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조선후기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의 『팔가총평(八家摠評)』을 중심으로 묵자 및 묵가에 대한 비판론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 묵가 연구의 성격과 한계를 고찰한 것이다. 『팔가총평』1)은 명대 심진(沈津)이 제자백가를 집성하여 편찬한 『백가유찬(百家類纂)』2)을 토대로 저술된 제자서 비평서이다.
신후담은 14~15세 무렵 『백가유찬』을 읽었으므로3), 『백가유찬』을 통해서 『묵자』를 읽은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따르면 『팔가총평』의 저술은 1719년(18세)부터 시작되어 1724년(23세)에 완성되었다. 그는 『팔가총평』 서설에서 이 책이 제자백가의 원류와 시비를 논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백가유찬』에 따라 유가·도가·명가·법가·묵가·종횡가·잡가·병가의 8가 문헌을 대상으로 비평했다. 그 중 7가에 대해서는 각 가의 총괄적인 논평을 붙였는데, 묵가의 경우 『묵자』의 「겸애」와 「절용」편에 대해 비평하고, 「묵자론(墨子論)」, 「묵씨원류(墨氏源流)」, 「묵불설(墨佛說)」 세 편의 논설을 추가하여 묵자의 사상을 분석했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묵자를 단순히 맹자의 벽이단론(闢異端論)에 따라 배척한 것과 차별되는 학술적 태도이다.
묵자의 생애나 묵가류에 대한 기록은 명확한 것이 거의 없다. 『장자』 「천하」편이나 『사기』 등에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소략하다. 이 때문에 『묵자』라는 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4) 『백가유찬』에서 『묵자』는 주석 없이 원문만 수록되어 있는데, “『墨子』 三卷, 戰國時代 宋 墨翟 撰”으로 간단히 서지사항을 밝혔다. 심진은 ”묵자의 도가 과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과는 다르며, 그의 말이 천하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천하가 그를 존경하고 믿은 것은 공자보다 못하지 않았으며, 공자와 함께 언급되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라고 하여 묵자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유가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묵자에 대한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5)
조선에서 묵자 및 묵가에 대한 연구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묵가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나종선6)과 윤무학7)의 연구가 있고, 박희병8)과 신정근9)은 홍대용의 사상에 묵자와 연관성을 검토했다. 윤무학은 조선에서 묵자사상에 대한 깊은 천착은 없고, 기본적으로 맹자의 벽이단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다만 유교 경전을 해석하기 위한 전고로만 활용되는 것에서 『묵자』의 문헌적 가치가 인정된 것으로 평가했다.10) 이러한 조선의 학술적 상황에서 신후담의 『팔가총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단순히 맹자의 비판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묵자의 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묵가의 원류, 묵자와 불교의 관계 등을 체계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묵가를 논의하는 방식과 차별되는 점이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 신후담의 묵자관은 검토되지 않았다.11)
조선시대 학술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묵자사상은 1900년대 이후 새롭게 재조명되었다. 선행연구에서도 이 점을 주목했는데, 한영규는 조긍섭과 변영만의 묵자에 대한 대립적 인식을 고찰했으며,12) 박문현은 박은식과 묵자의 사회사상을 비교했다.13) 이는 유교적 가치가 절대적인 기준이었던 조선사회와 달리, 근대적 전환기에 유교를 상대화하는 과정에서 묵자가 다시 연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청말민초 흐름을 선도한 양계초(梁啓超), 호적(胡適), 장병린(章炳麟) 등의 영향일 것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에서 다시 신묵학(新墨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묵자의 독립적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신묵가(新墨家)와 유학과의 상호 보완을 강조하는 신원묵학(新元墨學)과 두 파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다.14) 이에 반해, 한국학계에서는 조선시대 및 근대 묵자 연구가 일부 진행되었으나, 현대 중국의 신묵학 나아가 신자학(新子學)에 대응할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제자백가 연구가 유교 중심의 학문 전통 속에서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신후담의 『팔가총평』을 중심으로 그의 묵자관을 분석하고, 이를 조선시대 묵자 연구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비록 그는 홍대용처럼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유학자들 중 가장 심층적으로 묵자를 연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팔가총평』은 조선시대 제자백가 연구의 확장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현대 신묵학 논의와 연결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Ⅱ. 묵자의 겸애와 절용 비판
묵자뿐 아니라 전국시대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지는 근본적인 원인을 묵자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15) 묵자는 구별을 전제하고 있는 공자의 인의가 타자에 대한 적대적 행위를 용인하는 결과로 흐른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공자의 인의를 별애로 규정하고 타자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별애를 넘어서는 겸애가 요청된다고 주장한 것이다.16)
묵자는 내가 먼저 남을 해치지 않아야 남도 그에 상응하는 호의적인 행위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남의 부모와 나의 부모를 예로 들어 서로 사랑하되 내가 먼저 남의 부모에 대해 호의를 베풀어야 상대도 선의로 보답하게 되며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먼저 해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남도 그에 상응하는 호의를 베풀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묵자의 겸애는 결과주의적인 요소가 있지만 공리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이해의 상호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내가 먼저 호의를 베풀면 상대도 상응하는 호의를 베풀 것을 기대하는 점에서는 낙관적이고 내가 먼저 호의를 베푼다는 점에서 이타적이다.
