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Article

해원상생과 정신분석의 욕망이론: 애도를 중심으로

김석1,
Seok Kim1,
건국대학교 교수1
Professor, Division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in Konkuk University1
Corresponding Author : Kim, Seok, E-mail : kimseok@konkuk.ac.kr

ⓒ Copyright 2017,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16, 2016 ; Accepted: May 28, 2017

Published Online: Jun 30, 2017

초록

본 논문은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이론의 입장에서 대순사상 종지의 하나인 해원상생의 실천적 의미를 이해하면서 두 사상의 공통성과 상보성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대순사상과 정신분석 이론은 둘 다 욕망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순사상의 해원이념은 애도를 통해 욕망을 복원하고 상호 주체성 구조 속에서 그것을 실현할 것을 강조하는 정신분석 이론과 통한다. 물론 종교이론인 대순사상이 말하는 욕망의 의미는 다의적이고, 욕망의 지향점도 치료 담론인 정신분석과 다르다. 하지만 대순사상은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불행이 욕망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상극 때문에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서로 억제하고 누르면서 고통을 만들고 있는 상태가 바로 상극이며, 해원을 통해 상극을 벗어나 상생의 세상 후천에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은 애도를 통해 대상의 상실을 수용하면서 욕망이 다시 작동한다고 본다. 상생과 천지공사 같은 사회, 우주적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순사상은 상호주체성의 구조에서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정신분석과 통하는 점이 있다. 대순사상과 정신분석의 사회적 실천 방향은 둘 다 보편성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상호주체성 구조는 욕망의 인정과 인정의 욕망을 실천의 방향으로 제시한다. 욕망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ABSTRACT

This paper is an attempt to find commonality and complementarity between psychanalysis and Daesoon thought, while understanding the practical meaning of the Haewon-Sangsaeng, which is one of the religious doctrines of Daesoon Jinrihoe, in terms of the theory of desire posited by psychoanalysis. There is a common point between Daesoon thought and psychoanalytic theory since both ideas give importance to desire. The Haewon idea is similar to that of psychoanalytic theory, which emphasizes restoring desire through mourning and realizing it within a structure of inter-subjectivity. Of course, the meaning of desire in Daesoon thought, given its status as a religious doctrine, is polysemous, and the orientation of this type of desire is also different from that of psychoanalysis given psychoanalysis’s role as a therapeutic discourse. However, Daesoon thought explains that the pain and unhappiness suffered by human beings occurs because of mutual overcoming which is a relational style wherein desire can not be solved properly for either party involved in an interaction. Mutual overcoming is a state of making pain through repressing and suppressing one another. And through Haewon,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both parties reach a Later World of mutual beneficience beyond the previous state of mutual overcoming. Likewise, psychoanalysis seems to accept the loss of the object through mourning, and in this way, desire is reactivated. Daesoon thought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social and cosmic systems like mutual beneficience and the reordering of the Universe and these systems have a commonality with psychoanalysis as psychoanalysis sees desire positively within the structure of inter-subjectivity. The direction of social practice in Daesoon thought and psychoanalysis both aim at the realization of a new universality. The inter-subjectivity structure suggests desire of recognition and recognition of desire as a way of practice because desire is not personal but rather social. In conclusion, we should not stop at resolving our own individual desires, but should instead go forward in solidarity toward the achieving the common good.

Keywords: 해원; 상생; 상극; 욕망; 애도; 대순사상; 정신분석; 상호주체성
Keywords: Haewon; Sangsaeng; Mutual Overcoming; desire; mourning; Daesoon thought; Psychoanalysis; inter-subjectivity

Ⅰ. 대순사상과 정신분석: 상보적 대화를 위해

본 연구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욕망에 대한 사유1)의 프리즘으로 대순사상 핵심 이념의 하나인 해원상생(解冤相生) 사상의 실천적 의미를 이해하면서 정신분석과 대순사상의 공통성과 상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상보성은 종교적 교리의 정당화나 정신분석이론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매개로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사회 환경을 만드는 사회적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교 연구가 쉽지는 않다. 대순사상과 정신분석은 욕망 개념, 인간관, 실천 방향, 담론 지형 등 여러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천지공사와 해원상생을 중심으로 후천개벽과 지상천국 건설을 통해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 담론으로서의 대순사상과 개인적 차원에서 욕망의 절대성과 윤리를 강조하는 정신분석은 강조점은 물론 실천의 방향도 다르다. 또 대순사상에서는 해원의 주체도 상제이며, 먼저 삼계공사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이것은 욕망을 주체의 문제로 바라보는 정신분석과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원인을 욕망의 좌절과 이를 낳은 억압된 현실이나 상극을 통해 설명하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상생을 실현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려는 두 사상의 문제의식이 지닌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둘의 접점을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종합해 이 시대에 필요한 욕망에 대한 바른 관점을 정립하고, 여러 주체들이 어떤 식으로 연대를 실현할 것인가의 방향을 인문학적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이 연구는 심리적 관점에서 인간을 분석하는 정신분석과 우주론적인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존재를 바라보는 대순진리 이념의 교차 연구를 통해 욕망의 중요성과 그 함의를 더 풍부하게 규명해보려는 시도로서 가치를 탐색한다.

연구를 위한 키워드이자 방법론으로 필자는 해원과 애도의 유사 기능에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대순사상이 말하는 해원상생 이념은 욕망의 논리를 벗어나는 인간론적ㆍ우주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의미도 더 다의적이다. 치유의 담론인 정신분석과 천지개벽 지상천국 같은 구원론을 지닌 종교 담론은 애초부터 문제의식이나 최종 지향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 논문의 의도는 정신분석과 대순사상의 유사성 제시가 아니라 욕망과 애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원사상의 사회 실천적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논의는 최소한의 유사성을 상보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전개할 것이다. 대순진리회 『전경』에 보면 “상제께서 교훈하시기를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 이제 먼저 난법을 세우고 그 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 하라.’”2)는 말이 나온다. 대순사상은 욕망을 채우고 해방시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라캉도 ‘애도’(mourning)개념으로 상실의 수용을 통해 욕망이 작동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정신병적 상태인 멜랑꼴리에 빠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애도란 실제적인 상실의 대상을 욕망의 원인인 ‘오브제 a’3)로 대체하면서 이것을 주체의 삶에 정착시키는 의식적 작업이다. 애도작업을 통해 대상은 잃어버린 대상이 되며, 주체는 상실을 새롭게 채우려는 욕망을 통해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이하의 본문에서 필자는 정신분석이 말하는 애도작업(work of mourning)이 개인의 내면에 쌓인 한(恨), 타자로 향하는 원(怨), 집단적 차원의 원(冤) 상태에 놓인 ‘원(冤)’4)을 해소함으로써 욕망을 풀어주는 해원사상과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논할 것이다. 또 대순사상이 말하는 보은상생과 천지인 삼계가 조화를 이루는 후천세상의 비전은 일종의 사회 구원으로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윤리의 사회적 지향과 연대의 이상과 통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하에서 논할 것이다.

