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본 논문은 화서학파 내의 유인석(柳麟錫, 1842~1915)과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심론을 고찰함으로써 이들의 이론적 차이를 확인하고, 아울러 화서학파 내의 분열(심설논쟁)을 초래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화서학파는 율곡학을 계승한 화서(이항로, 1792~1868)를 종장으로 하는 기호학파 계열의 한 분파이다. 19세기 이후, 같은 기호학파 계열로는 노사(기정진)를 종장으로 하는 노사학파와 간재(전우)를 종장으로 하는 간재학파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는 입장이다. 율곡학은 ‘리는 무위(無爲)하고 기는 유위(有爲)하다’는데 기반하고 있다. 리는 무위하므로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유위한 기 속에 내재하니, 이것이 율곡이론의 뼈대를 이루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내용이다. 심성론에서도 ‘성은 무위하므로 리이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이다’는 심의 유위성·작용성에 근거하여 심을 기로 해석하니, 이것이 율곡의 ‘심시기(心是氣)’이다.
이항로 역시 율곡의 ‘심시기’에서 출발하지만(즉 심은 氣이고 物이다), 그럼에도 심통성정(心統性情)의 말처럼 ‘심이 성정을 주재·통솔한다’는 입장에서 심을 리로써 해석한다. 이것은 ‘리가 주인이고 기가 하인이다’는 리 우위적 주리론의 사고에 따른 것이다. “리가 주인이 되고 기가 하인이 되면, 리는 순수하고 기는 바르게 되어 만사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진다. 기가 주인이 되고 리가 하인이 되면, 기는 강하고 리는 미약하여 만사가 혼란해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1) 이러한 주리론의 사고는 그의 이기론과 심성론 전반에 그대로 관철된다. 율곡처럼 심을 기로써 해석하면, 결국 주인과 하인의 자리가 뒤바뀌어 하인(기)이 주인(리)에게 명령하는 하는 격이므로 옳지 않다. 이항로의 이러한 해석은 율곡학을 계승하는 기호학파의 종지와 맞지 않는데, 이로써 이항로의 심설에는 심을 ‘리’로써 말하기도 하고 ‘기’로써 말하기도 하는 서로 상반된 내용을 내포하게 된다.
이러한 상반된 해석은 문인제자들 사이에서 논쟁으로 전개되는데, 이항로의 직전 제자인 중암(김평묵)과 성재(유중교)의 충돌이 그것이다. 김평묵이 ‘이리위심(以理爲心)’의 관점에서 주재로서의 리만을 인정한다면, 유중교는 ‘심합이기(心合理氣)’의 관점에서 주재로서의 리와 작용으로서의 기를 동시에 인정한다. 이 과정에서 유중교는 만년에 스승인 이항로의 심설을 조정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취지의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1886)을 지어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논쟁을 심화시킨다.
유중교에 따르면, 심속에 비록 리(성)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심의 리를 실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이므로 ‘심합이기’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심은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기와 함께 말해야 한다. 물론 유중교가 심에서의 기의 역할을 주장한다고 해서 리를 주인으로 하는 ‘주리론’적 사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 근본을 논하면, 리는 실제로 기의 주인이 되고, 기는 곧 이 리가 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조화나 인심의 운용(작용)은 모두 리가 하는 것이다.”2) 리는 기의 주인이고 기는 리의 명령을 따르니, 천지의 자연현상과 사람의 마음작용은 모두 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이귀기천(理貴氣賤)·이선기후(理先氣後)·이주기역(理主氣役)뿐만 아니라, 이선기악(理善氣惡)의 전형이다. 결국 심은 리로써 말할 수도 있고 기로써 말할 수도 있지만, 리는 주인이고 기는 하인이므로 마땅히 리를 주로 하여 말해야 한다. 이것은 유중교 역시 김평묵과 마찬가지로, 주리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이항로 사후에 심을 ‘리로 볼 것인지’, ‘리와 기의 결합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임으로써 화서학파 내부의 논쟁으로 전개된다. 화서학파 내부 논쟁의 직접적 당사자인 김평묵과 유중교가 사망한 이후에도 유중교의 <조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된다.3) 이들 논쟁은 재전제자들로까지 이어지는데, 면암(최익현)·용계(유기일)·손지(홍재구: 김평묵의 사위) 등은 김평묵의 입장을 지지하고, 의암(유인석)·입암(주용규)·항와(유중악) 등은 유중교의 입장을 지지한다. 김평묵을 지지하는 최익현은 유인석 및 그의 제자들과 논변을 전개하고, 유중교를 지지하는 유인석은 최익현 및 그의 제자들과 논변을 전개한다. 이로써 이항로의 심설에 대한 해석을 두고 화서학파 내부의 논쟁으로 확대된다.
지금까지 화서학파 내부의 심설논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이항로의 직전제자요 화서학파의 대표인물인 김평묵과 유중교의 심설에 집중되어 있다.4) 본문에서는 그 범위를 이들 문인·제자들로까지 확장하여 화서학파 내부의 심설논쟁을 소개한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는 유인석의 심론을 최익현·김평묵처럼 기의 역할을 배제시킨 주리론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는데,5) 그의 심론은 ‘주리론’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기의 역할을 중시하는 ‘심합이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김평묵을 지지하는 최익현과 유중교를 지지하는 유인석의 심론을 고찰함으로써 이들의 이론적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화서학파 내부에서 일어난 심설논쟁의 분열양상과 그 원인을 확인한다.
본문을 전개하기 전에, 당시 학문풍토의 실상에 대한 유인석의 비판적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에서 바야흐로 학문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퇴계와 율곡으로부터이다. 호론과 낙론의 여러 선생들의 견해는 매번 같지 않아 바로 시비다툼이 일어났다. 시비다툼 사이에서 방치하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을 알지 못한다고 비웃는다. 이 한쪽 설을 주장하면 저 한쪽이 반드시 공격하고, 양쪽의 설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가지면 양쪽이 반드시 함께 공격한다. 중국의 학문(주자학)은 본래 이와 같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6)
이것은 조선의 학풍이 지나치게 양분화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나라에서 바야흐로 학문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즉 조선유학사의 학문적 폐단은 퇴계와 율곡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바로 16세기에 전개된 사단칠정논쟁을 가리키는데, 이를 계기로 퇴계와 율곡을 정점으로 하는 영남학파(퇴계학파)와 기호학파(율곡학파)라는 학파적 성격이 선명하게 정립된다. 이들 학파는 각자 스승의 학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상대방에 대한 논박을 지속함으로써 학파의 분열이 일어나고, 이와 더불어 다른 학파에 대한 배타적인 학풍을 형성한다. 예컨대 영남학파에서는 퇴계를 지지하고 율곡을 배척하며, 기호학파에서는 율곡을 지지하고 퇴계를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학풍은 인물성동이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8세기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에서 ‘인성과 물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인물성동이논쟁이 대두되어 호론(호학)과 낙론(낙학)으로 분화된다. 이들 역시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입장에서 상대방에 대한 논박을 지속함으로써 학파의 분열이 일어나고, 이와 더불어 다른 학파에 대한 배타적인 학풍을 형성한다. 유인석의 말처럼, 상대방의 주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학문을 모른다고 비웃고, 또한 한쪽의 설을 지지하면 다른 쪽이 공격하고, 양쪽의 설을 모두 지지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견지하면 양쪽에서 모두 공격한다. 이러한 배타적 학풍은 한말(韓末)에까지 지속된다.
