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 비교 고찰

안유경1,*
Yoo-kyoung An1,*
1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1Researcher, Youngnam Culture Institute of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Copyright 2022,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12, 2022 ; Revised: Sep 01, 2022 ; Accepted: Sep 14, 2022

Published Online: Sep 30, 2022

국문요약

본 논문은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생명과 생명 윤리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제기되는 이 시대에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해보려는 것이다.

유학과 대순사상은 모두 천지의 생명원리, 즉 생명의지(生意)와 신명에 근거하여 만물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 때문에 천지 속의 만물은 동일한 생명원리를 얻어서 생겨난 것이므로, 동일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여기에서 만물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동체(同體)의식이 성립하니, 이러한 동체의식은 만물이 모두 하나(전체의 일부)라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로써 천지 속의 만물은 모두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니, 나와 남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할 소중한 삶의 동반자가 된다.

그럼에도 유학과 대순사상은 모두 만물과 달리 인간을 빼어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의 우수성은 그대로 주체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찰ㆍ반성하여 자신을 완성시키고 만물을 완성시킴으로써 공존ㆍ공생의 대도(大道)를 이루게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의 본성을 실현하고 올바른 인간상을 확립하는 수양과 수도의 공부가 제시된다. 이러한 수양과 수도를 통해 본성 또는 인간상을 실현함으로써 천지화육 또는 천지공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천ㆍ지ㆍ인 삼재(三才)사상의 내용이다.

결국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은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동체의식에 근거하면서도 만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징과 역할을 강조하며, 이때 인간의 특징과 역할은 그대로 만물을 이끼고 보살피는 책임과 사명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볼 때,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은 그 이론구조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newly investigate the meaning of life in this era when various discussions on life and ethical living are commonly raised by comparing and examining the theories of life proposed by 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Both 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explain the creation of all things as having been based on the principles of life in heaven and earth. Specifically, there is the will to live (生意 saengeui) and also divine beings (神明 sinmyeong). For this reason, everything in heaven and earth is created by obtaining the same principle of life such that it is an equal being with the same intrinsic value. Here the consciousness of being one body amid all things as one living thing is established. The consciousness of being one body forms an organic worldview in which all things are one. As a result, all things in heaven and earth exist within a mutual organic relationship, and that makes oneself and others precious life partners that coexist rather than separate beings.

Nevertheless, both 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define humans as outstanding beings, set aside for a higher purpose than other beings. The excellence of humans is that by constantly engaging in self reflection and completing tasks through independent efforts, they thereby achieve the great moral doctrine of coexistence and symbiosis. In this process, cultivation of character (修養 suyang) and cultivation of the Dao (修道 sudo) are presented as means to realize one’s nature and establish the right human image. By realizing nature or humanity through the cultivation of character and cultivation of the Dao, humans fulfill their responsibilities and missions by independently participating in being nourished by Heaven and Earth (天地化育 cheonjihwayuk) or the Reordering Works of Heaven and Earth (天地公事 cheonjigongsa), both being based in the concept of the three generative forces of Heaven, Earth, and Humanity (天ㆍ地ㆍ人 cheonㆍjiㆍin).

In the end, the theories of life posited by 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are based on a consciousness of being one body. Both emphasize the characteristics and roles of humans who are distinguished from other beings and phenomena. At this time, human characteristics and roles are revealed as the reasons for which humans have a responsibility and mission take care of all things. From this point of view, it can be seen that the theoretical structure of Neo-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in regards to their theories of life, is rather similar.

Keywords: 유학; 대순사상; 생명론; 생의(仁); 신명
Keywords: Confucianism; Daesoon Thought; theory of life; the will of life; divine beings (sinmyeong)

Ⅰ. 서론

본 논문은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생명과 생명윤리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제기되는 이 시대에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생명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생명 연장과 난치병 치료 등의 의학적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생명복제ㆍ안락사ㆍ임신중절(낙태)ㆍ인공수정 등 생명의 존엄성 침해라는 사회ㆍ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물음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지속적인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생명이 존속하는 한, 그리고 의학기술의 발전이 계속되는 한, 이러한 생명윤리에 관한 논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우리에게 생명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하며 새로운 생명윤리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으니, 생명윤리를 단순히 논쟁으로만 묶어둘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성찰과 실천윤리로의 관심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명윤리의 현안에 대답하기 위해서나 또는 적합한 생명윤리를 정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통사상의 생명론을 탐구ㆍ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유학과 대순사상을 비교하려는 것은 생명론에 대한 이들의 인식과 그 이론구조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사전류에 따르면, 생명은 대체로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는 것을 구분해주는 것, 즉 숨이나 목숨을 의미한다.1) 같은 맥락에서 장회익 역시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는 존재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의 과정에서 살아있는 존재를 특징짓는 내용, 즉 ‘살아있음’의 성격을 추상해낸 개념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2)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생명과 생명 아닌 것 사이의 경계라든가,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이 나오는 그 시초(경계점)에 이르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마른 나뭇가지가 생명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나뭇가지는 땅에 꽂아서 살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조심스런 방식의 처리를 하면, 다시 싹을 피우고 소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모체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가 독립된 생명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으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명인지 아닌지, 독립된 생명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과학에서조차도 명쾌한 해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생명의 정의에 대해서는 과학 자체의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합의되지 않은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결국 생명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의가 없으니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누구나 쉽게 수긍할만한 대답을 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3)

이렇듯 생명과 관련된 다양한 현실적 문제의식에 직면하여, 본문에서는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을 생명의 원리와 생명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 및 실천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학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으며 대순사상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를 비교해봄으로써, 이들 생명론을 관통하는 생명원리와 그 실천적 의미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아울러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 이해를 통해 생명의 본질적 문제인 생명존엄과 생명가치에 대한 자각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명경시 풍조에 대한 대안마련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현안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동안 생명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연구 성과가 소개되어왔다. 특히 과학이나4) 종교적 분야5)에서 많은 성과를 보였으며, 서양철학이나6) 동양철학의 분야에서도 생명의 가치가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대순사상 역시 종교적 관점에서 생명의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7), 유학에서는 주로 『주역』ㆍ『중용』ㆍ양명학의 내용에 집중되어 있다.8) 따라서 본문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와 구별하여 아직 다루어지지 않는 신유학9), 특히 주자(주희)의 학설을 중심으로 대순사상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생명에 관한 세부적 분석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유학과 대순사상 생명론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분명해질 것이며, 특히 본문에서는 이들의 이론적 유사점에 주목한다.

