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대순사상과 『정감록』의 관계: 증산이 변용한 한시 전거(典據)를 중심으로

박상규1,*
Sang-kyu Park1,*
1Senior researcher, Asia Research Center of Religions
*아시아종교연구원 선임연구원, E-mail: parkthanks@hotmail.com

© Copyright 2020,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Sep 27, 2020 ; Revised: Nov 03, 2020 ; Accepted: Dec 08,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요약

칠팔년간고국성(七八年間古國城)으로 시작하는 증산의 비결시는 그 원형이 『정감록』에 수록된 것이라 주장되고 있다. 증산이 『정감록』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이 명확히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증산이 『정감록』에 심취했고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라는 담론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정감록』과 사상적 지향점이 다른 비결서인 『서계가장결』에 수록되어 있던 한시를 『정감록』의 비결시로 오인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결국, 예시 84절의 한시는 더는 증산에 대한 『정감록』의 깊은 영향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증산이 『정감록』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예시 84절의 한시 외에도 세 가지 문헌을 그 근거로 한다. 첫째는 “천개어자 지벽어축 인기어인[天開於子 地闢於丑 人起於寅]”의 어구로 소강절의 『황극경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어구는 조선에서는 숙어처럼 쓰이던 매우 일상적인 용어였다. 따라서 『정감록』과 대순사상이 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정감록』과 증산을 관련짓는 것은 증산이 『정감록』에 심취하였다는 예단에서 비롯된 왜곡인 것이다. 둘째는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라는 어구이다. 이는 정감 비결의 “모악산두 금불능언[母岳山頭 金佛能言]”의 어구와 거의 같다. 하지만 증산은 두(頭)를 정반대의 하(下)로 뒤집고 자신만의 종교적 예언을 덧붙인다. 비결을 전복하여 비결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지형체선지조화유지범절(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이라는 대순사상의 특징과 관련된 어구이다. 『초창결(蕉蒼訣)』이라는 비결서에 유일하게 발견되어 대순사상에 대한 『정감록』의 영향을 입증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초창결』의 내용과 필사 시기 등을 통해 분석하면 『초창결』은 1950년대 이후 편집된 비결서이기에 이 어구도 대순사상에 대한 정감 비결의 영향을 입증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오히려 역으로 『초창결』이 대순사상의 편린을 흡수하여 새롭게 편집되었음을 시사하는 많은 증거가 발견된다.

결국, 증산과 대순사상에 대한 『정감록』의 일방적인 영향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따라서 증산의 『정감록』에 대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모습은 잘못된 사실관계에 기반하여 구축된 허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증산에 의해 전개된 대순사상이 정감 비결의 풍수도참적 역성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Abstract

It has been suggested that Jeungsan’s prophetic poem that starts with the verse “For about seven or eight years, there will be a castle in the ancient country [七八年間古國城] … ” originally comes from Prophecies of Jeong Gam (鄭鑑錄). Despite Jeungsan, himself, obviously having been critical of that text, this claim has become the basic grounds for discourse suggesting that Jeungsan was not only interested in Prophecies of Jeong Gam but also considerably influenced by the text. However, the claim itself was formulated due to misunderstandings of the Chinese poems that had been included in A Compilation of Secret Prophecies Hidden in the Family-clan of Seogye (西溪家臧訣). These poems pursue a different ideological orientation than the poem from Prophecies of Jeong Gam. Ultimately, the Chinese poem in the verse 84 the chapter titled, Prophetic Elucidations in The Canonical Scripture of Daesoon Jinrihoe cannot provide a basis for the claim that Jeungsan was strongly influenced by Prophecies of Jeong Gam.

This claim that Prophecies of Jeong Gam made a deep impact on Jeungsan and Daesoon Thought was based on three other texts outside of those that appear within verse 84 of Prophetic Elucidations. The first supposedly-related line is: “Heaven opens at the period of the Rat (Ja 子), Earth opens at the period of the Ox (Chuk 丑), humankind starts at the period of the Tiger (Ihn 寅).” This line comes from from Shao Kangjie’s Book of Supreme World Ordering Principles (皇極經世), and the line could be quoted idiomatically as an expression in the Joseon Dynasty. Accordingly, attempts to relate Daesoon Thought to Prophecies of Jeong Gam are a distortion that arise from the assumption that Jeungsan had a significant interest in Prophecies of Jeong Gam.

The second related line is “At the foot of Mount Mother (母岳山), a golden icon of Buddha has the ability to speak [母岳山下 金佛能言].” That line is nearly identical to the verse “On the summit of Mount Mother, a golden icon of Buddha has the ability to speak [母岳山頭 金佛能言].” Yet, Jeungsan changed ‘頭 (du, the summit)’ to ‘下 (ha, the foot or under)’ and express his own unique religious prophecy. This allusion to the prophecies of Jeong Gam is actually a criticism designed to disprove the earlier prophecy.

Third, is the verse, “The form of Buddhism, creation of daoism, and propriety of Confucianism [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 which is characteristically related to Daesoon Thought. This verse can only be found in the prophetic text, Prophecies of Chochang (蕉蒼訣), and it is provided a main source when alleging that Prophecies of Jeong Gam was an influence on Daesoon Thought. However, considering the context of Prophecies of Chochang and the year of its publication (it is assumed to be compiled after 1950s), this does not hold water as Jeungsan had already passed into Heaven several decades before that time. This disqualifies the verse from being a basis for asserting Prophecies of Jeong Gam as an influence on Daesoon Thought. Contrary to the original assertion, there is a considerable amount of evidence that Prophecies of Chochang absorbed aspects of Daesoon Thought, which were simply revised in a novel way.

There is no truly compelling evidence underpinning the argument that Prophecies of Jeong Gam had a unilateral impact on Daesoon Thought. There seems to be a great deal of confusion and numerous misinterpretations on this matter. Therefore, the claim that Daesoon Thought, as developed by Jeungsan, was influenced by the discourse on dynastic revolution and feng shui contained in Prophecies of Jeong Gam should be re-examined at the level of its very premise.

Keywords: 대순사상; 삼도봉시; 서계가장결; 정감록; 증산; 초창결; 칠팔년간고국성
Keywords: A Compilation of Secret Prophecies Hidden in the Family-clan of Seogye; Daesoon Thought; For about seven or eight years, there will be a castle in the ancient country; Jeungsan; Poems of Samdobong; Prophecies of Chochang; Prophecies of Jeong Gam

Ⅰ. 서언

증산 연구자 중에는 증산이 읊거나 쓴 한시나 글이 기존의 문헌에서 인용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증산이 그 글 또는 작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거나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증산이 유년 시절 외가에 자주 머물렀다는 전언을 근거로 외가 쪽의 인물과의 사상적 관계를 주장하기도 한다.1) 어떤 이의 사상이 역사적 맥락을 떠나 주변과는 독립되어 형성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최소한 간접적인 영향이 존재함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증산을 비롯한 한국 자생 종교 창시자들 연구에 있어 이와 같은 주장이 심도 있는 연구에 기반하여 전개되는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든다. 다수의 연구가 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종교현상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추상적 일반화로 귀결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 종교 현상들의 차이를 부각한 다원적 종교문화의 이해를 강조하는 새로운 신비교주의(new comparativism)가 등장했다. 그 후 비교를 통해 동일성과 유사성을 지적하며 교집합을 밝히는데 치중하는 것보다는 다른 지점을 드러내어 보다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비교 연구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이것은 비교작업이 차이를 식별하는 근본적 도구라는 보다 본질적인 명제에 근거한다.2) 하지만 현재도 대순사상 연구는 고전적 비교주의(classical comparativism)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물론 최근 대순사상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차이를 드러내는 많은 비교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는 점은 크게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기존 연구성과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논쟁점을 제시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3)

