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마테오 리치와 대순사상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 대순사상의 기독교 종장에 대한 종교현상학적 해석

안신1,*
Shin Ahn1,*
1Professor, Department of Welfare & Theology, Pai Chai University
*배재대학교 교수, E-mail: shinahn@pcu.ac.kr

© Copyright 2020,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May 31, 2020 ; Revised: Nov 24, 2020 ; Accepted: Dec 08,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요약

대순사상에서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종장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본 논문은 종교적 인간으로서 리치의 삶과 사상이 지니는 의미를 종교현상학적 관점에서 탐색할 것이다. 리치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를 분석하고, 그의 신관과 인간관 및 구원관을 중심으로 탐구하여 리치가 대순사상에서 지닌 관계성을 재평가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리치는 예수회 선교사가 되어서 중국에 다양한 문물을 전하였다. 그는 예수회의 중국 친화적인 선교정책에 따라서 중국문화에 공감하며 언어를 배우고 중국인을 벗으로 삼아서 서양의 종교와 문화를 전달하였다. 그는 중국의 미래를 낙관하는 여덟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고, 이해와 설득의 간접 선교의 방식으로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메시지를 가르쳤다.

예수회신부들은 중국에서 기독교의 신을 천주라고 불렀는데, 리치는 유교의 상제를 기독교의 천주와 동일하게 간주하였다. 유교경전의 번역과 해석을 토대로 원시유교의 유일신론을 기독교와 유교의 공통점으로 파악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신관을 비판하면서 유교의 신관을 통해 기독교의 신관을 정당화하였다. 리치의 인간관은 기독교의 창조신앙을 기초로 하였고 불교의 윤회를 비판하였다. 리치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윤리성과 구원관을 제시하였다.

대순사상과 리치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1) 동서양세계 간 상호교류에 대한 기여, 2) 대화와 설득에 기반을 둔 평화적 포교방식, 3) 기독교의 종장으로서의 다양한 활동, 4) 종교의 치유하는 기적에 대한 믿음과 조선으로의 유입 등의 차원에서 의미를 찾았다. 리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독교와 유교의 신관이 지닌 공통점을 강조하면서 동서의 세계관을 교류하고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Abstract

In Daesoon Thought, Matteo Ricci is regarded highly as a Jongjang, ‘religious leader,’ (of Christianity). This paper deals with the life and philosophical/theological thought of Matteo Ricci as homo-religiosus from the perspective of phenomenology of religion. Examining his historical background and biographical sketch, I will analyze Ricci’s understanding of God, humanity, and salvation and re-evaluate his relationship with Daesoon Thought.

Matteo Ricci, born in Italy, became a Jesuit missionary to China and transmitted various products of western civilization. Accepting the pro-cultural approach of Jesuit mission, he applied it to Chinese culture and language by learning the Chinese language and regarding Chinese people as his friends. This was a sympathetic way to transmit Western religion and culture while on Chinese soil. He suggested eight reasons to look towards the future of China with optimism and taught Chinese people his Christian message through his indirect means of understanding and persuasion.

In China, Jesuit missionaries called the Christian God ‘Tianzhu (Cheonju in Sino-Korean),’ meaning Lord of Heaven. Ricci identified the Confucian notion of ‘Shangdi (Sangje in Sino-Korean),’ meaning Supreme Emperor (or God) with Tianzhu. While translating Confucian scriptures, he found the common ground between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to be the monotheism of ancient Confucianism. He criticized the concepts of God in Buddhism and Daoism, and justified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by way of a Confucian understanding of deity. Ricci’s understanding of humanity was based on his Christian faith in creation, and he criticized the Buddhist concept of transmigration. He proposed Christian ethics and doctrine of salvation by using discourse on the afterlife and in particular, the concepts of heaven and hell.

Concer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Daesoon Thought and Ricci, the following aspects should be examined: 1.) Ricci’s contribution to the cultural exchanges between East and West, 2.) his peaceful approach to his mission based on dialogue and persuasion, 3.) the various activities conducted by Ricci as a Christian leader, and 4.) his belief in miraculous healings. His influence on Korea will likewise be explored. Ricci’s ultimate aim was to communicate with Asian people and unify East and West under a singular worldview by emphasizing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Christian and Confucian concepts of God.

Keywords: 마테오 리치; 상제; 대순사상; 기독교의 종장; 종교적 인간; 현상학적 해석
Keywords: Matteo Ricci; Sangje/Highest Emperor; Daesoon Thought; Jongjang/Religious Leader; Homo-Religious; Phenomenological Interpretation

Ⅰ. 서론 : 서도의 종장?

대순사상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서도(西道), 즉 기독교의 ‘종장’(宗長, religious leader)으로서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세우려 했던 인물로서 기억되고 있다. 증산(甑山, 1871~1909)은 리치의 이야기를 종도에게 반복하여 전하였다. 16세기 서구기독교의 선교방식은 오만과 무력에 기반을 둔 자문화 중심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보였지만, 리치는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어를 습득하며 과학지식을 전달함으로써 기독교의 세계관을 중국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는 중국을 ‘타자’(他者)로 만들지 않았고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벗으로 존중하였다. 서유럽의 팽창적 정복주의가 확산되고 있을 때, 리치는 중국의 중심에서 개방적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동서 문화의 교류에 기여하였다.1)

본 논문은 『전경』(典經)에 나타난 리치의 생애와 사상을 종교현상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종교현상학은 신학적 고백주의와의 거리두기가 가능하고 신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 증산은 “서양인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하였다고 평가한 것인가?. 그리고 증산은 “종도들에게 옛사람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들려주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장, 이마두가 끼어있었다.”는 점에서 증산은 이마두의 삶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였고 그 지식을 종도와 나누었다. 나아가 증산은 세계종교의 대표들을 종장으로 세웠는데, “최수운을 선도의 종장으로, 진묵을 불교의 종장으로, 주회암을 유교의 종장으로, 이마두를 서도의 종장으로 각각 세웠노라.”고 말하였다. 끝으로 증산은 “이마두를 초혼하여 광주 무등산 상제봉조에 장사”하였다.2) 따라서 대순사상과 관련된 리치의 생애와 사상 연구는 대순사상의 맥락에서(in the context of Daesoon Thought) 리치의 종교적 의미를 탐색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리치에 대한 연구는 천주교와 유교의 학자들에 의하여 주로 보유론(補儒論)의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3) 본 논문은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모델을 넘어서, 신종교로서 대순사상이 리치의 생애와 사상을 어떻게 재평가하고 있는지를 문헌분석을 통하여 공감적이며 객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리치를 엘리아데가 제시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기독교와 유교의 세계관을 넘어 보다 우주적 의미에서 신관과 인간관 및 구원관의 구축을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대순사상에서 리치의 자리와 관계를 종교현상학적으로 재평가할 것이다.4)

