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당·송대 항주지역의 관음신앙

김성순1,*
Sung-soon Kim1,*
1전남대학교 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Chonnam National University
*E-mail: shui1@naver.com

© Copyright 2023,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l 25, 2023 ; Revised: Aug 29, 2023 ; Accepted: Sep 15, 2023

Published Online: Sep 30, 2023

국문요약

이 논문에서는 인도의 관음신앙이 중국불교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항주지역 불교계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관련된 교의와 실천을 구조화하고, 이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했다.

항주지역은 운하를 활용한 상업과 해상무역으로 축적된 부로 인해 불교교단들도 크게 성장했으며, 특히 송대에 이르러 선종교단이 왕성했다.

항주 천태교단의 지의(天台智顗)는 관음 관련 경전에 대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청관음경소(請觀音經疏)』를 저술하고, 천태교학과 관음사상을 융합하여 ‘청관음참법(請觀音懺法)’을 체계화했다. 또한 자운준식(慈雲遵式)은 관음참법을 대중들의 수준에 맞게 일상의 의례로 재생산한 ‘청관음참(請觀音懺)’을 정비했다.

북송대 항주지역의 선종 교단인 법안종(法眼宗)의 영명연수(永明延壽)는 그의 저술 『지각선사자행록(智覺禪師自行錄)』을 통해 관음신앙을 ‘108事’라는 일상의 작은 수행 안에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불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승려를 보살의 화신으로 숭배하는 현상도 나타나는데, 십일면관음보살로 믿어졌던 남조 제량(濟涼)의 보지(寶誌)화상이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항주지역의 천태교단과 선종교단의 승려들은 이러한 신이승(神異僧)의 관음화현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관음신앙을 통해 신도들을 흡수하려 했던 송대 불교의 일면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will examine how the Avalokitesvara faith of India was restructured into the doctrines and practices related to the Sinicized version of the deity as Guanyin (觀音) Bodhisattva. Particular focus will be given to the Hangzhou area of China, when the Guanyin faith was still in the process of gaining establishment in China. In the Hangzhou area, Buddhist Orders grew significantly due to the wealth accumulated from commerce using canals and maritime trade, and the Chan (禪 typically known as Zen in English) Orders were particularly active during the Song Dynasty.

Zhiyi (智顗), a prominent master from the Tiantai Order (天台宗), based his activities out of Hangzhou. He composed the text known as the Commentary on the Guanyin Petitioning Sutra (Qingguanyinjing-shu 請觀音經疏) based on a reinterpretation of a scripture related to Guanyin, and he systematized the Guanyin Repentance Ritual (Guanyin-chanfa 觀音懺法) by combining the Doctrines of Tiantai with the Guanyin faith. In addition, Ciyin Zunshi (慈雲遵式) reformulated that Guanyin Repentance Ritual into the Guanyin Petitioning Repentance Ritual (qing-guanyin-chan 請觀音懺) to make it into a common ritual that was more accessible to everyday people.

The book, Records Regarding the Personal Conduct of the Chan Master Zhijue (zhijue-chanshi-zixing-lu 智覺禪師自行錄), which is written by Yongming Yanshou (永明延壽), a figure from the Fayan Order (法眼宗), one of the Chan Buddhist orders in the Hangzhou area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reveals the acceptance of the Guanyin faith as a daily practice within the 108 daily rituals (108事).

In Chinese Buddhism, there were historical examples of monks being worshipped as incarnations of Guanyin Bodhisattva. An example of this includes iconography depicting Baozhi (寶誌), a figure from Jiliang (濟涼) who lived during the Southern Dynasties, as Ekādaśamukha (十一面觀音, Eleven-faced Guanyin Bodhisattva) in keeping with the belief that he was an incarnation of that deity.

Monks of the Tiantai and Chan orders operating in the Hangzhou area actively utilized the transmission of Buddhist tales about Guanyin Bodhisattva as related to monks that exhibited miraculous powers (神異僧).

This can be understood as a phenomenon demonstrating how Song Buddhism tried to attract more believers through the popularity of the Guanyin Faith.

Keywords: 관세음보살신앙; 당·송대 중국불교; 항주; 보타산(普陀山); 관음참법(觀音懺法); 108사(108事)
Keywords: Guanyin Faith; Tang-Song Buddhism; Hangzhou area; Mount Putuo; Guanyin Repentance Ritual; the 108 Daily Rituals

Ⅰ. 서론

관음신앙의 핵심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자비사상이며, 중생을 구제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성격이 강하다.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 4대 보살의 하나이며, 용모는 단정하고, 늘 손에 버드나무 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으며, 무량한 지혜와 신통을 가지고 있고, 대자대비하여 인간의 고통을 구제하는 보살로 묘사된다. 인도 초기불교의 관음신앙은 대승불교의 초석이 되는 보살도의 선발주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국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위신력을 믿는 관음신앙의 핵심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사상에 토대를 두고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며,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원력이라고 할 수 있다.1)

불교사상사적 차원에서의 관음신앙은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보살도(菩薩道) 이념과 구제사상에 외래영향을 받아들여 형성된 것으로 정의되고 있으며,2) 반야계 경전이 등장하게 되면서 관음은 반야지혜를 대표하는 보살로서의 위치도 부여받게 된다.3) AD 1세기 전후로 초기 인도대승불교 보살신앙의 대표가 자리잡았던 관음신앙이 중국불교에 전달된 것은 최소 3세기 말로 소급될 수 있다.4) 중국에서의 여성들에게 관음보살의 영향력은 석가모니불을 뛰어넘는 정도이며,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관음보살신앙이 보편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5)

이 글에서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입된 이후 중국화하는 관음신앙의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에서 남송대에 이르기까지의 변용의 현상들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특히 중국 내에서도 중원지역보다 활발하게 관음신앙이 힘을 발휘했던 강남의 항주지역을 중심으로 그 역동적인 변화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절강은 도시의 상업을 배경으로 축적된 부로 인해 다양한 종교들이 발전했으며, 각 교단들도 활발하게 성장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교의적 시도들이 이루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천태와 선으로 대표되는 중국 강남지역의 불교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음신앙이 수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나아가 당송대 불교에서의 관음신앙을 불교의례적 차원에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 본 글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선승들의 수행법과 실천에 녹아 들어간 관음신앙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송과 고려의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 한국불교 의례와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Ⅱ. 문헌 번역과 재해석을 통해 중국에 뿌리내린 관음

관음신앙의 시작이 인도의 초기 대승불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관음이 처음으로 언급된 경전은 모두 서기 300년 이전에 작성되었다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불경으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2세기),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1~2세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실려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 (13세기), 그리고 『반야심경(般若心經)』(2~4세기) 등을 들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법현(法顯, 337~422)이 400년경 마투라에서 관음에게 제물을 바치며 숭배하는 대승 승려들에 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적어도 5세기에는 인도지역에 관음신앙이 정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6)