대순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표면적으로 쉽게 발견되는 기존 사상의 한 단면으로 대순사상을 분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증산은 자신의 사상이 명확한 의도에서 다양한 결의 종교와 사상을 재구성하여 융합하였음을 암시했다.4) 즉 기성 종교와 사상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독특한 직조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옷감을 만들어낸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하게 증산이 어떤 문헌을 인용하였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깊은 영향을 주장하고 평가하는 것은 마치 사용된 씨줄과 날줄 몇 올로 천이 지닌 특성을 추론하고 이에 근거하여 유사성에 기반한 일반화를 시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대순사상에 대한 『정감록』의 영향을 주장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증산이 사용한 한시나 글귀에 『정감록』에 수록된 것과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증산으로부터 시작된 대순사상이 『정감록』의 예언 사상과 의미 있는 교집합을 지닌다는 주장이 있어 온 것이다.5) 이러한 주장은 증산을 계승한 식민지 시대 증산 종단 사이에 활용된 『정감록』 관련 예언과 관련 사건에 근거하여 더욱 신빙성을 지니기 시작했다.6) 증산의 사상이 『정감록』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증산의 『정감록』에 대한 명확한 비판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증산이 인용하거나 남긴 한시나 글을 근거로 증산이 한편으로는 『정감록』에 심취하였고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7) 맥락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비교를 통해 인용(引用)인지 변용(變用)인지, 오마주(hommage)인지 패러디(parody)인지를 분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를 구분하고자 기획된 것은 아니다. 본 연구는 이를 구분하기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즉 ‘증산에 대한 『정감록』의 상당한 영향’이라는 주장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여 『정감록』의 문헌이라고 주장되는 증산의 한시가 실제로 『정감록』에 수록된 것인지를 먼저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본 연구는 주로 이를 자세하게 논증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기존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결국 증산의 정감록에 대한 일견 모순되게 비치는 모습이 잘못된 사실관계에 기반한 연구로 구축된 것임을 밝혀 대순사상이 『정감록』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비판하고자 한다.

Ⅱ. 증산의 비결시와 『정감록』의 관계

1. 증산의 비결시와 『정감록』

대순사상 연구의 기본 문헌이라 할 『전경』의 여러 장 중에서 예시(豫示)는 주로 증산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결시 중에는 모두 8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또는 율시(律詩)가 있는데 84절에는 다음과 같은 칠언율의 비결시가 있다.

七八年間古國城 畵中天地一餠成

黑衣飜北風千里 白日傾西夜五更

東起靑雲空有影 南來赤豹忽無聲

虎兎龍蛇相會日 無辜人民萬一生

바로 증산이 『정감록』에 심취했으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비결시다.8)

『정감록』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다. 실존 인물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심(李沁), 이연(李淵) 형제와 정감(鄭堪)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풍수 사상에 근거하여 국가 운명과 생민존망(生民存亡)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급속도로 유포된 이유는 조선이 망하고 정씨에 의해 계룡산을 도읍으로 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반체제적 역성(易姓)혁명을 암시하는 비결 내용 때문이었다.

위 한시가 실제 『정감록』에 수록되어 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경』의 일화 때문이다.

… 상제께서 「우리 겨레에서 정 감(鄭堪)을 없앴는데도 세상에서 정 감의 노래가 사라지지 아니하기에 혹시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이제 그 살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 일러 주시니라.9)

이 일화는 증산이 정감(鄭堪)과 관련된 운수나 기운을 없애셨고 또한 정감의 노래, 즉 『정감록』에 대해 부정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증산이 정감의 노래를 사라져야 할 비결이라고 하였기에 만약 예시 84절이 『정감록』에 수록된 비결시를 종도들에게 외워준 것이라면 『정감록』에 대한 증산의 가르침은 일견 모순된 것이다. 과연 일각의 주장처럼 예시 84절의 시가 『정감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정확한 것인가?

증산이 읊은 예시 84절의 한시와 몇 글자 차이가 있는 유사한 시가 수록된 문헌들은 남아있다. 그 문헌 대부분은 현재 통상 『정감록』으로 지칭되고 있는 비결 모음집들이다. 그래서 위의 한시가 『정감록』에 수록되어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조선조에서 대부분의 비결서들은 그 반체제적인 성격으로 인해 집안이나 가까운 지인 간에 구전과 필사로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해당 한시도 약간씩은 차이가 있다.

해당 한시와 형태상 가장 유사한 것은 『유산결(遊山訣)』이라는 필사본 비결 모음집에서 볼 수 있다.10) 8절로 길이가 『전경』의 한시와 유사하지만 다른 글자가 10여 자 있고 어떤 글자는 정확히 어떤 한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아마도 전승 과정에서 형태와 글자가 훼손되거나 오기된 듯하다.11)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비결 모음서는 정감(鄭堪)이 완산백(完山伯)12)의 세 아들과 함께 조선의 산(山)들을 유력(遊歷)하면서 풍수를 문답한 내용인 <유산결(遊山訣)>이라는 비결로 시작한다. 이 비결은 『정감록』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유사하여 제목만 다른 『정감록』의 이본으로 평가된다. 비결 모음서인 『유산결』은 그 권두가 <유산결>이라는 비결이기에 제목이 ‘유산결’이 된 것일 뿐 사실 여러 비결의 모음이다. 대부분 비결 모음서는 권두의 비결로 그 명칭을 삼았다. 해당 시는 『유산결』이라는 비결 모음서에 수록은 되어있지만 <유산결>에 속한 것은 아니다. <유산결> 다음에는 양(楊) 씨와 류(柳) 씨의 비결이라는 뜻의 <양류결(楊柳訣)>, 전라도의 풍수에 관련된 비결인 <호남도평(湖南道評)>, 윤고산(尹高山)과 류겸암(柳謙庵)의 문답이라는 <윤고산여류겸암문답(尹高山與柳謙庵問答)> 등이 나열되는데, 해당 시는 그 뒤에 부록처럼 연결되어 있다.13) 따라서 『유산결』이 곧 『정감록』의 이본이므로 해당 시가 원래 정감 비결이었다고 하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전경』 예시 84절의 한시와 유사한 시 중 가장 온전한 형태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삼도봉시(三道逢詩)’라는 제목을 지닌 비결에 수록되어 있다. 해당 시와 유사한 부분은 <삼도봉시>라는 비결의 마지막 부분이다. 비결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시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남아있는 전문은 아래와 같다.

三道相逢益友三 淸談三夜坐三三 天道胡然移極五 人彛沆復斁綱三

先丙八年壬後七 後辛四月戌先三 一着碁翻那定一 三分鼎沸必遷三

四木七金埋六六 二弓五矢發三三 千楸風雨烏門八 萬壑雲烟兎窟三

九九宮行離後九 三三門路艮先三 五星福地宮尋四 一日災年節驗三

丹心故國忠無二 白首深山樂有三 論三百計無全十 愧我翁年六十三

六八運餘故國城 畵中天地一餠成 黑衣飄北風千里 白鷁登西夜五更

東起靑雲空抱影 南來赤幟暗無聲 龍蛇虎兎相催世 無罪人民萬一生

마지막의 8구가 『전경』 예시 84절의 한시와 유사하지만 10여 글자가 차이가 있어 뜻은 달라진다.

2. 현대 『정감록』의 기원

현재 <삼도봉시>는 근현대 이후 『정감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 대부분에 실려있다. 이러한 사실로 증산이 『정감록』의 시를 인용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 시가 실제 『정감록』이라는 제목의 책에 수록되어 『정감록』으로 대중에 알려지고 『정감록』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시점은 증산이 서거한 후인 일제 강점기이기 때문이다.

