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광해군 대(代)의 종교지형 변동: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양상을 중심으로

이종우1,*
Jong-woo Lee1,*
1Professor, College of Liberal Arts, Sangji University
*상지대학교 교수, E-mail: jwleers@sangji.ac.kr

© Copyright 2020,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Sep 11, 2020 ; Revised: Nov 01, 2020 ; Accepted: Dec 08, 2020

Published Online: Dec 31, 2020

국문요약

본 논문의 목적은 광해군 대(代)의 불교정책과 이것의 영향을 받는 불교계의 양상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이라고 규정지음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던 광해군 대의 불교가 가진 나름의 영향력과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불교는 성리학의 벽이단을 내세운 지배층에 의하여 배척되어야 했고, 이것은 광해군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이 이중적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은 광해군 대의 불교계의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에서의 전공으로 지배층은 불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이 일정부분 상승했다. 상승한 위상과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교계는 보사(報謝)와 구호 활동에 종사했다. 그 결과, 승려의 수는 증가했고, 사찰과 승려의 토지 소유가 허가됨으로써 경제적 상황도 좋아졌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은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을 좌우하고 불교지형을 변동시킨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광해군 대에 지배층은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임진왜란에 공이 있는 승려들에게 시호를 하사했고, 승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일부 승려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승려들은 국방, 건축 등 조직력과 물리적 힘을 요구하는 역을 부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해군 대까지는 승려들이 부담하는 역에 대하여 일정 부분 보상해서, 승려가 역을 부담하는 것이 불교에 대한 탄압의 면보다는 불교에 대한 용인의 측면이 강했다.

불교정책에 대하여 불교계는 지배층과의 유착과 사찰의 창ㆍ재건, 그리고 불교 예술품 제작이라는 양상을 보인다. 지배층과의 유착을 통해 불교계는 광해군 대 불교정책에 적극 호응했고, 이것을 통해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휴 선수(浮休 善修)와 제자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의 부휴계가 불교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했음도 확인된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좋아진 측면과 악화된 측면이 공존하는 불교계의 상황을 배경으로 시행되었다. 지배층은 불교의 조직력을 전후(戰後) 복구와 국방, 토목 공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시행했다. 불교계 역시 지배층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불교정책에 호응하였고, 사찰과 예술품을 보수하고 제작하였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과 대응을 살펴보면, 조선 불교에 대한 일반적 묘사인 “숭유억불”로 설명할 수 없는 불교의 조직력과 영향력이 확인된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representative Buddhist policies enforced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光海君), the 15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aspects of the Buddhist community affected by them. Through this, the influence and dynamism of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 will be revealed. Some of the findings will run contrary to what is popularly known about Joseon Buddhism and the policy of Sungyueokbul (崇儒抑佛), ‘Revering Confucianism and Supressing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ism was taken as an ideological background, and consequently, Buddhism was ostracized by the ruling class who advocated the exclusion of heretical views. This also characterized King Gwanghaegun’s reign during the Mid-Joseon Dynasty. In reality though, the ruling class held mixed opinions about Buddhism, and this influenced the Buddhist community in the Gwanghaegun Period. The military might of Japan demonstrat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led the ruling class to recognize Buddhism, and as a result, the status of Buddhism rose to a certain extent. Based on its elevated status and the aftermath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the Buddhist community engaged in social welfare activities inspired by the notion of requiting favors, and the Buddhist community gained recognition for providing relief services. As a result, the number of monks increased, and the economic situation improved as land ownership was granted to temples and monks. This is the means by whic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fluenced the Buddhist policies of the Gwanghaegun Period and changed the religious topography of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the ruling class regarded Buddhism as heretical, but offered posthumous titles to monks who engaged in meritorious service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Favorable and/or preferential treatment was also granted to some Buddhist monks. In addition, monks began to perform labor projects that demanded organizational and physical strength, such as those which related to national defense and architecture. However, throughout the Gwanghaegun Period, the monks were paid a certain amount of compensation for their labor, and the monks’ responsibility for labor increased. This can be understood as a partial reconciliation with Buddhism or an acceptance of Buddhism rather than the suppression of Buddhism often presented by historians.

As for policies which affected Buddhism, the Buddhist community showed signs of cooperation with the ruling class, the creation and reconstruction of temples, and the production of Buddhist art. Through close ties with the ruling class, Buddhism during the Gwanghaegun Period saw the Buddhist community actively responded policies that impacted Buddhism, and this allowed their religious orders to be maintained. In this way, it was also confirmed that the monk, Buhyu Seonsu (浮休 善修) and his disciple Byeogam Gakseong (碧巖 覺性), took up leadership roles in their Buddhist community.

The Buddhist-aimed policies of Gwanghaegun were implemented against the backdrop of the Buddhist community, wherein the ruling class held mixed opinions regarding Buddhism. As such, both improvements and set backs for Buddhism could be observed during that time period. The ruling class actively utilized the organizational power of Buddhism for national defense and civil engineering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Out of gratitude, they implemented appropriate compensation for the Buddhists involved. The Buddhist community also responded to policies that affected them through exchanges with the ruling class. They succeeded in securing funds and support to repair and produce Buddhist temples and artworks. A thoughtful inspection of the policies towards and responses to Buddhism during the Gwanghaegun Period, shows that Buddhism actually enjoyed considerable organizational power and influence. This flies in the face of the general description of Joseon Buddhism as “Sungyueokbul (revering Confucianism and supressing Buddhism).”

Keywords: 광해군; 숭유억불; 승역(僧役); 승려와 지배층의 유착; 사찰 창ㆍ재건; 예술품 제작
Keywords: Gwanghaegun; Sungyueokbul; service provided by Buddhist monastics; cooperation between monks and the ruling class; the creation and reconstruction of temples; the production of artworks

Ⅰ. 서론

본 논문의 저술 목적은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양상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기존의 “조선불교=숭유억불”이라는 도식과 달리, 광해군 대에 불교가 나름의 영향력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조선 후기 불교는 갑자기 출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6ㆍ17세기 조선불교는 이전인 15세기와 이후인 18ㆍ19세기의 성격이 모두 발견되는 시기다. 16ㆍ17세기 조선불교는 계보의 정통성과 강학에서의 체계적인 교육이 중요하게 여겨지며, 의병 활동과 이것에 대한 선양(宣揚), 문파의 형성과 분화 등 사족(士族) 계층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1) 결국 16ㆍ17세기는 조선 불교사에서 과도기로 평가될 수 있다. 광해군 대 역시 이 시기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시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불교가 변화하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과 그에 따른 여러 현상들이 이후의 시대에 펼쳐지는 불교정책의 시작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연구되어야 하는 분야이다. 그리고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은 당대의 불교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대상이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에 관한 선행연구는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미술사, 역사학, 불교학 등에서 불교 전반이나 해당 분야에 관한 선행연구가 일부 존재하고 있고, 16세기, 나아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의 특징을 소개한 선행연구가 존재한다. 또한, 최근 광해군 대의 지배층이 가진 이중적 불교관을 고찰하고, 이것을 통해 불교가 임진왜란 이후 어느 정도 입지를 갖추었다는 내용의 연구논문2)이 등장했다. 이러한 선행연구를 통해 광해군 대 불교 정책에 대한 단초와 그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를 참고하고, 동시에 선행연구의 한계를 극복하여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이 불교 용인의 측면이 있었음을 밝히고, 이것을 통해 숭유억불의 담론 뒤에 있는 불교의 영향력을 드러낼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선행연구의 논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찬사료와 개인 문집, 비명(碑銘) 등을 재검토 할 것이다. 특히 선행연구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그동안 “숭유억불”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간과했던 부분을 조명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예외적” 사례로 치부된 사건이나 사실에 대해서도 종교 중립적인 태도로 재검토 할 것이다.