본 논문이 좀 더 치밀하게 대순진리회의 이념이나 교리를 내부자 시각만큼 다루지 못한 것은 필자의 개인적 한계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대순사상의 ‘해원상생’ 이념의 의미를 정신분석이라는 외부 관점에서 색다르게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함축한 실천적 유의미성을 발굴하여 그 외연을 학문적으로 넓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는 향후 유사한 다른 통섭적 연구에도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우리는 욕망의 윤리와 해원상생의 실천적 의미를 검토하고 종합해 갈등과 분열이 심한 우리 사회가 나아갈 실천적 방향과 공동체의 화합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사회적 문제해결에도 영감을 주려고 한다.

Ⅱ. 해원과 욕망

해원상생은 대순사상의 핵심 이념이다. 해원이란 원(冤)을 푼다는 뜻이고, 상생이란 서로를 이롭게 하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다. 그런데 해원상생은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순사상 종지인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의 총체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5)음양합덕 신인조화에 의해 해원상생이 가능해지며,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도통진경에 도달한다. 반면 정신분석은 이런 상관성 보다는 개인의 욕망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종교 담론인 대순사상은 천지공사라는 말에서 보듯 인간이 처한 역사적이고 우주론적 상황에서 해원을 고려하면서 상극이 지배하는 선천(先天)에서 벗어나 “개인의 이상임과 동시에 사회와 우주 전체의 이상향”6)인 도통진경인 후천(後天)에 도달하는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에 해원의 의미가 넓을 수밖에 없다. 또 해원, 즉 원을 푸는 주체도 개인이 아니라 상제가 그 가능조건을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천지공사의 의미에 함축되어 있다. 또 천지공사 교리에 따르면 해원 대상도 인간 내부의 원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미친다.7) 『전경』의 다음 구절을 보자.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고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 중의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8)

대순사상이 말하는 원은 개인의 원한이나 미움도 포함하지만 상극의 상태에서 세상에 첩첩이 쌓인 역사적인 포원을 말한다. 상극이 압박하고 갇히게 하여 한이 서린 상태가 바로 원이다. “원이란 굴곡이고, 굴속에 갇혀 있는 토끼이다. 토끼가 막힌 곳에 갇혀 움직일 수 없으므로 억울한 것이다.”9) 원(冤)은 글자의 의미처럼 꼼짝 못하고 갇혀 원통함이 쌓인 상태이다. 원은 인류사적으로 누적되어 쌓이기도 하고,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척을 지면서 심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상극(相克)이 지배하는 선천이다. 원의 출발점은 『전경』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10)

아버지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단주의 한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인류사에 깊숙이 뿌리내린 원의 출발점이다. 선천 상극의 비극을 낳은 우주적 법리는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영향을 미친다. 해원상생의 일차적 의미는 이러한 만고의 원한을 푸는 역사적 작업이다. 그런데 상극의 상태에서 원이 남기는 상처들은 개인 상호 간에 의해서도 심화된다.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이것이 척이 되어 보복하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11)

세상에 온갖 문제가 생기고 불행이 생기는 것은 우주적으로 형성된 원 뿐 아니라 개인들이 서로에게 원한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만드는 것이나, 남을 미워하는 것, 정을 끊는 것 등이 다 척을 지는 행위다. 이 척을 풀어야 하고 이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해원의 대상이다. 해원에서 풀어야할 원은 우주론적인, 그리고 인간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대순사상의 특징이다. 즉 해원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우주와 삼라만상을 대상으로 삼는다.12)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정신분석과의 연결성을 찾기 위해 우주론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욕망이 좌절되고 해소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의 의미를 다소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해원의 대상이 되는 원은 해소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인간 전체가 지닌 욕망의 의미도 지닌다. 해원이 겨냥하는 원은 내부로 응어리진 원한이자 타자에 대한 원망이면서 동시에 충족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욕망이라는 복합적 의미가 있다.13) 원이 상극에서 생겨난 원한이나 원망 뿐 아니라 인간이 실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의미를 포함한다면 정신분석의 욕망과 비교가 가능하다. 원은 단순히 인간이 살면서 서로에게 생기는 미움이나 감정의 상태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실현하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이 해소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대순사상에서는 이런 상황을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14)로 표현한다. 욕망을 풀지 못하고 그물에 갇힌 것처럼 원통해 하는 것이 원의 상태이며 선천의 실상이다. 물론 이 선천에는 여러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이나 차별 때문에 원을 풀지 못하는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원(冤)의 이념을 정신분석의 욕망과 비교하면서 그것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라캉은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면서 욕망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나 여러 행동이 가능한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예컨대 공격성 같은 행동, 사랑이나 미움과 같은 정념, 그리고 신경증(neurosis) 같은 병리적 심리를 욕망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더 나아가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재구성하면서 정신분석의 인간학적 의미를 더 분명히 드러낸다. 욕망은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이자, 인간의 고유한 현실을 창조하는 동력이다. 교법 3장 24절에서 보듯 해원을 중요한 실천적 지침으로 제시하는 대순사상도 욕망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욕망이 중요한 만큼 현실에서 욕망은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충족이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대상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대상이란 욕망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주체는 환상(fantasty) 속에서 이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은 외견상 대상에 대한 집착처럼 보이지만 실은 “존재 결여에 대한 관계”15)이다. 존재 결여는 절대 채울 수 없는데 욕망의 좌절이 계속 발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욕망의 좌절은 삶에서 여러 증상(symptome)으로 나타난다. 욕망의 좌절로 인간은 신경증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증상은 억압 때문에 발생하는데 억압은 결국 인간의 고유한 존재(being)를 상징계의 기표(signifiant)로 대체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라캉은 기표에 대해 “하나의 기표화된 존재를 위해 하나의 주체를 대신하는 것”16)이라고 정의한다. 주체의 욕망은 결국 기표로 대체된 존재에 대한 정념이다.17)존재가 기표로 대체되면서 결여되었기에 욕망을 통해 이 결여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분석이 존재론적 욕망에서 고통 문제에 접근한다면 대순사상은 그것을 상극(相克), 선천(先天), 척(慼) 등 우주론적, 사회적, 인간적 맥락에서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순사상에서도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욕망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순진리회 『전경』에는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사례들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18)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대순진리도 인간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강조한다. 불교는 사성제라는 진리를 강조하면서 깨달음과 지혜[반야, 般若]를 통해 집착을 끊고 해탈할 주장한다. 그릇된 집착인 갈애(渴愛)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멸하면 되기에 깨달음이 중요하다. 반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초월적 은총을 통해 구원을 얻어 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보다 신이 주는 사랑과 수직적 개입을 더 강조한다.

