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대순진리회의 ‘세계종교’ 가능성에 관한 연구

권동우 1 , *
Dong-woo Kwon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Professor, Youngsan University of Sŏn Studies
*영산선학대학교 교수, E-mail: susanowo0428@gmail.com

© Copyright 2020,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May 18, 2020; Revised: Jul 01, 2020; Accepted: Aug 01, 2020

Published Online: Aug 31, 2020

국문요약

대순진리회는 교단 내부 구성원들에 있어서나 학계에 있어서나 ‘민족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종교의 성격이 꽤 복잡하다. 곧 민족종교로서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민족의 선민사상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류와 세계를 구제하겠다는 세계종교의 보편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민족종교의 특수성과 세계종교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논리는 단지 대순진리회에만 국한된 특징이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많은 종교들이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고 하는 이중성을 보여 왔다. 그 가운데 본고에서 주목한 것은 근대 일본에서 형성된 교파신도다. 근대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교파신도는 총 13개 종파가 형성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민족적 전통을 계승하는 민족종교라고 하면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세계종교를 표방하면서 해외포교에 나선다. 그렇다면 이처럼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종교를 지향했던 교파신도의 해외포교는 어떻게 귀착되었고, 이들의 세계종교화는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본고에서는 이처럼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이중성을 보여 왔던 교파신도의 사례를 통해 대순진리회의 세계종교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이를 위해 대순진리회가 지향해야 하는 길에 대해 약간의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민족종교’론 또는 ‘민중종교’론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살펴볼 것이며, 한국에서 민족종교이면서 세계종교를 지향하고 있는 원불교의 사례도 점검하는 것으로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경계에 서 있는 대순진리회의 새로운 지향점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Abstract

Daesoon Jinrihoe tends to be perceived as a ‘nationalistic religion’ by both internal members of the religious body and outside scholars of religious studies. However, the character of this particular nationalistic religion is rather complex. On top of emphasizing the special status of the Korean ethnic group while focusing on nationalism as a nationalistic religion, Daesoon Jinrihoe futrther asserts an implication of the universality of world religion aiming to bring relief to humankind and the world. This dynamic is one of the specificity of nationalistic religion and also the universality of world religion.

However, this dual logic of specificity and universality is not characteristic of only Daesoon Jinrihoe. Many religions in the world have also exhibited duplicity as nationalistic religions and world religions. And this thesis pays attention to Sectarian Shinto as it formed in modern Japan. Kyoha Shinto formed when the modern Japanese government established the national Shinto system which had a total of 13 sects. Most of them do not only call themselves a nationalistic religion, inheriting the ethnic tradition of Japanese people, but also jump into overseas missionary work. This started during the Sino-Japanese and Russo-Japanese Wars. With that in mind, how did the overseas missionary work of Sectarian Shinto aspire for status as a world religion while maintaining their identities as nationalistic religions? Furthermore, how did their movements fare in their efforts to become world religions?

Thus, this thesis aims to examine the possibility Daesoon Jinrihoe becoming a world religion through some cases of Sectarian Shinto that showed the duplicity as nationalistic religions and world religions. Also, this thesis makes suggestions regarding the future direction of Daesoon Jinrihoe. As such, this paper aims to review the new direction of Daesoon Jinrihoe as it stands on the borderline between being a nationalistic religion and a world religion. This is done by examining the historical flow of theory regarding ‘nationalistic religion’ or ‘minjung religion’ which have long been discussed in Korean society. Also examined is the case of Won Buddhism which likewise aims to simultaneosuly be both a nationalistic religion in Korea and a world religion abroad.

Keywords: 민족종교; 민중종교; 교파신도; 세계종교; 원불교; 특수성과 보편성
Keywords: Nationalistic Religion; Minjung Religion; Sectarian Shinto; World Religion; Won Buddhism; Specificity and Universality

Ⅰ. 들어가는 말

현재 국내에서 호칭되는 민족종교의 개념은 그 의미와 영역이 상당히 폭넓다. 한국 종교계에서 민족종교의 개념은 근대 이후 국내에서 자생한 신종교 또는 신흥종교를 외래종교와 구분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최근에는 불교와 유교, 기독교의 경우도 민족불교, 민족기독교, 민족유교의 표현을 통해 민족종교의 범주를 확장해 왔다. 그러나 민족종교라는 개념의 배경에는 민족주의와 민족종교, 민중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해 온 학술적 영역의 규정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 본고는 이러한 기존의 학술적 연구가 규정한 민족종교의 개념이 한국 신종교 이해를 위한 척도로서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한국 신종교 이해를 위한 새로운 시각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근대 이후 민족종교의 개념은 근대 국민국가체제가 낳은 국민 개념의 ‘순혈성’을 근간으로 단일민족국가를 외치는 속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의 경우 일본민족의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신도 계통의 ‘단일민족론(單一民族論)’과 인류학자나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제시되는 ‘혼합민족론(混合民族論)’이 충돌하는 가운데 교파신도(敎派神道)를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론이 신도를 민족종교라고 주장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다.1)

이들 교파신도 교단들은 일본제국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세계종교’를 표방한다. 그래서일까? 일찍이 구스타프 멘싱(Gustav Mensching, 1901~1978)은 7대 세계종교에 일본종교(신도)를 포함시키고 있다.2)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 교파신도는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종교를 표방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며, 최근 현지에서 조사해 보면 이들은 급격하게 민족종교적 성향이 강한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종교학 연구에서 말해 온 민족종교 또는 세계종교의 구분이 과연 실제에 있어서 타당하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세계종교’의 개념은 근대 이후 기독교와 유럽 제국주의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으며 민족주의 중심의 ‘민족종교’와 대립적으로 사용되어 왔다.3) 따라서 본고에서 사용하는 ‘세계종교’의 개념이 자칫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적 양상을 표출하는 것으로 인식될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논자는 민족종교의 개념을 세계종교와 대립개념으로 사용해 온 기존 연구의 한계, 곧 이데올로기 중심의 종교 이해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러한 관념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종교 개념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시각에서 본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말하는 ‘대순진리회의 세계종교의 가능성 모색’은 대순진리회의 종교적 정체성을 민족종교 또는 세계종교의 틀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임을 밝혀 둔다.

현재 대순진리회는 ‘민족종교’이면서 ‘세계종교’라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교파신도가 밟아 온 전철을 대순진리회가 따라가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의 종교적 정체성은 향후 과연 어떻게 표출될까? 근대 교파신도의 종교적 정체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대순진리회의 탈 민족종교의 필요성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Ⅱ. ‘민족종교’의 범주와 대순진리회의 정체성

1. ‘민족종교’론과 ‘민중종교’론

국내 학계 또는 종교계에서 ‘민족종교’라는 용어는 범람하고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종교’라는 용어가 국내에서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그 시작을 밝히기 어렵다. 다만 1930년 8월 29일 남경《중앙일보》에 ‘적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지사들은 천도교ㆍ대종교 등 민족종교의 이름을 빌려 비밀결사를 조직하는데 주력하였다’4)는 기록으로 볼 때, 민족종교라는 말이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된 역사용어라는 것과, 당시에도 천도교나 대종교 등 토착적 자생종교를 민족종교로 지칭한 것을 알 수 있는 정도다.

