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연구논문

3·1운동 전후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의 종교 인식과 종교인 관계: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를 중심으로

고마리1,*
Ma-rie Koh1,*
1서울대학교 박사수료
1Ph.D. Candidate, Religious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 Copyright 2026,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Oct 20, 2025 ; Revised: Mar 13, 2026 ; Accepted: Mar 25, 2026

Published Online: Mar 31, 2026

국문요약

본 연구는 1919년 3·1운동 전후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의 일기를 중심으로, 식민 통치의 현장에서 일본 군사 관료가 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하려 했는지를 분석한다. 우츠노미야는 조선인의 저항을 단순한 폭동으로만 보지 않고, 병합 이후 통치 방식이 민심을 충분히 수습하지 못한 결과로 이해하였다. 이에 그는 물리적 강제력만으로는 식민 지배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종교를 조선인의 감정과 사회적 정서를 매개할 수 있는 유력한 통치 자원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인식 아래 그는 천도교(天道敎)의 권동진(權東鎭), 청림교(靑林敎)의 김상설(金相卨), 일본조합교회(日本組合敎會)의 무라카미 타다요시(村上唯吉)와 김린(金麟) 등과 접촉하며 종교 네트워크를 통해 민심을 파악하고 통치의 안정성을 높일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종교를 독자적인 신앙 체계나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 존중하기보다, 제국 질서를 내면화시키기 위한 매개로 환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합과 상호 이해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조선인의 자율적 의지와 종교적 독립성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우츠노미야의 종교 인식과 종교인 접촉을 제도화된 종교정책의 완결된 형태로 보지 않고, 3·1운동 전후 식민 권력 내부에서 형성된 실험적 통치 구상과 그 내재적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한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종교정책 연구를 제도사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 통치의 현장에서 형성된 인식과 교섭, 그리고 식민 권력과 종교 사이의 긴장을 미시적으로 조명하는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how Utsunomiya Tarō (宇都宮太郎), Commander of the Japanese Army in Joseon (Korea), perceived and sought to utilize religion in the field of colonial rule around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Drawing primarily on his diary, it argues that Utsunomiya did not regard Korean resistance simply as a riotous disturbance, but understood it as a consequence of Japan’s failure to adequately manage public sentiment after annexation. From this perspective, he came to view religion as one of the most effective mediating resources through which the emotions and social sentiments of Koreans could be approached and guided, rather than as a purely spiritual domain. On that basis, he established contacts with a range of religious figures, including Kwon Dong-jin (權東鎭) of Cheondogyo (天道敎), Kim Sang-seol (金相卨) of Cheongrimgyo (靑林敎), and Murakami Tadayoshi (村上唯吉) and Kim Rin (金麟) of the Joseon Mission of the Nihon Kumiai Kyōkai (Japanese Congregational Church), while exploring the possibility of using religious networks to grasp popular sentiment and stabilize colonial rule. Yet his approach was marked by a fundamental limitation. Although he outwardly spoke of harmony and integration between Japanese and Koreans, he did not recognize Korean autonomy or the independence of religion as such. Religion was not treated as an autonomous sphere of belief and practice but was reduced to a medium through which imperial order might be internalized. This study therefore does not interpret Utsunomiya’s religious ideas and contacts as a fully institutionalized colonial religious policy. Rather, it reads them as an experimental mode of colonial reasoning formed in the aftermath of the March 1st Movement, one that simultaneously revealed the asymmetrical premises and inner contradictions of imperial rule. In doing so, this article seeks to move the study of colonial religious policy beyond institutional history and toward a closer examination of the perceptions, negotiations, and tensions that emerged at the actual site of governance.

Keywords: 일제강점기; 우츠노미야 타로; 3·1운동; 종교정책; 천도교; 청림교; 일본조합교회
Keywords: Korea’s Japanese colonial period; Utsunomiya Tarō; March 1st Movement; religious policy; Cheondogyo; Cheongrimgyo; Nihon Kumiai Kyōkai

Ⅰ. 들어가며

본 논문은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 1861~1922)의 일기를 중심으로, 식민 통치의 현장에서 제국의 군사 관료가 조선의 ‘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통치망으로 포섭하고자 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우츠노미야는 일본 육군의 핵심 참모 엘리트로서 제국의 대외 전략과 정책 기획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그가 약 15년에 걸쳐 남긴 방대한 일기 가운데, 조선 재임기(1918~1921)의 기록은 3·1운동을 전후한 통치 권력 내부의 위기의식과 대응 구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 이 시기 그의 기록에는 무력을 앞세운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과 상반되는 이질적인 장면들이 교차한다. 일기 곳곳에는 제국의 폭력적인 현실과 자신이 이상적으로 구상한 ‘동화 전략’ 사이에서 번민하는 관료의 내적 갈등이 엿보인다. 그는 물리적 강제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성심(誠心)’과 ‘도(道)’를 바탕으로 피지배자의 정서를 다독여 자발적 순응을 유도하려 했다. 특히 그는 종교를 신앙의 영역이 아닌 민심을 견인하는 매개 중 하나로 주목하였고, 조선의 종교 지도자들과 밀접하게 접촉하며 그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일기는 식민지 조선에서 종교가 통치 자원으로 사유되는 과정을 개인의 인식과 언어를 통해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츠노미야에 관한 선행 연구는 주로 그의 군사적, 정치적 행보를 추적하는 데 집중되었다. 국내 연구는 제암리 사건, 봉오동 전투, 조선인 군사 동원 문제 등 정치사와 군사사적 맥락에서 그를 조명해 왔다.2) 일기 간행과 함께 우츠노미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조선에서의 종교인 네트워크를 포착하는 데까진 나아가지 못했다. 키라 요시에(吉良芳恵)와 사쿠라이 요시키(櫻井良樹) 등의 선구적 연구는 그가 참모본부 제2부장 출신으로서 대아시아 전략을 기획했던 이력과 3·1운동 당시 중앙 정부와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밝혀내었다.3) 이들 연구는 우츠노미야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그가 1919년이라는 변곡점에서 어떻게 ‘종교’를 구체적인 통치 기술로 조작하고 전유하려 했는지에 대한 미시적 분석은 상대적으로 소략했다.

이러한 기존 연구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본 연구는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를 중심으로 식민 통치 현장에서 종교가 어떻게 포착되고 동원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비록 일기가 공식적인 정책 문서와 동일시될 수 없는 사적 기록일지라도, 이 텍스트는 통치 현장의 고민과 사유의 궤적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는 기존 연구가 그를 특정 사건의 무력 진압 책임자로만 조명해 온 시각에서 탈피하여 그를 행정 질서와 민심 관리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지했던 관료로 재위치시키고자 한다.4) 이를 위해 2022년 5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신규 공개된 「우츠노미야 타로 관계 문서(宇都宮太郎関係文書)」를 분석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일기 기록과 면밀히 교차 검토할 것이다.5)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우츠노미야의 종교 인식이 단순한 낭만적 유화책이나 사적 차원의 교섭이 아니라, 제국의 지정학적 전략과 결부된 통치 구상의 한 양상이었음을 보이고자 한다. 다음 장에서는 우츠노미야의 통치 구상의 연원과 종교 인식을 살펴보고, 당시 재한 일본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가 조선 종교인들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추적한다. 이어서 3장에서는 그가 실제로 전개하려 했던 종교인 포섭 양상을 조선의 자생종교6)와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부라는 두 가지 축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이를 통해 기존 제도사 중심의 종교 정책 연구를 인식사와 통치사 차원으로 확장하고, 억압과 저항의 이분법을 넘어 종교가 제국과 식민지의 이해가 교차하는 역동적 현장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우츠노미야 타로의 통치 구상과 종교 인식

1. ‘정보 장교’ 이력과 종교 인식

조선에서 우츠노미야가 전개한 독특한 종교 포섭 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본의 대외 전략을 기획하던 핵심 ‘정보 장교’ 출신이라는 이력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1861년 사가현(佐賀県)에서 출생한 그는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1877) 전후의 격변기를 거치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고,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참모본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 주재 일본 공사관 부속 육군무관으로 체류한 경험은 그의 사상적 지평을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운영과 외교 전략을 관찰하면서, 제국의 유지와 확장은 단순한 무력의 투입만으로는 불가능하며, 현지의 정치, 사회, 사상을 포괄하는 정교한 질서의 관리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체득했다.

