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정산 송규의 사상 형성과정에 미친 증산의 영향

김탁1,*
Kim Tak1,*
1한국학대학원 박사
1Ph.D.,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한국학대학원 박사, E-mail: kimtak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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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May 27, 2021 ; Revised: Jul 01, 2021 ; Accepted: Aug 03, 2021

Published Online: Aug 31, 2021

국문요약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는 15세 때 증산교인들과 만나 많은 영향을 받는다. 정산은 그들의 권고로 가야산에서 3개월 동안 수행했으며, 가족들에게도 태을주(太乙呪) 수련을 하도록 포교했다. 이후 정산은 18세 무렵에는 여러 이적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증산의 행적을 좇아 멀리 전라도까지 찾아간다. 그곳에서 정산은 증산의 누이동생을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 모셔와 백일치성을 드리는 정성을 보였다. 다시 증산의 생가를 찾아간 정산은 증산의 외동딸로부터 「정심요결」이라는 도교적 수련서를 전수받았고, 증산이 천지대도를 연 장소인 모악산 대원사에서 10개월간 공부를 행하였다. 대원사에서 만났던 증산교인과의 인연으로 그녀의 집에 머물던 정산은 그곳에서 비로소 소태산과 만났다. 소태산과의 만남이 있기 이전의 청년 정산은 증산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산은 원불교를 선언한 이후로도 제생의세(濟生醫世)라는 증산의 종교적 표어를 사용했고, 증산이 제자들에게 써주었던 글귀를 주문처럼 외웠으며, 증산이 짓거나 인용한 한시(漢詩)를 언급했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이 지은 『현무경(玄武經)』에 나오는 구절들을 독특하게 해석했으며, 증산이 했던 말을 자주 인용했다. 나아가 정산은 증산의 언행록에 나오는 글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했으며, 증산을 개벽을 주재하는 삼원(三元)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적극 인정했다.

Abstract

At the age of 15, Song Gyu, the second patriarch of Won Buddhism, met Jeungsan-gyo members and was substantially influenced by them. Jeongsan cultivated himself for three months in Mount Gaya based on their recommendations. He instructed his family members to practice reciting the Tae-eul Mantra. Henceforth, Jeongsan was said to attain supernatural power when he was around 18 years old, and he pursued the traces left by Jeungsan in Jeolla Province.

Once there, he asked Jeungsan’s younger sister to move to his hometown, Seongju, Gyeongsang Province, and he served her with his utmost sincerity. He went back to the birthplace of Jeungsan and received a Daoist book from Jeungsan’s daughter titled, Essentials for an Upright Mind (正心要訣). Jeongsan practiced holy works for 10 months at Daewon-sa Temple in Mount Moak where Jeungsan was said to have attained unification with the Dao. After he had met Jeungsan-gyo members at the temple, he was able to stay in her house where he ended up meeting So Taesan. Before their meeting, it is obvious that Jeongsan was a member of Jeungsan-gyo.

Afterward, Jeongsan entered into Won Buddhism and used the passage, ‘saving lives by curing the world (濟生醫世).’ He recited the writing of Jeungsan, which had been given to his disciples, as if it had been a mantra. In addition, he mentioned Jeungsan’s poems or the Chinese poems that he had quoted many times. Jeongsan also interpreted passages from The Hyunmu Scripture (玄武經) written by Jeungsan in a unique manner. Jeongsan answered his disciples in his own way when they asked questions on the teachings of Jeungsan. He recognized Jeungsan as one of the Three Primes, who presided over the Great Opening.

Keywords: 태을주; 정심요결; 대원사; 제생의세; 현무경; 삼원
Keywords: Tae-eul Mantra; Essentials for an Upright Mind; Daewon-sa Temple; saving lives by curing the world; The Hyunmu Scripture; Three Primes

Ⅰ. 머리말

동학의 태동 이후 한국 신종교의 주요한 맥을 이어온 증산종단과 원불교는 이제 한국종교의 대표적인 종단으로 착실하게 성장했다. 이 글에서는 증산종단의 창시자인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사상이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宗法師)인 정산(鼎山) 송규(宋奎, 1900~1962)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향후 증산종단과 원불교 사이의 원만한 교류와 상호 이해와 그 증진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지난 시기에는 증산종단과 원불교 사이에 약간의 억측과 비난이 있어서 한국 신종교의 주요한 전통들 가운데 증산종단과 원불교는 반목과 대립의 감정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화합과 상생을 표방하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증산종단과 원불교는 새로운 만남의 계기를 마련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그 일차적인 작업으로서 두 종교단체 사이의 초기 역사와 교류사를 연구하는 일은 시급한 실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종교화합을 위한 기초적인 연구로서의 의의가 있고, 종교교섭사의 본격적인 연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학술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

원불교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증산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증산이 원불교의 성립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는 연구는 증산종단과 원불교의 만남의 과정과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증산의 사상이 불법연구회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정산 송규의 사상이 형성되는데 미친 영향력과 과정을 확인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정한 인물의 독창적인 사상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이전 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인물이 지녔던 사상이 끼친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 채 전승되기 마련이다. 이 연구에서는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로서 원불교의 발전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인물인 정산의 사상이 성립되기까지 소년기와 청년기의 구도과정에 미친 증산사상을 고찰함으로써 두 종교사상의 만남의 접점을 찾아봄으로써 증산종단과 원불교단의 장래의 원만한 화해와 교류를 지향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우선 정산이 소년기에 만났던 증산종단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기록들과 증산에 대한 풍문의 내용을 살펴본 다음, 당시 경상도 성주에 살고 있던 정산이 그 지역에 있던 태을주(太乙呪) 주문 수련자들(광의의 증산교인)의 영향을 받았던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그리고 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벌였던 지역인 전라도 원평에 살았던 송찬오를 만나보라는 태을주 도꾼들의 말을 듣고 소년 정산이 멀리 전라도까지 찾아갔던 정황도 살핀다.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태을주 수련에 심취했던 정산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본 후, 전라도 정읍에 살고 있던 증산의 여동생인 선돌부인을 경상도 성주에 있던 자신의 집에까지 모셔와 백일 동안 수련을 행했던 정산의 행적을 원불교단 측의 자료를 통해 고찰한다. 또한 정산이 증산의 제자 가운데 보천교(普天敎)를 열었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을 만난 일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원불교단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의 딸인 강순임으로부터 「정심요결(正心要訣)」이라는 도교적 수련서를 입수하는데, 훗날 원불교의 초기 경전으로 사용되었음을 원불교단 측의 논문과 각종 자료를 통해 확인한다. 정산은 1917년 11월경에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로 발길을 옮겨 이른바 도통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곳은 증산(甑山)이 천지대도를 연 곳으로 널리 알려진 장소였다. 대원사에서 만난 인연에 따라 정읍 화해리에서 공부하던 정산은 그곳에서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을 처음으로 만난다. 이처럼 소년 정산의 행적에는 증산의 그림자가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증산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흠모하던 소년 정산의 모습이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정산이 원불교단을 이끌던 시기에도 그가 제자들에게 외워주었던 주문 가운데 일부는 예전에 증산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미 전했던 글이었으며, 정산이 인용한 어떤 시는 과거 증산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외워주었던 시였다. 특히 정산은 제생의세(濟生醫世)라는 용어를 종교적 행위의 표어로서 강조하기도 했는데, 원래 이 용어는 증산의 독창적인 용어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의 친필저작으로 전하는 『현무경(玄武經)』의 일부 구절을 직접 언급했으며, 후천개벽시대(後天開闢時代)를 여는 위대한 인물인 삼원(三元)의 한 인물로 증산을 인정하였다.

소년 정산은 증산을 존경했으며, 그의 천지공사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며, 구체적으로는 도통(道通)을 꿈꿨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산은 세월이 흘러 소태산 박중빈을 따라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의 핵심인물로 성장한 이후에도 증산이 남겼던 글귀나 주문을 인용하거나 외웠으며, 증산을 위대한 선지자로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했다.