민족종교라는 용어를 한국의 종교연구 범주에서 연구방법론으로서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선 역사적 또는 연구사적 관점에서 민족종교라는 용어가 어떻게 정의되고 사용되어 왔는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도된 이래,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사회에는 수많은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게 된다. 기존에는 이들 가운데 증산 강일순을 중심으로 하는 증산교, 홍암 나철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종교, 일부 김항을 중심으로 하는 정역, 소태산 박중빈을 중심으로 하는 원불교 등이 민족종교를 대표하는 교단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들 교단의 대부분은 종교유사단체로서 신도, 불교, 기독교와 같은 공인된 종교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 기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되었고, 종교유사단체의 행적은 경찰의 감시와 통제 아래에 놓였다. 현재 확인 가능한 일제강점기 종교유사단체에 대한 분포 또는 통계 기록의 경우 모두 경찰에 의한 조사가 대부분인 이유가 그것이며,5) 이러한 경무국의 종교유사단체에 대한 조사 결과들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1936년 무라야마 치쥰(村山智順)이 실질적인 현장 조사를 통해 학술적으로 계통을 나누는 등 내용을 보완하여 간행한 것인 『조선의 유사종교』다.6)

그렇다면 『조선의 유사종교』를 통해 볼 때, 유사종교=민족종교의 등식은 성립하는 것일까? 여기에 선뜻 수긍하기는 힘들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조선에서 토착적으로 자생한 종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신리종교(神理宗教)나 문화연구회와 같은 교단은 일제의 천황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등 한국의 민족적 종교라고 할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

어쨌거나 일제강점기를 통해 공인교의 지위를 얻지 못한 종교유사단체들은 경무국의 감시와 통제 아래서 존립하게 되는데, 이들에 대한 사회 일반의 인식은 대체로 종교유사단체=사교(邪敎)의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8) 당시 종교유사단체에 덧씌워진 사교의 멍에는 대체로 허황된 사술로 선량한 백성의 금전을 편취하는 것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간음이 주된 소재였다. 물론 이들 종교유사단체를 사교로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조선총독부와 경찰에 의한 통제와 탄압에 기인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1936년 보천교단의 해체를 비롯하여 1937년 백백교사건을 통해 조선 사회에서 종교유사단체에 대한 사교적 이미지는 더욱 굳어지게 되는데, 특히 백백교 사건의 경우 교주 전용해(全龍海)에 의한 황당할 정도의 음란과 막대한 금액의 재산 편취,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감추기 위해 자행된 대량살인은 당시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백백교사건을 빌미로 경무국은 대대적인 유사종교 조사와 해체 작업에 착수하면서 조선 내 자생종교들에 대한 사교의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켰고, 대중에 고착된 자생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해방 후에도 계속된다.

해방 후 학문의 영역에서 이른바 종교유사단체에 속해 있던 교단들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하는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장병길과 이강오에 의해서다. 우선 장병길은 기존의 유사종교들 가운데 대종교의 삼일신관과 증산교의 천지공사관을 ‘집단적 민간신앙’의 관점에서 다루었고,9) 그 뒤에는 ‘사리적(射利的), 성적(性的), 미온적(微溫的)인 도의(道義)를 설하는, 비속한 민중적인 집단체’인 ‘신흥종교’에 대해 천도교나 대종교 등 교의적으로도 세계형의 종교보다 선진적인 면을 가진 ‘신종교’를 구별하는 시도를 한다.10) 이러한 신종교와 신흥종교를 구별하는 종교학적 논의가 이후 구체화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후 ‘신종교적 민족종교’11)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동학, 증산교, 신교를 다루는 것은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이강오는 1966년부터 「한국의 신흥종교 자료편」시리즈를 통해 신흥종교에 대한 연구를 개시한다. 이 연구 성과는 후에 『한국신흥종교총감(韓國新興宗敎總鑑)』으로 통합 발행되는데, 여기서 이강오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유사종교로 규정된 종교들 중 ‘유ㆍ도ㆍ불의 사상을 조합하여 민족종교의 성향을 갖는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하여 유사종교와 민족종교가 혼재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이들의 성향을 구별하려고 하였다.12)

이러한 연구에 뒤이어 1969년에는 류남상의 「계룡산 신흥종교의 계보와 교리 연구」13)와 민동근의 「계룡산일대 종교의 실태조사」14), 류병덕의 「한국 신흥종교의 유사종교 규정에 관한 연구」15)등 신흥종교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 가운데 류남상은 신흥종교가 한국인의 전통적 사고유형의 형해를 보존하는 면과 종교적 유사성과 타락성으로서의 미신적인 면이라고 하는 양면성을 가졌다고 하였고, 류병덕의 경우도 신흥종교와 유사종교를 구별하나 유사종교를 기성종교에 의한 차별적 용어로 규정한 후 종교학자들이 무분별하게 신흥종교를 유사종교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해방 후 약 20여년이 흐른 후 시작된 신흥종교 연구는 과거 일제강점기를 통해 덧씌워진 유사종교의 멍에를 벗겨내는 작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흥종교 연구의 방향이 학자들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신종교, 신흥종교, 민족종교의 개념을 설정하면서 시각이 다양화 했으나, 동학 이후 탄생한 근대 자생종교를 대체로 신흥종교라는 시각에서 연구하는 경향이 정착되기 시작했고, 이는 점차 신종교라는 용어로 보편화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의 동향 속에서 1979년 황선명은 ‘민중종교’의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곧 황선명은 민중을 계급투쟁의 소외계층에 속하는 의미가 아니라 종교 내부의 신앙공동체로서 설정한 후, 민중에 의한 종교운동은 끝없이 새로운 이상향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하면서 한국 신흥종교를 민중종교의 시각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16) 이는 한국의 신흥종교가 지닌 성향을 ‘민중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려는 시도로서 이러한 시각에 호응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1983년 『한국근대민중종교사상』을 간행한다. 한편 류병덕은 1982년 「개화기ㆍ일제시의 민중종교 사상」을 통해 민중종교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수운의 동학사상ㆍ일부의 정역사상ㆍ증산의 신명사상ㆍ나철의 삼일철학ㆍ박중빈의 일원철학을 대표적인 한국민중종교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1985년 이후 윤이흠은 본격적으로 ‘민족종교’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가 민족종교란 용어에 주목한 이유는 1981년 6월 기존의 신흥종교 연구 그룹으로 분류되던 종교들이 ‘한국민족종교협의회’ 결성을 발기 후, 1984년 11월 정식으로 협의회를 결성하였던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민족종교라는 용어가 기본적으로 한국민족문화 주체의식의 각성을 전제로 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민족종교란 한국자생종교로서 한국민족의 공동운명공동체의식에 입각하여 외부로부터의 압력으로부터 자유와 영광을 추구하려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종교, 또는 그런 역사의식을 가진 종교”17)라고 정의한다.