Ⅱ. 마테오 리치의 생활세계와 생애

1552년 10월 8일 이탈리아 마체라타(Macerata)에서 조바니 바티스타 리치(Giovanni Battista Ricci)와 조바나 앙기오렐리(Giovanna Angiolelli)의 장남으로 태어난 리치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71년 예수회 신부가 되었다. 유년시절부터 니콜로 벤치베니(Nicolo Bencivegni) 신부에게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예수회에 입회한 개인교사를 인생의 모델로 보았다. 당시 서구사회에는 종교개혁과 제국주의가 확산되면서 종교와 정치의 영역에서 분열과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예수회는 천주교의 쇄신과 성장을 위한 희망이 되었고, 콜럼버스를 비롯한 이탈리아인들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후원과 협력을 받아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다.5)

리치는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행정가로서 마체라타의 시장이 되는 길보다는 종교인으로서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장상(長上)에 순명(順命)하며 천주의 영광과 구원의 복음전도를 위해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살겠다.”고 맹세하였다. 1575년부터 철학과 수학을 배웠고, 그의 지식을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읽으며 로마대학의 교수직을 추구하기보다는 이탈리아 밖으로 나아가 지적 탐구와 행동을 병행하기를 원했다. 리치는 1578년 3월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6)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리치는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선교의 현장에서는 폭력과 강압의 개종이 진행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란 해변가의 언던 위아래에 있는 것이 고작이어서 함대로부터 하룻길도 더 걸리는 내지에는 아직 뻗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수백만의 힘 센 [무슬림이나] 힌두교도들은 기회만 나면 이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려고 틈틈이 분노를 터뜨리기 때문에 사실 포르투갈인들은 이에 대항하는 것에 지쳐 있을 정도였다. 유럽에서 통용하는 ‘cuius regio, eius religio’(통치자의 종교가 곧바로 인민의 종교), 반무력, 반원칙에 의해서라도 포르투갈 당국은 기독교를 현지인들에게 강요했으나 그것은 말뿐이고 실상 제국주의적 문화정책은 저열하기 짝이 없었다. … 인도에서 현지민 개종이란 넓게 보면 포르투갈인의 관습을 따르게 하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새 교우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카스트 신분, 제도, 습속 등을 방기(放棄)하게 했고 새 포르투갈 주인의 의복과 말과 이름을 따르도록 강요받았다.7)

강압적 분위기에서 리치는 예수회 신부가 되었고 학수고대하던 전임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예수회의 선교정책은 세속국가의 정복적 방식과는 달리 중국문화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마카오 선교의 책임자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 신부는 “현지인의 관습과 토착신앙에 가능한 한 그들 스스로 적응시키며 주민들의 경애를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선교사는 우월의식을 버리고 “겸비와 타문화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고 “기독교는 현지 동양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법”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

16세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선교정책은 직접적 전달방식보다 간접적 선교방식을 선호하였다. 중국인의 의심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공적 영역에서는 “종교를 언급하지 않았다.”9) 일상에서는 중국의 언어, 사상, 문화를 익혔고, 인격의 감화를 통하여 선교의 길을 닦았다. 예수회 신부들에게 중국어와 중국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공개적인 교리강론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중국인의 두루마기”를 착용했고 중국인의 주택을 성당으로 개조하였다.10) 교리를 전파하지 않아도 먼저 중국의 말과 글을 배우며 예의범절을 익혀서 모범적으로 행동하면 중국인의 호의를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11)

리치는 1582년 중국 마카오로 이동해서 중국어를 수학하였고 다음해 중국 광둥 자오칭(肇慶)에 도착한 후 성당 선화사(僊化寺)를 세웠다. 리치는 처음에 불교의 승려처럼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었다. 1584년에 리치는 별호로 ‘서방의 현자’를 의미하는 ‘서태’(西泰)를 사용하였고 이름도 ‘리마두’(利瑪竇)로 바꿨다. 1584년 10월에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를 출판하였지만, 1589년에 8월 3일 자오칭에서 추방되었다. 그해 8월 26일에 샤오저우(韶州)에 정착하고 성당을 지었다. 리치는 1591년 12월에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3년 뒤인 1594년 11월에 마무리하였다. 리치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네 명의 철학자들이 쓴 책으로 소개하였다.12) 그는 공자를 위대한 철학자로 설명하였다.

중국인 중 최고의 철학자는 공자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550년 전에 태어나 70년에 걸친 훌륭한 생을 보낸 인물입니다. 그는 말과 행동 그리고 책으로 이 국민을 교화시킨 사람으로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공자의 말과 삶은 자연에 입각한 것이며 서양 고전 시대의 철학자들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자가 그들을 능가할 정도입니다.13)

사서를 번역하던 1592년부터 승복 대신에 유학자의 비단옷을 입고 활동하면서 머리와 수염도 길렀다. 그의 번역서는 선교사들이 중국을 이해하는 교재로 사용되었다. 1595년에 리치는 샤오저우를 떠나 난징(南京)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조난으로 난창(南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건안왕(建安王)을 위해 첫 한문저작 『교우론』(交友論)을 저술하였다. 리치는 왕의 환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 마테오는, 저 멀리 서양으로부터 바다를 항해해 중국에 들어왔습니다만, 위대한 명왕조의 천자의 학문적 미덕과 옛 선왕들의 남겨놓은 교훈에 존경을 표합니다. … 건안왕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천대받지 않는 은혜를 입었으며, 허락받아 큰 절을 올리니 손님의 서열을 정해주고 술상을 차려 매우 환대해 주었습니다. 왕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부여잡고 말하였습니다. “무릇 덕을 행하는 군자가 고생하며 우리의 땅을 찾아오면 일찍이 청하여 친구로 삼고 공경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서양 나라는 도의(道義)의 나라이니 원컨대 벗의 도를 어떻게 논하는 지를 듣고 싶습니다.” 나 마두가 물러나 그 뜻에 좇아 예전 어렸을 때 들은 바를 서술하여 벗의 도에 관해 한 데 모아 책 한권을 완성하니 삼가 다음에 적습니다. 내 벗은 남이 아니다. 즉 나의 반이며 곧 제2의 나다. 그러므로 마땅히 벗을 보기를 마땅히 나같이 해야 한다.14)

리치의 인식은 제국주의의 배타적 태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중국을 ‘문명국’으로 간주했고, 중국의 지도자를 ‘벗’으로 보았다. 리치에 따르면, 인간은 불완전하여 “상제(上帝)는 명하여 벗을 사귀어 서로 기다리다가 돕도록 하셨다.”고 믿었다.15)