연구방법은 현행 『원불교전서』(1977)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정산의 사상이 형성되기까지 미친 증산사상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을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상세히 추출하여 분석하고, 그 역사적, 종교적 의의를 살펴본다.

증산종단의 경전은 현행경전인 『대순전경(大巡典經)』 6판(1965)과 『전경(典經)』 12판(1989)의 내용을 중심으로 삼고, 원불교단에서 발행한 정산에 대한 기록은 산견되는 여러 자료와 원불교단에서 수행된 논문들을 연구의 주된 대상으로 삼는다. 시간적으로 후대에 발생한 원불교단에서 간행한 자료들에 간간이 보이는 증산사상의 자취와 그림자를 비교분석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근거를 통해 종교적 의미를 찾아본다.

특히 소년 정산과 청년기 시절의 정산이 도(道)를 구하는 과정에 관한 여러 기록들에서 증산의 영향을 기록과 전언을 통해 실제로 확인하고, 정산이 종교적 행위를 시작하는 시기에 미친 증산의 언행에 관한 풍문의 내용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상세히 고찰하여 당시 종교운동의 태동에 영향을 준 요인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정산의 언행 가운데 증산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인정한 대목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 맥락과 의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20세기가 새롭게 열리는 때를 맞아 증산(甑山)은 자신의 사상을 천하에 알렸다. 이후 증산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사상은 당시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강력하게 미쳤다. 증산의 종교사상은 사후에는 그가 살았던 전라도지역을 넘어서 멀리 경상도 지역에 살던 소년 정산에게까지 알려져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누대에 걸쳐 살았던 경북 성주에서 온 가족을 이끌고 전라도 정읍까지 이사할 정도로 소년 정산은 이른바 도통(道通)에 목말라 했던 증산신앙인으로서의 도꾼(道軍)이었다. 증산의 신인(神人)으로서의 행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도통을 꿈꾸던 소년 정산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종교적 삶에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애초에 정산은 증산을 흠모하여 그를 마음속으로 따르고자 했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새롭게 태동한 증산사상이 후대에 발생한 원불교의 실질적인 발전적 전개를 주도한 정산의 사상이 형성되는데 과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초기 원불교의 태동과 전개에 미친 증산의 영향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사회의 종교적 상황과 경향에서 과연 어떠한 부분이 새로운 종교운동으로서 전개되어 발전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나아가 이 연구는 향후 보다 진전된 형태의 증산종단과 원불교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교량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불교의 초기 교단역사에서 증산사상의 흔적은 매우 강렬하게 남아있으며, 이러한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이 글에서 필자는 원불교의 태동과정에서 있었던 증산사상의 영향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두 종교사상이 만날 수 있었던 교류의 접점과 실제의 과정을 확인하고, 그 종교사적 의의를 고찰하는데 이 글의 의의가 있으며, 이러한 연구는 한 나라에서도 각기 서로 다르게 전개되고 발전되었던 신종교들 사이의 만남의 역사를 연구하는 시금석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증산종단과 원불교의 교섭사에 대해서는 김탁의 「증산교와 원불교의 만남」이라는 논문이 거의 유일하다.1) 이 선행연구가 나온 지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기를 맞아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도 이 연구는 증산종단과 원불교의 두 종교사상 사이의 교류의 역사에 있어서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실행된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Ⅱ. 정산의 구도과정에 미친 증산의 영향

1914년 2월 15세의 정산은 두 명의 증산교 도꾼들과 함께 가야산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함께 기도 수행했다. 이후에도 정산은 가야산의 한 정사(精舍)에서 “증산계 치성꾼”과 또 한 번의 수련을 하며 밤을 지새우며 “주문을 외우며 정진했다.”고 전한다.2)

정산은 16세 되던 1915년 1월에 구도(求道)의 열정에 이끌려 가야산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제단(祭壇)에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致誠)하려는 증산교(甑山敎) 사람들과 마주쳤다.”고 전한다.3)

당시에는 증산교라는 교명이 없었다. 특정한 교명이 없이 태을주(太乙呪)를 외우는 집단이라는 뜻의 태을도(太乙道) 또는 태을주의 첫머리를 본떠 훔치교(吽哆敎)라고 불렸다. 1911년 9월에 고판례(高判禮, 1880~1935)가 교단을 창립했고, 증산의 사후 갈 길을 찾아 방황하던 많은 증산을 따르던 무리들이 이 교단에 모여 태을주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였다. 태을주를 외우면 각종 질병이 낫는 이적이 일어나 짧은 시간에 많은 신도가 모였다고 전한다. 아마 이러한 일들이 전라도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성주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가야산에 다녀온 뒤, 정산은 집안 식구들을 모아놓고 함께 태을주(太乙呪) 공부를 행했다. 처음에 조부가 이를 반대하다가 갑자기 복통이 나서 고생한 뒤부터 손자인 정산이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고 전한다.

1917년 2월 그믐께 정산은 처가 집안의 여처사(呂處士)라는 인물이 수십 년간 가야산에 은거하며 수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정산은 그들에게 평소에 만나보고 싶었던 여처사(呂處士)라는 이인(異人)의 행방을 묻지만, “그대가 도(道) 공부를 하기 위해 여처사를 찾는 듯하온데, 도 공부를 하려면 상도<上道, 전라도(全羅道)>로 가심이 좋을 것이요.”라는 권유를 받는다.4)

당시 증산교 치성꾼들은 정산에게 전라도로 가서 송찬오(宋贊五, 1874~1939)를5) 찾으면 큰 스승을 만날 수 있다고 회유했다. 송찬오는 하산(夏山)이라는 호를 썼는데 증산 강일순의 제자로서 증산교파의 도꾼이었다. 그는 여러 증산교도들을 소태산의 불법연구회로 인도했던 인물이다.6) 송찬오는 원래 충청도 출신이었지만 증산을 따르면서 김제군 원평으로 이사해서 엿방의 물주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원평에서 증산을 믿고 따르는 태을도 도꾼들의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1919년 8월에 소태산의 입문제자가 되었다.7)

1917년 4월 18세의 정산은 이후 6개월 동안 “깊은 수련에 힘을 쏟았다.”고 전한다.8) 이때 “간혹 이적을 보이기도 하고, 밤이면 정좌 수행하는 방을 중심으로 서쪽 하늘을 향해 서기(瑞氣)가 뻗지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정산의 아버지인 송벽조(宋碧照, 1876~1951)는 아들의 종교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우연히 증산계(甑山系) 수도인(修道人)의 지도를 입어 일야지간에 고요히 앉아 주문(呪文)을 읽은 결과 정신이 열연(悅然)히 밝아져서 … 정사년(丁巳年, 1917) 4월부터 9월까지 수련에 뜻을 두니 간혹 이적이 있었고, 당시 세 차례나 천상(天上)으로부터 서기(瑞氣)가 소거가옥(所居家屋)을 횡복(橫覆)하여 서천(西天)을 향해 연환(連桓)하기를 2~3시간씩 하였더라. … 9)

당시 정산의 가족들도 함께 증산교의 대표적 주문인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공부”를 했으며, 정산의 부인인 여청운(呂淸雲, 1896~1978)은 신장(神將)의 옹호를 믿을 정도로 증산신앙에 몰두했었다고 전한다.10)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영(靈)이 둥둥 떠 친정집에 가기도 하고, 어머니 무덤에 가기도 했으며, 정신이 번쩍 들 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당시 태을도 도꾼들은 여청운이 통령(通靈)을 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11)