그런데 대순사상은 고통의 해소 방안으로 상극의 상태에서 억눌린 원(冤)을 해소하여 행복을 실현하는 원리인 해원상생을 주장한다. 인간은 원을 풀어야 하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맺히고, 척이 져있어 고통을 유발한다. 이 원인은 우주론적으로 설명된다. 대순사상에서는 우주 만물이 서로 관계하고 작용하는 두 가지 상황을 상생과 상극으로 나눈다. 상생이란 나의 생존이 상대의 생존에서 비롯되고 이것이 상호적이라는 것을 알면서 서로를 불가분의 존재로 인정하는 생명의 관계다. 반대로 상극은 서로 억제하고 누르는 상태로 만물이 과도한 상극 관계에 치우치면 이 관계가 원한을 만들면서 온갖 고통이 시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주의 원처럼 오래 전부터 쌓여온 그런 상극 보다는 인간의 그릇된 집착이나 상호 원한 때문에 생기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다. 욕망에서 비롯되는 고통은 인과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해결책도 상호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상대에게 척을 졌다면 내가 그것을 풀어주면 된다. 남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원상생이란 유기적인 것이며 불가분하게 타자와의 윤리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의 문제도 결국 타자의 욕망과 주체의 욕망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생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욕망을 표현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타자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키는 원인이 된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는 말을 경구처럼 반복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라캉은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서 고갈되고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욕망으로 붙잡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19)라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인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된다. 인간은 자연적인 욕구(needs)를 타자를 향한 요구(demand)로 바꾸어 충족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다. 「남근의 의미」라는 라캉의 글에는 욕구와 요구의 어긋남이 욕망을 낳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욕구는 나로부터 비롯되지만 그것이 요구로 바뀌는 순간 타자(Autre)에 의해 인정되어야 하고,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타자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Que vuoi?)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어는 구조적으로 욕구와 요구의 불일치를 만든다. 이러한 틈에 욕망이 자리 잡는다.

“욕구 속에서 소외된 부분이 요구 속에서 연결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처럼 원억압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파생물 속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이 인간에게서 욕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20)

요구가 되풀이 되면서 무제약적 사랑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불일치가 커지면서 욕망도 점점 강렬하게 된다. 원래 욕망은 존재 결여에서 시작되었는데 주체는 이것을 타자를 향한 사랑의 요구를 통해 채우려고 한다. 이러한 욕구, 요구, 욕망의 변증법 속에서 욕망은 점점 더 모호해지며, 주체는 길을 잃는다. 라캉은 욕망에 대해 “욕망은 만족을 위한 탐욕도 아니고 사랑을 위한 요구도 아니다. 욕망이란 전자에서 후자를 뺀 차이, 혹은 오히려 욕구와 요구의 분열이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나 분열은 언어가 대체하면서 결여로 만든 존재와 연관된다. 결국 특정한 대상이나 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순수 욕망을 찾기 위해서는 결여에 대한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애도(mourning, work of mourning)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그것을 해원사상과 연결시켜 보려는 필자의 의도도 그 때문이다. 애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체로 하여금 대상의 상실을 수용하게 하면서 욕망을 가동시키고 상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애도는 상실을 주체의 삶에 자리 잡게 만드는 능동적 과정이며 건강한 욕망이 자리 잡게 해주는 조건이다.

대순사상이 음양합덕 신인조화라는 기초 공사를 통해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우주와 사회적인 시스템을 구성하고 척의 해소를 통해 갇힌 욕망을 풀어줄 것을 강조하는 것도 애도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해원과 애도의 기능이 수행하는 치유적 측면에 주목하려고 한다. 해원을 통해 풀지 못한 원(冤)의 실현이 가능해지는 것처럼 정신분석에서 대상의 상실을 수용하는 애도작업은 욕망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해원과 그것의 가능조건이라 할 수 있는 음양합덕 신인조화를 실현한 후 최종 목표로서 도통진경의 후천에서 상생이 실현된다. 정신분석도 애도를 통해 주체가 욕망을 추구하면서 결국 다른 주체들과 제대로 관계 맺을 것을 강조한다.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애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의 애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애도는 천지공사를 통해 삼계의 조화를 복원하여 해원의 시대를 연다는 대순사상의 이상과 연결해 볼 수 있다.

Ⅲ. 개인적 애도와 사회적 애도

이제 ‘애도’(哀悼) 의미를 조금 자세하게 살피면서 이것이 왜 욕망을 풀어주고 가능하게 하는지 살펴보자. 애도는 단순히 상실한 대상을 슬퍼하는 정서적 상태만이 아니라 상실을 기표 사슬 속에 포획함으로써 욕망이 가동되게 하는 상징화 작업이다. 프로이트는 1917년 발표한 「애도와 멜랑꼴리, Trauer und Melancholie」21)라는 논문에서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질적으로 전혀 다른 애도의 상태와 멜랑꼴리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전자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정상적인 슬픔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정신신경증적 상태로 주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파국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나 애정 대상의 상실 때문에 슬픔에 빠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이는 멜랑꼴리라는 정신병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것은 슬픔의 강도나 주체의 의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정상적 상태와 병리적 상태로 전혀 다른 경로로 발전해 간다. 애도는 주체성이 손상되지 않아 자아가 대상관계를 유지한 채 단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철회되면서 상실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반면 멜랑꼴리에서는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상실되며, 뚜렷한 원인이나 근거가 없는 낙심과 망상적 상태의 죄책감이 계속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중단하고 자폐적 상태에 빠진다. 특히 애도의 상태와 다르게 멜랑꼴리에서는 자애심이 추락하고 자아가 빈곤해진다.22)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꼴리는 애도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이기는 하지만 슬픔의 상태를 병리적인 상태로 전환시키는 어떤 요인이 지배하는 증상이다.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꼴리의 차이를 임상적 관점에서 분석했다면 라캉은 나중에 욕망의 관점을 대입시킨다. 라캉에 따르면 애도와 멜랑꼴리를 나누는 기준은 애도 작업 유무에 있다. 라캉은 『세미나 VI, 욕망과 그 해석』에서 <햄릿>에 대해 분석하면서 애도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햄릿의 병이 깊어지는 이유와 양상을 설명한다. <햄릿>은 괴테 같은 여러 사상가의 단골 분석 대상이었으며, 프로이트도 많은 텍스트에서 <햄릿>에 대해 언급한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도식을 적용해 햄릿이 진실을 안 이후에도 아버지의 복수를 단행하지 못하면서 광기가 점점 깊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햄릿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경쟁심, 그리고 아버지를 흠모하는 양가적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삼촌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거트루드와 결혼하자 자신의 은밀한 무의식적 소망을 실현한 클로디어스와 동일시하면서 복수를 결행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햄릿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자기 처벌에 대한 충동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23) 이런 해석은 프로이트의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24)가 충실하게 계승한다.

