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의 의미 재검토

차선근1,*
Seon-keun Cha1,*
1대진대학교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Daesoon Studies, Daejin University

© Copyright 2022,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l 07, 2022 ; Revised: Sep 02, 2022 ; Accepted: Sep 14, 2022

Published Online: Sep 30, 2022

국문요약

이 글은 대순진리회 도장에서 개최되는 치성 의례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그 정체성을 읽은 것이다.

첫째, 기존의 연구들은 대순진리회 치성이 회생 또는 도통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발원함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 글은 치성의 주된 목적이 거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대순진리회의 1차 자료는 치성을 신들에게 올리는 경축ㆍ기념ㆍ감사ㆍ찬양ㆍ고유ㆍ사죄이며, 신앙인들의 굳건한 믿음[誠信]의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종류의 치성을 연행하는 목적도 그 의미가 신을 향한 기도나 발원보다는, 특정한 의사를 전달하는 소통과 교환에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한국 의례사에서 볼 때, 대순진리회의 치성은 유교의 제사나 환구제와 비교하면 그들과 다른 차이가 상당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제사나 환구제의 입장에서는 대순진리회 치성이 매우 이질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순진리회 치성의 정체성은 한국의 종교문화 전통을 계승했거나 변용한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새롭게 발명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대순진리회 치성은 ‘발명된 천제’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determine the significance of the devotional offerings held in Daesoon Jinrihoe Temple Complexes (道場 dojang) and to interpret their identity.

Firstly, the existing research insists that the significance of these rituals implies that offerings held by Daesoon Jinrihoe embody the order’s religious purpose. However, this paper argues that the purpose of devotional offerings is not limited thereto. The reason is that the primary sources of Daesoon Jinrihoe defines the devotional offerings as practiced for purposes of worship, celebration, commemoration, the expression of gratitude, the dissemination of information, and to humbly beg pardon from divine beings. Additionally, the offerings are meant to express the solid faith of devotees. Considering the various purposes of practicing devotional offerings, rather than mostly being about prayer to divine beings, the meaning of the offerings could be better understood as forms of communication and exchange of unique ideas and intentions.

Secondly, in the light of Korea’s history of rituals, the devotional offerings of Daesoon Jinrihoe obviously differ from the rituals of Confucianism or the ritual for Heaven and Earth (圜丘祭 hwanguje). Indeed, the rituals of Daesoon Jinrihoe are rather alien to both of the aforementioned rituals. Accordingly, the identity of the devotional offerings in Daesoon Jinrihoe do neither succeed to the religious and cultural tradition of Korea nor transform it. It is rather the case that Daesoon Jinrihoe’s devotional offerings should be identified as having been newly invented. In this regard, the devotional offerings of Daesoon Jinrihoe should be understood as an invented tradition that began in modern times. In other words, they are ‘invented rituals to Heaven.’

Keywords: 의례; 치성; 희생제의; 천제; 환구제; 발명된 천제
Keywords: rituals; devotional offerings; sacrificial rituals; rituals to Heaven; rituals for Heaven and Earth; invented rituals to Heaven

Ⅰ. 여는 글

치성(致誠)은 대순진리회의 종교의례 가운데 하나다. 대순진리회 수도인이 종단의 규정을 위반하면 징계가 내려지는데, 그 하나는 일정 기간 치성 참여가 금지되는 것이다.1) 이 사실은 대순진리회에서 치성의 위상이 높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치성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으며 대순진리회 도인에게 어떤 가치를 느끼게 하는가? 이 글은 치성의 의미를 묻는 이 물음에 나름의 답변을 찾음을 목적으로 한다. 현대 의례학의 연구 경향이 의례의 외형보다 내적인 의미를 찾는 데 있음을 고려하면, 치성의 의미를 캐묻는 이 작업은 대순진리회 의례 연구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제로 한 선행 연구는 당연히 존재한다. 글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그들에 대한 소개와 평가, 그리고 그들과 차별되는 이 글만의 주장은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이 글은 치성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두 가지 접근 경로를 밟고자 한다. 첫째는 치성을 소개하는 1차 자료를 확인하고 그 정의와 종류를 다시 읽음으로써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Ⅱ장). 둘째는 치성의 정체성을 조명함으로써 치성이 갖는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전통 종교문화와의 관련성을 점검하고 치성과 유교 제사를 비교하며, 한국 제천 의례사 속에서 치성과 환구제(圜丘祭 = 圓丘祭)2)를 비교함으로써 치성의 좌표점을 확인하고자 한다(Ⅲ장).

글을 시작하기 전에, 대순진리회의 치성에는 지방에서 행해지는 개관치성(開館致誠)ㆍ납평치성(臘平致誠)ㆍ입도치성(入道致誠)도 있지만3) 이 글은 도장에서 행해지는 치성을 서술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 그리고 대순진리회 역사에서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 1917~1996, 이하 우당으로 표기함)이 종통을 계승한 이후에 열렸던/열리는 치성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전자는 지방 치성이 도장 치성에 거의 준한다는 이유 때문이고, 후자는 우당 이전 대순진리회의 교조였던 강증산(姜甑山)과 조정산(趙鼎山)이 행한 치성들은 현재의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과 그 결이 반드시 같다고만 단정하기는 어려우므로 도장 치성 연구와는 다른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Ⅱ. 치성의 정의와 종류 다시 읽기

1. 치성의 의미는 발원(發願)인가?

치성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물음의 첫 답변은 장병길(1976)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증산의 천지공사에 보이는 여러 의례, 이를테면 신명을 부르는 의례, 한재(旱災)를 없애는 의례, 해원 의례, 세상의 운[世運]을 돌리는 의례, 입문(入門)ㆍ심고(心告)ㆍ식고(食告)ㆍ고사(告祀)를 차례로 소개한 후 대순진리회의 치성 의식을 설명했다.4) 주목할 부분은 그가 입도 의식은 성역에 들어가는 의미, 기도 의식은 신앙의 대상에게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의미라고 해석하면서, 치성 의식은 본래의 나로 회복하는 회생(回生)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 데 있다.5) 그러니까 장병길은 ① 입도[시작]ㆍ② 기도[진행]ㆍ③ 치성[도달]을 순차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치성이 지니는 의미는 수도의 완결성을 갖추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치성의 의미를 살핀 두 번째 답변은 장병길 이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이경원(2009)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그는 먼저 치성 의례가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희생제의 성격을 띤다고 파악한다. 이어서 독일 인류학자 요제프 헤닝어(Joseph Henninger, 1906~1991)가 희생제의 형태론(Morphology of Sacrifice)에서 제시했던 희생제의 여섯 가지 공통 요소들인 ① 제의 연행자, ② 제물, ③ 의례 행위, ④ 제의 장소와 시간, ⑤ 제의 대상, ⑥ 제의 의도6)에 맞추어 치성 항목을 구성한 후(① 참례자, ② 치성물, ③ 의례 행위, ④ 시간과 공간, ⑤ 치성 대상, ⑥ 치성의 의도) 그 각각을 기술했다.7) 그 내용은 민족지(民族誌)와 같은 성격의 의례지(儀禮誌)로 볼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⑥ 치성의 의도 항목이다. 이경원은 치성 참석자들이 봉축주ㆍ태을주ㆍ기도주ㆍ도통주를 읽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치성 의도가 ‘찬양ㆍ감사ㆍ속죄보다는 도통을 기원함’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치성은 인간의 종교적 목적 달성에 그 궁극적 목적이 있고, 그것이 치성의 의의라고 결론짓는다.8) 이 해석에는 본연의 나를 회복함[回生]이 치성이라고 이해했던 장병길의 그것과 유사한 맥락이 담겼다.

치성 때 도통주를 읽음으로써 도통을 발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도통 발원을 치성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대순진리회는 초강식(初降式)과 합강식(合降式)이라고 하는 종교의례를 행할 때도 치성 때처럼 같은 주문을 같은 방식으로 읽는다.9) 도통주 봉송에 근거하여 치성의 의도와 의미를 도통 발원으로 파악하겠다면, 초강식과 합강식 역시 그러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초강식ㆍ합강식과는 구분되는 치성만의 고유한 의도와 의미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치성은 다양한 제물을 올리면서 수많은 수도인이 참가하여 밤을 지새우는 행사이지만, 초강식ㆍ합강식은 제물을 필요치 않고 정해진 소수의 수도인만 짧은 시간에 참가하는 행사다. 두 행사의 성격이 다르다면, 그 의미도 ‘반드시’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치성의 의미를 도통 발원 외에 별도로 더 추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도통주를 읽는 초강식과 합강식도 그 본질적 의미를 도통 발원에 두고 있지 않다. 우당이 대순진리회 임원들에게 가르치기를, 수도인들이 초강식과 합강식을 할 때 도통을 발원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실제로는 포덕천하와 창생 구제의 뜻을 발원해야 옳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전한다. 도통주를 읽는 행위는 도통 발원을 하는 것이지만, 그 참된 의미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치성 때 도통주를 읽는다고 해서 도통 발원을 그 의미로 단정하면 안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행 연구는 치성의 의미가 회생 또는 도통을 기원함이라고 볼 뿐이고 찬양ㆍ감사ㆍ속죄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성의 의미는 발원에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찬양ㆍ감사[謝恩]에 있다. 그리고 고유(告由)와 사죄(赦罪)에도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치성의 정의부터 다시 읽도록 한다.

2. 치성의 정의가 말해주는 의미

‘치성’을 문자 그대로 읽자면 정성[誠]을 지극히 들인다[致]는 뜻이다. 한국에서 치성은 하나의 의례를 의미한다. 같은 한자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치성이 의례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의례로 정의되는 치성은 사찰이나 민가에서 쌀밥이나 정화수 같은 제물을 간단하게 차려놓고 산신ㆍ칠성신 등의 일월성신과 천지신명에게 발원하는 행위를 일컬어왔다.10) 무속에서도 굿보다 규모가 작게 조그만 상을 차려놓고 소원 성취를 비는 의례를 치성이라고 한다. 산에 가서 치성을 드리면 산치성, 강가에 가서 치성을 드리면 물치성으로 부르는데, 그 목적에 따라 득남을 발원하는 기자(祈子) 치성, 무사 출산을 위해 비는 삼신맞이 점심치성, 삼재를 막는 삼재풀이 치성, 칠석을 기념하는 칠석맞이 치성, 추수 감사제 성격의 햇곡맞이 치성, 동지에 기양을 염원하는 동지 치성 등 다양한 종류의 치성이 있다.11) 무속 치성의 목적은 ‘맞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행복과 축제의 기쁜 영접’에도 있으나, 더 본질적인 기능은 사찰ㆍ민가 치성과 마찬가지로 신령에게 인간의 소망을 전달하는 ‘청탁’에 있다.12)

대순진리회의 치성도 제물을 차려놓고 신을 대접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순진리회 치성을 사찰ㆍ무속ㆍ민간의 전통 치성과 같이 발원이나 청원을 목적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순진리회 치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회생이나 도통 등 무언가를 발원한다고 하더라도, 치성의 본래 의미를 거기에서 찾는 관점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대순진리회 치성의 정의 때문이다.

