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조선조 유학자들의 양웅(揚雄) 이해에 관한 연구*

조민환**
Min-hwan Jo**
**성균관대학교 교수, E-mail: jomh@skku.edu
**Professor, Academy of East Asian Studies, Sungkyunkwa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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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Jan 31, 2021 ; Revised: Feb 25, 2021 ; Accepted: Apr 05, 2021

Published Online: Apr 30, 2021

국문요약

본 논문은 미시적 차원에서 조선조 유학자들이 양웅의 처세술, 학술, 문학 등을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고 이해했는가 규명하고, 이런 규명을 통해 조선조 유학자들의 학문 경향의 상이점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을 첫째 양웅의 처세술을 ‘망대부(莽大夫)’라고 평가한 것에 대한 견해, 둘째 양웅의 문학성 및 문학작품에 대한 견해, 셋째 양웅의 저술에 대한 견해, 넷째 양웅의 선악혼재설에 대한 견해, 다섯째 후대 인물들의 양웅 평가에 대한 견해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조선조 유학자들의 양웅 평가에는 주희(朱熹)가 양웅이 왕망(王莽)에게 대부 벼슬한 것을 ‘망대부’라고 비판한 것과 정호(程顥)가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비판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조선조 유학자들은 자신이 어떤 학파에 속하고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양웅에 대한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로 다른 평가와 이해에는 각 인물들이 지향한 세계관과 진리인식의 차이점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양웅의 처세술, 학술, 문학 등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은 대부분 주자학을 존숭하는 유학자들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홍직필(洪直弼), 위백규(魏伯珪), 김원행(金元行), 이상정(李象靖)이 그 예다. 영조같은 제왕의 경우도 유사성을 띤다. 다음은 양웅을 긍정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다시 두가지 견해로 나타난다. 하나는 양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거론하는 선택적 차원에서 양웅을 일정 정도 긍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허균(許筠)의 이해가 그것이다. 긍정하는 또 다른 견해는 다시 세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주자학의 훈도를 깊이 받지 않은 경우다. 서거정(徐居正), 성현(成俔)이 그 예다. 둘째, 실학적 사유를 견지한 경우다. 이익(李瀷)이 그 예다. 셋째 진리다원성을 주장하는 경우다. 장유(張維)가 그 예다. 다만 인성론과 관련해서는 모든 유학자들은 맹자의 성선설을 인정하면서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비판한다. 이상 본 바와 같이 미시적 관점에서 양웅에 대한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로 다른 평가에서 한 인물이 어떤 세계관과 사상을 견지하고 존숭하느냐의 차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양웅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달랐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find out from what perspective Joseon Dynasty Confucian scholars evaluated and understood Yang Xiong’s guiding principles and literature at the micro level and to reveal the academic trends of Joseon Dynasty Confucian scholars. This topic is approached as follows: first, an evaluation of Yang Xiong’s way of living as a ‘senior state official of Wang Mang (the controversial Emperor of the short-lived Xin Dynasty)’; second, Yang Xiong’s literary character and his literary works; third, Yang Xiong’s writing style; and fourth, Yang Xiong’s view of good and evil.

These can be summarized in three main ways: One is to agree with Zhu Xi’s criticism of Yang Xiong as a ‘senior state official of Wang Mang’ and dismiss his guiding principles, academic achievements, literature, and other accomplishments. Most of these negatives have been found in Confucian scholars who are especially enthusiastic about theology. Examples include Hong Jikpil, Wi Baekgyu, Kim Wonhaeng, and Lee Sangjeong. In the case of kings such as King Yeong-Jo, the assessment of Yang Xiong is quite similar. The following assessments of Yang Xiong are positive though. Positive assessments are presented from two different views. One is a balanced approach that covers both the positive and negative aspects of Yang Xiong. For example, Heo-Kyun’s understanding. Another positive view can be analyzed from three perspectives. The first case is when the scholars assessing Yang Xiong were not deeply influenced by Zhu Xi’s criticism of him. Seo Geojeong and Seong-Hyeon are examples. The second case are those that broke away from theology or adhered to Silhak [Practical Studies]. Yi-Ik is an example. Third, assessments from scholars who posited that truth was of a pluralistic nature. Jang-Yu is an example of such scholars.

Regarding theories of human nature; however, there was consensus among Confucian scholars that Mengzi held that human nature is good, and thereby it was common to criticize Yang Xiong’s theory that human nature was a mixture of good and evil. From an ideal micro perspective, Joseon Dynasty Confucian scholars’ different assessments of Yang Xiong show that their understanding and evaluation of Yang Xiong differed in accordance with their own differing worldviews and ideas.

Keywords: 양웅; 양자운; 망대부; 태현경; 법언; 선악혼재설
Keywords: Yang Xiong; ‘senior state official of Wang Mang’ [Wangdafu]; Taixuanjing; Fayan; ‘theory that human nature is a mixture of good and evil’

Ⅰ. 들어가는 말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가운데 극복해야 할 대표적인 사유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단시한 노불(老佛)이다. 아울러 주희는 ‘한당제자(漢唐諸子)’를 품평하는데, 이 중에서 유학자라고 평가받는 인물1) 중에서 한사람만 고른다면 바로 양웅(揚雄)2)일 것이다. 주희는 왕망에 대해 ‘왕망(王莽) 밑에서 대부 벼슬한 인물[莽大夫]’이란 점과 관련된 ‘실신(失身)’의 문제점을 강력하게 지적한다. 아울러 맹자의 성선론을 견지하는 입장에서 양웅의 선악혼재설(善惡混在說)도 비판하고, 우주론과 관련해서는 『주역』의 이진법 사유를 기준으로 하여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에서 펼친 삼진법을 비판한다.3) 주희가 양웅의 학설이나 처세가 성리학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주희 이전에 양웅에 관한 개괄적인 평가는 양웅을 순경(荀卿)과 비교하여 말한 정호(程顥)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명도[정호]선생이 말씀하였다 ··· 순경은 재주가 높아서 허물이 많고, 양웅은 재주가 부족하여 허물이 적다. 순경은 재주가 높아서 과감하게 다른 이론을 펼쳤으니, 예컨대 사람의 성을 악하다 하고 자사와 맹자를 그르다 하였으니 과실이 많다. 양웅은 재주가 부족하였으니, 예컨대 『태현경』을 지으면서 『역경』에 비견하고 『법언(法言)』을 지으면서 『논어』에 비견하여 모두 앞선 성인이 남기신 말씀을 모방하였으니 과실이 적다. 순자는 지극히 편벽되고 잡박하니 다만 한 구절의 ‘성악’에서 큰 근본을 이미 잃었다. 양자[양웅]는 비록 과실이 적었으나 이미 스스로 성을 알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도를 말하겠는가.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는데, 순자의 성악설과 양자의 선악이 뒤섞여 있다는 말은 똑같이 ‘본연의 성’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도를 말하겠는가.4)

정호가 양웅을 평가한 내용 중에서 주희는 성론에 관한 것이나 도를 알지 못한 것 등은 수긍하지만, 순경에 비해 ‘과실이 적다’고 일정 정도 양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의 총체적인 견해가 주희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권8 (상)에서 ‘왕망의 대부 양웅이 죽었다[莽大夫揚雄死]’라고 말한 것이다. 양웅은 주로 순자(荀子)와 비교되어 말해지는 경우가 많은데,5) 주희는 양웅의 학설은 ‘노장사상’에 귀결된다고 본다.6) 아울러 양웅의 사상은 황로(黃老)라고 보면서, ‘썩은 유학자[腐儒]’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린다.7) 도통론(道統論)을 견지하면서 벽이단(闢異端)을 강조하는 주희 입장에서 볼 때 양웅 철학이 갖는 노장적 성격, 황로적 성격은 인정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주희가 특히 문제 삼는 것은 『태현경』8)에서 말한 우주발생론에 대한 이해다. 주희는 『태현경』에 대해 졸렬한 공부에 해당한 것이라 평가하고 아울러 도리(道理)란 『태현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9) 주희의 이같은 사유는 ‘음양에서 사상으로, 사상에서 팔괘로’ 전개되는 방식 즉 ‘2진법’으로10) 전개되는 『주역』 음양론이 바로 ‘진리’라는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즉 주희는 노자가 말한 ‘삼생만물(三生萬物)’이란 우주발생 도식을 본받은 『태현경』의 ‘3진법[就三數起]’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11)

조선조 유학자들의 경우 양웅에 대한 정호의 평가와 주희의 평가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묵수적으로 이 두사람의 견해만을 받아들이지 않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두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주희를 ‘주부자(朱夫子)’라고 높이면서 주자학을 존숭하는 입장에서의 양웅에 대한 이해다. 이런 경우는 양웅의 처세, 학술, 문학 등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판한다. 다른 하나는 주자학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인물, 주자학에서 벗어나고자 한 인물, 실학적 사유를 탐구하고자 한 인물들의 양웅에 대한 이해다. 이 경우는 선택적 차원에서 양웅을 비판하지만 아울러 양웅을 긍정하는 경우로 나타난다. 양웅에 대한 이같은 두가지 상이한 현상을 통해 조선조 유학자들의 학파 및 학적 경향의 두 갈래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선조 유학자들이 양웅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하는 ‘미시적 관점’에서 조선사상사를 개괄하면 조선조 사상사에 나타난 서로 다른 큰 흐름을 볼 수 있다는 데에 이 논문의 의의가 있다.

