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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행록에 관한 재고찰

崔峰龍 1 ,
Feng-Long Cui 1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대련대학교 교수
1Professor, Dalian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 Cui, Feng-Long, E-mail : cuifl@daum.net

ⓒ Copyright 2016,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Feb 29, 2016; Revised: Apr 10, 2016; Accepted: May 05, 2016

Published Online: Jun 01, 2017

ABSTRACT

In 2007, according to the records, I made an on-the-spot survey of the place where Doju Cho Jeongsan and his family might have lived in exile in Manchuria and released a paper in which I decided that the site could be the Shuidongchun (village) of Luotongshanzhen in Liuhexian, Jilin Province.

Thereafter, sponsored by the Doju Cho Jeongsan’s Memorial Project from 2008 to 2013, many times, I carried out the field investigations and researches on Liuhexian, including the visits of the institutions which have the historical documents, in order to find the data related to the participation of him and his family in the anti-Japanese movement. I was, hence, able to reconfirm that the village had been the place of their exile, based on my collected data and the oral reports which the local historians and ethnic Korean elders had provided.

In this study, using the historical documents and maps and the oral materials, I made an attempt to prove the historical truth thoroughly once again. First, the existing sources of Doju Cho and his family’s settling in Manchuria from March 1909 to 1917, were carefully analyzed which were described in The Jin-gyeong. In doing so, the misspelling of the names and the spatio-temporal errors of the people’s activities were corrected.

Next, I researched on another town, Shuitungou of Liuhexian in Fengtian Province (in West Gando of Manchuria), which it is known that Doju and his family stayed in, and the Laogushan (mountain), which it is believed that Doju cultivated himself in. Finally, through the attempt, I reached the conclusion that Doju and his family had settled at Shuidongchun (once called Shuidonggou or Shuitongchun) of Luotongshanzhen (once called Datonggou) in Liuhexian, Jilin Province.

In the Liuhexian-related documents and maps published in the eras of Republican China and Manchuria, the place name called Shuitungou was not found. However, I discovered a map in the era of Republican China on which Shuitongchun was recorded as Shuidonggou. In addition, considering the administration system of Republic China, tun(屯) and gou(溝) could not be used together in the place names. Accordingly, Shuitungou was more likely misspelled as Korean people in those days mispronounced Shuidonggou. Furthermore, people in China has habitually called the Dagushan(大孤山), located in the north of Gushanzizhen of Liuhexian, as the Laogushan(老孤山). This means that the Korean people who lived in the area then perhaps recorded the mountain as the Nogosan(老姑山), the mountain of the old goddess, according to Korean enunciation, because they had the custom of worshipping the mountain goddess.

I tried my best to find the historical documents regarding Doju and his family’s anti-Japanese activities to prove the location of exile in which they settled in northeastern China (Manchuria). However, I was not able to reach the initial goal completely due to the shortage of objective evidences, only to leave tasks to be solved. I hope that this study can give a little help to researchers who are interested in this matter.

Keywords: Doju Cho Jeongsan; Shuitungou; Shuidonggou; the Dagushan (mountain); the Laogushan (mountain)

Ⅰ. 들어가는 말

근대 한국종교사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서세동점의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동학을 효시로 한민족의 자생적 신종교가 나타난 것이었다.[1] 그리고 일제식민지배 전후에도 다양한 신종교가 출현하였고 대부분 신종교들은 일제의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세력이 확장됨으로써 한민족의 전통적인 종교 신앙체계에 지형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그 가운데 일부 신종교의 본부 혹은 종단(혹은 종파)이 한인들의 이주와 함께 일제하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의 중심무대로 부상되던 만주지역으로 이전하여 신앙공동체를 만들면서 한인사회의 형성 및 항일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필자는 만주지역 한인사회에 전파된 각 신종교의 연원과 계보,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에서의 역사적 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한국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집필하면서 재만 한인들의 신종교 관련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증산을 교조로 하는 신종교인 무극도를 창립한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도주(이하 조정산 도주로 약칭) 및 그 일가족은 일찍이 1909년 4월 만주의 요령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수둔구(水屯溝)에 망명하였고, 조정산 도주는 15세 때부터 노고산(老姑山)에서 ‘진법도수공부’를 수련하면서 영적 체험을 통해 득도하였으며, 또한 그는 부친 조용모(趙鏞模, 호는 復宇, 도명은 道丈), 숙부 조용의(趙鏞懿, 호는 曙山)ㆍ조용서(趙鏞瑞, 호는 晨山)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여 김혁(金赫)ㆍ이석대(李碩大)ㆍ이동녕(李東寧)ㆍ이회영(李會榮) 등에게 조달하였다는 기록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필자는 증산교 계열의 보천교에서 분파하여 인도교(人道敎, 혹은 三聖敎라 칭함)를 창립한 구악(龜岳) 채경대(蔡慶大)가 1936년 본부를 요녕성 철령(鐵嶺) 요양와보(僚陽窩保)로 옮긴 후에 ‘신농농장(神農農場)’이란 간판을 걸고, 유하현 고산자진(孤山子鎭) 대전자촌(大甸子村)에서 팔원(八院)을 조직하고 교인집단촌을 만들어 신앙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겨울에 일만 군경에 의해 탄압을 받은 이른바 ‘대전자 사건’을 학위논문에서 다루었다.[2] 그러나 조정산 도주 일가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은 주로 종단의 경전 혹은 종단에서 출판한 전기에 기술되어 있고 다른 사료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박사학위논문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항상 큰 아쉬움과 더불어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위공부를 마치고 중국으로 귀국한 후, 필자는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출판할 때 대순진리회 산하 대순종교문화연구소의 의뢰와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던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사ㆍ보완하려는 목적으로 유하현 ‘수둔구(水屯溝)’ 및 ‘노고산(老姑山)’ 등 망명지에 관한 고증을 위해 두 차례 현지답사를 진행하고 그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발표하였다.[3] 그런데 조정산 도주의 행적은 그 종단의 성스러운 종교사로서 경전에 사실(史實)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당시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출판할 때도 결국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담지 못했다.

필자는 2009월부터 2014년까지 약 6~7년 동안 조정산도주 추모사업회의 후원으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함께 유하현에 대하여 선후로 8차례 현지답사를 진행하였다. 이 조사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노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구술을 통해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망명지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로 유하현 당안관과 사지판공실 및 지명판공실, 통화시 당안관, 통화현 당안관, 단동시 당안관, 길림성 당안관 등 기관을 방문하여 역사자료 추적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만주행록 관련 당안 자료 발굴은 예상같이 쉽지 않았다.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에서 정착한 망명지 및 독립운동 행적에 관한 현지조사와 역사자료 발굴 작업을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 제한으로 말미암아 당초 계획한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한 점에 대하여 큰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망명지에 대한 재확인을 여실히 소개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연구자들에게 조그마한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 본다.

Ⅱ.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행록에 관한 기존기록 분석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만주 망명지와 그곳에서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관련 종단의 경전에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4]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행록은 태극도 경전인 『진경』의 「태극진경」 제1ㆍ2장에 제일 소상하게 서술되고 있으며 또한 『태극도주 조정산 전기』 및 기타 한국 신종교 연구저서에도 비슷하게 나타나 있다.

필자는 조사연구에 착수하기 전에 『진경(眞經)』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다른 기록에 비해 구체적이어서 조사연구의 초점을 잡는 기초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비해서 그 편찬년도가 가장 뒤였기에 기록의 전래 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그 활용에 있어서는 신중을 요하는 자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태극도 경전인 『진경』의 「태극진경」 제1장은 도주와 도주의 조부 및 부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부주(祖父主)의 휘(諱)는 영규(瑩奎) 자(字)는 태견(泰見) 호(號)는 취당(聚堂)이시니 성정(性情)이 순정(純正)하시고 재화(才華)가 초절(超絶)하셔서 문장과 서예로 명성을 떨치시니라 문과에 급제하셔서 홍문관(弘文舘) 정자(正字) 지춘추관(知春秋舘) 기사관(記事官)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 등 관직에 계시며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등과 교유하시더니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체결단계에 그 부당(不當)을 극간(極諫)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자 심화병(心火病)으로 환향(還鄕) 후 토혈(吐血) 서거(逝去)하시니라 (1:6)[5]

