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기획논문

동아시아 신화와 문학의 증산 신학적 전개: 상상력의 법술(法術)과 전유(專有)의 신학*

정재서1,**
Jae-seo Jung1,**
1Professor Emeritus, Ewha Woman’s University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E-mail: jsjung508@hanmail.net

© Copyright 2020,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May 31, 2020 ; Revised: Jun 30, 2020 ; Accepted: Aug 01, 2020

Published Online: Aug 31, 2020

국문요약

본고에서는 『전경(典經)』의 강증산(姜甑山) 언설에 수용된 신화와 문학 자료를 대상으로 그것들이 『전경』 텍스트의 고유한 종교 신학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의미화 되었는지, 그 전유(專有)의 상황과 원리를 고찰해 보았다. 먼저 『전경』에서의 신화 수용을 강태공(姜太公), 사명(司命), 치우(蚩尤), 우사(雨師), 조왕(竈王), 망량(魍魎), 개고기, 동도지(東桃枝) 등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들 중의 상당수가 동이계(東夷系) 신화와 상관되며 민간에 깊게 뿌리를 둔 습속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강증산의 단학파(丹學派)적 성향, 수정주의적 역사의식, 민중의식 등과 상관된다.

다음으로 『전경』에서의 문학 수용을 시와 산문, 소설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시의 경우 강증산의 시재(詩才)와 취향에 바탕하여 당시(唐詩), 창작시 등이 수용되었고 산문, 소설의 경우 『서경(書經)』, 『사기(史記)』,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서주연의(西周演義)』 등이 수용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예언, 치병, 수련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되었는데 고전 명구(名句)나 소설이 지닌 대중적 감화력이 이 과정에서 종교적으로 전유되어 힘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경』에서 신화, 문학적 상상력이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 증산 신학으로 전화되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문자와 이미지의 주술적 역량, 시가 문학의 감성인식 기능과 표현 특성, 미메시스의 재현 혹은 창조 능력 등이 신화, 문학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공사 거행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3가지 설명 기제(機制)는 『전경』 언술의 의미화 과정을 파악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종합하면 강증산의 삼교합일적, 회통적 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된 신화, 문학적 상상력은 지배문화의 정통론적인 관념을 돌파하여 증산 신학의 민중성, 보편성을 구현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아울러 그것은 강증산의 구세 이념을 광포(廣布)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종교 법술로 변용되어 공사 수행의 중요한 방편으로 기능하였다.

Abstract

In this paper, we investigated the principle of appropriation by which mythology and literature were accepted in the unique religious context of The Canonical Scripture (Jeongyeong 典經).

First, we knew that almost all of the gods that appeared in the discourse of Kang Jeungsan (姜甑山) were related to Eastern Yi (東夷) mythology and deeply rooted in folklore. This is because the cultural tendency and historic consciousness of Kang Jeungsan was influenced by Danhakpa (the Danhak School 丹學派).

Secondly, when we investigated the acceptance of literature into The Canonical Scripture, we discovered that Tang Poetry (唐詩),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Sanguoyanyi 三國演義), and Journey to the West (Xiyouji 西遊記) were widely accepted in Kang Jeungsan’s discourse. These works were used in diverse ways such as predictions, healing, and meditation. We knew that popular classical work like these were religiously appropriated in the context of The Canonical Scripture.

Lastly, we investigated the mechanisms by which mythical and literary imagination was transformed into the Jeungsanist religious movements. Those mechanisms included the magical power of letter and images, sense-cognition of poetry, and the representational ability of mimesis.

In conclusion, mythical and literary imagination helped Jeungsanist religious movements gain popularity and spread Kang Jeungsan’s soteriology. This is especially true of how it transformed into unique religious techniques which functioned as key elements of the Reordering Works (公事).

Keywords: 신화; 문학; 법술(法術); 전유(專有); 감성인식; 미메시스
Keywords: Myth; Literature; Appropriation; Sense-cognition; Mimesis

Ⅰ. 서언

강증산은 『전경』에 담긴 언설을 통해 구세(救世)의 비전(vision)을 제시, 선포하였다. 그런데 역사상 동서의 성현, 종교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어록체(語錄體)의 형식을 통해 그들의 주의, 주장을 펼쳐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성경』과 『불경』은 물론 플라톤의 『대화편』, 공자의 『논어』, 원시도교 경전인 『태평경(太平經)』에서 주희(朱熹)의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예거(例擧)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에는 대부분의 경우 본인 사후 문도들에 의해 생전의 말씀이 편집되면서 자연스럽게 강화(講話)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긴 하다. 그러나 진리를 함장(含藏)한 성현의 언행을 체계적이고 사변적인 담론서로 요약, 정리하지 않고 방만하다 할 수 있는 일상의 대화록으로 완성했다는 사실에는 앞서의 현실적인 사정 말고도 좀더 탐문해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로서 우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역시 실제적인 견지에서 쉽고 통속적인 구어(口語)가 보다 많은 대중을 감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선교 혹은 교화의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궁구(窮究)해보아야 한다.

음성언어의 중요한 특징은 현전성(現前性, presence)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성현이 남긴 글을 통해 얻는 지식을 ‘찌꺼기[糟粕]’로 한탄했거니와 그것은 현전성을 소실한 문서의 의미 전달 한계를 지적한 것이리라. 어록체는 비록 문자언어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성언어의 특성을 가장 잘 보존하여 읽거나 듣는 이로 하여금 성현의 임재(臨在)를 실감하게 하고 말씀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하는 데에 유리하다. 어록체는 오스틴(John Austin)의 언어 수행론 곧 “Saying is doing”1)이 잘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어록체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대중적 설득과 전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 언어가 리듬과 이야기성 등 문학적 요소를 다분히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어록체는 현전성으로 인해 그것이 담지한 의미를 사변적,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 보다 감성인식(感性認識)에 호소하여 체득하는 것이 유리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경』에 담긴 강증산의 언설을 신화, 시, 산문, 소설 등의 측면에서 탐구하여 이들이 강증산에 의해 어떻게 수용되고 다시 예의 신화, 문학적 상상력이 궁극적으로 증산 신학에 의해 어떻게 전유되었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기존에 집중된, 『전경』에 대한 철학, 종교학적 연구에서 결락(缺落)된 의미를 밝히는 새로운 시도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언급이 철학, 종교 방면 연구를 간과한다든가 과거에 이러한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본고의 논의 또한 기왕의 연구 업적을 딛고 가능한 것이며 필자의 취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철학, 종교 방면에서도 신화, 문학적 관점을 원용한 좋은 선례들이 있다.2) 다만 본고에서는 철학, 종교 연구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신화와 문학의 본질과 작동 방식 특히 상상력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체현하여 증산 신학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강증산의 언설을 신화, 문학 일반론으로 환원하여 그를 탈신성화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화, 문학적 상상력이 『전경』 텍스트의 고유한 종교 신학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의미화 되었는지 그 주체적 전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구명해보려는 작업임을 부언(附言)해둔다.

Ⅱ. 『전경』에서의 신화 수용

신화는 종교와 근원적인 상관성을 지니며 종교적 담화에서는 자주 신화적 언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신화적 존재 및 현상을 빈번히 언급하여 해당 종교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우주론적,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전경』에는 강증산이 신화를 언급한 곳이 적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신농(神農), 요(堯), 순(舜), 단주(丹朱) 등 주요 신화적 존재들의 등장 의미를 증산 사상의 형성 배경, 해원(解怨) 개념의 성립 등과 관련하여 상론(詳論)한 바 있다.3) 본장에서는 이들에 이어 자주 『전경』에 등장하는 신, 영웅, 요괴 등을 분별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신과 영웅
1) 강태공(姜太公)

강증산은 신농의 후예인 강성(姜姓)이 성의 원시가 되며 개벽 시대에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소임을 맡게 되었다고4) 강조한 바 있고 신농, 강태공, 강이식(姜以式), 강감찬(姜邯贊) 등 강씨 성의 신과 인물들에 대해 주목하였다. 강태공에 대한 각별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엿보인다.

