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Article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도덕성 확인에 관한 연구: ‘공감적 성향’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정병화1,
Byung-Hwa Chung1,
대진대학교 교수1
Professor, Unification Graduate School in Daejin University1
Corresponding Author : Chung, Byung-Hwa, E-mail : wkak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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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Apr 15, 2016 ; Accepted: May 28, 2017

Published Online: Jun 30, 2017

초록

자기정체성의 확립이 ‘상생적 관계’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상생적 관계형성’은 자기존재의 안정성과 확증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타자와의 포용성을 지향하는 상생적 관계보다는 타자를 대상화하려는 행위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타자를 대상화하려는 자기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도덕성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이성 중심의 초월적ㆍ선험적 철학은 자기욕망에 대한 자기제어를 이성과 신체라는 이원화된 틀 속에서 이성에 의한 신체의 지배(支配)로서 기술한다. 하지만 이 실천철학이 가지는 한계점은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할 도덕적 행위의 내적 동기를 자명(自明)하게 제공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의 현실적용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입장이나 자기이해관계의 맥락에서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재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공감적 성향’은 새로운 도덕적 규범으로서 자리매김한다. 감성형태로 주어지는 ‘공감적 성향’은 사유 이전의 느낌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항상적이다. ‘공감적 성향’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작동하는 본능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 도덕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학습, 사유에 의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를 알고 있고 실천할 정도로 자명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공감적 성향’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현상적 접근(現象的 接近)’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점을 가진다. 기존 현상적 접근들은 ‘공감적 성향’을 이성이 아닌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공감적 성향’의 토대를 철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 도덕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도덕적 규범으로서 해석 내지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필자는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의 ‘살’ 개념에 입각하여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이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임을 밝히고자 한다. 신체적 차원에서 나와 타자 간의 교차배어로 형성되는 ‘살’은 ‘공감적 성향’에 그 철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나와 타자 간의 신체적 교차 내지 얽힘으로 형성되는 ‘살’은 ‘공감적 성향’을 일으키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 필자의 이러한 접근은 ‘공감적 성향’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現象學的 接近)’이라 할 수 있다.

ABSTRACT

As the establishment of self-identity is based on ‘Relationships of Mutual Beneficence,’ the formation of ‘Relationships of Mutual Beneficence’ is the only road to the security and confirmation of self-existence. But given that our ordinary life almost entirely consists of actions objectifying others, the formation of ‘Relationships of Mutual Beneficence’ is by no means easy. The formation of ‘Relationships of Mutual Beneficence’ should be based on morality, controlling self-desire, and not objectifying others.

Philosophy based on a priori reasoning describes self-control over self- desire as the domination of the body through a priori reasoning. But this practical philosophy cannot present a self-evidential internal motivation behind moral actions. Due to this, the application of moral order given by a priori reasoning in response to reality is likely to be reinterpreted on basis of self-interest.

With regards to this,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is given as new moral norm.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as emotion is direct and consistent given that feeling occurs prior to thinking.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is intuitive in the sense that it is an instinctual response preceeding a reasoned judgment.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as a natural moral emotion, is self-validating given that all human beings know it and practice it.

But previous studies on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have an obvious limitation because they adopt phenomenological approaches to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which eschew the investigation of morality. Though they present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as a natural emotion based on body rather than reason, they do not philosophically explain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Thus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as a natural moral emotion is likely to be interpreted as a subjective and relative moral norm.

This paper philosophically explains that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is a universal moral norm on the basis of Merleau-Ponty’s ‘flesh.’ ‘Flesh’ is formed as the entanglement between oneself and others and presents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as its philosophical basis. In other words, ‘flesh’ formed as the mixture or entanglement between oneself and others is the material foundation upon which one can activate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This paper’s approach to the ‘propensity of sympathy’ can be desribed as a phenomenological approach to the ‘propensity towards sympathy’ as a universal moral norm.

Keywords: 상생적 관계; 도덕성; 이성; 공감적 성향; ‘살’
Keywords: ‘Relationships of Mutual Beneficence’; morality; reason; ‘propensity towards sympathy’; ‘flesh’