중국불교에서 가장 이른 관세음신앙 관련 문헌은 서진(西晉) 태강(太康) 7년(286)에 축법호(竺法護, 231~308)에 의해 한역된 『정법화경(正法華經)』의 「보문품(普門品)」이다. 초기 번역된 용어인 ‘광세음(光世音)’이라는 명호는 점차 ‘관세음(觀世音)’으로 대체되었으며, 각종 관음 감응의 고사도 생겨나게 되었다. Avalokiteśvara에 대응하는 한역 용어로 ‘광세음’을 가장 먼저 사용한 역경승은 안식국(安息國) 출신의 안세고(安世高)이다. 그 후 월지국(月支國) 출신의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이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으며, 차츰 구마라집의 구역(舊譯)에서 등장하는 ‘관음(觀音)’ 혹은 ‘관세음(觀世音)’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7) 현장(玄奘, 602~664)의 신역(新譯)에서는 ‘관자재(觀自在)’로 번역이 되는데, 이처럼 관세음보살이 신역에서 관자재보살로 불리는 이유는 현장의 번역작업 말기의 황제였던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599~649)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8) 어떤 식으로 그 명칭이 번역되었든 관세음보살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무척 인기 높은 보살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진(姚秦)시기에 구마라집이 역출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관음신앙의 전파를 한층 촉진시켰으며, 그 중 「보문품」이 단행본의 형식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묘법연화경』 「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지념(持念)하면 7종의 재난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화난, 수난, 풍난, 도장난(刀杖難), 나찰난, 가계난(枷械難)과 원적난(怨賊難)이다. 이러한 7난은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난을 보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9)

사람들이 재난을 만날 때 단지 그 명호만 불러도 달려와서 구제해준다는 관음의 위신력 때문에 3세기에 중국에 관음신앙이 전입된 이후 매우 빠르게 확산되었다. 또한 초기에는 관음이 대세지와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었지만, 점차 독립적인 관음신앙으로 발전했던 것을 볼 수 있다.10) 『법화경』과 『화엄경』에서 관음보살은 구원자의 역할이기는 하나, 석가 혹은 아미타불에게 부속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해 밀교 경전에서 관음보살은 서서히 독립된 보편적인 구원자로서 부상하게 된다.11) 관음이 아미타불의 최측근뿐만 아니라 계승자로 등장하는 경전의 하나는 5세기에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비화경(悲華經)』이다. 더 나아가 관음이 서서히 독립된 구원자로서 등장하는 밀교문헌은 『불설대승장엄보왕경(佛說大乘莊嚴寶王經)』이다.12)

인도에서의 전입 이후 중국의 초기 관음신앙은 단지 관음보살의 명호를 칭명하여 현실의 고난을 해결하는 정도로 아직 신앙적 체계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전파 범주도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의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어서 동진(東晉), 남북조시대에서 수대에 이르면 많은 관음경전류들이 역출된다. 인간이 고난을 면하기 위해 관음의 위신력에 빌고 의지하는 구고구난(救苦救難)형의 관세음신앙은 남북조시기 가장 유행했던 유형이었으며, 당시 중국 민간인들의 요구에 부합했던 수준이었다.13)

이 시기에는 관음의 위신력에 의한 도움을 얻기 위한 신앙의 형태는 여전했으며, 명호를 칭념하는 수행법 위주였지만, 서서히 조상(造像), 예배, 공양, 송경(誦經), 주문 염송 등 다양한 수행방식이 유행했다. 위진남북조 시기 신자들이 관음의 가호를 받기 위해 암송하였던 경문은 이른바, 『관세음경(觀世音經)』이라 불리던 『법화경(法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었다. 당대(唐代)에 들어서게 되면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방식의 위진남북조시기 관음숭배의식이 밀교(密敎)의 영향으로 인해 주술성과 신비성을 띠면서도 교의적으로 정교하게 완성되기 시작하였다.14)

이러한 배경하에서 중국적 특색이 드러나는 많은 관음신앙 위경(僞經)이 등장하게 된다. 중국에서 찬술된 관세음신앙 관련 위경들은 『고왕관세음경(高王觀世音經)』 『대비관세음경(大悲觀世音經)』 『관세음삼매경(觀世音三昧經)』 『서응관세음경(瑞應觀世音經)』 『관세음참회제죄주경(觀世音懺悔除罪呪經)』 『관세음십대원경(觀世音十大願經)』 『관세음영탁생경(觀世音咏托生經)』 『미륵하생관세음시주보경(彌勒下生觀世音施珠寶經)』 『관음무외론(觀音無畏論)』 『관세음성불경(觀世音成佛經)』 『관세음소설행법경(觀世音所說行法經)』 『관세음관경(觀世音觀經)』 『일장관세음경(日藏觀世音經)』 『신관음경(新觀音經)』 『청정관세음보현다라니경(淸淨觀世音普賢陀羅尼經)』 등이 있다.

대다수의 관음신앙 관련 위경들은 이미 산실되고, 현재는 『고왕관세음경』과 『관세음삼매경』 만이 남아있다. 그 중 『고왕관세음경』이 가장 유명한데, 이 문헌은 대략 북조 후기에 찬술된 것으로 추정된다.15) 고왕관세음(高王觀世音)신앙은 위경인 『고왕관세음경』을 따라 출현한 관음신앙 형식 중의 하나이다. 고왕관세음신앙은 민간에서 매우 유행했으며, 신도들은 늘 이 경문을 지송하는 형식으로 신앙을 실천했다. 현존하는 문헌에 따르면, 『고왕관세음경』의 경문은 서위(西魏) 대통(大統) 13년(547) 도읍주(都邑主) 두조현(杜照賢)의 조상비에 새겨진 것이 가장 이른 기록이다. 이는 이 경이 아무리 늦어도 547년에는 이미 세상에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16)

관음신앙 관련하여 한역 경전 못지않게 민간사회에 영향을 준 문헌은 바로 관음의 위신력을 고사 형식으로 증험하는 영험기(靈驗記)이다. 남북조시기의 관음영험고사의 자료는 주로 『광세음응험기(光世音應驗記)』 『속광세음응험기(續光世音應驗記)』 『계관세음응험기(系觀世音應驗記)』 『명양기(冥陽記)』와 당대(唐代)의 『법원주림(法苑珠林)』 『법화경전기(法華經傳記)』, 송대의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의 문헌에 전한다.

