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전경』에 나타난 생명의 존재론적 위상

백춘현1,*
Choon-hyoun Baek1,*
1제주대학교 강사
1Lecturer, Jeju National University
*E-mail: expor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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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Apr 24, 2023 ; Revised: May 30, 2023 ; Accepted: Jun 07, 2023

Published Online: Jun 30, 2023

국문요약

이 글은 대순사상에 나타난 생명이 존재론적 관점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 살펴보려는 목적을 갖는다. 존재론이란 있는 것들을 있게끔 만드는 그 ‘있음’이 무엇인지, ‘있는 것들’을 실현하는 가능근거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인간 사유의 한 분야이다. 생명은 대순사상의 추기이다. 대순사상의 생명은 현재적 인간을 포함한 창생(蒼生)뿐 아니라 신성, 불, 보살, 귀와 신 등 모든 신명(神明)을 포괄하며 현재와 과거, 미래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시·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적 차원으로 확산한다.

고대 존재론의 시초인 플라톤에 있어서 인간은 ‘혼(psychē)을 가진 몸(sōma)’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몸은 무덤(sōma sēma)’일 뿐이다. 몸은 혼을 가두는 굴레이고 혼을 묶는 사슬이다. 플라톤의 혼의 세 특징은 각각 불사(不死), 상생(相生), 신성(神性)이다.

플라톤의 혼에 대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 서양 형이상학과 현대 생명철학자 베르그손에게 이어진다. 베르그손은 생명이란 무화(無化, néantiser)하려는 무(無)를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만들어 나가는 힘이다. 베르그손의 생명의 세 가지 특징은 자기동일성, 약동, 자유이다.

대순사상은 선천의 가사적 생명이 해원을 통해 후천의 영원한 생명으로 개벽한다고 본다. 대순사상이 보는 후천 생명의 대표인 지상신선은 이런 대순적 생명성을 잘 보여준다. 지상신선은 불사의 존재이고 영원을 특징으로 하지만 존재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부동성은 부정한다. 지상신선은 활동하는 생명 존재이다.

Abstract

This study aims at determining the meaning of Life in The Canonical Scripture of the Daesoon Thought upon the ontological bases of occidental philosophies; especially upon those of Plato and Bergson. In western philosophy, the word ontology designates investigating the meanings of being, which is derived from the Greek ‘onto (being)’ and ‘logia (logical discourse).’ The various meanings of life have been sought from ancient times all over the world, for these are the critical and vital questions that pertain to the nature of human existence.

Plato had asserted that life, in his word, soul, had three different kinds of aspects of meaning. Immortal, reciprocal, and divine. Plato scheme was such that the soul could die, but after death it could became reborn into another various forms of living creatures. The real inner life of humans, the soul, would live eternally.

Henri-Louis Bergson, a famous French philosopher from the 20thcentury, claimed that life had three different kinds of aspects. Self-identity, Élan vital (vital impetus) and liberty. Bergson insisted especially the real meaning of life had been characterized by “unité multiple et multiplicité une,” “unity as something multiple and multiplicity something singular.”

The meaning of life in Daesoon Thought could be said to have three different characteristics, solidarity, earthly immortality and grievance-resolution. Some similarities can be found between certain western ontological meanings of life and those of Daesoon Thought. Namely, the qualities of eternity, reciprocity, and divinity.

Keywords: 생명; 불사; 상생; 신성; 자기동일성; 약동; 자유
Keywords: life; immortality; reciprocity; divinity; self-consciousness; élan; liberty

I. 머리말

이 글은 대순사상에 나타난 생명이 존재론적 관점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 살피려는 목적을 갖는다. 존재론(ontology)이란 있는 것들을 있게끔 만드는 그 ‘있음(τὸ ὄν)’1)이 무엇인지, ‘있는 것들’을 실현하는 그 가능 근거(raison d’être)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인간 사유의 한 분야이다. 존재론은 흔히 우주론(cosmology)이나 형이상학(metaphysics) 등과 겹쳐 이해되기도 하는데2),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세 분야는 조금씩 영역을 달리한다. 우주론이 대개 물리 현상이나 운행의 인과에 초점을 맞추는 고대 및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고,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면, 존재론은 생명을 포함한 존재와 존재자 일반의 관점에서 ‘있음’에 접근한다.

대순사상의 생명 철학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조망할 때 좀 더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대순사상이 포괄하는 생명의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현재적 생명뿐 아니라 신명계에 속하는 더 넓은 범위의 생명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의 생명은 분과과학(science)의 관점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대순사상의 생명은 존재론적 생명 철학의 거대 담론에서 접근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대순사상에서 생명은 살아있는 현재적 개체 존재자뿐 아니라 신명계의 여러 존재자들 역시 생명으로 간주된다.3) 또한 이러한 존재론적 접근은 대순사상의 사유 체계를 동아시아 관점을 넘어 세계사적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생명은 대순진리회 철학의 한 중추를 이룬다. 포원과 상극의 선천세계에서 해원을 통해 생명의 후천세계로 가는 개벽을 예정하는 대순사상에서 선천과 후천을 관통하는 천·지·인 삼계 생명성이 추기(樞機)이기 때문이다. 대순사상의 삼계 생명은 현재적 인간을 포함한 창생(蒼生)뿐 아니라 신성, 불, 보살, 귀와 신 등 모든 신명(神明)을 포괄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모든 존재자가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순사상은 생명 있는 존재자와 생명 없는 존재자를 명확히 구별하고 있다.4) 대순사상에서 생명 있는 존재자를 생명 있게끔 만드는 생명은 현재와 과거, 미래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시·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적 차원으로 확산한다.

시·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에서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생명이 어떤 위상으로 정립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고대부터 내려온 존재론적 난문(aporia)이었다. 생명과 존재자, 생명과 영원, 더 나아가 생명과 무한은 얼핏 양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oxymoron)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절대에 부딪혀 시·공간에 매어있다. 그런 생명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는가? 생명이 어떻게 죽음이라는 절대를 넘어 영원의 지평(sub specie aeternitatis)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고대 플라톤(Platon)부터 시작하여 20세기 베르그손(H. Bergson)에 이르기까지 생명 영속은 인류 염원의 하나로 면면히 내려왔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가? 죽음을 넘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 절대(絶對)인가?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에 죽음에 대한 절망과 영생에 대한 갈구가 원초적으로 드러난다. “아무도 죽음을 알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아무도 죽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비정한 죽음은 인간을 꺾어 버린다.”5) 죽음은 생명을 꺾어 버린다. 길가메시 이야기는 인류 문자 이전부터 죽음이 생명의 절대였음을 가늠하게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은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관문(關門)이었다. 죽음을 넘는다는 것은 신(神)의 세계, 영원과 영생에 들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올림포스 열두 신의 아버지 크로노스(Chronos)6)는 권력에서 쫓겨난다는 예언을 듣고,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차례로 삼키고 나중에 다시 토해낸다.7)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이미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은 인간의 몫이었다. 카뮈(A. Camus)는 그의 실존적 철학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인간 시지프에 대해 보고한다. 자기를 극복하려 하면서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지프를 신들은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도전하는 ‘죽음의 존재(l’être mort)’를 용납할 수 없었던 으뜸 제우스는 타나토스(Thanatos)를 파견한다. 엉뚱하게도 시지프는 타나토스를 결박한다. 그러자 인간들 사이에서 ‘죽음(la Mort)’이 사라졌다.8)

빅뱅(Big Bang) 이래로 죽음은 생명의 절대 한계였다. 그렇다면 선천 죽음에서 후천 생명으로 개벽하는 대순사상에서 생명은 어떻게 생명할 수 있는가? 대순사상의 생명은 어떻게 죽음을 넘어서는가? 이 말은 대순사상의 생명이 존재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과 상통한다. 이 글은 『전경』에 나타난 생명 위상을 서양 존재론 바탕 위에서 조망하려 한다. 우리는 플라톤과 베르그손으로 대표되는 서구 생명 존재론 위에 대순사상의 생명성이 자리할 수 있는지, 자리한다면 어떤 위상으로 자리하는지 살핀다.