Ⅰ. 서론

타자와의 뒤섞임(mixture)과 얽힘(entanglement) 속에서 형성되는 공동체적 삶이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방식(original life form)이라는 점에서, 타자와의 상생(相生)적 관계형성은 인간관계의 파편화와 이로 인한 자기존재감의 상실 등 마음의 불안상태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대(對待)적 관계 속에 놓여있는 우리는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 속에서만 자기존재의 확증성을 가진다. 하지만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타자를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하려는 자기욕망의 확장성과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자기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도덕성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해서 자기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도덕성의 확인(確認, verification)을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 이성 중심의 초월적ㆍ선험적 철학은 자기욕망에 대한 자기제어를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 실천철학은 이성과 신체라는 이원화된 틀 속에서 이성에 의한 신체의 지배(domination)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 실천철학이 가지는 한계점은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할 도덕적 행위의 내적 동기를 자명(自明, self-evidence)하게 제공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의 현실적용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입장이나 자기이해관계의 맥락에서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재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맥락에서 ‘공감적 성향’은 새로운 도덕적 규범으로서 자리매김한다. ‘공감적 성향’은 초월적ㆍ선험적 도덕성의 토대에 자연적이고 정의적인 것들이 위치함으로써 감성이 이성을 포획하는 형태를 가진다. 이는 ‘공감적 성향’이 이성과 감성이라는 철학범주 중에서 감성에 기초해 있음을 의미한다. 감성형태로 갈무리되어 있는 ‘공감적 성향’은 사유 이전의 느낌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항상적이다. ‘공감적 성향’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작동하는 본능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 도덕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학습, 사유에 의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를 알고 있고 실천할 정도로 자명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공감적 성향’에 대한 기존 연구는 ‘현상적 접근(現象的 接近, phenomenal approach)’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점을 가진다. 기존 연구는 ‘공감적 성향’을 이성이 아닌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공감적 성향’의 토대를 철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 도덕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도덕적 규범으로서 해석 내지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필자는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의 ‘살(flesh)’ 개념에 입각하여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이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임을 밝히고자 한다. 신체적 차원에서 나와 타자 간의 교차배어로 형성되는 ‘살’은 ‘공감적 성향’에 그 철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필자의 이러한 접근은 ‘공감적 성향’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1)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도덕적 토대의 확인을 고찰하고자 하는 본고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상생적 관계형성과 ‘공감적 성향’이다(2장). 여기서는 상생적 관계형성이 가지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와 실천철학적 맥락에서 ‘공감적 성향’이 이성 중심의 초월적ㆍ선험적 실천철학에 대해서 가지는 강점과 한계점에 대해서 고찰한다. 둘째,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해석이다(3장). 여기서는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 우리 모두가 체험하는 ‘공감적 성향’이라는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을 다룬다. 나와 타자 간의 신체적 교차 내지 얽힘으로 형성되는 ‘살’은 ‘공감적 성향’을 일으키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 셋째,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해석의 윤리학적 의의에 대해서 고찰한다(4장). 신체적 ‘살’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도덕적 감정일 수 있는 ‘공감적 성향’에 그 철학적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공감적 성향’은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으로서 자리매김한다.

Ⅱ. 상생적 관계와 ‘공감적 성향’

실존적 의미에서, ‘나’라는 존재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무관한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는 소속된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통해 구성된 ‘각인된 자아’(embeded self)이다. 나는 항상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해 가는 존재인 것이다. 찰스 테일러(Ch. Taylor)는 이러한 자기정체성형성과 관련된 ‘나와 타자와의 관계’적 우선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일정한 상대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아이다. 한편으로, 내가 나의 자아를 규정하는데 핵심적이었던 상대방들과 관련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사람들과 관련해서이다. 물론 이들은 서로 겹칠 수 있다. 자아는 내가 ‘대화의 망’(web of interlocution)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만 존재한다.2)

이런 점에서 공동체는 개인 그 자신이 자신 정체성에 대해 물을 때 그것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자유주의자들이 기술하는 것처럼 각 개인의 권리를 간섭할 수 있는 강제력을 잠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폭력적 집단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의 입장이나 태도를 드러내고 갈등하며 동시에 대화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지시하는 개별적 특수성을 발전시킬 자유를 갖는다.”3)는 밀(J. S. Mill)의 언급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밀은 개인과 공동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눔으로써 무맥락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개별적인 삶과 개별적 자아를 이해하도록 이끈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이해관계와 자기가 디디고 있는 물질적 입장에서 표출되는 취향과 선호로 해석된다.4)

그렇다면 자기정체성형성과 관련된 나와 타자와의 대화적 방식은 어떤 상호관계에 기초해 있는가? 한편으로 대화적 방식은 이미 주어진 개별적 자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자아’를 전제로 한다. 대화적 방식은 존재론적으로 개별적 주체인 ‘나’, ‘타자’보다는 ‘나와 타자의 상호관계’를 우선시한다. ‘나와 타자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나’와 ‘타자’가 규정되는 논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화적 방식은 타자라는 존재를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을 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요구하는 대대(對待) 원리에 기초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화적 방식은 ‘타자의 입장이나 태도를 수용 내지 포용(inclusion)하려는 성찰적 태도’에 기초해 있다. 이것은 상반적 또는 상호모순적인 관계를 상호배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취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맥락에서 다른 성(性) 다른 극(極)끼리 서로 감응하여 조화롭게 합일되는 상반융합(相反應合)의 논리이다.5) 이런 점에서 대화적 방식은 세계에 대한 나와 타자와의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지향한다.

자기정체성형성과 관련된 나와 타자와의 대화적 방식이 대대원리에 입각한 상반융합적 논리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자기정체성형성과 관련된 대화적 방식이 상생적 관계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에게 있어 타자는 나의 생존권을 위협하거나6) 나의 자유를 방해7)하는 부정적인 존재도 아니고, 나의 자기이해에 바탕한 상호협력의 파트너8)도 아니다. 나에게 있어 타자는 나라는 존재의 확증성을 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이 인간관계의 파편화와 이로 인한 자기존재감의 상실 등 마음의 불안상태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대대적 관계 속에 놓여있는 우리는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 속에서만 자기존재의 확증성 내지 안정성을 가진다.

