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대순진리회와 불교의 심우도 비교연구

차선근1,*
Seon-keun Cha1,*
1대진대학교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Daesoon Studies, Daejin University

© Copyright 2023,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n 28, 2023 ; Revised: Aug 29, 2023 ; Accepted: Sep 15, 2023

Published Online: Sep 30, 2023

국문요약

대략 11∼12세기에 등장한 심우도는 동아시아에서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안내하는 역할을 해왔다. 근대 이후 등장한 한국의 종교들도 소를 찾거나 기르는 그림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종교가 대순진리회다. 이 종교는 독창적인 6폭(또는 7폭, 9폭)의 심우도를 별도로 제작해 자신의 교리와 세계관을 설명한다.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선(禪) 수행의 과정을 담은 불교 심우도와는 그 내용과 의미가 다르다. 소를 찾는다는 측면에서는 양자가 같지만, 불교 심우도의 소는 인간 본성을 상징하고,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소는 증산이 펼치고 정산이 완성한 상생의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상징한다. 찾는 대상은 소지만, 그 소의 상징과 의미가 다르다. 이 때문에 불교 심우도는 오염된 인간의 본성을 청정하게 회복하여 중생제도에 나서는 그림으로,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증산과 정산의 가르침을 찾아감에 따라 인간은 신선이 되고, 세상은 구제되어 지상천국으로 완성되는 그림으로 각각 설명된다. 불교 심우도의 최종 단계가 세상 구제를 위해 내딛는 수행자의 발걸음인 데 비해서,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최종 단계가 인간과 세상의 구제와 완성을 동시에 성취함이라는 것은 두 그림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차이는 불교와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른 데에서 나타난 결과다.

Abstract

Simwudo (尋牛圖), known as Ox Seeking Pictures, originated in the 11th-12th century and have consistently played a guiding role in the teachings of various religions in East Asia. Some Korean religions that emerged during modern times conveyed their teachings through depictions of ox seeking or herding. Among them, Daesoon Jinrihoe stands out as a representative religion. The belief system of this particular religion elucidates its distinct doctrine and worldview by reimagining Simwudo, into a new set of six panels (seven or nine panels in some variations).

The Simwudo of Daesoon Jinrihoe differs from that of Buddhism, particularly in its treatment of meditation (禪), both in terms of context and significance. While they share similarities in the aspect of ox-seeking, the Buddhist Simwudo symbolizes human nature, whereas the Simwudo of Daesoon Jinrihoe represents the great Dao of Heaven and Earth propagated by Kang Jeungsan and brought into completion by Jo Jeongsan. In the Buddhist context, the subject of the search is the Ox, signifying the restoration of a deluded human’s pure nature in order to achieve personal salvation and in some version of Simwudo, reenter society to perform salvific actions for others. On the other hand, in the Simwudo of Daesoon Jinrihoe depicts the process of a human attaining immortality and following the teachings of Jeungsan and Jeongsan. This culminates in the final image which is the redemption of the world.

The final phase of the Buddhist Simwudo, depending on the version, is either enlightenment (personal salvation) or reentering society to perform salvific actions (as a bodhisattva), whereas the Simwudo of Daesoon Jinrihoe show the simultaneous achievement of the perfection of humanity and the redemption of the world. This distinction highlights the fundamental differences between the Simwudo of these two distinctly different religious traditions. These differences arise from the contrasting purposes pursued by Buddhism and Daesoon Jinrihoe.

Keywords: 심우도; 심심유오(深深有悟); 봉득신교(奉得神敎); 면이수지(勉而修之); 성지우성(誠之又誠); 도통진경(道通眞境); 도지통명(道之通明)
Keywords: Simwudo; simsimyuoh (深深有悟, deeply awakened); bongdeukshin-gyo (奉得神敎, attaining the teachings of divine beings); myeonisuji (勉而修之, cultivating and moving forward with effort and perseverance); seongjiwuseong (誠之又誠, devoting oneself with utmost sincerity); dotongjingyeong (道通眞境, perfected unification with the Dao); dojitongmyeong (道之通明, the bright illumination of the Dao)

Ⅰ. 교리의 시각화

제도종교(institutional religion)1)에서 교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무형의 관념만으로 종교 공동체가 유지되는 경우란 드물다. 종교의 구성과 실천에 있어서 물질세계(the material world)의 도움은 필수다. 교리나 믿음을 포함하는 하나의 종교 전통은 다양한 물질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 물질은 종교의 가르침과 그에 기반한 삶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종교 생활에서 물질은 봉향(奉享)이나 모임 또는 주거 목적을 가진 건축물을 비롯하여, 성상(聖像)·경전·염주·부적·향·초·집기(什器)·제례복·음식 등으로 다양하다. 주문이나 노래·몸짓 같은 요소도 넓은 범주에서 물질로 분류된다. 교리나 성스러운 이야기(narrative), 수행도 이미지 즉 물질로 시각화되어 표현될 수 있다.

이미지는 특정 가르침이나 교훈을 함축적이고 직관적으로 알려줄 뿐 아니라, 미적 만족감까지 선사함으로써 전달의 기능을 극대화한다.3)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특히 효과적인 교육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미지는 ‘문맹자를 위한 책(books of the illiterate)’으로까지 불린다.4)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소(또는 말, 코끼리 등)를 찾거나 기르는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다. 목우도(牧牛圖), 심우도(尋牛圖), 팔우도(八牛圖), 십상도(十象圖)5), 유가십마도(儒家十馬圖)6)로 불리는 이 그림들은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이다.7)

이 글의 관심은 소가 등장하는 그림에 있다. 이 그림의 최초 출현 시기는 11∼12세기로 추정되는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9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대중에게 종교의 가르침을 안내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근대 이후 등장한 한국의 종교들도 소를 찾거나 기르는 그림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종교가 대순진리회다. 이 종교는 6폭(또는 7폭, 9폭)의 심우도를 별도로 제작해 자신의 교리와 세계관을 설명한다. 원불교처럼 송조(宋朝)의 승려 보명(普明)이 제작해 놓았던 목우도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횡보를 보인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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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팔우도(八牛圖). 명나라의 유명한 화가 대진(戴進, 1388~1462)이 그렸으며,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용은 하나의 긴 화폭에 소 여덟 마리를 담아 자연 친화적인 도교적 삶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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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권(2020)은 대순진리회 심우도가 불교 선(禪, dhyana) 수행 과정을 담은 심우도·목우도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불교 심우도와는 다른 ‘차용(appropriation)8)의 독창성’을 지닌다고 말했다.9) 그의 주장은 타당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있다.