리치는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의 중심으로 향했다. 예수회 선교전략의 핵심은 중국 황제가 베이징의 황궁에 예수회 신부를 머물도록 설득하는 방식이었다. 황제가 신부에게 설교를 허가하고 천주교의 교리를 수용한다면, 불교를 경시하는 중국인들이 기독교로 회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16) 리치는 1598년 9월에 베이징에 처음 도착했으나 주거허가를 받지 못하였다.17) 1600년 11월에 명 신종 황제에게 바친 진공품목에서 발견된 예수의 십자가상이 황제를 저주하는 부적으로 오인되어서 텐진(天津) 감옥에 억류되었다. 1601년 1월 24일에 마침내 베이징 진입에 성공하였고 서양시계 자명종 수리를 위해 베이징 거주허가를 받았다. 1602년 8월에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개정하였고 이듬해 8월부터 겨울까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출판하였다. 1608년 가을에 『예수회에 의한 기독교의 중국선교』를 집필하고, 1610년 5월 11일 베이징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의 미래를 여덟 가지 이유를 들어 낙관하였다. 첫째로, 난관에도 불구하고 “천주께서 중국전교가 성장하기를 바라신다.”는 천주의 신앙에서 성공할 이유를 찾았다. 둘째로, 천주교는 중국인들의 이성적 욕구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셋째로, 문(文)을 숭상하는 중국에서 천주교 문서선교의 수용성이 크다고 예측하였다. 넷째로, “총명한 민족”인 중국인은 서방의 수학과 천문학뿐만 아니라, 형이상학과 신학의 지적탐구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섯째, 고대 중국인의 상제관은 중국인들을 “본질적으로 경건하고 성실한 민족”으로 만들었고, “자연 이성에 상부하는 도덕철학”을 수립해 왔다. 여섯째, 천주교의 평화적 속성은 중국정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곱째, 중국의 문화를 존중하며 “중국사회에서 중국인과 똑같이 되어 살면서 전교를 하면” 중국인의 존중을 받을 것이다. 여덟째, 공자의 유교가 미신과 우상숭배를 제거하므로 천주교의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18)

리치는 서방의 중심 이탈리아에서 이동하여 동방의 중심 중국에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는 점에서 “구주권 밖 최고의 문명국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위대한 사도”로 칭송을 받았다.19) 그는 서양인 최초로 중국의 내지까지 들어가 중국을 탐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인문사회와 지리를 파악하고 중국의 문화를 서구에 상세하게 알렸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출판한 서적들은 선교에만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중국을 넘어서 한국과 일본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17세기에 동서 문화의 교류를 위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다. 쇄국정책을 일관하던 중국에서 기독교선교의 문을 열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국의 관리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유용한 존재”로 간주되기를 원했다.20)

16세기 중국에는 유불선 삼교 외에도 다양한 외래종교들이 있었다. 리치는 중국의 서편에서 유입된 이슬람, 소수종교 유대교, ‘십자교’(十字敎)로 알려진 기독교가 중국인들의 눈에는 모두 ‘회교도’(回敎徒)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유대인들은 ‘유대 회교도’, 기독교인들은 ‘십자 회교도’, 무슬림들은 ‘삼교 회교도’라 불렸다. 그는 이러한 오해와 무지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이해와 설득의 방식을 선택하였다.21)

Ⅲ. 마테오 리치의 신관 : 유교의 상제와 기독교의 천주

리치는 ‘문화적응주의’의 방식을 중국선교현장에 적용하면서, 불교나 도교보다는 원시유교의 일신론적 세계관에 주목하였다. 유교의 경전들을 섭렵하면서 상제와 천주의 일체성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였다.22) 리치의 신론은 1603년 8월에 출판한 『천주실의(天主實義)』에 잘 나타난다. 중국의 육경(六經)을 인용하여 천주의 사실성을 드러내고 불교와 도교의 헛됨을 비판하였다. 그는 서양의 도로써 인도의 도를 공격하고 중도의 도로써 중국의 도리를 교화하였다.23) 기독교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과 윤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를 “만물의 으뜸이며 지고한 근본”으로 위치시키고 인간과 동식물 및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체계화는 중국인들에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24)

리치에 따르면, 천주는 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예수회신부들은 중국에서 기독교의 신을 ‘천주’(天主)라고 불렀다. ‘천제’(天帝), ‘상제’(上帝), ‘만유진원’(萬有眞原) 등의 용어들도 있었지만, 리치는 “두 글자의 발음도 분명하고 의미도 심장하여 들어보면 장엄하고도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하였다.25) 리치는 한 중국인에게 기독교의 신을 설명하자 ‘천주’라는 글자를 판자에 써서 제단에 모신 사건을 목격하였다.26) 리치의 신관은 중국에서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의 신관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불상에 예배하고 불경을 읽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천주의 도리를 해친다고 평가했고, 불상에 절하는 행위는 ‘죄’라고 규정했다. 그는 유교가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주장하였다.

유학자들은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를 폐지시키려 하면서도 지금도 두 교파의 사원이나 도관을 세우고 그들[이 모시는] ‘신상’들에게 절합니다. 비유하면 나쁜 나무[惡樹]를 바싹 시들게 하려고 하면서도, 그 뿌리를 후하게 북돋워 주어서, 반드시 이들을 도리어 번성하도록 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27)

리치는 불교와 도교의 다신론적 세계관보다는 유교와 천주교의 유일신론을 강하게 옹호하였다. 따라서 천주는 다른 신들과 공존하는 단순한 지주(地主)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무한하고 무소부재하며 “온 우주와 온 나라를” 다스리는 우주적 통치의 존재로서, 불교의 부처와 보살이나, 도교의 신선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설명함으로써, 양대 종교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저들 [이단의] 교리들은 ‘하느님’을 존숭하지 않고 오직 자기 한 몸만을 높이 볼 뿐입니다. [저들이 만물의] 원대한 근원과 근본을 알지 못하면서도 가르침을 선포한 것들은 대부분 천주께서 제정하여 갖추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28)

그에게 불교의 윤회설과 도교의 무위론은 중국인들이 극복해야 할 종교적 사상들이었다. 리치는 상대적으로 고립된 중국인들이 천주교의 보편성과 독특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다.

천주의 도리는 [어느] 한 사람, 한 가족, 한 나라의 도리가 아닙니다. 서방에서 동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큰 나라들이 모두 그 도리를 몸에 익혀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성현들이 전한 바로서 천주께서 개벽하고 사람과 만물을 강생시키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전(經傳)으로 전수되었으므로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비님 나라[중국]의 유학자(儒學者)들은 다른 나라에는 그다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지역[서양]의 문자와 언어를 터득하여 우리[서양]의 사람과 문물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천주의 ‘보편적 교리’[公敎]를 해설하여 그것이 ‘참된 교의’[眞敎]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합니다.29)

리치는 천주를 천지의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로 보았고, 원초에 만물을 창제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고 판단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첫째로, 신에 대한 관념의 세계적 보편성을 지적하였고, 둘째로, 사물의 원리와 질서를 지배하는 존재로서 신을 상정하였으며, 셋째로, 동물의 욕구와 활동방식을 주재하는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30) 그는 비유로 신의 존재 가능성을 설명하였다.

