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의 서사와 불교적 효

정천구1,*
Chun-koo Jung1,*
1부산대학교 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Pusan National University

© Copyright 2026,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Feb 27, 2026 ; Revised: Mar 12, 2026 ; Accepted: Mar 25, 2026

Published Online: Mar 31, 2026

국문요약

중세 동아시아에서 유교와 불교는 효의 문제로 오래도록 논쟁해 왔다. 『삼국유사』에서도 「효선」편의 이야기들이 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대성효이세부모>는 불교적 효뿐만 아니라 효와 선의 관계를 생동하게 보여주므로 주목된다. 이 글에서는 서사의 분석을 통해 그 핵심 구조를 파악하고, 어떠한 선과 효가 구현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와 의미는 무엇인지를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대성효이세부모>는 두 개의 주요한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서사는 가난한 대성이 고승 점개가 외운 주원(呪願)을 듣고서 품팔이로 얻은 밭을 모두 보시한 덕분에 부귀한 집안에 환생했다는 것으로, ‘주원 → 보시 → 환생’의 구조를 갖는다. 두 번째 서사는 환생한 대성이 곰을 죽였다가 장수사를 세운 일, 그 일을 계기로 비원(悲願)을 세워 석불사와 불국사를 건립하고 불상을 조각했다는 것으로, ‘살생 → 비원 → 보시’의 구조를 갖는다.

두 서사의 공통점은 보시이지만, 사건이 달라 그 성격이나 의미도 다르고 효와의 관계도 다르다. 첫 번째 보시는 오로지 가난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바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효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은 행위였다. 이 보시는 자리(自利)의 선업이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도 덩달아 부귀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뒤늦게 부차적으로 효가 실현되었다. 두 번째 보시는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각한 일인데, 이는 시방의 중생을 두루 구제하려는 비원의 실천이면서 전세와 현세의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었다. 선업이 곧 효행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리와 이타의 두 보시는 불교의 기본 교리를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유교적 효와는 다른 불교적 효가 성립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Abstract

In medieval East Asia, Confucianism and Buddhism long debated the issue of filial piety. The “Hyoseon” (孝善 Filial Piety and Good Deeds) section of the Samguk Yusa (三國遺事) explores this issue. “Daeseonghyo Isebumo”(大城孝二世父母 “Daeseong’s Filial Piety towards His Parents Spanned His Past and Present Lives”) is particularly noteworthy for its vivid portrayal of not only Buddhist filial piety but also the relationship betwee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This article analyzes the narrative to summarize its core structure and interprets the specific good deeds and acts of filial piety embodied therein, as well as the relationship and significance of the two, from a Buddhist philosophical perspective.

“Daeseonghyo Isebumo” consists of two main narratives. The first narrative recounts how poor Daeseong, after hearing a written prayer chanted by the great monk Jeomgae, donated all the land he had earned through his labor to a wealthy family, thus leading to his rebirth into a wealthy family. This narrative follows the structure of “prayer → almsgiving → rebirth.” The second narrative recounts how Daeseong, after being reborn, killed a bear, which led to the founding of Jangsusa Temple. This act inspired a vow of compassion, leading to the construction of Seokbulsa Temple and Bulguksa Temple, and the carving of Buddhist statues. This narrative follows the structure of “destroying life → a vow of compassion → almsgiving.”

While the two narratives share the theme of almsgiving, their nature, meaning, and relationship to filial piety differ due to their different events. The first act of almsgiving was performed solely out of a desire to break the cycle of poverty, an act without even a thought of filial piety. This act of almsgiving is a good deed enacted out of self-interest. However, his mother also achieved a life of wealth and honor, and thereby his filial piety was realized later, as a secondary act. The second act of almsgiving involved building temples and carving a Buddhist statue. This was the fulfillment of a deep-seated wish to save all living beings in the world, while also performing filial piety to parents in both his past and present lives. This demonstrates that good deeds are a form of filial piety. These two acts of almsgiving, both self-sufficiency and altrusim, faithfully embody the basic doctrines of Buddhism and demonstrate how Buddhistic filial piety, distinct from Confucian filial piety, is established.

Keywords: 전세; 현세; 주원; 보시; 환생; 살생; 비원
Keywords: past life; present life; prayer; almsgiving; rebirth; destroying life; a vow of compassion

Ⅰ. 머리말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효선(孝善)」편이 있다. 이 편목은 각기 다른 처지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효를 실천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는 불교적 효의 독특한 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여서 주목된다. 제목에 이미 “대성이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들에게 효도했다”는 뜻이 드러나 있다. 전세와 현세는 행위의 선악(善惡)에 따라 과보가 결정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윤회(輪迴)의 교리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는 <대성효이세부모>가 불교의 교리나 철학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대성효이세부모>의 서사를 분석해 어떠한 불교적 효와 선이 구현되어 있는지, 그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밝히려 한다.

<대성효이세부모>의 서사와 주제는 단순하다고 할 수 없음에도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논의는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단독으로 다룬 연구 자체가 드물다. 남동신이 일연 당시의 고려 사회를 배경으로 그 의미를 검토한 것이 유일하다.1) 남동신은 13세기 초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이후에 윤리 문제가 시대적 과제가 됨에 따라 일연이 효선을 제창하며 유교적 효행과 불교적 선행의 일체화를 잘 보여주는 <대성효이세부모>를 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과 연관시켜 해석하려는 의도로 말미암아 <대성효이세부모>에 내재한 효행과 선행을 유교적 효행과 불교적 선행이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데서 그쳤다.

「효선」편 전체를 다루면서 <대성효이세부모>를 간략하게 검토한 연구들도 대부분 불교적 효가 구현되고 있다는 지적을 했으나,2) 그 효의 성격과 의미는 밝히지 못했다. 이 또한 서사를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사에 주목한 엄선용과 강성숙이 ‘주체의 신성성 → 시련 및 도전 → 조력자의 도움 → 효 실현’의 구조를 지향한다거나3) 대성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거치고 있는지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서사라 하면서도4) 대성의 효와 선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도 서사 분석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대성효이세부모>가 불교적 교리나 철학을 형상화한 이야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서사를 꼼꼼하게 분석해 핵심 구조를 파악하는 일부터 하는데,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전세와 현세라는 각각의 삶에서 상이한 사건이 벌어지므로 이에 따라 서사를 크게 둘로 나누어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두 개의 서사가 그 내용과 구조에서 사뭇 다르며, 성격과 의미가 다른 두 가지 보시가 핵심적인 선이라는 점을 밝힌다. 이어서 두 가지 보시의 의미, 그리고 각각의 보시가 효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불교 철학의 측면에서 해석해 불교적 효와 선의 독특한 면을 드러낼 것이다.

