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18세기 중ㆍ후반 무렵을 주요 활동기로 삼았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5대손으로, 노론계 내 호론(湖論) 계열의 종장(宗匠) 이었다. 송환기는 80세를 일기로 타계한 해에 종1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에 올랐지만, 실제 관직에 머물렀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신에 송환기는 우암학의 기조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선조와 관련된 유산(遺産)들을 관리하는 가운데, 학문 연마와 강학(講學) 활동의 전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던 전형적인 재야 학자형의 인물에 해당한다. 송환기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던 일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송환기는 국왕인 정조(正祖)로부터 ‘산림숙덕(山林宿德)ㆍ산림일품(山林一品)’이라든가, 혹은 ‘임하독서지사(林下讀書之士)’라는 등의 영예로운 별칭을 부여받으면서, 조야(朝野)에 중망이 두터운 층을 형성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처럼 정주학(程朱學)과 춘추학(春秋學)이라는 두 축으로 구축된 우암학의 기조를 충실히 전승하면서, 원자(元子)인 순조(純祖)의 교육을 담당했던 송환기였기에, 우리는 성담이 견지했던 불교인식(佛敎認識)의 특징적 양상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송환기의 경우 주자학(朱子學)을 관학(官學)으로 삼았던 유교 국가인 조선(朝鮮)의 주류 지성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지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송환기가 생래적으로 떠안은 가학(家學)적 연원과 대사헌(大司憲)ㆍ공조판서(工曹判書)ㆍ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등으로 이어졌던 주요 환력(宦歷), 그리고 세자시강원의 찬선(贊善)ㆍ사부(師傅)ㆍ이사(貳師)로 대변되는 상징적인 역할 따위로 미뤄보건대, 불교 방면에 대한 성담의 인식이란 원천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을 것임이 어느 정도 예상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바로 이러한 송환기의 국가 사회적ㆍ사상적ㆍ가학적 특수성의 요인들로 인해 성담이 견지했던 불교인식의 전모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증폭케 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송환기가 선보인 불교인식이란, 이 사안과 직결된 도통론(道統論)과 그 가지 담론인 벽이단론(闢異端論)과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진리론 일반을 가늠케 해주는 하나의 지표로 작용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금번 논의에 내재된 복합적인 문제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또한 송환기가 남긴 문집인 『성담집(性潭集)』에는 숱한 사암(寺庵)들이 분포했던 청량산(淸凉山)과 금강산(金剛山)을 순차적으로 유람했던 기록, 곧 <청량산유람록(淸凉山遊覽錄)>(34세)과 <동유일기(東遊日記)>(54세)가 수록되어 있어서 논의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이에 이번 지면을 빌려서 송환기가 형성했던 도통론ㆍ벽이단론을 대상으로 한 논의를 시발점으로 삼는 가운데, 그가 형성했던 불교인식의 대체를 추적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연구 성과가 미미한 상태를 유지해 온 송환기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의 도정(道程)에 의미 있는 하나의 징검돌을 가설함과 동시에, 또한 조선 후기 무렵에 노론ㆍ호론계가 형성했던 학풍의 일단을 관규(管窺)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를 아울러 기대해 본다.
Ⅱ. 성담의 벽이단론(闢異端論)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의 역사에서 진리의 원천을 전승하기 위한 도통(道統) 상전(相傳)의 문제는, 필경 호교론적 담론의 일환인 벽이단론을 수반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도통론과 벽이단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표리 관계를 형성하게 되며, 또한 엄준한 피아(彼我) 식별의 논리로 무장하는 가운데, 공히 위호(衛護)ㆍ척사론(斥邪論)으로 귀착되는 특징 보여주기도 한다. 이 같은 경향은 “앞선 성인들[聖]께서 전도(傳道)하신 것을 말미암아 말한즉, 이르기를 도통(道統)이라 한다.”1)는 개념 정의를 내렸던 송환기도 결코 예외이질 않았다. 다만 송환기는 도통ㆍ벽이단론을 대상으로 해서 논리 정연한 하나의 자기 완결적인 담론을 제출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송환기는 『성담집』을 통해서 도통론에서 벽이단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언술의 편린들을 남겨두었던바, 이제 해당 기록들을 선별적으로 추적해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일단, 송환기가 견지했던 도통론과 관련하여 그가 인생의 만년인 1803년(순조 3)에 이르러 문하생인 함인재(含忍齋) 정국채(鄭國采, 1757~1813)에게 건넨 발문(跋文)인 <서정사관소장고산구곡화첩후(書鄭士觀所藏高山九曲畵帖後)> 속의 아래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아! 고산(高山)의 한 구역이 여전하니 바로 무이구곡(武夷九曲)으로, 율옹(栗翁)[율곡]이 읊조리고 우옹(尤翁)이 시(詩)를 지었으니, 실로 주부자(朱夫子)[주희]의 <무이구곡도가[櫂歌]>의 말씀을 법도로 삼은 것으로, 그 연원의 요점[的]을 여기서도 또한 볼 수 있도다. 선배들이 이르신 ‘주자(朱子)를 배우고자 하거든, 마땅히 율옹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 말씀을 믿겠노라!2)
위의 인용문에는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로 표상되는 신유학(新儒學)의 창시자인 주희(朱熹, 1130~1200)[주자]의 학문 세계에서 연원하여 이이(李珥, 1536~1584)와 송시열의 순서로 연결되는 서인(西人) 노론 계열의 도통 상전의 계보가 확연히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송환기의 경우, 지난날에 노론계의 도통 계보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대신에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재배치시키려 했던 우의정[右相] 정우량(鄭羽良, 1692~1754)의 처사를 상소로써 강력하게 비판했던 스승인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1709~1758)3)의 유지를 받들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송환기가 존중했던 도통 계보란 주자ㆍ이이ㆍ송시열ㆍ김장생에서 호론(湖論)의 종장이었던 송능상으로 분화되어 전승된 흐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의와 관련하여 보다 더 중요한 점은 당시 노론계를 위시해서 조선 지성계의 지적 원천으로 정위(定位)되었던 주자의 대(對) 불교관(佛敎觀)일 것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서 주자가 피력해 보인 이하의 몇몇 구절들은 그 자신의 불교관을 집약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초(鮮初) 이래로 조선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대목에 해당한다.
