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Article

대순사상과 하이데거의 ‘양심’ 개념에 대한 비교연구: 근원을 향한 ‘양심’의 회귀적 특성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김대현1,
Dae-Hyeon Kim1,
대순진리회 교무부 연구위원1
Research committee member, Division of Cultural Affairs in Daesoon Jinrihoe1
Corresponding Author : Kim, Dae-Hyeon, E-mail : ditto-1225@hamail.net

ⓒ Copyright 2017,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13, 2016 ; Accepted: May 28, 2017

Published Online: Jun 30, 2017

초록

본고는 대순사상의 ‘양심(良心)’ 개념을 ‘근원을 향한 회귀적 특성’이라고 정의한다. 양심이라는 한 개념의 지평은 인간 존재자의 근원에 대한 이탈과 회귀라는 구조를 형성하며 또한 인간 완성이라는 수도의 목적으로 이어진다. 달리 말해 양심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고 그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을 근원으로의 회귀라는 개념으로 이끌어간다. 근원을 사이에 둔 이탈과 회귀 가운데서 양심은 인존적 인간의 주체적 힘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대순사상의 ‘양심’ 개념은 대순사상의 주체 개념인 ‘인존’과 ‘자유의사, 성사재인’과 체계적 구도 속에서 연결되며 이러한 주체의 특성이 하이데거 실존주의 체계의 주체가 가진 현대적 특성과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피투의 사실성과 기투의 실존성이라는 인간 현존재를 하이데거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보고 자기 자신의 고독한 실존적 구축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는 것으로 인간 실존을 규명하였다. 이에 대해 대순사상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인간의 내던져짐과는 달리 그 궁극적 실재의 근원을 가지면서 그 근원 자체를 주체 내부와 합일된 상태의 인간을 이야기한다. 이를 인존의 신명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독자적 주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근원에 종속된 주체도 아니다. 근원을 제시하지만 합일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종속이 아닌 자유의사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적 주체가 가진 자율성과 독자성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원을 제시하는 중층적 체계는 대순사상이 가진 독특한 현대적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ABSTRACT

In this research, I define ‘conscience’ in Daesoon thought as the ‘Restorative capability of returning to one’s roots.’ The notion of conscience forms a structure of separation and return, and it is connected to the ascetic aim of realizing human perfection. The conscience opens up potential possibilities and leads realization of potential possibilities by returning to the the point of origin. In the middle of separation and return, the conscience acts as the power of subjectivity possessed by human beings which is known as ‘In jon (Human Nobility)’ in Daesoon thought.

The concept of conscience in Daesoon thought is connected with the subjectivity of In jon and free will as well as the character of subjectivity. This shares commonalities with critical thinking, modern characteristics, and the subjectivity of Heidegger’s existentialism.

Heidegger describes human fate from an existentialist vantage point using terms such as dasein, Geworfenheit, and Entwurf, and establishes human existence as an act of self-recovery from within in a lonely existential establishment. Daesoon thought implies that humanity is the root of ultimate reality, and this description is in sharp contrast with the thrownness (Geworfenheit) of Heidegger’s subjectivity. Therefore, Daesoon thought can be seen as unique in its characterization of humanity as being connected to the root of ultimate reality, autonomy, and independent existence.

Keywords: 양심; 현상학; 실존주의; 궁극적 실재; 주체
Keywords: conscience; existentialism; ultimate reality; subjectivity

Ⅰ. 서론

본고의 과제는 하이데거와의 비교를 통해 대순사상의 ‘양심(良心)’ 개념을 사상 체계의 구조 가운데서 개념화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제로서의 체계가 논의되어야 하며 그 체계가 가진 구조적 특징과 함께 서술될 때 그것은 개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순사상의 양심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