묵자는 유가의 혈연에 기초하는 이타성이 차별을 전제한다는 것을 간파하여 별애라고 규정했다. 묵자는 유가의 별애는 결코 타자와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에 타자와 적대적인 관계를 초래하며 다툼이 그치지 않아 사회를 혼란으로 치닫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묵자의 대안이 바로 겸애이다. 그런데 겸애는 일정한 보상[利]을 전제하는 것으로, 맹목적인 헌신이나 시혜적인 사랑이 아니다. 겸애는 교리와 짝을 이루기 때문에,17) 선행연구에서는 유가의 혈연적 이타성에 대비하여 묵자의 겸애를 호혜적 이타성으로 보았다.18) 그러나 상대가 반드시 내가 기대하는 이타적 행위를 한다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그 이타성은 나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에 의한 것이므로 실제 이타성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묵자』 8편부터 39편까지는 묵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 이른바 10론이다.19) 그런데 이 10론 중 어느 편이 핵심인가 하는 것은 묵자사상을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신후담이 핵심으로 보는 것은 「상동(上同)」 「겸애(兼愛)」 「절용(節用)」 그리고 「법의(法儀)」편이다. 「법의」편은 바로 앞의 「소염(所染)」편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10론 중 「천론(天論)」과 연결된다고 보기도 한다.20)
신후담은 묵자 사상을 비판하기에 앞서 논의의 방향을 간략하게 제시했다.
옛날 추부자(鄒夫子; 맹자)는 전국 시대에 양주와 묵자를 배척하는데 전력을 다하면서 묵씨의 도에 대해 곧바로 무부(無父)의 죄가 있다고 했다. 나는 늘 묵씨의 도가 과연 어떻길래 추부자가 이와 같이 배척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 「법의」, 「상동」, 「겸애」, 「절용」 등 편을 보니 그 도의 궁극적 근원이 대개 드러난다. 의도는 본래 천하를 겸애하고자 한 것이나 도리어 그 부모를 박하게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우리 도에 죄를 지은 것이 크다. 이 책에서 그 설이 심하게 이치를 해친 것 두 가지를 들어 물리쳤다. 또 「묵자론」 1편, 「묵씨원류」 1편, 「묵불설」 1편을 뒤에 붙였으니 읽는 자가 평가할 것이다.21)
맹자의 ‘무부(無父)’라는 비판을 신후담은 『묵자』를 직접 보기 전에는 너무 지나친게 아닌가 의구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후담도 묵자 비판에 빠짐없이 거론되는 「겸애」와 「절용」 두 편에 집중하는데, 겸애의 문제가 가장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지금 묵씨의 겸애편을 보니 형의 자식을 친애하는 것이 이웃의 자식과 같을 뿐이고, 자기의 부모와 나란히 하는 것은 도리어 남의 부모만 못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묵자가 말하기를 “내가 먼저 남의 부모를 사랑하고 이롭게 하기를 일삼으면 그런 뒤에 남이 내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하는 것으로 나에게 갚겠는가? 내가 먼저 남의 부모를 미워하기를 일삼으면 그런 뒤에 남이 내 부모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에게 갚겠는가? ① 반드시 내가 먼저 남의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하는 것을 일삼으면 그런 뒤에 남이 내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하는 것으로 나에게 갚는다.”22)
신후담은 묵자의 본래 의도가 남이 나에 대한 호의를 기대하는데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묵자가 겸애를 주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남과 다투려 하지 않으면 남도 또한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①과 같이 묵자가 남의 부모를 내 부모보다 우선시할 것을 주장하기 위해 겸애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유학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무엇보다 내 부모와 남의 부모의 관계에 겸애를 적용하는 것이다. 친친은 인의 발로이므로 자연적이고 당위적이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전제되지 않는 정언명령과 같다. 그런데 묵자의 취지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남의 부모를 내 부모보다 우선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발상은 유학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다.