유학[儒]과 석씨[釋]는 성(性)을 말함에 다른 점이 있다. 석씨는 다만 공(空)을 말하고 유학은 실(實)을 말하며, 석씨는 무(無)를 말하고 유학은 유(有)를 말한다.4)
유불(儒佛)의 도덕철학적ㆍ존재론적 차이점을 각기 공무(空無)와 실유(實有)로 대비시킨 주자의 상기 언술이란, 두 종교가 공통된 접점을 형성하기 어려운 정반대의 대척점에 위상하고 있다는 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주자의 진단이 과연 적확한 철학적 인식인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가 “불교[佛]는 인륜을 무너뜨렸고, 선불교[禪]에 이르러서는 또 처음부터 허다한 의리(義理)를 소멸시켜 남김이 없다.”는 말로써, 특히 “선불교가 가장 폐해가 깊다.”고 비판해 마지않았던 이유를 아울러 설명해 주기도 한다.5) 즉, 유학적인 존재[有]의 철학 편에 선 주자가 보기에 비존재[無]의 철학을 대표하는 불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이자 실리(實理)인 도덕의 근거 자체를 완전히 무시한 교설에 불과할뿐더러, 도덕과 문화의 왕국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이단(異端)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주자의 불교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사회윤리의 비판’에 있다는 진단6)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주자는 군덕(君德)과 민속(民俗) 두 측면으로 표상되는 유학적 ‘도통’의 연원을 그것이 융성(隆盛)했던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로 소급ㆍ환원시킴으로써,7) 이른바 복고주의적 사관(史觀)의 기조를 제시하기도 했다는 점도 부기해 둔다. 물론 유학적 도통론의 기저는 요순(堯舜) 이래의 ‘수기(修己)ㆍ치인(治人)’의 문맥에 입각한 것이었다.8) 나아가 주자는 “맹자(孟子) 이후로 한 사람일 뿐”이었던 정이(程頤, 1033~1107)[정이천]가 “사문(斯文)[유학]을 흥기시킴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이단(異端)을 분변하고 사설(邪說)을 막아서, 성인(聖人)의 도(道)로 하여금 환하게 다시 세상에 밝혀지게 하신” 공로를 엄숙한 심정으로 기리면서,9) 자신 또한 이 같은 ‘변이단(辨異端)ㆍ벽사설(闢邪說)’을 위한 역사적 책무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표준(標準)한 바는 반드시 주자(朱子)로부터 시작하여, 능히 정일(精一)한 취지를 밝혔다.”고 토로했을 정도로,10) 우암에 못지않은 주자 절대주의자의 면모를 유지했던 송환기의 경우는 과연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단, 『성담집』에 산재해 있는 송환기의 불교 관련 언술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장면 중에 하나로는, 『대학』의 ‘고(高)’ 자의 의미를 노불(老佛)이 “비록 그 실질[實]이 없음에도, 또한 그 고명[高]한 척하는 게 아니겠습니까?”11)라고 풀이한 문인 남치태(南致泰, 1762~?)의 질의에 답변한 아래의 인용문이다.
(노불의) 허무적멸(虛無寂滅)한 가르침을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보게끔 하니, 어찌 고원(高遠)한 것처럼 여기지 않겠는가? 정명도[明道]의 이른바 ‘오늘날 사람들에게 침입[入]하는 것은, 그 고명(高明)함으로 말미암는다.’라는 것이니, 자세히 살피면 알 수 있다.12)
윗글에서 송환기는 불교의 교학(敎學) 체계가 ‘허무(虛無)ㆍ적멸(寂滅)’한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들이 높고 심원한 진리인 양 착각하는 것으로 진단했다. 이 같은 송환기의 견해는 앞서 주자가 불교의 본체론이나 도덕철학을 ‘공무’로 규정했던 시각이나 남치태가 ‘실질[實]’ 운운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면서, 또한 동시대를 전후로 한 정주학자(程朱學者)들의 평균적인 불교인식을 반영해 주기도 한다. 한편 송환기는 심(心)ㆍ성(性) 간의 개념적 구분을 무시한 일부 유학자들의 의론이란, 결국 “불씨(佛氏)의 견해와 같아서, 장차 그 하는 바에 구검(拘檢)하는 바가 없어, 미친 듯이 날뛰어 스스로 방자하리니, 그 폐해가 끝이 없을 것”13)이라는 취음(翠陰) 성이홍(成爾鴻, 1691~1749)의 생전 언술을 <현감성공행장(縣監成公行狀)>에 수록해 두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송환기 또한 불교적 심성론에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오도된 심성 논의가 야기할 법한 심각한 해악에 대해서도 동의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불교가 초래하는 폐해와 관련하여 송환기는 일찍이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던 은진(恩津) 송문(宋門) 출신의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1499~1547)가 내린 아래의 진단에 깊은 공감을 표했던 듯하다. 송인수는 유선불(儒仙佛) 세 종교의 차이를 논하면서 선교(仙敎)와 불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보인 사실이 있었다.
성학(聖學)[유학]은 인륜(人倫)을 중히 여기어, 그 아득하고 묘한 것[要妙處]을 논하지 않는다. 선불(仙佛)은 수심(脩心)과 견성(見性)을 근본으로 삼은 끝에, 하학처(下學處)가 완전히 결여되었으니, (바로) 이것이 삼교(三敎)가 다른 이유인 것이다.14)
송인수가 거론한 ‘요묘처(要妙處)’란 구도자가 수행을 통해서 신선(神仙)이 되거나, 혹은 정각(正覺)을 실현하는 맥락을 담지한 어휘로, 일면 『논어(論語)』의 이른바 ‘상달(上達)’15)과 의미가 부분적으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실상 송인수가 ‘오묘처’ 운운한 표현은 정이(程頤, 1033~1107)[정이천]가 “석씨(釋氏)는 오직 위로 통달하는 데만 힘쓰고, 하학(下學)이 없다.”16)고 성토했던 대목을 염두에 둔 언술이다. 그러나 ‘상달’의 문제도 인륜과 일상(日常) 및 인사(人事)로 대변되는 하학처를 통해서 실현이 가능한 사안이기에, 유교와 선교 및 불교는 입세간(入世間)과 출세간(出世間)으로 분기(分岐)되고야 만다는 것이 송인수가 내린 판단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송인수ㆍ환기 두 사람은 철저히 유학적 사회윤리의 편에서 불교를 심히 비판적 시선으로 응시했을 것임이 자명해진다.