본 논문은 광해군 대 조정의 정책과 그 대응 양상을 검토함으로서 광해군대의 불교지형의 변동 양상을 검토하고, 이것을 통해 조선시대 불교가 일정 수준에서 영향력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종교정책은 당대 종교지형을 반영하고, 종교지형은 다시 종교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정책은 피지배층에게 영향을 주고, 종교에 관한 피지배층의 모습은 종교정책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종교정책을 고찰(考察)하는 것은 당대 종교지형을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Ⅱ. 광해군 대 불교정책의 배경

1.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

광해군 대의 지배층은 불교에 대하여 이중적 태도를 취했고, 이것은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광해군 대의 지배층은 불교에 관하여 이단(異端)으로 간주해서, 통제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승군(僧軍)이 활약한 것을 계기로 승려들의 전공(戰功)을 인정하였다. 아울러 승단(僧團)의 조직력과 역(役)의 우수한 수행 능력을 인정하고, 이것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시도했다.

광해군은 승려에게 시호와 관직을 제수하는 등 승려를 우대했고, 각종 법회를 후원하는 등 불교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원찰(願刹)을 비롯한 각종 사찰의 건립과 불교 공예품 제작, 경전 편찬을 후원했다. 아울러 일부 왕실 사람들은 자신이 불자라는 것을 밝히기까지 했다. 이러한 모습은 광해군과 왕실이 불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찰의 건립이나 불교공예품의 제작, 경전 편찬 등은 임진왜란 이후의 전후 복구의 차원에서 여러 사업 중 하나로 이루어졌다. 특히 승려에 대한 예우는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승려에 대한 예우거나, 광해군이 시도했던 새로운 궁궐 영건(營建) 과정에 참여한 승려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궁궐 영건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불교 공예품이나 원찰의 건립, 경전 발간은 성리학 규범이자 당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효(孝)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습은 선왕(先王)에게서도 보이는 현상이었다. 결국, 광해군과 왕실의 불교 신앙은 단순히 불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전후 복구나 효의 실천 등 당대에 납득될 수 있는 명분의 발로(發露)라는 의미다.3)

사대부 계층의 불교관도 이중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사대부들은 불교를 성리학의 이단으로 규정하고, 벽이단(闢異端)에 입각하여 불교를 비판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광해군의 주도 아래 시행된 승려에 대한 예우가 있었고, 국방과 전후 복구에 승려 조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반면, 유신들이 승려들의 모습을 비판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태도와 민가 출입을 비판한 것을 들 수 있다.4) 부휴 선수(浮休 善修, 1543~1615)와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에 대한 모함은 당시 유신들이 승려조직의 활성화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이를 소요나 역모와 연루시키고, 승려를 무고하는 것으로 이어진 것도 사대부들이 불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5)

이와 달리 유신들이 임진왜란에 공에 있는 승려의 비문을 써준 사례나, 입적한 승려에 관한 비석의 조성도 보인다. 비석의 조성이 당시 조정에서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승려의 비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조정에 의한 용인(容忍)이 있었음을 방증하는 사실이다. 또한, 승려의 비문을 당대의 사대부 명문장가가 작성했다는 것은 사대부가 이단의 무리라고 규정했던 승려와 교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사대부나 당대의 권신(權臣)이 자신이 불교에 관심이 있음을 밝히거나, 불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 가운데 허균은 스스로 불교 수행으로 보이는 행위를 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고, 반면에 승려와의 서신 교환에서 깊이 있는 불교 지식과 신앙심을 보이기도 했고, 불교를 비판하거나 불교 신자임을 부정하는 모습도 나타냈다. 그리고 사대부 여성이 남편 사후(死後) 비구니가 되었고, 국문(鞠問)을 당했으나 비구니가 된 것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 모습도 나타났다.6)

2. 불교계의 상황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은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지배층에 의해 불교는 공식적으로는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통제되었다. 선조-광해군 대에 불교의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선조 말에 선조가 명(明) 승려의 입국을 엄금하거나, 수륙재(水陸齋)를 대중을 미혹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승려의 강화사절 활동을 중단7)시키는 등 강력한 통제도 있었다. 이것을 고려하면 불교는 당대 지배층에게 여전히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은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시각을 더욱 이중적으로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선조 말-광해군 대에, 지배층은 성리학적 시각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강력한 통제를 해야하는 동시에, 임진왜란에 있었던 승군의 활약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배척과 인정을 동시에 받는 상황을 맞이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불교는 조정으로부터 신앙의 기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민중종교로서 자리를 굳혀 갔다.8) 이것은 16세기 중반 선교 양종이 일시적으로 재건된 것의 영향이 큰데, 양종의 일시적 재건을 계기로 불교는 인적 토대를 다졌고, 임진왜란 발발 후에는 승군을 조직하여 전공(戰功)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 지배층은 승군을 노동력으로 활용하고 그 대가로 승려 자격을 용인(容認)했다.9) 이로 인해서, 임진왜란 직후의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종교적인 지위가 뚜렷이 인식되었고, 이러한 영향은 다음 왕인 광해군 때도 이어졌다10)는 평가도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前後)한 시기, 불교계는 전장에서 성숙시킨 현실 인식과 보사(報謝) 활동 같은 자구 노력으로 교단을 유지하고 운영했다.11) 사찰의 승려들은 불교의 “자비”에 입각하여 기아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중생 제도의 자선사업에 자진하여 참여하였다. 승려의 자선사업은 불교 수용 이후 계속 있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국가 차원에서 장려되는 모습도 발견된다.12)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매골(埋骨) 활동이었다.

왕명에 따라 임진왜란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고, 그 영혼을 위로하는 재(齋)를 불교에서 주관하였다.13)

승려의 수도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광해군 8년(1616) 11월 박경준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승려의 수가 많이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4)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학생(西學生) 박경준(朴慶俊) 등이 상소하였다.

“궁궐을 짓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은 국가의 양곡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이는 신하 된 자가 통곡을 할 일입니다. 국가의 양곡이 부족한 것은 놀고먹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지지 않는 것은 입산(入山)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중이라고 하는 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쌀을 훔쳐 먹는 하나의 도적입니다.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아 가지며 백성들의 자제를 그물질해다 기릅니다. 세상에서 군역(軍役)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중이 되기를 원하니, 백성들에게 비교해 볼 때 그 숫자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죽이자니 다 죽일 수도 없고 그대로 두자니 그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추쇄하여 성책(成冊)을 하였으므로 중이 되는 폐단이 적었는데, 지금은 국가의 정령이 해이해져서 군역을 도피하는 자들은 살피지 아니하고 한갓 백성들만 부리고 있으니 군역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중이 됩니다.

신들의 계책으로는, 추쇄하여 성책을 하는 것은 합당치 않더라도, 한가롭고 부유한 많은 중들에게서 한 사람에 한 필씩의 베를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중들이 바치는 것은 가벼우나 국가의 용도에는 아주 요긴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궁궐을 지을 때에 그 거둔 베를 다시 일꾼으로 들어온 중들에게 지급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많은 백성들이 쉴 수가 있고 집짓는 일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15)

