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신라승 김지장(金地藏)의 지장보살화(地藏菩薩化) 과정

안양규1,*
Yang-gyu An1,*
1동국대학교(경주)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Buddhist Studies, Dongguk University(Gyeongju)
*동국대학교(경주) 교수, E-mail: an313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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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Jan 30, 2021 ; Revised: Jul 22, 2021 ; Accepted: Aug 03, 2021

Published Online: Aug 31, 2021

국문요약

신라 출신인 김지장(金地藏)은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불교에서 김지장의 보살화(菩薩化)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특이하다. 첫째 자국인 신라가 아니라 타국인 중국에서 보살화가 비롯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실존 인물이 신화적 존재인 지장보살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장의 보살화 과정은 크게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중국의 구화산에 들어가서 수행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는 기간으로 지장보살처럼 추앙받는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김지장이 입적 직후부터 입멸 후 3년까지의 시기로 김지장의 전신사리(全身舍利)를 모시는 탑과 탑묘(塔廟)가 만들어진 시기로 지장보살로 동일시되는 시기이다. 셋째 시기는 입적 후 3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장보살로 유지되는 시기이다.

김지장의 보살화 과정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내적 보살화 과정이다. 김지장의 수행과 교화가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지옥 중생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을 실천한 것이다. 중생 교화는 철저한 자기 수행과 엄격한 수행 생활에 근거하고 있다. 김지장의 덕화를 입은 사람들은 김지장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보살화 과정에는 보은(報恩) 심리가 내재해 있다. 대중들의 심리 속에 은혜를 베푼 인물을 잊지 않고 존경해야겠다는 심리가 있다. 김지장이라는 은인(恩人)을 기억하려는 의도가 김지장의 지장보살화를 촉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외적 보살화 과정이다. 신비적인 현상도 보살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입적 시 나타난 신이나 입적 후 3년에 육신불의 화현은 보살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육신불의 화현은 역사적인 인물에서 초역사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런 육신불에 보시를 하면 공덕이 발생한다는 신념은 대중들에게 지속해서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경배하도록 하였다. 이런 대중들의 신앙심에 발맞추어 중국 황실에서 수시로 김지장의 전신사리를 모신 육신보전을 보수하고 지원함으로써 김지장을 국가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김지장의 지장보살화 과정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분석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재세시 김지장의 수행과 덕화(德化)에 기인한 것이다.

Abstract

The Buddhist monk, Kim Ji-jang (金地藏), a native of Silla, is still revered as Ksitigarbha Bodhisattva in China. In Chinese Buddhism, Kim Ji-jang’s becoming Ksitigarbha Bodhisattva is unique in at least two ways. First, it is said that his becoming the bodhisattva originated not in Silla, but in China, a foreign country. Second, it is said that the historical person became regarded as a mythical being, Ksitigarbha Bodhisattva.

The process of Kim Ji-jang’s becoming Bodhisattva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The first period is the period of entering and practicing at Mount Jiuhua in China, and this also includes the period wherein he was first revered as Ksitigarbha Bodhisattva. The second period begins immediately after Kim Ji-jang’s death and ends three years later. In this period he became regarded as Ksitigarbha Bodhisattva. The third period spans three years after his death to the present age. His status as Ksitigarbha Bodhisattva carries on at present.

There are two main causes for Kim Ji-jang’s transformation into the bodhisattva. The first is an internal bodhisattva process. According to Ksitigarbha Bodhisattva’s main vow, Kim Ji-jang’s practice and edification impressed the public. The second is an external bodhisattva process. The miracles that appeared at the time of his death or the manifestation of the incorruptible relics three years after his death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process of Kim Ji-jang becoming a bodhisattva. In line with the public’s devotion, the Chinese imperial family repaired and supported the temple that enshrined the relics of Kim Ji-jang. Various factors could be analyzed in the process of Kim Ji-jang’s becoming Ksitigarbha Bodhisattva, but more than anything else, it was Kim Ji-jang’s severe ascetic practices and his virtuous edification of others.

Keywords: 김지장; 보살화; 김교각; 전신사리; 지장보살; 육신보전; 육신불
Keywords: Kim Ji-jang; becoming a bodhisattva; Kim Gyogak; whole body sari; Ksitigarbha Bodhisattva; temple reliquary; living buddha

I. 서언

신라 출신 스님인 김지장(金地藏, 696~794)1)은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불교에서 신라스님 김지장이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동격(同格)이 되는 과정과 그 시기를 연구하고자 한다. 신격화(神格化)는 신(神, God)을 믿는 사회 문화나 종교에서 특정 인물을 신과 동등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약성서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자료는 예수의 역사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인간이었던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신적인 존재’라는 말은 한 인물을 신에 가까운 성품 또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서부터, 아예 신(하나님)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포함한다.”2) 전능(全能)한 신을 믿지 않는 불교에선 신격화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 본고에선 김지장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초역사적인 존재인 보살로 여겨지게 되는 과정 즉 보살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중국불교에서 김지장의 보살화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특이하다. 첫째 자국인 신라가 아니라 타국인 중국에서 보살화가 비롯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실존 인물이 신화적 존재인 지장보살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불교에선 4대 명산에서 4대 보살이 숭배되고 있다: 아미산(峨眉山)의 보현보살(普賢菩薩), 보타산(普陀山)의 관음보살(觀音菩薩),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文殊菩薩), 구화산(九華山)의 지장보살(地藏菩薩).3) 보현, 문수, 관음 등 세 보살들은 모두 인도 불교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비역사적 존재인 데 반해 지장보살로 여겨지는 김지장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구화산의 지장보살로 섬겨지는 인물이 신라 왕족인 김교각(金喬覺)이다.4)

김지장이 특정 시기에 일시에 보살로 여겨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보살화 과정은 크게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구화산에 들어가서 수행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는 기간이다. 입산 수행과 중생 교화의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김지장이 입멸 직후부터 입멸 후 3년까지의 시기로 김교각의 전신사리(全身舍利)를 모시는 탑과 탑묘(塔廟)가 만들어진 기간이다. 셋째 시기는 입적 후 3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첫 번째 시기는 김지장이 살아생전에 지장보살처럼 추앙받는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동일시되는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신앙되고 유지되는 시기이다. 세 개의 시기 중 두 번째 시기가 보살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시기는 둘째 시기를 위한 준비단계로, 세 번째 시기는 둘째 시기에 이루어진 지장보살화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후속 단계로 볼 수 있다.