이때 정산은 수련을 마친 후에 “내가 전라도에 가야 만날 이를 만나고 공부를 성취하리라.”고 말했다고 전한다.12) 결국 1917년 초가을 무렵에 정산은 “전라도에는 신흥종교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하니, 내 이제 전라도로 가서 큰 스승을 만나 큰 공부를 성취하리라.”고 말하고,13) 김제로 갔다. 이때14) 정산의 목표는 증산이 수부(首婦)로 임명했던 고판례를 모셔오는 일이었다.15) 당시 정산은 자신의 집을 수리할 것을 부탁하고 전라도로 떠날 정도로 확고한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에 간 지 약 한달 만에16) 정산이 모셔온 인물은 고판례가 아니라 “증산의 여동생(선돌 댁)”이었다.17) 성주에 있던 정산의 집에 온 선돌댁은18) 정산과 함께 석 달 동안 여러 가지 주문을 사용하여 기도도 올리고 “치성(致誠)을 드렸다.”고 전한다. 당시 마을사람들은 선비 집에서 치성을 드리는 일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 해 9월에 정산은 선돌댁과 함께 다시 전라도에 간 정산은 증산이 태어났던 손바래기 마을에 머물렀다. 이후 정산은 고향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정산은 비로소 증산의 유족은 물론 고판례도 만나고, 여러 증산교인들을 만나게 된다. 청년 정산이 증산교인들과 자주 접촉했고, 증산의 행적을 깊이 연구했으며, 증산과 관련된 인물들을 만나려 노력했고, 증산과 관련된 지역들을 힘써 찾아다녔던 것으로 보아, 청년 정산이 ‘증산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19)

그 무렵 정산은 보천교(普天敎)의 교주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을 만나 “천하창생을 위한 천하대사(天下大事)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지만, 차경석은 “소년이 말만 엉뚱스럽군.”이라는 핀잔 섞인 대답만 들었을 따름이다.20) 이에 정산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전한다.

청년 정산은 고판례의 교단이 있던 정읍 대흥리, 증산의 생가가 있던 두승산 시루봉 아래 손바래기 마을 등을 찾아다니며 여러 증산계 도꾼들을 만나보기도 했으나 만족함을 얻지 못하였다.21)

당시 정산은 증산의 생가에도 찾아갔는데 이곳에서 증산의 딸인 강순임(姜舜任, 1904~1959)으로부터 「정심요결(正心要訣)」을22) 전수받는다.23) 「정심요결」은 증산교파의 하나인 삼덕교(三德敎)의24) 경전인 허욱(許昱, 1887~1939)이 지은 「영보국정정편(靈寶局定靜篇)」과25) 관련이 있다.

정산은 구도과정에서 증산교 계통에서 활용하던 수련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상체계에 수렴하였다. 이후 정산은 「정심요결」을 부안 봉래정사에서 교법 초안을 도울 때 소태산에게 올렸으며, 소태산은 여기에다 「정관경(定觀經)」, 「상청정경(常淸淨經)」, 「통고경(通古經)」, 「대통경(大通經)」 등의 4종의 선서(仙書)를 더해 훈산(薰山) 이춘풍(李春風, 1876~1930)에게 번역하도록 하여 『정정요론(定靜要論)』이라고 제목을 붙여 1927년에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이라는 번역교재를 간행하니 이것이 불법연구회 최초의 교서가 되었다.26)

정산은 교단의 형성기인 1919년 무렵 변산제법(邊山制法) 시기에 한문본인 「정심요결」을27) 한글로 번역하였는데,28) 불법연구회의 초기교서인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1927)의 『정정요론(定靜要論)』의 저본이 되었다.29) 이후 정산은 『정정요론』을 다시 분장보정(分章補整)하여 『수심정경(修心正經)』이라는30) 명칭으로 유행시킨다.31) 정산이 손질하여 『수심정경』을 유인(油印)하여 교무훈련(敎務訓練)에 교재로 사용한 때는 1951년의 일이다.32)

한편 1927년에는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이 발간되어 보급되었는데,33) 『수양연구요론』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양연구요론』에 실려 있는 「정정요론」 상편과 하편은 제1장과 제2장에 포함되어 있는데, 「정정요론」이34)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인 43쪽을 차지하고 있다. 『수양연구요론』의 본문 총 73쪽 가운데 「정정요론」과 의두요목(疑頭要目)이 차지하는 비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35) 「정정요론」은 도교의 「영보국정정편(靈寶局定靜編)」과36) 도장(道藏)에 있는 4종의 수련서를 번역한 것이다.37) 정산은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2장에서 “정정요론(定靜要論)을 설하실 때에 성품과 정신과 마음과 뜻을 분석하여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정정요론」의 내용에 기대어 설법한 것이다.

정산은 1951년에 「정심요결(正心要訣)」을38) 상당부분 수정하여 『수심정경(修心正經)』이라는 책명으로 변경하여, 1954년 교무동선(敎務冬禪)에 프린트본 교재로 제공하였다.39) 그리고 정산은 『수심정경』의 강령을 밝혀 외수양(外修養)과 내수양(內修養)에 대해 설법하기도 했으며,40) 외정정(外定靜)과 내정정(內定靜)에 대해서도 설했다.41) 이처럼 정산은 증산의 딸인 강순임(姜舜任, 1903~1959)으로부터 전해 받은 「정심요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정심요결」의 원본은 증산의 딸 강순임이 증산이 재세시(在世時)에 기거하던 서재에서 묵은 종이로 천정에 봉해 놓았던 이 책을 찾아 정산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때 강순임은 정산에게 증산이 “뒷날 찾아갈 주인이 있으리라.”는 말과 함께 이 책을 감추어두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42)

정산은 “전주 대원사, 정읍 화해리, 영광 옥녀봉 토굴, 부안 월명암 등에 차례로 우거(寓居)하시면서 극히 조용한 때에 혼자서만 꺼내보시고, 품속 깊이 간직해 두셨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이 「정심요결」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43) 그 후 정산은 소태산이 교서들을 편찬할 때 이 책을 헌정했다.

이후 정산은 1917년 11월경에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로 발길을 옮겨 본격적으로 이른바 도(道) 공부를 시작한다.44) 그곳은 증산(甑山)이 천지대도를 연 곳으로 널리 알려진 장소였다. 이곳 대원사에서 정산은 정읍군 화해리에 살던 김해운(金海運, 1872~1939)을 만났다. 당시 김해운은 칠보(七寶)에 있는 증산교에 출입하던 중이었다.45) 김해운은 보천교인이었던 구남수(具南守, 1870~1939)의46) “대원사에 경상도 성주에서 온 생불(生佛)님이 계시니 찾아가 뵙자.”는 말에47) 이끌려 정산을 만났다. 김해운은 1918년 봄에 정읍군 화해리에 있던 자신의 집에 집안의 크고 작은 일 모두를 상담해 주는 ‘만국양반(萬國兩班)’ 정산을 모시고 갔다.48) 정산은 화해리에서 주문 기도에 전력하였는데, 신통(神通) 또는 이적(異蹟)을 행하고 내일의 일을 예견하기도 했다고49) 전한다.

