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은 19세기 퇴계학파의 일원이자 강우지역에서 활동한 한주학파 허유(許愈, 1833~1904)와 성재학파 박치복(朴致馥, 1824~1894)의 심론을 고찰함으로써 그 이론적 차이를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유학사는 16세기 퇴/율 이후, 퇴계학파(영남학파)와 율곡학파(기호학파)라는 양대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이들 학파 내에서도 내부적 분화현상이 나타나는데, 퇴계학파의 경우는 크게 다섯 학파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안동의 정재(유치명)에서 서산(김흥락)으로 이어지는 정재학파, ② 성주의 한주(이진상)에서 면우(곽종석)로 이어지는 한주학파, ③ 칠곡의 사미헌(장복추)에서 공산(송준필)으로 이어지는 사미헌학파, ④ 김해의 성재(허전)에서 방산(허훈)으로 이어지는 성재학파, ⑤ 창녕의 암서(조긍섭)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가 그것이다.1) 율곡학파에는 이항로를 종장으로 하는 화서학파, 박세화를 종장으로 하는 의당학파, 송병선을 종장으로 하는 연재학파, 전우를 종장으로 하는 간재학파, 기정진을 종장으로 하는 노사학파 등이 있다.
또한 19세기 퇴계학파의 특징으로는 퇴계 이후 주로 강좌(江左[경상좌도, 경상북도])지역이 주도해오던 것과 달리(퇴계 - 이상정 - 유치명 등), 강우(江右[경상우도, 경상남도])지역에서 걸출한 학자가 배출되면서 학문이 크게 진작된다. 그 중에서 이진상 문하의 한주학파와 허전 문하의 성재학파가 가장 번성하는데,2) 당시 강우(江右)의 뛰어난 학자들이 이진상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한주학파가 강우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다.3) 합천의 허유와 교우(윤주하), 단성의 곽종석과 물천(김진호), 의령의 자동(이정모)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허전은 성호(이익) - 순암(안정복) - 하려(황덕길)로 이어지는 서울에 가까운 근기(近畿) 남인계의 학맥을 이은 사람이다. 원래 경기도 포천 사람이지만 1864년에 김해부사로 재임하면서 당시에 관내에 학당을 열고 강학하자, 그때 입문한 인물이 박치복·단계(김인섭)·김진호·윤주하·소눌(노상직)·허훈 등이다. 허전 문인 가운데 60% 정도가 강우지역의 학자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들 강우지역에서 한주학파와 성재학파를 형성하게 되는 사상적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심(心)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에 있다. 한주학파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한다면, 성재학파는 심합이기(心合理氣)를 주장한다.
허유는 경상남도 합천 사람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퇴이(退而), 호는 후산(后山) 또는 남려(南黎)이다. 이진상 문하의 여덟 명의 저명한 제자를 세칭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부르는데, 이들 가운데 허유가 스승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받은 선배였고, 가장 가까운 사제지간이었다. 이진상의 아들 이승희의 “공(허유)의 마음이 곧 우리 先親(이진상)의 마음이다”4)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방증한다. 무엇보다 허유는 이진상이 ‘심즉리’를 발표하여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에 곽종석·윤주하 등과 함께 스승의 학설을 변호하고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한주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박치복은 경상남도 함안 사람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동경(董卿), 호는 만성(晩醒)이다. 박치복은 23세 때에 유치명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다가 37세 때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41세(1865) 때에 허전의 문하에 들어간다. 허전이 죽기 전에 박치복에게 성재(근기)학파의 의발(衣鉢)을 부탁하고, 자기의 저술을 주면서 교정할 것을 유언한다.5) 이에 허전 사후에는 박치복이 주축이 되어 강우지역의 성재학파를 이어간다. 무엇보다 박치복은 유치명과 허전의 두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로서, 퇴계의 ‘심합이기’에 근거하여 당시 강우지역에 유행하던 한주학파의 ‘심즉리’ 비판에 앞장섰던 성재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이진상의 ‘심즉리’가 퇴계의 ‘심합이기’ 학설에 배치된다는 평가에 따라, 훗날 그의 문집이 도산서원에서 반송되고 상주향교에서 불태워지는 등 퇴계의 정통학맥으로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는데, 이로써 퇴계학파 내에서는 심에 대한 해석을 두고 치열한 논변을 전개한다. 결국 퇴계학파 내의 심론의 전개는 동시에 19세기 강우지역 심론의 특징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후산집』에는 박치복에게 보낸 편지가 있고, 『만성집』에도 허유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본문에서는 이들 내용을 중심으로 후산과 박치복 심론의 이론적 차이를 확인한다. 박치복의 심론에 대해서는 이상하가 「만성 박치복의 학문 연원과 심즉리설 비판」에서 박치복 심론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으나6), 이진상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다. 허유에 대한 연구는 그의 학문과 사상 전반을 소개하는 정도이며 심론에 대한 세부적 분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와 구분하여 허유와 박치복의 심론에 대한 세부적 분석을 전개한다.
또한 주자가 심과 명덕을 모두 ‘具衆理 應萬事’로 동일하게 해석함으로써7) 심에 대한 논쟁이 명덕에 대한 논쟁으로 전개되며, 게다가 주자가 ‘명덕’을 허령불매(虛靈不昧)로 해석함으로써 명덕에 대한 논쟁은 ‘허령불매’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된다. 이에 본문에서는 허유와 박치복의 심론을 명덕의 내용과 아울러 고찰한다.
Ⅱ. 한주학파 허유의 심론
허유 심론의 특징은 심즉리(心卽理)에 있다. 물론 이때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이 한 몸을 주재하기 위해서는 리가 되어야 하니, 이러한 이유에서 허유는 ‘심즉리’를 주장한다.
먼저 허유는 자신이 ‘심즉리’를 주장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것은 당신과 내가 같으나 心卽理 운운하는 것은 나 혼자이다. 통틀어 말하여 ‘이기를 겸한다’고 하고, 오로지 심체만을 말하여 ‘심즉리’라고 하니, <통틀어 말하는>統說과 <오로지 말하는>單說은 각각 마땅한 바가 있지만, 지금 ‘단설’에 나아가서 매번 ‘통설’로써 배척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또 心卽理의 설은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니, 낙학의 군자는 心卽氣를 말하지만 심의 본체가 ‘본래 선한 기’라는 것이 이것이며, 영남의 가까운 이론은 心合理氣를 말하지만 심체가 리임을 논하지 않는 것이다.8)
심은 리와 기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허유가 ‘심즉리’를 말하지만, 이때도 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것은 당신과 내가 같다.” 즉 당신처럼 나 역시 심이 리와 기가 합쳐진 것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당신처럼 ‘심합이기’를 말하지 않고 ‘심즉리’를 말하는 것은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한 ‘심합이기’는 리와 기를 통틀어 말한 것이고, 내가 말한 ‘심즉리’는 오로지 심의 본체만을 말한 것이다. 심을 체용으로 설명하면, 심의 본체는 성(리)이고 심의 작용은 정이다. 따라서 ‘심즉리’는 리와 기가 합쳐진 심의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심의 본체(심의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심은 리와 기를 합쳐서 그 전체를 통틀어 말한 것이니 통설(統說)이 되고, 내가 말하는 심은 오로지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단설(單說)이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하는 통설로써 내가 말하는 단설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당신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지 않다.