비유하자면 강이나 바다를 배로 건너가는데 위에서는 바람이 불고 아래서는 파도가 치는데도 흔들려 전복될 걱정이 없다면, 비록 [배 안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반드시 그 배 안에는 노련한 조타수가 잘 조절하여 편안히 물을 건너갈 수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비유하자면 여기에 수천만 개의 화살이 날아가는데, 매번 과녁에 적중함을 보고서는 우리는 비록 활 쏘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도, 또한 화살을 쏘아 적중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명사수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31)

리치는 인류의 신앙과 자연의 질서 배후에 지적인 존재가 있다고 보았다. 신의 역할을 크게 창조와 주재의 차원으로 구분하였다.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의 단일성에 대해서도 증명의 과정으로 보여주었다. 첫째로, 모든 개체를 움직이는 최초의 동인(the first Mover)이 있듯이, 건축물 뒤에는 언제나 목수가 있다는 디자인 논증을 펼쳤다. 둘째로, 집을 짓는 목수와 금속활자를 배열하는 지식인의 비유를 들면서 천지만물의 질서 뒤에는 신으로서 “이성적인 주님”의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셋째로, 모든 생명들이 형체와 본성을 갖기 위해서 “원초의 특이한 존재”로서 천주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증명해 온 천주교의 종교철학적 전통을 중국의 문화와 맥락에 적용하였다. 유일신론의 근거에 대해서는 유비를 통하여 증명하였는데, 대규모 음악의 지휘자, 한 집의 하나의 가장, 한 나라의 하나의 구주, 한 사람의 한 몸, 한 몸의 머리 하나 등을 언급하며, 우주 가운데 지존자(至尊者)는 둘이 될 수 없고 하나라고 주장하였다.32)

리치에 따르면, 천주는 모습, 소리, 용모, 색깔, 크기 등의 “모든 부류에 초월해 있는 존재”이므로, 부정의 표현으로 신의 속성을 드러낸다. 천주는 하늘도, 땅도 아니며, 귀신도 신령도 아니고, 인간도 성인도 아니다. 나아가 과거도 미래도 없는 무소부재의 존재이다.33) 그는 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설계적 논증을 결합하여 신의 존재와 속성을 설명하였다.34)

중국에 유행하던 종교사상은 유불선의 삼교사상이었는데, 리치는 각 종교사상의 특징과 한계를 지적하며, 유교사상과 천주교사상의 유사점과 공통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무(無)를 강조하는 도교와 공(空)을 강조하는 불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도교나 불교의 신자들도 “천주이신 위대한 아버지께서 내셨으니 우리의 형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교가 도교와 불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삼교로 분열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리치의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은 당시 중국의 종교적 지형의 분위기를 보여준다.35) 그러면서 천주교의 역사를 종교통일의 과정으로 제시하였다.

우리[서양] 나라의 주변 나라들에도 상고 시대에는 삼교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종교의 지파가 얽혀 있었습니다. 후대에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바른 이치로써 분석하여 이해시키고 선행으로써 감화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오직 천주교 하나만을 따르고 있습니다.36)

불교와 도교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유교의 태극(太極)이나 이(理)도 유신론의 특징과는 다름을 지적하였다. 그는 “만물들의 원인 없는 원인”(causa prima)이라는 것에, ‘이’나 ‘태극’은 해당될 수 없다.”고 보았다.37) 리치는 다양한 유교경전들을 통하여 고대 중국인의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서양]의 천주는 곧 중국말로 ‘하느님’[上帝]입니다. 도교(道敎)에서 만들어 놓은 현제옥황(賢帝玉皇)의 조상(彫像)과는 같지 않습니다. 현제옥황은 무당산(武當山)에서 수도하며 살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역시 다 같은 인간인데, 인간이 어떻게 하늘의 임금님[宰皇]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서양]의 천주는 바로 [중국의] 옛 경전에서 말하는 ‘하느님’[上帝]입니다.38)

따라서 리치의 관점에서 천주교의 천주와 중국사상의 상제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존재이다. 그는 “하느님[帝]은 진(震: 동방)에서 나왔다.”는 『주역(周易)』의 구절을 비롯하여 『중용』, 『예기』, 『상서』 등의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천과 상제를 비교하면서 그는 “오직 한 분 이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조화ㆍ생성하고, 사람을 생존시키고 양육하시는 것”으로 설명하였다.39)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은 “천주”(天主)로 불러야 하고, 세상을 만든 초월적 존재가 그 배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넘어서 본질을 간파한다고 보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볼 수 없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만 형체가 있는 하늘과 땅은 섬길 줄 알면서도 천지의 주인이 있음은 더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먼 변방에서 온 사람이 갑자기 장안(長安)의 길 한복판에 이르러서, 웅장하고 호화찬란한 궁전을 보고 깜짝 놀라 예를 갖추어 절하고 나서 “나는 임금님을 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하늘과 땅[天地]을 받들고 공경하는 것은 대부분 궁궐을 보고 절하는 분류와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은밀한 것도 추리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천지의 높고 넓은 모양을 보고 마침내 천주께서 계시어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을 주재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엄숙한 마음과 굳은 뜻으로 형체는 없으나 ‘하늘보다 앞서 있는 존재’[先天, 하느님]을 받듭니다.40)

리치는 천주를 “부모보다 큰 부모”이며 “임금보다 더 큰 임금”으로 묘사하였고, 모든 천지만물의 “주인”이며 “만물을 낳고 기르시는 분”이라고 하였다.41) 신의 절대성과 초월성은 다른 신적인 존재들이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다. 천주가 만물과 합일될 수 있느냐는 중국 선비의 질문에 대해서는 서양 선비의 입을 빌어서 단호하게 부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이런 말의 오류는 [제가] 앞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욱 심한데, 어찌 감히 [천주와] 합일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말들 때문에 저희 ‘하느님’[上帝]의 지존함을 감히 태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천주의 경전에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천주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곧바로 여러 신(神)들의 무리도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거대한 신(神)이 하나 있었는데 루시퍼(Lucifer)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자기를 영특하고 밝다고 보고 곧 “나는 천주와 동등하다고 할 만하다.”고 오만하게 말하였습니다. 천주는 노하여 그 추종자 수만의 신(神)들을 함께 마귀로 변하게 하여 그들을 지옥에 떨어뜨려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하늘과 땅 사이에는 비로소 마귀가 생기고 지옥이 있게 되었습니다. 무릇 [창조된] 사물들과 조물주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루시퍼 마귀[魂]의 교만한 말입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하겠습니까?42)

리치는 중국에서 천주로 여겨지는 부처를 오만한 인물로 묘사하고, “자랑하고 과신하면서” 천주의 지존함에 자신을 비견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부처의 지혜는 천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오만보다는 천주 앞에서 겸양의 미덕이 필요하며, “미덕은 ‘자신을 수양함’에 기초하여 ‘하느님’[上帝]을 섬기는 일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3) 리치는 불교와 도교가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유사한 논법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기독교 신관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44)

IV. 마테오 리치의 인간관 : 윤회설에서 창조신앙으로

동양사상의 자연관과는 달리, 리치는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만물이 무(無)로부터 유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45) 리치는 천주가 세상에 인간을 창조한 이유를 “마음을 시험하여 [그들의] 덕행에 등급을 정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현세는 장기간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곳이다. 현세는 “짐승들의 세계”이고, 인간은 “하늘의 백성”이므로 “하늘을 향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이다.46) 리치는 인간이 사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사후관은 석가모니의 불교에서 빌려 온 개념이 아니라, 천주교 본연의 사상이며 불교가 도용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천주교는 오래된 종교이고, 석가모니는 서방 사람이니 반드시 그[천주교]의 이론을 훔쳐서 들었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천주와 천당 지옥에 관한 뜻을 [천주교로부터] 빌려 가짐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운 뜻과 사특한 도리를 전했습니다. … 석가모니가 미처 태어나기도 전에 천주교인들은 이미 그런 이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리를 닦은 사람은 내세에 반드시 천당에 올라가고 무궁한 복락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서 끊임없는 재앙을 받는 일을 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람의 순수한 영혼[精靈]은 언제나 살아 있고 소멸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47)