Ⅱ. 양웅의 처세술에 대한 견해

일단 조선조에서 행해진 양웅의 평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점을 홍직필(洪直弼)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정리해보자. 편의상 필자가 번호를 매겨 분류해 본다.

1) 양웅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마침내 왕망의 대부가 됨으로써 대절(大節)을 이미 무너뜨렸으니, 다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2) 설령 그가 저술한 책과 남긴 말들이 모두 이치에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창기(娼妓)가 부처에게 예배하고 백정이 불경을 외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3) 더구나 난해하고 모호한 말을 가지고 천근하고 평이한 내용을 포장하여 꾸며댔습니다. 심지어 성(性)에는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고 인식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성문(聖門)의 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4) 이른바 『태현경』이라는 책은 바로 태초의 역법(曆法)을 몰래 가져다가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실제 내용을 도용하고서 겉의 이름만 달리하여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 글이 마치 갓난아이가 말을 배울 적에 소리만 지르고 옹알대기만 하면서 말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똑같으니, 이 책을 가지고 참람하게 『주역』에 견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또 이른바 『법언』이라는 책은 노담(老聃=老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그 말이 명쾌하지 못하고 끝맺음이 없기가 마치 그 사람됨과 똑같으니, 이 책을 가지고 참람하게 『논어』에 견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반씨(潘氏)가 “마음이 수고로워 날로 졸렬해졌다”라고 평가한 말을 다시 바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5) 한나라 이후로 양웅을 칭송하여 평가하기를 맹자와 대등하게 하였고 심지어 강절(康節=邵雍))과 속수(涑水=司馬光)는 또 양웅을 떠받들어 높이기를 거의 맹자보다 높다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일곱 사람의 성인(聖人)이 모두 길을 잃고 헤맨다.’라는 것입니다. 정자가 양웅을 배척하였으나 그 죄를 모두 바로잡지는 못하다가 주자에 이르러서야 면밀하게 박살내어 다시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양웅을 지탄하는 말들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12)

홍직필의 이상 발언에 나타난 양웅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면, 첫째 양웅의 처세술과 ‘망대부(莽大夫)’에 대한 견해, 둘째 양웅의 문학성 및 문학작품에 대한 견해, 셋째 양웅의 저술에 대한 견해, 넷째 양웅의 선악혼재설에 대한 견해, 다섯째 후대 인물들의 양웅 평가에 대한 견해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13) 이 발언에서 가장 양웅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바로 첫 번째 견해다. 이런 견해는 여러 인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상징적으로 제왕인 영조의 견해를 보자.

상[영조]이 이르기를, “양자(揚子=양웅)의 말은 또한 훌륭한 곳이 많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대’를 물었는데 ‘소’라고 하고 ‘소’를 물었는데 ‘대’라고 한 말은 도를 아는 자의 말인 듯하지만 끝내 어찌하여 몸을 망쳤는가?”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한유도 양자를 칭찬하였고, 양웅 자신이 저술할 적에도 유자로 자처하였습니다. 『법언』은 『논어』를 본뜬 것이고, 『태현경』은 『주역』을 본뜬 것이니, 유가의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는 특별히 ‘왕망의 대부 양웅이 죽었다’라고 기록하여 그 마음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므로 후세에 마침내 그를 존경하거나 본받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심사(心事)뿐만 아니라 마음과 행적도 모두 옳지 않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참으로 학문한 공력이 있다면 어찌 처신을 잘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칭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14)

영조의 양웅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점은 양웅같이 도를 아는 인물 혹은 현인15)이 왜 몸을 망치는[失身] 행위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제왕인 영조는 ‘망대부’로서 양웅’이 행한 대절(大節)을 무너트린 ‘실신’ 처세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영조는 결론적으로 정조가 몸을 망친 관점에서 양웅의 심사뿐만 아니라 마음과 행적도 모두 옳지 않다고 평가한 것은 책을 저술한 인물의 부정적 처신과 연계하여 이해한 것에 해당한다.

정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중국 학술사에서 후대 인물들이 양웅에 대한 개략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후파(侯芭)가 그 스승의 문장이 『주역』보다 낫다고 한 것을 한유가 인정하였고, 송의 왕안석은 양웅을 크게 칭송하면서 ‘극진미신(劇秦美新)’은 양웅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손명복(孫明復)은 “『태현경(太玄經)』은 신망을 병통으로 여겨 지은 것이다.”라 하였고, 사마광은 “공자 이후 성인의 도를 아는 자가 양웅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고, 홍매(洪邁)는 양웅을 안자(顔子)에 비유하였다. 옛사람들이 치켜세우면서 인정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주부자가 ‘망대부’ 세 글자를 크게 씀에 이르러 양웅의 죄가 도망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을 정론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16)

정조가 주희가 ‘망대부’라고 양웅을 폄하한 이후 그것이 양웅 평가의 정론이 되었다는 것은 주로 주자학을 존숭하는 입장에서는 동의하는 내용이다. 조선조에서 양웅을 가장 많이 문제 삼는 인물 중 하나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위백규다. 우선 위백규는 ‘권도(權道)’ 입장에서 양웅의 처세를 미화시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양웅이 왕망에게 벼슬한 일에 대해 세속에서는 이른바 ‘권(權)’이라고 하지만, 인륜의 저울대가 더욱 무너져 저울추가 옮겨 가도 바르지 못해 저울추가 저울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장차 그런 저울을 어디에 쓰겠는가.17)

아울러 권도는 군자가 일을 처리할 때에는 오직 ‘의’에 맞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양웅이 ‘반경합도(反經合道)’라는 측면에서 벼슬살이 한 것도 문제삼는다.

“권도는 다만 경도일 뿐이다”라고 하면, 곧 경일 뿐이지 애당초 어찌 ‘권’ 자가 있었겠는가. ‘경을 뒤집어 도에 합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바로 ‘뒤집다.’라고 말할 때 이미 도가 아니니 어떻게 권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양웅 같은 무리들이 이를 권도를 삼았기 때문에 망대부가 되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권도가 되는가. 군자가 일을 처리할 때는 오직 의(義)에 맞는지를 보아야 한다 ··· 이것이 곧 시중(時中)의 의리이니, 오직 덕이 이루어지고 인이 성숙하여 시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권도와 함께할 수 있다 ··· 역적에게 벼슬한 짓은 극도로 의에 어긋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양웅은 ‘반경합도’라고 하면서 벼슬살이를 했으니, 어찌 권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18)

위백규의 양웅에 대한 이상의 평가는 주자학을 존숭하는 인물인 경우 대부분 공통적인 견해에 속한다. 조선조에서 전문적으로 양웅을 다룬 글 중 하나는 황현(黃炫)이 쓴 「양웅론(揚雄論)」이다. 「양웅론」은 우선 “성인은 배워서 같아질 수 있는가? 배울 수는 있어도 같아질 수는 없다. 만약에 배워서 모두 꼭 같아지려고 한다면 장차 그 가식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는 사람은 성인의 본뜻을 구하지 그 행적에는 얽매이지 않는데, 또 어찌 같아지기를 일삼겠는가”19)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황현의 이 말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인의 경지를 기준으로 양웅을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양웅을 접근하면 당연히 양웅에 대한 부정적인 사유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가 지은 『태현경』은 『주역』을 본받았고 『법언』은 『논어』를 본받았으니, 성인을 배우는 일환이라면 여기에서 그칠 만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왕망에게 나아가 벼슬까지 함으로써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는 성인의 행적과 같아지기를 추구하였다. 그는 아마 ‘공자께서도 양화(陽貨)를 보셨고 남자(南子)도 만났으며, 공산(公山)이 부르자 가려고 하셨고, 필힐(佛肸)이 부르자 가려고 하셨으니, 내가 왕망에게 벼슬하는 것을 아마 공자께서도 인정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천하의 대의가 무너졌고 그 자신은 ‘명교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이는 학문은 반드시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대의와 권도는 성인이 아니면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다 ··· 아아, 『태현경』과 『법언』이 비록 참람하긴 하였으나, 만약 양웅이 이를 안고 궁핍하게 살았더라면, 역시 공자의 후학이 되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자하게 스스로를 안자나 증자 이상의 성인에게 비김으로써 본래 양웅의 면모까지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양웅은 실로 망녕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또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는 세상의 유학자에게 경계가 되기에 충분하다 ··· 그렇다면 ‘공문의 왕망’이라는 지목은 양웅이 첫째로 받아야 하고 왕통이 그다음에 받아야 할 것이다.20)

황현은 양웅 처세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대의와 권도는 성인이 할 수 있는 것임을 모르고 행한 것이라 진단하고, 망녕된 사람이라고 결론짓는다. 양웅을 ‘명교의 죄인’이라 하고 ‘공문의 왕망’이란 첫 번째 타이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왕망을 심하게 비판한 말이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영조 등의 양웅에 대한 견해는 조선조에서 주자학을 존숭하는 유학자들에게는 유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양웅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인물도 만날 수 있다. 바로 계곡 장유다.