수·당시기에 이르면 감응고사 중에 관음보살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갈수록 많아지게 된다. 화신으로 응현하는 관음 중에는 고승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사례도 있었는데, 이는 관음감응신앙이 점차 민간에 깊이 침투했음을 나타낸다.17) 비교적 이른 관음보살감응기로 남조 유송(劉宋)의 부량(傅亮)이 찬술한 『광세음응험기(光世音應驗記)』가 있는데, 이 책은 중국에서는 실전되었으며, 일본에 가마쿠라 중기의 고서본이 교토 청련원(靑蓮院)에 소장되어 있다. 수·당시기는 중국불교의 전성기로서 관음보살 감응신앙이 한층 심화되었으며, 관음보살감응고사는 더욱 다채로워지고 포교적 색채도 더 농후해졌다. 응험설화들은 불교포교를 위해 노력하던 승려들에 의해서 이용되기도 하면서 관음신앙을 보다 더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간사회에서 현세 구제의 신으로서의 관음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도 크게 공헌했다.18)

수대 후기부터 송대는 관음신앙의 보급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현저한 특징은 대량의 관음류 경전의 번역과 해석서가 나와서 한전(漢傳; 중국)불교 관음신앙의 이론과 체계가 완성되었으며, 관음신앙형태도 풍부하고 다양해진 것을 들 수 있다. 관음신앙은 각 종파에 보편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사회적 전파와 보급도 더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관음 위경이 만들어졌으며, 민간에서는 더욱 많은 종류의 관음 화본과 전설이 유통되었다. 5대 시기부터 풍미하기 시작한 관음신앙은 송대 이후 선종의 유행, 북송의 문인사상, 그리고 대중적 세속문화의 영향을 거쳐 위경(僞經), 시문, 화본(話本)의 증가에 수반하여 이미 관음이 중국화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19)

한역경전과 영험기 뿐만 아니라, 관음 관련 경전을 2차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관음신앙을 교단의 수행의례로 정착시키면서 교단의 교의와 실천을 한 단계 상승시키기도 했었는데 바로 천태종에서 그러한 사례를 볼 수 있다. 한역된 관음신앙 관련 경전을 해석하는 주석작업을 시작한 것은 천태교학의 확립자인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였다. 그는 인도 출신의 거사 축난제(竺難提)20)에 의해 번역된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부터 주석을 시작했다.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은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위해 병고를 없애고 신주를 설하는 내용 위주로 되어있다. 제목 중의 ‘소독복해(消伏毒害)’는 『청관음경』의 핵심내용으로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형상과 관음법문의 수승한 신통을 드러낸다. 『청관음경』 속의 ‘消伏毒害’의 공능은 관세음보살이 설한 주문[呪]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주문은 주로 네 가지로 되어있다: 구호중생신주(救護衆生神呪), 파악업장소복독해다라니주(破惡業障消伏毒害陀羅尼呪), 대길상육자장구구고신주(大吉祥六字章句救苦神咒), 관정길상다라니(灌頂吉祥陀羅尼)이다.

이 경전은 한전불교의 관음도상, 관음법문, 관음참법 등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파급·확산의 공은 천태종단으로 귀결된다. 천태지의의 『청관음경소(請觀音經疏)』는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의 경문 내용에 대해 이론적 해석을 한 주석문헌으로, 천태종단에서는 이 문헌을 주요 텍스트로 삼게 된다. 천태지의의 『청관음경소』 1권은 지의의 많은 창의적인 이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천태교법의 원융을 구현한 경전이다. 천태지의는 관음법문의 염불삼매와 실상염불, 일심삼관 등의 천태지관법문을 결합하여, 관세음보살의 보살도 수행과 지혜관조를 강조했다.

나아가 지의는 『청관음경소』에서 관세음보살의 ‘지혜의 관조[智照]’의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지의는 천태지관 해석과 관음법문을 결합하여 천태종의 교의적 전통을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청관음경』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더 나아가 천태종 내부에서도 수·당에서 송에 이르기까지 장안관정(章安灌頂), 자운준식(慈雲遵式), 고산지원(孤山智圓) 등이 지속적으로 관음참법을 완성했으며, 관음신앙도 점점 정토종과 합류하는 과정 중에 관련 경문도 중국화가 완성되었다.21) 천태지의가 관음의 관(觀)을 일심삼관으로 해석하고 이를 수행과 결부시킨 것은 이후 등장하는 유심(唯心)정토나 유심관음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의에게 있어서 관세음이란 ‘세상의 근기를 관찰’하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세계로 이끄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일심삼관이기 때문에 관세음의 관을 천태종의 ‘관행(觀行)’과 결부시켜 해석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22)

『청관음경소』 권1에는 ① 장엄도량 ② 작례(作禮) ③ 소향산화(燒香散華) ④ 계념(繫念) ⑤ 구양지(具楊枝) ⑥ 통청삼보(請请三寶) ⑦ 송주(誦呪) ⑧ 피진(披陳; 表白) ⑨ 예배(禮拜) ⑩ 좌선 10가지 절차로 행해지는 간단한 관음참법이 나온다. 이 열 가지 절차의 관음참법은 경문의 총결과 규범에 의거하고 있으며, 관음신앙 중국화의 중요한 체현이기도 하다. 지의 사후에 쇠락했던 천태종이 북송시대에 부흥하면서 이전의 참법(懺法)체계도 전면적으로 재해석되어 사회적인 요구에 부합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었다.

북송대 자운준식(慈云遵式, 964~1032)도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삼매의(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三昧儀)』 1권을 저술하여 관음참법을 더욱 상세하게 완비하였다.23) 자운준식에 의해 ‘청관음참(請觀音懺)’으로 재생산된 참법은 민간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차원으로 수정되었으며, 참법 안의 주문도 이러한 민간의 종교성을 반영했다.24) 이러한 배경에는 자운준식의 개인적인 체험이 밑바탕이 되었는데, 그가 병을 얻었을 때 관음소복주를 지송하여 치유의 영험을 겪은 후에 관음신앙이 더욱 깊어졌던 배경으로 인해 관음참법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운준식이 관음참법을 수집하고 정리한 문헌이 『관음예문(觀音禮文)』이다. 그는 관음신앙과 미타정토신앙을 결합하여 미타정토왕생을 서원하고, 염불삼매를 수행했으며, 북송대 천태종과 정토종의 합류를 구현했다.25) 준식은 ‘치성광도량염송의(熾盛光道場念誦儀)’를 제정하여 서민들이 집에서 참의를 소재(消災)의식으로 거행할 수 있게 한 것 외에도 관음법문을 정토법문으로 발전시켜서 천태종의 수식법(數息法)과 염불을 결합시켰다.26)

이에 비해, 이전 수대의 천태지의는 관음법문의 ‘지조(智照)’의 공능을 부각시켜서 염불삼매와 실상관법(實相觀法)을 서로 결합하여 관음법문을 천태지관의 한 부분이 되게 했으며, 정토왕생신앙을 명확하게 지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지의와 자운준식의 차이에서 수당에서 송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중국불교에서 이루어진 관음신앙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운준식의 대에 이르면 당시 불교신도들의 종교적 요구를 수용하여 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을 연결하면서 천태 참법과 왕생염불을 융합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상 절강성 지역의 종교적 동향 범주 내에서 관음신앙이 중국불교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중국불교 안에서 천태종이 해낸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도불교를 중국화하는 과정에서 교의적·실천적으로 융합하고, 재해석했던 것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관음신앙이 중국불교에 탄탄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도 오월국 전씨 왕조의 불교 후원, 그리고 천태 조사들의 교의적 재해석이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절강성 지역의 천태종과 선종은 그 극성기의 시대가 다를 뿐 지역적 범주는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절강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지역 선종사원들의 종교문화적 토양은 한 시대 앞서 천태종이 다지고 가꿔놓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남종선 계열 선사들의 관음신앙을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Ⅲ. 항주지역의 불교 기반과 관음신앙