아아! 군자는 친친하고 인민하며 인민하고 애물하니 그 본말과 선후의 순서가 저절로 이와 같아서 바뀔 수 없다. 어찌 우선 자기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하지 못하면서 남의 부모를 먼저 아끼고 사랑하겠는가? 이는 남의 부모를 우선하고 자기의 부모를 뒤로 하는 것이니 본말이 또한 어그러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 의도는 본래 비록 남이 자기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먼저 남의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한 것이다. 자기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할 수 없으면서 남의 부모를 아끼고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사람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저절로 그만 둘 수 없다. 남이 아끼고 이롭게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기다려 사랑하는 것이겠는가?23)
유가에서 사회적 혼란을 해소할 수 있는 토대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륜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혈연관계로부터 출발하는 인륜의 수행은 그 본말과 선후의 차례가 분명하게 존재하므로 친친인민애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대응을 한다. 묵자의 겸애는 결과적으로 남의 부모를 우선시하는 것을 용인하게 되므로, 본말과 차서가 전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용문 마지막 부분에서 신후담은 묵자의 겸애가 지닌 허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묵자의 겸애는 타인에 대한 호의가 규범적인 당위가 아니라 타자의 호의여부에 달려있는 상대적인 호혜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 상대의 호의를 기대할 수 없다면 타자에 대한 호의를 나 역시 베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후담은 친친은 양지·양능이며 인이라는 것24)을 거듭 강조하며. 사람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본성의 발현이므로, 그만 둘 수 없는[不容已] 소당연의 법칙이고, 바꿀수 없는[不可易] 소이연의 정리임을 확인하고 있다.
묵자의 ‘절용’에서 대해서 신후담은 주로 장례와 매장을 문제 삼는데, 『묵자』에서 다음과 같이 장례와 매장의 제도를 설명했다.
관은 세 치 두께면 충분히 썩고, 수의는 세 벌이면 충분히 시신이 썩는다. 땅은 깊이 파되 아래로는 물이 스며들지 않고 위로는 기(氣)가 새어 나오지 않으며, 봉분이 어디인지 알 수 있으면 그만이다. 곡하며 가고 곡하고 오니 돌아와서 먹고 사는 생업에 종사한다.25)
신후담은 이러한 묵자의 장례와 매장 제도의 절검이 지나쳐 무례와 혼란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상사를 후하게 하는 것이 겉으로 화려하게 보일 수 있지만 상을 당한 효자의 비통함과 슬픔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을 억지로 억제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의나 관곽을 성대하게 하고 삼년상이 통용되었지만 부모의 은혜는 갚을 수 없고, 효자의 마음 또한 유감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슬픈 마음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다만 부모의 상이라도 삼년의 기한을 두어 본성을 상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제도화한 것인데, 묵자는 이러한 사람 마음의 당연한 정감을 표현하는 것조차 지나치다고 여겨 모두 줄이고 곧바로 생업으로 복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신후담은 이와 같이 묵자의 절장은 각박할 뿐 아니라 사람으로써 차마할 수 없는 짓이라고 질타했다.26)
신후담의 묵자의 절장 비판은 전형적인 유학자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묵자는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7) 신후담은 이러한 논의를 제외시키고 극단적인 장례 제도만 거론한 것이다. 묵자는 의식은 산 사람을 위한 리이고, 장례와 매장은 죽은 사람을 위한 리인데, 절검을 해야 하는 것은 죽은 사람 위한 것 뿐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보았다.28)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한 장례에 어떤 낭비도 있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산 사람의 생업을 해쳐서도 안 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하며(興利除害)’하여 ‘겸애교리(兼愛交利)’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장의 의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안위를 모두 고려하는데 있다.’29)라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신후담이 묵자의 절용을 비판하는 이유는 「묵자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묵자론」에서 신후담의 비판 근거는 당연한 정리[當然不易之定理]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당연한 정리(定理)가 있다. 성인은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고,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맞는다.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으니 반드시 정밀하게 택하여[精擇] 지켜야 하고 힘쓰지 않으면 맞지 않으니 반드시 견고하게 잡아서[固執] 지켜야 한다. 혹 위로 생각하지 않고 힘쓰지 않아서 이르지 못하고 혹은 아래로 정밀하게 택하고 견고하게 잡는 것이 절실하게 더해지지 않으면서, 다만 바로 사사로운 지혜나 얕은 견문으로 이에 합치하고자 하면 또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끝내 비슷한 경지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건대, 묵씨의 도는 그 또한 당연한 바꿀 수 없는 정리를 살피지 못했으니 함부로 사사로운 지혜와 얕은 견해를 남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설이 어찌 중도를 잃은 것이 이리도 심한 것인가?30)