그러나 ‘상생적 관계형성’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상반융합이라는 타자와의 포용성을 지향하는 상생적 관계보다는 타자를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하려는 행위로 대부분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포용성이 자기개방성을 전제로 한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를 지향한다면, 타자에 대한 대상화는 개별적 자아의 목적이나 가치지향이 더 이상 의문시 되지 않는 자기패쇄성에 기초해 있다. 타자를 대상화하려는 행위는 개별적 자아의 가치지향과 관련된 개별적 자아의 판단과 숙고의 능력에 적용된다. 자신의 목적에 기초하여 삶의 이익과 목적이 어떻게 규정되고 수용되는지, 그리고 이것들에게 어떻게 우선성이 주어지는가에 대해서 집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별적 자아 자신의 목적이나 가치지향이 가지는 그것의 정당성은 의문시되지 않은 채로, 개별적 자아가 자신의 목적이나 가치지향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채택할 것인지를 합리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와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은 타자를 대상화하려는 자기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도덕성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와의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해서 자기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도덕성의 확인(確認, verification)을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도덕적 토대에 대한 두 가지의 윤리학적 접근과 접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이성 중심의 초월적ㆍ선험적 철학이다. 이 실천철학은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자기욕망에 대한 자기제어를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 실천철학은 이성 대 신체라는 이원화된 틀 속에서 이성 중심의 도덕철학을 주장한다. 근대적 이성주의 도덕론의 선구자인 커드워스(R. Cudworth)는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틀 속에서 제시되는 수학적 논리와 마찬가지로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과 같은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의 판별은 인간이성에 의해서 명확하게 인식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선ㆍ악에 관한 앎은 수학적 원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9) 옳고 그름의 기준인 도덕적 법칙은 모든 인간들이 즉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의 이러한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서 인간의 규범적 실천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 인식은 선험적이다.

하지만 이 실천철학이 가지는 한계점은 도덕적 이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할 도덕적 행위의 내적 동기를 자명(自明, self-evidence)하게 제공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런 선험철학의 실천적 한계점에 대해서 데이비드 흄(D. Hume)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성 혼자만으로는 결코 어떠한 행동이나 의욕도 유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의 능력은 의욕을 금지시킬 수 없고, 감정이나 정서의 우선성에 대해서 반발할 여지도 없다고 나는 추정한다. 이러한 귀결은 필연적이다. 우리의 감정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충동을 주지 않고서는, 이성이 의욕을 금지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그러한 충동이 작용하기만 한다면, 충동이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다. 상반되는 충동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감정의 충동을 늦추거나 거역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된 충동이 이성으로부터 유발하기만 한다면, 이성능력은 반드시 의지에 근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분명하고, 의욕적 활동에 대한 방해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원인제공자의 역할을 행할 수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성이 아무런 근원적 영향력도 지니지 못한다면, 이성이 원인제공자나 방해자와 같은 효력을 가지거나, 잠시 동안 마음을 쏠리게 할 수 있는 어떤 원리에 맞서서 대항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정과 상반되는 원리는 이성과 같은 것일 수 없고, 부적절한 의미에서만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감정과 이성의 싸움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엄밀하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다.10)

또 다른 하나가 ‘공감적 성향’이다. ‘공감적 성향’은 초월적ㆍ선험적 도덕성의 토대에 자연적이고 정의적인 것들이 위치함으로써 감성이 이성을 포획하는 형태를 가진다. 이는 ‘공감적 성향’이 이성과 감성이라는 철학범주 중에서 감성에 기초해 있음을 의미한다. 감성형태로 갈무리되어 있는 ‘공감적 성향’은 사유 이전의 느낌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항상적이다. ‘공감적 성향’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작동하는 본능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이다. 자연 도덕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학습, 사유에 의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를 알고 있고 실천할 정도로 자명하게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공감적 성향’은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새로운 도덕적 토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감적 성향’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공감적 성향’을 이성이 아닌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공감적 성향’의 토대를 철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기질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으로서 정립되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도덕적 감정으로서 해석 내지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필자는 아래 3장에서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에 입각하여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이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임을 밝히고자 한다. 신체적 차원에서 나와 타자간의 교차배어로 형성되는 ‘살’은 ‘공감적 성향’에 그 철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Ⅲ.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해석

‘공감적 성향’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세계 내 존재로서 필연적인 인간의 세계 귀속성을 주장하는 메를로-퐁티의 독특한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의 필연적인 세계귀속성을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의 감각기관은 세계와 일종의 상호작용(communication)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와 몸의 감각의 상호교류를 감각적인 것에서 어떤 실존적 운동성을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11)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언급에 미루어 볼 때, 세계 내 존재로서 인간의 필연적인 세계 귀속성이란 신체주체와 세계와의 상황적이고 조건적인 상호작용, 즉 얽힘과 교차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체주체와 세계와의 상황적이고 조건적인 상호작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의식이 사유하기 전에 몸의 감각기관이 몸 밖에 무언가를 애매하게 감지하고 그에 따라 몸이 특정한 방식으로 정립작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립작용을 통해서 몸은 ‘구조화된 지각’(structured perception)을 가진다. 구조화된 지각을 가진 몸은 의식의 명령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반응체가 아니라, 의식이 발동하기 전에 몸이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 명령하는 형태들을 이미 자기 내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구조화된 신체주체의 ‘몸의 도식’(scheme of body)은 언어적 의미의 출처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적 표현은 구조화된 몸의 도식에 기초해 있고, 구조화된 몸의 도식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 앞에 주어진 것으로의 세계와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사이에서 형성된 조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몸의 도식의 이러한 선-술어성은 비트켄슈타인(L. Wittgenstein)이 그의 『지식의 확실성』에서 기술한 ‘펀더멘탈’(fundamental)개념과 유사하다. 비트켄슈타인은 펀더멘탈을 언어게임(language game)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습득하여 사용한 언어게임의 실행적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경험적 명제들에 대해서 되물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무수히 많은 문장들 중의 일부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을 할 수 없는 확실성을 지니게 되었고, 그러한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언어게임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이다.12)

