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2017)>에 나타나는 타자성과 윤리*: 경계적 존재와 연대의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강명주1,**
Myung-ju Kang1,**
1중앙대학교 HK+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HK+ RCCZ Research Center, Chung-aung University
**중앙대학교 HK+연구교수, E-mail: k009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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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Sep 30, 2021 ; Revised: Mar 04, 2022 ; Accepted: Mar 16, 2022

Published Online: Mar 31, 2022

국문요약

‘타자’는 주체의 권리 개념이 등장한 근대 서구 사상 이후 철학적으로 주요한 개념이다. 타자에 대한 여러 정의와 논의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타자’를 정의 짓기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중심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특히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논의를 중심으로 ‘타자성과 윤리’에 주목하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이는 다문화 사회에 도래한 현 사회에서 소통의 패러다임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름’에 대하여 경계-짓기보다는 타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도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의 ‘공존’은 중심부로 포섭하여 중심부의 확대를 가져오는 형태가 아니라 탈중심을 통해 서로 연합되는 것이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서사에 재현되는 타자와의 공존의 양상을 분석하여 그 가능성을 밝히고자 한다. 서사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자 경험을 구성하는 인지적 과정이다. 인간은 서사에 자신을 스스로 투사하고 이해하려 한다. 서사에 나타나는 타자성을 분석하여 타인에 대한 공존의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본고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shape of water>을 텍스트로 하여 작품 내 캐릭터의 형상화 방식과 관계 맺기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함으로써 공존의 가능성과 방향을 제언하고자 하였다.

Abstract

‘Otherness’ is a major philosophical concept in modern Western thought. It has been a force through which the concept of a subject’s rights emerged. This paper focuses on Emmanuel Levinas’ discussion of ‘otherness.’ Levinas emphasizes our ethical responsibility for others, which is meaningful in that it can be applied as a paradigm of communication for use in modern society. In the context of modern times and multicultural societies, it is important to recognize the diversity of others and to promote coexistence. Coexistence at this time should be ‘unifying’ rather than subject-centered. This paper attempts to understand this narrative. An epic is a cognitive process that constitutes the fundamental desires and experiences of humans. Humans try to project and understand themselves through narratives. The possibility of coexistence with others can be examined by analyzing otherness as found within those narratives. Therefore, this paper suggests the possibility and direction of coexistence by analyzing the storytelling that establishes relationships by shaping characters in Guillermo del Toro’s film, Shape of Water.

Keywords: 신; 이방인; 괴물; 타자성; 스토리텔링;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
Keywords: God; gentile; monster; otherness; storytelling; the shape of water

Ⅰ. 서론

‘타자’의 존재는 주체의 권리 개념이 출현한 근대 서구 사상 이후 철학적 반성에 있어 주요 개념으로 존재한다. 근대 사회에서 ‘나(自)’에 집중해왔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것(他)’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에 직면해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현대 삶에서 시공간적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우리’의 범위가 넓어지고 민족적 국가적 경계의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웃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해진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타자’와 ‘타자성’의 개념에 주목하며 특히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1)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를 이해하고자 한다. E.레비나스는 ‘타자’와 타자성의 존재에 주목하고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후설의 현상학을 발전시킨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다. 그는 주체를 기준으로 두고 규정되어 온 타자를 개별적 존재로 인정하며 타자에 대한 환대를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은 배타성을 넘어 다양성을 인정하는 출발점이 된다.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의 현상이 나타나는 현대사회에서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공존(혹은 공생)을 도모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또한, 그 공존(共存)의 방향에 대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공존을 위해 주체와 타자에 대한 인식이 선행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 제국주의적 체제가 저물었다고는 하나 잔영은 여전하다. 무력을 수단으로 영토를 넓히는 것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패권을 지닌 강대국 중심으로 통합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일방향적 통합은 경계 안 존재인 중심(주체)과 경계 밖 존재인 주변(타자)을 낳으며, 중심의 횡포에 밀려난 주변은 폭력적 현실에 처해진다. 이전과 같은 물리적 폭력은 아닐지라도 형태만 전환한 인식론적 폭력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ermo del Toro, 1964~)2)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2017)>3)은 이러한 주변부에 대한 사회의 폭력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부에 속한 타자들이 그 폭력에 대항하는 이상적인 방법을 미학적으로 스토리텔링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대항은 동일자 안의 타자를 불러내는 것이며 주변부에 속한 타자들의 무한한 ‘연합’이다. 이는 E.레비나스가 제시한 타자의 윤리학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으로 본고에서는 이를 통해 타인과의 공존에 대한 윤리적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구성하면서 스스로를 투사하고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즉,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자 경험을 구성하는 인지적 과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토리텔링을 분석하여 타자에 대한 인식양상을 살피고 공존의 가능성을 읽어냄으로써 현대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텍스트로 삼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로 냉전 체제의 이분법적 시대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철저한 배격이 이루어진 시기다. 타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시대적 배경뿐 아니라 등장하는 캐릭터와 수없이 철저하게 계산된 미장센들이 얽혀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영화의 톤과 매너, 대사에 등장하는 상호텍스트성, 테마곡의 변주 등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이 영화는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도 호평받은 작품이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비평적으로 의미 있다고 공인된 작품인 만큼 국내에서도 상당수의 연구들이 진행된 바 있다.

정동섭(2018)천윤정ㆍ조혜정(2018)은 영화에 나타난 동화, 신화, 기독교적 요소 등을 분석하고 그 상호텍스트성에 주목하여 영화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분석의 지평을 넓혔다.4)박종천(2018)김영덕(2018)은 비인간-생명체(creature)와 인간인 여주인공의 사랑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5) 그간 비인간과 인간의 이물교구담(異物交媾談)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에서는 비인간-생명체가 인간의 형태를 갖추게 되거나, 혹은 돌아오거나 하는 방식으로 결말 부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6) 그도 아닌 경우에는 정신적인 사랑, 혹은 우정만을 다루어왔다. 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는 다소 이질적 존재를 변화시키거나 주체의 질서로 편입시키려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정신적 사랑뿐 아니라 육체적 사랑까지 직접 드러낸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으며 이에 분석의 의의가 있다. 박종천(2018)은 종교적으로 충만한 사랑의 신비주의로 바라보며 김영덕(2018)은 이를 타자에 대한 윤리학의 실천으로 분석한다. 이때, 여주인공 엘라이자를 욕망이 아닌 윤리적 행동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행위자로 보고, 엘라이자와 괴생명체7)의 결합을 인간과 자연의 연대로 보고 윤리적 고려의 범위가 확장되었음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본고에서 역시 ‘타자와의 공존을 위한 연대’를 중점으로 둘 것이나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의 결합뿐 아니라 엘라이자와 주변인들의 형상화 방식 및 관계 맺기 양상을 함께 분석함으로써 논의를 확장하고자 한다. 또한 김영덕(2018)의 논의에서 언급된 ‘괴생명체’의 존재를 자연, 동물로 해석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타자성’자체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박정원(2021)8)의 논의와도 차이가 있다. 박정원(2021)은 선행연구들에 관해 상당수의 연구들이 괴생명체 자체의 성격을 간과한다고 지적하며 ‘괴생명체’를 괴물이 아닌 ‘아마존의 신’으로 규정하고 환경과 생태위기를 논한다. 본고에서는 그간 논의되어왔던 ‘괴생명체’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에 동의하나 ‘아마존의 신’이라는 특정 존재로 규정하기보다는 인간의 인식에 따라 ‘신’과 ‘괴물’의 경계에서 형상화되는 ‘타자성’을 분석하고 비인간-생명체에 대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필요성에 주목할 것이다.

