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차이에 대한 재해석:

김태수1,*
Tae-soo Kim1,*
1대진대학교 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Daejin University

© Copyright 2022,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25, 2022 ; Revised: May 29, 2022 ; Accepted: Jun 08, 2022

Published Online: Jun 30, 2022

국문요약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이하 『유적고』)와 증산(甑山) 및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震默) 설화의 차이와 관련, 선행연구에서는 증산이 종교적 이유로 설화의 원 의도를 변형한 것으로, 또는 믿음과 가치관의 차이로 본다. 이는 한국불교와 증산·대순사상 간 가치관의 차이를 전제로 양자를 회통하려는 해석이다.

본 연구는 가치관에 따른 기술 차이라는 이상의 관점을 수용한다. 다만 이러한 기술 차이를 불교와 대순사상 간 세계관 차이가 아닌, 문헌 전승과 구전 전승의 차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다. 이는 각각 19세기에 최초 문헌설화로 구성된 『유적고』와 18세기 이래 전래 된 민간전승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 지평에서 진묵-봉곡(鳳谷) 관계를 조명하면, 『유적고』는 초의(草衣)·김기종(金箕鍾) 등 지식층의 가치관·의도를, 구전설화는 조선 후기 민중들의 희망을 투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증산 또한 천지공사에서 민간전승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6C에서 19C에 이르는 유불 관계 맥락에서 『유적고』 찬술 경위와 의도를 분석했다. 특히 『완당집(阮堂集)』·승려 문집 등을 통해, 유학 측에서는 예도 정신의 진작이라는 시대 이념에 따른 자료의 순화·교정이 필요했고 초의 역시 불교에 불리한 구비전승을 윤색·삭제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유적고』에 수록되지 않은 진묵 설화가 18세기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영당중수기」 및 현존 구비전승을 볼 때 증산의 기술은 민중의 염원을 담은 시속의 민간전승을 수용한 것으로 평가했다. 즉 정치·사회적 이유로 유불 화합 내용만 채택한 『유적고』에 비해 『전경』은 조선 후기 회자 된 구비전승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이해했다. 근거로는, 진묵-봉곡 관계를 조명한 구전설화에서 봉곡의 시기나 살해에 관한 서사가 많다는 점, 증산이 정치적 입장·신분이 아닌 마음과 뜻에 따라 모든 계층의 인물을 아울렀음을 들었다. 따라서 구전 전승의 특성상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서사 내용을 개작할 필요가 없었고 민중의 소리를 투영한 것으로 해석했다.

Abstract

Concerning the differences in the tales between the Investigation of Historical Remains of Patriarch Jinmuk (hereafter, IHRPJ), as well as those which appear in Jeungsanist Thought and Daesoon Thought, previous studies view such differences as Jeungsan’s intentional modification of the original intent of the narratives or as indicating differences in beliefs and values. This style of interpretation seeks to reconcile both Korean Buddhism and Jeungsanist and Daesoon Thought based on the premise that the former and the latter two exhibit differences in values.

This study accepts the above view of the differences in description according to values. However,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ales of Jinmuk that appears in IHRPJ versus those in The Canonical Scripture can be approached from a new perspective, i.e., the differences that exist between literary and oral traditions; rather than only stemming from potential differences in the world views espoused by Buddhism and Daesoon Thought. These refer to the IHRPJ, which was constructed first as literary narratives in the 19th century; however, there was also folklore that had been handed down from the 18th century.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Jinmuk and Bonggok via this interpretive horizon, the contents of the IHRPJ are found to reflect the values and intentions of the intellectual class, such those held by Master Cho-ui and Kim Ki-jong, whereas oral traditions can be seen as a reflection of the hopes of the people of the late Joseon Dynasty. Jeungsan should also be interpreted as having utilized folklore in his teachings.

Meanwhile, the circumstances and intentions behind publishing the IHRPJ are analyzed in the context of the text’s historical background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Confucianism and Buddhism during the 16th through 19th centuries. In particular, through the Compilations of Wandang and the collection of writings of Buddhist monastics, I have evaluated that Confucianism needed to purify and correct materials according to the ideology of the times in order to promote a spirit of morality and courtesy. Likewise, Buddhist Master Cho-Ui also embellished records to benefit Buddhism and deleted oral records that could harm the reputation of Buddhism.

On the other hand, when viewing Records of Shrine Renovation and existing oral traditions, it can be shown that some Jinmuk tales existed in the 18th century which were not included in the IHRPJ. Thereby, Jeungsan’s description of Jinmuk tales can be reappraised as accepting the oral secular tradition that conveyed the wishes of the people. In other words, compared to the IHRPJ, which reflects only the harmonious content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due to political and social factors, The Canonical Scripture reflects oral traditions that were widespread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As evidence, it can be suggested that there are many narrative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Jinmuk and Bonggok that center on Bonggok’s jealousy and the murder of Jinmuk. Jeungsan aimed to encompass people of all classes according to their minds and wills rather than their political positions or statuses. Therefore, Jeungsan did not need to rewrite the narrative content that had been passed down via oral tradition. Instead he embraced those narratives as a projection of the voices of the people.

Keywords: 『진묵조사유적고』(『유적고』); 『전경』; 진묵 설화; 김봉곡; 초의; 문헌 전승; 구전 전승
Keywords: The Review of Historical Remains of Patriarch Jinmuk; The Canonical Scripture; Jinmuk Tales; Kim Bonggok; Cho-Ui; literary tradition; oral tradition

Ⅰ. 서론 : 문제 제기

한국불교의 대표적 도승(道僧), 또는 신승(神僧)으로 평가1)되는 진묵대사(震默一玉, 1562~1633; 이하 진묵)에 관해서는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상당량의 구비 설화가 존재한다. 이러한 구비전승에 의거, 19세기 중엽 초의 선사(草衣意恂, 1786~1866; 이하 초의)는 최초의 문헌설화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이하 『유적고』)를 편찬한다. 그런데 『유적고』에 수록된 진묵 설화는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 및 전북에서 창시된 신종교 경전들에 수록된 내용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강증산(姜甑山, 1871~1919; 이하 증산)의 교법에 나타난 진묵과 김봉곡(鳳谷 金東準, 1575~1661; 이하 봉곡) 간의 관계는 『유적고』 내용과 상반된다. 이 점에 주목, 본 연구에서는 『유적고』와 증산 및 대순사상의 주요 텍스트인 『전경』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차이를 봉곡과의 관계 기술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유적고』와 증산 및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차이에 관한 선행연구(김명선·김기옥·김방룡·김기종·유선경)2)는 주로 『대순전경』 및 증산 계열 신종교들과의 대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대순전경』에 초점을 맞추어 『유적고』와 대비한 연구로는 김방룡의 「증산교와 진묵대사」가 대표적이다. 한편 대순진리회 『전경』을 중심 텍스트로 해서 이에 나타난 진묵 설화를 『유적고』와 비교한 연구로는 이병욱의 「불교와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설화의 차이점」3)이 있다. 양 연구는 불교와 신종교 간의 차이를 넘어 『유적고』와 증산·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차이를 비교종교 시각에서 조명한 의미 있는 기반연구로 볼 수 있다.

김방룡은 『유적고』에 나타난 사상을 1. 유교·불교·도교의 회통사상 2. 진속일여의 사상 3. 대자유사상 4. 석가모니의 화신불 5. 효사상으로 분류한다.4) 한편 『대순전경』에 나타난 진묵의 모습을 증산이 선택한 것으로 기술한다. 이로써 실제 진묵보다 증산이 만든 진묵 이미지가 지닌 종교적 의미에 주목한다. 우선 진묵을 시기·질투하는 인물로서의 봉곡의 묘사가 『동사열전(東師列傳)』5)에는 보이지 않으며 기타 기술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어서 이러한 차이의 원인을 증산이 원래의 의도를 변형한 것으로 본다. 진묵을 한을 지닌 인물로 만들고자 의도적으로 각색했다는 견해이다. 나아가 “이러한 변형의 근본 의도는 종교 간 회통을 통한 조화로운 인간세계 건설에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6)

이병욱은 김방룡의 차이점 연구 외에는 『유적고』와 『전경』 간의 진묵 설화의 차이를 밝힌 연구가 없음에 주목한다. 이에 4가지 항목(1. 석가모니의 화신불 2. 무애행의 정신 3. 선교일치의 정신 4. 유불일치의 정신)으로 차이점을 검토한다. 이로써 화신불로서의 진묵이 『전경』에 수용되어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평가한다. 『전경』의 관점이 “동일한 주제의 설화를 다르게 표현되게 했다.”라는 해석이다.7) 나아가 엘리아데의 신화이론 중, “신화에는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역사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고”8), “살아 있는 신화는 늘 종교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숭배의례와 관련할 때 허구가 아니고 탁월한 진실”9)라는 시각을 활용한다. 물론 『유적고』가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종교 방법론은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한국불교와 대순사상의 진묵 설화 기술은 차이가 있지만 믿음을 지닌 사람들 마음속에서 신화는 살아 있는 진실이기에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양자 모두 틀리지 않음’을 제시하는 회통적 접근이다. 전승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차이만을 드러내려는 개방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김방룡과 마찬가지로 이병욱은 같은 주제의 진묵 설화 속에서 봉곡과 진묵의 관계가 나쁘지 않게 묘사되는 『유적고』와 봉곡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기술되는 『전경』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이로써 “『유적고』에는 불교의 가치관이 투영된 진묵 설화가 전승되었고 『전경』에는 대순사상의 가치관이 반영된 진묵 설화가 전승되었기에 진묵 설화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강조 내용에서 차이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10)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로써 한국불교와 대순사상에서 각기 다르게 기술되는 진묵 설화의 차이를 두 사상의 가치관이 투영된 결과로 본다.