대순진리회의 치성을 최초로 소개한 1차 자료는 우당이 부산 감천에서 태극도를 이끌고 있을 때 출판된 『규정』(1963)이다. 이 자료는 “치성의식(致誠儀式)은 본도(本道)의 경축일을 기념하고 도인으로서의 성신(誠信)을 표현하기 위하여 거행한다.”고 정의하면서, 그 날짜ㆍ시간ㆍ장소ㆍ순서ㆍ진설(陳設)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13)

『규정』은 1969년 서울 중곡동 도장 창건 후 『의식(儀式)』으로 개편되어 재발행되었다. 『의식』은 서지(書誌)가 불완전하여 그 출판 시기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성재일지(醒齋日誌)』14)가 『의식』과 『주문(呪文)』의 원안(原案)이 1972년 2월 22일에 작성되어 같은 해 3월 28일 각 방면에 배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의식』은 1972년에 재간행되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의식』은 1980년 말까지 두 차례 더 개정되었는데 그 각각의 시기는 알 수 없고, 마지막 개정판에서 주문은 『의식』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책자로 만들어졌다. 이 3판의 『의식』은 대순진리회의 의식을 ① 입도(入道, 입회), ② 기도, ③ 치성, ④ 일반 행사, ⑤ 혼상제례로 구분하고, 입도 의식은 신입 도인으로 가입하는 의례, 기도 의식은 종단의 목적(도통과 개벽)15) 달성을 위하여 신앙의 대상인 상제에게 기원하는 의례, 치성 의식은 정기 경축일을 기념하는 의례, 일반 행사의식은 국기 경례와 국궁(鞠躬: 도장을 향해 올리는 약식 인사)에 이어 훈회와 수칙을 낭독하는 의례, 혼상제례 의식은 결혼ㆍ장례ㆍ제사의 의례로 각각 정의하고 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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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대순진리회 치성을 소개한 자료인 『규정』(1963)과 『의식』(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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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치성의 1차 자료인 『규정』과 『의식』에서 보면, 발원을 목적으로 하는 의례는 치성이 아니라 기도다. 종단의 중요한 사건이나 시간을 경축하고 기념하며 성신(誠信)을 표현하는 의례는 치성이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치성의 의의는 발원보다 경축이나 기념에 있다고 말해야 옳다. 경축과 기념은 선행 연구가 관심 삼지 않았던 바로 그 찬양과 감사를 의미한다. 치성 때 참여자들이 회생이나 도통 등의 종교적 목적을 발원할 수도 있겠으나, 치성의 정의에 근거한다면 그런 발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차원의 부수적인 것으로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3. 치성의 종류가 말해주는 의미
1) 정기(定期) 치성

대순진리회 치성의 의미가 경축과 기념에 있다면 무엇을 경축하고 무엇을 기념하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치성의 종류를 검토해야 한다. 이를 정리한 자료들은 여럿인데 비교적 최근의 『대순회보』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표 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17)

표 1. 도장 치성의 종류
1월 2월 3월 4월
음력 치성 1일 원단
15일 대보름
10일 도주
감오 득도18)
6일 도주 화천 28일 도주
봉천명19)
5월 6월 7월 8월
24일 중곡도장 영대 봉안20) 24일 구천상제 화천 15일 중추
9월 10월 11월 12월
9일 중양절
19일 구천상제 강세
25일 여주도장 영대 봉안 4일 도주 탄강
13일 토성도장 영대 봉안
양력 치성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4일경 입춘 6일경 입하 22일경 하지 8일경 입추 8일경 입동 22일경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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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성들은 음력 혹은 양력 날짜에 따라 주기적으로 열리는 정기(定期) 의례다. 이들은 그 내용을 기준으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대순진리회 신앙 영역을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서, 신앙 대상인 구천상제의 강세와 화천, 증산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한 도주 조정산의 탄강ㆍ봉천명(奉天命)ㆍ득도ㆍ화천ㆍ강세, 그리고 도장의 영대에 구천상제의 진영(眞影)을 봉안함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치성이다.

둘째는 설날ㆍ정월 대보름ㆍ추석 명절과 사립이지(四立二至: 입춘ㆍ입하ㆍ입추ㆍ입동ㆍ하지ㆍ동지)를 경축하고 기념하는 치성이다. 절기에 치성을 모시는 이유는 만물이 나고 자라는 법칙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는 점에서,21) 이 절기 치성들은 대순진리회가 절기에 따르는 우주의 운행 법칙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중양절(重陽節) 치성이다. 중양절은 종단의 중요 기념일 혹은 우주의 운행 질서를 직접 표현하는 날이 아니다. 그에도 불구하고 이날에 치성을 올리는 것은 기일을 모르는 조상, 객사한 자, 연고자 없이 죽은 자, 전염병으로 죽은 자를 원혼(冤魂)으로 인식하고 이들을 중양절에 제향하여 위무해왔던 한국만의 독특한 전통 중양절 풍습과 관련이 있다. 근대 이후 한국에서 이런 중양절 풍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대순진리회는 이날 원혼을 위무한다는 목적에서 치성을 올린다. 원혼 위무, 즉 원한을 풀어준다는 해원(解冤)은 대순진리회의 핵심 사상에 속한다. 그러므로 중양절 치성은 대순진리회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의례다.22)

첫째와 둘째 분류의 치성은 경축과 기념, 그리고 거기에 신앙의 대상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성신(誠信)의 표현을 목적으로 삼음이 분명해 보인다. 셋째 중양절 치성은 그 의도를 경사스러운 일을 기념한다거나 무언가를 기념한다거나 하기보다는, 감사함의 표현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이 치성의 의도는 앞서 말한 대로 기일을 모르거나 객사하여 구천을 떠도는 원혼 등을 위무하는 데 있지만, 치성의 대상은 그 원혼들이 아니다. 중양절 치성은 제주 수련도장의 영대에서만 이루어지고23) 치성 대상은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를 포함하는 천지의 신명들이다. 이것은 치성에서 구천을 떠도는 원혼을 위무하고 해원하는 주체가 치성 참여자가 아니라 구천상제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객사한 자와 같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을 위무하기 위해 인간이 제물을 차려놓고 그들을 위한 의례를 여는 게 아니라, 우주의 최고신[解冤神] 구천상제가 원혼을 직접 위로하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니 그로써 세상에 원한이 사라지고 재앙과 탈이 없는 평화가 도래한다고 믿고, 그 믿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여는 의례가 바로 중양절 치성이다.

정리하자면, 대순진리회의 정기적인 치성은 그 내용으로 볼 때 감사를 표하는 성신(誠信)의 표현이면서 경축ㆍ기념ㆍ감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례 개념을 재정립한 것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캐서린 벨(Catherine Bell, 1953~2008)은 의례를 ① 통과 의례, ② 달력과 기념 의례, ③ (신 또는 신들과의)교환과 교제 의례, ④ 재난 의례, ⑤ 향연과 단식과 축제의 의례, ⑥ 정치 의례로 분류한 바 있는데,24) 이에 따른다면 <표 1>의 치성은 ② 달력과 기념 의례이면서 ③ (신 또는 신들과의) 교환과 교제 의례에도 해당한다.

2) 비정기(非定期) 치성

대순진리회 정기 치성은 현재 시점에서 참여관찰이 가능하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에는 우당 재세 시에 비정기적으로 열렸던 치성들이 몇몇 있다. 특별한 목적 속에서 열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치성들은 지금은 대부분 행해지지 않아 참여관찰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치성들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치성이 왜 개최되는지, 그래서 치성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더욱 잘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록이 부재하거나, 혹은 소실된 관계로 비정기 치성 전부를 파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면 1969년 7월 21일 인간이 처음 달을 밟았을 때 미시(未時)에 치성을 올렸다거나,25) 1980년대 후반 또는 1990년대 초반에 말복(末伏) 치성이 거행되었다거나,26) 1992년 3월 5일에 경칩 치성이 있었다거나 하는 기억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치성들은 일단 이 글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또한 전각을 새로 건설하거나 개축한 후 구천상제를 봉안할 때는 반드시 치성을 모시는데, 그 치성들은 대개 도장의 봉안 치성과 겹치고 해당 장소에서 별도로 시행된다. 예를 들자면 1988년 여주도장 수강원(授講院) 건물을 수강전(受降展)으로 개축하면서 그해 음력 10월 25일에 구천상제의 진영을 봉안했는데, 이날은 여주도장의 봉안 치성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같은 날 봉안 치성은 두 군데서 진행되었다.27) 이런 봉안 치성의 목적과 의미는 정기적인 도장 봉안 치성과 같이 경축ㆍ기념ㆍ감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게 분명하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 치성들을 제외하고 현재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자료들로만 한정하여 비정기적인 치성을 정리한 결과는 <표 2>와 같다.

표 2. 우당 재세 시 시행되었던 비정기 도장 치성 사례들
날 짜 치성 내용 치성 의도 치성 장소 치성 시간
(음) 1972. 2.14 대순진리회 임원 개편 신규 임명자 사은(謝恩) 치성 고유, 감사 중곡도장 ?
(음) 1984. 3.28 성궤(聖櫃)를 되찾음을 구천상제에게 고한 치성 고유, 감사, 사죄 중곡도장 01:00
(양) 1987. 1. 3 여주도장 48장 봉안 고유, 감사 여주도장 17:00
(양) 1987. 6.16 청계탑 건립 기초 치성 고유, 감사 여주도장 08:00
(양) 1988. 9.10 여주도장 수강전에서 치성 고유(수련공부) 여주도장 16:00
(양) 1990.11.25 여주도장 수강전에서 치성 고유(수련공부) 여주도장 06:20
(양) 1993. 3. 5 경칩 치성 찬양, 기념 고유, 감사 포천도장 22:43
(양) 1993. 4. 5 청명 치성 여주본부도장 03:37
(양) 1993. 7.15 파석(破席) 치성 (순감 공부) 여주본부도장 ?
(양) 1994. 3. 6 경칩 치성 여주본부도장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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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를 짧게 살펴보도록 한다. 대순진리회 임원 개편 신규 임명자 사은 치성(음력 1972. 2. 14)이란, 우당이 종단 대순진리회의 조직을 개편하면서 임원의 직제를 다시 정했을 때 새로 임원 임명장을 받은 55명의 수도인들이 구천상제에게 사은하는 치성이었다. 임원직 개편과 임명은 그해 설날(음력 1972. 1.1 )에 이미 있었고, 사은 치성은 한 달여 후에 있었다.28) 이 치성은 단 한 차례만 열렸고, 이후로는 수도인들이 새로 임원으로 임명되어도 사은 치성을 모신 적이 없었다.