그는 구조화된 몸의 도식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살’로서 기술한다. ‘살’은 신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중감각의 교차배어로 구성된다. 이중감각의 교차배어란 선험적 이성이 수행하는 반성과 구별되는 신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반성을 의미한다. 이성적 반성은 주체가 객체가 분리된 채로 주체라는 하나의 극점이 또 다른 극점인 대상을 바라보면서 일어난다. 대상인 세계에 대해서 주체인 의식은 초월적 입장에서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자기반성을 수행한다. 반면에 이중감각의 교차배어라는 신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반성은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자기반성을 수행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은 채 체험함과 체험됨이 상호얽힘 내지 상호교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이러한 “체험함과 체험됨의 이상한 교차(mixture)”13)을 통해서 형성되는 공통성 내지 동일성(identity)을 ‘살’로서 기술하였다. 이런 ‘살’ 개념에 비추어볼 때, 구조화된 몸의 도식은 지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대한 나와 타자 간에 형성되는 체험적 통일성, ‘상호신체성(intercorporeity)’으로 제시된다.14)

그는 하나의 전체로서 느껴지는 공통성 내지 동일성으로서의 ‘살’을 ‘일반화된 실존의 흔적(track of generalized existence)’15)이라고 표현하였다. “타자의 몸과 나의 몸은 하나의 전체이고, 현상의 안과 밖이다. 내 몸은 매 순간마다 익명적인 실존의 흔적이다. 이 익명적인 실존은 두 몸이 동시에 거주한다.”16) 그래서 체험함과 체험됨은 상호적인 것이 된다. 누가 보고 있고 누가 보여지는 지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일반화된 실존적 흔적으로서의 ‘살’은 나를 타자와 견고히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17) 또한, ‘살’이 흔적이라는 점에서 살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고정된 채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흔적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운동적 유형을 창출해 낸다.18) 다시 말해서 흔적으로서의 ‘살’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특정한 형태로 고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는 것, 즉 다른 것들과 합해지고 분리되는 어떤 익명적 생명의 운동을 추동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original involvement)’19)라는 인간의 ‘실존적 리듬(existential rhythm)’을 읽을 수 있다.

어떤 광경 속에서 나의 응시가 다른 사람의 신체와 맞닿으면서 농락당한 적이 있다. 내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던 바로 그때, 나는 그것들에 의해 둘러싸인다. 나는 내 고유 신체의 가능성들을 일깨우고 부르는 형태가 마치 나의 제스처나 행동들인 것처럼 공간 속에서 그려지는 것을 본다. 모든 것은 마치 지향성과 지향적 대상의 기능들이 역설적으로 뒤바꾸어진 것처럼 일어난다. 광경은 나를 그것의 구경꾼이 되도록 나를 초대한다. 마치 나의 정신과는 또 다른 정신이 갑작스럽게 나의 신체에 머물게 되는 것처럼, 혹은 나의 정신이 저쪽으로 이끌려서 나의 정신이 광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바깥에서 제2의 내 자신에 의해 덥석 물리는데, 나는 타자를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20)

이처럼 ‘살’은 지각적 차원에서 나와 타자의 개별적 몸속에 공동으로 내재해 있으면서, 나와 타자 서로에게 상호영향력을 행사하는 본원적인 운동성을 추동시킨다. 나와 타자의 신체적 몸속에 공동으로 내재해 있다는 것은 내가 타자의 구조화된 몸의 도식에 참여하기 때문이고, 서로에게 상호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나의 고유한 개별성이 타자에 대한 나의 지각과 함께 구성되기 때문이다. ‘살’은 신체에 내재해 흔적으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이 흔적이기 때문에 항상 운동성을 지닌 채 활동한다. 이처럼 ‘살’은 신체 속에 내재되어 있지만 항상 운동한다. ‘살’은 특정한 자아의 내적 소유물이 아니라 익명적인 형태로 다수의 교차적 공동성으로서 개별 자아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살’은 자신의 은신처인 개별적 자아에게 특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런 ‘살’에 비추어 볼 때, 나와 타자는 지각적 차원에서 상호침투적 방식으로 서로에게 상호영향력을 행사하는 공동주체이다.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를 지시하는 ‘살’에 미루어 볼 때, 타자의 시선에 내재하는 본래적인 갈등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나와 타자 간에 형성된 갈등이라도 ‘나와 타자’라는 상호관계의 틀 속에서 행하여지는 상호인식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서로 간의 갈등은 주어진 ‘나’와 주어진 ‘타자’ 간에 형성된 상반성이나 모순성이 아니라 ‘나와 타자’라는 상호관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인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상호부정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나와 타자 간에 형성된 갈등은 타자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며…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을 타자를 통해서 얻는다.”21)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살’이 지시하는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타자 간의 상호교류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버마스(J. Habermas)는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상호 인격체인 상호관계를 통해서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고, 상호 인격적인 인정(recognition)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자기존재의 확증성 내지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앎은 우리의 의사소통적 생활세계의 직관적 친숙성에서 도출된다.”22)라는 하버마스의 언명은 언뜻 보기에는 사회화된 개인의 사회적 속성으로서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를 표현하고 있지만 나와 타자 간의 상호교류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차원, 즉 보편화용론(universal pragmatism)이라는 틀 속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를 지시하는 ‘살’은 ‘공감적 성향’의 ‘원초적인 감정형식’이라 할 수 있다. ‘살’에 토대한 공감은 감정이입과 구별된다. 감정이입이란 상상의 방법을 통해 나 자신을 타자의 내면으로 침투시켜 타자의 내적 심리상태를 추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감정이입은 감정이입을 통하여 내가 타자의 심리상태에 도달하더라도 나와 타자는 여전히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 감정이입은 타자에 대해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타자의 심리상태가 어떻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는 타자의 일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이입은 타자의 심리상태에 도달하더라도 타자의 심리상태를 자기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감정이입은 “타자에 대한 이해는 항상 나의 입장이나 관점에 의해 도달될 수 있다.”23)라는 유추이론에 기초해 있다. 이런 유추이론은 “타자를 나의 입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라는 도덕적 유아론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24)