도쿄로 복귀한 이후 참모본부 제2부장으로서 대륙 정책을 담당하게 된 그는, 중국 문제를 군사적 사안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현지의 종교와 사회 동향을 아우르는 종합적 시각으로 접근했다.7) 그는 중국에 체류하던 승려, 유학생, 지식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현지의 정치 정세는 물론, 기독교 동향과 기층 사회에서 유통되던 여론 및 소문까지 종합적으로 파악하려 했다.8) 또한 우츠노미야는 청말 중국 유학생 수용과 일본인 응빙장교 파견 정책을 주도했는데, 이는 단발적인 외교 조치가 아니라 ‘유학생의 일본식 양성’과 ‘현지 교육 담당 인력 파견’을 결합한 장기 전략이었다.9) 이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군사 교육의 형태를 띠었으나, 실제로는 인적 교류를 통해 친일 인적 기반을 형성하고 엘리트층의 사상과 정서를 관리하려는 구상과 맞물려 있었다. 즉, 그는 일찍부터 군사 작전의 영역을 넘어 무력 개입 대신 정치 공작과 사상적 회유를 통해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이른바 ‘정서 관리와 인적 자원 마련’이라는 방법론을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당시 무력 개입보다 정치적 조정과 심리적 압박을 중시했던 경험은, 훗날 조선에서 물리적 진압보다 민심 관리에 주목하게 되는 사고방식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0)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정보 장교로서의 거시적 관점이 ‘종교’를 제국주의 열강과 대결하기 위한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시마다 다이스케(島田大輔)의 연구에 따르면, 우츠노미야는 메이지 후기부터 러시아와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터키 제휴 의견서(日土提携意見書)」를 구상한 바 있다.11) 그의 관심은 제국주의 열강과의 지정학적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모든 대외 전략으로 수렴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부터 기독교 현황을 주시하고 훗날 조선에서 서구 기독교의 영향력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일본이 아시아의 종교 문제를 제국 전략의 일부로 파악했던 그의 시각은 이미 이 시기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츠노미야는 육군 내 핵심 권력인 조슈파(長州閥)와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점차 중앙 권력으로부터 밀려나게 된다.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중심으로 한 조슈파가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사단장 등 지방 근무를 전전하던 그는, 1918년 7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조선군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비록 스스로는 이를 일종의 ‘한직(閑職)’으로 여겼으나, 부임 직후부터 각지를 순시하며 조선 사회의 기층 민심과 구조를 집요하게 관찰한 그의 행보는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는 메이지 말기부터 축적해 온 고도의 정보심리전 기술이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공간적 조건 속에서 구체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과 제암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사령관으로서 우츠노미야는 짧은 재임기에도 직접 지방을 시찰하고 자신의 대아시아 사상을 조선인들에게 선전하며 안팎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독보적인 정보 활용력과 전략적 식견 덕분에 그는 야전 사령관에 그치지 않고 하라 내각 및 총독부와 직접 의견을 교환하며 통치 정책에도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사령관이 일본 제국 전체의 정책 의지를 직접적으로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시 총독부에서의 일본 육군의 위치와 그의 지도부 인사들과의 인맥은 그의 사상이 일면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일본 육군의 지위는 식민지 지도부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1910년대 조선 총독부를 통해서 유력한 수상후보자를 배출할 정도로 조선총독은 일본 육군의 주량(柱梁)이었다.12) 비록 육군의 주류는 조슈파였으나 우츠노미야의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이후 일본 육군이 ‘조선인 군인’ 문제에 주목하게 된 과정을 분석한 박완의 연구가 지적하듯, 3·1운동 이후 일본 육군이 조선인 군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여 제국 내 통합과 ‘동화(同化)’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을 때, 그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는 다나카와 함께 우츠노미야의 문제의식이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13) 이는 그의 사상이 동시대 일본 육군 지휘부의 제국 통합 전략과 긴밀하게 공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조선 통치의 사령탑이었던 총독부와의 관계에서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부임 초기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과는 잦은 마찰을 빚었으나, 3·1운동 이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는 긴밀한 정치적 교감을 나누었다.14) 이들은 향후 조선 토지정책에 대해서 논의할 정도로 정치적 사안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또한 1920년 1월에 사이토가 The Independent지에 기고한 “Home rule in Korea?”라는 기사는 서양 선교사와 기자들의 비판적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우츠노미야가 기획한 선전 대책의 일환이었다. 또한 우츠노미야가 다나카에게 보낸 의견서인 「조선시국관견(朝鮮時局管見)」의 내용은 사이토의 언설과 통치 시책과 상당 부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처럼 우츠노미야는 단순한 군사적 진압의 책임자가 아니라, 제국 최고위층과 정책적 비전을 공유하고 여론전을 기획할 수 있는 상당한 정치적 자본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거시적 안목과 막대한 정보망, 그리고 총독부의 공식 행정망을 우회하여 비정규 공작을 수행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기에, 그는 3·1운동이라는 위기 속에서 ‘종교인 포섭’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의 구상이 총독부의 공식 정책으로 전면 제도화된 것은 아니나, 식민 권력 수뇌부와의 교감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막강한 재량권은, 그가 물리적 강제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피지배자의 내면을 다독이려는 ‘성심’ 기반의 회유 구상으로 나아가는 핵심적인 토대가 된다.

2. 정서적 동화 구상과 식민지 포교의 한계

우츠노미야가 종교를 조선 통치의 핵심 변수로 인식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을 일본 제국 질서 안으로 재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 그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사상15)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사회를 정치적 자율성을 지닌 주체로 승인하기보다는, 일본이 지도하고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통치의 성패를 제도의 강약이 아니라 민심과 정서의 관리 여부에서 찾고자 했다.16) 이러한 통합 지향적 사고는 1919년 전후에 작성된 「본원(本願)」, 「경세위언(警世危言)」, 「내선의 관계(内鮮の関係)」 등의 문건과 일기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17) 특히 「대본원(大本願)」 초안에서 그는 일본과 조선을 “합동공존(合同共存)”과 “융합화락(融合和樂)”의 공동체로 재구성하고, 동서 간의 차별을 극복하는 황금시대를 지향점으로 제시하였다.

