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 현황과 그 과제

김탁1,*
Tak Kim1,*
1한국학대학원 박사
1Ph.D.,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 Copyright 2022,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20, 2022 ; Revised: Aug 31, 2022 ; Accepted: Sep 14, 2022

Published Online: Sep 30, 2022

국문요약

대부분의 증산교단에서는 증산을 미륵불의 영체(靈體)나 화신(化身)으로 믿는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에서는 미륵불의 운수가 5만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미륵불상의 금(金)이 곧 후천 가을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대순진리회의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는 관촉사의 미륵불과 비슷한 모습의 미륵불상이 있는데, 금산사의 미륵불상과는 다른 ‘상징’을 보여준다. 금산사의 미륵불상이 증산과 그의 종통을 이은 정산이라는 두 인물을 상징하는 모심이라면 보다 보편적인 입장에서의 신행(信行)을 상징하는 미륵불상이 토성수련도장을 통해 제시된 것이다. 금산사의 미륵불상이 종통문제를 다룬다면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의 미륵불상은 민중 구원과 도통군자의 출현을 예언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대순사상에 따르면 미륵불은 더 이상 가까운 장래에 오실 미래불이 아니라 이미 지상에 몸을 나투신 현재불이다. 증산이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인해 미륵불의 현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이다. 향후 증산의 천지공사를 구체적으로 사회에서 실행하고 실천하여 미륵신앙의 참된 신행이 이루어져 미륵불이 지향하는 이상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Abstract

A majority of religious orders in Jeungsanism believe in Jeungsan as a spiritual entity or incarnation of Maitreya. However, Daesoon Jinrihoe insists that the destiny of Maitreya lasts for fifty-thousand years and the ‘gold (金)’ associated with the Maitreya icon (Geumsan-sa Temple) symbolizes the ‘Later World.’ A different Maitreya icon was produced for Daesoon Jinrihoe’s Toseong Training Temple Complex. That icon of Maitreya looks similar to the one at Gwanchok-sa Temple. That is because the icon in Daesoon Jinrihoe has been formed in order to emphasize Maitreya as a symbol different from the one in Geumsan-sa Temple. If the Maitreya icon of Geumsan-sa Temple is a core that symbolizes two figures, Jeungsan and his successor, Jeongsan, who inherited his religious orthodoxy, then the Maitreya icon at Toseong Training Temple Complex is a symbol that suggests faith and religious practice from a more conventional perspective.

The Maitreya icon in Geumsan-sa Temple deals with issues of religious orthodoxy whereas the icon at Toseong is related to the prophecies on the redemption of people and the advent of Dao-empowered sages. According to Daesoon Thought, Maitreya is not just the future Buddha. He has already descended on the earth in modern times. Due to Jeungsan’s descending on the earth, the incarnation of Maitreya has been accomplished as far as the Daesoon faith is concerned. Henceforth, the true practice of Maitreya reverence in the context of Daesoon Jinrihoe should be focused around a group of devotees who specifically practice Jeungsan’s Reordering Works of Heaven and Earth. An attempt to do so will enable the formation of the ideal world aimed upon by Maitreya.

Keywords: 대순진리회;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미륵의 상징; 종통; 도통군자의 출현
Keywords: Daesoon Jinrihoe; Toseong Training Temple Complex; Maitreya symbolism; the advent of Dao-empowered sages

Ⅰ. 머리말

증산교단은 단일 교파로 계승되어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여러 교파가 성립되고 각기 독자적인 신행(信行)을 형성하여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믿음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 신종교의 대표적 교단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의 미륵신앙이 증산교단의 여러 교파에서는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특히 현재 증산교단 최대 교파인 대순진리회의 독창적인 미륵사상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아본 다음, 그 미륵사상의 현황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불교의 미륵신앙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형태로 성립ㆍ전개된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전모를 일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이 갖는 종교적 특성과 의의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신격으로 믿어지는 증산과 불교적 구원자로서의 미륵불이 갖는 위상이 다소 겹치거나 어떤 면에서는 애매한 형태로 표현되는 대순진리회의 신행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향후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전망하여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방향성을 예상한 다음, 대순진리회 신앙인들의 미륵불에 대한 믿음과 신앙 행위가 갖는 종교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기존의 증산교단 미륵신앙에 대한 논문들을 분석하여 보충할 점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서술한다. 2장에서는 불교의 미륵신앙 가운데 특히 하생(下生)신앙으로 규정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을 중심으로 알아본다. 그리고 증산교단 미륵신앙의 성립과정에 대해 관련된 경전의 기록을 중점적으로 살펴 그 형성과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3장에서는 증산교단 미륵신앙의 전개 과정에 대해 특히 대순진리회의 신행을 개괄적으로 살펴 그 특징을 고찰한다. 신앙대상인 증산과 미륵불을 동일시하는 듯하면서도 현재에는 증산과는 다른 미륵불 신앙을 도입한 듯한 대순진리회 신행의 특징을 알아보겠다. 그리고 4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삼아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특성과 의의를 추출하여 서술한다. 맺음말에서는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독창성을 향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일정하게 전망해본다.

신앙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신앙은 과거에 이미 지나간 죽은 형태가 아니라,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형태로 후대에 계승된다. 따라서 오늘날은 현재 믿어지고 행해지는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현황을 개괄하고 그 특성과 의의를 불교의 미륵신앙과 대비하는 연구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대순진리회 미륵사상과 불교의 미륵신앙을 관련지어 논술한 기존 논문들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시도되는 이 글은, 향후 불교의 미륵신앙과는 다른 독창적인 형태로 전개된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위상을 정립하고 그 의의를 밝히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소 애매하게 제기되는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삼아 앞으로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에 대해 일정하게 전망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현재 대순진리회의 전개 과정과 활동과 맞물려 서로 피드백 작용을 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미륵보살은 현재 부처님이 되고자 수행하고 있는 보살이지만, 현재불인 석가불(釋迦佛)에 이어서 다음 대에 부처가 되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당래불(當來佛)로서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불린다. 미륵신앙은 수행과 선행을 통해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머무는 도솔천(兜率天)에 왕생할 것을 권하고 믿는 미륵상생(上生)신앙과 56억 7천만 년 후라는 아득히 먼 미래에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와 설법하게 될 용화회상(龍華會上)에 대한 신앙인 미륵하생(下生)신앙으로 크게 나뉜다. 전자는 미륵이 머무는 세계가 영원한 천상에 있고, 후자는 미래의 인간 세상에 있다. 어쨌든 미륵불은 ‘내일 오실 부처님’이라는 미래불(未來佛)이지만 현재불(現在佛)인 석가(釋迦)의 교설에 의한 교화가 불가능하게 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말법(末法)시대에 나타난다고 믿어진다. 이는 미륵불이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희망불(希望佛)이라는 특징을 지닌다.1)

미륵이 하생하는 세계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 의해서 평정된, 이미 평화롭고 번영하는 시대다. 미륵은 세상을 변혁하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세속적 문제가 해결된 세계를 완성하러 온다. 더욱이 그 시기 또한 아득한 미래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임박한 미래의 종말에 대한 인식이나 세계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가 빠져있다. 전근대의 정치적 반란이나 종말론적인 종교운동에 흔히 등장하는 미륵신앙은 미륵의 현실 개입이나 생불(生佛) 형태로의 출현에 대한 대망(待望)이라는 면에서 ‘미륵 하생’신앙과 구분되는 ‘미륵 출세(出世)’신앙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2)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경우에는 미륵세상이 미래에 다가올 이상세계이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는 현재의 말세적인 상황이 강조된다고 본 연구가 있다.3)