허유는 ‘심즉리’의 관점에서 당시 유행하던 기호지역 낙학계열의 심즉기(心卽氣)와 또 다른 영남지역 성재학파(또는 정재학파) 계열의 심합이기(心合理氣)를 동시에 비판한다. 낙학계열은 율곡(이이)의 이론에 근거하여 ‘심즉기’를 주장하고, 또한 성재계열은 퇴계(이황)의 이론에 근거하여 ‘심합이기’를 주장한다. 허유에 따르면, 낙학계열의 ‘심즉기’는 심의 본체를 리가 아니라 ‘본래 선한 기’ 즉 맑은 기라고 주장하고, 성재계열의 ‘심합이기’는 심의 본체가 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기를 겸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심즉기’와 ‘심합이기’는 모두 허유의 ‘심즉리’처럼 심의 본체, 즉 ‘심의 리’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허유가 심을 본체개념 즉 ‘심즉리’로 해석하는 이유이자 의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허유는 왜 심을 본체개념으로 해석하려 하는가. 여기에서 허유는 심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대개 심은 형질로써 말한 것이 있고, 기로써 말한 것이 있으며, 리로써 말한 것이 있으니, ‘심이 이기를 합한다’는 것을 믿지 않겠는가. 그러나 형질로써 말한 것은 <심장처럼>밖은 둥글고 속은 구멍이 나서 <한약 재료인>창포와 복령으로 보양할 수 있는 심이니, 의사가 말하는 심이지 내가 말하는 심이 아니다. 기로써 말한 것은 정신·혼백으로 <손이>잡고 <발이>달리는 것처럼 <사유하는 지각>능력이 있는 심이니, 선가가 말하는 심이지 내가 말하는 심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심은 의리의 심이니, 맹자가 말한 “심이 모두가 옳다고 여긴다”는 것이고, 주자가 말한 “심의 본체이다”는 것이 이것이다. 만약 심의 본체를 ‘기’라 하거나 ‘기를 겸한다’고 한다면, 대본이 주인을 바꾸어 주재가 한결같지 않으니 옳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심을 통틀어 말하면 심은 진실로 리와 기가 합한 것이지만, 오로지 심의 본체만을 말하면 心卽理이다’라고 말한 것이다.9)
심은 형질로써 말한 것이 있고, 기로써 말한 것이 있으며, 리로써 말한 것이 있다. 형질로써 말한 것은 오장의 하나인 심장(心臟)처럼 밖은 둥글고 속은 구멍이 난 것이니, 이것은 의사가 창포·복령과 같은 한약으로 치료·보양하는 심이다. 또한 기로써 말한 것은 손이 잡고 발이 달리는 것처럼(손과 발에 잡고 달리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심에도 정신·혼백처럼 사유하는 지각능력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심이다.10) 결국 심의 지각작용은 기로써 말한 것이다.
이들과 달리, 심에는 또한 ‘의리의 심’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심이다. ‘의리의 심’은 맹자가 말한 ‘심이 모두가 옳게 여긴다’는 것과 주자가 말한 ‘심의 본체이다’는 것이 그것이다. 맹자에 따르면, “입이 맛에 있어서도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도 모두가 즐거워하는 것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도 모두가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있다. 심에 이르러서만 유독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심에서 모두가 옳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理와 義이다.”11) 세상사람 모두가 역아(易牙)의 요리를 맛있어 하고, 사광(師曠)의 음악을 좋아하며, 자도(子都)의 미모를 아름다워 하듯이, 심에서는 모두가 리(理)와 의(義)를 옳게 여긴다(즉 理와 義를 옳게 여기지 않은 심은 없다). 이것은 맹자가 심을 리로써 해석한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또한 심을 체용으로 해석하면, 심의 본체는 성(리)이고 심의 작용은 정이니, 결국 주자가 말한 “심의 본체이다”12)라는 것은 심이 바로 리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심이 비록 리와 기가 합쳐진 것이지만, 맹자와 주자의 말에 근거하면, 이때의 심은 오로지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의리의 심’인 것이다. 그래서 “심이 이기를 합한다는 것을 믿지 않겠는가.” 즉 박치복처럼 ‘심합이기’라고 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허유가 말하는 심은 리와 기를 통틀어 말한 것이 아니라(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오로지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니 바로 ‘심의 본체’에 해당한다.
만약 심의 본체를 낙학계열처럼 ‘기’라고 하거나 성재계열처럼 ‘기를 겸한다’고 하면, 이것은 “大本이 주인을 바꾸어 주재가 한결같지 못하다.” 즉 심에서의 주인은 기가 아니라 리가 되어야 하니, 왜냐하면 심의 본체(大本)가 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심의 본체를 ‘기’라고 하거나 ‘기를 겸한다’고 하면, 대본(大本)이 주인을 바꾸어 기가 주인이 되니 주재 역시 리가 되지 못한다. 이로써 심에서의 주인은 리가 아니라 기가 되고, 결국 기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심의 전체를 통틀어 말하면 진실로 리와 기가 합한 것이지만(心合理氣), 오로지 심의 본체만을 말하면 ‘심즉리’가 된다.
그렇다면 허유가 말하는 ‘심의 본체’는 무엇인가.
심의 본체는 인·의·예·지가 이것이니, 인·의·예·지 밖에 또 다른 심이 없다. 수레를 세는 것에 비유하면, 수레덮개·수레바퀴·수레뒤턱나무·수레바퀴살을 다 세면 그 밖의 수레가 없는 것과 같다.13)
수레에 덮개·바퀴·뒤턱나무·바퀴살 밖에 또 다른 수레가 없듯이, 사람의 심에도 인·의·예·지 밖에 또 다른 심이 없다. 그러나 인·의·예·지는 성의 개념이지 심의 개념이 아니다. 심의 본체가 인·의·예·지라면, 이것은 심이 곧 성(리)이라는 뜻이다.