위의 인용문을 보면 박경준이라는 유생(儒生)이 상소를 통해 궁궐 영건(營建)이 끝나지도 않은 것은 양식 부족 때문이고, 양식이 부족한 것은 승려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승려들의 숫자가 매우 많아서 다 죽일 수도 없을 정도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에 현실적인 요인도 작용했다는 주장도 보인다. 이것은 당시 군역을 피해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승려들은 역에 동원되고, 그 대가로 선과(禪科)나 도첩을 지급 받았기 때문에 승려가 역에 동원되고 도첩을 받으면서 승려의 수가 증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기록은 적어도 광해군 8년까지는 승려의 수가 매우 많았다는 것과, 승려가 되려는 사람의 수도 매우 많았다16)는 것을 방증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광해군 대에 불교계의 경제적 상황도 바뀌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사찰 소지 토유의 확대였다.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경제 상태는 매우 척박했다. 이것은 당시 토지 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전 전국의 전결(田結)은 170만 8천결이었다. 이에 비해 광해군 3년(1611)에는 54만 2천결이었다.17) 이것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전란을 거치면서 토지가 황폐해진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찰이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찰이 토지를 소유함으로서, 토지는 소유한 불교 문중(門中)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18) 불교 교리 상 승려는 경제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 실제 조선 전기까지 승려가 사찰 소유 이외의 별도의 전답(田畓)을 소유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승려가 사적으로 전답을 소유하는 것이 인정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면세지인 공인 사위전(寺位田)이 매우 제한되었고, ‘이지출역(以地出役)’, 즉 대동법 등 토지 소유에 따라 세금을 내는 방식으로 세제가 개혁됨에 따라 세금의 원천이 전답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려의 군사적ㆍ경제적 비중이 높아진 17세기 이후 활발한 민간경제의 신장 추세에 따라 승려가 사적으로 전답을 소유할 수 있었다. 승려는 개간, 구매, 상속, 출가 전에 전답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사적으로 전답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19) 이를 통해 임진왜란 이후 사찰 소유의 전답이 비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흥사인데, 대흥사는 승병장인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이 의승군을 일으켰고, 휴정의 제사를 모셔서 “표충”이라는 사액을 받은 사찰로 유명하다. 대흥사의 토지 소유는 백성들이 죽은 부모, 혹은 전란에 관군으로 동원되었거나 의병으로 자원한 가족의 무운을 기원하기 위해 시주가 있었던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20)

사찰의 토지 소유로 인해 사찰의 경제적 상황은 좋아졌다. 이러한 모습은 광해군 대에 갑계(甲契)의 결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갑계는 동갑계라고도 하며, 같은 사찰에 거주하는 동갑의 승려들이 계금을 모아서 소정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직한 공동체다. 갑계는 사찰계의 기원이며, 조선 후기에 가장 번성했고, 조선 후기 사찰의 유지에 경제적으로 공헌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갑계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 등장하는 것은 명종 19년(1564)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의 갑계인데, 처음 결성되었을 때는 순수한 신앙심에 기인한 것이고, 이후 18~19세기에 이르면서 점차 번성했다.21) 그런데 광해군 대는 갑계 결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한상길 역시 “조선후기 사찰계는 232건이 발견되며, 시기상으로는 16세기 후반부터 1910년까지 분포되어 있다. 17세기와 18세기를 별도로 언급해야 하겠지만, 17세기는 불과 8개의 사례만 확인되므로 독립적으로 살펴보기 어렵다.”22)고 주장했다.

이것은 광해군 대에 사찰계가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당시에 갑계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원인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전반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갑계가 주로 사찰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계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갑계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당시의 불교 교단의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이었고, 국가로부터 임진왜란 때의 활약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갑계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정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또한 염불계, 불량계(佛糧契) 등 불사(佛事)나 사찰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 만들어진 계(契)도 광해군 대에만 유독 확인되지 않는 것은 광해군 대에, 사찰의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았거나, 임진왜란 이후 전반적으로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불사를 위하여 계를 결성하고 시주를 받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과 달리 적어도 사찰의 어려움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전반의 어려움의 일부 정도였거나, 세속의 경제적 어려움과 달리, 사찰의 경제적 상황이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는 가정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3. 임진왜란 이후 불교지형 변동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사찰의 토지 소유가 가능해지면서 경제 상황이 호전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불교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 후금(後金) 등이 개입된 동아시아 전체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이자 명분으로 조선과 명의 성리학에 기반한 화이사상과 일본의 신국주의(神國主義)가 작동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광해군 대에 일본과 국교가 재개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심지어 조선 말 동학에도 영향을 끼쳤다.23) 그리고 임진왜란은 조선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종전했던 시기는 선조가 왕위에 있었던 시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선조와 유신들의 불교에 대한 시각은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는 등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신하들의 불교를 멀리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간언에 대하여 성리학의 도가 바르게 정립되면, 사학(邪學)은 자연스럽게 쇠퇴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것은 유신들에 비하여 선조가 불교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가졌으며24), 임진왜란 전까지는 불교에 대하여 방관적인 정책을 취했다는 것과 연결된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는 불교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 몽진(蒙塵) 이후 한양으로 돌아올 때 선조의 어가(御駕)를 승려들이 호위했고, 전공을 세운 승려와 승군에 대하여 선조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또한 승직(僧職)과 승과(僧科)이 다시 생겼고, 승려에 대하여 실제 관직이 하사되는 등 지배층이 임진왜란 당시 승려의 활약이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승려의 인적 자원과 조직력을 활용하려는 의도의 정책도 확인된다. 이 과정에서 승려에 대한 포상이나 관직 수여에 반발하는 유신들이 선조에게 간언(諫言)하거나 사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는 대규모 불교 의례를 엄금하는 모습도 확인되는데, 이것은 지배층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고, 임진왜란과 전란의 와중에 발생한 잇따른 반란으로 인해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며,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25)

임진왜란 당시 불교지형의 변동은 임진왜란과 선조 대 불교정책의 결과였다. 이러한 불교 정책 가운데 상당수는 광해군 대에 계승되었다. 이후에 기술할 불교계의 조직력을 활용하여 국방과 전후 복구에 투입하고, 일정한 보상을 하는 모습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고 의병을 독려하는 등 실질적으로 항전을 지휘했던 것이 광해군이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광해군이 승병의 활약을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승려에 대하여 일정한 보상과 우대를 했고, 승려를 곁에 둔 것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Ⅲ.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

1. 승역(僧役) 부과

광해군 대 조선은 가뭄, 기아, 역병 등이 잇따르고, 왜란과 호란 등의 외침이 겹쳐서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전반에 걸친 국가체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경제의 파탄은 국고의 고갈을 초래했고, 집권층은 전세(田稅)에 관한 제도 개혁을 비롯하여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 실시 등의 수취체제 개혁을 통해 재정 확보를 강구했다.26) 또한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등 많은 분야에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불교에 관한 것은 주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적극적인 불교 통제를 위한 입안은 시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적 필요에 의해 불교의 조직력을 활용하는 시책이 관행으로 굳어졌다.27) 특히, 광해군 대 당시에는 전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승군과 승려의 부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억불정책이 보다 완화되었다.28)

임진왜란으로 전결의 수가 줄어들자 지배층은 불교계를 동원했다. 지배층에게 당시 불교는 여전히 이단이자 오랑캐의 종교이고 무위도식자들의 종교였지만, 승려는 부족한 국가 재정 운영에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4년(1601)에 처음으로 전국의 전결 수가 조사되었다. 그 결과 전국의 전결 수는 30만결로, 이전의 150~170만결에서 급감했다. 이후 광해군 3년(1611)에 5십4만2천결로 조금 증가했지만, 이전의 수로 회복되지는 못했다. 또한, 백성들은 군역(軍役)의 문란과 방납(防納)의 폐단으로 백성들이 유랑하는 시기였다. 이렇게 백성들이 곤궁한 상황에서 승려는 군의 유지와 노동력 동원에 절대적인 존재였다. 대동법의 시행도 승려에게 역을 더 부과하게 된 원인이었다. 대동법은 기존에 공물(貢物), 진상(進上), 요역(徭役)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세수(稅收)를 쌀로 통일하는 제도로, 광해군 즉위년(1608)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세금을 쌀로 대체하면서 발생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종이 생산과 납부, 왕의 묘인 산릉(山陵)을 조성하는 작업 등은 승려에게 부과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해 승려에 대한 부역이 강화되었고, 사찰의 경제 상황은 악화됐다.29) 이러한 상황에서 지배층이 불교계로부터 부족한 세수(稅收)를 보충하려는 의도는 다음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당초에 승군을 설치할 때에 소신이 영건 도감의 군장(軍匠) 당상으로 있었습니다. 역군(役軍)을 모집하면 역사가 부실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전결과 호구에 따라 신역(身役)을 바치게 하자니 이미 포를 거두었으므로 형세 상 다시 부역을 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승군에게 값을 주고 부역을 하게 하였더니 역군을 모집하여 역을 시키는 것보다 나았습니다. 중은 뜬 구름 같아서 정처가 없는데 지금 만약 놓아두고 일을 시키지 않으면 선수하는 일이 반드시 착실하게 되지 않을 것이고, 역을 시키면 여염에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바로 승지가 진언한 바와 같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30)