구사회는 “증산이 건설하려는 이상세계는 유, 불, 선을 포섭하고 조화시켜 설계한 새로운 미륵세계인 후천선경이다.”라고 주장했고,4) 윤재근은 민중에게 친숙한 미륵사상을 통해 후천의 도래를 선포했다고 보았고,5) 김남희는 증산교가 ‘희망의 종교’로서 미륵신앙을 수용했다고 보았다.6) 그리고 이병욱은 “대순사상에서는 ‘미륵불 관념’과 ‘삼교회통사상’이 하나로 연결된다.”고 주장했으며,7) 최종석은 “증산이 미륵의 도래로 나타나는 용화세계를 자신이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세계의 모델로 삼았다.”라고 주장하였다.8)

이처럼 기존의 논의들은 대부분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이 갖는 특징만 간단히 언급했을 뿐, 현재 대순진리회에서 신행(信行)되고 있는 미륵신앙의 현황과 특성에 대한 글이 아니다. 그리고 대순진리회에서 미륵사상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도 미처 논의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대순진리회에서 상제(上帝)신앙과 미륵사상이 갖는 중첩성 내지 독립성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고 있다.

Ⅱ. 증산교단 미륵신앙의 성립

1. 역사적 사건의 미륵신앙

역사의 무대에서 미륵불을 자처한 인물들은 다수 있었다. 대부분은 각종 반란 사건의 주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여 반란 활동의 주된 근거로 삼았다. 증산이 미륵불을 자처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종교적 인물의 입장에서 강조한 그의 주장이 갖는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증산은 “제생 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 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9)라고 말하였다. 왕이나 민중이 혁세(革世)의 차원에서 왕권의 강화, 권력의 정당성 주장, 혁명과 반란의 이데올로기 제공을 위해 ‘미륵불’을 자칭했지만, 결국 상극적(相克的) 성향으로 전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증산은 광제창생(匡濟蒼生)하기 위해서 자신을 ‘미륵’이라고 선언하며 상생(相生)의 법리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중국 북위(北魏)시대에 일어난 승려 법경(法慶)의 난(515)에서 법경은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고 불렀으며 “새로운 부처가 세상에 나왔으니, 오래된 마귀를 제거하자.<신불출세(新佛出世), 제거구마(除去舊魔)>”라고 주장하면서 경전과 불상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살해했다.10) 여기서 ‘새로운 부처’는 곧 미륵불을 뜻하며, 이는 미륵하생신앙과 민중반란이 결합된 최초의 사례다. 그리고 수(隋)의 대업(大業) 6년(610) 백의(白衣)를 입고 향화(香花)를 가진 무리가 미륵의 출세를 빙자하여 난동을 부렸다.

… (중국) 수(隋)의 송자현(宋子賢)은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했다.11) 송(宋)의 왕칙(王則)은 『오룡적루경(五龍滴淚經)』을 익히고는 “석가(釋迦)가 쇠하여 물러나면 미륵불이 세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12)13)

14세기 후반 우왕(禑王) 때에 경상도 고성지방 출신인 이금(伊金, ?~1382)이 자칭 미륵불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일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삼월에 이르러서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으리라.”고 말하였다.14) 미륵불이 인간계의 천체운행질서와 연관된다는 믿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 우왕 7년(1381) 4월에도 개성에서 미륵을 자칭하는 승려가 나타났으며, 고려 우왕 8년(1382) 2월에도 사노(私奴) 무적(無敵)이 스스로를 미륵의 화신이라고 사칭을 하다가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15) 승려는 물론 노비도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사례가 확인된다. 신분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주장한 사례다.

조선(朝鮮) 숙종 14년(1688) 7월에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승려 여환(呂還)과 용녀부인(龍女夫人)이라 불리는 그의 아내 원향(元香) 등이 지금 세상이 석가의 시대<석가대(釋迦代)>이며, 이 시대의 수명이 거의 다하여 이제는 미륵불이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6)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의 진술에 “미륵불이 지금 당장 세상에 나온다.<미륵불금당출세(彌勒佛今當出世)>”라는 말이 전한다. 여환이 미륵불이라는 정확한 주장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여환이 미륵불이라는 암시를 했던 증언으로 보인다. 역시 반란을 도모한 사건에 미륵신앙이 이용된 사례다.

영조 34년(1758) 황해도 지역에서 생불 혹은 미륵이라 칭하는 네 명의 여성들에 의한 종교운동이 일어나 지역민들이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폐지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는 무당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은 미륵불이라 자칭하는 이금의 명령에 따라 신명에 대한 기도와 제사를 중지하였다.17) 이 사건은 미륵신앙이 민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다.

… <영조 34년(1758)> 수년 전 해서의 시골 여자 하나가 갑자기 미륵이 강림했다고 하면서 환망(幻妄)한 말을 많이 하자 사방에서 선동되었는데, 관에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미륵이라고 하면서 석가와 원수가 되었다고 했고, … 18)

위 사건에서 여성의 몸에 ‘미륵이 강림’했다는 주장이 있었던 점이 특기할만하고, 미륵과 석가를 대척점에서 인식하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그리고 영조 39년(1763) 10월에도 “황해도에서 미륵불이라고 일컫는 자가 있었기에 법으로 다스렸었다.”는 기록이 있다.19)

정조 9년(1785)에 함경도 삼수부에서 일어난 역모사건에서 신사(神事)를 주도한 단천성인(端川聖人) 혹은 미륵성인(彌勒聖人)이라고 불리던 여성은 이 의례를 베풀면 “새로운 세계<신세계(新世界)>를 맞을 수 있고 미륵세계(彌勒世界)를 맞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0) 이 사건에서 여성이 주도한 것이고, 특히 미륵이 미륵세계를 여는 신성한 존재로 믿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에 미륵신앙이 기복신앙에서 변혁사상으로 부상하였으며,21) 미륵신앙을 이상사회의 도래를 추구하는 혁명사상으로 파악한 연구가 있다.22) 그리고 미륵의 시대의 종말로부터 석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무가(巫歌) 속 창세(創世)신화의 전도된 형태로 비밀결사들의 반란신화가 파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3)

2. 증산교단의 미륵신앙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 불교를 ‘미륵을 기다리는 종교’라고 이해했다.

… 불교 신자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 24)

불교가 석가모니의 교법을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이지만, 그 중심교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륵세계를 기다리는 종교라고 인식한 것이다. 증산은 이제 불교는 과거의 부처가 아닌 새 부처인 미륵의 지상 강림을 대망하는 교리체계를 지녔다고 이해하였다.

나아가 증산은 “내가 바로 미륵불이다.”고 주장하고 선언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증산을 미륵불로 믿었다.