무릇 함께 합치면 곧 강해지고, 나뉘면 곧 약해진다. 이는 천지의 진리이다. 그러나 세계는 아직 강약의 차별이 없고 일체 평등한 황금시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합동공존(合同共存)하여 우리의 공동 복지를 개척 및 증진하고 융합화락(融合和樂)하여 참으로 세계의 태평한 백성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여러 해 동안 품어 온 대본원(大本願)이다. 뜻을 같이 하고 근심을 함께하는 남녀는 와서 우리의 지업(志業)을 도와주기 바란다.18)

이후 수정 과정에서 “강약의 차별”을 “인종 간의 차별”로 수정한 우츠노미야는 이것을 다시 “동서 간의 차별”로 바꾸었는데, 이 대목에서 일본과 조선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재구성하려는 초국가적 통합 담론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동서 간의 차별이 없는 황금시대”라는 표현은 서구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문제의식과 인종, 문명 차별의 극복을 지향하는 동시대 아시아주의 담론과 부분적으로 공명하는 지점을 보여준다.19) 이는 표면적으로는 보편주의적 언어를 띠고 있었으나, 실상은 일본이 주도하는 제국 질서 안에서의 감정적 동일화와 질서의 내면화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3·1운동 직후의 일기에서 우츠노미야는 조선인의 봉기를 단순한 폭동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병합 정책이 민심을 수렴하지 못한 결과로 진단했다. 그는 한일 병합을 ‘무리한 결혼’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결국 그들이 저지른 잘못된 대한 근본정책(억지로 강행한 병합)은, 마치 마음 내키지 않는 부녀자와 억지로 결혼한 것과도 같다 … 오늘날 조선인의 원망과 동요는 당연한 이치라 할 것이다 … 그러나 이를 도(道)로써 다스린다면, 오늘 당장은 어렵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이를테면 억지로 결혼하여 마음이 맞지 않는 아내도, 남편이 그 뒤로 성심성의껏 대한다면, 마침내 그녀 역시 마음을 움직일 것이고, 그 사이에 자식도 생겨 진정한 부부의 정이 싹트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또 그 길이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는 바이다.20)

이 대목은 통치 실패의 원인을 식민 권력의 운용 방식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지배 구조의 근본적 재편이나 조선인의 정치적 자율성 보장이 아니었다. 그는 “성심성의껏 대하면 아내도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는 비유처럼, 법제와 헌병을 앞세운 무력이 아닌 ‘시간과 교화를 통한 감정적 동화’에 기대를 걸었다.

내선일체를 담지한 통합 지향적 사고는 담론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츠노미야는 1896년 조선인 김응선(金應善)을 호적상 ‘형제’로 편입시키고 일본군 입대를 가능하게 했다. 나아가 일본인과의 결혼을 권유한 사례는 우츠노미야가 개인적 차원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일화를 실천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21) 이러한 실천은 보편적 평등을 전제로 한 통합이라기보다 제국 질서에 순응할 수 있는 주체를 선택적으로 편입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유리안 비온티노(Juljan Biontino)가 지적했듯, 우츠노미야는 인본주의적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동화되지 않는 타자를 ‘이해 불가능한 존재’ 혹은 ‘저항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배제하는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22) 결국 그의 반성은 식민 지배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피지배자의 내면을 통제하여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귀결된 것이다.

통치 기술의 고도화를 꾀했던 이러한 비공식적 회유 구상을 실행하기 위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유력한 매개 가운데 하나가 종교였다. 그러나 우츠노미야가 마주한 식민지 포교의 현실은 그의 구상과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의 일기에는 식민 통치의 보조자 역할을 수행해야 할 재한 일본 종교인들의 무능과 나태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1919년 1월 21일, 정토진종 대곡파(真宗大谷派) 본원사(本願寺)의 광주포교소를 방문한 직후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1896년경의) 청한(清韓)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눈앞의 일본인 교인들을 상대할 뿐 조선어 하나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종교자들의 안목이 비루하고 그 시야가 좁은 것이 진실로 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대유위(大有為)의 인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23)

같은 해 안동 지역을 시찰한 기록에서도 그는 미국 선교사들의 현지 밀착형 활동을 경계하면서, 정작 그 대항마가 되어야 할 일본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조선인 교화의 포부는 전무하며, 조선의 실정을 이해하는 자도 거의 없어 어이없을 뿐”이라고 혹평을 가했다.24)

우츠노미야의 이러한 비판은 개별 승려나 포교사의 역량 부족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일본 종교계가 처한 구조적 한계를 예민하게 포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권동우가 지적하듯, 당시 천리교를 비롯한 일본 종교 단체들은 이념적으로는 ‘조선인 교화’를 내세웠으나, 실제 포교 현장에서는 교단의 경제적 존립을 위해 자본력을 갖춘 일본인 거류민 사회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5) 즉, 재한 일본 종교인들은 생존을 위해 ‘내지인 공동체’ 안에 머물렀고, 이는 필연적으로 조선인 대중과의 격리를 초래했다. 일본계 종교의 조선인 포교 실패는 종교가 식민 권력의 보조 장치로 기능하도록 구조화된 식민지 권력 관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26) 조선인은 자율적 신앙 주체라기보다 ‘교화의 대상’으로 설정되었고, 일본계 종교는 조선 사회 내부로 깊이 침투하는 데 구조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

또한 우츠노미야가 일본 종교인들의 조선 이해 부족과 포교의 무력함을 비판하며 조선의 자생종교 지도자들과의 협력 가능성에 주목한 태도는, 1920년대 식민정책 담론 전반에서 관찰되는 동화주의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박양신은 3·1운동 이후 일본 식민정책학 내부에서 동화주의가 식민지 사회의 민족과 문화를 고려하지 못한 실패한 통치 논리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식민지 본위와 자치주의적 발상이 대두하였음을 지적한다.27) 이러한 정책 담론의 변화는 종교 영역에서도 조선인을 자율적 신앙 주체가 아닌 교화와 통치의 대상으로 설정한 일본 종교의 포교 전략이 현실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던 배경을 설명해 준다. 우츠노미야가 포착한 재한 일본 종교인의 ‘무능’에 대한 비판은 그가 종교인을 ‘포교자’라기보다 ‘통치의 중개자’로 상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우츠노미야의 종교 인식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종교를 ‘동화의 매개’가 아니라 ‘민심을 우회적으로 조정하는 수단’으로 재사유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28)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츠노미야 시선은 조선인 종교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제도적 장벽이 존재했다. 1915년 제정된 「포교규칙」이 신도, 불교, 기독교만을 공인된 ‘종교’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은 ‘종교유사단체’로 규정하면서 필요시 준용(準用)이 가능하도록 했다.29) 이 ‘종교유사단체’의 개념은 이보다 앞선 1911년 시정연보에서 ‘종교유사 및 상사관계의 단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는데, 행정적인 분류와 통제 목적의 개념에 가까웠다.30) 사실상 법 적용이 가능한 회색지대로 방치되었던 조선의 자생종교는 1918년에서 1920년에 동학계, 유교계, 단군계, 미신적 종교라는 4종으로 분류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포교규칙」 개정은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이루어졌지만, 이미 하세가와 및 사이토 총독 시기를 거치며 무조건적인 탄압에서 ‘선별적 통제와 활용’으로 정책 기조가 미세하게 전환되고 있었다.31) 즉, 일정한 편의를 제공하되 방침을 따르지 않는 경우 단속과 해산으로 대응하는 이중전략을 취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20년 치안자료에는 유화와 통제의 이중전략이 실효성이 있음이 보고되기도 했다. 태을교(太乙敎), 그리고 후술할 청림교(靑林敎) 등의 ‘종교유사단체’가 우민을 현혹하거나 재전을 취득하는 통폐가 있을 때는 취체(取締)가 필요하나, 오히려 민심의 완화에 다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32) 이것은 당시 공인종교 밖에 위치한 조선의 자생종교가 일정 부분 통치에 기여하는 점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며, 식민지배의 완충 장치로서의 역할이 확인되는 내용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츠노미야의 독자적인 행보가 보다 분명해진다. 공식적인 행정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조선 자생종교를 ‘단속의 대상’에서 ‘통치의 파트너’로 전환하기 위해, 그는 군사령관이 동원할 수 있는 비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채널을 가동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우츠노미야의 종교 인식은 단순한 정책적 청사진이 아니라, 식민지 포교의 구조적 한계와 총독부 법제의 공백 속에서 ‘종교를 우회적인 민심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과도기적이고 실험적인 공작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Ⅲ. 우츠노미야 타로의 종교인 포섭