윤이흠의 민족종교론에 반발하면서 민중종교론을 보편종교의 개념으로 확장해 가려는 시도를 한 것이 류병덕의 ‘민중종교’론이다. 류병덕은 1985년 『한국민중종교사상론』에서 “종교가 한국인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의 종교’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세계적이고 또 그들이 내놓은 교리 속에는 보편성ㆍ세계성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 종교를 ‘한국으로부터의 종교’라고나 할까. 결코 민족적 종교이거나 국민적 종교로 한정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18)라고 하면서 ‘민족적 종교’의 틀을 벗어나 보편종교를 지향하는 ‘민중종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류병덕ㆍ김홍철ㆍ김낙필ㆍ양은용 등은 「한국근세종교의 민중사상연구」를 통해 원시종교, 민족종교, 세계종교로 이어지는 종교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이들 종교의 세 가지 기능을 회복, 개혁, 통합하는 완성형 종교의 양태가 바로 ‘민중종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19) 이른바 ‘민족적 민중종교’론을 통해 세계종교로 통하는 한국종교의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하였고, 나아가 기존 서구 중심의 종교학에서 벗어난 한국적 종교학 방법론의 성찰을 촉구한다.

이에 대해 1989년 강돈구는 「민족종교와 민중종교」에서 기존의 민족종교와 민중종교의 두 연구 흐름에 대해 ‘민족주의를 수용한 종교를 민족종교로, 마르크시즘을 수용한 종교를 민중종교’로 규정하자고 제안하고,20) 『한국 근대종교와 민족주의』를 통해 민족주의에 기반한 한국민족종교에 대해 고찰하였다.21) 노길명은 한국 신종교운동의 특징을 민중종교운동으로서 민중해방을 향한 염원의 표출과 민족종교적 속성으로서 선민사상과 민족문화계승사상 등 민족주체사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강돈구의 방법론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22)

이처럼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민족종교와 민중종교의 개념은 한국 자생신종교 연구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아 왔다. 다만 류병덕의 민족적 민중종교의 개념은 적극 수용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윤이흠의 민족종교론이나 황선명이 주장하고 강돈구가 정리한 민중해방적 민중종교론이 민중종교 연구의 중심이 되어 왔다.

윤이흠은 1990년 「세계종교사에 있어서 한국민족종교의 의미」에서 민족종교와 세계종교를 구분하면서 ‘엄밀한 의미에서 전 인류에 대한 보편적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들을 세계 종교’라고 하면서 한국민족종교의 경우 사상적 엄밀성이 보강되지 않은 채 세계 종교의 사상적 외형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하면서 한국민족종교가 사상적 엄밀성을 계발하고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23) 민족종교 개념이 점차 한국 자생종교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각이 아니라 마치 실체화된 민족종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전제한 후 논지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류병덕은 1995년 「한국종교연구의 현황과 과제 - 종교학 방법의 성찰과 개발」에서 ‘민족종교’의 개념이 연구방법론이 아닌 통시적으로 쓰이는 것에 비판을 가하면서 종교연구의 방법적 성찰을 요구하였다. 곧 ‘민족종교’와 ‘민중종교’는 각각 근대이후 한국자생종교의 특징을 연구하는 시각(연구방법론)이었는데, 이러한 방법론이 점차 한국 자생종교를 규정하는 하나의 고착된 개념으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24)

한편 김종서는 한국 신종교를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포함하는 민족종교로 규정하면서도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종교’라는 용어는 민족적 맥락에서 나온 신종교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세계종교’에 반대 짝이 되는 용어는 아니다’25) 라고 하여, 윤이흠의 민족종교론과 류병덕의 민족적 민중종교론의 방향성을 유연하게 수용하려고 하였다.

류병덕이 주장해 온 보편종교로서의 민족적 민중종교론이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2000년 이후다. 먼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민족종교와 민중종교 중심의 신종교 연구 풍토에 대해 이재헌은 “한국 신종교를 단순히 민족, 민중운동의 틀 안에서 매몰시킬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종교심성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종교운동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26)하다고 했고, 김낙필은 이재헌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종교일반, 인간 일반의 이해에 대한 관심으로 폭을 넓힐 것”27)을 제안했다. 한국신종교 연구의 시각을 민족종교나 민중종교라는 특수적 상황에 가두지 말고 보편적 종교운동의 관점으로 접근해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재헌과 김낙필의 주장에 앞서 김홍철의 경우도 1987년 「한국문화와 민족종교」에서 민족종교가 과연 세계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교조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교조가 제시한 상징적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정립시켜야만 세계종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28) 김홍철의 이러한 고민은 류병덕이 주장한 보편종교ㆍ세계종교를 지향하는 민족적 민중종교론을 계승하면서 민족종교와 민중종교로 국한되어 온 한국 신종교의 보편종교 또는 세계종교로서의 가능성의 길을 물은 것이었고, 이재헌과 김낙필도 또한 이러한 방향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종교학계의 대순진리회 정체성

최근 한국 신종교 연구 영역에서 민족종교와 민중종교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둘러싼 논의는 거의 없다. 최근 김석근이 「근대 한국종교에서의 ‘민족’과 ‘민중’」29)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 것으로 보이나 이 연구는 기존의 민족종교 또는 민중종교로 규정된 한국 신종교 교단들이 ‘민족’과 ‘민중’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류병덕이 우려한 바와 같이 민족종교나 민중종교는 한국 자생신종교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로 고착되었으며, 논의의 전개 방식이 이 틀을 벗어나는 경우는 크게 찾아보기 힘들다.