첫째, 포천수도장의 9폭 심우도 해설 문제다.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는 6폭 유형 심우도와 겹치는 몇몇 그림들로 인하여 6폭 유형과 유사한 줄거리를 가지는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6폭 유형에는 처음부터 흰 소가 등장하지만 9폭 유형에는 누렁소가 흰 소로 변하는 과정이 포함된다는 점, 6폭 유형과 달리 9폭 유형에서는 소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9폭 유형 심우도는 6폭 유형 심우도와는 다른 내용을 더 포함한다고 말해야 한다. 오세권의 연구에는 9폭 심우도에 누렁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적되지 않았고, 소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장면의 해설이 없으므로, 이에 대한 보강이 필요한 상태다. 또한 심우도 9폭 가운데 네 폭의 설명도 재고(再考)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상세한 검토는 Ⅲ장에서 할 것이다.

둘째, 보명의 목우도와 곽암(廓庵)의 심우도는 그 내용과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세권은 불교 심우도의 구성 단계를 곽암본으로, 그 후반부의 내용 설명을 보명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순진리회 심우도와 비교하고 있다.10) 일관된 정리가 되지 않은 불교 심우도 해설을 사용한 비교 작업은 적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게 한다. 사소한 부분이기는 하나, 그의 글에서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심심유오’를 深深有‘悟’가 아니라 深深有‘梧’로 표기한 것, 포천수도장에는 심우도가 6폭과 9폭의 두 종류가 있는데 9폭만 있다고 기술했던 것도11) 수정되고 보강되어야 한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이 글은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등장 및 종류와 의미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서술을 다시 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대순진리회와 불교의 심우도를 비교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 Ⅱ장과 Ⅲ장에서는 불교와 대순진리회의 소 그림들부터 재차 정리한다. Ⅳ장에서는 양자를 비교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짚어본다.

Ⅱ. 불교의 목우도와 심우도

불교에는 다양한 수행 전통이 있다. 그 가운데 선(禪)의 가르침을 쉽게 전달하기 위하여 그 내용을 시각화하여 만든 이미지 묶음이 소를 기르거나[牧牛] 소를 찾는[尋牛] 그림이다.

불교는 소에다 정(正)과 부정(不正)의 이미지를 다 붙였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될 때 소의 원래 상징은 불교 최상의 가치인 해탈 또는 해탈에 이르는 참다운 가르침[一乘], 경전, 참구(參究)의 기쁨 등으로 긍정적이었다.12) 하지만 5세기 초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이 인도의 승려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을 장안으로 초빙하여 많은 산스크리트 경전을 한역하게 했을 때 출간된 『유교경(遺敎經)』은, 소가 사람들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상황을 놓고, 그것을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감시함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13) 여기에서 소는 떨쳐내어야 할 번뇌의 상징이었다.

해탈과 참다운 가르침이라는 긍정, 그리고 번뇌라고 하는 부정, 이 두 가지 정반대 상징을 동시에 갖게 된 소는 흰 소[해탈]와 검은 소[번뇌]로 각각 표현되었다. 번뇌와 해탈을 담은 소의 양면적 상징성은 당나라 말기 이후 확고해졌고,14) 불교 지도자들은 소를 찾거나 기르는 그림으로써 인간의 참된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찾음의 대상인 흰 소는 번뇌를 떨쳐낸 참된 인간 본성 그 자체이다. 이것은 법성(法性), 진여(眞如), 각성(覺性)이라고도 불린다.15)

불교에서 선 수행의 상징을 담은 소 그림을 제작한 시기는 11세기 북송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시절로서, 승려 청거(淸居)가 그린 몇 장(5장? 6장? 12장?)의 목우도가 최초라고 한다.16) 이 그림은 현존하지 않는다. 12세기에는 승려 보명이 청거의 목우도를 개작하여 10장의 새로운 목우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그 전부가 전해지며, 16세기 후반에 출판된 『목우도송서(牧牛圖頌序)』17)에 실린 게 가장 유명하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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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보명의 목우도와 곽암의 심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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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 목우도 첫 장에는 길들이지 않은[未牧] 검은 소가 등장한다. 검은 소는 길들임에 따라 청정한 흰 소로 변해간다. 검은 소가 흰 소로 점점 바뀜은 묵은 때를 닦고 깨끗한 성품을 조금씩 회복하는 점오(漸悟)의 과정을 의미한다. 깨달음은 당면한 번뇌를 잘 달래고 길들여서 본래의 자리로 회복함에 있지, 밖에서 어렵게 찾아서 구해오는 데 있지 않다는 뜻이다. 차츰차츰 단계를 밟아 본각(本覺)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점 때문에 보명 목우도는 조동종(曹洞宗)18) 계열의 묵조선(默照禪)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19) 그러니까 묵상(默想)으로써 본성을 관찰하는 수행이 보명 목우도다. 이 그림 묶음의 마지막 장면은 원상(圓相)으로 채워져 있다. 소는 이미 사라졌고, 동자마저도 사라진 모습이니[雙泯], 이것은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 마음과 경계의 구별이 없어짐이며 곧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20)

보명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12세기의 곽암은 소를 기르는[牧牛]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한다고[尋牛] 보고 목우도와는 다른 심우도를 10장으로 그려냈다. 보명 심우도는 소가 처음부터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이를 잘 길러야 한다고 하지만, 곽암 심우도에서 소는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 찾아져야 하는 존재다.21) 보명의 소가 검은색을 벗어가며 흰색으로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 비해, 곽암의 소는 때를 벗고 깨끗함으로 가는 모습이 상대적으로 덜 나타난다. 이것은 되돌아서서 단박에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보는 돈오(頓悟)를 의미한다. 원래부터 소는 참된 소 즉 참된 성품이었는데, 동자가 이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가 본래부터 청정한 성품이었음을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곽암 심우도는 양기파(楊岐派)의 간화선(看話禪)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22)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활용한 공안참구(公案參究)를 한다. 좌선한 채로 오직 화두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화두의 답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화두가 던지는 물음 그 자체를 의심하는 수행법이다. 이런 집중 상태를 유지하여 문자를 뛰어넘고 망념(妄念)을 끊어내 깊은 삼매(三昧)에 들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인 이 간화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용어로 종종 설명된다.23)

곽암 심우도의 마지막 그림은 속세에 나서서 이타(利他)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入廛垂手]으로서, 불교 선(禪)의 목적이 중생제도에 있음을 말한다. 보명 목우도에는 이런 장면이 없다. 동자는 원래부터 현실[俗世]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로 나서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는 보명 목우도보다 곽암 심우도가 더 넓게 퍼졌다. 지금도 곽암 심우도는 한국의 사찰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 가장 유명한 곽암 심우도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 소장하고 있는 『십우도송병서(十牛圖頌並序)』(1278년)24)다(<그림 2>).