1. 조선 자생종교와의 교섭과 활용
1) 천도교 신파 권동진(權東鎭)과 3·1운동의 여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츠노미야가 조선의 자생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판단이라기보다, 기존 동화주의 통치 방식의 한계를 인식한 문제의식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 전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그는 조선인의 감정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을 인지하고,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매개로 한 간접적 통치 가능성을 모색했다. 반면 조선 종교계의 지도자들 역시 일본의 최고위 군정 권력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교단의 생존 기반을 확보하고 활동 공간을 모색하려 했기에, 양자의 만남은 불안정한 접촉 지대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초반 우츠노미야의 일기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종교계 인물은 천도교 신파의 지도자 권동진(權東鎭)이었다. 권동진은 일본 망명 시기 손병희와 교류하며 동학에 입교한 뒤, 1906년 귀국하여 천도교 재건운동과 대한협회를 통한 계몽 활동에 관여한 인물이다.33) 1910년대 후반 조선 종교계와 민족운동 진영을 가로지르는 위치에 있었던 그는, 우츠노미야의 입장에서 조선의 민심을 가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접촉 대상이었을 것이다. 우츠노미야는 권동진을 “장래에 함께 대화하고 활용해야 할 인물”로 평가하며, 그와 동아를 위해 크게 모의할 것을 약속했다고 기술했다.34) 이는 그가 권동진을 거시적인 지정학의 파트너이자 통치 구상의 조력자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면담과 식사를 함께하며 천도교의 동향과 조선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35)

그러나 이 관계는 종교 지도자를 제국의 하부 구조로 포섭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식민 권력의 과도한 기대와 오독(誤讀)으로 이어졌다. 관계의 취약성은 3·1운동을 전후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19년 2월 27일, 권동진은 우츠노미야에게 조선의 민심이 극도로 불안하여 다가올 고종 국장(國葬) 시에 대규모 소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전달했다.36) 권동진은 고종의 발인일인 3월 3일을 지목하여 우려를 전달한 것인데, 이는 사실상 다가올 3·1운동에 대한 암시적 경고에 해당했다.37) 그러나 우츠노미야는 이 발언을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3월 1일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폭발하자 일기에 강한 충격과 당혹감을 남겼다.

생각건대, 이번 독립운동은 내외로 널리 기맥을 통하고 조직적이며 근본이 있다. 야소교도, 천도교도(이를 아군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막상 와서 보니 완전히 적방(敵方)으로 넘어가 있었다), 학생 등 신진유위(新進有爲)의 분자들이 주도자가 되어, 외국인, 특히 선교사들(오늘도 자동차로 시위행렬을 밀고 나아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 밖의 증거도 적지 않다)의 후원을 얻어(아마도 미국 같은 나라는, 적어도 관헌의 일부 가운데에도 이들을 지원하는 자가 있다고 인정된다) 봉기한 것이다. 이번은 물론 진압할 수 있음이 의심없으나, 그 근저는 매우 깊고, 장래의 형세는 심히 우려할 만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38) (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그는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 세력이 조직적으로 결합하여 운동을 주도했다고 인식하며, 자신이 통치의 협력 가능성으로 상정했던 종교 세력이 독립운동의 핵심 주체로 등장했다는 점에 당혹감을 표한다. 이는 우츠노미야가 시도한 정서적 동화가 얼마나 취약한 전제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주목할 점은 우츠노미야가 이 사건 직후 배신감에 매몰되거나 무조건적인 무력 탄압으로만 회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저항의 거점이 된 천도교를 일거에 해체하기보다, 이를 역이용하여 내부로부터 무력화시키는 고도의 정치 공작을 기획하였다. 3·1운동의 열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3월 20일의 일기는 이러한 그의 냉혹한 전략가적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이날 우츠노미야는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와 만난 자리에서, 손병희를 일본 내지로 이송하여 우대하고 적절한 시기에 특별사면하여 신앙을 약화시킬 것을 제안했다.39) 나아가 그는 천도교를 ‘공인(公認)’하고 아군으로 두되, “최(崔), 박(朴)을 세워 둘로 나눌 것”이라는 구체적인 교단 분열 책동을 구상했다. 여기서 ‘최’는 3·1운동의 실무 기획자이자 훗날 신파의 거두가 되는 최린(崔麟)을, ‘박’은 천도교 제4세 대도주로서 구파의 구심점이 되는 박인호(朴寅浩)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츠노미야는 교단의 신구 세력을 대표하는 두 인물을 대립시켜 거대 종교 조직의 응집력을 와해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그중 한 축을 식민 권력에 순응하는 관제 종교로 재편하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기록은 우츠노미야의 종교에 대한 인식이 조선인의 감정에 호소하는 유화책이 아니라, 종교 단체의 내부 역학 관계를 조작하여 식민 지배의 하부 구조로 편입시키려는 치밀한 ‘분할 통치’ 전략이었음을 실증한다. 비록 당장 권동진 등 핵심 인사들이 수감되며 직접적인 교섭은 중단되었으나,40) 우츠노미야의 이 구상은 1920년대 이후 천도교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는 후일의 분열 양상을 선취하는 구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같은 날에 기독교와 불교 등에 관련된 사안과 조선인 차별대우 폐지 등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우츠노미야가 3·1운동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 관리에서 종교 문제를 얼마나 중차대한 과제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오히려 거대한 대중 동원력을 지닌 종교 지도자들을 통제선 밖에 방치할 경우 제국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냉혹한 각성으로 작용했다. 즉, 권동진과의 교섭에서 겪은 좌절은 우츠노미야에게 ‘종교망의 철저한 관리와 통제’라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으며, 보다 다각적이고 집요한 종교 포섭 공작으로 나아가는 추동력이 되었다.

2) 청림교(靑林敎)와 김상설(金相卨)

우츠노미야가 조선의 자생종교 지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려 했던 시도는 천도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 사회 내부에서 재편되고 있던 동학계 신종교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그 가운데 1919년에는 청림교와 지도자 김상설(金相卨)과 긴밀히 접촉했다.41) 두 사람의 인연은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김상설은 189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우츠노미야의 지도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이후 1919년 김상설은 상하이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하며 일본과의 연계를 유지했다. 이때 우츠노미야는 상하이에 체류하던 김상설에게 기밀비 100엔을 제공하기도 했다.42) 우츠노미야가 그를 “옛 지인”으로 언급 한 대목은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1919년 9월 이후 두 사람의 접촉이 더욱 빈번해졌고, 우츠노미야는 후술할 무라카미 타다요시(村上唯吉) 등과 함께 김상설을 제국 통치의 협력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

청림을 자처한 여러 인물들과 청림교에 대한 계보가 분분한 가운데, 1920년 전후 김상설에 의해 교단이 재정비되어 청림교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서는 우츠노미야와 접촉이 이루어진 시기의 청림교 재편 과정 초기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청림교는 1904년 이후 교세가 쇠락했으나 1910년대 후반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했고, 1920년대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김상설은 서울을 거점으로 교단을 정비하고 전국적 조직망을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본래 그는 이근호(李根澔) 남작이 구상한 ‘청림삼성무극교(靑林三聖無極敎)’와 일정 기간 연관을 맺었으나, 이후 독자적인 노선을 택했다.43) 당시 이근호는 이명래(李鳴來)의 권유로 동학 계열을 포함한 삼성무극교를 구상하며 여기에 ‘청림’의 명칭을 덧붙여 동학의 계승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근호는 일본군 장교와 면담 자리를 마련하여 김상설을 통역 역할로 대동하였는데, 그 장교가 바로 우츠노미야였다.44) 이후 김상설은 우츠노미야에게 직접 접근하여 청림교를 창시한 것이다.45)

동시대 윤치호(尹致昊)의 기록에 따르면, 김상설의 청림교 창립의 목적은 “조선과 만주의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장래 국민운동(national movement)의 조직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었다.46) 즉, 김상설의 창립 목적은 일본 제국의 질서 속에서 조선인을 통합하고 제국 신민으로 개조하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상이 오직 친일적 기획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동시대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종교를 기반으로 새로운 집합체를 형성하려는 복합적인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김상설은 우츠노미야와의 면담에서 청림교가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신흥 종교로 기능할 수 있으며, 조선인의 정신적 통제를 유지하는 데 적합한 종교적 도구라고 설득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제국 권력과의 협력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열어두는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이 청림교를 지원한 배경에 대해 “조선인을 기독교로부터 이탈시키기 위한 전략”이라고 본 평가를 고려하면, 당시 청림교에 대한 이해는 서구 열강과 기독교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47)

우츠노미야 역시 김상설의 논리에 깊이 공감했고, 청림교를 식민 통치의 중개 조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탐색했다. 김상설을 제국 통치의 인적 자원으로 받아들인 우츠노미야의 관점은 1919년 10월 28일의 일기에서 잘 드러난다.