대순사상을 분석하고 그 분석의 결과를 개념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의 어려움은 다수의 대순사상 연구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한정된 경전 자료와 그 자료가 가진 함축적 표현의 특성으로 인해 그 사상을 학문적 체계 속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이념의 핵을 실마리로 학자 스스로가 그 지형도를 잡아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대순사상의 학적 체계화 작업을 위해 다른 학문과의 비교 과정을 거치고 그 학문의 체계를 분석의 틀로 활용하는 것은 아주 유용한 방법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며 학문적 공간에서의 소통과 대화의 기회를 여는 것이며 대순사상을 학문적 공론의 장으로 개방하는 것이다. 대순사상의 양심을 다루는 본 논문은 그러한 취지에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그 분석의 틀로 도입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사상 체계에서 ‘양심’은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선악 구분에 대한 도덕적 의식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닌 ‘죽음’ 개념과 함께 그의 실존주의 체계를 구조화하는 주요 기재로서 장치되어 있다. 필자는 체계의 구조를 조망하고 그 속에서 그의 양심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끄집어내어 대순사상의 양심에 대한 투사를 시도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연결은 연구 성과라 할 수 없으며 양 사상의 체계 전체의 구조를 살피고 그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 연결인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 이외에도 ‘양심’은 동서양 사상사 전반에 걸쳐 다루어져 온 개념이다. 이 가운데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양심론을 선택한 이유는 대순사상의 현대적 특성에 대한 기대와 전망의 의도가 있다. 시대적으로도 하이데거(1889~1976)와 강증산(1871~1909) 상제님의 활동 시기는 동시대라 할 수 있다. 서양사상사에서는 자본주의와 과학주의의 지배 아래 인간 주체의 자유와 실존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철학적 주제로 첨예화되어가는 시기였으며 한국사에 있어서도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도탄기 속에서 민중과 지배층은 새로운 의식적 성장과 국가 체제의 전환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다른 문화적 공간의 이질감 하에서도 공통된 주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고의 진행 과정에서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부분은 하이데거 체계의 사상적 지형도와 대순사상의 사상적 지형도를 대비하는 일이다. 연구 과정에서 드러나겠지만, 실존주의 체계와 대순사상의 체계는 공통점도 있을 것이며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이 명확해질 때 연구는 설득력과 명증성을 얻을 수 있다. 가령 서양사상사는 현대로 접어들면서 맑시즘을 필두로 후설의 현상학과 그 영향 하에 있는 실존주의와 고전적 체계를 가진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와 같은 신실재론 그리고 영미 분석철학과 실증주의와 같은 지형도를 가진다. 대순사상의 지형도는 이러한 분류를 참고로 설정할 것이다. 그러한 설정을 통해 대순사상의 지형도가 가진 폭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실존주의적 특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지형도의 특성을 가진다면 대순사상의 학적 해석의 가능성은 크게 확장될 것으로 기대해볼 수 있다.

Ⅱ. 하이데거의 사상 체계와 ‘양심’ 개념

1. 하이데거 체계와 양심 개념

하이데거가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 초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 작업하는 일이 저서의 의도이며1) 그의 체계가 가진 지향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온 전통적 방식의 존재 물음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방식의 존재물음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 그의 문제의식은 인간 개체의 실존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근대도 물론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논했지만,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그 기반으로서의 존재 물음은 플라톤의 고전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존재의 의미를 정초한다는 것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이며 존재의 본원적 의미에 대한 파악으로부터 그 물음을 던진 주체는 자기 삶의 완전성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 세계에 피투(被投)된 인간이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자기 삶의 가장 온전한 방식으로 자신을 이끌고자 하는 점에서 인간을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로부터 인간이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으로 이것으로부터 즉 유한한 시간 속에 던져져 호흡하고 욕구하는 인간으로부터 철학적 체계는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물음과 인간 존재자에 대한 사유를 인간의 삶 자체로부터 출발하고자 한 것이며 그것이 목표하는 바는 인간의 ‘사실적인 삶에 대한 해석학’(Hermeneutik der Faktizitat)이다. 실존하는 인간으로부터 존재의 기반이 구축되는 것이다.2)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세계 속에 피투된 존재자이다. 피투된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외부로부터 찾을 수 없고 오직 실존하는 인간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모든 기반을 구축해야만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고독이면서도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이다. 이렇게 스스로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기투(企投, Entwurf, project)는 자신의 존재 가능(Seinkönnen)이라는 지평을 예감하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가운데 실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체계를 실존하는 인간의 삶과 그 의식으로부터 토대를 세우면서 그의 학적 진행 경로는 현존재의 이상적 상태로의 회복을 향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고전 철학이 추구하던 본체의 완전성이 만물을 통합하는 기능을 한 것과 같이 현존재의 이상적 상태를 통해 인간 실존 내부에서 삶의 모든 의미들을 통합하고 완성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온전한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반성하고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 현존재는 대체로 세인(世人, das Man)의 삶을 산다. 세인의 삶은 표층에 부유(浮游)하는 삶의 방식으로 주체성과 완전성이 결여되어 있다. 자기 자신 내부의 완전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삶이 아닌 타자의 힘에 의해 구조화된 방식에 세뇌된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세인은 현존재의 본래적 모습이 아니며 완전체로서의 가능적 삶을 망각한 체 살아가는 결핍된 현존재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체계가 가진 역동적 구조의 특성과 양심 개념의 등장은 여기에 있다. 존재의 의미를 실존으로서의 인간 현존재에서 찾고 그렇게 찾아진 존재는 인간 현존재의 완전한 삶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세인으로서의 일상적 인간은 현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존재를 잊고 있으며 이것으로부터 현존재는 망각된 것에 대한 요구를 내면으로부터 충동 받는다. 양심은 삶의 본원적 가치로서의 존재와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세인 사이에서 매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이데거 체계에서 양심은 이와 같이 인간 현존재가 세인으로서의 표층적 삶이 뿌리를 찾고 온전한 방식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내면의 울림이요 매개체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실존주의 체계의 구조는 삶의 완전성을 본체로 한 인간 현존재가 그것으로부터 이탈해 있다가 그것으로의 합일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에 양심은 삶의 완전성으로서의 본체와 그것을 망각한 일상적 삶 사이를 끊임없이 연결하고자 하는 인간 실존 내면의 매개적 힘인 것이다.