김지장에 관한 연구는 중국에서 먼저 이루어졌으며, 한중 국교 수립 이후 김지장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중국 학술계에서 김지장에 관한 연구가 비교적 많으나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그에 관한 연구는 중국에서만큼 많지 않다. 한국의 선행연구를 보면 2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김지장의 사상과 수행, 교화 등을 연구한 논문으로 주로 불교학계나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5) 둘째 김지장과 구화산을 중심으로 한중 문화교류와 관광 관련된 연구로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6)

김지장에 대한 고전 자료는 한국에는 없고 중국에서 작성된 것들이다. 중요한 것으로 당나라의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 송나라의 『송고승전(宋高僧傳)』, 원나라의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 명나라의 『신승전(神僧傳)』과 여러 종류의 『구화산지(九華山志)』 등이 있다.7) 기록상,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당대(唐代) 813년 비관경(費冠卿)이 쓴 『구화산화성사기』이다. 비관경은 글의 말미에 813년 가을에 작성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산 아래에 한거하며, 어려서부터 듣고 본 것을 조심스럽게 기록한다.”8) 『구화산화성사기』를 기본 자료로 삼고 후기 관련 문헌들을 살피면서 김교각의 지장보살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제1기 형성단계 : 김지장의 수행과 교화

1. 인간적 면모

현존하는 구화산 역사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구화산화성사기』에 의거하면 696년 출생하였고 99세로 794년에 입적하였다. 김교각의 최고의 전기는 매우 사실적이다. “지장 스님은 김씨이며 신라국 왕자이며 김씨의 자손이다. 키는 7척 장신에 이마에는 기이한 뼈가 솟아있고, 힘이 세서 백 사람 장부의 힘을 배가하였다.”9) 김교각이 신라의 왕족 내지 왕자 출신이라는 것을 중국 문헌에서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김교각 본인도 자신이 신라국의 왕자라고 밝히고 있다. “원래 이 몸은 서쪽 나라 왕자이었네.”10) 그의 신분에 대해 여러 문헌이 신라국 왕자, 김씨 근속(近屬), 신라국 왕자, 신라 국왕의 지속(支屬) 등 여러 가지 주장을 하고 있지만 높은 왕족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11) 왕자 내지 왕족은 사회 신분상 최고위층에 속한다. 고대에 최고의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계급인데 그런 특권을 포기하고 출가하였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광활한 중국에 비하면 신라라는 작은 나라일지라도 왕자 내지 왕족 출신이라는 출가 스님이라는 사실은 중국인에게 김지장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켰을 것이다.

7척에 이르는 장신(長身)은 그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12) 이마가 톡 튀어나왔으므로 특이하게 보인다. 힘이 세고 거구인 모습을 종합해 보면 힘센 장수(將帥) 내지 장사(壯士)를 연상하게 된다. 김교각의 출신 성분도 그리고 외모도 현지 중국인에게 특이하게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구화산에서 수행할 때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스님은 여러 차례 굶고 지냈음을 「수혜미(酬惠米)」라는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감히 문 두드려 다른 말 꺼내지도 못했는데/ 어제는 쌀을 보내주고 아침밥까지 지어주었네/ 오늘은 황금 같은 저녁까지 먹었네/ 배가 부르니 전일의 굶주림을 잊게 되네.”13) 이전엔 왕자 내지 왕족 출신으로 굶주림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 걸식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가 사문이 되어 걸식하는 생활을 하면서 음식 공양의 감사함을 표현하고 있다. 쌀과 밥을 공양해 준 오용지(吳用之)에게 감사하고 있다.

노년에 지은 시(詩)에서 김지장 스님의 인간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나이 어린 사미승이 집을 그리워하여 하산하는 것을 보며 지은 시에서도 김지장의 인정(人情)을 느낄 수 있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김교각은 자신을 ‘노승(老僧)’이라고 칭하고 있다. “노승에겐 안개와 노을이 도반이네.”14)

2. 초인적 고행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온 이후에도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신라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도착하여 천(千) 리의 길을 걸어서 구화산에 이르게 된다. 구화산에 입산한 이래 주로 산에서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 중에서 홀로 수행하였다. “오직 한 승려만이 석실 안에서 눈을 감고 수행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다리가 부러진 솥 안에는 흰 흙과 소량의 쌀뿐이고, 그것을 익혀 먹고 있었다.”15) 인적이 없는 깊은 산중에서 홀로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맹수 등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동굴 안에서 육신이 지탱할 정도의 음식만 섭취한 것은 사실상 금식이나 단식에 가까운 것이다.

김지장의 엄격한 수행과 인품이 구화산 인근과 전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아가 김교각의 명성은 신라국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김교각을 흠모하면서 한국으로부터 그를 찾아와 제자로 되려는 사람이 많아서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이 부족하였다. 김교각과 그의 제자들은 모두 밀가루 같은 흙을 파먹고 직접 농사를 하면서 장작을 준비하였다. 이런 검소한 생활을 하는 김지장과 그의 제자들을 ‘고고중(枯槁衆)’ 즉 ‘몸이 마른 장작과 같은 대중’이라고 칭하며 높이 우러러보았다.16)

김지장은 다른 제자 승려들과 똑같이 먹고 입고 수행하였다. 제자들과 달리 먹거나 입지 아니하고 특권을 누리지 않고 오로지 경전을 공부하였다. “스님은 남대(南臺)에 머물면서 스스로 삼베옷을 지어 입었지만, 그 무게가 모두 같았으며, 당(堂)에는 평상만이 있었을 뿐이다. 방생지 곁에 대(臺)를 세워 사부경(四部經)을 모시고 종일 분향하며 오로지 깊은 뜻만을 맛볼 뿐이었다.”17) 그가 머물던 방에는 나무로 만든 침대 하나밖에 없었고, 자신의 옷도 스스로 짓는 등 일반 승려들과 다름없었다.