약속에 따라 김상설(金相卨), 시부카와 쿠모다케(渋川雲岳), 김복(金復)을 동반하여 찾아왔다. 먼저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독립은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독립’을 말하는 것은 결국 동포를 구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희망 없는 독립운동은 오히려 동포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일이다. 이미 독립의 희망이 없다면 차선책을 택하여 동포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의존한다면 그 대우는 일본에 의존할 때보다 훨씬 악할 것임은, 프랑스령 동경(하노이)의 실제를 본 경험으로도 분명하다. 오늘날 동아의 대국면을 위해서라도 일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외국인의 자금을 받아 선동에 종사하고, 끝내 그들의 술책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개탄스럽다 등.) 이에 나는 「위언(危言)」의 대요를 설하고, 일·중·한(日支鮮) 등의 연합 혹은 제휴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합강약(分合強弱)의 이치를 들어 설명하였다 … 그들(김상설 일행)은 크게 감복한 듯하였다. 상해에 있는 자들도(上海の者等) 나의 주지(主旨)의 일단이라도 들으면 반드시 곧 심복할 것이라고 말하고, 만사를 깊이 의탁한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물러갔다. 확실히 유력한 일문하(一門下)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48) (강조는 필자)

이 기록은 우츠노미야가 유력 인물들을 단순히 회유하는 차원을 넘어, 제국 통치의 ‘중개자’로 포섭하는 전략을 펼쳤음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우츠노미야는 김상설을 자주 만나며 「위언」과 같은 자신의 저술을 공유하고 개인적으로 용돈을 지급하며 신뢰를 강화하였다.49) 특히 1920년 5월, 김상설이 청림교대회를 위해 500엔의 원조를 요청하자 우츠노미야는 조선군 사령부에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부인의 은행 예금에서 500엔을 꺼내어 직접 지원할 정도였다.50) 그는 김상설에게 “동아를 위해 함께 힘쓰자”고 격려하였고, 김상설은 이에 결연한 자세로 응하며 “반드시 실행으로 보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츠노미야는 김상설을 완전히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 있다고 판단하였다.51) 이는 우츠노미야가 기대했던 ‘종교인 네트워크의 정치적 활용’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츠노미야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이후 청림교의 신도 수는 1920년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나 불과 1년 만에 5천 명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52) 『시정연보(施政年報)』에 따르면 1922년에는 약 5천명, 1923년에는 약 1만 3천명으로 집계되며, 이러한 교세는 당시 천도교와 시천교 다음 수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53) 물론 우츠노미야의 조선군사령관 재임이 1921년에 종료되었기에 그 이후에도 직간접적인 후원이 지속되었는지는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이때 맺어둔 식민 권력 지도부와의 인연이 1920년대 중반 교단 성장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편의로 작용했는지는 추후의 연구를 통해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림교가 창립 초기에 폭발적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교단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우츠노미야와의 밀착된 관계가 초기 교단 기반 형성에 일정한 조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상설은 우츠노미야와 상호 지지를 교환하고 있었을 뿐아니라, 그를 대리하여 공작을 수행한 정황도 포착된다.54) 1919년 10월 10일 자 일기에 따르면, 김상설은 ‘배일 거괴(排日巨魁)’로 알려진 김복을 대동하고 우츠노미야를 찾아와 “상해임시정부를 파괴하고 내외 독립파를 개심(改心)시키는 사업”에 대해 상담하고 우츠노미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이는 우츠노미야와 김상설의 관계가 단순한 종교적 교감을 넘어선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즉, 김상설의 청림교는 표면적으로는 민심을 위무하는 종교의 형태를 띠었으나, 그 실질은 임시정부 와해와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의 ‘비정규 사상전(思想戰)’을 수행하기 위한 위장된 거점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청림교의 성격은 당시 총독부가 1915년 제정된 「포교규칙」을 통해 종교유사단체를 통제와 방임 사이의 모호한 영역에 둔 행정적 방침과도 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55) 종교유사단체는 교단의 생존을 위해 일제 최고위 권력자와 결탁을 시도했고, 식민 권력 역시 종교를 ‘위험 요소’이자 동시에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병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당시 김상설의 갑술구락부 창립, 최린(崔麟)의 일진회 재조직, 고일청(高一淸)의 시천교 운영 등 총독부가 종교의 이름 아래 친일 세력을 조직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56) 그러나 당시 종교유사단체로 분류되는 자생종교를 둘러싼 역학 관계는 일제의 일방적인 관제화 전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57) 우츠노미야는 김상설을 통해 김복과 같은 인물들을 자신의 통치망 안으로 포섭했다고 확신했으나, 김복은 오히려 이러한 일제 고관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이중적이고 책략적인 행보를 보였다. 즉, 우츠노미야가 시도한 종교인 포섭 전략은, 이처럼 종교와 정치를 넘나들며 식민 권력을 역이용하려 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복잡한 생존 전략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2.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부(朝鮮傳道部)와의 접촉

우츠노미야가 자생종교 지도자들을 포섭하려 한 이면에는 이와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차원의 종교 기획이 존재했다. 바로 일본 기독교 세력, 특히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부를 활용한 지식인층 및 대중 교화 공작이었다. 자생종교 지도자들을 통한 접근이 조선 민중의 정서를 매개하는 가능성을 겨냥했다면, 일본 기독교 인사와의 협력은 지식인층과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한 영향력 확대를 모색한 시도에 가까웠다.

이러한 구상은 1919년 5월 작성한 의견서 「조선시국관견(朝鮮時局管見)」에 명확히 드러난다. 다나카 육상 앞으로 작성한 이 문서는 총 1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츠노미야는 헌병 경찰 제도의 개편과 조선인 부대 창설과 같은 군사행정적 사안과 더불어 ‘일본인 경영에 의한 기독교에 대한 원조’를 핵심 통치 과제로 제안했다.58) 즉, 그에게 일본 기독교의 육성은 조선인 부대 창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통치 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또한 안동 지역 시찰 시에 포착했던 미국 등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조선인의 내면을 제국 질서로 통합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우츠노미야가 가장 먼저 접촉한 인물은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부 참사 무라카미 타다요시였다. 1919년 4월부터 우츠노미야는 무라카미와 빈번히 회동하며 조선 기독교계의 현황과 향후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4월 21일, 우츠노미야는 무라카미를 조선군사령부로 초청해 정무총감 오노 료이치로(大野綠一郞)에게 소개하고, ‘대(對)기독교 운동’을 명목으로 기밀비 500엔을 지급했다.59) 이 운동은 일본기독교본부와 연계되어 추진되었으며, 조선 내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일본 기독교의 활동 기반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무라카미는 이후 일본 본부로부터 1,500엔의 추가 자금을 지원받아 선교 활동을 확대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무라카미는 조선 기독교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심 동향과 불만 요인을 청취하여 총독부와 도쿄의 관계 인사들에게 보고했다. 그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도쿄의 정부가 조선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군국주의적 태도로 접근하는” 경직성을 문제의 원인으로 찾았다.60) 이는 식민 질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질서를 유지하면서 조선인을 보다 효과적으로 포섭할 방안을 모색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미국 선교사를 잠재적 경쟁 세력으로 인식하면서 무력 지배보다 문화와 사상을 통한 동화를 지향하던 우츠노미야의 관점과 접점을 형성했다.