<삼도봉시>라는 한시가 필사가 아니라 정식으로 활자화되어 처음 시중에 출판된 것은 1923년이다.14) 일본인 호소이 하지메가 1923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출판한 『정감록(鄭鑑錄)』에서 처음 활자화된 것이다.15) 호소이 『정감록』의 중요 저본이 되는 비결서 원제목은 『비결집록(秘訣輯錄)』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비결서 『정감록』으로 책을 출판한다. 활자화되기 전의 필사본 원제목 『비결집록』은 책의 목차에 기재하였다.16) 한국에서 <삼도봉시>가 활자화된 것은 같은 해 3월 김용주라는 이에 의해 경성, 즉 서울에서 발행된 『정감록(鄭鑑錄)』이 처음이다.17) 그해 4월에는 비결에 대한 설명과 비평을 곁들인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이 현병주라는 이에 의해 출판되는데 여기에도 수록되었다.18)

1923년 2, 3, 4월 차례로 출판된 이 세 종의 책들을 비교 분석하면 수록된 비결들은 거의 동일한 문헌을 기초로 한 25가지의 비결을 공통으로 수록하고 여기에 각자 자신들이 수집한 비결을 추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19) 그렇다면 공통된 25가지 비결들의 저본이 되는 문헌은 무엇일까? 그 저본으로 추측되는 문헌은 세가지 『정감록』에 공통으로 수록된 비결과 그 내용과 순서가 거의 일치하는 필사본인데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되어있는 『비결집록(秘訣輯錄)』이라는 고문서다.20)

수록된 비결은 <감결(鑑訣)> 등 25종으로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 소장되었던 것인데 여러 비결서를 모아놓은 형태로 그 필사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총독부 도서라는 인장이 없어서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1924년 이후의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1913년 이전의 것이 분명하다. 동일한 내용으로 편집방식까지 일치하는 필사본이 1913년 2월 이전에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필사본에 대해 1913년 2월 간략한 설명인 해제를 달아 권두에 추가한 문헌 자료가 현재도 남아있는 것이다.21)

해제가 추가된 이 필사본은 현재 일본의 동경대학과 한국의 부산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해제를 단 사람은 일본인 관변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다.2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러일전쟁에도 관계했다고 알려진 그는 필사본 비결모음서에 대한 해제를 앞쪽에 달면서 표지에 ‘정감록(鄭鑑錄)’이라 기재한다. 그가 분석한 필사본은 <감결(鑑訣)>로 시작했지만, 그는 <감결>을 책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다.23) 아유가이가 자신의 필사본 비결집을 ‘정감록’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권두의 해제를 통해 드러난다. ‘비결집에 반드시 정씨의 문답이 실려있어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이름이다’라고 밝힌 것이다.24)

아유가이는 자신이 ‘정감록’으로 명명한 필사본 비결집을 조선총독부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에 소장되어 있던 여러 종의 비결서 들과 비교 검토하여 내용의 차이를 분석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서 당시 총독부에 이미 적어도 총 7권의 비결서들이 소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은 필사본 비결집 여백에 아유가이가 남긴 메모로 알 수 있다. 아유가이가 필사본 비결집의 여백에 남긴 메모의 위치와 뜻은 다음과 같다.25)

  • ① 14번째 장 앞면 <감결(鑑訣)> 끝: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 소장(藏) 『정감록(鄭鑑錄)』의 기재(記載)는 전(全)적으로 쓰인[記] 것과 동일(同一)해서 일자(一字) 일구(一句)의 차(差)를 보이지[認] 않는다.

  • ② 14번째 장 뒷면 <무학전(無學傳)> 제목 밑: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 장서(藏書) 『무학비기(無學秘記)』는 <무학전>, <오백론사>, <오백론사비기>의 세 글을 포함한다.

  • ③ 18번째 장 뒷면 <도선비결(道宣秘訣)> 끝: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에 소장(藏)된 『도선비결(道宣秘訣)』과 비교(比較)하면 상기(上記) 결구(結句)의 존안(尊安) 이하(에는) 백 육십 자를 빠뜨렸다. (예를 들면 ‘壬申之間酉口不淸’云云) 다음 백 육십 자의 글은 26번째 장 뒷면 제3행의 <옥룡자기(玉龍子記)> 전문(全文)과 같다.

  • ④ 19번째 장 뒷면 <정북창비결(鄭北窓秘訣)> 끝: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의 장서(藏書)와 전체(全体) 동일(同一)

  • ⑤ 21번째 장 앞면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끝: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의 장서(藏書)와 전체(全体) 동일(同一)

  • ⑥ 22번째 장 뒷면 <남경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敬庵山水十勝保吉之地)> 끝: 이상(以上)(은)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의 장서(藏書) 『남사고비결』 내(內) 포함

  • ⑦ 23번째 장 앞면 <서산대사비결(西山大師秘訣)> 끝: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의 장서(藏書) 『서산대사비결』과 전체(全体) 동일(同一)

  • ⑧ 26번째 장 뒷면 <옥룡자기(玉龍子記)> 제목 밑: <무학전(無學傳)> 중(中) 16번째 장의 뒷면 제6행의 존안(尊安) 이하의 결문(欠文)은 바로 이곳의 <옥룡자기(玉龍子記)>의 전문(全文)을 가리킨다.26)

  • ⑨ 27번째 장 앞면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 제목 밑: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의 장서(藏書) 『서계가장결』과 동일해서 <삼봉도시>와 <서계이선생가장결>을 포함한다.27)

결국, 이 메모는 당시 총독부 학무과에 『정감록(鄭鑑錄)』, 『무학비기(無學秘記)』, 『도선비결(道宣秘訣)』, 『북창비결(北窓秘訣)』,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서산대사비결(西山大師秘訣)』, 『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의 7가지 비결서가 각각 독립된 문헌으로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이 비결서 들은 총독부에서 경성제대 그리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관되어 현재도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된다.28) 여기에 더해 아유가이의 메모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과 『두사총비결(杜師聰秘訣)』이 현재 총독부 도서로 더 확인되며 내용도 거의 같다.29) 결국, 1913년 당시 적어도 총 9가지의 독립된 비결서 들이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오늘날 통상 ‘정감록’으로 포괄되어 지칭되는 대부분 비결은 각각 독립적으로 전해지거나 하나로 묶여 소장되다가, 국권 침탈 전후로 일제에 의해 수집되고 연구되다가 1920년대 이후 활자화되면서 ‘정감록’으로 명명된 것들이다. 즉 다양한 비결들이 모두 ‘정감록’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와 이에 동조하던 일본 관변학자들이 비결서에 대한 민중들의 신앙을 이용하여 한일 강제 병합을 정당화하거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여러 비결서 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하나로 묶인 비결들을 모두 당시 가장 유명했던 비결서인 ‘정감록’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된 것이다.30) 실제 원(源) 『정감록』이 존재하고 이것이 현대 『정감록』의 일부분에 불과하기에 조선 시대의 원(源) 『정감록』과 현대 『정감록』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31)

그렇다면 많은 비결서 중 하나였던 원(源) 『정감록』이 한국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점은 언제인가? 필자가 검토한 바로는 『정감록』은 영조 15년 5월 15일(음)의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3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890책 영조 15년 5월 15일 기사에 ‘鄭鑑錄’을 ‘正鑑錄’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조가 ‘정감록(正鑑錄)’이 어떤 책인지 묻자 좌참찬이었던 조현명이 ‘참서비기지류(讖書祕記之類)’, 즉 참서로 비결이라고 대답하는데 아마 『승정원일기』 기록자는 당시 정감이 사람 이름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33)

이처럼 1739년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정감록』이라는 비결서는 1913년 아유가이라는 일본 관변학자에 의해 한국의 모든 비결서를 포괄하는 서적으로 명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또 다른 일본 관변학자인 호소이 하지메가 결이 다른 여러 비결들을 모두 혹세무민의 미신으로 몰아 『정감록』에 합쳐서 활자화했다.34) 그 결과 많은 연구자는 20세기 초반 정책적 상업적 이유로 수집 간행된 특정 판본의 『정감록』을 토대로 현전 도참 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정감록』 혹은 <감결>을 별다른 근거 없이 조선 후기 예언문화 전체의 원형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35) 『정감록』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비결서 들의 단편을 모두 『정감록』으로 포괄하여 그 예언 사상의 특징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모두 『정감록』의 부록으로 여긴 것이다.