이 때문에 유인석은 한말의 국가존망이라는 엄중한 시기에 지식인들이 서로 분열되어 싸움만을 일삼는 당시의 학문풍토를 비판한다. 이것은 아마도 개항 이후, 실제로 일제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며 항일의병운동을 주도한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써 그의 현실인식에 따른 것이다. 21세기 오늘날 학계에도 여전히 퇴계와 율곡을 경계로 배타적 학풍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Ⅱ. 의암 유인석의 심론 : 심합이기(心合理氣)
최익현의 제자인 유기일7)이 유중교의 <조보>에 대해 ‘선사(이항로)를 배반한 설’이라고 비판하자, 유인석도 스승인 유중교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유기일을 비판하는 것처럼8), 유인석9)의 심론은 유중교의 심설을 변호·지지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유중교와 마찬가지로, 유인석은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심을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 심을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심에는 진정(眞正, 선)과 사망(邪妄, 악)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심은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함께 있으니, 심은 반드시 리와 기가 합쳐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유인석은 유중교가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작성한 것은 선사(이항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사의 심설을 더욱 완비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이>다만 리가 주인이 된다고 말하고 그것이 氣가 되고 物이 됨을 함께 말하지 않으면, 진실로 본체에 밝으나 그 體用·本末에 대해서는 미비함이 있다. 이 때문에 ‘조정하고 보완하는(調補)’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氣가 되고 物이 됨을 겸해서 말한 것이다. 마치 정호와 장재가 맹자의 성선에 근거하면서 또 기질을 말하여 그 미비함을 보완한 것과 같다.10)
이항로의 심설에 대해 유중교가 <조보>을 작성한 것은 정호와 장재가 맹자의 성선설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기질을 말하여 그 미비한 점을 보완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정자에 따르면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미비하고, 기를 논하면서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 않다.”11) 성만 말하고 기를 말하지 않으면 기질에 따른 성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이때는 기질지성이다), 기만 말하고 성을 말하지 않으면 기질 속에 내재하는 성의 본질(본래모습)을 알지 못한다(이때는 본연지성이다). 그러므로 맹자의 성선설을 근본으로 삼지만, 성은 반드시 기질과 함께 말해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마찬가지로 심 역시 리를 주인으로 삼지만, 리만을 말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기와 함께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중교가 ‘심합이기’로써 기의 역할을 보완한 것은 전적으로 이항로의 심설을 완비시키려는 뜻이다. “정호와 장재에 연유하여 맹자의 도가 더욱 높아지듯이, 종숙(유중교)에 연유하여 화서(이항로)의 공이 더욱 드러난다.”12) 마치 정호와 장재가 맹자의 성선설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기질을 말하여 성리학의 이론이 완비된 것처럼, 유중교 역시 이항로의 ‘주리론’에다 기의 역할을 보완함으로써, 즉 ‘본체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그 본체와 작용(體用) 또는 근본과 말단(本末)을 겸함으로써’ 비로소 심설이 완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중교의 <조보>는 김평묵·최익현·유기일의 말처럼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사(이항로)의 심설을 완비하게 한 커다란 공로로 인정해야 한다. 만약 정호와 장재가 기질(기)을 말하지 않았다면 맹자의 성선설이 성행하지 못하였듯이, 유중교가 <조보>를 말하지 않았다면 후학들의 의심에 직면하여 오히려 선사의 공로가 천하에 밝게 드러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국 유중교가 <조보>를 말한 것은 선사를 위한 고뇌에 찬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어서 유인석은 선사(이항로)께서 심을 ‘주리’로 말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서(이항로)는 리로써 明德을 말하여 실제로 성학(주자학)의 종지를 터득하여 이학에 새로운 공로가 있다. 그가 리로써 심을 단정한 것은 오로지 심으로 리를 삼은 것이 아니다. 심은 대개 리로써 말하는 자도 있고 기로써 말하는 자도 있으나, 리는 주인이고 기는 하인이다. 그러므로 기로써 심을 말하는 것은 군자가 심으로 여기지 않는다.13)
원래 선사의 ‘주리’는 명덕을 리로써 해석한 것이지 심을 리로써 해석한 것이 아니다. “그가 리로써 심을 단정한 것은 오로지 심으로 리를 삼은 것이 아니다.” 선사께서 리로써 심을 말한 것은 심이 리라는 말이 아니다. 심은 이기를 겸하지만, 다만 리는 주인이고 기는 하인이니 주인이 리임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심은 리로써 말하는 자도 있고 기로써 말하는 자도 있지만, “기로써 심을 말하는 것은 군자가 심으로 여기지 않는다.” 즉 군자는 기로써 심을 말하지 않고 리로써 심을 말한다는 말이다.