지리적으로 보타산은 절강성 정해(定海)현 주산군도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동해 해역에 속한다. 하지만 보타산의 관음, 즉 강남의 보타관세음을 중국에서는 남해(南海)관음으로 부른다. 분명히 중국 기준으로 볼 때 동해에 속하는 보타산 해역의 관음을 왜 남해관음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그들 견해 중의 하나는 남인도에서 동남아시아 해역을 거쳐 중국에 전해진 관음신앙의 이력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르는 주처(住處)로 인식되는 布呾洛迦(Potalaka; 또는 補怛洛伽, 補陀落伽, 普陀洛으로 번역)는 인도 동남 연안지구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난구제의 위신력으로 인해 특별히 항해자, 연해 어민의 숭배를 받았다.27) 이러한 관음신앙의 중국 전입과 함께 자연스럽게 인도의 보타락가와 유사한 중국 내에서의 관음의 주처 역시 설정되어야 했다. 또한 12세기 이후가 되면 인도의 불교가 쇠망하고, 이어서 남인도 관음도량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최종적으로 절강성 매잠산(梅岑山)을 남인도의 보타락가산의 대체물로 신앙하게 된다. 이에 따라 송대 이후에는 이 매잠산을 보타락가를 의미하는 보타산(普陀山)으로 지칭했다.28) 관세음보살 주처인 광명산(光明山)은 남인도 해역에 속하는 보타락가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인도의 관음주처를 중국의 강남으로 전환한 중국관음신앙의 입장에서 부르는 명칭이라는 것이다.29) 결국 중국의 동해해역에 속하는 보타산이 남인도의 관세음보살을 그대로 중국으로 옮겨온 공간으로 전화(轉化)되면서 보타산의 관음 역시 ‘남해관음’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항주만의 주산(舟山)군도에 속하는 보타산의 발전과 해상무역의 발달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수(隋)대 부터는 대운하의 종점인 항주(杭州)가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되면서 수많은 선박이 보타산에 와서 안전한 항해를 위한 기도의식을 했는데, 그중에는 일본과 한국(발해·신라·고려)에서 온 외국 상인도 있었다.30) 주로 당 중기 이후 빠르게 상업이 번창하면서 해상 교통의 발달로 인해 절강 보타산 관음도량이 흥기하게 된 것이다. 보타산은 중국 동남부의 중요한 해상 항도이기 때문에 해상무역상과 어민들의 신앙과 관련이 깊었으며, 자연스럽게 관음신앙의 핵심이 되었다.31) 보타산 관세음은 이 항로를 왕래하는 여러 나라의 여행객들이 해적, 해난 등의 위급함을 당했을 때 그들을 구제해주는 신으로서 숭배되었던 것이다.32) 결국 북송시대부터 동북 발해 해역에서 일본해, 황해, 동해를 거쳐 점성(참파국) 남중국해에 이르는 동아시아 해역 전체에 걸쳐 보타산 관세음은 항해자의 정신적 지주로서 종교적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이 관음성지 보타산이 위치한 절강성은 양자강 이남, 즉 중국의 강남에 속하는 지역이며, 10세기에 존재했던 오월국의 영토에 해당한다.33) 오월국(907~978)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중 십국의 하나이며, 도성은 전당(錢塘; 항주)이고, 영토는 현재의 절강성, 강소성 동남부 및 복건성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월지역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오국(吳國)과 월국(越國)의 통치 영역이었고, 행정구역으로는 중국 동남부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남부, 그리고 복건성 북부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온화한 기후와 지리적인 이점으로 산수 환경이 우수하고, 농수산물 생산과 유통의 발달로 명·청 시대 경제적 중심이기도 했다.

오대 시기에 전씨 오월국은 항주에 도읍을 건국하고 불교를 크게 후원했다. 동남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병란이 많지 않아서 항주를 중심으로 상업과 유통 등이 발달할 수 있었던 데다가, 불교를 후원할 수 있는 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흥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과 오대시기에는 관세음보살상의 인시(印施), 즉 인쇄해서 배포하는 공덕행이 성행했으며, 현재까지도 유물이 많아 남아있다. 오월국의 관음신앙은 개국 군주인 전류(錢鏐, 852~932)에서부터 시작된다. 대규모로 관세음보살상이 제작된 기록은 오월국 충의왕 전숙(錢俶, 947~978 재위)시대의 일이다. 충의왕 전숙(忠毅王)은 그의 조부 전류에서부터 시작된 관세음보살신앙을 받아들여서 대규모로 관세음보살상을 제작했다.34)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권11 ‘용산범해관음시병서(龍山泛海觀音詩并序)’에는 오월왕 전류가 동광(同光) 원년(923)에 절강 염관(鹽官; 현재 海寧)의 백성이 바다 위의 붉은 빛을 보고 물결 속에서 전단목으로 만든 관음의 고상(古像)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용산 각원정사(각원정사)의 동쪽 전각에 봉안하였는데 신령스러운 이적이 드러났다는 「범해관음기(泛海觀音記)」 인용 기록이 등장한다.35)

전류 이후에 왕위를 계승한 문목왕(文穆王) 전원관(錢元瓘, 932~941 재위)은 천복(天福) 4년(939)에 항주 천축사 사문 도익(道翊)이 좋은 나무를 구하자, 장인 공인겸(孔仁謙)을 시켜 관음상을 제작하게 했다. 또한 전원관은 같은 해에 천축산에 관음전을 세웠다. 마지막 통치자인 전숙은 오월의 왕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신봉했다. 전숙은 건우(乾祐) 2년(949)에 석실동에 관세음보살상 1구를 새겼으며, 스스로 「건우착불찬(乾祐鑿佛贊)」을 지어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36)

송대에는 관음신앙이 선사들의 기우(祈雨)의식과 연관되면서 권력자의 후원도 두터워지고 민간에서도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절강성 상천축사 관음은 더욱 광범위하게 숭배를 받았는데, 그 배경에는 기우와 전청(轉晴)의례가 있었다. 절강성에서는 수재, 가뭄이 발생하면 지방관원이 상천축사 관음에게 가서 재난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것이다.37) 항주의 상천축사는 보타산보다 앞서 관음의 성지로 여겨졌던 곳이다. 상천축사가 관음의 성지로 여겨지게 된 계기는 바로 영험한 관음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8) 관음성지로서 강남의 주요 명소가 되었던 상천축사의 인기는 명대까지도 지속되었다.39)

상천축사에 이어 10세기 이래 관음과 관련된 영험한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보타산은 12세기 전반 강남이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되자 본격적으로 성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관음의 시현을 경험하고자 많은 이들이 방문하게 되면서 보타산은 남송 황실뿐 아니라 강남 지역 사대부 및 불교 신도들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각의 수리와 보수가 행해지고 새로운 성물의 안치가 이루어졌다.40)

