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Hamlet 1601)』은 문학사상 가장 논쟁적이며 다층적인 해석을 낳아온 작품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이 겪는 고뇌와 복수의 여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모순을 투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햄릿』에 대한 비평은 정신분석학, 정치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종교적 차원에서도 기독교적 섭리와 불교적 무상(無常)의 관점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져 왔다.
기존의 기독교적 비평은 햄릿의 갈등을 신의 영역인 ‘심판’과 인간의 영역인 ‘사적 복수’ 사이의 딜레마로 파악한다. 이 관점에서 햄릿은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신의 섭리(Providence)를 수용하고 기독교적 양심을 지키려 했던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불교적 관점에서의 연구들은 햄릿이 ‘나’와 ‘나의 것’이라는 아집(我執)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연기(緣起)의 법칙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모습임에 주목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의 내면적 고뇌와 도덕적 성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지만, 복수라는 행위가 초래하는 피의 악순환과 비극의 근원적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햄릿의 죽음이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나 비극적 숭고함으로 미화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회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간 ‘상극(相克)의 고리’를 끊어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서양의 고전 『햄릿』을 한국의 대순진리회 관점에서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햄릿』은 서구 비극 중에서도 ‘원의 적체’라는 대순사상의 핵심 개념을 분석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다. 햄릿이 처한 부친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숙부의 배신이라는 외적 상황은 ‘원(冤)’의 발생 조건을 충족하며, 복수의 의무와 도덕적 고뇌 사이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심리적 얽힘은 원한이 해소되지 못하고 내면에서 어떻게 심화·적체되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햄릿의 복수 여정을 단순한 심리극이 아닌, 선천 상극의 질서 속에서 원이 누적되어 파멸로 치닫는 ‘복수의 연쇄’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대순사상의 원과 한의 구조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상적 접근은 인류 역사의 원의 시초인 ‘단주(丹朱)’의 서사와 결합하여 더욱 강력한 비교 문학적 설득력을 얻는다. 단주가 겪은 정치적 배제와 그로 인한 원한은, 정당한 계승권을 박탈당한 햄릿의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유사성에 착안하여, 햄릿의 비극을 단순한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나 운명적 문제가 아닌, ‘선천 상극 시대’의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한다. 햄릿이 시도한 복수는 정의를 실현하려는 공적 명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무력으로 세상을 뒤엎는 ‘재민혁세(災民革世)’의 방식이었기에 또 다른 원한과 죽음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순사상이 경계하는 ‘웅패의 술(術)’에 해당하며, 진정한 구원은 호생(好生)의 덕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화민정세(化民靖世)’로 나아갈 때 가능함을 역설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Ⅱ장과 Ⅲ장에서는 서양의 기독교적 관점과 동양의 불교적 관점에서 햄릿의 고뇌와 한계를 분석한다. 이어 Ⅳ장에서는 본 논문의 핵심인 대순사상의 관점을 도입하여, 햄릿과 단주의 원을 비교 분석하고 해원상생의 법리가 제시하는 비극의 극복 방안을 모색한다. 이를 통해 『햄릿』이라는 서구의 비극이 동양의 상생 철학과 만났을 때, 복수와 파멸을 넘어선 새로운 인류 구원의 서사로 확장될 수 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Ⅱ. 비극적 영웅과 기독교적 양심
기독교적 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해석하면 주인공 햄릿은 ‘실패한 기독교인’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그가 성경에 명시된 ‘사적 복수 금지’ 조항1)을 어기고 스스로 죄를 단죄하는 복수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기영은 햄릿이 비극적 영웅은 되었으나 기독교인으로서는 실패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주장한다.2) 기독교적 가치는 복수보다 용서를 강조하며, 복수를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햄릿의 복수는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행위이자 영혼의 정죄에 이를 수 있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햄릿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이와 다른 평가가 존재한다. 