3. 대중과 황실의 후원

고행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에 감화된 사람들이 땅을 마련하고 절을 지어준다. 당 숙종 치덕(756~757)에 제갈절(諸葛節)과 그 동료들은 우연히 동굴 속에서 홀로 엄격히 수행하고 있는 김지장 스님의 모습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김지장 스님을 후원하게 된다. 구화산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사방에서 모여들어, 나무를 베고 집을 지어 수행할 수 있는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으로 인해 당나라는 전역이 파괴되고, 기아(飢餓), 질병 등으로 대중들이 격심한 고통에 빠졌다. 이런 고난의 삶에 김지장의 덕화는 많은 대중에게 감화를 주었을 것이다. 이런 감화 덕분에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김지장을 위해 사원 등을 지어 보시한 것이다.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755.12.16~763.2.17)은 3,600여만 명이 죽었을 정도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결과 안사의 난은 당나라 쇠퇴의 전환점이자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안사의 난 전후로 지장은 구화산 일대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하여 전신을 던져 구제의 손길을 펼쳐내었다. 그가 펼쳐낸 구제의 손길은 지장보살의 원력행을 방불케 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18) 김지장의 보살화는 그 당시 당나라의 정치적 정황과도 연관이 있다.

당 덕종 건중(建中, 780~783) 연간 장엄(張嚴)은 지주(池州) 태수로 임명되어 구화산 일대를 다스리면서, 김교각의 인품을 높이 숭배하여 사원에 많은 재물을 시주하였다. 각지 성읍의 지주, 토호, 관신도 화성사로 찾아와 시주하였다. 장엄은 덕종 황제에게 보고를 올려 “낡은 편액을 옮기고 절의 새로운 편액을 상주하였다.”19) 장엄이 황제에게 편액을 상주한 것은 당 황제의 공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김지장 스님을 인정한 것이다.

757년 당황제 숙종이 김지장에게 금인(金印)을 하사하였다. 금인에는 6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지장, 즉 김지장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제의 금인은 그 자체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황제가 금인을 내린다는 것은 김지장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들에게는 황제가 모시는 스님으로 여겨져 보살처럼 받들었을 것이다. “지덕 2년에 만들어졌다는 방인(方印)의 ‘地藏利生寶印’이라는 명문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명문이 쓰였다는 사실은 김지장과 지장신앙은 밀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후 신이에 근거를 둔 지장보살의 화신이 아니라 생존 시부터 지장보살을 신앙했다고 할 수 있다. 설사 지장이라는 법명의 호칭 시기가 입적 이후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생전에 지장신앙을 갖고 있었기에 그러한 호칭이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20)

이백(李白)은 김지장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이백이 직접 김지장을 만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김지장의 인품과 덕화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석가모니 열반하니 일월이 부서져 내리는데/오직 부처님 크고 밝아 생사의 눈을 녹이네./보살의 자비력에 의탁하여 무량한 고통을 구제하네/홀로 광겁의 윤회에서 나와 생사의 강을 건너니/지장보살이 되고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네.”21)

김지장을 찬탄하는 시에서 이백은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존칭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의 부촉을 받아 무불(無佛) 시기에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지장보살의 원력을 김지장이 이어받아 많은 중생을 구제하니 진실로 김지장이 지장보살이 되었다고 칭송하며 미래에 불(佛)이 될 것이라고 예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그 당시 칭송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Ⅲ. 제2기 결정단계 : 김지장의 신이(神異)

1. 산신용천(山神涌泉)

비관경의 기록에는 김지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기술도 보이지만 신이(神異)한 현상도 적혀 있다. 김지장이 용맹정진하고 있을 때 독벌레가 와서 김지장을 물었지만 김지장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좌선 수행하였다. “스님이 독벌레를 만났으나 단정히 앉아 무념하였다.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 절을 하고 약을 바치면서 아뢰었다. ‘제가 몰라보았습니다. 샘물을 나오게 하여 그들의 허물을 보상하겠습니다.’ 앉아 있는 바위를 응시하니 돌 사이에서 물이 솟아 나왔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구화산의 산신이었다고 한다.”22)

김지장의 수행에 감복하여 산신마저도 나타나 김지장을 돌보고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전통의 산신(山神)보다도 김지장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보통 승려와는 완전히 다르며 산신으로부터도 숭배받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김지장은 지장보살이라는 신념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육신보살과 육신불

산신용천 이야기도 신이한 것이지만 김지장의 입적과 관련된 이야기는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동일시 내지 동격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비관경(費冠卿)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입적할 때 즉 정원(貞元) 10년 (794년)과 입적 후 3년에 신이가 일어났다.

① 산이 울고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 무정(無情)도 감동한 것이 아닌가? 시적(示寂)에 있어 비구니 시자가 와서 미처 말하지 않았는데, 절에서 종을 쳤지만 소리가 나지 않고 땅에 떨어져 버렸다. 비구니가 와서 방에 들어가니 서까래 3개가 무너졌다. 우리 스님의 신이가 아닌가? ② 함(函)중에 결가부자(結跏趺坐)의 자세로 모시기를 3년이 지나서, 함을 열고 탑에 모시고자 하니, 얼굴이 살아계실 때와 같았으며, 옮길 때 골절이 움직여 쇠사슬 움직이는 소리가 울렸다. 경전에 이르기를, “보살의 몸은 쇠사슬과 같아서 모든 뼈에서 울림이 난다”라고 하였다. ③ 그 탑의 땅은 불타는 것과 같이 빛을 발하니 원광이 아니겠는가?” 불묘(佛廟)는 뭇 재목들을 얽어 만들어 대중들이 힘써 보호하였다. 한번 재물을 보시하면, 그 과보가 나타났으니, 아래로는 윤왕(輪王)이요, 위로는 성지(聖地)에 올랐다.23)

김지장의 입적과 그 후 3년까지 나타난 신이는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은 무정물(無情物)조차도 스님의 입멸을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는 현상은 희귀한 현상으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입적할 때 땅이 진동한 것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이 애통해하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서까래가 무너진 것도 신기한 일이다. 산천초목이 스님의 입적을 추모한 것이다. ②는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여겨지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곳 기술을 세분하면 세 가지의 신이로 분석된다. 첫째 보통 사람이 죽을 때나 사후 시신의 자세는 누워 있는 것인데 김지장은 정좌(正坐)한 것이다. 둘째 김지장의 몸이 부패하지 않고 살아 있을 때의 육신과 똑같았다. 셋째 김지장의 몸을 옮길 때 보살의 몸에서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발생하였다. ③김지장의 전신사리(全身舍利)를 모신 탑에서 빛이 나왔는데 원광과 같았다. 불묘(佛廟)에 보시하면 좋은 과보가 발생하였다.