성궤를 되찾음을 구천상제에게 고했던 치성(음력 1984. 3. 28)도 단 한 번만 시행되었다. 증산은 천지공사를 시행할 때 둔궤(遁櫃)를 하나 만든 일이 있었는데, 이 궤 속에는 천지 도수의 조화를 담은 신비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믿어졌다. 도주 정산은 증산의 여동생인 선돌부인의 권유에 따라 이 둔궤를 찾아와서 모종의 종교 행위를 하고 보관하고 있다가 도적을 맞아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우당이 그 둔궤를 되찾아 중곡도장에 안치하였으니, 이 사실을 구천상제에게 고하고[告由], 또 그것에 감사하며 궤를 뒤늦게 찾은 데 대한 사죄29)를 담아 올린 의례가 이 치성이었다. 치성 후 이 둔궤는 성궤(聖櫃)로 명칭이 바뀌었다.30)

여주도장 영대에 48장(48명의 神將)을 봉안함을 구천상제에게 고하고 감사하는 치성(양력 1987. 1. 3)도 열렸다.31) 48장은 구천상제를 측근에서 호위하는 신명이라고 추정된다.32) 특이한 것은 이 치성의 시간인데, 통상적인 축시(새벽 1시)가 아니라 오후 5시였다. 이것은 우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여주도장에 청계탑(靑鷄塔)을 건립하는 사실을 고하고 감사하는 치성(양력 1987. 6. 16)도 있었다.33) 청계탑은 득도(得道)와 성도(成道)를 상징하는 심우도(尋牛圖)를 비롯하여 사방(四方)ㆍ사시(四時)ㆍ12방(方)ㆍ12월ㆍ24절후ㆍ28수ㆍ9천 등 대순진리회의 세계관을 상징화한 건축물인데, 여주도장에만 존재한다. 이 치성 시간은 다른 치성과 달리 아침 8시에 열렸다.

양력 1988년 9월 10일(음력 7월 30일)에는 여주도장 수강전(지금의 봉강전 3층)에서 치성이 거행되었다. 이 치성 직후 수강전 수련반의 공부실을 이전(지금의 대순성전 자리)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34) 이 치성에는 수도인의 수련 상황을 상제에게 보고하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력 1990년 11월 25일(음력 10월 9일)에는 여주도장 수강전(지금의 대순성전 자리)에서 치성이 거행되었다.35) 이 치성이 열리기 며칠 전인 11월 20일에 수련 342반이 수련을 위해 입소하였고, 그 후 수련이 중단되었다가 약 두 달 뒤에 지금의 봉강전으로 자리를 옮겨 수련이 재개되어 1991년 1월 18일(음력 12월 3일)에 수련 343반이 입소했던 사실로 보아, 이 치성도 수련 공부실 이전을 상제에게 보고하기 위함인 것으로 판단된다.

경칩 치성은 적어도 기록만으로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두 차례 열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36) 경칩은 24절기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치성은 천지의 운행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경축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24절기 가운데 사립이지에는 정기적으로 치성을 열지만 다른 절기에는 치성을 올리지 않는데, 유독 경칩에만 치성을 열었던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37) 경칩 치성은 우당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일로서 그 사유가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경칩일은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 증산이 천지공사를 보면서 고부 화액(禍厄)을 겪고 풀려난 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38) 경칩 치성은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어떤 노고도 마다하지 않는 상제에게 감사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청명 치성39)은 우당의 지시로 1993년 오직 한 차례만 열렸다. 우당은 이 치성을 올리는 이유가 순감(巡鑑)들이 공부를 시작함에 있다고 말했다.40) 순감이란 대순진리회에서 수도인들 가운데 특정 인원을 선발하여 특별수련(공부)을 시킨 사람들을 일컫는다.41) 그러니까 우당은 특별수련을 시작함을 구천상제에게 고하고 감사를 표하는 치성을 청명일에 올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명 치성은 경축과 기념의 절기 치성이면서 동시에 고유(告由)의 치성이기도 하다. 한편, 청명 치성 후에 순감들의 특별수련이 100일 동안 실시되었고 그것을 무사히 마침을 고하며 감사하는 치성이 1993년 7월 15일에 열렸는데 이를 파석치성(破席致誠)이라고 한다.42)

이상의 사실들을 정리하자면,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에는 비정기적으로 열렸던 것들도 있었다.43) 그 치성의 시행은 우당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표 2>에 정리한 대로 그 치성들은 고유와 감사 혹은 사죄를 목적으로 했다. 특히 수련과 관련된 일의 변동 사항이 있을 경우 그것을 고[告由]하는 치성이 종종 열렸다. 그렇다면 비정기 치성 역시 정기 치성과 마찬가지로 (신 또는 신들과의)교환과 교제 의례에 해당한다. 교환과 교제 의례는 대개 희생 의례로 설명된다. 희생 의례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44) 이 가운데 치성은 나를 대신하여 제물로 올린다거나[substitutions], 폭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숨긴다거나, 중요한 사건을 재현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라, 초월적 존재와 소통하며 감사를 표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우당 재세 시에는 정기 치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행 시간이 반드시 축시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여주도장 총무부 『업무일지(1994년)』에 의하면, 이해의 중곡도장 영대 봉안치성(음력 5. 24)은 아침 6시, 중양절 치성(음력 9. 9)은 아침 7시였다. 심지어 중추절 치성(음력 8. 15)도 아침 6시로 기록되어 있다. 『업무일지(1987년)』도 1987년 입하치성(양력 5. 6)이 입절 시각인 10시 6분이 아니라 13시(未時)에, 봉천명 치성도 아침 6시에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업무일지에 부분적으로 오기(誤記)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사례들 전부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현재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의 거행 시간은 축시 또는 입절 시각이지만, 우당 재세 시에는 반드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Ⅲ. 치성의 정체성 확인하기

앞 장에서 대순진리회 치성의 정의와 종류를 다시 읽음으로써, 그 의미는 회생이나 도통 등 인간의 소망을 발원하는 데에도 있다고 하겠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경축과 기념, 감사, 찬양, 고유, 사죄, 굳건한 믿음[誠信]의 표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장에서는 한국의 의례사에서 치성이 갖는 위치와 정체성을 조명함으로써 살필 수 있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1. 치성은 전통 의례를 계승ㆍ종합했는가?
1) 치성, 그리고 유불도와 민간신앙의 의례

한국 의례사에서 치성은 전통 종교 의례들과 어떻게 대조되는가? 이 물음에는 대순진리회의 치성이 전통을 계승하기도 했고, 새로 창조하기도 했다는 선행 연구의 답변이 존재한다.45)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기에 검토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시간이 더 흐른 뒤인 2016년에 다시 논의되었다. 그때의 논의에서 선행 연구자들은 대순진리회를 포함하는 증산계 종교 개별 교단들의 의례를 조사하고, 그 의례에는 유불도와 민간신앙의 전통 종교문화를 계승ㆍ종합한 측면과 새로 창조한 측면이 동시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러니까 증산계 종교 치성은 관(冠)을 쓰고 기일을 맞추거나 치성물의 위치를 정하는 등의 형식과 절차에서 유교를, 염불하거나 범종을 치는 행위에서 불교를, 신과 통하기 위해 경을 소지하거나 암송하며 부적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도교를, 삼신을 숭배하거나 풍수를 활용하는 사례에서 민간신앙을 각각 계승했다고 한다.46) 또한 여성 지위의 상승을 보여주는 점, 인존(人尊)과 인간 중심사상을 드러내는 점, 치성 장소를 세계의 중심인 동시에 후천 문명의 중심으로 주장한다는 점은 창조적인 면모라고 말한다.47)

이들의 연구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치성 시 관(冠)을 쓴다는 점, 치성 날짜가 기일(忌日) 중심이라는 점, 증산법종교에서 선령신과 선배 도인을 향한 향사에 유족이 참여한다는 점을 근거로 증산교 치성이 유교 전통을 계승했다는 주장48)은 재고의 여지가 크다. 증산계 종교의 치성은 교조의 기일만이 아니라 생일, 각 교단의 중요 사건 기념일, 설ㆍ추석 같은 명절이나 절기 등에 거행된다는 점, 교조의 생일을 탄강이나 강세로 신성화하여 올리는 치성의 위상도 기일 치성의 위상보다 낮지 않다는 점, 기일 치성은 많은 치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은 증산계 치성이 기일을 중심으로 하는 의례라고 말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치성 때 관을 쓰기도 하지만 쓰지 않기도 한다는 점,49) 유족이 치성에 참여하는 교단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까지 더 고려하면, 이들이 유교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들은 타당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한정된 몇몇 사례는 증산교 치성이 유교 전통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둘째, 증산법종교가 치성을 올릴 때 염불하는 모습을 두고 증산계 종교가 불교적인 특성을 보인다고 기술하는 것도50) 문제가 있다. 증산계 종교 가운데, 치성 때 염불하는 교단은 증산법종교가 거의 유일하다. 이런 단 하나의 교단 사례로써 증산계 전체의 특성을 단정 짓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증산법종교만 치성 때 염불을 한다면, 증산계 교단들은 치성 때 대부분 염불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염불하지 않는 증산계 종교는 오히려 불교의 특성을 갖지 않는다고 기술하는 게 더 옳다.