심은 이기를 겸하지만, 리가 주인이므로 심은 마땅히 리로써 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사께서 말한 ‘주리론’의 요지이다. 선사께서는 리로써 심을 말한 것이지(이기를 겸하는 가운데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지), 육왕의 심즉리(心卽理)처럼 심이 곧장 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후생들은 선사께서 말한 ‘주리’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의 말이 돌고 돌아 마침내 양명학의 ‘심즉리’처럼 심이 곧 리라고 오인하는 지경에 이르니, 즉 선사께서 리로써 심을 말한 것이 결국 양명학의 이론으로 돌아가니, 결과적으로 선사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된다. 이 때문에 유중교가 선사의 뜻을 잘 살펴서 기의 역할을 보완한 것일 뿐이지, 선사를 비난하거나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유인석은 심을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심은 믿을 수 있는가. 심에는 存亡이 있어서 믿을 수 없다. 오직 보존하여 본체를 얻으면 믿을 수 있다. 심은 잡으면 바로 보존되고 놓으면 바로 잃어버린다. <다만>잃어버린 마음을 돌이키면 곧 보존되고, 보존되면 곧 본체를 얻으며, 본체를 얻으면 仁義가 그 가운데에 있다.14)
“심은 믿을 수 있는가.” 심은 믿을 수 없는 사물(물건)이다. 왜냐하면 심은 이기(또는 선악)를 겸하니, 심의 본체는 보존될 때도 있고(存) 잃어버릴 때도 있기(亡) 때문이다. 심이란 존망(存亡)이 있어서 믿을 수 없으니, 다만 심을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공자의 “<심은>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버린다”15)라는 말에 대해, 맹자는 “심은 神明不測하여 잃기가 쉽고 보존하기가 어려우니, 잠시도 존양하는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16) 즉 심은 잃기 쉽고 보존하기 어려운 물건이므로 반드시 보존하고 기르는 존양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심이란 수양공부가 필요한 대상이라는 말이니, 곧장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된다. 심이 리라면, 무슨 수양공부가 필요하겠는가. 다만 심을 보존하여 본체를 얻으면, 인·의·예·지의 성이 그 가운데 있으니, 이때는 리로써 말할 수 있다. 비록 심이 이기를 겸하지만, 다만 심의 본체만을 가리키면 리로써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인석은 심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경’ 공부를 제시한다. “심은 敬하면 보존되고, 보존되면 仁하니, 다른 길이 없다.”17) ‘경하면 심이 보존된다’는 것은 심은 믿을 수 없는 물건이라는 말이다. 결국 심은 이기·존망이 함께 있으므로 곧장 리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심을 기로만 말해서도 안 되니, 왜냐하면 심이 주재·묘용하기 때문이다. 율곡의 주장처럼 심이 기라면(心是氣), 기가 어떻게 주재·묘용할 수 있겠는가. 주재·묘용하는 것은 리이지 기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심은 이기의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心合理氣).
이러한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유인석은 심과 성을 개념적으로 분명히 구분한다.
또한 성은 仁하지 않음이 없으나 심은 仁하지 않음이 있다. 심은 인하지 않음이 있으나, 오직 심의 본체는 인하지 않음이 없다. 심이 인하지 않음이 있는데, 어찌 오로지 리로만 볼 수 있겠는가. 반드시 간별하여 본체의 仁만을 가리켜서 리로 보아야 비로소 옳다.18)
심과 성은 개념적으로 분명히 구분된다. 성은 인하지 않음이 없으나, 심은 인하지 않음이 있다. 성은 인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선하지만, 심은 인하지 않음이 있으므로 선악이 함께 있다. 따라서 성은 리이지만 심은 이기를 겸하므로 반드시 가려내어 본체만을 ‘리’라고 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 속의 일상에서 보더라도 사람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심이 곧장 리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심을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유인석은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심과 명덕을 분명히 구분한다.
심과 明德이 어찌 분명히 다른 두 가지 물건이겠는가. 그러나 심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는 神明(허령불매한 지각)이고, 명덕이란 것은 심에 있는 광명한 道理(법칙)이다. 그러므로 심과 명덕은 저절로 분별된다.19)
심은 이기를 겸한 것이지만, 명덕은 심속의 오로지 리만을 말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심속(리+기)의 리의 측면’과 ‘명덕의 리’가 겹치므로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가지 물건은 아니다. 그러나 명덕은 어디까지나 <이기를 겸하는>심속의 오로지 리만을 말한 것이지, 심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최익현처럼 심을 리로써만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심을 리로써만 해석하면, 결국 심과 명덕의 구분이 없게 되니 옳지 않다. 무엇보다 심은 이기를 겸한 것이므로 형이하의 사물(物)이라면, 명덕은 오로지 리만을 말한 것이므로 형이상의 법칙(則)이니,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이처럼 심과 명덕은 저절로 분별되니, 명덕은 리라고 할 수 있으나 심은 리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선사(이항로)께서는 왜 심을 리로써 말하였는가.
‘리가 기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있으나, ‘기가 리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리가 통솔한다’는 것은 말이 순조로울 수 있으나, ‘기가 통솔한다’는 것은 말이 순조롭지 않다. 그러므로 심은 리로써 말하기도 하고 기로써 말하기도 하지만, 주재가 되는 심과 성·정을 통솔하는 심은 마땅히 리로써 말해야 한다.20)
리는 기를 주재·통솔할 수 있으나 기는 리를 주재·통솔할 수 없다. 왜냐하면 리는 주인이고 기는 하인이니, 주인은 하인을 주재·통솔할 수 있으나 하인은 주인을 주재·통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가 기를 주재·통솔하듯이, 심은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한다. 예컨대 사람의 몸에 있는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손이 잡고, 발이 달리는 것은 모두 심의 주재에 따른 것이다. 물론 보고 듣고 잡고 달리는 것은 눈·귀·손·발과 같은 감각기관이 하는 것이지만, 이들이 보고 듣고 잡고 달리는 행동을 명령하는 주체는 심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선·악을 행하는 것, 즉 도덕성의 실현은 심의 주재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심이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심속의 리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 심속의 리가 주인이 되어서 한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할 때 비로소 도덕성(성)의 실현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심은 반드시 리로써 주인을 삼아야 한다. 비록 심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리가 주인이 되기 때문에 심을 리로써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사께서 말한 ‘주리론’의 뜻이다. 선사께서 말한 주리론 역시 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리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선사께서 말한 주리론의 종지이며, 동시에 주리론의 내용이 천하에 더욱 밝게 드러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유인석은 심을 기로써 말하는 기호학파와 심을 리로써 말하는 영남학파를 모두 비판한다.