①에서 무정물의 슬픔 표현은 붓다의 입멸 시 발생한 땅의 떨림과 같은 것으로 보면 김지장을 불(佛)과 연계시키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히 김지장을 불(佛)이라고 명시하지 못하지만 심정적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③에서 원광(圓光)이라는 표현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원광은 대체로 불(佛)에서 비롯되는 빛으로 불광(佛光)이라고 할 수 있다. 불묘라는 용어는 불탑 내지 불탑을 모시는 전각이나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김지장의 전신사리를 모시는 탑 내지 부속 건물을 불묘라고 부른 것은 김지장을 불(佛)처럼 여기려는 심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추정된다. 불묘가 나중에 육신보전(肉身寶殿)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사리탑을 공양받을 수 있는 자격은 불(佛), 벽지불(碧支佛), 아라한(阿羅漢), 전륜성왕(轉輪聖王) 등 네 종류의 사람이다.24) 이런 가르침에 따르면 김지장의 사리를 모시고 탑에서 원광이 있었다는 것은 김지장이 불(佛)내지 벽지불과 비슷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김지장의 사리를 모신 탑을 불묘라고 호칭한 것은 김지장을 불(佛)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묘에 보시하면 그 과보로 왕이 되기도 하였다. 대중들에게 보살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영험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에게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험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는 이 지역민들에게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에서 정좌한 채로 입멸한 것은 선정(禪定)에 들어가 있음을 암시한다. 육신의 기능이 모두 정지되고 부패해 흩뜨려지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선정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선정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아니며 육신이 부패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apatti)을 언급할 수 있다. 멸진정에 있으면 육신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가섭은 석가모니불의 부촉을 받아 어느 산속에서 멸진정에 입정하여 미래불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25)

입멸한 김지장의 몸에서 보살의 몸에서 나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 것은 김지장을 보살로 동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미륵보살은 금장(金杖)으로 구쇄해골(鈎鎖骸骨)을 두드려 그 소리로부터 죽은 자의 행처(行處)를 분별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붓다가 미륵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구쇄해골을 관(觀)하여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여 갈 곳을 알게 하고, 분별하여 결정해 주어 의심과 막힘이 없게 하라.’ 그때 미륵보살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금강칠보신장(金鋼七寶神杖)을 집고서 구쇄해골을 두드려 그 골성(骨聲)을 들었다.”26) 죽은 자의 해골을 두드리면 육도 중 어느 곳으로 재생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보살로 태어날 사람의 골성은 다른 중생과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미 ‘구쇄보살(钩锁菩萨)’의 용례가 나타났으며, 그 골성(骨聲)으로 성속(聖俗)을 판별할 수 있다는 경전적 근거가 더해지고, 더욱이 법명이 ‘지장’이라는 사실이 함께 메타포되어 후대에 이른바 ‘지장보살의 응신(應身)’으로 신성화된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상 구화산이 ‘지장도량’으로 성역화되는 기점은 바로 김지장의 입적과 3년 후 탑에 봉안하기 위해 함을 개봉한 일로부터라고 하겠다.”27) 보살의 몸은 쇠사슬과 같아서 소리가 난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대중들은 김지장을 지장보살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지옥이 빌 때까지는 절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誓願)을 김교각이 육신으로 실현한 셈이 되었다. 입적 후에도 육신이 부패하지 않고 정좌한 자세로 있다는 것은 중생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어서도 살아 생전의 모습으로 유지되는 것은 대중들에게 신비감과 신심(信心)을 불러일으키고 깊게 한다. 지장보살의 대원 즉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하고도 부합한다. 사후 육신의 기적으로 김지장은 지장보살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김지장 보살을 육신보살이라고 하는데, 육신보살이란 생신보살(生身菩薩)을 가리키는 말로써 부모가 낳아준 몸 그대로 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이처럼 사람의 몸에 금박을 입혀 만든 불상을 “육신불”이라고 부른다.”28) 보통 사람들이 죽으면 육신은 부패하기 시작하여 형체가 해체된다. 이에 반해 육신보살들은 육신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 김지장은 생전에 끊임없는 수행을 통하여 죽어서도 그 시신이 썩지 않고 전신(全身)이 진신(眞身)사리가 된 것이다. 이런 기적으로 인해 사람들은 김지장을 보살로 추앙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인물을 신격화하고 그에 의탁해서 소원을 염원하는 경우 반드시 의례 내지 기념 축제가 있어야 한다. 의례에 행해지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한데 육신불은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

입적 후 이른 시기에 적어도 당 시대에는 지장보살로 여겨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김진무는 비록 『구화산화성사기』 와 『송고승전』에 김지장이 지장보살이라는 언급이 되어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당대(唐代)에 김지장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구화산에 이미 수많은 사찰과 승려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당대에 구화산은 비록 공식적으로 ‘지장보살도량’의 명칭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지금과 같이 수많은 사찰과 승려들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사실상 당대에 김지장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이 성립한다고 하겠다.”29)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김지장의 행장을 보면 이미 생전에 성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입적시 나타난 신이(神異)에 의해, 그리고 입적 후에도 육신 유지의 신이에 의해 당나라 시대에 보살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특히 입적 후 3년이 지나서도 육신이 부패하지 않은 것은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동격화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입멸 후 3년에 나타난 신이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김지장과 지장보살

중국에서 육조 혜능(惠能)과 같은 자국의 고승에게도 붙이지 않은 보살의 칭호를 신라의 스님에게 붙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김지장의 칭호는 승지장(僧地藏), 석지장(釋地藏)에서 김지장(金地藏), 김교각(金喬覺)으로 바뀌어 갔으며, 결국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동일시하게 된다.30)