이미 잡거(雜居)와 혼종(混種)이 가득한 사회에서 경계 짓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공존과 연대의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그 가능성은 배척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물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하며 스토리텔링을 통해 그 메시지를 강화할 수 있다. 경계 밖의 존재는 열등하거나 기괴하게 표현되거나 ‘괴물’로 형상화되는 때도 있는데 그것의 정체가 사실은 괴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 나타난 괴물 역시 마찬가지다. ‘괴물’에 대한 명확하거나 구체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의 범주는 모호하여 ‘은유’로 쓰이는데 “살인마, 뱀파이어, 좀비, 마녀, 귀신, 티라노사우루스, 세이렌, 폴리페모스, 고질라, 슈퍼히어로, 기타 등등 신문과 소설과 영화와 만화와 드라마를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괴물의 목록은 결국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모두를 빗대는 것”9)이다. 기예르모는 ‘괴물 장인’으로 불릴 만큼 데뷔 이래 거의 모든 작품에 ‘괴물’로 일컬어지는 비인간-생명체를 등장시켰다.10) 본 논문에서는 이를 ‘괴물’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비인간-생명체라 칭할 것이며 타자의 형상화 중 한 형태라고 본다. 특히 이 존재는 등장인물들에 의해 때로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괴물로 일컬어지기도 하고 초월적 능력을 갖춘 신(神)으로 불리기도 하며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경계적 존재 그 자체로 볼 수 있어 이를 자세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한, 비인간-생명체 외에도 영화에서 타자가 어떻게 형상화되어 나타나는지를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해볼 것이다.

II.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2017)> 속 타자 캐릭터의 형상화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하여 근원적인 공포감이 있다. 알 수 없음에서 나오는 공포가 ‘경외(敬畏)’로 나타나는 경우 ‘신’의 모습이 되고 부정적 감정인 ‘혐오(嫌惡)’로 전이되는 경우 ‘괴물’로 표상된다. ‘혐오’는 단순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없애고 싶은 ‘불쾌감’이다. 그것은 알 수 없음 가운데서 유사성을 찾을 때 생기는 무의식적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의 감정은 “자신의 집단 정체성을 교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월적 권력 지위를 점하고 있는 집단이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타 집단을 차별화하고 그들에게 가하는 폭력적인 권력 행사”11)의 일종이다. 이러한 ‘혐오’와 ‘경외’는 실상 그 경계가 모호하다.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 거인신, 미노타우로스나 크로노스, 그리고 중세의 괴물을 지나 포스트모던한 이방인의 존재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은 어렵다. 통시적으로 서사에 형상화되는 존재인 “이방인, 신, 괴물(다양한 유령과 도깨비, 분신들을 포함하는)은 인간 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들로 그들은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어떻게 분열되는지”12)를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하여 이해하고 적응하거나 혹은 배격하고 거부하거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고, 그 낯선 존재는 지금까지 대부분 배격되거나 인간-되기를 택한다. 이러한 낯선 존재들은 모두 주체 외부의 타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대해 ‘타자’는 사실 주체 밖의 존재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공포의 권력(1980)』에서 이를 ‘아브젝트(abject)’와 ‘아브젝시옹(abjection)’의 개념화를 통해 설명한다.13) 그러나 그 역시 한때는 자신에게 속했던 것을 밖으로 밀어내고 타자의 영역으로 내보낸 것이다. 그렇기에 낯선 존재에 어떤 친숙함을 발견하게 되고 감추고 싶었던 무의식적 현상으로 오히려 더 기괴한 감정(uncanny)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이나 괴물, 이방인의 존재는 낯설고 두려운 것이지만, 실상은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주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억압된 것의 회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타자를 바라본다면 여전히 타자를 주체의 욕망 안에서 동일화시키고 통합시키려는 것이므로 진정한 화해와 연대가 이루어질 수 없다. ‘타자’에 대한 고찰 없이 습관적으로 눈앞의 대상을 동일화시키는 것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E.레비나스는 이러한 반복적인 동일화(identification)가 서구사회의 폭력적 전체주의의 기저에 있음을 비판하며 타자성이 결여된 사회는 연쇄적인 문제가 생겨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타자’라 함은 주체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밖의 모든 존재, 즉 사람을 포함한 모든 세계적 범주를 아우르는 것이다. E.레비나스에게 있어서는 주체보다 타자가 우선한다. 우선하는 주체에 의해 타자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주체가 형성되고 성립되는 것이다. “타자는 나와 공통되거나 내가 아는 규정들로 포착되지 않으며, 그런 규정들에 따르지도 않는 존재이므로 내 뜻대로 할 수 없다”14) 이와 같은 E.레비나스 철학은 동일자의 질서 내부를 공고히 하여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 아래 행해온 지배와 폭력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책임과 윤리를 일깨우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타자를 내부로 동화시키려는 일방적인 지배는 쉽게 발견된다. 가령, 현대 다문화 사회에서는 주로 타자(소수자)의 적응을 위하는 취지에서 정책과 교육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는 타자를 열등하게 보고 제외하는 ‘차별’의 일환이며, 있는 그대로의 타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인식적, 의식적 개선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다(多)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동일자로 환원시킬 수 없는 존재를 타자로 둔 E.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다양성을 공존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은 다문화 사회에서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소통의 패러다임15)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번 장에서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타자가 어떻게 형상화되어 나타나는지와 그들의 관계 맺기 양상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기예르모는 비인간 존재를 소재로 하여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를 제작해 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괴물을 소재로 한 고전 영화들을 섭렵하였으며, 감독이 된 후에도 <악마의 등뼈(Espinazo del diablo)>(2001)와 할리우드 진출작 <헬보이(Hellboy)>(2004)를 비롯하여 그를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한 <판의 미로(Laberinto del fauno)>(2006) 등 다양한 작품에서 기존의 생명체 분류에는 포함되지 않는, 그리하여 괴물로 분류되는 비인간 캐릭터를 반복적으로”16) 형상화했다. 그의 작품에서 괴물은 상징적인 존재로 서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괴물이 암시하는 바는 주로 세계의 이방인 혹은 타자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역시 괴물로 상징되는 비인간 생명체가 등장한다. 그 존재가 ‘괴물’로 배격되는 방식을 살펴볼 것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괴물 외에도 ‘타자’를 암시하는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본고에서는 ‘타자’로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에 대하여 비(非)주체로 타자를 누락시키거나 동일화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타자의 존재를 크게 두 가지 범주에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신과 괴물의 경계에 있는 비인간-생명체의 캐릭터가 어떻게 형상화되는지를 그를 타자화 시키는 캐릭터와 비교 대조하여 살펴보고, 다음 절에서 사회적 소수자(타자)의 캐릭터에 주목하여 어떤 역할을 하는지와 이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1. 신과 괴물의 경계적 존재