이처럼 사이비(似而非)한 교설에 유자(儒者)들이 현혹되는 이유를 정명도(程明道)[정호]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된 「명도행장(明道行狀)」 중의 구절들을 원용해서 설명해 보인 점도 눈길을 끌게 한다. 정호(程顥, 1032~1085)는 “도(道)가 밝혀지지 않음은 이단(異端)이 해치기 때문”인 것으로 진단하면서 “천근하여 알기가 쉬운” 옛날의 이단과는 사뭇 다르게, “지금의 이단[害]은 깊어서 분변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한 뒤에, 상기 인용문의 후미와 같은 분석을 내놓았던 것이다.17) 이처럼 송환기가 맹자와 주렴계(周濂溪)에 뒤이어 ‘하남양정선생(河南兩程先生)[곧 이정(二程)]’이 도통의 정맥(正脈)을 위호ㆍ계승한 끝에,18) “속학(俗學)의 비루함과 이단(異端)의 미혹[惑]에서 벗어나게 했던”19) 사실을 벽이단론(闢異端論)의 전거로 원용한 이면에는, “대개 (이) 세 선생께서 그 당세(當世)에 (변이단ㆍ벽사설의) 공(功)을 세운 것이, 이에 작지 않다.”20)고 극찬해 마지않았던 주자 도통론의 얼개와 평가를 존중한 결과였다.
당연하게도 이상과 같은 흐름의 연장선에서 송환기 또한 벽이단론과 유관한 견해를 더러 피력해 두었음이 확인된다. 다만, 송환기의 경우 완결된 하나의 담론 형식을 취한 체계적인 벽이단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기문(記文)이나 발문(跋文) 양식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송환기가 69세가 되던 해인 1796년(정조 20)에 지은 아래의 발문을 지목할 수 있다.
(덕곡공이) 고려[麗] 말엽에 이르러 … 그 오랑캐를 토벌하고 왜적들을 물리친 공로 같은 것은, 가히 충의(忠義)가 탁월[卓絶]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논술[辭]이 엄격하고 의리[義]가 방정한 척불(斥佛) 일소(一䟽)에 이르러서는, 족히 사도(斯道)를 위호하고 쇠하여 문란해진 풍속을 진작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21)
윗글에는 ‘덕곡륙공(德谷陸公)’이 호왜(胡倭)를 토격(討擊)한 무공(武功)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국왕에게 올린 사의(辭義) 엄정한 척불 상소문으로 인해 “사도(斯道)를 위호하고 퇴속(頹俗)을 진작시킨”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예찬이 나열되어 있다. 특히 덕공공이 상주(上奏)한 ‘척불(斥佛) 일소(一䟽)’가 ‘위사도(衛斯道)ㆍ진퇴속(振頹俗)’하는 교화의 효과를 파급할 것으로 평한 이면에는, 바로 송환기 자신이 견지했던 벽이단론의 기조가 자연스럽게 투영된 결과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송환기는 완산부(完山府)에 소재한 황강서원(黃岡書院)을 중건할 때 찬(撰)한 기문에서도 동일한 논조를 재현했다. 즉, 송환기는 공민왕(恭愍王) 때 황강 이문정(李文挺)이 “숭불(崇佛)의 세상인 고려조[麗朝]를 당하여 상소[疏]로 벽이단[闢異]을 항의한 끝에, 물러나 향원(鄕園)에 거처하면서 학문을 독실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학교[庠]ㆍ글방[塾]을 두루 교화시킨” 이력을 특기해 두었던바,22) <황강서원중건기>에 드러난 이문적의 행적 또한 자신의 벽이단론과 처세(處世) 방식과 매우 닮은꼴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송환기는 이상에서 소개한 불교 방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하에, 그에 상응하는 차원에서의 도통론과 벽이단론의 기조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송환기의 실질적인 대(對) 불교 인식을 가늠할 만한 몇몇 사항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일단, 그 중에서 출가한 수행자들인 승려(僧侶)들에 대한 호칭법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23)의 일환인 승려에 대한 호칭어들이란, 통상 유(儒)ㆍ석(釋) 교유(交遊)로 지칭되는 승려들과의 교유 양상과 불교 교학 체계에 대한 소양 정도, 그리고 실참(實參) 수행에의 깊이 등과 같은 제 국면들을 상징적으로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24)
Ⅲ. 불교인식의 세 국면
송환기가 활동했던 영조(英祖)ㆍ순조(純祖) 연간은 정주학 일변도로 치닫는 학문적 경색기로 접어든 가운데, 특히 주자학의 이념화 혹은 교조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물론 서구의 신문명이나 새로운 사조(思潮)에 관심을 표했던 흐름도 없진 않았으나, 주자학이 장악한 도도한 지적 헤게모니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자연히 대표적인 이단 목록에 등록된 불교계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정황은 『성담집』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승려에 대한 다양한 호칭법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특히 “평생의 고벽(痼癖)[고질]이 산수(山水)에 있다.”고 토로한 바가 있는 송환기의 경우,25) 약 20년을 시차로 해서 청량산과 금강산을 유람한 뒤에 남긴 유산기(遊山記)인 <청량산유람록(淸凉山遊覽錄)>(1761)과 <동유일기(東遊日記)>(1781)가 대단히 주목된다. 