심이 곧 성(리)이라면, 심과 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허유는 심과 리가 같은 뜻이지만, 다만 보는 관점에 따라 구분될 뿐이라고 설명한다. “심과 리는 진실로 하나이지만, 리가 기 위에 있는 것에서 말하면 심이라 하고, 심의 본체에서 말하면 리라고 하니, 이것이 ‘심은 스스로 심이고 리는 스스로 리이다’는 말이다.”14) 즉 리가 기속에 있는 것(리와 기가 함께 있는 것)을 ‘심’이라 하고, 심의 본체만을 말한 것을 ‘리(성)’라 하니, 심과 리가 저절로 구분되지만 실제로 그 뜻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심속의 리가 곧 인·의·예·지의 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즉리’와 ‘성즉리’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性卽理의 리는 오로지 靜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 心卽理의 리는 動靜을 관통하여 말한 것이다”15)라고 구분하지만, 결국 ‘성즉리의 리’는 하늘이 부여한 리이고 ‘심즉리의 리’는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리이니 그 리는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허유는 왜 심을 본체개념, 즉 심의 리로써 해석하는가. 심에는 리와 함께 기가 없는 것이 아닌데, 굳이 리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심이 한 몸을 주재하기 때문이며, 이때 심의 주재가 가능한 것은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심속의 리가 직접 주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심의 주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에 허유는 리는 형이상의 무위(無爲)한 개념이므로 주재로서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주재의 리가 진실로 성의 리이지만 성은 주재로서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은 성이 기의 바르고 통한 것을 얻어야 비로소 주재할 수 있다. 성 밖에 따로 주재의 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16) 즉 리는 무위하므로 홀로 주재할 수 없고 반드시 기를 얻어야 주재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기를 겸하는 심만이 주재가 가능하다. 결국 주재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리가 아니라 심이 된다.
따라서 심이 리의 지위로 격상될 때라야 비로소 한 몸을 주재할 수 있다. 예컨대 미발의 때든 이발의 때든 심이 항상 리로써 주재해나가야 효제충신(孝悌忠信), 즉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임금에 대한 충성, 친구간의 신의를 이루어 인간의 도덕성 구현이 가능하니, 이로써 만사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진다. 만약 심이 리로써 주재해나가지 못하면 천리가 형기에게 명령을 듣게 되므로 추악한 일들이 생겨나니, 이로써 만사가 혼란해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허유는 심의 주재를 기의 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심이 한 몸을 주재하는데, <이때>주재를 기(氣分)의 일로 인식하면 끝내 온당하지 못하다.”17) 심의 주재는 반드시 기가 아니라 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자 역시 심이 심다울 수 있는 것은 주재하기 때문이며, 이때 심의 주재가 가능한 것 역시 <심 속에>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심은 진실로 주재하는 뜻이다. 그러나 주재하는 것은 바로 리이니, 심 밖에 따로 하나의 리가 있거나 리 밖에 따로 하나의 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18) 이렇게 볼 때, 허유가 심을 본체개념 즉 ‘심의 리’로써 해석하려는 것은 무엇보다 주재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심의 본체나 심의 주재는 모두 리로써 말한 것이므로 ‘기를 겸한다’거나 ‘기와 합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심의 본체도 ‘기를 겸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심의 주재도 응당 ‘기와 합한다’고 말해야 하겠는가.”19) 결국 심이 한 몸을 주재하기 위해서는 리가 되어야 하니, 이러한 의미에서 허유는 ‘심즉리’를 주장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허유의 주장처럼, ‘심이 곧 리라면 더 이상 무슨 공부가 필요하겠느냐’ 즉 수양공부는 필요 없지 않느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허유는 심의 본체에서는 성인과 보통사람의 차이가 없다고 강조한다. “성인은 淸粹한 기를 얻었기 때문에 허령함이 통하지 않음이 없으나, 보통사람은 濁駁한 기를 얻었기 때문에 허령함이 통하지 않음이 있다. <성인과 보통사람의>분수가 있다는 말도 옳지만, 그 본체는 성인과 보통사람이 모두 같다.”20) 성인과 보통사람이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따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본체는 같다. 여기에서 ‘그 본체가 같다’는 것은 결국 성인의 심과 보통사람의 심이 그 본질에서는 같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때의 심은 허유가 말하는 ‘의리의 심’에 해당한다. “성인과 보통사람이 같다는 심은 의리의 심이 아니겠는가.”21)
이렇게 볼 때, 허유가 ‘심이 곧 리이다(心卽理)’라고 하여 심의 본체로써 리를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동일한 리가 나의 심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때의 리는 인·의·예·지의 도덕성을 말한다. 나의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면, 별도의 수양공부가 없더라도 누구나 쉽게 그 리(도덕성)를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허유는 기의 청탁수박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본체는 누구나 동일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박치복이 심에서의 기를 살피고 바로잡는 수양공부를 강조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된다. 박치복처럼 기와의 관계 속에서 심을 해석하면, 나에게 갖추어진 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탁(淸濁)한 기를 살피고 바로잡는 또 다른 공부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주자가 심과 명덕을 모두 ‘具衆理 應萬事’로 해석함에 따라 심에 대한 논쟁은 명덕에 대한 논쟁으로 전개된다. 명덕을 리로 볼 것인가, 이기의 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기로 볼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허유는 심과 마찬가지로, 명덕 역시 리(심의 본체)로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명덕’ 두 글자는 선배들의 설이 진실로 복잡하지만, 나는 主理의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주리’라는 것은 리가 공중에 매달려 홀로 있어 완전히 기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과 불에 비유하면, 물은 진실로 그릇에 의지하여 맑으나 맑은 것은 물이지 그릇이 아니며, 불은 진실로 기름에 의지하여 밝으나 밝은 것은 불이지 기름이 아니다. 명덕은 진실로 기에 의지하여 밝으나 밝은 것은 리이지 기가 아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기를 겸한다’는 설로써 리와 기를 뒤섞고서 스스로 완전하고 병폐가 없다고 여기니 매우 탄식할 일이다.22)
허유는 명덕을 주리(主理)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주리’란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가운데 리를 주로 한다는 말이니, 만약 이때에 기가 없다면 다만 리일 뿐이므로 ‘주리’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리라는 것은 리가 공중에 매달려 홀로 있어 기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즉 ‘주리’라고 하더라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허유는 이러한 사실을 물의 맑음과 불의 밝음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예컨대 물의 본질이 맑음에 있다고 할 때, “물은 진실로 그릇에 의지하여 맑으나” 즉 물은 그릇이 없으면 그 맑음을 드러낼 수 없으나, 그렇지만 이때 맑은 것은 물이지 그릇이 아니다. 또한 불의 본질이 밝음에 있다고 할 때, “불은 진실로 기름에 의지하여 밝으나” 즉 불은 기름이 없으면 그 밝음을 드러낼 수 없으나, 그렇지만 이때 밝은 것은 불이지 기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명덕은 진실로 기에 의지하여 밝으나” 즉 기가 없으면 그 명덕의 밝음을 드러낼 수 없으나, 그렇지만 이때 밝은 것은 리이지 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명덕이 비록 기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은 리라고 해야지 기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명덕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명덕은 오로지 리만을 말한 것이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덕은 리와 기를 섞어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명덕에 대해 ‘기를 겸한다’, 즉 리와 기가 합쳐진 설이 가장 완전하고 병폐가 없다고 주장하니 탄식할 일이다. 반면 박치복은 물이 진실로 그릇에 의지하여 맑고 불이 진실로 기름에 의지하여 밝듯이 명덕 역시 진실로 기에 의지하여 밝다면, 이것이 바로 리와 기가 합쳐진 것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이어서 허유는 명덕을 ‘의리의 심’으로 해석한다.