Ⅲ. 대순진리회의 심우도

1. 6폭 유형 심우도

대순진리회에도 소를 찾는 그림이 있다. 심우도(尋牛圖)라고 불리는 이 그림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공식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강증산(姜甑山, 1871~1909)과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의 활동 시대에는 심우도가 없었던 만큼, 이 그림을 제작하도록 지시한 인물은 정산에게 유명(遺命)을 받아 종통을 계승한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 1917~1996: 이후 도전으로 표기함)일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의 심우도는 서울 중곡도장 본전(本殿) 2층 봉강전(奉降殿) 외벽에 그려졌다(<그림 3> 참조). 본전은 196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1972년에 증축되었다. 이때 본전에 단청(丹靑)이 있는 상태였으므로 심우도도 같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단청 작업에 참여하면서 중곡도장 내부 상황을 꼼꼼하게 기록했던 김하정은 『성재일지(醒齋日誌)』에 심우도를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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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대순진리회 서울 중곡도장 전경. 가장 위쪽의 건물이 본전이며, 본전의 1층은 대순성전(大巡聖殿), 2층은 봉강전, 3층은 영대(靈臺)다. 대순진리회 최초의 심우도는 본전 2층 외벽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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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기획부 내부 보관 자료에 의하면, 1982년 9월과 10월 사이에 중곡도장 벽화 작업이 있었다고 한다.25) 중곡도장 본전의 단청도 재단장되었고, 본전 2층의 봉강전 실내를 비롯하여 숭도문(崇道門)과 성진관(成眞館) 등, 중곡도장 구석구석에 상당한 양의 벽화들이 그때 도전의 지시와 감독을 받아 그려졌다. 그렇다면 본전 2층 봉강전 외벽의 심우도도 같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대순진리회 최초의 심우도는 1982년 9월과 10월 사이에 중곡도장 본전 2층 외벽에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심우도는 여섯 폭으로 구성되었다. 도전은 그 각각의 그림에 ① 인생의 참 의미와 더불어 혼란한 세상의 구제 방법까지 같이 고민하는 ‘심심유오(深深有悟)’, ② 하늘이 내린 가르침[神敎]을 받들고 얻는 ‘봉득신교(奉得神敎)’, ③ 고난을 뚫고 힘써 닦아나가는 ‘면이수지(勉而修之)’, ④ 정성을 지극히 들이는 ‘성지우성(誠之又誠)’, ⑤ 진리인 도와 합일하여 일체를 이룬[道卽我 我卽道] 경지에 도달하는 ‘도통진경(道通眞境)’, ⑥ 개벽으로써 신천지가 열리고 신선·선녀가 등장하는 ‘도지통명(道之通明)’으로 제목을 붙여 그 의미를 알렸다(<그림 4> 참조). 이 심우도의 마지막 장면은 세상 구제가 완성되고 불로초가 피어난 신선·선녀 세상이다. 도교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점에서,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불교 심우도와는 다른 색채를 지닌다고 해야 할 듯하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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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대순진리회 중곡도장 본전 2층 봉강전 바깥 벽면에 그려진 대순진리회 최초의 6폭 심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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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7폭 유형 심우도

중곡도장 건설 이후 여주본부도장(1986년), 제주수련도장(1989년), 포천수도장(1992년), 금강산토성수련도장(1995년)이 차례로 들어섰다. 각 도장에는 중곡도장의 6폭 심우도와 같은 형태의 심우도가 모셔졌다.

대순진리회의 심우도에는 6폭 유형 외에도 두 종류가 더 존재한다. 하나는 여부본부도장의 7폭 심우도, 다른 하나는 포천수도장의 9폭 심우도다.

여주본부도장에는 봉강전 뒤편 1층 외벽에 6폭 심우도가 있지만, 대순성전 2층 내부에 7폭 심우도가 추가로 더 있다(<그림 5> 참조). 대순성전은 1991년 1월에 그 모습을 갖추었으니,27) 7폭 심우도 역시 그때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심우도는 <그림 3>에서 보는 ① 심심유오 1폭, ② 봉득신교 1폭, ④ 성지우성 1폭, ⑤ 도통진경 1폭과 더불어, ③ 면이수지의 과정을 다 자세하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3폭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6폭 심우도에 비해서 ⑥ 도지통명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 ③ 면이수지로 생각되는 3폭 그림들에 비바람과 뇌성이 없고 누렁소가 흰 소로 바뀌는 과정이 담겼다는 점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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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성전 2층 내부에 그려진 7폭 심우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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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폭 유형 심우도는 외부에 공개가 되지 않아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오직 여주본부도장에만 있다. 7폭 유형 심우도는 6폭 유형 심우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③ 면이수지의 내용을 자세하게 풀어 보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내용은 7폭 유형 심우도를 더 자세하게 묘사한 형태인 9폭 유형 심우도에서 살피도록 한다.

3. 9폭 유형 심우도

포천수도장에는 두 종류의 심우도가 있다. 도장 입구의 종의원(宗議院) 건물 앞 외부 벽면의 6폭 심우도와 본전 1층 내부의 9폭 심우도가 그것이다(<그림 6>). 포천수도장은 4개월이라는 짧은 공사 기간을 거쳐 1992년 7월 23일(음력 6월 24일 구천상제 화천(化天) 치성일)에 완공되었다. 이어서 4박 5일 참여 기간의 ‘특수수련 기도반’들을 편성하여 수도인들이 차례로 포천수도장에 들어와 수행토록 하는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1992년 가을 거기에 참여했었던 필자는 본전 1층에 9폭 심우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므로 9폭 심우도는 1992년 여름 전후에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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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대순진리회 포천수도장 전경. B는 종의원 앞의 담이고 여기에 6폭 심우도가 있다. A는 본전이며 1층 내부에 9폭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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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폭 유형 심우도의 각 그림에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아 그 내용을 확정할 수 없다. 다만 6폭 유형 심우도와 비교해보면, 9폭 심우도의 ①은 심심유오, ②는 봉득신교, ⑦은 성지우성, ⑧은 도통진경, ⑨는 도지통명인 것만은 확실하다(<그림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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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봉강전 뒤편의 6폭 심우도(좌)와 포천수도장 본전 1층 내부의 9폭 심우도(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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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폭 유형 심우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③ ④ ⑤ ⑥이다. 이 그림들은 6폭 유형 심우도에 없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23년 포천수도장의 홈페이지와 화보 책자는 ③을 ②와 같은 봉득신교, ④와 ⑤를 면이수지, ⑥을 ⑦과 같은 성지우성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심우도의 소는 대순진리회의 창설자인 도전을 뜻하고, 생전의 도전은 누렁소였고 화천한 이후로는 흰 소로 바뀜으로써 도전이 신명 세계에서 그 지위가 상승하게 되었다(元位로 올라감)는 것으로 설명한다.28) 글 서두에서 언급한 오세권의 선행 연구도 포천수도장 운영진 측의 설명을 가져다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의 발자취가 ‘끊어지고 없어져’ 당황해하고 있는 동자의 모습 ③은 신교를 받들어 얻는[奉得神敎]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⑥은 소가 ‘보이지 않는’ 상태이므로 소와 ‘함께하는’ 성지우성을 나타낼 수 없다는 점, ▲도전의 호 우당(牛堂)이 ‘소[牛]가 사는 집[堂]’이라는 뜻임을 고려하면 ‘소[牛]’와 ‘소의 집[牛堂]’은 다르기에 소가 도전을 상징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점, ▲더구나 곧 언급하겠지만, 도전이 생전에 심우도의 소는 ‘도전’이 아니라 ‘도’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못 박아 두었다는 점, ▲누렁소가 흰 소로 변하는 모습을 도전의 신명 세계 지위 상승으로 해석하는 것은 대순진리회를 이끌고 가르침을 펴던 생전의 도전이 가졌던 종교적 권위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이다.