3. 증산 비결시의 전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증산이 종도 들에 외워준 예시 84절 한시를 추적해 보자. 아유가이는 자신이 ‘정감록’으로 명명한 『비결집록』 27번째 장 앞면의 <경주이선생가장결> 제목 아래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의 장서(藏書) 『서계가장결』과 동일해서 <삼봉도시>와 <서계이선생가장결>을 포함한다.”는 메모를 남겼다. 즉 <경주이선생가장결>ㆍ<삼도봉시>ㆍ<서계이선생가장결>을 합치면 『서계가장결』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100여년전인 1913년 아유가이는 『전경』 한시의 원형으로 추측되는 <삼도봉시>가 『정감록』이 아닌 『서계가장결』이라는 비결서에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36)

그렇다면 『서계가장결』은 어떤 문헌인가? 『서계가장결』은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의 비결로 통상 알려져 있다.37) 현재 대부분 비결서 들이 지은이를 가탁(假託)하여 비결 제목으로 삼았다고 여겨지는데 『서계가장결』은 서계가 지은 것이라 여겨지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8) 서계의 본관이 경주(慶州)이기에 『서계가장결』은 『경주이선생가장결』로 불리기도 하는데 앞부분, 즉 『비결집록』의 <경주이선생가장결>에 해당하는 부분은 <토정가장결> 가운데 부분과 거의 같다.39) 그 뒤로 <삼도봉시> 등 7자로 된 한시 68구가 있고 다시 비결이 뒤따르는데 간지를 상징하는 용어를 국운, 사건, 세태, 피난법 등과 조합한 것이다.40) 마지막은 간지로 표시된 시점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때는 어느 곳으로 피난하여야 하며, 어느 비기(秘記)에는 어떻게 쓰여 있다는 등의 내용과 시세(時勢)를 논한 사자구(四字句)를 나열한 후 후손에게 하는 당부의 말로 비결을 마무리하고 하고 있다.41)

그 구성과 내용으로 본다면 『서계가장결』의 실제 지은이를 서계라 볼 확실한 근거는 없다.42) 그런데도 현재까지 서계의 저작으로 말해지는 것은 아마도 서계의 예지력에 관한 서사 때문일 것이다.43) 서계는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제자인 서기(徐起, 1523~1591)와 박지화(朴枝華, 1513~1592)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당대에는 박지화와 함께 역학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는 1602년 주역(周易)의 주를 교정하기 위한 설국(設局)이 있자 역학에 밝은 자를 가려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서계가 우선하여 선발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이와 연관되어 그의 예지력에 관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과 묘갈명(墓碣銘)에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이득윤(李得胤)이 죽었다. 처음의 이름은 덕윤(德胤)이고 자는 극흠(克欽)으로 경주인(慶州人)이다. … 서울에 와 사은하는 길에 도성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하였는데, 정묘년에 이르러 그가 한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44)

내가 계해년 겨울 예문관(藝文館)에 있을 때 일찍이 공의 상소를 보았는데 비록 상세하지 않지만 대략 오음(五音)으로 사람들을 살피니 조화를 잃어 변란이 있을까 두렵다는 내용이었다. 역적 이괄(李适)의 반역 기미가 없을 때였기에 이를 마음속으로 괴이하다 생각했다.45)

이상의 서사들은 대부분 서계가 역학에 능통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하나였으며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지녔던 기인이었음을 자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결국, 서계가 지닌 서사가 그가 『서계가장결』을 저술했다는 주장의 개연성을 강화했고 『서계가장결』이 『정감록』으로부터 그 독립성을 장시간 확보할 수 있도록 이바지했다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말세의 징후를 전쟁에서 찾는 『정감록』과는 달리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고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나가는 최고의 방법이라 주장하여46) 그 사상적 지향점을 『정감록』 달리했다는 점도 『서계가장결』이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결론짓자면, 『전경』 예시 84절의 한시를 증산이 『정감록』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다. 이 한시는 통상 서계 이득윤이 지었다고 민간에 알려진 비결시이며 증산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서계의 저작으로 회자하였던 『서계가장결』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시대의 지평에서 보면 증산이 외운 옛글은 정확하게는 『서계가장결』의 <삼도봉시> 마지막 8구를 변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Ⅲ. 대순사상과 『정감록』의 관계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증산이 “『정감록』의 예언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 한시는 정씨의 계룡산 건국설을 주제로 하는 조선 시대 원(源) 『정감록』과는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해당 한시를 근거로 증산 및 대순사상과 『정감록』 간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 근거를 잃는다.

하지만 증산의 『정감록』 인용이 이 한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은 이미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지형체선지조화유지범절(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 “ … 천개어자 … 지벽어축 … 인기어인( … 天開於子 … 地闢於丑 … 人起於寅)”47), “ …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 ”48) 등의 증산이 남긴 글과 비결시의 주요 내용이 『정감록』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이다.49) 하지만 이 세 가지 어구를 통해 대순사상과 정감 비결의 유사성을 차이의 관점에서 보면 양자 사이에는 교집합의 관계는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먼저 “천개어자 지벽어축 인기어인(天開於子 地闢於丑 人起於寅)”의 어구를 살펴보자. 이 어구는 『정감록』의 이본으로 평가되는 『징비록』, 『운기구책』, 『요람역세』 등에 수록되어 있는데50) 이것 들이 증산보다 앞선 시대에 성립된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증산이 이를 인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허점을 지닌다. 증산이 이 어구를 『정감록』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 들도 인정하듯이 이 어구는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자학이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의 지평에서 본다면 이 어구는 일상적으로 쓰이던 말인 것이다. 춘향전이라는 대중 소설과 판소리에서조차 재담으로 사용되던 유명 어구를51) 증산이 『정감록』에서 인용하였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증산의 사상 전체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증산이 『정감록』에 심취하였다는 결론을 이미 내린 채 그 사상을 연구한 결과다. 증산은 소강절을 예지에 있어 최고의 인물로 평가했고 소강절의 사상을 계승한 주자를 유교의 종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한다.52) 굳이 증산이 이 어구를 『정감록』의 맥락에서 인용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어구를 통해 우리는 대순사상과 정감 비결이 같은 텍스트를 활용하고 변용하는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 “ …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이라”는 비결시를 살펴보자. <이토정비결>과 『운기구책』에는 증산이 남긴 비결시의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와 유사한 표현이 있다. “모악산두 금불능언(어)[母岳山頭 金佛能言(語)] 천관산변(하) 금인봉옥(새)[天冠山下(邊) 琴人奉璽(玉)]”의 구절인데 바로 이어서 또는 몇 구 뒤에 “일룡(뇌)도해삼군[一龍(雷)渡海三軍]”의 어구가 따른다.53) 증산은 『정감록』의 중요 주제를 함축한 구절을 변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증산이 『정감록』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비결서의 어구는 해당 시점이 되면 “모악산 정상의 금불, 즉 미륵 또는 초월적 존재의 계시나 징표가 확실해지면 정씨 진인이 천자의 위에 오르며 해도에 준비된 삼군이 바다를 건넌다.”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정감록』의 주제와 직결된 내용이다. 『운기구책』과 <이토정비결>은 증산의 생전에도 존재했던 비결들이기에 증산이 이를 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증산은 이 어구를 변용하여 사용한다. 뒤집는 것이다. 바로 모악산두를 모악산하로 전환하는데, 이는 모악산의 금불, 즉 미륵으로 상징되는 신적 존재가 천상을 의미하는 산상을 벗어나 지상을 의미하는 산하에 강림함을 은유한 것이다. 따라서 금불의 천명을 받아 천자에 등극하는 금인은 더는 존재할 필요도 없으며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결국, 증산은 변용을 통해 정감의 비결을 해체함으로써 비결을 이용하여 왕조의 교체를 도모하는 이들을 견제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담론인 새 천자 등극의 비결 대신 금불, 즉 미륵이 하생하여 강(姜) 성의 인간으로 왔다는 종교적 구원의 메시지를 ‘화위전녀(化爲全女)’의 어구를 통해 암시한 것이다.54) 정감의 비결을 이용하여 정감의 비결을 비판하고 새로운 비결을 던져놓은 행위를 『정감록』의 영향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지형체선지조화유지범절(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의 어구를 살펴보자. 이 어구는 대순 신앙과 사상이 지닌 유불선 조화 방식을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전범이다. 따라서 이 글이 조선 시대 『정감록』에 존재하고 증산이 이를 인용하거나 변용하였다면 『정감록』이 증산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게 된다. 1995년 처음 이러한 주장을 제기한 김탁은 1981년 간행된 『정감록집성』의 『초창결(蕉蒼訣)』에 이 어구가 있음을 지적했다.55) 필자는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글자의 차이가 있는 다른 필사본도 존재함을 알 수 있었는데 비결의 명칭이 ‘초창결(蕉蒼訣)’이 아니라 ‘초창결(蕉窓訣)’ 또는 ‘초창록(蕉窓錄)’, ‘남초창결(南蕉窓訣)’이다.56) 여러 판본 중 그 출처가 가장 명확하고 정확하다고 보여지는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초창록』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판본을 조합하면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57) “大抵鄭氏之運鬼神世界儒佛仙三道(家)合爲一家佛爲宗主無傷殘之事佛之形體儒之風節仙之造化鷄龍山運會白日昇天此此有之矣美哉此時運也擧世都是蓮花世界也[대개 정씨의 운은 귀신 세계로 유, 불, 선 삼도(가)를 합쳐서 일가를 이루는데, 불이 종주가 되어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다. 불의 형체, 유의 범절, 선의 조화가 계룡산의 운에 모이면 대낮에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됨이 빈번히 있게 된다. 아름답구나! 이때의 운이여! 온 세상 모두 연꽃 세계이다.]” 『정감록집성』의 『초창결(蕉蒼訣)』은 ‘儒之凡節’을 ‘儒之風節’로 표기하고 있어 김탁은 증산이나 종도들이 풍(風)을 범(凡)으로 잘못 옮겼다고 주장했다.58) 하지만 필사시기가 더 오래되었다고 판단되는 판본은 대부분 유지범절로 필사되어 있다. 따라서 오히려 이 비결서 필사와 전승과정에서 ‘유지범절’이 ‘유지풍절’로 오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59)