위의 인용문은 품획사 이경전의 건의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승려의 노동력이 민정(民丁)이 부역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었다는 당대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동법의 실시로 백성들에게 추가로 역을 부과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승려를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역을 이행한 승려에게 값을 주었다는 것도 확인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대동법의 시행은 불교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동법은 그 실시와 운영에서 여러 논란과 한계가 있었지만, 백성들이 대동법의 실시를 청원할 정도로 성공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왕과 왕실의 묘역을 만드는 산릉의 조성, 사신을 맞이하는 조사(詔使), 종이를 만드는 부역(負役)은 예외로 두어서 백성들에게 그대로 나누어 부과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부담은 감소했지만, 예외 규정으로 인해 백성과 승려의 부역이 광범위해졌고, 고통도 심화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조선 전기에도 승려들은 역을 졌다. 그러나 유형이 많지 않았고, 사찰이 보유한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으로 승려는 대동법으로 인해 이전까지 예외였던 역을 모두 지게 되었다.31)

승려들은 불상이나 탑 등 석재를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석재를 다루는 역에 동원되었다. 또한 재목(材木)을 높고 건조한 곳으로 끌어 올리는 일, 채석장에서 석재를 운반하는 일 등에도 동원되었다. 그리고 기와 굽기나 벌채(伐採)에도 동원되었다. 승려들은 석재나 목재의 운반을 비롯하여 비교적, 그리고 매우 고된 역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영건(營建)도 광해군 대에 승려에게 부과되었던 대표적인 역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昌德宮)을 복구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변괴(變怪)가 발생하고, 풍수지리가가 궁궐을 옮길 것을 청했다. 그러자 광해군 9년(1617) 정사를 돌보기 위해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光政殿)과 홍정전(弘政殿)을 서둘러서 지을 것을 명했다.32)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교하였다.

“지금 이 두 궁궐은, 반드시 내가 직접 가서 여러 번 상의하고 살펴본 연후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두 번 가서 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인경궁의 광정전ㆍ홍정전 두 궁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린 후에 내당(內堂)과 외당(外堂) 중 한 곳을 서둘러 먼저 지어놓으면 내가 수시로 거둥하여 직접 대내(大內)를 볼 것이니, 그리하면 분부하는 대로 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을 잘 알아서 되도록 빨리 조성할 일로 도감에 말하라.”33)

기존까지 인경궁의 경우 입궁했다가 나이가 든 여성들이 거처할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그 내부에 정사를 돌볼 수 있는 전각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것은 인경궁의 기능이 다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궐의 영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승려 성지(性智)였다. 성지는 경남 창원 출신으로 전라도 무안현 승달산 총지사와 법천사에서 활동한 승려34)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런데 성지의 승려 신분에 대해서 이견도 등장하는데, 오항녕이 성지에 대하여 “풍수를 아는 환속승”35)이라고 평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하면, 성지가 당대 특정 종단이나 문중에 소속되어있는 승려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당시 불교 교단이 양종으로 통폐합 된 후 양종의 기능이 사라졌다가 임진왜란 이후 다시 부활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성지가 종단 소속 승려가 아니거나, 속한 종단이 소수 종단이기 때문에 정식 승려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지는 풍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시문용과 함께 ‘인왕산 왕기설’, 즉 인왕산 아래에 왕의 기운이 있어서 그것을 누르려면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용이하다는 이유로 교하 천도를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반대에 부딪히자 한양 안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런데 이것은 한양에서 지세가 낮은 숭례문과 흥인지문으로 왜군이 입성한 사례를 고려해서 외침에 대비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리고 기록에는 경덕궁을 지은 것도 정원군의 집이 있는 새문동에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궁을 지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것 역시 『광해군일기』가 인조 대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후대에 추가로 기술된 것으로, 풍수를 이용한 것이 광해군이 아닌 인조라는 의견도 있다. 광해군이 신하들과 창덕궁과 창경궁 재건에 관하여 논의하면, 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궁궐 영건을 밀어붙이기 위해 풍수를 내세워 술관을 등용하고, 그들을 통해 궁궐의 영건의 달성을 시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36) 이것은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해군일기』에서 광해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 부분 일리가 있는 의견이다.

광해군은 성지를 과도하게 혹신(酷信)한 나머지, 성지의 건의를 따라서 광해군 8년(1616) 봄에 경덕, 자수, 인경궁을 조영하게 되었고, 이 공사에 참여한 승려들로 인해 도성이 가득 찼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불교 교세가 상당하였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임진왜란 때 승려의 조직력과 인력이 전투나 축성 등 군사적 활동에 동원되었고, 광해군 대의 궁궐 공사 때는 예석(曳石-돌을 끄는 작업), 작벌(斫伐-돌을 캐는 작업) 등 중노동에 동원되었고, 또한 성 안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화승(畵僧)도 참여했다.37) 조선 전기 불교의 교세가 축소되지 않았을 때 승려에게 역을 부과하고 그 대가로 도첩(度牒)을 주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 때 도첩을 받은 승려의 수가 상당했고, 이것은 당대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광해군 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의 엄격한 사제 관계와 조직력, 그리고 불화를 조성하는 화승을 동원했다는 것은 당시 불교가 가진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국가 토목 공사에 동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려에게 부과된 역의 범위가 넓고 다양해졌지만, 광해군 대에는 승려의 부역에 대한 역가(役價)를 지급했다. 이것은 광해군이 왜란 당시 승군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동원된 승군들에게 쌀과 옷감을 지급하는 등 역과 공물을 납부하는 그 대가를 받았다. 특히 광해군은 최대한 긴급한 상황에서만 승려를 동원하려고 했다. 그 예로 광해군대에 산릉 조성과 인조 대에 산릉 조성을 비교하면, 광해군 대에는 경기도에서 25명만을 동원한 것에 비해 인조 대에는 선조, 인목왕후, 소현세자의 산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총 3천5백명이 동원되었다.38)

광해군의 궁궐 건축은 훗날,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한 것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그 예로 이능화는 『상촌집(象村集)』을 인용하여 무리한 궁궐의 건축 과정에서 있었던 백성에게 부과된 막대한 역과 매관매직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또한, 광해군의 성지에 대한 총애가 궁궐 건축으로 이어지고, 궁궐 건축에 동원된 승려가 저택 하나를 점유하면서 그 저택이 하나의 절간이 될 정도였다는 말도 등장한다.39)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경여가 백성들에게 칡을 캐게 한 후 영건도감이 칡을 대량으로 징수할 때 대응했던 사례, 북쪽 산의 나무 벌채를 금지했다가 영건도감이 나무를 대량으로 징수할 때를 대비했던 사례40)를 소개하면서, 이것이 잡세(雜稅)와 잡물(雜物)로 인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사례로 꼽았다. 『대동야승』에서도 영건도감(營建都監)을 다시 설치하고 경덕궁(慶德宮)ㆍ수성궁(壽聖宮)의 두 궁전을 짓는 과정에서 민가 수천 구(區)를 허물고, 8도에서 궁성에 쓰이는 재목을 징수하고, 8도의 승군(僧軍)을 징발했고, 이로 인해 민간에서는 떠들썩했다고 전하고 있다.41)

승려는 국방 강화에도 동원되었다. 광해군 즉위 초부터 광해군에 의해서 승려의 국가 방위 참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42)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교하였다.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에는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수어(守禦)에 힘을 보태게 하는 것도 무방하다. 유정(惟政)이 전에 국사에 공로가 있었으니, 지금 승장(僧將)의 호칭을 주어 승도를 불러 모아 관병(官兵)과 합세해서 서로(西路)의 요해처(要害處) 한 곳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변사는 의논해 처리하라.”43)

광해군은 즉위 10년(1618)을 기점으로 국방 강화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명(明)이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에 출병(出兵)을 요청했던 시기이다. 그로 인해 판돈령(判敦寧) 민형남(閔馨男, 1564~1659)이 출병 직전에 도성(都城)을 중심으로 요충지를 방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특히 외침에 대한 방어를 위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부각하면서, 남한산성의 수리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왜란 직후 인구 감소로 전쟁 물자가 부족해서 남한산성의 수리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자 승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에서 주목할 것은 선조 대와 광해군 대까지만 해도 승려를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승려 동원의 법적 근거가 있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원하는 승려를 동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도첩과 고신(告身), 면천(免賤), 면역(免役)할 수 있는 증명서를 나누어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44) 또한, 광해군이 무리하게 승려를 동원하지 말 것을 명하는 내용의 기록도 등장한다.