송나라 때 사람들이 이미 김지장과 지장보살을 동일시하는 현상이 있었다고 명나라 천계2년(1662년) 유성재(劉城在)는 밝히고 있다. “송나라 때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신라왕자 김지장은 불국의 지장왕이 아니다. … 부처의 응화지신이 아니라면, 어찌 땅에서 샘이 솟게 만들며, 죽을 때 산명운석하며, 뼈를 펴고 굽히는데 살아 있을 때와 같겠는가? 지장을 둘로 나누어서 다르게 보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31) 송나라 때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동일시하는 현상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성재는 김지장의 입적할 때 나타난 기적을 보고 김지장이 곧 지장보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지장을 지장왕보살로 호칭하는 문헌으로 명나라 중엽 이전에 만들어진 『삼교원류성제불조수신대전』 권7과 명나라 만력21년(1593년)에 만들어진 『신각출상증보수신기대전』이 있다.32) 청나라 도광3년(1823년) 의윤(儀潤)은 지장보살이 신라국 왕자인 김교각으로 현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붓다가 입적한 후 천 오백년이 지난 후 지장보살은 신라국의 군주 집안에 강탄하였다.”33) 청나라의 광서연간(1875~1908)에 주윤재(周贇在)가 쓴 『구화산지』 권6에서 김지장을 보살로 여기게 된다. 주윤재는 『구화산지』 권6 <인물>에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유일하게 김지장만 보살로 기재하고 있다.34) 중화민국시대에 인광대사(印光大師)는 주윤재의 견해를 수용하여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밝히고 있다. “보살이 당나라 시절 신라국의 왕족에 태어남을 보였다. 그가 김교각이었다.”35) 김지장을 지장보살의 응화지신으로 단독으로 기재하여, 다른 승려들과 구분하고 있다.

1901년에 간행된 『지장보권(地藏寶卷)』에서는 김지장을 지장보살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따로 장을 두어 김지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하양(河陽)의 『지장보권』과 청나라 동치 14년(1888년)에 간행된 『삼세광목보권(三世光目寶卷』의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36) 김지장을 지장보살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김지장의 전생으로 목련, 광목 등이었다고 이야기하는 보권(寶卷) 등이 나온 것이다. 김지장의 전생을 이야기함으로써 김지장과 지장보살의 동격화가 일관성 있게 완결되는 것이다.

현대 중국 현지에서는 김지장은 지장왕보살로 불린다. “구화산 가이드는 구화산에서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 대신 “나무아미타불 지장왕보살”이라고 염불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아니라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김교각이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지장왕보살을 나타내는 불상은 일반 지장보살상과 달리 왕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37)

Ⅳ. 제3기 유지단계 : 김지장 보살의 신앙

1. 민간전승과 황실의 지원

김지장의 높은 명성은 당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오다가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러 더욱더 증가하였다. 김지장에 관한 전설은 민간에서 생성되고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송 말기와 원 초기의 시인 진암(陳岩)이 구화산의 명승유적들을 유람하면서 200여 수의 시를 짓고 묶어서 『구화시집(九華詩集)』을 만들었다. 여기에 당시에 전해지고 있던 김지장의 유적과 명승지에 관한 이야기가 다수 실려 있다. 흰 개가 설법을 잘 들었다는 것과 민공(閔公)이 땅을 희사하였던 것, 김지장의 발자취 등이 『구화시집』에서 언급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김지장의 보살화를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고 있다.38)

민간전승 이야기 중 가사차지(袈裟借地) 이야기는 아주 강한 신이성(神異性)을 지니고 있다. 청나라 도광3년(1823년) 의윤(儀潤)의 『백장청규증의기』 권3에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승려는 가사를 둘 땅을 청했고, 민공이 허락한다. 그러자 가사는 9개의 봉우리를 덮는다. 모조리 희사한다. 그의 아들이 출가하고자 하니 바로 도명화상이다. 공도 나중에 속세를 떠나, 거꾸로 아들을 스승으로 모신다. 그래서 지금도 시상(侍像)을 보면, 왼쪽이 도명이고, 오른쪽이 민공이다. 그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39)

가사차지, 민공(閔公)과 도명(道明) 부자 등의 이야기는 비관경의 글에는 없는 내용이다. 민공이 지장에게 땅을 희사하였다는 것과 도명화상과 민공 부자가 속세를 떠나 지장을 시봉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민간에 전설로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김지장의 입적 이후, 김지장에 관한 이야기가 점차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김지장에 대한 전설은 대체적으로 신라로부터 데리고 왔다는 백견(白犬) 선청(善聽)과 지니고 왔다는 차나무[金地茶]와 벼종자[黃粒稻], 소나무[五釵松],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두 외삼촌이 신라에서 왔지만 오히려 감화되어 수행하게 되어 후에 이성전(二聖殿)을 지었다는 이야기, 민공(閔公; 閔讓和)이 구화산을 보시하고, 아들[道明]을 출가시켰다는 고사, 김지장의 모친이 찾아왔다는 낭랑탑(娘娘塔)의 이야기, 이백(李白)과의 교유(交遊) 등 다양한 전설이 형성되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40)

김지장에 관한 전설은 민간에서 전승되고 때로는 생성되어 중국인들에게 지장보살을 깊이 신앙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낭랑보탑(娘娘寶塔)의 이야기는 중국인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낭랑보탑은 김지장과 그 어머니에 얽힌 모자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지장의 어머니가 구화산에 아들을 데리고 가려다가 통곡하다 실명하였는데, 이 탑의 아래에 있는 우물물로 씻으니 회복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인들이 김지장을 높이 추앙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효를 강조해왔는데 김교각이 추구하는 지장신앙이 효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고난에서 구원한다는 효도사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유교적 심리기초를 가진 중국불교 신도들의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41)

아래로 민간에서는 각종 전설로 김지장의 보살화가 유지 내지 강화되고 위로는 왕들의 지원이 지장보살화 과정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명대의 만력(方歷) 황제가 ‘호국육신보탑(護國肉身寶塔)’이라고 사액하고 확대 건축하였다. 숭정 황제는 ‘응신보살’이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보내주었다. 청나라 황제도 김지장을 경배(敬拜) 중시하였다. 강희 황제는 친필로 쓴 ‘구화성경’이란 편액을 어사하였다. 건륭 31년(1766) 건륭 황제는 친필로 쓰신 “분타보교” 란 편액을 화성사에 흡사하였다. 그들은 경제상에서도 화성사에 아주 큰 지지를 보내주었다.42) 청대(淸代) 만력(萬曆) 연간(1573~1619)에 황태후가 육신보전을 보수하게 하고 만력 34년 호국육신보전(護國肉身寶殿)으로 칙봉하였다. “호국육신보전의 칙봉은 바로 김지장을 지장왕보살로, 구화산 화성사를 지장왕보살도량의 지위로 관방에서 정식으로 승인한 일이다.”43)

김지장의 육신을 모시고 있는 육신전(肉身殿)은 수시로 황제들에 의해 보수되고 지원받음으로써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배되는 것이다. 이런 국가적인 공인은 민중들에게 김지장에 대한 신심을 더욱 증장시킨다.