명덕은 무슨 물건인가. 다만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의리의 심’이니, 이 심은 오직 사람만이 얻고 사물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용장구』의 ‘천명지성’에서는 사람과 사물을 함께 말하였으나, 이 『대학장구』 ‘명덕’에서는 사람을 말하고 사물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 뜻이 심오하구나. 사람이 오직 이것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명덕을 ‘기’로 인식하는 자가 있고, 명덕을 ‘기를 겸한 것’으로 인식하는 자가 있으니, 어찌 자기의 본분에서 사람이 사물과 다른 ‘의리의 심’을 버리고 도리어 형기상에 나아가서 함부로 말하여 명덕의 참됨을 더럽히는가. 하늘의 밝은 명이 기를 곁들어 말할 수 없다면, 사람의 명덕은 기를 겸하여 말해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23)
주자의 『대학장구』 해석에 따르면,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주자성리학에 따르면,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 즉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해준 것은 성(리)이다. 그러나 허유는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을 ‘의리의 심’ 즉 심의 본체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허유는 왜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을 ‘성’이라고 하지 않고 ‘의리의 심’이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성과 심의 본체, 즉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의리의 심’은 심의 본체이니, 오직 사람만이 얻은 것이고 사물은 얻을 수 없다. 즉 성은 사람과 사물이 모두 얻은 것이지만, ‘의리의 심’은 사람만이 얻은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허유가 명덕을 성이라 하지 않고 ‘의리의 심’이라 한 것은 오직 사람만이 갖추고 있는 것임을 강조한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심즉리’의 주장은 심과 성의 구분이 없게 된다는 박치복의 비판과 달리, 허유는 심(심의 리)과 성(성의 리)의 개념적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허유는 명덕을 곧장 성이 아니라, 심의 본체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주자의 말에 근거지어 설명한다. 주자가 『중용장구』의 ‘天命之謂性’에서는 사람과 사물이 모두 동일한 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니,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함에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하니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이에 사람과 사물(人物)이 생겨날 때에 각각 그 부여받은 리를 얻어서 건순·오상의 덕으로 삼으니, 이른바 성이다.”24) 그러나 주자가 『대학장구』의 ‘명덕’에서는 사람만이 명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니, “명덕은 사람(人)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虛靈不昧하여 중리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25) 주자가 성을 말할 때는 사람과 사물을 모두 언급하나 명덕을 말할 때는 사람만을 언급하니, 결국 명덕은 <사물에도 있는 성과 구분되는>사람의 심속에만 갖추어져 있는 리를 말한다. 이러한 주자의 말에 근거할 때, 명덕은 성(리)이 아니라 ‘심의 본체(심의 리)’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허유는 명덕을 곧장 성(성즉리의 리)과 구분하여 사람에만 갖추어져 있는 ‘의리의 심’으로 해석한다. 명덕은 ‘의리의 심’처럼 성이 아니라 심의 영역이지만, 이때의 심은 ‘기(心卽氣)’ 또는 ‘기를 겸한다(心合理氣)’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리만을 가리키는(心卽理)’ 본체의 심을 말한다.
이에 허유는 당시 기호지역 낙학계열처럼 명덕을 기로 인식하거나(심즉기) 영남지역 성재계열처럼 명덕을 ‘기를 겸하는 것’으로 인식하는(심합이기) 양측을 모두 비판한다. 이들은 모두 “사람이 사물과 다른 ‘의리의 심’을 버리고 도리어 형기상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니”, 즉 명덕을 심의 본체인 ‘의리의 심(오로지 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심의>형기에 나아가서 기를 겸하여 해석하니, 이것은 명덕의 진짜모습을 더럽힌 것이다. 명덕의 진짜모습은 오로지 심의 본체인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늘의 밝은 명(天命)은 기를 겸하여 말할 수 없듯이, 사람의 명덕 역시 기를 겸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명덕에도 비록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심의 본체(심의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심의 리’가 곧 성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허유는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니, 성(성즉리의 리)이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면, 심의 리(심즉리의 리)는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덕은 기 또는 기를 겸하여 말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심의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명덕이 성이 아니라 심의 리를 말한다. 만약 명덕을 곧장 성이라고 하면, 구중리(具衆理)는 리가 리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니 옳지 않다. 성은 형상이 없으니, 리를 갖추고 있는 것은 성이 아니라 심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명덕은 성이 아니라 심으로 해석해야 하며, 이때의 심은 박치복의 주장처럼 리와 기를 겸하는 심이 아니라, ‘심이 태극이다’는 본체의 심을 말한다. “명덕은 심속에 나아가 오로지 리만을 가리킨 것이다.”26) 이러한 심이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으므로 만사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사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성이 아니라 심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에 허유는 기가 탁한 사람에게도 명덕이 변함없이 여여(如如)함을 강조한다.
제 생각에는 귀하께서 반드시 다른 설을 버려두고, 다만 주자의 말 속에 나아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궁구하면, 비단 기가 맑고 리가 통하는 사람만이 명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기가 탁하고 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명덕이 그대로임을 자연히 깨달을 것이다. 탁한 물속에 어찌 밝은 진주가 없겠는가.27)
명덕은 기가 맑고 리가 통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가 탁하고 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있다. 이것은 마치 탁한 물속에도 밝은 진주가 있는 것과 같다. 맑은 물속의 진주든 탁한 물속의 진주든 모두 동일한 밝은 진주이지만, 다만 탁한 물속의 진주는 탁한 물에 가려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탁한 물속의 진주도 그 본래모습은 밝은 진주와 다르지 않다. 명덕 역시 기가 맑은 사람이든 기가 탁한 사람이든, 또는 성인이든 범인이든, 모든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탁한 물속의 진주도 그 본래모습은 밝은 것처럼, 기가 탁한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명덕도 그 본래모습은 밝음 그 자체이다.