Ⅱ. 유학의 생명론

1. 생명의 원리 : 생명의지(生意) 또는 인(仁)

주자는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먼저 주자는 생명의 의미를 곡식의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곡식의 씨앗에 비유하면, 한 알의 곡식이 봄에는 발아하고, 여름에는 싹이 성장하며, 가을에는 결실을 맺고, 겨울에는 거두어들여 저장하는데, 生意는 여전히 안에 쌓여있다. 모든 곡식의 낟알 안에는 하나의 生意가 안에 감추어 있어 파종 이후에 생장한다.10)

주자는 생명을 살려는 뜻인 생명의지(生意)로서 이해한다. 한 알의 곡식 씨앗 속에는 생명의지가 감추어져 있다가, 그것이 봄에는 싹이 트고, 여름에는 성장하며, 가을에는 결실을 맺고, 겨울에는 거두어들여 저장한다. 한 알의 곡식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고, 거두어 저장할 수 있는 것은 곡식의 씨앗 속에 생명의지가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의지는 눈서리와 같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으니, 봄ㆍ여름ㆍ가울ㆍ겨울을 관통하여 작용한다. “자연의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가장 분명하니, 봄은 소생하고, 여름은 성장하며, 가을은 거두어들이고, 겨울은 저장한다. 비록 사계절로 나누어지지만 生意가 관통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설령 눈서리의 혹독함에도 生意인 것이다.”11) 혹독한 겨울의 메마른 대지와 나무를 바라보면, 그곳에는 조금도 생명의지가 없는 죽음의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이라도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생명을 새롭게 싹트게 할 봄을 준비한다. 혹독한 겨울의 땅속과 나무와 곡식 알갱이 속에는 봄날의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할 강인한 생명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되면 죽은 듯한 대지와 나무에서 새로운 싹이 솟아나서 무성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생명의지는 봄에 발아하고 여름에 성장하는 때에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할 때에도 계속된다.

만물을 거두어 저장할 때에도 어찌 쉬었던 적이 있었는가. 生意가 모두 안에 있다. 예를 들어 곡식씨앗, 복숭아씨앗, 살구씨앗 같은 것은 심으면 바로 살아나니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仁이라 이름 지었으니, 모두 이 生意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봄에는 만물이 생겨나고, 여름에는 만물이 번성하며, 가을에는 生意가 점차 거두어지며, 겨울에는 生意가 저장된다.12)

봄에는 생명의지가 있어 만물이 생겨나고, 여름에는 생명의지가 있어 무성하게 성장하며, 가을에는 생명의지가 있어 열매를 맺어 결실을 거두고, 겨울에는 생명의지가 있어 저장한다. 곡식이나 과일의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생명의지가 담겨있으니, 이 때문에 곡식의 씨앗을 심으면 씨앗에서 싹이 발아할 수 있다. 겨울이라고 해서 생명의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겨울 내내 씨앗에 생명의지가 저장되어 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싹을 틔운다. 오히려 겨울을 거치지 않으면 씨앗이 완성되지 않는다.

주자는 씨앗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지를 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복숭아 씨앗을 도인(桃仁)이라 하고, 살구 씨앗을 행인(杏仁)라 한 것이다. 모든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의지, 즉 仁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싹을 틔울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의지는 한 알의 씨앗에만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 속에도 감추어져 있다. 천지 속의 만물은 모두 이러한 천지 속에 내재하는 생명의지의 작용으로 생겨난다.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으로 마음을 삼은 것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도 각각 천지의 마음을 얻어서 마음을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덕을 말하면, 비록 그것(천지의 마음)이 통섭하고 관통하여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仁이라고 말할 뿐이다.13)

천지의 가장 큰 공능은 만물을 낳는데(생성하는데) 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천지의 큰 덕을 生이라 한다”14)라는 말로 표현한다. 만물은 천지로부터 생겨난다. 사람 역시 천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사람과 만물은 이 점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천지 속의 만물이 하나라는 동체(同體)의식[만물일체(萬物一體)사상]이 성립된다.

주자는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천지의 마음’으로 해석한다. “천지는 만물 낳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 “천지의 마음은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단지 만물을 낳을 뿐이다.”15) 이것은 천지를 ‘마음’이라는 의식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천지의 마음에는 만물을 낳고 살리는 생명의지가 충만해 있는데, 이로써 만물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또한 주자는 천지의 마음에 충만해있는 생명의지를 그대로 인(仁)으로 규정한다. “仁은 천지의 생명기운이다.”16) “仁은 생명의 뜻이다.”17) “천지가 이 만물을 낳을 때에는 바로 仁이 있다.”18) “다만 生意에서 仁을 말할 뿐이다.”19) 인이란 천지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생명의지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동시에 천지의 마음에 충만해있는 생명의지가 된다. 사람과 사물은 모두 천지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니, 사람과 사물에는 모두 생명의지가 충만해있으며 이것이 인으로 내재된다. 이 때문에 인은 천지의 마음과 사람ㆍ사물의 마음을 맺어주는 ‘마음의 덕’으로 표현된다.

사람과 사물은 모두 천지의 마음을 얻어서 생겨난 것이니, ‘천지의 마음’을 각각의 마음으로 삼는다. “천지는 이 마음이 만물에 두루 미치니, 사람이 그것을 얻으면 곧 사람의 마음이 되고, 사물이 그것을 얻으면 곧 사물의 마음이 되며, 초목ㆍ짐승이 그것을 얻으면 초목ㆍ짐승의 마음이 되니, 다만 하나의 천지의 마음뿐이다.”20) 천지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 되고, 사물의 마음이 되며, 초목ㆍ짐승의 마음이 되니, 여기에서 사람ㆍ사물ㆍ초목ㆍ짐승이 하나 되는 이론적 근거가 확립된다.

천지가 만물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천지의 마음속에 생명의지가 충만해있기 때문이다. 천지가 생명의지를 지닌 생명체라면, 천지에서 생성된 만물(사람과 사물) 역시 이 생명의지를 지닌 생명체이다. 결국 천지 속의 만물은 모두 생명의지가 충만해있는 ‘천지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동등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과 동등한 생명의지를 지닌 만물(자연)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손상시킬 수 없으며,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삶의 동반자가 된다. 여기에서 사람은 총체적 생명체 안에서 만물과 상호 유기적ㆍ상보적인 조화와 협력을 유지해나가야 하는 필연성이 확보된다.

또한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은 천지의 만물에 대한 ‘사랑(仁)’이 드러난 것이다. 주자는 이것을 인(仁)으로 표현하니 “한 마디로 요약하면, 仁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로써 인 역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니, ‘천지의 마음’ 또는 천지의 마음속에 충만해있는 생명의지와 그 의미가 같다. 사람도 이러한 ‘사랑(仁)’을 얻어서 자기의 마음으로 삼은 것이니, 사람의 마음에도 인이 내재하며 이것이 바로 본성(性)의 내용이다. 이로써 인은 주자의 생명론을 대표하는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주자는 천지의 마음을 원ㆍ형ㆍ이ㆍ정으로 해석한다.