본 연구는 가치관에 따른 기술의 차이라는 이상의 김방룡과 이병욱의 관점을 수용한다. 다만 『유적고』와 『전경』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차이점을 불교와 대순사상 간 세계관의 차이가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다. 문헌 전승과 구전 전승의 차이로서 말이다. 여기서 문헌 전승이란 19세기에 최초 문헌설화로 구성된 『유적고』를, 구전 전승이란 18세기 이래 민간에서 전래 된 구비 설화를 말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상이한 전승에 내포된 세계관과 가치관의 차이 또한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신화나 전승 해석에 있어 세계관(Weltanschaung)·가치관·시대정신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라는 이병욱의 해석 방법을 전제한다면 이러한 대비는 한층 유효한 접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헌설화뿐만 아니라 증산의 활동지이기도 한 호남지역의 구비전승을 검토할 때 『전경』과 『유적고』에 나타난 차이의 의미가 한층 객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적고』 집필 과정에서 봉곡과 진묵의 갈등 상황 삭제 가능성 또한 살펴볼 것이다. 이는 초의가 『유적고』를 집필하는 19세기 당시 유교 사대부로부터 박해받던 불교계의 열악한 현실을 고려할 때, 집권층 주요 인사이던 봉곡과 진묵 간의 갈등 상황, 특히 ‘살해와 관련된 민간전승은 교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문제 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구전설화와 다르게 기술된 문헌설화의 집필 의도 및 전승의 제 문제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단 『유적고』·『동사열전(東師列傳))』 등 외에는 진묵 설화에 관한 기록 문헌이 거의 없고, 진묵·봉곡 관계에 대한 민중의 관점을 드러내는 구비설화 또한 채록 시기가 명시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18세기 이전 진묵 설화의 존재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밝혀 둔다. 이에 『유적고』와 다른 시각에서 봉곡·진묵의 갈등 상황을 서술하는 구전 내용은 『한국구비문학대계』 및 채록 자료를 수록한 관련 연구를 활용할 것이다.

나아가 당대 유불 관계에 관한 문헌을 분석함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따른 『유적고』 편집의 필요성을 제시하겠다. 나아가 『완당집』 내용 등에 의거, 『유적고』 작성 당시 초의의 개작과 윤색 흔적을 검토하겠다. 이로써 초의가 『유적고』 저술 과정에서 지배층 사대부의 상징적 인사인 봉곡과 불교 간의 좋은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갈등 내용을 생략했을 가능성을 지지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우선 선행연구를 중심으로 『유적고』와 『전경』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로 『동사열전』·『대순전경』의 해당 내용 등도 대비하겠다.

Ⅱ. 『유적고』와 『전경』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구성

1857년(철종 8) 전주 서방산 봉서사(鳳棲寺)에서 초의가 간행한 『유적고』(목판본 상·하 2권 1책)의 전체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진묵조사유적고」 서(震默禪師遺蹟攷序) : 은고거사 김기종 (隱皐居士 金箕鍾)

『진묵조사유적고」 서(震默祖師遺蹟攷序) : 해양후학 초의의 순(海陽後學 草衣意恂)

『진묵조사유적고」 상(震默祖師遺蹟攷上)

* 유적고 본문 : 초의 의순 찬(撰), 교남후학 제산운고 교 (嶠南後學 霽山雲皐 校)

* <석가여래인지(釋迦如來因地)>

『진묵조사유적고」 하(震默祖師遺蹟攷下) 부록(附錄)〕

*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 지원 조수삼(芝園 趙秀三)

* 「진묵조사유적고」발(震默祖師遺蹟攷䟦)

<발>: 초의 의순(草衣意恂)

<발>: 제산 운고(霽山雲皋)

「진묵선사유사」발(震默禪師遺事䟦):

<발>: 김영곤(金永坤)·<서(書)>: 김학근(金鶴根)

<발>: 김영학(金永學) 노원(魯元)11)

『유적고』에 수록된 서사의 편수에 대해서는 17편 또는 20편이라는 주장이 대별 된다. 김기종은 김기옥·고석훈·이선이 등이 『유적고』 설화의 편수를 20편으로 본 것과 달리 초의의 고증에 따라 이를 17편으로 확정하고 그 구성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12)

  1. 신중단(神衆壇) 신장(神將)들이 사미 진묵의 공양을 거부함

  2. 진묵이 바늘을 국수로 만듦

  3. 진묵의 효심

  4. 술 즐기는 진묵

  5.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 『능엄경』 독경

  6. 목부암(木鳧庵)으로 거처 옮김

  7. 관가에 빚진 (전주부) 아전을 도와줌

  8. 사미의 장난으로 시냇물에 빠짐

  9. 봉곡 선생과의 교유

  10. 신령한 기운을 다스림

  11. 죽은 물고기를 살려냄

  12. 사냥꾼들에게 소금을 갖다줌

  13. 멀리서 해인사의 불을 끔

  14. 삼매에 들어 먹지도 자지도 않음

  15. 공중에서 내려온 발우

  16. 불상 조성의 증사(證師)가 됨

  17. 진묵의 입적13)

이에 비해 김기옥 등의 연구는 (3) 진묵의 효심 항목 안의 i 모친을 위해 모기를 쫓음, ii 진묵의 제문, iii 모친 묘소(無子孫千年香火之地) 이야기를 독립 설화로 보고 총 20편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유선경 또한 20편으로 정리한다.14) 단 『유적고』의 전체적 구성과 초의의 기술을 고려하면 이상의 17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전경』에 수록된 진묵 관련 내용은 총 8가지이다. 이 가운데 1) 증산의 평가와 천지공사 관련 내용은 5가지, 2) 진묵과 봉곡 간의 관계를 조명한 내용은 3편이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증산의 평가 및 천지공사 관련 내용

    • (1) 증산에 의해 선·불·유(仙佛儒) 중 불도의 종장(宗長)으로 임명 (교운 1장 65절)

    • (2) 『현무경』 중 “이목구비총명도통(耳目口鼻聰明道通)” 관련 내용 (교운 1장 66절)

    • (3) 증산이 석 달 안에 임진란 평란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 (예시 73절)

    • (4) 칠성을 숨겨 전주 아전을 도움 (행록 1장 31절)

    • (5) 진묵(震默) 초혼 공사 (공사 1장 15절)

  2. 진묵과 봉곡 간의 관계

    • (1) 봉곡에게 죽은 진묵을 해원 시켜 선경 건설에 역사케 함 (권지 2장 37절)

    • (2)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린 후 모두 버림 (공사 3장 14절)

    • (3) 봉곡에게 살해된 후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감 (공사 3장 15절)

이병욱은 1) (4)에 대한 『유적고』와 『전경』 기술의 차이와 관련하여 『유적고』에서는 나한에게 명하는 화신불로서의 성격을, 『전경』에서는 진묵과 증산의 신이한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15) 이러한 차이의 원인으로는, 전자에서는 불교의 가치관을 강조했고 후자에서는 천지공사와 해원상생이라는 대순사상의 가치관이 반영된 진묵 설화가 전승되었기에 강조점에서 차이점이 생긴 것으로 평가한다.16)

김방룡 또한 『유적고』와 『대순전경』의 차이를 “증산에 의해 선택된 진묵의 모습의 차이”17)로 본다. 검토를 위해 『전경』의 2) 진묵과 봉곡 간의 관계 중 (2)의 상응 내용을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고 [(2-i); (2-ii); (2-iii)]18), (3)의 내용을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눈다. [(3-i); (3-ii)].19) 이러한 구성은 (3)의 두 번째 항목(3-ii)에서 “이는 봉곡의 소위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걷우어 모아 천하를 문명케 하고져 하였더니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야 헛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20)를 제외하고는 『전경』 의 진묵 설화 내용과 같다. 『전경』의 경우, 『대순전경』의 해당 구절(3-ii)이 2) (1) 증산의 진묵 해원공사 내용으로 설명된다.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진묵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으로 데려와서 선경 건설에 역사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21)

나아가 김방룡은 『동사열전』 「진묵조사편」에서 진묵과 봉곡 간의 관계를 서술하는 내용을 3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부가한다.22) 이 분단 방식에 따라 『전경』의 2)에 해당하는 『동사열전』 기술을 정리해보자.

(4)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봉곡 선생이라고 불리는 유학자 김동준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사계의 고제(高弟)로서 정명도(程明道) 사상을 고양하는 학자였다. 진묵은 만년에 봉곡과 내왕하면서 사상적 핵심에 관한 고차원적 대화를 나누며 방외(方外)의 사귐을 가졌으니 이 두 분은 모두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5) 하루는 봉곡이 스님에게 『주자강목(朱子綱目)』을 빌려주고 사람을 하나 딸려 보냈다. 스님은 책을 바랑에 넣어 짊어지고 길을 걸으며 한 권씩 꺼내어 대강대강 훝어본 뒤 한 권 한 권 땅에 떨어뜨리고 한 권의 발문만을 갖고 절로 돌아갔다.