그러나 라캉은 오이디푸스 도식을 적용해 햄릿을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애도’라는 개념을 적용해 햄릿의 광기와 비극성의 원인을 해석한다.25) 햄릿의 신경증은 애도의 부재로 인해 발생했고, 그 결과 햄릿뿐 아니라 모두가 상실(죽음)의 대상이 되는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 라캉의 진단이다. 햄릿을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푸스 욕망에 사로잡힌 신경증자로 해석하는 것보다 애도의 부재와 그것에 이어진 욕망의 좌절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햄릿>의 여러 장면은 더 설득력 있게 분석된다. 애도의 관점이란 햄릿의 광기나 무기력증보다는 더 근원적으로 햄릿의 욕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원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컨대 햄릿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항상 타자의 시간에 머무는 것, 자기가 사랑하는 오필리아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냉담하게 대하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복수를 하지 못하고 자신이 칼에 찔려 죽게 되자 신속하게 왕을 죽인 것 등이 이것과 연관된다. 라캉은 햄릿에게 부족한 것은 햄릿이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6)

햄릿의 상태를 요약하는 말이 ‘불가능한 행동’(L'acte impossible)27)인데 이것은 욕망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애도의 부재’이다. 애도의 부재에 따른 병리적 상태는 마치 대순진리가 말하는 상극의 상태에서 욕망이 꽁꽁 묶여 좌절된 것과 비슷하다. 라캉에 따르면 애도는 상실(perte)과 결여(manque)를 슬퍼하는 상태이자 그것을 인정하면서 주체와의 대상적 관계 속에 재등록하는 상징적 작업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꼴리」에서 애도와 멜랑꼴리의 차이에 대해 의미심장한 설명을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 상태에서는 상실된 대상을 포기하려는 것과 그것에 집착하는 리비도 갈등이 무의식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전의식 조직에서 의식으로 이르는 통로를 따라 진행된다. 반면에 멜랑꼴리에서는 이 통로가 막히면서 리비도 갈등이 무의식 조직에서만 일어나게 된다.28) 결국, 애도란 의식의 장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멜랑꼴리는 의식화에 실패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는데 라캉은 이를 ‘애도 작업’(work of mourning)29)의 유무로 설명한다.

상실을 경험한 주체가 그것에 대한 애도의 작업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면서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만들면 애도의 상태로 들어간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애도할 수 없게 되면 주체는 멜랑꼴리에 빠진다. 애도는 욕망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상태이다. 애도과정에서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인 ‘오브제 a’가 욕망이 일상적으로 향하는 ‘경험적 대상 i(a)’에 기입되는 과정을 거쳐 최초 상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환유적 대상을 찾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애도는 상실을 내재화함으로써 욕망을 발생시키는 ‘오브제 a’가 욕망의 구조 내에 자리를 잡도록 하는 작업이고, 이를 통해 대상에 대한 욕망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결국, 애도가 없으면 욕망이 불가능해진다. 욕망이란 결여에 대한 관계이고, 애도란 일상에서 그 결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30) 애도란 한 마디로 잃어버린 대상이나 사람에 대한 표상을 기호화하면서 그 표상에 대한 리비도 에너지를 점진적으로 철회하는 작업이다. 해원을 통해 원을 풀어내듯 애도를 통해 대상을 확실하게 잃어버린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욕망이 가능하며, 주체가 상실 속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 애도의 작업은 상실을 상징하는 ‘오브제 a’와 주체가 대상적 관계를 맺는 작업으로 애도를 통해 환유적인 대체가 가능해진다. 최초 상실이 정착되면 잃어버린 대상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상을 찾는 욕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애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애도가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 애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의 애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회적 애도란 개인적 애도의 가능조건이라 할 수 있다. 라캉이 <햄릿>에 대한 해설에서 이 부분을 암시했다.31) 라캉은 애도작업이 여러 의식을 통해 실현되지만, 그 본질은 그것이 로고스의 단계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일종의 상징계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애도의 작업은 모든 기표적 요소의 불충분함 때문에 무질서가 발생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의 만족처럼 제시되는 데 이것은 존재 속에 생겨난 구멍을 마주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만족은 모든 기표체계를 최소한의 애도 주변에서 작동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32) 애도란 결국 상징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모든 기표의 체계를 결여의 구멍 주위에 배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상실을 기호화하는 상징화 작업으로 대타자(Autre)33)의 개입을 전제하기에 사회적 차원을 이미 전제한다. 우리는 사회적 애도의 기능에 더 중요성을 부여해야 하는데 그것이 주체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인 상징계를 복원해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적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대상의 상실을 주체가 수용하면서 상실을 주체의 욕망의 구조 속에 기입하는 작업이다. 사회적 애도는 상실이 대상관계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결여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사회적 애도가 있어야 개인적 애도가 가능하다는 것은 음양합덕 신인조화가 해원상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대순사상의 원리와 통할 수 있다. 대순사상에서는 해원을 천지인 삼계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면서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우는 거시적 맥락34)에서 이해한다. 대순사상에서는 한편으로 해원에서 척을 맺는 것도 나요 푸는 것도 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개인적 실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실천은 천지공사에 의해 그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천지공사에 의해 새롭게 열린 후천에서는 각자가 서로에게 해원하면서 상생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35) 정신분석이 말하는 사회적 애도와 개인적 애도의 관계도 비슷하다. 사회적 애도가 개인적 애도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개인적 애도를 통해 사회적 애도의 의미도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이것은 욕망이 사회적 차원과 상생의 조건에서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상생과 상호 주체성의 관계를 살펴보자.