상제께서 교운을 펼치신 후 때때로 종도들에게 옛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그 사람들 중에는 강 태공(姜太公)ㆍ석가모니(釋迦牟尼)ㆍ관운장(關雲長)ㆍ이마두(利瑪竇)가 끼었도다.5)

석가모니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관운장은 당시 민간도교와 무속에서 숭배했던 큰 신이며 이마두 곧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동서 문화 교류의 주역인데 이들 모두 각각의 자질로 강증산에 의해 특별히 거론되었던 인물들이다. 강태공은 전술한 강씨 성의 인물 말고 어떤 의미에서 주목되었던 것일까? 강증산은 강태공에 대해 아래와 같은 논평을 가한다.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봄 어느 날 문 공신에게 「강 태공(姜太公)은 七十二둔을 하고 음양둔을 못하였으나 나는 음양둔까지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6)

상제께서 「강 태공(姜太公)이 十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千六百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 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함이니라. 나는 이제 七十二둔으로써 화둔을 트니 나는 곧 삼이화(三离火)니라」고 말씀하셨도다.7)

강태공은 주(周) 나라 문왕과 무왕을 보필하고 은(殷)의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큰 역할을 하여 후일 제(齊) 나라 임금에 봉해진 신화적 인물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나라 민간에서는 뛰어난 도술과 때를 낚는 낚시질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 “경신년경신월경신일강태공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8) 등 귀신을 쫓는 부적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강증산은 강태공 신화의 이러한 주요 화소(話素)를 활용하여 강태공의 빼어난 능력과 업적을 거론한 다음 자신이야말로 무비(無比)한 권능의 화신임과 후천 개벽의 주관자임을 비교 우위적으로 암시하였다.

2) 서신(西神) 사명(司命)

강증산은 자신의 신격을 서신 사명으로 여러 번 표현한 바 있다.

경석으로 하여금 양지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일순 호남 서신사명(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 姜一淳湖南西神司命)」이라 쓰게 하고 그것을 불사르게 하시니라. 이때에 신 원일이 상제께 「천하를 속히 평정하시기 바라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하셨도다.9)

상제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재제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 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 」라고 말씀하셨도다.10)

먼저 사명이라는 신화적 존재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본래 초(楚) 나라의 지역 신으로 사람의 목숨을 맡은 신인데 초사(楚辭)의 「구가(九歌)」에 대사명(大司命)과 소사명(少司命)의 두 신으로 등장한다. 대사명은 사람의 생사를, 소사명은 후손의 유무를 맡은 신으로 역할이 구분되나11) 후대에는 사명이 특정한 신이 아니라 목숨과 관련된 모든 신을 총칭하는 어휘로 정착된다. 가령 수명을 주관하는 칠성신(七星神), 죄업을 하늘에 보고하여 수명을 깎게 하는 조왕신(竈王神) 등도 사명신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강증산이 사용한 사명이란 말은 이와는 좀 다르게 목숨 혹은 운명을 맡아본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며 위의 예문에서는 명사로, 아래 예문에서는 동사로 쓰였는데 여기서 목숨 명(命) 자는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명까지 포괄한 넓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 위에 길게 주소를 쓴 것은 신이 좌정(坐定)한 공간을 명시한 것이고 ‘호남 서신’은 지역과 관련하여 이해하면 고부군이 호남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소박하게 호남 서쪽의 신을 지칭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 예문에서 가을 바람에 따른 만물의 성숙, 소멸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서신은 오행에서 금(金)으로 가을을 맡은 서쪽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관련된 전통적인 가을의 신으로는 욕수(蓐收)12)가 있다. 그러나 강증산이 계절신 중의 하나에 불과한 욕수로 자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증산의 언급에 기대건대 그는 가을을 선천 시대가 조락하고 후천 시대가 도래하는 중요한 전환기로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서신은 욕수와는 스케일이 다른, 세계의 전환기에 대운을 맡은 큰 신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13)

3) 치우(蚩尤)

『전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신 혹은 영웅적 존재는 아니지만 한국의 재야사학에서 중시하는 신화적 인물로 치우가 있다. 강증산은 단 한 차례 치우에 대해 논평한 적이 있다.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란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 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요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 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14)

치우는 신농의 후예 혹은 신하로서 동이계(東夷系) 종족의 군장이었다. 그는 신농이 황제(黃帝)에게 최고신의 자리를 빼앗기자 이를 설욕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탁록(涿鹿)에서 대결했으나 패사(敗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재야사학에서는 치우를 고조선의 단군에 상응하는 인물로 보고 결코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15)

강증산은 재야사학의 경우처럼 치우에 대해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는 않다. 황제와 치우 간의 전쟁에 대한 인식도 중국 문헌에 담긴 일반적인 서술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패배자인 치우를 모든 악의 근원이자 흉신(凶神)으로 규정했던 중국 측의 견해와는 다르게 중립적인 견지에서 그의 의미를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동이계 고서(古書) 『산해경(山海經)』에서 단주, 치우 등 패배자에 대해 동정 혹은 중립적 어조로 묘사했던 것과 근사하다. 물론 강증산은 그의 구세 공사가 단순한 치란과 흥망을 통섭하는 차원임을 설파하려는 의도에서 황제-치우 전쟁을 예화(例話)로 든 것이지만 그럼에도 최제우나 전봉준(全琫準)과 상응하는 위치에서 치우 행위의 가치를 평가한 것은 중국 측의 견해와 비교하면 가히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4) 우사(雨師)

호풍환우(呼風喚雨)는 과거의 종교 지도자가 지녔던 필수적인 능력 중의 하나로 강증산 역시 이러한 능력을 누차 발휘하는 경우를 『전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출현하는 신화적 존재가 우사이다.

상제께서 인사를 드리는 김 갑칠(金甲七)에게 농사 형편을 물으시니 그는 「가뭄이 심하여 아직까지 모를 심지 못하여 민심이 매우 소란스럽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네가 비를 빌러 왔도다. 우사(雨師)를 너에게 붙여 보내리니 곧 돌아가되 도중에서 비가 내려도 몸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시니라. 갑칠은 발병 때문에 과히 좋아하지 아니하니라. 상제께서 눈치를 차리시고 「사람을 구제함에 있어서 어찌 일각을 지체하리오」 하시고 가기를 독촉하시니라. 갑칠이 서둘러 돌아가는 길에 원평에 이르러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도다. 잠깐사이에 하천이 창일하여 나무다리가 떠내려가게 되니라. 행인들은 모두 단비라 일컬으면서 기뻐하는도다. 흡족한 비에 모두들 단숨에 모를 심었도다.16)

고대 농경사회에서 적시(適時)의 강우(降雨)는 무엇보다 중요하였으므로 주술사는 흔히 우사[rain maker]를 겸하였다. 동아시아의 기상신인 풍백(風伯), 우사, 운사(雲師)는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동이계 종족의 대표적 신들이다. 이중 풍백은 비렴(飛廉)이라고도 부르는데 ‘바람’의 고대 한국어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이 있을 정도이다.17) 『산해경』을 보면 우사는 풍백과 더불어 동이의 군장인 치우의 편을 들어 황제의 패권에 대항하기도 하였다.18)

강증산은 이렇듯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우사를 소환하여 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당하는 농민들을 위해 단비를 내려줌으로써 최고신으로서의 권능을 현시(顯示)한 것으로 보인다.