비결의 서두에 반계공, 즉 실학자인 반계 류형원(柳馨遠, 1622~1673)의 아들이 반계가 은거한 옹정 4년, 반계를 시종하며 미래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기에 ‘초창’은 유형원의 외아들인 류하(柳昰, 1642~1699)의 호로 봐야 한다. 하지만 판본중에 자신들의 성을 남씨라고 하거나 초창을 격암 남사고의 후손이라 한 판본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모순된다. 이 비결을 실제 류형원과 아들 류하나 남사고 후손의 문답으로는 생각할 수는 없다. 문답이 이루어진 시점인 옹정 4년은 1726년으로, 류형원과 류하 모두 사망한 후다.60) 사후인 영조 시대 크게 이름을 떨친 반계의 명성에 기대어 가탁한 비결로 보인다.

이에 근거하여 『초창결』의 성립연도를 옹정 4년, 또는 반계가 명성을 얻은 영조시대 이후인 18세기 초중반으로 추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용상 18세기에 이루어진 문답으로 보기 어려운 용어와 역사적 사실이 많이 등장한다. 18세기의 예언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19세기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의 역사적 사실들과 고유명사 및 개념들을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등장하는 동학(東學), 광무(光武), 선통(宣統) 등의 고유명사를 비결서 특유의 은유나 암시 없이 밝히고, 양요(洋擾), 외척의 전횡과 군란, 고종의 칭제와 관제개혁, 외국과의 조약에 따른 국채 증가와 국고 고갈, 의병의 발호와 실패, 이토 히로부미의 국권 찬탈, 고종의 선위, 융희(隆熙) 4년의 국권 침탈 [일한연합], 오백 년 종사(宗祀)의 종말, 구학문 철폐 신학문 수립, 동북 천 리의 철마 왕래와 성시와 도회지의 전등 연결, 비대면 만국 통신과 비행기의 등장, 선통제 폐위와 청의 종말, 만주국 건립과 선통제 복위, 중일 전쟁, 남북 수도의 철수와 폐허, 국부(國府) 이전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정확히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61)

실제 역사를 기록했다고 할 만큼의 정확성을 지닌 비결서 『초창결』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타났다면 아마도 시대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예언의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한계 시점인 1950년 이전에 『초창결』은 공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62) 결국, 『초창결』은 빨라도 1950년대 이후에 기존 저본이나 다른 비결서를 창작 수준으로 재편집하면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63) 100% 적중에 가까운 1950년 이전의 예언과는 달리 그 이후의 예언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과64) 『초창록』에서 진경(眞經)의 소재를 기재한 책으로 지칭된 『격암록』이 일러야 1950년을 전후로 그 존재와 내용이 공개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65)

『초창결』이 기존의 비결서나 저본을 토대로 재편집 된 연유는 무엇일까? 『초창결』에 나타나는 다음의 몇 가지 예언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① 진주(眞主)는 하늘이 내린 성인(聖人)이다.

  • ② 말년에 하늘에서 내린 질병은 큰 나라도 그 명을 보존하기 어렵다. 병명이 없는 급질은 산사태와 해일처럼 세계를 휩쓴다.

  • ③ 2차 일중간의 전쟁으로 천안 이북은 호병이 가득하게 된다.

  • ④ 진주가 출세하여 금산사에 도량을 펴 창생이 요순세계를 만나도록 한다.

  • ⑤ 성인이며 신도 알지 못하는 신술을 사용하는 진주를 2존사, 12신인, 800법사가 따른다.66)

위의 예언들을 통해서 본다면 일제 강점기까지도 풍수도참에 기반하여 역성 혁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정씨 계룡산 도읍설은 『초창결』에 이르러서는 질병과 전쟁에서 창생을 구제하여 지상 낙원으로 인도하는 신과 같은 권능을 지닌 진주의 출현이라는 종교적 담론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것은 동학에서 시작되어 증산 종단으로 이어진 개벽설과 지상천국 실현의 종교적 구원신앙이 『정감록』의 혁세 담론과 융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동학과 증산 종단의 종교 운동에 의해 구원신앙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고 이는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던 정감 비결과 상호 작용을 한 것이다.67) 특히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에서 민중들의 지지를 얻던 증산 종단들의 교리와 예언들도 이후 비결서들과 융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68)

위에 나열한 『초창결』 내용이 증산의 예언과 큰 틀에서 유사성을 보여줌은 이를 뒷받침한다. 진법을 세우고 도통을 행하는 진주의 출현, 피하기 어려운 병겁인 급살병의 도래, 두 번의 청일 전쟁과 한수 이북 호병 침입, 금산사에서 시작되는 조화 세상과 다시금 출현하는 요순의 도, 무소불능의 경지에 이른 12,000의 도통군자의 출현과 지상 낙원 건설 등은 이미 증산이 생전에 예언한 것들로 위에 나열한 초창결의 예언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69)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빨라도 1950년대에 재편집되었다고 볼 수 있는 비결서인 『초창결』에 증산의 “불지형체선지조화유지범절(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증산이 『정감록』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산의 사상이 『초창결』에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이다. 이 외에도 증산이 쓴 글귀인 “귀신세계(鬼神世界)”나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其時 人有其人]”이라는 시가 초창결에도 나타나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70) 결국 “불지형체선지조화유지범절(佛之形體仙之造化儒之凡節)”의 어구는 대순사상이 새로운 정감 비결 구축에 영향을 미치는 역방향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증산이 일관되게 『정감록』에 대해 부정적이었음은 정씨의 계룡산 도읍 비결에 대한 일화로도 명확히 알 수 있다.71) 증산은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 즉 『정감록』이 현실성이 없는 허황한 비결이며 미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담론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비판 외에도 은유로써 『정감록』의 실패를 예언하기도 한다. 바로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 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는 언설이다.72) 증산은 시속의 유행어인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을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의 허망함으로 해석하고 『정감록』의 비결이 실현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대중들의 『정감록』에 대한 맹신이 사라지지 않을 것 또한 예상하면서 이를 안타까워한 것이다.