전교하기를,

“곽진경(郭震卿)은 바로 중 의엄(義嚴)이다. 지금 만약 산사(山寺)에 군관을 파견하여 승군을 불러 모은다면, 영건(營建)의 일로 승군을 여러 해 동안 조발하여 쓴 끝에 지금 또 침해하는 것이 되니 매우 옳지 않다. 각별히 경계하고 신칙하여 절대로 사찰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45)

이 시기는 후금(後金)이 평안도 가도에 주둔해 있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위기감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운 의엄으로 하여금 승려를 모집할 것을 지시하였다. 주목할 것은 승려의 모집 과정에서 사찰에 피해를 입히지 말아야 됨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배층은 승려에게 다양한 역을 부과했고, 국방에까지 투입했다. 이렇게 역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대가도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는 승려를 동원하고, 대가로 도첩을 지급했다. 선조 대에서 광해군 대까지 승군의 용도가 토목 공사에 집중되면서, 승려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그 대가로 도첩이나 호패를 지급해서 승려 자격을 인정하는 시책이 관례화되었다.46) 그런데, 도첩제는 조선 전기 성종 대에 일시 중지된 후 연산군과 중종 대까지 중단되었다가 명종 대에 일시적으로 부활했다. 이어서 명종 21년에 도첩제가 폐지된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시 시행됐다. 즉, 도첩제는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시행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국가의 역을 시행하고 그 대가로 도첩을 발급하는 방식은 조선 전기 내내 지속되었다.47)

임진왜란 때 승려들의 활약은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를 격상시키고, 불교에 대하여 배척하는 태도를 지속했지만,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만큼은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의승군의 활동이 지배층의 수호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또한, 승려들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종묘 건립이나 산성 축조, 서적 인출, 시신의 매장 등 전후 복구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승려들의 기여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도첩, 고신, 면천 등의 혜택을 주었지만, 이 혜택은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과도한 부역으로 인한 고통이 지속됐다.48)

이러한 모습을 정리하면,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 중 승려에 대한 부역 강화는 임진왜란으로 궁핍한 당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란을 겪으면서 불교, 즉 승군의 효용성을 절감하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정 부분 용인하여 상호 보험적 차원에서 관리되었다.49) 아울러 승려들의 동원은 사회적 안정과 더불어, 국가 재정과 지방 재정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50) 이러한 모습은 다른 관점에서도 평가될 필요가 있다. 즉, 불교는 세속과의 인연의 단절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인왕경(仁王經)』을 비롯하여 당시 왕조나 지배층에 충성해야 됨을 강조한 경전도 일부 존재한다. 또한, 당시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노동력과 조직력의 이용이 필요했고, 불교 역시 교단의 존속을 위해 이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측면도 존재했다. 승군의 조직과 양란에서의 활약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측면이다.

2. 승려 우대

승려에 대한 우대의 대표적인 사례는 왕이 승려에게 시호를 내린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전공이 있는 승려와 부역에 동원된 승려에게 그 대가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왕이 직접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 2년(1610)에 유정(惟政)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광해군 11년(1619) 광해군은 부휴 선수(浮休 善修)에게 홍각등계(弘覺登契)라는 시호를 추증한 것, 광해군 14년(1622) 3월 선수에게 법호를 추증한 것과 각성에게 법호를 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51)

흥미로운 것은 유정이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을 때 억울함을 관에 호소해주었던 것이 유생들이라는 점이다.52) 이후 광해군도 유정에 대하여 각별하게 대우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유정에게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변방에 가서 오랑캐의 침략을 수비할 것을 명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그 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가야산에 들어가서 병을 치료했다. 광해군이 유정에게 거듭하여 약을 하사하였다. 광해군 2년(1610) 광해군이 유정의 병을 걱정하고 의원을 보내고 관찰사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53)

또한, 부휴 선수계의 고승들은 부휴 선수, 그리고 벽암 각성을 비롯한 부휴 선수의 제자들이 “김직재(金直哉)의 옥(獄)”54)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국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부휴 선수가 보였던 당당한 태도로 인해 광해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군 대에 부휴대사가 어떤 미친 승려의 무고를 당해 옥에 붙들려 갈 때 화상(和尙)도 여기에 연좌되어 결박을 당했지만, 태연히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옥을 관장하는 관리가 그분들은 큰부처 작은 부처라고 하였다. 이튿날 광해군이 친국했으나, 그 도의 기운이 뛰어나고 그 말이 곧고 발랐다. 그것을 보고 (광해군이)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겨 그 결박을 푸고 한참 동안 문답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매우 기뻐하면서 비단 가사 두 벌을 나누어 주고는 그 영역으로 돌아가게 하니, 모두 달려와 그들에게 절하고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 55)

이렇게 광해군과 재회한 부휴 선수는 훗날 승려들을 이끄는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을 제수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군 때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부휴 선사가 요승의 무고를 당하니 대사가 함께 서울로 들어갔다. 광해군이 두 대사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서, 부휴 선사를 석방하여 산에 돌아가게 하였고, 대사를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56)

위의 기록에서 임진왜란 이후 양종이 부활했다는 것과 이 기록을 통해 광해군 대에 관이 지정한 승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조정이 인정한 불교 관직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앞에서 언급한 성지에게는 실제 관직까지 제수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교하였다.

“성지는 국사를 위하여 수고한 일이 매우 많으니 의엄(義嚴)의 전례에 의하여 우선 당상의 실직을 제수하도록 하라.”57)

앞의 인용문과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의엄(義嚴, ? ~ ?)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을 인정받아서 참봉 고신을 만들어 보낼 것이 건의되었으나, 훗날 사임하고 사찰로 돌아갔던58)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의엄의 전례를 들어서 성지에게 관직 제수를 시도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는 임진왜란이 종전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인 동시에 명(明)과 후금(後金)의 긴장 관계로 비상시국에 가까웠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공이 있는 승려들에게 관직을 제수한 전례를 성지에게 적용하는 것이 가능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훗날 성지는 광해군의 자문에 응했고, 첨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는데,59) 이후 성지에게 지급하지 않은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60)하거나, 높은 품계를 부표하라61)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에서 성지에 대한 광해군의 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승려에게 관직과 녹봉이 지급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Ⅳ. 불교계의 양상

1. 지배층과의 유착을 통한 자구책 강구

광해군 대에는 일부 승려들이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16세기 중반 양종의 일시적 재건과 임진왜란 이후 승군의 활동으로 높아진 불교의 위상을 역이용하려는 승려도 있었다. 즉, 권력과 사대부에게 아부하고, 이들에게 인정받고자 시문이나 서예를 익힘으로써 승려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던 인물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성지가 대표적인 사례다.62)