왜냐하면 숱한 사찰ㆍ암자들이며 구비전승 따위를 간직하고 있었던 청량산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도중에, 평소 송환기가 품고 있던 불교와 관련된 인식의 편린들이 불현듯이 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청량산유람록>과 경(景)ㆍ정(情)ㆍ의(議)의 유기(遊記) 형식이 사용된 것으로 평가받는 <동유일기>26)를 중심으로 해서 『성담집』에 수록된 승려에 대한 호칭어들을 몇몇 범주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위의 분류 체계에서 드러난 대로 같이 송환기가 구사한 승려 관련 호칭어는 크게 네 개의 범주로 구획할 수 있다. 송환기의 경우 전체적으로 봐서 존칭어를 사용한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이는 송환기가 견지했던 벽이단론과는 달리, 그가 평소 고승(高僧)ㆍ대덕(大德)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범주 ②에 해당하는 호칭을 사용한 횟수는 매우 제한적인 수준이다. 한편 유력한 사대부(士大夫)들이 명산ㆍ대첩 등지를 유람할 때 가마를 메주는 역할을 행한 승려들을 지칭하는 ‘담승ㆍ여승’이라는 조어(造語)가 당연시 되었던 점도 부수적인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송환기는 ‘승려[僧]’라는 고유명사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오유(吾儒)’48)의 일원인 송환기가 승가(僧伽) 공동체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명칭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상기 네 범주에 소속된 호칭어들 중에서 특별히 음미할 만한 사항들을 선별해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범주 ①속의 치도(緇徒)란 검은 물을 들인 승복(僧服)을 입은 무리라는 뜻이고, 치곤(緇髡)은 삭발승을 의미하는데, 정주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곤 했던 어휘에 해당한다. 특히 승려들의 치의(緇衣)는 유자(儒者)들이 착용했던 유복(儒服)이나 심의(深衣)와는 대비되는 복색을 취했기에, 상이한 머리 모양에서 유래한 ‘치곤’과 함께 이들을 타자화한 명칭에 해당한다. 또한 승배(僧輩)ㆍ군승(群僧) 등의 어휘는 시중의 무리들처럼 승려들을 무덤덤하게 칭한 호칭으로 읽혀진다.
범주 ①과는 사뭇 다르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과 관련된 호칭과 여타의 존칭어들을 망라한 범주 ②의 경우, 앞서 소개한 벽이단론의 논조를 초극해서 송환기가 고승ㆍ대덕들을 향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예컨대 “도선(道詵)과 무학(無學) 두 고승(高僧)” 운운한 표현이라든가,49) 혹은 “암자 뒤의 부도(浮圖)에는 휴정(休靜)ㆍ의심(義諶) 등과 같은 여러 명승비(名僧碑)가 나열되어 있다.”50)고 포착해 둔 장면 따위가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할 수 있다. 다만 휴정ㆍ의심을 명승으로 칭한 것은, 각기 이들의 비문(碑文)을 지은 ‘명공(名公)’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와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과 대등한 호칭법이기에, 수행의 전범을 향한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 호칭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는 송환기의 스승인 송능상이 도선ㆍ무학의 풍수(風水) 방면의 식견을 인정하면서도, “이 어찌 참으로 천지의 이치를 알았던 자이겠는가?”51)라고 반문했던 대목과 의미의 리듬이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렇듯 일면 존중과 타면 배격, 곧 억양(抑揚)의 기조가 동시에 유지되었던 정황들이란 송환기가 두수(斗守) 상인(上人)에게 전한 아래의 오언율시를 통해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그대는 작시[詩]에 능해 내게 시를 주셨네만
나는 그대가 승려가 된 게 애석하게 여겨지오
운수(雲水)에 몸과 마음은 멀어져만 가는데
죽순채의 냄새와 맛은 맑기도 하여라
재주는 경사(經史)를 익숙히 감당할 만한데도
업(業)으로 『화엄경[華]ㆍ능엄경[楞]』을 마구 외우시누나!52)
위의 시에는 두수 상인이 “경사(經史)를 익숙히 감당할 만한” 탁월한 재주와 문장 역량까지를 겸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산에 몸을 맡긴 운수승(雲水僧) 처지가 된 데 따른 송환기의 안타까운 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일찍이 주자도 불교계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은 것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심정을 피력해 보인 바가 있다. 겸사해서 위의 시 속에는 불교 교학의 기본인 ‘업’에 관한 이해 정도와 함께, 송환기가 『화엄경(華嚴經)』과 『능엄경(楞嚴經)』과 같은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접했던 자취를 아울러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범주 ②중에서 고선(高禪)은 노성(老成)한 선승(禪僧)이라는 뜻을 지닌 노선(老禪)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런데 송환기의 경우 금강산을 유람했을 때 “지금은 산속에서 비에 막혀 하루 동안 정좌(靜坐)를 할 수 있으니, 또한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53)고 토로했을 정도로 실참(實參) 수행을 매우 중시한 유학자다. 때문에 송환기는 일행인 군술(君述)과 승려들이 함께 수행에 임한 장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아래와 같은 촌평을 덧붙여 두기도 했던 것이다.