증산계 교단들이 범종을 사용하는 모습을 두고 불교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51) 문제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 종은 범종 모양으로 제작되어왔고, 그 기술 전통 속에서 현대의 종이 범종 또는 범종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범종을 소유한다는 사실만으로 불교 전통의 계승이라고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된다. 그 소유 의도와 타종 목적을 더 확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대의 지자체도 범종을 제작ㆍ소유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지역 홍보나 관광객 유치가 주된 목적일 뿐이고 불교를 계승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보신각 타종도 마찬가지다. 조선 건국 직후 만들어진 보신각은 불교의 유물이나, 현대 한국에서 보신각 타종은 새해맞이 또는 국가 경축을 위해 사용될 뿐이다. 현대 보신각의 타종을 두고 불교 전통을 계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증산계 종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증산계 교단들이 범종과 유사한 종들을 만들어 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부처의 덕이나 법문을 전하는 불교 신앙을 담은 게 아니라면, 범종의 소유와 타종이라는 외형적 모습만으로 불교적이라거나 불교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증산교 치성 때 경을 소지하거나 올리는 모습이 도교적이라는 주장도52) 재고되어야 한다. 경을 소지하고 올리는 증산계 교단도 일부인데다가, 유교 의례나 불교 의례에서도 경과 유사한 축문을 소지하거나 읽고 소각하기 때문이다. 치성 때 부적을 활용하는 사례를 두고 도교적이라고 단정하는 것53) 역시 적절하지 않다. 부적(talisman)은 세계종교사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종교 물품으로서 도교의 발명품이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도교에서만 사용되는 도교 특유의 부적이 치성 때 사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넷째, 삼신을 숭배하거나 풍수를 활용하는 것을 근거로 증산교 치성이 민간신앙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삼덕교가 여성을 초헌관으로 두는 단 하나의 교단 사례를 근거로 들면서 증산교 치성은 여성 해원을 보인다고 일반화하는 것54)도 바르지 않다. 삼신 숭배, 풍수 중시, 여성 초헌관 사례는 일부 교단에서 발견되는 사례일 뿐이며, 증산계 교단들의 공통된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증산계 종교의 치성에는 유불도와 민간신앙의 의례를 회통하고 원융하면서 계승하기도 하고 창조적인 면모도 있다고 한 선행 연구의 주장은 매우 부실한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 한두 교단의 특수 사례를 모자이크처럼 잘라 붙여서 증산계 종교의 전체 외형을 묘사하고자 한 이 선행 연구는 ‘전체-부분의 오류’ 또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결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55) 비유를 들자면 이들의 기술은, 코끼리는 코가 길고 기린은 목이 길고 토끼는 귀가 길다는 점을 들어 포유류는 코와 목과 귀가 모두 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포유류 가운데 이런 모습을 한 동물은 없으므로 이런 말은 포유류의 외모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단 한 종류의 포유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이 같은 오류를 안은 기술은 증산계 교단 전체의 공통 특징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증산계 특정 교단 하나의 특징을 짚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을 대순진리회의 치성 이해에 옮겨올 수 없다.

2) 치성과 유교 제사의 형식 비교

대순진리회 치성이 전통 종교문화와 무관한 건 아니다. 우당이 치성을 두고 제사라고 말한 바 있고,56) 한국에서 제사는 개별 종교 전통마다 각자의 절차와 형식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57) 불교나 도교의 의례가 치성에 미친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그러면 치성은 유교 제사와 어떻게 비교되는가?

유교의 제사는 이재(李縡, 1678~1746)가 지은 『사례편람(四禮便覽)』, 그것을 1900년에 황필수와 지송욱이 증보한 『사례편람』에 자세하다. 유교 의례의 표본은 『주자가례』이나 한국 실정에 맞지 않고 세부 지침도 결여되 미완성의 저술[未成之書]로 여겨졌다. 이를 대신하여 만들어진 『사례편람』은 한국 유교식 관혼상제의 참고서이자 지침 역할을 해왔다.58) 여기에는 사시제(四時祭: 사철 제사), 예제(禰祭: 부친 사당 제사), 기일제(忌日祭: 기제사), 묘제(墓祭)의 순서가 소개되어 있다.59) 그것을 정리하여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 순서60)와 비교하여 나열한 결과가 <표 3>이다.

표 3. 대순진리회 치성과 조선 후기 유교 제사의 순서 비교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 순서 유교 제사 순서
① 진설(陳設)
② 일동 정렬 취석면수(取席俛首: 고개를 숙이고 시립함), 분향(焚香)
③ 봉헌관(奉獻官) 배례, 타고(打鼓) 15회
④ 초헌정저(初獻正箸)
⑤ 일동 배례
⑥ 아헌정저(亞獻正箸)
개기(開器)ㆍ삽시(揷匙: 수저를 메의 중앙에 꽂음)
⑦ 봉헌관 배례
⑧ 삼헌정저(三獻正箸)
⑨ 일동 배례
⑩ 일동 부복(俯伏), 고유(告諭), 봉헌관 주문 낭독, 타고 15회
⑪ 일동 흥(興)
⑫ 일동 법좌(法坐), 태을주ㆍ기도주ㆍ도통주 각 4독(讀), 타고 15회
⑬ 일동 흥
⑭ 퇴갱(退羹)ㆍ반개(半蓋)
⑮ 일동 부복, 유식(侑食)
⑯ 일동 흥, 하시(下匙)ㆍ합개(合蓋)
⑰ 일동 배례, 예필국궁(禮畢鞠躬)ㆍ퇴(退)
⑱ 철상(撤床)ㆍ음복
① 진설(陳設)
② 출주(出主: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옴)
③ 참신(參神: 신을 맞이하는 절을 함)
④ 강신(降神: 분향하고 술을 올린 후 배례함)
⑤ 진찬(進饌: 국과 밥 등을 올림)
⑥ 초헌(初獻), 축문 낭독
⑦ 아헌(亞獻)
⑧ 종헌(終獻)
⑨ 유식(侑食: 음식을 권함)
⑩ 합문(闔門: 문을 닫고 나가 흠향하기를 기다림)
⑪ 계문(啓門: 문을 열고 들어가 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림)
⑫ 수조(受胙: 주인이 제물을 받아 음복함)
⑬ 사신(辭神: 신을 보내는 절을 함)
⑭ 납주(納主: 신주를 사당으로 다시 모심)
⑮ 철(撤: 음식을 물림), 준(餕: 참여자가 음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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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의하면, 술을 ‘세 차례’ 올린다는 점(초헌ㆍ아헌ㆍ삼헌 또는 종헌), 신의 흠향을 기다린다는 점(유식)에서 두 의례는 같다. 또한 신의 흠향을 기다리는 동안, 유교 제사의 참여자는 문을 열고 밖에서 기다리며(합문), 치성 참여자들은 밖에 나가지 않고 부복하여 기다린다는 점에서도 두 의례는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유교 제사는 사당에서 신주를 가져왔다가[出主] 되돌려 놓으나[納主] 치성에는 그런 게 없다는 점, 치성은 타고(打鼓)를 하고 참여자들이 소정의 주문을 모두 읽으나 유교 제사에는 그런 게 없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를 보인다.61) 유교 제사에서 음복은 제의 중간에 주인이 먼저 하고[受胙] 제의 종료 후 참석자들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치성에서 음복은 제의 중간에는 없고 제의 종료 후에만 있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어쨌든 술과 음식을 제의 대상에게 올리며 신성성을 획득한 그 제물을 음복하는 것은 의례 행위의 핵심이라는 사실에서, 유교 제사와 치성의 순서가 보여주는 뼈대는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순서만 볼 때는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순진리회 치성은 유교의 제사를 기초로 삼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덧입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진설을 비교해보자. <그림 2>는 대순진리회 치성 진설과 『사례편람』에 실린 유교 제사의 진설이다. 이를 살펴보면 과일ㆍ채소 등 대강의 위치는 일치하지만, 고기[肉]와 떡[餠]의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그러나 치성의 대상인 증산이 제물의 위치를 중요시하지 않았다62)는 점을 고려하면, 진설의 위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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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대순진리회 치성과 유교 제사 진설 비교 (A) 대순진리회 치성 진설도63) (B) 『사례편람』에 실린 유교 제사 진설도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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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옥자의 연구를 참고하면, 치성 진설에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교 제사에서 지극히 공경할 대상에게 올리는 제물은 날 것 그대로 피가 흐르는 생육(生肉)이지만,65) 대순진리회 치성 제물은 인간이 먹기 좋도록 익히고 조리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먹는 대로 신이 흠향한다는 증산의 말66)이 반영된 결과이다. 둘째, 대개 유교 제사에서 밥[飯]은 서쪽에 국[羹]은 동쪽에 둔다. 이를 우반좌갱(右飯左羹)이라고 하는데, 이런 위치는 평상시 생전의 식사 상차림과 반대이다. 퇴계는 그 이유를 산 자가 아닌 망자[귀신]를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67) 치성 진설에서는 유교 제사 진설과 반대로, 살아있을 때 식사할 때처럼 밥[메]이 동쪽에 국[탕국]이 서쪽에 위치한다. 이것은 유교 제사의 대상이 인간계와 유리(遊離)된 존재로 상정되지만, 치성에서는 그 대상이 인간계와 공존하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68)

정리하자면, 대순진리회 치성은 유불도와 민간신앙의 의례를 회통ㆍ원융ㆍ계승하고 종합시킨 게 아니다. 조선시대 이후 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유교식 제사 흐름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유교의 제사를 계승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유교 제사의 모든 것이 치성에 담기지 않았고, 치성의 어떤 부분들은 유교 제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치성에는 신을 부르고 내보내는 과정[出主, 納主]이 없다는 점, 타고를 하고 참여자들이 모두 주문을 읽는다는 점, 음복은 제의 종료 후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는 점, 밥과 국의 위치가 정반대이며 날 것이 아닌 조리된 음식을 올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치성이 제사는 제사이되 유교 제사와 같은 결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 치성은 유교식 제사를 계승했다기보다는,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 500년을 거치면서 한국의 제사가 직간접적으로 유교의 영향을 받아왔던 역사적 흔적을 보이면서 나름의 독특한 종교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2. 치성은 제천의례를 계승했는가?
1) 한국의 제천의례와 치성

제천(祭天: 하늘에 제사함)의 범주는 넓다. 제의 대상이 하늘이라고 해도, 그 하늘이 구체적인 이름을 갖는 것은 아니므로, 하늘을 의미하는 지고신에게 드리는 의례라면 그 모두는 제천에 속한다. 유교의 호천상제나 도교의 삼청 혹은 옥황상제에게 올리는 의례, 한배검을 지고신으로 신앙하여 올리는 의례, 심지어 서구 기독교의 야훼를 천주(天主)로 번역하여 올리는 의례까지도 모두 제천이라고 할 수 있다.69)