마침내 1918년 5월에 김해운의 집을 찾은 소태산은 정산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50) 그 만남의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없지만,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정산은 소태산을 만난 후로 그를 처음에는 형제로, 나중에는 사제의 인연으로 스승으로 모셨다. 불법연구회의 초기 역사가 섬광처럼 이루어지는 순간이 증산을 믿고 따르던 인물의 집에서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Ⅲ. 정산사상에 나타난 증산사상의 자취

정산의 사상 형성에 미친 증산의 영향을 도처에서 확인된다. 우선 정산은 제생의세(濟生醫世)라는 용어를 불법연구회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산이 1947년 5월에 행한 「유일학림(唯一學林)의 특색」이라는 법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 유일(唯一)이란 교명(校名)은 대종사님께서 정하시었다. 여러분은 먼저 유일의 참뜻을 알아 유일한 목적과 유일한 행동과 유일한 성과를 얻으라. 유일한 목적이란 곧 제생의세(濟生醫世)요, 유일한 행동이란 곧 무아봉공(無我奉公)이요, 유일한 성과란 곧 일원세계(一圓世界) 건설이다.51)

제생의세는 “일체 생령(生靈)을 도탄으로부터 건지고 병든 세상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각종 질병, 무지, 폭력 등으로 병들어 있으며, 병든 세상에서 인간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세상의 병을 다스리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적극 참여하고 성의를 다하자는 것이다. 정산은 학교의 이름을 설명하면서 그 목적이 제생의세라고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정산은 1948년 4월에 「원불교 교헌(敎憲)」을 제정, 반포하면서 총강(總綱) 제2조에 “본교(本敎)는 인생의 요도(要道) 사은(四恩) 사요(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학(三學) 팔조(八條)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佛恩化)하고, 일체 대중을 선법화(禪法化)하여 제생의세(濟生醫世)하기로 목적한다.”(『정산종사법어』 「경륜편」 5장)고 했다. 또 『원불교성가(圓佛敎聖歌)』 2장 교가(敎歌)에는 “제생의세(濟生醫世) 목적하는 형제들, 고해중생(苦海衆生) 반야선(般若船)에 건져서”라 했다. 원불교의 목적이 “일체 대중을 제생의세하기로 함”이라고 명시하였다. 이처럼 정산은 원불교의 교헌을 제정하면서 증산의 제생의세라는 용어를 차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산은 제생의세(濟生醫世)라는 용어를 사람들에게 자주 휘호로 써 주기도 했다. 원불교 원광사편집위원회에서 발간한 『정산종사법설집(鼎山宗師法說集)』(1962)의 첫머리에 정산이 쓴 휘호가 전한다.

원불교에서는 제생의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제생의세는 일체 생령을 도탄(塗炭)으로부터 건지고 병든 세상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곧 이 세상은 질병, 기아, 무지, 폭력, 인권유린 등으로 병들어있으며, 병든 세상에서 인간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세상의 병을 다스리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다. 성불제중(成佛濟衆)과 같은 의미로 쓰이나 제생의세는 ‘제중(濟衆)’에 더 비중을 둔 개념으로 세상의 병맥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52)

그런데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원래 증산 강일순의 독창적인 용어다. 증산교단 최초의 경전인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을사년(乙巳年, 1905) … 신원일(辛元一)이 개벽공사(開闢公事)를 하로 밧비 행(行)하시기를 천사(天師) 강청(强請)한대, 천사(天師) 가라사대 인사(人事)는 기회(機會)가 잇스며 천리(天理)는 가 잇나니, 그 기회(機會)를 지으며 를 기달닐 것이어늘, 이제 기회(機會)와 천시(天時)를 어긔고 억지로 인모(人謨)만 쓰면 이는 천하(天下)에 재(災)를 기침이며 억조(億兆)의 생명(生命)을 아슴이라, 엇지 참아 할 바이랴? 원일(元一)이 듯지 안코 천사(天師) 구지 청(請)하야 가로대, 방금(方今) 천하(天下)가 무도(無道)하야 선악(善惡)을 분별(分別)키 어려오니, 속(速)히 이를 잔멸(殘滅)하고 후천(後天) 신운(新運)을 열으심이 올흘가 하나이다. … 익일(翌日)에 천사(天師) 서 원일(元一)의 집에 오시사 원일(元一)다려 닐너 가라사대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聖人)의 도(道)오, 재민혁세(災民革世)는 웅백(雄伯)의 술(術)이라. 이제 천하(天下)가 웅백(雄伯)의게 괴로운지 오란지라. 내가 상생(相生)의 도(道)로써 화민정세(化民靖世) 하리니 너는 이제로부터 마음을 곳치라 하시고, 가라사대 대인(大人)을 공부(工夫)하는 자(者)는 항상(恒常) 호생(好生)의 덕(德)을 가져야 할 것이라. 엇지 억조(億兆)를 사멸(死滅)케 하고 홀로 살기를 도모함이 도리에 당(當)할 것이냐 하시더라. …53)

증산에 따르면 원래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재민혁세(災民革世)와 대비되어 짝을 이루는 용어였다. 제생의세는 성인(聖人)의 도(道)요, 재민혁세는 웅백(雄伯)의54) 술(術)에 해당한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영웅호걸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도자에 의해 다스려졌다면, 이제 앞으로 오는 세상은 성인(聖人)들이 도(道)로써 세상을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제생의세는 “상생(相生)의 도(道)”, “화민정세(化民靖世)”, “호생(好生)의 덕(德)”과도 연결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어쨌든 제생의세는 증산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다. 정산은 증산의 제생의세라는 용어를 차용하여 자신의 교법의 대강(大綱)을 설명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원불교에서는 제생의세와 비슷한 성불제중(成佛濟衆)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성불제중은 “진리를 깨쳐 부처를 이루고 자비방편을 베풀어 일체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구제하는 일”로 성불(成佛)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적 개념의 용어다. 원불교가 불교에 연원을 둔 새로운 종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제생의세와 함께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원불교의 교무였던 한산(閑山) 이은석(李恩錫, 1925~1982)은 여러 종교의 목적하는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불교의 목적은 성불제중(成佛濟衆)이요, 유교의 목적은 수제치평(修齊治平)이요, 기독교의 목적은 속죄구령(贖罪救靈)이요, 천도교의 목적은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며, 원불교의 목적은 제생의세(濟生醫世)라고 볼 때, 그 목적하는 표현은 다를지언정 그 원리는 동일하다.55)

이은석은 성불제중은 불교의 목적이고, 제생의세는 원불교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어쨌든 원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제생의세라는 용어는 원래 증산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독창적 용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정산이 1947년 7월 6일에 행한 「우주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법문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정산종사 예회에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일월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빈 그림자이다. 일월이 없으면 인간이 고저청탁(高低淸濁)을 분간하지 못한다. 천지에는 일월이 있고, 이것을 좋다고 하는 자 또한 사람이니, 우주의 주인은 사람이다. … 56)

“하늘과 땅은 해와 달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빈 그림자이다.”라는 말은 증산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비롯된다.

… “천지무일월공각(天地無日月空殼), 일월무지인허령(日月無知人虛靈)”이라 하시니라.57)

… 가라사대 천지(天地)가 일월(日月)이 아니면 공각(空殼)이오, 일월은 지인(知人)이 아니면 허령(虛靈)이라. … 58)

증산의 “빈 껍질과 허령(虛靈)”을 정산이 “빈 껍질과 빈 그림자”로 약간 바꾸어 언급했을 따름이다.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는 대체로 같다. 이처럼 정산은 증산이 했던 말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이를 자신의 법문에 자유자재로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이 구절은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1898)이 지은 『정역(正易)』 「십오일언(十五一言)」에 나온다. 『정역』에는 지인(至人)으로 적혀 있다. 일부가 썼던 구절을 증산이 인용했고, 정산이 이를 다시 원용했던 것이다.

또한 정산은 1948년 1월 ‘재단법인 원불교(圓佛敎)’의 등록인가를 받은 후 그해 4월에 원불교라는 교명을 선포한 이후에도 다음과 같이 증산이 제자에게 써준 글을59) 주문으로 외웠다.

1950년 무렵에 정산은 대각전 법신불 앞에서 아래 주문을 많이 외우시었다.