나의 삶과 타자의 삶을 구분하는 감정이입과는 달리, 공감은 내가 타자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을 전제로 한다. 공감은 타자가 자신의 가족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퍼할 때, 즉발적으로 나를 슬픔으로 이끈다. 이때의 나의 슬픔은 타자의 슬픔 그 자체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슬픔은 가족의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슬픔에 대한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반응이다. 이처럼 공감은 타자의 삶에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는 감정이입과는 달리 타자의 내면에 보다 깊숙이 다가간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서 타자의 느낌에 빠져든다.

Ⅳ.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해석의 윤리학적 의의

원래 신체의 영역은 도덕적 담론에서는 배제의 영역이었다. 단지 욕망의 출처로서만 규정된 신체는 항상 인간이성에 의해 포획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플라톤(Plato)과 스토아학파(Stoicism) 시기부터 신체의 영역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신체의 영역으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정념이나 욕망)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인간의 삶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자아의 도덕적 완성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신체로 도출되는 감정은 이성에 의한 통제와 제어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칸트에게서 이런 윤리학의 경향성의 정점을 목격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의 완성자인 칸트(I. Kant)에게 있어 신체의 영역은 어떻게 기술되고 규정되는지를 살펴보자.

칸트는 실천철학과 관련된 모든 그의 책에서 인간이성과 신체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있고, 신체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는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이라는 책에서 실천적 영역을 실용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으로 나눈다. 실용적 영역이 신체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의 정념이나 욕망의 현실화 내지 실현과 직접적으로 관계한다면, 도덕적 영역은 선험적 이성이 명령하는 보편타당한 도덕적 명제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칸트는 선험적 이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도덕적 명령에 의한 감성의 약화를 주장한다. “감성이 인간의 정신의 구성적 요소이지만, 신체로부터 발생하는 감성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인간의 도덕적 완성은 수동적인 감성적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이성이 명령하는 인간의 실천적 의지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감성은 이성에 의해 약화되어져야 한다.”25)

이러한 이성과 신체의 영역에 대한 칸트의 관점은 그의 주저인 『도덕 형이상학 정초』26)와 『실천이성비판』27)에서 극단적으로 기술된다. 그는 두 저서에서 이성에 의한 감성의 완전한 지배 내지 종속을 말한다. 감성이 도덕적 인식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지만,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감성은 장애물이다. 도덕적 인식을 도덕적 실천으로 전환하는 데 정념이나 욕망은 가장 강렬한 방해꾼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란 결국 신체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실천적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궁극적인 행복이란 신체로부터 발생하는 감성의 실현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신체의 지배로 표현되는 도덕적 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 중심의 이러한 실천철학은 헤겔(F. Hegel)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칸트 실천철학이 보여주는 보편주의와 형식주의, 당위와 당위의 무력감, 그리고 이성에 의한 감성의 테러리즘 등이 대표적이다.28)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 실천철학이 가지는 한계점은 도덕적 이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험적 이성의 도덕적 명령이 우리에게 그것을 실천할 도덕적 행위의 내적 동기를 자명하게 제공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인식과 그것의 도덕적 실천은 다른 것이다.

도덕적 실천에 대한 선험철학의 이러한 한계점에 대한 대안을 우리는 신체의 영역에서 발견한다. 신체로부터 발생되는 ‘공감적 성향’은 사유 이전의 느낌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이며, 이성적 판단 이전에 작동하는 본능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이다. 데이비드 흄은 이러한 공감에 관하여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2권 1부 11절(명예욕에 관하여)에서, 그리고 연민에 관하여서는 같은 책 2권 2부 7절(연민에 관하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공감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곳에서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본성에 있어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다. 우리의 공감은 문화적으로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상호교류시키고 이러한 상호교류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들인다.”29) 흄의 이 언급은 공감의 기능이 인간의 본성적 성향임을 의미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균일성이나 유사성이 모두 이런 공감의 기능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나라와 언어와 관습이 달라도 같은 대상을 보고 유사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위대한 유사성”30) 덕분이며, 이 유사성이 바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같은 종으로서의 동포애(fellow-feeling)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포애는 우리에게 인간본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의 원리로 경험되어진다.”31)

동아시아 인문학은 인간 사이에 ‘공감적 성향’을 철학의 핵심명제로 삼았다. 공자(孔子)는 인간관계의 도덕적 계율로 서(恕)를 제시하였다.32) 그는 서는 인간이 한평생 살면서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행동의 지침임을 강조하였다.33) 서가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의 한자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서는 인간관계에서 상호 간에 동일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남도 같이하고 자기가 행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배려와 상호존중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처럼 서는 타인의 감정이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적 삶에 따름 아니다. 맹자(孟子)는 이를 토대로 인간의 심성을 보다 더 깊이 탐구함으로써, ‘공감적 성향’의 근원을 마음에서 직접 발견한다. 특히,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다움을 예증하는 단초가 된다.34) 이처럼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적 전통은 인간의 도덕적 토대를 선험적ㆍ초월적 이성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 삶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기질, 즉 ‘공감적 성향’에서 찾았다.