증산에게 있어 정감의 노래, 『정감록』은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를 받는’ 역성(易姓)혁명과 같은 상극을 초래하고, 더 나아가 후천의 정사를 어지럽힐 수 있는 역도(逆度)를 의미했기에 공사를 통해 그 기운을 풀어 소멸시켜야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73) 따라서 『정감록』의 예언을 활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거나 설파할 이유는 없었다. 재민 혁세(災民革世)를 비판하고 상생(相生)의 도를 통한 화민 정세(化民靖世)를 지향한 증산이 역성(易姓)혁명의 중심 이데올로기로 활용되던 『정감록』의 비결에 대해 표리부동의 모순된 입장을 가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74) 이는 당시 통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경전 『맹자』조차도 가차 없이 비판한 증산의 언행을 본다면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75)

Ⅳ. 나가며

이상에서 증산이 『정감록』에 심취하고 그 담론을 활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였다는 주장을 원점에서 재검토한 결과는 명확하다. 문헌의 맥락에 대한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 없이 기계적인 비교 만을 통해 사실관계를 오인했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를 다시 정리하는 대신 유사한 연구에 있어서 어떠한 관점과 방법이 더욱 종합적인 대순사상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본 연구에서 검토된 증산의 비결시를 통해 시론적인 논의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경』 예시 84절의 한시 원형이 서계 이득윤의 저작인지는 충분히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원래 한시의 의미와 맥락을 서계를 통해 추론하고 이를 기반으로 증산의 은유가 무엇인지를 추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증산은 역사적 서사와 설화적 서사가 공존하는 경우 원의 서사, 즉 원한을 지닌 약자에 의해 전승된 서사를 채택하고 이를 기반으로 천지공사를 전개한다. 대표적으로 진묵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 서사와는 정반대인 설화적 서사를 기반으로 진묵을 해원하는 것이다.76)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증산에게 있어 한시와 관계된 역사적 서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증산은 한시에 얽힌 당대의 담론을 활용할 뿐이다. 조선 시대 대부분 비결은 비주류나 약자의 것이었고 따라서 비결시의 저자가 이들에 의해 서계로 믿어졌다면 증산은 이 믿음을 선택하고 관련 서사를 공사에 활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시 84절의 한시가 지닌 의미와 그 사상적 특징을 밝히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서계가 지닌 서사를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증산의 문헌을 통해 그 사상을 연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많은 후속 논의를 구한다.

Notes

가장 대표적인 것은 김성환의 주장으로 증산이 외가 쪽 선조인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의 “정신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권극중은 조선중기인 17세기에 증산의 외가가 있던 고부 서산리 지역에서 활동했던 성리학자이며 도교학자이다. 김성환, 「한국 선도의 맥락에서 보는 증산사상」, 『대순사상논총』 20 (2009), p.329 참조.

윌리엄 페이든, 『비교의 시선으로 바라본 종교의 세계』, 이진구 옮김 (파주: 청년사, 2004), p.19 참조.

김방룡은 2009년 증산 사상 연구 상황을 검토하면서 증산 사상에 관한 철학적 종교학적 주요 주제에 대한 담론이 심도 있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방룡, 「증산사상의 연구 동향과 대순사상의 학문적 과제」, 『대순사상논총』 20 (2009), p.59 참조.

『전경』, 예시 73절 참조.

김탁, 『조선의 예언사상』 (성남: 북코리아, 2016), pp.540-542 참조.

김탁, 『일제강점기의 예언사상』 (성남: 북코리아, 2019), p.289, p.331, p.364, p.375, p.397, p.431, p.482, p.500 참조.

김탁, 『조선의 예언사상』 p.542 참조.

1990년대부터 이를 주장한 가장 대표적인 연구자는 김탁이다. 김탁, 「증산 강일순이 인용한 한시 연구」, 『한국종교』 19 (1994), pp.81-84; 김탁, 『조선의 예언사상』, pp.540-542 참조.

『전경』, 권지 2장 29절.

김탁은 가장 유사한 시가 『유산결정감록(遊山訣鄭鑑錄)』의 <윤고산여겸암문답(尹孤山與謙菴問答)>에 수록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김탁은 『유산결』을 『유산결정감록』으로 <윤고산여류겸암문답>을 <윤고산여겸암문답>으로 표기했다. 김탁, 앞의 글, p.83; 안춘근 편, 『정감록집성』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1), p.73 참조.

원문의 <윤고산여류겸암문답(尹高山與柳謙庵問答)>으로 본다면 高山은 孤山의 오기로 필사 과정의 실수나 착간이다. 다른 비결 부분과는 달리 윤고산과 류겸암의 문답이 끝난 다음 삼도봉시의 마지막 8구가 전혀 맥락 없이 수록되어 있어 필사한 원본 자체가 불완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필사 과정에서 앞부분이 유실되어 가장 뒤의 팔구만 남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완산(完山)은 전주이며 백(伯)은 우두머리나 백작(伯爵)을 의미한다. 실제 고려에서 완산백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이는 이자선(李子宣, 1331~1356)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부인 도조(度祖, ?~1342) 이춘(椿)의 셋째 아들이다. 후에 완원대군(完原大君)으로 추증되었다.

시 뒤로도 <윤고산비결(尹高山秘訣)>과 <청학동비결(靑鶴洞秘訣)>이 이어진다. 윤고산(尹高山), 류겸암(柳謙庵)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와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오기이다. 겸암 류운룡은 서애 류성룡의 형이다. 두사람 모두 후대에 신비한 능력이나 풍수 도참과 관련된 설화로 유명했다.

안춘근 편, 앞의 책, p.8, p.871 참조.

이에 관해서는 백승종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백승종, 『한국의 예언 문화사』, (서울: 푸른역사, 2006) pp.233-234 참조. 호소이 하지메 (細井肇, 1886~1934)는 동경 아사히 신문의 기자로 우치다 료헤이의 한일 합병 운동을 지원하고 1920년대에는 식민지배를 위한 조선 민족 연구 사업을 전개한 인물이다.

細井肇 編著, 『鄭鑑錄』 (東京: 自由討究社, 1923), pp.20-21 참조.

백승종,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0) 현대판 정본 정감록의 배후를 찾아라」, 《서울신문》 2005. 5. 26, 26면 참조.

백승종은 현병주의 『批難鄭鑑錄眞本(비난정감록진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또는 194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안춘근이 편찬한 『鄭鑑錄集成』에 서지사항이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온전한 판본을 찾을 수 있으며 서지사항에 대정 12년 4월 18일로 발행 시기가 특정되어 있다. 이는 한승훈에 의해서 2019년 이미 지적된 바 있기도 하다. 백승종, 『한국의 예언 문화사』, (서울: 푸른역사, 2006) p.238; 현병주 편, 『批難鄭鑑錄眞本』 (京城: 槿花社, 1923), pp.72-73; 한승훈, 「조선후기 변란의 종교사 연구: 추국 자료로 본 반란과 혁세 종교」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p.125 참조.

각 편집자들간의 수집자료와 비결들 간이 주종 관계 구분 방식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백승종이 자세히 분석한 바 있다. 백승종, 같은 책, pp.239-260 참조. 본 연구에서는 제목이 달린 글을 하나로 보고 <삼도봉시(三道峯詩)>에 이어지는 <무제(無題)>의 시를 별도로 하여 25종으로 하였다.

『秘訣輯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서고 청구기호: (古書) 奎 7568]; 백승종, 같은 책, pp.247-254 참조.

이에 관해서는 백승종이 이미 2005년 밝힌 바 있다. 본 연구자는 백승종이 문헌을 찾았다고 주장한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해당자료를 찾지 못하였고 해당 자료가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에 원본이 있고 부산대학 도서관에 복사본이 있음을 확인한 후 부산대학 도서관 자료를 통해 연구를 진행했다. 백승종, 같은 글, 26면 참조. 『鄭鑑錄』 (1913)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 소장 등사판 청구기호: 漢籍小倉 44771]; 『鄭鑑錄解題』 (1913) [부산대학도서관 소장 등사본 청구기호: OMO 3-10 4] 참조.

이에 대해서는 백승종이 최초로 밝혔고 자세히 연구했다. 백승종, 같은 글, 26면 참조.

『鄭鑑錄』 (1913) [일본 동경대학 도서관 소장 등사판 청구기호: 漢籍小倉 44771), 『鄭鑑錄解題』 (1913) [부산대학도서관 소장 등사본 청구기호: OMO 3-10 4] 참조.

같은 책, p.1.