리치는 영혼불멸의 근거를 기독교 성경에서 찾았고, 인간은 천주와 같지 않지만 만물과는 구별된 존엄한 존재로 인식했다.48) 인간에 대한 평등사상은 리치를 중국의 위정자에 대한 선교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선교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었다.49) 인간은 천주로부터 몸과 정신을 받았으므로 두 가지를 가지고 천주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존재들보다 뛰어난 이유는 안으로는 정신적인 영혼을 갖고 있고 밖으로는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이성 능력’(intellect)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을 무형과 유형의 육신으로 구분하였는데, 유형의 육신에 해당하는 것은 사물을 지각하는 감각기관이고, 무형의 육신에는 기억능력(memory), 이성능력, 의지력이 해당된다.50)

리치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내면적인 본질인 혼신과 육신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스스로 주재해 나가는 의지[意]가 없지만, 인간에게는 이성적인 의지[靈志]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은 한 몸의 주인이고 귀신은 “사물로 분류되지 않는 무형의 특별한 존재의 부류”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 리치는 인간에게 직분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천주의 명령으로” 세상의 만물을 관리할 뿐, 세상을 지배하는 전권이 천주에게 있음을 명시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하였다. 불교의 윤회설에 대하여, 리치는 현생의 인간은 불교가 말하는 전생을 믿기보다는 “덕을 닦고 선을 행하여” 내세에 영생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1) 오히려, 석가모니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 BCE 약 582~500)의 윤회설에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보통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악을 저지르는 것을 항상 마음 아파하다가, 자기의 명성을 가지고 기괴한 이론을 지어내어서, [악행]을 막기 위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악[不善]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세에 다시 태어나서 보복을 받게 되니, 어떤 경우에는 아주 고생스럽고 힘들게 사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거나, 어떤 경우에는 짐승의 부류로 변형된다. … ” ‘올바른 선비’[君子]들은 [피타고라스의 주장]을 이렇게 판결하였습니다. “이 [이론의] 의도는 좋으나, 말로 표현함에는 결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악을 막는 데에는 정도(正道)가 있습니다. 어찌 옳은 것을 버리고 그릇된 것을 좇아야겠습니까? [피타고라스] 사후에 그의 문인들 중의 소수가 이 말들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때 이 말들이 국외로 새어나가서, 인도의 석가모니가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52)

불교의 윤회설이 서양에서 기원되었고 석가모니가 육도(六道)를 가미하였다는 리치의 주장은 불교의 기원에 대한 서구사회의 동양종교에 대한 이해의 한계와 리치의 제한적 지식을 보여준다. 윤회설은 불교 이전 힌두교사상에도 널리 유행하던 개념이기 때문이다.

리치는 불교의 윤회설가 지닌 철학적 한계를 지적하였다. 첫째로, 인간이 윤회한다면, 전생의 기억을 후생의 존재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둘째로, 천주가 최초로 창조한 짐승의 혼이 인간의 혼으로 교체된다는 근거의 부족이다. 셋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혼설에 따라서, 인간의 혼[靈魂, intelligence-soul]과 동물의 혼[覺魂, sentiment soul]은 다르다는 지적이다. 넷째로, 인간과 동물의 혼과 몸이 달라서 결합될 수 없다는 문제이다. 다섯째로, “인간의 혼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불교의 설명은 천주의 처벌이기보다는 욕구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여섯째, 불교의 윤회에 기초한 살생금지는 동물로 변한 부모를 살해하는 것이나 노동시키는 것이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는 추론이다.53)

리치는 중국의 유교를 종교가 아니라 도덕으로 간주하였다.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규정하는 윤리학의 체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공자를 성인으로까지 존중하지만 그에 대한 제사는 희생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있다고 해석하였다. 리치는 유교의 목적을 “왕국의 평화와 안녕, 가정과 개인의 원만한 생활”로 보았고, 유교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공통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독신생활의 금지와 일부다처제의 용인에 대한 두 종교의 차이는 중국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믿었다.54) 리치는 같은 맥락에서 선교사들이 우상숭배로 비판하던 제사가 지닌 효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제사는 더 이상 동서 교류의 걸림돌이 아니라, 서양인의 이해와 존경의 대상이며, 동양인의 교육과 추모의 의식이었다. 따라서 우상숭배보다 중국인들의 망자에 대한 예절과 효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55)

V. 마테오 리치의 구원관 :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통한 윤리와 구원

천주를 숭배하고 인간을 귀히 여기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추론을 통해 유교사상의 수용으로 가능했지만, 선악의 행위에 따라서 사후세계가 천당과 지옥으로 결정된다는 교리는 이로움보다는 인의(仁義)를 강조하는 유교의 가치관에는 큰 난관이었다. 유교의 “순수한 도덕이상주의”는 선 그 자체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고, 악행은 그 자체가 도덕에 배치되기 때문에 미워하고 경계한다. 군자가 선행을 실천할 때 이해를 따지는 의도(intention)가 없어야 한다고 중국 선비가 묻자, 리치는 서양 선비의 말로 유교의 학문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실한 의지(will)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답하였다. 같은 입장에서 노장사상의 무위론까지 반대하며 선행과 악행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주장하였다.56)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인간은 사후에 “불멸하는 정신과 속이 썩어 버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세의 이해를 따지기보다는 내세의 이해를 중시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그는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의 올바른 의지[正意]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하급은 천당에 오르고 지옥[의 고통]을 면하려는 의지입니다. 중급은 천주의 은덕을 두텁게 입은 것에 보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상급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화합하여 순명하려는 의지입니다.57)

리치는 이탈리아의 성인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 1181~1226)의 사례를 들면서, 천당을 가기 위하여 천주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존귀와 선을 믿기 때문에 공경하고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천당은 “옛날과 지금의 인자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광명한 곳”이고, 지옥은 “옛날과 지금의 죄인과 악인들이 유배를 받는 지독히 더러운 지역”이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는 선인들이 이로움을 위하여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의로움에 이르기 위하여 천당과 지옥의 설법을 가르쳤다고 비교하였다.58)

『천주실의』에서 중국 선비가 천국과 지옥의 비가시성을 이유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자, 서양 선비는 천국과 지옥의 없다는 증거를 요구한다. 리치는 지혜로운 자가 육신의 지각에 의지하지 않고 네 가지의 올바른 이치를 따른다고 설명하였다. 첫째로, 모든 사물처럼 인간에게도 목적[志向]이 있는데, 그 목적에 이르면 소망이 사라진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에 따라서 지극한 복락과 완전한 행복 및 무한한 수명이 갖추어진 천당에 이르면 소망을 멈춘다. 둘째로, 인간은 지닌 무한한 진리와 욕구의 본성은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 충족될 수 있다. 셋째로, 덕과 죄는 무한성 때문에 천국과 지옥으로만 보상이 가능하다. 넷째로, 천주는 정의로우므로 선한 자는 상으로 천국을, 악한 자는 벌로서 지옥을 받게 된다. 나아가 리치는 『시경(詩經)』과 『상서(尙書)』와 같은 유교경전에 나타나는 천(天)의 개념을 천국의 근거로 제시하였다.59) 따라서 군자는 지극히 인자하고 공정한 천주를 믿을 뿐만 아니라, 천당과 지옥의 교리도 수용한다.