천지의 마음에는 그 덕이 네 가지가 있으니, 원ㆍ형ㆍ이ㆍ정이라 하지만 ‘원’이 <형ㆍ이ㆍ정을>총괄하지 않음이 없다. 그것의 운행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순서가 되지만, 봄의 생동하는 기운이 <여름ㆍ가을ㆍ겨울에> 관통하지 않은 곳이 없다.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도 그 덕이 네 가지 있으니, 인ㆍ의ㆍ예ㆍ지라 하지만 ‘인’이 <의ㆍ예ㆍ지를>포괄하지 않음이 없다. 그것이 발하여 작용하면, 사랑하고(愛) 공경하고(恭) 마땅히 하고(宜) 분별하는(別) 정이 되는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관통하지 않은 곳이 없다.21)

천지의 마음에는 원ㆍ형ㆍ이ㆍ정이 있으며, 이것을 천지의 사덕(四德)이라고 부른다. 원(元)은 만물이 시작하는 것이고, 형(亨)은 만물이 성장하는 것이며, 이(利)는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정(貞)은 만물이 완성되는 것이다.22) 주자는 천지의 사덕인 원ㆍ형ㆍ이ㆍ정을 사계절의 운행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천지의 운행은 봄ㆍ여름ㆍ가울ㆍ겨울의 순서로 드러나니, 봄은 소생하고, 여름은 성장하며, 가을은 거두어들이고, 겨울은 저장한다.23) 따라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이니 ‘원’에 해당하고, 여름은 만물이 성장하는 시기이니 ‘형’에 해당하며, 가을은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시기이니 ‘이’에 해당하고, 겨울은 만물을 저장하고 다시 봄을 준비하는 시기이니 ‘정’에 해당한다. 결국 천지의 마음인 원ㆍ형ㆍ이ㆍ정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라는 사계절의 운행에 다름 아니다.

이들 원ㆍ형ㆍ이ㆍ정 가운데에 ‘원’이 네 가지의 으뜸으로 나머지를 총괄한다. “원은 네 가지 중에서 으뜸이다.”24) “하나의 원이 네 가지를 포괄한다.”25) “원은 다만 처음의 것이니, 마치 나무와 풀의 싹과 같다. 그러므로 원ㆍ형ㆍ이ㆍ정이지만 원이 四德의 머리가 된다.”26) “원ㆍ형ㆍ이ㆍ정이 모두 선하지만 원은 선의 으뜸이 되고, 형ㆍ이ㆍ정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27) ‘원’이 만물을 생성하는 시작이요 으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계절 가운데 봄이 나머지 여름ㆍ가을ㆍ겨울을 포괄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비록 다르지만, 모두 봄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봄에는 生意가 소생하고, 여름에는 生意가 자라나며, 가을에는 生意가 이루어지고, 겨울에는 生意가 저장된다.”28) “만약 봄 사이에 생명이 생겨나지 않으면, 여름이 되어도 성장할 수 없고, 가을과 겨울에도 거두어 저장할 수 없다.”29) “여름ㆍ가을ㆍ겨울에도 生意가 어찌 그친 적이 있겠는가. 뿌리는 비록 시들고 떨어져도 生意는 항상 존재한다.”30) 만물은 봄에 소생하고 여름에 성장하며 가을에 거두어들이고 겨울에 저장하지만, 봄이 생명의지의 시작으로써 뿌리가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가을ㆍ겨울의 때에도 지속된다. 결국 봄의 생명의지가 여름ㆍ가을ㆍ겨울을 관통하듯이, ‘원’의 생명의지가 형ㆍ이ㆍ정을 관통함으로써 만물이 생성된다.

또한 천지의 마음에 원ㆍ형ㆍ이ㆍ정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에는 인ㆍ의ㆍ예ㆍ지가 있으니 이것을 사람의 사덕(四德)[또는 오상(五常)]이라고 부른다. 주자는 사람의 사덕인 인ㆍ의ㆍ예ㆍ지 역시 사계절의 운행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봄은 仁이고, 여름은 禮이고, 가을은 義이고, 겨울은 智이다.”31) ‘인’은 봄의 탄생에 해당하고, ‘예’는 여름의 성장에 해당하며, ‘의’는 가을의 수확에 해당하고, ‘지’는 겨울의 저장에 해당한다.

원ㆍ형ㆍ이ㆍ정 가운데 ‘원’이 네 가지의 으뜸으로 나머지를 총괄하듯이, 인ㆍ의ㆍ예ㆍ지 가운데 ‘인’이 네 가지의 으뜸으로 나머지를 포괄한다. “인ㆍ의ㆍ예ㆍ지는 네 개의 기둥과 같은데, 인이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32) “인ㆍ의ㆍ예ㆍ지가 모두 선하지만, 인이 모든 선의 머리가 되고 의ㆍ예ㆍ지는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33) “이 生意를 얻어서 살아있는 뒤에 의ㆍ예ㆍ지ㆍ신이 있다.”34) 인(仁)에는 생동하는 기운인 생명의지가 있으며 이 생명의지로부터 만물이 이루어지니, 인이 시작이요 으뜸인 것이다. 봄의 생명의지가 여름ㆍ가을ㆍ겨울에도 지속되듯이, 인에 내재하는 생명의지가 의ㆍ예ㆍ지의 때에도 지속된다.

이처럼 천지에는 생명의지(生意)가 충만해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 봄이 되면 생명의지가 대지에서 싹을 틔우고 점차 성장하여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다. 천지가 낳은 만물 역시 천지에 충만해있는 생명의지를 얻어서 생겨나니, 만물에도 생명의지가 충만해있으며, 이것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에 있어서 생명의지는 인ㆍ의ㆍ예ㆍ지의 본성(性)으로 내재하며, 인이 나머지를 포괄하는 으뜸이 된다.

이때 천지에 충만해있는 생명의지가 만물을 낳는 것과 달리, 사람에 내재하는 생명의지는 사랑하고, 공경하고, 마땅히 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마음에 내재하는 인ㆍ의ㆍ예ㆍ지는 사랑하고, 마땅히 하며, 공경하고, 분별하는 정, 즉 측은ㆍ수오ㆍ공경(사양)ㆍ시비의 정으로 드러난다. ‘인’은 남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측은의 정으로 드러나고, ‘의’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수오의 정으로 드러나며, ‘예’는 남을 공경하고 양보하는 공경의 정으로 드러나고, ‘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의 정으로 드러난다. 결국 사람의 마음에는 인ㆍ의ㆍ예ㆍ지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고, 마땅히 하며, 공경하고, 분별하는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의 정으로 드러날 수 있다. “마음은 살아있는 것이니, 반드시 이 마음이 있으면 바로 사양함을 알 수 있고, 반드시 이 마음이 있으면 바로 <자신의 잘못을>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잘못을>미워함을 알 수 있으며, 반드시 이 마음이 있으면 바로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다. 이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또 어찌 사양ㆍ수오ㆍ시비할 수 있겠는가.”35)

이 때문에 주자는 인ㆍ의ㆍ예ㆍ지와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를 뿌리(씨앗)와 싹의 관계로 설명한다. “인ㆍ의ㆍ예ㆍ지는 뿌리이고,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는 뿌리에서 생겨난 싹이다”36) “인ㆍ의ㆍ예ㆍ지 네 가지는 씨앗이고,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는 씨앗에서 생겨난 싹이다.”37) 뿌리(씨앗)에서 싹이 생겨나듯이, 인ㆍ의ㆍ예ㆍ지의 성에서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의 정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성리학의 기본 개념 중의 하나인 성발위정(性發爲情)의 의미이다. 결국 사람의 마음에는 인ㆍ의ㆍ예ㆍ지의 생명의지가 내재되어 있는데, 이것이 남을 사랑하고, 마땅히 하며, 공경하고, 분별하는 정으로 드러남으로써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는 생명원리로 작용한다.