그 근거는 햄릿이 복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적 양심으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하며 신의 섭리를 의식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극의 마지막 5막에서 그가 회개하고 신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은 그가 결국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생을 마감한 햄릿이 1막부터 4막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토록 치열하게 갈등하고 고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다양하겠으나,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당시 영국 사회의 종교 문제를 들 수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종교는 긴장과 갈등의 중심이자 원천”3)이라고 할 만큼, 종교는 당시 영국인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중용 정책을 통해 헨리 8세가 설립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를 중심으로 신·구교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통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국교회 내부에서는 청교도(Puritan)들이 ‘칼뱅 사상’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결과 당시 영국은 가톨릭, 국교회, 청교도 간의 종교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4)
이러한 종교적 문제와 더불어, 당시 영국은 ‘고전 문화의 부활’을 상징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오면서 복잡한 종교적 가치관에 고대의 사상까지 유입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한 결과로 『햄릿』에는 고대, 중세, 근대의 가치가 혼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의 주인공 햄릿은 이러한 혼돈의 소용돌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즉, 햄릿의 갈등은 신·구교의 종교적 대립뿐만 아니라 고대, 중세, 근대 가치의 충돌을 내포한다. 따라서 “전인적 르네상스인”5)인 햄릿은 이 모든 사상과 가치, 종교에 대한 의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바로 그 의식들이 충돌함으로써 갈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햄릿이 유학한 비텐베르크 대학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친 개신교 사상의 상징적 장소이다. 따라서 햄릿은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보이나, 셰익스피어 부친의 가톨릭 신앙 기록 등을 고려할 때 작품 기저의 가톨릭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즉, 연옥을 인정하는 가톨릭 세계관이 혼재되어 있었기에 햄릿은 유령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막에서 선왕의 유령이 요구한 숙부 클로디어스(Claudius)에 대한 복수는, 앞서 언급한 기독교적 가치관에서는 재고의 여지없는 불가능한 행위였다. 하지만 햄릿에게는 기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의 가치에 대한 동경 또한 존재했다. 기독교 전파 이전의 이교도적 복수 가치관에 따르면 복수는 명예와 직결된 행위였으며, 자식은 응당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했다고 한다.6) 또한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복수는 단순히 이교도적 가치관을 넘어,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에게 혈연적 본능이자 살해당한 아버지가 자신의 친부임을 행동으로 입증하는 문화적 의무이기도 했다.7) 그래서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요구하며 “너에게 본성이 있다면 참지 마라”(If thou has nature in thee, bear it not, 1.5.81)8)라고 부자간의 혈연관계를 강조한다. 또한 클로디어스가 햄릿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레어티즈(Laertes)에게 복수를 권할 때도 “네가 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주겠느냐?”(what would you undertake/ To show yourself in deed your father’son/ More than in words? 4.7.123-25)라고 묻는다. 비록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복수를 엄격히 금했으나, 당시에 복수를 금지하는 설교문과 팜플렛 등이 만연했던 역설적인 상황은 그만큼 현실에서의 복수 관행이 달랐음을 시사한다.9)
게다가 햄릿의 경우, 복수는 단순히 혈연관계에 의한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과 국법은 복수 행위를 신과 신의 대리인인 국왕의 권한으로 선언했다.10) 문제는 햄릿의 복수 대상이 바로 신의 대리인인 국왕이라는 점이다. 국왕에게 호소할 수도 없고, 국왕을 상대로 합법적인 응징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의 간섭’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사회 정의 실현과 기독교적 양심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장승재는 “악인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부르짖을 것을 요청”하는 시편 94편을 언급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신의 심판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이는 깊은 신앙을 요하는 것으로서 당시 햄릿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고 주장한다.11)
하지만 햄릿의 복수 행위를 단순히 ‘기독교인으로서의 믿음 부족’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햄릿은 고대 그리스 영웅이다”12)라는 주장처럼, 그는 고대의 가치를 동경했기 때문이다. 햄릿이 비텐베르크 유학 동료인 호레이쇼(Horatio)를 “가장 균형 잡힌 사람”(107)(thou art e’en as just a man / As e’er my conversation cop’d withal. 3.2.54-5)이라고 평가한 것 역시, 갈등의 순간에 이성을 중시하는 고대 스토아시즘의 가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햄릿은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명예가 지켜질 수 있도록 호레이쇼에게 진실이 전달되기를 부탁한다(“이 일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 행동과 그 이유를 바로 전해주게” (Report me and my cause alright/ To the unsatisfied. 5.2.344-5).