천당과 지옥의 응보는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 두 종교에서도 이를 믿으며, 유가 중에 지혜로운 이들 역시 그것을 따릅니다. 동양과 서양의 큰 나라들이 이를 의심하지 않으며, 천주의 성경에도 그것이 실려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이 명백한 이치를 들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천당과 지옥의 도리를] 왜곡하고 반대하는 이는 반드시 군자가 아닐 것입니다.60)

리치는 불교와 도교로 인하여 중국인들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며 탄식하였다. 종교의 진위를 판가름하기 힘든 상황에서 천국의 길보다는 지옥의 길을 선택한 중국인들이 더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생명의 없음이 죽음이듯이, 악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선의 부재”로 정의하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덕을 쌓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무궁한 복락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였다.61)

리치는 『논어』에서 “어짊[仁]은 오직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천주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으로 요약하였다. 성인(聖人)이 되는 학문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천주가 인간의 마음에 새겨 놓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근원적으로 파괴될 수 없다고 하였다.62) 이러한 주장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임을 보여주는데, 리치는 유교의 경전에서 덕을 터득하는 것이 곧 천명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유교의 세계관 안에서 기독교의 가치관을 찾았고 종교 간 대화를 시도하였다.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는 그의 사상과 활동에서 동서양의 대화와 종교와 과학의 대화로까지 확대되었다.63) 그는 유교의 인과 기독교의 사랑의 공통점을 강조하며 윤리관을 확립하였다.

천주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진실로 천주를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이 [바로] ‘인’의 덕이 존중되는 까닭입니다. 그 존중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만약 천주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자아를 완성시키는 ‘바탕’[所以]을 [우리 마음] 밖의 것들에서 말미암게 하신다면, 또한 [우리들이] 혹 그것들을 얻으려고 추구한다고 해도 [반드시 다]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아완성] 또한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자아 완성은] 모두 우리[인간]들의 ‘내면’[內]과 연관된 것들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다만 “사랑” 하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누가 “우리들이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주께서는 여러 좋은 점들을 모아서, 우리[인간]들을 창생하여 길러주십니다. … 또한 [우리들에게] 덕을 실천하려는 ‘본성’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인간]들이 천주를 사랑하면 곧바로 천주께서도 또한 은총으로 이에 보답하여 주시니 [어디인들]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64)

리치는 유교의 수행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천주의 은총을 강조하면 덕의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상제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분별적 사랑을 주장하는 유교에 대해서, 악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악한 중에도 배울 만한 장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없다고 밝혔다. 결국, “천주를 위하여” 자기와 남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인간은 몸과 정신을 주신 천주의 은덕을 흠모하며 그것을 찬미해야 한다.65)

리치는 중국의 종교지형이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교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을 오류로 잘못 인도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데, 종교적 가르침이 상이하므로 믿음의 돈독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66) 진리는 하나인데, 상호 모순된 가치관과 세계관이 공존하면서 천주의 참된 도리를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는 세 사람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공자는 노자의 도리에서 취함이 없이 유가(儒家) 학파를 세웠습니다. 석가모니는 도교와 유가 학파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또한 중국에 불교를 세웠습니다. 무릇 세 종파는 자기의 뜻이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천 년 후에 그 세 사람의 뜻을 억측하여서 그것을 억지로 같다고 한다면, 역시 속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세 종교는 하나[도교]는 무(無)를 숭상하고, 하나[불교]는 공(空)을 숭상하며, 하나[유교]는 ‘진실로 있음’[誠有]을 숭상합니다. … ‘삼교’ 각각은 근본 계율이 [서로] 같지 않음을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불교]는 살생을 금하고, 하나[유교]는 희생[제물]을 써서 제사지내게 합니다. 그렇다면, 세 종교를 합쳐 놓게 되면, 누가 [그 중에서] 하나를 지키려면 진실로 다른 것을 어기게 됩니다.67)

리치는 유불선 삼교사상이 17세기 중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기술하며, 천주의 올바른 도리를 배우기 위해 기존의 종교들의 상충된 주장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구원의 ‘올바른 도리’를 제시하였다.68) 리치는 불교와 도교의 논리적 약점을 비판하면서, 유교의 가치관을 재해석하여 기독교의 구원관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하였다. 리치는 『천주실의』의 제8편에서 천주교의 신념체계와 의례 및 공동체를 축약하여 소개하였는데, 교황의 “가장 존귀한 직위”와 예수회 수도회의 독신생활의 타당성을 열거하였다. 천지창조 후에 인류조상의 타락을 설명하고 세상에 강생하신 예수의 구원능력을 강조하였다.

서양의 상고 시대에는 성인이 많이 있었습니다. 몇 천 년 전에 예언자와 선지자들이 [구약] 성경에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강생의 의미를 기록하였고 그 예정된 때를 지적하였습니다. [지상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신] 때에 이르러서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서 그분을 바라보려고 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분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 그분은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을 가르치고 깨우치셨습니다. 귀머거리는 들으라고 명하자 들었고, 장님은 보라고 명하자 곧 보았고, 벙어리는 말하라고 명하자 곧 말을 하였고, 앉은뱅이는 걸으라고 명하자 곧 걸었고, 죽은 자는 살아나라고 명하자 곧 살아났습니다. 하늘과 땅, 귀신이 다 그분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며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옛 성인이 기록한 바와 부합하고, 이미 또 이전의 성경을 더욱 보태어서 큰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도리를 전하는 일이 끝나자 스스로 말씀하신 그 때, 대낮에 하늘로 되돌아가셨습니다.69)

예수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도 리치는 위정자와 유학자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대속교리를 창조적으로 해석하였다. 기득권자에 대항하는 정치적 혁명가의 이미지 대신에 민중을 가르치고 약자를 치유하는 스승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70) 경전과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교의 세계관을 고려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기독교공동체로의 개종을 권면하면서, 리치는 마음의 허물을 제거하고 성스러운 교회에 입문하기 위한 성세성사[聖水]를 먼저 소개하였다. 리치는 천주교가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중국의 황제에게 전함으로써 중국의 모든 가정이 “선을 닦아 악이 없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71)

VI. 대순사상과 마테오 리치의 만남 : 대순사상의 리치에 대한 재평가

리치는 명말 선비들에게 중화풍(中華風)을 사모한 ‘서양의 선비’로 알려졌다.72) 그는 ‘중국 천주교의 창시자’, ‘중국과 서방의 학술을 소통시킨 선각자’, ‘선교사업의 스승’으로도 기억되고 있다.73) 그는 다양한 언어를 알고 있었는데,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시작으로 라틴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를 사용하였다.74) 그는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직접 배우며 중국의 유교적 세계관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쌓았고 그것을 토대로 서양의 수학과 과학 및 천주교의 교리를 효과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중국인과 소통하며 기독교선교의 미래기반을 다졌다.