성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풍수 지식을 통해서 광해군과 친분을 쌓았고, 궁궐의 영건(營建)에 깊게 개입했다. 성지는 영남의 승려로 풍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궁에 드나든 이후 인경궁 공사 이전부터 이의신, 김일륭 등과 함께 경복궁 터를 살펴보았고, 창경궁 재건에도 관여했다.63) 광해군이 반정으로 쫓겨난 근거 중 하나가 풍수와 불교 등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광해군이 궁궐을 무리하게 건축한 것이 왕권 강화의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그 결과 성지는 당대에는 요승(妖僧)으로 평가되었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중 성지가 복주(伏誅)되었다. 성지는 풍수술로 이름이 났다. 폐군이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 옥관자에 비단옷을 입고 궁중을 출입하게 하였다. 토목 공사를 극도로 벌여 백성에게 독을 끼친 것은 모두 그가 종용한 것이라, 온 나라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고자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복주된 것이다.64)

위의 인용문에서 성지가 죽임을 당했을 당시, 성지가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성지는 풍수지리에 능통하고,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궁에까지 자유롭게 출입했다. 심지어 성지는 광해군 대에 부역했던 사람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기준이 될 정도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김일륭은 풍수지리의 요술을 가지고 폐주를 미혹시켜 궁궐을 창건하게까지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혹독한 고통을 안겨 주었으므로 그 죄가 성지와 다를 것이 없어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효시할 것을 명하였다.65)

광해군이 성지의 말에 미혹되어서 궁궐 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했고, 이로 인해 성지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한 당대의 평가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오늘날에는 “성지(性智)는 역할과 위상을 고려했을 때 조선 초기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와 비슷했다.”66)는 평가도 있다. 이와 같은 상반된 평가의 이면에 승려, 그것도 당대의 고승이 아닌 사람이 궁궐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공사에 직접 개입했음이 확인되고,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다. 당대 궁궐 출입은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도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그런데 성지는 그 신분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궁궐 신축을 이유로 자유롭게 궁에 출입했다. 아울러 휴정, 유정, 의엄 등 임진왜란에 전공이 있는 승려들이 일정 수준의 포상과 지원을 받았다는 점은 그 전공으로 인해 승려들이 왕실과 관계를 맺고, 큰 장애가 없이 지배층과 교류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당대의 고승이나 전후 복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승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휴 선수와 그 제자 벽암 각성도 지배층과 교류했다. 부휴 선수는 광해군 대에 불교를 융성하게 만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67) 또한, 제자인 벽암 각성은 그의 스승인 부휴 선수를 이어서 광해군을 비롯한 왕실과 교류했고, 부휴 선수에게 함께 배운 동반(同伴)들과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했다.68) 그 결과 부휴 선수가 입적한 이후 당대의 명문장가들이 부휴 선수의 비문을 작성해주었다. 그리고 벽암 각성은 그의 스승인 부휴 선수 계보의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지배층과의 교류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지배층과의 교류는 사찰과 승려의 토지 소유 문제와도 연결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 후기에는 사찰의 위전(位田), 즉 사찰의 행사나 능침 관리를 위해 경작하는 토지는 물론이거니와 사찰이나 승려 개인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조선 전기까지 사찰과 승려가 따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17세기 이후부터 별산제가 확립되어서 승려의 토지 소유가 활발해졌다. 사위전(寺位田)은 면세지와 비면세지로 구분되는데, 면세되는 사위전 중 능침(陵寢) 사찰의 위전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면세가 인정되었다. 이렇게 면세지로 공인된 사위전은 임진왜란과 광해군 대를 거치면서 상당히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69)

사찰이나 승려의 토지 보유는 승려와 지배층 사이의 교류, 그리고 지배층의 불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전기와 유사하게, 광해군 대 지배층은 사찰에 능침의 관리를 맡기고 토지를 지급했다. 아울러 능침 관리를 위한 토지에는 면세의 혜택도 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불교계가 지배층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결과이다. 또한, 사찰이나 개인의 사찰 소유가 가능해진 것은 당시 불교계가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불교계가 지배층과 교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왕실 불교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는 사례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예를 들어서 궐내 연등 풍속이 인조 대에까지 발견되는데,70)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파일에 금인(金人)을 씻기는 의식은 불법(佛法)과 함께 생겨난 것이요, 도성 거리에서 옥충(玉蟲)을 밝히는 행사는 마음을 서로 전하는 전등(傳燈)을 비유한 것이다.71)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인조 8년(1630)의 기록으로, 인조 대까지도 불교 의례와 연등 행사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도성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특히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던 시기라는 것, 그리고 도성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분이 제약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모습은 광해군 대 이후까지도 상당 기간 불교 행사가 궐 안에서 거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심지어 승려의 궁궐 출입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사례이다. 또한, 연등의 궐내 설치는 유신(儒臣)들의 이목과 반발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이러한 행사가 있었다는 것은 유신들과 왕실 등 지배층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지배층과 불교계가 교류했다는 것도 방증한다.

불교 교단은 조정의 시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했고, 이로 인해 조정과 지배층도 불교 교단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불교의 조직력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불교 정책을 선회했다. 그 결과 왕실의 지원 아래 사찰이 재건되었다. 불교계 역시 역대 왕실의 원당(願堂) 조성에 협조했고, 선왕이나 선대 왕후의 영정이나 위패가 봉안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왕실과 조정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72) 이러한 과정에서 광해군 대는 중요한 접점이 되었다. 특히, 광해군 대의 봉인사 창건의 경우, 그 불사가 이후까지 이어져서, 광해군 대가 원당의 재설치를 비롯한 지배층과 왕실 사이 연계의 시작점이 되었다.

2. 사찰 창ㆍ재건과 예술품 제작

16세기는 사림이 지배층을 구성하고, 성리학을 모든 백성에게 보급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시기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러한 노력과 그 결과에 있는 모순이 드러났으나, 실제 지배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더욱 보수화되었다. 결국, 17세기는 16세기부터 시작된 지배질서의 변화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불교시설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 잿더미 위에서 조선왕조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인 원상복구를 시도하였다.73)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진 17세기 초반에 광해군 대가 위치하고 있다. 광해군 대는 전후 복구의 차원에서 선조 대 후반부터 시작된 사찰 재건을 위한 노력74)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앞에서 언급한 사찰의 중건과 예술품 제작 등의 정책으로 이어졌고, 불교계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조정과 지배층이 종묘, 사직, 궁궐을 비롯하여 관청, 학교, 역원, 읍성, 산성 등 기간 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승려들에게 역을 부과했고, 이로 인해 사찰 재건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찰 재건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이 시기에 불전과 승사(僧舍)만 소규모의 형태로나마 복구되었다.75) 광해군 대에 창건되거나 재건된 사찰은 아래와 같다.

봉인사 창건(1610), 부석사 무량수전 재건(1614), 선운사 대웅전 중건(1614), 갑사 정문 중건(1614), 법주사 대웅보전 중건(1618), 전등사 대웅전 중건(1621), 해인사 수다라장 중건(1622), 완주 송광사 창건(1622~1631)76)