천용우로지박즉(天用雨露之薄則) 필유만방지원(必有萬方之怨)이요, 지용수토지박즉(地用水土之薄則) 필유만물지원(必有萬物之怨)이요, 인용덕화지박즉(人用德和之薄則) 필유만사지원(必有萬事之怨)이니, 천용지용인용(天用地用人用)이 통재어심(統在於心)이라. 심야자(心也者)는 귀신지추기야(鬼神之樞機也)며, 문호야(門戶也)며, 도로야(道路也)니, 개폐추기(開閉樞機) 출입문호(出入門戶) 왕래도로신(往來道路神)이 혹유선(或有善) 혹유악(或有惡)하니, 선자(善者)는 사지(師之)하고, 악자(惡者)는 개지(改之)하면 오심지추기문호도로(吾心之樞機門戶道路)가 대어천지(大於天地)니라.60)

위의 구절에 대해 원불교단 측에서는 “이러하나 대덕(大德)에 대하여 일찍이 강증산(姜甑山) 선생이 읊으신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다만 왕래도로신(往來道路神)에서 신(神)이 빠진 채 인용되고 있다.61) 여기서 심(心)을 대덕(大德)으로 본 점이 특기할만하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법설을 내리기도 했다. 증산의 글이라는 점을 밝히지 않고, “옛글”이라고만 말한 점이 특기할만하다.

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옛글에 ‘무어상봉(無語相逢)에 정야월(情也月)이라.’는 글이 있나니, 말없이 만남에 정이 밝았더라 함이니, 오직 내 마음도 이와 같도다. … 62)

원래 이 글은 『대순전경』과 『전경』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신년(1908)에 천사(天師) 여러 종도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내가 비록 죽을지라도 너희들이 마음을 변치 않고 믿겠느냐? 대하여 가로대 어찌 변할 리가 있사오리까? 천사(天師) 글 한 구(句)를 외워주시니 이러하니라. “무어별시정약월(無語別時情若月), 유기래처신통조(有期來處信通潮)”63)

“말없이 이별할 때의 정(情)은 달과 같고, 기약 있어 다시 올 때의 신의는 조수(潮水)와 통하리라.”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별할 때의 아쉬운 감정은 매달마다 차고 기우는 달처럼 어김없이 올 것이고, 돌아올 약속이 굳건함은 파도가 밀려오듯이 분명하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순전경』에는 증산이 여러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 전하는데, 『전경』 행록 4장 23절과 24절에는 “상제께서 무신년 어느 날 고부인에게64)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였도다. 이 대답을 듣고 상제께서 글 한 수를 지으셨도다.”라고 하여, 증산이 지은 한시(漢詩)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정산은 증산의 친필저작인 『현무경(玄武經)』에 나오는 글귀의 연원을 밝히며 원불교의 핵심교리로 해석하고 있다.

… 또 동인(東人), 서인(西人)의 당파 싸움에서 정가산이 동인(東人)의 칼에 죽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가산을 죽이면서 “그대가 아니면 장부의 칼을 어디에 써 보며, 내가 아니면 붉은 충성(忠誠)을 어찌 나타내겠는가?”하며 만사일장(輓詞一章)을 썼었는데 “大仁大義)는 무병(無病)이요, 대병(大病)은 사물탕(四物湯) 팔십첩(八十帖)이라.”하였나니, 이 뜻이 과연 무엇인가? 곧 (大人)의 뜻을 가진 사람은 병(病)이 없는 사람이요, 소인(小人)이 되어 소인의 뜻을 가진 사람은 다 병(病)든 사람이니, 이 병은 다른 병이 아니라 탐(貪), 진(瞋), 치(痴)의 대병(大病)이라. 이로부터 당쟁과 혼란이 비롯되었으므로, 이 병을 낫게 하려면 사물탕 80첩을 복용해야 한다고 하였나니라. 그러나 이 대병을 다스리는 사물탕 80첩은 무엇인가? 그 자세한 뜻을 알 수 없어 오늘날까지 비결(秘訣)로 전해왔으나, … 사물탕은 곧 일원대도(一圓大道) 회상(會上)의 사은사요(四恩四要)요, 80첩은 삼학팔조(三學八條)가 아니겠는가? … 65)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정산이 인용한 정가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서 알 수 없다. 다만 정산이 옛날부터 전해오는 많은 비결(秘訣)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비결과 예언과 관련된 인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가산(嘉山)은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이며,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 당시 홍경래에게 점령된 여덟 고을의 수령 중 유일하게 항거한 수령인 가산군수 정시(鄭蓍, 1768~1811)라는 인물이 있다. 당시 선천부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을66) 비롯한 둘은 항복하고 나머지 다섯은 도망쳤는데, 정시는 당시 항거한 대가로 목이 잘렸지만 반란이 진압된 후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따라서 충절과 관련된 인물은 정가산은 정시를 가리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결국 정산은 조선 선조 때의 당쟁과 관련된 인물로 정가산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정산은 “대인대의는 무병, 대병은 사물탕 팔십 첩”이라는 구절이 정가산의 만사(輓詞)에 나온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구절은 증산 강일순이 친필로 지었다는 『현무경(玄武經)』에 나온다. 사물탕과 팔십 첩을 비결로 본 정산은 원불교의 핵심교리인 천지은(天地恩), 부모은(父母恩), 동포은(同胞恩), 법률은(法律恩)의 사은(四恩)과 자력양성(自力養成), 지자본위(智者本位),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의 사요(四要), 그리고 정신수양(精神修養), 사리연구(事理硏究), 작업취사(作業取捨)의 삼학(三學)과 신(信), 분(忿), 의(疑), 성(誠),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의 팔조(八條)라고 주장한다. 비결을 풀이하는 방법이 바로 원불교의 교리에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부분이다. 어쨌든 정산은 증산이 썼던 글귀를 인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한편 『정산종사법설집』(196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 과거에는 상대적 상극적인 복마(伏魔)의 도(道)로써 세상일을 이루는 자가 많았으나, 미래에는 상생보은(相生報恩)과 해마(解魔)의 도(道)로써 세상일을 이루는 자가 많을 것이니, 이는 천지순환(天地循環)의 대도(大道)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이치를 알아서 해마(解魔)의 도(道)로써 실천하여야 그 바라는 바를 원만히 이루는 자 많을 것이다.67)

정산이 행한 이 법설은 다음과 같이 『정산종사법어』에 실려 있다.

말씀하시기를 “과거시대에는 상극(相克)되는 복마(伏魔)의 도(道)로써 세상일을 할 수도 있었으나, 미래시대에는 상생(相生)하는 해마(解魔)의 도(道)가 아니면 무슨 일이든지 이루지 못하나니, 이는 천지의 대운(大運)이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시기에 이른 까닭이니라.”68)

위와 같은 정산의 법설은 다음과 같은 증산의 말에서 유래한다.

나는 해마(解魔)를 위주(爲主)하는 고(故)로 나를 따르는 자는 모든 복마(伏魔)가 발동(發動)하나니, 복마의 발동을 잘 받아 이겨야 복(福)이 이어서 이르느니라.69)

나는 해마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의 발동이 있으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고 타이르셨도다.70)

정산이 말한 과거시대는 증산의 선천(先天)에 해당되고, 미래시대는 증산의 후천(後天)에 해당되는 용어다. 그리고 상극과 상생은 증산이 자주 주장했던 말이며, 특히 복마와 해마도 그러하다. 또한 주지하다시피 해원상생(解冤相生)은 증산의 사상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독창적인 용어다. 이처럼 정산은 증산의 사상을 대표하는 용어들을 자신의 법설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정산은 다음과 같은 법설을 하기도 했다.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개벽되는 시기에는 순수(順數)의 일꾼들과 역수(逆數)의 일꾼들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서로 발전하여 좋은 세상 건설을 촉진하나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동란자(動亂者)도 성인(聖人)이요, 정란자(靖亂者)도 성인이라.’하셨나니, 때를 맞추어 일으키고 때에 맞게 진정시키는 이를 성인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이를 배은자(背恩者)라 하나니라. 일에는 순서가 있나니, 사체(事體)의 순서를 알아 그에 맞는 방법을 베푸는 것이 곧 성인의 자비방편이니라.”71)

그런데 정산이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인용한 위의 말은 증산이 했던 말이다.