대순진리회 심우도를 9폭으로 만든 도전의 의도를 알 수 없으므로 그 정확한 의미는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하는 9폭 유형 심우도 해설에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그 대안으로 다른 설명을 제시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9폭 유형 심우도의 ① ② ⑦ ⑧ ⑨ 다섯 그림은 6폭 유형 심우도의 ① ② ④ ⑤ ⑥과 같다. 9폭 유형 심우도의 ③ ④ ⑤ ⑥ 네 그림은 새롭게 해설해야 하는데, <그림 7>에 표시한 대로 이 글은 ③ ④ ⑤ ⑥이 모두 면이수지의 확장판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것을 하나씩 설명하겠다.

1) 9폭 유형 심우도의 ③

9폭 심우도 ②는 6폭 심우도 ②의 봉득신교와 똑같다. 봉득신교 즉 신교를 받들어[奉] 얻었다면[得], 얻었던 것은 이미 얻었던 것이므로, 다음 장면인 ③에서 얻는 과정을 더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③은 소 발자국이 중간에 끊겨 없어짐을 동자가 보고 당황하여 멈춰선 모습임을 주목해야 한다(<그림 7> 참조). ②에서 시내 건너의 소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쫓았는데, ③에서 시내를 건넜더니 소 발자국이 딱 세 개만 남기고 사라져버려 당황한 동자는 갈 길을 잃고 멈춰야 했다. ‘얻음’이 아니라 ‘잃음’이라면, 이 모습은 신교를 받들어 모시고 있는 상황이 될 수 없다.

②에서 분명히 신교를 받들고 얻었다. 그러나 ③에서 신교의 자취가 사라져버려 당황스럽다. 동자가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은 증산의 다음 비유로써 이해할 수 있다.

보라. 선술을 얻고자 십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그의 성의로 하늘에 올림을 받은 머슴을. 그는 선술을 배우고자 스승을 찾았으되 그 스승은 선술을 가르치기 전에 너의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하니라. 그 머슴이 십 년 동안의 진심갈력(盡心竭力)을 다한 농사 끝에야 스승은 머슴을 연못가에 데리고 가서 「물 위에 뻗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물 위에 뛰어내리라. 그러면 선술에 통하리라」고 일러 주었도다. 머슴은 믿고 나뭇가지에 올라 뛰어내리니 뜻밖에도 오색구름이 모이고 선악이 울리면서 찬란한 보련(寶輦)이 머슴을 태우고 천상으로 올라가니라.29)

머슴은 선술(仙術)을 배우기 위해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원하는 선술을 접할 수 없었다. 10년 동안 선술과는 별 관련이 없는 농사만 지어야 했고, 급기야 목숨을 걸고 연못에 뛰어들기까지 해야 했다. 증산은 수도자가 성의(誠意)를 가지고 이런 과정을 잘 극복해야 본격적인 신선의 길로 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입문은 하였으나 선술의 흔적조차 보지 못하고 농사만 묵묵히 지어야 했던 머슴의 처지는, 봉득신교를 하였으나 신교의 흔적은 보지 못하는 9폭 심우도 ③의 동자 신세와 닮았다.

이것은 봉득신교 이후 동자에게 닥친 시련이다. 하늘에서 신교를 보여주는 듯하다가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이제 동자는 선택해야 한다. 하늘을 믿고 성의를 보이며 계속 정진할 것인지, 아니면 변덕스러운 하늘을 탓하며 포기할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동자의 의지에 달렸다. 그렇다면 봉득신교 후에 진리의 발자취를 잃고 성의를 요구받으며 당황해하고 있는 모습의 동자는 이미 닦음의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③을 봉득신교가 아니라 면이수지로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9폭 유형 심우도의 ④와 ⑤

③에서 소 발자취가 사라졌지만, 실망하지 않고 성의를 보이며 정진했더니, ④와 ⑤에서 비바람과 뇌성이 몰아치는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소의 엉덩이를 드디어 찾았다. 이러한 9폭 심우도의 ④ ⑤는 6폭 심우도의 ③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므로, 두 개 모두 면이수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6폭 유형 심우도의 ③(<그림 8>)과 9폭 유형 심우도의 ④ ⑤(<그림 9>)가 똑같지는 않다. 결정적인 차이는 6폭 유형 심우도에서는 흰 소만 보이고, 9폭 유형 심우도에서는 7폭 유형 심우도와 마찬가지로 누렁소가 흰 소로 바뀐다는 데 있다. 9폭 유형 심우도 ④ ⑤에서 누렁소가 흰 소로 바뀌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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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대순진리회 6폭 유형 심우도 ③번 그림. 흰 소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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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 ④번과 ⑤번 그림. 누렁소는 흰 소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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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의 상징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를 이해하는 핵심은 소의 정체성에 있다. 대순진리회 심우도에 등장하는 흰 소의 상징은 불교 심우도의 흰 소와 같은 인간의 참된 본성이 아니다.