하지만 새로운 도덕적 토대에 대한 이들의 (대)발견에도 불구하고, ‘공감적 성향’에 대한 이들 연구는 ‘현상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점을 가진다. 이들은 ‘공감적 성향’을 이성이 아닌 신체에 토대한 자연적 감정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공감적 성향’의 토대를 철학적 해명하지 못했다. 이럼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러운 기질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으로서 정립되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도덕적 감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앞선 3장에서 기술된 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살’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도덕적 감정일 수 있는 ‘공감적 성향’에 그 철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공감적 성향’이 이성적 사유 이전의 느낌이라는 점에서, ‘공감적 성향’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신체적 차원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공감적 성향’은 어떤 물질성 내지 흔적(trace)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점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연 도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이 실체가 없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성으로만 규정될 때, 자연 도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은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분석은 ‘공감적 성향’이라는 신체적 운동성을 일으키는 물질성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나와 타자와의 근원적인 연루’를 지시하는 신체적 ‘살’은 ‘공감적 성향’이라는 신체적 운동을 추동시키는 흔적이다.

이러한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분석은 다음의 두 가지를 새롭게 기술한다. 첫째는 보편적 도덕적 규범의 출처로서 ‘살’로서의 신체이다. 이것은 신체 영역의 재발견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단지 ‘욕망적 신체’가 아니라, 공동적인 행동으로서의 상호신체성을 형성하는 ‘살’로서의 신체는 ‘공감적 성향’을 추동시키는 물질적인 토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신체는 ‘욕망적 신체’와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를 추동시키는 ‘살’로서의 신체로 양분된다. 이러한 분류는 신체에 대한 맹자의 분류와 흡사하다. 맹자는 체(體)를 ‘생리적 신체’와 ‘덕성적 신체’로 나누었다. 생리적 신체는 소체(小體)와 천체(賤體)이며, 소인이 추구한다 하였고, 덕성적 신체는 대체(大體)와 귀체(貴體)이며 군자가 추구한다고 하였다.35)

전자는 개체론적 입장에서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이익관계의 절충이라는 맥락에서 기술한다. 특히, 전자는 평등과 같은 보편주의적 도덕을 논증할 수 없다. 전자에서 제시하는 타자에 대한 평등은 개별적 자아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제시되는 평등이다. 이런 점에서 전자의 입장에서 나와 타자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contract)은 개별적 자아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토대한 잠정협정(modus vivendi)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36)

후자는 개별적 자아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상호호혜(reciprocity)적 행위 양식이다. 개별적 자아의 물질적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타인과의 상호호혜적 관계를 추구하는 ‘살’로서의 신체는 타자에 대한 배려, 사랑 속에서 발생되는 삶, 즉 타인의 기쁨이나 고통에 공감하여 개별적 자아 자신이 타인이 겪고 있는 마음속으로 들어가 타인의 감정을 나누는 삶을 이끈다. 다시 말해서 ‘살’로서의 신체가 추동시키는 공감적 삶은 나와 타인에게서 괴로움이나 이롭지 않은 것들을 떼어내려는 의도와 행동, 그리고 나와 타인에게서 행복과 이로운 것을 가져오려는 의도와 행동에 기초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신체의 이 두 영역은 배타적이면서 독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어느 하나의 영역(자기패쇄성을 특징으로 하는 욕망으로서의 신체)으로 또 다른 하나의 영역(자기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살’로서의 신체)의 행위양식을 유추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이 두 신체의 배타적인 순환구조 속에서 어떤 국면에서는 ‘욕망적 신체’가 발동하고 어떤 국면에서 ‘살’로서의 신체가 추동된다.

둘째는 인간 이성개념에 대한 재기술이다. 칸트적 이성주의에서 표현되는 신체는 무질서하고 잡다한 것으로 언급된다. 칸트에게서 신체는 소재로서 제시될 뿐 대상형성에 있어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대상형성은 인간이성이 명령하는 형식대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살’에 근거해 있는 이성은 ‘신체적 이성(embodied reason)’이다. 살에 의해서 형성되는 상호신체성이 특정 조건이나 상황에서 형성되는 신체주체의 구조화된 몸의 도식이라는 점에서, 상호신체성은 이미 그 자신이 선-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살에 의해서 형성되는 상호신체성은 그 자체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성의 활동이란 상호신체성의 선-구조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명시적 형태로 밝혀내는 것, 대상화 내지 객관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Ⅴ. 결론: 도덕적 행위의 발현(發現)37)과 관련하여

이성 중심의 초월적ㆍ선험적 실천철학에서 신체는 단지 욕구의 주체로서 항상 이성에 의해서 포획되어야 할 대상으로서만 규정된다. 반면에 ‘공감적 성향’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은 신체를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의 출처로서 규정한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 내지 재발견은 우리의 도덕성 확인에 대한 심신일원론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마음과 신체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하나의 몸속에서 이 둘은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살’이란 세계에 대한 신체주체들 간의 뒤섞임으로 형성되고, 이렇게 형성된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신체적 ‘살’은 ‘공감적 성향’을 추동시키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

‘공감적 성향’이 이성이 아닌 신체적 ‘살’에 토대한다는 점에서, 신체는 이중적 구조를 가진다. ‘욕망적 신체’와 ‘공감적 성향’을 추동시키는 ‘살’로서의 신체가 그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도덕적 행위의 발현이란 ‘공감적 성향’의 출처인 ‘살’로서의 신체가 ‘욕망적 신체’를 경계지우는 것과 관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지움은 가역적으로 ‘살’을 매개로 한 ‘마음과 신체의 감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상생적 관계형성을 위한 ‘공감적 성향’의 발현이란 ‘마음과 신체의 감응’을 통한 ‘살’적 운동성의 충만성(fullness)에 다름 아니다.38)