그리고 상제께서 어느 날에 가라사대 「나는 곧 미륵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아래 입술을 내어 보이시니 거기에 붉은 점이 있고 상제의 용안은 금산사의 미륵금신과 흡사하시며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白毫珠)가 있고 … 25)

증산은 자신이 살던 인근 지역에 있던 김제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에 안치된 미륵불상과 매우 비슷한 용모를 지녔다고 전한다. 이는 증산이 바로 미륵불이라는 믿음과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증산이 바로 미륵불”이라는 주변인들의 확고한 믿음은 이러한 전언과 퍼져나간 소문에 힘입어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미륵불의 지상 강림이 증산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종도(從徒)들의 소박한 믿음은 불교의 핵심교리가 증산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후대 증산교단의 굳건한 신행(信行)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증산은 “나는 곧 미륵(彌勒)이라.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장육금신(丈六金身)은 여의주(如意珠)를 손에 들었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하시고, 아랫입술 속에 있는 홍점(紅點)을 보여주셨다는 증산교단 최초의 기록이 전한다.26) 애초부터 증산은 “내가 바로 미륵불”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결정적인 증거로 입속의 붉은 점이 바로 여의주라고 강조했다고 전한다. 증산은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하였고, 그를 따르던 종도들도 그렇게 믿었으며, 신체의 점까지도 신비한 보물을 상징한다고 여겼음이 확인된다. 입속의 붉은 점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확대되기도 했다.27)

상제께서 형렬(亨烈)의 집에 머무르고 계실 때 형렬이 집안이 가난하여 보리밥으로 상제를 공양하여 오던 차에 八월 추석절을 맞게 되어 쇠솥을 팔아서 공양코자 하는지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彌勒佛)이 출세하리라」고 이르셨도다.28)

증산은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집안의 솥을 팔아서 음식을 마련하려는 제자에게 “솥이 들썩이는 것은 곧 미륵불이 출세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 금산사의 미륵불이 솥 위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에 빗대어 자신의 출현을 미륵불의 출세로 강조했던 것이다. 금산사의 미륵불은 연못 위에 조성되었는데, 철로 솥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불상을 세웠다고 전한다. 금산사의 미륵불만이 유독 솥 위에 입불(立佛)로 모셔져 있는 사실에 빗대어 증산이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한 것이다.29)

또 “석가불은 사바세계의 도주(道主)요, 미륵불은 용화세계의 도주이니, 사바세계는 고해(苦海)요 용화세계는 선경(仙境)이니, 미륵불의 조화선경은 하늘 문이 넓게 열리고 … ”라는 기록도30) 전한다. 석가모니와 미륵불을 비교하고 있으며, 각기 사바세계와 용화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존재라고 서술하고, 고해와 선경이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고 대비시킨다. 여기서 증산은 미륵불로서 장차 용화세계를 건설할 존재라고 강조한다.31)

나는 금산미륵(金山彌勒)이노라.32)

위의 구절은 증산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금산사의 미륵불이라고 주장했다는 전언이다. 증산이 불교의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특정 사찰의 미륵불상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말이다.

어느 제자가 증산에게 묻기를 “닥쳐올 난리에 차가운 쇠는 떠 있는 쇠이니, 쇠를 따르는 사람은 산다는 말이 있으니 그러하오니까”라 하니, 증산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러하므로 토정(土亭)이 천관산(天冠山) 아래 금인(琴人)이 옥새를 받들고, 모악산 금부처가 능히 말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라 하셨다. … 33)

“부금냉금”이라는 비결은 정확한 편찬연대를 알 수 없는 『정감록』에 수록된 「초창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부금냉금(浮金冷金)은 무엇이며, 엄택곡부(奄宅曲阜)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부금냉금은 농기구다. 엄택곡부는 밭 앞의 총록(總錄)이니, 모두 궁벽한 곳에 살며 농사짓는 것이다.”라 했다. … 34)

그리고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부처가 능히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조선 말기에 민간에 널리 퍼졌던 비결이다. “모악산두금불능어(母岳山頭金佛能語)”라는 표현이 현전하는 『정감록』 「운기구책」과 「감결」에 보인다.35) 이처럼 증산은 당시 민중 속에 널리 퍼졌던 미륵에 관한 비결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비결신앙은 대순진리회의 『전경』에도 다음과 같이 수용된다.

…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 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이라 …

란 구절을 외워주셨도다.36)

이와 관련하여 1920년대 초기에 보천교의 예언 해석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광축(光丑) 수변괴(雖變怪) 증산(甑山) 통구하(通九夏)”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광축은 광무황제(光武皇帝) 신축년(辛丑年, 1901)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축년은 증산대성께서 성도(成道)하신 해이다. 이때에 증산의 교(敎)가 구하 곧 천하에 통달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 이에 따라 같은 비결에 “팔난유오운(八難流午運), 명슬존태을(鳴膝尊太乙)”이라는 구절은 태을주(太乙呪)를 외우는 수련을 주로 하는 본교(本敎)를 따라야만 이 절박한 삼재팔난(三災八難)의 말세운수를 면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 같은 비결의 “장육금신(丈六金身) 화위전녀(化爲全女)”라는 구절은 화위전녀의 전녀(全女) 두 글자를 합하면 강(姜)자가 되는데 이는 금산사의 장육미륵불상이 강증산(姜甑山)으로 화신하였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 같은 비결에 “모악산하(母岳山下) 금불능언(金佛能言) 천관산하(天冠山下) 금인봉새(琴人奉璽)”라는 구절은 모악산하 금산사의 미륵불의 화신 강증산이 창교함으로써 천관산 곧 정읍 대흥리 앞에 있는 입암산(笠岩山) 머리에 금인(琴人) 차경석이 옥새를 받들어 제위(帝位)에 오른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 37)

“모악산하, 금불능언”과 “천관산하, 금인봉새”는 『정감록』에 자주 나오는 구절이다.38) 그러나 “장육금신(丈六金身), 화위전녀(化爲全女)”라는 구절은 보천교의 포교 활동이 활발할 당시에 이러한 비결이나 예언이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현존하는 이른바 『정감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구절은 당시 강증산의 출세를 비결로 풀이하려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결이라고 짐작된다.

증산은 “삼천(三遷)이라야 일이 이루어지느니라.”39)라고 말했는데, 이는 미륵불의 3회 설법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0) 대순진리회에서는 증산 → 정산 → 우당으로 이어지는 종통(宗統) 계승과 관련하여 이해한다.41) 그리고 증산의 친필저작인 『현무경(玄武經)』에 도솔(兜率)이라는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미륵보살이 거처하고 있다는 도솔천(兜率天)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된다.

한편 이능화(1869~1943)는 「조선고대신교이행(朝鮮古代神敎已行)」에서 “또 태을교(太乙敎)가 있는데 흠치교(吽哆敎)라고도 한다. 근년 호남에 강증산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름은 일순(一淳)이다. 28세에 금구군 금산사에 들어가 절의 동쪽 기슭에서 백일 간 이슬을 맞으며 좌정하여 득도하여 금산사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불렸다. 죽어서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이 되었다고 한다.”라는 기록을 남겼다.42) 증산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금산사의 미륵불과 동일시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태을천상원군이라는 도교적 성향이 짙게 풍기는 신격이 되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전언이다.

상제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에게 주고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느니라.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로다.43)

위의 인용문은 증산이 설립한 동곡약방에 비치된 물품의 목록기를 금산사에서 불태우는 상징적 행위에 의해 훗날 미륵불을 모신 전각의 전망이 석가불을 모신 전각의 전망보다 넓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미륵불이 석가불보다 우수한 존재라는 주장을 반영하는 대목이며, 이러한 일이 증산의 공사(公事)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부분이다.

