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신라 관련 조상숭배 기록을 보면 현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들의 머리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인(倭人)에게 참수되어 암매장(暗埋葬)된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한 처(妻)의 처절한 분투, 그리고 그녀의 복수로 죽임을 당한 왜인을 남편의 무덤에 기어코 순장(殉葬)하는 서슬이 퍼런 이야기가 있다. 전쟁에 승리하여 개선하면 가장 먼저 묘당(廟堂)을 찾아 조상을 배알(拜謁)하고 감사를 표하는 문무왕, 후손이 잘못을 저질러 천문(天文)이 경고했다고 조상에게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고,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신문왕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와 대화를 했다. 산자는 죽은 자에게 기도를 올렸고, 원하는 신기(神器)를 받아내기도 했다.
우리가 신라인들의 조상숭배 신앙을 도외시한 채 이를 바라보면, 그것은 그저 혼란스럽고 기이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상을 숭배하는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말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학에서 정치와 물질적 현상, 제도만을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으며, 그 연구 대상을 인간의 영혼으로 확대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프랑스 실증주의 역사학자 쿨랑주(Coulanges, 1830~1889)의 저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영혼이 믿었고 생각했고 느꼈던 것을 알아내야 그들의 신앙에서 파생된 법과 제도 등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그의 이론은1) 우리에게 난해한 고대의 사료를 재성찰하게 한다. 하지만 The Ancient City는 그리스·로마의 사료들과 인도의 마누법전을 분석하여 집필한 연구서이다. 고대 서양·인도의 사례가 동아시아에 적합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103년 전 일본의 법학자 호즈미 노리시게(穂積陳重)에 의해 쿨랑주의 이론이 동아시아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그 이론을 분석의 틀로 삼아 일본의 조상숭배 신앙을 연구하여 그것으로부터 그 나라의 법·제도가 배태했다는 것을 논증해 냈다.2)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법·제도의 관계를 조명한 쿨랑주의 1864년 저서 『고대도시(古代都市)』는 일본의 저명한 법학자 나카가와 젠노스케(中川善之助)에 의해 “현대 사회과학의 시작을 알린 걸작”으로 평가받았다.3) 그의 이론은 상주사(商周史) 연구의 석학인 카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1904生)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카이즈카(貝塚)의 방대한 중국 고대사(동아시아 사례) 연구에 그의 이론이 스며있다.4)
1930년대 초 프랑스에 유학했던 중국학자 리쭝퉁(李宗侗)은 쿨랑주 이론이 중국 고대사회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여기고, 1934년에 『희랍로마고대사회연구서(希臘羅馬古代社會硏究序)』를 발간하여 중국에 소개했고, 종법(宗法)의 질서가 봉건제로 이어졌다는 점을 밝혔다.5) 한국학자 김두헌(金斗憲)도 그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2년 그의 동경 유학 시절에 발간된 『조상제사와 일본법률(祖先祭祀と日本法律)』을 그가 보고 이론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두헌, 『조선가족제도연구(朝鮮家族制度硏究)』 (을유문화사, 1949)는 한국의 가족 제도사에 이정표적인 업적이다.
그의 이론은 다음 명저를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Wu Hung, Monumentality in early Chinese art and architectur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우훙(巫鴻), 『순간과 영원』, 김병준 옮김, (파주: 아카넷, 2001)을 읽어보면, 미국의 중국학 대가 우훙도 쿨랑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태섭의 한국 고대 조상숭배신앙 연구 역시 그러하다. 그는 그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왜 유용한지 연구사적으로 밝히고, 한국 고대인의 조상숭배신앙을 분석했다.6)
이 글에서 필자는 신앙으로부터 배태된 법·제도를 밝히는데 앞서 죽은 조상에 대해 ‘신라인’이 품고 있던 신앙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신라인들에게 무덤은 어떠한 곳인가. 다음으로 죽어서 신이 된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어떻게 봉양을 받았는가. 마지막으로 묘당에서 조상을 만난 후손은 어떠한 보답을 받았는가.
마누법은 인간에게 최초의 신(神)은 죽은 조상이었다고 하고 있다.7) 죽음은 신비였고, 그들을 또 다른 영역으로 인도했다. 죽음은 사람들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으로 고양시켰다.
Ⅱ. 무덤 속 삶
박·석·김(朴·昔·金)이 하나의 통혼권을 이루고 왕위를 교대했던 신라 상대(上代) 석씨(昔氏) 조분왕(助賁王)·沾解王 시기였다. 주변 소국들과 전쟁이 잦았다. 시대가 군사 카리스마를 소유한 자를 요구했다. 내해왕(奈解王)의 아들 우로(于老)는 전쟁 영웅이었다.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7년(209) 7월이었다. 포상(浦上)의 8개 나라(창원·칠원·고성 등)가 가라(加羅, 김해 본가야)를 침공했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도움을 청했다. 부왕(父王)의 명령으로 우로는 6부병(部兵)을 이끌고 출동하여 8개국의 장수를 쳐 죽이고, 그들이 포로로 잡은 6천 명을 구출하여 돌려보냈다.