다시 널찍한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니, 군술이 두서넛의 노선(老禪)들과 더불어 가부좌[趺坐]를 하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의태(意態)가 또한 한적(閒適)하였다.54)
위의 인용문에서 “의태(意態)가 또한 한적(閒適)하였다.”고 운운한 표현은 이들이 외물에 전혀 반연(攀緣)됨이 없이 완전한 몰입지경에 접어든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고선ㆍ노선ㆍ화상’ 등과 같은 단어들은 정좌 수행에 대한 송환기의 높은 관심사와 맞물려 있는 어휘들임을 이해하게 된다. 기실 불교에 대해 심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주자의 경우도, “승가(僧伽)에서 도(道)를 터득한 존숙(尊宿)[고승]들”의 지난한 수행 과정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이 “자연히 광명(光明)이 빼어나게 높은” 이유와 함께, 또 존숙들이 세인의 존경을 받았던 정황을 아울러 설명한 사실이 있다.55) 그런데 유자와 노선들이 동참한 상기 인용문에서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항은, 주자가 권고한 공부론적 지침인 이른바 “반일정좌(半日靜坐)”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운위되는 참선(參禪) 수행 사이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학적 함양설(涵養說)의 이론적 전제인 미발시심체설(未發時心體說)이 입론 불가한 이론임을 폭로하는 가운데, 정좌 수행이 선불교의 참선법에 다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판했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순차적인 문제 제기는 유학적 공부론사의 전개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성찰의 의미를 지닌다.56)
이제 남아 있는 범주 ③과 ④에 소속된 특별한 호칭어들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우선, 범주 ③의 ‘담승(擔僧)ㆍ여승(輿僧)’이란 저명한 사족층 인사들이 산행(山行)에 나설 때에, 이들을 ‘편여(箯輿)ㆍ견여(肩輿)ㆍ남여(籃輿)’ 따위로 칭한 가마로 메주는 가마꾼 승려를 지칭하는 독특한 신조어에 해당한다. 그런데 <청량산유람록>과 <동유일기>에는 유달리 ‘가마꾼 승려’에 얽힌 기록들이 많이 발견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송시열의 5세손으로 저명한 인사였던 송환기가 선성(宣城)[예안] 현감인 종형(從兄) 송환세(宋煥世)와 함께 청량산을 유람했고,57) 또 1781년에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한 막역한 벗인 근와(芹窩) 김희(金熹, 1729~1800)의 주선으로 금강산을 찾았던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58) 그 중에서 세 가지 사례만을 선별해서 나열하자면 이하와 같다.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내리고 있어서, 노를 빨리 저어 동쪽으로 가서 기슭에 정박하니, 승려 무리들[緇徒] 수십 명이 편여(箯輿)를 가지고 와서 맞이하였다.59)
동남쪽으로 가서 효양치(孝養峙)를 지나는데, 견여(肩輿)가 매우 힘들고 위태로워 산꼭대기에 이르러 멈춰 앉았다.60)
강원 감사가 신계사(新溪寺)로부터 숙고(稤庫)를 거쳐서, 이미 유점사(楡岾寺)에 도착해 건장한 승려와 견고한 가마를 가려 보내주었는데, 험한 박달령(朴達嶺)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는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61)
이상의 사례들은 송환기가 ‘등산(登山)ㆍ산행록(山行錄)’이라는 제목 대신에 ‘유람록ㆍ동유’라는 잡저 명칭을 부여한 이유를 실감케 해줌과 동시에, 또한 18세기를 전후로 한 무렵에 이르도록 이단시되었던 조선 불교계의 위축된 현주소를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물론 송환기는 손수 “지팡이 짚고 나막신 끌던 수고로움”을 감당하기도 했고,62) 박달령 주변의 험준하고 위태로운 지대에서 “매우 두려워 가마에서 내리고자 했으나, 승려들이 말을 듣지 않고 더욱 건장하게 힘을 쓰는” 등의 인간적인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63) 또한 송환기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자 “마을 백성들로 하여금 견여를 메고 맞들며 바삐 걷는 수고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특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실토한 바대로,64) 그가 견지했던 애틋한 위민의식(爲民意識)의 자취들을 <동유일기> 곳곳에 남겨두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송환기 또한 신분제 사회에서 서열화된 불교계의 위상을 당연시하고 있었던바, 이러한 태도는 앞서 고승들을 향한 이중적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한편 범주 ④에 포함된 호칭어 가운데 ‘운석(韻釋)ㆍ암사(菴師)ㆍ암승(菴僧)ㆍ거승(居僧)’ 등은 여타의 문헌 자료에 잘 발견되지 않는 조어에 해당한다. 시승(詩僧)과 주지(住持)를 각기 ‘운석ㆍ암사’로 지칭한 작문자(作文字) 역량이 돋보인다. 거승은 특정한 사암(寺庵)에 거처하던 승려를 지칭한 표현인데, 암승과 내용상 동의어에 해당한다. 또한 ‘고려승(高麗僧)ㆍ신라승(新羅僧)’과 같은 호칭어는 지난 역사 속의 이름난 승려들을 굳이 범칭화한 표현으로, 이는 불교가 꽃피었던 과거 시대를 바라보는 송환기의 시각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이상으로 『성담집』에 드러난 승려들에 대한 네 종류의 호칭어 분석을 통해서 송환기가 형성했던 불교인식의 상징적 면모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송환기의 불교인식은 일면 긍정과 타면 배척이라는 이중적 태도가 저변을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불교 교학체계에 대한 송환기의 소양 정도와 더불어, 그가 청량산과 금강산을 순차적으로 유람하면서 접했던 불교적 구비전승에 대한 촌평들을 수습해서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송환기의 문집인 『성담집』에는 불교의 교학체계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소략한 편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주자(朱子)가 나온 이후로, 의리(義理)가 크게 갖추어져 남은 것이 없다.”는 언술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65) 평소 주자 절대주의자였던 선조인 송시열의 학풍을 계승하는 것을 가업(家業)으로 삼았던 사정도 크게 관여했을 것이다. 이에 송환기 또한 “그 표준(標準)한 바는 반드시 주자로부터 시작하여, 능히 정일(精一)한 취지를 밝혔다.”는 말로써,66) 삶의 제반 영역에서 항상 주자학을 제일의(第一義)로 설정했던 사실을 내비쳤다. 그래서인지 송환기는 청량산 유람 시에 축융봉(祝融峯)의 “매우 기이한 자태가 드러나자” 문득 “주(朱) 선생의 ‘낭음비하(朗吟飛下)’ 한 구절을 읊조릴”67) 정도로 주자의 시작(詩作)을 즉각적으로 대상과 연관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송환기는 <청량산유람록>의 대미를 “정순공(程純公)[정명도]이 호산(鄠山)에서 장단구(長短句)를 읊은 것에 부끄러웠다.”