남송대에는 임안(臨安; 항주)를 도읍으로 삼고, 전국의 경제중심지가 남방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승려와 불교문화도 항주로 옮기게 되었으므로 불교가 항주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항주는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각종 종파와 신앙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41) 절강성을 비롯한 강남지역 불교가 성행한 원인을 사찰의 숫자 외에도 개창자들의 출생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종 일파인 조동종(曹洞宗; 良价, 807~869; 제기(諸曁)), 법안종(法眼宗; 문익(文益), 여항(餘杭)), 운문종(雲門宗; 文偃(864~949), 가흥(嘉興)) 등은 종조(宗祖)가 모두 절강성에 속하는 지역 출신이다. 관음신앙과 관련이 깊은 영명연수(永明延壽) 역시 오월국에 살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42)

또한 남종선 계열인 법안종에 속하는 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는 선과 천태교학의 융합을 시도했으며43), 그의 선법이 제자인 보운의통(寶雲義通, 927~988)에 이어지고, 다시 의통의 제자인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와 자운준식(慈雲遵式, 963~1032)에 의해 북송대 천태종이 부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천태덕소-보운의통에서 지례와 준식으로 이어지는 법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선과 천태가 이어지게 된다. 오월국 항주지역 불교계의 주류는 천태종과 법안종이었으며, 이는 두 종파가 유사한 종교문화적 토양을 공유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항주 절강지역의 관음신앙은 남송대에 왕성했던 선종 사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 단적인 사례로 보타산의 승려 덕소(德韶, 13세기 전반 활동)44)가 가정 3년(1210) 8월에 태풍이 불어서 원통전이 무너지자 만민(万缗)을 하사해달라고 조정에 청하여 수년에 걸쳐 새 전각을 세웠던 일을 들 수 있다.45) 덕소는 영종(寧宗)이 ‘원통보전(圓通寶殿)’, ‘대사교(大士橋)’ 사액을 내리자 용장각(龍章閣)을 세워 그 현판을 소장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덕소가 수년간에 걸쳐 세운 전각이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는 점이다. 전각명에 ‘원통’이 붙으면 관세음보살을 모신 공간임을 나타낸다. 수년간에 걸쳐서 지을 정도의 크고 장엄한 전각이라면 해당 사원에서 그만큼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의례와 신행의 비중이 컸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면, 남인도 해역의 보타락 관음주처와 중국 동해해역 주산군도의 보타산을 종교적으로 동일시하는 것과 맞물려 해운이 발달한 절강 항주지역에서 관음신앙이 크게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음신앙은 항주지역에서 발달한 천태와 법안종 등의 선종사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는데, 대형 사찰에 관음 예배공간을 건축하고, 이를 남송 정부가 지원했던 사실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하겠다.

Ⅳ. 당·송대 선승들의 관음신앙

1. 영명연수(永明延壽)의 108사(事)와 관음신앙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가 속했던 법안종(法眼宗)은 절강 출신인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에 의해 개창되었으며, 선종에 속한다. 법안종은 운문종의 개조인 운문문언(雲門文偃, ?~949)의 스승인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문하의 현사사비(玄沙師備, 835~ 908) 계통에서 나온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영명연수로 이어지는 선문(禪門)이다. 비록 영명연수 역시 선종의 계보에 속하는 선사라 하더라도 강남지역 오월국 관음신앙의 토양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저술이나, 수행에서 상당수 관음신앙과 연관된 면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법화경현응록(法華經顯應錄)』 (2卷)에는 영명연수가 선관(禪觀)수행을 하던 중에 관음이 입에서 감로수를 내어 관정하는 것을 본 이후로 관음의 변재(辯才)를 얻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처음에는 그가 설두사 주지로 있었으나, 나중에는 영명사로 갔는데 제자들이 2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미륵하생으로 불리며 대정진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명연수가 얻었다는 관음의 변재라는 것이 곧 법문의 감화력이 뛰어났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46)

그의 저술 『지각선사자행록(智覺禪師自行錄)』은 영명연수가 제시하는 일상의 수행, 즉 일과(日課)를 108가지로 세분하여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동시에 공덕을 축적하는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명연수가 제시하는 108사(事) 중 9번째인 ‘항상 하루 여섯 번 천수천안대비다라니를 외어 일체 법계 육근(六根)이 지은 일체의 장애를 참회한다’는 내용이 있다.47) 이 천수천안대비다라니(千手千眼大悲陀羅尼)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비심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大悲心陀羅尼經)』을 소의경전으로하며, 밀교의 변화관음에 속하는 천수천안대비관음의 위신력을 비는 다라니이다.

다음으로 영명연수의 108사 중 24事는 ‘빙빙 돌며 관세음본신다라니를 외면서 두루 원통신을 갖추고 보문행을 이루기를 발원하는 것이다.48) 여기에서 ‘빙빙 도는 것[旋繞]’는 존상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요잡(繞匝) 형식의 행도(行道)수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월지역에서 성행한 천태종의 사종삼매 중에 ‘상행삼매(常行三昧)’도 이와 유사하게 탑이나 본당 주위를 돌면서 끊임없이 염불을 하는 형식이다. 동일 강남지역의 종교문화권에 속한 영명연수 역시 염불 대신 관세음다라니를 외면서 행도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08사 중 27사는 ‘오시(午時)에 일체 법계중생을 위하여 관음을 정대(頂戴)하고 행도(行道)하며, 관음의 실제의 몸을 이루고 동체 대비의 행을 한다’49)고 되어있다. 관음을 ‘정대(頂戴)’, 즉 작은 관음상을 머리에 인 상태에서 실천하는 일종의 ‘관상(觀想)’수행법으로서, 관음과 한 몸이 되어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을 심상(心想)하는 수행으로 생각된다.

다음 30사는 ‘황혼에 동학법려, 보타락가산 대자대비구고관세음보살마하살, 시방법계일체보살마하살에 예배하고, 두루 법계일체중생이 원통문(圓通門)에 들어 법계 운행을 하기를 발원한다’50)고 되어있다. 황혼 무렵에 실천하는 수행으로서, 관세음보살과 일체 보살마하살을 비롯하여 함께 수행하는 동학법려(同學法侶)에까지 원통문, 즉 관세음보살의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기를 발원하는 기도를 행하는 것이다.

33사는 ‘황혼에 두루 일체법계중생을 위하여 빙빙 돌면서 관세음보살마하살을 념(念)하고 14무외(無畏)를 갖추고 중생을 복되게 하기를 발원한다’51)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33사 역시 황혼에 선요하는 행도를 실천하면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칭명하는 기도법이라고 할 수 있다.