양명학을 수용했다고 평가받는 장유는 「우리나라의 경직된 학풍[我國學風硬直]」21)이란 글에서 중국에는 ‘정학’, ‘선학’, ‘단학’ 및 ‘정주학’, ‘육상산학’ 등 다양한 학술 경향이 있다는 관점에서 당시 조선조 학풍의 주자학 일색의 경직된 학문을 비판한다. 장유의 이런 사유는 세계관의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유는 이 같은 사유를 양웅에 대한 이해에도 적용한다. 즉 그동안 양웅의 행위 가운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유는 [촉 땅의 상인이 천금을 들여 양웅의 『법언』 속에 이름을 넣어 줄 것을 청하였다[蜀賈以千金乞載名于揚子法言]는 글에서 양웅이 글을 지을 때 중니(仲尼=공자)를 표준으로 삼았고, 부귀와 권세의 영화를 추구하지 않은 삶을 긍정한다.

촉 땅의 어떤 부유한 상인이 천금을 가지고 양자운[양웅]을 쫓아다니며 자기 이름을 『법언』 속에 기재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자운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대저 자운은 글을 지을 때 중니를 표준으로 삼았는데, 만약에 돈을 받고서 글의 내용을 가감하였다면, 진수(陳壽)나 위수(魏收)가 역사를 팔아먹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고 보면 촉 땅의 상인 또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자라고 하겠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세상의 군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귀와 권세의 영화에 흠뻑 빠져든 나머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향기가 날 것인지 악취를 남길 것인지는 도대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 지취가 또 촉 땅의 장사꾼보다도 못하다 할 것이니, 슬픈 일이다.22)

장유가 양웅이 글을 지을 때 ‘공자를 표준으로 삼아서 했다’는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양웅이 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저서를 저술했다고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입장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견해다. 아울러 양웅이 부유한 상인에 대한 부탁을 거절한 것을 진수(陳壽)나 위수(魏收)가 역사를 팔아먹은 것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은 양웅의 행위는 매우 높게 평가한 것에 해당한다.

이상 양웅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조선조 유학자들 가운데 진리일원주의적 입장에서 주자학만을 존숭하는 학문의 경직성을 타파하고 다양성을 추구하고자 한 장유는 양웅을 매우 긍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노불 및 제자백가의 관심을 가지면서 주자학을 존숭하는 유학자들과 다른 견해를 보였던23) 허균(許筠)은 양웅에 대해 선택적 평가를 한다. 허균은 순경과 양웅을 비교하면서 일단 두사람 모두 성인의 도를 알지 못했다는 비판을 한다. 구체적으로 양웅에 대해서는 『태현경』과 『법언』을 저술하면서 성인과 합치하고자 한 노력이 고루하다 평가하고 순경은 스스로 잘난 체한 것으로 평가한다. 결론적으로 잘났다고 하는 것보다 고루한 것이 낫다는 평가를 하여 양웅을 선택적으로 긍정 평가한다.24) 허균은 양웅이 사부(詞賦)만으로 세상을 울렸더라면 사람들이 그의 잘잘못을 거론하지 않았을 것인데, 도리어 정신을 쏟고 힘을 다하여 유술(儒術)과 합치되기를 구하다가 마침내 망대부(莽大夫)의 배척을 면치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양웅에 ‘실신’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대목이다.

이익(李瀷)은 공자의 많은 제자들의 행태와 평가를 통해 순황, 양웅, 왕필, 가규, 두예, 마융 등을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주자학을 존숭하는 유학자들이 평가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평가를 한다.

성묘(聖廟)의 종사(從祀)에 대하여, 순황의 성악설과 양웅의 왕망에게 벼슬한 것과 왕필(王弼)의 노장을 숭배한 것과 가규(賈逵)의 미세한 행실을 경홀히 한 것과 두예(杜預)의 상기를 단축하자는 것과 마융(馬融)의 권세에 붙은 따위를 들어 고금에 퍽이나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그 취할 만한 점만 들어서 취할 것이지 하자와 허물을 샅샅이 들춰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 당시 70 제자 중에 공백료(公伯寮), 공손룡(公孫龍)의 무리는 무슨 까닭으로 버리지 않았는가? 십철 가운데도 중유(仲由)는 위첩(衛輒)을 지지하여 괴외(蒯聵)를 막았고, 염구(冉求)는 계씨(季氏)를 위하여 세금을 더욱 많이 받아들였는데도 성인이 원만히 용납하였으니, 성인을 제사할진대 마땅히 성인의 마음을 요량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버리고 취한 것을 품고(禀告)한다면 성인은 반드시 그 과실은 책하고 그 몸은 용서하였는데, 어찌 구태여 의론이 이미 정해진 뒤에 이론을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25)

이익은 공자가 행한 제자에 대한 예를 들어 한 인물의 하자와 허물을 샅샅이 들춰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관점을 양웅에 적용한다. 양웅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덕무(李德懋)는 ‘대유론(大儒論)’을 펴면서 양웅은 천·지·인을 통달한 인물26)이라고 극찬한다.

문인은 얻기 쉬우나 선비는 얻기 어려우니, 이는 백 사람의 문인이 한 사람의 선비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경 중에〉 한 가지 경서에 능통하고 〈육예 중〉 일예(一藝)를 전공한 사람을 선비라고 한다. 제자백가의 글을 널리 섭렵하여 명물을 종합적으로 자세히 밝히는 것은 그 다음인 것이다. 여러 성인의 글을 널리 통하고 명리를 탐구하여 한 가지라도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대유(大儒)’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양웅이 말한 천·지·인에 통달한 자인 것이다.”27)

이익의 이같은 양웅에 대한 긍정적 평가 혹은 극찬에는 양웅의 ‘망대부’가 상징하는 부정적인 점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영조처럼 처세와 문학성을 연결하여 이해하는 사유도 없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조선조 유학자들이 양웅을 이해할 때 ‘망대부’라고 비판하지만 반드시 그런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양웅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이런 점을 문학성과 문학작품 및 다양한 양웅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한다.

Ⅲ. 양웅의 문학성 및 저술에 대한 견해

양웅의 문학성과 문학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주로 성인의 마음을 체득했느냐의 여부와 관련이 있다. 하나의 예를 보면, 박덕일(朴德一)이 사마천, 사마상여, 양웅, 유향, 한유 같은 무리들은 모두 문장이 더욱 뛰어난 자들이라 할 수 있지만 모두 성인의 마음은 체득하지 못하였으니 이로부터 도덕과 문장과의 거리가 매우 멀어지게 되었다고 말한 것을 들 수 있다.28) 박덕일은 이른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양웅의 문학이 성인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한 것을 문제삼은 것인데, 이런 평가는 양웅의 문학성을 비판할 때 전범에 해당한다.

이같은 양웅의 문학성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있지만 긍정적인 견해도 있다. 양웅을 삼불후(三不朽) 가운데 ‘입언(立言)’의 관점에서 분석한 서거정(徐居正)이 그 예다.

옛사람의 말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세 가지이니, 덕을 세우는 것과 공을 세우는 것과 말을 세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대개 덕을 세우는 것과 공을 세우는 것은 사람이 기필하기 어려운 것이거니와 말을 세우는 것에 이르러서도 어찌 쉽겠는가. 육경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도 흠잡을 것이 없고, 맹자께서 돌아가신 뒤로 말을 세운 자가 적으니, 서경에 이르러 동강도(董江都:董仲舒)와 가태부(賈太傅:賈誼)가 고문을 창도하고, 사마천과 반고가 그 뒤를 이었으며, 그 후로 양웅, 유향, 왕통과 같은 작자가 서로 계승하였다.29)

양웅을 비판적으로 보는 경우 대부분 양웅, 유향, 왕통 이 세사람을 한데 묶어서 비판하는 것을 참조하면 서거정의 이런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에 속한다. 아울러 서거정의 평가는 앞서 본 영조가 학문, 문장 등을 양웅의 망대부라는 것과 연계하여 이해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 성현(成俔)은 ‘문은 변할 수 있으면 변화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양웅을 가의, 동중서, 사마천, 유향과 더불어 매우 호걸스러운 자들이었다고 평가한다.30) 장유는 ‘양웅과 사마상여의 부를 초록한 것에 대한 서문[揚馬賦抄序]’에서는 양웅의 ‘부’는 사마상여와 더불어 천고에 빛나는 사림(詞林)의 표준이 된다고 극찬한다.