증산은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오게 된 인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44)

증산은 이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구천(九天)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여러 신성한 존재들의 하소연에 의해 증산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서양에 있는 대법국의 천계탑에 내려와 세상을 둘러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지상에 안착할 장소를 물색하던 증산은 드디어 우리나라의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로 내려올 것을 결정한다. 증산은 금산사에서도 미륵금불에 안주하였다고 주장한다. 금산사에 있는 많은 불상 가운데서도 특히 미륵상(彌勒像)에 내려왔다고 주장한 것이다. 증산이 금산사 미륵금상에 머무른 기간은 무려 30년 동안이었다고 이야기된다. 오랫동안 금산사의 미륵금불에 영적(靈的)으로 머무르던 증산은 먼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세상을 구원할 책무를 맡겼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수운이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자 증산은 1864년 갑자년에 천명을 거두었다. 이 해는 수운이 죽음을 맞이한 해이다. 증산의 권능으로 천명을 거두자 이에 응해 수운이 숨을 거두었다는 말이다. 이윽고 증산은 1871년 신미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증산천사공사기』(1926)에는 팔괘(八卦)에 응하여 수운이 죽은 후 8년 만에 증산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설명한다. 증산은 자신이 바로 미륵불이라는 점을 이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전에 이미 금산사의 미륵금상에 영적인 존재로 머물렀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믿음에 힘입어 후대의 증산교인들은 금산사 미륵금상을 증산의 영체(靈體)로 신앙하였다.

한편 증산은 “내가 천하에 대순(大巡)하다가 석가모니의 당래불찬탄설게(當來佛讚歎說偈)에 의거하여 승(僧) 진표(眞表)가 당래(當來)의 비음(秘音)을 감통(感通)하고 모악산 금산사에 금신(金身)을 세워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곳에 이르렀느니라.”라고 말했다.45)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고 하셨도다.46)

증산은 임종 무렵에 “나를 보려면 금산사로 오너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금산사는 거대한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미륵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불교사찰이다. 증산은 자신이 죽은 후에 자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금산사의 미륵불을 참배하러 오라고 말했다. 증산이 불교의 사찰과 불상을 자신의 신앙체계 안으로 흡수한 지점이다. 어쨌든 증산이 자신을 금산사의 미륵불과 동일시했던 점은 분명히 확인된다.

Ⅲ. 증산교단과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 현황

증산교단 미륵신앙의 출발과 성립은 증산이 자신의 영체(靈體)라고 주장한 금산사의 미륵불상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금산사가 위치한 김제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방룡은 “‘미륵이 출현하여 용화회상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메시지는 미륵신앙 혹은 미륵신앙운동에 민중들을 끌어들이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역사 속에서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메카로 민중들 속에서 자리매김한 것은 진표 당시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증산교단이 활발히 활동할 때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한다.47)

김형렬(金亨烈)의 미륵불교(彌勒佛敎), 유제봉(柳濟鳳)과 최선애(崔善愛)의 대한불교법상종, 강순임(姜舜任)의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 정인표(鄭寅杓)의 태인(泰仁) 미륵불교, 김낙원(金洛元)의 오동정교단, 김홍현(金洪玄)의 대한불교미륵종 등 거의 모든 증산교단에서는 증산과 미륵불을 동일시하여 신앙한다. 특히 서백일(徐白一, 1893~1966)의 용화교(龍華敎)에서는 교주 스스로가 미륵불을 자처했다는 특색이 있다.48)

김근하(金槿下, 1901~1971)의 용화사(龍華社)에서는 증산을 창조주이자 하느님이시며, 미륵부처님이시며,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후신(後身)으로 믿었다.49) 증산에게 여러 신격의 최고신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믿음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증산과 미륵불이 일체라는 신앙과는 결을 달리한 점이 독특하다.

이효진(李孝鎭, 1920~2007)의 이제원(夷齊院) <동곡서원(銅谷書院)>에서는 증산을 미륵불로 존칭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미륵불은 대두목(大頭目)으로 증산과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금산사의 미륵불이 증산상제께서 내려보내는 대두목이자 단주(丹朱)라고 강조했다.50) 이처럼 증산과 미륵불이 별도의 존재라고 믿었던 증산교단도 있었던 점이 매우 특기할만하다.

『대순전경』을 편찬한 이상호(李祥昊, 1888~1867), 이정립(李正立, 1895~1968) 형제가 창교한 교단은 1928년 동화교(東華敎) → 1945년 대법사(大法社) → 1955년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 → 1961년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 → 1968년 증산교본부(甑山敎本部)로 교단명을 바꾸어왔다. 이 교단에서는 미륵불을 따로 조성하여 모시지 않았고, 증산을 통천상제(統天上帝)이자 미륵불로 신앙한다. 증산과 미륵불을 일체로 보고 믿는다.

안세찬(安世燦, 1922~2012)의 증산도에서는 의례 때마다 읽는 「심고문(心告文)」에서 “우주일가의 후천선경을 열어주신 개벽장 하느님이시며, 미륵존불이시며, 삼계대권을 주재하옵신 증산 상제님”이라는51) 표현을 사용한다. 증산을 하느님이자 미륵불이며 상제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외에 미륵신앙을 하고 있는 증산교단을 열거해보면 용화교(이근하), 용화미륵불연구소(서승영), 미륵증산교(정삼룡), 증산미륵도(장영주), 미륵종산대도회(서원섭), 용화세존미륵불증산대도회(서원호), 증산진법회(배용덕), 동도법종금강도(강승태), 청도대향원(김삼일), 증산도장(안세찬), 금산사미륵불숭봉회(정혜천), 미륵교(유동윤), 용화사(김근하), 미륵정심회(이호정), 미륵증산교(정삼례), 증산미륵도(장영준), 미륵불영원회(정공일), 대한법상종광제원(변중규), 인도교(채경대) 등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52)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교단 이외에도 미륵회불숭배회(彌勒會佛崇拜會),53) 장영주(張永株, 1930~2011)의 한국미륵사상연구회<진해원(眞解寃)>54), 서원섭이 1968년 부산에 세운 (徐元燮)의 용화미륵불증산대도(龍華彌勒佛甑山大道)에서도 증산을 미륵불로 신앙한다.

그리고 서승영(徐承泳)의 용화미륵불교연구회에서는 그가 미륵세존님으로부터 상생원리(相生原理)의 대근원(大根源)인 불종송주경(佛宗誦呪經)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악한 자는 미륵세존님의 호신천부인(護身天符印)을 받지 못해 신병(神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55) 미륵불로부터 새로운 경전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한 점이 특기할만하고, 미륵불이 신병을 물리치는 특별한 부적을 전해준다는 믿음이 독특하다.

또한 유동윤(1899~?)이 창립한 미륵교(彌勒敎), 정혜천(鄭惠天, 1912~2008)이 1973년에 결성한 미륵숭봉회(彌勒崇奉會),56) 서원호(1912~1982)가 1975년에 부산에서 세운 용화세존미륵불증산대도회 등에서도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이 확인된다.

우당(牛堂) 박한경(朴漢慶, 1917~1996)이 1969년 4월에 서울 중곡동에서 창설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1993년 2월에 경기도 여주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대순진리회는 1925년에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1958)가 세운 무극도(无極道)에서 비롯했는데, 신앙대상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인 증산을 신앙하는 교단이다.