II. <대성효이세부모>의 서사 분석

<대성효이세부모>에는 서사 외에도 사실에 관한 설명과 인물의 행위에 관한 찬시가 함께 나온다. 서사와 설명, 찬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설명과 찬시는 서사가 아니지만, 서사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일연의 의도를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므로 함께 고찰한다. 서사는 전세의 사건과 현세의 사건 둘로 나누어 각 서사 단락에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자세하게 분석한다.

첫 번째 서사 단락은 아래와 같다.

  • ① 신문왕 때 모량리[부운촌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는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는 편편하여 성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했다. 집이 가난해서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부유한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했다.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나누어 주기에 입고 먹는 밑천으로 삼았다.

    그때 고승 점개가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베풀려고 시주를 권하다가 복안의 집에 이르렀다. 복안이 베 50필을 보시하니, 점개가 주원하며 복을 빌어주었다.

    “시주가 보시하기 좋아하니, 천신이 언제나 지켜주시기를.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 얻으니, 안락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들어가서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전생의 선업이 없어서 지금 이렇게 곤궁합니다. 이제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 더 어려워질 겁니다. 제가 품팔이로 받은 밭을 법회에 보시해서 훗날의 과보를 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좋다!”

    이에 점개에게 밭을 보시했다.

  • ②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죽었다. 이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네 집에 태어난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대성이 정말로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은 시각이었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해서 아이를 낳으니,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았다. 이레 만에 폈는데, 금으로 된 간자에 ‘대성’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시 이것으로 이름을 삼고 그 어머니를 집안으로 맞아들여 함께 보살폈다.5)

위의 서사는 모량리의 여인 경조와 그의 아들 대성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대성이 부자인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약간의 밭을 얻어서 생활했다는 데서 그 처지가 매우 곤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대목은 모자가 함께 복안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로 살 집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뜻이다.

어느 날, 품팔이를 하던 대성의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 생겼다. 고승 점개가 복안의 집에 이르러서는 흥륜사의 법회를 위해 시주를 권했다. 이에 복안이 부자답게 베 50필을 보시하자, 점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주원(呪願)하며 복을 빌어 주었다. 그 주원을 대성도 들었는데, 특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 얻는다”(施一得萬倍)는 구절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대성이 곧바로 어머니에게 뛰어갈 정도로 말이다.

①에서 가장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대목은 대성이 어머니에게 한 발언이다. 짤막하지만 논지의 전개가 아주 정연하다. 대성은 점개에게서 들은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구절을 먼저 말하고는, 이어서 자신들이 지금 곤궁한 까닭은 전생에 선업을 짓지 않아서라고, 지금 보시라는 선업을 짓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 힘들어질 거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면”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이런 발언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늘 했던 데서, 내세에 다시 태어나도 가난에 시달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평소에도 안고 살았던 데서 저절로 나온 것이다.

대성은 어머니의 동의를 얻은 뒤에 유일한 재산이자 전 재산이라 할 밭을 기꺼이 보시했다. 대성이 점개의 주원 한 구절에 꽂혀서 언제 받을지도 모를 후보(後報) 곧 ‘훗날의 과보’를 기대하면서 단박에 보시한 것과 그 어머니도 머뭇거림이 없이 보시를 허락한 일은 오래도록 곤궁에 시달린 만큼이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도 컸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시의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계기는 그 가난이나 욕망이 아니라 점개의 ‘주원’이다. 주원이 궁핍에서 벗어날 방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②는 대성이 보시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시작된다. 대성의 죽음은 그 자신이나 그의 어머니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며, 특히 어머니에게는 충격적인 사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는 대성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대성이 보시를 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했으므로 보시한 행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정확하게는 보시가 원인이 되어 벌어진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지는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대성이 죽던 날,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는 “대성이라는 아이가 네 집에 태어난다”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이윽고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을 해서 태어난 아이가 왼손에 ‘대성’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간자를 쥐고 있었다. 대성의 환생(還生)이다. 결국, 부귀한 집에 환생하려고 죽은 것이다. 이렇게 신이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나 대성이 기대했던 ‘훗날의 과보’가 이토록 빠르게 실현된 것은 대성의 보시가 결코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었다는 뜻인데, 이는 앞서 말한 보시의 계기와 관련이 있다. 요컨대, 오랜 가난이나 강한 욕망보다 점개의 주원이 보시의 직접적인 계기였다는 사실, 그만큼 주원에 대한 대성의 믿음이 아주 깊고 두터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성이 죽은 뒤,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는가? 뻔히 예상할 수 있듯이, 대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머니는 더욱더 곤고한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김문량의 집안에서 맞아들여 보살폈으므로 그의 어머니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서 어머니의 처지 변화를 어머니 자신의 선업으로 말미암은 과보로 볼 것인지, 아니면 대성의 환생에 잇따른 결과로 볼 것인지 해석의 문제가 발생한다.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사의 맥락이다. 밭을 보시한 일이 대성뿐 아니라 어머니의 선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어머니가 김문량의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대성의 환생 덕분이다. 그렇다면, 이는 대성의 과보에 잇따른 것이며, 대성의 선업이 뒤늦게 효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불교적 효의 성립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뒤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첫 번째 서사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대성과 그의 어머니는 가난했다. 이 ‘가난’을 배경으로 사건들이 펼쳐지는데, 주요한 사건은 대성이 점개의 주원을 들은 일, 주원의 내용을 믿고 보시한 일, 보시의 과보로 김문량의 집에 환생한 일 등이다. 이는 ‘주원 → 보시 → 환생’으로 구조화할 수 있다. 이 구조는 첫 번째 서사가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또 다른 서사가 이어진다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두 번째 서사 단락은 다음과 같다.

  • ③ 다 자란 뒤에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는 산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 묵었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서는 하소연했다.

    “너는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씹어 먹겠다!”

    대성은 무서워 떨며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했다.

    “나를 위해 절을 세워줄 수 있겠느냐?”

    대성은 “그러겠소!”라고 말하며 맹세했다.

    깨어나 보니, 땀이 흘러 자리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뒤로는 사냥을 그만하고 곰을 잡았던 자리에 곰을 위해 장수사를 세웠다.