그의 두 번째 출동은 조분왕 2년(231) 7월이다. 우로는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 김천)을 정복하고 그 땅을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의 세 번째 출정은 조분왕 4년(233)이었다. 그해 5월 왜군이 동해안에 상륙했다. 7월에 우로가 군대를 이끌고 사도(沙道, 영일만 부근)에 도착하여 화공(火攻)으로 왜의 배에 불을 지르자 왜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많은 자가 익사했다.
조분왕 16년(245) 네 번째로 출정하였다. 이번에는 고구려였다. 여기서 우로는 강력한 고구려군의 공세에 밀려 퇴각하였다. 우로의 다섯 번째 출정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247~261) 초기였다. 신라에 신속하다가 이탈한 사벌국(沙伐國, 상주)이 원정 대상이었다. 우로는 그 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지금까지 우로의 전쟁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작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그의 군사적 공적이 아니라 그의 비극적인 최후이다.8)
그의 죽음 대한 기록이 한국기록(『삼국사기』 권45, 昔于老傳)과 일본기록(『日本書紀』 卷9, 神功皇后 9年 12月 조 [宇流助富利智干])에 동시에 나온다. 당시 우로의 비극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열도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깊은 인상을 남겼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어 전해져 오다가 양국 기록에 남았다. 먼저 『삼국사기』를 보면 이러하다.
A-① (沾解王) 7년 癸酉에 倭國 사신 葛那古가 (신라에 와서) 館에 있었다. 于老가 접대를 주관하게 되었다. 손님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넸다. “조만간에 너의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너의 왕비는 취사부로 만들겠다.” 倭王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공격하자 大王이 于柚村으로 나가 있었다. 우로가 말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우로는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하기를 “前日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라 하니 왜인이 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②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몸이 약한 탓에 걸음을 걷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안아다가 말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후에 訖解尼師今이 되었다.
③ 味鄒王 때 왜국 大臣이 왔는데 우로의 妻는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할 기회를 얻었다. 왜국의 사신이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는 壯士로 하여금 그를 뜰에 내려놓고 불에 태워 전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金城에 침공해 왔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9)
위의 기록은 3개의 내용으로 나뉜다. ① 우로의 죽음, ② 어린 우로 아들의 귀가(歸家), ③ 우로 처(妻)의 복수가 그것이다.
A-①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신라에 와서 객관에 머물 때 우로가 그의 접대를 주관하면서 실언(失言)을 했다. 조만간 당신 왕을 소금 굽는 종으로 만들고, 왕비는 밥 짖는 부엌데기로 만들 것이다. 이 말을 전하여 들은 왜왕(倭王)이 분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첨해왕과 우로는 휘하 병력과 함께 우유촌(于柚村)에 주둔해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많은 사상자(死傷者)가 나올 터였다. 부담을 느낀 우로는 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로 왜군의 진영으로 갔다. 실언을 사과했지만, 왜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포박하여 장작더미 위에 놓고 불 질러 분사(焚死)하게 했다.
A-② 우로의 아들 흘해(訖解)가 우유촌의 신라군 주둔지에 있었다. 어리고 연약한 아들을 전쟁터에 데리고 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하게 생각해 볼 때 아이를 그 위험한 장소에 데리고 온 곳이 아니라 우유촌이 우로 소유의 영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싸움에 패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로는 자신 아들의 안위도 고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들이 없이는 죽어서도 삶을 누리지 못한다.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창녕비(昌寧碑)」에 보이는 대나말(大奈末) 비시지(比尸智)의 관직명인 우유(于抽, 울진)·실직(悉直, 삼척)·하서아(河西阿, 강릉) 군사대등(郡使大等)인데 신라 왕경 기준으로 볼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동해안을 따라 나란히 위치한 행정단위이다. 우추(于抽)는 우유(于柚)와 자형(字型)이 거의 동일하다. 우유촌은 『삼국사기』 권35, 지리지에 보이는 울진(蔚珍)의 고명(古名)인 우진야(于珍也)와 통한다. 이기동은 우로가 동해안 지방의 한 성읍(城邑)국가의 족장인지도 모른다고 했다.10)
A-③ 시간이 흘러 미추왕(味鄒王) 재위기가 되었다. 왜국의 대신(大臣)급 사신이 신라에 왔다. 우로의 처는 미추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접대하게 되었다. 왜사(倭使)가 술에 취하자 그녀는 장사(壯士)를 시켜 그를 뜰에서 불에 태워 과거의 남편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왜국 대신은 과거 우로의 화형(火刑)을 집행한 자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을 보면 우로의 죽음은 더욱 처참하고, 우로 처의 복수와 매장(埋葬)도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B-① 신라 왕(宇流助富利智干)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가서 정강이뼈와 힘줄을 뽑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新羅宰로 삼고 돌아왔다.
② 그 후 죽은 왕(宇流)의 妻가 남편의 시신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왜인) 宰를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宰를 유인하여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宰가 속이는 말을 듣고 시신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주었다. 그러자 왕(宇流)의 妻가 國人들과 의논하여 宰를 죽였다.