상제께서 현화인신(現化人身)하신 부주(父主)의 휘(諱)는 용모(鏞模) 자는 순필(舜弼) 도호(道號)는 복우도장(復宇道丈)이시니 도기전(道紀前) 三十二년 정축생(丁丑生)이시며 품성이 관후인자(寬厚仁慈)하시고 문장이 수일(秀逸)하시니라 선조로부터 전승한 가풍에 따라 충렬(忠烈)의 정신이 투철하시더니 을사년(乙巳年)에 부주(父主) 취당공(聚堂公)께서 순국(殉國)하신 후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더욱 열렬(熱烈)하셨으나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하여 내지(內地)에서의 구국활동(救國活動)이 불가능(不可能)하므로 계씨(季氏) 용의(鏞懿), 용서(鏞瑞)와 함께 만주(滿洲)로 솔가망명(率家亡命)하셔서 김혁(金赫) 이석대(李碩大) 등과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展開)하시다가 옥고(獄苦)까지 치르시고 만년(晩年)에 귀국하셔서 상제의 창도사업(創道事業)을 보좌하시니라 (1:4)[6]

이런 기록은 조정산 도주 일가에 보국안민과 애국충렬의 가풍이 짙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이석대(李碩大)란 인물은 잘 알려진 바가 없고 기존의 서간도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일찍이 유하현 삼원보(三源堡)[7]에서 활동했던 이진룡(李鎭龍, 일명 李奭大ㆍ李錫大)을 이석대(李碩大)[8]로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만주로 망명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삼형제(三兄弟)분은 선대(先代)부터 몸에 배인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왜(倭)라면 무조건(無條件) 혐오하시더니 이때 마산(馬山)에서 산본(山本)이란 왜인(倭人)이 금광업(金光業)과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으로 한인재산(韓人財産)을 착취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그를 도산(倒産)시켜 그 자금으로 화약을 제조하여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사용할 계책을 세우시니라 정미년(丁未年) 가을에 서산공(曙山公)께서 먼저 그에게 접근하여 신용을 얻으신 다음 익년(翌年)에는 춘궁기(春窮期)에 차금(借金)하여 추수(秋收) 후에 배(倍)로 상환(償還)하는 소위 농사장려금(農事獎勵金)을 얻기로 하시니라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 하시다가 드디어 삼형제 분의 가산(家産) 전부를 담보(擔保)하여 삼칠일대(三漆一帶) 주민(住民)이 넉넉히 쓸만한 정도의 거금(巨金)으로 제의(提議)하여 그의 재산보다 더 많은 오천원(五千圓)을 차금(借金)하시니 이는 상답(上畓) 수십만평(數十萬坪)에 상당(相當)하는 거금이니라 (1:33)[9]

이때 상제께서 은신처로 찾아가 진언(進言)하시기를 「저도 이제는 미구(未久)에 호패를 찰 연령(年齡)이옵고 세상물정도 다소나마 짐작하므로 어른들의 대사도모(大事圖謀)에 감히 말씀드릴 수 있사옵니다 저의 요량(料量)으로는 이번에 거금을 얻으심은 실로 천의(天意)의 감응이오며 선령의 감호(感護)이옵니다 그러나 이대로 구국운동을 추진하심에는 때가 늦사옵고 국외에서가 아니며 불가능할 듯 하오며 지금 만주(滿洲)의 간도지방(間島地方)에는 우국지사(憂國之士)가 많이 망명(亡命) 중이오니 활동의 적지(適地)라 생각하옵니다. 이 기회에 아버님께서는 중부(仲父)님과 함께 간도(間島)로 가셔서 근거지(根據地)를 정하시고 이어 전(全)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대사도모(大事圖謀)에 보좌하도록 하심이 양책(良策)이겠나이다」하시니라 (1:35)[10]

위의 기록에 따르면 조정산 도주의 진언에 따라 부친 복우도장과 서산공이 먼저 만주에 가서 유하현 수둔구에 정착지를 선택하고 땅을 구매하여 가택을 건조한 다음에 복우도장이 귀국하여 가족을 인솔하고 다시 만주로 망명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진경』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분께서는 만주(滿洲)에 도착(到着) 후 서간도(西間島) 요령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의 수둔구(水屯溝)를 정착지(定着地)로 택(擇)하시고 전답(田畓) 약간(若干)과 개간(開墾)할만한 황무지(荒蕪地) 십여만평(十餘萬坪)을 매수하여 이를 인근의 빈한(貧寒)한 동포들에게 분할(分割) 대여(貸與)하여 개간(開墾) 경작(耕作)하게 하시니라 또 전(全) 가족이 거주할 가택(家宅)을 건조(建造)한 다음 도장(道丈)께서 성솔(省率)을 위하여 다음해 三月에 귀향(歸鄕)하시니라 (1:36)[11]

기유(己酉) 四월 二十八일 미명(未明)에 전(全) 가족이 도장(道丈)의 인솔하(引率下)에 왜헌(倭憲)의 감시를 피하여 창원역(昌原驛)에서 기차로 망명(亡命)길에 오르시니 일행(一行)은 십여 명이며 간단한 의류(衣類)와 식기(食器) 등을 가지고 신의주(新義州)로 가셔서 압록강(鴨綠江)을 선편(船便)으로 건너 마차(馬車)로 수둔구(水屯溝)에 안착(安着)하시니라 (1:38)[12]

그리고 그해 추수 후에 조정산 도주는 부친 복우도장께 “천명을 받들어 노고산(老姑山)에 들어가 진법도수공부에만 전념하려 하오니 주무(綢繆)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청하니 “도장께서 쾌락하시고 노고산 속 계견성(鷄犬聲)이 들리지 않는 은적한 곳에 공부처를 마련하여 주시니라”(1:41)[13]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경술국치의 소식에 복우도장 가족들은 3일간 망배통곡하며 항일투쟁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짐하였는데 “도장께서는 한인들이 갹출한 성금을 군관 김혁(金赫), 이석대(李碩大) 등을 통하여 독립군에 원납하셨으며 서산공은 수차에 걸쳐 만인(滿人)으로 변장하고 만주 각지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시며 적정을 염탐하여 독립군에 제보하시니라”(1:43)[14]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경』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만주에로 망명은 한말 한민족의 망국 위기 속에서 서간도지역에 이주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구국운동의 구체적인 사례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해년(辛亥年) 四월에 도장(道丈)께서는 과거 취당공(聚堂公)과 함께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활약하던 이동녕(李東寧) 등이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에 망명하여 독립군(獨立軍)을 양성(養成) 중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서산공(曙山公)을 보내셨더니 자금(資金)이 부족하여 곤경(困境)이라 하므로 수차(數次) 자금을 마련하여 원조(援助)하시니라. 한 번은 중도(中途) 여사(旅舍)에서 왜헌(倭憲)의 습격을 당하셨으나 목침(木枕)으로 일당(一黨)을 격퇴(擊退)하시고 자금을 무사히 전달(傳達)하시니라 (1:45)[15]

여기서 이동녕의 북간도 용정에서 활동은 시공간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예컨대 석오 이동녕(1869~1940)은 1906년 8월 북간도 용정촌(현재 용정시)에 망명하여 이량(李亮)으로 변명하고 이상설(李相卨, 당시 李堂으로 변명함)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통해 독립운동기지의 기틀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 이듬해(1907) 3월 이상설이 헤이그밀사로 용정촌을 떠날 때 이동녕도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그곳에서 만국평회회의 밀사 일행과 작별한 후 다시 용정촌에 왔다가 곧 국내로 귀환하여 신민회 창립에 동참하였다.[16] 그리고 경술국치(1910) 이후, 이동녕은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망명하여 이석영(李石榮)ㆍ이철영(李哲榮)ㆍ이회영(李會榮)ㆍ이시영(李始榮)ㆍ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을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배일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된 신흥강습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이동녕은 1913년 유하현 삼원포를 떠나 노령으로 가서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정부 및 권업회를 설립하고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ㆍ보급하다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을 모색하였고, 그해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 및 내무총장 등의 직무를 맡았다.