이 가운데 광해군 14년(1622) 완주 송광사의 경우 다른 사찰의 중건에서 시도할 수 없는 큰 규모로 창건되었다. 또 관룡사의 경우, 임진왜란 때 파괴된 사찰이었는데, 17~18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복구되었다.77) 관룡사의 복구는 광해군 대에 처음 시작되어서, 영조 25년(1749)에 중창이 완료되었다.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창한 것은 법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휴 선수계가 주도권을 잡은 것, 당시 사람들이 가진 불교 신앙, 왕실의 지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부휴 선수의 제자이자, 선수계를 일으킨 사람인 벽암 각성은 광해군 1년(1609) 순천 송광사의 중창(重創)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찰들을 중창했다. 또한, 각성은 광해군 14년(1622)에는 중창된 완주 송광사의 화엄 법회에 초빙되었는데, 이 법회는 50일 동안 지속되었고, 전국에서 수 천 명이 모여서 시주를 했다. 특히 그의 불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전각의 건축과 불상의 조성이 많다는 것이었다.78) 각성은 훗날 인조 대에도 당대 최대의 건축 공사였던 남한산성 축조, 해인사 대장경판고 재건, 완주 송광사 개창, 화엄사 재건, 쌍계사 재건을 시행했다.79) 이 가운데 특히 완주 송광사 화엄법회에 수천명이 모이고, 50일 동안 법회가 지속되었다는 것은 당대 불교가 가진 교세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찰의 건축은 승장(僧匠, 승려 신분의 장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승장의 신분으로 인해 승장들은 단순한 기술자와 다르게 그들의 신앙과 그 내용을 건축물에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승장들은 사찰뿐만 아니라 문중의 사원 건축 공사에도 참여하였다. 이것은 사원 건축과 사찰 건축이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찰의 건축은 불교 교리와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그 의미를 담는 작업이다. 이것은 광해군 대에 재건된 사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80)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훼손된 불화(佛畵)를 다시 제작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불화 역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상당수가 소실되었는데,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화는 광해군 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특히, 광해군 대에 대형 괘불(掛佛)이 많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괘불이 주로 수륙재 때 사찰에 걸리는 그림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전란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재가 많이 설행되었다는 증거다. 조선 후기 불화 제작의 첫 시작이 광해군 14년(1622) 죽림사 괘불도였다. 죽림사 괘불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화로, 3명의 승려와 4쌍의 부부의 시주로 조성되었다.81) 이것은 광해군 대가 조선 후기 불화 제작의 시작 시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죽림사 괘불도는 석가불을 주인공으로 영산회(靈山會) 장면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 작품 이후 광해군-경종 대의 불화에는 영산회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법화경 사상”에 의한 석가불 신앙, 즉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신앙이 성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묘법연화경』 신앙은 일찍이 왕실이나 귀족 사이에서 기복 차원에서 전개되어왔는데, 조선 후기에는 신분을 막론하고 유행했고, 특히 피지배계층에서 많이 유행했다. 도상 차원에서도 석가모니가 무릎 아래로 내린 오른손의 모습이 팔은 가늘고 새끼손가락은 벌렸으며, 손의 크기는 신체 비례와 잘 맞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이후 18세기 초 불화에서까지도 계속 발견된다.82) 결국 죽림사의 세존괘불도를 통해 광해군 대가 조선 후기 불화의 조성 양식, 구체적인 불교 신앙의 방향이 시작된 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찰의 창ㆍ중건과 불교 예술품의 제작은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불사였다. 또한, 성리학을 사상적 근간으로 삼고 있었고, 지배층의 보수화가 진행되던 상황에서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즉 광해군 대 사찰의 건축과 중건, 그리고 불화의 제작 등은 광해군 대의 광해군과 왕실이 불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불교가 소위 “숭유억불”이라는 단순화 수 없는 영향력과 경제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대 불교 신앙이 널리 퍼져있다는 것 등을 방증한다. 그 결과 광해군 대는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를 열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시작이 되는 시기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Ⅴ. 결론

본 논문의 목적은 광해군의 대의 불교정책과 이것의 영향을 받는 불교계의 양상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이라고 규정지음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던 광해군 대의 불교가 가진 나름의 영향력과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광해군 대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을 재건하는 동시에 후금의 위협을 막아내야 하는 시기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지배층이 보수화되었고, 지배층 안에서도 붕당(朋黨) 사이에 당쟁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아울러, 유신들이 붕당과 유신 스스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왕권을 견제하거나 왕위 승계에 개입하고, 왕권을 드러내놓고 견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상 명분이 되었던 것이 성리학적 질서였다. 그리고 성리학의 벽이단에 따라 불교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배척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이 이중적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과 왕실은 승려를 우대하고, 원찰을 비롯한 각종 사찰 건축과 예술품 제작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관습, 효의 실천, 전후 복구라는 명분의 일부로서 시행되었고, 일부 왕실 사람들이 불교 신앙을 가졌다고 확인되지만, 실제로 광해군과 왕실 인사들이 불자인지 여부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조선조는 상대적으로 강한 권력을 가진 왕과 유신들 사이의 협의와 합의가 정책 결정과 시행의 기본적인 방식이었고, 왕실의 정치 개입이나 정치의 왕실 내부 문제 개입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실 인사들의 개인적 신앙이 정책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불교 신앙이 명종 대의 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사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왕과 왕실은 조선조에 공식적으로 가장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과 왕실의 신앙은 정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이것을 고려하면, 광해군 대에 왕실의 발원에 따른 각종 불사는 당대 불교의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불교의 위상 변화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유신들도 공식적으로 승려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불교를 배척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대의 유력한 유신들이 승려의 비문이나 문집에 글을 써주고,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스스로가 불자임을 표방하거나 사대부 여성이 비구니가 되는 일까지도 발생했다.

이러한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은 광해군 대의 불교계의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 광해군 대 전까지 지배층은 불교에 대하여 방관적 자세를 취하면서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모습이 보이면 불교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의 전공으로 지배층은 불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이 일정 부분 상승했다. 상승한 위상과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교계는 보사와 구호 활동에 종사했다. 아울러, 승려의 수는 증가했고, 사찰과 승려의 토지 소유가 허가됨으로써 경제적 상황도 좋아졌다.

이러한 배경은 불교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다. 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임진왜란에 공이 있는 승려들에게 시호를 하사했고, 승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일부 승려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승병의 활약을 경험한 후, 광해군 대에는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조정의 일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승려들은 국방, 건축 등 조직력과 물리적 힘이 요구되는 역을 부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해군 대까지는 승려들이 부담하는 역에 대하여 일정 부분 보상해서, 승려가 역을 부담하는 것이 불교에 대한 탄압의 측면보다는 불교에 대한 용인의 측면이 강했다.

이러한 불교정책 아래에서 불교계는 지배층과 교류하면서 사찰을 창ㆍ재건하고, 불교 예술품을 제작했다. 불교계는 전란에서의 승병의 활약으로 높아진 위상을 바탕으로 지배층과 교류했다. 이것은 다시 지배층의 불교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지배층과의 유착 자체도 사찰의 창ㆍ재건과 불교 예술품 제작에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휴 선수와 제자인 벽암 각성 등의 부휴계가 불교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했음도 확인된다.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불교의 상황이 좋아진 측면과 악화된 측면이 공존하는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시행되었다. 지배층은 불교의 조직력을 전후 복구와 국방, 토목 공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시행했다. 불교계 역시 지배층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불교정책에 호응하였고, 아울러 사찰과 예술품을 보수하고 제작하였다. 이상의 모습은 광해군 대의 불교정책과 대응을 살펴보면, 조선불교에 대한 일반적 묘사인 “숭유억불”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 여럿 나타난다고 정리할 수 있다.

미셸 푸코(Paul Michel Foucault, 1926~1984)는 담론은 예외 없이 특정한 권력과 지식의 구조에 연루되어 있고, 이러한 권력과 지식의 구조는 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83)고 주장했다. 실제 조선불교에 대한 연구는 불교학을 비롯하여 역사학, 종교학 등에서 주요한 연구 대상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각 학계의 풍조에 따라서 담론의 생산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에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한동안 조선불교를 연구한 학자들의 선행연구의 결론은 숭유억불이라는 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담론에서 벗어나는 연구들이 1990년대 이후 연구에서 속속 등장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Notes

손성필, 「16ㆍ17세기 불교와 불교계의 동향」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pp.8-10.

이종우, 「광해군 대의 종교지형 변동 -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승려와의 교유」, 『숭실사학』 44 (2020).

같은 글, pp.8-13.

같은 글, pp.13-15.

남동신, 「조선후기 불교계 동향과《상법멸의경(像法滅義經)》의 성립」, 『한국사연구』 113 (2001), p.118.

이종우, 「광해군 대의 종교지형 변동 - 지배층의 이중적 불교관과 승려와의 교유」, pp.15-23.

이종우, 「종교정책을 통해 본 선조 대의 종교지형 변화 - 불교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62 (2011), p.116.

김갑주, 『조선시대 사원경제사 연구』 (서울: 경인문화사, 2007), p.2.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성남: 신구문화사, 2010), p.381.