③ 왕(宇流)의 시신을 파내어 다른 곳에 가서 葬事를 지냈다.11)
B-① 왜인들이 우로(宇流)를 사로잡아(禽獲) 해변으로 끌고 갔다. 포박된 그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할 터였다. 칼로 종아리를 절개(切開)하여 정강이뼈(臏)와 힘줄(肋)을 빼냈다(拔王臏肋). 그리고 넓적한 돌에 그를 올려놓고 기어가게 했다. 그 위에 피가 낭자했으리라. 잠시 후 우로는 참수되어(斬之) 모래밭에 암매장되었다. 왜인들은 그를 가혹하게 고문하고 목을 잘랐을 뿐만 아니라 묘지 박탈이라는 혹독한 처벌을 가했다. 시신을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유기하는 것은 영겁의 형벌이었다. 무엇보다 우로 시신의 다리가 크게 손상되어 있고, 머리도 몸에서 분리되어 있어 죽어서도 도망갈 수 없었다.12)
우로의 처(命元夫人)는 우로의 영혼과 시신이 겪게 될 기나긴 고통을 생각했던 것이 확실하다. 당시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삶에서 영혼은 육체와 결합해 있고, 둘이 함께 태어난 것처럼 죽음도 그들을 떼어 놓지 못했다. 영혼과 육체는 무덤 속에서 영원히 함께 있다고 믿었다.13)
여기서 잠시 죽은 미추왕과 김유신의 대력 14년(779년) 4월 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유신의 영(靈)이 미추왕의 무덤을 찾아가 호소했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庚戌年)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미추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소리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 내 (김유신의 묘로) 돌아갔다.”라고 한다.14)
우리는 여기서 혜공왕대 신라인들이 미추왕과 김유신은 땅속에서 삶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행복과 고통의 느낌을 간직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우로가 조상이 모셔져 있는 묘원에 묻히기 전까지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장례의식(葬禮儀式) 없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자신의 무덤을 가지지 못한 영혼은 집이 없어 이승에서 노고를 마친 다음에 기대하는 휴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덤 없는 영혼은 비참하다는 것, 무덤에 의해서 영원히 행복해진다는 것을 확신했다.
B-② 그녀는 남편이 암매장된 장소를 알고 있는 왜인(宰: 신라 주재 대사)에게 접근했다. 재(宰)는 우로가 고문을 당한 후 살해되어 모래 속에 던져졌을 때 현장에 있었고, 그 모든 것을 주동한 사람이 분명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복수의 칼을 갈았던 그녀는 목적을 위해 증오를 감추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 몸을 영구히 그에게 예속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자부심 강한 왕가의 젊은 여인(助賁王女)의 유혹이었다. 설렘에 의심을 풀어 제친 왜인은 그녀에게 우로의 시신이 어디에 묻었는지 말해주었다.
돌변한 그녀는 사람을 시켜 왜인을 죽였다. 이기동의 지적대로 남편을 죽인 부르쿤트족에 대한 복수를 위해 크림힐트가 훈(Hun)족에게로 달아나, 계획적으로 훈(Hun)의 추장과 혼인하여 그의 힘을 빌려 복수하는 것과 너무나 비슷한 발상이다.15)
그녀는 남편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은 장례 의식의 거행에 달려 있었다고 믿었다.『일본서기(日本書紀)』 권9를 보면 시신을 찾아낸 그녀가 우로를 장사(葬事) 지낼 때 왜인 재(宰)의 시신을 순장하는 기록이 보인다.
“(유기한) 왕(우로)의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서 葬事지냈다. 그때 (왜인)宰의 시신을 왕(우로)의 墓土 밑에 묻어, 왕(우로)의 관아래 놓고, ‘尊卑의 순서는 실로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16)
묘역을 조성하기 위해 먼저 땅을 팠을 것이다. 우로의 처가 사람을 시켜 먼저 왜인(宰)의 시신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우로의 손상된 시신을 복원한 뒤 염을 하여 관에 넣었을 것이고, 관을 왜인(宰)의 시신 위해 올려놓는 입관 의식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 우로는 무덤 속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고, 순장된 왜인은 무덤 속에서 영원히 비천한 종으로 우로를 섬겨야 한다.
“訖解尼師今이 즉위했다. 그는 奈解王 孫이다. 父는 于老角干이이고, 母는 命元夫人으로 助賁王女이다. … 그(于老)는 (아들) 訖解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侯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17)
310년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우로와 명원부인(命元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였다. 아버지 우로가 왜 군영에 스스로 걸어가 고문을 당하고 분사할 때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시 어려서 몸이 약해 걷지도 못하는 아이었다. 그의 즉위식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회가 밀려왔을 것이다. 후(侯)들은 우로가 그의 비범한 아들 흘해를 보고 말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 아이가 내 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다.”