2. 비본래적 삶과 세 가지 일상적 존재 양식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 체계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적 삶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완전성과 그것으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회귀라는 구조를 가진다. 여기에서 그는 완전성으로부터 이탈한 실존의 삶을 비본래적(uneigentlich)인 것이라고 했다. 비본래적 존재 방식은 본래적인 존재방식과 함께 현존재인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실존방식의 두 가지 양태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적이거나 비본래적 실존방식은 윤리학적 범주의 개념이 아니며 그의 존재론적 양태로서의 개념이다.3) 즉, 본래적이며 비본래적인 실존 방식은 윤리적 기준에 의한 삶의 평가보다 더 본질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가늠한다.

비본래적 실존 방식은 일상성 속에서 구조화되고 획일화된 삶이다. 현존재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오직 관습적으로 주입된 상식 속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것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하고 안정되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므로 인간은 쉽게 그것을 인지하고 벗어나기 어렵다. 타인에 의해 보편화된 생각과 말 그리고 행위의 형식을 답습하면서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며 안주하는 것은 근원을 상실한 삶으로서 비본래적인 삶, 세인의 삶인 것이다.4)

현존재가 비본래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 자신을 상실하고 본래적인 존재가능으로부터 분리되는 이유에 대해 하이데거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잡담, 호기심, 애매함이다.5) 일상성, 세계, 공공성 속에 빠져 현존재는 자신의 폭을 좁게 한계 지으며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상실하는데 잡담, 호기심, 애매함은 각각의 고유한 특성으로써 현존재의 일상적 굴레 속에 속박시킨다.6)

잡담은 밖으로 표현되어진 말로서 일종의 공동의 소통을 가능케 한다. 현존재의 해석과 이해의 존재양식이 말 속에 규격화되어 던져지면 이것이 현존재의 공공의 인식 틀로서 작용하는 잡담이 된다. 소통을 위한 일방적인 주입에 대한 요구에 의해 그 말은 근거로서의 지반 없이 작동한다. “말은 현존재의 본질적인 존재구성 틀에 속하고 현존재의 열어 밝혀져 있음을 함께 이루고 있는데, 이 말은 잡담이 되고, 이러한 잡담으로서 세계-내-존재를 분류된 이해 안에 열어놓기는커녕 오히려 닫아버리고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를 은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7) 하이데거의 이 텍스트는 잡담은 닫아버림, 폐쇄성, 무지반성에 의한 세뇌적 작용으로 현존재를 한계지어 속박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호기심은 인간이 ‘보는 것’에 대해 가지는 일상적 반응 방식이다. 이 반응 양식은 본 것에 대한 이해와 진정한 만남의 의미보다는 그냥 보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호기심은 새로운 호기심을 낳는데 이것은 진리와의 합일이 아닌 세계 속에 자신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은 이 현상의 세 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8)에서 볼 때 호기심은 현존재의 주체적 뿌리가 없는 상태의 인간의 의식 양식이다. 세계 가운데서 호기심은 습관화된 하나의 욕망으로 오직 색다른 입맛을 향해 방황하게 하는 현존재의 비본래적 특성이다.

애매함은 현존재의 근본을 망각하게 한다. 애매함에 의해 대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 원리가 없이 호기심에 의해 미리 정해진 이해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현존재는 자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렇게 즉흥적이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 밝혀져 있음은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을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준다.”9)라고 했는데, 이것은 애매함이 가진 즉흥성과 무근거성이 현존재를 비본래적 방식으로 실존하게 함을 뜻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비본래성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다. 본래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이며 또한 본래적인 것을 향한 회귀의 가능성의 고유한 조건이다. 그는 현상학적 입장에서 존재론을 정초하면서 현존재가 가질 수 있는 존재 방식의 가능적 양태의 하나로 비본래성을 제시했다. 그의 체계에서 비본래성과 본래성은 서로가 서로의 근거로서 작용함으로써10) 하나의 순환적 존재 구조를 가진다.