는 말로써 마무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68) 이후 송환기가 150구로 이뤄진 <유청량산(遊淸凉山)>69)을 별도로 창작했던 이유는 바로 정호(程顥)가 선보인 행적을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들은 송환기가 착지한 근본 정주학적 성향을 방증시켜 주고 있을뿐더러, 그가 축적한 불교의 교학체계 방면의 소양이 그리 깊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 개연성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실제 『성담집』에는 불교의 교학을 구성하는 양대 축인 유식학(唯識學)과 중관학(中觀學) 방면의 언급이 거의 전무한 특징이 포착된다. 물론 조선조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의 교학체계를 대상으로 하여 체계적인 논의를 펼친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그런가 하면 세세생생 전변(轉變)하는 윤회의 주체인 식(識)의 문제라든가, 혹은 해체론적 사유를 표상한 공(空)과 같은 주제들을 유학자들이 비판적인 안목에서 거론한 흔적들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런 점에서 송환기의 경우, 애초부터 불교의 교학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심진(尋眞)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해서 송환기가 불교 교학을 접했던 행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단, 송환기가 34세가 되던 해인 1761년(영조 37) 봄에 청량산을 유람하고 하산하던 길에 지장암(地藏庵)70)에서 조우한 한 승려와 대면했던 일들을 기록해 둔 아래의 인용문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지금의 절은 바로 암자에 있는 암사(菴師) 학승(學聖)이 점지한 곳이라고들 한다. 대사[師]가 땅을 살피는 풍수지리설[術]에 대해, 나는 그 얕고 깊음에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습을 접하고 담론을 들어보니 범상치 않은 듯이 느껴져서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하게 했더니, 역시 깊은 성찰을 일으킬 만하였다.”71)
윗글에서 눈에 띄는 장면은 ‘암사ㆍ대사[師]’나 노사(老師) 등과 같은 호칭어나 풍수지리설 따위가 아니라, 송환기가 30대 중반 무렵에 『금강경』의 내용을 익히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그는 범상치 않은 용모와 설법력의 소유자인 학성에게 『금강경』 독송을 청한 끝에, 일순 ‘깊은 성찰[深省]’의 세계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다만, 어떤 뉘앙스의 성찰을 체험했는지에 관한 내용 묘사가 누락된 상태다. 반면에 송환기는 <유청량산>을 통해서 “노사(老師)의 현담(玄談)이 청위(淸湋)를 쏟았다.”고 회상했던 정황으로 미뤄보건대,72) 만만찮은 내면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상기 인용문은 『금강경』으로 대변되는 불교의 교학에 대한 송환기의 소양 정도와 문호 개방적인 태도를 동시에 가늠케 해준다. 또한 윗글은 송환기가 고승ㆍ대덕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감정으로 대했던 정황도 아울러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윗글의 연장선에서 송환기는 금강산을 찾아가는 도중에 단발령(斷髮嶺) 고개에 이르러, “속인(俗人)이 이 고개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면, 머리카락을 자르고 출가[出世]하려는 생각이 든다고들 운운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할 게 없었다.”는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던 것이다.73) 이러한 송환기의 언술은 은연중 그가 견지했던 염리심(厭離心)을 방증해 줌과 동시에, 또한 육신의 구속인 “형해(形骸)를 잊고”74) 싶어 했던 강한 구도(求道) 의지가 넌지시 묻어나기도 한다.
한편 송환기는 『금강경』 외에도 “재주는 경사(經史)를 익숙히 감당할 만한데도, 업(業)으로 『화엄경[華]ㆍ능엄경[楞]』을 마구 외우누나!”라는 시구에 노정되어 있듯이,75) 『화엄경』과 『능엄경』도 접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상인 두수가 “승려가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긴” <차증두수상인(次贈斗守上人)>은 앞서 소개한 학승에 대한 태도나, 혹은 단발령에서의 단상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송환기가 견지했던 이중적 면모를 재차 입증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주자의 경우 『화엄경』이 “결국 천지만물은 다 리(理)를 갖추고 있다는 것일 뿐”인 경전으로 평했고,76) 후자인 『능엄경』에 대해서는 “본래 단지 주어(呪語)[주문]였을 뿐이나, 나중에 방융(房融)이 허다한 도리와 설화를 보태 넣은”77) 위경(僞經)인 것으로 규정한 바가 있다. 이에 반해 송환기는 이상에서 적시한 『금강경』과 『화엄경』ㆍ『능엄경』을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평론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후론될 유람 시에 접한 불교적 설화들을 촌평하는 과정에서 “축교(竺敎)의 방자한 행태”78)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한 불교의 교학체계를 총체적으로 비판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송환기가 약 20년의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장유(壯遊)’79)에 나섰던 체험을 저술한 <청량산유람록>과 <동유일기> 중에서, 특히 후자에 수록된 불교 관련 구비전승에 대한 촌평들을 선별해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송환기가 <동유일기>를 통해서 가한 첫 번째 비판 대상은 고려승(高麗僧) 익장(益莊)이 찬한 <낙산사기(洛山寺記)>였다. 낙산사에 주석(駐錫)했던 익장이 지은 기문의 내용에 대한 비판은 낙산사의 “관음굴 남쪽 수십 보 즈음에 의상대(義相臺)가 있어서 올라갔다가, 잠시 뒤에 돌아온”80) 직후에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절을 창건하고, 법당에 단향목(檀香木)으로 된 관음보살(觀音菩薩) 한 구를 안치해 대대로 숭배하고 받들어서 상당히 영이(靈異)함이 있었다.’고들 한다. 고려승 익장의 기문과 같은 경우에는 더욱 괴이ㆍ허탄해서 믿을 수가 없다.81)
송환기는 ‘세전(世傳)이라는 간접적인 화법 형식을 가차해서 ‘고려승’ 익장의 <낙산사기>를 간략히 소개한 뒤에, 이를 “괴탄(恠誕)하여 믿을 수가 없다.”고 평했다. 즉, 송환기는 『천수경(千手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등에 근거한 불ㆍ보살의 신이한 위신력(威神力)을 유학자의 상식감과 합리적 기준에 비추어 냉정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송환기가 제시한 “괴탄(恠誕)하여 믿을 수가 없다.”는 평가어는 그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접한 불교적 설화들에 대한 논평에서 자주 발견되는 어휘임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53구의 부처가 종(鐘)에 매달려 있다는 설”을 간직한 괘종암(掛鍾巖) 설화를 접하고, “참으로 믿을 수 없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나.82) 또 유점사(楡岾寺) 불당 앞에 마련한 별도의 집에 “노춘(盧偆)의 영정 족자를 걸어 놓은” 것을 보고, “그 일이 매우 괴이하고 허탄하다.”83)고 평한 장면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할 수 있다.