김갑주, 앞의 책, p.118.

오경후, 「조선후기 불교계의 변화상」, 『경주사학』 22 (2003), p.265.

김갑주, 앞의 책, pp.266-267.

부휴 선수,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한국불교전서』 제8권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3), pp.329-331.

김갑주, 앞의 책, p.169.

『광해군일기[중초본]』 109권, 광해 8년(1616) 11월 22일 기축 2번째 기사.

김갑주, 앞의 책, pp.171-174.

같은 책, pp.147-148.

김용태, 앞의 책, p.381.

김갑주, 앞의 책, pp.155-160.

같은 책, pp.175-181.

한상길,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寺刹契)』 (서울: 경인문화사, 2006), pp.139-181.

같은 책, p.314.

이종우, 「종교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 재고」, 『숭실사학』 41, pp.102-103.

이종우, 「종교정책을 통해 본 선조 대의 종교지형 변화 - 불교를 중심으로」, p.115.

같은 글, pp.131-133.

김갑주, 앞의 책, p.201.

김용태, 앞의 책, p.52.

정석종ㆍ박병선, 「조선후기 불교정책과 원당(1) - 니승의 존재양상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18ㆍ19 합집 (1998), p.245.

오경후, 「광해군ㆍ인조 연간 승역의 실제」, 『한국불교사연구』 6 (2015), pp.45-49.

『광해군일기[중초본]』 130권, 광해 10년(1618) 7월 4일 경인 7번째 기사.

오경후, 「광해군ㆍ인조 연간 승역의 실제」, pp.56-57.

같은 글, pp.53-55.

『광해군일기[중초본]』 118권, 광해 9년(1617) 8월 3일 을미 1번째 기사.

황윤석, 「주부박공전(主簿朴公傳)」, 『이재유고(頤齋遺稿)』 권 22, “有務安縣摠持寺僧性智者.”

오항녕,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서울: 너머북스, 2012), p.280.

손신영, 「광해군대 궁궐영건 재고」, 『강좌미술사』 33 (2009), pp.269-272.

김갑주, 앞의 책, pp.118-119.

오경후, 「광해군ㆍ인조 연간 승역의 실제」, pp.58-64.

이능화 편, 『역주 조선불교통사』 2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pp.306-307.

상국(相國) 이경여(李敬輿) - 호는 백강(白江)이다. - 가 광해조(光海朝) 때 충원 현감(忠原縣監)이 되었다. 하루는 여름철에 칡을 캐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영건도감(營建都監)이 과연 칡 수천 묶음을 징수하매, 칡 값이 모시 값과 맞먹었는데, 이 고을 사람들만은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연(晏然)하였고, 여분으로는 이웃 고을의 급한 사정을 도와주고, 그 값을 대략 쳐서 받아다가 다른 부역의 대가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도감(都監)이 또 장목(長木) 수만 개를 징수하였다. 공은 전에 현의 북쪽에 위치한 산에 재목이 많은 것을 보고는 벌채를 특별히 금지해 두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강가로 달려가서 여러 상인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너희들 중 저것을 베어서 도감에게 바치는 자는 절반을 주겠다.” 하니, 여러 상인들은 모두 좋아 날뛰며 명령에 따랐다. 이웃 고을의 산골 백성들은 장목을 마련하느라 부산하였으나 그 고을 사람들만 부역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약용, “제5조 공잡”, 「목민심서-봉공」, 『목민심서』.

성현 편, 「속잡록」 1, 『대동야승』.

김용태, 앞의 책, p.52.

『광해군일기[정초본]』 14권, 광해 1년(1609) 3월 27일 무신 3번째 기사.

오경후, 「광해군ㆍ인조 연간 승역의 실제」, pp.50-51.

『광해군일기[중초본]』 173권, 광해 14년(1622) 1월 27일 계해 1번째 기사.

김용태, 앞의 책, pp.52-53.

이종우, 「조선 전기 종교정책 연구-불교정책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2010), pp.51-62.

오경후, 「조선후기 불교계의 변화상」, pp.250-251.

박병선, 「조선후기 원당의 정치적 기반 - 관인 및 왕실의 불교 인식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25 (2002), pp.103-104.

같은 글, p.132.

이능화 편, 앞의 책, pp.289-307.

같은 책, p.290.

같은 책, p.292.

광해군 4년(1612) 봉산(鳳山) 군수 신율(申慄)이 군역을 피하려다가 체포된 김경립(金景立)이란 자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성균관 학유(學諭)로 있는 김직재 부자(父子)가 모반(謀反)을 계획한다고 발설하여 김직재가 친국(親鞫)을 당하는 과정에서 혐의를 인정한 사건. 이 과정에서 다른 승려의 무고로 인해 부휴계 승려들이 반란에 연루되어서 체포되고 친국을 당했다. 이 사건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한 대북파의 조작극이었다.

『한글대장경-대각등계집』, p.262;황인규, 「광해군과 봉인사」, 『역사와실학』 38 (2009), p.64에서 재인용. 또한 이 과정에서 중 천옥(天玉)ㆍ선수(善修), 관노(官奴) 풍손(風孫) 등을 국문하였는데, 황혁의 일에 연루된 사람들이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제52권, 광해 4년(1612) 4월 5일 6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4005_006

이경석, 「華嚴寺碧巖覺性大師碑文」, 『한국고승비문총집 : 조선조ㆍ근대편』 (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光海時獄事興休師爲妖僧所誣師偕入京光海見兩師奇之放休還山留師於奉恩寺爲判禪敎都摠攝.”

『광해군일기[중초본]』 121권, 광해 9년(1617) 11월 16일 정축 15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1016_015

이종우, 「종교정책을 통해 본 선조 대의 종교지형 변화 - 불교를 중심으로」, p.125.

황인규, 「광해군과 봉인사」, 『역사와실학』 38 (2009), p.58.

성지가 군직(軍職)에 부쳐졌다고는 하나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니, 첨지(僉知)의 녹봉을 속히 제급(題給)하 라고 해조에 이르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26권, 광해 10년(1618) 4월 19일 무신 5번째 기사.

전교하기를, “첨지 성지를 높은 품계로 부표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45권, 광해 11년(1619) 10월 19일 무진 3번째 기사.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56> 조선시대 보살행자」, 『불교신문』, 2019년 04월 25일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365

손신영, 앞의 글, p.272.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1623) 3월 17일 정미 3번째 기사.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1623) 5월 4일 계사 4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5004_004

황인규, 「광해군과 봉인사」, 『역사와실학』 38 (2009), p.73.

鎌田茂雄, 『한국불교사』, 신현숙 옮김 (서울: 민족사, 1988), p.212.

김미경, 「조선 광해군대의 불사(佛事) 연구 - 안동 선찰사(仙刹寺) 목조석가불좌성 조성발원문을 중심으로」, 『석당논총』 67 (2017), p.100.

김갑주, 앞의 책, pp.2-3.

김용태, 앞의 책, p.100.

윤선도, 「책(策)」, 『고산유고(孤山遺稿)』 제6권 상 별집, 한국고전종합DB.

이강근, 「17세기 불전의 재건설」, 『미술사학연구』 (1995), pp.44-45.

같은 글, pp.39-40.

특히 선조 대에 소위 “삼보(三寶) 사찰” 중 불보 사찰인 통도사와 승보 사찰인 송광사가 재건되었다.; 같은 글, p.50.

같은 글, pp.51-56.

같은 글, p.50. “1610년(광해군2), 감로사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화재로 사라진 가람을 다시 짓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의 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고려할 때 광해군 대에 중창된 사찰들이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천은사 홈페이지 (http://www.choneunsa.org/sub01/sub01.php) 광해군 14년(1622)에 중창되었다. ; 김현정, 「조선 후반기 제1기 불화의 화기를 통한 조성 배경 연구」, 『강좌미술사』 38 (2012), p.127.

남동신, 앞의 글, p.120.

김미경, 앞의 글, pp.9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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