38사는 ‘초저녁에 일체법계중생을 위하여 빙빙 돌면서 관음연화심다라니를 염하고, 두루 대비문자재혜를 갖추기를 발원한다. 진언은 ‘옴아로륵계사바하(唵阿盧勒繼娑婆訶)’를 왼다’52)고 되어있다. 83사는 ‘일체 법계중생을 위하여 주야 여섯 번 따로 도량을 건립하여 관음존상에 공양하고, 여섯 번 선요하며 명호를 외고 모든 중생의 오안(五眼)이 밝아지며 십신(十身)이 현현하기를 발원한다’고 되어있다.53) 여기서 ‘도량을 건립한다’는 것은 의식을 행하기 위해 단을 세운다[作壇/設壇]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여섯 차례 단 위에 모신 관음상에 공양하고, 상 주위를 선요하면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고, 모든 법계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해 기도 발원하는 수행법인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행록』에서 드러난 영명연수의 관음신앙이 무척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종경록(宗鏡錄)』,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심부주(心賦註)』에도 관세음보살신앙과 관련된 내용들이 등장한다. 영명연수의 저술에서 드러나는 관음신앙은 그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관음보살의 영험사적이며, 또한 관음보살수행의 법문은 주로 근기가 두루 원만하게 통달하게 되는 이른바, 원통을 위한 것이며, 모든 중생의 구원을 지향하는 대자비로 확장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관음보살의 성격과 특징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54) 보살신앙은 특정 보살을 불문하고, 그 토대 자체가 대승불교의 보살도(菩薩道)에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발원자 자신을 위한 기도만이 아닌 전체 법계 중생을 향해 기도의 대상을 확장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영명연수의 108사에 나타나는 관음보살 기도 역시 이러한 경향성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선승인 영명연수가 108사라는 만선(萬善)적 성격의 수행법, 즉 모든 수행법이 깨달음을 위한 목적에서는 유효하다는 열린 수행관을 통해 관음보살신앙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명연수의 수행관은 이후 다른 선종의 선승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보지(寶誌)화상과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당대에 이르러 밀교사상의 출현을 따라 등장한 각종 변화관음신앙 중에서 가장 먼저 유행한 것이 십일면관음이었다.55) 십일면관음 역시 밀교의 변화관음에 속하며, 밀교 문헌의 한역으로 인해 중국에서 알려지게 된다. 십일면관음의 인도 원류는 분명하지 않으며,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도상은 서인도 Kanheri 석굴의 한 사례가 있을 뿐이다.56) 십일면관음에 관한 비교적 초기의 문헌은 북주(北周) 야사굴다(耶舍崛多) 역 『불설십일면관세음신주경(佛說十一面觀世音神呪經)』이다. 그 후 현장(玄奘, 602~664) 역의 『십일면신주심경(十一面神呪心經)』, 불공(不空, 705~774) 역 『십일면관자재보살심밀언염송의궤경(十一面觀自在菩薩心密言念誦儀軌經)』 및 아주구다(阿地瞿多) 역 『다라니집경』 권4에도 『관세음신주경』이 있으며, 당대 법상종의 혜소(慧沼, 650~714)가 『십일면심주경』에 대한 의소(義疏)를 진행했다.

당대의 각종 변화관음 중에 가장 초기에 유행했던 것이 십일면관음이다. 대략 측천무후시기부터 십일면관음상 독존이 대량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천수천안관음과 같은 다른 변화관음과도 결합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측천무후 시기에 독존 십일면관음상의 우아한 조상이 대량으로 출현하고 성행한 배경에는 호국사상이 있다. 동시에 천수관음과 같은 각종 변화관음도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상호간에 결합하고 차용하는 현상을 보여준다.57)

십일면관음 외에 십이면관음신앙도 중국에 전입되었는데, 십일면과 십이면은 본질적으로 동일개념으로 볼 수 있지만,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십일면에 본면(本面)을 더하여 십이면이 되었다는 점이다. 십일면관음은 의궤상으로 보면, 정면의 3면(얼굴)은 보살면으로 적정상(寂靜相), 왼쪽 3면은 분노상, 오른쪽 3면은 보살면에 개이빨이 위로 드러난 이아상출상(利牙上出相), 뒤의 한 면은 웃으며 분노하는 흉악대소상(暴惡大笑相), 머리 꼭대기는 불면인 여래상으로 되어있다. 이에 비해 오월국의 ‘십이면관음24응현’상을 보면, 첫 번째 줄에 3면을, 두 번째 줄에 4면, 세 번째 줄에 4면, 맨 꼭대기에 1면을 배치하는 4층 구조로 배열된다.

중국에서는 이 십일면관음 혹은 십이면관음을 남조 제량(濟涼)의 보지(寶誌)화상(418~514)58)과 함께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기우(祈雨)의식을 잘 설행했으며, 양 무제가 수륙법회를 처음으로 개설하는 과정에서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이한 능력이 있어서 점을 잘 쳤으며, 계율에도 얽매임이 없었고 예언도 잘했다고 한다.59) 양무제의 큰 신뢰를 받았던 그는 신이력(神異力)과 예언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심지어 관음의 현신으로까지 불리게 된다. 이 십이면관음과 지공(誌公)화상과의 관계는 송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연계되기 시작한다.60)

9세기에 활동했던 혜연(慧然)이 찬술한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 권1에도 십이면관음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십이면관음은 어디가 정면이냐고 묻는 마곡에게 스승은 그가 어느 곳을 향해 가느냐고 물으면서 마곡을 지팡이로 때리려 하는 대목이다.61) 당연히 그가 가려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얼굴이 십이면관음의 정면 아니겠냐는 질책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에서 십이면관음이 이미 선사들의 참문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사제간의 참문에서 등장할 정도라면 9세기 당(唐)의 선사들 간에 익숙한 보살형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십일면관음에 비교하여 십이면관음은 문헌에 기록된 것이 적다. 또한 문헌에서 나타나는 기록 역시 대부분이 지공(誌公)화상 십이면관음 화현 관련 내용들이다.62)

‘십이면관음’이라는 용어는 당대 임제의현(臨濟義玄, ?~866)의 『임제록(臨濟錄)』 및 오대시기 남당(南唐) 정(靜)·균(筠) 두 승려가 편찬한 『조당집(祖堂集)』(952)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두 문헌 안에서는 십이면관음과 남조 제량(齊梁)의 신이승 지공을 결합시키는 정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송대에 이르러 지반(志磐)의 『불조통기(佛祖統紀)』(1269)에는 보공화상과 십이면관음의 관련성이 많이 나타난다.63) 화공 장승요(張僧繇)를 불러서 보공의 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보공이 얼굴을 그어서 십이면관음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각각의 얼굴이 자비롭기도 하고 위엄 있기도 해서 장승요가 결국은 그릴 수가 없었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64)

남조 시기까지는 보공화상이 보살이라고는 했지만 관음보살과 바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대 8~9세기 초에는 보공의 관음화현설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얼굴을 그어서 관음상을 드러내니 승요로 하여금 그리게 했으나 그리지 못했다는 고사가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보공화상이 십일면관음의 화신이라는 설이 출현한 것은 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였으며, 10세기 상반기에 다시 십일면관음의 설이 등장했다. 11세기의 기록에는 보공화상이 십이면관음상으로 시현되었으며, 십일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11세기에 이르면 십이면관음이 보공 화현의 고사 안에 들어와 완전히 십일면관음을 대체했던 것이다. 남조시대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흐르면서 보공화상이 엄연한 십이면관음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는 결국 처음에는 십일면관음에 속했던 십이면관음이지만, 10세기에 이르러 십이면관음이 독립적인 교의 체계를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보공의 이면화현(剺面化現)고사와 결합하여 십이면관음신앙의 선전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65)