무라카미는 우츠노미야와 윤치호가 40여 년만에 재회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윤치호는 조선 신지식계의 핵심 인물로 최남선(崔南善)과 이승만(李承晚)을 언급하며, 해외 유학 장려와 같은 정책이 민심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이러한 논의는 강압적 방식의 통치에서 교화 중심의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우츠노미야와 일본 내부의 문제의식과 상통하는 성격을 지닌다. 또한 무라카미는 도쿄와 상하이와의 교단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정보 교환과 인적 연결을 수행했다. 그는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본부의 핵심 인사들을 우츠노미야에게 연결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다나카 등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과의 정보 교환 창구 역할도 담당했다.61) 또한 무라카미는 일본 본토와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일본 기독교 조직을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활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기독교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또 다른 인물이 상하이 일본기독교청년회(YMCA)의 주사 후지타 큐코(藤田九皐)였다. 그는 일본 외무성 기록에 ‘상하이 거주 목사’로 기재되어 있으며, 1920년 1월 28일자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여운형을 직접 접촉해 독립운동 세력을 회유하려 시도한 인물이었다. 후지타는 ‘목사’라는 종교적 신분을 외교와 첩보의 매개로 활용했는데, 주목할 점은 일본조합교회 관계자들이 주도한 이 여운형 도쿄 유인 공작의 이면에 우츠노미야가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는 사실이다.62) 실제로 우츠노미야는 두 번째 도쿄 출장 중이던 1919년 11월 23일, 다나카 육군대신이 주최한 오찬 석상에 여운형과 직접 동석하였다. 비록 여운형이 일본의 기대를 깨고 독립의 정당성을 연설함으로써 회유 공작은 무참한 실패로 끝났으나, 이 자리에 조선군사령관이 배석했다는 사실 자체가 종교인을 매개로 한 공작이 제국 최고위층의 기획 하에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일본인인 무라카미나 후지타가 조선인 사회 깊숙이 파고드는 데에는 태생적 한계가 존재했다.

우츠노미야가 조선전도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더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내선일체’의 교리를 조선사회에 침투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 즉 조선인 행동대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조선전도부 간사 김린(金麟)이 있었다. 김린은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일제에 매수되어 변절한 인물로, 3·1운동 직후에는 조합교회 조직을 동원한 ‘대시국특별운동(大時局特別運動)’을 주도했다.63) 이 운동은 총독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는데, 인쇄물 배포, 순회 설교, 교리 보급 등을 통해 일본제국의 이념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책임자 와타세 츠네요시(渡瀨恒吉)는 이를 “기독교를 통한 보국(報國)의 실천”이라 규정하며, 종교를 제국에 대한 충성과 봉사의 수단으로 삼았다.64) 김린은 3·1운동의 여파가 지속되던 시기,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를 순회하며 시위 확산을 저지하고 일본의 통치 논리를 설파하는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우츠노미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어에 능통하고 계몽운동가 출신이라는 이력을 지닌 김린은 일본 종교인들이 갖지 못한 ‘현장 장악력’을 가진 유력한 매개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1919년 6월 무라카미의 소개로 “일본어에 능통하고 열심히 하는 친일자”로 김린을 처음 대면한 우츠노미야는 곧바로 김린의 장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65) 이후 김린은 단순한 종교적 협력자를 넘어, 사령관의 대(對)조선인 회유 공작을 최일선에서 수행하는 정보 브로커이자 인맥의 허브(Hub)로 맹활약했다. 일기에 따르면 그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정보 수집 및 분열 공작이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동향을 탐지하여 보고했으며, 10월에는 중국 철령(鉄嶺)의 유력자 이희간(李喜侃)을 우츠노미야의 관저로 유인하여 ‘내선융화’를 설득하게 했다.66) 당시 우츠노미야는 상해 임시정부의 해산과 재외 배일 조선인의 회유를 제1의 급선무로 삼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김린은 이희간과 같은 해외 유력자들을 사령관 앞으로 유인해오는 실질적인 수행원 역할을 담당했다. 우츠노미야는 이러한 비정규 공작을 독려하며 김린에게 활동 자금을 지급하고 장쭤린(張作霖)의 고문 마치노 다케마(町野武馬)에게 그의 신변 보호를 지시하는 등 치밀한 배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는 국내 유력 인사,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포섭 알선이었다. 김린은 10월 9일 우츠노미야와의 오찬에서 “조선 제일의 인물은 이상재(李商在)”고 평하며, 배일(排日) 인사의 영향력 순위를 양기탁, 안태국(安泰國), 문창범(文昌範), 이승만 순으로 보고했다.67) 이어 10월 10일에는 실제로 이상재를 우츠노미야의 관저로 대동하였다. 70세의 노옹(老翁) 이상재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우츠노미야는 “말에 힘이 있고 기세가 있다”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만찬 후 “이씨가 점점 친근해진 것으로 보였다”며 회유의 성공을 확신하는 기록을 남겼다.68) 나아가 김린은 의병장 출신의 강재천(姜在天)이나 감리교 목사 홍병선(洪炳璇) 등 교파와 출신을 막론한 인사들을 연이어 소개하며, 사령관의 인적 통치망을 확장하는 매개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김린을 통한 우츠노미야의 포섭 전략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우츠노미야는 김린의 보고와 주선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상재 등이 “넘어왔다”고 판단했으나, 이는 식민 지배자의 희망 섞인 착각이었다. 실제로 이상재는 우츠노미야와의 만남 이후에도 비타협적인 민족운동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훗날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일제의 회유에 포섭되지 않았다. 한편 김린이 데려온 이희간은 1920년까지 계속해서 사이토 밑에서 임시정부의 회유, 파괴 공작에 종사하고 우츠노미야가 퇴임할 때까지 인연을 이어갔으며, 특별히 김상설과 함께 고별의 기회까지 따로 마련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69) 이처럼 이희간의 사례처럼 인맥 구축에 일부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상재의 굳건한 태도에서 드러나듯 그의 종교인 포섭 전략이 항상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김린이라는 왜곡된 렌즈를 통해 조선을 바라본 우츠노미야는, 종교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전략적 침묵이나 독립 의지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한 채 표면적인 ‘친일 인맥화’를 사상적 동화로 착각하는 맹점에 빠지고 말았다. 이는 우츠노미야가 시도한 ‘심정 통치’가 제도적 장치가 아닌 인적 네트워크와 금전적 지원에 의존한 비공식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한다.

Ⅳ. 나가며

본 연구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가 종교를 통치의 미시적 기제로 전유하려 한 양상을 일기를 통해 추적하였다. 그는 조선인의 자율적 정치 주체성을 부정한 채 식민 지배의 비대칭성을 도덕적 감화로 환원하였으며, 종교를 독자적 실천의 장이 아닌 통치 질서 보완을 위한 기능적 수단으로 한정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제국주의적 한계를 지닌다.