이렇게 상충하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극의 전개 과정 중 5막에 이르러 햄릿이 기독교인으로서 신의 섭리를 깨닫는 중요한 전환점이 등장한다. 클로디어스의 계략으로 떠난 영국행 배에서 해적을 만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우리 인간들이 일을 대충 벌여 놓는다 해도/ 말끔하게 마무리하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걸” (There’s a divinity that shapes our ends,/ Rough-hew them how we will, (5.2.10-1)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 결과 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을 억지로 통제하거나 자시의 행동에 지나치게 자책하지 않고, 수동적이며 관조적인 자세로 변화한다. 그러면서 햄릿은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의 인식을 보인다.
그럴 필요 없네. 전조 따윈 무시하는 게 좋아.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데도,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란, 지금 오면 장차 오지 않을 것이고,
지금 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오고 마는 법.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순리를 따르세.
어느 누구도 사후의 일을 알 수 없는데,
세상을 일찍 떠난들 아쉬울 게 뭐 있겠나. (203)
Not a whit. We defy augury. There is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a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e; if it be not to come,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 The readiness is all. Since no man, of aught he leaves, knows aught, what is’t to leave bedtimes? Let be. (5.2.215-220)
위 인용문은 성경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이는 참새보다 귀한 성도를 세심히 돌보시는 ‘특별한 섭리’를 강조한 칼뱅의 용어를 반영한 것으로, 기독교적 깨달음의 발로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에 브래들리(Bradley)는 이를 칼뱅의 예정교리가 아니라 스토아적 운명론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위 인용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히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운명론이라 불려야 할 일종의 종교적 체념을 표현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섭리의 뜻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실천하려는 어떠한 결단과도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On the contrary, they seem to express that kind of religious resignation which, however beautiful in one aspect, really deserves the name of fatalism rather than that of faith in Providence, because it is not united to any determination to do what is believed to be the will of Providence.13)
그럼에도 홍기영은 햄릿이 이제 하늘의 합당한 대행자가 되어 자신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겼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14) 강석주 또한 햄릿이 비록 신의 뜻을 저버리고 도덕적 잘못을 범한 실패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이지만, 햄릿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신의 섭리에 귀의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기독교적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15)
이처럼 기독교적 섭리에 의지한 해석은 햄릿의 파멸을 영적 구원으로 승화시키지만, 현세의 비극적 악순환을 끊어내는 데에는 한계를 보인다. 이러한 한계는 비극을 초래한 인연의 굴레와 햄릿 자신의 아집(我執)을 성찰할 때 비로소 구체화된다. 이에 본고는 햄릿의 고뇌를 보다 심층적으로 파악하고자 인과법과 무명의 이치를 다루는 불교적 관점의 논의로 이행하고자 한다.
Ⅲ. 연기설과 집착의 굴레
『햄릿』의 불교적 해석은 성기서의 여러 논문16)을 통해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그 주요 쟁점은 불교의 연기설(緣起說)과 삼법인(三法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 연기설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하며 발생하고 소멸한다”17)는 이치이다.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내는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함),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음)를 의미하며, 이를 간략하게 “무상, 고, 무아”로 표현한다. 이 삼법인은 연기설의 필연적 귀결로서, 연기적 세계관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해 보여준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에 변하고(무상),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무아), 그 실체 없음을 깨닫지 못해 집착하므로 고통스러운 것(고)이다.
이러한 불교적 관점에서 성기서는 햄릿의 비극을 ‘모든 존재의 속성이 무상-고-무아’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그는 햄릿의 복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수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연기한 것이며, 연기한 것이기에 복수는 덧없으며,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즉, 복수는 없고, 육체의 파멸인 살육만이 있을 뿐이다. 햄릿의 복수 과정에 포함된 주요 등장인물, 유령, 햄릿, 클로디어스 등은 모두 덧없는 존재이고, 모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불변의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복수 행위는 존재의 무상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은 고정불변이라는 실체론자 입장에서 파생된 육체의 파괴행위에 불과할 뿐 인간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삼법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셋 모두가 정신 또는 정신과 육체가 혼합된 제각각의 ‘흐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18)
이러한 관점에서는 햄릿이 5막 2장에서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진정한 성공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햄릿이 죽인 시점의 클로디어스는 ‘친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고 형수까지 차지한’ 1막의 악당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자 조카의 목숨을 노리는 왕’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즉, 동일하지 않은 존재에 대한 단죄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이다.19)
햄릿의 복수가 성공이 아닌 또 다른 이유는 선왕의 유령이 의도했던 복수의 본질과 다르기 때문이다. 선왕의 유령이 햄릿에게 복수를 부탁한 것은, 거짓에 속고 있는 덴마크 왕국의 모든 이들에게 진실을 규명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함이었다.