Ⅳ. 상생과 상호주체성

대순사상의 종지에서 보듯 해원은 상생과 불가분의 관계다. 또 천지공사를 통해 해원상생이 가능한 우주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개인적인 해원도 가능함을 대순사상은 강조한다. 해원상생은 먼저 상제에 의한 천지공사를 통해 시작되지만36) 다음으로는 인간 서로가 척을 풀면서 상생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해원(解冤)은 척(慼)을 푸는 일이며 척을 맺는 것도 나요 푸는 것도 나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먼저 풂으로써 상대는 스스로 풀리게 되니, 양편이 척이 풀려 해원이 되고 해원이 되어야 상생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37)

모두의 노력으로 우주적인 천ㆍ지ㆍ인의 상생과 조화, 천인의 조화와 신명이 가득한 세상, 인간 상호 간 상생이 실현되어야 후천개벽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개인적 노력으로만 해원상생을 실현할 수는 없고 우주적인 조화와 사회적인 실천이 뒷받침되어 한다. 이런 입장은 욕망을 상호주체성의 구조, 즉 주체와 주체의 관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정신분석 입장과 통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상호주체적 구조가 욕망을 가능하게 만들며 욕망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대순사상이 말하는 욕(冤)도 우주와 사회의 맥락에서 강조되기 때문에 상생을 필요로 한다. 해원상생을 통해 실현되는 욕망은 적극적 의미, 즉 긍정적 의미의 원(願)으로서 원(冤)이다. 선천의 포원은 그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할 대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후천을 열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후천이란 인간의 욕망이 상극과 원한에서 벗어나 서로 상생하는 이상적 상태이기도 하다. 해원 이념은 상생을 통해 본래적 가치를 온전하게 실현할 수 있으며, 상생은 해원을 과정으로 하여 시작되고 창조된다. 대순사상은 후천사상, 개벽론, 신인조화 등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다 충족하면서도 상생 역시 가능한 세상이 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후천에서는 개인의 욕망이 상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생으로 귀결되면서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은 해원상생의 최종 지향점이 개인의 욕망 해소가 아니라 도통진경의 이상향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원한의 매듭을 푸는 것도 결국 상생의 도를 세우기 위함이다.38) 이것은 기독교의 천국이나 불교의 극락이 개인적 관점에서 이생을 초월하는 해탈 이후 세계나 내세를 전제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집단적으로 공존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인간적인 세계관을 전제한다. 상생이 지향하는 바가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우주 평화와 전 지구적 인류의 구원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대순사상은 보편성을 향한 실천적 이념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39) 그러므로 해원상생 이념을 더 발전시키고 응용해 사회적 실천윤리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해원상생(解冤相生)과 보은상생(報恩相生)의 원리를 정신분석이나 공동체주의 같은 다른 사상에 접목시키면서 그 이론적 함의를 풍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대순사상의 해원상생 이론은 욕망을 상호 주체적 구조에서 바라보는 정신분석 입장과 통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언어 때문에 생겨나는 데 언어는 구조상 화자와 청자라는 주체 상호적 관계(inter-subjectivité)를 전제한다.40) 주체는 언어의 효과로서 구성되며, 주체의 삶이 펼쳐지는 상징계(le symbolique)는 복수의 주체들과 이들을 규정하는 대타자(Autre)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주체가 타자(A)와 관계를 맺을 때 상상계의 관계인 a'와 a가 개입하면서 둘의 관계가 왜곡된다. 더구나 타자적 대상인 자아a가 주체를 대신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일치와 갈등은 더 심해진다. 자아는 타자다. 주체성의 소외 본성과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라캉이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에서 소개한 L도식41)이다.

L도식은 주체의 내적 구조이자, 주체들이 맺는 상호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식이다. 내적 구조라는 말은 주체성이 주체 기표S와 자아a, 타자a'와 그것의 담지자 A의 네 항목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42) 타자적인 것(A와 a')이 주체의 구조를 이룬다는 것은 이미 상호주체성의 구조를 암시한다. 다음으로 L도식은 주체들의 관계가 상징계와 상상계의 상호작용에 의해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긋나는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호주체성의 구조에서 주체(S)와 타자(A)의 직접적 만남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늘 자아a와 상상적 타자a'의 관계에 의해 왜곡된다. 이것은 주체가 타자의 욕망을 매개로 삼을 때 늘 자신의 욕망에서 길을 잃고, 그 의미가 제대로 알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jdaos-28-0-73-g1
그림 1. L도식
Download Original Figure

이런 상호주체성이 인간 삶의 조건이다. 인간의 욕망은 상호 주체적 관계 속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으며 무의식도 타자의 담론이다. L 도식을 연극적 상황처럼 풀어서 보여주는 글이 『에크리』에 수록된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이다. 이 세미나에서 중요한 것은 각 인물들의 역할과 배치하고 관계 맺게 하는 것이 편지(Lettre43))라는 것이다. 라캉은 에드거 알랜 포우의 단편을 문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주인공은 편지이다. 그리고 편지를 중심으로 세 가지 시선 혹은 세 주체의 위치가 배치되어 반복된다. 극에서 편지의 내용, 즉 기의는 전혀 알려지지 않으며, 중요하지도 않다. 오히려 순수 기표를 상징하는 편지가 순환할 때마다 인물들 위치가 바뀌고 갈등이 새롭게 전개된다. 이것은 주체에 대한 상징계의 절대적 지배력을 보여주는 은유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편지와 주체의 지배적 관계가 아니라 편지(시니피앙, 언어)를 매개로 상호 주체적 구조에서 주체들의 욕망이 전개되는 자율적 메커니즘이다. 인물이 아니라 편지에 의해 규정되고 타자를 향하는 세 시선44)의 순환이 극의 긴장감을 주는 요인이다.

결국, 편지의 내용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에 대한 ‘인정’을 매개로 진행된다. 주체의 욕망은 타자에 의해서 인정될 때만 그 의미가 있다. 그러기에 욕망은 ‘인정의 욕망’과 ‘욕망의 인정’ 사이에서 복잡하게 반복된다. 욕망은 늘 인정의 욕망(le désir de la reconnaissance)이자 욕망의 인정(la reconnaissance du désir)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전개되는데 이것이 상호주체성의 진정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인정의 욕망이란 타자에게 욕망의 의미를 인정받아야 그것이 성립하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반면 욕망의 인정은 주체가 여러 증상과 무의식적 형성물을 통해 자신을 이해시키고 인정받으려는 태도를 말한다.45) 욕망은 인정의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된다.46) 인간은 타자를 통해 욕망의 의미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인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주체가 갖는 욕망의 인정과 인정의 욕망의 상호 작용은 본질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다.

욕망의 인정과 인정의 욕망이 변증법적으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바른 관계가 중요하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에 일방적으로 휘둘려서도 안 되지만 또 욕망의 가능 조건인 타자의 욕망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는 라캉의 언명은 인정의 욕망과 욕망의 인정의 변증법의 관계를 요약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타자의 욕망에 의존하면서도 주체의 욕망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욕망을 회복하는 것은 욕망이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대상들이 아니라 그 너머의 내 존재에 대한 요구47)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상실을 정착시키고 그것을 구현하는 상징적 대상인 ‘오브제 a’를 자리 잡게 만드는 애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애도란 결국 대상이 대신할 수 없고 결여의 본성을 지닌 존재를 안착시키는 과정이다.