나아가 그가 표방한 유화적 구상의 기만적 한계는 제암리 학살 사건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츠노미야는 무력 진압의 참상을 인지하고도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사건을 철저히 축소·은폐하였다. 이는 조선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겠다던 그의 유화책이, 실제로는 도덕적 외양 아래 제국의 폭력성을 은폐하는 효과를 낳은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우츠노미야가 시도한 종교적 유화책은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위한 이면의 포석이기도 했다. 그는 3·1운동의 위기 상황을 역이용하여 사이토 총독과 함께 조선 내 일본군의 군사력 확장을 본국에 거듭 요구하였으며, 이는 훗날 1930년대 일본이 만주와 대륙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할 때 조선 주둔 일본군이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치명적인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비록 그의 비공식적 기획이 실제 행정망에 어느 정도 흡수되었는지는 관계 문서들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으나, 우츠노미야의 일기는 독보적인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무력통치와 문화통치의 이분법을 넘어, 행정과 감정 관리를 결합한 관리형 식민 통치를 구상한 관료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총독부의 문화통치로 이어지는 통치 논리가 형성되기 이전 단계의 중요한 연결 고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70) 그의 일기는 식민지 종교 정책이 완결된 제도로 등장하기 이전, 권력 내부에서 종교가 어떠한 문제의식 속에서 사유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종교 정책을 완결된 제도로 소급해 설명하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통치 현장의 미시적 실험과 식민 권력 내부의 균열을 조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일제강점기 종교와 권력의 관계는 단순한 억압과 저항의 이분법을 넘어, 제국의 고도로 계산된 통치술과 식민지 지식인들의 생존 전략이 치열하게 교차했던 ‘회색지대의 전장(戰場)’이었다. 이러한 참모형 군인의 비공식적 통치 실험이 이후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공식적인 문화정치 및 종교 관리 담론으로 어떻게 흡수·변형되었는지, 그리고 식민 권력의 공작에 대응했던 조선 종교계 내부의 시선은 어떠했는지를 교차 분석하는 것은, 근대 제국주의 통치와 종교의 역동적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향후 과제로 남겨둔다.

Notes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宇都宮太郎日記)』는 2007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일본군과 아시아 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제1권은 1900년, 제2권은 1907~1916년, 제3권은 1918~1921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제3권은 조선 주둔기의 통치 인식과 정책 구상을 비교적 집중적으로 담고 있다.

유리안 비온티노(Juljan Biontino), 「宇都宮太郎将軍の三·一独立運動の鎮圧過程に見られた朝鮮認識」, 『일본근대학연구』 37 (2012), pp.287-304; 김영숙, 「일본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사건」, 『일본학』 49 (2019), pp.1-30; 박완, 「3.1.운동 전후 조선인의 군사적 이용에 관한 일본 육군 내 논의」, 『일본비평』 21 (2019), pp.14-41; 이상훈,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 『백산학보』 123 (2022), pp.157-180. 이외에 우츠노미야의 조선인 네트워크를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배경한, 「독립운동과 친일의 경계 : 재중(在中) 독립운동가 김규흥(金奎興)의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 조선군사령관에의 접근문제」, 『역사학보』 244 (2019), pp.317-350.

키라 요시에(吉良芳恵), 「宇都宮太郎関係資料から見た三·一独立運動 : 陸軍中央との関係を中心に」, 『日本女子大学史学研究会』 46 (2005), pp.129-163; 사쿠라이 요시키(櫻井良樹), 「大正時代初期の宇都宮太郎 : 参謀本部第二部長として」 23 (2007), pp.1-8.

유리안 비온티노, 앞의 글, pp.3-5, 14-15.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소장된 「우츠노미야 타로 관계 문서(宇都宮太郎関係文書目録)」는 일기·서간·보고서·사진 자료 등 6,000여 점으로 구성된 개인 문서군으로, 그의 대아시아 통치 구상을 복원할 수 있는 핵심 사료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분석한 선행연구를 참조하여 원문 활용을 대신한다.

여기서 ‘자생종교’는 조선 사회 내부의 종교적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한 분석 범주로 사용된다. 이는 일본에서 이식된 교단 조직과 달리, 조선인의 언어, 관습, 신앙 감수성 속에서 형성되고 조선인 주체에 의해 운영된 종교운동을 가리킨다.

사쿠라이 요시키(櫻井良樹), 「大正時代初期の宇都宮太郎 : 参謀本部第二部長として」, pp.1-8. 우츠노미야의 생애와 조선군사령관으로 부임까지의 약력은 이 논문과 함께 유리안 비온티노, 앞의 글과 『国立国会図書館月報』 第739号 (2022年11月)를 참조하였다.

「우츠노미야 타로 관계 문서」 해제, 『国立国会図書館月報』 第739号 (2022年11月). 이 문서군에는 그가 중국 장사(長沙) 등지의 정보원들과 주고받은 서간과 보고서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쿠라이 요시키(櫻井良樹), 「宇都宮太郎関係文書」中の陸軍中国人留学生関係資料について」, 『人文学研究所報』, 72 (2024), pp.55-71.

사쿠라이 요시키(櫻井良樹), 「辛亥革命を利用した陸軍参謀本部の大陸戦略 : 宇都宮太郎 「居中調停に付」(一九一一年一二月三日)」, 『外交』 10 (2011), pp.72-75.

시마다 다이스케(島田大輔), 「明治後期における日本の対中東観 : 宇都宮太郎の「日土提携意見書」を中心に」, 『軍事史学』 578 (2015), pp.27-61.

이형식, 「조슈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조선 통치」, 『역사와 담론』 91 (2019), p.16.

박완(朴完), 「第一次世界大戦後における日本陸軍の自己改革に関する研究 : 国民·皇室·帝国の視点から」 (도쿄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유리안 비온티노, 앞의 글, pp.298-299.

우츠노미야 일기에 나타난 조선 인식과 종교 이해를 분석할 때, 이를 곧바로 1930년대 이후 제도화된 ‘내선일체론’이나 ‘황민화 정책’과 동일시하고자 함은 아니다. 1919년 시점에서 ‘내선일체’는 아직 국가 이념이나 공식 정책 용어로 정식화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총독부 차원의 일관된 정책으로 체계화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내선일체’라는 용어는 후대의 제도적 이념을 소급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츠노미야 개인의 인식과 실천 속에서 확인되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한 제국 질서 안에서 재편하려는 사고방식’을 분석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한정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는 정책사적 범주라기보다 인식사와 사상사의 범주에 가깝다.

유리안 비온티노, 앞의 글, pp.292-294.

1919년에 작성된 이 문건들은 우츠노미야가 주변 유력자들에게 문건을 보여주고 동지를 규합하는데 사용되었으며, 『경성일보』 등에 익명으로 게재되는 등 우츠노미야의 치밀한 대중 여론 공작에 적극 활용되었다. 해당 문건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향후 별도의 연구로 미루고, 본고에서는 그 핵심 요지와 일기 속 사유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宇都宮太郎, 『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 : 陸軍大将宇都宮太郎日記 第3巻』, 宇都宮太郎関係資料研究会 編 (東京: 岩波書店, 2007), 1919. 3. 9. (이하 『宮太郎日記』로 표기)

그의 구상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주도하는 제국 질서 내부에서 전개된 것이며, 현실의 식민 통치 구조를 해체하려는 급진적 평등론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강약’과 ‘동서’의 차별을 넘어선 세계를 지향점으로 상정하고, 일본과 조선의 융합을 그 출발점으로 설정한 점은, 그의 통치 구상이 문명과 정신의 통합이라는 차원에서 사고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우츠노미야의 본원에 담긴 구상은 제국 일본 내부에서 전개된 일종의 ‘아시아주의적 보편주의’의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우츠노미야가 말한 ‘황금시대’는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자율성을 전제하지 않는 한계 속에서 제시된 이상이었다. 이는 근대 아시아주의가 지녔던 초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이중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박상수, 「동아시아 근대 ‘아시아주의’ 독법(讀法) : 계보, 유형, 층위」, 『아세아연구』 56 (2013), pp.7-38.)