햄릿, 들어봐라.
사람들은 내가 정원에서 낮잠을 자던 중,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알고 있다.
덴마크 백성들 모두
이 조작된 사인에 감쪽같이 속고 있다.
하지만 알아 두어라. 내 귀한 아들아.
아비를 물어 죽인 독사는 지금
그 머리에 덴마크 왕관을 쓰고 있다. (44)
Now, Hamlet, hear.
’Tis given out that, sleeping in my orchard,
A serpent stung me — so the whole ear of Denmark
Is by a forged process of my death
Rankly abus’db — but now, thou noble youth,
The serpent that did sting thy father’s life
Now wears his crown. (1.5.34-40)
유령은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음란하고 저주받은 근친상간의 놀이터”( Let not the royal bed of Denmark be/ A couch for luxury and damned incest, 1.5.82-3)가 된 덴마크 왕실을 바로잡아 정의를 실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의 결말에서 드러나듯, 왕위를 이을 햄릿마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덴마크의 왕위는 선왕 시절 적대 관계였던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Fortinbras) 왕자에게 넘어가고, 덴마크 왕실은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
또한 선왕의 유령은 햄릿에게 클로디어스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면서도 그의 어머니인 왕비 거투르드(Gertrude)에게는 물리적 복수를 명하지 않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도록 하여 햄릿의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게끔 했다(1.5.84-80).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5막 결투 장면에서 클로디어스가 준비한 독약을 거투르드가 마심으로써 그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유령이 원하던 복수의 결과가 아니었다. 거투르드 외에도 왕위 찬탈에 대한 복수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오필리어(Ophelia), 폴로니어스, 레어티즈, 그리고 햄릿의 친구인 로젠크란츠(Rosencrantz)와 길든스턴(Guildenstern)까지 무고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불교적 관점에서는 햄릿의 복수를 헛된 것으로 보지만, 그럼에도 햄릿을 “무상성을 지적인 차원과 체험적 차원에서 인식하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20) 성기서는 그 근거로 두 가지 사건을 든다. 첫째는 영국으로 유배 가는 길에 해적들과 싸운 사건으로, 이는 그 자체로 무상성의 극치인 죽음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21) 둘째는 5막 1장의 묘지 장면으로, 한때 왕실의 어릿광대였던 요릭(Yorick)의 해골을 보며 존재의 무상성·괴로움·무아라는 삶의 속성을 읽어내고 있다는 것이다.22) 햄릿은 무덤지기에게 해골을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불쌍한 요릭!
난 그를 알고 있네, 호레이쇼.
재담은 끝이 없고
기막힌 상상력을 가진 친구였지.
난 천 번도 넘게 그의 등에 업혀 다녔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되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것 같네.
입술이 여기 달려 있었는데.
난 그 입술에 얼마나 자주 입을 맞췄는지 몰라.
좌중을 온통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그대의 익살, 광대 춤, 노래,
그 신명 나던 재담은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아래턱은 빠져 달아나 버리고?
그 꼴을 하고 마나님 방으로 가서
이렇게 말해 줘라.
한 치 두께의 분칠을 해도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될 거라고
네 꼴을 보고 웃게 하란 말일세. (188)
Alas, poor Yorick. I knew him, Horatio, a fellow of infinite jest, of most excellent fancy. He hath bore me on his back a thousand times, and now — how abhorred in my imagination it is. My gorge rises at it. Here hung those lips that I have kissed I know not how oft. Where be your gibes now, your gambols, your songs, your flashes of merriment, that were wont to set the table on a roar? Not one now to mock your own grinning? Quite chop-fallen? Now get you to my lady’s chamber and tell her, let her paint an inch thick, to this favour she must come. Make her laugh at that. (5.1.178-89)
햄릿의 생각은 이제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과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에게로 옮겨가, 그들의 고귀한 시신도 무덤 속에서는 한 줌의 흙이 되어 결국 술통 마개나 벽구멍 마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한다 (5.1.200-5). 이정호는 햄릿의 이러한 인간존재의 깨달음을 굳이 특정 종교에 한정 지을 수 없다고 보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불교에서도 세상 만물은 서로 연관이 있으며, 원소들은 윤회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깨달음에는 종교적인 울타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울타리를 넘어서는 위대함과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23)
이정호의 주장처럼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라는 성경 구절과도 상통하며, 이는 특정 종교를 넘어선 우주적 진리의 깨달음일 수 있다. 즉,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은 서양의 이교도, 기독교, 그리고 동양의 불교가 공유하는 보편적 진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적 진리 또한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는 우주적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고타마 붓다 역시 이를 언급한 바 있다.