대순진리회 치성의 대상은 구천상제와 그를 중심으로 한 천지의 신명들이다. 구천상제는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다.70) 그렇다면 대순진리회 치성도 천제(天帝)에게 드리는 천제(天祭)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순진리회 치성의 정체성을 읽기 위해서는, 영고(迎鼓)ㆍ동맹(東盟)ㆍ무천(舞天)부터 환구제에 이르는 한국의 제천 의례사에서 치성이 어떤 좌표점을 가지는지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제천 의례사를 늘어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 전부가 아니라 제천의 의도ㆍ목적ㆍ성격이므로, 이를 초점으로 하여 한국의 제천의례를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는 고대의 제천의례다. 공동체ㆍ부족 연맹체ㆍ고대 국가에서 공적으로 행해진 이 의례는 음주 가무의 축제에서 체계적인 제사의 형태를 차차 갖추어나갔다. 한국 고대인들은 이 의례로써 천신ㆍ지모신ㆍ시조신 신앙을 표현하고, 수렵 또는 농경의 풍요를 기원하며, 지도자의 권위를 하늘에게서 확인받았으며, 정치ㆍ경제ㆍ군사ㆍ사법 등의 통치 행위까지 담아내었다. 그 내용을 짧게 살펴보자면, 주지하듯이 부여는 사냥한 짐승을 천신에게 바치고 수렵을 기원하는 감사제를 열었는데 그것을 영고라고 했다.71) 12월인 납월(臘月)에 행해졌던 그 전통은 후대에 납평(臘平)으로 이어졌다. 부여는 영고 외에도 전쟁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맞이할 때마다 제천의례를 행하고 소의 발굽으로 점을 쳤다.72) 고구려는 10월에는 천신과 수신(隧神)에게 제사하고 재판과 형벌을 집행했으니, 이게 동맹이다. 동맹은 동명(東明)이라고도 하는데, 동명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鄒牟) 동명성왕(東明聖王)을 일컫는다. 따라서 동맹은 제천의례이면서, 나라의 시조인 추모가 하늘의 자손임을 확인하고 그를 기리는 제의이기도 했다.73) 예(濊)는 10월에 천신에게 제사하고 밤낮으로 음주 가무를 하였으니 이를 무천이라고 했다.74) 무천이 열리는 시기에는 통치의 일환으로서 형벌의 판결과 집행이 이루어졌다.75) 삼한(三韓)에서는 5월에 파종하면서 제사하고, 10월에는 농경을 마치고 방울과 북[鈴鼓]을 단 큰 나무(솟대)를 세운 소도(蘇塗)에서 천군(天君)이 천신에게 제사했다.76) 천군은 제사장과 유사한 존재로서 제천의례를 통치에 활용했다.77) 또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기풍(祈豐)이나 풍어(豐漁)를 위해, 또는 수렵 후의 화해와 재생을 위해 하늘에 제사 지낸 흔적이 암각화에서 많이 발견된다.78)

백제도 1년에 4번 풍농을 기원하고 임금이 권력의 정당성을 하늘에게서 인정받는 제천의례를 지냈다. 특이한 사실은 천신과 더불어 오제(五帝)까지 제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79) 고려와 조선 이전 한국의 고대 국가 가운데 오제를 제사한 것은 백제뿐이다. 서영대에 의하면, 백제의 제천의례에 오제가 합사(合祀)된 이유는 백제의 정치적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로서, 천신의 후예가 왕실뿐이라는 인식에 귀족까지 끼워 넣음으로써 왕실과 귀족의 공존을 모색하려 했기 때문이다.80) 신라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신궁(神宮)을 건설하여 시조 또는 천지신(天地神)을 모시는 제천의례를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로 삼았다. 불교를 공인하고 당나라의 제사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신라는 신궁에서 천신과 지신에게 올리는 제천의례를 계속 이어갔다.81)

둘째, 고려와 조선의 제천의례다. 삼국시대부터 유입된 불교와 유교는 한국의 전통 의례들을 주변으로 밀어내기 시작했고,82) 통일신라를 거치면서부터는 국가의 공적 의례도 유교와 불교의 외피를 입게 되었다. 고려 시대가 되면 동맹과 무천 등의 고대 제천의례는 불교에 편입되어 팔관회로 변형ㆍ계승되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제천은 국가 주도하에 당송 시대에 정비된 유교의 큰 제사[大祀]인 환구제 형태를 취했는데, 그 제의 대상은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오제 그리고 태조 왕건이었다. 민간에서도 단군 신앙이나 도교 초제(醮祭)를 결합한 형태의 제천을 이어갔으니, 황해도 구월산이나 연백(延白)의 전성(氈城), 강화도 마니산 등이 그 장소다. 국가 영역과 민간 영역에서 동시에 보이는 이러한 고려의 제천의례는 보본(報本)보다 기고(祈告), 즉 풍작과 기우 발원, 송충이 방지 등의 기양(祈禳)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83)

고려를 이은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중화의 질서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제천은 천자만이 할 수 있고 제후는 자기가 맡은 지역과 산천에만 제사할 수 있다는 『예기』 「곡례」의 논리에 따라, 하늘에 제사하는 환구제의 정당성은 의심받게 되었다. 여러 논쟁 끝에 세종 시대에 기우제 형식으로 시행되고 있었던 환구제는 폐지되었고, 세조 때 복구되어 잠시 시행되다가 결국 혁파되었다.84) 근대가 열리면서 청이 일본에게 패하고 한국 지배력을 잃었다. 이에 고종은 1896년에 환구제를 복원했다.85) 이 제천의례는 동지에 거행되는 환구대제(圜丘大祭)와 정월 상신일(上辛日)에 개최되는 환구기곡대제(圜丘祈穀大祭)로 대별되어 풍작을 기원하고 국가ㆍ왕실의 중요 행사 및 위기를 기고(祈告)하면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시행되었다. 다만 이 환구제는 풍작과 기우를 발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조선 초기의 환구제와 달리, 국가ㆍ왕실의 중요 행사 및 위기를 기고(祈告)하면서 중화사상에서 탈피하여 한국이 독립된 나라임을 표방하고, 동시에 군주를 천자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왕권 강화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86) 조선 전기와 후기의 환구제의 성격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를 종합하자면 국가 차원에서 시행된 조선의 제천은 기우와 풍작을 기원하고 특별한 사건을 기고하며, 동시에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지배와 권력 정당성을 인정받는 장치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제천의례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했다. 산간에서 숨겨진 채 은밀하게 거행된 이 의례들은 풍요와 재액 방지를 기원하는 한편 모반의 성격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87) 그러므로 조선 민간의 제천은 기양과 더불어 권력을 향한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근현대 신종교의 제천의례다. 조선 후기 민간의 제천이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것은 최수운에 이르러서다. 그는 구도 방법을 하늘에 기도하는 것으로 바꾸고, 1856년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49일(실제로는 47일), 다음 해에는 천성산 적멸굴에서 49일을 보내면서 산간 제천의례를 지냈다. 그리고 1859년에는 경주 용담정에서 하루에 세 번 자시(子時), 인시(寅時), 오시(午時)에 청수를 떠 놓고 하늘에 발원한 끝에 1860년 4월 5일 상제를 만나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동학을 연 수운은 매달 초하루와 그믐에 돼지와 과일을 제물로 하여 하늘에 제사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수운의 사후에도 동학도들의 산간 제천은 태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여러 곳에서 이어졌다.88)

수운 이후 신종교 영역의 제천의례로 대표적인 것은 증산계 교단들과 대종교에서 살필 수 있다. 증산계 교단들이 모시는 신격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구천상제, 옥황상제, 미륵존불, 통천상제 등 다양하다.89) 대개 이들은 각자가 중시하는 날에 치성을 올린다.90) 이 치성들은 하늘 지고신을 모신다는 점에서 각자의 신앙을 표현하는 제천의례라고 할 수 있다. 대종교에서는 나홍암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봉행했던 선의식(襢儀式)을 제천의례의 전범(典範)으로 삼는다. 선의식은 한인ㆍ한웅ㆍ단군을 삼신일체(三神一體: 세검 한몸)의 하느님(한얼, 한님, 한배검)으로 모시고 다른 신들은 받들지 않는다. 또 제단에는 천지인을 각각 상징하는 ○ㆍ□ㆍ△ 모양의 제기를 사용하며, 곡류와 과일만 올리고 육류는 올리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종교는 단군을 역대 시조 가운데 한 분으로만 모셨던 기존의 단군 숭배를 뛰어넘어 단군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상정한 후, 단군 제사를 제천으로 격상하여 그들만의 새로운 제천의례를 만들어내었다.91)

이상과 같은 한국 제천 의례사에서, 대순진리회 치성의 좌표점은 수운 이후 근현대 신종교에서 올리기 시작했던 제천의례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의례들은 하늘과 직접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각자의 종교사상 및 신앙을 표출한 것으로서, 수렵이나 풍년 기원ㆍ기우ㆍ통치와 권력 정당화 구축 또는 반란을 통한 권력의 이양을 목표로 하는 기존의 제천과는 그 결이 다르다. 그러니까 대순진리회의 치성은 제천에 해당하지만, 고대 국가와 고려ㆍ조선의 제천 목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니다.

2) 환구제와 치성의 형식 비교

대순진리회 치성의 형식은 전통적인 제천의 형식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전통 제천의 형식이 전해지는 것은 고려 이후의 환구제이므로, 이 절에서는 치성을 환구제와 비교해 볼 것이다. 그것을 제의 대상과 제의 순서, 진설로 나누어 각각 살펴보도록 한다.

(1) 제의 대상

고려와 조선의 환구제, 그리고 대순진리회 치성의 제의 대상을 분류하여 정리한 것이 <표 4>이다.