어머니 명원부인이 실종된 아버지의 시신을 기어코 찾아내 장사를 치렀기에 흘해는 묘당에 제사를 올릴 수 있었고, 우로는 무덤 속에서 아들의 봉양을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이승에서 짧은 삶과 함께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의 삶 이후에 두 번째 삶을 믿었다. 그들은 죽음을 존재의 해체가 아니라 삶의 단순한 변화로 보았고, 그들이 지상에 남겨둔 후손들의 봉양을 받을 것이라 여겼다. 아버지는 아들로 말미암아 조상들의 망혼에 대한 빚을 갚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멸도 보장받는다.
우로의 처와 아들 흘해는 오시리스의 처와 아들 호루스를 연상케 한다.18) 오시리스는 세트(Seth)에게 모살 당해 시신이 토막이 난다. 처인 이시스가 여러 지역에 흩어진 시체 조각을 찾아 복원하여 남편을 부활시켰다. 그리하여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세계 두아트(Duat)의 신왕(神王)이 되었다. 아들 호루스는 어머니 이시스의 보호를 받는 연약한 아이에서 세트와 경쟁하는 전사로 자라나 승리하여 이집트 파라오 자리에 오른다.19)
Ⅲ. 조상(祖上)과의 대화
산자는 죽은 자와 대화했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668) 11월 조를 보자.
C-“11월 5일 (문무)왕이 사로잡은 高句麗人 7천명을 데리고 수도로 들어왔다. 6일에 (문무왕이) 문무신료들을 거느리고(率文武臣寮) 선조의 묘당에 조알하고(朝謁先祖廟) 고하기를 ‘삼가 先祖의 뜻(先志)을 이어 唐과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문초해 그 괴수를 처단하매 국운이 태평해졌기로 이에 감히 고하노니 神靈이여 들어 주오소서.’라고 하였다.
668년 11월 5일 문무왕이 고구려인 7천 명을 포로로 잡아 개선했다. 왕경 사람들이 그들을 목도하고 고구려 멸망을 확인했다. 앞서 나당연합군은 660년에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 9월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이 땅에서 지워버렸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의 문 앞에 다가섰다.
수백 년 동안 신라를 침공하던 여제(麗濟)가 사라지고 평화가 도래한 듯했다. 의미가 있는 시점이었다. 문무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선조의 묘당을 찾았다. 그리고 고했다. 당과 연합군을 꾸려 고구려와 백제의 죄를 문초해 그 괴수를 처단하매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하노니 신령(神靈)이여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왕이 조상신의 뜻으로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고, 승리를 할 수 있었으며, 통일된 신라를 다스리게 할 수 있다고 감사를 전했다.20)
이는 선대왕들에게 7천의 고구려인 포로를 바치는 헌부의식(獻俘儀式)이기도 했다. 존재의 빚을 아직 다 상환하지 못한 자손들은 자기의 조상인 구원자와 항상 함께했다. 668년 11월에 문무왕의 묘당 배알의 구체적인 모습은 687년에 그의 아들 신문왕의 그것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D-① 7년(687) 봄 2월, 元子가 출생하였다. 이날 날씨가 음침하여 어두컴컴했으며,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다.
② 4월, 音聲署의 長을 卿으로 바꾸었다.
大臣을 보내 祖廟에 제사를 지냈다(遣大臣於祖廟).
③ 제문은 다음과 같았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삼가 太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 영전에 아뢰나이다. 저는 천박한 자질로 숭고한 유업을 이어받아, 자나깨나 걱정하고 노력하여 편안하게 지낼 틈이 없었으나, 宗廟의 돌보심과 천지가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락하며, 異域의 내빈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며, 刑政이 공평하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④ 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 보니, 정의가 어그러지는 것을 하늘이 살펴보고,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매,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⑤ 모관 모를 시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살아 계신 神靈 앞에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사 이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해주시며, 5사의 성과를 틀리지 말게 하시며, 농사가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중외가 평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남겨주고,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룁니다.”21)
D-① 687년 봄 2월에 신문왕의 맏아들인 효소왕이 태어났다. 신문왕은 즉위년(681)에 역적 김흠돌의 딸을 출궁(出宮)시키고(離婚), 683년 5월 7일에 고(故) 김흠운의 딸과 재혼하여 결실을 보았다. 매우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저주라도 하듯 대낮에 검은 구름이 끼어 어두컴컴한 가운데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경(王京)에 거주하는 사람 누구나 그날의 天氣가 갓 태어난 왕자의 액운을 예언하는 징조로 느꼈을 것이다.
D-② 4월,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을 경(卿)으로 격상시켜 조직을 확대하였다. 음성서는 각종 국가행사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하는 관부였다. 그것은 이어진 조묘(祖廟)의 참배와 무관하지 않다.22)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인용된 고기(古記)를 보자.