민족종교론 주장의 중심에 서 있던 윤이흠은 1998년 「한국민족종교의 역사적 실체」에서 한국 자생신종교의 민족종교적 성향에 대해 1949년 1월 12일에 있었던 증산교통정원 결성 당시 이정립의 강연 제목이 「민족적 종교운동」이었던 것과 1966년 이정립이 「증산교행동강령」30)에서 발표한 3항목의 강령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31)

위의 강령은 첫째, 전체적으로는 민족주의 사상을 천명하고 둘째, 증산사상과 민족주의를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이 강령은 증산교단연합체가 스스로 민족주의의 주체임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이흠은 한국 자생종교의 종교적 특수성을 ‘민족종교’로 규정하는 논리를 충실히 이어가면서 유사종교 또는 사교(邪敎), 신흥종교 또는 신종교, 분파 또는 섹트 등 한국 자생종교를 규정해 온 많은 용어들의 부적절함을 비판했고, ‘민족주의가 한국민족종교 사상의 역사적 실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정립에 의한 ‘민족적 종교론’이었으며, 증산교 계통이야말로 해방 후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의 유형이라고 규정하였다.32)

그렇다면 증산계 교단으로서 국내에서 가장 큰 교세를 형성해 온 대순진리회는 이러한 학계의 ‘민족종교’ 논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다만 종교학계의 연구 중 민족종교의 틀에서 대순진리회를 조명한 초창기 연구 중 하나로 유흔우의 「민족종교의 특수성과 보편화 가능성」을 들 수 있다. 다만 유흔우는 윤이흠의 민족종교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토대 위에서 대순진리회가 후천개벽사상을 기반으로 한 선민사상의 표출 등 민족종교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주장한 후, 후천개벽사상을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개혁, 사회차원의 종교운동 등 현실적이고 현재적으로 실천해 가는 것을 통해 보편화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하였다.33)

이에 대해 이경원은 기존의 민족종교론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대순진리회를 민족종교라고 규정한 후,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에 내재하는 해원과 상생을 대순진리회의 민족종교적 특징으로 제시하였다. 다만 이경원이 말하는 민족종교의 개념은 앞서 밝힌 윤이흠의 민족종교론과 류병덕의 민족적 민중종교론 등이 종합된 것으로, 그가 수용하는 민족종교의 의미는 세계종교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 이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밝힌 류병덕의 민족적 민중종교론이나 김종서의 민족종교론의 성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34)

대순진리회의 보편종교를 지향하는 이경원의 주장은 이듬해에 발표하는 「대순사상 연구의 현황과 과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제 대순종단은 스스로 세계인류를 향한 보편적 진리를 증명해야 할 때가 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른바 세계종교는 지역과 민족을 떠나서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심성에 호소하고 인간의 구원을 향한 보편적 진리를 제시하였다는데 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궁극적으로는 세계 인류가 요구하는 새 시대의 보편적 가치관으로서 대순진리가 이해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 위에서 이경원은 내적연구의 과제로 대순종학방법론을 계발하여 대순종학을 정립하는 것과 외적 연구의 과제로 대순종단이 지닌 사회적 책임과 인류보편의 문제에 대한 연구 영역의 확장을 촉구하였다.

논자는 이경원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한다. 다만 대순진리회의 보편종교로서의 가능성과 가치를 밝히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 중 하나가 바로 기존의 민족종교, 특히 민족주의적 관념에 고착화되고 실체화된 민족종교론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꾸어 말하자면 대순진리회가 민족종교의 틀을 유지하는 속에서 인류의 구제를 외치는 세계종교, 보편종교로 나아간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길명이 한국 신종교의 ‘구세주 신앙과 선민사상’을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민족적 소명을 부여한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평가하면서도 ‘편협한 계급주의나 국수주의만으로는 세계 보편종교로 성장하기 어렵다’35)고 한 것이나 윤이흠이 지적한 민족종교의 한계 등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세계종교화 될 수 없는 민족종교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보편화의 가능성은 있으나 보편화의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기존의 이데올로기 중심의 민족종교론이나 민중종교론이 한국 자생종교를 유사종교나 사교라는 부정적 인식의 불식에 공헌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민족종교와 민중종교를 이데올로기의 틀에 가둔 점이나 민족종교의 개념을 실체화하면서 보편종교, 세계종교의 지향성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민족종교이면서도 세계종교를 지향했던 종교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은 그다지 멀지 않은 한국 자생종교 내에도 존재하며 조금 멀게는 근대 이웃나라 일본의 교파신도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민족종교이면서도 세계종교를 지향했던 종교들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 대순진리회와 유사한 종교적 성향을 보이는 근대 교파신도를 점검하는 것으로 대순진리회의 미래 종교적 정체성의 방향에 대해 가늠해보고자 한다.

Ⅲ. 근대 ‘교파신도’의 탄생과 세계종교의 지향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가 실패한 후, 전통적으로 민간에 전해오던 신앙과 지역 신사(神社)를 통해 계승되던 신도적 전통을 종교적 형태로 조직하여 공인하는 이른바 교파신도(敎派神道) 제도를 창출한다. 이 교파신도의 탄생은 곧 국가를 중심으로 관리하는 국가신도와 민간의 종교인 교파신도를 분리함으로써, 국가신도를 종교적 영역에서 분리하여 신사는 일본민족이 고대 이래로 계승해 온 국가의 종사(宗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덕 윤리로 규정하게 된다. 서구 열강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요청받는 속에서 신도를 신앙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으로 구분함으로써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국가신도를 탄생시킨 것이다.

메이지정부는 국가신도의 영역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일본의 전통신앙의 영역에 대해서는 ‘교파신도’를 공인하여 종교적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따라서 1876년에 흑주교(黑住敎)와 신도수성파(神道修成派)를 공인한 이후, 1882년 출운대사교(出雲大社敎), 부상교(扶桑敎), 실행교(實行敎), 대성교(大成敎), 신습교(神習敎), 신궁교(神宮敎), 어악교(御嶽敎)를 공인하고, 1886년에 신도(神道本局), 1894년에 신리교(神理敎)와 계교(禊敎), 1900년에 금광교(金光敎), 1908년 천리교(天理敎)를 교파신도로 공인한다. 이 가운데 신궁교는 1899년 스스로 종교가 아님을 선언하고 교파신도를 이탈하여 재단법인 신궁봉재회(神宮奉齋會)를 조직한다. 따라서 교파신도는 총 14개 교파가 공인되었으나 신궁교가 이탈함으로써 총 13개 교파가 공인되었고, 천리교 이후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 새로 공인되는 교파신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도13파, 또는 종파신도, 교파신도로 호칭된다.

메이지정부에 의해 교파신도가 공인되면서 자연히 종교는 불교, 기독교, 신도로 고착되었고, 민간에 전승되어 왔던 음양도 계통이나 점복, 주술 등을 주로 하는 종교인들은 대부분 교파신도의 부속교회로 들어가서 회원 등록을 해야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교파신도의 부속교회 및 신자는 짧은 기간에 급속도로 증가하여 자칭 1백만 이상의 신도를 거느린 신도계 교단이 다수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교파신도 교단들은 천리교나 금광교, 흑주교 등 일부 교단을 제외하면 대체로 후지산이나 어악산 등을 중심으로 한 산악신앙의 집단, 특히 신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자 집단인 강(講)의 연합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하나의 교파신도에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신앙적으로 성향이 현저하게 다른 경우가 많아서 교리적 일관성이나 교단적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교파신도로 공인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리체계와 일정 규모의 교단 조직, 그리고 조직 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군소 강조직을 연합하는데 주력하였고, 이들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조직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교단의 교리와 의례를 정비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파신도 전체가 하나의 공통된 신 관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조화삼신(造化三神) 개념이다. 조화삼신은 『고사기(古事記)』에서 천지창조 이후 최초로 등장하는 세 신,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御中主神), 다카미무스비노카미(高御産巣日神), 가미무스비노카미(神産巣日神)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에 대해 유일신적 관념을 부여하고, 나아가 이 신이 곧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하는 방향으로 그 의미를 창조해 가는 작업이 교파신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면 신도수성파에서는 “우리나라가 존숭받아야 하는 이유는 고대에 세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고천원(高天原)이라고 하는 신께서 머무시던 곳이 있었다. 그곳에 아메노미나카누시와 두 무스비의 신께서 계신 것이다. 이 신들의 계획을 세워서 말씀하시기를 국토가 만들어지고 사람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서 나라를 만들어 고정하라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의 두 신에게 명령하셨다.”36)라고 하여 천지를 창조함과 더불어 세계의 오대주를 수리고성(修理固成)했다는 의미에서 수(修)와 성(成)을 택하여 신도수성파라고 명칭하였다.