5) 조왕(竈王)

『전경』에는 전통 시기 민간에서 인기리에 숭배되었던 조왕 또는 조왕신이 등장한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상제께서 김 병욱의 집에 들르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도다. 병욱이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일렀으되 아내는 무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괴로워하면서 혼자 불평을 하던 차에 갑자기 와사증에 쓰러지는지라. 이 사정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 하시고 글을 써서 병욱에게 주시면서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게 하셨도다.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행하니 바로 와사증이 사라졌도다.19)

조왕은 조군(竈君), 부엌신, 부뚜막신이라고도 한다. 집안에 상주하는 가택신(家宅神)의 하나로 부엌의 아궁이 불과 주방 일을 관장하며 가족을 지켜주는 신으로 신앙되었다. 이 신은 또한 가족 개인마다 1년 동안 지은 죄를 연말에 천상에 올라가 보고하여 수명을 깎게 만드는 사명신의 하나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부엌 불을 다루는 직무상 여신이었으나 후일 남신으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을 비롯, 동아시아 각처에서 보편적으로 숭배되었던 신이었다. 조선 시대의 민간 숭배를 거쳐 근대 이후 농촌에서도 부뚜막에 조왕 단지를 모시는 습속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사찰의 공양간에 조왕단(竈王壇)의 형태로 신앙이 잔존해 있다.

강증산이 종도(從徒)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부가 무성의한 태도로 음식 준비를 했다가 조왕의 노여움을 사 와사증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일단 주부가 조왕신이 좌정한 부뚜막 앞에서 불평을 토로하는 등 불경한 행위로 인해 벌을 받았다는 의미로 들리지만 궁극적으로는 가택신인 조왕도 강증산의 존엄한 위격(位格)을 긍정하여 불손한 그녀에게 대신 벌을 내렸다는 취지로도 읽힌다. 이는 결국 민간신인 조왕을 통하여 모든 신을 지배하는 강증산의 지고신(至高神)적 위상을 확인한 것이라 하겠다.

2. 요괴, 기타
1) 망량(魍魎)

신화적 존재로는 신, 영웅, 서수(瑞獸) 등 이외에 요괴, 괴수(怪獸) 등과 같은 하위 초자연적 존재들도 있다. 『전경』에는 이와 관련하여 망량에 대한 언급이 몇 차례 보인다.

상제께서 개고기를 상등인의 고기로서 즐기셨도다. 종도가 그 연유를 묻기에 상제께서 「이 고기는 천지 망량(魍魎)이 즐기니 선천에서는 도가가 기(忌)하였으므로 망량이 응치 아니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20)

상제께서 가라사대 …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은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21)

망량은 동식물, 광물 등 자연물의 기운이 변화를 일으켜 사람 혹은 괴물과 같은 형체를 지닌 정괴(精怪)의 일종으로22) 속칭 도깨비를 말한다. 망량은 흔히 이매(魑魅)와 병칭되어 ‘이매망량’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매 역시 망량과 같은 부류의 요괴이다. 이들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다리가 하나 혹은 넷이라든가, 뿔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등 다양하여 한중일 삼국 간에도 차이가 있으나 사람을 잘 홀린다는 점에서는 특성이 일치한다.23) 이매망량은 황제-치우의 전쟁에서 치우를 도와 안개를 일으키는 등 활약을 했던 것으로 보아24) 동이계 종족과 상관된 신화적 존재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중국 신화의 주체적 입장에서 망량은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가령 황제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다 제거되었다든가, 우(禹) 임금의 청동 솥에 위험한 존재로 새겨져 접근이 배제되었다든가25) 하는 등의 조치가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 망량은 태생적으로 자연 생태적 경향을 보여주는 존재이며, 중원의 핵심 권력보다는 주변부 동이계 종족과 친연성을 지니는 존재이어서 인문화, 중심주의가 점증하는 중국적 현실에서 구축(驅逐)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강증산은 상등인이 먹는 개고기를 망량이 즐긴다고 하거나 자신에 대한 깊은 신심(信心)을 망량과의 사귐으로 비유하는 등 망량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우리 민간에서 망량 곧 도깨비와 관련된 민담, 습속이 풍부하고 중국에 비해 그 인식이 친화적이었던 실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궁극적으로는 강증산이 망량이라는 요괴 곧 신화적 하위 존재마저도 그의 해원 세계 속에 포괄하는 종교적 금도(襟度)를 보여준 것이라 할 것이다.

2) 개고기

망량에 덧붙여 논할 것은 강증산이 상등인의 고기로서 즐겼다는 개고기에 대한 문제이다. 개고기는 오늘날 혐오 식품으로까지 비하되었지만 은대(殷代)에는 사방의 풍신(風神)에게 제사드릴 때에 바쳐지는 신성한 제물이었다. 갑골(甲骨) 복사(卜辭)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바람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는 세 마리의 양과 세 마리의 개, 세 마리의 돼지를 바친다.(其祭風, 三羊三犬三豕.)26)

갑골 복사뿐만 아니라 동이 문화의 요소를 풍부히 지니고 있는 『산해경』에도 산신에게 제물로 개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남차삼경의 첫 머리 천우산에서 남우산까지는 모두 14산으로 그 거리는 6530리에 달한다.이곳의 신들은 모두 용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제사에는 한 마리의 흰 개를 희생하여 기원드리며 젯메쌀로는 찰벼를 쓴다.(凡南次三經之首, 自天虞之山以至南禺之山, 凡一十四山, 六天五百三十里. 其神皆龍身而人面. 其祀皆一白狗祈, 糈用稌.)27)

다시 말해 은 및 동이계 종족에게 개고기는 결코 금기 식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강증산은 전봉준과 최제우를 해원하기 위한 제사를 지낼 때 누런 개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삼는다.28) 천도교와 원불교 등 여타 신종교에서는 동물 희생 제의가 없다. 다만 무속에서는 동물을 희생하여 신을 즐겁게 하고 죄를 대속(代贖)하여 복을 내리게 하는 제의가 상존(尙存)해 있는 것으로 보아29) 강증산은 이러한 민간의 오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조선 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고기를 제물로 삼는 제법(祭法)은 희귀하므로 강증산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은 상고 시기 동이계 종족의 습속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 검토의 여지가 있다.

3) 동도지(東桃枝)

동아시아 신화에서 복숭아나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화에서 유래한 복숭아나무의 기능은 동아시아 각국의 민속, 도교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 『전경』을 보면 강증산의 법술 시행에 ‘동도지’ 곧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동원되고 있다.

이 공사를 끝내시고 상제께서 양지에 무수히 태극을 그리고 글자를 쓰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덕겸에게 동도지(東桃枝)를 꺾어오라 하시며 태극을 세되 열 번째마다 동도지를 물고 세도록 이르시니 마흔아홉 개가 되니라. 상제께서 「맞았다. 만일 잘못 세었으면 큰일이 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동도지를 들고 큰 소리를 지르신 뒤에 그 문축(文軸)을 약방에서 불사르시니라.30)

복숭아나무와 관련된 신화로 유명한 것은 불로장생을 가능케 해주는 서왕모(西王母) 반도원(蟠桃園)의 반도 복숭아가 있고 거인 과보(夸父)가 태양과 경주 끝에 죽자 그가 지녔던 지팡이가 복숭아나무 숲으로 변했던 일, 동이계 종족의 영웅 예(羿)가 제자 방몽(逄蒙)에게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맞아죽었던 일 등이 있다.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대인이 복숭아에 대해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을 알 수 있으나 벽사(辟邪)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할 신화는 영웅 예의 복숭아나무 몽둥이 이야기이다. 예는 복숭아나무 몽둥이에 맞아 죽은 후 귀신의 우두머리인 종포신(宗布神)으로 좌정하는데 그는 이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로 복숭아를 무서워하였고 이에 따라 모든 귀신들이 복숭아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습속은 바로 이 신화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복숭아의 벽사 의미가 보다 구체화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 신도(神荼), 울루(鬱壘) 신화이다. 이 신화에 의하면 동해에 도삭산(度朔山)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 거대한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의 동북쪽 가지 사이에 모든 귀신들이 세상을 드나드는 귀문(鬼門)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문 위에는 신도와 울루 두 신장(神將)이 지키고 있다가 귀환 시간이 늦거나 악행을 저지르는 귀신을 잡아 호랑이 밥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31)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강력한 벽사의 법구(法具)로 화한 것은 바로 이 신화 때문이다. 지금도 민담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귀신이 새벽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황급히 돌아가려하는 장면, 무속인이 귀신을 쫓는다고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로 환자를 때리는 무술(巫術)도 여기에서 기원하였다.