물론 이때도 측은이 나머지 수오ㆍ공경ㆍ시비를 포괄하는 으뜸 개념이다. “측은이 수오ㆍ사양(공경)ㆍ시비를 포괄한다.”38) “이 마음이 처음 발동하는 곳이 바로 측은이니, 마치 봄이 있어야 바야흐로 여름이 있는 것처럼 측은이 있어야 바야흐로 수오가 있다.”39) “측은지심을 말하면, 수오ㆍ사양ㆍ시비가 그 가운데 있다.”40)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절실하게 마음 아파하고 그 아이를 생명의 위기로부터 구해낸다.41) 이러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 있어서는 한없이 만물을 낳는 마음이며, 사람에 있어서는 따뜻하게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서 四德을 포괄하고 四端을 관통하는 것이다.42)

천지에는 천지의 마음이 있듯이, 사람에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 천지의 마음이 만물을 낳는 마음이라면, 사람의 마음은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비록 사람의 마음이 천지의 마음을 얻어서 자신의 마음으로 삼은 것이지만,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과 달리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작용한다. 결국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과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써 그 이론적 구조를 같이한다.

2. 생명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

주자에 따르면, 만물은 천지에서 생겨나고 만물 중의 하나인 사람 역시 천지에서 생겨난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사람과 만물은 차이가 없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천지의 마음’을 얻어서 생겨난 동등한 생명체이다.

그렇지만 주자는 사람과 만물(사물)을 분명히 구분한다.

음양오행의 기가 천지 가운데 흘러들어 빼어난 것이 사람이 되고 찌꺼기는 사물이 된다. 빼어난 것 가운데 빼어난 것은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며, 빼어난 것 가운데 찌꺼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불초한 사람이 된다.43)

음양오행의 기가 사람의 형체를 구성하는데, 이러한 기 가운데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찌꺼기를 얻은 것은 사물이 된다. 이때 기와 함께 사람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리가 있으며, 리가 형체에 내재되어 성이 된다. 기의 빼어남과 찌꺼기는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과 정편통색(正偏通塞)으로 표현되니, 맑고 순수한(淸粹) 기를 타고난 것은 사람이 되고 탁하고 잡박한(濁駁) 기를 타고난 것은 사물이 된다. 맑고 순수한 기를 타고난 사람 중에서도 바르고 통한(正通) 기를 얻으면 성인이나 현인이 되지만, 맑고 순수한 기를 타고난 사람 중에서도 치우치고 막힌 기(偏塞)를 얻으면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 된다.

또한 탁하고 잡박한 기를 타고난 사물 중에서도 경중(輕重)이 있으니, 탁하고 잡박한 것 가운데 조금 치우치고 막힌 것은 금수(동물)가 되고 완전히 치우치고 막힌 것은 초목(식물)이 된다. “사물은 본래 어둡고 막혀있는데, 어둡고 막혀있는 가운데서도 또한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다. 어둡고 막힌 것 중에 더욱 심한 것은 기의 찌꺼기 가운데서도 다시 찌꺼기의 심한 것을 타고났을 뿐이다.”44)

이렇게 볼 때, 사람은 만물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난 기를 받아서 태어난 뛰어난 존재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만물보다 더 귀하거나 가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만물은 모두 천지(또는 천지의 마음)에서 생겨난 동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만물과 구분될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이라는> 명칭을 얻는 이유는 仁 때문이다. 仁을 말하고 사람의 몸을 말하지 않으면 리가 깃든 곳을 알 수 없고, 사람의 몸을 말하고 仁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의 몸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반드시 합하여 말해야만 비로소 도리를 알 수 있다.45)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는 인(仁)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인은 리가 성으로 내재된 것으로써 의ㆍ예ㆍ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사람은 인(성 또는 리)과 형체(기)로 이루어지니, 인만 말하고 형체를 말하지 않으면 인이 머무는 곳을 알 수 없고, 형체만 말하고 인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의 본질이 되는 성이 없으므로> 사람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을 말할 때는 인과 형체를 동시에 말해야 한다.

이때 인은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은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을 보살피고 양육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책임과 사명은 그대로 천지를 도와 만물을 화육하는 천지화육에 참여하게 되고, 이로써 사람과 만물이 공존ㆍ공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46) 이것이 바로 천ㆍ지ㆍ인 삼재(三才)사상의 내용이며, 동시에 만물과 구분되는 사람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仁)의 온전한 실현이 강조된다.

仁이란 본래 마음의 온전한 덕이다. 사람이 만일 본래 그러한 천리의 양심을 보존하고 잃지 않는다면, 하는 일에 저절로 질서가 있고 화합할 것이다. 만일 이 마음을 한번 놓치면, 다만 인욕과 사심이 되어 나오니, 어찌 질서가 있을 수 있고 어찌 화합이 있을 수 있겠는가.47)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은 천지의 만물에 대한 ‘사랑(仁)’이 드러난 것이듯이, 사람 역시 이 사랑(仁)을 얻어서 자신의 마음으로 삼은 것이다. 천지의 마음에 인(仁)이 내재되어 있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인이 내재되어 있다. 이때 사람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인은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드러나며, 또한 인ㆍ의ㆍ예ㆍ지를 포괄하여 말할 경우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의 마음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仁을 ‘마음의 덕(心之德)’이요 ‘사랑의 이치(愛之理)’라고 말한다. 이것은 천지처럼 단순히 만물을 낳는데 그치지 않고,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적극적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사람의 마음에는 인이라는 덕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천리의 양심을 보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천리의 양심을 잃지 않고 보존할 수 있으면 하는 일마다 저절로 질서와 화합이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천리의 양심을 잃어버리고 보존하지 못하면, 곧바로 인욕과 사심이 생겨난다. 이러한 인욕과 사심은 생명의 본질이 아닌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욕에서 비롯된다. 이때 사욕은 탁한 기질의 방해로 본성이 가려짐으로써 발생하는데, 여기에서 사욕을 제거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수양(공부)이 제기된다. 사람은 수양을 통해 사욕을 제거하고 자기 안에 내재된 본성을 온전히 실현함으로써 나와 남 또는 사람과 만물이 하나 되는 공존ㆍ공생을 이룰 수 있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만이 그<자기>의 본성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본성을 다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본성을 다할 수 있으면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으며,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함께 참여할 수 있다.48)

사람은 지극한 정성(至誠)을 통해 자기의 본성을 실현한다. 이때 자기의 본성 실현은 다른 사람의 본성 실현과 만물의 본성 실현으로 이어지고, 결국 천지만물의 화육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자기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49) 천지화육의 문제로 확장된다. 여기에서 사람이 자기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함으로써 천지만물과 하나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된다.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一體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다.”50) 결국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거나 자기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천지만물과 하나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명원리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된다.51)

Ⅲ. 대순사상의 생명론

1. 생명의 원리 : 신명(神明)

대순사상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대순사상에는 유학의 생명의지(生意)와 유사한 생명기운(生氣)이 있으나52), 본문에서는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신명(神明)’의 개념에 주목한다.53)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54)