(6) 뒷날 봉곡은 진묵에게 물었다. “책을 빌려 가서 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진묵의 대답은 그야말로 오늘의 학자들에게도 깊은 교훈을 주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得魚忘筌)이지요.” 봉곡이 『강목』을 꺼내어 진묵에게 그 내용을 물으니 한 글자도 틀림없이 모두 대답하는 것이었다.23)

이상 (2-i), (2-ii)와 (4) 간의 대비를 통해 김방룡은 『대순전경』에서 봉곡이 진묵을 시기·질투하는 인물로 기술되는 내용이 『유적고』와 『동사열전』에는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나아가 (2-iii)과 (5)·(6)을 비교하여 진묵이 봉곡으로부터 빌린 책을 버린 이유에 대해 ‘쓸데없는 것이어서’라는 『대순전경』 내용과, ‘말과 글에 걸려있는 것을 벗어 버려야’라는 『동사열전』 기술의 차이점을 나타낸다. 이에 따라 증산이 원래 의도를 변형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즉 증산이 진묵을 “선천시대의 한을 지닌 채 도통신을 데리고 서양으로 가서 후천 개벽 세계를 만드는 불교계의 종장으로 재탄생시켰고 … 한(恨)을 강조하기 위해 봉곡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변형시켰다는 해석이다.24)

그런데 최초 문헌설화인 『유적고』와 조선 고승전 『동사열전』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데 비해 증산의 기술이 이와 다르다고 해서 증산이 본래의 구전설화 내용을 변형했다고 확정할 수 있을까? 특히 『동사열전』 편찬자 범해 각안은 1833년(순조 33) 해남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서 출가, 1835년 초의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후 그 문하에서 활동한 제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정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같은 불교 문중, 특히 선가(禪家)의 사제 간에 전승 내용(則)을 변경하는 일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25)

이러한 맥락에서 진묵·봉곡 활동 시기로부터 『유적고』 찬술 기까지의 유불 관계 맥락을 검토할 때 초의 등이 문헌설화로 기록하게 된 이유나 목적에 대한 새로운 해석 지평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기종26) 또한 기록화의 이유나 목적에 관한 선행 연구가 없음에 주목하면서 『유적고』 찬술 경위를 “유불을 적대적 관계로 묘사하는 설화들의 유행에 대한 유불 지식인의 문학적 대응으로써 교정이나 순화의 성격을 띤다.”27)고 추정한 바 있다. 단 당대 유불 관계 맥락에서 『유적고』 찬술 경위와 의도를 상세히 검토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 주목, 다음 절에서는 유불 관계를 통해 『유적고』 찬술의 배경을 고찰해보기로 하자.

Ⅲ. 유불 관계로 본 『유적고』 찬술 배경과 기록화 고찰

1. 유불 관계 맥락에서 본 『유적고』 찬술의 배경

1633년 진묵의 열반 시, 한 제자가 ‘종승(宗乘)을 누구에게 연계해야 할지’ 묻는다. 이에 진묵은 “명리승이지만 일단 청허 노승에게 붙여두라.”28)라는 유언을 남긴다. 여기서 청허 노승이란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을 가리킨다. 이는 임란 전후 기, 다수를 점하던 청허계 역시 명리를 쫓기는 하지만 보우(太古普愚, 1301~1383) 계열보다는 정치 세력에 부응하는 경향이 비교적 적고 산림계가 많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언에서 볼 수 있듯이, 명종 대와 임란 전후 시기 조선불교는 일정 정도 국가의 인정하에 활로를 찾고 있었다. 특히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 계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기간에 승군·부역·수호29)등의 공으로 획득한 불교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승려 문집 간행을 확산한다. 이 흐름은 『유적고』가 출간되는 19세기까지 지속된다. 손성필의 연구에 따르면, 1630~1640년 인조 대 승려 문집에는 서문·발문·행장이 추가되기 시작한다. 특히 저명한 유학자의 칭송이 담긴 서문을 통해 승려의 시문·행적에 관한 문집 편찬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차츰 증대된다. 1612년 『청허당집(淸虛堂集)』과 『사명당집(四溟堂集)』 간행 이후, 서문이 없는 승려 문집은 없었다. 명문 사족의 승려 문집 서문 찬술은 18·19세기까지 이어져 조선 후기의 일반적 경향으로 된다.30)

그렇지만 불교가 “허무적멸에 빠져 인륜을 저버리는 가르침”31)이라는 유학자들의 비판 기조가 약화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경향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사후 선교 양종(禪敎兩宗)이 폐지된 이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해진다. 이에 따라 서문 내용 또한 휴정과 같은 군주에 대한 충성, 진묵의 효심과 같은 개별 승려의 유교적 덕행을 찬탄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유적고』 서문에 수록된 진묵의 행실에 관한 봉곡의 일기 내용에서처럼 승려가 유교인 보다 더 유교적 덕목을 잘 실천한다는 찬양도 많이 나타난다. 이로써 ‘유불의 도는 다르나 하나로 통할 수 있으니 다르지 않다’라는 논변을 전개한다.32) 이러한 경향을 염두에 두고, 김기종의 『유적고』 서문 내용을 보자.

유교와 불교는 도가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 유교인들은 자주 불교인들과 어울리고 불교인들 가운데 유교인들을 쫓아 어울리는 사람들은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나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대체로 같지 않은 가운데 때로 같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 옛 군자는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하고 흔연히 칭찬하기에 이로써 어찌 명성이 없겠는가? 오호라! 명종·선조 양 조정 시기에 봉곡 선생 같은 분이 부쩍 성하게 일어났으니 사계의 우수한 제자로서 도학을 널리 밝혔다. 진묵 선사는 여래의 응신으로서 선과 교를 수행했는데 모두 한때 으뜸가는 위인들이다. … 진묵 선사는 출가한 이로써 절 가까운 곳에 모친을 모셨는데 효도하고 봉양하는 것이 극진하였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글을 짓고 곡하였는데 매우 슬퍼하였다. … 진실로 돈독한 효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앞에서 말한 “같지 않은 것 중에 같은 것이 있다.”라는 말과 김선생이 말한 “행위는 유가이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늘 마음속에서 사모하는 마음을 그칠 수 없다.33)

이상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김기종이 유불 일치를 말하는 것은 유교 입장에서 진묵의 유가적 덕목을 찬양한 것이지, 불교 그 자체를 존중하는 뜻에서 ‘같지 않은 것 중에 같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유학자들의 서문에서 훌륭한 자질을 지닌 승려들이 불문에 귀의한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심지어 불교를 버리고 유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는 형태에서 한층 분명히 드러난다.34)

『유적고』 본문 가운데 봉곡과의 관계가 나타나는 부분은 (i) 진묵이 봉곡에게서 빌려 간 책을 버린 이유에 대해 “고기를 잡은 이는 잊는 법”35)이라고 답한 내용, 그리고 (ii) 봉곡의 집에 방문한 진묵이 계집종에게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가?”36)라 물었을 때 응답하지 않자 탄식하며 신령한 기운을 허공 밖으로 물리친 내용에 그친다. 그밖에 진묵과 봉곡의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정의’와 같은 친밀한 관계는 모두 김기종의 평에 나와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와 교유를 했는데 이제 그가 돌아가매 슬픔을 가누지 못하겠구나.”37) 및 “일옥(一玉) 대사가 떠나가셨다고 들었다. 이 스님은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선비의 행실을 지녔으니 슬픔을 이길 수 없구나.”38)라는 김봉곡 일기의 짧은 언급 모두 김기종의 서문과 김영곤의 발문에 수록된 내용이다.39) 이 일기 내용이 실제 봉곡의 기술이라면 유교 시각에서 진묵을 바라본 봉곡의 마음과 태도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렇듯 진묵과 봉곡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한 내용이 특히 유학자에 의해 소개되었다는 사실은 집필자의 의도와 관련하여 당대 유불 관계를 좀 더 신중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당시 민간에서 회자한 진묵 설화에 진묵-봉곡 간 대립 내용이 많았다면 이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에게도 곤란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학 집권층 입장에서 볼 때 봉곡은 최고의 산림이던 사계(沙溪 金長生, 1548~1631)의 직제자로서 사계를 도와 인조반정을 주도한 그룹에 속한다. 만약 이러한 인물이 민간에서 생불(生佛), 내지 미륵불의 화신으로까지 추앙되는 진묵과 갈등이 있었다거나 진묵을 살해했다는 전승이 유포될 경우, 유교의 상징적 인격의 이미지에 타격이 가고 급기야 집권층 자체를 불신하게 될 수 있다.