강증산은 공사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법술을 행하였는데 이에는 무속과 도교에서 유래한 것들이 많지만 신화에 기원을 둔 것도 더러 있다. 사실 무속 및 도교의 법술도 근원을 따져보면 신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예문만으로는 강증산의 공사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지만 태극을 셀 때마다 동도지를 물게 하고 나중에 동도지를 들고 큰 소리를 지른 것으로 보아 공사를 엄중히 시행하는 과정에 사마(邪魔)가 침범하지 않도록 방비하는 벽사의 조치로 일단 이해된다. 왜냐하면 동도지 곧 귀문 위에는 신도, 울루 두 신장이 거하고 있는 것으로 상상되었으므로 행사에 동도지를 수반한 것은 이들 두 신장이 천지 주재의 대신(大神) 강증산의 공사에 시립(侍立)한 형국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민간에는 신도와 울루 두 신장을 직접 대문에 문신(門神)으로 그려넣어 잡귀의 침입을 방비하는 습속이 있었다. 강증산은 신화로부터 유래된 당시의 동도지 관련 무속 및 민속을 채택하여 법술의 일부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Ⅲ. 『전경』에서의 문학 수용

『전경』은 비록 종교 담화를 기록한 책이지만 시, 산문, 소설 등 문학과 관련된 언급이 상당히 많다. 이는 단학파(丹學派)적 성향을 지닌 강증산32)이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에서 박람박식(博覽博識)을 중시한 까닭도 있지만33) 강증산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취향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록체 종교서가 갖는 문학과의 친연성이 근원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하겠다. 그것은 교리를 대중에게 쉽게 전포(傳布)하기 위한 필요에서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본장에서는 『전경』에 수록된 문학 자료를 고전 시가와 고전 산문, 소설 등으로 나누어 그 현상과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고전 시가

강증산이 소시(少時)부터 뛰어난 시재(詩才)를 지녔다는 사실은 『전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가령 훈장이 학동들에게 시를 짓게 했을 때 그가 낙운성시(落韻成詩)하니 시격(詩格)의 절묘함에 모든 사람이 탄복했다는 일화34)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증산은 시 창작이 일상이 될 정도로 심취하였고 종도들에게도 자주 시를 음송(吟誦)해주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시가 문학 자체를 애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강증산에게 시는 단순한 개인적 기호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강증산의 구세 이념을 효과적으로 종도들에게 각인시키는 수단이기도 했고 실제적으로 강증산의 공사 수행에 수반되는 법술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때때로 시를 읽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셨도다.

非人情不可近 非情義不可近

非義會不可近 非會運不可近

非運通不可近 非通靈不可近

非靈泰不可近 非泰統不可近 … 35)

강증산은 각각의 취지는 다르지만 언어적 구조는 동일한 6언구를 반복함으로써 종도들로 하여금 수련의 마음가짐을 다잡게 하고 있다. 6언구가 정통 시체(詩體)는 아니지만 강증산이 즉흥적으로 작성한 이 시구들은 리듬감이 확실하여 알아듣기 좋고 암송하기 쉬웠을 것이다. 『전경』을 보면 강증산이 종도들에게 공사 혹은 사안의 상황에 맞게 창작하거나 인용한 시구를 들려주는 경우가 빈번하다. 최제우의 언설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보이는데 조선말 종교 지도자들의 문예적 성향으로 보아도 좋을 상술한 경향은 조선조 문인문화(文人文化) 풍조의 반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에도 불구하고 강증산의 시적 지향은 후술할 바와 같이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주목을 요한다.

전 봉준(全琫準)이 학정(虐政)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알으시고 여름 어느 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36)

강증산이 읊은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 ” 시는 중당(中唐)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중의 하나인 노륜(盧綸)의 「새하곡(塞下曲)」 중 제3수로 눈 내리는 겨울밤에 침입한 오랑캐를 패퇴시키고 그를 추격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강증산은 이 시 중의 오랑캐 두목이 도망치는 ‘둔도(遁逃)’와 큰 눈이 내리는 ‘대설(大雪)’ 이미지를 빌려 전봉준의 봉기가 겨울에 실패할 것을 예언하였다.37) 다시 말해 강증산은 의도적으로 당시(唐詩)를 시참(詩讖)처럼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활용은 당시 전반에 대한 고도의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그의 시학에 대한 소양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약방에 이르사 여덟 종도를 벌여 앉히고 사물탕 한 첩을 지어 그 첩면에 인형을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두르시면서 시천주를 세 번 외우신 후에 종도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도다.

「남조선 배가 범피중류(泛彼中流)로다. 이제 육지에 하륙하였으니 풍파는 없으리로다」 하셨도다.38)

강증산이 인용한 ‘범피중류(泛彼中流)’는 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인데 본래 송(宋) 사마광(司馬光)의 시사(詩詞) 「杕柏寄傅欽之三首」 중의 제1구 “洋洋者膛, 泛彼中流, 于渚于洲.”에서 유래한 시구이다. 사마광의 시구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경ㆍ용풍(詩經ㆍ鄘風)』 「백주(柏舟)」의 “汎彼栢舟, 在彼中河” 구절에 연원을 두고 있다. 강증산은 여기서 천지공사가 잘 이루어져 후천 선경 곧 남조선 시대가 도래 하리라는 것을 ‘범피중류’ 시구에 부쳐 배의 순항(順航)으로 암시하였다.

김 창여(金昌汝)가 동곡에서 살았는데 여러 해 동안 체증으로 고생하던 중 어느 날 상제를 찾아 자기 병을 보아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그를 평상 위에 눕히고 배를 만지면서 형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하였더니 창여(昌汝)는 체증으로부터 제생되었도다.

調來天下八字曲 淚流人間三月雨

葵花細忱能補袞 萍水浮踵頻泣玦

一年明月壬戌秋 萬里雲迷太乙宮

淸音鮫舞二客簫 往劫烏飛三國塵39)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강증산은 종도 김창여의 체증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창작한 시를 활용한 것이다. 오늘날 문학 치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고대 동아시아에는 이러한 치료법이 이미 존재했었다. 한대(漢代)에는 왕공 귀족들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달래기 위해 사부(辭賦)가 동원되었는데 무제(武帝) 때의 문인 매승(枚乘)의 작품 「칠발(七發)」을 보면 그것으로 초(楚) 나라 태자의 울화병을 치유했다는 기록이 있다.40) 우리는 단순한 질병 치료를 넘어 사실상 강증산의 해원 서사 전반을 문학치료의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적절하고도 설득력이 있다.41)

칠언율시의 이 시는 압운을 이루지 않았으나 구절과 구절 간의 대우(對偶)가 비교적 정밀하다. 시상(詩想)은 정어(情語) 보다 경어(景語) 중심으로 자주 변환되어 난해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전반 4구에서는 누류(淚流), 부종(浮腫), 빈읍(頻泣) 등이 환기하는 이미지에 의해 침중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후반 4구에 이르면 명월(明月), 청음(淸音), 조비(鳥飛) 등의 밝고 약동적인 이미지가 연속되어 명랑한 분위기로 종결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아마 이 시의 극적인 정조(情調) 변화가 체증의 해소와 유비(類比) 관계를 이루고 그 위에 시의(詩意) 및 음운(音韻), 자형(字形) 등의 시청각적 요소가 병합되어 치유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당연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증산 고유의 종교 법술적 차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고전 산문, 소설

강증산은 『전경』에서 시가뿐만 아니라 고전 산문과 소설 등을 다수 활용하여 전술한 종도 및 대중의 교화와 공사 과정의 법술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시가 수용이 뛰어난 시재와 개인적 애호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산문과 소설 수용은 강증산이 평소 강조한 ‘박람박식’의 소양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조선조 문인문화의 ‘박학(博學)’ 기풍42)과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아래에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경석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양지 二十장으로 책 두 권을 매니 상제께서 책장마다 먹물로 손도장을 찍고 모인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 또 상제께서 한 권의 책명을 「의약복서 종수지문(醫藥卜筮 種樹之文)」이라 쓰시고 「진시황(秦始皇)의 해원 도수이니라」 하시고 한 권을 신 원일의 집 뒷산에 묻고 또 한 권을 황 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도다.43)