“정명왕(신문왕) 9년에 왕이 新村에 거동하여 큰 술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했다. 가무(笳舞)에는 감(監)이 6명, 가척(笳尺)이 2명, 무척(舞尺)이 1명; 하신열무(下辛熱舞)에는감이 4명, 금척(琴尺)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歌尺)이 3명; 사내무(思內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한기무(韓岐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상신열무(上辛熱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소경무(小京舞)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1명, 가척이 3명; 미지무(美知舞)에는 감이 4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음성서 악단(樂團) 구성이 드러난다. 노래하는 가척(歌尺), 춤을 추는 무척(舞尺), 피리를 부는 가척(笳尺), 거문고를 연주하는 금척(琴尺) 등이 그것이다. 제물을 차려놓고 조상의 신령(神靈)을 불러내는 의식은 어디에도 존재하며, 그 자리에 음악이 없을 수 없다. 피리 소리와 거문고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척(歌尺)이 노래를 부르고 무척(舞尺)이 춤을 추는 자리에서 조상에 대한 참배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D-③의 제문에서 왕이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뢴다고 했다. 중대왕실이 태조로 모시는 태조대왕은 「문무왕비」에 성한왕(星漢王)으로 등장한다. 진지대왕 다음에 위치한 문흥대왕은 진지의 아들 김용춘(金龍春)이고, 다음에 태종대왕은 김춘추(金春秋)로 용춘의 아들이다. 마지막으로 문무대왕 김법민은 춘추의 아들이며, 제문을 올린 신문왕의 아버지이다. 살아 있는 왕은 종묘(宗廟)에 모셔진 직계 조상들의 은총에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인사를 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지상과 지하에서 격리되어 살았지만, 묘당에서 만나 대화하였다.
D-④ 최근에 왕 자신이 도의(道義)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좌(王座)에 있었기에, “정의가 어그러지는 것을 하늘이 보고,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므로,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신문왕은 속죄의식을 하고 있다. ①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은 2개월 전 적자(嫡子)가 태어난 날 대낮에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어두워지고, 번개가 내리치면서 우레가 울려 퍼진 것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어지는 ⑤에서 “이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라고 하고 있다.
조상신은 후손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궁정에서건 전쟁터에서건 그의 삶의 노정에서 그를 지탱해 주는 보호자요, 후손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늘을 통해 경고하는 재판관이었다. 여기서 죄와 벌·속죄 같은 관념들이 생겨났다. 후손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조상의 지혜에 호소하고, 슬픔에 싸이면 위로를, 위험에 빠지면 도움을,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는 용서를 청했다. 이 종교는 용서를 안다. 자신 후손만 돌보는 편협성도 있지만, 잘못을 범한 후손을 위로할 줄도 안다.
D-⑤ 대신(大臣)을 시켜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살아 계신 신령(神靈) 앞에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사,”라고 한다. 제단에 제물(祭物)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을 죽은 자를 봉양하는 것은 추념식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제물은 실제로 죽은 사람을 위한, 오직 그를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기 위해 악단(樂團)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러면 조상들이 나타나서 제물을 흠향(歆饗)하면서 좋아한다고 믿었다. 죽은 자는 산자 없이 신이 되어서도 삶을 누릴 수 없었고, 자손도 조상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었다. 후손에게 조상은 살아 계신 신령이었다.
신라의 무덤을 발굴해 보면 무기, 갑옷, 장신구, 그릇, 말과 마갑(馬甲) 등 죽은 자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그와 함께 묻었다. 사람을 순장하기도 했다.23) 그들은 살아서 주인을 모셨던 것처럼 죽어서도 그러해야 했다. 신라인들은 조상이 무덤 속에서도 희로애락(喜怒哀樂) 느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Ⅳ. 죽은 자가 준 신기(神器)
아래의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이 죽은 아버지(효양)로부터 (무열왕계) 조종(祖宗)의 신기(神器)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E-① “(元聖)王의 아버지 大角干 孝讓이 祖宗의 萬波息笛을 왕에게 주었다. 왕이 그것을 얻게 되니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② 貞元 2년 丙寅(786) 10월 11일에 日本王 文慶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략하려 했으나,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렸다. 그리고 사자에게 金 50냥을 보내어 피리를 주기를 청했다. 이에 왕은 사자에게 일렀다. ‘내 듣건대 上世 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金 1천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여 말했다.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보내겠습니다.’ 왕은 지난번과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銀 3천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가져온 金은 받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內黃殿에 보관했다.24)
위의 이야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왕위 계승 순위가 높은 김인문(金仁問, 태종무열왕 차남)의 직계 손 김주원(金周元)을 제치고 왕위에 즉위한 원성왕이 어떻게 무열왕계 조종의 만파식적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파식적 탄생 설화를 보자.
제31대 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이다. 開耀元年 辛巳(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 이듬해인 壬午 5월 초하루 海官 波珍飡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바다에 떠서 감은사를 향하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日官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일관이 말하기를, ‘(文武)大王의 아버지께서 지금 海龍이 되어서 三韓을 鎭護하시고 또한 金庾信公 도 三十三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大神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同德하여 城을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게 되면 값으로 칠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문)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利見臺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피게 하였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 형상이었다. 그 윗켠에 한간(一竿)의 대나무(竹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왕은 感恩寺에 나아가 머물렀다.