따라서 신해년(1911)에 이동녕은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고 있었다. 때문에 만약 그 당시 복우도장이 서산공을 통하여 이동녕에게 군자금지원을 하였다면 그 지역은 북간도 용정이 아닌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라면 시공간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추론된다. 더욱이 1911년 10월 중순 이전부터 복우도장은 유하현 수둔구에서 촌장으로 활동하였는데[17] 부친 취당공(聚堂公)이 오래전부터 국내에서 교유하던 유명지사들이 유하현에 모여 이처럼 중대한 한인들의 결사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면 복우도장은 당연히 자금을 지원하였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상술한 내용 외에도 유하현 수둔구에서 조정산 도주와 그 일가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1910년 한인들과 만인(滿人)사이의 토지분쟁으로 인한 소송 사건(1:44), 1912년(壬子年) 봄 복우도장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에 골몰하니 중국지방관서에서 “청조의 복구를 도모하는 보황당(保皇黨)과 동류라는 혐의”로 심양에서 극형을 선고받았지만 조정산 도주가 북경에 가서 부친의 명의로 원세개(袁世凱) 대총통에게 진정서를 직접 전하여 무죄석면이 된 ‘보황당 사건’(1:48)[18], 1915년(乙卯年) 2월 조정산 도주의 숙부 서산공이 자택에서 급습한 왜헌에게 체포되어 3년 징역을 선고받고 안동형무소(安東刑務所)에서 복역하다가 1916년(丙辰年) 3월 도장과 조정산 도주가 함께 당국에 교섭하여 극형을 면하게 되어 1년 만에 감형 석방된 서산공의 ‘투옥사건’(1:53), 도장(道丈)께서 구국운동의 동지 이동녕, 이시영 등으로부터 서간도지방의 흉년과 왜헌의 횡포로 1913년(癸丑年)에 상해로 이전하여 동지들과 함께 활동 중에 “자금이 부족하여 난관이라”는 전갈을 받고 1916년(丙辰年) 8월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조정산 도주가 부친 복우도장을 수행하여 상해로 가서 자금을 전달한 사실(1:55), 1917년(丁巳年) 4월 조정산 도주는 노고산 공부처에서 구천상제의 계시를 받고 그달 말에 9년 만에 환국하였다는 등 기록이 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조정산 도주의 환국 이후 기록은 『한국민족종교총람(韓國民族宗敎總攬)』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9] 이러한 기존 기록을 통하여 조정산 도주 일가가 만주로 망명하게 된 원인과 동기 및 독립운동 행적에 관한 기본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때문에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가 만주에 망명하여 정착한 유하현 ‘수둔구’라는 지명(地名)과 ‘노고산’이란 산명(山名)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재확인하고, 구체적인 역사자료 발굴을 위한 조사방안으로는 그들의 행적과 관련된 중국의 각 지방 당안관 등 기관을 방문하여 조사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역사자료 관련 기관방문조사에 있어서 유하현 수둔구 토지매입 및 한인 집단촌에서 ‘토지분쟁 소송사건’ 관련 기록은 유하현 당안관 및 통화시와 통화현 당안관에 소장된 당안자료, 그리고 민국시기를 중심으로 만주국시기 자료 및 해방 후 중국 관방문서로 편찬한 유하현 지방지(地方誌) 혹은 민족지(民族誌)도 수집ㆍ열람이 필요하였다. 또한 ‘보황당 사건’ 및 서산공(曙山公)의 ‘투옥사건’ 등 관련 당안문서는 단동시 당안관 혹은 요령성 당안관(심양)에 보관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곳을 방문 조사하여 재판문서 혹은 안동형무소 복역문서를 확보한다면 독립운동 관련 사실 확인은 물론 그들의 망명지인 ‘수둔구’라는 지명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필자는 상술한 중국의 당안관을 여러 번 방문하여 자료 발굴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지속적인 과제로 남겨두고 여기서 조정산 도주 일가가 만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던 망명지-‘수둔구’와 조정산 도주의 공부처-‘노고산’에 대한 현지조사 및 재확인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Ⅲ. 유하현 ‘수둔구’와 ‘노고산’에 대한 현지조사

근대에 이르러 한반도에 대한 일제 침탈은 한민족의 공간 이동의 시기였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 많은 한인들이 삶의 공간을 이동하였는데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인해 만주는 그 중심지로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하현은 서간도지역에서 전개된 한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지목된다.

예컨대 1896년 8월에 한말 제천의병장 의암 유린석은 ‘북천지계(北遷之計)’[20]에 따라 의병 219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환인현 사첨자(沙尖子, 현재 요녕성 환인현 사첨자진)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후, 그해 9월 통화현 오도구(현재 유하현 오도구향)에서 ‘척왜독립’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고 망국단(望國壇)을 만들어 놓고 참배하며 재기의 기회를 기다렸다.[21] 이때부터 유하현을 중심으로 서간도지역에 독립운동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9년 11월 경술국치 전후에 우당 이회영 5형제를 비롯한 이동녕ㆍ이상룡ㆍ김동삼 등 계몽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현재 홍성촌)에서 서간도지역 한인들의 첫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그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워 반일인재를 육성함으로써 이곳은 점차 독립운동기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유하현은 서간도지역에서 한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22]

jdaos-26-0-215-g1
그림 1.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大孤山)과 신흥강습소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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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현 ‘수둔구’에 관한 지명고증을 위해서 우선은 유하현의 행정연혁을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지방의 행정연혁은 반드시 그 지방관청에서 출판된 지방지(地方誌)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유하현은 청나라 봉금시기에 성경장군(盛京將軍)이 관할하는 성경위장(盛京圍場-사냥터를 말함)에 속했는데, 1875년부터 압록강 북안의 봉금정책[23]이 해제되면서 관내 하북, 산동, 하남 등 지역의 중국인 난민들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일부 한인들이 압록강을 넘어 이곳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24]

청나라 광서(光緖) 4년(1877)에 통화현이 설치될 때 유하는 통화현 북쪽 양자로(養子路)에 소속된 21개 보(保)가 포함되었다. 광서 28년(1902)에 유하현이 설치될 당시에는 봉천성 해룡부(海龍府)에 속했고, 광서 31년(1905)에 동남서(東南西) 3로(路)로 구획구분, 매 로(路)마다 7개 보를 두었으며, 그 이듬해 다시 3로를 4구(區)로 나누어 각 구역에 3개 분주소(分駐所)를 두어 민간치안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유하현의 행정구역은 중화민국시기에는 봉천성(奉天省), 만주국 시기에는 통화성(通化省), 해방 직후에는 안동성(安東省)과 요동성(遼東省)에 속했으며, 공화국이 건립된 후 1954년부터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에 귀속되어 있다. 이런 까닭으로 유하현은 역사기록에서 흔히 봉천성(奉天省) 즉 오늘의 요령성(遼寧省)으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가 정착한 곳의 지명은 유하현 ‘수둔구’이고 복우도장은 1911년경에 촌장으로 추대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수둔구’의 지명고증을 위해서 당시 행정구역상의 구(溝)와 촌(村)의 관계, 그리고 유하현에서 촌장제도가 시행된 시기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2008년 7월 필자는 여름방학에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망명지 관련 역사자료 발굴ㆍ수집을 위해 유하현 관련 당안자료가 보관된 통화시 통화현 당안관, 그리고 유하현 사지판공실 및 지명판공실을 방문하고, 또한 현지거주 향토학자 및 유하현 조선족노인협회 등을 방문하여 구술 자료를 수집하기로 계획하였다.

필자는 유하현 당안관 역사자료가 통화시 통화현 당안관에 이관되어 있음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두 당안관에 소장된 당안 자료에 접근한다면 그 어떤 새로운 기적이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필자는 통화시 당안관에서 중화민국 19년(1930년)에 편찬된 『유하현지』(4冊, 2009년 길림인민출판사 영인본)와 만주국 강덕(康德) 4年(1937년) 유하현공서에서 편찬한 『유하현일반상황(柳河縣一般狀況)』 등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이 두 자료는 필자가 접촉한 민국과 만주국시기의 유하현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관방문서로서, 1910년대 유하현 경내 지명 및 한인들의 상황을 잘 반영하였을 것이라는 큰 기대에 부풀었다.

이 『유하현지』에 따르면 민국 11년(1922)부터 구촌제(區村制)를 실시하면서 원래 4구를 8구로 나누고 각 구장(區長)은 성(省)에서 위임하여 지방행정 사무를 담당하며, 구(區)에서 촌(村)을 관할하고 촌에는 촌장, 부촌장을 두어 촌무를 처리하는 행정 구조를 갖추고 있었는데, 민국 14년(1925년)에 유하현 관내의 촌수는 모두 83개, 분산된 작은 193개 촌에 조선인은 모두 1,118명이었다.[25] 그런데 『유하현지』에 첨부된 「경찰구구별도(警察區區別圖)」에 나타난 촌명 중에는 ‘수둔구’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1937년 유하현공서에서 편찬한 『유하현일반상황』이란 책자 속에 첨부된 「유하현구촌조사표(柳河縣區村調査表)」에 기재된 7구, 35개 촌에서도 ‘수둔구’라는 지명 혹은 촌명은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26]