이렇게 볼 때, 허유가 명덕을 ‘심의 리(또는 심의 본체)’로 해석한 것은 누구에게나 명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 명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면, 아무리 기가 탁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박치복처럼 기를 맑게 다스리는 별도의 수양공부가 없어도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명덕(인·의·예·지)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성선설의 요지이며, 허유가 명덕을 ‘심의 리’로 해석하는 이유이다.
Ⅲ. 성재학파 박치복의 심론
박치복 심론의 특징은 ‘심합이기’에 있다. 심의 주재가 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리를 실현시키는 작용으로서의 기의 역할을 인정하자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기가 없이는 리가 실현될 수 없으며, 또한 ‘심즉리’처럼 심이 곧 리라면 주자성리학의 수양공부는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박치복은 심과 성의 의미를 분명히 구분한다.
성은 심의 리이고 심은 성의 성곽이니 그 이치는 하나이나 글자의 뜻은 다르다. 심을 말하면 성이 그 속에 있으나, 성을 말하면 심이 다 갖추어지지 못한다. 글자를 사용하여 물건을 명명한 것에 각각 마땅한 바가 있으니, 어찌 옛날과 지금의 다름이 있겠는가. 만약 ‘옛사람은 심과 성을 하나로 여기고 둘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性善을 말한다’는 것도 ‘心善을 말한다’고 하고, ‘천명의 성’도 ‘천명의 심’이라 하면 옳겠는가. 인심과 도심도 人性과 道性이라 하면 옳겠는가.28)
심과 성은 그 의미가 다르니, 예컨대 “성은 심의 리이고 심은 성의 성곽이다.” 즉 성은 심속에 들어있는 리이고 심은 성을 담고 있는 그릇(성곽)이다. 그러므로 “심을 말하면 성이 그 속에 있으나, 성을 말하면 심이 다 갖추어지지 못한다.” ‘심이 성과 정을 총괄한다(心統性情)’는 말처럼, 심은 성을 포함하는 전체개념이라면 성은 심에 포함되는 부분개념이니 성은 심을 다 포함하지 못한다. 이것을 선악으로 표현하면, 성은 심속에 있는 리만을 말한 것이므로 순선하지만, 심은 성을 담고 있는 그릇까지 포함하므로 선과 악이 함께 있다. 이처럼 심속에도 성(리)이 있으므로 비록 심과 성의 이치는 같으나 글자의 뜻이 다르니, 심과 성(리)을 일치시켜 ‘심즉리’라고 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심과 성은 그 의미뿐만 아니라 이미 글자 자체가 다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글자를 사용하여 그 뜻을 표현하니 “글자를 사용하여 물건을 명명한 것에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 예컨대 심은 ‘心’이라는 글자를 써서 심이라 이름 붙인 것이고, 성은 ‘性’이라는 글자를 써서 성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이미 심과 성의 글자에는 각각 마땅함이 있다. 각각 마땅함이 있기 때문에 심이라는 글자는 성이라 부를 수 없고, 성이라는 글자도 심이라고 부를 수 없다.
따라서 “글자를 사용하여 물건을 명명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비록 옛사람이라 하더라도 심과 성의 글자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만약 옛사람은 심과 성을 하나로 여기고 둘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컨대 “맹자의 ‘性善을 말한다’는 것도 ‘心善을 말한다’고 하고, 자사의 ‘천명의 성’도 ‘천명의 심’이라고 하면 옳겠는가. 인심과 도심을 人性과 道性이라 하면 옳겠는가.” 즉 맹자의 성선(性善)을 심선(心善)이라 말할 수 없고, 자사의 ‘천명의 성’을 ‘천명의 심’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게다가 인심·도심을 인성(人性)·도성(道性)이라 말할 수 없듯이, 옛사람 역시 심과 성을 하나로 여긴 것이 아니라 둘을 분명히 구분해서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심과 성은 분명히 구분되니, 심과 성(리)을 일치시켜 ‘심즉리’라 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박치복은 심이 리와 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리와 기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
리와 기는 섞이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나누어 둘로 하면 不雜이라 하고 합하여 하나로 하면 不離라 하니, 또한 어찌 옛날과 지금의 다름이 있겠는가. 리와 기를 가지고 말하면 리는 스스로 리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며, 사람의 몸을 가지고 말하면 음양·오행은 기이고 건순·오상은 리이다. 이 기가 있으면 반드시 이 리가 있어 나의 방촌 속에 모두 모이면 허령지각이 갖추어지고 사단칠정이 발하니 이것이 이른바 심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지각되는 것은 심의 리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의 허령함(靈)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심이>오로지 리만을 가리킬 뿐이다’라고 한다면, 리는 태허의 공공의 물건이니 무슨 일이 나와 상관이겠는가. 담고 싣는 것은 누구이며, 실행하고 발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어느 곳에 걸려있고 어느 곳에 머무는가. 존양·성찰의 방법과 主敬을 자각하는 공부는 장차 어느 곳에서 실행될 수 있겠는가.29)
리와 기는 합쳐서 볼 수도 있고 나누어서 볼 수도 있으니, 리와 기를 합쳐서 하나로 보는 것을 ‘不離(또는 不相離)’라 하고, 리와 기를 나누어서 둘로 보는 것을 ‘不雜(또는 不相雜)’이라 한다. 결국 리와 기는 ‘불리’로도 말할 수 있고 ‘부잡’으로도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두 측면에서 보아야 이 세계를 더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는 항상 기 속에 있으므로 ‘불리’가 되지만, 그럼에도 리는 추상적 이치이고 기는 구체적 사물로서 그 성질이 다르므로 ‘부잡’이 된다. 이처럼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지만 그 성질이 분명히 구분되니, 이 때문에 “리는 스스로 리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불리’와 ‘부잡’은 “옛날과 지금의 다름이 있겠는가” 즉 옛날이든 지금이든 동일하게 사용된다.