최초로 아유가이의 메모에 주목하고 이를 부분적으로 해석하여 소개한 이는 백승종이다. 백승종, 앞의 글 참조. 하지만 메모에 대한 해석이 부분적이고 빠진 곳도 있어서 본 연구에서는 메모 전체를 모두 분석하여 번역했다.

이 부분의 아유가이 메모는 착오가 있다. 도선비결을 무학전으로 쓰고 있다.

아유가이는 삼도봉시를 삼봉도시라 오기하고 있다.

『鄭鑑錄』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1]; 『無學秘記』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2]; 『道宣秘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3]; 『北窓秘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4]; 『南師古秘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5]; 『西山大師秘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6]; 『西溪家藏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8] 참조.

필자가 대조해본 결과 내용은 거의 같다. 『土亭家藏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9]; 『杜師聰秘訣』 [규장각서고(古書) 奎 12377] 참조.

아유가이가 비결집을 ‘정감록’으로 명명하면서 해제를 썻던 것은 비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한일합방 합리화 등 식민지배의 정당화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였다고 할 것이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해제 내용으로 알 수 있다. “ … 즉, 조선의 풍수설이라는 것은, 신라 대(代)에 있어 도선 등의 고승(高僧)이 당나라 승려 일행(一行)의 지리설을 전해 받은 것이 그 시초가 되었고, 고려ㆍ조선에 이르러 불교와 함께 성행하여 세간에 유포되었다. 고려 말의 고승 무학대사가 창도(唱導)한 이래, 이조에 이르러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풍습(관습)이 되어, 당당한 유학자조차도 이를 존중해서 믿을 정도에 이르렀고, 뿌리 뽑을 수 없는 하나의 습속을 형성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풍수설이 믿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는 잠시 논외로 하고, 동요가 참언이라는 동요위참(童謠爲讖)의 속담처럼 역시 일률적으로 배척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조오백년망(亡)’이라는 것은 우리가 명치 년에 한국에 건너올 당시 이미 귀에 익숙했던 참언이었다. 또 ‘聖歲(庚戌)之望漢陽之運移去紅日之下(한양의 운을 경술년에 바라보니 붉은 해 아래로 옮겨간다)’라고 하는 것도, 러일전쟁 전 이미 우리의 귀에 익숙하던 참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깊은 흥미를 갖고 계속 관찰해 온 것이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가 이 책을 바보[痴人]의 꿈 얘기라 하여 한마디로 배척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이다. 즉, 조선인의 신앙 및 습속을 연구하는 데 있어, 하루도 빼먹을 수 없는 참고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조선인 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이 신앙과 습속 위에서 태연하게 잘살고(平然晏居)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책 중에 은어가 많아 읽고 그 뜻을 알기가 어렵다는 것뿐이다.” 『鄭鑑錄解題』 (1913), p.6.

백승종은 “1910년대 초반까지 『정감록』의 본체는 아유가이가 감결이라 이름한 비결이었으며, 거기에 3편의 부록, 즉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 <역대왕도본궁수> 및 <삼한산림비기>가 포함된 것이다.”라고 하여 원(源) 『정감록』은 현대 『정감록』이 공통으로 수록한 25개의 비결 중 <감결>ㆍ<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ㆍ<역대왕도본궁수>ㆍ<삼한산림비기> 4개로 구성되었음을 밝혔다. 백승종, 앞의 책, p.259 참조.

『승정원일기』 890책, 영조 15년 5월 15일 경신 30/30 기사 참조. 본 연구자와 같은 주장은 한승훈에 의해 2019년 이미 이루어진 바 있다. 한승훈, 앞의 글, p.91 참조. 백승종은 『비변사등록』 영조 15년 (1739) 6월 15일(음)의 기사를 근거로 1739년 6월 15일을 주장한다. 백승종, 같은 책, pp.78-80 참조. 김탁은 1739년 6월 9일을 주장하는데 『승정원일기』 892책 영조 15년 6월 9일 갑신 36/36 기사를 근거한 것이다. 김탁, 「정감록 출현의 역사적 과정과 의의」, 『충청문화연구』 20 (2018), p.35 참조. 조선왕조실록의 정감록 관련 기록은 『영조실록』 영조 15년 8월 6일 기사에서 ‘정감의 참위서[정감참위지서(鄭鑑讖緯之書)]’라 지칭된 것이 처음이다.

『승정원일기』 890책, 영조 15년 5월 15일 경신 30/30 기사. 이러한 문답이 오고 간 내력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김신회의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김신회, 「‘정감록’ 기억의 형성과 예언서 출현: 1739년 이빈(李濱)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84 (2018), pp.235-249 참조.

이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된 새 국가에 대한 희망을 비결서에 대한 믿음으로나마 지키려 했던 한국 민중들의 희망의 불씨를 끄기 위해서라 판단된다. 백승종,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서울신문》 2005. 5. 19, 22면 참조. 호소이가 권두에 ‘정감록의 검토’라는 단락을 두고 계룡산에 정씨가 건국한다는 참언(讖言)이 여러 종교와 독립운동에 어떻게 악용되었고 실패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나열한 것으로 이러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안춘근 편, 앞의 책, pp.667-673 참조.

백승종, 앞의 책, pp.229-260; 한승훈, 앞의 글, p.7 참조.

『서계가장결』 1면에는 서울대학교도서라는 인장 아래 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의 인장이 있다. 『서계가장결』 참조.

서계의 저작에 『서계가장결』을 포함하기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093 (2020. 11. 19 검색) 참조.

한국고전번역원의 『서계집』 해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청 서기(孤靑 徐起)와 수암 박지화(守庵 朴枝華)의 문인으로, 역학(易學)에 밝았으며 그가 남겼다는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은 「정감록(鄭鑑錄)」의 일부로 되어있다.” 규장각의 『서계가장결』 해제는 “이득윤(李得胤)이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적어 놓은 비결(秘訣)”로 소개하고 있다.

안춘근 편, 앞의 책, pp.586-587, 593-594 참조.

『서계가장결』 내용을 분서해 보면 <삼도봉시> 부분이 가장 정감 비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서계가장결』 끝부분에 “略陳來事 以曉後生 一念在玆須從此示(간략히 앞일을 늘어놓으니 후손들에게 일러주어 일념으로 잊지 말고 반드시 이 가르침을 따르라)”라는 글이 있다.

백승종은 이에 대해 19세기 후반 그 이름을 빌려 위작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서계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정을 반영하는 부분과 그 특징으로 본다면 서계의 본뜻을 담고 있는 대목도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백승종,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 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서울신문》, 2005. 7. 28, 26면 참조.

『서계선생문집』의 행장과 묘갈명, 규장각의 『서계가장결』 해제, 한국고전번역원의 『서계선생문집』 해제, 그리고 이종관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 『서계집(西溪集)』은 『서계선생문집』이라고도 한다. 이종관, 「청주 사림의 학맥과 서계 이득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Journal of the Korea Academia-Industrial cooperation Society』 16-2 (2015) pp.1092-1100 참조.

『인조실록』, 인조 8년 (1630) 5월 28일.

이경석, 「묘갈명병서(墓碣銘並序)」, 『서계선생문집』 4권.

백승종, 앞의 글, 참조.

『전경』, 공사 3장 39절.

같은 책, 예시 14절.

김탁, 「한국종교사에서의 증산교와 민간신앙의 만남」, 『신종교연구』 2 (2000), pp.220-226; 김탁, 『일제강점기의 예언사상』, p.331, p.336 참조.

안춘근 편, 앞의 책, p.485, p.501, p.515.

“천개자시생천 하니 태극이 광대 하늘 천, 지벽축시생후 하니 오행팔괘로 따 지” 김진영 외 역주, 『춘향가 명창 장자백 창본』 (서울: 박이정, 1996), p.55.

『전경』, 교법 2장 42절; 교운 1장 65절.

안춘근 편, 앞의 책, p.497, p.601 참조.

대순 신앙에서 전녀(全女)는 증산의 성인 강(姜)의 파자로 이해된다.