아메노미나카누시의 유일신적 성향을 더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부상교에서는 “신전(神典)에 이르기를, 천지의 태초에 신이 계셨으니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라고 이름한다. 곧 일원(一元)의 신이다. 일신(一神)은 태극보다 앞서 계셨으며, 천지를 나누셨다. 두 무스비의 신은 서로 교합하여 만물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세 분의 신을 조화의 추뉴(樞紐)라고 하는 것이다.”37)라고 하여 아메노미나카누시가 천지를 창조한 일신(一神)이면서 태극에 앞서 천지를 창조하였다고까지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의 신을 절대유일신으로 규정하는 신화해석에는 서구의 중심사상이요 제국들에 의한 아시아 침탈의 첨병으로 역할해 온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이라는 외부적 영향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곧 교파신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면서도 모방할 수밖에 없는 표준화된 근대종교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당시 교파신도의 교주들은 그리스도교보다 뛰어난 신도의 논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한 예로 신리교(神理敎) 교주 사노 쓰네히코(佐野経彦)는 1884년 일본에서 포교하던 러시아정교회 주교 니콜라이와 교리문답 하는데, 이 문답에서 사노는 자연스럽게 탄생한 종교가 천조교(天造敎)요 자연을 파괴한 가르침이 인조교(人造敎)로 신도는 곧 천조교이며, 불교나 유교는 인조교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도와 유사한 천조교인데, 그리스도교는 창조설(創造說)이지만 신도는 조화설(造化說)이라는 점에서 자연종교로서의 천조교에 더 가까우며, 따라서 그리스도교보다 신도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38)

현대의 종교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종교는 곧 원시종교나 미개종교에 가깝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연종교인 신도가 이미 교리ㆍ제도적으로 보편종교의 표준이 되는 그리스도교에 비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종교인 신도의 우위를 역설한 사노의 주장은 당시 신도의 종교적 위상을 세계종교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하는 노력이었다는 점, 또 세계종교로서 위의를 떨치던 러시아정교회의 주교와 대등한 문답을 펼쳤다는 주장에 의해 신도가 세계종교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신도 우월주의, 일본민족주의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메이지시대 교파신도의 종교화가 진행되는 과정은 불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보편종교에 뒤지지 않는 교리와 조직, 의례 등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 ‘신도는 민족종교이면서도 그리스도교에 비견할만한 세계종교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는 논리다. 이러한 주장은 청일전쟁 이후 교파신도가 세계종교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에는 대부분의 교파신도에서 민족종교와 세계종교를 동시에 표방하는 양상을 보이시 시작한다. 그렇다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교파신도가 지향하는 민족종교이면서 세계종교의 양상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먼저 흑주교의 기관지 『구니노오시에(国之敎)』의 기사를 통해 확인해 보자.

해외에 흑주교를 확장할 시기가 왔다. 본교 교사(敎師) 제군은 내무를 정비하고 평화적 종교전쟁을 강행해야 할 때다. … 애초에 우리 흑주교의 교주 무네타다신(宗忠神)이 세운 도는 하늘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대도다. 우리나라(일본)에 신도 교파가 많으나 그 가운데 발군으로서 다른 교파가 미치지 못하는 둘도 없는 큰 가르침(大敎)임을 확신한다. 광대무변하고 유일하여 일본에만 국한된 우물 안의 종교가 아님은 우리 교도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항상 본교 교사의 설교를 들을 때 천지의 대도를 설하는 것을 보면 세계적 대교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충분하다.39)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유럽 제국의 세력과 대등한 힘을 가진 일본의 위세를 세계에 알리는 거대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의 자긍심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흑주교는 종교전쟁을 운운하면서 세계적 대교인 신도를 해외에 확장해 갈 것을 주장한다. 위 글은 흑주교가 자연종교임을 전제로 다른 신도교파에 비해 우월함을 주장하고, 나아가 일본을 초월하는 세계적 대교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가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으나 이들의 신념에서는 일본의 민족종교면서도 세계적 대교라는 논리가 통용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흑주교에서는 실제로 동년 동월 오사카 쥰케이마치(順慶町)교회에서 조선인 유학생 두 사람을 교회에 거주시키면서 흑주교의 교리를 가르쳤고, 그 경험을 흑주교 해외포교를 위한 교육의 보편적 방법을 고안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하지만 6개월여에 걸쳐 실시된 흑주교의 신도(神道) 교육은 조선인 두 사람을 설득 또는 감화시키지 못한 채 마무리되며, 결과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40) 결국 흑주교의 해외포교는 1926년에 이르러야 비로소 개시된다.

해외포교를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은 비단 흑주교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천리교의 해외포교도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한다. 사실 신도의 조선포교는 1893년 사토미 지타로(里見治太郞)가 부산에서 포교한 것이 최초라고 알려져 왔으나, 논자의 연구에 의해 1885년 신도수성파, 1890년 흑주교 순서로 조선포교가 이루어진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41) 더욱이 천리교의 공식화된 해외포교는 1904년 무요(撫養)분교회에 의한 부산 전도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교파신도의 조선포교가 본격 개시되고, 러일전쟁 이후 조선 포교가 급증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러일전쟁을 틈타 천리교도 세계종교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의도를 표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당시 천리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42)

금후 우리 일본의 민족을 구제하고 국운을 발전시킬 것은 단 하나 우리 천리교뿐이다. … 우리 천리교는 일본 고유의 간나가라(維神) 대도를 종교화한 것이므로, 국체 민속에 적합한 것은 물론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분발해서 민족의 구제와 국운의 발전이라는 큰 책임을 맡아야 할 것이나 … 종교와 골동품을 동일시하는 세상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불교는 우리나라에 도래 후 오랜 역사 전통을 가지고,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태동한 후 이천년의 역사를 가지는 종교이므로 존중받아야 한다면서도, 천리교는 반대로 개종(開宗)한지 백년도 안 된 새로운 종교이므로 앞의 종교 같은 가치는 없다고 한다 … 그렇지만 시기의 대세는 이미 여기에 이르지 않는가. 신의 명령이 새롭게 우리에게 내려진 이상 세상에서 신종교로 보더라도(일본 고유의 간나가라의 대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유치하게 생각하더라도(교지가 광대심원하고 조직이 완전무결함에도 불구하고) 좌고우면하면서 주저하고 망설여서는 안 될 것이다.