이 같은 송환기의 언술은 일면 “공자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다.”는 언명을 연상케 해준다.84) 실상 『논어(論語)』의 이 구절은 “괴이(怪異)ㆍ용력(勇力)ㆍ패란(悖亂)의 일은 이치의 바른 것이 아니니, 진실로 성인(聖人)이 말씀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자주(朱子註)의 설명처럼,85) 유학적 상식의 기준을 넘어선 대상ㆍ현상들에 대한 중요한 판단의 척도를 제시해 주었다. 물론 송환기의 경우도 “영험한 부처의 위신력[威]”이라든가,86) 혹은 “신령의 도움”87)과 같이 인간의 알음알이 수준을 초극하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상기 인용문은 송환기가 철저히 종교적 신앙주의(religious fideism)의 입장에서 선 불자(佛子)들의 귀의심(歸依心)과는 사뭇 다르게, 그가 불보살(佛菩薩)을 향한 귀의심에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명증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설화 비판은 신라 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효행담(孝行談)에서 파생되었다. 그 계기는 외금강 발연사(鉢淵寺) 주변의 “폭포의 흐름이 매우 맑고 빠른” 중대(中臺)에서 한 승려가 옷을 벗고 물길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다가 “웅덩이를 만나 멈추는 것이 마치 구유(甌臾) 속을 나는 탄환과 같았고, 몸을 뒤집으면서 나오는 것이 소용돌이에서 자맥질하는 오리와도 같은”, 곧 이른바 ‘치폭(馳瀑)’으로 불리는 특이한 물놀이를 행한 데서 제공되었다.88) 이에 송환기는 이 놀이의 기원을 “곁에 있던 노선(老禪)”에게 질의하게 되었고, 연로한 선사는 “옛날 진표율사가 고개를 넘어 왕래하며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자신의 성효(誠孝)를 시험해 보고자 “국그릇을 들고 바위 위를 달려갔으나, 국을 쏟지 않았다.”는 설화의 줄거리와 함께,89) 또 “후인들이 율사(律師)를 사모하여 본받아 마침내 이 놀이가 만들어졌다.”며 치폭이 이어져 온 경위를 아울러 설명했다.90) 그러자 송환기는 진표율사의 효행 설화와 치폭 놀이에 대한 논평을 아래처럼 피력해 두었다.
그 말이 비록 믿기에 부족했지만, 또한 떳떳한 윤리[彜倫]는 모조리 죽여 소멸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저 불가[釋氏]의 가르침이란, 과연 무슨 법도란 말인가?91)
송환기는 효행담 서사(敍事)와 치폭의 기원 따위는 차치하고서라도, 출세(出世)한 수행승도 효로 표상되는 이륜(彜倫)이 인간 본연의 본질적인 실체임을 진표율사 스스로가 입증시킨 것으로 진단하면서, “석씨(釋氏)의 가르침”에 내포된 이율배반성의 문제를 지적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선초(鮮初)의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사회윤리를 부정하는 불교의 출가승들이 승가(僧伽)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진 것으로 비판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인 셈이다. 즉, 송환기ㆍ권근의 입장에 봤을 때 “집에 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라!”고 설파했던 공자의 언명이란,92) 시공을 초월한 절대주의적 윤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송환기는 유점사의 동쪽 구석에 위치한 용선전(龍𦨣殿)이라는 건물에 “낙산사의 고사[事]처럼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위패(位牌)를 봉안해 놓은” 것을 목격하고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참으로 미안한 점이 있었다.”는 말로써,93) 선왕(先王)의 위패가 사찰의 부속 건물에 안치된 사실에 대해서 신하된 자의 도리를 자각해 보이기도 했다. 기실 지난날 송환기가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옛날 퇴옹(退翁)이 강독(講讀)하던 곳”인 백운암(白雲菴)의 황폐해진 유적94)을 발견한 뒤에 행한 탄식도 용선전의 사례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송환기는 “청량산이 세상에 이름이 난 까닭”을 “우뚝ㆍ기이하고 장대한 12개의 봉우리” 외에도, 퇴계 “선생이 몸소 다니시며 쉬었다는 것 때문에, 다시 광휘가 생겨나서 후인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95)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운 다음에, 아래와 같은 심경을 토로해 두었음이 주목된다.
남아 있는 암자가 저와 같은데, 오직 거주하는 승려들[居僧]은 보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키는 자는 개탄만 하고 있으니, 우리 유자[吾儒]들 중에서 이곳을 지나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자들이 그 또한 몇 명이나 되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96)
윗글 속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강학과 독서를 병행했던 백운암이 황폐해졌지만, 그 누구도 더는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방치된 모습을 접한 송환기의 개탄스러운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듯 송환기는 청량산과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접한 백운암ㆍ용선전을 통해서, 그가 견지했던 유자적 정체성을 누차 노정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송환기의 경우 폐해진 사찰ㆍ암자의 현황들을 목도한 뒤에도 안타까운 심정을 연신 토로하였고, 이 점 송환기가 형성했던 불교인식의 또 다른 특징을 형성하고 있는 수준임을 첨언해 둔다. 예컨대 송환기는 청량산을 유람했을 때 마주친 상(上)ㆍ하청량암(下淸凉菴)이 처한 처연한 현황 묘사와 더불어, 그에 따른 한스러운 소감도 아래처럼 덧붙여 두었음이 주목된다.