3. 본래적 실존방식과 양심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에서의 현존재는 근본 진리 없이 부유(浮游)하며 산만하다면 본래적인 존재 방식에서의 현존재는 근본 진리를 근거로 통일성과 완전성을 갖는다.11)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본래적 실존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통찰하고 자신으로부터 뻗어 나온 모든 구현 가능성을 하나의 원리 속에서 통일하여 완전체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비본래적 실존 방식이 뿌리 없이 방황하는 부유의 특성이 있고 삶의 모든 현상이 즉흥적으로 표출되어 파편처럼 흩어진다면 본래적인 실존 방식은 그 흩어진 파편들의 가치를 하나의 근본 원리 속에서 통일시킴으로써 완전한 형태의 실존 방식이 된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실존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본래적 실존 방식으로의 가능성을 설정하면서 그 가능성을 입증하는 장치 하나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 Gewissen)’ 개념이다.12) 그가 말하는 양심은 인간 현존재에게 어떤 것을 말해 주는 음성으로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여 그 실존적 의미가 현존재의 의식 속으로 개시(開示)되도록 한다.

현존재의 일상적이며 일반적인 존재 방식인 비본래적인 삶의 방식은 자기 주체적인 현현 방식 즉 자기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으로부터 발현된 삶이 아닌 타인의 외부적 말소리에 의해 살아가는 방식이다. 비본래적인 실존 방식이 외부의 목소리에 의한 방식이라는 외재적 특성이 있다면 본래적인 실존 방식은 자기 자신의 내밀한 음성으로서의 양심이라는 내재적 특성을 가진다.13)

하이데거에게 있어 양심은 온전히 현존재의 개시성의 한 방식으로 현존재가 자신의 실존을 이해하고 의미부여하는 본래적인 방식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양심은 인간에게 본래적인 모습으로의 회귀를 요청하는 ‘부름(Ruf)’, 즉 인간 현존재를 향해 근원적 책임을 깨우치고자 하는 침묵의 소리이다.14)

본래적 실존방식으로의 지향을 유도하는 이 양심의 작용은 현상학적 측면에서 의식 주체에게는 내재적이며 주체적이며 자기 원인적이다. 양심의 부름 안에서 불리는 이가 세인-자기로서의 현존재인데 이러한 부름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 하이데거는 ‘현존재 자신’이라고 말한다.15) “부름은 나에게서 와서 나 위로 덮쳐와서 나에게로 향해 있다는 이 현상적 실상 일반을 확고하게 견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안에 놓여 있는, 현존재의 현상으로서의 그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앞서 윤곽 잡아야 한다.”16) 하이데거의 본 논의를 볼 때 내적 부름의 양심은 현존재 자신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의 체계에서 실존으로서의 인간 주체의 자립적 구조 속에서 양심은 발생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심은 피투된 현사실적 현존재가 기획투사하는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양분된 현존재 사이에서 실존론적이며 존재론적 구조를 형성한다.

요컨대, 하이데거 체계에서 양심 개념의 기원은 실존적 주체의 순환 운동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의 현존재가 부르는 자와 부름을 받는 자로서의 중층을 이루면서 하나의 주체는 분열이라는 모순 속에서 순환 운동을 하게 되며 이러한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 속에서 양심은 양자의 사이를 매개하고 그 순환의 종합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주체의 분열과 매개의 구조 속에서 양심은 인간 실존의 본래성을 유도하는 필연적이며 자기 원인적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Ⅲ. 대순사상의 사상 체계와 ‘양심’ 개념
1. 대순사상 체계에서의 양심 개념

대순사상의 체계를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나의 규정된 학으로 출발한 사상이 아니며 사상의 특성 자체가 포괄적이며 경계가 없고 생성[becoming]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정하려고 한다면 대순사상의 잠재성을 축소할 수 있으므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이며 실존주의적 체계와의 대비를 기준으로 살펴보겠다.

하이데거의 체계는 현상학적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다음의 연구는 에드문트 후설이 놓은 토대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17)라고 밝힌 것처럼 그의 체계는 현상학적 방법이 말하는, 유한성 속에 던져진 실존으로서의 인간 의식으로부터 구축된 체계이다. 그의 체계가 지극히 유한자로서의 인간 실존으로부터 구축된다면 대순사상의 체계는 궁극적 실재로부터 구축된다.