1906년은 천리교가 아직 교파신도로 공인되기 이전이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포교를 지향하면서도 일본 내에서 여전히 사교(邪敎)로 평가받고 있었기에 간나가라의 대도임을 주장하며 민족종교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이미 교파신도의 공인을 받은 흑주교나 교파신도로 공인받기를 기대하는 천리교나 모두 민족종교이면서 세계종교를 표방하는 독특한 상황이 러일전쟁 직후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들 교파신도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조선포교를 전개하면서 세계종교를 지향한 것은 천리교다. 그런데 천리교가 조선 포교를 개시한 이후 23년이 지난 1927년의 조선 포교 상황을 적은 다음 글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본교가 조선에서 포교에 착수한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나 아직 조선민족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할 정도의 가르침을 볼 수 없다. … 일본에서는 포교의 방법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진부한 얘기지만 조선에 있어서는 다른 외국과 마찬가지로 이 방법을 찾는데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 구석구석 조선인 포교사를 양성해서 포교를 하려고 하면 일반 조선인에게 ‘너는 일본인에게 매수되었는가?’라고 하면서 조선인이 아닌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된다. … 내가 6개월 동안 교단(敎壇)에서 목소리를 높여 가르친 후 마지막에 천리교의 대체를 알겠느냐고 물으면 ‘모르겠습니다’라고 바로 답한다.43)

1926년 조선 내 천리교 신자 37,064명, 그 중 조선인 신자 8,347명이던 것이 조선총독부 통계라면,44) 위의 내용은 통계에 가려진 조선포교의 허상을 보여준다. 1938년 천리교에서 발행된 『전도지지(傳道地誌)』에 조선의 천리교회는 181개, 신도 수 3,85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총독부 통계의 진위 여부를 재검토 할 필요가 있으나, 어쨌거나 천리교의 조선인 포교가 실제 알려진 것보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45)

1928년 천리교의 해외포교에 대해 세계애, 인류애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해외전도는 … 본교의 교세 신장을 위한 것이지만 널리 세계인들로 하여금 우리 야마토민족(大和民族)의 입장에서 국제적 평화와 친선우호의 선진(先陣)을 이어가는 신(神)의 선민(選民)다운 명예로운 사명이요 포부이며 자랑이지 않으면 안 된다”46)고 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성향은 이후 조선포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937년 9월 천리교의 조선포교 30년을 맞이해서 진행한 대담에서는 천리교가 겉으로는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외치면서도 실상은 근본적인 마음(心)에서부터 조선인을 차별하는 의식에 변함이 없는 점을 지적하면서 해외전도에 있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할 것을 주장하였다.47) 천리교가 세계종교를 표방하면서도 의식의 근저에 민족적 우월감, 선민의식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와 모순을 표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천리교지만, 그나마 조선포교에 성공을 거둔 사례로 기억되는 것은 이들의 경우 현지인 포교사를 양성하는 등 다른 교파신도에 비해 적극적으로 해외포교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천리교 이외에 조선에서 포교를 개시한 교파신도는 총 11개 교파인데, 이 가운데 현지인 포교사를 양성한 것은 천리교 외에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세계종교를 표방하였으나, 민족종교에 대한 강한 인식을 기반으로 선민의식을 포기하지 못하였던 교파신도는 결국 해외포교에서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전과 함께 본국으로 철수한다. 이후 교파신도 교단은 다시 민족종교로 그 정체성을 재구축하였으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점차 교세는 위축되어 왔고, 현재는 천리교, 금광교 등을 제외하면 군소종단으로 전락되었고 그마저도 존립의 기반이 위협받고 있는 형국이다.48) 심지어 현재 금광교가 외국인 포교사 4명을 육성한 외 천리교를 비롯한 기존 교파신도의 어떤 교단에서도 외국인 포교사가 육성되거나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교파신도의 세계종교화 시도는 근대 이후 실패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Ⅳ. 세계종교로서 대순진리회의 가능성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천리교를 대표로 하였으나 근대 교파신도 각 교단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세계종교인 기독교와 대응할만한 교리적, 제도적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종교를 표방하며 해외교화에 나서지만 천리교뿐만 아니라 교파신도 대부분은 세계종교화에 실패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현재는 대부분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는 어떠한가? 대순진리회를 포함하는 증산교계 교단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로부터 시작되며,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증산교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하늘의 절대유일신이었던 구천상제가 인간의 몸으로 직접 이 세상에 내려와서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 역사를 통해 천지와 인간 사이에 맺힌 모든 원한을 푸는 해원(解冤)을 이루고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것이다. 신의 아들로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출현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 받았다는 그리스도교의 논리와 비교할 수 있으나, 절대유일신이 직접 세상에 내려왔다는 점은 그 신적 권위와 상징성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보다 더 크고 위력적으로 다가온다.

구천상제의 천지공사를 통해 후천개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종교로 탄생한 무극도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대순진리회는 근대 이후 지금까지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왔다. 이러한 방향성은 무엇보다도 『대순지침』에 “본도는 민족종교이니 민족주체성 계도에 앞장서야 한다.”49)고 한 것이나,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장차 국가와 종단을 이끌어 갈 인물이기에 학교 교육은 민족 주체사상이 투철하고 애국애족하는 공민육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50)는 등 박한경 도전의 뜻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순지침』은 1980년 1월부터 1984년 3월까지 약 4년여에 걸쳐 행해진 훈시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곧 1981년은 ‘한국민족종교협의회’의 결성이 발기되고, 1984년 11월에 정식으로 협의회가 결성되는 등, 『대순지침』의 훈시 내용은 한국사회에서 근대 자생종교들이 민족종교 또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고 이를 근대 자생종교의 정체성으로서 확립해 가던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민족종교를 지향했던 박한경의 정신은 계승하되 그 의미의 해석을 어떻게 확장해 갈 것인가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대순회보』 177호 「Q&A 게시판 : 대순진리회는 왜 민족종교라고 하나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순진리회는 민족종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종교’와는 확연히 구분하여야 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적 종교’는 ‘민족’을 ‘종교’보다 우선시하는 자민족 중심적이며 타 종교나 타 민족, 또는 타 집단에 대해 배타적 성향을 드러냅니다. 대순사상이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적 종교로 왜곡ㆍ축소된다면 세계적 보편종교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세계 종교의 특성은 민족종교를 바탕으로 발생하였지만, 민족의 차이를 초월하고 세계 인류를 똑같이 구제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대순사상은 목적에 있어서 지상신선 실현(地上神仙實現)이라고 하는 개인의 인간완성을 지향함과 동시에 지상천국 건설(地上天國建設)이라고 하는 세계적 이상(理想)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주체성과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창도이념을 지닌 대순진리회는 민족종교이면서도 상제님의 광구천하(匡救天下)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인류평화사상을 담고 있는 세계종교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51)