진시황은 잘 알려져 있듯이 자신을 비방했던 유생(儒生)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분서갱유(焚書坑儒)란 폭거를 단행한 바 있다. 강증산은 진시황을 해원하기 위한 법술을 시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의약복서종수지문’으로 제명(題名)한 책을 만든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진시황이 승상 이사(李斯)의 상주에 따라 분서갱유를 실시할 때 “의약과 점술, 농업 관련 책(醫藥卜筮種樹之書)”을 제외한 유가 경전, 제자백가서 등 모든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한다.44) 강증산은 진시황이 그 가치를 긍정했던 ‘의약복서종수지서’란 『사기』의 글귀를 상징으로 활용하여 그를 해원하는 법술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약방을 설치하신 후 「원형이정 봉천지 도술약국 재전주동곡 생사판단(元亨利貞奉天地道術藥局 在全州銅谷生死判斷)」이란 글귀를 쓰셔서 불사르셨도다. 약장은 종삼 횡오 도합 十五간으로 하고 … 그 위 十五간 중의 가운데 간에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고 그 속에 목단피를 넣고 그 아래에 「열풍 뇌우 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횡서하고 또 칠성경을 백지에 종서하고 그 끝에 「우보 상최 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횡서하고 … 약방에 통감(通鑑)ㆍ서전(書傳) 각 한 질씩 비치하였도다.45)

강증산이 전주 동곡에 설치한 약방은 단순히 매약(賣藥)과 치병을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 운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자리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우주론적, 의미론적으로 치밀하게 직조(織造)되어 있어야 한다. 약장은 이에 따라 한가운데에 ‘단주수명’이란 명목으로 해원의 공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임을 천명한다. 강증산은 이어서 그 아래에 ‘열풍뇌우불미’라는 『서경』의 글귀46)를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화에 의하면 요는 순에게 선양(禪讓)하기 전에 그의 자질을 시험한다. 순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숲속에 놓여졌으나 길을 잃지 않는다. 이는 순의 부동심(不動心), 성심(誠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배치한 ‘우보상최등양명’은 기문둔갑(奇門遁甲)에서 사용하는 우강주(禹罡呪)의 구절로 우(禹)와 상관된 주문이다.47) 결국 단주가 해원되어 요의 장자로서 그 적통을 이은 것으로 본다면 약장은 고대의 대표적 성인 요-순-우의 차서대로 구조화되어 있으면서 의미론적으로는 그곳에 열거된 문구, 전적 등으로 미루어 유교와 도교 양자를 포괄하는 상징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형렬이 상제의 명을 좇아 광찬과 갑칠에게 태을주를 여러 번 읽게 하시고 광찬의 조카 김 병선(金炳善)에게 도리원서(桃李園序)를 외우게 하고 차 경석ㆍ안내성에게 동학 시천주문을 입술과 이를 움직이지 않고 속으로 여러 번 외우게 하셨도다.48)

강증산은 앞서의 사례들처럼 『사기』, 『서경』 등 주요 고전의 산문 글귀를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방식으로 활용함에 그치지 않고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와 같은 문학 작품을 종도들에게 주문처럼 송독(誦讀)시킴으로써 이를 도서(道書)로 간주하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강증산이 『서경』, 『맹자』, 『대학』 등 유교 경전의 일부 구절을 도리(道理) 터득의 교재로 삼은 사례는 『전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49) 이는 앞서 지적했듯이 강증산의 삼교합일적 학문 성향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상, 학술서가 아닌 문학 작품을 수련에 활용한 경우는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춘야연도리원서」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명문으로 도교 시인 이백의 거시적 세계관과 호방한 기상을 엿보게 하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의 무한한 시공과 유한한 인생을 대비시키면서 우주 속 인간 존재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이 작품에서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고 시간은 영원의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구절은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묘사한 절창으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왔다. 문학은 이처럼 사변적 논리와는 다른 방식 곧 감성의 언어로 세계의 진상(眞相)을 파악하는데 강증산의 탁월한 시적, 문학적 감수성은 이백 작품의 정수를 꿰뚫어 보고 그 수련적 가치에 착목(着目)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도학자들은 문학이 도를 달성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편협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이정(二程)과 주희(朱熹) 같은 이학가(理學家)들이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 혹은 ‘작문해도(作文害道)’의 관점에서 문학을 도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했던 것이 그 실례이다. 이러한 점에서 강증산의 고전 산문 수용은 누구보다도 넓고 깊은 문학에 대한 식견에 근거한 회통적(會通的) 인식의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 되게 하고 못 될 일을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 빈(孫臏)의 재조는 방 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릉(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 량(諸葛亮)의 재조는 조 조(曺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 데 있느니라.50)

소설은 가장 대중적인 문학 장르로서 정통문학인 시가와는 달리 통속적인 문체로 여러 계층에게 환영을 받았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본명: 三國演義)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전입된 이래 폭넓게 읽혀지면서 오늘날까지 사회, 문화 각 방면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강증산은 『전경』의 곳곳에서 제갈량과 관련된 스토리를 예화로 들어 설득력 있는 담론을 전개하는데 실상 제갈량 설화는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근거한 것이 아닌, 소설 『삼국지』 곧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끌어온 허구의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가령 위의 예문에도 있듯이 『삼국연의』 제50회에는 제갈량이 조조(曹操)가 화용도(華容道)로 패주할 것을 미리 알고 관운장(關雲長)을 배치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다.51) 『전경』에는 이외에도 제갈량이 기도로 동남풍을 빌었다는 고사가 등장하나 『삼국연의』 제49회에 담긴 이 이야기 역시 정사에 없는 소설가의 허구이다.52)

제갈량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강증산은 전술한 바 있는 강태공의 뛰어난 도술, 당태종(唐太宗)의 웅재대략(雄才大略)과 위징(魏徵)의 신력(神力)53), 팔선녀(八仙女)54) 등에 대한 스토리를 인용하여 자신의 위격을 확인시키기도 하고 종도들을 깨우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화들 또한 『서주연의(西周演義』, 『강태공전(姜太公傳)』, 『강태공실기(姜太公實記)』, 『서유기(西遊記)』, 『수당연의(隋唐演義)』, 『구운몽(九雲夢)』 등 조선 시대에 유행했던 번역, 번안소설 및 국내 소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로 미루어 강증산은 『전경』의 상당히 많은 지면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언급할 정도로 소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셈이다.

전통시대에 소설은 비정통의 통속문학으로 치부되어 지배계층에 의해 백안시되었다. 중국의 경우 관리가 공문서에 소설 구절을 인용했다 하여 파직된 적도 있고 소설가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업보로 인해 지옥에서 고초를 겪을 것이라는 낭설이 있을 정도였는데 조선의 경우도 이러한 인식은 중국과 대등소이하였다.55) 그럼에도 강증산이 허구의 스토리를 교설(敎說)에 긍정적으로 활용한 것은 1차적으로는 스토리텔링의 차원에서 대중적 설득력을 배가하기 위한 방편임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보다 근원적으로는 (그에게 내재한 것으로 여겨지는) 합리적 지식보다 서사지식(敍事知識)을 중시하는 신선가(神仙家)의 설화주의적 성향56)에 비중을 두고 싶다. 강증산에게는 소설 서사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여부 보다 그 허구의 이야기로부터 감발(感發)된 상상력이 어떻게 깨달음으로 나아가느냐가 중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Ⅳ. 신화, 문학적 상상력에서 신학으로의 전화(轉化) 원리

본장에서는 그간 예거하고 논의해온, 『전경』에서 전개된 강증산의 신화, 문학적 상상력이 어떠한 본질 혹은 기능적 차원에서 신학으로의 전화를 이룩할 수 있었는지 주로 문학적 상상력을 중심으로 그것이 내장(內藏)한 메카니즘에 대해 각론해 보고자 한다.