대순사상의 체계를, 현상학적18) 방법을 취한 하이데거와 비교해서 실재론이라고 할 때, 대순사상의 체계는 인간 내부와 외부 모두에 이법적 절대성(무극, 태극)과 인격적 절대자(구천상제)가 근원으로 있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이러한 대순사상의 실재론은 오랜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출발인 플라톤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르며 마르셀과 야스퍼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와도 같지 않다. 인간의 자유의사와 인존이라는 개념 속에서 절대성과 절대자와 인간 실존과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인격성과 이법성이 하나로 지양(止揚)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의 그런 중층적 체계 속에서 우리는 본 텍스트 해석도 그런 측면에서 진행해 나가야 된다.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言語) 행동(行動)은 마음의 표현(表現)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良心)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依)하여 발동(發動)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原來) 인성(人性)의 본질(本質)은 양심(良心)인데 사심(私心)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敢行)하게 됨이니 사심(私心)을 버리고 양심(良心)인 천성(天性)을 되찾기에 전념(專念)하라. 인간(人間)의 모든 죄악(罪惡)의 근원(根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人性)의 본질(本質)인 정직(正直)과 진실(眞實)로써 일체(一切)의 죄악(罪惡)을 근절(根絶)하라.19)

하이데거 체계에서 양심이 현존재의 실존 방식의 존재론적 기재로서 작용한다면 대순사상의 체계에서는 어떤 양태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대순사상의 궁극적 실재론에서 보면 인간은 피투된 실존이 아닌 자유의사에 맡겨지고20) 성사재인(成事在人)하는21) 인존적 주체이다. 하이데거의 인간 실존은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져 스스로 기투하여 삶과 세계를 자기 내부에서 의미 지으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 실존의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부분은 대순사상의 인존적 주체22)와 통한다고 할 수 있지만 대순사상의 인존적 주체는 피투된 실존이 아닌 근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근원과 주체가 서로 하나의 완전체로 어우러져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다르다. 이것을 인간의 신명성23)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대순사상의 지형도가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현상학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실재론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하이데거 체계에서 양심이 현존재의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실존적 순환 구조 사이에서 작용하는 매개적 기재라면 이러한 대순사상의 중층적 체계에서 양심 개념은 실재론적이며 현상학적인 매개 기재의 성격을 동시에 띤다. 인존으로서의 인간 주체와 궁극적 실재 사이의 매개 기재로서 양심이 장치되어 있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며 인성의 본질이라고 했을 때, 대순사상의 체계에서도 양심은 매개의 연결성으로 보인다. 양심을 매개적 위치에 두고 양심이 곧 천성이라고 한 것은 인존적 주체와 궁극적 실재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고 그 자체의 일체적 신명성에 의한 표현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 사(私)적 삶과 물욕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依)하여 발동(發動)하는 욕심(慾心)이다.24)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두 가지 실존 방식으로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말했다면 대순사상에서는 사(私)적 삶과 공(公)적 삶이 있다.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사심은 공심(公心)에 상대되는 말로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私)는 욕심에 의해 자기 본연의 완전성을 상실한 자아의 결핍된 상태이다. 자신과 타자를 분별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폭은 더욱 좁아지고 결핍의 외연은 여러 형태의 욕심의 모습으로 확장된다. 자신과 타인을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집착하게 된다. 진리의 보편성과 무한성은 육체가 가진 고립적 자아의 경계와 틀을 넘어서게 하지만 진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사적인 자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아를 육체의 틀에 고립시키고 욕심의 충족을 위해 타자와 투쟁 대립하게 된다.25)

또한, 물욕에 대한 주희의 설명을 참고해 보면, 인의(仁義)의 마음은 인간 모두에게 있지만 육체[身]로 인해 물욕의 영향을 받게 되어 인의에 대한 완전한 앎을 얻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인의의 마음으로서의 리가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원인은 물욕 때문이다. 인간이 리(理)를 깨우치지 못하면 심(心)이 발현할 때 의리에 일치하지 못하고 물욕의 사사로움에 빠지게 된다.26) 물욕에 대한 주희의 설명에서도 물욕은 육체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육체는 자아의 경계와 틀이 되어 리로서의 천품성을 잃게 만든다.

대순사상에서 사심은 곧 욕심으로 욕심은 우주와 같은 인간의 원대한 가능성을 육체 속에 속박하게 만들어 고립시킨다. 그러한 고립은 근원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무한히 우주 속으로 확장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을 사물화한다. 물욕의 삶이란 육체적 유한성에 갇힌 삶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육체적 특성에 기인하며 그 육체적 특성이란 자기보존본능과 같은 지극히 자기 개체의 존립에 집착하는 성향이다. 이것은 유한성 너머에 있는 존재의 근원, 만물의 근원에 대한 망각을 유도한다. 따라서 물욕의 삶이란 근원을 잃은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기 육체에 고착화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사심을 버리고 이르게 되는 천성’과 주자가 말하는 ‘인욕의 극복에 의해 이르는 리’는 모두 인간 개체의 본질적인 근원을 유한적 육체 너머에서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물욕의 삶은 그러한 근원과의 완전한 단절 가운데 있으며 원래로의 회귀를 추구해야 할 상태인 것이다.