이러한 리와 기의 관계를 사람의 몸을 가지고 말하면, 음양·오행은 기이고 건순·오상은 리이다. 이때 기는 사람의 몸을 이루는 형체를 말하고, 리는 인·의·예·지의 성을 말한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할 때에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한다”30)는 주자의 말처럼, 기가 사람의 형체를 이루면 리가 부여되어 성이 된다. 만약 기가 사람의 형체를 이루지 못하면 리 또한 머물 곳이 없다. 결국 반드시 기가 있어야 리도 있으며, 만약 기가 없으면 리 또한 실재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리를 담고 싣는 것도 기이고 리를 실행하고 발용하는 것도 기이며, 또한 리가 걸려있는 곳도 기이고 리가 머무는 곳도 기이니, 결국 기가 있어야 리의 현실화도 가능하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심 역시 기와 리가 합쳐진 것이다. 기가 형체를 이루면 리가 부여되어 사람이 되듯이, 심 역시 사방 한 치에 불과한 방촌(기) 속에 리가 모이면 허령지각이 갖추어지니 이것이 바로 심이다. 결국 ‘방촌’이라는 기에 리가 모여야(즉 기와 리가 합쳐져야) 비로소 심이 되며, 이로써 허령한 지각작용이 가능하다. 이때의 허령한 지각작용은 생각하고, 인식하고, 감각하는 모든 의식활동을 말한다.
주자 역시 심의 지각작용을 리와 기가 합쳐진 것으로 설명한다. “<지각은>오로지 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지각의 리가 있다. 리는 아직 지각하지 못하고,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어 리와 기가 합쳐지면 지각할 수 있다. 비유하면 촛불이 기름을 얻으면 수많은 불꽃이 생기는 것과 같다.”31) 마치 촛불이 기름(기)을 얻어야 수많은 불꽃이 생기는 것처럼, 심의 지각 역시 리와 기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자는 “지각되는 것(지각하게 하는 것)은 심의 리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의 허령함이다”32)라고 말한다. 이때 ‘심의 리’는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에 해당하고, 실제로 지각하는 것은 ‘허령한(맑은) 기’이다. 여기에서 박치복은 ‘허령함’을 맑은 기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허유가 리로써 해석하는 것과 구분된다.
그런데도 허유처럼 ‘심은 오로지 리만을 가리킬 뿐이다’고 말한다면, “리는 태허의 공공의 물건이니 무슨 일이 나와 상관이겠는가.” 심에서 기를 말하지 않고 오로지 리만을 말한다면, 결국 리는 머물 곳이 없으므로 나와는 상관이 없는 태허 속 공공의 물건이 될 뿐이다. 태허의 리가 나의 심속에 갖추어질 때에 비로써 나와 상관하는데, 이때 태허의 리가 머무는 곳이 바로 기이다. 만약 심에 기가 없으면, 리는 머물 곳이 없으므로 다만 태허 속의 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허유의 ‘심즉리’처럼 심을 오로지 리만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박치복이 ‘심합이기’ 즉 심이 리와 기가 합쳐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수양공부 때문이다. 이것을 선악으로 말하면, 리는 다만 선할 뿐이고 기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으니, 이때 수양공부의 대상은 기가 된다. 결국 심에 기가 있기 때문에 수양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존양·성찰의 방법과 主敬을 자각하는 공부는 장차 어느 곳에서 실행될 수 있겠는가” 즉 미발 때의 존양공부든 이발 때의 성찰공부든,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는 主敬공부를 막론하고, 공부를 실행해야 할 곳은 리가 아니라 기라는 말이다. 만약 ‘심즉리’처럼 심이 곧 리의 상태라면, 무슨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즉 더 이상 수양공부는 필요가 없으니 잘못이다.
이에 박치복은 기를 변화시키는 수양공부를 강조한다.
심은 기가 아니면, 리가 어디에 머물겠는가. 태허의 리가 내 몸 속에 모이는 것은 이 리가 나의 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를 다스려서 탁한 것으로 하여금 순수하게 하고 혼란한 것으로 하여금 고요하게 하면, <심에 갖추어져 있는>온갖 리가 <막힘이 없이>환하게 통하여 장애가 없다.33)
심은 리와 기가 합쳐진 것이다. 만약 심에 기가 없으면, 리 또한 머물 곳이 없다. “태허의 리가 내 몸 속에 모이는 것은 이 리가 나의 기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리가 나의 기를 타고 있으므로 태허의 리가 내 몸 속에 갖추어질 수 있으니, 내 몸에 해당하는 기가 없으면 결국 태허의 리도 머물 곳이 없다. 이것은 반드시 기가 있어야 리가 실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리가 나의 기를 타고 있으면” 즉 리가 기와 함께 있으면, 또한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리가 맑은 기를 타고 있으면 리의 밝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으나, 반면 리가 탁한 기를 타고 있으면 <탁한 기에 가려서>리의 밝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이것은 리가 타고 있는 기의 청탁수박에 따라 그 리의 실현여부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때 리가 타고 있는 탁한 기를 다스려서 맑게 하면, 심에 갖추어져 있는 온갖 리가 막힘이 없이 모두 실현되니 “기의 精爽에 갖추어진 리는 저절로 드러난다.”34) 이것이 바로 “기가 맑으면 리도 밝고, 기가 탁하면 리도 어둡다”35)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박치복은 심에서 리가 주재(주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기가 주재라는 말이 아니지만), 다만 리가 주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의 精爽’처럼 리를 태우는 기가 맑고 깨끗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박치복은 심에서의 기를 강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심즉리’에 반대하고 ‘심합이기’를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심즉리’처럼>심을 리라고 말한 것도 좋지만 <‘심합이기’처럼>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 더 온전하며, 리를 주로 한다는 말도 옳지만 기를 갖추어 말한 것이 더 흠이 없다.”36) 즉 ‘심즉리’보다 ‘심합이기’가 더 온전하고 흠이 없다고 강조한다.