리치는 예수회의 수사로서 기독교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16세기 인도와 일본의 기독교선교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동양선교에 헌신한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이례적이며 획기적이었다. 유교와 기독교의 신을 동일시하는 리치의 파격적인 해석은 19세기 옥스퍼드대학교의 중국학자 레게(Legge)의 주장에서도 반복되었는데, 유교의 상제(上帝)를 기독교의 하느님(God)과 동일시한 것이다. 리치가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한 이유는 과거제도의 필수과목인 사서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탐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통치의 방법이었던 유교를 기독교와 병립 가능한 제도로 보았다. 유학을 공감적으로 수용한 후에 중국사회에서 유학자처럼 행동한 리치의 선교방식은 중국의 지식계급과 지도자들에게 호소력은 있었지만, 예수회와 경쟁을 벌이던 다른 기독교교단들은 그러한 적응정책에 대하여 혹독한 비난을 가했다.75) 그는 평범한 선교사가 아니라, 선교역사의 방법론적 논쟁에 자주 소환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리치가 세계종교사에 끼친 사상적 영향은 어떻게 재평가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로, 그는 서양과 동양의 상호 ‘교류’와 ‘협력’ 및 ‘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천주교 선교사였지만 원시유교의 사상을 신관과 윤리의 관점에서 존중하면서도 중국사회에 적용된 실제적 제도로서의 유교의 한계에 주목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불신의 태도를 보인 것과는 달리, 유교에 대해서는 공감적인 이해와 긍정적인 인정을 병행하고, 유교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제도로서의 현실적 적용의 한계를 비판하였다.76)

대순사상에서 리치는 서양의 세계관을 동양으로 일방적으로 전달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후(死後)에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일으킨 일종의 ‘문화교류자’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나아가 당시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리치가 처음 동양에 가져온 서구의 과학문명은 근대적 과학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사상의 체계(scientia)로서 기독교선교의 도구였다. 리치가 사후에 과학 문명을 열었을 가능성은 동양의 과학적 지식이 역으로 서양에 전달되어 17세기 서양의 근대적 과학개념의 확립에 기여하였다는 해석에서도 확인된다.77) 리치의 저술들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과 북미에까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중국과의 조우로 그가 갖게 된 비전은 서양의 문명을 변화시켰는데, 17세기 자연과학의 발달, 18세기 계몽주의의 출현, 19세기 미국의 민주주의 사상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까지 고백적 담론을 강화한다.78)

둘째로, 리치의 종교전달방식은 폭력과 강요가 아닌 대화와 설득에 기반을 둔 ‘평화적 포교’였다.79) 그는 아래로부터의 선교방식과 위로부터의 선교방식을 적절히 조화시키며 중국선교의 현장을 주도하였다.80) 중국내지선교를 위한 길을 최초로 개척하였고, 중국문화를 중국인의 시각에서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중국과 관련된 저서들을 출판함으로써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문서선교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는 천주를 “인간의 대부모”로 고백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대부모를 “효성을 다해 사랑하며 그 교의를 믿고 이름을 칭송해야 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81) 그의 평화적 방법이 극명하게 나타난 분야가 바로 경전번역과 저술활동의 영역이었다. 그는 사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경험을 토대로, 원시유교의 상제(上帝)가 기독교의 천주(天主)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적 우월주의의 태도를 버리고 종교사상의 접촉점을 통하여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위한 평화적 기초를 닦았다.

셋째로, 리치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통하여 ‘기독교의 종장’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었다.82) 리치는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유교의 목적을 왕국의 평화와 가정과 개인의 원만한 생활로 보았지만, 독신생활의 금지와 일부다처제의 용인은 유교의 사회적 폐단으로 보았다. 그는 중국의 유불선 삼교의 합일사상에 대하여 적지 않은 불편함을 느꼈고, 이에 대하여 서양철학의 논리적 근거를 토대로 기독교 정체성의 진정성을 가지고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였다. 특히 불교의 윤회설을 피타고라스의 변형된 형태로 간주하였다. 한편으로, 리치는 중국선교의 책임자로서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논리적으로 변호해 나갔다. 그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철학과 윤리학의 논리를 이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중국인에게 설득하였다. 그는 “중국선교구의 창시자”였고 “중국에서 죽고 중국에서 묻힌 첫 번째 선교사”였다.83) 그는 예수회 수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그대들을 큰 상으로 인도하는 열린 문의 입구에 둘 것이오. 하지만 여전히 수고와 모험이 필요하오!” 또 다른 신부가 그에게 묻기를,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자신들에 대한 신부님의 사랑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리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막 유럽에서 파견되어오는 신부들을 항상 관심과 인자함으로 대하시오! 친절과 애정으로 그가 그대들 가운데에서 유럽의 회원에서와 같은 안위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시오.” … “나는 [피에르 코통 신부]에게 우리가 중국에서 해보려고 하는 일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편지를 쓰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이 그에게 나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해주기를 부탁합니다.84)

리치는 마지막까지 중국에서 후학들이 기독교선교를 계속해서 이어가기를 원했고, 동시에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의 결과가 유럽의 중심에까지 전달되어 서양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희망하였다.

넷째로, 리치는 당시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를 중국에 전달하면서도, 종교의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합리적 추론과 함께 적지 않은 기적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신자들이 질병의 굴레에서 벗어났고 귀신이 물러났다고 기술하였다.85) 리치의 저술들은 임진왜란 뒤에는 서학(西學)의 형태로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수광과 유몽인의 저술에도 소개되었고, 허균과 이승훈을 통하여 결국 천주교의 조선 선교로도 계승되었다. 서양에 대한 지식이 조선에 도착한 무렵에 조선에 대한 지식도 유럽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합리적 사고를 통해서 중화주의(中華主義)에 젖어있던 중국인들의 마음을 정화하였고, 서양 문명과 종교의 진수를 가르쳤지만, 여전히 기적의 힘을 굳게 믿었다. 리치가 표방한 상층문화와 하층문화를 동시에 아우르는 균형 잡힌 문화적 포교방법은 기독교의 선교와 대순진리회의 포덕을 포함한 세계종교의 역동성을 잘 드러낸다.86)

Ⅶ. 결말 : 대순사상의 창조적 수용

종교현상학자는 종교공동체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상아탑의 엘리트의식에 쌓여 낯선 다름에 대해서 실증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가 왜 진실한 이야기인지를 공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리치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서양의 문화와 종교의 세계관을 중국에 전한 위대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리치가 중국의 사람과 문화에 보여준 공감적이며 친화적인 접근방법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용한 문화교류의 모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리치가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400년이 지난 후에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중국에서 제의논쟁의 중심에 섰다가 지금은 세계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결국에는 그의 선교방법이 중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는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판단들이 등장한다.