부(賦)는 고시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대개 육의의 하나에 속한다고 하겠다 ··· 서경(西京=前漢)이 융성하던 시기에 성도(成都)의 사마장경(司馬長卿=司馬相如)이라는 사람이 부를 잘 지어 명성을 떨쳤는데, 그지없이 웅대하고 화려한 표현을 능란하게 구사하여 무가내하로 한량없이 세상을 눈 흘겨보면서 종횡으로 치달리곤 하였다. 대체로 볼 때 그의 작품은 이소를 조술한 것으로서 체격을 약간 변화시킨 것이라 하겠는데, 평하는 자들이 조물주의 솜씨에 버금간다고 극찬하는 것도 빈말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양웅씨가 그 뒤에 출현하여 그의 작품을 사모하고 본받으려 하면서 침착하고 사려깊고 노련하고 힘찬 기상을 발휘하여 기이하면서도 난해한 말들을 쏟아 내었다. 천리마처럼 치달리는 그 속도 면에 있어서는 혹 문원(文園=사마상여)보다 약간 뒤떨어질지 몰라도 그가 밟고 간 자취를 살펴보면 마치 똑같은 수레를 타고 간 것 같기만 하니, 이 두 대가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사림(詞林)의 표준이 된다고 할 것이다.31)

노장사상에 깊이 심취하고 『참동계』 등에도 관심을 가졌던 신흠(申欽)은 사마상여의 부(賦)를 칭찬하기 위해 쓴 ‘사마장경의 부 뒤에 쓰다[書司馬長卿賦後]라는 글에서 비록 양웅이 사마상여를 본받은 점에서 사마상여의 ’노복‘에 불과하다는 식의 표현을 하지만, 양웅의 부를 전적으로 가치를 폄하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양웅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한다.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은 부(賦)의 창시자이고, 사마상여와 양웅은 부의 대표적인 자이다. 사마상여의 부체(賦體)는 굴원과 송옥에게도 없는 것이니 창작자라고 할 만하며, 자운(子雲: 양웅의 자)은 그를 모방하였으니 훨씬 뒤떨어졌다. 뒤에 경도(京都)에 와서 지은 작품들은 비록 각각 심오한 기교를 드러내고 풍부한 문장을 과시하였으나 장경(長卿)의 노복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다면 장경은 비록 굴원에게는 뒤지나 부를 짓는 자들의 하나의 큰 사표이니, 위대하다 하겠다.32)

이밖에 신흠은 ’양자운의 부 뒤에 쓰다[書揚子雲賦後]‘에서 양웅의 문사(文詞)는 비록 장경[사마상여]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으나 위진(魏晉)에 비유하면 마땅히 종주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하여 양웅의 문학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33)

이상 본 바와 같이 양웅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에도 두가지 평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웅의 문학성을 ’문이재도‘적 입장에서 비판한 박덕일과 비교할 때 서거정, 신흠 등은 상대적으로 양웅의 문학성을 선택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는 양웅의 철학 저술인 『태현경』과 『법언』에 대한 두가지 견해를 보기로 한다. 양웅의 철학 저술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인물은 노론계로 분류되는 위백규(魏伯珪)일 것이다. 위백규는 왕망이 문장을 잘한 재사(才士)라는 것은 인정하지만34), 『태현경』의 저 작동기, 기타 부(賦)에 관한 문장 내용 및 평소 권력 지향적인 몸가짐에 대한 것은 강력하게 비판한다.

양웅은 장우(張禹)나 공광(孔光) 같으면서 문장을 잘했던 자이다. 그렇지만 〈장양부(長揚賦)〉와 〈우렵부(羽獵賦)〉의 문장은 도리어 공광이나 장우가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것보다도 못하다. 문장을 자랑하려고 안달이 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이른바 『태현경』이니 『법언』이니 하는 저술을 남겼다. 만 마디 말 중에서 한 마디라도 얻었다면 혹시 취할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은 오로지 교언영색(巧言令色)하면서 명성을 훔치고 삶에 욕심을 부리며 염치가 없었던 자이다. 『법언』의 마지막 장은 비록 신(新)나라를 찬미하지 않았지만, 그렇더라고 분명 왕망에 대해 깎아내리는 데 이르지 않았다. 오로지 오랫동안 오르지 않았던 관직에 옮기려고 예(羿)와 착(浞)을 까맣게 잊었으니 스스로 예와 착의 무리에 빠졌다. 납일(臘日)에 초주(椒酒)를 올린 것은 과연 『태현경』 어느 장의 뜻에 부합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왕망이 하늘에서 내린 운수가 있어서 여러 대에 걸쳐 조비(曹丕)처럼 나라를 전했다면, 후대에 양웅을 찬양할 경우에는 반드시 순욱(荀彧)을 순수한 신하라고 인정하듯 양웅을 인정하는 자가 있어서 『법언』을 도통(道統)에 계산해 넣었을 것이니, 통탄할 일이다.35)

영남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상정(李象靖)은 ‘역(易)’을 말하지 않은 맹자는 역의 길흉소장(吉凶消長)의 도와 진퇴존망(進退存亡)의 의를 잘 알았다는 예를 들면서 양웅의 『태현경』을 대강의 흔적만 논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맹자는 역(易)을 잘 사용하였다.”라고 하였고, 소자(邵子)도 말하기를 “맹자는 역의 용(用)을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7편의 글[=『맹자』]’에 어찌 역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겠습니까. 맹자의 언행과 운용이 『주역』의 길흉 소장의 도와 진퇴 존망의 의리에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을 잘 아는 사람은 역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양웅의 『태현경』이나 왕통의 『중설』처럼 대강의 흔적만 논한 것이 아닙니다.36)

그럼 양웅의 또 다른 대표저작인 『법언』에 대한 평가도 보자. 노론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김창협(金昌協)은 성인의 말은 모두 ‘도’를 말한 것이란 기준에서 출발해 양웅의 『법언』을 평가한다. 결론적으로 양웅의 글은 표절과 모방을 통해 난삽하게 되어 버린 것이 제자백가의 글보다 못한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바로 성인의 도를 체득하지 못하고 문장 기법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고, 이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법언』을 읽고(讀法言)」라는 글이 그것이다.

육경은 모두 성인의 말이고, 그 말의 내용은 모두 도이다 ··· 내가 양웅이 지은 『법언』을 읽어 보니, 이 글은 대체로 요순, 공맹을 거론하기를 좋아하여 도를 밝히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글은 매우 난삽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성인의 말과 달랐는데, 이는 어째서인가? 육경의 문구가 비록 간고(簡古)하고 심오하여 알기가 어렵긴 해도 처음 만들어질 때를 따져 보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붓 가는 대로 쓴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을 읽어 보면 막힘이 없음을 알 수 있고, 그 글을 음미해 보면 싫증 나는 점을 찾을 수 없으며, 그 글을 반복하여 읊어 보면 한마디도 빠진 구석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말의 특징으로서 배우는 자들이 종신토록 가까이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양웅의 글은 언뜻 보면 궁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으나 음미해 보면 의미가 얕디얕아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난삽하여 이해하기가 어렵게 하여 마치 간고하고 심오한 것처럼 보이게 하였으니, 비루하게도 그는 문장 기법에 마음을 쓴 것이다 ··· 그런데 양웅은 스스로 성인의 도에 가탁하면서도 그 글은 표절과 모방으로 난삽해져 도리어 제자백가의 글보다 못하니, 이는 도를 터득하지 못하고 문장 기법에 마음을 쓴 정도가 심했기 때문이다, 이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37)

이상과 같이 위백규와 김창협은 양웅의 저서를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런 견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장유(張維)를 거론할 수 있다.