이와 같이 현재 대순진리회는 민족종교라는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종교를 지향하는 보편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따라서 대순진리회의 민족종교적 성향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순진리회가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이중성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서 유흔우의 특수성과 보편성 연구를 통해 볼 수 있는데, 그 원류는 노길명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노길명은 “증산의 민족주체의식은 세계사적인 보편성 속에서 한민족으로서의 특수성을 찾으려고 하는 발전지향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52)고 하여 증산사상이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경』을 통해 볼 때,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제각기 소원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받들어 줄 것이므로 도인들은 천하사에만 아무 거리낌 없이 종사하게 되리라.”라고 하여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내포하는 면과 “내가 보는 일이 한 나라의 일에만 그치면 쉬울 것이로되 천하의 일이므로 시일이 많이 경과하노라.” 또는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문명개화삼천국(文明開花三千國) 도술운통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라고 하여 증산의 천지공사가 조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천하’라고 하는 범세계적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돈구는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입장은 유대민족주의나 중국의 중화사상과 유사한 측면을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53) 따라서 대순진리회가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진다는 이원적 관점은 증산교계나 대순진리회에만 해당되는 특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논자는 근대 교파신도를 통해 이들이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두 가지 특징을 주장해 왔다는 것을 밝혔으며, 이는 강돈구가 말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논리가 상당히 널리 적용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특정 지역에서 탄생하여 그 지역을 토대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점에서 모든 종교는 민족종교의 성향을 가지고 이를 특수성으로 규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민족종교의 특수성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한다는 점은 그 종교가 민족종교에서 벗어나 점차 세계종교를 지향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세계의 모든 보편종교들도 민족종교에서 세계종교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특수성과 보편성은 종교가 성장해 가는 과도기적 단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민족종교의 특수성을 당연시 해왔던 대순진리회가 세계종교를 지향하는 방향에서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논자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과거 대순진리회와 유사한 형태로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이중적 정체성을 유지하던 종교들이 현재 대부분 민족종교의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는 종교로 남아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한국 자생신종교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세계종교를 지향하고 있는 교단은 원불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불교도 이러한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이중성의 문제를 통해 ‘성장통’을 겪고 있는 상태다.

소태산대종사(少太山大宗師, 1891~1943)의 대각으로 시작된 원불교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도 불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1958년부터는 세계불교도회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불교재산관리법’을 공포한 이후 원불교는 자유롭고 적극적인 교화활동의 전개를 위해 스스로 불교 종단이 아닌 ‘신흥종교’임을 선언한다. 이후 원불교는 국내에서는 한국 신종교요 민족종교로 활동하면서도 해외에서는 1980년 세계불교도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불교 교단으로서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92년 원불교 수위단회는 ‘원불교는 새 불교이면서 새 종교’라고 결의함으로써 원불교의 불교적 정체성을 회복하여 세계 보편종교의 지향성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원불교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원불교의 불교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인식이 증가해 왔다. 원불교의 군종 승인이나 노무현대통령의 국민장과 김대중대통령의 국장에 한국 민족종교를 대표하여 국내 4대 종단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나 불교계 내부에서 원불교를 비불교로 배척하는 경향이 점차 증가해 온 것 등이 원불교 구성원들의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속에서 2015년(원기100년)을 기준으로 원불교는 세계 23개국에 67개 교당과 30개 기관에서 140여명의 교무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원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연원불로 한다’는 교헌 항목의 삭제를 둘러싼 논쟁이 불붙었다. 연원불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속에서 결국 존치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지만 여전히 논란의 불씨는 남아 있다. 이때 존치를 주장했던 사람들 중 세계교화를 위해서는 원불교가 불교여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원불교가 민족종교의 정체성으로 남을지, 불교적 정체성을 회복하여 세계종교로 나아갈지의 기로에 서 있는 형국이다. 이는 한국 자생신종교가 세계종교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대순진리회에서도 참고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Ⅴ. 나가는 말

대순진리회는 현재 적극적인 해외 포덕으로 세계종교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 일부 개별 방면에서 미국에 포덕소를 개설하여 활동하고 있는 사례도 있지만, 종단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계획하거나 실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대순진리회가 민족종교에만 국한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증산의 천지공사를 민족구원에만 국한하지 않는 교리의 해석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대순진리회는 이미 민족종교에서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과정에 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도 그 속도에 차이는 있을 것이나 보편종교를 지향하는 흐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점에 논자는 대순진리회의 세계종교의 지향에 있어 향후 가장 큰 과제가 바로 기존에 유지해 왔던 민족종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탈각할 것인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의 종교가 세계종교를 지향한다는 것이 탈민족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지만, 기존의 종교들이 민족종교와 세계종교의 경계에서 결국 민족종교로 회귀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선민의식이나 민족주체성과 같은 민족주의적 성향의 탈피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천리교의 경우처럼 조선포교 30년을 지속하면서도 내지인(內地人)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의식을 놓지 못하는 속에서 토착화에 실패했던 기록은 충분히 검토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54)

류병덕이나 김종서, 이경원, 노길명 등이 한국의 민족종교 또는 민족적 민중종교가 세계종교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역설하였으나, 실제로 윤이흠이나 노길명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 성장한다는 것은 교리 해석의 틀을 바꾸고 구성원의 의식을 바꾸면서 세상을 향해 보편적 구원의 원리를 제시해 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대순진리회가 앞으로 당면해야 할 이러한 과제, 특히 민족종교의 굴레를 탈각하는 작업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느냐가 대순진리회를 민족종교의 영역에서 세계종교의 무대로 이끌어 내는 가능성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대순진리회 내부에서 구천상제의 신 관념이나 후천개벽의 개념 등 기존의 민족종교라는 인식의 틀에서 연구되어 왔던 대순진리회 교리의 핵심적 문제를 어떻게 보편개념으로 확대해서 해석해 갈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Footnotes

1) 小熊英二, 『単一民族神話の起源』 (東京: 新曜社, 1995), pp.19-32참조.

2) Gustav Mensching, Stuctures and Patterns of Religion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6), p.45; 안연희, 「‘세계종교’와 종교 가르치기」, 『종교문화비평』 29 (2016), p.54에서 재인용.

3) 안연희, 앞의 글, pp.51-56 참조.

4)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1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1), p.47.

5) 朝鮮總督府警務局編,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状況ー昭和八年ー』 (京城: 巖南堂書店, 1933), pp.106-132.

6)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教』 (京城: 朝鮮総督府, 1935).

7) 같은 책, p.450.

8) 윤이흠, 「일제강점기의 민족종교운동」,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엮음, 『한국민족종교운동사』 (서울: 한국민족종교협의회, 2003), pp.176-179.