요컨대, 물욕은 인간을 근원으로부터 단절케 하여 사심에 빠지게 한다. 사심은 인간의 마음이 가진 두 가지 양태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고립되어 자기 외부의 대상을 극(剋)하는 상태의 마음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따라서 대순사상에서 사심을 물욕에 의해 발동하는 욕심으로 보는 것은 물욕이 신체의 유한적 특성과 맞닿아 있으며 그 유한적 특성이 개인의 이기심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결국, 욕심으로서의 사심은 인간이 인간 본연의 가능성과 존재의 근원을 상실하게 하여 물욕의 삶에 머물고 이기적인 개체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공(公)적 삶과 양심

양심(良心)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27)

천성이라는 말에는 본질 그대로의 것 또는 근본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손상되지 않은 본래 상태로서의 온전함이기도 하다. 본질 그대로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개체의 유한성에 한정된다면 본질 그대로의 가능성을 발현하는 인간은 그 자체가 무한자이자 총체적 인격이며 공(公)적이다. 물욕이 인간을 사(私)적인 한계로 몰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결핍으로 몰고 가는 것과 같다.

도리(道理)에 합당한 삶은 물욕으로써 그 결핍을 메우는 대신 절제와 이치로써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삶이며 심신의 안정으로 드러난다. 4강령의 안심(安心)에서 천성의 삶을 유지하는 마음의 감정적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사람의 행동(行動) 기능(機能)을 주관(主管)함은 마음이니 편벽(偏僻)됨이 없고 사사(私邪)됨이 없이 진실(眞實)하고 순결(純潔)한 본연(本然)의 양심(良心)으로 돌아가서 허무(虛無)한 남의 꾀임에 움직이지 말고 당치 않는 허욕(虛慾)에 정신(精神)과 마음을 팔리지 말고 기대(企待)하는 바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도록 항상(恒常) 마음을 안정(安定)케 한다.”에서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가서”와 “허욕에 정신과 마음을 팔리지 말고 기대하는 바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항상 마음을 안정케 한다.”의 내용은 물욕의 불안정으로부터 벗어나 사사됨 없는 본연의 양심으로부터 오는 안정된 마음을 대비시킨다.

무엇보다 공적 삶이란 인간 삶의 본연(本然)적 상태이다. 천성을 되찾을 것을 요구한 위의 인용문을 볼 때도 인간의 본연적 삶이란 허욕에 이끌리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 상태는 도리에 지극한 마음인 도심(道心)이다. 대순지침에 “사(私)는 인심이요 공(公)은 도심이니, 도심이 지극하면 사심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28)에서 보듯 유한적 틀에 갇힌 개인의 사사로움을 넘어 무한하고 영원한 도로서의 마음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아가 그 마음자리는 원래 나의 삶이 기거하던 근원처라는 것까지 추론해볼 수 있다. 앞선 논의와 같이 양심은 천성으로서 인간의 삶을 본래의 자기 본연의 가능성으로 회귀하도록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대순지침』에서 “성(誠) 자체는 하늘의 도요, 성(誠)하고자 함은 사람의 도이니 지극한 성으로 바르게 도 닦기를 힘써야 한다.”29)라고 한 것을 볼 때 인간 본래의 품성은 하늘의 도와 일치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양심이 천성이라는 것은 이 양자가 동일하면서도 인간이 천성을 지향해가고자 하는 의지와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Ⅳ. ‘양심’ 개념에 대한 비교

지금까지의 논의 구도를 정리해 보면, 하이데거와 대순사상의 체계 지형도를 구분하고 그 기반 하에 양심 개념의 구조적 위치를 설정하였다. 비본래성과 사심의 삶, 본래성과 천성의 삶, 잡담ㆍ호기심ㆍ애매함과 물욕의 대비를 통해 두 사상의 양심 개념에 이르렀다.

양 사상의 체계 지형도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대순사상의 궁극적 실재론으로 구분되었다. 우연히 피투된 현존재와 절대성과 상제의 주재 하에 있는 인간의 차이 속에서도 하이데거의 기투적 현존재의 실존적 자유의지와 대순사상의 인존적 주체의 자유의사는 유사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대순사상의 인존적 주체는 신명성을 내재하고 있는 실존적 완전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가 말하는 주체의 폭을 넘어서고 있다. 실존과 본질의 차별 속에서 실존의 우위를 주장하는 실존주의와 달리 대순사상은 유한성으로서의 실존과 절대성으로서의 본질이 동시적으로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피투된 실존과 인존적 주체는 그 내재된 완전성의 발현 여부에 따라 두 가지 삶의 양태를 갖는다. 비본래성과 본래성, 사적 삶과 공적 삶으로 대비되며 본래성의 기투를 통해 가능성을 구축하고 천성의 삶은 절대성과 상제로부터 허락된 내재된 신명성을 통해 가능성을 구축한다.