바로 여기서 필자는 도덕적 행위의 발현이라는 맥락에서 맹자의 수양론과 대순진리회의 수도의 요체인 안심(安心)과 안신(安身)에 주목한다. 맹자의 수양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사단지심(四端之心)의 확충으로서의 마음의 통제이다. 마음의 통제는 존심(存心)과 양성(養性)을 통한 선한 자기 본성을 확인하여 사단지심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의 사단지심은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내재해 있는 사단지심의 확인과 그것의 확충은 기본적으로 인의예지로서의 선한 본성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단한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수반한다.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은 자기 안에 있는 도덕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자기가 도덕적 실천의 주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확충을 통한 신체행위의 통제이다. 맹자는 맑고 청명한 기(氣)를 배양하는 방법으로 호연지기를 강조하는데 호연지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의(集義)의 방법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집의는 기를 통제하고 수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 기의 양상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곧게 하는 것으로써 길러서 해침이 없으면 천지간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의 양상은 의와 도에 짝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주리게 된다. 이것은 의를 쌓아서 만들어 내는 것이지 의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다.”39) 이처럼 기는 의(義)와 연동되기 때문에 단순한 욕심이나 감정의 표출을 넘어 자신의 의지적 자각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배양된다. 이렇게 되면 욕심이나 감정의 표출이 이기적인 욕망의 무한한 표출이 되지 않으며 항상 의에 맞는 행위가 드러나게 된다.

대순진리회 수도생활에서 안심ㆍ안신 이율령은 심신이 그 정상상태를 벗어나서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음을 나타낸다. 『대순진리회요람』에 기술된 안심과 안신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람의 행동기능을 주관함은 마음이니 편벽됨이 없고 사사됨이 없이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서 허무한 남의 꾀임에 움직이지 말고 당치 않는 허욕에 정신과 마음을 팔리지 말고 기대하는 바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항상 마음을 안정케 한다.”40)라는 안심은 도덕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자기가 도덕적 실천의 주체라는 자각이다. 육체적인 감각기관은 외부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수동적이다. 이에 반해 마음은 본연의 양심이 이미 준비되어 있어 자각적 반성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능동적이다. 마음은 부단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신체적 감각기관에 의해서 발생하는 욕망이 적절하게 조정되도록 통제해야 한다. 이런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자기의 확충이 실제적인 실천적 행위로 드러난다.

“마음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은 몸이니 모든 행동을 법례에 합당하게 하며 도리에 알맞게 하고 의리와 예법에 맞지 않는 허영에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41)라는 안신은 의리와 예법에 맞는 신체의 정립작용을 통해서 단순한 욕심이나 감정의 표출을 넘어 자신의 의지적 자각을 자신의 내부에 배양함을 의미한다. 이런 안신을 신체적 ‘살’과 결부시켜보면, 안신은 곧 ‘살’적 운동성의 극대화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살’적 운동성의 극대화를 통해서 ‘살’적 운동성은 실천적 의지(實踐的 意志)로 변화되어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발현시킨다.

Footnotes

1. ‘현상’이란 우리가 사는 생활세계(life world)에서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 내지 자연적 성향(natural propensity)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런 점에서 ‘공감적 성향’ 역시 생활세계에 사는 공동체 구성원들 누구나 가지는 자연적 성향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현상학’은 세계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러한 자연적 태도 내지 자연적 성향에 대한 철학적 해명과 관련된다. ‘공감적 성향’에 대한 대표적인 현상학자인 막스 쉘러(M. Scheler)가 ‘공감적 성향’을 ‘정신과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정초시키려고 했다면(막스 셸러,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조정옥 옮김, 서울: 아카넷, 2006 참조), 메를로-퐁티는 ‘공감적 성향’을 신체적 ‘살’로서 해명하고자 한다.

2. Ch. Taylor, Source of the Self (Cambridge: Cambridge UP,1990), p.36.

3. 존 스튜어트 밀, 김형철 옮김, 『자유론』 (서울: 서광사, 1992), p.229.

4. 개인의 권리에 대한 해석이 ‘나와 타자의 상호관계’에 기초하기보다는 개인의 자기이해관계와 자기가 디디고 있는 물질적 입장에서 표출되는 취향과 선호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성을 매킨타이어(A. MacIntyre)는 정의주의(emotivism)이라고 하였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7), pp.44-45 참조.

5. 이경원, 「대순진리회 ‘상생’개념에 관한 연구」, 『신종교연구』 13 (2005), p.310.

6. 타자를 자기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토마스 홉스(T. Hobbes)를 들 수 있다. 그는 인간 심리학적 맥락에서 인간 내적인 권력욕을 인간의 타고난 심성으로 규정한다(T. Hobbes, Leviathan, Oxford: Oxford UP, 2012, ch.13). 또한, 현대정치철학자 칼 슈미트(K. Schumitt)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적과 동지’라는 틀에서 이해한다. “적과 동지라는 틀 속에서 대별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 옮김 (서울: 법문사, 1995), p.44.

7. 사르트르는 그의 책 『존재와 무』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주장한다. 그의 개인주의는 순수한 의식의 무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타자의 의식을 대변하는 하나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이 의식을 대상화하고 그리하여 타자의 의식을 무화시키는 기루에 도달한다(J. P. Sartre, Being and Nothing,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56, pp.221-223).