여기에서 천지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을 가리킨다.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신명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나고, 만물에도 신명이 깃들어 있으므로 생존ㆍ존재가 가능하다. 예컨대 풀잎의 생물이나 흙벽과 같은 무생물까지도 모두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신명을 얻어서 생겨난 것이다. 때문에 신명이 떠나가면 풀잎은 바로 말라버리고 흙벽은 바로 무너져버린다. ‘풀잎이 마르고 흙벽이 무너진다’는 것은 만물이 생존ㆍ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므로 풀잎이 존재할 수 있고 흙벽도 존재할 수 있으니, 결국 신명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생명원리가 된다. 이러한 생명원리로서의 신명은 주자가 말한 생명원리로서의 생명의지(生意)의 개념과 유사하다. 천지에 생명의지가 충만해있어 만물을 낳을 수 있듯이,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어 풀잎과 흙벽과 같은 만물이 생겨날 수 있다. 반대로 천지에 생명의지가 없으면 만물을 낳을 수 없듯이, 천지에 신명이 없으면 풀잎이나 흙벽도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천지에 신명이 있으므로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은 만물,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명이라는 동일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생물ㆍ무생물에는 모두 동일한 신명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만물이 하나라는 동체(同體)의식이 성립된다. 이것은 천지에 생의(生意)가 충만해있고, 만물은 모두 이 생의를 얻어서 생겨나므로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주자의 사고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원리에 대한 구조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대순사상이 만물에 내재하는 생명원리를 ‘신명(神明)’으로 해석한다면, 유학은 생명원리를 ‘생의(生意)’로 해석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이어서 대순사상은 만물을 낳는 천지의 작용을 구체적으로 원ㆍ형ㆍ이ㆍ정으로 설명한다.

원ㆍ형ㆍ이ㆍ정은 천지의 도이고, 인ㆍ의ㆍ예ㆍ지는 人神의 도이다.55)

대순사상에는 원ㆍ형ㆍ이ㆍ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주자의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대순사상 역시 원ㆍ형ㆍ이ㆍ정이 생장염장(生長斂藏), 즉 생겨나고, 성장하며, 거두어들이고, 저장하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56) 원ㆍ형ㆍ이ㆍ정은 천지의 도(四德)이며, 천지의 도는 사계절의 운행으로 드러난다. 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원’에 해당하고, 여름에 만물이 성장하는 것은 ‘형’에 해당하며, 가을에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이’에 해당하고, 겨울에 만물을 저장하는 것은 ‘정’에 해당한다. 이러한 원ㆍ형ㆍ이ㆍ정의 끊임없는 작용으로 천지가 운행하고 만물이 생성ㆍ존재한다.

또한 천지에는 천지의 도가 있듯이, 사람에는 사람의 도가 있다. 물론 대순사상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신까지를 포함한다. 사람의 도에는 인ㆍ의ㆍ예ㆍ지가 있으니 “편벽된 사랑이나 미움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仁이라 하고, 오로지 억지나 편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을 禮라 하며, 모두가 옳거나 그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義라고 하고, 방자한 총명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智라고 하며, 넘치는 물욕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信이라 한다.”57) 여기에서 ‘편벽된 사랑이나 미움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자의 남을 사랑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으며, ‘억지나 편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자의 남에게 양보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상생을 위한 공동체 상호간에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 것이다.

때문에 인ㆍ의ㆍ예ㆍ지는 남에게 원한을 짓지 않거나 남을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며, 더구나 남을 잘 되게 하는 상생의 대도(大道)로 드러난다.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58)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59) 남을 미워하면 남도 그를 미워하여 서로 간에 원한이 쌓이고, 원한이 쌓이면 서로 반목하여 대립ㆍ갈등하니, 결국 모두가 파멸하는 지경에 이른다. 반대로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남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더 나아가 남을 잘되게 하니, 결국 대립ㆍ갈등이 없는 상생ㆍ조화의 세상이 된다.

이것은 유학에서 인ㆍ의ㆍ예ㆍ지가 ‘사랑하고, 마땅히 하며, 공경하고, 분별하는’, 즉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의 마음으로 드러나서 다른 생명을 보살피고 양육하는 상생ㆍ조화를 이루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때 인ㆍ의ㆍ예ㆍ지의 도 역시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생명원리로서의 신명이 사람에게 내재된 것을 의미하니, 유학에서 천지에 충만해있는 생의(生意)를 얻어서 사람의 마음, 즉 인ㆍ의ㆍ예ㆍ지의 본성으로 삼는 것과 유사하다.

결국 대순사상의 생명론은 사람을 비롯한 만물이 모두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신명을 얻어서 생겨난 것이니, 만물에는 모두 동일한 신명이 내재한다는 동체(同體)의식에 기초한다. 이러한 동체의식은 만물이 모두 하나(또는 전체의 일부)라는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드러난다.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의 기운이 막힌다.”60) 즉 하나라도 막힌 곳이 있으면 전체가 막히게 되는 것처럼, 천지 속의 만물은 모두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니, 오직 자기의 생명 유지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공존ㆍ공생을 목적으로 삼게 된다. 이러한 사고는 유학에서 만물이 모두 천지의 마음을 얻어서 생겨난 동체(萬物一體)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2. 생명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

대순사상에서 생명의 의미는 유학과 마찬가지로 천지만물이 동체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천지 속의 모든 존재는 ‘신명’이라는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데61), 이 점에서 사람과 만물은 다르지 않으니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순사상 역시 사람이 만물과 동체임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만물과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그 주체적 역할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람이 생명의 세계 안에서 어떠한 위상을 지니는가라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대순사상은 사람의 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땅히 일의 왕성함은 천지에 있고 반드시 사람에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으므로 천지가 사람을 내어서 쓴다. 사람으로 태어나 천지가 사람을 쓰는 때에 참여하지 못하면, 어찌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62)

여기에서 일이란 상제께서 시행한 천지공사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 천지공사는 말 그대로 천지를 역사하여 지상선경을 이룩하는 것을 가리키니, 천지(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개개의 사람(창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은 천지에 있고 사람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천지공사에 참여하는 주체는 반드시 사람이 되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다”는 뜻이다. 천지공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없으면 천지공사를 이룩할 수도 없으니, 이 때문에 천지공사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을 내어서 쓰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천지공사가 상제의 권능으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천지공사가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지공사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즉 사람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는 것은 천지공사에 참여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하며, 동시에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함으로써 천지와 같은 대등한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참여할(셋이 될) 수 있다”63)라는 의미이다. 대순사상에서는 사람이 천지공사에 참여함으로써 사람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듯이, 유학에서는 사람이 천지화육에 참여함으로써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게 된다.