고타마 붓다는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연기법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우주적인 법칙이며, 자신은 단지 이 우주적인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等正覺] 후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12연기설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24)
그러므로 햄릿의 복수는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우주적 법칙”에 따른 인과응보의 결과로 해석 가능하다. 따라서 무고한 생명을 죽게 한 주인공 햄릿 역시 그 업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햄릿은 체험을 통해 삼법인의 이치를 어느 정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수라는 살인 행위를 감행했을까? 성기서는 그 해답을 햄릿의 현실 인식과 가치관의 괴리에서 찾는다.
우선, 햄릿은 종교적 수행자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왕자이며 “정치가·군인·학자”(3.1.153)로 묘사되는 그가 속한 사회는 자아의 영속성과 신의 심판을 믿으며, 지혜보다는 개인의 사회적·윤리적 가치가 최우선시하는 사회였기에, 그 가치관이 명령하는 바를 따라야 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탐구보다는 사회정의나 윤리적 가치가 더 중시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불교적 삶과 햄릿의 삶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살아가는 과정은 같지만, 그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25)
위 인용문처럼 햄릿의 사회적 역할은 “궁정인의 구변과 기사의 무술과 학자의 안목을 겸비하고 있는 인물” (The courtier’s, soldier’s, scholar’s eye, tongue, sword, 3.1.153)로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햄릿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과 제약은 레어티즈(Laertes)가 여동생 오필리어에게 건네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분의 높은 신분으로 비추어 보건대,
자신의 뜻대로만 행동하실 수는 없는 분이다.
그분은 타고난 자신의 신분에 얽매여 있으니까.
세자빈을 선택할 경우에도,
이 나라 만백성의 뜻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31)
His greatness weigh’d, his will is not his own.
For he himself is subject to his birth:
He may not, as unvalu’d person do,
Carve for himself, for on his choice depends
The sanity and health of this whole state;
And therefore must his choice be circumscrib’d
Unto the voice and yielding of the body
Whereof he is the head. (1.3.17-24)
결국 햄릿이 체험적으로 우주적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가 속한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햄릿의 세계는 인생의 괴로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는 하나, 그것을 경감시키거나 해탈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고 평가받는다.26) 불교적 진리는 깨달음과 실천이 동반되어야 완성되는 것이기에, 햄릿의 비극은 “지혜와 실천의 괴리”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27)
이러한 불교적 분석은 기독교적 섭리론과 마찬가지로 비극을 초월적 질서나 숙명으로 수용하게 하여, 파국을 실천적으로 타개하기에는 정적이고 수동적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에 본고는 정적 수용의 한계를 넘어 보다 능동적이고 사회적인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다음 장에서 대순사상의 해원상생 관점으로 『햄릿』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Ⅳ. 햄릿과 단주 : 재민혁세와 화민정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햄릿의 비극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인간인 햄릿이 신의 영역인 ‘복수’를 자처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극의 결말에서 그가 신의 섭리를 수용하고 순리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보편적으로 그의 영혼은 구원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공적 의무를 위해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는 햄릿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영웅적 면모를 갖춘 비극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불교적 관점에서 햄릿의 비극은 존재의 무상함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실에서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여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초래했으므로, 열반에 이르지 못한 고뇌하는 중생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신종교인 대순사상(大巡思想)에 의한 해석은 어떠한가? 대순사상은 유·불·선을 모두 수용하는28) 사상으로, 기존 종교들이 인식하는 우주의 근본 진리를 공유한다. 그러나 대순사상만이 갖는 가장 차별화된 관점은 우주가 상극(相克)의 이치로 인해 원(冤)과 한(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이다. 이는 기독교의 원죄론이나 불교의 업보(카르마)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대속과 회개를 통해, 불교에서는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구원(성불)에 이른다고 본다. 반면에 대순사상에서의 구원은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上帝)의 직접적인 개입, 즉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이루어진다. 『전경』 공사 1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29)
상극에 지배된 선천은 원과 한이 가득 찰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음양의 주재자인 상제가 어긋난 도수를 바로잡는 천지공사이다. 즉,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神道)30)로부터 원을 풀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원을 풀고 함께 상생하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의 법리를 통해 후천 선경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햄릿이 당면한 ‘아버지의 복수’ 문제를 어떻게 해원상생의 법리에 따라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는 『전경』의 차경석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또 하루는 경석에게 가라사대 「갑오년 겨울에 너의 집에서 三인이 동맹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렇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그 일을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고 하시니 경석이 낙루하며 「그렇소이다」고 대답니라. 또 가라사대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나니 나를 쫓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하시니라.31)
차경석과 형제들은 모해자의 밀고로 억울하게 죽은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이은희는 당시 동학농민운동 패배 후 가담자들이 정당한 절차 없이 처형당했으며,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 또한 그러한 희생자였다고 설명한다.