근래에 충청도(湖中)의 학문(기호학파)은 심을 오로지 기로 여기고, 영남의 학문(영남학파)은 심을 오로지 리로 여긴다. 심이 오로지 기일 뿐이라면, 심은 ‘태극이 되고 주재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기에 대하여 ‘태극이 되고 주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이 오로지 리일 뿐이라면, 심에는 사려가 있고 지각이 있지 않는가. 리에 대하여 ‘사려가 있고 지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은 리로써 말하는 자도 있고, 기로써 말하는 자도 있다. 리로써 말하는 자는 <심을>리라고 하고, 기로써 말하는 자는 <심을>기라고 하니, 이와 같으면 괜찮다. 심은 하나인데, 어째서 혹자는 리로써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기로써 말하기도 하는가. 리와 기가 합하여 심이 되기 때문이다.21)
퇴/율 이후 조선유학사는 크게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양분되어 전개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이들 학파 사이에서 다양한 분화가 일어나니, 기호학파 내에서는 노사학파·화서학파·간재학파 등으로, 영남학파에서는 정재학파·한주학파 등으로 분화된다. 기호학파에서는 주로 율곡의 주기(主氣)적 경향에 근거하여 심을 기로 해석한다면, 영남학파에서는 퇴계의 주리(主理)적 경향에 근거하여 심을 리로 해석한다. 그러나 유인석의 말처럼, 기호학파에서는 모두 심을 기로 해석하거나 영남학파에서는 모두 심을 리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기호학파 내에서도 화서학파·노사학파는 심을 리로써 해석하기도 하고, 영남학파 내에서도 정재학파는 유인석처럼 ‘심합이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유인석은 심을 기로써 해석하는 기호학파와 심을 리로써 해석하는 영남학파를 동시에 비판한다. 예컨대 같은 기호학파 내의 간재학파에서처럼 심을 오로지 기로써만 해석하면(心是氣), ‘심이 태극(리)이 되고 주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주재하는 것은 리이지 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영남학파 내의 한주학파에서처럼 심을 오로지 리로써만 해석하면(心卽理), ‘심에 사려가 있고 지각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사려하고 지각하는 것은 기이지 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을 ‘기’라고 말하자니 태극과 주재가 리가 아니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심을 ‘리’라고 말하자니 사려와 지각이 기가 아니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태극과 주재를 기라고 말할 수 없듯이, 사려와 지각을 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결국 심에는 태극과 주재에 해당하는 리의 측면이 있고, 동시에 사려와 지각에 해당하는 기의 측면이 함께 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심은 리로써 말하는 자도 있고 기로써 말하는 자도 있다. 리로써 말하는 자는 영남학파 내의 한주학파에서처럼 심을 리라고 하고(心卽理), 기로써 말하는 자는 기호학파 내의 간재학파에서처럼 심을 기라고 한다(心是氣). 결국 심은 하나인데, 어째서 혹자는 리로써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기로써 말하기도 하는가. 왜냐하면 리와 기가 합하여 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이 리와 기가 합쳐진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인석은 ‘심합이기’를 재차 강조한다. “지금 천리의 주재와 氣機(기의 기틀)의 작용을 구분하지 않고 <심을>곧장 리라고 하면, 심의 지위가 경계에서 지나침이 있다. 오로지 기로만 보면, 또한 그 지위가 분수에서 감소함이 있다.”22) 심은 리로만 말해서도 지나치고 기로만 말해서도 부족하니, 리 또는 기 어느 하나에만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리와 기가 합하여 심이 된다’는 말처럼, ‘심합이기’로 보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심에는 주재기능(리)과 지각기능(기)이 있으며, 이 둘을 합한 것이 심이다. “주재와 지각을 심이라 한다. 사람이 천지를 알고(지각) 만물을 주재하여 그것(천지와 만물)을 위해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이라 한다.”23)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리로써 만물을 다스리고 주재할 수 있으며, 심속에 기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기로써 천지를 지각(알)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극·주재로써 말하면 심을 리로써 말할 수 있고, 사려·지각으로 말하면 심을 기로써 말할 수 있다. 결국 심은 리로써만 말해도 안 되고 기로써만 말해도 안 되니, 리와 기가 합쳐진 것으로 말해야 한다.24)
그렇다면 유인석은 왜 심을 리와 기의 결합으로 보려고 하는가. 무엇보다 심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써 진정(眞正, 선)과 사망(邪妄, 악)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심이란 본래 존귀하여 상대할 짝이 없지만, 또한 사람의 몸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物)이다. 사물에는 저절로 진(眞, 참)·정(正, 바름)과 사(邪, 사악함)·망(妄, 거짓)이 있으니, 심에도 ‘진·정’과 ‘사·망’이 없을 수 없다.25) 그러므로 반드시 사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다스려서 참되고 바른 마음(본체)을 회복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수양공부가 필요한 이유이다. 물론 본체를 회복한 심은 리로써 말할 수 있다. 결국 유인석이 ‘심합이기’를 주장하는 것은 심을 ‘진·정’과 ‘사·망’이 함께 있는 수양공부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이 이기·선악을 겸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대체로 심은 리로써 말하는 자도 있고 기로써 말하는 자도 있다. 다만 심이 리가 되는 것만 알고 그것이 기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공부에 소홀해진다. 다만 심이 기가 되는 것만 알고 그것이 리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주인인 근본에 어두워지니 모두 좋지 않다.26)
심은 리로써 말하는 자도 있고 기로써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심이 리가 되는 줄만 알고 기가 되는 줄을 모른다면, 반드시 공부에 소홀해진다. 왜냐하면 심이 리라면, 더 이상 사욕을 극복하거나 다스리는 공부가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양공부에 태만하여 자기 방종으로 흐르거나, 또는 양명학의 ‘심즉리’ 폐단처럼 개인의 주관적·자의적 판단을 그대로 리의 실현으로 오인할 위험이 있다. 이로써 객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주관주의적 폐단에 빠질 수가 있다. 예컨대 양명학처럼 심이 곧 리라면, 주관적 인식이 곧 객관적 진리가 되니, 내면(심속)의 양지(良知)만을 절대시하게 되고 ‘격물치지’와 같은 객관적 사물탐구에 대한 공부가 필요 없게 된다. 때문에 양명학은 객관적 사물의 리를 탐구하는 격물공부를 폐기하고, 현실생활에서 오로지 양지를 실현하는 ‘치양지(致良知)’ 공부만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유인석이 보기에는, 비록 사람에게 양지가 부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치양지’를 이룰 수 없고, 반드시 양지에 근본을 두더라도 격물공부를 병행해나가야 비로소 ‘치양지’를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격물공부(또는 수양공부)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심을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심이 기가 되는 줄만 알고 리가 되는 줄을 모른다면, 반드시 근본에 어두워진다. 왜냐하면 심이 기라면, 기가 리를 주재·통솔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기가 한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하여 모든 일의 강령(근본)이 되니 옳지 않다. 이것이 바로 선사께서 기를 배제하고 리를 주인으로 삼아 심을 말한 ‘주리론’의 큰 공로이다.