  • ④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더니 자비의 서원이 더욱 도타와졌다. 이에 현세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어버이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세워 신림과 표훈 두 거룩한 스님을 청해 각각 살게 했다. 웅장한 불상을 세워 길러주신 수고로움에 보답했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부모에게 효도한 일은 옛적에도 드물었다. 좋은 보시의 효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 ⑤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실 두껑을 만드는데, 문득 돌이 세 쪽으로 쪼개졌다. 대성은 성을 내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일어나 남쪽 고개로 달려가서는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했다. 그런 까닭에 그 땅을 향령이라 불렀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를 아로새기는 기술에서 동도의 여러 절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6)

위의 서사는 대성이 환생한 뒤의 삶, 곧 현세에 대성이 한 일들을 들려준다. 먼저 ③은 환생한 대성이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사냥을 즐기다가 겪은 일을 다루고 있다. 늘 하던 대로 대성은 사냥하러 갔다가 곰을 잡았는데, 곰 귀신이 나타나 위협하는 꿈을 꾸었다. 대성은 무서워 떨며 용서를 빌었고, 곰 귀신을 위해 절을 세우겠다고 다짐하며 꿈에서 깼다. 곰 귀신의 위협에 대성이 매우 큰 충격을 받았음은 대성이 잠자리를 적실 정도로 땀을 흘렸고 그 뒤로 사냥을 그만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이윽고 대성은 장수사를 세워 곰 귀신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죄과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7)

③은 사냥을 즐기던 대성이 곰을 사냥했다가 장수사를 창건하게 된 사건이다. 길이는 짧으나, 장수사 연기 설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결되어 있다. 이어지는 ④가 대성의 효행을 간략하게 전하는 것과 대비될 정도다. 이렇게 완결된 형태로 ④의 앞에 배치된 것은 ④에서 일어날 일을 위한 예비이며 결정적인 계기가 됨을 의미한다.

④는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더니 자비의 서원이 더욱 도타와졌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는 ③의 장수사 창건 과정에서 대성의 내면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대성의 장수사 창건은 분명히 곰 귀신의 위협과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찰 창건은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고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도 없는 역사(役事)다. 무수한 이들의 원력(願力)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역사를 대성은 처음으로, 게다가 자신의 이름으로 도맡아 해야 했다. 순탄하게 진행되었을 리 없고, 고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느끼는 바, 깨닫는 바가 없었겠는가?

대성의 내면에서 각성이 일어났음은 비원(悲願) 곧 자비의 서원이 “더욱 도타와졌다”는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성이 장수사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 전에는 몰랐던 무언가를 이미 느끼거나 생각했다는 뜻이고, 그런 느낌이나 생각이 불교에서 중시하는 자비의 서원으로 전이되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깊어지고 굳건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성의 각성에는 곰 귀신과 장수사 건립 외에도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수 있다.

②에 암시되어 있듯이 환생한 대성은 현세의 부모 외에도 전세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성은 자라면서 전세의 삶과 보시, 환생 등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세의 대성은 그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사냥을 좋아했다. 이는 전세의 일을 굳이 되새기지 않았음을, 현세에 선업이나 효도를 실천하는 일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뜻한다. 곰 귀신의 위협으로 장수사를 건립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즐겼던 사냥이 살생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불교에는 십악(十惡)에 대한 교리가 있다. 십악은 현세나 내세에 자기와 남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행(惡行) 또는 불선(不善)한 행위를 가리키는데, 첫 번째가 살생(殺生)이다. 살생은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는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하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주장을 부정하는 심각한 악업이다. 장수사를 세우면서 대성은 바로 이러한 교리를 깨달았을 터이고, 아울러 현세의 자신이 전세에 보시해서 환생한 결과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면서 살생의 악업에 따르는 과보도 반드시 받게 될 것임을 깨달았을 터이다. 이러한 각성에서 비원(悲願), 곧 부처나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려고 세운 서원을 지니게 되었으리라.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대성이 살생의 악업을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세와 전세의 부모들을 위해 사찰을 건립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성의 과정에서 자신이 현세에 누리는 모든 것이 부모들의 은덕 덕분임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전세의 어머니는 아들의 보시를 기꺼이 허락하며 언제 벗어날 지 모를 곤궁함을 감내했고, 현세의 부모 또한 대성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까지 거두어 보살폈다. 대성은 뒤늦게나마 그러한 은덕 덕분에 자신이 현세의 삶을 누리고 있음을, 살생이 심각한 악업인 줄 모르고 사냥을 즐겼던 것도 그러한 은덕을 잊고 있었기 때문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대성은 석불사와 불국사를 세웠으며, 웅장한 불상을 손수 조각했다. 대단히 훌륭한 선근공덕(善根功德)이다. 더구나 대성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세와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공덕을 닦았다. 이런 일은 자신의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돌리는 ‘회향(廻向)’으로 볼 수 있는데, ④에서는 이를 ‘효도’라고 했다. 이는 불교적 개념인 회향이 효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러한 효도에 이어 “좋은 보시의 효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善施之驗, 可不信乎?)라고 이야기의 화자가 감탄한 부분이다. 여기서 ‘선시지험(善施之驗)’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대성이 전세와 현세의 부모를 위해 한 효행은 ①에서 했던 보시의 결과라는 뜻이다. 곤궁한 처지에서도 보시한 덕분에 환생해서 이러한 효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참으로 놀랍다는 것이다. 둘째는, ④의 효행 자체가 ‘좋은 보시’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⑤다.

⑤에서는 대성이 감실 두껑을 만들다가 세 쪽으로 쪼개진 일에서 비롯된 사건을 들려준다. 돌이 쪼개지자 대성은 성을 내다가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온전하게 만들어 놓고 돌아간 것이다. 그 고마움에 대성은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고, 천신이 사라진 고개를 ‘향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천신이 나타나 도운 일이 바로 ‘선시지험’ 곧 ‘좋은 보시의 효험’이다. ①에서 점개가 외운 주원을 보면, 둘째 구절이 “천신이 언제나 지켜주시기를”(天神常護持)이다.

서사의 전개상 ④의 말미에서 말한 ‘좋은 보시의 효험’은 ⑤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대성이 ④에서 한 효행은 그 자체로 보시다. 보시 가운데서도 좋은 보시다. 그리고 여기에도 회향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대성이 주도해 건립된 사찰과 손수 조각한 불상은 전세와 현세의 부모를 넘어서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될 공덕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④에서 대성이 자비의 서원을 세워 했던 일은 효행이면서 보시이고 보시이면서 효행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서사는 대성이 부귀한 집 자제로서 사냥을 즐기다가 곰 귀신의 위협으로 장수사를 건립했고, 그 과정에서 각성하고 비원을 세웠으며, 전세와 현세의 부모들에게 효도하려고 사찰을 세우고 직접 불상도 조각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건의 흐름은 ‘살생 → 비원 → 보시’로 구조화할 수 있다. 여기서 ‘효행’이 아니라 ‘보시’라고 한 까닭은 첫 번째 서사와 견주어서 살피기 위함이다.

이제 설명과 찬시에 대해 분석한다.

  • ⑥ 옛 향전에 실린 것은 위와 같으나, 절 안에 남은 기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경덕왕 때 대재상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년(751)에 불국사를 처음 세웠고, 혜공왕 때를 지나 대력 9년 갑인년(774)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유가의 대덕 항마를 청해 이 절에 머물게 했으며, 그를 이어 지금에 이르렀다.” 옛 향전과 같지 않은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⑦ 기린다.

    모량에 봄 온 뒤 밭 세 이랑 보시하니

    향령에 가을 오자 만금을 거두었구나.