2. 보살의 후예 : 육신불 전통

김지장이 육신불로 추앙받은 이래로 구화도량에서 수행하였던 승려 중에는 육신불이 된 분이 여러 명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입적한 고승의 몸을 육신불로 만드는 전통이 있는데, 그 육신불 전통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 구화산이다.44)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고승이 사후 화장하면 사리가 출현한다는 사리신앙(舍利信仰)은 드물고, 오히려 사후에 3년이 지나도 시체가 썩지 않으면 활불(活佛)이 된다는 화신보살(化身菩薩)로서의 진신사리신앙(眞身舍利信仰)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김교각이 김지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이같은 진신사리신앙에 의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교각은 중국 최초의 진신활불이 되었다.”45)

김지장 이후로 나타나는 육신불은 김지장의 육신불을 계승하는 역할과 아울러 원조격인 김지장의 육신불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장이 남대 신광령(神光嶺)에서 처음으로 등신불이 된 이래 구화산에서는 1,200년 동안 아홉 명의 등신불이 출현하였다. 지장왕보살로부터 시작된 등신불의 전통은 명나라 때 지장의 등신불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지장의 법맥을 이은 고승인 해옥 무하(海玉無瑕, 1513~1623)선사에 의해 재현되었다.”46)

무하(無瑕)화상은 명 천계(天啓) 3년에 입적한지 3년이 지나 항아리를 여는데,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승려들이 그 유체에 금을 입혀 신체를 보호하고, 사당을 세워 모셨다. 명(明) 숭정 (崇禎) 3년(1630)에 황제가 칙령을 내려 무하화상을 ‘응신보살(應身菩薩)’로 봉하였다. 육신탑의 이름은 ‘연화보장(蓮花寶藏)’이다. 무하선사가 등신불이 되자 명나라 숭정황제는 옥인을 하사했다. ‘백세궁’이라는 이름의 편액을 내리고 무하선사를 김교각의 응신보살로 대우했다.47) 김지장의 화신이 무하스님의 등신불로 나타났다고 보고 응신보살이라 칭한 것이다. 김지장으로부터 시작된 구화산의 등신불이 중단없이 이어지고 있다.

3. 현대 한중의 신행 활동 및 기념사업

중국에선 지장보살과 관계된 법회가 구화산에서 개최된다. 남송(南宋)의 주필대(周必大)의 기록에 의하면 송대에도 화성사와 지장탑원이 지역민에게 신봉되고 있었다.48) 명대의 지주부지(池州府志)에 의하면 하루에 1천명 단위로 김지장의 전신사리탑에 향을 피우고 경배하였다.49) 현재까지도 매년 7월 30일 지장보살의 성도일을 맞는 법회는 성대하게 개최된다. 지금도 중국남방의 많은 불자들은 음력 7월 30일 향을 피워 지장보살을 기념한다. “7월 30일이 김지장의 수진일(壽盡日)이 되었지만, 이후에 민간에서는 변화되어 지장보살의 탄생일, 성도일, 기진일(忌辰日)도 7월 30일로 하고 있다. 이 날에는 웅장하고 장엄한 제사를 거행하는데, 이 날을 ‘지장회(地藏会)’ 혹은 ‘지장절(地藏节)’이라 부른다. 이러한 제사는 의식이 동일하고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구화산 지장도량의 제사가 가장 장엄하고 웅장하다.”50) 이러한 성대한 법회는 대략 천여 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법회 참여자가 7~8만명이 이를 정도로 융성하게 진행된다.51)

지장보살 신앙은 구화산에 그치지 않고, 멀리 일반 사찰과 사당에서 모두 지장보살의 공덕을 칭송한다. 특히 장강 유역에는 김지장 보살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도처에 봉안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 없이 모두 가사를 입은 비구(比丘) 모습이다. 즉 승모(僧帽)를 쓰고 가사를 입고 손에는 석장(錫杖)을 들고, 한 괴물 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제일 많다. 그 괴물이 바로 신라 김교각이 백견(白犬)을 타고 구화산에 오른 그 「선청(善聽)」인 것이다.”52) 김지장 이전에 중국에는 지장보살상이 있었으나 김지장 이후 지장보살상에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1999년 9월 구화산 불교협회는 김지장보살 대동상 건립기념식을 거행하여 2009년 99미터에 이르는 세계 최대 높이의 보살상을 구화산 화성사 입구에 건립하였다.

김교각의 이야기는 1980년대 한중 수교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95년 한중 양국의 불교계가 김지장 탄생 1천 3백 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구화산 불교 기관과 한국 불교계는 1996-7년 서울 민속박물관과 대구 민속박물관에서 김교각 유품 전시회를 열었다. 2004년 KNN(옛PSB)가 ‘연화불국토 구화산 김지장 지장보살’을 방영하였다. 2008년 한국 KBS가 특집 다큐멘터리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을 방영하였다. 2019년 BBS에서 ‘중국 지장성지, 구화산을 가다’를 방영하였다. 2007년 중국 정부가 한중수교 15주년을 맞아 김지장 입상을 제작해 한국에서 봉안하는 행사를 가졌다. “근래에 한국의 경기도 일대 사찰에서는 종래의 지장보살 대신 지장왕보살을 모시는 ‘김지장전’ 혹은 ‘지장전’ 등처럼 그를 봉안하는 전각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53) 1990년대 한국에서도 김지장 보살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각종 학술적 연구와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54)

V. 결어

신라 출신의 김지장이 중국 대륙에서 현지 중국인에 의해 지장보살로 여겨지는 보살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보살화 과정을 3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 시기는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숭앙받는 시기로 그의 엄격한 수행과 중생 교화가 중심이 된다. 두 번째 시기는 김지장이 지장보살로 동일시되는 시기로 사후에 발생한 신이와 입적 후 3년에 육신불로 되는 것이 핵심 원인이다. 세 번째 시기는 육신불이 된 이후 현재까지 이르는 시기로 김지장의 보살화가 유지되는 기간으로 민간의 신앙과 정부의 지원이 유지되고 있다.