이로써 사람은 천지만물과 대립ㆍ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유기적ㆍ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며, 천지만물을 사랑하고 보살펴야 하는 책임감을 지니게 된다. 그 결과 사람은 만물의 생명 손상과 같은 아픔ㆍ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만물과 하나 되는 사람의 참된 모습이다. 이러한 사람의 참된 모습이 실현될 때에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낄 수 있고, 동시에 남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에 앞장설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만물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대순사상에는 유학에서처럼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ㆍ정편통색(正偏通塞)에 의한 사람과 만물의 구분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유학에서 사람을 오행의 빼어난 기, 즉 맑고(淸) 순수하고(粹) 바르고(正) 통하는(通) 기를 얻은 우수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처럼, 대순사상 역시 만물과 달리 조상신의 오랜 공덕을 쌓아야 태어날 수 있는 존귀한 존재로 규정한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헤아릴 수 없는 공력을 들이나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선령신들은 60년 동안 공에 공을 쌓아 쓸 만한 자손 하나를 타 내되 그렇게 공을 들여도 자손 하나를 얻지 못하는 선령신들도 많으니라. 이같이 공을 들여 어렵게 태어난 것을 생각할 때 꿈같은 한 세상을 어찌 잠시인들 헛되게 보내리오.64)

사람은 오랜 공덕을 쌓아야 겨우 태어날 수 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은 유학의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 중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65)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사람이 신봉하고 따르는 신에 비교하더라도, 사람 없는 신의 존재는 말 그대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순사상은 세계를 구성하는 천ㆍ지ㆍ인 삼계(三界)의 한 축에 해당하는 사람을 천지보다 높게 이해한다.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66)

대순사상은 사람을 천지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사람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한다. 물론 이때 사람이 천지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心靈) 때문이다. “지극한 보배가 곧 나의 심령이니, 심령이 통하면 귀신과도 함께 응대할 수 있고, 만물과도 함께 순서를 나란히 할 수 있다.”67) 천지의 일부(또는 만물 중의 하나)에 불과한 사람이 천지(귀신ㆍ만물)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신명이 머무는> 중추기관이요 <신명이 드나드는> 문이요 <신명이 다니는> 길이니, 천지보다도 크다”68)라는 것도 같은 의미로써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마음이 중요한 이유로는 마음의 작용이 그대로 수도(공부)의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음의 작용, 즉 “정심으로 수련하는”69) 주체적인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찰ㆍ반성하여 자기를 완성시키고 나아가 만물을 완성시킴으로써 천지만물과 공생ㆍ공존의 大道를 이룰 수 있다. 이때 사람의 마음 역시 천지만물과 별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결국 나의 생명이 소중한 것처럼 남의 생명도 소중하니, 이러한 사고는 그대로 남을 잘되게 하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70)

게다가 남을 잘되게 하는 공부 역시 대단한 수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마음가짐 여부에 달려있을 뿐이다.

…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 하셨도다.71)

“나쁜 것이라 제거하려 하면 풀이 아닌 것이 없고, 좋은 것이라 취하려 하면 꽃이 아닌 것이 없다.” 이미 마음에서 싫다고 생각하고 보면 모두 풀로 보이고, 이미 마음에서 좋다고 생각하고 보면 모두 꽃으로 보인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풀이 꽃으로 보이듯이, 남을 어떻게 대하느냐(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남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이해와 사랑으로 하면 남도 잘될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와 남이 모두 화를 입는다. 이것은 나와 남이 별개의 존재가 아닌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말이니, 남을 잘되게 하면 그것이 복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오고 남을 해치면 그것이 화가 되어 나에게로 돌아온다. 결국 생명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대순사상의 생명원리를 실현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대순사상의 이러한 남(만물)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초목 하나 꺾지 않고 작은 곤충 하나 해치지 않는 호생(好生), 즉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구체적 실천정신으로 드러난다.

상제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고 관후하시며 남달리 총명하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경대를 받으셨도다. 어리실 때부터 나무심기를 즐기고 초목 하나 꺾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곤충도 해치지 않으실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도다.72)

한겨울에 상제께서 불가지 김 성국의 집에 계셨도다. 김 덕찬과 김 성국은 꿩이 많이 날아와서 밭에 앉기에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니라.73)

대순사상에서 생명 존중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초목ㆍ곤충ㆍ꿩과 같은 미물을 함부로 손상시키거나 해치지 않는 것은 만물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동체(同體)의식에 근거한 것이다. 천지 속의 만물이 모두 하나의 생명체임을 자각할 때, 즉 이름 없는 잡풀 하나에도 약동하는 생명의지를 느낄 수 있을 때에 자기 몸처럼 만물을 아끼고 보살피는 생명원리의 실현이 가능하다.74) 이로써 천지 속의 만물은 지배ㆍ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삶의 동반자가 된다.

이처럼 대순사상은 생명을 잡는(죽이는) 공부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생명가치의 소중함을 만물로까지 확장시켜나간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이, 남의 생명 역시 소중하다. 이러한 생명가치에 근거할 때, 대립ㆍ갈등의 충돌을 막고 상생ㆍ조화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Ⅳ. 결론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은 크게 생명의 원리와 생명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과 실천으로 구분된다.

첫째, 생명의 원리에 대한 해석이다. 주자는 생명을 곡식의 씨앗에 비유한다. 곡식의 씨앗에는 생명의지(生意)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발아하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어 결실을 거두고, 저장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생명의지는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할 때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잎이 시들고 열매가 떨어지거나 눈서리가 내리는 혹독한 겨울에도 그대로 지속된다. 한 알의 씨앗에만 생의(生意)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에도 생의가 내재한다. 천지 속에는 생의가 충만해있으며, 이러한 생의에 의해 만물이 생겨나니 결국 생의는 만물을 존재케 하는 생명원리가 된다. 만물 역시 생의를 얻어서 생겨난 것이니, 만물에도 생의가 내재하며,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때 사람에게 내재된 생의를 인(仁)이라 부르며, 이것이 바로 본성(性)의 내용이 된다.

대순사상 역시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신명에 의해 만물이 생겨나고 만물에도 신명이 내재하므로 생존ㆍ존재가 가능하다. 결국 신명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생명원리가 된다. 유학에서처럼 천지에 생의가 충만해있어서 만물을 낳을 수 있듯이, 대순사상에서는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어서 만물이 생겨난다.

유학과 대순사상은 모두 천지의 생명원리, 즉 생의(生意)와 신명(神明)에 근거하여 만물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 때문에 천지 속의 만물은 모두 동일한 생명원리를 얻어서 생겨난 것이므로, 동일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서 만물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동체(同體)의식이 성립하니, 이러한 동체의식은 만물이 모두 하나(전체의 일부)라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로써 천지 속의 만물은 모두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니, 나와 남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할 소중한 삶의 동반자가 된다.

또한 천지의 내용에는 원ㆍ형ㆍ이ㆍ정이 있으며, 이러한 천지의 사덕(四德)이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된다. 물론 이때 원ㆍ형ㆍ이ㆍ정은 사계절의 운행으로 드러나니, 봄에는 소생하고, 여름에는 성장하며,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저장한다. 이렇듯 만물의 생성을 원ㆍ형ㆍ이ㆍ정의 작용으로 설명하는 것도 유학과 대순사상이 다르지 않다. 다만 유학에는 이들의 내용이 체계적이고 매우 풍부한 것과 달리, 대순사상에는 너무 소략하여 유학의 내용을 가지고 그 의미를 추론할 수 있을 정도이다.