Ⅱ. 서양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생명

1. 플라톤의 생명 철학

플라톤을 서양 철학의 가장 큰 원류로 뽑는 것은 비단 화이트헤드(A. Whitehead)만이 아닐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20세기 서양 사상의 거장답게 서양 철학 전체의 흐름을 예리하게 통찰한다. 저 유명한 말,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플라톤으로 흘러들어간다.’9)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서양 철학은 플라톤 사상에 대한 주석이나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철학을 보더라도 이미 후대에 나온 생명 사상들의 씨앗을 우리는 플라톤 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생명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Socrates)부터 이미 그 철학의 중심 문제였다. 플라톤이 평생 꿈꾸었던 것이 “최선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인”10)들의 세상을 어떻게 만들지 하는 문제였다.11) 플라톤은 시라쿠스 사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소개하면서 평생 가졌던 꿈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디온(Dion)의 생각을 빌어 “대충 짐작으로가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12)라고 썼다. 플라톤은 그 자신의 국가, 아테네뿐 아니라 당시 그리스 사회 전체를 인간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최선의 세계로 만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13)

플라톤의 생명 철학은 세계 개조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위상이 드러난다. 플라톤은 세상을 바꿀 주체를 인간으로 본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면 곧바로 나라의 공적 활동에 뛰어들겠노라.”14)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정치 참여를 플라톤은 정치적 상황 변화와 소크라테스의 부당한 죽음으로 인해 포기하고 만다. 결국, 그는 “올바르고 진실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15)이라고 생각하여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의 길을 택하게 된다. 플라톤에 있어 사회 개혁은 인간의 일이다.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핵심은 생명이다. 플라톤은 살아있는 인간을 변혁의 주체로 삼는다.

플라톤에 있어 변혁의 주체인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물음은 소크라테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 짓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물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16) 소크라테스의 이 물음은 그리스 인들의 세상을 넘어 인류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해답은 인간이 ‘혼(psychē)을 가진 몸(sōma)’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몸은 무덤(sōma sēma)’일 뿐이다. 몸은 혼을 가두는 굴레이고 혼을 묶는 사슬이다. 인간의 주인은 혼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혼으로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17) “혼과 몸이 한데 있을 때, 자연(physis)은 몸에 대해서는 복종하고 지배받도록 지시하되, 혼에 대해서는 지배하고 주인 노릇을 하도록”18)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혼(psychē)은 본래 ‘숨(breath)’을 뜻했다.19) “프시케는 우선 무엇보다도 숨, 즉 목숨을 뜻한다.”20) 그래서 숨은 생명, 즉 살아있음의 가장 생생한 징표이다. 추운 겨울, 호호 부는 입김은 마치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우리나라처럼 삼한사온이 분명한 그리스 반도에 살던 사람들도 생각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본래 ‘숨’, 그리고 ‘목숨’을 뜻했던 ‘프시케’는 더 나아가 ‘혼(魂)’을 뜻하는 의미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혼은 곧바로 삶과 생명을 의미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혼이 하는 일은 ‘삶(zōē)’이며, 그 일차적 기능도 ‘사는 것(to zēn)’”이기 때문이다.21) 비단 이런 사유의 전개는 고대 그리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인간의 인간다움은 몸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설화에도 혼이 몸과 구분된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22)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대계』에는 경북 청송에 전해 내려오는 “남자 코에서 나온 쥐”라는 채록 설화가 있다. 이 설화에서 바느질하는 아내가 옆에서 자던 남편 코에서 쥐가 나와서 그 쥐를 따라 갔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다시 남편 코로 들어가자 남편이 “아구 잘 잤다.”라며 기지개를 켜면서 “내가 오늘 꿈 하나 좋은 거 꿔 놨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23) 이와 비슷한 설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혼과 몸이 별개로 있으며, 우리의 주인이 혼이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혼이 인간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자면, 각각의 사물이나 인간 등 있는 것들을 그것이게끔 만드는 것은 그것의 고유한 기능(ergon)이다. 그리고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육신의 성장이나 감각이 아니라 이성(logos)이다. 이 이성적 기능도 ‘복종하는 이성’과 ‘사고하는 이성’으로 나뉘는데, 이 중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사고하는 이성’이다. 이 이성은 혼의 고유한 기능이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인간의 고유 기능은 ‘혼의 이성적 활동’이 된다.24)

이렇게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인간의 주인이 혼이라는 믿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혼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다시 말해, 혼의 어떤 특징들이 혼을 인간의 주인으로 만드는가?

플라톤은 혼의 일차적 특징으로 죽지 않음(athanatos)을 제시한다. 혼은 죽거나 사멸하지 않는 존재, 즉 불사(不死)의 존재이다. 인간의 몸이 죽더라도 혼은 죽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혼이 있다는 것은 사실”25)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죽은 후, “이승에서 저승에 도착한 혼들이 거기에 있다가, 다시 이리로 와서는 죽은 자들에게서 다시 태어난다.”26)고 주장한다.27) 플라톤에 있어 혼은 “그 어떤 나쁜 것에 의해서도, 그것이 그 특유의 것이든 또는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든 간에, 파멸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aei on)’임이 명백하(고) 그것이 언제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죽지 않는”28)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혼의 둘째 특징은 상생(reciprocity)한다는 점이다. 죽음은 생성 소멸의 원인이다. “모든 대립되는 것은 대립되는 것들에서 생성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29) 삶과 죽음이 대립되는 한, 삶에서 죽음이 생기고 죽음에서 삶이 생긴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대립되는 것들은 생성과 소멸의 인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일방통행만 가능하고 그 역방향이 가능하지 않다면 새로운 삶의 탄생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쪽 것에서 이에 대립되는 것으로의 생성이 오로지 직선적인 것이기만 하여, 다른 쪽 것으로 거꾸로 되돌지 않고 반전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마침내 똑같은 꼴이 될 것이며 똑같은 처지를 겪게 되고 생성되는 것도 그치게 될 것”30)이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길이 없다면 궁극적으로 죽음만 있게 되고 생명은 사라진다. 그래서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탄생이 필연적이다. 혼은 불멸하는 것이기에 생성과 소멸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영원하다.