당연불역지리는 주희가 『중용』의 솔성지위도를 설명할 때 사용한 것으로31) 신후담은 이를 『중용』의 성(誠)으로 설명한 것이다.32) 그는 『중용』의 “擇善”을 “精擇”으로 바꾼 것인데, 정밀하게 택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당연지정리이다. 마찬가지로 잡아 지키는 것도 바로 당연지정리이다. 그러므로 묵자가 도를 내세우지만 얕은 지혜과 사견으로 세운 견해에 매달려 과하거나 부족한 이론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신후담이 묵자의 도라고 한 것은 묵자가 공자의 사상을 일부 공유했다고 보기 때문이다.33) 신후담은 『팔가총평』에서 제자백가의 등장 배경을 서술했는데, 고대 성왕이 다스리고 교화하는 것은 바로 유가의 도라고 보았다. 유가의 도로 도덕과 문화가 일치된 삼대는 사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으나, 주나라가 쇠퇴하고 성군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서 천하의 사상가들이 각자 자신이 타고난 기질대로 학문을 탐구하면서 사견에 갇혀 유가의 도를 떠나 방황하게 되었고, 결국 따를 만한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자백가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34) 그러므로 묵자가 검약을 귀하게 여기고 겸애를 주장하는 것도 공자의 ‘寧儉’35)과 ‘汎愛’36)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보았다.37) 이 때문에 묵자의 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신후담도 묵자 학설의 핵심으로 겸애와 절검 두 가지로 보았다. 묵자는 세상의 군주·부모·형이 자기만 사랑하고, 신하·자식·동생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희생하는 것을 자기의 이로움으로 삼기 때문에 도둑과 전쟁도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모두 서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를 주장했다.38) 묵자는 또 세상의 다양한 기물과 생활방식을 살펴보면서, 화려한 그릇을 사용하고 얼음 띄운 국을 마시며 비단옷을 입으며 장식하여 사치를 추구하며, 후장을 하는 따위에 반대하고 거상 중에도 생업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복잡한 예식을 행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법령이나 조정의 의론에 얽매이는 것을 폐해로 지적했다.39) 신후담의 논지에 따르면 겸애는 묵자가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으려다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고40), 절검은 사람들이 지나친 것을 바로 잡으려다 미치지 못하게 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41) 이 두 가지 모두 당연지정리를 깨닫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신후담이 말하는 당연지정리는 무엇인가?
이른바 당연한 정리라는 것은 임금은 인(仁)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신하는 충(忠)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부자 관계에는 자(慈)와 효(孝)가 준칙이며, 형제 사이에는 우애[友]와 공손[恭]이 마땅함이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도 자기 몸을 사랑함을 알아야 하며, 내가 내 집과 나라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도 자기의 것을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군신·부자·형제에게 실천하고, 미루어 물아의 간격이 있는 것에도 베푼다면 각기 그 마땅함이 있을 것이다. 제기의 숫자로 존비를 구별하고, 변면(弁冕)의 의장으로 귀천에 등급을 두며, 의금(衣衾)과 관곽의 제도로 상사(喪事)를 정중히 치루며, 문발(免髮)과 곡인(哭靷)의 절차로 슬픔을 억제한다. 예는 몸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거둥은 면앙주선(府仰周旋)하는 동작에 드러나며, 음악은 마음을 기르는 것이니 그 이치는 금슬(琴瑟)과 간척(干戚)에 깃들어 있다. 의복, 음식, 상례와 장례의 제도와 예와 악을 만들어 가르치는 까닭은 대개 각각 그 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당연지정리가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42)
신후담이 보기에 유가의 예는 음식이 너무 낭비되는 문제[饐], 의복이 지나치게 화려해지는 문제[侈], 장례와 애도가 예법을 벗어나는 문제[越乎禮制], 음악과 교제가 문란해지는 문제[煩交奸聲]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본래 당연지정리의 범주 안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잡으려면, 당연지정리를 명확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묵자는 이러한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겸애를 실천하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낙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당연지정리를 겸애라 여긴다면 이는 결국 극단으로 나아간 것으로 참된 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부자·형제 관계에서도 겸애를 주장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가족을 경시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절검 역시 단순히 절약을 강조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극단적인 검약만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왕이 만든 제도를 경시하는 것 뿐 아니라 도리를 저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묵자의 사상은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고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버린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신후담은 묵자의 겸애 논리가 불교의 자비와 같다고 비판하는데, 「묵불론」에서 불교와 묵자의 유사점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불교의 자비와 보제는 묵자의 겸애의 논리이다. 