따라서 심은 한주학파의 ‘심즉리’처럼 리로만 말하거나 간재학파의 ‘심시기’처럼 기로만 말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것은 ‘심합이기’로 보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결국 심은 리로써 주재와 근본을 삼지만, 또한 심에는 기에 따른 ‘진·정’과 ‘사·망’이 있으니 항상 ‘극치존양’의 공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심을 리와 기의 결합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Ⅲ. 면암 최익현의 심론 : 이리위심(以理爲心)
최익현27)의 심론은 이항로·김평묵처럼 심을 ‘주리’로 해석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이리위심(以理爲心)’의 관점에서 ‘심합이기(心合理氣)’를 주장하는 유중교와 그를 지지하는 유인석을 아울러 비판한다. 먼저 최익현은 김평묵의 편지 내용에 근거하여 유중교의 처신이 잘못된 것임을 비판한다. 이것은 유중교를 지지하는 유인석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그(김평묵)가 나(최익현)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유중교가>심지어 ‘스승(이항로)의 설은 본래 경전과 다르다’고 하고, 또 ‘스스로 견해가 있으면 구차하게 先儒와 같이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또 선사(이항로)를 모함하고 천고의 성현과 배치되어 별도로 문호를 세워 오나라와 초나라가 왕으로 참칭한 죄를 범한 것이니, 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28)
최익현은 김평묵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내용에 근거하여 유중교를 비판한다. 유중교가 김평묵에게 ‘선사의 심설이 경전과 다르다’거나 ‘자신의 견해가 있으면 굳이 선유인 정주(程朱)와 같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최익현이 보기에, 이것은 선사에 대한 모함이며 정주의 심설과도 배치된다. 그렇다면 유중교가 선사의 문하에서 나와서 별도로 문호를 세운 것이니, 마치 오나라와 초나라가 주나라 천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왕으로 참칭한 죄를 범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하나 중요한 것은 최익현이 유중교의 심설을 ‘주기’로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이 노인(유중교)은 작년부터 ‘동문·제공에게 알리는 문서(示同門諸公帖)’를 가지고 나와 여러 차례 편지로 왕래하였는데, 한결같이 선사를 배척하고 노주(오희상)를 믿어서 구절마다 낙론(洛下)의 설과 부합하니, 이는 그의 고심이 첫째도 主氣이고 둘째도 主氣에 있음을 속일 수 없다.29)
최익현이 유중교의 심설을 ‘주기’로 비판하지만, 실제로 유중교의 심설은 ‘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와 기가 합쳐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데 있다(心合理氣). ‘심합이기’의 관점에서 리를 근본으로 삼지만, 동시에 기의 역할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익현은 심의 주인이 리라는 ‘주리’의 관점에서, 유중교의 ‘심에서 기의 역할을 보완해야 한다’는 <조보>의 취지를 그대로 ‘주기’로 이해하고 그의 심설을 비판한다.
주리·주기라는 말은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분리된 상태에서는 ‘주로 한다’는 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은 이기를 겸하는데, 이때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 ‘주리’이고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 ‘주기’이다. 비록 유중교가 기의 역할을 보완할 것을 주장하지만, 리를 주인(근본)으로 삼는 것은 김평묵·최익현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바로 유중교가 김평묵에게 보낸 <조보>의 내용이기도 하다.
특히 노주(오희상)-매산(홍직필)-고산(임헌회)-간재(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은 율곡의 ‘심시기’에 근거하여 ‘주리’에 반대하고 ‘주기’를 주장한다. 심이 비록 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곧장 성(리)이라 말해서는 안 되니, 왜냐하면 심과 성은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최익현은 유중교가 낙론의 학설과 부합한다고 비판한 것이다.30)
또한 주리·주기는 하나의 주제에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 예컨대 심은 이기를 겸하므로 ‘주리’의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고 ‘주기’의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으나, 심이 ‘주리’이면서 동시에 ‘주기’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최익현은 유중교의 심설이 ‘주리’이면서 동시에 ‘주기’가 되니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미 기가 주인이라고 말하고 또 리가 주인이라고 말한다면, 하나의 심 안에 두 주인이 나누어 차지하는 것이니, 또 어느 것이 바른 것이고 어느 것이 지나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31)
유중교처럼 ‘심합이기’로 말하면, 하나의 심 안에 리가 주인인 것과 기가 주인인 것이 각각 나누어 차지하는 꼴이니, 그렇다면 심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지, 즉 리인지 기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기가 주인이 아니라 리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김평묵과 마찬가지로, 유중교 역시 심에서 ‘리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다르지 않다. 다만 김평묵처럼 심속의 기 부분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리만을 말하면, 사려·지각하는 기의 역할이나 심의 ‘진·정’과 ‘사·망’에 대한 이해가 빠지므로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을 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볼 때, 최익현의 비판은 유중교의 취지를 오해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최익현 역시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래서 심이 이기를 겸하는 것은 마치 천하의 사물이 모두 이기를 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천하에는 기 없는 리가 없고, 또한 리 없는 기가 없다. 기가 없는 사물을 가려내어 리라고 부르려고 한다면 끝내 리를 말할 길이 없을 것이며, 리가 없는 사물을 가리켜서 기라고 부르려고 한다면 또한 기를 말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리와 기는 다만 사람이 그것을 나누어 보는데 있을 뿐이다.32)
천하의 사물은 모두 이기를 겸하니, 예컨대 기 없이 리만 있는 사물도 없고, 리 없이 기만 있는 사물도 없다. 그러므로 리를 말하려면 반드시 기가 있어야 하니 “기가 없는 사물을 가려내어 리라고 부르려고 한다면, 끝내 리를 말한 길이 없을 것이다”는 뜻이다. 또한 기를 말하려면 반드시 리가 있어야 하니 “리가 없는 사물을 가리켜서 기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또한 기를 말할 길이 없을 것이다”는 뜻이다. 이처럼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므로 리만을 말하거나 기만을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의 인식이 그것을 합쳐서보기도 하고 나누어보기도 하는데, 이로써 리와 기의 분별이 없을 수 없다. 이것은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지만, 다만 사람의 인식이 그것을 나누어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릇 사물에는 모두 리와 기가 있으니 하나라도 빠지면 사물이 될 수가 없다. 오직 리는 앞서고 기는 뒤서며,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되며, 리는 주인이고 기는 손님이며, 리는 장수이고 기는 병졸이니, 이것은 크게 구분한 것으로 털끝만큼도 어지럽힐 수 없다.”33) 결국 리와 기는 선(先)과 후(後), 통(通)과 국(局), 주인과 손님, 장수와 병졸과 같은 가치우열의 관계가 성립하니, 이 때문에 리가 기의 주인이 된다.
심 역시 마찬가지다. 심은 이기를 겸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합쳐서보기도 하고 나누어보기도 하는데, 이로써 심속의 리와 기의 분별이 없을 수 없다. 이때 리는 주인이 되고 기는 하인이 되니, 비록 심이 이기를 겸하지만 리가 주인이므로 반드시 리로써 말해야 한다.