다음날 午時에 대나무가 합하여져서 하나가 되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일어나며 7일 동안 계속 캄캄하였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는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서 왕에게 바치었다. 자리를 같이하여 왕이 묻기를, “이 산에 있는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龍이 대답하기를, ‘비유를 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것은 합해진 연후라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는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좋은 징조이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취하여 피리로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문무왕)께서는 바닷속의 龍이 되셨고 庾信公은 다시 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을 저에게 주어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랍고 기뻤다. 5색 비단과 金·玉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보내어 그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아니하였다. …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를 피리로 만들어서 月城의 天尊庫에 보관하여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뭄 때에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맑아지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하였다. 그래서 이 피리를 萬波息笛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國寶로 삼았다.25)
위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즉위 후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왕 2년(682)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日官)에게 점을 치게 하니, 그가 말했다.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고 한다. 폭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흑옥대(黒玉帶)를 바쳤고, 용이 왕에게 그 대나무로 피리로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萬波息笛)로 만들어 보관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 조에서 일연(一然)이 인용한 『사중기』를 보자.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永隆 2년(681)에 죽으면서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장사하라고 유언하였다. 왕은 평상시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원컨대 나라를 수호하는 큰 용(龍)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보위하리라.
문무왕이 평소에 왜병(倭兵)을 막는 호국(護國)의 용이 되겠다고 늘 말하였고, 이로부터 인하여 동해의 용왕이 된 그가 신문왕에게 국가를 위호(衛護)하는 ‘흑옥대’와 ‘만파식적’을 내렸다는 신화가 생성되었다.26) ‘만파식적’은 신라를 진호(鎭護)하기 위해 용이 된 문무왕이 내려준 호국의 신물(神物)이다.
E-②의 ‘원성대왕’조에서 이 신물이 ‘윗대 진평왕대’의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신문왕대의 만파식적과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진평왕대의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원성왕이 만파식적을 보여 달라는 일본 사신의 청을 거절하기 위해 너무 먼 옛날의 물건이라 그 소재를 알 수 없다는 취지에서 말한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면이 있다. 더욱이 만파식적으로 인해 일본이 스스로 신라에 대한 침략을 중단했다는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이 만파식적은 왜구를 막기 위해 호국용이 된 문무왕이 신문왕에게 내려준 바로 그 ‘신물 피리’임이 분명하다.27)
용왕은 문무왕과 일체화된 신격이다. ‘조종의 만파식적’이 원성왕에게 다시 전수되었다는 이야기는 원성왕이 정당한 왕위의 계승자이며, 중대 왕실의 계승자이었기 때문에 생성된 것이다. 이기백은 선덕왕·원성왕의 등장을 중대 왕실의 전제주의에 대한 ‘안티’로서 설명하였지만,28) ‘원성대왕’ 조에 보이는 ‘부활한’ 만파식적의 설화로 볼 때 오히려 하대의 개창자였던 원성왕은 중대 왕실의 영속과 부활을 대외적으로 자임하였다고 볼 수 있다.29)
그렇다면 원성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죽은 아버지 효양 角干이 어떻게 무열왕계 조종의 만파식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중대왕실은 진지대왕 → 문흥대왕(용춘) → 태종대왕(춘추) → 문무대왕(법민)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중대 왕실의 뿌리이며 연원(淵源)인 진지왕에 대한 원성왕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94년 그를 모실 봉은사(奉恩寺, 眞智大王寺)가 원성왕에 의해 완성되었다.30) 『고운집(孤雲集)』(1933, 朝鮮總督府博物館慶州分舘寫)에 실린 「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에 나오는 ‘ … 一依奉恩故事’의 할주(割註)에 “奉恩寺烈祖大王奉爲眞智大王追福所建故取爲則”이라 하여 봉은사는 열조대왕(烈祖大王) 즉 원성왕이 진지대왕의 추복지소로 건립한 것이라 하였다.31)
원성왕은 진지왕에 뿌리를 둔 가지였을 것이다.32) 원성왕이 혈통으로 진지왕과 이어지지 않았다면, 막대한 재원과 시간·인력을 투입하여 봉은사를 건립·유지할 이유가 있겠는가. 조상숭배는 과시용 절차가 아니며, 진짜 조상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 가족 종교의 가장 준엄한 계율이다. 자신 조상이 아닌 자를 섬기는 것은 불경이었다. 조상들도 진짜 자손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진짜 후손이 아닌 자가 제사를 지내면 가족 종교의 모든 원리가 침해된다. 숭배는 더럽혀지고, 불순해지며, 묘당에 바쳐진 제물은 불경해진다. 그러면 조상들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영원한 굶주림에 처한다.33)
「숭복사비(崇福寺碑)」를 보자. 원성왕이 진지왕을 봉은사에 모신 것과 같이, 원성왕의 현손 헌강왕도 숭복사를 중창하여 원성왕을 모셨다.