치우(蚩尤)가 작란(作亂)하여 큰 안개를 지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정(定)하였나니, 작란(作亂)하는 자도 조화(造化)요 정란(靖亂)하는 자도 조화라. 최수운(崔水雲)은 동세(動世)를 맡았고 나는 정세(靖世)를 맡았나니, 전명숙(全明淑)의 동(動)은 곧 천하의 난(亂)을 동케 하였느니라.72)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란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요,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73)

정산의 “동란자(動亂者)도 성인(聖人)이요, 정란자(靖亂者)도 성인이라.”는 말은 증산의 “작난(作亂)하는 자와 정란(靖亂)하는 자 모두 조화(造化)를 부리는 자라.”는 말고 상통한다. 성인(聖人)과 조화자(造化者)라는 말만 다를 따름이다. 그 본지는 같다. 원래 증산의 말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세상을 움직여 난리를 일으켰다면, 자신은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다는 확신을 드러낸 것이다. 어쨌든 정산이 증산의 말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의 사상에 미친 증산의 영향력이 다시 한 번 여실하게 확인된다.

그리고 정산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고 전한다.

영통(靈通)의 단계는 허령(虛靈), 지각(知覺), 신명(神明)으로 이루어진다.74)

정산은 신령(神靈)에 통할 수 있는 단계로서 허령, 지각, 신명을 언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증산의 친필저작인 『현무경(玄武經)』에 허령부(虛靈符), 지각부(知覺符), 신명부(神明符)가 있다. 증산은 허령, 지각, 신명을 각기 다른 단계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형태의 부(符)를 그렸다. 정산이 증산의 『현무경』에 있는 이들 부(符)에 영향을 받아 이러한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75)

또 정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선성(先聖)의 말씀에 ‘선천(先天)에는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나, 후천(後天)에는 모사(謀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옳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뜻에서 하신 말씀이지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는 말씀은 바꿀 수 없는 판에 박은 말씀이다.”76)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선성(先聖)은 증산 강일순이다. 증산의 말을 인용하여 어떤 사람이 정산에게 물은 대목이다. 이에 정산은 그 본질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고 대답한다. 증산의 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선천(先天)에는 모사(謀事)는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모사(謀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니라.77)

원래 이 구절은 선천과 후천의 질서를 대비하여 했던 말로, 선천에는 모든 일의 주도권과 결정권이 하늘에 있었다면 후천에는 그 결정적 권한이 사람에게 있다는 증산의 파천황적인 주장이다. 인간의 능력이 최대로 발현되는 후천시대가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선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세계가 열릴 것을 강조한 대목이기도하다. 그런데 증산의 이러한 말뜻을 부정하고 정산은 원래적 의미의 뜻으로 해석한다. 그것도 “판에 박은 말씀”이라고 확언한다. 이러한 정산의 해석은 증산의 본지와는 전혀 다르다.

한편 정산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순전경』을 많이 보고 인용했다.

“『대순전경(大巡典經)』에 보면 강(姜)선생께서 많은 병자를 낫게 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병만 고치셨다는 말씀입니까? 거기에 다른 뜻이 있습니까?” “별다른 뜻은 없다. 사람을 제도(濟度)하기 위하여 방편을 쓴 것이다.” “신통(神通)은 정(定) 공부에 속합니까?” “그렇다.” “그러면 신통으로 묘술(妙術)을 부린 사람은 생사(生死)에 해탈(解脫)을 하였습니까?” “아니다. 신통했다고 해탈한 것은 아니다. 도(道)와 술(術)은 좀 다른 것이다.”78)

증산의 각종 치병(治病)사례에 대해 숨겨진 뜻이나 의미가 있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정산은 특별히 다른 뜻은 없는 방편을 쓴 행위라고만 평가했다. 정산은 증산의 치병활동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의 말에 다음과 같이 새로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대순전경』에 ‘술수(術數)는 삼국시대에 나서 해원(解寃)하지 못하고, 이제야 비로소 해원하게 되나니라.’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중국의 삼국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술수가 계속해 오다가 이제 술수시대와 도덕시대가 서로 교체된다는 뜻으로, 이것이 천지의 원리인 것이다.”79)

정산은 증산의 ‘술수(術數)의 해원(解寃)’에 대해 “술수시대와 도덕시대의 교체”라고 풀이했다. 시대를 지배하는 질서와 원리가 바뀌는 뜻이라고 독특하게 해석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산은 증산의 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순전경』에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四義)를 쓰나니,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생장염장은 즉 춘하추동(春夏秋冬)의 뜻이니, 천지로 더불어 그 차서(次序)를 합한 것과 같은 것이다.”80)

원래 증산은 나고 자라고 거두고 감추는 우주의 질서를 주재하는 인물이 바로 ‘나’ 즉 자신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위와 같은 말을 했다. 물론 그러한 자연의 원리가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 대목이기도하다. 그런데 정산은 이 구절을 질서와 원리의 주재자인 ‘나’에 전혀 주목하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의 순환으로만 해석한다. 증산이 자신을 우주 최고의 주재자인 상제(上帝)로 자처하고 강조한 부분을 애써 무시한 풀이로 보인다.

“『대순전경』에 ‘도(道)를 닦는 자는 그 정혼(精魂)이 굳게 뭉쳐서 죽어서 천상(天上)에 올라 영원히 흩어지지 아니하나, 도를 닦지 않은 자는 정혼이 흩어져서 연기와 같이 사라지느니라.’ 하였으니,81) 정혼이 아주 없어진다는 말씀입니까?” “부처는 생사거래(生死去來)를 자유하는 힘이 있고, 중생(衆生)은 오리무중(五里霧中)같이 앞길이 희미하다는 뜻이다.”82)

정산을 따르는 무리들이 증산의 언행록인 『대순전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대순전경』의 내용에 대해 정산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위의 질문에 대해 정산은 “부처는 삶과 죽음, 오고 감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중생은 그렇지 못하다.”고 불교적 입장을 대변하는 대답을 했다고 전한다. “도를 닦는 사람”이라는 『대순전경』의 표현을 애써 무시한 채 “부처와 중생”이라는 불교적 표현을 사용하여 나름대로 답변을 제시한 것이다. 불교에 연원을 둔다는 점을 강조한 원불교의 입장을 나타낸 부분으로 볼 수 있겠다.

Ⅳ. 정산이 인정한 증산의 위상

정산은 개벽을 주재하는 인물로 삼원(三元)과 오성(五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삼원(三元)과 오성(五成)이 새 세상의 개벽을 주재한 뒤에 영세중정(永世中正)하리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선천(先天)이 열리는 때에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차례로 나와, 개벽의 역사를 맡아 하시었다는 동양의 설화와 같이, 후천(後天)이 열리는 데에도 삼원(三元) 오성(五成)이 차례로 나와, 동서양을 망라한 개벽의 큰 공사를 주재할 것이요, 그런 후에는 영세토록 중정(中正)의 인물들이 중정의 다스림을 계속하여 태평성대가 한이 없으리라.” 시자 여쭙기를 “삼원(三元)은 이미 다녀가셨고, 대종사(大宗師)께서 인증하신 바도 있삽거니와 오성(五成)은 앞으로 언제 나오시며, 누가 또한 그분들을 인증하게 되오리까?” 말씀하시기를 “오직 때를 따라 차례로 나올 것이며, 때를 따라 그 일을 하신 분들을 천하의 후인(後人)들이 저절로 추숭(追崇)하여 천하가 스스로 인증하게 되리라.”83)

그렇다면 삼원(三元)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후천개벽을 여는 중차대한 일을 맡아 행하는 인물인 삼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공전(共田)이84) 여쭙기를 “삼원은 누구 누구오니까?” 답하시기를 “몰라서 묻느냐? 수운(水雲), 증산(甑山), 두 어른과 대종사(大宗師)님이 그이시다.” 또 여쭙기를 “오성(五成)은 누구 누구오니까?” 답하시기를 “해월(海月)이 그 한 분이고, 남은 분들은 이후에 이어 나올 것이다. …85)

동학의 창시자 수운, 증산종단의 종조(宗祖) 증산, 원불교의 창립자 소태산의 세 사람이 바로 삼원(三元)이라는 말이다. 한국 신종교의 대표적 종단인 동학, 증산종단, 원불교를 창시한 인물들이 후천개벽을 주재하는 중심인물이라는 주장이다. 이들 세 사람은 후천(後天)이라는 이상사회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영웅적 면모를 지닌 위대한 선각자로서 인정되고 존경받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오성(五成)에 대해서는 동학의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만 밝혀졌고, 나머지 네 사람은 앞으로 나올 것이라는 정산은 말이 전해질 따름이다. 후천개벽이 여전히 계속 진행되는 과정에 있으며, 개벽을 이끌 주도적 인물들이 앞으로도 나타날 것을 예언한 대목이다.