    어머니는 백년 새 가난했다 부귀했고

    재상은 한 꿈 새에 떠났다가 왔구나.8)

⑥과 ⑦은 일연이 덧붙인 것이다. ⑥에서는 앞의 서사가 향전에 실린 것임을 밝히면서 불국사에 남아 전하는 기록 가운데서 향전과 다른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불국사의 기록에서는 건립을 시작한 연도와 완성한 연도가 밝혀져 있고, 처음에 대덕 항마가 머물렀다고 했다. 향전에서는 불국사와 석불사를 세운 연도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항마가 아니라 신림이 거론되고 있다. 일연은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했으나, 절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향전의 이야기를 실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분석한 두 서사 단락 모두 ‘보시’에 방점을 찍고 있다. 첫 번째 보시는 환생으로 이어졌고, 두 번째 보시는 천신의 도움을 불렀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종교적 신이가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을 중시한 것일까?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서사의 구조로써 보건대, 두 가지 보시의 성격과 의미가 독특해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 같다. 찬시에서도 이 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⑦은 서사의 요지라고 할 대성의 보시와 그 과보를 기리는 찬시다. 첫째 줄에서는 가난한 대성이 밭을 보시한 일을 봄에 씨를 뿌린 것으로 비유했고, 둘째 줄에서는 그 보시의 과보를 가을의 수확에 견주었다. 둘째 줄의 ‘만금’은 서사에서 대성이 주목했던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 얻는다”를 압축한 표현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어휘는 첫째 줄의 ‘모량’과 짝이 되도록 배치한 ‘향령’이다. 향령은 환생한 대성이 불상을 조각하면서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고 모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대성이 현세에 보시하고 천신이 도운 일 모두 전세의 보시에서 비롯되었다는 연기법의 작용을 드러내 보여준다.

셋째 줄은 대성이 부귀한 집안에 환생한 덕분에 그의 어머니도 그 집안에서 보살핌을 받게 된 과보를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가 부귀해진 일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성의 보시에 따른 부수적인 과보로 볼 수도 있고, 대성의 효행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논의하겠다. 넷째 줄에서는 대성이 “한 꿈 새에 떠났다가 왔구나”라고 했는데, 중의적인 표현이다. 표면적으로는 모량리의 대성이 죽고 바로 그 날에 김문량의 집안에 환생한 일을 가리킨다. 동시에 ③에서 곰을 사냥한 날에 꾼 꿈을 계기로 살생을 끊고 절을 세우는 비원을 품게 된 일, 다시 말해 대성의 내면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 일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효선」편의 다섯 이야기 가운데 <대성효이세부모>에만 일연이 찬시를 덧붙였다. 그 내용은 대성의 보시와 그로 말미암은 과보, 그리고 환생 등에 관한 것으로, 서사를 분석하고 해석할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아래에서는 이를 참조해 두 가지 보시의 성격과 그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 두 가지 효의 의미를 해석한다.

Ⅲ. 두 가지 보시와 불교적 효

위에서 <대성효이세부모>의 서사를 두 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해 서로 다른 구조를 추출했다. 첫 번째 서사는 ‘주원 → 보시 → 환생’의 구조이며, 두 번째 서사는 ‘살생 → 비원 → 보시’의 구조였다. 두 구조에서 공통되는 부분은 ‘보시’인데, 보시가 놓인 위치가 다르다. 보시는 본래 업인(業因)이어서 그 과보가 뒤에 따른다. 첫 번째 서사 구조에서는 그런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서사 구조에서는 보시의 뒤에 다른 일이 없다. 이는 두 보시의 성격과 의미가 다를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가지 보시를 따로 해석하며, 각각 어떻게 효와 관련되는지를 논의한다.

1. 자리(自利)의 보시와 지연된 효

첫 번째 서사에서 대성이 실천한 보시의 성격과 의미는 고승 점개가 읊은 주원(呪願)을 실마리로 삼아 풀어낼 수 있다. 점개는 베 50필을 보시한 복안을 위해, “시주가 보시하기 좋아하니, 천신이 언제나 지켜주시기를.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 얻으니, 안락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檀越好布施, 天神常護持. 施一得萬倍, 安樂壽命長!)이라는 주원으로 복을 빌었다. 이 주원에서 나열한 효험들은 보시가 대단한 선업임을 잘 보여주는데, 그런 효험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

불경에 『불설죄복보응경(佛說罪福報應經)』(1권)이 있다. 이 경전은 중국의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435년에서 443년 사이에 한역한 것으로, 중생이 받는 모든 죄와 복은 자신이 이미 행한 업에 따른 과보임을 밝히고 있다. 이 경전은 붓다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과 사위국(舍衛國) 사이에 있는 니구류(尼拘類)라는 큰 나무 아래에 앉아서 쉴 때 아난과 주고받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니구류 나무에는 향기롭고 달디단 열매가 수천만 섬이나 열렸으며, 그 열매가 떨어지면 백성들과 비구들이 맘껏 주워 먹었다. 이 니구류 나무 아래에서 붓다는 “죄와 복이 사람을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다. 복밭에 씨를 심는 것은 니구류 나무와 같으니, 본래 심을 때에 몇 개의 씨앗을 심었겠느냐?”라고 물었고, 아난은 “한 개의 씨앗을 심은 것이 점점 자라서 커져 한량없는 열매를 거두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붓다는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 함이 거짓이 아니니라”9)라고 말한 뒤에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

賢者好布施, 현명한 이가 보시를 좋아하면
天人自扶將, 천인이 도우며 지켜줄 것이요
施一得萬倍,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 얻어
安樂壽命長. 안락하게 오래오래 살게 되리.

붓다는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증했을 뿐 아니라 게송으로써 거듭 확인해 주었다. 게송은 점개의 주원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주원에서 ‘단월(檀越)’이라 한 것을 게송에서는 ‘현자(賢者)’로 표현한 것, 주원의 둘째 줄에서 ‘천신상호지(天神常護持)’라 한 것을 게송에서는 ‘천인자부장(天人自扶將)’이라 한 것이 다를 뿐이고,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경전에서 흥미로운 점은 붓다가 위의 게송을 읊은 지점이다.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면서 게송을 읊고 있지 않은가? 이는 대성이 점개의 주원을 듣고서 다른 구절보다도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는 구절에 귀가 번쩍 뜨이고 마음이 쏠린 것이 당연했음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대성은 그 구절대로 과보를 받으리라는 ‘믿음’을 일으켜 보시를 했으며, 실제로 부귀한 집안에 환생했다. 대성이 받은 과보 또한 『불설죄복보응경』에서 말한 대로다.