우당은 석가불이 3천 년 운(運)이고, 미륵불이 5만 년 운(運)이라고 주장했다.57) 불교의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가 3천 년이 지난 후에는 미륵불의 5만 년 운수가 도래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동학 이후 한국신종교의 ‘후천 오만년 운수’를 강조한 대목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당은 “미륵금불의 금(金)이 서방(西方) 4ㆍ9 금(金) 즉 가을을 상징하며, 후천 가을 시대를 열기 위해 증산이 상제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말했다.58) 복희역(伏羲易)을 근거로 후천을 가을 금(金)에 비유한 대목이다. 역학(易學)을 빗대어 미륵불을 설명하려 했던 점이 특기할만하다.

대순진리회의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는 1997년 11월 24일에 미륵불을 봉안하였다.59) 이러한 사실에 대해 교단 측에서는 “후천선경을 열어주실 미륵불이 금강산 1만 2천봉의 지기(地氣)를 머금고 있는 토성도장에 봉안됨으로써, 도인들은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60) 미륵불이 후천선경을 열어줄 주체적 신격으로 표현된 것이며, 금강산의 땅 기운을 본받아 1만 2천 명의 도통군자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과 연결시켰다. 불교의 미륵신앙을 후천 건설이라는 한국신종교의 독창적인 교리와 관련지었고, 특히 금강산의 기운이라는 지기(地氣)를 주장하여 민간신앙을 흡수하면서 그 종교적 의의를 내세운 점이 특징적이며, 그 결과 1만 2천 명의 도통한 인물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과 결부시킨 점이 독특하다. 이는 불교 미륵신앙의 한국신종교적 변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의 이러한 주장과 믿음은 미륵불과 증산상제와의 신격(神格)의 동이(同異)에 대한 의문은 물론 두 신격 사이의 구체적 관련성이 다소 애매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 취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토성수련도장에는 여주본부도장과 마찬가지로 영대(靈臺)에 증산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이처럼 증산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토성수련도장에 따로 미륵불이 입상으로 모셔짐으로써 증산과 미륵불이 같은 신격으로 이해되고 믿어질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순진리회에서는 증산상제가 구제창생(救濟蒼生)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종교적 함의를 다만 미륵불이라는 상(像)으로 모신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대순진리회의 도인들은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의 미륵불에는 평배 4배를 올린다. 석가여래(釋迦如來) 전에도 평배 3배를 올리는데, 이보다 격을 높여 예를 드리는 것이다. 불교의 석가모니불보다 미륵불이 더 높은 신격이라는 뜻이 담긴 의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우당은 그 배례의 격식에 대해서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고, 현재는 도인들이 배례와 읍배를 자율적 정성으로 올린다고 한다. 우당은 토성수련도장에 미륵불을 모시라고 분부했을 때 “이 미륵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모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61) 결국 우당은 “증산이 곧 미륵불이다.”라는 것을 “상징적인 의미로 모신다.”고 말한 바 있다. 미륵불은 증산상제를 ‘상징’하는 신격일 따름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대순진리회에서는 증산을 구원의 절대자를 상징하는 미륵부처님의 상으로 모심으로써 일반인들의 신행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지점에서 기존의 여러 증산교단의 미륵신앙과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이 차이를 가질 수 있다. 미륵불에 대해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면은 향후 좀 더 깊이 있는 천착을 통해 핵심적인 교리로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당(박한경 도전)은 미륵삼존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도전님께서는 솥 위에 얹혀있는 것은 모두 ‘시루’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솥 위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이 곧 ‘시루 <증(甑)>’에 해당이 되고, ‘산(山)’ 글자 형태의 미륵삼존불로 서 있는 까닭에 솥 위의 미륵은 결국 ‘증산(甑山)’을 표상(表象)하고 있다.62)

솥 위에 얹혀있는 형태로 세워진 금산사의 미륵불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당은 솥 위에 서 있는 불상(佛像)은 모두 ‘시루’이며, ‘시루’는 곧 ‘증(甑)’자로 표현되기 때문에 미륵불은 곧 증산을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증산의 호에 나오는 ‘산(山)’자에 대해서도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미륵불을 보위하는 협시보살 두 위(位)를 함께 모시는 일을 뜻한다고 밝혀주었다.

한편 금산사의 미륵불에 대한 신행은 대순진리회에서도 확인된다. 대순진리회 도인들의 주요 성지순례지에는 김제 금산사(金山寺)가 포함되기도 한다는 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순진리회에서는 금산사의 미륵불상을 참배하는 대신에 왜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따로 거대한 미륵불을 석상으로 조성하여 모시는지에 대한 보다 명확한 교단 측의 입장이 표명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대순진리회에서는 금산사의 미륵불이 가지는 종교적 함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용추(용소)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놓은 위에 미륵불을 봉안한 것은 증산(甑出), 정산(鼎山), 양산(兩山)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 놓은 것이며, 상제님께서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도 미륵불과 솥의 양산의 이치를 알라는 말씀인 것입니다.63)

대순진리회에서는 시루와 솥을 상징적으로 모신 금산사 미륵불의 모습을 증산에서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1958)로 이어지는 종통의 계승을 밝혀주는 결정적 근거로 본다. 여기서 시루는 솥 위에 모셔진 미륵을 상징한다. 어쨌든 이러한 주장은 대순진리회의 연원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내용이다.

위의 인용문과 관련한 『전경』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또 상제께서는 때로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시고 세속에 있는 말의 양산도와 비유하기도 하셨도다.64)

한편 이봉호는 “증산의 신격은 불, 보살, 신성들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서학까지도 초월하는 궁극적 신격으로서 모든 신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신격인 ‘상제’인데, ‘증산즉미륵(甑山卽彌勒)’의 입장을 견지하면, 궁극적 신격으로서 구천상제의 신격을 축소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천상제(九天上帝)로서 증산은 특정한 종교의 특정한 신(神)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65) 증산의 신격이 불교의 미륵불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향후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과 다른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의 특징이 과연 무엇인가를 천착하는 작업이 종단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야 하겠다. 그 핵심은 구천상제와 미륵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증산교단의 미륵하생신앙의 특징을 류병덕은 첫째, 미륵으로 나타날 인물을 찾으려는 태도, 둘째, 미륵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선택된 땅을 찾으려는 것, 셋째, 미륵 하생의 시기를 정하고 기다리는 태도, 넷째, 미륵이 하생하기 위해서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된다는 태도, 다섯째, 대망의지(待望意志)로 현실을 부정하며 요행을 찾는 태도 등으로 정리하였다.66)