<셰이프 오브 워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캐릭터는 비인간-생명체와 여주인공 엘라이자이다. 영화는 아마존에 기거하던 비인간-생명체가 미국 정부의 필요성에 의해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실험실에 폭력적으로 끌려온 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실험실에서 그는 흉물이나 괴물로 취급되며 억압된 존재다. 이 생명체가 가진 이질적인 부분은 연구의 대상이 되며 필요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되자마자 죽이기로 결정된다. 그러나 그를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생명체 그 자체로 받아들인 엘라이자와 조력자들의 도움을 통해 탈출에 성공한다. 바다로 돌아간 생명체는 그를 구하려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엘라이자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신성한 존재로 나타난다.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속성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는 ‘괴물’이었다가 ‘신’이기도 한 경계적 존재인 것이다.

이제까지 기예르모의 영화에서 이러한 비인간 - 생명체의 존재는 주로 기괴하게 그려지며 괴(怪)생명체, 즉 괴물로 분류되어 왔다. 이 괴물은 인간과 비인간의 애매한 혼종적 구성물로 주로 인간을 규범으로하여 타자화된 존재로 나타난다. 과거부터 “이상한 동물, 다른 모양과 피부색의 사람은 규범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17)로 여겨왔다. 그러나 실상 괴물과 신의 경계는 모호하다. ‘두려움과 공포’라는 근원이 되는 감정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비인간 - 생명체는 괴물과 신의 경계에 있는 캐릭터로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이 비인간-생명체가 어떠한 이름을 부여받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캐릭터는 기존의 분류로는 규명하기 어려운 존재다. 외적으로는 인간과 어류의 혼종적 형태를 보이고 있어 인간과는 분리가 되며 내적으로도 초월적인 능력18)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캐릭터는 기묘하게 낯선 존재로 형상화되는데 그 모습은 인간의 형태라고도 동물의 형태라고도 하기 어렵다. 근육질의 몸통과 사지가 있고 직립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유사하나 아가미가 있고 지느러미로 추정되는 것으로 뒤덮여 있어 어류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특히 눈꺼풀이 얇은 막으로 뒤덮이거나 피부가 초록색으로 빛나는 모습은 기괴하기도 하고 신성하기도 한 모습이다.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언어나 소리를 구사할 수는 없다는 면에서 마치 야생동물 같지만, 한편으로 손짓을 따라 하고 상대의 눈짓과 몸짓(body language)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소통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육체적 관계까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간과의 접점을 가진다. 괴물과 신의 경계에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어류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처럼 애매한 존재로 그려진 캐릭터는 기예르모의 다른 작품들과도 차이를 보인다. 가령 초기작인 <검은 늪지대의 생명체>에서 비슷한 존재를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의 양서류’라고 명확히 정의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앞서 말한 비인간-생명체의 정체에 관해 명확한 규정을 내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 어떤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로 존재한다. 그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괴물(monster)로, 자산(asset)으로, 흉물(filthy thing)로, 친구(friends)로, 또는 신(God/Lord)으로 표현되지만, 그 누구도 그를 무언가로 명명(命名)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태초에 무명으로 존재한다. 최초의 나타남은 무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니 내게로 와 꽃이 된 것처럼 ‘이름 붙이기’는 주체가 만든 세계 안으로 받아들이고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이 존재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이름을 붙이거나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대신 이 생명체를 대하는 다양한 시각과 반응이 존재한다.

비인간-생명체는 외적으로는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러한 언캐니(uncanny)함은 불편한 감정을 앞서게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신성화되기도 한다. 상처를 치유하고 재생하는 이질적인 능력은 이 생명체를 초월적 존재로 만든다. 이 생명체는 미국으로 오기 전까지 아마존에 있었으며 그곳의 원주민들은 꽃과 과일을 공물로 바치며 신으로 숭배했다는 점이 언급된다. 신이었던 존재를 한순간에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스트릭랜드(Strickland)다. 그는 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부 요원이며 미국의 주류인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의 전형적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는 아마존에 있던 생명체를 폭력적으로 끌어내어 미국으로 데려온 장본인이다. 그는 이 생명체를 잡아와 폭력을 행하며 단지 소련과의 경쟁에서의 승리를 갖게 해줄 ‘자산(asset)’이라 말한다. 본질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나 단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신’과 ‘괴물’을 오가는 것이다. 이처럼 신과 괴물의 경계는 모호하다. 결국 경계를 짓는 것은 ‘인간’이며 불분명한 기준 아래 판단되는 것이므로 실상 경계란 벗어나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트릭랜드에게 비인간-생명체는 경계 밖의 존재다. 그는 여러 번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익 창출에 그 존재적 가치를 두고 필요 가치에 따라 팔거나 죽이는 것에도 아무런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를 경계 짓고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영화의 배경이다. 배경 속에서 인물의 성격이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시대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ㆍ소 냉전 시대의 위기가 고조에 달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뒤 편에 흘러나오는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영화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색채의 대비가 명징하다. ‘빨강’과 ‘초록’ 사이의 색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스트릭랜드는 이분법적 사고를 내재화한 시대의 ‘전형’ 같은 캐릭터다. 체제 안에서 타자를 대상화하고 비주류를 다루는 방식을 스트릭랜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준다. 스트릭랜드에게 비인간-생명체는 내 경계 밖의 존재이기에 열등한 것이자 ‘괴물’이다. 그는 대사에서 경계 짓기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우등한 존재로 여기는데 특히 본인을 신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는 젤다와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Strickland : 저 역겨운 놈19) 을 남미의 더러운 강에서 끌고 왔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서로 악감정만 쌓였지. 뭐 … .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할 순 있어. 두 다리로 서니까. 하지만 우린 신의 형상대로 창조됐어. 저게 신의 형상으로 보이진 않잖아?