천지의 도에 원ㆍ형ㆍ이ㆍ정이 있듯이, 사람의 도에는 인ㆍ의ㆍ예ㆍ지가 있다. 이때 인ㆍ의ㆍ예ㆍ지는 천지에 충만해있는 생의(生意)가 사람에게 내재한 것으로써, 사랑하고, 마땅히 하고, 공경하고, 분별하는, 즉 측은ㆍ수오ㆍ공경ㆍ시비의 마음으로 드러남으로써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는 생명원리로 작용한다. 대순사상 역시 사람의 도를 인ㆍ의ㆍ예ㆍ지로 설명하며, 이때 인ㆍ의ㆍ예ㆍ지의 뜻이 비록 ‘용납하지 않는다(不受)’는 부정의 형식을 취하지만 유학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대로 남에게 원한을 짓지 않거나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게다가 남을 잘되게 하는 상생의 대도(大道)로 드러난다. 이때 인ㆍ의ㆍ예ㆍ지 역시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신명이 사람에게 내재된 것을 의미하니, 유학에서 천지에 충만해 있는 생의를 얻어서 본성으로 삼는 것과 이론구조가 유사하다.

둘째, 생명에 대한 인간의 역할과 실천에 대한 해석이다. 유학과 대순사상은 모두 사람과 만물이 하나라는 동체의식에 기초하면서도, 동시에 사람과 만물을 분명히 구분한다. 사람은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기를 받아서 태어난 뛰어난 존재이며, 유학은 이것을 청탁수박(淸濁粹駁)과 정편통색(正偏通塞)이라는 기의 차이로 해석한다. 대순사상 역시 사람은 만물과 달리, 조상신의 오랜 공덕을 쌓아야 태어날 수 있는 존귀한 존재로 해석한다. 이러한 사람의 우수성은 그대로 인간의 역할과 사명으로 귀결되며, 이 과정에서 온전한 본성 또는 인간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양 또는 수도의 과정이 요구된다.

유학은 사람이 만물보다 뛰어난 이유로써 인(仁)에 주목한다. 사람의 마음에 인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천리의 양심을 보존할 수 있고, 천리의 양심을 보존할 수 있으면 조화ㆍ상생을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자기의 본성을 실현하는 수양(공부)이 제기된다. 대순사상 역시 사람이 만물보다 존귀한 이유로써 ‘마음’에 주목한다. 사람의 마음은 주체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찰ㆍ반성하여 자기를 완성시키고 만물을 완성시킴으로써 조화ㆍ상생의 대도(大道)를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올바른 인간상을 확립하는 수도(공부)가 제기된다. 이러한 수양과 수도를 통해 본성 또는 인간상을 실현함으로써 천지화육 또는 천지공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천ㆍ지ㆍ인 삼재(三才)사상의 내용이다.

또한 생명원리의 실천방법으로는 주로 유학이 남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등 사단(四端)의 실천을 통한 본성의 실현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대순사상은 남에게 원한을 짓지 않거나 남을 잘 되게 하는 등 해원상생의 실천을 중시한다. 물론 이러한 생명원리의 실천은 만물이 모두 하나의 생명체임을 자각할 때 가능하다.

결국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은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동체의식에 근거하면서 동시에 만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징과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때 인간의 특징과 역할은 그대로 만물을 이끼고 보살피는 책임과 사명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무엇보다 인간의 책임과 실천을 강조하는 유학과 대순사상의 생명론이 오늘날 다양한 생명윤리의 현안에 대한 이론적 대안마련에 적절한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Notes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 (서울: 민중서림, 1982), p.1879.

장회익, 『삶과 온생명』 (서울: 솔, 1999), p.167.

같은 책, p.168 참조.

최경석, 「생명윤리와 철학 : 철학적 대립과 새로운 생명윤리학을 위한 철학의 과제」, 『생명윤리』 14 (2013); 박은정, 「생명 : 과학과 윤리 사이」, 『생명윤리』 16 (2015).

허남결, 「불교와 생명윤리」, 『불교학연구』 12 (2005); 김도훈, 「생명의 온전성의 회복 : 나눔과 섬김,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오늘의 생명신학』 1 (2013).

박경혜, 「대순사상의 생명관 연구」 (대진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1).

윤재근, 「한국 신종교의 도교문화와 생명관 : 대순사상의 인간이해를 중심으로」, 『종교교육학연구』 (2010); 김영주, 「생명윤리와 대순진리회의 종교교육」, 『종교교육학연구』 45 (2014); 최치봉, 「대순사상의 생명관과 인생관」, 『대순사상논총』 33 (2019).

김병환, 「유가의 생명관 : 生生, 만물일체와 살림의 생명론」, 『유교사상문화연구』 22 (2005); 정병석, 「유가의 생명관」,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 4 (2000); 김세정, 「왕양명 생명철학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8).

신유학은 송대 이후의 유학(성리학)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이전의 漢唐이나 선진시대 공맹의 유학과는 학문경향을 달리하는 새로운 유학이라는 의미로 종래의 유학과 구별하여 쓴다. 주자가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주자학으로도 부른다.

『朱子語類』 卷20, “以穀種譬之, 一粒穀, 春則發生, 夏則成苗, 秋則結實, 冬則收藏, 生意依舊包在裏面. 每箇穀子裏, 有一箇生意藏在裏面, 種而後生也.”

『朱子語類』 卷6, “天之春夏秋冬最分曉, 春生, 夏長, 秋收, 冬藏. 雖分四時, 然生意未嘗不貫, 縱雪霜之慘, 亦是生意.”

『朱子語類』 卷6, “且如萬物收藏, 何嘗休了, 都有生意在裏面. 如穀種ㆍ桃仁ㆍ杏仁之類, 種著便生, 不是死物, 所以名之曰‘仁’, 見得都是生意. 如春之生物, 夏是生物之盛, 秋是生意漸漸收斂, 冬是生意收藏.”

『朱熹集』 卷67, 「仁說」, “天地以生物爲心者也. 而人物之生, 又各得夫天地之心以爲心者也. 故語心之德, 雖其總攝貫通, 無所不備, 然一言以蔽之, 則曰仁而已矣.”

『周易』, 「繫辭傳(下)」, “天地之大德曰生.”

『朱子語類』 卷69, “天地之心, 別無可做 … 只是生物而已.”

『朱子語類』 卷6, “仁是天地之生氣.”

『朱子語類』 卷20, “仁是箇生底意思.”

『朱子語類』 卷17, “只天地生這物時, 便有箇仁.”

『朱子語類』 卷6, “只從生意上說仁.”

『朱子語類』 卷1, “天地以此心普及萬物, 人得之, 遂爲人之心; 物得之, 遂爲物之心; 草木禽獸接著, 遂爲草木禽獸之心, 只是一箇天地之心爾.”

『朱熹集』 卷67, 「仁說」, “蓋天地之心, 其德有四, 曰元亨利貞. 而元無不統. 其運行焉, 則爲春夏秋冬之序, 而春生之氣, 無所不通. 故人之爲心, 其德亦有四, 曰仁義禮智, 而仁無不包. 其發用焉, 則爲愛恭宜別之情, 而惻隱之心無所不貫.”

『周易』, 「乾卦」, “元亨利貞, 謂之四德, 元者, 萬物之始; 亨者, 萬物之長; 利者, 萬物之遂; 貞者, 萬物之成.”

『朱子語類』 卷6, “春生, 夏長, 秋收, 冬藏.”