中和 을사년(885) 가을에 (헌강왕이) 하교하시기를, “그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아 잘 따르며 길이 후손에게 좋은 일을 물려주는 것이 나에게 달려있을 뿐이니 先代에 세운 鵠寺의 명칭을 바꾸어 마땅히 大崇福이라 해야 할 것이다. 經을 몸에 지니는 보살과 寺務의 대강을 맡은 청정한 승려가 좋은 田地로써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였는데 한결같이 奉恩寺의 전례를 따르라[奉恩寺烈祖大王奉爲眞智大王追福所建故取爲則]. 故 波珍飡 金元良이 희사한 땅의 산물로부터 얻는 이익을 운반하는 일이 중대하니 마땅히 正法司에 위임토록 하라. 그리고 따로 덕망이 있는 두 고승을 뽑아 寺籍에 올려 常住토록 하면서 冥路에 복을 드린다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 幽界까지 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고 大緣을 맺은 이로서도 감응이 있어 반드시 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34)
위의 기록을 보면 헌강왕대(中和 을사년[885])에 가서도 봉은사에 모셔진 진지왕을 추복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원성왕을 모신 숭복사(崇福寺) 운영을 봉은사의 전례에 따라 하도록 했는데 고승 2명을 뽑아 상주시켜 명복을 빌게 하고, 희사받은 전지(田地)에서 나오는 수익을 정법사(政法司)가 관리토록 했다.
또한 원성왕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오묘(五廟)에 넣어 제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10, 원성왕 즉위년(785) 2월 조에 개정된 오묘를 보자.
시조대왕(始祖大王)은 미추왕을 말한다. 태종대왕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다. 문무대왕은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이다. 흥평대왕(興平大王)은 원성왕의 조부 위문(魏文)이다. 명덕대왕(明德大王)은 원성왕에게 만파식적을 전해준 아버지 효양 각간(角干)이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0년(680) 3월 조에 왕이 고구려인 보덕왕 안승에게 예물을 주고 혼인시킨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혼인의 당사자가 문무왕의 누이(妹)와 원성왕의 증조부 김의관(金義寬) 사이에 태어난 여(女)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의관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이며, 문무왕의 매부(妹夫)였다. 원성왕의 조부 위문(魏文, 興平大王)은 문무왕과 생질-외삼촌 관계였다. 또한 그는 태종대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35)
갑골문 연구자로서 UC 버클리(Berkeley) 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키틀리에 의하면 상(商)의 왕릉에서 초대형 정(鼎) 등 제기류가 다량 출토되는 현상에 대해 죽은 상의 왕들은 제사를 받는 대상이자 제사를 올리는 존재로서 조상제사에 계속 참여하였다고 해석한 호후선(胡厚宣)의 견해를 소개했다. 살아있는 왕이 세대가 낮은 조상에게 접대하면 다음에는 그 조상이 더 세대가 높은 조상을 대접하고 다시 그 조상은 더 세대가 높은 다른 조상을 접대한다.36) 신라 고분에서도 적지 않은 제기들이 출토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묘에서 가장 중요한 성령(聖靈)은 순위에서 마지막 신(主)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 각간, 명덕대왕이다. 원성왕이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면, 명덕(효양)은 그의 아버지 흥평대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흥평(위문)은 그의 외삼촌 문무왕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러면 문무왕이 생질인 흥평(위문)에게 만파식적을 내려주고, 흥평(위문)은 그 아들 명덕(효양)에게 그것을 주고, 마지막으로 명덕(효양)이 살아있는 아들 원성왕에게 그것을 전한다.
원성왕은 묘당에서 돌아간 아버지 효양을 만나 영적인 교감을 유지했으며 만파식적을 얻었다. 효양은 왕실 가족 정체성의 근원이었다. 그를 통해 윗대로 이어진 혈연의 계보로부터 원성왕과 그의 정처(正妻) 숙정부인(淑貞夫人),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37)
Ⅴ. 맺음말
신라의 전쟁 영웅 우로의 비극적 최후와 그의 아내의 복수 이야기가 한국·일본기록에서 동시에 전해진다. 고대에 해안을 마주하는 두 지역의 사람들에게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 확실하다.
왜국의 왕과 비에 대한 우로의 모욕적 언사는 보복을 불러왔다. 왜군이 신라를 침공했다. 우로는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하고 홀로 왜인 군영으로 향했다. 왜인들이 사죄하려고 온 우로를 고문한 후 참수했다. 그리고 묘지 박탈이란 영겁의 형벌을 내렸다. 우로의 처는 왜인이 암매장한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고대 사람들은 죽음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믿지 않았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태어난 것처럼 죽음도 그들을 떼어 놓지 못하며, 무덤 속에서도 영원히 함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존재의 해체가 아니라 삶의 단순한 변화로 보았다. 이승에서 짧은 삶과 함께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현재의 삶 이후에 두 번째 삶을 믿었다. 그래서 제대로 매장되지 않는 것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했다.
시신이 있어야 제대로 장사를 치를 수 있고, 죽은 자는 무덤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이 지상에 남겨둔 후손들의 봉양을 받을 수 있다. 암매장된 시신과 영혼은 아무런 제물도 받지 못하고 영겁의 배고픔에 처한다.