심우도는 소를 찾는 것이다. 소는 축(丑)이고 12월이다. … 1년 12월 안에 모든 조화가 다 이루어진다. 12달 안에 다 들어있으니 그래서 심우도는 도를 찾는 그림이다.30)

심우도가 다른 게 아니라 도를 찾는 것이다. 도 찾는 그림으로서 흰 소를 찾는 것이다. 희다는 것은 백자(白字)로, 백(白)은 사람 인(人)에 뫼 산(山)이니 인산(人山)이고 신선 선(仙)자다. 사람 산(山)과 신선의 도를 찾는다는 것, 그게 백자(白字) 안에 숨겨진 이치, 비결이다. 도(道)라고 하면 증산상제님, 정산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31)

위 인용문은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그림 구성을 직접 창작한 도전의 훈시다. 이에 의하면, 소가 도전을 상징한다는 기존의 설명은 도전의 의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도전은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소가 도(道), 구체적으로는 상생(相生)의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심우도는 소를 찾는 그림이다. 소는 축(丑)에 해당하고, 축은 12월이며, 12월은 춘하추동 1년으로 만물이 생장렴장(生長斂藏)의 변화를 담아내는 틀이니, 심우도에서 찾음의 대상인 소는 곧 도가 된다. 人과 山이 결합한 글자는 仙이고, 仙은 白( )에 해당하며, 白은 희다는 뜻이니, 흰[白→ →仙] 소는 선(仙)의 道를 뜻한다. 이때의 선(仙)은 대순진리회 신앙의 대상인 증산(甑山), 그리고 증산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한 정산(鼎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증산이 최고신으로서 후천개벽을 위해 선포하고 정산이 진법(眞法)의 구축으로써 펼쳐놓은 상생의 천지대도가 대순진리회의 진리이자 도인 것이다.32) 봉득신교의 신교(神敎)도 이것을 말한다. 대순진리회 심우도에서 찾음의 대상인 소가 상징하는 것도 이것이다. 증산과 정산의 가르침을 도[天地大道]라고 하고, 이것을 찾아 체득하여 진리와 일체를 이루며[道卽我 我卽道], 이로써 신선이 되고 지상천국이 들어섬을 보여주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심우도라는 말이다.

(2) 선도(宣道)와 창도(創道)

불교 심우도에서 검은 소는 번뇌를, 흰 소는 청정한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이때 소의 색상 변화는 본성 회복 과정을 의미한다. 대순진리회 심우도에서 소는 천지대도를 상징한다. 9폭 유형 심우도는 누렁소가 흰 소로 변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를 두고, 천지대도가 처음에는 불완전했다가 완전한 상태로 서서히 변해간다고 설명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증산이 펼친 천지대도의 신성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의 소는 왜 그 색을 바꾸는가? 앞에서 언급한 소의 정체성이 실마리를 풀게 할 핵심 단서다. 대순진리회가 구축하는 종교 세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소, 즉 천지대도를 둔 증산과 정산의 역할이다.33) 증산은 진멸의 위기에 처한 천지를 바로 잡아달라는 신명의 하소연에 따라 인간계에 강세한 최고신으로서, 세상을 구제할 방책인 상생의 천지대도를 ‘선포’하고 천지인 삼계를 개벽하는 공사를 9년 동안 시행하고 화천했던 존재다.34) 세상을 구제하는 최고신이므로 증산은 신앙의 대상이 되며, ‘도를 선포했다’라는 의미에서 선도주(宣道主)로 인식된다.35) 증산은 화천하기 전에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로써 자기가 선포한 도를 구체화하여 진법(眞法)을 낼 인물[大頭目=眞主]이 나올 것임을 예언하였다.36) 대순진리회는 정산이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50년 동안 공을 들여 이 일을 완성하였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정산은 ‘도주(道主)’로 불리며 창도주(創道主)로 인식된다.37)

증산이 최고신으로서 후천개벽을 위해 선도(宣道)했고, 정산이 도주(道主)로서 창도(創道)했다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신앙 설정이다. 도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했다.

대저 어떠한 일이나 물건을 막론하고 설계, 계획의 과정과 시공, 시행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리적인 순서일진대, 상제님[증산]께서는 선경 건설의 계획과 설계의 부분만을 맡아 다 하시고 그 계획과 설계에 의한 시공과 시행의 부분은 상제님께서 하실 바가 아니라 그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암시하시기 위하여 ‘시유기시(時有其時)며 인유기인(人有其人)’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과정을 예를 들어본다면 가령 철도를 개설한다고 할 때 그 철도 개설의 설계와 계획에 관한 일은 상제님[증산]의 일과 같을 것이요, 그 공사와 시공에 관한 일은 도주님[정산]의 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철도는 지금 이미 완성되었고 그 철도 위를 달릴 기차도 지금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다만 그 기차를 탈 승객인 우리들에 대한 개찰과 그 개찰 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준비사항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38)

증산의 선도(宣道)란 전대 미증유의 진리를 선포하고 후천 지상선경(地上仙境)을 계획·설계한 것이며, 정산의 창도(創道)란 그 계획과 설계를 받아 시공·시행하여 구체화한 것이라는 게 도전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천지대도는 증산의 ‘계획·설계’ 선도로부터 50년 여정을 거쳐 정산의 ‘시공·시행’ 창도로 넘어가는 과정을 겪었다고 말해야 한다. 도, 즉 천지대도의 실체는 하나지만,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일정한 시간과 과정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설명을 이렇게 했었던 도전은 9폭 유형의 심우도까지 직접 창작·구성하여 그리게 했다. 이상의 사실을 활용한다면, 퍼스(Charles S. Peirce, 1839~1914)가 제안한 창의적 추론 방식인 가추법(假椎法, abduction)으로써,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 ④ ⑤에서 누렁소가 흰 소로 변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3) 누렁소와 흰 소