플라톤이 보는 혼의 셋째 특징은 신성(deity)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theos)’이나 ‘신적(theios)’이라는 말은 독특한 용법을 갖는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 이상의 것(more than human)’을 뜻한다.31) 위에서 살핀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은 죽음의 존재였다. 죽음은 인간과 신을 구분하는 추기(樞機)였다. 신적인 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것, 인간 이상의 것, 즉 불사의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신적’이라는 말의 쓰임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적’이라는 단어를 주어가 아니라 술어로 썼다. 즉 ‘신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은 신이다.’는 용법으로 사용했다. ‘신은 구름이다.’, ‘신은 무지개이다.’가 아니라 ‘구름은 신이다.’ 혹은 ‘무지개는 신이다.’라고 썼다. 즉 ‘신(theos)’은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속성(attribute)이었다. 이 속성의 의미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이었다. 플라톤은 “혼이 신적이며 사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과 동류의 것”이라고 못 박는다.32)

플라톤은 이런 생명의 본 모습은 결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몸이 혼의 무덤이기에, 혼은 몸에 갇혀 그 본 모습을 알기가 어렵다. 이는 바다의 신(海神) 글라우코스(Glaukos)의 모습과 같다. 그의 옛날 모습은 “풍랑으로 인해 일부는 부러지고 일부는 박살 나 완전히 훼손된 때문이며, 또한 다른 것들이, 즉 따개비와 해초, 그리고 돌들이 그에게 덧붙어 자라기 때문”33)이다. 우리는 그 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생명의 이데아(Idea), 곧 형상(形相)인 혼도 그러하다. 살아있는 생명은 혼을 감추고 있어 그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든다.

서양 생명 철학의 길을 열어 놓은 플라톤에 있어서 생명의 본질은 혼이다. 이는 혼의 특징이 곧 생명의 특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신(theos)과 생명의 형상 자체, 그리고 그 밖에 죽지 않는 다른 것이 있다면, 이것이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에게서 동의를 얻게 될 것”34)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플라톤의 생명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맥맥히 이어져 온다.

2. 베르그손 관점에서 본 생명

20세기 생명 철학자 베르그손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그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에 있어 낙관론을 표방하는 거의 유일한 시간성의 철학”35)이기 때문이다. 김진성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 말은 서양 철학사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서양 형이상학은 크게 존재(存在) 형이상학과 운동(運動) 형이상학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를 대표하는 사람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이다. 그는 ‘있는 것은 오직 존재뿐이고, 운동은 없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엘레아(Elea) 사람이었던 파르메니데스는 이 주장을 통해 전 우주가 존재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는 전 우주에서 ‘생성과 소멸을 완전히 제거하여 있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생겨나거나 소멸하지 않고 다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여겨질 뿐’이라고 믿게 하려 하였다.36)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하고 부동(不動)만 있다고 하였다.

존재 형이상학은 시간조차 부동으로 해석하려 한다. 시간은 흐름이나 운동, 즉 ‘지속(durée)’이 아니라 ‘공간화된 직선(ligne spatialisée)’일뿐이다. 존재의 형이상학은 시간을 “텅 빈 동질적 공간(l’espace vide et homogène)’으로 환원해버린다.37) 즉 시간을 공간화하여 운동을 사상(捨象)한다. 이런 존재의 형이상학에서 시간이 설 자리는 없다.

반면, 움직임과 역동(力動)을 강조하는 운동 형이상학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로부터 출발한다. 흔히 ‘판타 레이(panta rei)’라고 알려진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설은 부정확하지만 그의 사상의 핵심을 표현한다. 우주 전체를 대립과 변화의 관점에서 본 헤라클레이토스는 “차가운 것들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가워진다.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게 된다.”38)는 말로 대표된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나아가고 어떤 것도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39)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같은 것이란 변화하는 것이다. “동일한 것 …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 있는 것과 잠든 것, 젊은 것과 늙은 것. 왜냐하면 이것들이 변화하면 저것들이고, 저것들이 다시 변화하면 이것들이기 때문에.”40)

운동 형이상학은 우주를 움직임과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이 세계관은 시간이 움직임과 변화의 중추라고 믿는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시간 아래에, 즉 ‘지속 아래에(sub specie durationis)’ 서 있다.

대개 서양 형이상학은 이 두 세계관의 각축으로 이해된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존재 형이상학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공간화한다. 생명은 물질이나 수에 덧붙은 사멸하는 우연적 사건일 뿐이다. 생명의 가치는 물리적 가치에 종속한다. 역사적으로, 물질만능주의의 사고에는 존재 형이상학의 세계관이 깔려 있다.

반면, 운동 형이상학은 생명을 시간과 병치(juxtaposer)한다. 생명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변화하며 움직인다. 생명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이 일차원인 것처럼, 생명도 일차원이다. 오직 앞을 보고 달릴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운동 형이상학에서 생명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운동 형이상학은 생명의 움직임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존재 형이상학보다 더 정확했지만, 그 종점을 죽음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비관적이다. 생명은 끊임 없이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마치 시냇물이 강물을 거쳐 깊은 죽음의 바다에 빠져 버리듯이 … . 이런 면에서 서구의 주류 형이상학들은 모두 생명의 생명다움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베르그손은 이런 서양 주류 형이상학들의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생명 형이상학을 변증적으로 포월(抱越)한다.41) 베르그손에 따르면, 생명은 생명을 무화(無化, néantiser)하려는 무(無)를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만들어 나가는 힘이다. 이런 점에서 베르그손의 생명의 결정적 특징은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이다.

베르그손의 생명론(théorie de la vie)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베르그손에 따르면, 진짜 시간(temps réel)은 생각이나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42)이다. 생각이나 판단, 즉 지성(intelligence)은 시간을 대상화하고 공간화하여 그 본성인 지속(durée)을 사상해 버리기 때문이다. 공간화되지 않은 참된 시간은 그 스스로 타자(l’autre)에 대해 자기동일성(identité soi même)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그 어떤 무엇인가의 존재근거(raison d’être)이다. 일반적으로, 존재가 타자에 대해 갖는 자기 동일성의 성립은 무(néant)를 통해 구획된다고 생각되어 왔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건널 수도 없고 메울 수도 없는 무(無)가 간섭한다는 것이 존재 형이상학의 전제였다.43) 이들은 존재 동일성과 정체성을 동질(同質, homogèneité)에서 찾는다. 이 동질은 시간과 무관하다. 만약 시간이 개입한다면 동질이 파괴된다. 시간은 변화를 야기하고 변화는 동질에 모순되기 때문이다.44) 존재 형이상학이 보는 동질은 시간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무시간적이고 초월(超越)적이다. 이 동질은 움직임과 변화, 운동을 부정한다. 존재 형이상학에서 꿈꾸는 궁극 세계는 움직임과 변화가 없는 세계, 즉 ‘죽음’의 세계이다.