먼저 박치복은 명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명덕은 리가 기에 막히지 않은 것을 명명한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모두가 이 리를 얻지만, 기품이 앞에서 구속하고 물욕이 뒤에서 가리면, 자연히 지극히 맑은 기를 부여받은 성인이 아니고는 그 밝음의 전체를 볼 수 없다. <성인>이외에는 각각 맑음<맑은 기>의 많고 적은 분수에 따라 그 밝음을 보고, 중인은 흐릿하게 막혀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부여받은 리는 진실로 없던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물로>기어가는 <어린아이의>측은한 모습이나 너희를 <무시하는>수치스런 상황을 갑자기 만나면, 기가 用事하지 않고 아직 장애에 부합하지 못하여 잠깐 사이에 밝음이 드러난다. 만약 잠깐 밝아짐에 의거하여 그 구속되고 가리는 것을 다스려서 장애가 모두 제거되는데 이르면, 본체의 밝음이 성인과 다름이 없다. <기가>본래 맑아서 밝은 것도 명덕이요, <기를>맑게 하여 밝음을 회복한 것도 명덕이니, 비록 오로지 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그 설이 또한 이와 같은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를 겸한다’는 해석이 과연 ‘사람마다 모두가 <리를>얻은 것이다’는 뜻에 구애되는가.37)
명덕은 허유처럼 심에서 오로지 리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리가 기에 막히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다. ‘리가 기에 막히지 않는다’는 것은 명덕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이때는 리가 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기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리가 기를 타고 있으면(리가 기 속에 있으면) 기에 구속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한 성질 때문이다(理弱氣强). ‘구속된다’는 것은 리가 탁한 기에 가려져서 그 밝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니, 결국 ‘리가 기에 막히지 않는다’는 것은 리를 태우고 있는 기가 맑고 깨끗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두가 이 리를 부여받지만, 이 리가 기(형체)에 내재하는 순간 기품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진다. 그러므로 지극히 맑은 기를 부여받은 성인이 아니고는 “그 밝음의 전체를 볼 수 없다” 즉 리의 밝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성인 이외의 사람은 “맑음의 많고 적은 분수에 따라 그 밝음을 보니”, 예컨대 맑은 기가 많은 사람은 리의 밝음이 많이 드러나고, 맑은 기가 적은 사람은 리의 밝음이 적게 드러난다. 이것은 기의 맑은 정도에 따라 그 리의 밝음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또한 중인은 “흐릿하게 막혀있을 뿐이다” 즉 탁한 기에 가려서 리의 밝음이 거의 드러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리의 밝음이 거의 드러나지 못할 때라도 “리는 진실로 없던 적이 없다” 즉 이때도 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박치복은 아무리 탁한 기를 가진 사람이라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님을 맹자의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측은한 상황38)이나 음식을 얻어먹어야 살 수 있는 절박한 순간에도 욕하거나 발로 차서 주는 수치스런 상황39)에 직면하면, 이때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가 용사하지 않아 기의 장애에 구속되지 않으니, 이러한 잠깐의 사이에는 리의 밝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 잠깐의 사이에 드러나는 리의 밝음’에 의거하여 구속하거나 가리는 기를 다스려서 그 장애를 모두 제거하면, 이때는 본체의 밝음이 성인과 다름이 없다. 아무리 탁한 기에 가려진 사람이라도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 일어나는 잠깐의 사이에는 리가 밝게 드러나니, 그 짧은 순간에 <리를 가리는>기의 장애를 모두 제거하면 성인과 같은 리의 밝음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은 맹자가 불꽃이 처음 타오르거나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처럼 아주 미미한 사단지심(四端之心)이지만, 그것을 넓혀나가면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주자 역시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사단지심) 돌이켜 자신에게서 구하고 묵묵히 알아서 넓혀나가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40) 즉 사단지심을 넓혀나갈 수 있으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리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기가 본래 맑아서 리가 밝은 것도 명덕이고, 기를 맑게 다스려서 그 리의 밝음을 회복한 것도 명덕이다. 전자가 성인처럼 지극히 맑은 기를 부여받은 사람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중인처럼 탁한 기에 막혀있는 사람에 해당한다. 결국 성인의 명덕이든 중인의 명덕이든 모두 기가 없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성인은 기가 맑고 중인이 기가 탁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인은 기가 맑으므로(기에 구속되지 않으므로) 리도 밝지만, 중인은 기가 탁하므로 <탁한 기에 가려서>리가 밝지 못하다. 그러나 이때도 탁한 기를 다스려서 맑게 하면 리의 밝음을 회복할 수 있으니, 이때 리의 밝음(명덕)은 성인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박치복은 탁한 기를 변화시키는 수양공부를 강조한다. 이것은 허유가 수양공부를 거친 뒤의 명덕이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명덕(리)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된다.
이처럼 명덕은 오로지 리만을 말한 것이 아니며, 설령 허유처럼 오로지 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그 설이 또한 이와 같은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명덕에는 기가 없는 것이 아니니, 본래 기가 맑은 것과 탁한 기를 맑게 하는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기가 맑아서 리가 밝은 것이든, 탁한 기를 맑게 하여 그 리를 회복한 것이든, 그 명덕의 내용은 같다.
따라서 명덕이 ‘기를 겸한다’고 해석하더라도 “사람이 모두가 <리를>얻은 것이다”는 말에 구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탁한 기를 제거하면 본래의 밝음을 회복할 수 있으며, 또한 본래의 밝음을 회복하면 이때는 하늘이 부여한 리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치복은 리가 기에 가리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탁한 기를 제거하여 리의 밝음을 회복한 것까지 명덕으로 해석하니, 이것은 명덕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박치복은 허유가 명덕을 리(심의 리)로만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또한 박치복은 ‘명덕이 이기를 겸한다’는 사실을 ‘허령불매’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왜냐하면 주자가 『대학장구』와 『대학장구대전』에서 모두 ‘허령불매’를 명덕의 뜻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주자의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중리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거나 “허령불매 네 글자는 명덕의 뜻을 설명한 것이 이미 충분하다”41)라는 말에 근거하면, ‘허령불매’는 바로 명덕의 뜻이다. 이때 허령은 명덕의 ‘明(밝음)’자를 주석한 것이다. 이에 박치복은 ‘명덕이 이기를 겸한다’는 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생각이라고 강조한다.42)
이 때문에 박치복은 ‘경을 주로 하고 리를 밝히는’ 공부가 모두 나의 기를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는 리에게서 명령을 듣고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더욱 기를 자리만 차지하는 죽은 물건으로 본 것이다. 군자가 敬을 주로 하고 리를 밝히는 것은 나의 기를 기르는 것이니, 道義에 배합하고 크게 가득 채우면, 약한 것은 강한데 이를 수 있고 잡박한 것은 순수한데 이를 수 있어서 이에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리를 주로 하고 기의 有無·存亡이 나에게 족히 티끌만도 못된다면, 몸에 가득 찬 것이 이미 결핍되어 굶주리게 되니, 이른바 ‘리’라는 것은 장차 어디에 머물며 우주에 충만한 기상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는가.43)
만약 기가 리에게서 명령을 듣기만 하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기가 자리만 차지하는 죽은 물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박치복은 기가 죽은 물건이 아니라, 학문의 목적(대상)이라고 강조한다. “군자가 敬을 주로 하고 리를 밝히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기를 기르는 것이니” 즉 군자의 학문하는 목적이 기를 기르는 데 있다는 말이다. 나의 기가 길러지면 “道義에 배합하고” 즉 그 기가 사람이 도의(道義)를 행하는 데 도움을 주니, 결국 도의를 실현시키는 주체이다. 도의를 행하고자 하면, 먼저 기가 길러져서 몸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기를 “<몸에>가득 채우면” 약한 자는 강하게 되고 잡박한 자는 순수하게 되니, 이에 중인도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나의 기를 기르는 것이 성현이 되는 구체적 방법이다.