불교 심우도가 찾는 소는 인간 본성을 상징한다. 본성은 오염을 극복하고 청정을 회복해야 하니, 이 과정은 흑색에서 백색으로의 변화로 묘사된다. 보명 목우도에서는 이런 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곽암 심우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남은 전술한 바와 같다. 대순진리회 심우도가 찾는 소는 인간 본성이 아니라 천지대도를 상징한다. 천지대도는 이미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신성한 것이니만큼 오염된 상태를 극복하여 청정을 회복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천지대도는 증산의 선도에서 정산의 창도로 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 변화는 오염을 벗고 청정을 회복함이 아니므로 흑색과 백색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대순진리회 9폭 심우도가 변화를 표시하기 위해 채택한 색상은 황색과 백색이다. 오행에서 황색은 5·10의 토(土), 백색은 4·9의 금(金)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순진리회 세계에서 토는 만물 운행의 법칙을 펼치는 배경이자 다스림 그 자체를 상징하고,39) 금은 곧 다가오는 새로운 복된 세상[後天의 地上仙境]을 상징한다.40) 우주를 다스리는[土] 최고신 증산이 선도함을 상징하는 데 황색이, 그에 따라 후천의 새 세상[金]이 열리도록 하는 직접적 방법을 정산이 창도한 것을 상징하는 데 백색이 선택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의 소가 황색에서 백색으로 변화함은 천지대도가 선도에서 창도로 넘어가는 단계를 밟음을 의미한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부연하자면, 대순진리회의 도는 최고신 상제가 대순한 진리로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다. 그러므로 선도(宣道)의 도(道), 창도(創道)의 도(道)가 다른 게 아니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니, 둘 다 상제가 대순한 진리를 의미한다. 다만, 선도의 도는 ‘계획·설계’의 단계를, 창도의 도는 ‘시공·시행’의 단계로 구분되는 것뿐이다. 시공이 끝나야 이용할 수 있다. 시공 과정이 없다면 계획만 있을 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대순진리회는 이 시공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산이 50년 공부종필로써 구축한 진법(眞法)이라고 설명한다. 선도를 잇는 창도로써 실현한 진법이 없다면, 수도인들은 소와 하나가 되는 과정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산은 ‘도주(道主)’로 불리는데, 도주는 ‘도의 주인’이라는 뜻이며, 이때의 도는 선도의 도가 아니라 창도의 도를 말한다. 선도의 도와 창도의 도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자칫 ‘도주’ 정산은 ‘대순진리[道]의 주인’이라는 잘못된 이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같은 도이지만, 설계 단계와 시공 단계를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선도 기간은 1901년부터 1909년, 창도 기간은 1909년부터 1958년으로 선명하게 구분된다. 선도와 창도가 뒤섞일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창도 과정은 순식간이 아니라 5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9폭 유형 심우도의 소도 황색에서 백색으로 단번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연히, 이것은 도 자체가 변화하는 게 아니라, 도가 계획 단계를 넘어 시공을 통해 구체화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리해보자. 소는 시간을 들여 누렁소[선도]에서 흰 소[창도]로 변한다. 도가 변하는 게 아니라, 계획에서 시공으로 나아가는 모습일 뿐이다. 증산의 선도 이후, 증산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한 정산은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50년 동안 공을 들여 창도의 과정을 밟았다. 그 역정을 따라가야만 하는 동자도 힘든 고난의 길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려움은 동자 주변의 풍경인 뇌성과 번개, 비바람, 깎아지른 절벽 등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동자는 선도에서 창도로 넘어가는 대순진리의 변화 속에서 도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만 하고, ④와 ⑤는 동자가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닦음을 놓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3) 9폭 유형 심우도의 ⑥

혹자는 ⑥을 두고,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도가 사라진 상태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느긋한’ 동자의 모습, 그리고 바닥에 찍힌 ‘뚜렷한 소 발자국’은 이런 해석이 설득력이 없음을 말해준다.

⑥에서 동자는 아직 소를 만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누렁소가 흰 소로 변하고 도는 창도의 결실을 이루었으니, 이제 동자는 창도로써 이룩된 진법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 소를 잡지 못하였으나, 창도로써 진법이 완성된 이상에는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흰 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바닥에 발자국이 여전히 뚜렷하니 따라가기만 하면 흰 소를 반드시 만날 수 있다. 허겁지겁 급하게 달려갈 필요도 없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확신이 가득한 동자는 ‘평온한’ 얼굴로 흰 소를 만나기 위해 ‘선명하게’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그림 10> 참조). 앞선 ④와 ⑤에서, 행여나 소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하여 비바람을 뚫고서 허겁지겁 황급히 달려가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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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대순진리회 9폭 유형 심우도 가운데 ⑥번 그림 속의 동자 모습.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평온하며 느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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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는 ③에서 천지대도를 만날 자격이 있는지 시험받았다. ④ ⑤에서 어려움을 뚫고 천지대도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선도에서 창도를 거쳐 진법이 완성되는 광경까지 목격했다. 이제 ⑥에서 동자는 소 발자국만 따라 가면 곧 천지대도에 근거한 진법을 만나게 되고, 그때 그것을 따르면(진법에 따라 참된 정성을 들이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여유 있게 자취를 밟아가고 있다. 그러나 발걸음은 느긋하다고 하더라도 소를 만나고자 하는 그 의지만큼은 강렬하다. 만나기만 하면 결코 그 소를 놓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의지는 오른손에 꼭 쥔 끈[고삐]으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⑥은 소 발자국을 묵묵히 따라가지만, 흰 소를 얻어 어울리고 있는 성지우성의 단계까지 이른 것은 아직 아니다. 그러므로 ⑥은 성지우성의 직전 단계인 면이수지로 해설하는 것이 타당하다.

동자는 소 발자국만 잃지 않고 초심(初心) 그대로 평온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소 발자국을 버리고 다른 길로 벗어나면 흰 소를 절대 만나지 못한다. 오직 앞만 보고 묵묵히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뛰어갈 필요조차 없다. 요구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 확신과 믿음, 굳건한 의지, 소 발자국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고 앞만 보며 따라가는 우직함이다. 그러면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소를 당연히 만나게 되니, 지극한 정성을 들이는 ⑦ 성지우성의 과정을 거쳐 ⑧ 도통진경과 ⑨ 도지통명으로 가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림 7>에서 보였듯이, 9폭 유형 심우도는 6폭 유형 심우도를 기본 줄거리로 삼으면서도 면이수지의 과정을 ③ ④ ⑤ ⑥의 네 단계로 더 세분화하고 있다. 즉 수도자의 자격이 있는지 성의를 보이는 시험을 하늘에게서 받는 과정(③), 선도에서 창도로 이어지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④ ⑤), 초심을 잃지 않고 굳은 의지로써 묵묵히 진리의 발자국에서 벗어나지 않고 곁눈질하지 않으며 앞만 보고 우직하게 따라가는 수행(⑥)을 더 자세하게 그려 보여준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Ⅳ. 심우도들의 비교, 그 결과가 말하는 것

대순진리회 심우도와 불교 곽암 심우도는 소를 찾는다는 데에서는 같지만, 찾아야 할 소가 다르다. 곽암 심우도는 인간 본성을 찾는 그림이고,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도를 찾는 그림, 즉 증산[宣道]과 정산[創道]이 펼친 천지대도를 찾는 그림이다. 그러니까 둘 다 소를 찾지만, 그 소의 상징이 다르므로, 결국 내용은 다르다고 해야 한다.