Ⅳ.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 재고(再考)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종교적 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다소 애매모호하게 제시되는 미륵사상과 증산신앙의 경계가 보다 분명하게 설명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증산교단에서는 ‘새 세상을 다스릴 새로운 부처’가 바로 교단의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이라고 믿는다. 불교의 미륵불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증산이 바로 새로 오신 미륵불이라는 강력한 신앙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는 불교의 미륵신앙을 한국적으로 독특하게 전개한 종교현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증산교단은 불교 교리의 창조적 수용과 변용을 이룸과 동시에 그 발전적 계승을 시도한 신종교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증산은 자신이 살던 인근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유력한 종교운동이었던 금산사의 미륵불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독창적으로 변용하였다. 증산은 자신을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자처했으며, 세계의 우주론적 변혁을 주재할 존재로 인식했다. 따라서 이러한 확신과 인식을 바탕으로 증산이 곧 ‘구원의 절대자’라는 믿음이 형성되었고, 불교의 구원자인 미래불로서의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가 바로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부분 증산교단의 신앙과는 달리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은 맥락이 약간 다르다. 한 도장에 증산의 진영과 미륵입상을 같이 모심으로써 증산신앙과 미륵사상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두 신앙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앞으로 미륵불과 증산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연구가 필요하며, 교리적 차원에서도 더욱 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모셔진 미륵입상의 모습에 관한 종교적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증산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영적 존재로서 금산사의 미륵불상에 삼십 년 동안 머물렀다고 주장하였고, 증산의 모습이 금산사의 미륵불과 매우 비슷했다는 전언이 있으며, 스스로를 금산사 미륵불로 자처했으며, 사후에는 금산사의 불양답을 차지하겠다는 말을 남겨 금산사의 미륵불을 중심으로 독창적인 미륵사상을 성립하였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에서 모셔진 미륵입상은 금산사 미륵불상의 모습이 아니라 관촉사의 미륵불상과 모습이 흡사하다. 왜 이러한 변화가 있었을까에 대한 종교적 의문에 대해 교단 측에서는 일정한 해답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증산이 주장한 미륵사상의 핵심은 금산사의 미륵불상과 깊이 연관된 것이었는데, 백여 년이 지난 후에는 입상(立像)의 또 다른 대표적 불상인 관촉사의 미륵불상과 관련이 있는 신행으로 바뀌었다. 왜 이러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보다 친절한 교단측의 설명이 요청된다. 또 향후 이러한 입장에 대한 교리적 설명이 부연되었으면 한다.

셋째,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은 불교의 미륵 하생(下生)의 모티브만 차용했을 뿐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하겠다. 미래의 먼 훗날에 이 땅에 내려오실 미륵부처님에 대한 불교의 미륵신앙이 이 땅에 이미 증산이라는 인물이 미륵불로서 강림하셨다는 믿음과 신행이 핵심인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으로 성립되고 전개되었다. 불교의 미륵하생신앙은 전륜성왕에 의해 평정된 이상적인 세상에 미륵이 내려와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무수히 많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믿음이지만,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은 당래불(當來佛)로서의 미륵불이 증산으로 지상에 이미 내려와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독창적인 종교적 행위로 이상사회의 지상건설을 주도했다는 믿음이다. 불교 전통에서 미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부처다. 그렇지만 증산은 미륵을 자신이 살던 당대에 출현한 ‘현재’의 부처라고 주장했다. ‘아직 오지 않은 부처’가 아니라 ‘지금 와 있는’ 부처라는 선언을 통해 불교의 미륵신앙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전통과 신앙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미륵불이 자신의 세 차례에 걸친 설법을 통해 구원을 행하려 한다는 믿음체계이지만,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은 창시자이자 미륵불인 증산이 천지공사라는 신비한 종교적 행위로 미래의 일을 미리 확정해놓았고 이 원리에 따르는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강조한다. 앞으로 이와 관련하여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이 현재불 중심과 실천덕목을 중심으로 집약된 면이 더욱 연구되어야 하겠다.

넷째,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의 독특한 점은 창시자인 증산을 미륵불이자 상제(上帝)로 믿는다는 복합성에 있다는 점이 거듭 밝혀져야 할 것이다. 증산은 불교의 이상적 존재인 미륵불인 동시에 동양문화권의 최고주재자인 유교적 관념에서의 이상적 존재인 상제(上帝) 또는 구천상제(九天上帝)로 받들어지고 믿어졌으며, 나아가 도교적 최고신격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으로도 숭앙된다. 동양문화권의 각 종교에서 숭봉되는 최고신격이자 이상적 신격이 증산이라는 한 인물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지는 신행이 주장되며 강조되는 것이다. 이는 여러 종교의 통합과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 신종교의 고유한 입장에서 성립되고 전개된 독특한 종교적 현상과 신행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불교의 미륵신앙이 한국 신종교의 교리체계에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불교의 미륵신앙과 구별되는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만의 고유한 특성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미륵신앙이 용화회상(龍華會上)에서 미륵불이 출현하여 행할 세 차례의 설법을 듣고 구원받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신행인데 반해,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은 증산이 행한 천지공사를 그가 짜놓은 도수(度數)에 따라 이 세상에서 직접 참여하고 실제로 이루어야 하는 노력과 수행에 의한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미륵불의 설법을 청해 듣는 행위에 의한 일방적인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 증산 미륵불의 공사(公事)에 실제로 참여하고 함께 이루어나가는 실천이 더욱 강조되었다. 믿음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이 역설된 것이다. 결국 구원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짓고 만들어가는 공동의 실천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과 믿음이다. 불교에서는 미륵불을 단순히 믿고 따르는 일이 강조되었다면, 대순사상에서는 미륵불의 구원행(救援行)에 함께 동참하는 일이 매우 강조된 셈이다. 향후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이 도덕적 자각을 통한 실천운동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하겠다.

여섯째, 불교의 미륵신앙을 넘어선 대순진리회의 독창적인 미륵사상 체계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대순진리회 미륵사상의 중심을 잡아야 향후 신행의 바람직한 척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불교의 미륵신앙과는 맥락과 결을 달리하는 대순사상 고유의 독창적인 미륵사상을 확립하고자 할 때 예상되는 일들을 미리 예상하고 그 해결을 위한 작업에 보다 집중해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미륵은 불교 전통의 맥락에 놓여 있을 때 이미 ‘미래’에 올 존재였다. 따라서 미륵불은 석가, 관음, 아미타보다 다음 세상의 지배자이자 구원자로 선택되기에 적합했다. 이와 관련하여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에서 미륵의 시간도 가까운 역사적 미래에 놓여 있다. 석가불로 대변되는 현재의 세상은 쇠락하고 멸망해야 할 낡은 세계로 인식된다. 반면 미륵불로 믿어지는 증산이 주도할 이 세상은 쇠락한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시대, 곧 혁세(革世)의 상징이 된다.

금산사의 미륵전을 중심으로 찾아들었던 대부분의 미륵신자들은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 신도들이었다. 이들의 미륵신앙은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에 전통적인 불교의 미륵신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종익(李鍾益, 1912~1991)은 불교십선운동본부(佛敎十善運動本部)를 조직하고, 훗날 조계종의 총무원장이 된 송월주(宋月珠, 1935~2021)는 미륵정신회(彌勒正信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증산을 미륵불로 신앙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어쨌든 여러 증산교단에서 교조인 증산을 미륵불로 믿고 불교적 교단 명칭을 사용하는 교파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불교의 미륵신앙을 나름대로 한국 신종교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미륵불교, 대한불교법상종, 용화교, 용화사, 대한불교미륵종 등의 교단명은 얼핏 보면 불교의 한 종파로 보기 쉽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교리를 살펴보면 증산 강일순을 미륵불로 모시는 단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교의 교리가 한국 신종교의 교리로 변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행은 ‘불교 미륵신앙의 한국적 변용’으로 이름할 수 있겠다.