조선에 주자학만이 득세하는 현상에 대해 “우리나라의 경직된 학풍[我國學風硬直]”과 관련된 글을 써 주자학 일색의 학풍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38) 장유는 『태현경』에 대해 ‘간장 단지 덮개용 책이라는 비평을 해명함[覆醬瓿解]’이란 글에서 『태현경』을 저술할 당시의 일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유흠이 『태현경』을 보고, “나는 (자네의 『태현』이) 후세 사람들이 간장 단지를 덮는 데에나 쓰지 않을까 염려되기만 하네. 그런데도 그만둘 수가 없단 말인가”라는 비꼬는 말을 한다. 이에 양웅은 ““유자(劉子=유흠)야말로 비루하기 짝이 없구나. 군자가 말하는 것은 도(道)를 밝히기 위함이지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도를 밝히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것은 그들이 하기에 달려 있다. 내가 할 일을 충실히 하기만 한다면 금궤(金匱)에 넣어져 석실(石室)에 보관된다 하더라도 영광스럽게 여길 것이 없고 도랑에 처박혀 쓰레기처럼 되더라도 욕되게 여길 것이 없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후세에 전해질 경우에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망신만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내실(內實)을 기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라는 것과 “옛날 중니(仲尼)가 육경(六經)을 찬술할 적에 창황분주(倉皇奔走)하며 온갖 모욕을 다 당하고 사방에서 입에 풀칠하며 살았었는데, 죽고 나서는 또 포악한 진(秦)이 분서(焚書)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거의 남김없이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으니, 그 욕됨이 어찌 단지를 덮는 정도로만 그쳤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다 없어진 뒤끝에 장벽(牆壁) 사이에서 나와 사해(四海)에 행해지게 되어서는 하늘을 운행하는 해와 달처럼 휘황하게 빛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도가 그 속에 깃들여 있기 때문이요 내실을 기했기 때문이다”라 하고 결론적으로 “나를 아는 자는 인정해 주고 나를 모르는 자는 비난할 테니, 이런 정도일 뿐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명산에 보관되고 학궁(學宮)에 진열되거나 무리를 모아 강습한다고 해서 『태현경』에 더 이익될 것도 없고, 불태우고 찢어 버리거나 내버리고 짓밟는다 해서 『태현경』에 더 손상될 것도 없다. 그러니 그것으로 간장 단지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어찌 『태현경』에 병(病)이 될 수 있겠는가”39)라는 발언을 기재하고 있다. 장유의 이 글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장유가 ‘간장 단지 덮개용 책이라는 비평을 해명함’이란 글을 써 양웅의 저술 의도가 결국 도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고 대신 변명해준 것은 결과론적으로 『태현경』의 가치를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학문의 객관성이란 점에서 『태현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실학자로서 평가받는 이익(李瀷)이다. 실학자나 양명학자들은 博物學적 사유나 혹은탈주자학적 사유 등을 통해 주희가 춘추의리사관에 입각해 양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망대부라는 입장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이런 점을 이익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 권23, 「經史門·太玄」에서 『태현경』의 문구 가운데 유가 입장에서 봤을 때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구를 골라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는데, 앞부분만 거론한다.

소자(邵子=邵雍)는, “지극하구나 『태현경』이여.”라고 하였으니 이는 칭찬을 극도로 한 말이다. 『주역』은 8×8=64괘이고, 『태현경』은 9×9=81 수(首)라 하여, 그 도가 둘 다 갖추어져 있으니, 『주역』과 서로 참조할 만하다. 그러나 그 문장이 반쯤은 『주역』에 따라 모방하면서 조금 더 기괴하게 꾸며 만들었으니, 그 뜻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어찌 확정할 수 있겠는가? (『태현경』 養首 初一의) “美厥靈根”은 자못 후세 사람의 채용하는 바가 되는 까닭에 그 중 쓸 만한 것만 뽑아 기록한다.40)

이익의 『태현경』 경문에 대한 이해는 조선조 주자학을 존숭하는 인물들이 유가의 윤리도덕이나 우주론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달리 상당히 긍정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상 본 바에서 장유와 이익의 『태현경』에 대한 긍정적인 사유는 주목할 만하다. 양웅의 저서를 긍정하는 경우에는 학문에 대한 열린 자세가 담겨 있고, 부정하는 자세는 주자학을 존숭하는 입장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 양웅의 선악혼재설에 대한 견해

양웅의 선악혼재설에 관한 것은 이미 정호에 의해 비판받는다. 유학은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을 견지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정호는 양웅의 선악혼재설은 본연지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규정하는데, 조선조 유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보인다. 다만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비판한다. 즉 주로 이기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이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관점에서 양웅의 성론을 접근하면서, 양웅은 ‘분수’만 알고 ‘이일’을 모른 것이라 진단한다.

이일분수 네 글자는 가장 체인하고 연구해야 하니, 한갓 이일만 알고 분수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불교에서 작용을 성이라 하여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과 같고, 한갓 분수만 알고 이일을 알지 못한다면 순자와 양웅이 성이 악하다고 말하고 혹은 성(性)에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41)

이이는 성리학의 이일분수 사유를 기준으로 하여, 먼저 이일만 알고 분수를 모르는 경우라면 불교에서 ‘작용을 성’이라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선과 악의 혼재 및 무분별’을 지적하고, 다음 분수만 알고 이일을 모른 경우라면, 성선설의 기본에 해당하는 순선인 성이 악하게 되거나 혹은 성에 선과 악이 뒤섞이는 문제점이 발생한다고 하면서 순자의 성악설과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비판한다. 아울러 이이는 자신의 이기론의 핵심인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입장에서도 양웅의 성론을 비판한다.

물에 국한된 것은 기의 국한이요, 이는 이대로 기와 서로 뒤섞이지 않는 것은 이의 통(通)입니다. 지금 형은 다만 이의 낱낱이 분산된 것이 기에 국한되어 각각 하나의 이가 된 것만 보고, 혼연일체의 이가 비록 기에 있으나 통하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일관의 뜻에 대해서는 어찌 겹겹의 관문(關文)과 고개를 사이에 둔 것처럼 막혀 있지 않겠습니까. 순자와 양웅은 낱낱이 분산된 이가 각각 하나의 물에 있는 것만 보고 본체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순자는 “성이 악하다” 하였고, 양웅은, “선악이 섞였다”는 설을 주장하였고, 맹자는 다만 본체만 들고 기를 타는 설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고자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불비(不備)한 것이요,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불명(不明)하니, 성과 기를 둘로 하면 옳지 않다” 하였으니, 지금 형의 소견은 다만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아니하여, 순자와 양웅에게 빠져 있습니다.42)

이이는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불비(不備)한 것이요,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불명(不明)하니, 성과 기를 둘로 하면 옳지 않다.”는 입장 즉 성과 기를 동시에 논해야만 올바른 성론이 가능한데, 양웅의 성악혼재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결국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는 잘못을 범했다고 결론짓는다. 즉 이통기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통을 모른채 기국의 입장에서만 성론을 전개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김창협은 양웅의 선악혼재설은 기질지성에 초점을 맞추어 논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도리는 정밀하고 사람의 견해는 잘못되기 쉬운 법이니, 시비의 구분은 털끝만 한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근원을 철저히 밝혀 명백하고 정확하므로 당연히 이설이 있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순자와 양웅은 성이 악하다고 하고 섞여 있다고 하였으니, 기질을 가지고 성을 말하는 것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43)

김창협은 성리학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란 두가지 관점에서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순자의 성악설과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기질지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논한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도 비판의 초점은 결국 이이의 입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문장학 측면에서 양웅은 도44)를 몰랐다는 점에서 평가하고, 아울러 양웅의 선악혼재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핵심은 ‘성 아닌 것을 성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본심의 온전한 작용을 논하건대, 선도 할 수 있고 악도 할 수 있는 이치가 있고, 선을 하기는 어렵고 악을 하기는 쉬운 형세가 있으니, 이는 모두 성이 아닙니다. 양웅(揚雄)은 선도 할 수 있고 악도 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 하여 성혼(性混)이라 하였고, 순경(荀卿)은 선을 하기는 어렵고 악을 하기는 쉬운 형세가 있다 하여 성악(性惡)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성 아닌 것을 성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전론(全論)한 것이 있으므로 지금 갖추어 기술(記述)하지 않습니다.45)

정약용은 성이란 기본적으로 純善임에 비하여 마음의 작용은 선과 악 두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순자나 양웅의 성론을 비판한다. 즉 순자나 양웅은 모두 이같은 순선인 성을 제대로 모르고서 성 아닌 것을 성으로 여긴 잘못을 했다고 진단한다. 양웅에 긍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신흠(申欽)도 양웅의 성선불선혼재설은 기질지성만 알고 천명지성이 있음을 모른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천명과 기질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판정한다.

천명지성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기질지성에는 선한 것이 있고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은 천명지성에 입각한 것이요, 순자가 성악설을 말하고 양웅이 성선불선혼재설을 말한 것은 기질지성을 가리킨 것으로 천명지성이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일 뿐더러 천명과 기질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46)

김원행(金元行)은 리(理)의 본질로서 공(公)이란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선설을 따른다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과 양웅의 선악혼재설에 빠지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리는 다만 공(公)일 따름이다. 기(氣)를 탐에 있어 선한 기를 타면 선해지고 악한 기를 타면 악해져 모두 한결같이 기가 하는 대로 따르게 되어 리는 마치 관여하는 바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性)은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투철하지 못하면 외면적으로는 성선설을 따른다 해도 내심으론 필시 순자와 양웅의 설에 빠지게 될 것이 틀림없다.47)

김원행이 공으로서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는 것은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성선설의 근본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순자와 양웅의 성론에 빠지게 된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양웅의 선악혼재설은 리와 기의 차이점,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의 차이점을 모르고 혼잡하여 이해하였다는 식의 부정적인 견해가 대부분이다. 이런 점은 양웅의 처세, 학문, 문학 등에 대해 ‘호오(好惡)가 엇갈리는 것’과 비교할 때 특이한 점에 속한다.