표 4. 고려ㆍ조선의 환구제와 대순진리회 치성의 제의 대상 비교
고려의 환구제92) 조선 세조 환구제93) 조선 고종 환구제94) 대순진리회의 치성
제의 대상 호천상제
(昊天上帝)
오제(五帝)
호천상제
(昊天上帝)
황지기
(皇地祇)
황천상제
(皇天上帝)
황지기
(皇地祇)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
조성옥황상제(趙聖玉皇上帝)
태조(太祖: 왕건) 태조
(太祖: 이성계)
태조고황제
(太祖高皇帝: 이성계)
직선조(直先祖)
외선조(外先祖)
대명(大明: 日)
야명(夜明: 月)
대명(大明)
야명(夜明)
성신(星辰) 북두칠성
오성(五星)
이십팔수
주천성신(周天星辰)
칠성대제(七星大帝)
악독산천
(岳瀆山川)
오악(五嶽)
오진(五鎭)95)
사독(四瀆)
오악산왕(五嶽山王)
동남서북해
(東南西北海)
사해(四海) 사해용왕(四海龍王)
풍운뢰우
(風雲雷雨)
풍백(風伯)
운사(雲師)
뇌사(雷師)
우사(雨師)
석가여래(釋迦如來)
명부시왕(冥府十王)
사시토왕(四時土王)
관성제군(關聖帝君)
칠성사자(七星使者)
우직사자(右直使者)
좌직사자(左直使者)
명부사자(冥府使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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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살필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최고신의 종류다. 고려 때는 천신(天神)인 호천상제가 최고신이었고, 거기에 덧붙여 오제인 청제(靑帝)ㆍ적제(赤帝)ㆍ백제(白帝)ㆍ흑제(黑帝)ㆍ황제(黃帝)가 제의 대상이었다. 이것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세조 때가 되면 환구제에서 오제가 제외되고 대신 지신(地神)인 황지기[后土]가 모셔졌다. 천신 호천상제와 지신 황지기를 나란히 모시는 형태는 고종 시대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때는 호천상제를 황천상제로 이름했다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순진리회 치성은 지고신으로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이하 구천상제)를 모시고, 조성옥황상제(이하 옥황상제)도 더불어 같이 모신다. 구천상제는 증산이고 옥황상제는 정산이다. 구천상제와 옥황상제는 조선의 환구제와 같이 천신과 지신의 나란한 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순진리회 내부에 확정된 설은 없지만, 옥황상제는 구천상제 바로 아래에서 동서남북의 천존 등 모든 신명을 통솔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96) 구천상제-옥황상제의 최고신 계열은 천신 호천상제와 오제(고려와 조선 초기 환구제 경우), 천신 황천상제와 지신 황지기(조선 세조와 고종 환구제 경우)와는 서로 대비되지 않는다. 대순진리회 치성 대상에는 오제가 보이지 않고, 지신은 최고신이 아니라 사시토왕이라 하여 그 하위의 신으로 상정될 뿐이다. 따라서 증산을 구천상제로, 정산을 옥황상제로 모시는 대순진리회 치성은 천지[천신과 지신]를 제의 대상으로 삼았던 전통 천제와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인다.

둘째, 제천 제의 대상에 등장하는 조상의 신분을 살펴보자. 전통 제천은 국왕이 천자의 자격으로 집전하는 것인 만큼 제의 대상으로서 등장하는 조상은 나라를 개국한 시조신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태조 왕건을, 조선은 태조 이성계를 각각 환구제의 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순진리회 치성에도 조상이 등장하니 그것은 직선조-외선조다. 이들의 신분이 알려진 바는 없다. 그래도 왕건이나 이성계처럼 국가의 시조신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치성을 집전하는 사람[봉헌관]의 단독 조상도 아니다. 직선조-외선조는 치성 참여자 각자의 조상, 나아가 인간 개개인의 조상 모두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환구제가 천신과 국가의 시조를 모심으로써 임금 단 한 사람이 하늘의 아들임을 확인받고 그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굳건히 하는 장치였다면, 치성은 천신과 더불어 각자의 조상을 모시고 거행되는 행사라는 점에서 인간 각자가 하늘의 자손임을 인정받는 인간 존중과 평등의 의미를 담아낸다.

셋째, 자연과 그 현상을 주관하는 신들을 검토해보자.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환구제의 제의 대상에 들지 못했던 해ㆍ달ㆍ별ㆍ악독산천ㆍ사해ㆍ풍운뢰우의 신들이 세조 때 등장했고, 고종 때에는 그 종류가 더 세분되고 오진(五鎭)까지 추가되어 나타난다.97) 대순진리회 치성은 고종 대가 아닌 세조 대의 환구제와 같이 간략한 모습을 보이는데, 성신(星辰)은 칠성대제로,98) 악독산천은 오악산왕으로 축소된 형태를 지닌다. 풍운뢰우의 신들은 제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치성에서 자연과 그 현상 관련 신들의 규모가 간소해진 이유는, 구천상제가 풍운뢰우 등의 각종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대순진리회 치성에는 한국의 전통 환구제에서 모신 적이 없었던 신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표 4>에서 보듯이 석가여래와 명부시왕, 사시토왕, 관성제군(관우), 칠성사자, 우직사 자, 좌직사자, 명부사자로서 불교와 도교, 민간종교에서 모셔지는 신들이다.

(2) 제의 순서와 진설

다음으로 제의 순서를 살피도록 한다. 환구제는 대개의 국가 사전과 마찬가지로 ① 준비 → ② 영신(迎神: 신을 맞이함 → ③ 궤식(饋食: 신에게 제물을 올림) → ④ 헌작(獻酌: 신에게 술을 올림) → ⑤ 음복(飮福)) → ⑥ 송신(送神: 신을 보냄) → ⑦ 정리의 순서로 진행되었다.99) 그것을 조선 세조대와 고종대로 구분하여 각각 정리한 것이 <표 5>이다.100)

표 5. 조선 환구제의 제의 순서
절 차 세조의 환구제101) 고종의 환구제102)
① 준비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희생과 제기를 살핌)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② 영신(迎神) 실찬구(實饌具: 제기에 음식을 채움)
번시(燔柴: 섶 위에 천신의 머리를 놓고 태워 천신을 부름)
예모혈(瘞毛血: 땅에 희생의 털과 피를 묻어 지신과 인귀를 부름)
전폐(奠幣: 폐백을 올림)
실찬구(實饌具)
번시(燔柴)
신관(晨祼: 향을 피우고 울창주를 붓고 玉帛을 올림)
③ 궤식(饋食) 진찬(進饌: 희생의 익힌 고기를 올림) 진찬(進饌)
④ 헌작(獻酌) 초헌(初獻)
독축(讀祝: 축문을 읽음)
아헌(亞獻)
종헌(終獻)
초헌(初獻)
독축(讀祝)
아헌(亞獻)
종헌(終獻)
⑤ 음복(飮福) 음복(飮福) 수조(受俎) 음복(飮福) 수조(受俎)
⑥ 송신(送神) 철변두(徹邊豆: 제기[邊豆]를 치움) 철변두(徹邊豆)
⑦ 정리 망료(望燎: 축문과 폐백 등을 태움) 망료(望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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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제 순서의 틀은 <표 3>의 유교 제사와 비교했을 때 규모 면이나 세세한 면에서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틈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보면 준비 과정을 거쳐 신을 부른 뒤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축문을 읽고 음복하며 신을 보낸다는 흐름에서만큼은 일치한다. <표 3>에서 정리한 치성의 순서도 유교 제사를 기초로 삼는다는 점에서 환구제의 순서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물론, 치성에는 신을 맞이하고[迎神] 보내는[送神] 과정이 없지만 환구제에는 있다는 점, 그래서 치성에는 폐백이 없지만 환구제에는 있다는 점, 치성에는 제의 종료 후에 음복이 있지만 환구제에는 제의 중간(임금과 대신이 음복함)과 종료 후에 음복이 있다는 점, 치성에는 참여자들이 소정의 주문을 읽지만 환구제에는 그런 절차가 없다는 점은 눈에 드러나는 차이다. 순서에는 기재되지 않았지만 환구제에는 제례악이 연주되고 치성에는 음악이 없다는 점, 환구제 복장은 화려한 제례복103)이고 치성 참여 복장은 한복(전통 일상복)이라는 점도 두 의례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차이는 환구제가 임금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에 의해 주도되지만, 치성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치성과 환구제의 진설을 비교하도록 한다. 다음 <그림 3>은 『환구단 사제서 의궤(圜丘壇祠祭署儀軌)』의 ‘대향시 상단 정배위 찬실도설(大享時 上壇 正配位 饌實圖說)’에 각각 실린 황천위(皇天位)와 황지위(皇地位)의 진설 모습이다.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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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대한제국 환구제의 황천위와 황지위 진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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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설도에 등장하는 음식과 도구는 다음과 같다.

  • ○ 등잔(燈盞)

  • ○ 작(爵: 술잔)

  • ○ 구이(糗餌: 볶아 말린 쌀음식)

  • ○ 분자(粉餈: 가루 인절미)

  • ○ 진자(榛子: 개암나무 열매)

  • ○ 능인(菱仁: 마름 풀의 열매)

  • ○ 검인(芡仁: 가시연열매)

  • ○ 녹포(鹿脯: 사슴고기로 만든 포)

  • ○ 형염(形鹽: 호랑이 모양으로 놓은 소금)

  • ○ 어수(魚鱐: 말린 물고기)

  • ○ 건조(乾棗: 말린 대추)

  • ○ 율황(栗黃: 깎은 밤)

  • ○ 우대갱(牛大羹: 양념을 넣지 않은 삶은 쇠고깃국)

  • ○ 보(簠: 구리로 만든 제기 그릇)

  • ○ 도(稻: 벼)

  • ○ 양(粱: 조)

  • ○ 궤(簋: 귀가 달린 나무 제기 그릇)

  • ○ 서(黍: 기장)

  • ○ 직(稷: 피)

  • ○ 구저(韭菹: 부추김치)

  • ○ 담해(醓醢: 돼지고기나 노루고기로 만든 젓갈)

  • ○ 청저(菁菹: 무 김치)

  • ○ 녹해(鹿醢: 사슴고기로 만든 젓갈)

  • ○ 근저(芹菹: 미나리 김치)

  • ○ 토해(兎醢: 토끼고기로 만든 젓갈)

  • ○ 순저(筍菹: 죽순 김치)

  • ○ 어해(魚醢: 물고기(주로 조기)로 만든 젓갈)

  • ○ 비석(脾析: 소의 처녑)

  • ○ 돈박(豚拍: 돼지의 갈빗살)

  • ○ 이식(酏食: 찰기장으로 만든 떡)

  • ○ 삼식(糝食: 쌀가루를 섞어 끓인 국)

  • ○ 우숙장(牛熟腸: 익힌 소의 내장)

  • ○ 조(爼: 도마)

  • ○ 태뢰(太牢: 소, 양, 돼지의 고기로 만든 요리)

  • ○ 폐비(幣篚: 폐백을 담는 대나무 그릇)

황천위와 황지위에 올리는 제물의 진설은 일치한다. 이 제물에서 분자(粉餈), 진자(榛子), 능인(菱仁), 검인(芡仁), 녹포(鹿脯), 양(粱), 서(黍), 직(稷), 담해(醓醢), 녹해(鹿醢), 토해(兎醢), 이식(酏食), 삼식(糝食) 등을 주목해야 한다. 환구제에서 중요시되는 이 제물들은 <그림 2> (A) 대순진리회 치성 진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도 천제이고 환구제도 천제이지만, 적어도 진설만큼은 유사하게 보이는 것이 거의 없다.