한편 인조 이후 점차 증대된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불 위협마저 느끼고 있던 불교계 입장에서는 불교계 인물로 인해 명망 있는 유림 인사가 폄하되는 전승이 유포될 경우, 존폐의 문제까지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 배경하에서 호남 불교의 대표 격 인사 초의는 집권 노론 가문 출신이면서도 초의와 깊은 교분 관계에 있던 완당 김정희(金正喜, 1786~1856)40)의 주선으로 전주 봉서사에서 유학자 김기종을 만나게 된다. 이후 김기종은 18세기 말~19세기 초 생존하던 향촌 어른들의 진묵 전승 수집 자료를 초의에게 전달하면서 『유적고』 집필을 부탁한다. 당시 김기종과 유학자 그룹은 백성들이 인조반정 이래 강조된 강상 윤리와 예도 정신의 진작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채록 자료의 순화와 교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편 초의 입장에서는 유불 간의 좋은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불교의 명맥 보존을 위해 당위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 증대된 서원 교육으로 유학의 기본 소양을 갖춘 승려들이 늘어나고 승려 문집이 급작스레 증가한 경향 또한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박해당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급증한 승려들의 문집 내용에서 유불 간의 사상적 차이를 기술한 내용은 극히 드물다. 오히려 유교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찬양하거나 불교가 유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회통적 호교론이 대종을 이룬다.41) 또는 유불 인사들 간의 개인적 친분이나 교분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다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의 역시 시대적 관습과 제약을 벗어나기 어려웠으리라. 더욱이 초의가 불교의 명맥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유학자들과 교분을 쌓던 인사였다는 점은 이러한 추정에 신빙성을 더한다. 물론 진묵은 당시 민간에서 도승·신승, 내지 석가불의 화신으로까지 추앙된 고승이었음에도 어떤 저작이나 역사 기록도 없었기에 이를 정리해서 실제 역사화할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42)

요약하자면 유학자 김기종이 완당,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 등과 교분을 나누던 해남 대둔사의 초의에게 『유적고』 집필을 부탁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호남지역에 성행하던 진묵 전승이 도학의 롤 모델이 되는 주요 인사의 인품·도덕성을 훼손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유교 지배층에 불만을 드러내는 민심을 순화·교정할 필요였을 것으로 보인다. 황의동은 숭유억불을 표방하던 당대 상황 속에서도 진묵과 봉곡은 매우 친밀한 교유를 했을 것이고, “일부 종교와 구전에서 김동준이 진묵을 죽였다느니 많은 시기·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는 후일 덧붙여진 얘기거나 종교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일화일 것”43)으로 추정한다. 그렇지만 황의동이 제시한 근거 역시 김기종의 『유적고』 서문이다. 따라서 유학자 시각에서 기록한 내용일 수 있다.

2. 『유적고』의 첨삭 가능성과 18세기 구전설화의 존재
1) 『유적고』의 찬술 경위와 변용 가능성

이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김명선은 『유적고』 자체의 의도적 편집, 첨삭 가능성을 제시한다. 김명선은 금석학자이자 실학자인 “김정희가 초의와 서신 왕래를 하면서 진묵에 관한 일설들을 바로잡고 빼거나 부족한 곳을 보태며 서문과 일화의 문장을 검토해서 보았다는 『완당집』의 기록”에 주목한다. 해당 내용을 『완당집』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진묵 선사의 행록은 바로 곧 남아있는 기름과 향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디마디가 향이어서 확실히 이것으로 진묵 선사를 다 말하기는 부족합니다. 수미산이 향기 나는 열매를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진묵 선사 역시 응당 흔쾌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서문과 후기의 서술은 매우 좋아서 다시 하나하나 따져 정정할 것이 없을 듯하지만, 또 마땅히 충분히 보고 잘 논의해서 재차 교정하실 것을 청합니다. 2가지 선(二禪)44)의 ‘살·활(殺活)’ 등의 문장은 분명 이처럼 말해야 할 것이니 천 가지 백 가지 갈등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근자에 명료하지 않은 부분과 무성한 장애를 말끔히 쓸어낸 것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다만 ‘살·활’의 일체 일용을 차츰 헤아려서 ‘살’과 ‘활’을 모두 사용할 뿐입니다. … 진묵 선사의 행적은 이로써 돌려보내니 이에 준거해 진행하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서문과 후기의) 두 가지 서술도 삭제할 것이 없는데 원 기록 중에 어떤 것은 자못 상의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현재 저의 정신이 명민하지 않아서 일일이 지적해 정정할 수가 없군요. 이는 하루의 일이 아니니 차차 다른 날을 기다려 다시 정정하는 것도 좋고 이대로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선문의 문자는 조금 이상한 데가 있더라도 보는 사람이 살려 보기 마련인 까닭입니다.45)

『완당집』의 이 기술 등에 근거하여 김명선은 “초의가 진묵 일화들을 수집하여 완당에게 서신으로 보냈는데 이미 이 과정에서 초의의 개작과 윤색 등이 가미되었고 이에 완당의 개작·윤색이 첨가되었음”46)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초의와 완당은 진묵 일화에 대해 될수록 원문에 가깝게끔 보완·개작하였지만, 어느 한 곳이라도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있으면 정정을 서슴지 않았고”47) 진묵 설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대 실학사상의 지평에서 문헌으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명선은 구전설화가 문헌설화로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채록자 간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후, 구전설화가 대립양상을 드러내는 데 반해 문헌설화가 친화적 양상을 보이는 원인을 당대 현실 상황, 향유자들의 현실 인식, 신분 차이 등에서 찾는다. 나아가 당시 현실 정황으로 볼 때, 진묵 사후 200여 년간 민중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 양상 및 시대 변화 속에서 진묵 설화의 변이 여부에 따라 구전설화와 문헌설화 전승 간에 친화와 대립 구도가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수용자인 사람과 장소, 시간에 따른 변이요인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한다.”라는 구비설화의 해석 방법론48)을 문헌설화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근거는 채록 자료의 자의적 선정 및 삭제 가능성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유적고』 편찬자들이 “민중들에 의해 구전되어온 내용을 수집·정리하는 과정에서 진묵과 봉곡의 실증과 구전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목, 편찬자 의도대로 개작해 버린 것”으로 평가한다. 개작 이유에 관해서는 “민중들이 항유하는 일화에 중점을 두고 편집한 것이 아니라 문집이나 유고의 실증을 들어 편집하였기 때문에 구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말았고, 문헌으로 정착된 이상 변화 없이 굳어져 버린 것”49)으로 평가한다.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구전설화는 역동성을 지니고 발전·변이 과정을 거친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고, 문헌설화는 편찬자의 성향과 시대적 역사 인식과 관련해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50)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엘리아데의 살아있는 역사로서의 저항의식이라는 관점을 전제할 때 한층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당대 역사 연구 방법은 고증학의 지배 속에 있었다. 특히 박제가, 완옹(阮翁, 1764~1849), 옹방강(翁方綱, 1733~1878)과 사제의 연을 맺었던 완당의 학문 태도는 ‘헛된 논설에 기대거나 공론을 숭상하지 않고 사실에 따라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에 입각해 있었다.51) 따라서 봉곡 가문에서 작성한 『김동준 문집』과 「유고」, 우암(尤庵 宋時烈, 1607~1689)의 <봉곡 김동준 비문>52) 등 외에 실증할 수 없는 구전 전승의 대다수는 엄격하게 삭제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명료하지 않은 부분과 무성한 장애를 말끔히 쓸어낸 것은 정말 잘하신 일”이라는 완당의 초의에 대한 찬사는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손영식은 실증에만 의거, 고증학의 형식미 문학과 예술을 추구한 완당의 경향을 정신적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소중화론과 북벌론이라는 노론 명분론의 반대 극단으로 평가한다. 즉 실증에만 의존함으로써 진실을 간과할 수 있는 완당의 학문 경향이 조선적인 것을 부정하고 청나라 배우기(북학)에 매몰되었다는 비판이다.53)

2) 「영당중수기」에 나타난 18세기 구비전승

한편 실증되지 않은 민간전승을 모두 삭제·첨삭·개작했다는 김명선 등의 이러한 주장은 지원 조수삼(芝園 趙秀三)의 「영당중수기」 내용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조수삼이 “젊어서 남쪽 지방에서 노닐다가 70여 세의 노승 용파새관(龍波璽寬)으로부터 진묵대사의 전승을 전해 듣고 탐구해서 알게 되었다.”54)라는 사실 기록을 통해 『유적고』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이래 전승된 다양한 진묵 설화가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기옥 등의 선행연구에서도 “1857년 「유적고」가 발간되기 훨씬 전인 1700년대에도 진묵 설화가 전승되고 있었음”55)고 밝히고 있다. 김기종과 고석훈 또한 조수삼이 전주부 노승 용파새관으로부터 들은 「영당중수기」 내 5편의 설화에 주목하면서 『유적고』에 없는 설화 및 차별되는 내용을 정리한다.56) 해당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내가 젊어서 남쪽 지방에서 노닐다가 (전주) 부중의 노인들과 친하게 지내기를 즐겼다. 70여 세의 노승 용파새관이 있었는데 때때로 대사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하여 내게 주지시켰다.