Zelda. D :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요.

Strickland : 인간처럼 생기셨지 나처럼. 혹은 당신처럼. 내 모습에 더 가깝겠지만. 나가봐.

신이 인간과 같이 생겼다는 발언을 한 스트릭랜드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스스로 중심화한다. ‘나처럼. 혹은 당신처럼20)’이라는 발언을 하며 백인 남성인 자신이 흑인 여성인 젤다보다 신에 가깝다며 신의 권위를 왜곡된 방식으로 이용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내세우고자 한다. 또한, 그는 젤다의 가운데 이름인 D가 성경에 나오는 ‘데릴라’임을 듣자 삼손을 배반한 마녀와 같은 존재인 듯 격하한다. 그러나 삼손의 관점에서 데릴라는 이방인이며 유혹자일 뿐 블레셋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용감한 영웅이 되기도 한다.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배척해야 할 이방인’과 ‘추앙받는 영웅’이 뒤바뀌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는 편협한 사고로 일방적 폭력을 가한다. 본인을 중심에 두고 상대를 주변화시키며 격하시킨다. 그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극히 모순적인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모순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로 형상화되어 있다.

가령 그는 첨단과 미래를 외치며 항공우주 연구센터에서 근무하지만, 마음을 안정시킬 때는 항상 오래된 싸구려 사탕을 꺼내 씹는다. 자신을 스스로 선도적인 인물이라고 여기고 미래적인 것에 집착하지만 정작 과거에서 그리고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과거의 것에서 안정을 찾으면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매우 모순적이다. 과연 어느 것이 과거이며 미래인지에 대한 경계를 고민하게 한다. 또한, 그는 전기봉을 들고 다니며 폭력을 행사하고 권력으로 상대를 억압하려 드는 모습으로 강인함을 내세우는 인물이다. 그는 주변과 그럴 경계 짓고 ‘단절’하는 캐릭터로 형상화된다. 그는 비인간-생명체를 대할 때 지하의 밀폐된 공간으로 가지만 본인의 연구실은 지상에서도 계단을 올라가야 나오는 높은 곳에 따로 있다. 그의 방은 계단 위에 위치하며 많은 기계, 회색 컴퓨터, 하얀 코트와 같이 차갑고 통기성 없는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 유리창이 있지만, 밖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특히 누군가 그의 공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의 명령이 있거나, 노크를 통해 반드시 그의 허락을 구해야만 한다. 굉장히 권위를 내세우는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권위와 강인함을 내세우는 것에 비해 그는 오히려 뚜렷한 주관이 없으며 주체적이지 못하기에 약한 존재임을 여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새 차를 구매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스트릭랜드가 새 차를 사야겠다고 말하자 이를 들은 아내는 캐딜락을 구매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을 것처럼 무시한다. 그에게 여자란 항상 조용히 본인을 따라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관계를 맺는 도중에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것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스트릭랜드가 새 차를 구매하기 위해 간 곳은 결국 캐딜락 매장이다.

Strickland : 녹색이 별로군요.

Dealer : 녹색이 아니라 청록색이죠. … 미국에서 성공한 분 다섯에 넷은 캐딜락을 몰죠. 이게 미래입니다. 손님은 거길 향해 가시는 분 같은데요.

Strickland : 어디요?

Dealer : 미래 말입니다. 미래가 어울리는 분이니 이건 손님 차에요.

게다가 스트릭랜드가 새로 구매한 차는 사실상 그 외형이 그가 열등하다 여기는 생명체의 모습을 닮아있으나 미래형 차라는 딜러의 말에 망설임 없이 차를 구매해버리며 다음 장면에서 바로 기분 좋게 캐딜락을 운전하며 만족감에 빠진다. 그는 끊임없이 경계-짓기를 하여 타인과 구분되기를 원하며 본인을 중심에 두고 그 외의 존재들에 대하여는 무시하고 배격한다. 그러나 모순적이 되게도 그는 타인을 통해 본인을 규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의 의견이 아닌 아내가 제안한 차, 딜러가 추천한 차를 탐으로써 만족한다. 타인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모순점을 알지 못하기에 그의 태도와 시선에는 항상 타자에 대한 폭력성이 기저에 있다. 그의 손에는 “권력의 상징인 전기봉과 그것을 종교 혹은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 (The Power of Positive 목사의 긍정적 사고의 힘이 들려 있다.”21) 이는 신을 주류 지배 권력의 토대가 되는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으로 존재한다. 이는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동일화’ 개념과 유사하다. 타자를 그 자체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체계 속에서 보고 모든 것을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폭력적인) 동일성’ 개념을 근저에 놓은 것이다. 타자를 항상 동일자에게 포섭하거나 환원시키는 것은 형식적 존재론에 불가하며 E.레비나스는 이를 비판한다. 더 나아가 E.레비나스는 이러한 재론을 “존재론적 제국주의”라 하며 이 ‘존재론적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감행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존재 안에 머무르려는 경향, 자기에 대한 구역질나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타자에 대한 지혜, 즉 ‘사랑의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로부터의 해방”22)을 추구한다. 이는 엘라이자의 태도를 통해 나타난다.