베르그손은 생명이 자기동일성(identité)과 자기정체성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자기동일성과 자기정체성은 생명의 두 가지 근원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생명의 자기동일성은 물질의 자기동일성과 같지 않다고 본다. 물질과 공간을 우주의 근본으로 삼는 존재 형이상학이 자기동일성의 근거를 동질에서 찾는 것을 비판하며, 베르그손은 생명의 자기동일성의 근거를 이질(異質, hétérogénéité)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이질은 동질에 무가 개입한 존재론적 이질이 아니다. 존재 형이상학에서 보는 이질은 동질의 병치일 뿐이다. 베르그손은 이런 이질은 참된 이질이 아니라고 본다. ‘구획된 다수(multiplicité distincte)’는 오직 공간 안에서만 가능하다.45) 한 점은 오직 다른 한 점과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공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질이 아니다.

베르그손은 생명의 자기동일성을 “다수이면서 하나이자 동시에 하나인 다수(unité multiple et multiplicité une)”46)라고 본다. 이 ‘다수이면서 하나이자 동시에 하나인 다수’야 말로 생명의 진수이다. 이는 존재 형이상학에서 보았을 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기동일성이다. 어떻게 하나이면서 또한 동시에 여럿일 수 있는지, 존재론적 논리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이런 동일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고 본다. 이런 동일성은 “서로서로 파고드는 각각(termes)이 뒤엉키는 다수”47)가 보여주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라고도 말하기도 어렵고 여럿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런 ‘다수이면서 하나’는 물리적, 수학적, 논리적 세계관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납득 불가능이 존재 형이상학의 한계이다. ‘다수이면서 하나이자 동시에 하나인 다수’는 오직 생명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하나’인가? 나는 지금 자판을 두드리면서 동시에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또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무엇을 썼는지 기억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 쓰는 나와 고민하는 나, 기억하는 나는 하나인가? 읽으면서 비판하는 나는 동일한가? 아무리 봐도 내 안에는 둘 이상의 내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둘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내가 정말 둘인가? 서로 다른 내가 내 안에 있다고 한다면 참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하나인가?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이 다른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하나라고도, 또 여럿이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베르그손은 이런 특징이야말로 인간의 특징이며 더 나아가 생명 일반의 특징이라고 말한다.48) 우리는 하나이지만, 또한 동시에 여럿이고, 여럿이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이다.

베르그손은 생명의 둘째 특징을 ‘약동(élan)’에서 찾는다. 생명은 약동한다. 약동(躍動)은 날아올라 뛰어 넘는 것이다. 약동은 시간을 넘어서면서 시간에 매어있다. 베르그손은 이런 생명의 약동이 창조(création)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끊임 없이 자신을 무화(無化)하려는 무(無)를 헤치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미래로 나아간다.49) 생명은 약동한다. 베르그손은 이 생명의 약동은 섭취된 ‘양분(nurroture)’을 통해 그 추동력을 얻는다고 한다.50) 그러나 생명은 물리적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약동하는 생명은 “심리적 질서에 속하며 모호한 다수성을 상호침투하는 각각의 것으로 감싸는 것이 심적인 것의 본질”51)이다.

베르그손에 있어 생명의 셋째 특징은 근원적 창조 혹은 자유의 욕구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르그손에 있어서 생명은 ‘자유(liberté)’를 그 본성으로 한다.52) 생명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이는 생명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 없이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은, 인간을 통하여, 커다란 강에서 작은 물줄기로 나뉘는 흐름과 같다. 이 흐름을 통해 생명은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고립되지 않는다. 생명은 모두 함께 연대해 있으며(solidaire tout entiere), 모든 생명은 가장 미천한 것에서 가장 고귀한 것까지, 생명의 출발부터 우리가 사는 오늘날까지, 함께 이어져 있다. 이 생명의 추동력은 놀랍다. 생명은, 전체에서 보자면, 어떤 저항이나 방해, 심지어는 “죽음(la mort)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천군만마와 같다.53)

그렇다면 이런 ‘다수이면서 하나이자 동시에 하나인 다수’인 생명을 생명이게끔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베르그손은 이를 의식(conscience)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적확한 용어가 아니다. 딱 들어맞는 용어를 찾지 못한 베르그손은 이를 차라리 ‘초의식(supraconscience)’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런 생명의 본질인 의식 혹은 초의식은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이는 불꽃(fusée)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폭죽처럼 생명은 우주의 어둠을 밝힌다.54) 이 의식은 창조를 욕망한다. 이 의식은 오직 창조가 가능한 곳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55) 의식은 발명이자 자유이다. 이들은 동의어이다.56) 베르그손은 생명을 또 다르게 혼(l’âme)이라고 부른다.57) 베르그손은 이 혼의 핵심 기능을 ‘직관(intuition)’에서 찾는다. 직관은 ‘정신 그 자체(l’esprit même)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 그 자체(la vie même)’이다.58)

Ⅲ. 대순사상에 나타난 생명 위상

대순사상에서 생명은 선천과 후천 세계를 관통하는 추기(樞機)이다. 대순사상은 이런 면에서 생명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생명은 비단 인간 존재뿐 아니라 천·지·인 삼계를 두루 관통하는 삼계 생명과 신명계를 모두 포괄하는 우주적 개념이다.59)

대순사상에는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든 시간과 공간만큼 소중하다고 보는 것이 대순사상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대순사상의 생명 철학은 생명의 연대성(solidarity)을 중시한다. 상제는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 기운이 막힌다.”60)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각 개인이 천지기운을 좌우할 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말씀이다. 대순사상의 인간관은 존엄한 존재로서 인간이 서로 연대(連帶)한다는 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김학택은 대순사상의 인간을 전체 세계, 더 나아가 전 우주와 연관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존재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 전체에 연관지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계와 신명계도 그러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61)라고 보았다. 김학택은 대상에 대한 온전한 인식 기능인 ‘직관(intuition)’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직관은 서구 존재론에서 ‘설명(explanation)’이나 ‘해석(interpretation)’과 대비되는 인간 인식 기능을 뜻한다. 설명은 의미론(semantics)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상(object)에 대한 속성(attribute)의 열거라고 말할 수 있다. 설명은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성질이나 특성을 다른 성질이나 특성으로 치환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명을 통해서는 결코 대상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게 직관론자들의 주장이다.

해석은 설명과 다르지만 여전히 대상을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직관론자들의 주장이다. 해석은 대상에 대해 대상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화용론(pragmatics)적 관점에서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대상에 대한 온전한 파악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직관론자들의 주장이다. 직관론자들은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파악하는 방법은 ‘무매개적으로(non-inter-mediatedly)’ 대상에 다가서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상제는 이런 직관 인식을 마음의 소여(所與)로 파악한다. 마음은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다.

이제 범사에 성공이 없음은 한마음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한마음만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슨 일을 대하든지 한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할 것이로다. 안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62)

대순사상은 마음이 직관을 통해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고 파악한다고 본다. 마음의 힘은 매우 크다. 마음은 만물을 좌지우지한다.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 낙언(鄭樂彦)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63)라는 『전경』의 말씀은 마음이 어떤 기능과 능력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준다.