9) 장병길, 「한국민간신앙의 구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엮음, 『한국종교와 종교학』 (서울: 도서출판 청년사, 2003), pp.320-328[초출, 『서울대학교 논문집: 인문과학집』 11, 1965].

10) 장병길, 「한국민간신앙의 심리」, 『한국종교와 종교학』, p.334[초출, 『서울대학교 논문집: 인문과학집』 12, 1966].

11) 장병길, 「민족 종교의 발생과 전개」, 『한국종교와 종교학』, p.428[초출, 「민족 종교들의 대두」, 『한국사상사대계』 5, 1992].

12)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감』 (서울: 도서출판 대흥기획, 1992), p.4.

13) 류남상, 「계룡산 신흥종교의 계보와 교리 연구」, 『철학연구』 8 (1969), pp.137-160.

14) 민동근, 「계룡산 일대 종교의 실태조사」, 『철학연구』 8 (1969), pp.89-115.

15) 류병덕, 「한국 신흥종교의 유사종교 규정에 관한 연구」, 『논문집』 4 (1969), pp.197-304.

16) 황선명, 「민중운동과 종교 - 종교운동의 본질에 관한 고찰」, 『종교학연구』 2 (1979), pp.45-69.

17)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권2 (서울: 집문당, 1988), p.153[초출, 「사회변동과 한국의 종교」, 1987].

18) 류병덕 편, 『한국민중종교사상론』 (서울: 시인사, 1985), pp.2-3.

19) 류병덕ㆍ김홍철ㆍ김낙필ㆍ양은용, 「한국근세종교의 민중사상연구」, 『한국종교』 14 (1989), pp.11-133.

20) 강돈구, 「민족종교와 민중종교」, 『한국종교연구회회보』 1-1 (1989), pp.7-10.

21) 강돈구, 『한국 근대종교와 민족주의』 (서울: 집문당, 1992), pp.7-10.

22) 노길명, 『한국의 종교운동』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pp.151-159.

23) 윤이흠, 「세계종교사에 있어서 한국 민족종교의 의미」,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권3 (서울: 집문당, 1991), pp.72-76[초출, 『한사상과 민족종교』 (서울: 일지사), 1990].

24) 류병덕, 「한국종교연구의 현황과 과제 - 종교학 방법의 성찰과 개발」, 『한국종교사연구』 3 (1973), pp.8-11.

25) 김종서, 「현대 신종교 연구의 이론적 문제」, 『현대 신종교의 이해』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p.6.

26) 이재헌, 「1970년대 이후 한국 신종교연구의 현황과 전망」, 『신종교연구』 3 (2000), p.21.

27) 김낙필, 「민족종교 연구의 바람직한 방향」, 『한국종교사연구』 9 (2001), p.269.

28) 김홍철, 「한국문화와 민족종교」, 『종교연구』 3 (1987), p.279.

29) 김석근, 「근대 한국종교에서의 ‘민족’과 ‘민중’」,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4 (2017), pp.149-191.

30) 「증산교행동강령」은 1) 증산천사의 사상을 몸 받아 민족적 종교를 건설하자. 2) 증산천사 교의의 기초 위에 새로운 국민도덕을 건설하자. 3) 증산천사의 사상 아래 새로운 민족문화를 건설하자이다. 이정립, 「증산교행동강령」, 『증산교요령』 (증산교본부, 1966), p.1.

31) 윤이흠, 「한국민족종교의 역사적 실체」, 『한국종교』 23 (1998), pp.87-88.

32) 같은 글, pp.89-99 참조.

33) 유흔우, 「민족종교의 특수성과 보편화 가능성」, 『제2회 대순사상학술대회 자료집』(2000), pp.593-602.

34) 이경원, 「한국민족종교의 특성과 대순사상」, 『신종교연구』 18 (2008), pp.209-249.

35) 노길명, 앞의 책, pp.157-159.

36) 新田邦光, 『敎道大意』 1권 (京都: 修成講社, 1873), p.3.

37) 宍野半, 『扶桑教』 (東京: 扶桑敎會講學堂, 1882), p.1.

38) 井上順孝, 『教派神道の形成』 (東京: 弘文堂, 1991), pp.196-197.

39) 不動, 「全国教導職に告ぐ」, 『国之教』 124號, (1906), p.19.

40) 이와 관련한 정황 및 강연 내용 등은 『国之敎』 제124호부터 129호에 게재되어 있다.

41) 권동우, 「신도의 조선 유입에 관한 재검토」,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6 (2018), pp.416-447 참조.

42) 社說, 「歲端の希望」, 『道之友』 169 (1906), pp.22-25.

43) 牧野榮一, 「朝鮮布敎の實際」, 『道之友』 497 (1927), pp.33-35.

44) 朝鮮總督府學務局宗敎課, 『朝鮮ニ於ケル宗教及享祀一覧』 (京城:: 朝鮮總督府, 1928), p.13.

45) 天理教校, 『伝道地誌』 (天理市: 天理教道友社, 1938), p.118.

46) 諸井慶五郞, 「海外布敎論」, 『道之友』 501 (1927), pp.8-11.

47) 記者, 「朝鮮布敎異聲問答」, 『道之友』 713 (1937), p.70.

48) 2019년 현재 일본 문화청 통계에 따르면 신도계 신자는 80,092,601명으로 이 가운데 신사신도계 76,835,969명, 교파신도계는 3,037,931명으로 집계된다. 천리교의 신자는 1,201,587명이나 천리교가 1970년 교파신도에서 탈퇴함으로써 현재 신도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교파신도계 교단은 총 69개로 이 가운데 출운대사교의 신자가 1,265,278명으로 가장 많고 금광교가 409,387명, 흑주교가 295,786명, 신습교가 138,077명, 계교가 90,711명, 신리교가 77,033명, 어악교가 47,990명, 부상교 31,500명, 대성교가 21,515명, 실행교가 11,710명, 신도수성파가 8,340명 등 근대에 수백만의 신자를 자랑하던 교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그마저도 계속 감소 추세다. (https://www.bunka.go.jp/tokei_hakusho_shuppan/tokeichosa/shumu/index.html)

49) 『대순지침』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84), p.25.

50) 같은 책, p.103.

51) 대순진리회 교무부, 「Q&A 게시판 : 대순진리회는 왜 민족종교라고 하나요?」, 『대순회보』 177 (2016).

52) 노길명, 「증산의 민족 주체사상」, 『증산사상연구』 6 (1980), p.55.

53) 강돈구, 앞의 책, p.136.

54) 물론 근대 교파신도와 대순진리회의 사례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근대라는 시기와 식민지 제국의 종교와 식민자들에 의한 피식민자들의 신앙이식이라는 특수성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가 교파신도를 사례로 제시한 것은, 그들이 민족종교와 세계종교를 동시에 주장하다가 결국 민족종교로 귀착된 대표적인 특징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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