불교의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은 바로 묵자가 부모를 버리는 것과 같다. 불교의 도는 죽음을 적멸로 여기고 시신을 들판에 버린채 슬프고 애통하게 여기지 않으니 묵자가 장례를 박하게 하고 깊이 애통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불교의 도는 천당 지옥의 이름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위협하니 묵자가 천귀에 의탁하여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과 같다. 묵가에서 거자(巨子)를 성인으로 여기고 시신을 떠받들며 후세에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법사(法嗣)와 같다.43)
신후담은 불교의 출가·죽음·천당지옥설·법사 등 구체적인 사항들에서 묵가와 얼마나 유사한지를 적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묵가와 불교를 비판하는 논리는 유교전통의 벽이단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맹자 이후는 특정 학파를 지칭하여 적대적인 태도가 분명해지고, 유교 이외에 이설에 대한 배타성이 강화되었다. 맹자는 양주와 묵적을 특정하였고 공맹유학을 계승하는 유학이 전통이 당송시기에 이르면 도통의식에 따라 성인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론은 원칙적으로 모두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실제 조선에서 벽이단의 대상은 초기에는 불교와 노장, 중기는 양명학과 선불교, 후기는 천주교였다. 제자백가는 한당 이후 유가를 제외하고 현실적 영향력을 상실하였지만, 유교의 학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되어 이단의 범주로 묶이게 되면서 배척되는 것은 송대였고, 주자의 도통론에 입각한 유교정통론이 확립되면서 유교 이외의 사유와 문화는 모두 주변,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묵불론」은 다소 피상적으로 묵가를 불교와 묶어 이단으로 비판한 것이다.
신후담은 묵가와 불교의 출현 배경이 서로 다르며, 어떤 영향을 주고 받은 일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묵가나 불교가 모두 사의(私意)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학설은 동일하게 실패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다.44) 그는 유가를 제자백가의 원류로 보면서 제자백가를 유가와 동일한 반열에 둘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45) 유가와 제자백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공사(公私) 개념이다.46) 따라서 묵가와 불교는 유가의 공도(公道)47)와 대비하면 사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가의 도를 공으로, 유가 이외의 학설을 사로 대비하는 것은 정통과 이단의 구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신후담의 취지는 유가가 정통이며 제자백가가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니다. 천하가 혼란에 빠진 전국시대에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의견을 내고 사사로이 학문을 탐구한 결과 공도의 한 단면만 받아들인 것을 유가를 포함한 제자백가로 보았다. 후대 유가는 공도로써 제가를 포괄하지 못하며, 제가는 공도의 한 단면만 받아들이면서 공통된 근원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진단한다.48)
성호 문하에서 서학에 비판적이었던 신후담의 서학대응 논리에는 많은 부분 묵자와 관련된 논의가 중첩되어 있다. 익숙한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묵자의 논의를 새로운 이단인 천주교에 배척에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자백가를 단순히 이단으로 배척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Ⅲ. 묵가의 연원과 분기
묵자는 물론이고 묵자 이후 제자들의 행적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신후담은 「묵씨원류」에서 단편적인 기록들을 모아 묵가의 흐름에 대해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묵가와 관련된 조선학자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한다. 묵자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노혜공(魯惠公) 때, 재양(宰讓)을 보내 천자에게 교묘(郊廟)의 예를 청하니, 주환왕(周桓王)은 사각(史角)을 보냈다. 혜공이 사각을 노나라에 머물게 하여 묵자가 사각에게 배웠다. 대개 사씨는 귀신의 일을 주로 말했다. 그러므로 묵자의 학문도 귀신을 숭상했다.49)
이 내용은 『여씨춘추』에 보인다.50) 교제와 묘제는 모두 당시 천자의 예이지만, 노나라가 요청하자 주왕실에서 사관을 보내 예를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는 노의 체제사를 비례라고 한 것이다.51) 여기서 주환왕이 사각을 보냈다고 했는데, 주환왕을 주평왕의 오류로 보기도 한다.52) 혜공이 사각을 돌려보내지 않고 노나라에 그대로 머물게 했고, 묵자가 사각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일설에서는 사각의 후손에게 배웠다고도 한다. 사각이 귀신의 일을 주로 말한 것은 그가 교묘의 제사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신후담은 묵자가 바로 이러한 제례의 전문가인 사각으로부터 배웠으므로 귀신을 숭상한다고 본 것이다.