대순사상은 이런 마음을 가진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후천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대순사상은 이런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을 ‘지상신선’이라고 부른다.64) 후천의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인 지상신선은 온전하고 완전하며 불로불사하는 현세적 인간이다. 대순사상에서 지상신선은 신·인격적 존재이다. 지상신선은 신격(神格)과 인격(人格)을 함께 지닌 존재이다.65)

대순사상에서 지상신선은 궁극적 인간상이다. 이 지상신선의 첫째 특징은 불사의 존재라는 점이다. 『전경』은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66)을 말한다. 대순사상은 인간이 도통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삼라만상의 모든 것에 통달하고 모르는 것이 없으며 무소불능의 경지”에 이른다고 본다. 일단 그 경지에 도달하면 “번뇌가 있을 수 없으며 불로불사는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67)

불사의 존재는 영원의 존재이다. 생겨나고 사라짐에서 벗어나 지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핀 것처럼, 영원(eternity)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움직임이 멈추어 정지된 상태의 영원이다. 이는 움직임과 변화, 생성소멸이 물리적으로 멈춘 상태로서 시간에 매어 있다. 이는 물리적, 자연 세계의 영원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참된 의미에서의 영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리적 존재도 시간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 영원은 시간에 지배되어 조금씩 사라진다.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넘어서는 자연 존재는 없다.

영원의 두 번째 의미는 생명의 영원이다.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대로, 다수이자 하나인, 하나이자 다수인 존재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자가 체험하는 영원이다. 플라톤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68)

죽기 마련인 생물들과 불사의 생명체들을 받아 이처럼 가득 차게 된 이 우주(cosmos)는 눈에 보이는 생명체들을 에워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것이며,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의 모상(eikōn)이요, 지각될 수 있는 신이고 가장 위대하고 최선의 것이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으로 탄생된 것이 이 유일한 종류의 것인 하나의 천구(ouranos)입니다.

대순사상이 보는 지상신선의 영원은 불사하는 생명의 영원이다. 대순사상은 이를 죽은 물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누릴 수 있는 선경의 낙이라고 칭한다. 대순사상에 있어 지상신선은 “현실에서 확인되지 않은 공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확인 가능한 구체적 모습의 인간임을 지향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69) 대순사상의 지상신선은 완전한 생명의 신인성을 대표한다. 지상신선은 완전하고 온전한 우주적 생명을 대표하는 대순사상의 표현방식이다.

대순사상의 지상신선은 이런 면에서 당연히, 생명 존재이다. 전통적 의미에서 지상선(地上仙), 혹은 지상신선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근심 없이 생활하며 항상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매우 소극적 의미에 머물러 있었다.70) 그러나 대순사상의 지상신선은 이런 소극적이고 현실 안주적 범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대순사상의 지상신선은 선경의 주인이다.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을 건지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전경』은 증산의 후천세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71)

대순사상은 생명 존엄을 강조한다. 『전경』은 인간의 생명은 선이나 악과 상관 없이 모두 존엄하다는 것을 보인다. 악하고 불량한 사람들의 생명조차 존엄하고 귀중하다는 것을 『전경』은 여러 곳에서 말한다.

장 성원(張成遠)은 대흥리에 살면서 주막을 업으로 삼는 자인데 그의 아기가 낮에 잘 있다가도 밤이 되면 신열과 해소로 잠을 자지 못하고 몇 달을 보냈도다. 성원이 아기를 안고서 상제를 뵙고 치료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불쌍히 여겨 아기를 보시고 성원에게 「비별(飛鼈)이니 낮이면 나와 놀고 밤이면 들어와 자니라. 불가불 다른 곳으로 옮겨야 나을 것인바 산으로 옮기려 하나 금수도 또한 생명이요 바다로 옮기려 하나 어류도 또한 생명이니 부득이 전선으로 옮겨야 하리라. 전선 두어 자를 구하여 와서 그것을 앓는 아기의 머리 위에 놓았다가 전주 밑에 버리라」고 이르시니라. 성원이 명하신 대로 시행하니 아기는 밤에 잠자기 시작하고 얼마 후에 신열과 해솟병에서 제생되었도다.72)

인간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비별을 옮겨야 한다. 비별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것 역시 생명인 바, 병의 원인이 되는 생명이다. 상제는 비별을 죽여 없애는 방법보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한다. 비별 역시 낮에는 나와 놀고 밤이면 들어가 자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살리면서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상제는 고민한다. 산으로 옮기려 하니 금수 또한 생명이라 금수가 병에 걸릴 수 있다. 바다로 옮기려 하니 물고기들 또한 생명이라 물고기가 병에 걸릴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곳으로 비별을 보낼 수 없다. 상제는 부득이 무생물에 비별을 보낸다. 전깃줄 한 토막을 구해 그 전깃줄에 비별을 살게 한다. 이렇게 하면 어떤 생명도 다치지 않고 모두 살아갈 수 있다. 대순사상이 보는 생명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대순사상은 선천 세계의 원한이 해원을 통해 후천의 상생적 생명 세계로 이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경』은 말한다.73)

박 순여가 왼쪽 다리에 부종이 생겨 다리가 큰 기둥과 같이 부어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상제께 간청하니라. 상제께서 자현에게 「순여의 병을 다스려 살게 함이 옳으냐. 또는 그대로 두어 죽게 함이 옳으냐. 네 말 한 마디에 달렸느니라」고 물으시기에 자현이 조금 주저하다가 「살려주심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니 가라사대 「박 순여는 불량한 사람이니라. 너에게 매우 무례하였으니 너와 함께 가서 치료하리라」 하시고 자현을 앞세우고 순여의 집에 가시니라. 상제께서 손수 부운 다리를 주물러 내리시며 백탕 한 그릇을 마시게 하시는도다. 원래 순여는 나이가 자현보다 많다 하여 항상 자현을 무례하게 대하여 왔느니라. 자현은 입 밖에 내지 않으나 속으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기에 상제께서 이것을 아시고 자현에게 물으신 것이었도다. 순여는 그 후에 부기가 내려 걸어 다니게 되었도다.

박순여는 불량한 사람이었다. 자현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항상 자현을 무례하게 대해왔다. 자현은 차마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였으나 이에 대해 늘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순여가 병이 들었다. 『전경』에는 그런 자현을 상제가 시험하는 장면을 보인다. 순여를 살게 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 죽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자현에게 묻는다.

자현은 주저한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순여의 생사가 결정된다. 마음 같아서는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만 차마 미움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자현은 생각한다. 원(冤)은 풀어야 한다.

이에 상제는 자현을 앞세우고 순여의 집으로 향한다. 자현과 순여의 묵은 원한을 해원(解冤)하고자 하는 상제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생명은 해원을 통해 한층 더 고양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대순사상이다.

대순사상에서 해원은 선천의 죽음에서 상생의 생명 세계로 인도한다. 해원을 통해 생명은 고립된 개별(個別)에서 벗어나 우주적 전일(全一)로 나아갈 수 있다. 『전경』은 다음을 전한다.

또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 하셨도다.74)

해원은 생명이 개별을 극복하고 전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해원상생의 길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해원은 생명에 허여된 생명 포월의 방법이다. 『전경』은 금수를 비롯한 동물 생명들도 해원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한다.