김지장이 구화산에서 행한 초인적인 수행과 함께 그의 입적 시와 입적 후 3년에 보인 여러 신이(神異) 현상은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동일시하게 하였다. 김지장에 관한 전승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성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예컨대 가사차지의 이야기나 낭랑탑에 관련된 이야기 등이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중국에서는 김지장을 지장왕보살로 숭앙하며 각종 법회와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지장의 보살화 과정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내적 보살화 과정이다. 김지장의 수행과 교화가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지옥 중생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을 실천한 것이다. 중생 교화는 철저한 자기 수행과 엄격한 수행 생활에 근거하고 있다. 김지장의 덕화를 입은 사람들은 김지장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보살화 과정에는 보은(報恩) 심리가 내재해 있다. 김지장이라는 은인(恩人)을 기억하려는 의도가 김지장의 지장보살화를 촉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특정 실존 인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을 계속해서 추모하고자 하는 염원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인물은 신 혹은 신격으로 자리 잡아 가면서 주민들의 기원과 소망, 안전, 마을 수호 등의 초능력을 발휘해 주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55)

둘째 외적 보살화 과정이다. 신비적인 현상도 보살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입적시 나타난 신이나 입적 후 3년에 육신불의 화현은 보살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육신불의 화현은 역사적인 인물에서 초역사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런 육신불에 보시를 하면 공덕이 발생한다는 신념은 대중들에게 지속해서 김지장을 지장보살로 경배하도록 하였다. 이런 대중들의 신앙심에 발맞추어 중국 황실에서 수시로 김지장의 전신사리를 모신 육신보전을 보수하고 지원함으로써 김지장을 국가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김지장의 지장보살화 과정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분석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재세 시 김지장의 철저한 수행과 지장보살의 본원을 실천하는 모습이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Notes

김지장의 생몰연대 696~794는 『화성사기』에 의거해 역산한 것임.

박찬웅, 「예수의 신격화의 유대 사상적 배경」, 『신약논단』 27-1 (2020) p.3.

중국의 4대 불교성지라는 개념은 명·청대에 이르러 성립되었다. 조영록, 「구화산 지장신앙과 오월수부 항주」, 『동국사학』 33, (1999) p.137.

“김교각”이라는 속명은 명나라 만력7년(1579년) 청양현령 소만민(蘇萬民)이 편찬한 <구화산지(九華山誌)>에 나타나고 있다. 謝樹田은 교각은 본명(本名)이라고 보기 보다는 후세에 붙여진 덕호(德號)로 추정하고 있다. 謝樹田, 「慈風長春慧日永曜-金地藏日光輝歷史一」, 『불교대학원논총』 1 (서울: 동국대학교 대학원, 1993), p.388; 여상구, 「입당구법승 지장의 행적과 사상」 『백산학보』 52 (1999), p.457.

최석환 편, 『육신보살 지장법사』 (서울: 불교영상회보사, 1993); 김진무, 「중국 지장신앙의 연원과 김지장」, 『정토학연구』 15 (2011); 고영섭, 「구화 지장이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 『한국불교사연구』 8 (2015) ; 김영태, 「당 구화산의 신라 지장선사 고찰」, 『한국불교학』 23 (1997); 김영태, 「신라 지장선사와 그의 시」, 『불교문화연구』4 (2003); 여상구, 앞의 글; 조영록, 「구화산 지장신앙과 오월수부 항주」.

包卿, 「중국 지주시 구화산 불교 문화관광 개발 연구 : 한국 관광객 유치 및 국제관광 경쟁력 향상 전략을 중심으로」 (한서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조영록 「최근 한중 불교교류사 연구의 경향과 특징 : 중국 남부지역의 한국관련 유적을 중심으로」, 『동국사학』 34 (2000); 양한순, 「불교유적지 순례를 통해 본 한국인의 중국문화관광」, 『비교문화연구』 16-1 (2010).

김지장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 문헌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김영태, 「당 구화산의 신라 지장선사 고찰」, pp.35-36; 고영섭, 앞의 글, pp.76-77; 여상구, 앞의 글, p.456.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全庸文』 권694), “余閑居山下,幼所聞見,謹而錄之.”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全庸文』 권694), ”時有僧地藏,則新羅王子金氏近屬,項聳奇骨,軀長七尺,而力倍百夫.”

金地藏, 「酬惠米」, 『靑陽縣志』 “原身自是西王子.”

출신에 대하여 왕자설과 왕족설이 있다. 경덕왕의 子 혹은 兄弟, 경덕왕의 가까운 친척, 김씨왕의 아들, 왕의 친척 등 4가지설 이외에 진덕여왕의 넷째 왕자설이 있다. 여상구, 앞의 글, p.457; 김영태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왕족에서 왕자로 변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영태, 「당 신라 구화산 신라 지장선사 고찰」, pp.43-44.

현재 김지장의 것이라고 전해지는 짚신(40cm 길이)이나 구화산 정상의 고배경대에 남겨진 김지장의 엄청난 크기의 발자국은 모두 키가 커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KBS 한국사전 :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방송: 2008. 5. 24.)

金地藏, 「酬惠米」, 『靑陽縣志』, “未敢叩門求他語, 昨叨送米續晨炊 而今殖食黃金飯 腹飽忘思前日飢.”

金地藏, 「送童子下山」 (『全唐詩』 권808), “老僧相半有煙霞.”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全唐文』 권694, “惟一僧閉目石室,其旁折足鼎中,惟白土少米,烹而食之.”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全唐文』 권694, “南方號為枯橋眾 莫不宗仰.” “고고중은 석상 경제(石霜 慶諸, ?~887)와 그 문하승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모습이 지장과 그의 제자들과 유사하여 贊寧이 후대의 일을 가지고 지장에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상구, 앞의 글, p.473)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全唐文』 권694, “居於南臺,自緝麻衣,其重兼鈞,堂中榻上,惟此而已, 池邊建臺,厝四部經,終日焚香,獨味深旨.”

고영섭, 앞의 글 p.89. 오형근은 김지장이 신라에 있을 때 이미 지장사상을 체득하고 중국에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형근, 「김지장의 선정과 교화사상」, 최주광 편, 『구화산 지장성지와 동아시아의 지장신앙』 (서울: 월류산 영명사, 2001). p.27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全唐文』 권694), “因移舊額,奏寘寺焉.”

여상구, 앞의 글, p.475.