그런데 이 「조사표」에는 주요 촌만 기록되었고 또한 촌 아래에 둔(屯) 혹은 보(堡)를 두고 지명은 허칭(虛稱)과 실칭(實稱)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이것은 근대에 청나라 봉금제도가 폐지된 후 만주에로 유입된 관내 한족(漢族)들이 새로운 터전을 잡으면서 호칭하던 지명에서 나타난 특유의 현상이었다. 즉 기록에 따르면 “초기 황무지를 개척할 때 지명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산수지형에 따라 거주지를 표시하였는데 모 골짜기(溝), 모 갈림길(岔), 모 언덕(崗)이라 불렀다”[27]고 한다. 그런데 후에 행정지명(地名)을 지정해도 중국인들이 계속 지리적 특징에 따른 지명을 사용하여 발생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때로는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호칭하는 지명이 서로 다른데서 기인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검토하여 당시 행정단위로서 구촌제도와 촌장제도를 실시한 시기는 파악할 수 있었으나 ‘수둔구’라는 지명은 역사문서에서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지명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지역에 실칭, 허칭 등 수개의 지명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방문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문제해결을 위해 한인들의 입적자료 등 심층정보가 수록된 당안 자료가 필요하였다. 통화시 당안관의 장(張)씨 과장에게 한인들의 역사에 관한 다른 자료에 대한 열람을 요구하자 그는 “본 통화시 당안관은 주로 건국 이후 당안을 소장ㆍ관리하며, 해방 전의 당안 자료는 모두 통화현 당안관 즉 현재 통화현 소재지인 쾌다무자(快大茂子) 당안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뜻밖에 “왜 이런 역사자료를 조사하느냐?”라고 물었다. 필자는 “조선민족의 한 유명한 역사인물이 민국시기에 유하현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인물연구를 위해 당안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그런 역사자료를 발굴하면 보수를 얼마나 받느냐? 듣건대 20만 달러씩 받는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게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가끔 와서 당안 자료를 찾는다고 말했다. 사실 한중(韓中) 양국 간에 수교(1992년)된 후, 광복 전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의 유가족들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위해 역사자료수집에 집념하고 있으며, 또한 일부 조선족들도 조상들이 민족주의 계열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역사자료를 발굴하여 한국에서 국적을 취득하는데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처럼 와전(訛傳)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왜냐하면 이런 여파로 인하여 한인(혹은 조선족) 관련 당안 자료 접근이 날로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필자는 통화시에서 직행 버스를 타고 쾌다무자(快大茂子-통화현 소재지)에 도착하여 곧장 통화현 당안관으로 찾아갔다. 통화현 당안관에서 민국 16년(1927)에 이춘우(李春雨)가 편수한 『통화현지』(4권), 강덕 2년(1935) 『통화현지』 및 유복덕(劉福德)주편으로 편찬한 『통화현지: 1877~1895』(吉林人民出版社, 1996) 등 고적과 함께 일부 당안 자료 목록을 열람할 수 있었다. 특히 당안 자료 목록 중에는 청나라 말기 한인들의 입적 및 토지계약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通化縣署警務局-韓僑入籍及甘保切結」(宣統2年, 편호: 109-1), 「各僑戶-韓僑入籍及甘保切結」(宣統2年, 편호: 110-1), 「通化縣署韓僑入籍及甘保切結」(宣統3年, 편호:110-2),「奉天交涉司憲呈送自宣統二年至三年底止入籍韓僑淸冊」(宣統3年, 편호:111-2), 「奉天民政交涉司憲劄飭査明己未入籍若幹縣署警務各區遵照條約年限分別造冊呈報」(宣統3年,편호:111-3) 등이었다.

이런 목록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909년 11월 청나라에서 『대청국적조례』를 반포한 후에 재만 한인들에 대한 영사재판권을 둘러싸고 청ㆍ일(淸日)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이 심해져갈 때의 상황들이 기록된 자료로 주목되었다. 즉 일본은 재만 한인에 관한 영사재판권을 주장하면서 한인들이 일본영사관의 관리를 받을 것을 강요했고, 청나라는 일본인 침투를 차단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한인들에게 입적을 권유하였다. 따라서 봉천성 민정사ㆍ교섭사에서는 각 현 한교(韓僑)들에 대한 입적 명부를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요구하면서 입적을 독려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민국시기에 이르러서도 한인들은 중화민국에 입적해야만 토지소유권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당시 복우도장이 ‘수둔구’에서 10만여 평에 달하는 땅을 구매하였다고 한다면 반드시 청국(후에 중화민국)에 입적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이러한 한교 입적 자료를 면밀히 추적하면 복우도장이 당시 구매하였던 토지매입 계약서류(甘結)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한인들의 입적 관련 당안자료 목록을 내밀고 열람을 요청하자 당안관의 관리자는 한인 관련 당안 자료는 몇 년 전에 모두 길림성 당안관으로 이전되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미 연변지역 8개 시/현의 당안관 및 자치주 당안관에 소장하고 있던 조선인 관련 당안 자료가 길림성 당안관으로 이전된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연변지역 뿐만 아니라, 길림성 각 시/현에서도 시행되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상술한 당안 자료를 열람하려면 장춘에 있는 길림성 당안관에 가서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곧바로 기차를 타고 장춘에 있는 길림성 당안관에 가서 통화현 혹은 유하현을 포함한 한인들의 입적 자료 열람을 요청하였지만 당안관에서는 청사건물을 확충하는 중이므로 관련 당안 자료는 아직 ‘미정리 상태’라는 대답만 받았다. 필자는 장춘에서 돌아온 후, 수차례 전화로 길림성 당안관에 문의하였지만 동일한 대답만 반복되었다. 한인을 포함한 외국인 관련 당안 자료 접근이 날로 어려워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계획하였던 목표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2010년 7월 여름방학에 또 다시 유하현에 대한 현지답사를 진행하였다. 필자는 먼저 유하현 당안관 및 지명판공실 등 기관을 방문하였는데, 1991년에 유하현 지방지판공실에서 『유하현지』를 편찬할 때 활용했던 민국시기와 만주국시기에 편찬된 유하현 관련 역사자료 10여 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28] 이러한 역사자료 가운데는 1920~30년대 동변도(서간도지역)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과 사회단체활동에 관한 연구에 일조가 될 것으로 주목되었다. 예컨대 『동변도안내(東邊道案內)』, 『통화성개황(通化省槪況)』, 『만주사정-통화성(滿洲事情-通化省)』 등 일본어 자료들은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및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봉천성유하현사정(奉天省柳河縣事情)』에 부록으로 첨부된 「유하현조선인사정(柳河縣朝鮮人事情)」에는 유하현 삼원포 한인들의 이주상황, 인구분포, 조선인민회 및 조선인 사상동향, 그리고 한인들의 교육, 종교 및 집단부락정책 등 내용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이러한 역사자료들은 1910-30년대 유하현 삼원포를 중심으로 하는 서간도지역 한인사회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들이었다. 이처럼 현지조사에서 중심 주제에 따라 주변 주제 관련 자료도 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주변 주제를 통해 중심 주제에 관한 정보도 접할 수 있었다.[29]

그러나 이 ‘부록’에 기록된 조선인 촌명에서도 ‘수둔구’라는 지명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전술한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만주행록에서 나타난 망명지의 지명 혹은 산명은 당연히 당시 호칭하던 그대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다만 오랜 역사의 변천 속에서 지명이 변경되거나 혹은 오기의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 ‘수둔구’에 관한 역사기록을 찾는 것은 결코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때문에 필자는 유하현 관련 기관 방문조사와 함께 현지 중국인 향토학자와 유하현 조선족노인협회를 방문하여 구술조사도 병행하였다.

필자는 유하현 대통구[현재 나통산진(羅通山鎭)]에서 향토학자로 손꼽히는 고점일(高占一, 당시 77세)선생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그곳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후에 나통산 풍경구에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나통산 고구려산성에 대하여 해박한 식견이 있기에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한국학자들도 가끔 그를 찾아왔다. 필자가 그를 다시 찾아 나통산진으로 갔을 때 그는 유하현 경내에 ‘수둔구’라는 지명은 없다고 주장했다. 민국 11년(1922)부터 유하현은 8구(이듬해 다시 7구로 축소됨)로 나뉘고 그 아래에 110개 촌, 227개 둔(屯-중국어에서 ‘툰’으로 발음)이 있었는데 지명에서 행정구역 단위인 둔(屯)자와 구(溝)자를 함께 붙이는 지명은 있을 수 없으며, 특히 민국시기 유하현 행정구역 단위로 본다면 둔(屯)은 말단 부락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맨 끝에 붙여서 ‘○○屯’으로 사용되었고, 구(溝)의 경우는 중국인들이 지리적인 특징에 따라 강줄기나 골짜기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였는데 대통구(大通溝)처럼 행정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행정구역 단위인 둔(屯)자와 구(溝)자가 병용된 ‘수둔구’라는 지명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고점일 선생은 당시 지명은 동일한 곳에 대해서도 중국 한족들이 쓰는 지명과 한반도에서 이주한 한인들이 쓰는 지명이 서로 달랐다고 말하였다. 이른바 ‘수둔구’라는 지명의 경우는 중국 한족들이 발음하는 지명을 한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수둔구’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따라서 중국 한족들이 발음하는 것을 듣고 만약 한인들이 ‘수둔구’라고 기록하였다면, 그것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다른 한자 즉 수통구(水通溝) 혹은 수동구(水洞溝)의 오기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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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대통구와 소통구를 설명하는 고점일(高占一, 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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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수둔구’가 수통구의 오기라면 현재 나통산진의 당시 행정구역 명칭이 대통구(大通溝)인데 중국인들은 수통구라고도 불렀다. 『유하현일반상황』(1937)에 첨부된 「유하현지현세지도」를 보면 대통구는 나통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여서 흐르는 가장 큰 골짜기인데 당시 그 골짜기에는 대통구라는 지명을 쓰는 두 개 마을과 소통구라는 지명을 쓰는 한 개 마을이 존재하고, 수동구의 물도 대통구하류에서 합류되는데 물이 나통산에서 발원하여 하류에서 합류되어 삼통하(三通河)로 흘러나가는 이 골짜기 전체지역이 당시 행정구역 명칭으로 대통구이며 이 지역을 한족들이 수통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즉 ‘수둔구’는 수통구의 오기라면 당시 이 대통구를 지칭하는 것인데 오늘날 나통산진 소재지의 넓은 지역을 의미한다.