신후담이 제례 전문가인 사각이 귀신을 주로 말했다는 점을 들어 묵자의 상귀를 지적했는데, 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것은 천에 대한 존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본래 고대로부터 천신(天神)· 지기(地祇)·인귀(人鬼)는 모두 제사의 대상으로 중시되었고, 조상에 대한 제사는 결국 사귀(事鬼)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유학자들은 묵자의 귀신을 공자가 말한 괴력난신53)으로 간주할 뿐이다. 공자는 귀신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지만, 묵자는 귀신이 천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적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천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신후담은 배제하고 묵자가 주나라에서 전수받은 지식을 괴력난신과 같은 저급한 차원의 귀신문제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묵자의 천개념과 귀신론은 이후 서학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비판 논리로 재구성되는데, 신후담의 「묵불론」은 이러한 천주교 비판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후담은 이어서 묵자가 사각에게 배운 학술이 어떻게 전수되는지를 기술한다.
묵자의 제자는 금골리, 고하(高何), 현자석(縣子石) 등이 있다. 금골리(禽滑釐)는 금골려(禽滑黎), 금골리(禽滑氂)라고도 하니 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금골리의 제자는 허범(許犯)과 색로참(索盧參)이며, 허범의 제자는 전계(田繫)이다. 지금의 『묵자』에서 오직 금골리의 이름만 보이는데, “신의 제자인 금골리 등 300명이 신이 지키려고 수위하는 도구를 들고 송나라 성에 있으면서 초나라의 적을 기다리고 있으니 비록 신을 죽이더라도 뜻은 결코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54)라고 한 것이 있으니, 금골리는 묵자의 도를 전한 제자이다. 고하와 현자석(縣子石)은 본래 제나라의 난폭한 자들로 마을에서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묵자에게 배워 행실을 바로잡았다. 색로참(索盧參)은 동방의 간교하고 교활한 자로 또한 금골리에게 배워 개과천선했다.55)
『묵자』에서 금골리는 「공수(公輸)」, 「비성문(備城門)」, 「비제(備梯)」 등에 보이는 데 ‘禽子’로 지칭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신후담이 인용한 것은 「공수」편으로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묵자가 저지하였는데 금골리가 묵자와 함께 공격을 내용이다. 금골리는 『사기』, 『장자』, 『설원』, 『열자』 등에 ‘禽滑釐’로 표기되는데, 신후담이 지적한대로 문헌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 『여씨춘추』에 ‘禽滑釐와 ‘禽滑黎’가 혼용되고, 『한서』에 ‘禽骨釐’ 또는 ‘禽屈釐’로 표기되었다. 청대 손이양(孫詒讓)은 이와 같이 滑, 骨, 屈이나 釐, 氂, 黎자가 혼용되는 것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으로 보았다.56)
고하(高何)와 현자석(縣子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묵자』에는 고석자(高石子)만 언급되고 고하는 나오지 않는다.57) 현자석도 『묵자』에서 볼 수 없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여씨춘추』에 인다.58) 『여씨춘추』의 다른 곳에는 묵자의 학술이 금골리에서 허범(許犯)으로 다시 전계(田繫)로 전수한 것으로 기록했다.59) 『사기』에서는 전자방, 단간목, 오기, 금골리 모두 자하에게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0)
이규경(李圭景, 1788~1856)도 『여씨춘추』를 인용하면서, 묵자를 따르는 인물들조차 모두 현인으로 여긴 것은 성인의 도는 누구를 막론하고 깨우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61) 이는 이규경이 묵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고, 성인은 교화를 위해 가르치는 대상에 차별을 두지 않고 포용했다는 것으로 유가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비록 『여씨춘추』를 인용한 것이지만, 조선학자가 고하·현자석·색로참 등 묵가의 인명을 언급한 것은 신후담 이외에는 이규경 뿐이다.
다음으로 신후담은 묵가의 분기에 대해 설명한다.