또한 최익현은 심을 당체(當體)와 본체(本體)로도 구분한다. “당체는 혼륜해서 말한 것이고 본체는 분별해서 말한 것이니, 당체는 형이하가 되고 본체는 형이상이 되는 것은 비록 성현이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아마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34) 당체는 리와 기를 섞어서(혼륜하여) 말한 것이고, 본체는 리와 기를 나누어(분별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은 주자성리학의 인식방법인 혼륜(불상리)과 분개(불상잡)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최익현은 심을 당체(혼륜)와 본체(분개)의 두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심이 이기를 겸한다(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당체의 관점보다 본체의 관점에서 심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니, 왜냐하면 본체의 관점일 때라야 리가 주인이 되는 ‘주리’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익현이 ‘주리’의 입장에서 심을 리로써 말하지만,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수양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의 한 몸에서 살펴보면, 성은 진실로 사람에 있는 태극이다. 그러나 본체는 심에 갖추어져 있고 작용은 정에 도달하니, 심은 어둡고 밝은 차이가 있고, 정은 지나치고 모자라는 폐단이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욕을>극복하여 다스리는 공부를 더한 뒤에야 이 성이 비로소 온전해진다. 요·순의 惟精惟一과 공자·안자의 克己復禮와 자사·맹자의 存養省察과 遏人欲存天理가 모두 이 설이 아닌 것이 없으니, 그 공부하는 절도는 궁구할 필요 없이 저절로 분명하다.35)
‘심통성정’의 말처럼, 심은 성과 정을 통솔·주재하는 개념이다. 성이 심속에 갖추어져 있다가 심의 작용을 통하여 정으로 드러나니, 성은 심의 본체(體)가 되고 정은 심의 작용(用)이 된다. 이것이 심의 체용론적 해석이다. 심속에 갖추어져 있는 인·의·예·지의 성은 사람에게 있는 본체, 즉 태극(리)을 말한다. 그럼에도 심은 이기를 겸하므로 밝고(선) 어두운(악) 차이가 있다. 이것은 심에 선악이 함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결국 심은 이기·선악을 겸하므로 반드시 사욕을 이겨내고 다스리는 수양공부가 필요하며, 그러한 수양공부를 거친 뒤라야 비로소 그 본체(성)가 온전해진다.
다시 말하면, 심은 이기를 겸하므로 그것이 작용을 시작하면, 그 기미의 순간에 선악으로 갈라진다. 이때 심이 리로써 주재하여 사욕을 이겨내고 천리를 보존할 수 있으면 그 본체가 온전히 실현되니, 이때는 심을 곧장 리라고 말할 수 있다. 정 역시 마찬가지다. 성이 발하여 정으로 드러날 때, 심이 리로써 주재하면 선한 정으로 드러나지만, 리로써 주재하지 못하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불선한 정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심은 반드시 사욕을 이겨내고 다스리는 수양공부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요·순의 ‘<인심은 위태하므로>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도심은 미약하므로>오직 한결같이 지킨다(惟精惟一)’는 뜻이며, 공자·안자의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예(리)를 회복한다(克己復禮)’는 뜻이며, 자사·맹자의 ‘심의 미발 때는 존양하고 심의 이발 때는 성찰한다(存養省察)’거나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억제한다(存天理遏人欲)’는 뜻으로, 모두 같은 의미이다. 요·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심의 공부방법이나 공부절차는 이미 더 이상 궁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이처럼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최익현 역시 심이 이기·선악을 겸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최익현은 심을 리로써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심이 사물(物)이고 성이 법칙(則)인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모두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심’자는 ‘성’에 상대하여 말한 것일 뿐이니, 만약 오로지 심만을 말하면 인·의·예·지는 심의 리이고,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심의 정이며, 통틀어서 말하면 명덕이라 한다. 精爽은 심의 기이고, 火臟(심장)은 심의 형체인데, 이것은 군자가 심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36)
심과 성을 상대시켜 말하면, 심은 사물(物)이 되고 성은 법칙(則)이 된다. 심이 ‘사물’인 것은 사람의 몸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니, 이때 ‘사물’은 리(성)와 기(심장)를 겸하는 심의 전체를 말한다. 심은 ‘사물’이니 형이하의 개념이 되고, 성은 ‘법칙’이니 형이상의 개념이 된다. 결국 심은 형이하의 개념이고 성은 형이상의 개념으로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이것이 바로 유인석이 말하는 심의 의미이다.
유인석처럼 성과 상대시켜 말하면, 심은 이기를 겸한다. 그렇지만 성과 상대시키지 않고 오로지 심만을 말할 수도 있으며, 만약 오로지 심만을 말하면 “인·의·예·지는 심의 리이고,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심의 정이며, 통틀어 말하면 명덕이라 한다”는 의미이니, 이때는 심을 리로써 말할 수 있다.
또한 심은 기로써 말할 수도 있으니, 심의 정상(精爽, 혼백)·화장(火臟, 심장)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기로써 말하는 것은 “군자가 심으로 여기지 않는다.” 결국 군자가 심으로 여기는 것은 리이지 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최익현은 심이 비록 이기를 겸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심을 리로써 말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최익현은 심을 리로써 말한 사례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이른바 리가 주인이 되는 심이란 것은 무엇인가. 『주역』에서 말한 天地之心, 순임금이 말한 道心, 공자가 말한 明德, 맹자가 말한 仁義之心·良心·大人心·赤子心이나, 本心이라 하고, 主宰라 하며, 天君이라 하고, ‘심은 태극이다’고 하며, ‘심·성·천은 하나의 리이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본체인 것이다.37)
천지지심, 도심, 명덕, 인의지심, 양심, 대인지심, 적자지심, 본심, 주재, 천군, ‘심은 태극이다’, ‘심·성·천은 하나의 리이다’ 등은 모두 심을 리로써 말한 것이다. 이것은 이기를 겸하고 있는 심에서 오로지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양명학의 ‘심즉리’처럼 심이 곧장 리라는 말이 아니다. “<심이>이미 리와 기가 합쳐진 명칭이라면 眞·妄과 邪·正의 구분이 없을 수 없으니, 반드시 참되고 바른 것을 골라낸 뒤에야 비로소 리가 주인이 되는 심이라 말할 수 있다.”38) 이러한 해석은 실제로 유인석과 다르지 않다.
유인석과 마찬가지로, 최익현 역시 선사께서 오로지 심의 리만을 말하고 기를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항로 사후, 제자들이 스승의 글 중에서 핵심 내용만을 발췌하여 간행한 『화서아언』속의 “심은 氣이고 物(사물)이다. 다만 이 物과 이 氣 위에 나아가 그 덕을 가리켜서 리라고 말할 뿐이니, 성현이 말한 심은 대부분 이것(리)을 가리킨다”39)라는 말처럼, 선사께서 심을 리로써 말하지만 동시에 심이 기(氣)이고 물(物)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비록 심이 이기를 겸하지만(심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심의 본질은 리(덕)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사께서 말한 주리론의 뜻이다.