Ⅴ. 나오는 말

송대 주희가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는 가운에 노불(老佛)을 비판한 것 이외에 행했던 것 중 하나는 한당의 제자(諸子)들을 품평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양웅이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양웅은 『태현경』을 저술하면서 『주역』의 이진법이 아닌 삼진법을 응용하는 우주론을 전개하고, 성선설을 부정하는 ‘선악혼재설’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왕망의 대부’라는 이른바 실신(失身)의 처세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주희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는데, 이런 주희의 양웅에 대한 비판은 양웅 비판의 핵심에 해당한다. 하지만 본 논문은 조선조 유학자들 사이에서 주희나 정호와 다른 양웅 평가가 나타난 것에 주목하였다.

본 논문은 미시적 차원에서 조선조 유학자들이 주희가 비판한 양웅의 처세술, 학술, 문학 등을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고 이해했는가를 규명하고, 이런 규명을 통해 조선조 유학자들의 학문 경향의 상이점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본고에서는 첫째 양웅의 처세술을 ‘망대부(莽大夫)’라고 평가한 것에 대한 견해, 둘째 양웅의 문학성 및 문학작품에 대한 견해, 셋째 양웅의 저술에 대한 견해, 넷째 양웅의 선악혼재설에 대한 견해, 다섯째 후대 인물들의 양웅 평가에 대한 견해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조선조 유학자들의 양웅는 주희(朱熹)가 양웅이 왕망(王莽)에게 대부 벼슬한 것을 ‘망대부’라고 비판한 것과 정호(程顥)가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비판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조선조 유학자들에게는 자신이 어떤 학파에 속하고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양웅에 대한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로 다른 평가와 이해에는 각 인물들이 지향한 세계관과 진리인식의 차이점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크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양웅의 처세술, 학술, 문학 등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은 대부분 주자학을 존숭하는 유학자들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면 홍직필(洪直弼), 위백규(魏伯珪), 김원행(金元行), 이상정(李象靖)이 그 예다. 영조같은 제왕의 경우도 유사성을 띤다. 다음은 양웅을 긍정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다시 두가지 견해로 나타난다. 하나는 양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거론하는 선택적 차원에서 양웅을 일정 정도 긍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허균(許筠)의 이해가 그것이다. 긍정하는 또 다른 견해는 다시 세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주자학의 훈도를 깊이 받지 않은 경우다. 서거정(徐居正), 성현(成俔)이 그 예다. 둘째 주자학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실학적 사유를 견지한 경우다. 이익(李瀷)이 그 예다. 셋째 주자학의 틀에서 벗어나 진리다원성을 주장하는 경우다. 장유(張維)가 그 예다. 다만 인성론과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맹자의 성선설을 인정하면서 양웅의 ‘선악혼재설’을 비판한다.

이상 미시적 관점에서 양웅에 대한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로 다른 평가를 보면, 한 인물이 어떤 세계관과 사상을 견지하고 존숭하느냐 하는 차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양웅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달랐던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Notes

이 글은 제6차 ‘신자학국제학술대회(新子學國際學術大會)’(강릉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년 6월 27일 주최)에서 발표한 「한중유학자들의 양웅 평가에 대한 연구」를 조선조의 양웅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전면적으로 재작성한 것이다.

二程, 『二程遺書』 卷18, 「206조」, “한나라 이래로 오직 대모공, 동중서, 양웅 세 사람만이 유자의 기상에 가까웠다[自漢以來, 惟有三人近儒者氣象, 大毛公, 董仲舒, 揚雄].”라는 것 참조.

양웅 스스로가 말한 것에 따르면 조선(祖先)은 원래 성의 희(姬)씨였다. 그러나 후대에 분봉 받은 땅이 진(晉)의 양지(揚地, 오늘날 山西省에 있다.)로서 곧 ‘揚’으로 자신의 씨를 삼았다. 그런데 몇몇 문자성음학자(文字聲音學者)들 예를 들면 단옥재(段玉裁), 왕영보(汪榮寶) 등은 모두 ‘揚’은 ‘楊’과 동음(同音)이고 상통(相通)한다고 여겼다. 아울러 한대(漢代)의 비각(碑刻) 예를 들면 정고비(鄭固碑), 조관비(趙寬碑)에서 양웅(揚雄)의 ‘揚’이 모두 ‘楊’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왕충(王充)은 『논형(論衡)』에서 ‘揚雄’을 ‘楊雄’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예증을 삼아 ‘揚’과 ‘楊’ 모두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학술계에서는 양웅의 성(姓)은 여전히 ‘揚’으로 하는 것이 비교적 합당하다고 본다. 양웅에 관한 전모는 『漢書』 卷87, 「揚雄傳」 참조.

이점에 관해서는 앞서 거론한 제6차 ‘新子學國際學術大會(강릉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년 6월 27일 주최)’에서 발표한 「한중유학자들의 양웅 평가에 대한 연구」 발표문을 참조할 것.

葉采 著, 『近思錄集解』 卷14, 「觀聖賢」, “明道先生曰 ··· 荀卿才高, 其過多, 揚雄才短其過少. 荀卿才高, 敢爲異論, 如以人性爲惡, 以子思孟子爲非, 其過多. 揚雄才短, 如作太玄以擬易, 法言以擬論語, 皆模倣前聖之遺言, 其過少. 荀子極偏駁, 只一句性惡, 大本已失. 揚子雖少過, 然已自不識性, 更說甚道. 率性之謂道, 荀子性惡, 揚子善惡混, 均之不識本然之性, 何以語道.”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不要看揚子, 他說話無好處, 議論亦無的實處. 荀子雖然是有錯, 到說得處也自實, 不如他說得恁地虛胖.”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諸子百家書, 亦有說得好處. 曰, 揚子工夫比之荀子, 恐卻細膩. 曰, 揚子說到深處, 止是走入老莊窠窟裏去, 如清靜寂寞之說皆是也. 又如玄中所說靈根之說云云, 亦只是莊老意思, 止是說那養生底工夫爾.” 및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問揚雄. 曰, 雄之學似出於老子. 如太玄曰, 潛心於淵, 美厥靈根. 測曰, 潛心於淵,神不昧也, 乃老氏說話.” 참조.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揚雄則全是黃老, 某嘗說, 揚雄最無用, 眞是一腐儒. 他到急處, 只是投黃老..如其爲人, 他見識全低, 語言極獃, 甚好笑.”

주희는 ‘태현경’이란 말을 쓰지 않고 ‘태현’이란 말을 쓰는데, 본고에서는 통일을 기하기 위해 편의상 ‘태현경’이라고 한다.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然而如太玄之類, 亦是拙底工夫, 道理不是如此.”

『朱子語類』 卷65, “數只有二,只有易是. 老氏言三,亦是二共生三,三其子也. 三生萬物,則自此無窮矣. 後人破之者非. 揚子雲是三數,邵康節是四數,皆不及易也.”

이런 점은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蓋天地間只有個奇耦, 奇是陽, 耦是陰. 春是少陽, 夏是太陽, 秋是少陰, 冬是太陰. 自二而四, 自四而八, 只恁推去, 都走不得, 而揚子卻添兩作三, 謂之天地人, 事事要分作三截. 又且有氣而無朔,有日星而無月,恐不是道理.” 및 『朱子語類』 卷137, 「戰國漢唐諸子」, “子雲所見多老氏者, 往往蜀人有嚴君平源流. 且如太玄就三數起, 便不是. 易中只有陰陽奇耦, 便有四象, 如春爲少陽, 夏爲老陽, 秋爲少陰, 冬爲老陰. 揚子雲見一二四都被聖人說了, 卻杜撰, 就三上起數.” 등을 참조.

洪直弼, 『梅山集』 卷1, 「答金維誠·乙巳棗秋」(한국문집총간본 a295_387a. 한국고전번역원. 이하는 총간본 번호와 페이지만 기재한다.), “揚雄濡跡於亂賊, 終做莽大夫, 大節已虧, 更無可論. 縱令其著書立言, 盡中理致, 亦無異娼家之禮佛, 屠市之誦經. 况以艱晦之辭, 文淺易之說, 而至認性爲善惡混, 則其不爲聖門之罪人乎. 所謂太玄, 乃勦取太初曆法, 銖兩尺寸, 陰用其實, 而別其名以新之, 其文如嬰兒學語, 號嗄未成, 用是僭擬於周易可乎. 所謂法言, 從老聃窠臼中出來, 其言不明快不了决, 如其爲人, 用是僭擬於論語可乎. 潘氏所謂心勞日拙, 無容改評也. 自漢以來, 稱述揚也, 與孟子幷. 至康節涑水, 又推尊揚也, 幾在於孟子之上, 眞所謂七聖皆迷也. 被程子斥黜而未盡正其罪, 至朱子而剗地埋殺, 無復餘蘊, 人始翕然信及也.”