그 후에 상리근(相里勤)의 제자들과 오후(五侯)62)의 무리와 남방의 묵가와 고획(苦獲)·이치(已齒)·등릉자(鄧陵子) 등의 무리가 모두 묵자의 경전을 외우면서도 배반하고 대립하여 같지 않았으니 서로 별묵이라고 하였다. 또 진혜왕 때 거자(鉅子) 복돈(腹䵍)과 당고과(唐姑果)의 무리는 모두 묵가를 배웠다고 칭했다. 복돈은 진나라에 살았는데 혜왕의 중임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살인을 하자 혜왕이 특명을 내려 처벌하지 않자 복돈은 “묵가의 법은 살인자는 죽고, 상해자는 형벌에 처합니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자기 아들을 죽였다. 당고과(唐姑果) 또한 혜왕의 중임을 받았다. 산동(山東) 출신의 묵가 사자(謝子)가 혜왕을 알현하려고 하자, 당고과는 혜왕에게 “그는 사람이 매우 험악하여 장차 탁월한 말재주로 젊은 군주의 신임을 얻으려 한다.”라고 말했다. 사자가 도착했으나 왕은 등용하지 않았으니 사자가 마침내 떠나버렸다.63)
앞부분에서 상리근의 제자를 비롯하여 묵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별묵이라며 대립했다는 내용은 『장자』 「천하」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한비자』 「현학」편에 “묵자가 죽고 난 뒤에 상리씨의 묵가가 있었고 상부씨의 묵가가 있었고 등릉씨의 묵가가 있었다[自墨子之死也 有相里氏之墨 有相夫氏之墨 有鄧陵氏之墨].”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복돈과 당고과에 대한 내용은 『여씨춘추』에서 인용한 것이다.64) 복돈은 『여씨춘추』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묵가의 인물이며, 당고과의 일은 『한비자』와 『설원』에도 보인다. 각각의 기록된 내용은 비슷하지만 『회남자』에서 당고과는 ‘唐姑梁’으로 표기했고65), 『설원』에서 ‘謝子’가 ‘祁射子’로 바뀌었다.66)
신후담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맹자의 시대에 묵가는 후장(厚葬)을 비판했지만, 맹자의 말을 직접 듣고는 오랫동안 침묵하고 맹자의 말을 따랐다. 『한서』 「예문지」의 묵가류는 윤일(尹佚)67), 전구자(田俅子), 아자(我子), 수소자(隨巢子), 호비자(胡非子)의 무리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말할 만한 것이 없다.68) 도연명의 『성현군보록』에 송형(宋鉶) 등의 아묵(亞墨)이 있다.69)
전국시대는 묵가의 세력은 강성했다. 묵가가 맹자와 직접 논변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맹자의 등장으로 묵가의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사실여부와 관계 없이 유학자들이 묵가에 대한 우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서』 「예문지」에 거론된 묵가에 대해 신후담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도잠(陶潜, 365~427)이 찬한 『성현군보록』은 고대 성현을 보좌했던 인물들의 사적과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여기서 자사(子思)·자장(子張)·안씨(顔子)·맹씨(孟子)·칠조(漆雕)·중량(仲梁)·악정(樂正)·공손(公孫)을 팔유(八儒), 송형과 윤문, 상리근과 오후자, 고획·이치·등릉자를 삼묵(三墨)으로 지칭했다. 앞에서는 금골리를 수제자라고 했으나 여기서 송형을 아묵이라고 한 것은 『장자』 「천하」편에 근거한 것이다. 도잠은 묵가의 인물도 성현의 도를 보좌한 인물로 유가와 병칭한 것인데, 신후담도 이를 그대로 가져와 묵가의 원류를 설명한 것이다.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은 『성현군보록』을 증보하고 발문을 남겼는데, 묵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그의 관심은 공문의 인물을 정리하는 것에 있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0)
신후담의 「묵씨원류」는 온갖 잡사를 모아놓은 『여씨춘추』에 근거한 것이지만, 비교적 체계적으로 묵가의 기원과 분기가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묵씨원류」는 본래의 취지와 관계없이 제자백가의 발생에 대해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남궁경숙(南宮敬叔)의 요청으로 수레와 말, 하인 등을 노나라로부터 지원받아 주나라를 갈 수 있었다.71) 이때 공자는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고72) 하는데, 공자가 주나라를 방문해서 보고 들은 것은 『공자가어』 「관주(觀周)」편에 자세하다.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에 간 공자는 노자에게 예를 묻고 장홍(萇弘)에게는 악(樂)을 물었으며, 교제(郊祭)와 사제(社祭)를 지내는 곳을 들렀으며, 명당(明堂)의 법칙, 종묘와 조정의 법도를 직접 살펴보았다.73) 공자가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를 가게 된 것은 남궁경숙이 노나라의 삼환씨 중 하나인 숙손씨(叔孫氏) 맹희자(孟僖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기』 「증자문」에 증자의 예에 대한 질문에 공자가 대답하면서 “내가 노담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다(吾聞諸老聃曰)”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문답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장자』이다.74) 그러나 후대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공자가 노자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배웠다는 “孔子問禮” 자체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데, 공자문례의 최초의 기록도 『장자』 잡편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의구심을 더하게 한다.75)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의 「묵씨원류」에서 묵자는 주나라에서 파견된 제례 전문가를 통해서 배웠고, 공자는 직접 주나라를 방문해서 예악문물제도를 보고 들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당시 중앙에 집중된 통치를 위한 지식이 분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왕실의 쇠퇴는 비록 귀족집안 출신이지만 평민 혹은 사의 신분에 불과한 공자나 묵자에게 지식권력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공자와 묵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앙[주왕실]에 독점되었던 지식을 습득한 것이다. 