정리하자면, 하이데거와 대순사상의 양심은 이러한 체계의 방식 속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게 된다. 공통점은 양 사상 모두에 있어 양심은 인간의 완전성 회복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투를 통해서 실존의 가능성을 조망하고 대순사상은 인간 내면의 신명성을 통해 인존적 가능성을 조망한다. 하이데거의 양심이 비본래적인 인간 현존재를 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요구하는 내면적 부름이라면 대순사상의 양심은 사심으로 인해 한계 지어진 인간의 천성을 회복하여 공적인 경지에 이르게 하는 주체적 힘이다. 본래적인 실존 방식과 공적인 삶은 온전함, 완전성으로의 회귀라는 개념적 특성을 공유한다.

차이점은 양심의 출처가 어디냐에 있다. 하이데거의 양심은 그 출처를 오직 현존재 자기 자신으로부터 갖는다. 본래성으로의 요구를 하는 이도 현존재이며 그 요구를 받는 이도 현존재이다.30) 기투를 통해 현존재의 가능성을 개방하고 내적 부름으로서의 양심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 가능성을 회복하게끔 유도한다. 그런 데 반해 대순사상의 양심은 그 출처를 절대성과 인존적 인간 양자 모두로부터 갖는다. 자유의사를 가진 인존적 인간은 절대성이라는 근원성을 자기 내부에 갖고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무근거적 피투가 아니면서도 자유의사에 의해 개방된 특성이다. 실존주의와 궁극적 실재론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Ⅳ. 결론

이상의 논증 과정을 통해 본고는 대순사상의 양심 개념을 ‘근원을 향한 회귀적 특성’이라고 정의한다. 인존으로서의 인간 주체가 가진 신명성의 발현이라는 수도적 취지와도 동일한 개념이다. 양심이라는 한 개념의 지평은 인간 존재자의 근원에 대한 이탈과 회귀라는 구조를 형성하며 또한 인간 완성 내지는 도통이라는 수도의 목적으로 이어진다. 달리 말해 양심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고 그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을 근원으로의 회귀라는 개념으로 이끌어간다. 근원을 사이에 둔 이탈과 회귀 가운데서 양심은 인존적 주체의 생동하는 힘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양심 개념과의 비교를 거쳤다. 그 비교의 내용은 양 사상의 체계 지형도를 규정하고 그 체계 속에서 양심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분석이었다. 서론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본 논의를 통해서 저자가 얻고자 한 연구목표는 대순사상의 양심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중심으로 대순사상과 현대 사상인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 체계의 사상 지형도를 서로 견주어 보고 이 두 사상의 소통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대순사상의 현대적 진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대순사상의 ‘양심’ 개념은 대순사상의 주체 개념인 ‘인존’과 ‘자유의사, 성사재인’과 체계적 구도 속에서 연결되며 이러한 주체의 특성이 하이데거 실존주의 체계의 주체가 가진 현대적 특성과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피투의 사실성과 기투의 실존성이라는 인간 현존재를 하이데거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보고 자기 자신의 고독한 실존적 구축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는 것으로 인간 실존을 규명하였다. 이에 대해 대순사상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인간의 내던져짐과는 달리 그 궁극적 실재의 근원을 가지면서 그 근원 자체를 주체 내부와 합일된 상태의 인간을 이야기한다. 이를 인존의 신명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독자적 주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근원에 종속된 주체도 아니다. 근원을 제시하지만 합일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종속이 아닌 자유의사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적 주체가 가진 자율성과 독자성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원을 제시하는 중층적 체계는 대순사상이 가진 독특한 현대적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본고를 통해 저자는 앞으로의 대순사상 연구 방향성을 대순사상의 현대적 특성을 발견해내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순사상이 가진 종교적 특수성은 부각되었지만, 한국의 근대를 열고 그것을 기점으로 세계 개벽을 지향한 대순사상의 진보적 사상성이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대순사상의 이러한 진보성은 종교적 특성에 묻혀 드러나지 못한 한국사상사의 큰 획임에 분명하며 이것은 한국의 사상적 유산임과 동시에 세계사상사의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타 사상과 소통하며 그 속에서 대순사상과 타 사상이 공유한 문제의식을 포착하고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해답을 내렸는지에 대한 개념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대순사상 연구자에게 주어진 복되고도 힘겨운 학문적 여정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Footnotes

1.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서울: 까치글방, 2005), p.13.