여주인공 엘라이자는 어떠한 편견으로 규정하지 않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그것의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태도는 그녀가 위치한 공간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엘라이자가 사는 건물의 아래층은 오래된 영화관이다. 그곳에서는 <룻 이야기(The story of Ruth)>(1960)가 상영 중인데 중반부에 엘라이자가 도망간 비인간 생명체를 찾아내어 포옹하는 장면의 뒷 배경으로 나타난다. <룻 이야기>는 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다윗의 조상 롯의 서 이야기다. 모압 신전의 여사제였던 이방인 여성 롯이 유대인과 결혼하여 훗날 다윗을 잉태한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이방인으로 그려지는 롯과 그녀의 족외혼(exogamy)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엘라이자의 상황과도 중첩되면서 그 서사가 엘라이자와 비인간 생명체의 서사를 긍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 나온 <룻 이야기>의 장면은 사제인 롯이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의심한 것에 속죄하는 부분이었는데 이 다음 장면이 엘라이자가 비인간 생명체에게 바친 달걀을 삶는 장면이다. 엘라이자는 자신이 먹는 달걀을 항상 비인간 생명체가 존재하는 수중과 지상의 경계를 나누는 단 위에 올려두는데 이는 제단에 공물을 올려두는 행위와 유사하게 보인다. 또한 모압 족속이 모시는 신이 ‘케모시(Chemosh)’라 불리는 ‘물고기 신’이라는 점에서도 어류의 특징을 지닌 비인간-생명체와 비교해볼 만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부활의 상징이기도 한 ‘달걀’은 극 후반부에 비인간 생명체와 엘라이자의 부활을 암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결말 부에서 스트릭랜드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친 비인간 생명체를 기어이 쫓아와 총으로 쏜다. 엘라이자 역시 스트릭랜드가 쏜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엘라이자가 쓰러진 것을 본 비인간 생명체는 총에 맞은 몸을 재생시키고 스트릭랜드를 공격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스트릭랜드는 “너는 신이었구나(Fuck, you are God!)”를 외친다. 극의 전체가 진행되는 동안 비인간 생명체의 존재를 폄하하던 그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고서야 그 존재를 신으로 인정하게 된다. 비인간-생명체는 죽은 듯 보이는 엘라이자를 안고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든다. 물속에서 엘라이자는 부활한다. 비인간-생명체가 가진 치유력이 물속에서 엘라이자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녀 목에 있던 상처가 아가미로 변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쓰이는데 엘라이자가 입은 옷이 강렬한 붉은 색이라는 것에도 주목할 만하다. 비인간 생명체를 만나기 전의 엘라이자의 주변은 항상 초록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가 그와의 교감 이후 붉은 머리띠나 붉은 구두를 착용하게 된다. 초록이나 청록은 극 전반을 지배하는 색이며 ‘미래의 색’으로 그려진다. 당시 소련과 냉전하던 시대적 배경임을 고려할 때 이분법적으로 양분된 사회에서 ‘반대의 색’으로 여겨진 것은 다름 아닌 붉은색이다. 이러한 점에서 청록색을 띤 물과 생명체 그리고 그것과 결합하는 붉은 엘라이자의 마지막 모습은 과거와 미래, 혹은 우리 편과 적의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입장의 결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합이 결국에는 물 속이라는 ‘현실 밖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현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신과 괴물, 영웅과 적 사이의 경계는 결국 타자를 대하는 주체의 태도가 만들어 낸 것이다. 숭배할 대상인 신이나 배격할 공동의 적이 아니라 그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의 타자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요구되는 사회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본인만을 중심에 둔 스트릭랜드는 결국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 역시 현실이 아닌 대안의 공간으로 사라졌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연대와 결합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다. 이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사회적 소수자

<셰이프 오브 워터>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또 주목할 범주는 사회적 소수자들이다. 영화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정확히 묘사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이 진행되는 동안의 타임라인을 제시해준다. 엘라이자가 비인간 생명체를 처음 접한 날, 엘라이자의 집에 걸린 달력은 1962년 9월 17일임을 보여준다. 같은 방식으로 엘라이자가 비인간 생명체를 되돌려 보내기 위해 표시한 날 달력은 1962년 10월 10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처럼 카메라 프레임에 정확히 보이는 날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60년대 초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흑인,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위한 민권 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1962년은 흑인 민권 운동이 거센 해였다. 극에서는 소외된 자들로 여겨지는 ‘흑인(혹은 유색인종),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의 캐릭터가 모두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적 소수자이자 주변부의 인물로 존재하며 그들의 연대를 통해 극의 중심 갈등이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들이 맞서는 주류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은 ‘스트릭랜드 ’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냉전 시대의 편협한 사고를 가진 정부 요원이다. 스트릭랜드에게서 비인간 생명체를 구출하고자 했던 엘라이자는 결코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었다. 엘라이자는 주류가 아닌 주변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지만, 약한 것들의 연대는 그들의 총합보다 더 큰 힘을 낸다.

극 중에서 엘라이자와 그녀의 곁에서 조력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사회적 소수자에 해당한다. 특히 주인공인 엘라이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장애가 있는 인물이다. 사회적 소수자는 주류 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녀는 사회적으로도 하층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밤 근무를 하는 청소부다. 그녀의 삶은 크게 비인간-생명체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다소 무의미한 하루를 반복해내던 엘라이자는 우연히 비인간-생명체를 만난 이후로 삶에 ‘생기’가 생겨난다. 하지 않던 붉은 머리띠를 하거나 붉은 신을 신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머리를 기대어 잠만 자던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하기도 한다. 그녀는 비인간-생명체를 통해 그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한다. 스트릭랜드와는 또 다른 방식이다. 스트릭랜드는 구분짓기를 통해 타자를 배척했다면, 그녀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인지하고 그와 공감한다. 이는 그녀가 자일스에게 하는 대사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뭐죠?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끗거리고 나도 그 사람처럼 소리를 못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내 모습, 내 인생 전부가 날 그 사람에게 이끌었어요. 날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내가 어디가 모자라는지 어떻게 불완전한지 모르는 눈빛이에요. 그 사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요. 그 사람은 행복해요. 날 볼 때마다.”라고 한다. 그녀의 대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 것이다.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는 서로가 된 것이며 이를 동일자 안의 타자를 발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엘라이자는 비인간 생명체에게 공감한다. 주변의 모두가 그녀와 비슷한 소수자였지만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오히려 절대적 타자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보이는 비인간 생명체는 존재를 존재 자체로 보이게 했다.

엘라이자뿐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은 모두 주류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결핍되고 억압된 존재들로 그려진다. 엘라이자의 이야기를 항상 들어주는 자일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나이 들어 퇴직당한 동성애자 노인이다. 그의 그림은 회사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미래적이고 현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사진에 밀려난 존재다. 사회적 고립에 처한 상태인 것이다. 또한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 역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정당한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직장에서 해고된 존재이자, 게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해 식당에서 쫓겨난 주변인이다. 자일스는 엘라이자처럼 목소리를 잃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 역시 누구도 듣지 않는다. 자일스는 파이집 직원을 마음에 두고 있어 맛없는 파이를 냉장고에 쌓아두면서도 매번 찾아간다. 그러나 정작 파이집 직원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며 밖으로 쫓아낼 때, 그리고 자일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태도가 돌변하며 자일스를 쫓아낼 때, 그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그의 어떤 마음도 닿지 못했다.

자일스의 집에는 늘 TV가 틀어져 있으며 흘러나오는 장면들로 당대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흑인들의 인권 운동 장면이 작은 흑백 화면을 통해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공간이 늘 작고 흑백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집은 엘라이자의 집과 붙어있는데 둘의 집은 나뉘어 있는 듯하지만 사실 하나의 창을 공유하고 있다. 자일스의 방 뒤편에는 오른쪽 반원, 엘라이자의 방 뒤편에는 왼쪽 반원 모양의 창이 있다. 창이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해 보이지만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의 창을 공유하고 있으며 둘의 연대로 인해 비로소 창문이 온전해진다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처럼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약자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물론 사회는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 어려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여주인공 엘라이자다.