대개 사람이 복을 짓는 일은 이 나무에 견줄 수 있으니, 본디 씨 하나를 심은 것이 점점 자라서 커져 그 이익이 한량없게 된다. 사람이 국왕과 장자(長者)처럼 권세가가 되는 것은 삼보를 예를 다해 섬기는 데서 오고, 사람이 재물이 한량없는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보시(布施)를 하는 데서 오며, 사람이 오래 살면서 병이 없고 몸이 건강한 것은 계율(戒律)을 잘 지키는 데서 온다.10)

대성은 죽어서 재상 김문량의 집안에 다시 태어났으니, 권세가이면서 부자인 집안에 환생한 셈이다. 서사 ③에서 대성이 사냥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집안에 태어난 덕분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권세가에 태어날 업인과 부잣집에 태어날 업인이 다르다고 했다. 보시만 한 대성은 어떻게 권세가이기도 한 재상가에 태어났을까? 삼보는 붓다인 불보(佛寶), 붓다의 가르침은 법보(法寶),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이들인 승보(僧寶)를 가리킨다. 대성이 믿고 따른 주원의 구절은 곧 붓다의 가르침이니, 이는 법보를 섬긴 일이다. 그리고 점개를 믿고 그에게 보시한 일은 승보를 섬긴 것이나 진배없다. 이렇게 법보와 승보를 섬겼으므로 재상가에 환생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위의 과보를 받는 보시는 오롯이 나를 위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선업이다. 자리행(自利行)으로서 보시라는 말이다. 물론 자리행이라고 해서 낮추어 볼 것은 아니다. 남을 이롭게 하거나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대성처럼 가난으로 고생하는 하층의 백성은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라서 남들을 위해 널리 덕을 베푸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더구나 전생에 아무런 선업도 짓지 않고 도리어 불선한 짓을 해서 그런 지경에 떨어졌다면, 자리행조차 쉽게 하지 못한다.

『불설죄복보응경』에는, “사람이 종이 되는 것은 빚을 지고 갚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람이 비천한 것은 삼보에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인색하고 탐내며 혼자 먹으면 아귀에 떨어지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빈궁해서 굶주리고 몸을 가릴 옷도 없게 된다”11)는 대목이 나온다. 대성은 ①에서 자신이 가난한 이유가 전생에 선업을 짓지 않아서라고 했다. 경전에 따르면, 단순히 선업을 짓지 않은 게 아니다. 빚을 지고 갚지 않은 일, 삼보에 예배하지 않은 일, 탐욕을 부린 일 등의 불선을 하나 또는 여럿을 저질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대성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해 자신의 가난이 선업을 짓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불선했기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내세에 더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지 않으려면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선업을 지어야 한다는 점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점개의 주원을 들었으므로 즉각 밭을 보시했던 것이다.

대성은 보시를 선업으로 삼아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았다.12) 그 자신은 보시의 이익을 담뿍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는 어떠한가? 갑작스레 대성이 죽으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는 더욱 곤궁한 처지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는 대성이나 그의 어머니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결코 바라지 않았을 변고다. 이러한 상황은 대성의 보시가 자리의 보시였음을 뒷받침해준다. 대성이 효행보다 도리어 불효를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일연이 찬시에서 “어머니는 백년 새 가난했다 부귀했다”고 한 표현대로 어머니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흥미로우며,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먼저 어머니가 부귀해진 것을 어머니 자신의 선업에 따른 과보로 해석할 수 있다. 대성이 보시한 밭은 어머니와 공동 재산이었을 공산이 크고, 보시할 때 어머니도 기꺼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업보의 원칙에서는 타당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사의 전개는 자업자득과는 거리가 멀다. 어머니는 순전히 자신의 선업에 따른 낙과(樂果)로 부귀해진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대성의 환생을 매개로 하지 않은 채 직접 그 과보를 받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13) 따라서 어머니의 부귀는 대성이 받은 과보에 부수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문제는 그 결과를 대성의 효행으로 볼 수 있느냐다.

효행이나 보시 모두 주체의 적극적인 의지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런데 대성에게는 효행의 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어머니가 재상가에 들어가 부귀해질 수 있었던 것은 대성의 의지로 말미암은 과보가 아니라 김문량과 그의 부인이 결단한 결과였다.14) 분명히 대성의 직접적인 의지나 의도는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의 인과응보나 연기법에 따르면, 이 또한 효행으로 볼 수 있다.

연기법에서는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이자 조건인 연(緣)이 상호작용하여 과(果)가 생겨난다고 한다.15) 이 연기법에 따르면, 대성의 보시도 결과적으로는 효행의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어머니의 부귀는 대성의 보시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고 대성이 환생한 김문량의 집안을 간접적인 원인이자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결과다. 이로써 대성의 보시는 자리행임에도 효행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불교적 논리다.

그렇지만 자리의 보시는 나를 위한 선업이고 부모를 위한 선업이 아니므로 그것이 효행인지 아닌지 곧바로 알 수 없다. 대성의 경우로 알 수 있듯이, 보시의 주체인 자식이 그 과보를 받을 때에 또는 받은 뒤에야 부모도 그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리의 보시는 즉각적으로 효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보가 실현되면서 부차적으로 뒤늦게 효행임이 입증되므로 ‘지연된 효’라 할 수 있다. 물론, 유교적 관점에서나 세속의 통념상으로는 효로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업보의 원리에서 볼 때는 타당하다. 선업이나 악업에 대한 과보를 언제 받을 지, 현세에 받을 지 내세에 받을 지, 또 어떤 형태로 받게 될 지 따위는 미리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미래의 어느 때에 반드시 과보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지연된 효’처럼 독특한 ‘불교적 효’가 성립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아래에서는 또 다른 양상의 불교적 효를 보게 될 것이다.

2. 이타(利他)의 보시와 즉각적 효

두 번째 서사는 장수사 연기 설화라 할 만한 매우 흥미로운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사건은 환생한 대성의 삶이 전세와는 사뭇 달랐음을 보여준다. 전세에 가난으로 힘들게 살았던 대성은 현세에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가 되어 사냥을 즐기며 고생을 모른 채 살고 있었다. 처지가 달라졌고 전세의 기억이 없으니, 보시를 한다거나 선업을 짓는다는 따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잡은 곰이 귀신이 되어 꿈에 나타나 위협하자, 대성은 무서워 떨면서 비로소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게 되었다.

꿈에서 깬 대성은 먼저 사냥을 그만두었다. 사냥이 올바른 행위가 아님을 느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장수사를 세웠다. ④가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더니 자비의 서원이 더욱 도타와졌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것은 대성이 무언가 자각을 했다는 뜻이다. 무엇을 자각했는가? 사냥이 ‘살생(殺生)’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불교의 십악(十惡)에서 첫 번째가 살생이다. 살생에 대해 『정법염처경』에서는 “다른 중생에 대해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고 죽일 마음을 일으켜 그 목숨을 끊는다면, 살생이 된다”16)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생에는 짐승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대성은 사냥감을 짐승이라 생각하고 그런 짐승은 죽여도 된다고 여겨 그 목숨을 끊으면서도 즐거워했다. 경전의 표현에 따르면, 대성은 살생을 즐긴 사람이다.