2. 박정호ㆍ양운덕ㆍ이봉제ㆍ조광제, 『현대철학의 이해』 (서울: 동녘, 2001), p.55.

3. 이유택,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양심 개념」, 『철학연구』 62 (2003), 115.

4. “이렇게 선택 없이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해서 끌려다니게 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빠뜨리는데,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그 자신에게로 되찾아오는 식으로만 되돌려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되찾아옴은, 그것을 소홀히 함으로써 현존재가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상실해버린 바로 그 존재양식을 가져야 한다.” 하이데거, 앞의 책, p.358.

5. 같은 책, p.240.

6.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의 방식과 일상성, 잡담, 호기심, 애매함을 부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본래적인 삶의 방식은 고차적이고 비본래적인 삶은 타락한 것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인 것을 본다. 왜냐하면, 비본래적인 삶의 방식은 본래적인 삶의 방식으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책, p.241.

7. 같은 책, p.232.

8. 같은 책, pp.236-237.

9. 같은 책, p.239.

10. “비본래성은 가능적인 본래성을 근거로 한다.”[SZ 344]고 말하면서도, 양자가 실존적으로는 상호적으로 변양의 관계에 서 있고, 또한 실존론적으로는 본래성이 비본래성의 “변양된 움켜쥠에 불과하다.” 기다 겐 외 3명, 『현상학사전』, 이신철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11).

11. 박정호ㆍ양운덕ㆍ이봉제ㆍ조광제, 앞의 책, p.59.

12. “그러나 현존재는 본래적으로도 실존할 수 있는가?…어디에서 우리는 이것을 위한 [즉,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을 구별하고 본래적 실존을 선택하기 위한] 기준을 획득하는가?…본래적 존재가능을 입증하는 것은 양심이다.”(SZ, 234/295), 이유택, 앞의 글, p.116.

13. 같은 글, p.117.

14. 같은 글, p.118.

15. 같은 글, p.119.

16. 하이데거, 앞의 책, p.368.

17. 같은 책, p.62.

18. 여기서 말하는 현상학은 독일의 철학자 후설의 ‘현상학’이다. 후설의 현상학 체계는 주체의 관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 체계로서 주관의 의식이 철학의 출발점이며 도달점이다. 의식에 소여되는 세계는 지극히 주체의 본질에 투영되어 드러나는 것으로 주체의 인식적 가능성을 통찰하고 그 역량에 근거하여 의식에 소여된 것으로서의 세계와 자아를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서 ‘현상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주체의 의식을 근원으로 하는’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19. 『대순진리회요람』, pp.18-19.

20. 이경원, 「대순사상의 인간관 연구」, 『신종교 연구』 12 (2005), p.315.

21. 같은 책, p.314.

22. 인존적 주체는 자유의 역량을 확보하고 있는 완전체로서의 주체이다. 자기 외부의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기 내부의 완전성으로부터 확보된 자유가 실현된다. 인존적 주체로서의 모든 개별적 인간 주체는 평등하며 신의 완전성과 일치하는 자격을 가진다.

23. “후천은 ‘모사재천 성사재인’의 사고로서 인간이 보다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 나서기 때문에 참된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본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이 바로 ‘인존’이 되며, 그 마음을 천지의 마음과도 같이 회복하고 쓸 줄 아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같은 책, p.314.

24. 『대순진리회요람』, p.19.

25.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대사전』 (익산: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2013)

26. 박성규, 『주희 대학(해제)』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27. 『대순진리회요람』, p.19.

28. 『대순지침』, p.93.

29. 같은 책, p.41.

30. 이유택, 앞의 글, p.119.

참고문헌(References)

1.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2.

『대순지침』,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2.

3.

『대순진리회요람』,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10.

4.

기다 겐 외 3명, 『현상학사전』, 이신철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11.

5.

박정호ㆍ양운덕ㆍ이봉제ㆍ조광제, 『현대철학의 이해』, 서울: 동녘, 2001.

6.

이경원, 「대순사상의 인간관 연구」, 『신종교 연구』 12 , 2005.

7.

이유택,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양심 개념」, 『철학연구』 62, 2003.

8.

구연상, 「Kant 윤리학에서 양심의 문제」, 『인문학연구』 8, 2003.

9.

장승희, 「맹자의 양심론」, 『유교사상연구』 32, 2008.

10.

박성규, 『주희 대학(해제)』,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11.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대사전』, 익산: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2013.

12.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서울: 까치글방,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