『宮太郎日記』, 1919. 3. 1.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형제’의 비유를 들기도 했다. 우츠노미야는 조선의 교과서에 한일 합동이 불가피함을 서술하면서 내지인은 조선인을 동생으로, 조선인은 내지인을 형님으로 서로 친할 것을 교육해야 함을 세키야 테이자부로(關屋貞三郞) 학무국장에게 말한 바 있다. (『宮太郎日記』, 1919. 5. 9.)

유리안 비온티노, 앞의 글, p.295.

같은 글, pp.287-304.

『宮太郎日記』, 1919. 1. 21.

『宮太郎日記』, 1919. 2. 15.

권동우, 「일제강점기 천리교의 토착화 과정 연구 : 조선인 포교의 방향과 실제 양상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119 (2022), pp.287-314.

같은 글, pp.302-307.

박양신, 「1920년대 일본 식민정책학의 식민정책론 : 식민지 본위주의와 자치주의」, 『일본비평』 21 (2019), pp.53-57.

같은 글, pp.54-59.

박인규, 「일제강점기 식민당국의 신종교 정책의 추이 : 종교유사단체와 유사종교 개념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47 (2024), p.13.

같은 글, pp.6-7.

미야우치 사키(宮內彩希), 『“미신”론을 통해 본 제국일본과 식민지 조선』 (서울: 민속원, 2021), pp.73-74.

박인규, 앞의 글, p.15.

장석흥, 「권동진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학논총』 30 (2008), pp.639-669.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은 6·10만세운동 때에도 천도교 구파를 이끌었으며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자주 독립에 매진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독립국가 수립에 힘썼고, 신탁통치 반대, 자율적 통일정권 추진 등을 주장하였다. 만년까지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헌신한 그는 1947년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宮太郎日記』, 1919. 1. 5.

『宮太郎日記』, 1919. 1. 12.

『宮太郎日記』, 1919. 2. 27.

권동진이 사건일을 3월 3일로 오해하도록 말한 것의 의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3·1운동의 정확한 날짜가 미정 혹은 보안상 내부에서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추측이 있는 한편, 그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모를 수 없는 상황에서 일부러 혼란을 주기 위해 다른 날짜를 전달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유리안 비온티노의 경우, 후자의 의견에 서있다. (유리안 비온티노, 같은 글, p.295.)

『宮太郎日記』, 1919. 3. 1.

『宮太郎日記』, 1919. 3. 20.

이후 권동진은 우츠노미야 일기에 일체 언급되지 않다가 12월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 그가 수감 중임을 알 수 있다. (『宮太郎日記』, 1919. 12. 2.)

최시형 계열의 도통을 따르지 않고 갈라져 나온 청림교에 관해서, 일부 기록에서는 최제우가 생전에 자신의 추종자 중 한 인물이 훗날 청림교를 창시할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진다. 이에 따라 여러 명의 청림(靑林)이 등장했는데, 정시종(鄭時鐘), 임종현(林鍾賢), 남정(南正) 등 설이 분분하여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요시카와 분타로(吉川文太郞)는 청림교를 1913년 정감록(鄭鑑錄)의 ‘정도령 계룡산 건국서’를 유포하며 경성에서 포교를 시작한 불온한 종교라고 보았고,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1904년에 남정 혹은 한간(韓旰)이 이를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이강오는 교조를 임종현(林鐘賢)으로 특정하면서, 그가 최시형의 북접(北接)에 대항하여 ‘남접(南接)’을 자처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한승훈, 「역사적 최제우와 청림교의 비밀결사들 : 한국 자생종교에서의 종교와 저항 폭력」, 『한국종교』 51 (2022), pp.56-101를 참고할 수 있다. 한편, 『청림교연혁사』는 최제우에게 ‘청림’이라는 호를 받고 남접의 주인으로 임명된 정시종의 도통 계보를 제시하며, 김상설이 그 전통을 계승한 인물임을 암시한다. (한승훈, 「청림교와 『청림현기경』」, 한국신종교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문(2024. 5. 11.), pp.49-53.)

『宮太郎日記』, 1919. 5. 10.

지나치게 많은 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조직으로는 조선의 정신을 정치적 소요에서 돌리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7』, 1920. 3. 26.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7』, 1920. 3. 29.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7』, 1920. 3. 26. 영문 일기 원문에는 “national movement”로 표기되어 있는 부분이 한국어로는 ‘민족운동’으로 되어 있다. 직역상으로는 독립운동과 유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으나, 문맥상 일본제국 내에서 조선인을 ‘신민(臣民)’으로 포섭하기 위한 국민적 계몽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를 ‘국민운동’으로 번역하여, ‘민족운동’으로 번역할 경우에 김상설이 실제로는 항일독립을 지향했다는 오독을 방지하고자 한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7』, 1920. 3. 29.

『宮太郎日記』, 1919. 10. 2.

『宮太郎日記』, 1919. 10. 4., 10. 7.

『宮太郎日記』, 1920. 5. 15.

『宮太郎日記』, 1919. 10. 9. 한편으로는 김상설의 말을 전부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도 있다. (『宮太郎日記』, 1919. 11. 2.)

미야우치 사키, 앞의 책, p.75. 본서에는 김상설을 김상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일한 번역에서의 오기로 보인다.

박인규, 앞의 글, p.17.

『宮太郎日記』, 1919. 10. 10., 10. 16.

미야우치 사키, 앞의 책, p.71.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9』, 1934. 7. 7.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종교 조직을 표방하여 합법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독립운동가 양기탁(梁起鐸)은 1920년 5월, 천도교·시천교·청림교 등 6개 교단을 통합하여 통천교(統天敎)를 창립하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종교 운동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분산된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려는 위장된 정치적 기획이었다. 김복, 즉 김규흥(金奎興)의 사례 역시 이러한 경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김규흥은 우츠노미야와 면담하며 공작 자금을 요청하고 은행 설립을 협의하는 등 외관상 일제 권력과 협력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과 조직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는 독립의 현실적 가능성을 냉정히 타진하고, 식민 권력을 협상과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책략적 선택’으로 이해된다. (김필자, 『양기탁의 민족운동』, 서울: 지구문화사, 1988; 배경한, 앞의 글.)

『宮太郎日記』, 「解説」, p.23.

『宮太郎日記』, 1919. 4. 21.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6』, 1919. 4. 25.; 1919. 4. 26.

『宮太郎日記』, 1919. 9. 5.

서민교, 「3·1운동 100주년에 다시 보는 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일기」, 『내일을여는역사』 77 (2019), pp.236-237.

박혜미, 「일본조합교회 간사 김린의 생애와 친일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51 (2019), pp.41-74. 김린의 본명은 김명준으로, 본래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설에 참여하고 105인 사건 등 기독교계의 고난을 목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3년경 일제에 매수되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 YMCA에 예속시키려 시도하다 축출된 바 있다. 우츠노미야가 그를 중용한 것은 이러한 그의 ‘변절’ 이력과 기독교계 내부 사정에 정통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기 전덕기(全德基)가 이끄는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는 국권 회복 운동에 매진하였는데, 김린의 행보는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친일 기독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한국기독교와 역사』 5 (1996), pp.34-35.

『宮太郎日記』, 1919. 6. 6.

『宮太郎日記』, 1919. 6. 23.

『宮太郎日記』, 1919. 10. 9.

『宮太郎日記』, 1919. 10. 10.

『宮太郎日記』, 1920. 8. 17. ~ 8. 19.

유리안 비온티노, 같은 글, pp.292-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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