『정법염처경』에서는 살생에 대한 정의에 이어 살생의 종류도 밝히고 있다.

저 살생에는 상·중·하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상은 아라한 등을 죽여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요, 중은 도 닦는 이를 죽이는 것이며, 하는 선하지 못한 사람이나 짐승을 죽이는 것이다. … 살생에는 또 다른 세 가지가 있으니, 탐내어 죽이는 짓, 성이 나서 죽이는 짓, 어리석어서 죽이는 짓 등이다. 탐내어 죽이는 짓이란 사냥 따위를 말하고, 성이 나서 죽이는 짓이란 백정이 하는 짓을 말하며, 어리석어서 죽이는 짓이란 외도들이 행하는 재 따위를 말한다. 살생에는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직접 죽이는 것, 남을 시켜 죽이는 것, 두 가지를 함께한 것 등이다.17)

위에서 거론한 여러 가지 살생을 대성은 두루 저질렀다. 짐승을 사냥했으므로 상·중·하 가운데서 하의 살생을 했고, 탐내어 죽이는 살생을 했으며, 직접 죽이는 살생을 했다. 대성은 불교에서 그 어떤 죄악보다 무겁게 다루는 살생을 거듭 저지르는 동안에 자신의 행위가 악업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장수사를 세우면서 비로소 자신이 즐겼던 사냥이 살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참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죄업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런 자각이 있었음은 “자비의 서원이 더욱 도타와졌다”는 구절에 내포되어 있다.

비원(悲願), 곧 자비의 서원은 어떤 마음이고 다짐이기에 자각과 관련되는가?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을 설한 『범망경』을 보면, 자비의 마음인 비심(悲心)에 대해 말한 대목이 나오므로 참조할 만하다.

비심(悲心)이란, … 일체 중생에 대한 한량없는 괴로움 가운데서 생겨난 지혜로 중생을 죽이지 않음을 따르고 법을 죽이지 않음을 따르며 나에 집착하지 않음을 따르느니라. 그러하므로 한결같이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음행하지 않아서 한 중생도 괴롭지 않느니라.18)

비심(悲心)은 왜 중생이 괴로워하는지를 알고 깊이 공감하는 마음이므로 지혜를 동반한다. 어떤 대상이나 어떤 사태에 대해 저절로 갖게 되는 슬픈 마음이 아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애써 가지려 할 필요가 없으며, 특별히 자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성처럼 오래도록 살생을 즐긴 사람이 다시는 살생하지 않으려면 위의 말처럼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깊이 알아야 한다. 따라서 대성이 자각했다는 것은 “일체 중생에 대한 한량없는 괴로움 가운데서 생겨난 지혜”를 어느 정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성이 일으킨 비심은 살생을 더 이상 하지 않게 할 뿐이다.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데서 나아가 전세와 현세의 부모를 위해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각하려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원심(願心)이 요구된다. 원심에 대해서도 『범망경』에서 풀이하고 있다. “원심이란 크게 구하고 일체를 구하려는 바람이니라. 과행(果行)이 인이 되므로 원심과 원심은 서로 이어지고 백겁 동안 전해져 부처가 되어 죄를 없애주느니라. … 한량없는 공덕으로써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느니라.”19)

원심은 중생을 구하려는 바람이다. 이 바람대로 하면 과행(果行), 곧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이룬다. 그리고 그 과행이 다시 인(因)이 되어 원심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원심을 계속 지니고 지녀서 백겁 동안 과행을 실천해야만, 한량없는 공덕을 지어야만 비로소 부처가 되고 죄가 말끔하게 없어져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대성은 앞서 말한 비심에 이 원심까지 아울러 갖추었으므로 ‘자비의 서원’이 도타와졌고, 그 덕분에 효행이나 선업에 대한 인식도 전세에 보시할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대성이 전세와 현세의 부모들에게 효도하려고 석불사와 불국사를 세우고 불상을 손수 조각한 일은 확실히 전세의 보시와 다르다. 그렇다면, 이 효는 어떠한 효이며, 이 보시는 어떠한 보시인가?

보살행과 전생의 인과에 대해 설한 경전으로 『불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이 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非飮食及寶, 음식과 보배 따위로도
能報父母恩, 부모의 은혜 갚을 수 없나니
引導向正法, 정법으로 인도하는 일이
便爲供二親. 곧 어버이를 공양하는 것이라.

같은 「효선」편에 실려 있는 <빈녀양모(貧女養母)>에서는 음식으로만 부모를 봉양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도 살펴서 편안하게 해드려야만 온전한 효임을 강조한다. 『맹자』에서도 어버이의 입과 몸만 봉양해서는 안 되고 어버이의 뜻을 봉양해야만 올바로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20) 부모의 마음을 살피고 그 뜻을 섬겨야 온전한 효라는 것이 유교적 관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어버이를 정법으로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올바른 공양이며 효라고 말한다. 대성은 장수사를 건립하면서 이러한 불교 교리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전세와 현세의 부모들을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를 세우고 불상을 손수 조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성이 부모들을 위해 굳이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까지 조각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있던 사찰에 가서 불상을 향해 지극한 신심으로 기원하거나 승려들에게 때마다 공양을 올려도 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여기서 대성의 자각이 긴요해진다. 자각한 대성이기에 재가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는 공덕을 닦는 일이고, 사찰과 불상을 보시하는 것만한 공덕은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앞서 첫 번째 보시의 성격을 논하면서 ①에서 대성의 마음을 빼앗은 점개의 주원이 사실은 『불설죄복보응경』에 나오는 게송임을 밝혔는데, 흥미롭게도 그 게송에 이어 아래의 게송이 나온다.

今日施善人, 오늘 보시하는 착한 사람은
其福不可量, 그 복덕 헤아릴 수 없으리니
皆當得佛道, 모두가 불도를 성취하여서
度脫於十方. 시방중생을 두루 제도하리.

붓다가 마치 대성의 두 번째 보시를 염두에 두고서 읊은 듯한 내용이다. 대성이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각한 일은 위 게송에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불도를 성취하고 시방중생을 두루 제도하기에 적합한 보시다. 붓다의 가르침을 공간화한 사찰, 그것을 형상화한 불상은 모든 중생이 쉽고 편안하게 귀의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중생 제도에 가장 효과적이고 또 유용하다. 따라서 대성의 보시는 부모들을 위한 효행이면서 시방의 중생에게까지 미치는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이 된다. 이것이 가능한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자신의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회향(廻向)’의 원리가 작용하며, 이 원리로 말미암아 불교의 독특한 효가 성립된다.