이를테면 (i) 발우를 내던져 비가 오게 하여 해인사의 화재를 구한 일 (ii) 눈처럼 소금을 뿌려 사냥꾼의 식사를 도운 일 (iii) 불상을 장엄하게 꾸며 다시금 불칠(개금)을 하지 않게끔 한 일 (iv) 샘구멍을 꽉 채워 막아 돌을 뽑을 수 없었던 일 (v) 사람들이 억지로 어탕을 먹여, 바지를 내리고 돌에 걸터앉으니 물고기가 모두 항문으로부터 나와 냇물에서 활발하게 뛰놀던 일 등이다.57)

「영당중수기」에 수록된 이상의 설화 내용 중 Ⅱ 장에서 살펴본 『유적고』 17편 설화와 같은 것으로는 (v) ‘죽은 물고기를 살려냄’ 밖에 없다. 기타 4편의 설화는 『유적고』에 없거나 다른 형태이다. (iv)는 『유적고』에 보이지 않는다. (i)·(ii)·(iii)은 『유적고』 기술과 다른 형태이다.

유선경은 구전으로만 전하던 일화를 초의가 『유적고』로 정리한 것을 최초의 문헌설화라는 점에서 원형으로 보고 이후 수많은 변용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58) 그런데 이 관점을 따를 경우, 같은 『유적고』로 편집되었다 하더라도 초의가 기술한 진묵 설화는 1850년도에 찬술되었고 『유적고』 하권에 부록으로 추가된 「영당중수기」는 1833년도 찬술이다. 따라서 조수삼의 채록 자료를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같은 설화에 대해 「영당중수기」와 달리 기술된 『유적고』의 진묵 설화 내용 역시 변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석훈은 이러한 기술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의가 「영당중수기」를 추가한 이유를 “일체 경계를 초월한 선사로서의 면모”59)라는 “큰 틀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60)일 것으로 평가한다.

이어서 조수삼이 용파새관을 추모하며 기록한 「영당중수기」의 기술을 보자.

무릇 지인(至人)의 진심과 사실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대사를 가벼이 또는 무겁게 할 수 없다. 가만 생각하면 마고(麻姑)의 간교하고 꾀 많음과 보살의 신통은 우리 유자들이 귓가로 소곤거리기에 알맞다. 또 황망히 돌아와 글을 쓸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이미 나이 들어 다시 찾아보니 어르신들은 천명을 다하셨고 용파 선사도 서방정토로 귀환하신 지 오래구나! 그 법손인 완엄 정우 선사가 영당을 중수해 새로이 단청을 입히고 나를 찾아와 그 일을 기록해주기를 청하니 아마도 그 조사가 이전에 알려준 것일지 모르겠다. 문자의 연이란 이처럼 깊구나! 내가 용파 선사에게 승낙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음을 느끼고, 정우 선사가 묵묵히 계승함을 기뻐하여, 이에 기록해 대사의 실제 행적을 상세히 기술하고 어르신들로부터 전하여 들은 바를 약술하니 설사 대사가 현재 계신다고 해도 분명 내가 수행하러 감을 허락할 것이고, 말수가 많다 해서 침묵하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61)

이상 조수삼의 기록을 볼 때 분명한 것은 『유적고』 편찬 이전인 1700년대 말~1833년에 이르는 시기, 진묵 설화가 이미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고 노인들과 불교계 인사 등을 통해 전승되어왔다는 점이다.62) 김기옥·김기종·김명선 또한 진묵 설화가 18세기 후반 및 조선 후기에 민간뿐 아니라 지식층에도 상당수 유포·전승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63)

그밖에 19세기 혹은 20세기 초 기술로 추정되는 기록이지만 유선경이 정리한 조앙사 소장 순 한글체 묵서(墨書) 「딘묵됴샤유젹록」64)의 설화 내용도 참조할 수 있다. 특히 이 기록 및 『유적고』 진묵 설화, 주지 해경당 도우의 기록 자료를 종합해 그린 조앙사 진묵조사전(祖仰寺 震默祖師殿) 벽화 <진묵변상도(震默變相圖)>65)에는 『유적고』 에 없거나 다른 형태의 설화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예컨대 ‘누이동생과의 점심 공양’, ‘고시레-징게멩게 외배미들-조의씨레-꼬시레’, ‘누이동생의 부탁’66) 등은 『유적고』에 없는 설화이고 ‘삶은 물고기에 교화함’67)에서는 물고기를 잡아 어탕을 대접한 주체가 봉곡으로 변화되어 있다. 또 ‘이상한 예감을 느낀 봉곡이 찾아와 제자들에게 호통을 침’68)에서 진묵을 다비(茶毘) 한 내용도 『유적고』 기술과 다르다.69)

『유적고』의 집필 의도와 배경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이제 다음 장에서는 『유적고』와 『전경』 간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진묵 살해 사건 내용과 관련, 『유적고』에 수록되지 않은 민간전승의 주요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증산의 기술과 민간전승 간의 연속성을 고찰하기로 하자.

Ⅳ. 『전경』 및 민간전승과의 차이 검토

이제 『유적고』 내용과의 대비 차원에서 『전경』 및 민간전승에 나타난 진묵 설화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전경』에서 김봉곡에 의한 진묵의 죽음을 기술하는 문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8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써 인도국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 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 갔도다.70)

이상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증산은 진묵이 시해법을 통해 인도국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익혀 오려 했으나 봉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 갔다고 언명한다. 한편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진묵이 범서와 불법을 배워오려는 까닭은 선진 문명을 배워서 창생의 편의에 도움이 되게 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71) 사후에 문명과 과학을 상징하는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 갔다는 기술은 진묵의 이러한 의도를 방증해 준다.

그런데 『전경』에 나타나는 진묵-봉곡 간의 이러한 서사 구조는 『유적고』 내용과 상반된다. 오히려 『전경』의 기술은 민중들 간에 회자 된 민간전승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명선과 김기옥 등의 연구에 따르면, 진묵이 죽은 이유에 대한 구비 설화의 주요 서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진묵대사는 팔만대장경을 가지러 영혼만 서천서역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2. 진묵은 승려들에게 자신이 거처하는 방문을 열지 말라는 부탁과 비밀을 꼭 지키라고 하였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체같이 누워있는 자신의 육신을 그대로 두라고 상좌에게 이르고는 길을 떠난다.]

  3. 절 아래 사는 봉곡이 와서 진묵을 만나겠다며 승려들을 다그치어 방문을 열었다. 봉곡은 혼 없는 진묵을 불가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해 버렸다. [봉곡이 나타나 스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묵의 육신을 화장해 버린다.]

  4. 진묵이 돌아와 보니 몸이 없어 공중에서 팔만대장경을 외우면서 승려들에게 적으라고 하였다. 진묵의 혼이 봉곡 후손들의 논 물줄기를 막아버려 건답이 되어 버렸다. [진묵이 돌아와 자신의 육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봉곡의 후손에게 가난을 면치 못하리라 예언한다.]72)

김명선이 채록한 지역민의 구전설화에서도 진묵의 죽음은 불교를 통한 미래 세계에 대한 희구로써 표현된다.

그러고 그 진묵이 죽었어, 죽은지 모르자나. 어떻게 죽은지를 어떻게서 진묵이 죽었는고허니 나도 이 얘그 소리를 듣고 아는 거셔. 어떻게 죽은능고 허니 … 아무것이 잡어오니라허고. 그 책을 가질러 갔어. 서천서역국으로 말허자면, 팔만대장경이란 책을 가질러 갔는디, … (김광현)73)

이렇듯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진묵의 자비심과 방편 행을 시사하는 구전설화 내용에는 진묵을 통해 지배층의 상징인 봉곡을 이기고자 하는 민중의 원망과 염원이 교차 되어 나타난다. 진묵의 억울한 죽음을 묘사하는 이어지는 채록 내용에도 그 해학적 표현 밑에 민중의 세계관과 유교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원망이 내포되어 있다.

오늘 새복으로 떳으면 오늘 나즈때 그냥 와가지고는 봉곡 선생님을 갔어. 봉곡도 알아. 시체는 남아있고 혼만 나가 있는지를. 다 도통한 분들이라 인자 가서 알고 가갔고는. 야! 이바 문얼어라. 너그 시님 여깄지? 궁게로 있다고 문열어라. 중은 죽으면 화장을 시키는 법이다 긍게 워느니 어느 영이라고 안 열을 재간이 없어. 문을, 그라가꼬 꼼짝 못허고 문을 따줬어. 죽었싱게로 갖다 빨리 화장시켜. 그러가꼬는 어느니 영이라고 말을 안들을 재간이 없어. 귀앵이 앞에 머셔 지노릇헝게, 그 당시는. (김광현)

혼만 널러 가갖고 혼만 오는 판에 외와갖고 오는 안에 전주서 김봉곡씨가 긍게 하인들 시키서 태와 버리라고 혔어. 중놈이 이럴 수가 있느냐. 사찰의 뒷방이다 송장을 갖다 노응게. 태워버리라고. 아닝게 아니라 신체가 누워 있거등. 양반 세상에 중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거든. (김용길)74)

이상 채록 내용과 같이, 전래 민간 설화에서 진묵과 봉곡은 모두 도통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도 봉곡을 진묵의 살해자로 묘사하는 까닭은 당대 유교로 대표되는 지배 이데올로기 하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원망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진묵을 민중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존재로 상정한 이유 중 하나는 승려 역시 유교에 종속된 부역 계층 또는 천민 취급을 받는다는 동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특히 “양반 세상에 중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거든.”이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민중들의 이러한 동질감과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지배층에 의해 억압받는 시대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자신들의 소외된 심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석가의 화신불, 내지 미륵불로까지 회자 되던 진묵에게 투사했으리라.