정리하자면, 환구제와 치성 순서를 비교했을 때 치성은 유교 제사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는 환구제와 유사한 궤적을 보이지만, 참여자들이 주문을 읽고 제례악을 연주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측면에서는 다른 결을 보인다. 특히 음복이나 복장 상태는 환구제가 특권을 지닌 지배계층에 의해 주도되었고 치성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환구제와 치성에 차려지는 음식 진설은 그 종류가 유사한 요소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치성은 환구제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지는 않았으며, 유교 제사를 틀로 삼아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얹어 하늘을 받드는 종교의례라고 말할 수 있다.

Ⅳ. 닫는 글

한국에는 신적 존재에게 지극한 정성을 들여 소원을 비는 의례인 치성이란 게 있다. 의례로서의 치성은 중국과 일본에는 없고 한국에만 존재한다. 대순진리회에도 치성이 있다. 그러나 그 치성은 전통 치성처럼 특정한 소원을 비는 측면보다는 신들을 향한 경축ㆍ기념ㆍ감사ㆍ찬양ㆍ고유ㆍ사죄를 담고, 수도인들의 굳건한 믿음[誠信]의 표현을 더 강하게 표출하는 의례다. 따라서 치성의 의미를 회생이나 도통과 같은 종교적 목적의 발원에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부수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살폈듯이 치성의 정의와 종류에서 확인된다.

한국의 의례사를 살펴보면 대순진리회의 치성은 유교 제사 또는 환구제와 유사하면서도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치성에 유교 제사 및 환구제와 같은 전통 의례의 모습이 일부 관찰된다고 해서, 그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했다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전통이 어떻게 재해석되어 현재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살폈듯이, 치성에는 신을 부르고 내보내는 과정이 없고, 참여자들이 모두 주문을 읽으며, 음복도 제의 종료 후에 모두 같이 하고, 진설의 위치와 제물의 종류도 다르다. 이것은 치성이 갖는 기본 설정이 인간계와 신계의 공존이라는 점, 치성을 올리는 주인공은 특정 1인ㆍ가문ㆍ지배계급이 아니라 참여자 모두라는 점에서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치성의 제의 대상이 구천상제와 옥황상제, 석가여래 등으로 전통 천제와 크게 다르고, 제례악의 연주가 없고 참여자 전원이 소정의 주문을 읽는다는 사실은 치성을 전통 제천의 계승이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기 힘들게 한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 의례사에서 확인되는 대순진리회 치성의 정체성이 계승이나 창조적 계승, 변용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품은 ‘발명’에 있다고 본다. 계승(繼承, succession)이란 물려받거나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창조적 계승이란 계승은 계승이되 새로운 가치관을 덧입힌 계승을 의미한다. 변용(變容, variation, translation, transformation)이란 A가 B로 전이ㆍ변이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계승, 창조적 계승, 변용이라고 표현하려면, 어쨌든 치성 이전에 치성의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획기적 변화를 거쳐 현재의 치성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살폈듯이 의례의 의도, 목적, 형식, 제의 대상, 제의 참여자 등의 측면에서 치성 이전에 그 원형이 되는 의례를 찾을 수 없다. 유교 제사나 환구제가 치성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절차와 진설 등 형식만이 아니라 세계관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치성은 유교 제사나 환구제를 계승ㆍ변용했다기보다는 전통문화를 재료로 삼아 새로운 의례로 발명되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오늘날 우리는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이 말한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105)으로서의 치성을 대순진리회에서 만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대순진리회의 도장 치성은 유교 제사를 재료로 삼으면서도, 이것저것 새로운 요소를 잔뜩 더 덧붙여 다른 기능을 갖도록 만든 ‘발명된 천제(invented ritual to Heaven106))’다.

이러한 치성의 정체성은 대순진리회의 세계관 속에서 신들과의 접촉과 교류로써 소통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 소통은 인간이 신에게 특정한 소원을 비는 데에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경축ㆍ기념ㆍ감사ㆍ찬양ㆍ고유ㆍ사죄ㆍ굳건한 믿음[誠信]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것이 대순진리회 치성의 의미다.

Notes

대순진리회, 『도헌(道憲)』 (1985), 제118조.

한국과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환구제보다 원구제라는 용어를 더 사용해왔다. 환구제는 대한제국 시대 주로 사용되었고, 그 영향으로 오늘날 한국은 원구제보다 환구제라는 용어를 더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글도 그 경향에 따라 원구제 대신 환구제로 표기한다.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파주: 돌베개, 2011), p.16, p.132 참조.

강돈구, 「대순진리회의 연중 종교 생활」, 『한국 종교교단 연구ⅩⅢ』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pp.22-42 참조.

장병길, 『증산종교사상』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6), pp.163-171; 장병길, 『대순종교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9), pp.155-164.

장병길, 『대순종교사상』, pp.163-164.

Henninger, Joseph, “Sacrifice,” in Mircea Eliade ed.,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12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87), pp.545-550.

이경원, 「대순진리회 치성의례의 종교적 특질에 관한 연구」, 『신종교연구』 20 (2009), pp.150-158.

같은 글, pp.156-158.

강돈구, 앞의 글, pp.33-39.

최길성, 「치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pp.727-728.

박일영, 『한국 무교의 이해』 (칠곡: 분도출판사, 1999), pp.82-86.

같은 책, p.86.

태극도, 「의식규정」, 『규정』 (부산: 태극도, 1963), pp.2-4 참고.

김하정, 『성재일지』(필사본), p.192, p.211; 『성재일지』의 저자는 중곡도장 건설 전후로 우당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교무부장과 수도부장까지 역임했던 김하정(金夏正: 호가 醒齋)이다. 그는 1971년 3월 20일부터 1976년 12월 2일까지 중곡도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일지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대순진리회는 천지인 삼계를 통달하고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치며 무소불능(無所不能)의 경지에 오르는 도통에 도달함으로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함을 취지로 하는 종단이다. 이것은 무자기(無自欺)ㆍ정신개벽, 지상신선실현ㆍ인간개조, 지상천국건설ㆍ세계개벽이라는 목적으로 표현된다. 이 사실에서 추출할 수 있는 키워드는 도통과 개벽이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진리회 요람』 (서울: 대순진리회 교무부, 1969), p.9, p.17.

대순진리회 교무부, 『의식』 3판 (서울: 대순진리회 교무부, 간행년 미상), pp.3-14.

대순진리회 교무부, 「종단에서는 언제 치성을 모십니까?」, 『대순회보』 171 (2015), pp.112-120 참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이 1917년 음력 2월 10일에 구천상제의 삼계 대순한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함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치성. 대순진리회 교무부, 「도주님 감오득도치성」, 『대순회보』 129 (2012), pp.35-37 참조.

1909년 음력 4월 28일 도주 조정산이 만주 봉천으로 망명을 가면서 구천상제로부터 계시[천명]을 받음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치성. 대순진리회 교무부, 「봉천명치성」, 『대순회보』 120 (2011), pp.28-31 참조.

구천상제의 진영(眞影)을 봉안함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치성.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전 훈시』 (미발행 자료), 기사(1989)년 5월 19일(양력 1989. 6. 22), “절후치성이 중한 치성이고 대치성이다. … 천지의 치성이다. 만물이 생장하는 모든 것은 절후, 그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그것 때문인데 … .”

자세한 내용은 차선근, 「중양절의 원혼 위무와 치성」, 『대순회보』 248 (2021), pp.42-57 참조.

중양절 치성이 제주도 수련도장에서만 열리는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우당이 제주도는 유배지였던 등의 이유로 해서 한이 많은 곳이라고 언급했던 것으로부터 추정은 가능하다. 중양절 치성이 제주도에 연수가 시작됨을 하늘에 고하는 치성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 치성의 날짜가 굳이 중양절이어야만 했던 데에는 제주도가 한이 많은 곳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차선근, 「중양절의 원혼 위무와 치성」, pp.54-55 참조.

각각의 의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캐서린 벨, 『의례의 이해』, 류성민 옮김 (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7), pp.190-268 참고.

미시(未時)의 치성은 13시에 시작한다. 당시 우주비행사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처음 내딛고 올드린과 함께 달을 걸어 다니며 활동한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7월 21일 11시 56분부터 14시 26분까지였다.

말복 치성이 1990년 전후로 거행된 후, 한동안 실시되지 않다가 지난 2016년 8월 16일에 다시 거행되었다. 대순진리회는 치성의 날짜가 겹치면(대개는 5일 이내) 치성 하나를 생략하는데, 그동안 말복 치성은 치성 날짜가 겹치는 문제로 인하여 생략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말복 치성은 정기 치성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시행은 비정기 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종단소식」, 『대순회보』 11 (1988), p.4.

『성재일지』, p.188, pp.209-211 참조.

도장 밖에 있는 수도인이 각자 활동하는 지역에서 행하는 치성 가운데에도 사죄치성(謝罪致誠)이란 것이 있다. 수도인은 입도 치성으로써 대순진리회에 입회하고 수도에 매진하게 되는데, 만약 이런저런 사유로 수도를 오랜 시간 동안 중단하였다가 수도를 재개할 때 다시 입도 치성과 유사한 치성을 올리는데, 이것을 사죄치성이라고 부른다. 사죄치성은 입도치성과 형식과 절차가 같으나 녹명지만 올리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13판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공사 3장 10절, 교운 2장 14ㆍ17ㆍ20절; 『도전 훈시』, 갑자(1984)년 3월 30일(양력 1984. 4. 30) 참고.