결국, 욕망을 발산해야 하지만 존재를 향한 대상에 집착하는 기만적 욕망이 아니라 순수 욕망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라캉이 욕망을 윤리적 차원에 연결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라캉은 개인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말 것을 정신분석 윤리로 제시한다.48) 이렇듯 욕망이 중요한 것이기에 먼저 개인의 욕망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인정받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다른 주체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적 차원에서 욕망을 함께 실현해야 한다. 주체들의 연대와 욕망을 함께 실현하려는 집단적 노력이 중요하다. 욕망의 의미가 존재에 대한 것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고 그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선의 정립이 필요하다. 마치 대순사상에서 음양합덕 신인조화 같은 천지공사가 해원상생과 도통진경으로 이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정신분석의 윤리를 정치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면에서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을 주장하기도 한다.49) 그러나 라캉은 직접적인 정치 투쟁을 암시하기 보다는 『세미나 VII.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이웃사랑’ 개념을 제시한다. 이웃사랑은 욕망을 서로 인정하고 상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이자 원리로 고민해볼 만한 대안이다. 라캉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타인을 향한 연민 같은 정념이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공리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상호주체성의 구조를 전제하면서 타자의 존재와 욕망을 무조건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욕망 자체가 자기 존재에 대한 정념이기 때문에 자칫 욕망의 추구가 인간 상호 간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라캉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윤리적 명령의 차원에서 타자를 독립된 주체로 간주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통해 인간 뿐 아니라 천지만물의 모든 존재와 화합하고 상생할 것을 주장하는 대순사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50)

우리는 타자 그 자체를 사랑한다.…우리는 타자를 단지 우리를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서 취급한다.51)

이웃사랑은 공동체적 관계가 주는 이득이나 선 때문이 아니요, 그것이 상호 주체적 구조의 본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천적 유의미성을 갖는다. 상호주체성의 구조는 자칫 주체와 주체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 자아의 상상적 축에 의한 상상적 관계로 변질될 수 있기에 더 윤리적 요구에 철저해야 한다. 이웃사랑은 칸트가 윤리의 조건으로 말하는 무조건적 성격을 지닌다고 라캉은 말한다. 즉 이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이웃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52) 이것은 실상 실천적 측면에서 어려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주체의 보존이 불가능하다. 타자는 내 욕망을 위협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이 해원상생의 자연스러운 실현을 말한다면 정신분석은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공존을 위한 욕망의 윤리와 이웃사랑의 강제적 필요성을 말한다. 이것이 라캉이 정신분석의 윤리에 관해 진행한 『세미나 VII,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윤리의 사회적 차원으로 암시한 이웃사랑이다. 그리고 라캉은 『세미나 VIII, 전이』에서도 ‘사랑’ 개념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면서 다른 주체를 인정하고 공생할 것을 주장한다.53) 해원이 상생을 그 조건이자 가능성으로 필요하듯 라캉에 따르면 욕망도 타자와의 바른 관계를 전제54)할 수밖에 없다. 욕망 자체가 상호주체적 구조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Ⅴ. 결론에 대신하여: 모두의 욕망을 위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대순사상과 정신분석은 교리와 이론의 전제들이나 인간관, 욕망을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최종 지향점이나 목표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열린 시각으로 상보성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해원상생과 애도, 그리고 상생의 후천세상과 이웃사랑의 윤리를 통해 거칠게나마 두 사상의 공통성과 대화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대순사상과 정신분석은 각각 상극과 병리적 상태에 좌초해 있는 욕망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발산하게 해주고 공생을 모색하는 것을 지향한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는 내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주체의 욕망을 대상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바른 정념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인정의 욕망과 욕망의 인정의 변증법을 잘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정의 욕망과 욕망의 인정이 갈등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이웃사랑 같은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모두를 위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서다. 더 나아가 여기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선언적 의미의 이웃사랑의 선언을 넘어 모두를 위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 모순적인 것을 바로 잡는 정치적 투쟁을 할 필요성도 있다.

대순사상에서도 궁극적으로 평화와 상생을 위해 인간이 함께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전경』에는 “우리의 일은 남을 잘되게 하는 공부이니라.”55)는 말이 나오며 『대순지침』에서도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56)는 구체적 실천 강령이 나온다. 이 모두는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신명과 인간, 나아가 전 우주가 평화와 복록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대순사상이 말하는 후천세상도 결국은 모두가 자유롭게 욕망을 실현하며 소수자나 약자도 행복한 세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전경』에는 이런 비전에 대해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후천에서는 약한 자가 도움을 얻으며 병든 자가 일어나며 천한 자가 높아지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을 것이요 강하고 부하고 귀하고 지혜로운 자는 다 스스로 깎일지라’고 이르셨도다.”57)고 소개한다.

욕망은 개인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순사상이 말하는 해원상생도 결국 개인이 욕망을 실현하고 사회와 우주의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그런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실천의 이상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소외가 극심해지는 오늘날 이렇듯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조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실천 윤리의 정립이 필요하다. 본 연구의 의의는 이런 노력을 위해 정신분석의 윤리와 대순사상이 상당부분 공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접점을 찾은 데 있다. 하지만 구체적 방안이나 실천 가능성은 각각 내부에서 좀 더 치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욕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타자와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공존해야 한다. 욕망은 스피노자가 지적했듯 인간의 본질이고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Footnotes

1. 프로이트는 “꿈은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며, 정확히 말해 소원성취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3, p.163)라고 말했지만 ‘욕망’개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주체 개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라캉은 주체와 욕망 개념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새롭게 해석한다. 비록 라캉이 철학과 언어학을 차용해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것이 프로이트의 본래 문제의식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라캉 덕분에 정신분석 이론은 철학적이고 인간학적인 의미가 한결 풍성해지면서 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본 연구논문의 정신분석 관점은 주로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2. 『전경』, 교법 3장 25절.

3. ‘오브제 a’는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이자 대상을 지칭하며 환상 속에서 욕망을 지속시키는 동력이다. ‘오브제 a’는 상실을 지시하는 기호로 주체는 그것과 관계를 가지면서 일상적 대상에 욕망을 적용할 수 있다. 필자는 애도 작업이 ‘오브제 a’를 대상에 기입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

4. 대순사상이 말하는 원의 의미는 복합적이다. 김용환, 「천지공사의 공공윤리 실천전망에 관한 연구」, 『제7회 대순사상학술원 학술세미나 자료집』 (포천: 대순사상학술원, 2017) 참조.