반면 앞의 『전경』 구절에 기술된 “ …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라는 표현이 민간전승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당시 민중들의 지배층에 대한 저항 의식이 봉곡에게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뭐라고 허닝그로니는 이런 말이 있어. 여그 와 갖고 진묵대사가 느 봉곡자손들은 호맹이 자루를 면을 못할 것이단 말여. 호맹이는 그전 논매는 호미, 지금은 논을 안 매지마는, 논에는 호미를 면허지 못헐 것이다. 그말은 공중에서 하였어. (김광현)75)

한편 이러한 민간전승은 유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이나 초의와 같이 지배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지식층 승려들에게는 허용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특히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의 논쟁 등을 통해 불교 부흥을 꾀했던 초의 당대에 유교, 특히 집권 계층과의 우호 관계는 불교의 존폐와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이렇듯 친유교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 속에서 봉곡과의 대립적 설화가 선택되기는 어렵다. 한편 집권층 가문 출신임에도 친불교 성향을 지니고 귀양 생활을 전전하던 완당에게도 명승 진묵과 명유(名儒) 봉곡 간의 이례적 스토리텔링은 유불 간의 관계 개선뿐만 아니라, 초의 등 불교계 인사들과 왕래하는 자신의 운신에도 도움이 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호적으로 기술되기를 원했을 것이고 실제 여러 차례 전체 교정을 도왔다.

그러나 스스로 몰락 양반 출신으로서 유학의 폐습에 대해서도 비판적 언사를 아끼지 않던 증산의 경우,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진묵 설화 내용을 종교적 목적에 맞게 의도적으로 개작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II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증산이 ‘진묵을 해원 시켜 선경 건설에 역사케 한 일’이나 ‘초혼’ 공사, 그리고 ‘자신이 한국 땅으로 온 이유’ 등의 서술을 보면, 증산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진묵 설화를 개작 또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 당시 민간에서 회자 되던 민중의 소리를 천지공사에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증산은 한국 땅에서 천지공사를 하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76)

이렇듯 증산은 후천선경을 열어 도탄에 빠진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는 뜻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진묵 설화가 공통으로 회자 되고 있다면, 유학자나 불교도처럼 이를 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증산 스스로 천하 창생을 구하고자 했기에 천하를 문명화하려던 진묵의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민중들의 염원과 소망도 들어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고 보지 않았을까? 이 점에서 증산이 천지공사에서 민간전승을 활용한 데 대순사상의 가치관이 들어 있다는 이병욱의 관점 또한 일리가 있다.

단 『유적고』 와 『전경』 기술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엘리아데의 ‘살아있는 신화’와 ‘역사에 저항하는 의식’이라는 관점을 도입한다면, 증산 역시 유교적 가치관을 담은 문헌설화(『유적고』)에 비해, 18세기 이래 전승되어온 구전설화에 민중들의 살아 움직이는 역사와 가치관, 희망이 투영되어있다는 점을 수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비 설화는 각각의 “자료가 일정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종결되는 데 비해 문헌설화는 사건구조를 명확히 갖추지 않고 인물의 성정(性情)이나 행적들을 단편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77) 이렇듯 구비 설화의 사건 완결적 특성을 고려할 때 증산은 사건 서사 내용을 개작·첨삭할 필요 없이 전승 그대로 자신의 교화와 공사에 활용하면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18세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 사례들의 존재를 보여주는 「영당중수기」 내용, 전라북도 지역에서 회자 된 진묵-봉곡 관계 서사 및 송구봉 등에 관한 구전설화, 그리고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할 때, 종교·당파·정치적 성향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마음과 뜻, 또는 능력만을 사용했다는 사실 등으로 뒷받침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전라북도 지역 송구봉 설화 (도포끈 때문에 죽은 송구봉) 내용을 살펴보자.

송구봉 이야기를 하지요. 이야기가 그러데요. 그 사람은 도포를 입고 다니면 끈을 안 내요. 다 짤라가지고 단추를 만들어 가지고 단추를 잠가가지고 다닌데 그랬다지. 그놈을 입고 다녔다고 그래. 그 사람은 항시 적이 많아 가지고 늘 피해 다니는데, 인제 들보에다 홈을 파놓고 거기 들어가서 잠을 잔단 말이여.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자기 부인더러 단추 단 도포를 만들게 했는데 그날사 말고 입고 나선 것이 이 달린 도포였다고 그래. 그래서 인제 자는데 그 사이로 끈이 나와가지고 나풀나풀해가지고 발각이 돼서 잡혔다고 그래요.78)

봉곡의 스승 송구봉(龜峯 宋翼弼, 1534~1599)은 진묵 당대 서인 집권 세력의 핵심 인물이다. 하지만 구전 전승에 나타난 민중들의 송구봉에 대한 태도는 봉곡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송구봉 관련 구전 전승에 나타난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달리, 임진란에 관한 『전경』의 다음 기술은 증산이 민중의 대변자로서 진묵만을 두둔하거나 송구봉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지나간 임진란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진묵이 당하였으면 석 달이 넘지 않고, 송구봉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불·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 .”79)

이상과 같이 증산은 진묵과 송구봉 모두 임진란을 평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한다. 최풍헌, 진묵, 송구봉은 각각 도교·불교·유교를 상징한다. 약술한 바와 같이, 서인(노론)의 핵심 인사 송구봉은 도학과 예학으로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해 동인(남인·북인) 들의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다.80) 그런데도 증산은 송구봉의 도학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봉곡과 함께 사계의 문인이자 정국을 주도한 산림(山林)이었던 우암 역시 남인 등의 주요 비판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증산은 우암이 건립하고 주창한 만동묘와 소중화론81)을 활용해 황극신(皇極神) 및 대중화(大中華) 공사를 본다.82) 또 해원상생 차원에서 최대 정적인 노론 영수 우암과 남인 영수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을 동시에 공사에 쓰기도 한다.83)

이렇게 볼 때 증산은 진묵 설화와 관련해서도 봉곡으로 대변되는 유학 지배층, 특히 서인 정권에 불만을 지닌 민중들의 가치관을 대변하거나 소외 계층, 및 불교 승려들의 저항 의식을 지지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19세기 당시 전 세계 최 극빈국이자 약소 민족인 조선 민족 중에서도 가장 약한 고리인 민중들의 원과 한을 먼저 풂으로써 천하를 널리 구하려는(匡救天下) 뜻에 따라, 정치적 입장·당파·신분 및 종교에 구애 없이 천지공사를 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증산은 민간에서 회자 되던 진묵 설화 속의 진묵-봉곡 갈등 구조 역시 가감 없이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천지공사 속에서 해소하려 했을 것이다.

Ⅴ. 결론

증산과 초의의 『유적고』에 나타난 진묵 설화 기술의 차이와 관련하여, 선행연구에서는 ‘증산이 종교 간 회통을 통한 조화로운 세계 건설을 위해 설화 내용을 변형한 것’, 또는 대순사상과 불교의 세계관으로 인해 해석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본다. 이와 달리 본 논문은 문헌 전승과 구전 전승의 차이가 『유적고』와 『전경』 기술의 차이를 낳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문헌설화 구성 과정에서 전승의 선별적 수록 가능성을 지지했다. 나아가 『전경』에 수록된 증산의 기술이 구비 설화에서 회자 되는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함으로써 증산의 공사 내용이 조선 후기 민중들이 처한 현실과 염원을 수용한 것으로 보았다.

제법불이·선다일여(諸法不二 禪茶一如)를 주창하며 완당과 돈독한 교분을 나누던 초의의 정신세계에서 유불 간 교유 내용이 담겨있는 진묵 설화는 문헌 화가 요구되는 중요한 전승이었을 것이다. 초의는 완당의 소개로 김기종을 만난 후 진묵 행적을 입수했고, 『유적고』 서문과 전체 본문 교정 역시 완당에 힘입었기에 이 기록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렇지만 초의가 가감 없이 불교와 민중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전승을 객관적으로 채록했다고 보기에는 전해오는 구비 설화 내용과 너무 다르다. 이처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실학 정신을 따른 완당과 초의의 경우, 검증할 수 있는 기록에 의존하고 그렇지 않은 기록은 삭제하는 태도를 지녔기에, 진묵 살해 사건과 같이 구전 전승에 다수 나타나지만 문제시되는 내용은 삭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민중들의 반유교적 입장과 달리, 대표적 불교 인사로서 집권층과 민중을 모두 아울러야 했던 초의가 『유적고』를 편찬한 배경에는 현실적 고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진묵 설화 중 유불 화합 전승만 기록한 것은 진묵의 친유가적 풍모를 부각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적대감을 완화하려 한 의도로 생각된다. 예컨대 진묵의 효도 설화를 통해 『부모은중경』 외에도 불교의 효 사상이 있음을 드러내 유학자들의 비판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 계율에 초연한 진묵의 무애행과 진속(眞俗)을 초월한 선(禪)의 정신을 미화하여 승가의 위상과 승풍(僧風)을 진작할 수 있다는 점, 권력의 핵심 계열에 속했던 봉곡과의 교류를 부각해 지배층으로부터 불교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 편찬 의도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설사 진묵-봉곡 간에 좋지 않은 전승이 있다 하더라도 수록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김기종이 제공한 자료 중 초의가 유불 대립적 내용은 삭제하고 우호적 전승만 수록했다는 추정은, 교정 과정에서 갈등 내용 등 불필요하고 불명료한 부분을 첨삭·삭제했음을 칭찬하는 완당의 서신등으로 뒷받침된다. 이로써 이전 구비전승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고 실제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을 개연성도 많다. 이렇듯 문헌설화가 자료의 실상을 있는 대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자체적 성격84)을 넘어, 시대 상황이나 지배층과의 이해관계로 인해 유불 화합 내용으로 각색됨으로써 구비 설화와의 차이가 더욱 현저해졌을 것이다.