이날은 옥황상제 탄강일(음력 12.4)이다. 여주도장 총무부, 『업무일지(1987년)』 (필사본) 참고; 1987년 당시 여주도장의 영대는 지금의 봉강전이었다. 여주도장의 현재 영대는 1990년에 신축된 것이다. 48장은 여주본부도장에만 봉안되어 있다.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 (Ⅱ)」, 『대순사상논총』 23 (2014), pp.261-263 참고.

여주도장 총무부, 『업무일지(1987년)』 참조; 1987년에는 청계탑의 명칭이 정해지기 이전이었고 ‘수강원 건립 기념탑’으로 불렸다. 청계탑의 탑을 조각하는 작업은 1987년 3월 14일부터 시작되었다. 기공식은 1987년 8월 19일(음력 윤 6. 25) 오시에 열렸다.

여주도장 총무부, 『업무일지(1988년)』 (필사본) 참고.

여주도장 총무부, 『업무일지(1990년)』 (필사본) 참고.

대순진리회 교무부, 「종단 소식」, 『대순회보』 36 (1993), p.8; 대순진리회 교무부, 「종단 소식」, 『대순회보』 41 (1994), p.8; 1993년 3월 5일 경칩일의 입절(入節) 시간은 22시 43분이어서 이때 치성이 거행되었다. 회보에 치성 시간이 축시로 나와 있는 것은 잘못된 표기다. 『도전 훈시』, 계유(1993)년 2월 11일(양력 1993. 3. 3) 참고.

전통 시대에 경칩에 올리는 국가 제사가 있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한국은 국가 차원에서 경칩에 소사(小祀)에 해당하는 둑제(纛祭)를 지냈다. 병조판서가 주관하는 이 의례는 임금의 행차나 군대 행렬 앞에 앞세우는 둑기(纛旗)에게 올리는 제사로서 전쟁 승리나 군사(軍事)의 길함을 기원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전경』, 행록 3장 51-64절 참조.

대순진리회 교무부, 「종단 소식」, 『대순회보』 36 (1993), p.8.

『도전 훈시』, 계유(1993)년 3월 10일(양력 1993. 4. 1) 참조.

순감은 강돈구, 「대순진리회의 종교교육」, 『종교연구』 62 (2011), pp.247-248 참고.

『도전 훈시』, 계유(1993)년 5월 22일(양력 1993. 7. 11) 참조.

우당 화천 후에는 도장에 비정기적인 치성이 열린 적이 없다. 다만 1997년 11월 24일(음력 10월 25일) 오시(午時)에 금강산토성수련도장에서 미륵불을 봉안하는 치성을 올린 적은 단 한 차례가 있었다. 토성도장에 미륵불을 조성한 것은 우당의 생전 지시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를 하늘에 고하고 감사하는 치성을 올렸던 것이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종단 소식」, 『대순회보』 57 (1997), p.8 참조.

Kessler, Gary E., Studying Religion (New York: McGrawHill, 2006), p.103 참조.

이경원, 앞의 글, p.134.

백경언ㆍ이경원, 「증산계 신종교의 의례와 상징에 관한 연구」,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0 (2016), pp.384-386.

같은 글, pp.387-388.

같은 글, pp.384-385.

대순진리회를 예로 들면, 우당은 치성을 집전하는 봉헌관(奉獻官)을 하면서 갓을 썼다. 우당 화천 후부터는 봉헌관이 치성을 집전하면서 갓이나 관을 쓰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모두 갓 또는 관을 쓰지 않는다.

같은 글, p.385.

같은 글, p.385.

같은 글, pp.385-386.

같은 글, pp.385-386.

같은 글, pp.386-388.

관련 논의는 다음을 참고하라. 차선근, 「증산계 일괄 기술에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방향」, 『신종교연구』 30 (2014), pp.57-95.

“상제님, 도주님의 화천일 치성이 다른 게 아니다. 음식 장만하고 절하고 그러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제사다. 제사를 우리는 치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전 훈시』, 경오(1990)년 12월 28일(양력 1991.2.12).

강돈구, 「유교 조상의례의 미래」, 『종교연구』 69 (2012), p.2.

김미영, 「조상제례의 규범성과 실제성」, 『역사민속학』 51 (2016), p.201, pp.224-226; 김윤정, 「조선후기 사례(四禮)의 전형」, 『민족문화연구』 86 (2020), pp.130-132.

이재 외, 『증보 사례편람 역주본』, 문옥표ㆍ이충구 역주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pp.591-641.

윤미정, 「치성 의례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대순회보』 193 (2017), pp.108-111.

강돈구, 「대순진리회의 신관과 의례」, 『종교연구』 73 (2013), p.168; 방옥자, 「한국 신종교 의례에 나타난 음식의 상징」, 『종교문화연구』 26 (2016), p.251.

『전경』, 교법 1장 48절 참고.

유교에서 희생제물은 ‘혈(血: 피를 흘리는 상태)’, ‘성(腥: 피를 다 빼지만 삶지 않은 상태)’, ‘섬(爓: 살짝 데친 상태)’, ‘숙(熟: 완전히 익힌 상태)’으로 올려진다. 제의 대상이 더 높을수록 고기는 덜 가공된다. 그것은 제의 대상에게 고기가 지닌 ‘원래의’ 기운과 향기를 올리는 것이 더 정성스럽다고 보기 때문이다. 『禮記』 「祭法」ㆍ「郊特牲」 참조.

『전경』, 교법 1장 49절.

이재 외, 앞의 책, pp.652-653; 원래 오른손잡이 문화에서 볼 때 좌반우갱이어야 할 제사 상차림이 신중한 검토가 없이 잘못 전해져 우반좌갱으로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은주, 「전통문화 속에서의 좌ㆍ우 개념」, 『한국민속학보』 8 (1997), pp.42-43.

방옥자, 앞의 글, pp.241-242, pp.249-250.

같은 글, p.249.

이재 외, 앞의 책, p.644.

이욱, 「조선 및 한국 근대의 제천문화」, 『선도문화』 8 (2010), p.76.

『대순진리회요람』, p.7.

『後漢書』 「東夷傳」 ‘夫餘條’; 『三國志』 「魏書」 ‘東夷傳’.

『三國志』 「魏書」 ‘東夷傳’.

최광식,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p.32, p.44; 서영대, 「한국 고대의 제천의례」, 『한국사 시민강좌』 45 (2009), pp.14-15.

『三國志』 「魏書」 ‘東夷傳’.

최광식, 앞의 책, p.140.

금장태, 「제천의례의 역사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25 (1990), p.165.

최광식, 앞의 책, pp.142-143.

같은 책, pp.106-116; 서영대, 「한국 암각화의 신앙과 의례」, 『한국암각화연구』 12 (2008), pp.26-29.

같은 책, p.66, p.147, p.161, pp.179-180.

서영대, 「백제의 오제신앙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20 (2000), p.88, p.132.

최광식, 앞의 책, pp.148-152.

조현범, 「의례의 문화사를 통해서 본 한국 종교의 흐름」, 『한신인문학연구』 5 (2004), pp.318-319.

금장태, 앞의 글, pp.169-172; 이욱, 「조선 및 한국 근대의 제천문화」, pp.64-65, pp.70-71; 김문식 외, 앞의 책, pp.36-37.

금장태, 앞의 글, pp.173-176; 이욱, 「조선 및 한국 근대의 제천문화」, pp.69-70.

고종은 아관파천 시기에 1896년의 동지인 12월 20일 환구대제를 거행하게 했고, 1897년 설날인 1월 25일 환구기곡대제를 올리게 했다. 환구제를 거행하기 위한 전용 공간인 환구단은 1897년 10월에 건립되었고, 1903년까지 증축과 정비를 이어갔다.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 30 (2003), pp.190-192.

같은 글, p.187, pp.206-208.

최종성, 「숨은 천제」, 『종교연구』 53 (2008), p.65.

같은 글, pp.77-79.

차선근, 「증산계 일괄 기술에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방향」, pp.65-67 참조.

백경언ㆍ이경원, 앞의 글, pp.360-371 참조.

이욱, 「대종교의 선의식과 단군의례」, 『신종교연구』 8 (2003), pp.142-146, pp.150-152; 윤관동, 「근대 한국선도의 제천의례 연구」, 『도교문화연구』 24 (2006), pp.309-310.

『高麗史』 卷五十九, 「志」 卷第十三, <吉禮大祀>, ‘圜丘壇’, ‘親祀儀’.

『世祖實錄』 卷六 世祖 3年(1457) 1月 6ㆍ7ㆍ15日; 『世祖實錄』 卷十三 世祖 4年(1458) 7月 30日.

『大韓禮典』 卷六 「儀註吉禮」, ‘冬至祀圜丘儀’; 한영우, 「대한제국 성립 과정과 《대례의궤》」, 『한국사론』 45 (2001), p.245;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p.205 ; 김문식 외, 앞의 책, p.74;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가제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2016), p.69.

다섯 진산(鎭山)인 백악산ㆍ태백산ㆍ송악산ㆍ금성산ㆍ묘향산의 산신.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 (Ⅱ)」, pp.266-283 참조.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p.205.

조선 고종 환구제에서 모신 이십팔수는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봉강전에 모셔져 있다. 우당 생전에는 이곳에서도 도장 치성이 모셔지곤 했으나, 우당 사후의 지금은 봉강전에서 치성이 거행되지 않는다.

국립고궁박물관, 앞의 책, pp.19-23.

같은 책, pp.72-73.

『世祖實錄』 卷六 世祖 3年(1457) 1月 15日; 『世祖實錄』 卷十三 世祖 4年(1458) 7月 30日;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p.209.

『大韓禮典』 卷六 「儀註吉禮」, ‘冬至祀圜丘儀’; 한영우, 앞의 글, pp.251-258;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p.209; 김문식 외, 앞의 책, p.76.

국왕과 왕세자가 입는 면복(冕服) 등 8가지 복식 유형이 있었다. 김문식 외, 앞의 책, pp.99-130; 국립고궁박물관, 앞의 책, pp.17-18 참조.

『圜丘壇祠祭署儀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

에릭 홉스봄, 「대량 생산되는 전통들」, 에릭 홉스봄ㆍ테렌스 레인저 편집, 『만들어진 전통』, 박지향ㆍ장문석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04), pp.493-577 참조.

RISS를 검색해보면 천제(天祭)의 영문 표기는 Chunjae, Cheonje, ritual to Heaven, ritual for Heaven, Heavenly rituals, Heaven worship ritual, ritual to heavenly god 등 다양하다. 이 글은 이 가운데 ritual to Heaven을 선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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