개벽의 주재자로서 삼원(三元)을 언급하여 후천개벽의 진행을 맡은 위대한 인물로 인정한 정산은 수운, 증산, 소태산 세 사람의 업적이 서로 다르지 않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수운선생전(水雲先生傳) 탈고. 읽어드리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차차 최선생(崔先生)과 종사(宗師)님이 두 분이 아니신 것을 알게 될 것이요, 강선생(姜先生) 일과 종사(宗師)님 일이 딴 일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86)

한국 신종교의 독창적 주장과 믿음인 후천개벽사상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계속 이어져 진행되는 종교적 사건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산은 수운, 증산, 소태산으로 이어지는 개벽의 이상과 꿈이 자신에게 이어져 내려왔으며, 원불교의 역사를 통해 발현되고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어쨌든 정산은 후천개벽사상의 핵심인물의 한 사람으로 증산을 강조하고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했다.

Ⅴ. 맺음말

어떠한 형태의 만남이든지 간에 항상 일정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이는 사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두 사람이 동일한 역사적 시간대를 살지 않았더라도 전해지는 말이나 글을 통해서 후대의 인물이 앞선 시대를 살다간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정한 인물과 어떤 인물 사이의 만남은 늘 열려진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만남은 사상적 교섭사로서의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만남의 흔적은 단순한 일회성으로 끝나는 단절이 아닌 계속 이어지는 연속의 과정으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증산 강일순과 소태산 박중빈의 법통을 이은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宗法師)이자 개벽계성(開闢繼聖)으로 받들어지는 정산 송규의 사상적 만남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비록 역사의 무대에서는 시대를 달리했던 까닭으로 두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정산은 증산에 대한 풍문을 듣고 깊이 감화를 받았으며 증산의 행적과 일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최소한 청소년기의 정산은 증산을 마음속으로 믿고 따르던 넓은 의미의 증산교인이었음이 이 글을 통해 확인된다.

소년 정산이 훗날 존경받는 종교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증산과의 사상적 만남의 결과였다. 1918년 5월에 소태산과 만나기 이전의 정산은 분명히 증산을 믿고 따랐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종교적 지향은 증산과 같은 성도(成道)를 이루는 일이었다. 물론 소태산을 만난 이후 정산은 그를 스승으로 삼아 새로운 종교운동인 불법연구회에 적극 참여하여 불교적 지향으로 사상적 전환을 시도하고 이루었다.

청소년기의 정산은 증산이 가르쳐준 태을주(太乙呪) 수련에 심취했었으며, 증산교식의 백일치성에도 극진한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산은 증산의 여동생을 자신의 본가에 모셔와 수련했으며, 증산의 외동딸로부터 수련서를 전수받을 정도로 증산의 행적과 말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종교적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시기에 청소년이었던 정산을 자극한 유일한 것은 증산처럼 도를 깨닫는 일, 즉 도통(道通)이라는 종교적 야망을 성취하는 일이었다. 결국 청소년기의 정산은 자신의 종교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간이었으며, 직접 체험한 종교경험의 지속가능성과 효능을 확인하는 시기였다. 한 인간의 삶에 미친 어떤 사상은 영향력은 지대하다. 특히 성장기는 더욱 더 그러하다. 장래의 인생항로를 결정짓는 시기에 말이나 글을 통해 특정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의 폭발력은 매우 크다. 청소년기의 정산의 몸과 마음을 움직인 원동력과 정신적 점화를 이룬 것은 바로 증산이었다.

이후 정산은 대대로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의 집성촌을 과감히 떠나 종교적 구도(求道)의 일념으로 삶의 근거지를 멀리 전라도 땅으로 옮겼다. 이는 기존의 세속적 삶과의 결연한 단절을 결심하고 결정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정산의 그러한 결심과 결정의 배후에는 증산의 그림자가 분명히 어른거린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정산의 사상적 성장과정과 배경에 심각한 파문을 던졌던 증산의 엄청난 영향력은 이후 원불교의 종법사로 존경받던 시기에도 여전히 확인된다. 정산은 증산의 글을 주문처럼 외웠으며, 증산이 지은 한시를 인용하기도 했으며, 전해지는 증산의 말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독특한 해석을 내리기도 했고, 증산의 언행록을 인용한 제자들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성장기의 어떤 인물에 미친 특정인물의 사상적 감화와 영향의 지대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간적으로 후대에 발생한 원불교는 인근 지역에서 태동하고 성장했던 증산종단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음이 분명하다. 개벽종교(開闢宗敎)를 지향하고, 새로운 시대인 개벽된 이상사회를 꿈꾸고 이루려했던 점에서 두 종교사상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녔다. 그리고 두 종교는 거의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 배경도 공유했다. 따라서 증산종단과 원불교는 형제종교요 이웃종교다. 앞으로 두 종단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만남을 통해 일치와 협력으로 영원한 이상인 개벽(開闢)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 만남의 초석을 살펴보는 이 글을 후학들의 진일보된 연구를 기대하며 맺는다.87)

Notes

이 글은 원불교 교화연구회에서 1991년에 발행한 『한국근대사에서 본 원불교』 (서울: 원화)에 실렸다. 이후 김탁, 『증산교학』 (서울: 미래향문화, 1992)에 그대로 전재되었다.

김일상, 『정산 송규 종사』 (이리: 월간원광, 1987), p.44.

같은 책, p.38.

같은 책, p.38.

훗날 정산의 연원으로 소태산의 제자가 되어 적벽(赤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송인걸, 『대종경 속의 사람들』 (이리: 월간원광사, 1996), pp.155-157. 구남수(具南守), 송월수(宋月守), 장정수(張正守), 김정각(金正覺) 등이 대표적이다.

같은 책, p.156.

김일상, 앞의 책, p.44.

송벽조, 「현재법사(정산) 역사」, 『원광』 49 (1965), p.28.

박용덕, 「선진열전 - 중타원 여청운 사모 ‘하맑은 구름처럼’」, 『원광』 99 (1999년 2월), p.71.

박용덕, 「일대기」, 『주산종사문집』 (이리: 원불교출판사, 1980), p.321.

김일상, 앞의 책, p.45.

같은 책, p.47.

박용덕은 1917년 4월의 일로 기록한다. 정산은 “전라도에 가 선생님 사모님을 모시고 올랍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물론 여기서 “선생님”은 증산 강일순을 가리킨다. 박용덕, 「정산종사의 가계고(家系考)」,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정산종사의 사상』 (이리: 원불교출판사, 1992), p.53.

김일상, 앞의 책, p.49.

박용덕은 그해 6월의 일이라고 기록한다. 박용덕, 「정산종사의 가계고(家系考)」,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정산종사의 사상』 (이리: 원불교출판사, 1992), p.53.

김일상, 앞의 책, p.49.

고부군 입석리(立石里)에 살던 박창국(朴昌國)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입석(立石)을 한글로 푼 ‘선돌’댁으로 불렸다. 당시 선돌댁은 아이를 낳지 못해 시집에서 쫓겨나 덕천군 신월리 손바래기에 있던 증산의 생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강율(姜栗, 1881~1922)이다. 1927년 6월 21일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의 판결문에 이름이 나온다. 김탁, 『일제강점기의 예언사상』 (성남: 북코리아, 2019), p.431.