5. 『전경』, 교운 2장 32절.

6.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서울: 문사철, 2013), p.65.

7. 천지공사에 대한 다음 설명을 보라. “‘천지공사’는 ‘대순진리회’에서 시공간적으로 전후를 구분하는 기점이다. 시간적으로는 선천시대와 후천시대를 구분하는 개벽의 기점이며, 공간적으로는 천, 지, 인의 삼계가 완전히 새로운 원리와 구성을 이루는 기점이다.” 류성민, 「‘천지공사’의 종교 윤리적 의미에 대한 연구」, 『대순사상논총』 23 (2014), p.7.

8. 『전경』, 공사 1장 3절.

9. 『설문해자(說文解字)』 (주잔옌, 「두 가지 해원사상 비교」, 『대순사상논총』 24-2, 2015, p.2에서 재인용).

10. 『전경』, 공사 3장 4절.

11. 같은 책, 교법 2장 44절.

12.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p.149.

13. 같은 책, p.143 참조. 이경원은 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원이념에서 바라본 인간은 ‘원(冤)’의 담지자로서 스스로 욕망을 지닌 존재다. ‘원(冤)’은 욕망을 지닌 인간의 현실적 모습을 순수하게 그리고 있다.” 이경원, 『대순종학 원론』, (서울: 문사철, 2013), p.85

14. 『전경』, 교법 3장 24절.

15. J. Lacan, Le Séminaire II: Le moi dans la théorie de Freud et dans la technique de la psychanalyse, (Paris: Seuil, 1978). p.261. 이하 ‘J. Lacan, S II, p.’로 표기(라캉의 다른 세미나도 처음 표기는 서지전체를, 다음에는 약자로 표기).

16. J. Lacan, Le Séminaire X, L'angoisse (Paris: Éditions du Seuil, 2004), p.77.

17. J. Lacan, Écrits (Paris, Seuil, 1966), p.627 참조. 이하 ‘J. Lacan, Écrits, p.’로 표기.

18.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차선근, 「대순진리회 고통론의 유형화와 특징」, 『대순사상논총』 25 (2015), pp.1-43.

19. J. Lacan, Le Séminaire I, Les écrits techniques de Freud, (Paris, Éditions du Seuil, 1975), p.247.

20. J. Lacan, Écrits, p.690.

21. 기존에 나온 프로이트 전집에는 논문 제목이 「슬픔과 우울증」으로 나온다. 슬픔이라는 말은 애도와 달리 trauer가 담고 있는 본래 이중적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한다. trauer는 슬퍼하고 있는 상태이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프로이트가 말한 멜랑꼴리는 일종의 정신병 상태로 우리가 흔히 보는 우울증과 다르다. 정신의학자 에밀 크래펠렝은 멜랑꼴리를 정신병의 하나인 조광증으로 분류했다. 그래서 프로이트 전집과 달리 「애도와 멜랑꼴리」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참조. ‘멜랑꼴리’(mélancolie), Elisabeth Roudinesco et Michel Plon, Dictionnaire de la psychanalsyse,(Paris: Fayard, 1997), p.676.

22.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멜랑꼴리」,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ㆍ박찬부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3), pp.244-247 참조.

23. 프로이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가…유아적 소원을 거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낸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더욱 위장된 상태로 근친상간 콤플렉스(incest-complex)라는 동일한 근원을 공유한다.” Five Lectures on Psychoanalysis in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 XI, (London: The Hogarth Press and the Institute of Psycho-Analysis, 1957), p.47. 또 프로이트는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익스피어가 <햄릿>을 쓰게 된 이유도 그가 유사한 사건을 경험하거나 최소한 그에게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 1897년 10월 15일」, 『정신분석의 탄생』, (서울: 열린책들, 2003), pp.167-168. 결국 햄릿은 세익스피어의 욕망을 대변해주는 대리인이다.

24. 어니스트 존스, 『햄릿과 오이디푸스』가 <햄릿>에 대한 해설서로 유명하다.

25. <햄릿>에 대한 라캉의 분석은 1958~59년 진행한 세미나 6권에 나온다. 이 책에서 특히 「햄릿에 관한 7개의 강의」를 참조하라. J. Lacan, Le Séminaire VI, Le désir et son interprétation, (Paris: Éditions de la Martinière et Le Champ Freudien Éditeur, 2013), pp.79-419 참조.

26. J. Lacan, S VI, p.384 참조.

27. 「햄릿에 관한 7개의 강의」 의 첫 번째 강의제목. J. Lacan, S VI, p.279.

28.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멜랑꼴리」,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ㆍ박찬부 옮김, p.263 참조.

29. 데리언 리더는 애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내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하면서 애도란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데리언 리더, 『우리는 왜 우울할까』 (서울: 동녘사이언스, 2011), p.33 참조.

30. J. Lacan, S VI, p.441 참조. 애도와 욕망의 관계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김석, 「애도의 부재와 욕망의 좌절」, 『민주주의와 인권』 12-1 (2012) 참조.

31. 물론 라캉은 명시적으로 개인적 애도와 사회적 애도를 구분하지 않았고 사회적 애도가 집단 차원에서 수행되는 애도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라캉은 <햄릿>에서 장례의식이나 죽은 자에 대한 기념 등이 아주 중요하며, 유령은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로 설명한다. J. Lacan, S VI, p.399 참조.

32. J. Lacan S VI, pp.398-399.

33. 라캉은 대타자(Autre)와 소타자(autre)를 구분한다. 소타자는 우리와 마주하면서 그 특징을 상상할 수 있는 타자를 말한다면 대타자는 추상적인 언어의 장을 지칭한다. 대타자는 비인격적인 것으로 근본적인 타자성을 뜻한다. 대타자에 대해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대타자를 언어의 장소라고 정의했다. 대타자는 주체가 말을 한다는 유일한 사실 때문에 구성되고, 가시화 된다.” J. Lacan, Le Séminaire V, Les formations de l’inconscient, (Paris: Éditions du Seuil, 2013), 1998, p.475.

34. 『전경』, 공사, 1장 3절.

35.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베풀어 해원상생의 토대가 잡혀 있으나 사람들이 저마다 해원해야만 완전한 해원상생이 가능하다.” 이항녕, 「해원상생사상의 현대적 의의」, 『대순사상논총』 4 (1998), pp.12-13.

36. “대순사상에서 해원을 실시하는 주체는 주로 진인진신(眞人眞神)인 상제이다. 상제님은 삼계공사를 행하셨는데, 그 목적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한 데 있다.” 주잔옌, 「두 가지 해원사상 비교」, 『대순사상논총』 24-2 (2015), pp.28-29.