자일스 외에 엘라이자의 생활 공간, 즉 직장에서 항상 이야기를 들어주고 수화를 통역해주는 인물 역시 소수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녀는 젤다.D로 흑인이며 집에 가부장적 남편을 두고 있어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여성이다. 젤다는 흑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주변의 무시에도 본인의 목소리를 꿋꿋하게 낸다. 스트릭랜드가 이름을 가지고 모욕을 주었을 때도 좌절하거나 비굴하게 복종하는 대신 담담하게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다. 엘라이자가 무시당하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챙기는 인물 또한 젤다이다. 이를 두고 항상 항의하는 히스패닉계 동료 욜란다가 있지만 역시 가볍게 되받아친다. 남성 직원들과도 쉽게 어울리며 본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상 그녀의 당당한 태도 외에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대답하고 소리내지만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 주변에 적절하게 동화되는 듯 타협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런 그녀가 직접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엘라이자의 계획에 힘을 보태면서다. 그리고 이는 비인간 생명체를 항공 센터에서 빼돌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한 호프스태틀러 캐릭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호프스태틀러 박사는 백인 남성이지만 실은 스파이로 그 어느 곳에서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있는 자다. 그는 미 정부요원들에게 호프스태틀러 박사로 불리지만 본명은 디미트리다. 그가 자신을 본명으로 소개하는 것은 역시 엘라이자의 계획에 따라 비인간-생명체를 구하면서다.

처음부터 엘라이자의 비인간-생명체 구하기에 모든 캐릭터가 흔쾌히 동참한 것은 아니다. 흉물, 혹은 그것으로 비인간 생명체를 인식하던 자일스와 젤다는 엘라이자의 설득에도 돕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 역시 다시 한번 차별과 배제를 당하면서 결국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엘라이자에게 힘을 보탠다. 엘라이자를 연결 고리로 하여 소수가 힘을 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챔버린(Edward Chamberlain)은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서 괴물의 등장이 사회적 차별의 실재를 인지하도록 하며, 이에 대항하여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사회적 정의로 향해 나아가는 작업을 이끄는 기능의 중심이 된다고 지적한다.”23) 차이에 의한 차별과 폭력이 자행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옳고 그른 것은 강자이냐 약자이냐가 정할 뿐이었다. 강자의 특권만이 보장되는 사회 제도 안에서 약자가 정당한 방법을 쓸 방법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제도의 불합리함에 약자는 불행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에 잠식되어 주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약한 것이 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약점과 불행은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타인이 겪는 아픔까지 공감하고 교감을 나누게 되면 연대할 수 있다. 엘라이자는 공감과 교감을 통해 연대의 실마리를 끌어낸다. 힘이 없는 개인은 약할 수 있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결국, 사회를 이루는 것은 개개인의 합이며 약한 개인들일지라도 연대한다면 강한 변화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 ‘타인성의 공유’다. 엘라이자는 이를 통해 개체와 종의 차이를 초월하는 사랑을 완성해내는 윤리학의 실천을 몸소 보여준다. 비인간-생명체와 엘라이자를 매개로 소수의 연대와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에서 받는 소외와 억압은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우리’가 아니면 ‘적’이라는 냉전 체제의 이분법적 논리 속에서 ‘차이’는 배척되고 다름에 대한 ‘폭력’ 쉽게 자행되었다. 유색인종, 여성, 성적 소수자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사회인 것이다. 극의 초반부 엘라이자의 이웃인 자일스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흑백영화에 서로 다른 존재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을 보며 자일스는 “봐라. 보쟁글스의 계단 춤이야. 저 어려운 걸 캐그니가 해냈지. 독특하지만 아름다워.”24)라고 감탄한다. 보쟁글스는 덩치가 큰 흑인 남성이며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며 춤을 추는 백인 소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다르지만 아름답고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 대사는 극의 중후반부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의 결합을 목격한 자일스의 입에서 다시 나온다. 동일자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 무한히 결합될 때 이상적인 결합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 극 전체의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완벽한 타자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기는 쉽지 않다. 외부 세계와 타자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주체는 항상 타자를 향한 탈존(脫存)의 경계에서 고민해야 한다. 부정(不定)의 타자에 대한 불확실성은 막연한 두려움을 낳는다. 이는 예측 불가능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주체가 실상 존재하면서 타자는 그 바깥에서 침묵하며 존재한다. 주체에게 ‘대상’이 되는 타자, 주체의 전체성 안에 포섭된 타자는 진정한 타자성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타자성은 주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다름이자 주체가 도달하지 못하는 무한성이다.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아무리 동일시를 하고, 주체의 사유의 기준으로 사유해보려 해도 이것은 타자의 존재증명이 아닌 주체의 추측과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타자”25)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E.레비나스는 ‘타인(autrui)과의 관계’ 혹은 ‘이웃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이웃은 공간적인 접성으로 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의 법에서 나타나듯이 강도를 만나 쓰려져 있는 자가 나의 이웃이다. 그는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른 이다. 이러한 이웃은 나의 반응, 응답, 책임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웃과의 관계’, ‘이웃에 대한 책임’이 바로 타자에 대한 윤리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을 위한 책임의 관계이면서 나의 중심과 핵을 비우는 책임이다. 이는 극의 중반부 자일스와 엘라이자의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Giles :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우리가 뭔데? 너랑 나?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못 해! 미안하지만 그건 … 인간도 아니잖아.

Elisa : (수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비인간-생명체를 구하러 가는 길에 도움을 요청한 엘라이자를 처음 자일스는 거절한다. 사실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자의 입장에 서 있는 그들이 너무도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엘라이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 단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의미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인격적인 의미를 타인을 위한 책임을 통해 발생하는 ‘타인을 위한 존재’의 등장에서 찾는다. 여기서 이웃의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는 나의 바깥에서, 타인을 위해 맨얼굴로 노출되어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비인간-생명체와 엘라이자와의 사랑을 초현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비인간-생명체에 대한 매혹을 강조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흉한 생명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인간과의 소통이 가능하며 심지어는 육체적으로 관능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젤다는 처음 비인간-생명체를 빼돌리려는 엘라이자를 그저 막으려고 했지만 이후 엘라이자의 긍정적 태도 변화를 보고 그녀를 응원한다. 둘 간의 육체적 결합에 대한 질문을 스스럼 없이 하기도 한다. 또한 그를 괴물로 단정하던 자일스는 엘라이자와 결합한 생명체를 마주한 순간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Ⅲ. 타자와의 관계 맺기와 연대의 스토리텔링

<셰이프 오브 워터>의 도입부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극의 내부 등장인물인 자일스의 내레이션을 통해 서술된다. 자일스의 내레이션은 극의 후반부 엔딩 장면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을 통해 마치 자일스가 한 편의 긴 동화를 들려준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극의 중반부에서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 스트릭랜드와 자일스, 젤다 와 같은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각이 관계를 맺는다. 자일스는 극의 완전한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관찰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다. 오히려 그의 관계 맺기 방식은 소극적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립적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그를 서술자로 선택한 것은 적절한 스토리텔링 전략으로 보인다. 또한 중반부의 이야기는 스토리 외적 서술자의 상위 서술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처음과 끝을 자일스의 내레이션을 삽입함으로써 전체 서술자가 자일스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스토리텔링 전략 방식이다.