김탁, 『증산교학』 (서울: 미래향문화, 1992), pp.363-364.

김일상, 앞의 책, p.51.

박용덕, 「정산종사와 화해리 인연」, 『원광』 175 (1989); 박용덕, 「화해리 이적에 관한 이야기」, 『원광』 176 (1989).

「정심요결」은 「영보국정정편(靈寶局定靜編)」이 저본이 되었으며, 「영보국정정편」은 송대(宋代) 정사초(鄭思肖, 1241~1318)의 「태극제련내단(太極製鍊內丹)」이 많이 참고하였다. 안동준, 「수심정경의 도교적 연원」, 『전통사상의 현대화와 정산종사』 (한국원불교학회 추계학술대회, 1999년 12월), p.60.

이 책은 수사본(手寫本)이었다고 전한다. 이공전, 「봉래제법과 익산총부 건설」, 『원불교 70년 정신사』 (이리: 원불교출판사, 1989), p.171.

삼덕교에 대해서는 홍범초, 『범증산교사』 (서울: 한누리, 1988), pp.276-329을 참고하시오.

서상범이 편찬한 『생화정경(生化正經)』 (김제: 삼덕교교화부, 1955)의 부록에 한문본이 실려 있다.

박용덕, 『정산종사 성적을 따라』 (익산: 원불교출판사, 2003), p.64.

「정심요결」은 내단(內丹)사상 계통의 저술이다. 박병수, 「정신수양의 기론적 접근」, 『원불교수행론연구』 (익산: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6), p.124.

불법연구회가 창립되기 전인 교단 초기에 『정심요결』 번역본이 사용되었다. 신순철, 「몽각가와 소태산가사 수록 문헌 연구」,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2005) pp.265-266. 정산이 아니라 훈산(薰山) 이춘풍(李春風, 1876~1930)의 번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박도일, 「정산종사의 수심정경 연구」, 『정산종사의 경륜과 사상』 (신룡교학회 제 32차 학술발표회 발표문, 1997년 10월) 정산이 분장(分章)하고 이름을 붙여 『수심정경」으로 유통시켰다는 연구가 있다. 양은용, 「『수양연구요론』의 구조와 성격」, 『원불교사상』 14 (1991), p.342.

1927년 3월에 훈산 이춘풍(李春風)이 『산중풍경(山中風景)』을 편성하면서 『정심요결』의 제목을 모두 『정정요론』으로 수정하였다. 박용덕, 『천하농판』 (익산: 동남풍, 1999), p.107.

『원불교교고총간(圓佛敎敎故叢刊)』 4권 (이리: 원불교정화사, 1969) 별록에 한문본에 실려 있다.

양은용, 앞의 글, p.329, p.345.

이공전, 『범산문집, 범범록(凡凡錄)』 (이리: 원불교출판사, 1987), p.323.

『수양연구요론』은 초기 원불교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안동준, 「수심정경의 도교적 연원」, 『전통사상의 현대화와 정산종사』 (이리: 원불교출판사, 2000), p.67.

정정(定靜)이라는 개념은 원불교 초기수행법의 형성과 실천방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성전, 「정정의 유ㆍ도통합적 성격」,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31 (2005), p.57.

박용덕, 『천하농판』, pp.86-87.

전북 부안에 살던 증산교인 이옥포(李玉浦)가 기술(記述)한 한자본 문헌이다. 이옥포는 자신의 두 제자들에게 증산(甑山)을 찾아가 배우라며 비전(秘傳)으로 「영보국정정편」을 전하며 수련에 정성을 다하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옥포에 대해서는 출신지역 이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박용덕, 『천하농판』, p.103.

빛바랜 양지, 이른바 해묵은 백로지에 필사(筆寫)한 순한문(純漢文)으로 된 책자였다고 전한다. 이공전, 『범산문집, 범범록(凡凡錄)』, p.324.

류성태, 『정전변천사』 (익산: 원불교출판사, 2010), p.174.

『정산종사법어』, 「경의편(經義編)」 65장.

같은 책, 「경의편」 66장.

이공전, 『범산문집, 범범록(凡凡錄)』, p.325.

같은 책, p.325.

그 기간이 무려 10개월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박용덕, 「수심정경 입수경로」, 『원광』 1989년 2월호, pp.58-59. 1917년 음력 11월에 대원사에 들어가 이듬해 가을까지 있었다고 한다.

김삼룡, 「정산종사의 생애와 사상」,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정산종사의 사상』 (이리: 원불교출판사, 1992), p.21. 원광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삼룡은 김해운의 손자다.

1916년에 차경석의 차천자교(車天子敎)에 입교했으며, 1919년에 소태산과 만났다.

송인걸, 『대종경 속의 사람들』 (이리: 월간원광사, 1996), p.173.

정산은 김해운의 집에서 1918년 정월부터 약 7개월 동안 머물렀다.

당시 증산교인들 사이에서 “송도군<宋道君, 송규(宋奎)>이 개안(開眼)하였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김일상, 앞의 책, p.62.

박제권, 『정산종사 수필법문』 상 (익산: 원불교출판사, 2008), p.27.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원불교대사전』 (익산: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2013), pp.1035-1036.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p.50-52. 『대순전경』 2장 42절과 『전경』 교운 1장 16절에 비슷한 구절이 있다.

『대순전경』에는 웅패(雄覇)로 기록된다.

이은석, 『정전해의(正典解義)』 (이리: 원불교출판사, 1985), p.51.

박제권, 앞의 책, pp.59-60.

『대순전경』, 3장 160절; 『전경』, 예시 21절.

같은 책, 4장 39절.

『대순전경』, 2장 88절과 『전경』, 행록 3장 44절에 따르면 증산이 제자인 신경원에게 써준 글인데, 이 글을 한번 읽고 불사르자 경관의 조사가 멈췄다고 전한다.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이치에』 (이리: 원불교출판사, 1982), p.90; 박정훈, 『정산종사전』 (익산: 원불교출판사, 2002), pp.373-374.

오선명 엮음, 『정산종사 법설』 (익산: 월간원광사, 2000), 제3편 도덕천하, 24장 큰 덕, pp.157-158.

같은 책, 제3편 도덕천하, 32장 허공을 잘 이용하라, pp.166-167.

『대순전경』, 9장 1절.

고판례(高判禮, 1880~1935)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선명 엮음, 앞의 책, 제4편 하나의 세계, 피난하는 비결, pp.200-201.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조부다.

원불교원광사편집위원회 편집, 『정산종사법설집』 (n.p.: 원불교원광사, 1962), p.217.

『정산종사법어』, 「도운편(道運編)」 12장.

『대순전경』, 6장 37절.

『전경』, 교법 2장 15절.

『정산종사법어』, 「도운편」 18장.

『대순전경』, 5장 19절.

『전경』, 교법 3장 30절.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이치에』, p.64.

혀령, 신명, 지각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이었다. 향후 이러한 용어가 증산과 정산에 의해 사용되고 발전적으로 이해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요청된다.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이치에』, p.83.

『대순전경』, 6장 106절; 『전경』, 교법 3장 35절.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이치에』, p.83.

같은 책, p.83.

같은 책, pp.83-84.

『대순전경』, 6장 77절과 『전경』, 교법 2장 22절에 실려 있다.

박정훈 편저, 『한울안 한이치에』, p.84.

『정산종사법어』, 「유촉편」 34장.

범산(凡山) 이공전(李空田, 1927~2013)이다. 본명은 순행(順行)이다.

이공전, 『범산문집, 범범록(凡凡錄)』, pp.113-114.

같은 책, p.556.

특히 이 논문은 정산의 증산사상의 ‘수용’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향후 원불교단 측에서 정산이 어떻게 증산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적으로 전개시켰는지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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