회향은 대승불교에서 중시하는 사상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십회향품(十廻向品)」이 이 사상의 주요한 근거다. 「십회향품」에서는 열 가지 회향을 설하고 있으나, 대체로 중생회향(衆生廻向)·보리회향(菩提廻向)·실제회향(實際廻向) 셋으로 압축된다.21) 중생회향은 자신의 선근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돌리는 것이고, 보리회향은 자신의 모든 선근을 깨달음을 얻는 데로 돌리는 것이며, 실제회향은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을 열반을 얻는 데로 돌리는 것이다. 대성의 보시는 중생회향에 해당한다.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각하며 닦은 공덕을 부모들이 받게 했기 때문이다. 이 회향으로 말미암아 그의 보시는 실질적인 효행이 되고, 그 공덕도 부모들을 넘어서 시방의 중생에게까지 전이되는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이 된다.

요컨대, 대성이 전세와 현세의 부모에게 한 효행은 시방의 중생을 두루 제도할 만한 복덕으로서 이타적 보시다. 여기서는 효행이 곧 보시이고 보시가 곧 효행이다. 효와 선이 하나이며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효가 더디게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지연된 효’가 아니라 ‘즉각적 효’가 이루어진다. ⑤에서 볼 수 있듯이 대성이 불상을 조각하는 과정에서 천신이 나타나 도운 일도 대성의 행위가 ‘좋은 보시’이면서 ‘즉각적 효’라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

Ⅳ. 맺음말

<대성효이세부모>는 재가자인 대성이 전세에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다가 죽어 환생해서 현세에 부귀한 삶을 누리다 각성하고 전세와 현세의 부모들을 위해 효행을 실천한 일을 들려준다. 가난한 인물이 어떻게 부귀한 삶을 누릴 수 있는지, 부귀한 삶보다 더 훌륭한 삶은 어떠한 것인지를 불교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왜 「효선」편을 굳이 설정했는지, 효나 선에 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을 터인데 왜 다섯 개의 이야기만 실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대성효이세부모>인지 등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면, 그런 정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해석이 요구된다.

<대성효이세부모>의 서사는 전세에서 현세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듯하지만,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사건들이 거듭 나와서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불교적 효를 생동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전세의 사건과 현세의 사건으로 나누어 서사를 분석해 각각 독자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밝혔다. 첫 번째 서사는 ‘주원 → 보시 → 환생’의 구조였고, 두 번째 서사는 ‘살생 → 비원 → 보시’의 구조였다. 두 서사 구조의 공통점은 보시인데, 그 위치가 다른 만큼 성격도 달랐다.

첫 번째 보시는 대성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선업으로, 자리행이다. 그 과보로 대성은 죽어 부귀한 김문량의 집안에 환생했다. 그 덕분에 홀로 남았던 어머니도 그 집안으로 들어가 대성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로써 대성이 처음에 보시하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효가 부수적으로 또 뒤늦게 실현되었다. 이 ‘지연된 효’는 연기법에 따라 실현된 것이어서 불교적 효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보시는 전세와 현세의 부모들을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를 건립하고 손수 불상을 조각한 일로서, 이타행이다. 이 보시가 실질적인 효행이 되는 데에는 ‘회향’의 원리가 작용했다. 대성은 불사를 하며 공덕을 닦았는데, 그 공덕이 부모들에게 전이되면서 효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이타의 보시는 ‘즉각적 효’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대성효이세부모>는 불교의 자리행과 이타행 두 가지 선업을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라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음을, 불교에서도 연기법이나 회향 사상에 입각한 효가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보시라는 선업이 효행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점도 잘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경전에서 설하는 교리나 철학을 문학적으로 생동하게 표현하고 있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렇게 불교의 교리나 철학을 형상화하면서 유교적 효와 다른 불교적 효를 보여주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일연이 『삼국유사』에 실었던 것이리라.

Notes

남동신, 「대성효이세부모조에 보이는 효와 선」,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30 (2009).

이기백, 「신라 불교에서의 효관념」, 『동아연구』 2 (1983); 김상현, 「삼국유사 효선편 검토」, 『동양학』 30 (2000); 엄선용, 「『삼국유사』 「효선」편 분석 연구」, 『한자한문교육』 21 (2008); 강성숙, 「효행 설화 연구 :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효행 양상을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48 (2012); 신태수, 「『삼국유사』 <효선편> 효윤리와 이념 지향」, 『한민족어문학』 68 (2014); 전경미, 「『삼국유사』 「효선」편을 통해 본 효행설화의 전승문법」, 『국학연구론총』 20 (2017); 명계환, 「일연의 『삼국유사』 「효선」편 인식 연구」, 『신라문화』 51 (2018); 신선혜, 「『삼국유사』 효선편의 내용과 특징」, 『역사학연구』 88 (2022).

엄선용, 앞의 글, pp.462-465.

강성숙, 앞의 글, pp.20-22\

『三國遺事』 卷5, <大城孝二世父母>, “① 神文王代, 牟梁里[一作浮雲村.]之貧女慶祖有兒, 頭大頂平如城, 因名大城. 家窘不能生育, 因役傭於貨殖福安家. 其家俵田數畝, 以備衣食之資. 時有開士漸開, 欲設六輪會於興輪寺, 勸化至福安家. 安施布五十疋, 開呪願曰: ‘檀越好布施, 天神常護持. 施一得萬倍, 安樂壽命長!’ 大城聞之, 跳跟而入, 謂其母曰: ‘予聽門僧誦倡, 云施一得萬倍. 念我定無宿善, 今玆困匱矣. 今又不施, 來世益艱. 施我傭田於法會, 以圖後報何如?’ 母曰: ‘善!’ 乃施田於開. ② 未幾城物故. 是日夜, 國宰金文亮家有天唱云: ‘牟梁里大城兒, 今託汝家!’ 家人震驚, 使檢牟梁里, 城果亡, 其日與唱同時. 有娠生兒, 左手握不發. 七日乃開, 有金簡子彫大城二字. 又以名之, 迎其母於第中兼養之.”

같은 책, “③ 旣壯, 好遊獵. 一日登吐含山, 捕一熊, 宿山下村. 夢熊變爲鬼, 訟曰: ‘汝何殺我? 我還啖汝!’ 城怖懅請容赦. 鬼曰: ‘能爲我創佛寺乎?’ 城誓之曰: ‘喏!’ 旣覺, 汗流被蓐. 自後禁原野, 爲熊創長壽寺於其捕地. ④ 因而情有所感, 悲願增篤. 乃爲現生二親創佛國寺, 爲前世爺孃創石佛寺, 請神琳‧表訓二聖師各住焉. 茂張像設, 且酬鞠養之勞, 以一身孝二世父母, 古亦罕聞. 善施之驗, 可不信乎? ⑤ 將彫石佛也, 欲鍊一大石爲龕盖, 石忽三裂. 憤恚而假寐. 夜中天神來降, 畢造而還. 城方枕起, 走跋南嶺, 爇木以供天神, 故名其地爲香嶺. 其佛國寺雲梯石塔彫鏤石木之功, 東都諸刹未有加也.”