한국에서 행해진 양웅 연구 중에 본고와 같은 시각으로 양웅을 핵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통해 조선조 유학자들의 학문 경향을 규명한 글이 거의 없다는 점에 본고의 의의가 있다. 양웅의 생애와 『태현경』 및 그의 사상에 관한 개괄적인 것은 이연승, 『양웅 : 어느 한대 지식인의 고민』 (파주: 태학사, 2007)을 참조할 것. 이밖에 王靑, 『揚雄評傳』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0); 鈴木由次郞, 『太玄易の硏究』 (東京: 明德出版社, 1964)와 鄭萬耕, 『太玄校釋』 (北京: 北京師範大學出版社, 1989); 鄭萬耕, 『揚雄及其太玄』 (北京: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9); 萬志全, 『揚雄美學思想硏究』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8); 葉幼明 注釋·周鳳五 校閱, 『新譯揚子雲集』 (臺北: 三民書局印行, 1997) 등 참조. 『태현경』 번역으로는 揚雄 撰·司馬光 集注·류사오쥔(劉韶軍) 點校, 『太玄集註』, 조민환 역주 (고양: 학고방, 2017) 참조. 양웅의 성론에 관해서는 김철호, 「양웅의 선악론」, 『도덕윤리과교육』 61 (2018) 참조.

『承政院日記』 664책(탈초본 36책), 「英祖 4년 6월 23일(壬寅 1728년)」, “楊子之言, 亦多好處, 如或問大曰小, 問小曰大之說, 似是知道者之言, 而終何失身耶? 宗玉曰, 韓愈亦贊楊子, 而其著書, 亦以儒者自處, 法言則擬魯論, 太玄則擬周易, 可爲儒家之羽翼, 而朱子特書莽太夫楊雄死, 以誅其心, 故後世遂不尊師之矣. 上曰, 不特其心事, 心與跡, 俱非矣.宗玉曰, 眞有學問之工, 則豈有失身之事. 此無可稱者矣.”

『承政院日記』 723책(탈초본 39책), 「英祖 7년 5월 19일 辛巳」, “揚雄賢人也, 而朱子以爲莽大夫, 其人雖朴質, 不能脫俗, 則便是時象中人也.” 참조.

正祖, 『弘齋全書』 卷112, 「經史講義49」(新莽)(a265_291c), “侯芭以爲其師之文過於周易. 韓子許之. 宋之王安石盛稱揚雄. 以爲劇秦美新非雄所述. 孫明復曰太玄乃病莽而作也. 司馬光以爲孔子之後. 知聖人之道者. 非雄而誰. 洪邁以雄比顔子. 古人之推許如此. 及朱夫子大書莽大夫三字. 而雄之罪無所逃. 此可爲定論.”

魏伯珪, 『存齋集』 卷16, 「雜著·原類」「原權」, “揚雄之仕莽, 俗所謂權也, 而人倫之衡益隳, 權移而不正, 權不權矣. 將焉用彼哉”

魏伯珪, 『存齋集』 卷7, 「讀書箚義·論語」「子罕篇」(a243_135a), “權只是經則經而已, 初豈有權字. 若曰反經合道則纔言反時. 已是非道, 何可曰權. 揚雄輩以是爲權, 故爲莽大夫 ··· 然則如何是權, 君子處事, 惟義是視 ··· 此便是時中之義. 惟德成仁熟而能時中者, 可與權 ··· 仕於逆賊, 悖義之極, 而揚雄以爲反經合道而仕之, 烏可謂權也.”

黃玹, 『梅泉集』 卷6, 「揚雄論」(a348_506b), “聖人可學而似乎. 曰, 可學也, 不可似也. 使學焉而皆取必乎似, 則將不勝其僞矣. 是以善學者, 求其意而不拘其跡, 亦安事乎似也哉.”

黃玹, 『梅泉集』 卷6, 「揚雄論」(a348_506b), “孟氏沒, 求學孔子者, 雄其始也. 豈不誠傑然哉. 但傲然以爲仲尼復起則悖矣. 太玄象易矣, 法言象論語矣. 學聖人, 汔可以止矣. 卒至仕莽, 以求似乎聖人無可無不可之跡. 其意若曰孔子見陽貨矣, 見南子矣, 公山召則往. 佛肸召則往, 吾之仕莾, 殆亦孔子之所許也. 於是自壞天下之大防, 而甘作名敎之罪人. 盖徒知學必以聖人爲師, 而不知夫精義大用, 非聖人不能行 ··· . 嗟乎. 玄與法言雖僭乎. 使雄抱以窮餓, 亦不失爲孔氏之徒, 而乃忲然自擬於顔曾以上, 幷其所以爲雄者而失之, 雄固妄矣. 亦足爲世儒自大者戒也 ··· 然則孔門王莽之目, 雄其首而通次之可也.”

張維, 『谿谷集』 卷1, 「漫筆」(a092_573c), “我國學風硬直, 中國學術多岐, 有正學焉, 有禪學焉, 有丹學焉, 有學程朱者, 學陸氏者, 門徑不一, 而我國則無論有識無識, 挾筴讀書者, 皆稱誦程朱, 未聞有他學焉, 豈我國士習果賢於中國耶, 曰非然也, 中國有學者, 我國無學者.”

張維, 『谿谷漫筆』 權1, 「蜀賈以千金乞載名于揚子法言」(a092_576d), “蜀有富賈, 持千金從揚子雲, 乞載名法言中, 子雲終不許. 夫子雲著書以准仲尼, 若使受金增損, 便與陳壽, 魏收輩鬻史何異. 蜀賈其亦不自量者乎. 雖然世之君子, 沈酣於富貴勢能之榮, 都不念身後芳臭, 其趣操又出蜀賈下. 悲夫.”

자세한 것은 조민환, 「허균의 ‘제자백가’ 이해에 관한 연구」, 『유교사상문화연구』 79 (2020) 참조.

許筠, 『惺所覆瓿稿』 卷13, 「文部10·讀」「揚子」(a074_251d), “荀卿自大其學, 自私其智, 而欲勝於諸子. 揚雄自賤其學, 自卑其智, 而欲合於聖人. 故二氏俱斥於知者, 其爲不知道也均矣. 雄著法言準論語, 著太玄準易, 以爲己之學不及聖人, 己之智不逮諸子, 不可別立言爲經也. 故著二書以合於聖, 其志陋矣. 其爲艱深之詞者, 所以文淺易之說而愈艱愈夷, 愈淵愈淺, 愈達愈礙, 不得掩其拙. 使雄不爲是, 只以賦鳴世, 則人不議出處矣. 乃反竭心悉力, 求合於儒術, 而終不免莽大夫之斥, 有以也夫. 然雄之過在陋, 而卿之失在不自量, 寧陋而不闇也已.”

李瀷, 『星湖僿說』 卷25, 「經史門」「聖廟從祀」, “聖廟従祀, 如荀况性惡, 揚䧺仕莽, 王弼老莊, 賈逵忽細行, 杜預短䘮, 馬融附勢之類, 古今有許多議論. 愚謂宜取其可取而取之, 不宜尋摘瑕咎. 如當時七十子, 公伯僚公孫龍之軰, 何故不去. 十哲之中, 仲由右輒拒蒯聵, 冉求為季氏附益, 聖人優容之, 祀聖人宜揣量聖人之心. 設使禀告其去取, 則聖人必責其過, 而容其身矣. 又何必紛紛立議, 扵㝎論之後耶.”

하지만 이덕무는 양웅이 ‘진(秦) 나라를 극렬하게 비판하고 신(新)을 아름답게 여겼다[劇秦美新]’는 점에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4 「盎葉記(一)」「文人無耻」(a258_486c), ““揚子雲. 文人之無耻者, 劇秦美新.” 참조.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21, 「編書雜稿(1)」「宋史筌儒林傳論」(a257_299a), “文人易得而儒者不易得, 是盖百文人, 不足以當一儒者. 故能通一經專一藝者, 謂之儒. 泛覽百家綜覈名物, 又其次耳. 至若博通羣聖人之書, 探賾名理, 耻一物之不知, 始可謂之大儒, 此乃揚雄所謂通天地人者也.”

許穆, 『記言』 卷5(上篇), 「答朴德一論文學事書(庚辰作)」(a098_051b), “其後如司馬遷,相如,楊雄,劉向,韓愈之倫, 皆可謂文章之尤著者也. 皆未得聖人之心, 自此道德之與文章, 相去不啻萬里.”