만약 ‘수둔구’가 수동구의 오기라면 나통산에서 발원하는 크고 작은 두 개의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합류되는 곳에 수동촌(水洞村)[30]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수동(水洞)이라는 지명 유래는 그 중 한 개의 골짜기 물이 나통산에 있는 동굴-수렴동(水帘洞)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수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수동촌의 작은 두 개의 개천이 합류되는 곳에서부터 그 아래로 물이 흘러 내려가는 하천지역을 수통하(水通河)라고 불렀으며 그 물이 흘러드는 수동저수지(水洞貯水池)에서 모이는데 그 수동촌에서부터 수통하를 포함한 수동저수지까지 지역을 수동구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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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유하현 나통산(羅通山)에서 발원하는 수통하의 원류인 수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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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복 전에 조선인들이 살던 부락자리를 알려주면서 “나는 어릴 때 조선인 아이들과 함께 놀았고, 토지개혁 때 10여 호 조선인들이 거주하였는데 그 후에 그들도 하나 둘씩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났으며, 심지어 그들이 떠날 때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던 병풍도 선물로 주고 떠나갔다”라고 말하였다. ‘수둔구’가 수동구의 오기라면 그곳은 당시 수동촌에서 수동저수지까지의 골짜기와 그 주변 지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에도 이곳에 수동촌이라는 마을이 있고, 또한 1937년에 발행된 『유하현일반상황』에 첨부된 「유하현지현세지도」에도 수동구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다음날 유하현 소재지 문화관 2층에 있는 조선족노인협회를 방문하여 조정민(趙貞敏, 89세)노인을 만났다. 그는 유하현 오도구에서 출생, 삼원포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전쟁 및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유하현 법원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였으며, 조선족노인협회에서 가장 고령이고 오랜 토백으로서 매우 정정하고 공무원출신의 엘리트였다. 필자가 제시한 ‘수둔구’라는 한자 메모를 보고 그는 ‘쉐이툰꺼우’라고 발음하면서 그것과 거의 비슷하게 발음되는 수통구(水通溝)의 오기라고 말하면서 필자가 찾는 지명은 당시 한족들이 ‘수퉁구’라고 불렀던 수통구 즉 대통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과제인 조정산 도주의 공부처인 ‘노고산(老姑山)’을 확인하기 위해 고점일 선생에게 “한국의 유명한 역사인물이 1910년~1917년 사이에 ‘노고산’이란 곳에서 수도공부를 하였는데, 유하현 경내에 노고산과 유사한 산명이 있는지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유하현에 3개 고산(孤山)이 있는데 삼원포 추가에 고산이 있고 고산자진에도 대고산(大孤山)과 소고산(小孤山)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고산자진의 대고산을 한족들은 노고산(老姑山)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잇따라 그는 “그러나 그 역사인물이 수도공부를 한 사람이었다면 당신들이 찾고자하는 노고산은 오전일 수 있으며, 노고산 보다는 아마도 나통산의 삼청궁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대답하였다. 나통산 서쪽 성문(西城)에 위치한 삼청궁은 명말 청초에 수건 된 도관이며, 그 주위의 산수가 아름답고 수려하여 역대 도가들이 숭경하는 보지(寶地)로 유명하다. 그 전당 내에는 도교의 삼청(三淸) 즉 옥청원시천존(玉淸原始天尊)ㆍ상청령보도군(上淸靈寶道君)ㆍ태청태상노군(太淸太上老君)을 공봉하고 있으며, 만주국시기(1934년)에 소각되었다가 1993년에 중국의 종교정책이 회복됨과 동시에 나통산 풍경구 개발을 위해 복원되었다고 소개하였다. 필자는 고점일 선생에게 “고산자진의 대고산이 중국인들에게 노고산이라고 불리었다면 한국에서 노고(老姑)는 산신 할머니를 의미하는데, 혹시 그곳에서 산신제를 지냈거나 관성제군을 봉안했던 관왕묘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나통산의 삼청궁은 총묘이고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는 고산자진의 대고산에 관왕묘가 있었는데 이곳 나통산 삼청궁의 분묘이며, 옛날에는 소봉천(小奉天)으로 이름이 났지만 지금은 그 관왕묘가 훼손되어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 쪼개진 기와들만 남아 뒹굴고 있다”면서 “삼청궁의 도사들은 흔히 도고(道姑-여자도인)를 노고(老姑)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산신(山神-山仙)이란 뜻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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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1993년 나통산 위에 복원된 삼청궁 도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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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유하현 고산자진 북측에 위치한 대고산(大孤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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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진의 대고산에 관왕묘가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앞서 언급한 「태극진경」 제2장 12절의 내용과 일치하므로 그곳이 필시 조정산 도주가 공부하던 노고산으로 추측되어 즉시 고 선생에게 그 곳으로 안내해 줄 것을 요청하여 택시를 타고 고산자진의 대고산으로 향하였다. 대고산은 이름과는 다르게 그렇게 크지 않은 산이지만 중국은 평원이 이어지는 지역이므로 산이 드물어 중간에 간간이 서있는 산을 외롭게 서있는 산이란 뜻에서 고산(孤山)이라고 불렀는데, 그 옆에 200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소고산과 구분하여 대고산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당시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돌아와 정리하면서 ‘노고산’과 ‘수둔구’의 현재 위치를 비정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미비한 점이 많아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이후에도 꾸준히 중국의 관련 기관을 방문하여 자료조사의 가능성을 타진해 가면서 기존의 자료들을 처음부터 다시 재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태극도주 조정산 전기」의 내용 중에 “수둔구가 지명의 뜻 그대로 수풍(水豊)댐의 물에 잠겼다”[31]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수풍댐 수몰지를 조사하면 쉽게 ‘수둔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유하현을 방문하여 나통산진과 고산자진 및 녹미림진(鹿尾林鎭)부근의 조선족들의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수풍댐 수몰지에 관련된 정보를 포함하여 좀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수풍댐은 유하현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둔구’로 추정되는 수동구 혹은 수통구는 수풍댐 공사로 인한 수몰지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또한 유하현 경내에 있는 녹미림저수지나 수동저수지는 수풍댐처럼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곳 주변의 한인들을 방문하여 수몰지구에 대해 조사하여도 잘 알지 못해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는 더 이상 수집되지 않았고 또한 자료 부족이라는 난관에 봉착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2013년 여름, 필자는 조정산 도주 일가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담은 저자 미상의 필체 원고를 입수하였다.[32] 이 기록에 따르면 조정산 도주 일가족은 ‘유하현 수덩거우’란 곳에 토지를 구매하고 정착했다고 기술되었다. 여기서 ‘수덩거우’라는 지명은 곧 한자 지명에 대한 중국인들의 발음을 우리말 표기인 것이었다. 즉 ‘수’는 물을 뜻하는 수(水)자의 중국어 직역이고 ‘거우’는 골짜기를 뜻하는 구(溝)자의 중국어 음역이며 ‘덩’은 한자 ‘동(洞)’과 ‘통(通)’ 두 글자만을 놓고 비교하면 동굴을 나타내는 ‘동(洞)’자의 중국어발음인 ‘뚱(洞)’자[33]에 가깝기 때문에 ‘수덩거우’는 곧 수동구(水洞溝)라는 지명에 대한 중국인들의 발음을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두 개의 기록에서 조정산 도주 일가가 황무지 10여만 평을 매입하여 정착한 지역으로 ‘수둔구’와 ‘수덩거우’로 각각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수둔구’와 ‘수덩거우’를 동일 지명으로 간주해야 하는지 갈등이 있었다. 만약 동일하다고 한다면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수둔구’라는 지명을 중국식 발음이 서로 유사한 쉐이퉁거우(水通溝)를 배제하고 쉐이뚱거우(水洞溝)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경전상의 ‘수둔구’는 곧 오늘날 수동촌(水洞村)에서부터 수동저수지까지를 지칭하는 수동구(水洞溝)로 판단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조정산 도주가 망명지를 ‘수둔구’와 ‘수덩거우’로 서로 다르게 구술하였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해 볼 수도 없다. 때문에 ‘수둔구’와 ‘수덩거우’, 그리고 수통구와 수동구를 놓고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가 없어서 다시 현지에 직접 가서 지금까지 수집된 모든 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재확인하면서 최종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2013년 8월 8일 다시 유하현을 방문하였다.