말에 의한 문자의 억압이라는 데리다(Derrida)의 해석과 달리, 역사해석에서는 기록 문헌에 권위를 부여하고 이에 따라 구전 내용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활자화된 문헌 일변도의 사고가 지닐 수 있는 한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적고』 찬술 배경과 경위, 『완당집』 관련 구절 및 채록된 설화 내용 등을 고려할 때, 증산의 진묵 설화 기술과 이에 기반한 공사가 오히려 구비 설화에 나타난 주요 서사를 충실히 아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문헌설화에는 편찬자의 유교 중심적 성향과 현실적·정치 사회적 역사 인식이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지역 정황으로 볼 때, 김제·정읍·전주 지역에서 활동한 증산은 김기종이 수집한 자료 이외에 더 많은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미 보편적으로 회자 되는 전승이 있다면 종교적 목적을 위해 없는 전승이나 왜곡된 설화를 유포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전경』에 나타난 증산의 천지공사 사례를 보면, 정파나 계층, 종교와 관계없이 중립적으로 공사를 처결하되 민초들의 가치관이 담긴 시속의 민간전승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85) 이에 비해 『유적고』에 나타난 진묵과 봉곡 간의 유불 화합 이미지는 유교 지배층의 억압에 저항하는 민심을 순화·교정하기 위해 미화한 스토리텔링 요소가 많아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진묵 설화와 관련하여 엘리아데가 말하는 저항의식을 통한 가치관의 반영이란, 유불 화합 필요성을 절감하는 초의·완당과 같은 지식층의 체제 유지적·이념적 가치관에 대해, 현실적 구원과 정의를 갈구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저항 의식이 투영된 구원 신앙적 가치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증산이 진묵을 천지공사에 활용함으로써 해원상생적 세계관을 드러냈다는 이병욱의 분석 역시 증산·대순사상의 가치관과 구전 진묵 설화가 공유하는 구원 신앙적 가치관이라는 측면에서 한층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Notes

『전라북도지(全羅北道誌) 제3권』 (전주: 전라북도, 1991), p.730, p.1225.

김명선, 「진묵대사 설화 연구」 (전주우석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3), pp.1-108; 김기옥, 「진묵설화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9), pp.48-69; 김방룡, 「증산교와 진묵대사」, 『신종교연구』 4 (2001), pp.135-158; 김방룡, 「설화를 통해 본 진묵일옥의 삶과 사상」, 『한국불교학』 44 (2006), pp.21-28; 김기종, 「19세기 진묵 설화의 기록화와 그 의미」, 『한국불교학』 75 (2015), pp.220-252; 유선경, 「진묵신앙의 전개와 변용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pp.130-139.

이병욱, 「불교와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설화의 차이점」, 『대순사상논총』 29 (2017), pp.141-170.

김방룡, 「증산교와 진묵대사」, pp.146-151.

1894년 초의의 제자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4)이 찬술한 한국 고승전이다.

같은 글, p.157.

이병욱, 앞의 글, p.167.

같은 글, p.144.

같은 글, p.145.

같은 글, p.168.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考)」,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10』(이하 『韓佛全 10』),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https://kabc.dongguk.edu); 박윤호, 「진묵 일옥 일화 연구 : 『유적고』를 중심으로」, 『문학/사학/철학』 2 (2005), pp.4-5 참조.

김기종, 앞의 글, p.225; 草衣 意恂, 「跋」, 『震默祖師遺蹟攷』 卷下, 『韓佛全 10』 [이하, 『震默祖師遺蹟攷』, 『韓佛全 10』], p.883中, “由是觀之 則向所記一十七則之言蹟一皆具 離言默之道理 無一而非吾師之眞說 師之說在佛之道不遠矣.”; 김기옥, 앞의 글, p.19; 고석훈, 「진표·진묵이야기의 특질과 전승 양상」 (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2), p.32; 이선이, 「『진묵선사유적고』에 보이는 경전명과 그 의미」, 『정토학연구』 16 (2011), p.314 재인용.

김기종, 앞의 글, pp.224-225.

유선경, 「진묵신앙의 전개와 변용에 관한 연구」, p.63.

이병욱, 앞의 글, pp.167-168.

같은 글, p.168.

김방룡, 앞의 글, p.154.

2-i) 봉곡이 시기심이 많았는데, 진묵이 『성리대전』을 빌려갈 때 걸어가면서 한 권씩 보고 길가에 버림; 2-ii) 진묵이 유도까지 정통하면 불법이 흥왕해지고 유교는 쇠퇴해지리라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책을 찾어오라 하니 뒤쫓아가면서 길가에 한 권씩 버린 책을 걷우어 옴; 2-iii) 봉곡이 버린 책을 돌리라고 청하거늘 진묵이 쓸데없는 것이므로 다 버렸노라 하니 봉곡이 노하자 진묵이 외움에 한 자의 오착이 없어서 봉곡이 더욱 시기함.

같은 글, p.155; 증산교회본부, 『대순전경』 (부산: 문우당, 1975), pp.162-164 재인용; 3-i) 진묵이 상좌에게 여드렛동안 방문을 잠구어 둘 것을 부탁하고 범서(凡書)와 불법을 연구하려고 시해로 서역에 갔음을 봉곡이 알고 절에 가서 그 방문을 열고 시체를 방에 갈머두고 혹세무민하느내고 꾸짖어 화장하게 하였더니 팔일이 지난 뒤에 진묵이 돌아와서 신체가 없어졌음을 보고 공중에서 소리쳐 가로되; 3-ii) 이는 봉곡의 소위라 내가 각지방 문화의 정수를 걷우어모아 천하를 문명케 하고져 하였더니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야 헛되게 되엇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이제 나는 이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갔느니라 하시니라.

김방룡, 앞의 글, p.155.

『전경』, 권지 2장 37절.

김방룡은 『동사열전』의 추가 항목을 (6)·(7)·(8)로 표시했지만, 『전경』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본 연구의 논의 구도에 따라 (4)·(5)·(6)으로 표기한다. 김방룡, 앞의 글, pp.155-156.

범해, 『동사열전』, 김윤세 옮김 (서울: 광제원, 1992), p.151.

김방룡, 앞의 글, pp.156-157.

일반적으로 선가의 화두 전승 전통에서는 본 내용인 본칙은 바꾸지 않고 평창(評唱)과 송(頌)만 부가한다.

김기종, 앞의 글, pp.223-224 참조.

같은 글, p.249.

이일영, 「진묵대사소전(震默大師小傳)」 (서울: 보림사, 1983), p.81, “ … 名利增也 且屬靜老長 … .”

예컨대 광해군 대의 조세와 부역, 경덕궁·자수궁 건축 등은 총섭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계열이 담당하고, 병자호란 전후 남한산성·북한산성 증축과 사고 수호 등은 부휴 선수 계열에서 담당한다. Duk-Whang Kim, A History of Religions in Korea (Seoul: Daeji Moonhwa-sa, 1988), pp.215-226.

손성필, 앞의 글, pp.236-238.

박해당, 앞의 글, p.214.

박해당은 이이화의 『역사속의 한국불교』(p.311)를 인용하면서 임란 후 조선 후기 세속 권력과 유교 지식인들이 불교 교단과 승려들을 철저하게 냉대하고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박해당,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불교관 : 승려 문집의 서문을 중심으로」, 『태동고전연구』 28 (2012), pp.212-220.

金箕鍾, 「震黙祖師遺蹟攷序」, 「震黙祖師遺蹟攷」, 『韓佛全 10』, pp.876下-877上, “儒與佛道不同. 然吾儒氏往往與浮屠遊 而浮屠之從儒氏遊者 名益著 何也. 盖不同之中 或有所同而然矣. 又或古君子 有立言而許與 則藉是而名不焉. 嗚呼. 明宣兩朝間 人物蔚興有若鳳谷先生 以沙翁高弟 倡明道學 震默大師 以如來應身 修行禪敎 皆一時魁偉之人也. … 師 以出家人 奉母於近寺之地 孝養備至 及歿 爲文而哭之 甚哀. … 苟非篤於孝者 豈能如是乎. 向所謂有同於不同之中 而金先生所稱儒行者是耶. 余所以眷眷不能已也.”; 박해당, 앞의 글, p.220 참조.

박해당, 앞의 글, pp.218-222.