일렁이는 물속에서 시작함으로써 시각적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고 대사에서 말할 수 없는 공주 혹은 공주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인어공주와 같은 동화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이야기에 직접 등장하는 서술자라는 점에서 마치 실제 이야기인 듯 느껴지게 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화를 들려주는 방식을 사용해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동화를 들려주는 서술자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청자의 몰입도를 높여주면서 진실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어지는 자일스의 대사는 아래와 같다.

Giles : 그 얘길 한다면 정말로 한다면 뭘 말해야 할까? 나도 궁금하군. 그 시대에 관한 얘길 할까? 얼마나 오래전인지. 잘생긴 왕자님이 다스리던 시절 같군. 아니면 그곳에 대한 얘길 할까? 그 작은 도시는 바다만 가까웠지.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어디 보자. … 그녀에 대한 얘길 할까? 목소리를 잃은 공주. 아니면 이 사건들의 진실을 말해줄까?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와 그 모두를 파괴하려던 괴물에 관한 이야기.

여기에서 말하는 ‘괴물’은 얼핏 인간이 아닌 비인간-생명체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면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사실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실제로 극의 중반부에 비인간-생명체를 지칭하는 여러 단어가 나오지만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지는 않는다. 자일스가 괴물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존재는 비인간-생명체가 아니다. 여기에서 ‘괴물’은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존재다. 이 대사를 하는 자일스는 비인간-생명체와 엘라이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지켜보고 겪은 인물이다. 사실이나 진실을 모르는 자들과는 다른 것이다. 타자에 대하여 그저 다르니까, 차이가 있으니까 ‘괴물’로 쉽게 규정짓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기예르모의 영화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엘라이자가 고문당하던 비인간-생명체와 마주친 순간은 E.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대면 장면에서 비인간 생명체를 위해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지 모두에게 묻는다. 델 토로 영화의 주인공 엘라이자는 이 물음에 기꺼이 긍정으로 응답한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비인간 생명체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자일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도 아닌 것(thing)”을 위해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반응에 대해 오히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타자에 대한 윤리적 대응을 통해 인간성이 규명되는 것이다. 타자를 통해 내 안에 나타나는 감정은 또 한편으로 타자를 위한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일성의 반복적인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동일자의 자유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일자에게 항시 “외재적”이며, “하나의 비밀스러운 것과의 관계”다. 다시 말해 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결코 이론적이거나 인식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단지 예기치 못한 것과의 비밀스럽고 필연적인 만남이다. 이 받아들임의 과정에서 동일자는 수동적으로 되며 ‘타자를 환대하는 자가 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타자와의 연대와 공존을 ‘물’의 상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영화 곳곳의 장면에 물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창에 맺힌 물방울, 욕조의 물, 천장에서 물이 새는 영화관 등 물이 주요 심상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제목에서도 ‘물’을 내세우고 있다. “물은 내재하는 신성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각하고 존재 간 자유로운 소통이 이루어지며 개별적 자아를 희생하여 사랑의 합일로 새롭게 생명을 얻는 의식 변용의 장”이다.26) 특히 영화에서 엘라이자는 비인간-생명체와 사랑을 나눈 뒤 달라진 모습을 하고 언제나와 비슷하게 버스를 타지만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녀에게는 생기가 부여된다. 붉은 머리띠나 붉은 구두, 흥얼거리는 콧소리는 그녀를 기계적인 모습이 아닌 ‘살아있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엘라이자의 손길에 따라 물방울은 관성의 법칙을 무시한 채 흐른다. 뒤로 흐르던 물방울은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다. 다른 형태의 물방울들이 빙글빙글 돌더니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의 육체적 결합 이후에 이어지는 시퀀스로 그들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때, 하나가 된 물방울의 형태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말 물의 모양, 즉 ‘셰이프 오브 워터’ 자체이자 사랑의 모양이기도 한 것이다. 국내에서 이 영화의 부제가 ‘사랑의 모양’인 것에는 이 시퀀스에 대한 의미를 부각시킨 것이다.

‘물’은 또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며 무한한 것이다. 엘라이자는 비인간-생명체를 집에 데려온 초반 시퀀스에서 비인간-생명체가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 이후 엘라이자는 더 이상 욕조로만 한정짓지 않는다. 화장실의 공간 전체를 물로 가득 채운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 방 한가득 채운 물이 넘쳐서 아래층 극장에 누수 현상이 일어나고 관객들은 그 사소한 변화에 극장 밖을 나간다. 낯설고 피하고 싶은 변화일 수 있지만, 그들의 새로운 시도가 분명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극장 주인의 항의를 받은 자일스는 새는 물의 근원을 찾기 위해 엘라이자의 집에 방문하고 화장실 틈으로 새어나오는 물줄기를 보고 놀라 문을 열어젖힌다. 활짝 열린 문 밖으로 꽉 차있던 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방을 꽉 채우고 그들이 사랑하기에 부족함 없어 보이던 물은 고작 엘라이자와 길스의 집까지 영역을 넓혔을 뿐인데도 금새 사그라든다. 미미한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극의 후반부에 엘라이자와 비인간-생명체는 더 큰 물 속으로,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강이 개방되고 운하가 열려 바다로 나아가는 것처럼 타자를 위한 선한 영향력의 물줄기가 합쳐져서 더 큰 세상의 밖으로 나아가는 공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Ⅳ. 결론