전봉준의 설득에 따라 농민 봉기에 참여하게 된 차치구는 전북 정읍의 동학 농민군 등을 이끌고 활약하다가 동학군의 패배 후 은신해 있었다. 차치구의 친구가 음식을 몰래 날라주다가 관아에 들켰는데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차치구의 은신처를 실토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한 마을 사람이 은신처를 밀고하는 바람에 잡힌 차치구는 재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형을 당했다.32)
기독교적 회개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었다고 호소하는 햄릿 선왕의 유령(1.5.76-9)처럼, 차경석의 아버지 역시 합당한 재판 없이 사형당했다. 이러한 억울한 죽음은 자식들에게 원한을 심어주었고, 결국 복수 모의로 이어졌다. 당시 조선 시대 역시 개인적 복수를 법으로 금지했으나, 부모나 남편의 원수를 갚는 일은 효(孝)와 열(烈)의 관점에서 미덕으로 용인되었다. 조규제는 『예기(禮記)』 「곡례편」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예기』 「곡례편」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불여공대천(弗與共戴天)이라 하여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형제를 죽인 원수는 불반병(不反兵)이라 하여 죽이려는 병기를 도로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를 죽인 원수는 부동국(不同國)이라 하여 나라를 같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수는 용서하거나 서로 화해할 수 없으므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는 선천 상극 시대의 의리론(義理論)으로 따지면 지극히 당연한 도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33)
증산(상제) 역시 차경석 형제들의 복수심을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라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극 시대의 논리이며, 그러한 방식은 또 다른 원(冤)을 낳게 된다. 따라서 증산은 원을 푸는 방법으로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제시했다. 왜냐하면 악을 악으로 갚았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악을 만들어 낼 “악의 씨” 34)를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끊임없이 복수를 종용하는 선왕의 유령이 과연 아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령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그 존재를 “지옥의 독기를 몰고 오는 악마”(goblin damn’d / … blasts from hell, 1.4.40-1)가 아닐까 의심했던 햄릿의 개신교적 관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유령은 르네상스 복수극의 단순한 관습적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유령은 햄릿에게 부친 살해의 은폐된 진실을 폭로함과 동시에, 무너진 덴마크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운명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35)
이처럼 햄릿의 복수는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덴마크라는 국가의 왕위 계승 및 질서 회복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거시적인 정치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햄릿이 처한 상황을 『전경』에서 원(冤)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단주(丹朱)의 원과 비교 분석하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햄릿의 비극을 한 개인의 차원에 가두지 않고, 국가적 질서와 진정한 통치자의 자격이라는 더 넓은 지평에서 조명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의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 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36)
요임금의 아들 단주는 부친으로부터 ‘불초하다’는 평가를 받아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고, 이것이 깊은 원이 되었다. 햄릿은 부친의 결정이 아닌 숙부의 찬탈로 왕위를 잃었으나, 정당한 계승권을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단주와 유사한 구조적 원한을 지닌다. 또한 햄릿의 복수는 왕(클로디어스)에 대한 저항이므로 정치적 전복의 성격을 띤다. 즉, 왕위 계승의 좌절에서 비롯된 원은 개인적 불행을 넘어 더 큰 범위의 비극으로 확대된다.