공자가 습득한 지식은 이후 유가의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 묵자 역시 주나라의 지식을 사각을 통해서 습득했다. 노자는 비록 후대에 도가로 분류되지만, 노자는 주왕실의 통합된 지식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이 성립한다.
Ⅳ. 맺음말
신후담의 『팔가총평』 묵가류는 조선시대 유학 내에서 이루어진 가장 체계적인 묵가 연구로, 단순한 비판을 넘어 묵가 사상의 원류와 전개 양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특히 그는 「묵자론」에서 묵자의 핵심 사상인 겸애와 절용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키면서도, 묵자가 맹자의 비판한 것처럼 결국 ‘무부(無父)’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조선 유학자들이 묵자를 배척했던 전통적 논리와 연결되지만, 신후담은 단순한 거부를 넘어서 묵자의 사상적 기원을 추적하고, 그 사상적 흐름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묵불설」에서는 묵자의 사상이 불교적 사고와 일정한 유사성을 가진다는 점을 논의한다. 신후담은 묵자가 이상적인 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불교의 세계관과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조선 유학자들이 불교를 배척하는 논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묵자 사상을 평가하며, 묵가의 지나친 실천주의가 결과적으로 유교적 인륜 질서를 훼손할 위험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신후담의 묵자 비판 논리는 그의 서학 비판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그는 「묵씨원류」에서 묵자의 사상이 본래 유가적 가치와 일정 부분 공유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무부무군으로 흐르게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그가 서학을 비판하는 방식과도 유사한데, 신후담은 서학이 표면적으로는 천주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내세우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리학적 인륜 질서를 해체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서학의 내세 구원론과 신앙 중심의 윤리가 현실 세계의 군신·부자 관계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는데, 이는 묵자의 겸애 사상이 유교적 친친의 원칙과 충돌한다고 본 그의 비판과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신후담에게 있어 묵가와 서학은 각각 전통적인 유교 질서에 도전하는 사상적 흐름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유가적 가치 체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묵가 사상의 연원과 그 변화를 조명하며, 묵자가 본래 의(仁)과 의(義)를 추구했으나 사상의 편중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무부의 사상으로 귀결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맹자가 지적했던 묵자의 한계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묵자 사상이 초기에는 유가적 가치와 일정 부분 공유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분석이기도 하다. 신후담은 묵가가 점차 유가와 대립적인 위치로 변질된 원인을 탐구하며, 맹자의 비판이 단순한 논쟁 차원이 아니라 유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학술적 대응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종합하면, 신후담은 묵가 사상을 조선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도, 단순한 배척이 아니라 그 사상적 특징과 발전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려 했다는 점에서 기존 조선 유학자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그는 묵가가 유교적 질서와 양립하기 어려운 점을 강조하면서도, 그 기원을 탐구하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의 논의는 유교적 가치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묵가 사상을 독립적인 철학 체계로 평가하기보다는 유교적 관점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신후담의 『팔가총평』을 통한 묵자 연구는 조선시대 제자백가 연구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 묵자 사상이 어떻게 인식되고 논의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제자백가를 연구하는 방식이 단순한 비판에 머물지 않고 일정한 분석적 깊이를 가졌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조선의 지식인이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사상을 이해하려 했던 태도를 반영한다. 나아가 이러한 연구가 현대의 신묵학(新墨學) 혹은 신자학(新子學) 논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