1. 문자와 이미지의 주술적 역량

상형문자인 한자는 청각 이미지이자 시각 이미지이기도 한데 이것의 힘에 대한 신뢰는 고대 중국에서 이미 보인다. 신화는 창힐(蒼頡)이 한자를 창제하기 전날 밤 귀신들이 통곡을 했다고 전한다.57) 아울러 우 임금은 청동 솥에 새겨 넣은 그림으로 요괴와 괴물을 축출하였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최초의 문자 갑골문은 글이자 그림으로서 신과 소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부적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주로 문자를 변형한 이미지인데 오래된 문자일수록 효험을 지닐 것으로 믿어졌다. 곽박(郭璞), 갈홍(葛洪) 등 신선가들은 이 때문에 고문자에 정통한 문자학자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강증산도 언급한 바 있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이 방면의 대가이며 그가 제작한 척주(陟州) 동해비(東海碑)는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하는데 삼척 지역의 해일을 물리쳤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특이하게도 퇴조비는 비문이 고문자인 전서체(篆書體)의 부적 형식으로 되어 있다.58)

『전경』을 일관하여 강증산은 문자가 지닌 힘을 신뢰하고 강조한다. 가령 선비는 항상 지필묵을 지녀야 하고59) 글도 일도 않는 자는 쓸모없다60)고 인식하는 강증산은 불가불 문자로 인간을 권계(勸戒)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61) 이에 따라 그는 공사를 행하는 법술에서 글을 써서 불사르는 행위를 그치지 않는다.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행사(行事)한다.

상제께서 계묘년 정월에 날마다 백지 두서너 장에 글을 쓰거나 또는 그림(符)을 그려 손이나 무우에 먹물을 묻혀 그것들에 찍고 불사르셨도다. 그 뜻을 종도들이 여쭈어 물으니 「그것은 천지공사에 신명을 부르는 부호이노라」고 알려 주셨도다.62)

강증산의 문자와 이미지의 힘에 대한 신뢰는 자형(字形) 자체에 대한 신뢰 곧 부적을 넘어서 문자의 조합인 글로 확대되고 결국 서언에서 말했듯이 어록체의 효용과 가장 상응하여 정동(情動)을 야기하는 문학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게 된다.

2. 시가 문학의 감성인식 기능과 표현 특성

고인(古人)은 일찍부터 시가 문학이 지닌 감성인식 방면의 기능에 주목했다. 가령 「모시서(毛詩序)」에서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킴에 시 만한 것이 없다(感天地動鬼神, 莫近於詩).”고 단언한다. 즉 신명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문학 중에서도 시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왜인가? 시는 압운을 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리듬은 곧 파동으로 현상계뿐만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 곧 상상계에도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위한 제문이나 묘비명 등은 산문임에도 반드시 압운을 해야만 했다.63)

아울러 시는 상징과 비유의 기법을 주로 활용하기 때문에 산문처럼 의미를 직서(直敍)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식은 큰 도리를 짐짓 감추고 자발적인 깨달음을 유발하기에 적합하다. 즉 일상 언어로서 표현하기 어렵거나,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의가 손상되는 미묘한 이치 혹은 궁극적인 도리를 설유(說諭)함에는 모든 문학 장르 중에서 시가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道德經)』의 첫 장이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로 시작하여 전문이 운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의 좋은 실례이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강증산은 시가에 대한 뛰어난 능력과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공사를 보거나 법술을 행할 때뿐만 아니라 종도들에 대한 교육, 스스로의 일상에서도 시를 자유자재로 창작하고 운용하였다. 가령 최제우의 혼을 불러오기 위해 “걸군굿 초란이패 남사당 여사당 삼대치”라는 구절에 곡조를 붙여 읽었다든가64), 고대 명현의 교육법과 관련하여 율곡이 이순신에게 두보(杜甫) 율시를 천독(千讀)할 것을 권했다는 예화를 긍정한 이야기65) 등은 강증산이 시가 문학이 지닌 감성인식 기능과 표현 특성을 깊이 심득(心得)하였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3. 미메시스(Mimesis)의 재현 혹은 창조 능력

인간의 모방 본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 이래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의 방식으로 작동하여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고 창조하기도 한다. 유사성 곧 ‘비슷한 것은 가짜’가 아니라 오히려 진짜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은 생존을 위한 거울 뉴런의 시뮬레이션 작용 결과이고 여기에서 이야기, 문학, 예술 등이 발생한다는 가설이 최근 뇌과학이나 진화생물학을 통해 제기된 바 있다.66) 프레이저(J. G. Frazer)는 일찍이 모방 본능이 주술과 상관됨을 인식하고 그것을 공감주술과 모방주술 등으로 정리한 바 있으며 모스(M. Mauss)는 이를 환경 및 사회적 관습 등과 관련하여 그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였다.67)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합리주의와 진화론이 대세를 점하면서 모방과 주술은 미개인의 관념과 행위로 폄하되었다가 최근 물활론의 부상과 더불어 다시 복권되는 추세에 있다.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미메시스 능력을 긍정적으로 거론한 사람은 ‘아우라(Aura)’ 이론으로 유명한 벤야민(W. Benjamin)이다. 벤야민은 복제를 통해 전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미메시스로 규정하였다. 다시 인류학자 타우시그(M. Taussig)는 미메시스적 행위에서 재현은 재현된 것의 특질을 공유하거나 획득할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한다.68)

강증산이 신화적 존재를 호명하고 좋은 시를 종도들에게 읊어주며 명문과 명작 소설 구절을 송독하거나 인용하는 행위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그러한 영향력 있는 원본을 복제함으로써 그것과 동일한 효과를 증산 신학이 전유하게끔 하는 미메시스적 법술이다. 여기서 나아가 우리는 사실상 강증산 신학의 가장 역동적인 측면이라 할 공사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도 이해할 여지를 갖게 된다.

상제께서 무신년 봄 백암리 김 경학ㆍ최 창조의 두 집으로 왕래하시며 성복제와 매화(埋火) 공사를 보셨도다. 「 … 오늘 밤에 인적이 없을 때를 기다려 정문밖에 한 사람이 엎드릴 만한 구덩이를 파고 나의 옷을 세 사람이 한 가지씩 입고 그 구덩이 앞에 청수 한 그릇과 화로를 놓고 … 그리고 한 사람은 저육전 한 점씩을 집어서 청수와 화로 위로 넘기고 한 사람은 연달아 넘긴 것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받아서 구덩이 속에 넣고 흙으로 덮어라. 그리고 빨리 돌아오너라」고 일러주시니 형렬이 그대로 시행한 후 시급히 상제께 돌아가는 길에 돌연히 검은 구름이 일더니 집에 이르자 폭우가 쏟아지고 뇌전이 크게 치는지라. … 상제께서 가라사대 「뒷날 변산 같은 큰 불덩이로 이 세계가 타 버릴까 하여 그 불을 묻었노라」 하셨도다.69)

상제께서 매양 뱃소리를 내시기에 종도들이 그 연유를 여쭈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 이제 배에 실어 오는 화물표에 따라 넘어오게 되므로 그러하노라」고 하셨도다.70)

강증산은 미래에 있을, 불로 인한 세계의 대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불을 땅에 묻는 매화 공사를 시행한다. 대운(大運)의 주재자인 강증산의 상징적 행위는 비록 좁은 사가(私家)에서 이루어지나 프랙탈(fractal)한 구조를 반복하는 미메시스의 원리에 따라 우주적으로 확대된다. 마찬가지로 뱃소리를 모방하는 행위도 상상계에서는 서양의 신명을 불러오는 것이지만 현상계에서는 빈번한 교역을 촉진하여 조선을 상등국으로 만드는 법술이 된다.

강증산은 또한 어음(語音)의 유사성을 활용하여 공사를 시행하기도 한다.