수십 보 앞으로 나아가니 상청량암이 있었고, 또 십여 보를 가니 하청량암이 있었다.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었고 지세가 높고 시원스레 트여 있었다. 불전(佛殿) 역시 매우 청정(淸凈)하였으나, 다만 텅 빈 집[齋]들이 황량(荒凉)하여 안중암(安仲菴)ㆍ치원암(致遠菴)과 다를 것이 없음이 한스러웠다.97)
안중암과 치원암, 그리고 상ㆍ하청량암을 접하고 토로한 송환기의 심회는 그 견지했던 강한 유자적 정체성과는 다르게, 사암의 고적(古蹟)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 반면에 송환기는 금강산 유람 일정을 모두 소화해 갈 무렵에 “먼 나라 사람들도 한 번 구경하기를 원하여 문학 작품[詞章]에 표현하기도 했을”98) 정도였던 “이 산의 여러 제봉(諸峯)”에 대한 총평을 아래처럼 수행해 두었음이 자못 눈길을 끌게 한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는 모두 축서(竺書)[불경]의 황망(荒茫)한 말과 여러 부처의 음혼(淫昏)한 명호[號]를 덮어쓰고 있어서, 그 부끄럽고 한스러운 바가 실로 퇴도(退陶)[퇴계]가 청량산에서 부끄러워하고 한스러워했던 바와 같은 점이 있다.99)
송환기는 윗글에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온통 “축서(竺書)의 황망(荒茫)한 말”과 “제불(諸佛)의 음혼(淫昏)한 명호[號]”로 덧칠된 데 따른 큰 불만을 표출했다. 금강산은 당시만 해도 무려 108여 개의 사찰ㆍ암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1천여 년이 훌쩍 넘는 불교의 동전(東傳)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기에 ‘신라승’ 시기부터 불경의 구절과 불보살의 명호(名號)가 봉명(峯名)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송환기는 청량산을 ‘신선산[仙山]’100)으로 극구 예찬했던 이황이 <주경유청량산후록발(周景遊淸涼山錄跋)>을 통해서, “하물며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축서(竺書)의 황망한 말과 여러 불보살[諸佛]들의 음혼한 명호를 덮어쓰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선구(仙區)의 치욕이며, 우리 무리들의 수치인 것”101)으로 규정했던 논평을 그대로 차용해서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취한 작명 현황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런데 송환기는 윗글에 곧장 이어서 “그러나 이것이 선계(仙界)의 빼어난 경치에 무슨 훼손하는 일이 있겠는가?”라며 스스로 반문하기도 했다.102) 당연하게도 명실(名實)이 서로 부합하면 더 좋을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명보다는 실을 더 중시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스스로 위안했던 것이다. 물론 ‘실’이란 “나는 산수에 대해 유암(游巖)의 천석고황[膏肓]과 다르지 않다.”고 밝혔듯이,103) 금강산을 제대로 유람하는 내실을 뜻한다. 이처럼 송환기가 취했던 유연한 입장 선회란, 그가 일관되게 견지했던 이중적인 불교인식의 일 국면을 형성한 수용ㆍ긍정에의 힘이 배척ㆍ부정으로 얼룩진 또 다른 차원을 일시 진정시킨 결과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상에서 송환기가 일련의 불교적 설화들을 비판했던 이면에는, “축서(竺書)의 황망(荒茫)한 말”과 “제불(諸佛)의 음혼(淫昏)한 명호[號]”로 표현된 교학체계에 대한 얕은 소양과 귀의심의 문제가 내밀히 관여한 결과였음이 아울러 확인되기도 한다.
Ⅳ. 맺음말
이상의 포괄적인 논의를 통해서 유학적 도통론과 벽이단 의식에 충만했던 송환기가 형성했던 불교인식의 전모를 살펴보았다. 그 구체적인 연구 방법론으로 송환기가 구사했던 승려들에 대한 호칭법의 문제와 교학적 소양 정도, 그리고 청량산ㆍ금강산 유람 시에 접했던 불교적 설화에 대한 비판적 언술들을 차례대로 검토하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송환기가 형성했던 불교인식은 일면 수용ㆍ긍정과 타면 부정ㆍ배척이라는 상이한 두 국면이 혼재된 초점 불일치의 양상을 취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송환기가 견지했던 엄정한 도통론과 벽이단론의 기조가 대표적인 이단인 불교와의 대면 과정에서 애초의 예봉(銳鋒)이 상당히 둔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여느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송환기 또한 요순과 공맹을 경유하여 정주(程朱)에로 귀착된 도통상전의 계보를 중시하면서, 호교론적 담론인 벽이단론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송환기가 17세기의 서계 박세당이 시도했던 유불(儒佛) 교섭(交涉)과 같은 사상적 실험을 감행했던 것은 아니지만,104) 상대적으로 문호 개방적인 일면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예컨대 고승ㆍ대덕을 향한 우호적인 감정이라든가, 혹은 비교적 존칭어 비중이 높았던 승려들에 대한 호칭법이며 황폐해진 사찰ㆍ암자들의 고적(古蹟)들을 심히 안타까운 시선으로 응시했던 정황 따위는 송환기의 불교인식에 내재된 긍정과 수용의 측면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런 반면에 두 종류의 유산기인 <청량산유람록>과 <동유일기>를 통해서 불교적 설화나 구비전승들을 접하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던 장면들이란, 애초 송환기가 견지했던 도통론과 벽이단론의 기조가 여전히 유효한 상태임을 시사해 준다. 이 같은 정황은 불보살의 명호나 불교적 용어들로 얼룩진 청량산의 현주소를 강하게 비판했던 퇴계의 어록을 그대로 따라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들에 대한 불평을 드러낸 장면에서 그 한 정점을 과시해 보이고도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송환기가 불법승 삼보를 향한 종교적 귀의심이 결여되었던 사정과 함께, 또한 『금강경』을 비롯한 몇몇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 외에는 교학적 소양이 온축되지 못했던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듯 송환기가 형성했던 불교인식은 일견 종교적 배타주의와 다원주의적 양상이 혼재한 듯한 복합적인 형국을 취하고 있다. 차후 이러한 부류의 특징적인 양상이 송환기 개인만의 고유한 특징에 국한되는 것인지, 아니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스승인 송능상으로 이어지는 호론계의 주요 구성원의 공통된 현상인지 여부를 추가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