불교의 고유한 미륵신앙과는 다르게 교단의 창시자가 미륵불로 오셨다는 믿음을 각자 나름대로 전개하는 형식으로 전개된 한국 신종교 특히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은 주목할 만한 특유의 특징을 지닌다. 증산교단에서는 미륵불이 인간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현현하였다는 하생(下生)신앙을 특히 강조한다. 여기서 미륵불은 내생이 아닌 현생에서 인간 구원을 위해 헌신한다고 믿어진다. 도솔천에서 설법하는 미륵불이 아니라 이 세상에 몸을 나투어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어나갈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득히 먼 미래의 특정 시점에 이 세상에 내려올 것으로 기대되는 미륵불의 하생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내려온 미륵불이 요청되는 각종 정치ㆍ사회적 요구에 따라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역사적으로 미륵불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때로는 정치적 군왕의 모습으로, 때로는 종교적 단체의 수장으로 미륵불을 자처하는 인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 근대종교사에서도 증산이 미륵불을 자처했다. 그는 금산사의 미륵대망(彌勒待望)신앙에 주목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종교행위인 천지공사(天地公事)와 연관시켰다.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하고 그 자격과 권능으로 우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천지공사를 집행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실 여부와 실현 여부는 믿음의 영역에 있는 문제이지만, 그 종교적 천재성이 번뜩임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증산에게 있어서 이상사회의 현재적 건설이 목표로 상정된다. 현세구원의 관점에서 미륵신앙이 변용되어 이해된 것이다.

그리고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은 미륵의 세상을 지금 여기서 만들어나가자는 도덕적 실천운동과 자각을 요청하는 신행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으로 내가 믿는 종교의 창시자가 미륵불이라는 믿음은 자칫하면 이웃 종교를 무시하는 오만으로 보여질 수 있다. 나를 철저히 낮추고 미륵불을 모시는 마음과 행동은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화두로 삼아 현재의 관점에서 이상사회를 지상에 이루려는 온갖 노력이 뒤따를 때 비로소 미륵의 세상이 점차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믿음과 이상은 행위와 실천을 통해서만이 현실화될 수 있다.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는 이상향이 저절로 이 세상 펼쳐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륵불의 설법을 듣고 이를 믿고 따르는 중생들의 끊임없는 오랜 노력이 쌓일 때 비로소 이 땅에 용화의 이상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미륵하생신앙은 미륵불의 설법이 전제된다면, 대순진리회의 미륵사상은 증산의 천지공사가 전제되는 이상사회관을 주장한다. 현대의 미륵불 선양운동인 십선(十善)운동과 증산교단의 미륵신앙의 접점을 찾아 미륵불을 모시고 미륵불의 온전한 정신을 이 땅에 구현하고 실천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미륵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Notes

홍윤식, 「한국사상에 있어 미륵신앙과 그 사상적 구조」, 『한국사상사학』 6 (1994), p.75.

한승훈, 「미륵, 개벽, 요나오시 : 동아시아 종교사에서의 위기와 혁세 인식」, 『종교와 문화』 40 (2021), p.33.

미야타 노보루<宮田登>, 『미로쿠신앙의 연구』 (동경: 미래사, 1975), pp.323-324.

구사회, 「미륵사상과 강증산」, 『불교어문논집』 3 (1998), p.43.

윤재근, 「증산사상의 불교 수용과 해석」, 『신종교연구』 23 (2010), p.181, p.188.

김남희, 「증산교의 미륵신앙의 수용과 전개과정」, 『한국불교학회』 61 (2011), p.100.

이병욱, 「한국불교에서 본 대순사상 : 미륵사상과 삼교회통(조화)사상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5 상 (2015), p.183.

최종석, 「증산교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 : 미륵신앙의 수용을 중심으로」, 『선문화연구』 23 (2017), p.248, p.255.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교운 1장 16절.

『위서(魏書)』 권19 상, 경목 12왕(王), 열전 제7 상; 미쓰이시 젠키치, 『중국의 천년왕국』, 최진규 옮김 (서울: 고려원, 1993), pp.98-150.

대업(大業) 9년(613)에 일어난 사건이다.

왕칙에 대한 기록은 『송사(宋史)』 권292, 열전 51, 「명호(明鎬)」에 나온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7, 인사문(人事門), 「미륵불」에서 재인용.

『고려사』 권107, 열전 20, 「권화(權和)」.

『고려사』 권134, 열전 47.

이 사건에 대해서는 김탁, 『조선의 예언사상』 상 (성남: 북코리아, 2016)과 한승훈, 『조선후기 혁세적 민중종교운동 연구 : 17세기 용녀부인 사건에서의 미륵신앙과 무속』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2)을 참고하시오.

최종성, 「무업(巫業)없는 무당 : 개종상황에 놓인 조선의 무당들」, 『종교학연구』 32 (2014), pp.11-17.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7, 인사문(人事門) 「미륵불」.

『조선왕조실록』 영조 39년 10월 2일자.

고성훈, 「정조년간 삼수부 역모사건의 추이와 성격」, 『사학연구』 90 (2008)을 참고하시오.

고성훈, 「조선후기 민란의 전형 : 미륵신앙과 정감록을 내세운 변란」, 『민란의 시대 : 조선시대의 민란과 변란들』 (서울: 가람기획, 2004).

정석종,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서울: 일조각, 1983), pp.46-47.

한승훈, 「미륵의 시대, 진인의 귀환 : 조선후기 종교운동에 대한 ‘반란의 현상학’」, 『종교연구』 75 (2015).

『전경』, 예시 79절.

같은 책, 행록 2장 16절.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146.

김찬문ㆍ김태진, 『천지공사 실록 동곡비서』 (서울: 동곡서원, 1990), p.30, “또 가라사대 「금산사 삼층전 미륵은 손바닥에 불(여의주)을 받았으나, 나는 입에다 물었노라.」하시고 입을 열어 보여주시니, 좌측 볼에 붉은 점이 바둑돌 같이 박혀 있더라.”

『전경』, 예시 86절.

홍범초, 『증산교개설』 (서울: 창문각, 1982), p.149.

이중성, 『천지개벽경』 (서울: 대도연수원 부설 용봉출판, 1992), pp.55-58.

같은 책, p.59.

같은 책, p.14.

같은 책, p.51.

안춘근, 「초창결」, 『정감록집성』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3), p.173, “ … 問曰, 浮金冷金何也? 奄宅曲阜何也? 曰, 浮金冷金, 卽農具, 奄宅曲阜, 卽前田總錄耳. 都是窮居作農也 … .”

「운기구책」, 『정감록』 (경성: 한성도서주식회사, 1923); 안춘근, 『정감록집성』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3), p.497; 「감결」, 『정감록』 (경성: 한성도서주식회사, 1923); 안춘근, 『정감록집성』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3), p.601; 「감인록」, 『정감록』 (경성: 한성도서주식회사, 1923); 안춘근, 『정감록집성』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3), p.624. 「감결」과 「감인록」에는 금불능언(金佛能言)으로 나온다.

『전경』, 예시 14절.

홍범초, 『범증산교사』 (서울: 한누리, 1988), pp.76-77.

「운기구책」, 『정감록』 (한성도서주식회사, 1923); 안춘근, 『정감록집성』 (아세아문화사, 1973), p.497, 자세한 내용은 김탁, 『일제강점기의 예언사상』 (성남: 북코리아, 2019)를 참고하시오.

『전경』, 예시 87절.

홍범초, 『증산교개설』 (서울: 창문각, 1982), pp.162-163.

『대순회보』 201, 「대순진리회의 종통」 가운데 ‘삼천의 이치’를 참고하시오.

이능화, 「조선고대신교이행(朝鮮古代神敎已行)」, 『역주 조선불교통사 6』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p.596.

『전경』, 공사 2장 11절.

같은 책, 교운 1장 9절.