김탁은 다른 비결서인 『요람역세』에도 있다고 했지만, 해당 문헌에서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佛之形體儒之風節仙之造化”가 발견되는 비결서는 현재까지 『초창결(蕉蒼訣)』이 유일하다. 김탁, 「한국종교사에서의 증산교와 민간신앙의 만남」, 『월간천지공사』 68 (1995), p.22 참조.

한국국학진흥원에는 2007년 수집 소장된 『초창록』이 있는데 의성 김씨 지촌 김방걸(芝村 金邦杰) 종가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고문서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961년 필사된 『초창록』과 경신년(1920) 필사한 것으로 주장하는 『남초창결(南蕉窓訣)』이 있다. 고서 경매 시장에서도 『초창록』과 『남초창결(南蕉牕訣)』을 볼 수 있다. 『蕉窓錄』 [한국국학진흥원 06447]; 초창, 『蕉窓錄』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1961)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1496-54]; 남도순 편, 『南蕉窓訣』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1496-45] 참조.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초창록』은 의성김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기록으로 다른 비결서와 합본되어 있지 않으며 중간 중간 『초창결』에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 보인다. 특히 뒤로 『초창결』에 없는 200-300 글자가 더 있다. 또한 글의 마지막에 쓰여진 시기와 저자가 기술되어 있다. 더하여 다른 판본과 달리 1977년 공개된 『격암유록』이라는 서명을 언급하지 않고 모두 『격암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로 본다면 『격암유록』이 알려지지 않았을 시점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가장 필사 시기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남초창결』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초창록』과 유사하나 누락된 부분이 일부 있어 보인다. 서문에 저술된지 300년 후인 경신년(1920) 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서문 자체에 만주국 성립을 의미하는 만몽합국의 비결을 근거로 이 비결서의 정확성을 평가하고 있어서 만주국 성립시기인 1931보다 필사년이 이를 수는 없는 판본이다. 1998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고서로 등록된 『초창록』은 신축년(1961) 필사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한글로 된 약초재배법이 합본되어 있어 그 필사시기가 『남초창결』보다 이를 수는 없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두 필사본은 모두 1977년 공개된 『격암유록』을 그 내용에 언급하였기에 그 필사 시기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보다 더 뒤일 것으로 추정된다. 『蕉窓錄』 [한국국학진흥원 06447]; 안춘근 편, 앞의 책, pp.157-174; 남도순 편, 『南蕉窓訣』; 『蕉窓錄』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1961) 참조.

안춘근 편, 앞의 책, p.171; 김탁, 앞의 글, p.22 참조.

『초창록』, 『남초창록』은 대부분 유지범절로 표기되어 있으며 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은 절(節)자가 누락되어 있다.

안춘근 편, 앞의 책, p.157 참조.

같은 책, pp.158-162 참조. 증산이 『초창결』을 인용하였다고 주장한 김탁 역시 초창결의 이러한 문제점을 상세히 지적하고 있다. 김탁, 『일제강점기의 예언사상』, pp.35-37 참조.

처음 『초창결』이 알려진 시기는 1960년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창결』의 다른 판본이라 할 수 있는 『초창록』 중에는 1961년 필사된 것이 존재한다. 『蕉窓錄』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1961) 참조.

김탁은 초창결의 필사 시기를 1930년대 이후로 보고 있다. 김탁, 앞의 책, p.37.

국부(國府), 즉 국가 기관의 부산 이동 [국부이산(國府移山)] 이후 예언은 급질의 발생, 2차 중일 전쟁, 천안 이북 호병 점령, 세계대란 발생, 팔정지란(八鄭之亂)[정씨 8명, 이씨 7명, 조씨 2명 간의 쟁투], 생존한 3명 호걸의 집권과 전횡, 정씨 진주의 남해안 상륙, 금산사 도량 설치, 세 호걸 제거, 계룡산 도읍, 800년 왕조 등등이다. 안춘근 편, 앞의 책, pp.166-174 참조.

『초창록』에는 “참된 경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격암록』이라.” 답하는 내용이 있다. 『蕉窓錄』 참조.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격암록』이 『초창결』 보다는 앞서 존재해야 한다. 『격암록』은 그 성립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최중현의 연구에 따르면 증언들이 모두 진실된다고 하더라도 『격암록』은 일러도 1940년대가 되어야 그 존재가 확인된다. 최중현, 「『격암유록』 이용세본의 저본(底本)들에 관한 소고」, 『신종교연구』 10 (2004), pp.113-121 참조. 『격암유록』의 경우는 시기가 더 늦다. 김하원에 따르면 『격암유록』은 전체가 조작된 것이기에 그 쓰인 시기를 증산이 활동하던 시대 이전으로 보는 것은 어렵다. 김하원, 『격암유록: 위대한 가짜 예언서』 (서울: 도서출판 만다라, 1995) 참조. 『격암유록』 전체가 조작되었다 단정할 수 없음을 주장한 최중현에 따르더라도 현 『격암유록』은 1960년 이후 여러 비결서 저본들을 재편집해 등장한 것이다. 인터뷰와 문헌분석을 통해 『격암유록』을 분석한 최중현은 『초창결』과 『격암유록』 중 어느 것이 앞서 존재했는지에 관해서는 유보적 견해를 표한다. 최중현, 「저본들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격암유록』 편집내역」 『신종교연구』, 19 (2008), pp.268-309 참조.

안춘근 편, 앞의 책, pp.163-174 참조.

김탁, 앞의 책, pp.248-504 참조.

최중현의 연구에 따르면 1955년 태극도의 오경석이라는 인물이 포교를 위해 소지하고 다니던 필사 자료가 『격암유록』의 중요 저본 중 하나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이 자료는 현재 대순진리회의 류 모 씨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초창결』과 깊은 관련을 지닌 『격암유록』의 편집에 증산으로부터 기원된 문헌이 사용되었을 개연성을 잘 보여주므로 초창결의 편집에도 증산이 남긴 교리나 예언이 직간접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최중현, 앞의 글, pp.281-283; 최중현,「『격암유록』 이용세본의 저본(底本)들에 관한 소고」, pp.114-115 참조. 동학의 경전과 비결서의 융합에 대해서는 최중현이 밝힌 바 있다. 최중현은 『초창결』과 깊은 관련을 지닌 『격암유록』의 편집에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의 <교훈가>가 저본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최중현, 「저본들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격암유록』 편집내역」, p.283 참조.

『전경』, 행록 2장 16절; 5장 29절; 공사 1장 36절; 교운 1장 9절; 34절; 38절; 41절; 42절; 46절; 권지 1장 11절; 예시 1절; 14절; 15절; 17절; 43절; 45절 참조.

같은 책, 예시 46절;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79), pp.103-104; 안춘근 편, 앞의 책, p.163, p.171 참조.

『전경』, 교법 3장 39절; 40절 참조.

같은 책, 예시 65절.

같은 책, 행록 5장 33절; 공사 2장 19절; 공사 3장 19절 참조.

같은 책, 교운 1장 16절 참조.

같은 책, 행록 3장 50절 참조. 증산이 맹자의 사상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최초로 역성혁명을 정당화한 맹자의 사상에도 기인할 것이다.

이병욱은 진묵에 관하여 역사적 서사와는 다른 신화적 서사를 대순사상이 활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병욱, 「불교와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설화의 차이점」, 『대순사상논총』 29 (2017), pp.141-170 참조.

【참고문헌】

1.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2.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79..

3.

『南師古秘訣』.

4.

『南蕉窓訣』.

5.

『道宣秘訣』.

6.

『杜師聰秘訣』.

7.

『無學秘記』.

8.

『北窓秘訣』.

9.

『秘訣輯錄』.

10.

『備邊司謄錄』.

11.

『西溪家藏訣』.

12.

『西溪先生文集』.

13.

『西山大師秘訣』.

14.

『承政院日記』.

15.

『英祖實錄』.

16.

『仁祖實錄』.

17.

『鄭鑑錄』.

18.

『鄭鑑錄』 (1913).

19.

『鄭鑑錄解題』.

20.

『蕉窓錄』.

21.

『蕉窓錄』 (1961).

22.

『土亭家藏訣』.

23.

細井肇 編著, 『鄭鑑錄』, 東京: 自由討究社, 19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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