상제께서 무더운 여름날에 신방축 공사를 보시고 지기를 뽑으셨도다. 종도들이 상제께서 쓰신 많은 글을 태인 신방축의 대장간에 가서 풍굿불에 태웠나니라. … 갑칠이 병욱으로부터 일본 신호(神戶)에 큰 화재가 났다는 신문 보도를 듣고 돌아와서 그대로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일본의 지기가 강렬하므로 그 민족성이 탐욕과 침략성이 강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일삼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전날 신방축 공사를 보았음은 신호(神戶)와 어음이 같음을 취함이었으니 이제 신호에 큰 불이 일어난 것은 앞으로 그 지기가 뽑힐 징조이로다」고 하셨도다.71)

강증산은 일본의 지기를 뽑기 위해 태인 신방축에서 불을 일으키고 그 불기운이 신방축과 첫 음(音)이 같은 일본의 신호(神戶) 곧 코오베에 감응하여 대화재를 유발하도록 행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강증산 스스로 이 공사가 미메시스 원리에 기댄 것임을 “신방축 공사를 보았음은 신호(神戶)와 어음이 같음을 취함”이라고 밝힌 점이다.72) 어음의 유사성은 사실 두 단계를 거쳐 미메시스의 목적을 달성한다. 우선 유사한 어음의 용어(여기서는 지명)는 환유 작용에 의해 표상하는 의미가 원관념과 동일시되고 다음 단계에는 감응 원리에 의해 일방의 속성 혹은 작용 효과마저 전이되어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강증산의 공사는 미메시스에 의해 인간과 자연, 속계와 신명계를 절합(節合, articulation)한다. 강증산이 예거했던 신화, 시, 산문, 소설 역시 상상과 감각을 의미로 이끄는 미메시스적 작용73)에 의해 신학으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Ⅴ. 결어

본고에서는 『전경』의 강증산 언설에 수용된 신화와 문학 자료를 대상으로 그것들이 『전경』 텍스트의 고유한 종교 신학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의미화 되었는지, 그 전유의 상황과 원리를 고찰해 보았다. 먼저 『전경』에서의 신화 수용을 강태공, 사명, 치우, 우사, 조왕, 망량, 개고기, 동도지 등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들 중의 상당수가 동이계 신화와 상관되며 민간에 깊게 뿌리를 둔 습속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강증산의 단학파적 성향, 수정주의적 역사의식, 민중의식 등과 상관된다.

다음으로 『전경』에서의 문학 수용을 시와 산문, 소설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시의 경우 강증산의 시재와 취향에 바탕하여 당시, 창작시 등이 수용되었고 산문, 소설의 경우 『서경』, 『사기』, 『삼국연의』, 『서유기』, 『서주연의』 등이 수용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예언, 치병, 수련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되었는데 고전 명구(名句)나 소설이 지닌 대중적 감화력이 이 과정에서 종교적으로 전유되어 힘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경』에서 신화, 문학적 상상력이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 증산 신학으로 전화되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문자와 이미지의 주술적 역량, 시가 문학의 감성인식 기능과 표현 특성, 미메시스의 재현 혹은 창조 능력 등이 신화, 문학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공사 거행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 3 가지 설명 기제는 『전경』 언술의 의미화 과정을 파악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종합하면 강증산의 삼교합일적, 회통적 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된 신화, 문학적 상상력은 지배문화의 정통론적인 관념을 돌파하여 증산 신학의 민중성, 보편성을 구현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아울러 그것은 강증산의 구세 이념을 광포(廣布)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종교 법술로 변용되어 공사 수행의 중요한 방편으로 기능하였다.

향후 『전경』의 신화, 문학 자료와 그 작용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가 이어져 증산 신학 형성의 내적 메카니즘 예증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소략하나마 시도적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Footnotes

* 여기서 ‘법술’은 단순한 도술이나 방술(方術), 무술(巫術), 요술, 마술 등의 차원이 아닌 강증산의 문명 전환 방편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용어이다. 사실 강증산은 선도, 유교, 불교와 관련하여 이들 종교의 방편을 법술로 이미 표현한 적도 있다. (전경 예시 73절 참조.) ‘전유(appropriation)’란 탈식민주의에서 유래된 용어로 본고에서는 타자의 것을 주체적으로 자기화하여 활용한다는 의미로 쓰였음을 밝혀둔다. 아울러 여기서의 ‘신학’이 협의의 기독교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1) 언어의 주술성을 시사한다. 오스틴의 언급을 포함한 언어와 주술의 근원적 상관성에 대한 논의는 Stanley J. Tambiah, Magic, Science, Religion, and the Scope of Ration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p.65-83 참조.

2) 가령 시가 문학과 관련한 김탁, 「증산 강일순이 인용한 한시 연구」, 『한국종교』 19 (1994), 문학치료와 관련한 고남식, 「강증산 전승의 해원과 문학치료」, 『문학치료연구』 1 (2003)을 비롯한 일련의 논문들, 신화, 상징과 관련한 박광수, 「한국 신종교(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에 나타난 신화, 상징, 의례 체계의 상관성에 관한 비교연구」, 『종교연구』 26 (2002); 윤재근, 「대순사상의 의미체계에 대한 상징해석-천지공사(天地公事)를 중심으로」, 『종교교육학연구』 17 (2003); 이경원, 「강증산의 천지공사의 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연구」, 『신종교연구』 14 (2006) 등의 논문들을 들 수 있다.

3) 정재서, 「강증산(姜甑山)의 중국 신화 수용과 그 의미」, 『대순사상논총』 25 (2015) 참조.

4) 『전경』, 행록 4장 17절.

5) 같은 책, 교운 1장 10절.

6) 같은 책, 행록 3장 28절.

7) 같은 책, 예시 20절.

8) 이능화, 『조선도교사』, 이종은 옮김 (서울: 보성문화사, 1977), p.272.

9) 『전경』, 행록 5장 33절.

10) 같은 책, 예시 30절.

11) 王夫之, 『楚辭通釋』, “大司命統司人之生死, 而少司命則司人子嗣之有無, 皆楚俗爲之名而祀之.”

12) 욕수(蓐收)는 서방의 대신(大神) 소호(少昊)의 보좌신으로 가을을 주관한다.

13) 이와 관련하여 대순진리회를 창도(唱導)한 박우당 도전(都典)의 해설을 참고할 수 있다. “연원도통이라는 것은 근본이 용(龍)못에 있고, 증산ㆍ정산의 진리를 말함이고 용소(龍沼)에 근본이고, 용소인 물에서 나온 것이다. 이치 교화라는 것은 하도도 낙서도 물에서 나왔다는 것이고 지금은 연원도통에 있다는 것이다. 원 근본은 淵(못)이다. 네 연원, 내 연원이 없다. 용소다. 여기가 근본이다. 상제님, 도주님을 믿고 나가는 것이 진리다. 도인은 상제님 도인이지 우리의 도인이 아니다. 앞으로는 연원도통이다. 후천 정역은 연원도통이다. 복희씨, 木神司命으로 봄 절후이고 3 ㆍ8木이고, 문왕은 여름이니까 火神司命이고 2ㆍ7火이니까 여름 절후이다. 우리는 金神司命이다. 후천은 연원도통이다. 가을은 금신사명이고 金이란 서쪽이고 4ㆍ9 金이다. 金神은 상제님을 말하고 미륵금불(彌勒金佛)로 오셨다. 불교에서 찾는 미륵은 상제님을 말함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하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1992년 4월 9일, 「도전님 훈시」) 자료를 제공해 준 토론자 박병만 연구위원(대순진리회 교무부)에게 감사를 드린다. 박병만 연구위원은 이외에도 본고에 대해 여러 좋은 지적을 해주었다.

14) 『전경』, 교법 3장 30절.

15) 『揆園史話』, 『桓檀古記』 등 이른바 재야사서(在野史書)에서의 인식이다.

16) 『전경』, 행록 4장 31절.

17) 蕭兵, 『楚辭新探』 (天津: 天津古籍出版社, 1988), pp.516-518.