『朱子語類』 卷68, “元乃爲四者之長.”

『朱子語類』 卷95, “一箇元字, 便是包那四箇.”

『朱子語類』 卷95, “元只是初底便是, 如木之萌, 如草之芽. … 故元亨利貞, 而元爲四德之首.”

『朱子語類』 卷95, “元亨利貞皆是善, 而元則爲善之長, 亨利貞皆是那裏來.”

『朱子語類』 卷6, “猶春夏秋冬雖不同, 而同出於春. 春則生意之生也, 夏則生意之長也, 秋則生意之成, 冬則生意之藏也.”

『朱子語類』 卷6, “若春間不曾發生, 得到夏無緣得長, 秋冬亦無可收藏.”

『朱子語類』 卷6, “在夏秋冬, 生意何嘗息. 本雖彫零, 生意則常存.”

『朱子語類』 卷6, “若將仁義禮智說, 則春, 仁也; 夏, 禮也; 秋, 義也; 冬, 智也.”

『朱子語類』 卷95, “仁義禮智, 便如四柱, 仁又包括四者.”

『朱子語類』 卷95, “仁義禮智亦皆善也, 而仁則爲萬善之首, 義禮智皆從這裏出爾.”

『朱子語類』 卷6, “得此生意以有生, 然後有禮智義信.”

『朱子語類』 卷20, “心是活物, 必有此心, 乃能知辭遜; 必有此心, 乃能知羞惡; 必有此心, 乃能知是非. 此心不生, 又烏能辭遜羞惡是非.”

『朱子語類』 卷25, “仁義禮智是四箇根子, 惻隱羞惡恭敬是非是根上所發底苗.” 『朱子語類』 卷6, “仁是根, 惻隱是萌芽.”

『朱子語類』 卷6, “一箇是仁, 一箇是義, 一箇是禮, 一箇是智, 這四箇便是箇種子, 惻隱羞惡恭敬是非, 便是種子所生底苗.”

『朱子語類』 卷6, “惻隱包羞惡辭遜是非.”

『朱子語類』 卷97, “此心之初發處乃是惻隱, 如有春方有夏, 有惻隱方有羞惡也.”

『朱子語類』 卷97, “言惻隱之心, 則羞惡辭遜是非在其中矣.”

『朱子語類』 卷17, “惻隱是傷痛之切 … 緣見孺子入井, 所以傷痛之切.”(측은은 절실하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절실하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朱熹集』 卷67, 「仁說」, “此心何心也. 在天地則坱然生物之心, 在人則溫然愛人利物之心, 包四德而貫四端者也.”

『朱子語類』 卷14,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爲不肖.”

『朱子語類』 卷94, “物固昏塞矣, 而昏塞之中, 亦有輕重者. 昏塞尤甚者, 於氣之渣滓中, 又復稟得渣滓之甚者爾.”

『朱子語類』 卷61, “人之所以得名, 以其仁也. 言仁而不言人, 則不見理之所寓; 言人而不言仁, 則人不過是一塊血肉耳. 必合而言之, 方見得道理出來.”

결국 사람의 마음(仁)은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만물을 보살피고 양육한다는 의미에서 유학 생명관의 특징을 ‘도덕생명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병환, 「유가의 생명관 : 생생(生生), 만물일체와 살림의 생명론」, 『유교사상문화연구』 22 (2005), pp.327-331 참조.

『朱子語類』 卷25, “仁者, 本心之全德. 人若本然天理之良心存而不失, 則所作爲自有序而和. 若此心一放, 只是人欲私心做得出來, 安得有序, 安得有和.”

『中庸』, 第22章,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中庸』, 第1章,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中庸章句』, 第1章,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유학에서 자기의 본성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은 주로 수양론에서 다루어지며,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敬의 내용이다. 敬은 안과 밖, 동과 정, 이발과 미발 등으로 설명되며, 특히 밖으로 용모를 바르게 하는 整齊嚴肅과 안으로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主一無適을 중시한다.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행록 4장 15절(이하 『전경』의 인용은 행록 4장 15절의 경우 ‘행록 4-15’로 표기함), “말라죽던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도다.”; 예시 53, “이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가뭄에 마르던 보리가 생기를 되찾더라.”; 행록 5-38, “천하의 형세를 아는 자에게는 천하의 살 기운이 있고, 천하의 형세에 어두운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이 있으니라.(知天下之勢者, 有天下之生氣; 暗天下之勢者, 有天下之死氣.)” 다만 이러한 生氣는 말 그대로 생명기운의 의미일 뿐이고 생명원리나 만물생성과 같은 본체적인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신명 개념에 주목한다.

『전경』에는 신명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하늘과 땅의 신령으로서 천지신명의 의미로 쓰인다. 예컨대 행록 1-29, “나는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아니하는도다.”; 행록 1-29, “그대의 성심이 신명에게 사무쳤으니”; 행록 4-40, “두 마음을 품으면 신명의 음호를 받지 못하니라.”; 행록 5-4, “몹쓸 일을 하여 신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으니”; 교법 1-55, “신명의 도움을 받지 못하리라.” 등. 다만 본문에서는 인격신의 의미로서 신명개념이 아닌 생명원리의 의미로서 신명개념에 주목하여 내용을 분석한다.

교법 3-2.

교운 2-42, 「運合呪」, “元亨利貞, 天地之道; 仁義禮智, 人神之道.”

교법 3-27, “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

교법 3-47, “不受偏愛偏惡曰仁, 不受專强專便曰禮, 不受全是全非曰義, 不受恣聰恣明曰智, 不受濫物濫欲曰信.”

교법 2-44.

교법 1-2.

공사 3-29.

『전경』에는 신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생명원리의 의미에서 보면 천지 속의 모든 존재는 ‘신명’이라는 동등한 내재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교법 3-47, “事之當旺, 在於天地, 必不在人. 然無人無天地, 故天地生人用人. 以人生不參於天地用人之時, 何可曰人生乎.”

『中庸』, 第22章, “惟天下至誠. …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교법 2-36.

『童蒙先習』, 「首篇」, “天地之間, 萬物之衆, 惟人最貴.”

교법 2-56.

교운 2-41, “至寶卽吾之心靈也, 心靈通則鬼神可與酬酢, 萬物可與俱序.”

행록 3-44, “吾心之樞機門戶道路, 大於天地.”

공사 2-16, “너는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

교법 1-2.

교법 1-11.

행록 1-11.

권지 1-26.

이와 유사한 내용이 주돈이의 일화에도 보인다. “무숙(주돈이의 字)이 창문 앞의 풀을 베어내지 않아서 그 이유를 묻자 ‘내 뜻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二程集』, 「河南程氏遺書 第3」, “周茂叔窗前草不除去, 問之,云與自家意思一般.”) 즉 주돈이가 창문 앞의 잡풀을 베어내지 않은 것은 그 잡풀의 살고자 하는 의지(生意)가 자신의 살려는 의지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천지의 生意가 주돈이와 잡풀 사이를 관통하듯이, 생명원리가 상제와 초목ㆍ곤충과 같은 미물 사이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전경』,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2.

『童蒙先習』.

3.

『朱子語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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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章句』.

5.

『朱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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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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