대성은 장수사를 세우기 전에 사냥을 그만두었다. 살생을 끊었다는 말인데, 이를 보시로 보는 견해가 있다. 『대지도론』에서는 “일체의 중생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계율을 지켜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무외보시다”(“一切衆生皆畏於死, 持戒不害, 是則無畏施.” 『大智度論』 卷14, 「釋初品中尸羅波羅蜜義之餘」)라고 했으며, 법장(法藏, 643∼712)은 “살생을 끊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살생의 대상에게는 무외시이고 살생의 주체에게는 오계 등을 지키게 하므로 법시이다”(“望所殺是無畏, 望能殺令持五戒等是法施.” 『花嚴經探玄記』 卷8, 「金剛幢菩薩迴向品」)라고 했다. 그러나 대성은 두려운 마음에 살생을 끊었을 뿐이므로 그 결단을 보시로 보기는 어렵고, 나중에 불국사 등을 세우고 불상을 조각하는 적극적인 보시를 할 실마리나 계기로 볼 수는 있다.

『三國遺事』 卷5, <大城孝二世父母>, “⑥ 古鄕傳所載如上, 而寺中有記云: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 歷惠恭世, 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 國家乃畢成之. 初請瑜伽大德降魔住此寺, 繼之至于今.’ 與古傳不同, 未詳孰是. ⑦ 讚曰: 牟梁春後施三畝, 香嶺秋來獲萬金. 萱室百年貧富貴, 槐庭一夢去來今.”

『佛說罪福報應經』, “佛言: ‘ … 罪福隨人如影隨形. 殖種福田如尼俱類樹, 本種之時爲種幾核?’ 阿難長跪叉手答佛言: ‘種一枚核, 稍稍漸大, 收子無限.’ 佛言: ‘阿難, 施一得萬倍, 言不虛也.’”

같은 책, “夫人作福, 譬如此樹, 本種一核, 稍稍漸大, 所益無限. 爲人豪貴國王長者, 從禮事三寶中來; 爲人大富財物無限, 從布施中來; 爲人長壽無有疾病身體强壯, 從持戒中來.”

같은 책, “爲人奴婢, 負債不償故; 爲人卑賤, 不禮三尊故. … 慳貪獨食, 墮餓鬼中, 出生爲人, 貧窮飢餓衣不蔽形.”

명계환은 대성이 밭을 보시한 것이 효이며 환생한 것을 선이라고 보았다.(앞의 글, p.289) 이는 불교의 기본 교리인 인과법 또는 연기법에 어긋난 해석으로, ①에서 대성이 한 발언과 거기에 담긴 갈망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오해다.

대성의 어머니와 대비되는 여성이 <眞定師孝善雙美>에 나오는 진정의 어머니다. <大城孝二世父母> 앞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진정의 어머니는 신심이 깊어 하나뿐인 솥을 보시했으며 자식보다 더 지혜로웠다. 그래서 아들인 진정의 수행이나 득도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자신의 선업으로 도리천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정천구, 「<진정사효선쌍미>의 서사 분석과 효선 재해석」, 『가족과 커뮤니티』 10 (2024), pp.182-187에서 자세하게 논의했다.

엄선용(앞의 글, p.464)과 강성숙(앞의 글, p.202)은 대성이 전생의 어머니를 모셨다고 했는데, 이는 서사의 분석을 소홀히 한 탓에 오해한 것이다. 특히, 강성숙은 대성이 두 번의 보시를 한 일에 주목했으면서도 두 보시의 차이를 간과하고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雜阿含經』 卷12의 「연기법경緣起法經」에 연기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어떤 비구가 연기법을 세존이 만든 것인지 묻자,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저 여래들이 세상에 나오거나 아직 나오지 않거나 간에 법계에 항상 존재한다.”(緣起法者, 非我所作, 亦非餘人作. 然彼如來出世及未出世, 法界常住.)

『正法念處經』 卷1, 「十善業道品」, “於他衆生, 生衆生想, 起殺害心, 斷其命根, 得成殺生.” 『正法念處經』(70권)은 중국의 반야류지(般若流支)가 538년에서 541년 사이에 한역한 경전으로, 육도에서 윤회하는 원인을 설명하고 올바른 사유로써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것을 설하고 있다.

같은 책, “彼有三種, 謂上中下. 所言上者, 殺羅漢等, 墮阿鼻獄; 所言中者, 殺住道人; 所言下者, 殺不善人及殺畜生. … 又復三種, 所謂貪作瞋作癡作. 彼貪作者, 所謂獵等; 彼瞋作者, 所謂下性; 彼癡作者, 外道齋等. 又復三種, 所謂自作·他教·二作.”

『梵網經』 卷上, “悲心者, … 於一切衆生無量苦中生智, 不殺生緣·不殺法緣·不著我緣. 故常行不殺·不盜·不婬, 而一衆生不惱.”

같은 책, “願心者, 願大求·一切求. 以果行因故, 願心連願心連, 相續百劫, 得佛滅罪. … 無量功德, 以求爲本.”

『孟子』, 「離婁 上」, “증자는 부친인 증석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상에 올렸는데, 상을 물릴 때는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 지 반드시 여쭈었다. 부친이 ‘남았느냐?’ 하고 물으면, 반드시 ‘예, 남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석이 죽고 증원이 증자를 봉양할 때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상에 올렸는데, 상을 물릴 때 누구에게 줄 지 묻지 않았다. ‘남았느냐?’ 하고 물으면, 반드시 ‘남은 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남은 음식을 다시 상에 올리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바 어버이의 입과 몸만 봉양한다는 것이다. 증자처럼 해야만 어버이의 뜻을 봉양했다고 할 수 있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증자처럼 해야 된다.”(정천구, 『맹자, 시대를 찌르다』 (부산: 산지니 2014), p.297의 번역을 따랐음.)

「십회향품」을 바탕으로 한 회향에 대해서는 권탄준, 「『화엄경』 「십회향품」의 삼종회향」, 『보조사상』 27 (2007); 강기선, 「『화엄경』 「십회향품」에 담긴 보시의 실천적 의미」, 『선학』 65 (2023) 참조.

【참고문헌】

1.

『大智度論』.

2.

『孟子』.

3.

『梵網經』.

4.

『不思議光菩薩所說經』.

5.

『佛說罪福報應經』.

6.

『三國遺事』.

7.

『雜阿含經』.

8.

『正法念處經』.

9.

『花嚴經探玄記』.

10.

강기선, 「『화엄경』 「십회향품」에 담긴 보시의 실천적 의미」, 『선학』 65, 2023..

11.

강성숙, 「효행 설화 연구 :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효행 양상을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4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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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구, 『맹자, 시대를 찌르다』, 부산: 산지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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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구, 「<진정사효선쌍미>의 서사 분석과 효선 재해석」, 『가족과 커뮤니티』 10,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