8. 타자를 자기이해관계에 기초한 상호협력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학문적 조류가 자유주의이다. 존 로크(J. Locke), 칸트(I. Kant), 홉하우스(L. T. Hobhouse), 존 롤즈(J. Ralws), 드워킨(R. Dworkin) 등은 타자의 평등성에 대한 고려가 전제된 개별주체들 간의 상호협력적 상호관계를 주장한다. 로크와 칸트가 형식적 평등에 기초한 상호협력을 기술한다면, 홉하우스, 롤즈, 드워킨은 실질적 평등에 기초한 상호협력을 주장한다.

9. R. Cudworth, A Treatise concerning Eternal and Immutable Morality: British Moralists 1650-1800 (Indiana: Hackett Publishing Co., Inc, 1991), ch.2.

10. D. Hume, A Treaties of Human Nature (Oxford: Oxford UP, 1978), p.415.

11. M. Merleau-Ponty,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London: Routledge, 1962), p.vii.

12.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Oxford: Basil Blackwell, 1978), p.370. 비트켄슈타인이 언급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이란 곧 신체주체의 구조화된 몸의 도식이 지시하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태도 내지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를 말한다.

13. M. Merleau-Ponty,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Evanston: Northwestern UP, 1968), p.139.

14.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지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대한 자기와 타자와의 체험적 통일성, 즉 ‘상호신체성’에 기초함을 알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세계의 산문』이라는 책에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기존의 언어체계는 소통의 부재 속에 설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언어체계는 감각적 세계에 뿌리를 둔 우리의 공동적인 행동들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M. Merleau-Ponty, The Prose of the World (Evanston: Northwestern UP, 1986), p.42.

15. M. Merleau-Ponty,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p.347.

16. Ibid., p.354.

17. M. Merleau-Ponty, Sense and Non-Sense (Evanston: Northwestern UP, 1964), p.36.

18. M. Merleau-Ponty,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p.148.

19. 하이데거(M.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 내 존재로서의 현존재(Dasein)의 의미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는 현존재에 대한 연구에서 ‘살’적 운동인 ‘나와 타자와의 본원적인 연루’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한다. “현존재는 타자보다 뒤처지면 앞서있는 타자를 따라잡으려고 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염려한다. 이러한 타자와의 거리감에서 현존재는 평온감을 구할 수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전양범 옮김 (서울: 시간과 공간사, 1995), p.180.

20. M. Merleau-Ponty, Signs (Evanston: Northwestern UP, 1982), p.94.

21. M. Merleau-Ponty, Sense and Non-Sense, p.68.

22. J. Habermas, The Inclusion of The Other (Cambridge: MIT Press, 1998), p.30.

23. M. Merleau-Ponty,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p.400.

24. M. Merleau-Ponty, The Primacy of Perception (Evanston: Northwestern UP, 1964), pp.114-115.

25. 임마누엘 칸트,『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이남원 옮김 (울산: 울산대학교 출판부, 1998), p.42.

26. 임마누엘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옮김 (서울: 아카넷, 2005) 참조.

27. 임마누엘 칸트,『실천이성비판』, 최재희 옮김 (서울: 박영사, 1997) 참조.

28. 위르겐 하버마스, 『담론윤리의 해명』,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7), pp.15-17 참조.

29. D. Hume, A Treaties of Human Nature (Oxford: Oxford UP, 1978), p.316.

30. Ibid., p.318.

31. D. Hume,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 of Morals (Oxford: Oxford UP, 1978), pp.207-208.

32. 신정근, 「‘관계’의 고착성과 ‘탈바꿈’의 자유사이의 긴장-고대유가의 ‘우주적 인간’의 탄생」, 『철학연구』 51 (2000), pp.69-90.

33. 『논어』, 「위령공」, 21장.

34. 『맹자』, 「공손축상」, 5장.

35. 『맹자』, 「고자상편」.

36. 고티에(D. Gauthier)는 욕망적 신체에 토대하여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제시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형태를 모든 합리적 인간이 체결하는 사회계약에서 찾는다(D. Gauthier, Morals by Agreement (Oxford: Clarendon Press, 1986), p.234.).

37. ‘도덕적 행위의 발현’에서의 핵심은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이 아니라, 자연 도덕감으로서의 ‘공감적 성향’을 어떻게 보존하고 확충하여 실천할 것인가에 있다.

38. 도덕적 행위의 발현과 관련하여 ‘공감적 성향’에 대한 ‘살’적 분석은 ‘공감적 성향’을 ‘정신과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정초시키는 막스 쉘러와 비교된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공감적 성향’의 발현이란 심신일원론적 관점에서 마음과 신체의 감응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마음은 도덕성으로서의 공감 그 자체이고, 신체는 이러한 마음을 실천하는 실천의지(practical will)와 관계한다. 반면에 막스 쉘러에게 있어 ‘공감적 성향’의 발현은 심신이원론적 관점에서 이것의 형이상학적 전제인 ‘정신과 사랑’이라는 선험적인 보편적 힘에 의해서 추동된다. 막스 쉘러에게 있어 신체는 도덕적 행위의 발현과는 무관한 영역인 동시에 항상 선험적인 가치에 의해서 포획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막스 쉘러는 ‘공감적 성향’을 보편 윤리학으로 정초시키고자 했지만, 칸트적 실천철학적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39. 『맹자』, 「공손축상」, 2장.

40. 『대순진리회요람』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10), p.15.

41. 같은 책, p.15.

참고문헌(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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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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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요람』,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10.

3.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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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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