『震默祖師遺蹟攷』, 『韓佛全 10』, pp.879上-中, “晩節常住鳳棲寺(全州地) 去寺不遠之地 有鳳谷先生者 當時儒賢也. 嘗從先生借綱目 貯鉢囊自擔而行. 先生使人隨後覘之. 行且披閱 手一卷看了抛地 又拔一卷 手之抛地如是. 至寺門盡抛 不顧而入. 他日先生謂師曰 借書而抛於地何也. 師曰 得魚者忘. 先生遂篇擧難 無不洞悉.” 만년에 늘 (전주 지역) 봉서사에 머물렀다.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곡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당시 유가의 현인이었다. 일찍이 선생으로부터 『강목』을 빌렸는데 바랑에 넣어 메고 갔다. 선생은 사람을 시켜 뒤를 따라가 살피게끔 했다. 걸어가면서 펼쳐 읽었는데 한 권을 다 본 후 땅바닥에 내던지고 또 한 권을 꺼내 땅에 내던져 버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절(봉서사) 문에 이르렀을 때는 모두 내버려 돌아보지 않고 들어갔다. 이후 선생이 선사에게 “책을 빌려서 땅바닥에 내버린 것은 무슨 연유인지요?”라 물었다. “고기를 잡은 이는 잊는 법입니다.” 선생이 편에 따라 어려운 내용을 거론했는데 속속들이 알지 못한 바가 없었다; 이병욱이 소개하듯이, 황의동은 『동사열전』에도 『주자강목』으로 되어 있지만, 총 59권인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영당중수기」의 『강목』 70권이라는 기술에 부합하지 않는 데 비해, 『성리대전』은 70권이고 『대순전경』 기록도 이를 지지하므로 『강목』이 『성리대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전경』(공사 3장 14절)에도 『성리대전』으로 기술된다. 황의동, 앞의 글, pp.326-327; 이병욱, 앞의 글, p.160 참조.

金箕鍾, 「震默禪師遺蹟攷序」, 『震默祖師遺蹟攷』 卷上, 『韓佛全 10』, pp.876下-877上, “一日先生 使女奴餽饌 路見師望空而立. 奴致命. 師曰 汝欲有孕乎. 奴不應則師歎其福薄 而恐靈氣之妄泄 遠屏空外.…”(하루는 선생이 여종을 시켜 음식을 보냈는데 길에서 선사가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종은 명을 받들었다. 선사는 “너는 아이를 갖고 싶으냐?”라고 물었다. 종이 답하지 않자 선사는 그 복이 박함을 탄식하고 신령한 기운이 헛되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허공 밖으로 멀리 물리쳤다.)

金箕鍾, 「震默禪師遺蹟攷序」, 『震默祖師遺蹟攷』 卷上, 『韓佛全 10』, pp.876下-877上, “其生也 與之交遊 其歸也 爲之慟悼.”

金永坤, 「震默禪師遺事䟦」, 『震默祖師遺蹟攷』 卷下, 『韓佛全 10』, p.884上, “考鳳谷金先生日記有曰 聞玉師化去云 此僧墨名而儒行 不勝慟悼.”

김기종, 앞의 글, pp.242-243 참조.

완당은 1815년 30세 때 초의와 인연을 맺은 후 호남과 제주 유배기에 걸쳐 돈독한 교분을 쌓았다. 유홍준, 『완당평전 3 : 자료·해제편』 (서울: 학고재, 2002), pp.159-160 참조.

박해당, 앞의 글, pp.214-220 참조.

金箕鍾, 「震默禪師遺蹟攷序」, 『震默祖師遺蹟攷』 卷上, 『韓佛全 10』, p.877上 참조.

황의동, 앞의 글, p.325.

외도나 범부가 수행하는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과 여래선, 또는 조사선과 여래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金正喜, 󰡔阮堂先生全集󰡕 卷五, 「書牘」 與草衣[二十八-二十九], a301-106c, “震師行錄 卽不過殘膏𠟇馥. 然寸寸皆香 固不足以此盡震師. 須彌納芬子 震師亦當肯受. 前後記叙甚好 似無更加點定 又當熟看爛商 再請麈正. 二禪殺活等文 固當如是說去 何庸千藤百葛. 廓掃近日霧窟茆障 善哉善哉. 但殺活之一體一用 稍欠商量 殺活俱是用耳.…震師行迹玆以還去 依此行之 亦無妨矣. 兩叙無可刪 而原錄中頗或有可商處. 今此神精不接 無以一一點正. 此非一日之事 稍俟異日更訂亦佳 依此行之亦佳. 禪門文字有涉怪 而人之見之者 亦活看來耳.”

김명선, 앞의 글, p.72.

같은 글, p.73.

최래옥, 『한국구비전설의 연구 : 그 변이와 분포를 중심으로』 (서울: 일조각, 1984), pp.121-122.

같은 글, p.73.

같은 글, pp.72-73; 조동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설화의 변이에 주목, 설화의 역사와 역사에서의 설화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동일,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 : 영해지방 현지조사 자료의 구비문학적 분석』 (대구: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p.102.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치츠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는 김정희가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연경에서 귀국하자 조선 학계의 실사구시 학문은 500년 내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유홍준, 『완당평전 1 :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서울: 학고재, 2002), p.60.

전라금석문연구회, 「김동준묘갈」, 『탁본전시회 도록 : 제6회 전라금석문연구회 탁본전시회』 (인천: 전라금석문연구회, 2010), p.23.

손영식, 『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 (울산: UUP, 2011), p.97, p.102 참조.

『震黙祖師遺蹟攷』, 『韓佛全 10』, p.882下.

김기옥, 앞의 글, p.48.

김기종, 앞의 글, p.223; 趙秀三, 「影堂重修記」, 『震默祖師遺蹟攷』 卷下, 『韓佛全 10』, pp.882中-下.

趙秀三, 「影堂重修記」, 『震默祖師遺蹟攷』 卷下, 『韓佛全 10』, p.882中-下, “始余少而南遊 府中耆老 樂與過從 有老僧龍波璽寛 年七十餘 時時說大師遺事 而索余識之. 如曰擲鉢而雨 救海印之災也 撒鹽而雪助獵戶之餐也 莊嚴佛像 永不改金也 塡塞泉眼 莫能拔石也 被人强㗖魚羹 而開袴踞石 魚皆從尻門出 潑刺乎川中也.”

유선경, 「진묵 설화의 형성과 변용」,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5 (2018), pp.182-183.

고석훈, 앞의 글, p.44.

같은 글, p.43.

조수삼, 앞의 책, p.882下, “大凡至人之眞心實事 不相違背. 然此數事有無 不足輕重於大師. 竊恐麻姑狡獪菩薩神通 適爲吾儒之呫囁也. 且卒卒歸而未暇於筆硯 爾今余已老而再到 則故老盡矣 龍波亦西歸久矣. 其法孫完巖政耦 重修影堂 新施丹雘 來請余記其事 盖不知其祖師有成言於昔年也. 文字緣若是其深也歟. 余感龍波之宿諾 喜政耦之克紹 遂爲之記 而詳記大師之實蹟 略述古老之傳聞 使大師今在者 必許余赴蓮社 而不以多言故 去入石中也.”

조수삼은 1762년(영조 38년)생으로 젊은 시절 70여 세의 용파 선사로부터 들었다고 했으므로 늦어도 38세인 1800년 이전에 용파 선사를 만난 것으로 볼 수 있다. 趙秀三, 「影堂重修記」, 『秋齋集』 권8 참조.

김기옥, 앞의 글, p.48; 김기종, 앞의 글, p.223; 김명선, 앞의 책, p.50.

유선경, 「진묵신앙의 전개와 변용에 관한 연구」, p.66.

같은 글, p.83.

유선경, 「진묵 설화의 형성과 변용」, pp.191-194.

같은 글, p.189.

같은 글, p.198.

그밖에 ‘노모 조의씨가 세연(世緣)을 다하여 돌아가심’, ‘불거촌 유앙산 무자손천년향화부절지지 참배 인연 공덕’ ‘진묵의 열반세계’, ‘진묵조사의 열반 기일 다례법회’, ‘불거촌 유앙산 진묵조사의 탄생터에 조앙사를 세움 등이 추가되어 있다. 같은 글, pp.196-200.

『전경』, 공사 3장 15절.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구비전승에는 관련 내용이 상당수 나타난다. 김명선, 『진묵 설화 연구』 (서울: 보고사, 2007), p.93, p.97.

최래옥, 『한국구비문학대계 5–2 :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편』 (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pp.250-252; 김명선, 앞의 글, p.18; 김기옥, 앞의 글, p.29.

김명선, 앞의 글, p.21.

같은 글, p.21.

김명선, 앞의 책, pp.82-83.

『전경』, 권지 1장 11절.

서대석, 『조선조문헌설화집요(朝鮮朝文獻說話輯要) I』 (서울: 집문당, 1991), p.670.

최래옥, 『한국구비문학대계 5-1 : 전라북도 남원군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pp.203-204.

『전경』, 예시 73절.

김용흠·원재린·김정신 역주, 『동남소사(東南小史)』 (서울: 혜안, 2021), p.64, pp.85-93, p.262.

『전경』, 공사 3장 18절.

같은 책, 공사 3장 22절.

같은 책, 제생 9절.

서대석, 앞의 책, pp.669-671.

『전경』, 공사 1장 1절, “시속에 말하는 개벽장은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비겁에 쌓인 신명과 창생을 건지는 개벽장(開闢長)을 말함이니라 … .”; 교운 1장 7절, “ …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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