이에 최익현은 선사께서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주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굳이 기를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심이 사물(物)이고 성이 법칙(則)인 것은 저마다 모두 말한 것이니, 선사께서 어찌 모르셨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고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한 것이므로 말할 필요(일)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40) 마치 주인을 말하면 하인이 그 속에 포함되므로 굳이 하인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심 역시 이기를 겸하지만 리(주인)를 말하면 기(하인)는 저절로 그 속에 포함되므로 굳이 기를 말할 필요가 없어서 말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결국 선사께서 심을 리로써 말하더라도 양명학의 ‘심즉리’와는 분명히 구분되며, 다만 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리가 주인’임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심이 이기를 겸하지만 리로써 주인을 삼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며, 동시에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심을 기로써 말하는 ‘심시기’ 또는 ‘주기론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최익현은 왜 심을 리로써 해석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 심에서 리가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리는 주인·장수·선이고 기는 하인·병졸·악이라는 ‘리’ 우위적 가치우열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한말의 성리학적 특징인 ‘주리론’의 내용이다. 이 때문에 최익현은 태극이 음양의 주인이듯이, 심 역시 리를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양·동정이 태극으로 주인을 삼으면, 태극이 空寂에 빠지는데 이르지 않고 동정의 기틀(機)이 제멋대로 하지 못한다. 심이 비록 氣이고 物이지만, 반드시 리를 주인으로 하는 심으로 본체를 삼아서 克治存養의 공부로 하여금 치우치거나 폐기되는데 이르지 않게 하면, 이미 주인과 손님, 장수와 병졸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고, 또 명분과 지위가 확고한데 미혹되지 않는다.41)
태극(리)이 음양·동정(기)의 주인이 되면, 태극이 아무 것도 없는 공적(空寂, 텅 비어 있는 상태)에 빠지지 않으므로 동정의 기틀이 제멋대로 작용하지 못하니, 이로써 천하가 다스려지고 안정된다. 만약 태극이 음양·동정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태극은 있으나마나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동정의 기틀이 제멋대로 작용하니, 이로써 천하가 혼란해지고 위태롭게 된다. 그러므로 태극은 반드시 음양·동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비록 실제로 음양·동정의 기틀이 작용한 것이라도 그것은 리(태극)의 명령이나 지시에 따른 것이니, 결국 리가 주인이 된다. “기가 발하고 행하는 것은 실제로 리에서 명령을 받은 것이니, 명령하는 것은 주인이 되고 명령을 받는 것은 하인이 된다. 하인이 그 일을 담당하고 주인이 그 공을 차지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하늘의 법칙이고 땅의 의리이다).”42) 마치 하인이 일을 맡아서하더라도 주인의 명령이나 지시에 따른 것이듯이, 기의 작용 역시 리의 명령이나 지시에 따른 것이니, 리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리가 주인이므로 심은 반드시 리로써 말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비록 “심이 기(氣)이고 물(物)이지만” 즉 심이 이기를 겸하지만, “반드시 리를 주인으로 하는 심으로 본체를 삼아야 한다.” 즉 리로써 심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 예컨대 심이 리로써 근본(주인)을 삼아야 비로소 나쁜 마음(사욕)을 이겨내고 다스리거나 선한 마음(성)을 지키고 기르는 극치존양(克治存養)의 공부가 “치우치거나 폐기하는데 이르지 않는다.” 즉 외적인 사욕을 제거하는 ‘극치’와 내적인 성을 보존하는 ‘존양’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며칠 하다가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극치존양’의 공부가 이루어지면, 심에서 누가 주인인지 하인인지가 분명히 분별되고, 이로써 심의 명분과 위상이 확고해진다. 때문에 심은 리로써 주인을 삼아야 한다.
이 때문에 최익현은 리가 유위(有爲)한 것의 주인이지 결코 무위(無爲)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리가 無爲하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만약 ‘동하여<양을 낳고> 정하여<음을 낳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有爲이지 無爲가 아니다. 리는 진실로 無爲하지만 有爲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 이미 주인이 된다면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태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43)
사람들은 주자의 ‘리는 정의도 없고 조작도 없다(無情意 無造作)’는 말에 근거하여 리를 무위한 것이라 말하기를 좋아한다. 특히 율곡은 주자의 이 말에 근거하여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理無爲 氣有爲)’는 것을 자기 이론의 뼈대로 삼는다.
그러나 최익현에 의하면, 리는 결코 무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리가 무위하다고 하더라도, 리는 무위한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위’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처럼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 즉 태극이 동정하여 음양을 낳으니, 이때 태극(리)은 동정하여 음양(기)을 낳는 실제적인 주인(주체)이다. 율곡의 주장처럼 “음양·동정의 기틀이 저절로 그러할 뿐이지 시키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機自爾 非有使之)”는 말이 아니라, 리가 실제로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여 음양(기)을 낳도록 만드는(시키는) 주인이다.
심 역시 마찬가지다. 심이 비록 이기를 겸하지만, 심이 한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심속의 리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리의 주재 하에서 ‘극치존양’의 공부가 이루질 수 있으니, 심은 반드시 리로써 주인을 삼아야 한다.
여기에서 최익현과 유인석 심론의 이론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이들은 모두 ‘극치존양’의 공부를 말하지만, 그 내용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최익현이 심의 주재 하에서 비로소 ‘극치존양’의 공부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라면, 유인석은 심 자체를 ‘극치존양’의 공부가 필요한 대상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가 ‘극치존양’의 수양공부에서 심의 적극적 주재가 되는 리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라면, 후자는 ‘극치존양’의 수양공부에서 <심이 이기를 겸하므로>수양공부의 대상이 되는 기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같은 화서학파 내에서 ‘극치존양’의 수양공부를 말하지만, 그 내용에서 미세한 이론적 차이를 보이는 이유이다.
이어서 최익현은 심이 이기를 겸하지만 리로써 말해야 하는 이유를 비유로써 설명한다.