신은 세상에 여러 타인의 얼굴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 E.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이다. 그가 말한 타인의 얼굴은 자아의 원천적 근거가 된다. 신은 수없이 많은 형상들로 현시하게 되는데 이 주체의 바깥에서 타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타자는 주체보다 크고 더 근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주체에게 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존재인 것이므로 우주가 될 수도 세계가 될 수도 있다. 결국, 타자성은 존재를 지배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지극히 높이 계시지만 지극히 낮은 곳을 통해 얼굴로 마주하게 된다. 신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우리의 이웃이자 타자들이라 E.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당신이란 것이 나와 절대적 그분 사이에 끼어든다”27)고 말한다. 즉 타자를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이 즉, 근원에 다가가는 일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타자들의 바람직한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중심을 두고 폭력적으로 주변부를 포섭하는 형태가 아닌 주변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탈중심으로 나아가는 형태다.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경계는 실로 모호하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 경계를 나누고 중심에 서고자 하는 캐릭터가 ‘스트릭랜드’다. 정부 요원이자 사회의 주류로 가장 큰 발언권과 권력을 가진 ‘스트릭랜드’는 기지에서 가장 핍박당하는 비인간-생명체나 장애를 가진 여성 청소부인 주인공 ‘엘라이자’와 대조되는 캐릭터다. 그가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영화 내내 저지른 행동은 자기중심적이며 주변부를 향한 폭력이다. ‘스트릭랜드’와 그의 직원들은 종종 기독교적 신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권위나 행동을 정당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가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불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의 행동에는 모든 의미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를 자신의 욕정을 풀어줄 도구로 여기는 것이 그나마 사랑과 근접한 모습이나, 관객 중 누구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시점에 기괴하고 뒤틀린 비인간 생명체와 주인공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인정하며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완성하는 진정한 타자의 윤리학을 실천한다.

비인간 생명체는 괴물과 신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타난다. 억압받고 고통받았지만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주인공 엘라이자에 의해 신으로 거듭난다. 그 생명체는 신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이 때의 얼굴은 단순히 눈, 코, 입이 들어간 신체 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바라보는 타자의 이 얼굴은 E.레비나스의 주체 이론의 핵심이기도 한 올바른 마주침이다. 그 존재를 ‘직면’하는 것이며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타자와의 마주침이 주체의 반복적인 자기 동일화를 해체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 이를 통해 연대와 공존의 가능성을 제언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Notes

* 이 논문은 2017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6A3A03079318).

이하 E.레비나스로 칭함.

이하 기예르모로 칭함.

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로 칭함.

정동섭, 「<셰이프 오브 워터>에 나타난 비동시성의 동시성」,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11-2 (2018); 천윤정ㆍ조혜정, 「기예르모 델 토로 영화의 신화적 모티프 연구」, 『인문사회21』 9-4 (2018).

박종천, 「현대 영화에 나타난 신비주의적 상상력」, 『종교문화연구』 31 (2018); 김영덕, 「장애정치학과 포스트휴먼 윤리」, 『영미어문학』 129 (2018).

가령 <미녀와 야수>에 등장하는 야수는 저주에 걸린 ‘인간 왕자’였기 때문에 마지막에 저주에서 풀려나고, <구렁덩덩 신선비>에서 뱀 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생긴 남자로 변신한다. 대부분의 콘텐츠에서도 구미호같은 요괴 혹은 괴물이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할 때는 인간이 되고자 하거나 인간의 형태로 변신하는 모습을 취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 생명체에 대하여 비인간-생명체로 칭할 것이나, 김영덕(2018)의 논의에서 ‘괴생명체’로 언급되고 있기에 이를 그대로 인용하였음.

박정원,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아마존 비인간 주체와 세계의 재마법화」, 『비교문화연구』 3 (2021).

문형준, 「괴물서사란 무엇인가? : 괴물서사에서 파국서사로 나아가기 위한 일곱 개의 단편」, 『비교문화연구』 50 (2018), p.34.

기예르모 델 토로는 데뷔작인 <Cronos(1992)>를 시작으로 <Mimic(1997)>, <Espinazo del diablo(2001)>, <Hellboy(2004)>, <Laberinto del fauno(2006)>, <Scary stories to tell in the dark(2019)>등의 작품에서 인간과는 다른 기괴한 캐릭터들을 형상화시켜왔다.

허라금, 「혐오, 발화, 그 억압의 두 얼굴 : ‘문화제국주의’와 ‘폭력’, 『문화와융합』 40-4 (2018), p.85.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 이지영 옮김 (서울: 개마고원, 2004), p.15.

‘아브젝트’는 내 쪽으로 넘어와 주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모호한 존재로 경계 밖으로 추방해야 하며 ‘아브젝시옹’은 그러한 심리적 현상을 말하는데 가장 강렬한 아브젝트를 자기 자신이라고 설명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참조.

문성원, 『타자와 욕망 :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 (서울: 현암사, 2018), p.29.

김범춘, 「다문화 사회의 소통 패러다임으로서 레비나스의 타자성」, 『통일인문학』 57 (2014), p.165.

박정원, 앞의 글, p.2.

김영덕, 「장애정치학과 포스트휴먼 윤리」, 『영미어문학』 129 (2018), p.61.

물속에서와 물 밖에서 모두 호흡할 수 있으며 기이할 정도로 빠른 재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극 중에서 그를 연구한 호프스태틀러 박사는 인체가 못 견디는 조건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그 연구가치가 있다고 언급한다. 또한, 자일스에게 접촉한 그것만으로 민머리였던 그의 머리에 머리카락이 자라거나 팔이 치유되는 모습이 나타난다.(“This creature, Sir- I’ve never seen anything like it. Ever. It can alternate between two entirely separate breathing mechanisms.”, “I’m toweling my hair, Elisa. My hair. And- and- look at the arm: healed. As if nothing had happened. You said he was a god.”)

“I’ve dragged that filthy thing out of the river muck in South America and all the way here.” 이 원어 문장이다. “filthy thing”을 역겨운 놈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놈’과 같은 사람에 가깝지만 비하하는 표현보다는 이용 가치를 가늠하는 도구 혹은 사물로 취급하는 것이다.

“Just like me … . or even you.”의 표현에서 번역하면서 ‘even’의 표현이 생략되었다. 혹은 당신처럼의 문장은 앞의 문장과 대등하게 이어지기보다는 “심지어 당신처럼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정도의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상대인 Zelda를 구분 짓고 본인을 더 높게 두고 있는 것이다.

박종천, 「현대 영화에 나타난 신비주의적 상상력」, 『종교문화연구』 31 (2018), p.85.

조종화, 「헤겔과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 비교」, 『헤겔연구』 35 (2014), p.118.

박정원, 앞의 글, p.7.

원어로는 “Will you look a that? Very hard to do. Cagney did it- Different, but beautiful. we should watch that one day.”로 엄밀히는 서로 다르지만 아름다워의 뉘앙스로 해석이 가능하다.

김민아, 「타자성에 대한 예술적 표현 연구」, 『도예연구』 26 (2017), p.7.

박종천, 앞의 글, p.80.

강영안, 「레비나스의 신 담론」, 『대동철학』 57 (2011), p.17에서 재인용.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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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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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장애 정치학과 포스트휴먼 윤리 : <작은 신의 아이들>과 <사랑의 모양>에 재현된 수화 여성>」, 『영미어문학』 129,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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