Ⅳ. 최종 현지답사와 자료정리 및 결론

필자는 최종 현지답사를 떠나기 얼마 전에 휴대폰을 분실하였기 때문에 고점일 선생에게 예약도 하지 못하고 전부터 머물러 왔던 유하현 정부 뒤쪽에 위치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조사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몇 차례 현지답사에서 수집된 역사자료 및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확실한 사항부터 보완조사를 실시하여 마무리해 나가기로 했다.

우선 고점일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고산자진의 대고산은 중국인들이 노고산이라고 불러왔고, 관왕묘가 있었던 자리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진경』에 기록된 사실과 매우 근접되지만 구술 자료가 고점일 선생의 한 사람에게 제한되어 있어 최종결정을 내리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되었다. 때문에 먼저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하여 좀 더 많은 구술 자료를 확보하고, 삼원포에 있는 고산도 직접 방문하여 혹시 산신제를 지낸 사실이 있거나, 노고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재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필자는 고산자진으로 떠나기 위해 택시를 타려고 호텔을 나섰다. 그런데 휴대폰 분실로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유하현을 방문할 때마다 안내해주던 택시기사를 만났다. 우연한 만남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고산자진으로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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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대고산의 도관 위치를 소개하는 애홍상(艾鴻常, 6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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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산 근처에 도착하여 택시를 세워두고 지나가는 연세가 가장 많아 보이는 한족 노인에게 “대고산을 노고산(老姑山)라고 부르느냐? 그리고 그곳에 관왕묘가 있었느냐?”라고 물어보니 고산자진에 살지 않아서 모 른다고 하였다. 다음은 대고산 기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인가(人家)를 방문하였는데 애홍상(艾鴻常, 67세)씨를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4대를 이어서 살고 있는 진짜 토박이 농군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어릴 때 조부한테서 이 산에 도관이 있었다는 말을 가끔씩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서 백 미터 남짓 떨어진 옥수수 밭으로 안내하였고 그 위쪽에 있는 몇 기의 묘지는 조상들의 묘지이고 그 아래쪽에 관왕묘가 있던 자리라고 알려주었다. 이곳은 지난번에 고점일 선생이 관왕묘 옛터를 소개하던 지역에서 비슷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밭에는 일부 작은 기와 잔해들이 이따금씩 보였는데 이런 기와조각들은 문화대혁명 때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서 도관을 부셔버린 흔적이라고 한다. 다만 “이곳에 있던 도관의 명칭을 관왕묘라고 불렀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산신제 같은 고사를 지낸 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고사를 지낸 실상은 소개하였으나 관왕묘라고 불린 사실에 대해서는 확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노고는 산신할머니로 풀이하고 산신제를 지내는 산을 노고산이라고 하며(예컨대 지리산 노고단), 고점일 선생도 중국도관에서는 흔히 도고(道姑-여자도인)를 노고(老姑)라고 부른다고 이야기한 사실이 있으므로 산의 정식 명칭은 대고산이나 현지 중국인들이 노고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에 신뢰가 있었다. 또한 그가 소개한 관왕묘 위치와 애홍상씨가 안내한 도관의 위치도 거의 같은 위치이므로 그곳에 관왕묘가 있었다는 사실도 신빈성이 있었다. 때문에 필자는 고산자진의 대고산이 조정산 도주가 공부하던 노고산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오후에 다시 유하현 삼원포 광성촌에 있는 고산으로 가서 주변 한족 마을과 조선족 마을에 들어가서 그곳 고산에 관왕묘가 있었는지 여부와 산신제 등을 지낸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를 문의하여 보았으나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다는 진술을 듣고 유하현 경내 3개 고산 중에 고산자진의 대고산이 곧 조정산 도주가 진법도수공부를 하고, 귀국 전에 관왕묘를 참예하였다던 그 노고산이라고 최종 정리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갈등이 계속되던 망명지인 ‘수둔구’에 대한 최종 고증을 위해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하였다. 『진경』에서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가 만주로 망명하여 정착한 곳은 “서간도 요령성 유하현 수둔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요령성은 한국 행정구역의 도에 해당된다면 유하현은 군, ‘수둔구’는 면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둔구’는 한국의 리나 중국의 촌이 아닌 그보다 좀 더 넓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답 약간과 개간할 만한 황무지 10여만 평을 매입하였다면, 최소한 복우도장이 매입한 황무지와 다른 한인들이 소유한 토지, 그리고 선착한 중국인들의 경작지를 포함하여 한인촌과 중국인촌이 공존하려면 좀 넓은 지역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유하현현세지도」(1937년)에 표기된 수동구(水洞溝)는 대통구(大通溝)의 한 지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도상의 대통구가 한국의 면(面)과 같은 행정단위로 넓고 광활한 지역이라면 수동구는 한국 행정구역의 “리”(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수동구에 대한 고점일 선생의 구술 및 현지조사에 따르면 수동구는 수동촌에서부터 수통하를 포함한 수동저수지의 구간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정도 면적이면 대통구의 한 소단위 행정구역에 불과한 좁은 면적이므로 수동구를 유하현 바로 아래 행정단위인 수둔구(水屯溝)로 해석하여 결정짓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 말하면 수둔구는 나통산 수렴동에서부터 수동저수지에 이르는 지역을 지칭하는 수통구(水洞溝, 혹은 水通溝)에 대한 우리말 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노고산’의 경우는 고산자진의 대고산이라는 산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인들은 한족들이 노고산이라고 불렀던 그 습관적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수둔구’도 중국인들이 불렀던 지명을 그대로 따라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족들은 실제로 ‘수둔구’를 “쉐이툰거우”로 발음하는데 한인들이 ‘수툰구’라는 발음을 듣고 한자로 표기하려고 해도 우리말 한자음에 “툰”으로 발음되는 글자가 없어서 중국 발음에서 “툰”으로 발음되는 둔(屯)자로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인들의 한자발음인 ‘둔’으로 읽어 ‘수둔구’라고 하였기 때문에 당시 민국시기와 만주국시기 문헌에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쉐이툰거우”라는 한족들의 발음과 유사하게 발음되는 한자를 추정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망명지로 나타나는 지명으로 “수툰구”와 유사한 발음의 한자 지명으로는 ‘쉐이뚱거우(水洞溝)’와 ‘쉐이퉁거우(水通溝)’가 있는데 앞서 검토한 대로 행정단위가 달라 이미 수동구(水洞溝)는 수둔구(水屯溝)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쉐이툰거우(水屯溝)’라는 발음이 ‘쉐이퉁거우(水通溝)’의 중국 발음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그 수통구(水通溝)의 당시 지명이 대통구(大通溝)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대통구는 유하현이라는 현(縣) 행정단위의 바로 아래 행정구단위이므로 수둔구(水屯溝)는 수통구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논리가 앞서 기술한 『진경』의 두 구절에도 모순되지 않고 또한 유하현 조선족노인협회 조정민 노인이 구술한 “수둔구는 ‘쉐이툰거우’라고 발음하고 그것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쉐이퉁거우(水通溝)’의 오기이며 당시 한족들이 수통구(水通溝)라고 불렸던 대통구(大通溝)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과도 부합되기 때문에 수둔구(水屯溝)는 수통구의 오기이고 수통구는 당시 행정구역상 명칭이 대통구이며 오늘날 나통산진(羅通山鎭) 소재지를 지칭한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수둔구’ 관련 자료 중에 접수된 저자 미상의 필체 원고를 보면 조정산 도주 일가족은 유하현 ‘수덩거우’라는 곳에서 토지를 구매하고 정착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 ‘수덩거우’라는 지명도 ‘노고산’이나 ‘수둔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중국인들이 ‘수덩거우’로 발음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한자를 찾는다면 지금까지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망명지로 거론해 온 수통구(水通溝)와 수동구(水洞溝)중에 후자의 발음에 더 가깝다. 이 수동구는 「유하현현세지도」(1937년 발행)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위치가 “수동촌부터 수통하를 포함한 수동저수지까지를 수동구라고 하였다”라는 고점일 선생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곳에는 수동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때문에 필자는 수동구를 조정산 도주 일가의 정착지로 비정하고 조정산 도주 일가가 정착할 수 있는 조건 즉 황무지를 개간한 10여만 평 정도 이상의 경작지가 있는 곳인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또 복우도장이 촌장으로 추대된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마을이름이 촌으로 끝나는 마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촌장제도는 1922년 민국시기에 유하현은 구(區)밑에 촌(村)을 두는 촌장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런데 조정산 도주 일가는 1909년 4월에 이주하여 1917년 4월에 귀국하였고 구촌제가 정식으로 실시되기 이전인 1911년부터 복우도장이 촌장으로 활동하였다면 그것은 상급기관의 임명이 아니고 한인들과 만인들의 추대로 마을 대표와 같은 역할을 했고 그 마을지명이 촌으로 끝난 지역이었기 때문에 촌장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 마을이 곧 민국시기의 수동구(水洞溝) 곧 현재 유하현 나통산진 수동촌으로 비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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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수동저수지(고려댐) 둔덕에서 바라본 수동촌(水洞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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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정산 전기에 ‘수둔구’는 수풍댐 건설 때 수몰되었다는 기록과 조정산 도주의 친족들이 경작지와 집이 큰 댐을 건설할 때에 수몰되어 형편이 어렵다고 증언한 내용을 재고해 보았다. 이 지역은 수풍댐 수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으로 확인되었지만 가령 ‘수덩거우’가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망명지라면 그가 귀국한 이후에 건설된 상당히 큰 댐이 있어야 하는데 수동촌에 있는 수동저수지가 건설된 시기나 규모면에서 그 조건에 부합하는 댐인지 재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현지답사를 위해 수동촌으로 출발하였다. 이곳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만든 최소한 10여만 평의 경작지가 있는지, 수동저수지가 일부 경작지와 집들이 수몰될 수 있을 정도 규모의 댐인지, 그리고 조정산 도주 일가족이 귀국한 이후에 축조되었는지를 중점으로 확인하면서 현지답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휴대폰 분실로 고점일 선생에게 직접 전화로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날 아침 유하현 호텔을 떠나기 전에 고점일 선생에게 미리 연락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나통산진을 향해 달려가는 도중에 우연히 녹미림저수지(鹿尾林水庫)에서 고점일 선생을 만났다. 그는 유하현 어느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나통산진에 대한 인문지리를 홍보하는 중이었다. 실로 하늘이 굽어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함께 수동촌으로 가서 수동저수지의 면적을 가늠해 보고 비록 수풍댐만큼은 크지 않더라도 수십 가구의 집과 경작지가 수몰되었을 정도의 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고 축조시기도 1958년경이라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고점일 선생이 구술한 수동구에 대한 내용을 재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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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나통산 아래에서 본 수통하와 수동구(水洞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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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수동촌은 유하현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한 나통산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있으며 나통산의 수렴동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개천이 수통하(水通河)이고 그 물이 모이는 곳이 수동저수지이다. 현재 이 저수지를 당지(當地) 중국인들은 과거에 한인들이 수전을 풀면서 버들나무로 물을 막던 자리에 저수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려댐’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재확인하였다. 따라서 수동촌에서 수통하라는 개천을 따라 물이 흐르고 그 개천의 양쪽 언덕을 포함한 골짜기가 수동구(水洞溝)가 된다. 수동저수지를 출발하여 수동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수답들을 바라보면서 수통구에 선착한 중국인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던 대통구(大通溝)의 중ㆍ하류 넓은 평야지역의 경작지가 아니라 대통구의 상류 북서쪽 맨 끝쪽의 높고 험준한 나통산 아래 지역에서 중국인들로부터 매입한 척박한 황무지를 조정산 도주 일가와 한인들이 힘들게 개간하여 만든 수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중국 한족들이 이런 곳을 개간했다면 그들은 주식인 옥수수를 심었겠지만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한인들은 이런 황무지를 개간하더라도 작은 하천만 흘러가면 그 주변은 쌀농사를 짓는 수답을 만든다는데 바로 그런 수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동구가 곧 ‘수덩거우’라는 확신이 점점 뚜렷해졌다. 또한 고려댐의 기초 위에 수동저수지가 건설될 때 일부 고려방자(高麗房子)들이 수몰되었다는 고점일 선생의 증언도 이 지역에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반증해준다.