상제께서 대원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시니 대원사 골짜기에 각색의 새와 각종의 짐승이 갑자기 모여들어 반기면서 무엇을 애원하는 듯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 무리들도 후천 해원을 구하려 함인가」 하시니 금수들이 알아들은 듯이 머리를 숙이는도다. 상제께서 「알았으니 물러들 가 있거라」고 타이르시니 수많은 금수들이 그 이르심을 좇는도다.75)

해원은 대순사상에서 강조하는 상생의 조건이자 관문이다. 해원을 통해 개체는 전체로, 죽음은 영생으로, 인간은 신선으로 포월할 수 있다.

Ⅳ. 대순사상 생명 철학의 존재론적 함의

대순사상은 근본적으로 생명을 인간을 포함하여 삼계 생명과 신명계를 포괄하는 우주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서양 존재론적 철학에 있어 우주적 생명 개념은 고대 그리스 이후 몇 가지 차별적 특징을 지니고 나타난다. 이러한 서양 존재론적 생명 철학의 특징에 대순사상의 생명 철학을 조회해 본다면 우리는 대순사상 생명 철학의 존재론적 함의를 가늠할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서양 존재론적 생명 철학의 일반적 특징은 ‘죽음’을 인간과 신의 경계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mortal) 인간과 결코 죽을 수 없는(immortal) 신의 경계는 서양 존재론 철학을 관통하는 대강(大綱)이다. 신은 죽음을 겪지 못한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그의 자식들을 자신의 뱃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고, 신들의 여왕 헤라조차 인간 여인에게서 태어난 제우스의 자식을 죽일 수 없었다. 신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그 존재는 불사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철학에서도 혼(魂)은 불사의 존재이다. 플라톤은 혼의 불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에 혼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삶 속으로 들어와 태어나는 것이 죽음(thanatos)과 죽어 있는 상태(technanai)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태어나는 게 아님이 필연적이라면, 혼은 어쨌든 다시 태어나야만 할진대, 어찌 죽은 뒤에도 혼이 있는게 필연적이지 않겠는가.76)

베르그손 철학에서 생명은 ‘다수적 일자((unité multiple), 일자적 다수(multiplicité une)’로 존재하는 영원함이 특징이다. 베르그손에 있어 개체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개체를 관통하는 생명은 지속한다.

대순사상은 후천세계 존재들의 불멸(不滅)과 불사(不死)를 말한다. 이미 앞에서 밝힌 것처럼, 대순사상이 말하는 이상적 인간인 지상신선은 불멸의 존재, 불사의 존재이다. 인간 한계를 넘어선 영원의 존재로서 지상신선은 후천 세계 생명을 대변한다. 개체 생명의 한계인 죽음을 넘어서는 것을 서양 존재론뿐 아니라 대순사상도 궁극적 인간 특징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불사와 불멸은 또한 영원을 담보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참된 영원은 시간 안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플라톤에 있어 참된 영원은 ‘동일성의 운동(phora tēs tautou physeōs)’77)을 특징으로 한다. 동일성의 운동은 변화하면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함을 특징으로 한다. 자기 동일성을 부동(不動)과 불변(不變)으로 이해하는 존재 형이상학과 달리, 운동 형이상학은 자기동일성이 운동(運動)과 변화(變化)를 통해 유지된다고 본다. 움직임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대표가 생명이다. 물질이나 물체는 움직임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파괴한다. 물체에 있어서 시간과 운동은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와 반대로 생명은 물체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생명은 시간과 운동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플라톤에 있어 인간 생명인 혼은 영원한 운동을 한다. 플라톤은 “혼의 전체 구조가 그것을 구성한 이의 뜻대로 이루어졌을 때, 혼은 … 자신 안에서 스스로 회전하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슬기로운 삶의 성스런 시작을 보게 되었”78)다고 보기 때문이다. 베르그손도 참된 영원은 부동성이 아니라 운동을 특징으로 한다고 본다. 베르그손에 있어 참된 영원(sub specie aeternitatis)은 참된 시간, 베르그손의 표현에 따르자면, ‘지속(durée)의 관점(sub specie durationis)’에서 성립한다.

대순사상은 영원한 생명이 운동과 변화, 움직임을 특징으로 한다고 본다. 영원한 생명은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79) 것이다. 낙을 누리는 것은 살아 있음의 특징이다. 죽어 움직이지 못하는 부동(不動)은 낙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순사상의 생명철학은 서양의 존재 형이상학이 아니라 운동 형이상학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상신선의 삶은, 플라톤의 말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슬기로운 삶의 성스러운 시작’을 뜻한다.

대순사상이 바라보는 이상적 생명은 또한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이다. 대순사상의 지상신선은 그 말 그대로, 신인격적(神人格的) 존재이다. 인간 특징과 신 특징을 동시에 지니는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고,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존재를 뜻한다. 대순사상의 신성은 서양 존재론이 보는 신성의 특징과 일치한다. 대순사상의 생명 철학은 후천에서는 “사람마다 불로불사하여 장생을”80) 얻는다고 본다.

서양에서 신성의 두드러진 특징은 불사와 불멸이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부터 출발하여 플라톤을 거쳐 현대 베르그손에 이르기까지, 불사와 불멸은 신성의 단초이자 상징이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은 넥타르(nectar)를 마시고 암브로시아(ambrosia)를 먹는다. 그리스 어 넥타르는 ‘죽음(necro)을 물리침(tar)’을 뜻하고, 암브로시아는 ‘죽지 않음(anti-mortal)을 뜻한다. 그리스 신들의 삶은 죽음을 물리치는 술과 불사를 약속하는 음식을 통해 지속된다.

대순사상은 후천세계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후천에는 “사람마다 불로불사하여 장생을 얻으며 궤합을 열면 옷과 밥이 나오며 만국이 화평하여 시기 질투와 전쟁이 끊어지리라.”81) 이뿐만 아니라, “후천에서는 종자를 한 번 심으면 해마다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추수하게 되고 땅도 가꾸지 않아도 옥토가”82) 된다. 대순사상은 후천의 삶이 먹고 마시고 입을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 세계라고 본다.

대순사상의 생명이 서양 존재론적 생명과 온전하게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문제될 수 있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또 다른 논제이다. 대순사상과 서양 존재론적 철학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것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넘어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따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더욱 많은 시간과 자료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논의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동서양 생명 철학의 차이보다는 그 공통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좀 더 깊은 탐구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운동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참된 존재는 생명이고 생명은 죽지 않는 영원한 신적 존재이다. 이런 생명 관점은 고대 그리스 신화부터 시작하여 플라톤, 베르그손 등 서양 사상 곳곳에 나타난다. 플라톤은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본질이 몸이 아니라 혼이라고 단정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혼이라고 보았다. 이런 전통은 중세를 거쳐 근대, 더 나아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다. 대순사상의 생명 철학 또한 생명을 움직이지 않는 정지와 부동으로 보지 않는다. 대순사상의 생명은 살아 움직임이요, 활동하는 생명이다. 이는 서양 운동 형이상학의 생명 관점과 상통하는 면이다.