위의 인용문은 단주의 원이 순임금과 두 왕비의 죽음을 초래하고, 나아가 세상에 원의 뿌리를 박게 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단주의 문제가 단순한 부자 관계를 넘어선 거시적 파장을 일으켰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남식은 이를 통치자인 요임금의 ‘화권(和權)’ 부족으로 분석하며 요임금이 단주를 불초하다고 단정한 것에는 주관적 견해가 작용했으며, 이는 정치적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37) 좀 더 부연하면 요임금은 중앙 중심의 패권적 통치를 지향했으나, 단주는 중앙과 주변을 아우르는 대동(大同) 세계를 꿈꿨다.38) 단주가 삼묘족과 연합해 순임금에게 저항했다는 역사적 정황은39) 그가 화합을 지향했으나 부왕의 반대로 뜻이 좌절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단주의 해원에 관하여 『전경』에 여러 서사가40) 있지만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피지배자를 억누르는 정치 시대를 종결하고 ‘화권’41)에 의한 정치를 열어야 함을 의미한다.
햄릿 또한 단주처럼 왕위 계승의 좌절을 겪었으며, 부패한 덴마크 왕국을 정화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사회 개혁을 위한 ‘하늘의 대행자’를 자처하기도 하지만,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복수는 결국 또 다른 원(冤)을 낳는 살생이며, 상극(相剋)의 질서 안에서 ‘연기적 업보’를 반복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복수의 본질적 한계를 ‘피러스(Pyrrhus) 에피소드’를 통해 극도로 잔혹하게 형상화한다. 햄릿이 제1배우에게 낭송을 요청한 트로이 전쟁 이야기 속의 피러스는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왕 프라이엄(Priam)을 찾아가는데, 그 묘사는 정의로운 복수의 집행이라기보다 광기 어린 상극의 폭주에 가깝다.
머리 흐트러진 피러스, 검은 마음과도 같은
검은 갑옷을 입고 칠흑 같은 밤에,
운명을 안은 목마 속에 스며들더니,
이제 그 검고 무서운 모습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붉은 피로 물들여져
보기에도 처참한 꼴이 되었도다.
죽은 적의 왕 얼굴을
무참히 비추며, 미쳐 날뛰는 화염 속에서
불타 죽은 아비의 피를
또 어미의 딸, 자식의
피를 덮어썼도다.
분노의 화염에 불타면서
굳어진 피에 싸여
살기등등한 눈은 악마의 형상,
피러스는
노왕 프라이엄을 찾아간다 - (진한 표시 저자강조, 80)
The rugged Pyrrhus, he whose sable arms,
Black as his purpose, did the night resemble
When he lay couched in the ominous horse,
Hath now this dread and black complexion smear’d
With heraldry more dismal. Head to foot
Now is he total gules, horridly trick’d
With blood of fathers, mothers, daughters, sons,
Bak’d and impasted with the parching streets,
That lend a tyrannous and a damned light
To their lord’s murder. Roasted in wrath and fire,
And thus o’ersized with coagulate gore,
With eyes like carbuncles, the hellish Pyrrhus
Old grandsire Priam seeks. (2.2. 448-460)
이 장면은 결코 복수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인의 피로 물든 피러스의 ‘악마적 형상’을 통해, 복수가 도달하게 될 종착지가 결국 생명의 가치가 전멸한 참혹한 폐허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햄릿이 이 구절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의 복수 행위가 지닌 이 끔찍한 파괴성을 본능적으로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이 잔혹한 복수의 서사는 ‘상극의 논리로는 결코 원(冤)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는 햄릿의 비극이 지닌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동시에 상극의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질서가 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가를 시사한다.
이러한 비극적 교착 상태를 해소할 새로운 차원의 질서로 증산은 상생의 도인 ‘화민정세’를 제시한다.
원일이 자기 집에 상제를 모시고 성인의 도와 웅패의 술을 말씀 들었도다. 그것은 이러하였도다. 「제생 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 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 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42)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햄릿의 행위는 무력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웅패의 방식, 즉 ‘재민혁세’43)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그는 정의를 열망했으나 그 수단이 상극의 논리에 기반했기에, 필연적으로 주변의 희생을 초래하며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햄릿의 고뇌를 넘어, 상생(相生)의 도인 ‘화민정세’(化民靖世)’를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세상을 화평하게 하며, ‘호생(好生)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비극적 악순환을 끊어낼 진정한 통치자의 덕목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단주 해원(解冤) 공사를 살펴보면, 단주가 품었던 원(冤)의 본질과 화민정세의 깊은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 원한의 시원(始原)인 단주의 원을 푸는 것이 곧 만고의 원을 푸는 길이라는 점은, 앞선 인용문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선천(先天)의 웅패술을 벗어나 생명을 살리는 화민정세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와 궤를 같이한다.