그리고 줄곧 풀리지 않던 하나의 의구심은 “왜 조정산 도주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크고 수려한 나통산을 가까이 두고 걸어서 한나절이 걸리는 고산자진의 대고산(大孤山, 일명 老姑山)에 공부처를 정하였을까?”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통산은 백두산계 용강(龍崗)산맥의 북부 지맥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명칭은 낙타산(駱駝山-만족어로 ‘러컬’)인데 당나라 때 나통(羅通)이란 장군이 고구려를 징벌하면서 이 산성에 왔기 때문에 후세에 그 이름에 따라 나통산이라 불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민족의 한이 서린 나통산은 오직 구국운동을 전개하려는 일념으로 만주에 망명한 조정산 도주에게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며, 이곳에 있는 삼청궁에 봉안된 신명들 중에는 발재전(發財殿)에 있는 관제상위 외에는 증산계열에서 신앙하는 신명과는 달라서 오히려 이곳에서 ‘진법도수공부’처를 마련하기에는 불편하였으리라 생각되었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예단은 과잉해석이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가 만주로 망명하여 정착한 곳은 당시 유하현 수통구(水通溝) 즉 대통구(大通溝)의 수동촌(水洞村)에서 살았고 복우도장은 이곳의 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실제 거주지와 경작지는 수덩거우(水洞溝) 하류지역이었는데 1958년경에 수동저수지(일명 ‘고려댐’)가 건설되면서 한인들의 주택과 경작지 일부가 수몰되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Ⅴ. 나오는 말

이 글에서 필자는 현지조사에서 발굴ㆍ입수한 민국시기와 만주국시기 유하현 관련 역사자료 및 유하현의 향토학자 고점일(高占一, 당시 77세), 유하현 조선족노인협회의 조정민(趙貞敏, 89세), 고산자진(孤山子鎭)의 애홍상(艾鴻常, 67세)등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초보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가 만주에서 정착하였던 망명지로 기록된 유하현 수둔구(水屯溝)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으로써 유하현 수동구(水洞溝 혹은 水通溝)의 오기이며 수통구(水通溝)는 당시 대통구(大通溝)의 수동구(水洞溝, 현재 수동촌)를 포함한 오늘날 나통산진(羅通山鎭)소재지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는 조정산 도주가 수도공부하던 노고산(老姑山)은 유하현 고산자진에 위치한 대고산(大孤山, 일명 老姑山)이라고 판단된다.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행록에서 나통산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나통산을 ‘노고산’으로 비정하기는 어렵다. 셋째는 ‘수덩거우’는 오늘날 유하현 나통산진 수동촌(水洞村)이 있는 수동구(水洞溝)를 지칭하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객관적인 역사자료에 근거한 완벽한 결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간접적인 자료 및 구술 자료를 취합ㆍ분석ㆍ귀납하여 최대한 근접한 결론에 도달하려고 시도하였다. 인정승천(人定勝天)이라! 앞으로 중국의 당안자료 관리정책이 보다 개방되어 역사자료 공유가 활성화될 때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망명지, 그리고 항일독립운동 관련 실상 등이 좀 더 확실하게 규명되기를 소망해 본다. 필자의 현지조사 결과가 관련 종단의 경전 기록과 상이한 점이 있더라도 한 역사학자가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해 조사ㆍ정리한 연구 결과로 널리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또한 금후에도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행록에 관한 연구가 지속되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역사적 실상들이 빠짐없이 재조명됨으로써 조정산 도주 일가 유족들과 그를 신봉하는 많은 종도들에게도 큰 광영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이 글이 장차 조정산 도주 일가의 만주행록에 관한 연구에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대해 본다.

Footnotes

1. 근대 한민족의 자생종교에 대해 ‘신흥종교’, ‘유상종교’, ‘민족종교’, ‘민중종교’, ‘보국종교’ 등으로 다양한 용어로 지칭되고 있지만 흔히 신종교라는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본 글에서 필자는 신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함을 부언해둔다.

2. 최봉룡, 『만주국의 종교정책과 재만 조선인 신종교』 (파주: 태학사, 2009), pp.342-351.

3. 최봉룡, 「만주의 역사적 지명 고증과 현지조사: 조철제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민족연구』 3 (2007).