두 심우도에서 소를 찾는 이유도 다르다. 그것은 해당 종교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 심우도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묘사한 것이다. 선 수행[參禪]의 목적은 명심견성(明心見性), 즉 고요함에 들어 망상과 집착의 오염과 번뇌를 벗고 마음을 밝혀 자성(自性)의 참모습을 바르게 봄으로써, 지혜를 얻고 깨달음에 도달해 열반에 오름이다. 보명 목우도는 그것을 참선의 최종 단계로 보아 원상(圓相)으로 묘사하고, 주체와 대상의 구별이 모두 사라지는 쌍민(雙泯)이라고 설명한다(<그림 2>). 곽암 심우도에서는 원상이 끝이 아니다. 원상은 여덟 번째에 나타나며 사람도 소도 모두 잊고 사라지는 인우구망(人牛俱忘)으로 설명된다. 이어서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참된 지혜를 얻은 끝에(⑨ 返本還源), 그것을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속세에 나선다(⑩ 入廛垂手, <그림 2>). 그러니까 곽암 심우도에서 소를 찾는 목적은 참선의 명심견성으로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서는 데 있다.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도를 찾아 얻고[① 深深有悟, ② 奉得神敎], 일정한 고난과 수행을 거쳐[③ 勉而修之, ④ 誠之又誠], 도와 합일하는 경지에 오르며 신선이 되고 속세는 천국으로 화하는[⑤ 道通眞境, ⑥ 道之通明] 단계를 묘사한다. 즉, 무자기(無自欺)로써 정신개벽을 이루고, 그 결과 지상신선(地上神仙)이 되어 인간개조(人間改造)가 성취되며, 나아가 지상천국 건설과 세계 개벽이 달성된다는 대순진리회의 목적41)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개인의 수도 및 완성[得道-修道-道通]과 세상의 완전한 구제를 동시에 시각화한 게 대순진리회의 심우도이므로, 소를 찾는 목적은 불로불사의 신선이 됨과 중생제도에 성공함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 사실은 동자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말해준다. <그림 2>의 곽암 심우도와 <그림 4>의 대순진리회 심우도를 다시 견주어보자. 곽암 심우도의 첫 장면은 동자가 소를 찾으러 다니고 있다.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첫 장면은 동자가 소를 찾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앉아서 사색에 몰두하고만 있다.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가? 소를 찾는 목적이 ▲인간의 완성과 ▲세상 구제의 성취라면, 당연히 동자가 사색에 잠겨 풀고자 했던 문제도 이 둘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까 대순진리회 심우도에서 동자는 인생의 참 의미를 알기 위해서만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대순진리회 심우도 속의 동자는 인간 완성과 만물 구제 해결책, 즉 도통군자가 되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방법을 동시에 찾으려 하니, 인간 본성 회복을 추구하는 곽암 심우도 속의 동자에 비해 고민의 깊이와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순진리회 심우도가 첫 장면에 동자의 깊은 고민을 담아내는 모습을 ‘굳이’ 할애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순진리회 세계에서 심우, 즉 증산과 정산의 천지대도[牛]를 찾는[尋] 목적이 개인과 세상의 구제와 완성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그들의 독특한 교리 때문이다. 대순진리회는 천지의 질서와 법칙[度數·常道]이 무너져 세상은 진멸의 참상을 맞이할 위기에 빠졌고, 최고신이 아니면 이것을 바로 잡을 수 없다고 신명들이 호소하자 구천의 최고신이 증산이라는 인간으로 강세하여 세상을 건질 상생의 천지대도를 열어 설계를 마쳤고, 정산이 이를 이어받아 진법을 완성하였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대순진리회 심우도에서 찾아야 할 대상인 소가 상징하는 상생의 천지대도란 깨달아야 할 주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 구제의 솔루션을 의미한다.42) 소를 찾아 수행을 완성하면 솔루션 실행도 완료되므로, 개인의 완성은 물론이요 참혹한 세상도 건져져 천국으로 화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끝은 중생구제를 위해 나서는 곽암 심우도와 달리, 중생구제가 완료된 모습을 보인다. 이 차이는 불교와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른 데에서 나타난 결과다.

불교의 곽암 심우도와 대순진리회 심우도를 비교한 결과를 <표 1>에 나타내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곽암 심우도는 보명 목우도에 비해 중생제도의 의지를 더 표출하지만, 그럼에도 중생제도를 막 시작하는 모습으로 매듭지어진다. 이와 달리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중생구제를 완료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 차이는 <그림 11>과 같이 곽암 심우도가 개인 수행 이후 중생구제라는 단층 연속 구조를,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개인 수행과 중생구제가 동시에 진행되는 복층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표 1. 불교의 곽암 심우도와 대순진리회 심우도의 비교
불교의 곽암 심우도 대순진리회 심우도
정의 인간 본성을 찾는 그림 증산·정산의 천지대도를 찾는 그림
그림 종류 (제작 시기) 10폭(12세기) 6폭(1982년), 7폭(1991년), 9폭(1992년)
소의 상징 회복해야 할 청정한 본성 증산이 선포하고 정산이 구체화한 천지대도
※ 천지대도는 선도(宣道) 후 창도(創道)의 과정을 거치므로, 소는 황색에서 백색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임
첫 장면 소를 찾으러 다니는 동자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세상의 구제를 고민하는 동자
소를 찾는 이유 인간 본성을 회복하여 지혜를 얻고 깨달음에 도달함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인간의 완성과 고통받는 세상을 구제하고자 함
마지막 장면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구제에 나섬 도통을 하여 신선이 되고 지상천국을 건설하여 중생구제를 완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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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심우도 구조 비교. 곽암 심우도는 불교 차원의 깨달음 연후 중생제도에 나서는 것이고,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신선이 되어 인간 개체의 완성을 기하면서 동시에 세상 구제를 완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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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비교 작업에서 밝힌 사실은 불교 곽암 심우도가 인간의 청정한 본성을 회복하여 중생제도에 나서는 그림이고, 대순진리회 심우도는 증산과 정산의 가르침을 찾아 인간과 세상을 도통군자와 지상천국으로 각각 완성하는 그림으로 대비된다는 것이다. ‘심우도’라는 단어는 같지만, 그 의미와 내용이 명백히 다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심우도의 사전 내용도 달라질 것을 기대해본다. 지금의 각종 사전에는 심우도가 불교의 선화(禪畫)라는 사실만 등재되어 있지만, 이제는 근대에 등장한 대순진리회가 심우도를 전유하여 그들의 세계관을 담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더 서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비교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낸다면, 그 새로운 지식은 당연히 활용되어야 한다. 대순진리회와 불교의 심우도를 비교한 작업의 결과와 효용이 이것이다.

마지막으로 ‘굳이’ 하나 덧붙일 게 있다. 이 글의 9폭 유형 심우도 해설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모든 책임은 오로지 글쓴이가 질 뿐이다. 독자들의 지적과 비판을 겸허히 기다린다. 그래도 이 글이 뒤에 나타날 훌륭한 연구의 거름이라도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Notes

중국 광동성 출신의 미국 사회학자 양칭쿤(楊慶堃, 1911~1999)은 종교 형식을 제도종교와 분산종교(확산종교, diffused religion)로 분류했다. 분산종교란 경전, 조직, 성직자 등이 전문화되어 있지 않은 종교를 말한다. 양경곤, 『중국사회 속의 종교 : 대륙을 움직인 숨겨진 얼굴』, 중국명저독회 옮김 (의왕: 글을 읽다, 2011), p.58.