차선근은 『전경』에 명시된 단주해원도수와 오선위기혈 공사를 연관 지어 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오선위기혈 공사는 당시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데, 이 공사로 단주의 원이 풀린다는 사실은 단주의 원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44) 즉, 단주가 통치권을 쥔 지배 집단보다는 삼묘족과 같이 “약자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45) 이었음을 고려할 때, 단주의 원을 풀어 만고의 원을 푼다는 것은 결국 약소국이나 약자를 희생시키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화민정세’의 시대로 나아가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햄릿의 복수의 대상이 약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정의 구현 방식은 여전히 투쟁과 희생에 기반한 ‘선천 상극 시대의 의리론’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햄릿과 단주의 대비는 이제 후천(後天) 시대를 맞아 호생의 덕을 바탕으로 한 화민정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Ⅴ. 결론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다룬 불멸의 고전으로서, 그 비극적 서사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왔다. 본 연구는 햄릿의 비극을 서구의 기독교적 관점과 동양의 불교적 관점, 그리고 한국의 대순진리회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 비평이 포착하지 못한 비극의 구조적 원인을 ‘원(冤)’과 ‘상극(相克)’의 차원에서 규명하고, ‘해원상생(解冤相生)’이라는 실천적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먼저 기독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햄릿은 ‘사적 복수’와 ‘신의 섭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양심적 인물이었다. 그는 타락한 덴마크 왕국을 정화해야 할 소명을 안고 있었으나, 복수는 신의 영역이라는 기독교적 교리에 가로막혀 갈등했다. 결국 그가 신의 뜻에 순종하며 죽음을 맞이한 것은 영적인 구원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현세적인 차원에서는 왕가의 몰락과 죽음의 행렬이라는 파국을 피하지 못했다.
불교적 관점에서 햄릿의 고뇌는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과 집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된다. 햄릿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었으나, ‘아버지의 복수’라는 강력한 아집(我執)과 인연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윤회의 사슬 속에서 악업을 반복하는 중생의 한계를 드러내며, 열반(Nirvana)에 이르지 못한 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본 연구의 핵심인 대순사상의 관점은 이러한 논의를 사회·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햄릿이 겪은 왕위 계승의 좌절과 부친의 억울한 죽음은 인류 역사의 원(冤)의 시초라 일컬어지는 ‘단주(丹朱)’의 비극과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 단주가 요(堯)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지 못해 품은 원한이 세상에 ‘상극의 뿌리’를 내린 것처럼, 햄릿의 원한 역시 덴마크 왕국 전체를 병들게 하고 파멸로 이끄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햄릿이 선택한 복수의 방식은 무력으로 악을 제거하고 세상을 뒤집으려는 ‘재민혁세(災民革世)’의 전형이었다. 이는 일견 영웅적인 정의 실현처럼 보이지만,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또 다른 희생과 원한을 낳는 ‘웅패의 술(術)’에 불과하다. 햄릿의 비극은 그가 악한 숙부를 처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극의 시대를 끝내고 생명을 살리는 ‘상생(相生)’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였다.
진정한 구원과 비극의 극복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써 원을 풀고 세상을 화평하게 만드는 ‘화민정세(化民靖世)’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순사상은 햄릿과 같은 비극적 영웅들이 ‘선천 상극 시대’의 한계 속에서 고통받았음을 밝히며, 이제는 ‘후천 상생 시대’의 법리인 호생(好生)의 덕을 실천해야 함을 역설한다.
종합하면, 『햄릿』에 대한 대순사상적 독해는 이 작품을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인류가 ‘복수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원상생의 역사’로 전환해야 함을 보여주는 거대한 텍스트로 격상시킨다. 햄릿의 죽음은 우리에게 재민혁세의 한계를 경계하게 하고 화민정세의 필요성을 웅변하는 역설적인 교훈을 남긴다. 본 연구가 서양의 문학적 유산을 동양의 상생 철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문학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정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