37. 『대순지침』 (여주: 대순진리회출판부, 2010), p.27.

38. “‘해원’이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상생(相生)이 지배하는 후천(後天)이다.…모든 원을 상생의 도에 맞게끔 풀어냄으로써 영원한 평화의 세계인 후천선경을 여는 것이다.”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서울: 문사철, 2013), pp.152-153.

39. 류병무, 「대순진리회 목적(目的)에 관한 연구」, 『대순회보』 188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6), p.119, “상생법리는 남을 잘되게 하는 것이 곧 나도 잘되는 길임을 자각케 하는 협동의 원리이며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평화(平和)의 윤리이다.”

40. 욕망이 주체 상호적 구조를 전제하며, 언어 때문에 생긴다는 것은 인간만이 욕망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라캉이 욕망이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입장을 계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물에게는 욕구(needs)는 있지만 욕망은 불가능하다.

41. J. Lacan, Écrits, p.53.

42. J. Lacan, Écrits, p.549 참조.

43. Lettre는 편지, 문자, 문학, 문인 등 여러 뜻이 있다.

44. 이 세 시선은 첫 번째 장면에서는 편지를 전혀 보지 못하는 왕, 그리고 왕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감춘 것이 잘 감춰져 있다고 착각하는 왕비, 마지막으로 이 두 시선으로부터 감춰져 있는 것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에게는 발견된다는 것을 아는 대신의 시선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그 역할을 경찰, 대신, 뒤팽이 차례로 대신한다. 이것은 기표 질서가 지배하는 상징계의 은유적 장면이다. J. Lacan, Écrits, p.15 참조.

45.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ㆍ에크리 독해 I』, 홍준기ㆍ강응섭 옮김 (서울: 아난케, 2009), p.275 참조.

46. “인간의 욕망 자체는 그의 욕망을 인정받게 하려는 욕망이라는 그런 중재의 조건 하에서 구성된다.” J. Lacan, Écrits, p.181.

47. “욕망은 존재 결여의 관계이다.” J. Lacan, S II, p.261.

48. “정신분석의 윤리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 J. Lacan, Le Séminaire VII, L'éthique de la psychanalyse (Paris: Éditions du Seuil, 1986), p.370, “단 하나의 비판 그것은 욕망을 양보하는 것.” 같은 책, p.370.

49. 인디고연구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서울: 궁리, 2012), p.195.

50. 이웃사랑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석, 「사랑을 통한 갈등해소와 보편성 실현의 가능성 탐구」, 『시대와 철학』 23-3, (2013) 참조하라.

51. J. Lacan, Le Séminaire VIII, Le transfert (Paris: Éditions du Seuil, 1991), p.174.

52. J. Lacan, S VII, pp.227-229 참조.

53. “주체적인 것, 그것은 또 다른 주체에 대해 유효한 것으로서 하나의 주체 속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통이라는 생각자체가 가능한 가장 근본적인 이 지점으로 가는 것이다.” J. Lacan, S VIII, p.281.

54. ‘욕망의 인정’과 ‘인정의 욕망’의 변증법이 그것이다.

55. 『전경』, 교법 1장 2절.

56. 『대순지침』, p.20.

57. 『전경』, 교법 2장 11절.

참고문헌(References)

1.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2.

『대순지침』,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2.

3.

김 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서울: 살림, 2007.

4.

김 석, 「애도의 부재와 욕망의 좌절」, 『민주주의와 인권』 12-1, 2012.

5.

김 석, 「사랑을 통한 갈등해소와 보편성 실현의 가능성 탐구」, 『시대와 철학』 23-3, 2013.

6.

류병무, 「대순진리회 목적에 관한 연구」, 『대순회보』 188,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6.

7.

류성민, 「'천지공사'의 종교 윤리적 의미에 대한 연구」, 『대순사상논총』 23, 2014.

8.

데리언 리더, 『우리는 왜 우울할까』, 우달임 옮김, 서울: 동녘사이언스, 2011.

9.

알랭바디우, 『사도바울』, 현성환 옮김, 서울: 새물결, 2008.

10.

야니 스타브라카키스, 『라캉과 정치』, 이병주 옮김, 서울: 은행나무, 2006.

11.

어니스트 존스, 『햄릿과 오이디푸스』, 최정훈 옮김, 서울: 황금사자, 2008.

12.

이경원, 『대순종학 원론』, 서울: 문사철, 2013.

13.

이경원, 『대순진리회 교리론』, 서울: 문사철, 2013.

14.

이항녕, 「해원상생사상의 현대적 의의」, 『대순사상논총』 4, 1998.

15.

인디고연구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서울: 궁리, 2012.

16.

주잔옌, 「두 가지 해원사상 비교」, 『대순사상논총』 24-2, 2015.

17.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ㆍ에크리 독해 I』, 홍준기ㆍ강응섭 옮김, 서울: 아난케, 2009.

18.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멜랑꼴리」,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ㆍ박찬부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3.

19.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3.

20.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탄생』, 임진수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06.

21.

차선근, 「대순진리회 고통론의 유형화와 특징」, 『대순사상논총』 25, 2015.

22.

Elisabeth Roudinesco et Michel Plon, Dictionnaire de la psychanalsyse, Paris: Fayard, 2000.

23.

Jacques Lacan, Écrits, Paris, Seuil, 1966.

24.

Jacques Lacan, Le Séminaire II: Le moi dans la théorie de Freud et dans la technique de la psychanalyse, Paris, Éditions du Seuil, 1978.

25.

Jacques Lacan, Le Séminaire V, Les formations de l'inconscient, Paris: Éditions du Seuil, 2013.

26.

Jacques Lacan, Le Séminaire VI, Le désir et son interprétation, Paris: Éditions de la Martinière et Le Champ Freudien Éditeur, 2013.

27.

Jacques Lacan, Le Séminaire VII, L'éthique de la psychanalyse, Paris: Éditions du Seuil, 1986.

28.

Jacques Lacan, Le Séminaire VIII, Le transfert, Paris: Éditions du Seuil, 1991.

29.

Jacques Lacan, Le Séminaire X, L'angoisse, Paris: Éditions du Seuil, 2004.

30.

J. Laplanche et J. B. Pontalis,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PUF: Paris, 1992.

31.

Sigmund. Freud, "Trauer und Melancholie"(1917), Gesammelte Werke 1913-1917, Fischer Verlag: Frankfurt am Main, 1946.

32.

Sigmund. Freud, Five Lectures on Psychoanalysis in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 XI, London: The Hogarth Press and the Institute of Psycho- Analysis,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