Ⅴ.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대순사상에 나타난 생명이 존재론적 관점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는지 살펴보았다. 존재론이란 있는 것들을 있게끔 만드는 그 ‘있음’이 무엇인지, ‘있는 것들’을 실현하는 그 가능 근거(raison d’être)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인간 사유의 한 분야를 말한다.

생명은 대순사상의 추기이다. 대순사상의 생명은 현재적 인간을 포함한 창생(蒼生)뿐 아니라 신성, 불, 보살, 귀와 신 등 모든 신명(神明)을 포괄하며 현재와 과거, 미래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시·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적 차원으로 확산한다.

빅뱅(Big Bang) 이래로 죽음은 생명의 절대 한계였다. 그렇다면 선천 죽음에서 후천 생명으로 개벽하는 대순사상에서 생명은 어떻게 생명할 수 있는가? 대순사상의 생명은 어떻게 죽음을 넘어서는가? 우리는 플라톤과 베르그손으로 대표되는 서구 생명 존재론 위에 대순사상의 생명성 운동 형이상학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적 생명 개념과 상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고대 존재론의 시초인 플라톤에 있어서 인간은 ‘혼(psychē)을 가진 몸(sōma)’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몸은 무덤(sōma sēma)’일 뿐이다. 몸은 혼을 가두는 굴레이고 혼을 묶는 사슬이다. 인간의 주인은 혼이라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었다. 플라톤에 있어서 혼은 영원한 불사의 존재이고 그런 면에서 신적이었다. 그리스어에서 신이란 영원을 뜻하는 다른 단어였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혼에 대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 서양 형이상학과 현대 생명철학의 대표인 베르그손에게 이어진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생명은 생명을 무화(無化, néantiser)하려는 무(無)를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만들어 나가는 힘이다. 베르그손의 생명은 ‘일자이면서 다수이고 다수이면서 일자’인 다수적 단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베르그손의 생명은 개체로서는 죽음을 넘지 못하지만, 우주를 관통하는 전체 생명인 생명 그 자체는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대순사상은 선천의 가사적(可死的) 생명이 해원을 통해 후천의 영원한 생명으로 개벽한다고 본다. 대순사상이 보는 후천 생명의 대표인 지상신선은 이런 대순사상적 생명성을 잘 보여준다. 지상신선은 불사의 존재이고 영원을 특징으로 하지만 존재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부동성은 부정한다. 지상신선은 활동하는 생명 존재이다.

우리는 이런 대순사상의 생명성이 서구 존재론적 관점에서 운동 형이상학의 생명성과 일치하는 면이 있음을 밝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순사상의 생명철학을 좀 더 넓은 역사적, 사상적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Notes

이제부터 이 글에 나오는 희랍어는 변환 규칙에 의거하여 로마자로 표기한다. ‘τὸ ὄν’을 로마자로 바꾸면 ‘to on’이 된다. ‘토 온’으로 읽는다.

존재론, 우주론, 형이상학 등의 용어는 서양 철학의 기본용어로 사용된다. 실제로 이 각각의 용어는 사용자에 따라 광범위한 언어 지시적 스펙트럼(denotative linguistic spectra)을 갖는다. ‘존재론(Ontology)’이라는 말은 매킨타이어(A. MacIntyre)에 따르면(“Ontology”, P. Edwards, ed.,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cmillan Publishing: London, 1967), 1636년에 고클레니우스(R. Goclenius)에 의해 최초로 쓰인 것으로 기록되지만, 실제로 이 용어는 그 의미에 있어 이미 그 전부터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사용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이 말을 캘로비우스(A. Calovius)처럼, 형이상학과 호환 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를 형이상학의 하위 영역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형이상학의 하위 영역으로 존재론 외에 우주론(Cosmology)을 놓기도 하는데, 이때 우주론은 당연히 존재론과 구분하여 사용된다. 이 용어는 특히 서구 독일 근대 철학에서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볼프(C. Wolff)나 칸트(I. Kant), 하이데거(M. Heidegger), 21세기 미국 철학자 콰인(W. Quine) 등에서 특히 조명을 받았다. 이 각각의 철학자들이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이 논문의 영역 밖이다. 이 글에서는 이 용어를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 하버마스(J. Habermas) 등이 다루었던 화용론(pragmatics)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반면, ‘형이상학(Metaphysics)’의 어원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말의 어원이 “자연(physica)을 넘어서(meta-), 혹은 자연의 뒤에”라는 희랍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작을 모아 최초로 편집했던 안드로니코스(Andronicos)이며 정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제1철학, 혹은 으뜸철학(prōtē philosophia)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서양 철학사에서 제1철학, 혹은 으뜸 철학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이어져 이를 제대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학문을 이룰 만큼 규모가 방대하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는, 거의 무정의 용어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용어는 그 포함 범위가 지나치게 모호하기에, 이 논문에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 피했다.

우주론(Cosmology)이라는 용어 또한 광범위한 언어 지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크게 철학과 과학의 양 분야에서 사용된다. 머니쯔(M. Munitz)에 따르면(같은 책, cosmology항),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볼프는 형이상학 아래에 존재론(ontology)과 신학(theology), 그리고 심리학(psychology)을 형이상학의 하위 영역으로 구분하고 이와 다른 하위 영역으로 우주론을 배치하였다. 우주론은 볼프에 있어 다른 철학 분야와 구별되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후 칸트, 테일러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 용어는 다채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이들 용어가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세분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용어에 매인다면 논의의 핵심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최치봉, 「대순사상의 생명관과 인생관」, 『대순사상논총』 33 (2019), pp.319-349 참조.

대표적으로 『전경』 제생 31절에는 “금수도 또한 생명이요 바다로 옮기려 하나 어류도 또한 생명이니 부득이 전선으로 옮겨야 하리라.”고 하여 생명 존재와 비생명 존재의 구분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최치봉, 앞의 글, p.330 참조.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서울: 휴머니스트, 2005), p.369, 길가메시는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에 절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원한 삶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실패한다.

크로노스는 ‘시간(chrono)’을 뜻한다. 시간 앞에 영원한 강자는 없다. 시간은 자신이 낳은 자식에 의해 퇴출된다. 시간은 ‘지금’이다. 그리스 신화는 우주의 근원, 우라노스가 대지, 즉 땅과 결합하여 세상을 만들어 냈다고 전한다. 시간은 미래를 낳지만, 미래에 의해 사라진다. 지금을 몰아내는 것은 미래다.

아폴로도로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천병희 옮김 (고양: 숲, 2004), pp.20-22.

타나토스는 죽음의 신이다. 이는 오늘날 ‘죽음학(thanatology)’, ‘안락사(euthanasia)’, ‘죽음 공포(thanatophobia)’, ‘죽음 감성학(thanatosensitivity)’, ‘죽음 위장(thanatosis)’ 등의 용어에 그 흔적을 남겼다. 본래 타나토스는 로마에서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타나토스에 해당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랜트와 헤이즐은 “지혜가 뛰어난 시시포스는 교묘히 타나토스를 속여 그를 결박한 뒤 토굴에 감금했다. 이 때문에 인간이 죽지 않게 되었다.”라고 보고했다. 그랜트·헤이즐, 『그리스·로마 신화사전』, 김진욱 옮김 (서울: 범우사, 1993), p.153.