李白, 「地藏菩薩贊」, (『全唐文』 제350권), “大雄俺照日月崩落 唯佛知慧大而光生死雪, 賴假菩慈力能救無邊苦, 獨出曠劫得開橫流, 爲地藏菩薩爲當仁矣.”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曾遇毒螫,端坐無念,有美婦人,作禮奉藥云:小兒無知, 願出泉補過 應視坐石,石間潗潺,時人謂九子神焉.”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但聞山鳴石隕,感動無情與?將滅,有尼侍者來,未及語,寺中扣鍾,無聲墮地. 尼來入室,堂椽三壞, 吾師其神歟?趺坐函中,經三周星,開將入塔,顏狀亦如活時,舁動骨節若撼. 經云:「菩薩鉤鎖,百骸鳴矣. 基塔之地,發光如火,其圓光與. 其佛廟, 群材締構,聚力保護 施一金錢,報一重果,下為輪王,上登聖地.” 한글 번역은 김진무에 의거하되 약간 수정하였다. 번호는 저자가 추가한 것임. 김진무, 앞의 글, p.82.

Digha Nikaya II, p.143.

Strong, J.S., Relics of the Buddha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7), pp.45-46. 멸진정과 죽음이 매우 유사하지만 차이가 있다. 멸진정에 든 자는 생기, 온기, 근(根)이 남아 있지만 호흡이나 생각은 없다(Majjhima Nikaya I, p.296). 붓다고사(Buddhaghosa)에 의하면 멸진정에 입정하고 있는 동안 죽음은 일어나지 않는다(Visuddhimagga, p.707).

『菩薩處胎經』 (『大正藏』12, p.1033 중), “佛告彌勒: 汝觀鈎鎖骸骨, 令一切眾生知識所趣, 分別決了令無疑滯. 爾時彌勒菩薩即從坐起, 手執金鋼七寶神杖, 敲鈎鎖骸骨聽彼骨聲.”

김진무, 앞의 글, p.91.

양한순, 앞의 글, p.62. 양한순은 한국에서는 육신불이라는 용어 대신에 “등신불”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영향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김진무, 앞의 글, p.94.

비관경(費冠卿)은 “승지장(僧地藏)”이라고 썼고, 북송 때의 찬녕(贊寧, 919~1001)은 『고승전』에서 “석지장(釋地藏)”으로 부르고 있다. 남송의 주필대(周必大)가 쓴 『구화산록(九華山錄)』과 원나라의 진암(陳岩)이 쓴 『구화시집』에는 “김지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영락15년(1417년)에 만들어진 『신승전(神僧傳)』에는 석지장이라는 칭호가 나타나고 있다.

劉城在, 「九華山記」 (淸 周贊, 『九華山誌』 卷7 所收), “宋人有言 新羅王子金地藏 非佛國地藏王也. … 使非諸佛應化之身 豈能生而地涌泉 沒而山隕石鎖骨屈伸如故黄岐 地藏而二之亦非通識.”

윤문한, 「신리왕자 김교각(金喬覺)은 어떻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되었는가?」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6645 (검색일자: 2020. 7. 19.)

儀潤, 『百丈淸規證義記』, “佛滅度一千五百年. 地藏降迹新羅國主家.”

윤문한, 앞의 글.

印光, 『九華山志』, “菩薩示生,在唐新羅國王族,姓金,名喬覺.”

윤문한, 앞의 글.

양한순, 앞의 글, p.62; 김진무는 지장왕보살의 명칭 기원을 김지장의 왕자 출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地藏王菩薩’의 칭호에는 후대에 지옥의 ‘冥界十王’說이 형성되면서 ‘十王’을 주재하는 ‘王中王’으로서 ‘地藏王菩薩’의 칭호가 사용되지 않았을까 한다.” 김진무, 앞의 글, p.80.

張總, 『지장II 조각과 회화』, 김진무 옮김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9), p.393.

儀潤, 『百丈淸規證義記』, “僧乃乞一袈裟地 公許 衣遍覆九峯 遂盡喜捨 其子求出家 即道明和尚 公後亦離俗網 反禮其子為師 故今侍像 左道明 右閔公.” 김지장이 호랑이로부터 민양화의 아들 도명(道明)을 구해주어서 민양화는 김지장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땅을 시주하였다고 전한다. 여성구, 앞의 글, p.464.

김진무, 앞의 글, p.92; 조영록, 「구화산 지장신앙의 오월에의 전파」, 최주광 편, 『구화산 지장성지와 동아시아의 지장신앙』, (서울: 월류산 영명사, 2001) p.73.

김훈, 「중국불교사에 있어서의 김교각법사의 위치」,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15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94), p.264.

釋聖富, 「지장영탑을 수호하여 구화도량을 새롭게 빛내이자」 『불교대학원논총』 1 (동국대학교 대학원 1993) p.372; 張總, 『지장II 조각과 회화』, p.372.

嚴耀中, 『江南佛敎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000) pp.293-294(김진무, 앞의 글, p.97에서 재인용).

양한순, 앞의 글, p.62. 구화산 이외의 몇몇 사찰에서도 육신불을 볼 수 있다.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도 남화선사에 육신불로 남아 있다.

홍윤식, 「신라승 김교각과 구화산의 수행정진」, 최주광 편, 『구화산 지장성지와 동아시아의 지장신앙』, (서울: 월류산 영명사 2001), p.114.

고영섭, 앞의 글, p.103. 등신불이 된 스님들의 명단은 고영섭, 앞의 글, p.104에 나열되고 있다.

張總, 『지장II 조각과 회화』, p.372. 무하스님은 김동리의 유명한 단편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었다.

조영록, 「구화산 지장신앙의 오월에의 전파」, p.74.

張總, 『지장II 조각과 회화』, p.396.

張總, 『지장I 경전과 문헌자료 연구』, 김진무 옮김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9), p.292.

張總, 『지장II 조각과 회화』, pp.395-397.

김훈, 「중국의 지장신앙과 김교각 법사」, 『불교연구』 28 (2008), p.110.

고영섭, 앞의 글, p.76.

2002년에 불교춘추사(발행인 최석환)는 서울 마포구 불교방송국에서 ‘동아시아 지장사상의 전개와 지장 법사 그의 위대한 생애’란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2014년 경북문화포럼은 ‘김교각 지장보살을 통한 한중문화교류’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강남주, 「실존 인물의 신격화 과정」, 『비교민속학』 11 (1994),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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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팔리어 문헌은 the Pali Text Society에서 간행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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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正藏』은 대정신수대장경의 약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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