18) 『山海經』, 「大荒北經」,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蓄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19) 『전경』, 행록 4장 36절.

20) 같은 책, 공사 1장 26절.

21) 같은 책, 교운 1장 7절.

22) 陸德明, 『經典釋文』引『說文』, “魍魎, 山川之精物也.”

23) 『史記ㆍ五帝本紀』, 「索引」引服虔, “魑魅, 人面獸身, 四足, 好惑人.”

24) 羅泌, 『路史ㆍ後記』, 卷4, “蚩尤乃驅魍魎, 興雲霧, 祈風雨, 以肆志于諸侯.” 및 杜佑, 『通典ㆍ樂典』, “蚩尤氏帥魑魅, 以與黃帝戰于涿鹿, 帝命吹角作龍吟以御之.”

25) 『左傳ㆍ宣公』 3년, “昔夏之方有德也, 遠方圖物, 貢金九枚, 鑄鼎象物, 百物以爲之備, 使民知神姦, 故民入川澤山林, 不逢不若, 魑魅魍魎, 莫能逢之.”

26) 『殷墟文子續篇』 2-15-3.

27) 『山海經』, 「南次三經」. 번역은 정재서 역, 『산해경』 (서울: 민음사, 1985)에 의함.

28) 『전경』, 공사 3장 2절.

29) 박광수, 「한국 신종교(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에 나타난 신화, 상징, 의례 체계의 상관성에 관한 비교연구」, 『종교연구』 26 (2002), p.104.

30) 『전경』, 공사 3장 12절.

31) 王充, 『論衡』, 「訂鬼」引『山海經』, “滄海之中, 有度朔之山, 上有大桃木, 其屈蟠三千里, 其枝間東北曰鬼門, 萬鬼所出入也. 上有二神人, 一曰神荼, 一曰鬱壘, 主閱領萬鬼. 惡害之鬼, 執以韋索而以食虎.”

32) 이에 대해서는 김성환, 「한국 선도의 맥락에서 보는 증산사상」, 『대순사상논총』 20 (2009), pp.327-330 및 정재서, 위의 논문 참조. ‘단학파적 성향’이라는 언급이 강증산을 도교계 인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가계, 수련방식, 담론 등에서 뚜렷이 보이는 선도적 요소를 고려한 표현일 뿐 총체적 단언이 아님을 밝혀둔다.

33) 『전경』, 교법 2장 24절, “가장 두려운 것은 박람박식(博覽博識)이니라.”

34) 같은 책, 행록 1장 17절.

35) 같은 책, 교법 3장 47절.

36) 같은 책, 행록 1장 23절.

37) 김탁은 강증산의 동학 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기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김탁, 앞의 글, pp.69-70.

38) 『전경』, 예시 71절.

39) 같은 책, 제생 10절.

40) 蕭統, 『六臣註文選』, 卷34, 「七發」, “太子之病, 歌舞藥石針刺灸療而已. 可以要言妙道說而去也 … 於是太子據几而起曰, 渙乎若一, 請聖人辯士之言, 忽然汗出, 霍然病已,” 이와 관련된 논의는 정재서, 「苑囿, 제국 서사의 공간」, 『중국문학』 38 (2000), p.6 참조.

41) 상술했듯이 이와 관련된 논의는 고남식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바 있다. 고남식, 앞의 논문을 비롯 「증산 강세전승에 대한 문학치료적 접근」, 『문학치료연구』 2 (2004), 「단주 해원전승에 대한 문학치료적 접근」, 『문학치료연구』 4 (2006), 「해원설화에 대한 문학치료적 접근」, 『문학치료연구』 6 (2007) 등의 논문들이 그것이다.

42) 조선 후기 문인들의 박학 추구에 대해서는 심경호, 「박지원과 이덕무의 희문(戲文) 교환에 대하여」, 『한국한문학연구』 31 (2003), pp.95-96 참조.

43) 『전경』, 공사 3장 17절.

44) 『史记ㆍ秦始皇本纪』, “丞相李斯曰 臣请史官非秦记皆烧之 … 百家语者,悉烧之 … 所不去者,医药卜筮种树之书. 帝曰可.”

45) 『전경』, 공사 2장 9절.

46) 『書經ㆍ堯典』, “(舜)納於大麓, 烈風雷雨弗迷.”

47) 『奇门遁甲』, 卷11, 「禹罡圖」, “凡出兵左足向前踏去,咒曰, 禹步相催登陽明,一氣混沌灌我形,天回地轉步七星,躡罡履鬥覺通靈,惡逆催伏妖魔群,眾星助我斬妖精,我得長生遊太清.” 『전경』, 공사 3장 39절에는 “我得長生飛太淸, 衆星照我斬妖將. 惡逆摧折邪魔驚, 躡罡履斗濟九靈. 天回地轉步七星, 禹步相催登陽明. 一氣混沌看我形, 唵唵急急如律令.”이라는 주문이 있는데 「禹罡圖」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김탁은 이를 『道藏』에 실린 「布斗呪」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탁, 앞의 글, pp.49-50.

48) 『전경』, 행록 5장 7절.

49) 강증산은 특히 「대학」을 중시하여 수련, 벽사, 치병 등에도 활용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鍾雲鶯, 「韓國大巡真理會對《大學》思想的解釋與轉化」, 『대순사상논총』 34 (2020), pp.150-156 참조.

50) 『전경』, 교법 3장 28절.

51) 許盤淸 等, 『三國演義三國志對照本(上)』 (南京: 江蘇古籍出版社, 2002), pp.448-449.

52) 같은 책, pp.441-443.

53) 『전경』, 교법 3장 33절.

54) 같은 책, 공사 2장 16절.

55) 가령 실학파인 이덕무도 다음과 같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李德懋, 『雅亭遺鎬』 7, 「與朴在先齊家書」, “夫俗所謂小說者, 卽演義之流也, 以其誨淫誨盜, 壞倫敗化之具. 王政之所可厲禁. 故吾輩, 嘗與痛惡而深斥之.”

56) 정재서, 『불사(不死)의 신화와 사상』 (서울: 민음사, 1994), pp.246-247.

57) 『淮南子ㆍ本經訓』, “昔者, 蒼頡作書, 而天雨粟, 鬼夜哭.”

58) 삼척 퇴조비의 부적 형식과 주술성에 대한 논의는 정재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에 표현된 산해경(山海經)의 신화적 이미지들」, 『영상문화』 29 (2016) 참조.

59) 『전경』, 교법 2장 27절.

60) 같은 책, 교법 1장 61절.

61) 같은 책, 행록 5장 38절.

62) 같은 책, 공사 1장 10절.

63) 시가의 주술적 소통능력과 관련된 논의는 정재서, 「산해경의 시적 변용」, 『중국학보』 38 (1998), pp.197-198 참조.

64) 『전경』, 공사 2장 3절.

65) 같은 책, 행록 1장 32절.

66)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노승영 옮김 (서울: 민음사, 2016), p.39, pp.93-94. 보이드(Brian Boyd) 역시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다. 브라이언 보이드, 『이야기의 기원』, 남경태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16), p.226, p.234, p.252.

67) 모스는 주술을 구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환경, 사회적 관습의 총체성 안에서 파악해야 할 것임을 언명한다. Marcel Mauss, A General Theory of Magic,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Robert Brain, (New York: The Norton Library, 1975), p.24.

68) Michael Taussig, Mimesis and Alterity (New YorkㆍLondon: Routledge, 1993), pp.47-48.

69) 『전경』, 공사 3장 1절.

70) 같은 책, 예시 29절.

71) 같은 책, 공사 3장 31절.

72) 이와 비슷한 사례로 청주 만동묘에서 보아야 할 청국 공사를 가까운 청도원에서 행한 일(『전경』, 공사 2장 6절)을 들 수 있다. 윤재근, 이경원은 이러한 사례들을 지명 상징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윤재근, 앞의 글, p.209; 이경원, 앞의 글, p.129.

73) Michael Taussig, 앞의 책,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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