우로의 처는 죽은 남편이 겪게 될 불행을 생각하면서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다. 남편이 유기된 곳을 알고 있는 왜인(宰: 신라 주재 대사)에게 접근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했다. 왜인에게 자신 몸을 종신토록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왕가의 젊은 여인[조분왕녀(助賁王女)]의 속삭임에 왜인이 넘어갔다. 설렘에 왜인은 그녀에게 시신 암매장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일격이 가해졌고, 왜인이 피살되었다. 시신을 찾아낸 후 장사를 치르기 위해 땅을 팠다. 우로의 妻가 사람을 시켜 왜인(宰)의 시신을 먼저 넣었다. 이어 훼손된 우로의 시신을 복원하고 염을 한 후 관에 넣었다. 그리고 왜인(宰)의 시신 위해 관을 올려놓는 입관 의식이 이어졌다. 순장된 왜인은 영겁의 노예가 되었다. 이제 우로는 무덤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로 말미암아 조상들의 망혼에 대한 빚을 갚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멸도 보장받는다. 우로와 명원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인 흘해가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명원부인이 실종된 아버지의 시신을 기어코 찾아내 장사를 치렀기에 흘해는 묘당에 제사를 올릴 수 있었고, 우로는 무덤 속에서 아들의 봉양을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우로의 처는 남편의 토막 난 시신을 처절하게 찾아내 복원하여 명계의 신왕(神王)으로 부활시킨, 이집트 오시리스의 처 이시스를 연상케 한다.
668년 문무왕은 고구려·백제(麗·濟)를 멸망시킨 후 조상신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상 신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승(戰勝)을 할 수 없었다고 고했다. 후손의 봉양을 받기에 조상이 후손을 돕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상을 성찬(聖餐)의 자리에 불러내기 위해 거문고와 피리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의식은 단순히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조상과의 영적인 교류를 의미했다.
687년 신문왕은 묘당에서 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도움을 청했다. “왕 자신이 도의를 다하지 않아, 정의가 어그러지는 것을 하늘이 보고,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므로,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앞서 적자가 태어난 날 대낮에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어두워지고, 번개가 내리치면서 우레가 울려 퍼진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조상신에게 하찮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라고까지 했다.
조상신은 후손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궁정에서건 전쟁터에서건 그의 삶의 노정에서 그를 지탱해 주는 보호자요, 후손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늘을 통해 경고하는 재판관이었다. 후손은 어려움에 봉착하면, 조상의 지혜에 호소하고, 슬픔에 싸이면 위로를, 위험에 빠지면 도움을,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는 용서를 청했다.
원성왕(785~798)은 죽은 아버지가 신기 ‘만파식적’을 내려주었다고 주장했다. 만파식적은 문무왕(661~680)이 호국의 용이 되어 아들 신문왕(681~692)에게 내린 신물로, 피리를 불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전설이 있다. 원성왕은 자신의 혈통적 정당성을 과시하고,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계승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 신기를 강조했다. 물론 그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중대왕실은 진지대왕 → 문흥대왕(용춘) → 태종대왕(춘추) → 문무대왕(법민)순으로 이어졌다. 그 뿌리의 연원은 진지왕이다. 794년 그를 별도로 모신 봉은사(진지대왕사)를 원성왕이 건립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조상이 아니면 제사 지낼 수 없고, 조상도 진짜 자신 후손이 아닌 자의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믿었다. 원성왕은 혈통적으로 진지왕에 뿌리를 둔 가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원성왕의 혈통이 어떻게 ‘만파식적’의 주인 문무왕까지 이어지는지 알아보자. 신라 고분군에서 적지 않은 제기(祭器)들이 출토된다. 죽은 자들은 제사를 받는 대상이자 제사를 올리는 존재로서 조상제사에 참여한다고 신라인들이 믿었다는 증거로 보고 싶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아버지를 접대하면 다음에는 부(父)는 죽은 할아버지를 대접하고 다시 조부(祖父)는 더 세대가 높은 다른 조상을 접대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이 오묘에 모신 왕들은 이러하다. 시조대왕(始祖大王, 미추왕)-태종대왕(太宗大王, 문흥의 외조부 김춘추)-문무대왕(文武大王, 문흥의 외삼촌)-흥평대왕(興平大王, 원성왕의 祖父)-명덕대왕(明德大王, 원성왕의 父)이다. 원성왕이 아버지 명덕에게 제사를 지내면 부(父)는 할아버지 흥평에게 제사를 지내고, 조부(祖父)는 그의 외삼촌 문무왕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러면 문무왕은 생질 흥평에게 만파식적을 내리고, 흥평은 아들 명덕에게 그것을 건넨다. 마지막으로 명덕이 살아있는 아들 원성왕에게 만파식적을 전한다.
신라인들이 이러한 순차식 상향 제사와 신기의 하달 순서를 믿었기에 원성왕은 죽은 아버지에게 만파식적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 조에서 일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이 그것(만파식적)을 얻게 되니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산자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고, 죽은 조상과 소통하며 그들의 삶의 방향을 정했다. 후손은 묘당에서 조상과 교감을 유지하면서 힘을 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