만약 당시에 연이어 일어난 선교사들이 [리치]의 정신과 방법을 지녔다면 중국 천주교는 이미 대다수 중국인들의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400년 후에 우리들은 비로소 그의 궤도로 돌아가서 복음 전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87)

리치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선교와 교육의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중국의 중심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일 격무에 시달렸지만, 학문과 선교의 활동을 계속 병행하였다. 지리와 천문의 지식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선교의 기반을 조성하였고, 기독교 세계관도 무력이나 강요의 방식이 아니라 논리와 설득의 평화적 방법으로 전했다.88)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유교의 상제와 동일시했던 천주교의 천주를 중국에 거부감 없이 이식하는 것이었음을 다음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난징에서 얻은 최초의 두 학생은 유자(儒子)였다. 한 사람은 아주 명석한 머리를 가진 청년이었는데 수학을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대과에까지 급제한 한 한림(翰林)이 보내서 온 학생이었다. 자기 스스로는 친히 와서 배울 수 없으니까 사람을 보내 리치의 견해를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학생과 친해지면서 리치는 그의 궁극적인 최종 목적이 중국 사람에게 불교가 아니라 천주교를 심는 데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89)

리치가 지향했던 궁극의 목적은 서양기독교의 세계관을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이질적 토양 위에 단순히 이식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는 유교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원시유교의 상제개념을 동서양의 상반된 세계관들을 교류시키고 통합하는 화해의 가교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적 유산은 지금까지 대순사상의 ‘기독교의 종장’이라는 개념 안에서 창조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앞으로 대순사상의 종장들에 대한 현상학적 비교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Notes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신진호ㆍ전미경 옮김 (서울: 문사철, 2011), pp.14-15. 리치가 유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불교나 도교를 비판한 태도를, 지배층과 하층민의 종교적 차이를 들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와 도교보다 유교가 지닌 기독교와의 교리적 유사성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편, 『전경(典經)』 (여주: 대순진리회출판부, 2010), 교운 1장 9절ㆍ10절ㆍ65절, 예시 66절.

김상근,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나타난 16세기 후반 예수회 대학의 교과과장과 예수회 토미즘의 영향」, 『한국기독교신학논총』 40-1, 2005, pp.291-312; 김상근, 「명말(명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 『선교신학』 12, 2006, pp.73-107. 연세대의 종교학자 김상근은 리치의 『천주실의』와 『기인십편』에 나타난 리치의 토착화신학을 분석한다. 구만옥, 「마테오 리치 이후 서양수학에 대한 조선지식인의 반응」, 『한국실학연구』 20, 2010, pp.301-355. 경희대의 사학자 구만옥은 리치의 과학선교를 소개하면서, 철학과 신학이 수리과학과 일체화되어 과학선교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안대옥, 「마테오 리치와 보유론」, 『동양사학연구』 106, 2009, pp.117-158. 고려대의 안대옥은 리치의 보유론에서 신학과 형이상학, 특히 수리과학이 정합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과학선교를 방법론적인 적응주의로 해석하는 입장에 반대한다.

대순사상에 대한 종교현상학적 연구사례로는 안 신, 「예수와 증산의 내러티브 비교연구 - 경전의 상호영향 가능성에 대한 종교현상학적 이해」,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2 (2014), pp.299-323; 안신, 「강증산의 해원사상에 대한 이해 - 영화 <화평의 길>(1984)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3 (2014), pp.109-152; 안신, 「엘리아데의 관점으로 본 대순사상의 인간관 연구」, 『대순사상논총』 33 (2019), pp.1-30.을 참조하라. 현상학적 연구는 고백주의와 환원주의의 해석을 넘어서 신종교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를 시도한다. 종교현상학적 연구방법론의 사례는 안신, 「조나단 스미스의 종교현상학 연구」, 『철학과 현상학 연구』 34 (2007), pp.5-29; 안신, 「종교현상학의 주요 인물과 최근 동향」, 『철학과 현상학 연구』 39 (2008): pp.123-145; 안 신, 「종교현상학의 창조적 다양성과 비판적 변형 - 김종서의 신종교와 종교사회학 연구를 중심으로」, 『철학과 현상학 연구』 79 (2018), pp.263-288.을 참조하라.

빈센트 크로닌, 『서방에서 온 현자』, 이기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89), p.27.

같은 책, pp.31-35.

같은 책, p.41.

같은 책, pp.47-48.

같은 책, p.27.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203.

히라카와 스케히로, 『마테오 리치 : 동서문화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노영희 옮김(서울: 동아시아, 2002), p.113.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p.161-162;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56-57.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166.

마테오 리치, 『벗은 제2의 나다 :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 노용필 옮김 (서울: 어진이, 2017), pp.10-16.

같은 책, p.46.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104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123-124.

빈센트 크로닌, 앞의 책, pp.322-323.

같은 책, p.23.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120.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131-133.

이재호, 「마테오 리치의 사상과 그의 사후 서양의 변화」, 『상생의 길』 2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p.85-87.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소영배 외 옮김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p.19.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83.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203-204.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115. 이 장면을 목격한 리치는 Deus를 천주(天主)로 번역하였다.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377.

같은 책, p.376.

같은 책, pp.40-41.

같은 책, pp.45-48.

같은 책, pp.48-49.

같은 책, pp.49-56; pp.62-63.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692-693.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p.68-69.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535. 리치는 당시 중국의 황제가 불교와 도교에 기우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리치, 『천주실의』, p.75.

같은 책, p.98.

같은 책, pp.99-100.

같은 책, p.106.

같은 책, pp.107-108.

같은 책, p.109.

같은 책, pp.191-192.

같은 책, pp.194-196.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139-145. 불교에는 불법승의 삼보(三寶)와 삼존(三尊)이 있고, 도교에는 태상노군, 태상원시, 태상도군의 삼청(三淸)이 있다.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p.197, 207.

같은 책, pp.120-121.

같은 책, pp.122-123.

같은 책, pp.210-211.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547-552.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p.41-42, p.354.

같은 책, p.171, p.184, p.189, pp.231-232.

같은 책, pp.233-234.

같은 책, pp.236-246.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p.168-169, p.171.

이재호, 「마테오 리치의 사상과 그의 사후 서양의 변화」, pp.83-84.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p.274-280.

같은 책, p.304.

같은 책, pp.305-310.

같은 책, pp.315-318, pp.321-322.

같은 책, pp.305-310

같은 책, p.343, p.349.

같은 책, pp.357-358, p.363.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428-436.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364.

같은 책, pp.371-375.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446-454.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p.388-389.

같은 책, pp.389-390.

같은 책, pp.426-427.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486.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pp.429-431.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49.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7.

히라카와 스케히로, 앞의 책, p.57.

같은 책, pp.66-69; pp.174-181.

같은 책, p.186.

차선근, 「이마두가 서양에 건너가 과학문명을 열었다?」, 『대순회보』 200, 2017, pp.61-63. 대순진리회 도인의 이마두에 대한 이해는 대순사상의 리치 이해가 실증적인 역사주의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창조적으로 해석됨을 잘 보여준다.

이재호, 「마테오 리치의 사상과 그의 사후 서양의 변화」, pp.88-93.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265.

히라카와 스케히로, 『마테오 리치』, p.187.

같은 책, p.190.

이재호,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선교활동」, 『상생의 길』 1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p.42-43.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p.804-809.

같은 책, p.769.

같은 책, p.753.

이재호,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선교활동」, pp.73-76.

마테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p.8.

같은 책, p.606.

빈센트 크로닌, 앞의 책,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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