수세기에 걸쳐 선승의 신이적 능력을 바탕으로 그를 관음보살로까지 숭배했던 현상은 그 시기의 문화사적 맥락까지 감안하여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착안할 논점이 있다면 십일면 혹은 십이면관음의 현신으로 보공의 행적을 문헌에 기록했던 기록자들과 이를 화두 참문에까지 적용했던 이들이 천태승 혹은 선승들이었다는 것이다. 특정 신이승의 관음화신설은 전승 자체로 많은 신도들을 사원 안으로 흡수하는 효과도 컸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보공의 십이면관음 화현설은 밀교 변화관음까지도 수용했던 선승들의 수용력이 발휘되었던 송대 불교의 면목을 볼 수 있는 현상 중 하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Ⅴ. 결론

본문에서는 당·오대에서 남송대를 중심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입된 이후 중국화하는 관음신앙의 역사와 변용의 현상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중국 내에서도 활발하게 관음신앙이 힘을 발휘했던 강남의 절강 항주지역의 교단과 승려들이 관음신앙을 수용하고 해석했던 모습을 관찰했다. 절강성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지역은 도시의 상업발전과 해상무역으로 축적된 부로 인해 교단들도 안정을 구가했으며, 특히 송대에 이르러 선종교단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관음신앙은 관음의 위신력을 증험하는 영험기, 위경, 화본과 전설을 통해 민간에 유통되었다. 5대 시기부터 민간사회에 파고들기 시작한 중국의 관음신앙은 송대 이후 선종의 유행, 북송의 문인사상, 그리고 대중적 세속문화의 영향을 거쳐 중국화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위경과 영험기 뿐만 아니라, 한역된 관음신앙 관련 경전을 해석하는 주석작업이 중국화된 종파인 천태교단에 의해 선도적으로 진행되었다. 천태지의는 관음신앙과 미타정토신앙을 결합하여 미타정토왕생을 서원하고, 염불삼매를 수행했으며, 북송대 천태종과 정토종을 융합시켰다. 자운준식은 민간신도들이 집에서 참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의궤를 새로 제정했으며, 관음법문과 정토신앙을 결합시켰다.

보타산이 위치한 절강성은 양자강 이남, 즉 중국의 강남에 속하는 지역이며, 10세기에 존재했던 오월국의 영토에 해당한다. 오대 시기에 전씨 오월국은 항주에 도읍을 건국하고 불교를 크게 후원했다. 송대에는 관음신앙이 선사들의 기우(祈雨)의식과 연관되면서 권력자의 후원도 두터워지고 민간에서도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남송대에는 임안(臨安; 항주)를 도읍으로 삼고, 전국의 경제중심지가 남방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승려와 불교문화도 항주로 옮기게 되었으므로 항주지역에서 불교, 특히 선종교단이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또한 남송대 강남지역의 관음신앙은 선종 사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강남지역에서 활동한 선종교단 중 하나인 법안종의 대표적 고승인 영명연수의 『자행록』이나, 『종경록(宗鏡錄)』,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심부주(心賦註)』 등의 저서를 통해 그의 관음신앙이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강남지역 불교교단들의 전반적인 현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명연수의 수행관은 이후 다른 선종의 선승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종 승려들과 관음신앙과의 연관성에 관련된 사례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성격을 지닌 것이 바로 寶誌화상의 십이면관음화현설이다. 원래 십일면관음과 보공화상을 연관시켰던 것이 11세기에 이르면 십이면관음이 보공 화현의 고사 안에 들어와 완전히 십일면관음을 대체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의 십일면관음과 십이면관음신앙의 전개사와도 관련이 있다. 10세기에 이르러 십이면관음이 독립적인 교의 체계를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보공의 이면화현(剺面化現)고사와 결합하여 십이면관음신앙의 선전에 활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신이승의 관음화신설은 전승 자체로 많은 신도들을 사원 안으로 흡수하는 효과도 컸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보공의 십이면관음 화현설은 밀교 변화관음까지도 수용했던 선승들의 수용력이 발휘되었던 송대 불교의 면목을 볼 수 있는 현상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Notes

顏娟英, 「唐代十一面觀音圖像與信仰」, 『佛學研究中心學報』 11 (2006), p.91.

侯坤宏, 「觀音信仰的流傳與衍化」, 『人間佛敎』 10 (2017). p.16.

李利安, 『觀音信仰的淵源與傳播』 (雲南: 宗教文化出版社, 2008), pp.105-110.

顏娟英, 앞의 글, p.89.

林國平, 『閩台民間信仰源流』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p.210.

『高僧法顯傳』 T.2085. 859b27-b28. “摩訶衍人則供養般若波羅蜜文殊師利觀世音等”

이정수, 「불공삼장(不空三藏)의 Avalokiteśvara의 한역(漢譯)에 나타난 특징」, 『한국선학』 32 (2012), pp.245-247.

趙娜, 「意指延伸與圖式轉化 : 符號学視域下『觀音·猿·鶴圖』研究」, 『美术大观』 5 (2019), p.41.

黄家庭, 「試析觀音感應信仰的本土化及其现實品格」, 『法音』 5 (2021), p.45.

趙娜, 앞의 글, p.41.

워러슈 에리카, 「동아시아의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 신앙 비교 연구 : 바다를 통한 한중일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 논문, 2018), p.16.

같은 글, p.13.

崔峰, 「印度觀音信仰的中土改造」, 『平頂山學院學報』 28 (2013), p.111.

김한신, 「중국 중세 관음신앙의 민간사회 확산과정 : 위진남북조·수당 시기 관음설화와 밀교의식의 보급을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39 (2016), p.105.

崔峰, 앞의 글, p.112.

公維章, 「西夏时期敦煌的觀音信仰」, 『泰山學院學報』 43 (2021), p.31.

黄家庭, 앞의 글, pp.47-48.

김한신, 앞의 글, p.102.

趙娜, 앞의 글, p.42.

축난제는 晋 元熙 원년(419)에서 송 元嘉 10년(433) 사이에 여러 차례 송에 와서 중인도 및 주변지구의 무역과 문화교류를 촉진시킨 해상실크로드의 사신이었다. 劉田田, 「天台诸祖對『請觀音經』的闡釋與修習」, 『世界宗敎文化』 (2021), p.155.

같은 글, p.156.

차차석·서규리, 「관음보살의 천태선적 이해」, 『불교문예연구』 9 (2017), p.30.

劉田田, 앞의 글, p.159.

蔣義斌, 「宋初天臺宗對「請觀音懺」的檢討」, 『法鼓佛學學報』 3 (2008), p.69.

劉田田, 앞의 글, p.160.

蔣義斌, 앞의 글, p.74.

印順法師, 『初期大乘佛教之起源與開展』 (台北: 正聞出版社, 1981), pp.483-484.

李利安, 앞의 책, p.404.

陳玉女, 「觀音與海洋 : 明代東南沿海的觀音信仰」 『人間佛教學報藝文』 2 (2016), p.109.