그럼에도 “만약 리를 주로 하고 기의 有無·存亡이 나에게 족히 티끌만도 못된다면”, 즉 기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면, 이것은 <맹자의 말처럼>기가 몸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핍되어 굶주린 것이다. 몸에 가득 차 있던 기가 결핍되어 굶주리면, 리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다. 결국 주자의 말처럼 사람은 더 이상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으니, “만약 이 기가 없으면 그 한때에 하는 바가 비록 道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가>몸에 가득 차지 못한 바가 있으면 또한 의구심을 면치 못하여 족히 <훌륭한 일을>할 수 없다.”44) 즉 기가 없으면 도의(道義)조차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맹자는 이러한 기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말하고, 주자도 우주에 충만한 천지의 바른 기라고 해석하니 “천지의 바른 기이고 사람이 얻어서 태어난 것이니, 그 체단(모습)이 본래 이와 같다.”45)
이렇게 볼 때, 무엇보다 기가 결핍되어 굶주림이 없이 몸에 충만해 있어야 리 또한 머물 곳이 있으며, 이로써 리의 실현도 가능하다. 결국 리를 실현시키는 주체는 기이며, 기가 없으면 리도 실현될 수 없으니, 이러한 이유에서 박치복은 리와 함께 기를 중시한 것이다.
Ⅳ. 결론
허유와 박치복 심론의 이론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심은 리인가(心卽理) 리와 기가 합한 것인가(心合理氣).
허유는 심을 리로써 해석한다. 물론 허유도 심에 리와 함께 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심을 리로써 해석하는 것은, 무엇보다 심이 심다울 수 있는 것이 한 몸을 주재하는데 있으며, 이때 심의 주재가 가능한 것은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심이 한 몸을 주재하기 위해서는 리(심의 리)가 되어야 하니, 이러한 의미에서 ‘심즉리’를 주장한다. 이때의 심을 허유는 리와 기를 겸하는 ‘기질의 심’과 구분하여 ‘의리의 심’이라고 말한다.
반면 박치복은 심을 리와 기가 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박치복도 허유처럼 심이 심다울 수 있는 것은 심의 주재에 있으며, 이때 심의 주재가 가능한 것은 리 때문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리와 동시에 기의 역할을 강조하니, 왜냐하면 기가 없으면 리 또한 머물 곳이 없어 실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방촌(기) 속에 리가 모여야 비로소 심이 되니, 이러한 의미에서 ‘심합이기’를 주장한다.
둘째, 명덕은 리인가 리와 기가 합한 것인가.
허유는 명덕 역시 리(심의 리)로써 해석한다. 명덕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심의 본체만을 가리키니, 이때는 기가 맑은 성인이든 기가 탁한 범인이든 모두 동일하다. 탁한 물속의 진주도 그 본래모습은 밝은 것처럼, 기가 탁한 사람의 명덕이라도 그 본래모습은 성인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 이미 성인과 같은 명덕이 갖추어져 있으니, 별도의 수양공부 없이도 누구나 나의 명덕(인·의·예·지의 도덕성)을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허유가 명덕을 리(심의 본체)로서 해석하는 이유이다.
반면 박치복은 명덕 역시 리와 기가 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박치복에 따르면, 명덕은 허유처럼 오로지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리가 기에 막하지 않은 것을 말하니, 이때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탁한 기에 막히거나 가리지 않은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리를 막거나 가리고 있는 탁한 기를 제거하여 그 밝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리의 밝음을 회복하면 이때는 성인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성인처럼 기가 본래 맑아서<기가 리를 가리지 않으므로> 리가 밝은 것도 명덕이고, 중인처럼 기를 맑게 다스려서 그 리의 밝음을 회복한 것도 명덕이다. 여기에서 박치복은 탁한 기를 다스려서 맑게 하는 수양공부를 강조한다. 예컨대 아무리 탁한 기에 가려진 사람이라도 리를 가리는 기의 장애를 모두 제거하면, 성인과 같은 리의 밝음을 회복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박치복은 명덕 역시 리와 기가 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론의 이론적 차이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허유의 ‘심즉리’처럼 심의 본체에서 해석하면, 성인이든 중인이든 그 리가 같다. 누구나 성인과 같은 리가 나의 심속에 갖추어져 있다면, 어려운 수양공부가 없어도 그 리를 실천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경우 기를 다스리고 변화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아주 탁한 기를 가진 어리석은 사람은 더 어려운 일이므로 미리 포기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수양공부보다 나의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거나 자각하게 하는 것이 실제로 그 리를 실천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해석은 선종의 ‘누구나 <부처와 같은>불성이 있다’는 것이나 왕수인의 ‘누구나 <도덕적 능력인>良知가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반면 박치복의 ‘심합이기’처럼 기와의 관계 속에서 심을 해석하면, 이때는 성인과 중인이 분명히 다르니, 중인이 성인되기 위해서는 기를 다스리고 변화시키는 수양공부가 수반된다. 물론 탁한 기를 다스려서 맑게 하면, 이때는 성인과 다름이 없다. 결국 심속에 갖추어져 있는 리가 막힘이 없이 모두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탁한 기를 맑게 다스리는 수양공부가 선행되어야 하며, 기가 맑은 뒤라야 리의 온전한 실현이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이들 심론의 이론적 차이는 그대로 인간에 대한 다른 규정으로 이어지니, 허유가 맹자의 성선설처럼 심의 본질적 측면에서 인간을 해석한 것이라면, 박치복은 선악이 혼재하는 심의 현실적 측면에서 인간을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그대로 사회실천의 이론적 근거로 이어지는데,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전자가 주로 <심이 곧 리이므로>주체적 결단과 강한 실천력과 같은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적극적 태도를 보인다면, 후자는 주로 <심에는 리와 함께 기(악)도 있으니 수양이 필요하므로>입산자정(入山自靖)하여 저술이나 강학과 같은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고나 할까.
결국 이들은 ‘리’를 모두 최고의 원리요 가치로 보고 그것의 실현을 학문의 최종목표로 생각한 것은 차이가 없지만, 다만 그 리를 어떻게 현실 속에 구현·실현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주학파 허유의 ‘심즉리’와 성재학파 박치복 ‘심합이기’의 이론적 차이이며, 동시에 기호학파의 ‘심즉기’와 구분되는 영남학파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의 논쟁은 무엇보다 주자성리학의 이론체계 속에서 심에 대한 개념정의를 분명히 함으로써 자신의 성리설을 전개하는 이론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만, 19~20세기라는 격변기의 사회현실 속에서 심의 성격과 역할을 바르게 규정하고 실천하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