4.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조정산 도주 및 그 일가의 만주에로 망명에 대하여 “一九○九년(己酉年) 十五세시(歲時)) 四월에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으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결정단계(決定段階)에 있음을 개탄(慨嘆)하시고 부친(父親) 숙부(叔父) 등(等)과 같이 만주(滿洲) 봉천지방(奉天地方)으로 망명(亡命)하시어 동지(同志)들과 구국운동(救國運動)에 활약(活躍)하시다가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救國濟世)할 뜻을 정(定)하시고 입산(入山) 공부(工夫)를 하시다.”(pp.11-12)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봉천지방’은 심양지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표현이다.

5. 태극도편찬위원회, 『진경』 (서울: 태극도출판부, 1989), pp.316-317.

6. 같은 책, p.316.

7.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의 옛 지명.

8. 이진룡(李鎭龍)은 1905년 황해도 평산 의병장으로서 1908년 유인석을 따라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 안중근 의사에게 거사자금을 마련해준 인물로서 국내에 들어왔다가 1911년 압록강을 넘어 유하현 삼원포에서 조맹선(趙孟善), 이중협(李鍾協) 등과 재기를 꾀하면서 활동하였다. 1919년 관전에서 피체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순국, 그의 부인 우(禹)씨는 그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는데 이진룡의 기념비와 함께 그의 부인 우씨 열녀비는 현재 관전현에 있다. 이석대(李奭大)는 이진룡(李鎭龍)의 별칭이며 이석대(李碩大)는 곧 이석대(李奭大)의 오기로 추정된다. 반민영, 「유인석의 의병통합 노력과 안중근의 하얼빈의거」, 『의암학연구』 7 (2009), p.104 참조

9. 『진경』, pp.327-328.

10. 같은 책, p.328.

11. 같은 책, p.329.

12. 같은 책, p.330.

13. 같은 책, p.331.

14. 같은 책, p.332.

15. 같은 책, p.333.

16. 북간도 용정촌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할 때 이상설은 이당(李堂), 이동녕은 이량(李亮)으로 변명하였는데, 1907년 3월 이동녕은 이상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준(李準)과 회합한 후,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떠나는 그들 일행과 작별하고 이상익(李相益) 정순만(鄭淳萬)과 함께 다시 북간도 용정촌에 이르러 서전서숙에서 1개 월정 수업하다가 가사(家事)로 인하여 서울로 귀하였다. 윤정희, 「간도개척사」, 『한국학연구』 3 별집 (1991), p.21 참조.

17. 1911년 10월 15일 조정산 도주의 혼례가 있었고 그 이전 재판에서 이긴 후부터 조정산 도주는 당총각이라고 불리웠고 복우도장은 촌장으로 추대되었으므로 1911년에는 복우도장이 이미 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 이때 조정산은 부친의 명의로 북경에 가서 원세개에게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항일운동의 일념 뿐이니 하가(何暇)에 귀국사에 간여하리요”(『진경』, p.334.)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전했다고 한다.

19. 조정산 도주는 귀국 후 1921(辛酉)년 4월 28일 정읍군 갑곡면 통사동 영모재에서 ‘무극대도(無極大道)’라는 도명의 교단 창립을 선포, 1936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예견한 조정산은 교단의 명칭을 ‘태극도(太極道)’로 개칭하고 도인들을 모아 교단재건사업에 착수, 도인 수효가 10만 여명에 달하자 1948년 설날 교단을 태극도로 공포하고 본부를 부산시 보수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58년 3월 6일 화천하였다. 그 뒤 도전을 맡은 박한경은 10년간 태극도를 운영하다가 1969년 4월 서울 중곡동에 도장을 만들고 ‘대순진리회’라는 교단명을 내걸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한국민족종교총람』 서울: 한누리, 1992, pp.588-589)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대순진리회의 기록은 몇 가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무극도 해산의 시점은 1941년으로 나타난다.

20.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서울: 집문당, 1997), p.199.

21. 당시 통화현 오도구는 현재의 행정지명으로는 길림성 유하현 오도구향인데, 1877년 통화현이 설치될 때 통화현에 소속되었으나 1902년 유하현이 설치되면서 유하현에 편입되었다. 이로부터 유하현 지명 및 행정관할 소속의 변동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22.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경학사’ 및 ‘신흥강습소’의 설립에 직접 관여한 독립운동가들의 대표적인 증언록 및 회고록으로는 이상룡의 『석주유고』 (서울: 고려대학교, 1973); 이은숙의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울: 정음사, 1975); 이관직의 『우당이회영실기』 (서울: 을유문화사, 1985)등이 있다. 현재 이곳의 행정 명칭은 유하현 삼원포진 홍선촌이고 습관적으로 서추가(西鄒家), 선광촌을 동추가(東鄒家)로 부르고 있다. 2015년 11월 7일 필자는 대순진리회 교무부 및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임원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면서 당지 주민들로부터 대고산(大孤山)옆에 두 개 소고산(小孤山)이 있고 또한 대고산에 도관이 있었다는 것은 1970년대 대고산에서 채석할 때 안전을 기도하기 위해 산신제를 지내던 작은 제단일 뿐 도관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23. 청(淸)나라 때에 한인(漢人)들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으로서 1677년 이후부터 여러 번 법령이 공포되었는데 1875년과 1881년부터 서간도지역과 북간도지역에서 각각 봉금정책이 해제되기 시작하였음.

24. 압록강유역 한인들의 초기 이주에 대한 기록은 1872년 이 지역을 시찰한 최종범이 남긴 『강북일기(江北日記)』에서 한인들의 생활 실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25. 『柳河縣誌』, 民國 19年(1930), p.122(길림성 통화시 당안관 소장).

26. 『柳河縣一般狀況』, 康德 4年(1937), pp.55-58.

27. 『柳河縣誌』, 民國 19年(1930), p.153.

28. 유하현 사지판공실에서 입수한 자료목록: 1)『柳河縣志』,民國19年(1930); 2)『柳河縣縣誌』, 大同2年(縣誌編輯所編輯責任者, 橋本綱雄, 1933); 3)『柳河縣政況槪要』(柳河縣公署編輯), 1935; 4)『奉天省柳河縣事情』 附錄:柳河縣朝鮮人事情』(滿洲帝國地方事情大系刊行會), 1935; 5)『思想硏究資料』 特輯41號, 司法省刑務局, 昭和13年(1938); 6)『通化省槪況』(日文); 7)『滿洲事情-通化省』(日文); 8)『東邊道案內』(日文); 9)『東邊道』 昭和十六年(1941,日文)등이었다. 이 외에도 『吉林省柳河縣地名誌』(柳河縣人民政府, 1985); 『柳河縣誌』 (1991): 『三源浦鄕誌』 (1983); 『五道溝鄕誌』 (1984) 등을 수집하여 유하현 지명ㆍ산명을 고증하는데 참조.

29. 일본사법성 형무국에서 편찬한 『思想硏究資料』(特輯41號)는 1937년 12월 만주국에 파견된 일본검사들이 하얼빈에 이르러 만주국 내 공산주의운동 상황에 관한 시찰보고서를 묶어서 출판한 것인데, 「滿洲に於ける中國共産黨と共産匪」, 「最近に於ける滿洲共産主義運動の情勢」, 「鮮滿北支に於ける蘇支の謀略諜報について」, 「北滿洲を中心とする對蘇交通工作の一般」 등 4편 조사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조사보고서들은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약하던 양세봉의 조선혁명군과 중공계열의 동북항일연군 및 한인공산주의운동사 연구에 새로운 사료로 주목된다.

30. 현재 수동촌의 행정 명칭은 2005년부터 복민촌(福民村)에 병합되면서 유하현 나통산진 복민촌 수동둔(水洞屯)으로 불리고 있다.

31. 태극도편찬원, 『태극도주 조정산 전기』 (부산: 태극도출판부, 1992), p.28.

32. 조정산 도주 재세시에 수도인이 직접 조정산 도주로부터 말씀을 하명 받고 기록해 둔 자료를 그의 자제분이 조정산 도주의 장손자인 조현장에게 전달하였다고 함.

33. 우리말 “수덩거우”의 “덩”에 상응하는 한자는 “ㄷ”(혹은 ‘ㄸ’)발음이나 “ㅌ”발음이 동시에 나는 동(洞)자가 “ㅌ”발음만 나는 통(通)자 보다 합당하다고 판단함.

참고문헌(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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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첨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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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奉天省柳河縣事情』(康德2年-1935年)에 첨부된 「柳河縣略圖」에 나타난 대통구(大通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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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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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2. 『柳河縣一般狀況』(康德4年-1937)에 첨부된 「柳河縣現勢地圖」에 표기된 대통구(大通溝)ㆍ수동구(水洞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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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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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3. 『柳河縣一般狀況』(康德4年-1937)에 첨부된 「柳河縣現勢地圖」에 표기된 나통산진(羅通山鎭)의 대통구(大通溝)ㆍ수동구(水洞溝) 지도의 부분 확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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