徐居正, 『四佳文集補遺』(二) 「雜著類」「太虛亭集序」(a011_309a), “古人有言, 死而不朽者三, 立德立功立言也. 夫立德立功, 人所難必, 至於立言, 亦豈易哉. 六經, 吾無間然矣. 鄒夫子旣沒, 立言者少, 至西京, 董江都, 賈太傅, 以古文唱之. 司馬遷, 班固繼之, 後得楊雄氏, 劉向氏, 王通氏, 作者相承.”

成俔, 『虛白堂文集』 卷13, 「雜著」「文變」(a014_532a), “文不可變乎. 可變則斯爲變矣 ··· 漢承周文, 其文最盛. 賈誼,董仲舒,司馬遷,劉向,揚雄, 尤傑然者也.”

張維, 『谿谷集』 卷5, 「揚馬賦抄序」(a092_087a), “賦者, 古詩之流, 蓋居六義之一焉 ··· 西京之隆, 成都有司馬長卿者以賦名, 能爲宏博鉅麗之詞, 汪洋恣睢, 馳騁從橫. 蓋祖述離騷而體格稍變. 說者謂神化所及, 非虛言也. 揚雄氏後出, 慕而傚之, 以沈深老健之氣. 發爲奇崛聱牙之語, 雖奔軼絶塵, 或稍後於文園, 而步驟轍跡, 如出一軌, 斯兩家者, 誠千古詞林之標極也.”

申欽, 『象村稿』 卷36, 「書司馬長卿賦後」(a072_227d), ”屈宋, 賦之祖, 馬楊, 賦之宗. 而馬之體, 屈宋之所無, 幾乎作者, 子雲摸之而相距已三十里矣. 後來京都之作, 雖各自逞奇衒富, 不過僕馭於長卿爾. 若是則長卿也, 縱靡於屈, 然比興家, 一大宗師也. 韙哉.“

申欽, 『象村稿』 卷36, 「書楊子雲賦後」(a072_228a), “然其詞則雖非長卿, 班視魏晉, 當執耳也哉.”

魏伯珪, 『存齋集』 卷10, 「讀書箚義(中庸 33장)」(a243_203a), “揚雄豈不是才士也. 其擬易作玄, 全是不文之致也.”

魏伯珪, 『存齋集』 卷14, 「雜著」「格物說尙論」「揚雄」(a243_289a), “雄是張禹孔光而能文章者也.然長揚羽獵之文章. 反不如孔張之無作也. 不耐文章之技癢, 有所謂太玄者法言者, 萬言中一得, 或不無可取. 其心則專是巧言令色掠名貪生, 無廉沒恥者也. 法言卒章, 雖不美新, 王莾必不至收殺. 專爲欲遷久次, 渾忘舁浞, 自陷於舁浞之徒者也. 未知臘日椒酒, 果合於太玄何章之義歟. 但王莽有天數, 數世傳國如曺丕, 後之贊雄者, 必有如許荀彧爲純臣, 而以法言計數於道統者矣. 可勝痛哉.”

李象靖, 『大山集』 卷28, 「與李日昇」(a227_038c), “張子曰, 孟子善用易, 邵子亦曰, 孟子得易之用, 今七篇之書, 曷嘗有一易字而猶云云者. 以孟子之言行運用, 得乎大易吉凶消長之道, 進退存亡之義, 是乃所謂善易者不言易, 而非如揚雄之太玄, 王通之中說, 徒擬議其粗迹也.”

金昌協, 『農巖集』 卷25, 「雜著」「讀法言」(a162_213a), “六經, 皆聖人之言, 而其言者, 皆道也 ··· 及余讀揚雄所爲法言, 其書類喜稱堯舜孔孟, 似欲以明道者, 而竊怪其文頗艱深詰曲, 與聖人言異者, 何也. 六經, 雖若簡奧未易明. 然本其始, 固矢口以出, 肆筆以成. 故讀之而不見其有礙也. 味之而不見其可厭也. 反復之而無一言之或遺也. 此其爲聖人之言, 而學者所以沒身也. 今雄書.驟若未易窮, 而徐而繹之, 直淺淺不見其有得焉, 而故自爲艱深詰曲. 令若簡奧, 陋矣, 其有意於文也 ··· 今雄自附託聖人之道, 而其文剽擬局澁, 反出諸子下. 以其無得於道而有意於文, 甚也. 是豈不可戒也哉.”

자세한 것은 이 논문의 주 47의 張維, 『谿谷集』 卷1 「漫筆」(a092_573c)를 참조할 것.

張維, 『谿谷集』 卷3, 「雜著」「覆醬瓿解(課作)」(a092_068c), “揚子方草玄 ··· 歆過而勞之曰 ··· 吾恐後之人, 用覆醬瓿也. 是亦不可以已者乎. 揚子默然良久, 盱衡而應曰, 甚矣. 劉子之鄙也. 君子之言, 以明道也, 非以蘄乎人之知之也. 道之明, 存乎我, 人之知之, 存乎人. 存乎我者有其實, 則金匱石室, 不足爲榮, 溝渠糞土, 不足爲辱. 不然傳之愈久而詬愈甚. 此君子所以重乎實者也. 昔者仲尼之述六藝也, 倉皇僇辱, 餬口於四方. 及其旣沒, 厄於暴秦之焰. 煬爲灰塵, 幾無存者, 此其辱豈特覆瓿已哉. 然其斷爛之餘, 出於墻壁, 行於四海, 灼然若日月之經乎天, 何者. 道之所寓也. 實之所存也 ··· 知我者取之, 不知我者罪之, 如斯而已. 非以蘄乎人之知之也. 藏之名山, 列於學宮, 聚徒而講習之, 無加益乎玄. 焚之毀之, 棄之轢之, 無加損乎玄, 醬瓿之覆, 庸詎爲玄病乎.”

李瀷, 『星湖僿說』 卷23, 「經史門·太玄」, “邵子曰至㢤太玄, 嗟歎之極也. 八八九九, 其道兩立, 可以與易相叅. 然其文半是依㨾, 稍加竒詭而眩飾之, 其義之合否, 何可定也. 如美厥靈根之類, 頗為後人所採. 故略選其可用者錄之.” 자세한 것은 관련 전문을 참조하기 바람.

李珥, 『栗谷全書』 卷9, 「答成浩原」(a044_196a), “理一分殊四字, 最宜體究. 徒知理之一而不知分之殊, 則釋氏之以作用爲性, 而猖狂自恣是也. 徒知分之殊而不知理之一, 則荀揚以性爲惡, 或以爲善惡混者, 是也.”

李珥, 『栗谷全書』 卷10, 「答成浩原」(a044_214c), “局於物者, 氣之局也. 理自理, 不相挾雜者, 理之通也. 今兄只見理之零零碎碎者, 局於氣而各爲一理, 不見渾然一體之理. 雖在於氣, 而無所不通, 其於一貫之旨, 何翅隔重關複嶺哉. 荀揚徒見零碎之理各在一物, 而不見本體. 故有性惡善惡混之說. 孟子只擧本體而不及乘氣之說, 故不能折服告子. 故曰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 二之則不是. 今兄所見, 只論氣而不論性, 陷於荀揚矣. 與其不明, 曷若不備之爲愈乎.”

金昌協, 『農巖集』 卷14, 「答閔彥暉」(a162_018b), “然而道理精微, 人見易差, 是非之爭, 只在絲髮. 是以孟子之言性善, 極本窮源, 明白正當, 宜不容異說也. 而至荀揚氏, 或以爲惡, 或以爲混, 則未免以氣質言性矣.”

丁若鏞, 『茶山文集』 卷11, 「五學論」(3)[『定本 與猶堂全書』(2), 299~301쪽], “揚雄不知道.” 정약용은 이 글에서 양웅 이외 유향, 사마상여, 한유, 유종원, 소식 등의 문장에 대해 모두가 화려하긴 해도 알맹이가 없고 기이하긴 해도 올바르지가 못하였다고 혹평한다.

丁若鏞, 『茶山文集』 卷19, 「答李汝弘(丙子九月日)」[)[『定本 與猶堂全書』(4), pp.160-162]], “若論本心之全用, 有可善可惡之理, 有難善易惡之勢, 摠非性也. 楊雄以有可善可惡之理而謂之性混, 荀卿以有難善易惡之勢而謂之性惡, 摠以非性爲性, 另有全論. 今不具述, 是日又書.”

申欽, 『象村稿』 卷58, 「求正錄(中)」(a072_396a), “天命之性, 無不善, 氣質之性, 有善有不善. 孟氏之言性善, 天命之性也. 荀氏楊氏之言性惡性混, 指氣質之性, 而不知有天命之性也. 且不知天命與氣質之爾殊也.”

金元行, 『渼湖集』 卷14, 「雜著·雜記」(a220_273a), “理只是公而已. 其乘於氣也, 乘乎善則善, 乘乎惡則惡, 皆一隨氣之所爲, 而理若無所與焉. 然則性無善惡, 何以見其不是也. 於此而不能透, 雖外襲性善, 而中必陷於荀揚無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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