William J. F. Keenan and Elisabeth Arweck, “Introduction: Material Varieties of Religious Expression,” in Elisabeth Arweck and William Keenan, eds., Materializing Religion: Expression, Performance and Ritual (Aldershot, England; Burlington, VT: Ashgate, 2006), pp.1-3; S. Brent Plate, “Material religion: An introduction,” in S. Brent Plate, eds., Key Terms in Material Religion (New York: Bloomsbury Academic, 2015). p.3.

David Morgan, “Visual Narrative.”, in chief ed. Lindsay Jones, Encyclopedia of Religion, Vol 2 (Detroit: Macmillan Reference USA, 2005). p.608.

John E. Cort, “Image.”, in chief ed. Lindsay Jones, Encyclopedia of Religion, Vol 14 (Detroit: Macmillan Reference USA, 2005). p.4389.

코끼리와 원숭이가 등장하며,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한다.

말이 등장하여 유교의 가르침을 시각화한다. 박소현·이정한, 「불가(佛家) 목우도(牧牛圖)와 유·도(儒·道) 십마도(十馬圖) 비교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1-4 (2022) 참조.

신현경, 「심우도(尋牛圖)의 분석과 포스트 모더니즘적 재해석」, 『일러스트레이션학 연구』 5 (1999), p.152, p.163.

‘appropriation’을 ‘차용(借用)’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문화비평 영역에서는 대개 ‘전유(專有)’로 번역한다.

오세권, 「‘차용’ 표현으로 본 불교와 대순진리회의 ‘심우도(尋牛圖)’ 연구」,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60 (2020), p.73.

같은 글, p.84의 <표 3> 참조.

같은 글, p.74, p.83.

신명희, 「깨달음과 교화에 관한 소고(小考) : 십우도(十牛圖)의 입전수수(入纏垂手)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불교학』 80 (2016), pp.162-163.

『遺敎經論』 一卷, “너희들 비구여, 이미 계에 능히 머물렀다면 마땅히 오근을 제어해야 할 것이지, 게을러서 오욕에 들어가면 안 된다. 비유하자면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소들을 감시하면서 사람들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經曰汝等比丘已能住戒當制五根勿令放逸入於五欲譬如牧牛之人執杖視之不令縱逸犯人苗稼若縱).”

신명희, 앞의 글, pp.165-166.

장순용, 『십우도』 (서울: 세계사, 2000), p.197.

Daisetz Teitaro Suzuki, Essays In Zen Buddhism (first Series) (London: Rider & Company, 1958), p.369; 吳汝鈞, 「十牛圖頌所展示的禪的實踐與終極關懷」, 『中華佛學學報』 第4期 (1991), p.314; 장순용, 앞의 책, p.112. 청거의 목우도는 5장이라는 설(吳汝鈞) 또는 6장이라는 설(Suzuki)이 있고, 12장이라는 설(장순용)도 있다.

『明嘉興楞嚴寺方冊本大藏經』 第二十三冊, 『牧牛圖頌序』.

조동종은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으로부터 파생되어 당송대에 형성된 선종의 일곱 종파인 칠종(七宗) 가운데 하나다. 칠종에는 위앙종(潙仰宗),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 황룡파(黃龍派), 양기파(楊岐派)가 있다.

장순용, 앞의 책, pp.196-197;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서울: 시공사, 2003), p.440; 신명희(정운), 「십우도와 목우도의 비교 고찰」, 『동아시아불교문화』 34 (2018), pp.61-62.

신명희(정운), 같은 글, pp.61-62.

장순용, 앞의 책, p.197.

곽철환, 앞의 책, p.440; 신명희(정운), 앞의 글, pp.61-62.

윤원철⋅강은애, 「종교언어로서의 공안」, 『종교와 문화』 7 (2001), pp.59-61; 이정섭, 「간화선 수행의 현대화를 위한 시론」, 『종교학연구』 28 (2009), pp.7-13.

《THE MET》, 「Ten Verses on Oxherding」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3660, 2023. 5. 29. 검색).

대순진리회 기획부, 『대순 연혁』 (내부 자료, 1988).

차선근, 「대순진리회의 개벽과 지상선경」, 『신종교연구』 29 (2013), pp.219-220.

여주본부도장 대순성전 건물은 원래 수강원(授講院)으로 지어졌다가 증축되어 1990년 말까지 수강전(受降殿)으로 사용되었다. 대순성전 3층에는 1991년 1월 9일에 여러 성화가 그려졌고, 9일 뒤인 1월 18일에는 ‘大巡聖殿’ 현판식이 있었다. 여주도장 총무부. 『업무일지(1991년)』 (필사본) 참고.

종단 대순진리회 포천수도장, 『종단 대순진리회 화보(소)』 (포천: 포천수도장 교무부, 2016), pp.28-31; “동자는 도문소자이고 소는 도전님이시다. … 7번 성화는 (도전님께서) 재세시의 누런 소가 흰 소로 바뀐 모습으로 신명계의 원위 자리에 모심을 뜻한다. … 거듭 말하거니와 심우도에 모셔진 소는 도전님을 뜻한다.”, 《대순진리회 포천수도장 홈페이지》, 「도장 벽화 이야기」 (http://www.daesoon.kr/board/mural/board_view.asp?page=1&num=1231, 2023. 6. 3. 검색) 참조.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13판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10), 예시 83절.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전 훈시』 (미발행 자료), 신미(1991)년 3월 6일 훈시.

위의 자료, 임신(1992)년 2월 15일 훈시.

차선근, 「숫자 3, 그리고 연원과 종통」, 『대순회보』 189 (2016), pp.50-58 참조.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 (Ⅱ) : 15신위와 양위상제를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3 (2014), pp.275-283 참조.

『전경』, 예시 1절∼9절;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69), pp.10-11.

태극도 본부 교화부, 『태극도 안내서』 (부산: 태극도 본부 교화부, 1966), p.3.

『전경』, 공사 3장 37절, 교운 1장 41·42절, 교법 1장 18절, 교법 3장 24절.

태극도 본부 교화부, 앞의 책, p.4; 대순진리회, 『도헌(道憲)』 (1985), 제2조.

태극도 본부, 『태극도 월보』 3 (1967), p.2.

차선근, 「조석(潮汐)의 이해」, 『상생의 길』 1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p.181; 차선근, 「선천에는 105염주, 후천에는 108염주」, 『대순회보』 264 (2023), pp.46-48.

『도전 훈시』 (미발행 자료), 갑자(1984)년 11월 5일 훈시, “복희 선천은 봄·동(東)·목신(木神)이며 삼(三)·팔(八), 목신사명(木神司命)이다. 다음으로 문왕 후천은 여름·남(南)·화신(火神)이며 이(二)·칠(七), 화신사명(火神司命)이다. 이제 용화 후천은 가을·서(西)·금신(金神)이며 사(四)·구(九), 금신사명(金神司命)이다.”

『대순진리회요람』,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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