비유하면 김 판서의 집에는 김 판서가 집의 주인이지 식객인 이씨·장씨가 주인이 아니며, 이 참판의 집에는 이 참판이 집의 주인이지 하인인 안가·박가가 주인이 아닌 것과 같다. 만약 김 판서의 집에 식객인 이씨·장씨가 있다는 이유로, 이 참봉의 집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장 진사의 집이라고 부른다면 옳겠는가. 이 참판의 집에 하인인 안가·박가가 있다는 이유로, 안 청지기(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드는 사람)의 집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박 구종(驅從, 벼슬아치를 모시고 따라다니던 하인)의 집이라고 부른다면 옳겠는가. 지금 심에 리와 기가 있다는 이유로, 마침내 기를 그 형체의 주인이라 부른다면, 무엇이 이와 다르겠는가. … 이것이 우리 선사의 主理의 공이 세유들의 이론보다 뛰어난 점이다.44)
심이 비록 이기를 겸하지만 반드시 리를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비유하면, 김 판서의 집에서는 김 판서가 주인이지 식객인 이씨·장씨가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이 참판의 집에서는 이 참판이 집의 주인이지 하인인 안가·박가가 주인이 될 수 없다. 또한 김 판서의 집에 식객인 이씨·장씨가 있다고 하여, 이씨의 집이라고 부르거나 장씨의 집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이 참판의 집에 하인인 안가·박가가 있다고 하여, 안가의 집이라고 부르거나 박가의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비록 심에 리와 기가 함께 있다고 하여, 기를 주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결국 심은 사람의 몸에 있으니 이기를 겸하는 하나의 ‘사물(物)’이지만, 그럼에도 한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은 심속에 리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니, 심은 반드시 리로써 말해야 한다. 이처럼 최익현은 심의 주재기능에 근거하여 심을 리로써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선사께서 말한 ‘주리’의 내용이며, 동시에 선사가 말한 ‘주리론’의 공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Ⅳ. 결론
이상으로 같은 화서학파의 일원인 유인석과 최익현의 심론을 고찰한 것이며, 이것은 유중교와 김평묵 심론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유인석은 유중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심론을 전개하고, 최익현은 김평묵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심론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은 서로가 화서학파의 종장인 이항로의 심설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니, 이것은 이항로의 심설에 대한 화서학파의 내부 분열을 의미한다.
이항로의 심설에는 ‘심은 기(氣)이고 물(物)이다’는 기의 내용과 ‘리가 주인이고 기가 하인이니 심은 리로써 말해야 한다’는 주리의 내용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항로 사후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둘로 갈라지니, 김평묵이 ‘주리’의 내용에서 이항로의 심설을 해석하는 반면, 유중교는 ‘주리’의 내용에다 ‘기’의 내용을 보완하여 이항로의 심설을 해석한다.
유중교에 따르면, 명덕은 ‘주리’로 말할 수 있지만 심은 ‘주리’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심은 이기를 겸하므로(진정(眞正)과 사망(邪妄)이 함께 있으므로)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항로도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니, ‘심은 기(氣)이고 물(物)이다’는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럼에도 이항로는 ‘리는 주인이고 기는 하인이다’는 입장에서 심을 리로써 해석하니, 왜냐하면 리가 되어야 기(현실이 악)를 주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주리론’의 내용이다.
그렇지만 유중교는 심을 리로써만 말하면, 양명학의 ‘심즉리’로 오해될 수 있다고 경계한다. 실제로 당시 전우는 이항로의 ‘주리’적 심설을 양명학의 ‘심즉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유중교는 이항로의 ‘주리’적 심설의 바탕 위에서, 기의 역할을 아울러 강조함으로써 양명학의 ‘심즉리’와의 차이를 분명히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유중교가 이항로의 심설을 <조보>한 이유이며, 결코 스승의 심설을 반대하거나 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김평묵도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사실을 전제하지만 심을 리로써 해석하니, 무엇보다 심의 주인이 리가 될 때라야 한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중교 역시 심의 주인(주재)이 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심에는 진정(眞正, 선)과 사망(邪妄, 악)이 함께 있으므로(이기를 겸하므로) 오로지 리로써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유중교가 김평묵처럼 심을 리로써 말하는 것에 반대하고 ‘심합이기’를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들의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그 문인이자 후배인 유인석과 최익현의 심론으로 확대·전개된다. 유인석은 유중교를 계승하여 심을 이기의 결합으로 해석하는 반면, 최익현은 김평묵을 계승하여 심을 리로써 해석한다. 물론 최익현도 심이 이기를 겸한다는 사실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심의 주인이 리가 되어야 한 몸을 주재하고 성·정을 통솔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리의 주재 하에서만이 비로소 ‘극치존양’의 공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익현이 김평묵처럼, 심을 리로써 말하는 이유이다(以理爲心).
최익현과 마찬가지로 유인석도 심의 주인(주재)이 리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사려·지각과 같은 기의 역할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심에는 진정(眞正)과 사망(邪妄)이 함께 있으니(심이 이기를 겸하니), 이것이 바로 ‘극치존양’의 공부가 필요한 이유이다. 만약 최익현처럼 심을 리로써만 말하면, 더 이상 수양공부는 필요가 없게 된다. 이로써 주자성리학의 이기론·심성론과 같은 방대한 이론체계가 결국 수양론으로 귀결된다는 기본 전제가 무의미해진다. 이것이 바로 유인석이 유중교처럼, 심을 이기의 결합으로 말하는 이유이다(心合理氣).
이렇게 볼 때, 유인석과 최익현은 모두 이항로의 주리론을 견지하는 화서학파의 일원이지만, 이들의 심론에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최익현이 현실의 악(기)에 대한 리의 적극적 주재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심을 리로써 말한 것이라면, 유인석은 사려·지각과 같은 기의 작용성을 강조하는 측면뿐만 아니라 선악이 혼재하는 심에 대한 수양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심을 이기의 결합으로 말한 것이다. 전자가 주재라는 심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면, 후자는 수양의 대상이라는 심의 수동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을 인간에 대한 해석으로 설명하면, 최익현이 맹자의 성선설처럼 심의 본질적 측면에서 인간을 해석한 것이라면, 유인석은 선악이 혼재하는 심의 현실적 측면에서 인간을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심의 주재를 통해 리를 실현하든, 또는 심의 수양을 통해 리를 실현하든, ‘리의 실현’을 학문의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은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에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인석의 ‘심합이기(心合理氣)’와 최익현의 ‘이리위심(以理爲心)’의 이론적 차이이며, 동시에 같은 기호학파 계열인 전우(간재학파)의 ‘심시기(心是氣)’와 구분되는 화서학파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심론은 그대로 한말의 위정척사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비록 유인석이 리와 함께 기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그 역시 최익현과 마찬가지로 리가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리론적 세계관 속에서 위정척사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한 것은 둘이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논변은 무엇보다 주자성리학의 이론체계 속에서 심에 대한 개념정의를 분명히 함으로써 자신의 성리설을 전개하는 이론적·철학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만, 19~20세기라는 격변기의 사회현실 속에서 심의 성격과 역할을 바르게 규정하고 실천하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