『乾道四明圖經』 卷7; 中華書局 編, 『宋元方志叢刊』 5 (北京: 中華書局, 2001), p.4910. 원문 재인용. “梅岑山在縣東二百七十里四面環海 高麗日本新羅渤海諸國皆由此取道 … 山後有一小寺曰觀音接. 釋典所載觀音住寶陀山在海岸孤絶處卽其所也. 皇朝元豊三年改賜寶陀觀音寺.”

侯坤宏, 앞의 글, p.20.

佐伯富, 「近世中國における觀音信仰」, 『塚本博士頌壽記念佛教史學論集』 (1960), pp.372-389.

절강성(浙江省)은 ‘浙’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며, 상해시와 강소성에 인접한 성이다. 춘추시대에는 오월(吳越)항쟁의 장이었으며, 월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소흥(紹興)이 오랫동안 번성했다.

王翠玲, 「敦煌殘卷「觀音證驗賦」與永明延壽」, 『成大中文學報』 10 (2002), p.173. 전숙이 제작한 2만폭의 「十二面觀音二十四應現」絹像을 일본 승려 玄證이 복제한 작품이 현재 일본 교토대학 구원(久原)문고에 보존되어 있다. 이 견상에는 제작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송대의 피휘 때문에 ‘弘’자를 빼고 「天下大元帥吳越國王錢俶印造」를 볼 수 있어서 오월국 말기, 즉 960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大覺國師外集』 권 11 ‘龍山泛海觀音詩并序’ H0063 v4, p.589b02-b09. “海觀音記云, 同光元年, 鹽官民見海上紅光奪日, 迺於波閒, 得觀音古像. 栴檀香所成聖相, 昔所未有. 吳越王聞之, 迎請入府. 後奉安於龍山覺圓精舍之東殿, 靈異甚著. 皇宋元豊八年冬, 予陪行高麗國祐世僧統, 瞻禮尊像時, 講僧宣英求章句, 以紀之.”

王翠玲, 앞의 글, pp.172-173.

徐一智, 「明代上天竺講寺觀音信仰之研究」, 『法光學壇』 7 (2003), pp.99-100.

최선아, 「성지(聖地)의 형성과 존상(尊像)의 출현 : 중국 보타산(普陀山)의 관음상(觀音像)을 중심으로」 『미술사와 시각문화』 23,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9), p.145.

상천축사 관음상에 대한 가장 이른 전승은 1268년 편찬된 『咸涥臨安志』 권80 「上天竺靈感觀音寺」 条에서 확인된다. 『影印文淵閣四庫全書』 제490책 (驪江: 驪江出版社, 1988), p.841. 재인용. “後晉天福年道翊結盧山中夜有光就視得奇木命孔仁謙刻觀音像 … 錢忠懿王夢白衣人求治其居王感悟乃卽其地創佛盧號天竺看經院 … .”

원대까지 관음의 성지로서 인기를 구가하던 보타산은 명 초 홍무 19년(1386) 왜구의 잦은 침입을 이유로 섬 자체가 강제로 공동화(空洞化)되면서 화려했던 옛 모습을 한순간에 잃게 되었다. 칙명으로 보타산의 주민을 내지로 이주시키며 전각들을 모두 불태워 없앴기 때문이다. 최선아, 앞의 글, p.126.

徐一智, 앞의 글, p.80.

王翠玲, 앞의 글, p.173.

천태덕소 문하에서 남종선을 배운 보운의통은 스승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천태종의 螺溪義寂(919~986)을 찾아 一心三觀의 천태교학을 수학하게 된다. 고려에의 귀국을 단념한 보운의통은 明州에서 천태학을 전법하며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이 기간 중에 四明知禮, 慈雲遵式 등과 같은 걸출한 인재들을 가르쳤다. 천태덕소의 법안선과 나계의적의 천태교학이 보운의통에 의해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오대의 혼란기에 오월국 전씨왕조가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윤기엽, 「보운의통(寶雲義通)의 생애를 통해서 본 고려·중국의 천태불교」 『보조사상』 30 (2008), pp.28-33.

임제종 경산파(径山派) 창시자 대혜종고(大慧宗杲) 문하인 불조덕광(佛照德光)의 제자이다.

『寶慶四明志』 卷20, 『文淵閣四庫全書』 제487책 (驪江: 驪江出版社, 1988), pp.314-315. 원문 재인용.

X1540 『法華經顯應錄』 (2卷) ‘杭州智覺禪師’ “禪觀中見觀音以甘露灌于口, 從此發觀音辯才. 初住雪竇, 後選永明, 眾至二千人, 時號彌勒下生, 勤大精進.”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59c5-6. “常六时誦千手千眼大悲陀羅尼, 普爲一切法界衆生, 慘六根所造一切障.”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60c10-12. “旋繞念觀世音本身陀羅尼, 普願具圓通身, 成普門行.”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60c17-18. “頂戴觀音行道, 成觀音實際之身, 運同体大悲之行.”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61a1-3. “黄昏, 礼同学法侣寶落陀洛山大慈大悲救苦觀世音菩薩摩訶薩, 盡十方法界一切菩薩摩訶薩, 普願一切法界衆生, 入圆通門, 運法界行.”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61a9-10. “黄昏时, 普爲一切法界衆生, 旋繞念觀世音菩薩摩訶薩, 願具十四無畏, 福佑衆生.”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61a21-23. “初夜, 普为一切法界衆生, 旋繞念觀音蓮華部心陀罗尼, 普願具大悲門, 圓自在慧, 真言曰, 唵阿盧勒繼娑婆訶.”

『智覺禪師自行錄』, CBETA 2023.Q1, X63, no.1232, p.163c15-17. “普爲一切法界衆生, 盡夜六時, 别建道場, 供養觀音尊像, 六時旋繞, 課誦名號, 願諸衆生五眼圓明, 十身顯现.”

王翠玲, 앞의 글, p.181.

顏娟英, 앞의 글, p.89.

見宮治昭, 「インドの觀音像の展開─密教系觀音·變化觀音の成立を中心に」, 『佛教藝術』 262 (2002), pp.13-28. 宮治昭는 관련 문헌에 근거하여 십일면관음의 3종류의 표정에 드러나는 자비와 분노의 조합으로 판단컨대, 그 원류는 인도의 시바(Śiva;大自在天)의 3면 조형인 것으로 주장한다.

顏娟英, 앞의 글, p.89.

여러 문헌에서는 그의 명칭이 保誌, 誌公, 寶公, 志公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각 문헌 간의 인용 과정에서 전승이 부풀려지고, 각색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高僧傳』, T2059: 394c-395a.

王翠玲, 앞의 글, p.174.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 T.1985 504a23-504a25 “十二面觀音, 向什麼處去也. 麻谷轉身擬坐繩床, 師拈拄杖打, 麻谷接却相捉入方丈.”

楊明璋, 「唐宋誌公神異傳說與中日十一面, 十二面觀音信仰」, 『漢學硏究』 36-1 (2018), p.85.

王翠玲, 앞의 글, p.175.

『佛祖統紀』 T.2035. 348c03-348c05 “嘗詔張僧繇寫誌眞, 誌以指剺破面門出十二面觀音相. 或慈或威, 僧繇竟不能寫.”

楊明璋, 앞의 글,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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