『대순전경』 초판 (경성: 동화교회도장, 1929), 9장 11절.

『전경』, 행록 5장 29절.

김방룡, 「금산사의 미륵신앙과 호국애민정신」, 『금산사와 호국불교』 (서울: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21), p.83.

《동아일보》 1966년 3월 28일자 기사에 “미륵불이란 존칭을 받아왔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전경현, 『범증산종단사』 하권 (서울: 해피로라, 2019), p.312.

같은 책, p.386.

『증산도도전』 (서울: 대원출판사, 1992).

김홍철, 「한국신종교의 미륵신앙」, 『한국사상사학』 6 (1994), p.260.

1950년에 강성태(姜聖泰)를 중심으로 조직된 교단이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여러 미륵신앙이 별립하여 팽창하는 것을 통합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많은 금액을 편취한 후 곧 사라졌다. 유병덕, 『계룡산하 종교집단체와 모악산하 종교집단체의 비교 연구』 (이리: 원광대학, 1968), p.259-260.

애초에는 진혜원(眞慧院)이었는데 이름을 바꾸었다.

전경현, 『범증산종단사』 하권 (2019), p.525, p.527.

훗날 증산대도일화장(甑山大道一俰場)으로 이름을 고쳤다.

「도전님 훈시」 1991년 2월 12일(미공개 자료).

「도전님 훈시」 1992년 4월 9일(미공개 자료).

높이 19.5m, 둘레 12.12m의 동양 최대의 입석 미륵불로, 형태는 관촉사의 은진 미륵불과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되었다.

「종단소식」, 『대순회보』 57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97), p.8.

윤미정,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의 미륵불에 대한 예(禮)」, 『대순회보』 214 (여주: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2019), p.27.

대순진리회 교무부, 「상제님께서 금산사 미륵금불에 임어하시다」, 『대순회보』 69 (여주: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2007), p.14.

「도전님 훈시」, 『대순회보』 5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6), p.2; 『대순지침』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2), pp.14-15.

『전경』, 예시 15절.

이봉호, 「전경에 나타난 ‘미륵’의 성격」, 『대순사상논총』 26 (2016), p.48, p.70.

유병덕, 「일제시의 미륵하생신앙」, 『한국미륵사상연구』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pp.219-239.

【참고문헌】

1.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2.

『대순지침』,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2..

3.

「도전님 훈시」, 『대순회보』 5,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6..

4.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5.

『대순전경』 초판, 경성: 동화교회도장, 1929..

6.

『증산도도전』 서울: 대원출판사, 1992..

7.

『정감록』 경성: 한성도서주식회사, 1923..

8.

『고려사(高麗史)』.

9.

『삼국사기(三國史記)』.

10.

『삼국유사(三國遺事)』.

11.

『성호사설(星湖僿說)』.

12.

『송사(宋史)』.

13.

『수서(隋書)』.

14.

『원사(元史)』.

15.

『위서(魏書)』.

16.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7.

김찬문ㆍ김태진, 『천지공사 실록 동곡비서』, 서울: 동곡서원, 1990..

18.

고성훈, 「조선후기 민란의 전형 : 미륵신앙과 정감록을 내세운 변란」, 『민란의 시대 : 조선시대의 민란과 변란들』, 서울: 가람기획, 2004..

19.

고성훈, 「정조년간 삼수부 역모사건의 추이와 성격」, 『사학연구』 90, 2008..

20.

구사회, 「미륵사상과 강증산」, 『불교어문논집』 3, 1998..

21.

김남희, 「증산교의 미륵신앙 수용과 전개과정」, 『한국불교학회』 61, 2011. http://uci.or.kr/G704-001245.2011..61.001.

22.

김방룡, 「금산사의 미륵신앙과 호국애민정신」, 『금산사와 호국불교』, 서울: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21..

23.

김삼룡, 『한국미륵신앙의 연구』, 서울: 동화출판공사, 1983..

24.

김탁, 『조선의 예언사상』 상, 성남: 북코리아, 2016..

25.

김탁, 『일제강점기의 예언사상』, 성남: 북코리아, 2019..

26.

김홍철, 「한국신종교의 미륵신앙」, 『한국사상사학』 6, 1994..

27.

대순진리회 교무부, 「상제님께서 금산사 미륵금불에 임어하시다」, 『대순회보』 69, 여주: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2007..

28.

목정배, 「한국 미륵신앙의 역사성」, 『한국사상사학 6집 : 미륵사상의 본질과 전개』, 서울: 서문문화사, 1994..

29.

미쓰이시 젠키치, 『중국의 천년왕국』, 최진규 옮김, 서울: 고려원, 1993..

30.

유병덕, 『계룡산하 종교집단체와 모악산하 종교집단체의 비교 연구』, 이리: 원광대학, 1968..

31.

유병덕, 「일제시의 미륵하생신앙」, 『한국미륵사상연구』,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32.

안춘근, 『정감록집성』,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3..

33.

양백의(陽白衣), 「미륵신앙재중국적유전(彌勒信仰在中國的流轉)」, 『마한백제문화』 7, 1984..

34.

윤미정,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의 미륵불에 대한 예(禮)」, 『대순회보』 214, 여주: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2019..

35.

윤재근, 「증산사상의 불교수용과 해석」, 『신종교연구』 23, 2010. .

36.

이능화, 「조선고대신교이행(朝鮮古代神敎已行)」, 『역주 조선불교통사 6』,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37.

이병욱, 「한국불교에서 본 대순사상 : 미륵사상과 삼교회통(조화)사상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5 상, 2015. .

38.

이봉호, 「전경에 나타난 ‘미륵’의 성격」, 『대순사상논총』 26, 2016. .

39.

이중성, 『천지개벽경』, 서울: 대도연수원 부설 용봉출판, 1992..

40.

전경현, 『범증산종단사』 상ㆍ하, 서울: 해피로라, 2019..

41.

정석종,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서울: 일조각, 1983..

42.

「종단소식」, 『대순회보』 57,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97..

43.

최종석, 「증산교에 나타난 불교적 요소 : 미륵신앙의 수용을 중심으로」, 『선문화연구』 23, 2017. .

44.

최종성, 「무업(巫業)없는 무당 : 개종상황에 놓인 조선의 무당들」, 『종교학연구』 32, 2014..

45.

한승훈, 『조선후기 혁세적 민중종교운동 연구 : 17세기 용녀부인 사건에서의 미륵신앙과 무속』,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2..

46.

한승훈, 「미륵의 시대, 진인의 귀환 : 조선후기 종교운동에 대한 ‘반란의 현상학’」, 『종교연구』 75, 2015. .

47.

한승훈, 「미륵, 개벽, 요나오시 : 동아시아 종교사에서의 위기와 혁세 인식」, 『종교와 문화』 40, 2021. .
.

48.

홍범초, 『증산교개설』, 서울: 창문각, 1982..

49.

홍범초, 『범증산교사』, 서울: 한누리, 1988..

50.

홍범초, 「한국사상에 있어 미륵신앙과 그 사상적 구조」, 『한국사상사학』 6, 1994..

51.

Barend J. Ter Haar, 『중국 역사상의 민간종교운동 : 백련교의 실체와 그 박해』, 송요후 옮김, 서울: 신서원, 2007..

52.

미야타 노보루<宮田登>, 『미로쿠신앙의 연구』, 동경: 미래사, 1975..

53.

《동아일보》 1966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