Whitehead, A., Process and Reality (Free Press, 1978), p.39; 박종현, 『적도 또는 중용의 사상』 (고양: 서광사, 2022), p.29. 이 말은 본래 “유럽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가장 안전한 전반적인 특징적 규정은 그것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脚註)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는 문장을 쉽게 푼 것이다. 사실 화이트헤드의 본문보다 쉽게 푼 이 이야기가 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플라톤, 『편지들』, 강철웅 외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10), p.83.

이 말이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직 잘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대화편 외에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편지(epistolai)」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뢰할 만한 편지인 일곱 번째 편지의 핵심이다. 이 편지에서 플라톤은 “다른 대화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신의 철학에 대한 깊은 속내를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p.45; 플라톤 철학에 대한 전반적 조망점(樞機)으로 위 문장이 기능한다.

같은 책, p.45.

플라톤의 관심이 실천적이었다는 해석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종래에는 플라톤을 이상주의자로 보는 견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플라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꿈꾸었던 것이 실천적 관심이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실제로는 이론보다도 실천에 훨씬 더 몰두했다.”(L. Robin, Platon (Paris: LFA, 1935, p.254)는 지적이나 “우리가 플라톤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고 주장해도 좋을 것이다.”(M. Schofoeld, Plato: Political Philosophy (Oxford: OUP, 2006, p.4)라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는다. 플라톤 연구에 대한 현존하는 세계적 권위자 박종현도 이런 관점을 제시한다. 박종현은 플라톤을 “철학을 통한 교육과 나라 체제의 근본적 변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라고 평한다. 플라톤, 『법률』, 박종현 역주 (고양: 서광사, 2009), p.19.

플라톤, 『편지들』, p.83.

같은 책, p.86.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표준이 「크리톤」에 나오는 말, “캐묻지 않는 삶(ho anexetastos bios)은 사람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편』, 박종현 역주 (서울: 서광사, 2003), p.176(38a).

혼이 무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그 후 인류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고대 이후 기본 개념으로 쓰이는 ‘이성(reason)’이라는 말이나, 독일 관념론이 말하는 ‘정신(der Geist)’ 등 고대 이후 현대까지 몸에 대한 정신의 우위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이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편』, p.342(80a).

박종현, 『적도 또는 중용의 사상』, p.120.

박종현, 『희랍 사상의 이해』 (서울: 종로서적, 1982), p.59.

박종현, 『적도 또는 중용의 사상』, p.120.

흔히 혼쥐설화라고 불리는 이런 설화는 대개 잠이 들면 몸에서 쥐가 나와 밖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몸으로 돌아오면 잠에서 깨어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몸과 혼이 서로 구분되어 달리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혼쥐설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3918, 2023. 3. 24. 검색).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천병희 옮김 (파주: 숲, 2017), p.40.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편』, p.317(72d).

같은 책, pp.310-311(70c).

소위 플라톤의 ‘윤회설(palingensia)’의 최초 형태이다. 플라톤의 윤회설은 그의 철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식론뿐 아니라 영혼론, 인간론,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윤회는 그의 중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윤회설은 소위 ‘에르(er) 신화’로 알려져 있다. 에르 신화는 대화편 『국가』 10권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전투에서 죽은 지 열흘이 지나 화장하려는 찰라, 깨어난 용감한 에르의 환생담이다. 여기서 에르는 저승에 다녀온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플라톤, 『국가·정체』, 박종현 역주 (고양: 서광사, 2020), pp.652-667(614b-621d).

플라톤, 『국가·정체』, p.645(610e-611a).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편』, p.312(70e).

같은 책, pp.315-316(71b).

Liddell &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Oxford: Crarendon Press, 1968), p.788.

플라톤, 『국가·정체』, p.646(611e).

같은 책, p.646(611d).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편』, p.431(106d).

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5), p.176.

탈레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서울: 아카넷, 2009), p.294.

Bergson, Oeuvres (Paris: PUF, 1970), p.63.

탈레스, 앞의 책, p.238.

같은 책, p.243.

같은 책, pp.238-239.

Bréhier, E., Histoire de la Philosophie III, Paris: PUF, 1989, p.895.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PUF, 1969, p.46. Nous ne pensons pas le temps réel. Mais nous le vivons … .

이에 대해서는 박홍규, 「베르그송에 있어서의 근원적 자유」, 『희랍 철학 논고』 (서울: 민음사, 1995), pp.183-188을 참고하라.

동질은 동질인 한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즉 동질(同質) 안에는 이질(異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만약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동질 안에 이질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존재의 동질이 변한다는 것은 존재가 동질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258.

같은 책, p.258.

같은 책, p.258.

같은 책, p.258.

같은 책. p.252 참조.

같은 책, p.253.

같은 책, p.258.

같은 책, p.266.

같은 책, p.271.

같은 책, pp.261-262.

같은 책, p.262.

같은 책, p.264.

같은 책, p.269.

같은 책, p.258.

백춘현, 「대순사상의 인존에 대한 화용론적 해석」, 『대순사상논총』 39 (2021), pp.33-67 참조.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9), 공사 3장 29절.

김학택, 「종지론에 나타난 인간관 연구」, 『대순사상논총』 6 (1998), p.20.

『전경』, 교법 2장 5절.

같은 책, 교법 3장 20절.

이런 면에서 차선근은 지상신선을 “개인적 수양을 넘어 전통 신선이 발휘했던 도술적 능력보다 더욱 더 강력한 초능력을 사회에 발휘하는 가족 공동체적인 인간상”(차선근, 아래 논문, p.141)이라 규정한다. 이는 지상신선에 대한 기능론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능론적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체론적 관점이 필요하다. 지상신선을 신·인격적 존재로 보는 것은 실체론적 접근의 한 형태이다. 한편, 동양에서 ‘신선(神仙)’ 개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치된 견해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차선근이 「근대 한국의 신선 관념 변용 : 대순진리회의 지상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62 (2011), pp.139-175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백춘현, 「대순사상에 나타난 지상신선 실현 : 인간개조의 의미와 실천」, 『대순진리학술논총』 13 (2013), p.299, 이런 면에서 백춘현은 대순사상이 “전통적 의미의 비현실적 신선을 넘어 구체적이고 완전한 존재로서 신인격적 존재인 지상신선을 추구한다.”고 본다.

『전경』, 권지 1장 11절.

차선근, 앞의 글, p.152.

플라톤, 『티마이오스』, 박종현·김영균 옮김 (고양: 서광사, 2000), p.256.

이경원, 「대순진리의 지상신선 실현 : 인간개조에 관한 연구」, 『대순사상논총』 1 (2002), pp.187-188.

같은 글, p.189.

『전경』, 권지 1장 11절.

같은 책, 제생 31절.

같은 책, 제생 26절.

같은 책, 공사 3장 5절.

같은 책, 행록 2장 15절.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편』, p.334(77c-d).

플라톤, 『국가·정체』, p.98(36c).

같은 책, p.100(36c).

『전경』, 권지 1장 11절.

같은 책, 예시 80절.

같은 책, 예시 80절.

같은 책, 교법 3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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