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인성교육 이해방식과 방법론에 관한 일고찰: 인간 본성과 감정의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한 인성교육으로의 전환

김성실 1 , *
Sung-sil Kim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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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구경북연구원 부연구위원
1Associate Research Fellow, Daegu Gyeongbuk Institute

© Copyright 2022,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25, 2022; Revised: May 30, 2022; Accepted: Sep 14, 2022

Published Online: Sep 30, 2022

국문요약

인성교육은 먼저 인성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인성이 인간의 본성 혹은 성격이라는 주장들이 있으나 교육적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인성은 곧 선하냐 악하냐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의 본성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결국 교육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입장에서의 교육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입장에서의 교육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오늘날 현대교육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입장에서 교육은 미성숙한 자를 성숙한 상태로 이끄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한번도 선하게 된적도 없는 우리의 본성을 무슨 수로 선하게 만드는 교육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인가.

인성교육이 단순히 잘못된 사례를 중심으로 고쳐나가는 방식의 에티켓 교육이나 주입식 예의범절 교육이 된다면 그 이전에 잘못된 교육사례의 답습밖에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의 인성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교정이다. 교육은 인간의 미성숙하기에 끊임없이 교정ㆍ교화해나가는 절차가 아니라 완전한 나를 깨닫고 이해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인성교육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입장 하에서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드러난 감정을 중심으로 감정의 자기이해가 올바른 인성교육임을 말하고자 하였다. 인성은 교육 가능하지만 이때의 교육은 결코 없던 인성을 채워넣는 방식이 아닌 이미 완전하고 선한 나의 본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어떤 행동을 ‘하지마’라는 부정적 명령보다 ‘왜 하면 안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이전에 내 감정이 그렇게 느끼고 말해주는 것에 귀 기울여 듣는 ‘감정의 자기이해’가 녹아들어가는 인성교육이 된다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 될 것이다.

Abstract

Character education begins with a clear definition of character. There are claims that humanity is reducible to human nature or personality, but when approached from an educational perspective, human nature soon boils down to the question of its ultimate goodness or wickedness. There is a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the educational systems that emerge from the standpoint that human nature is evil versus the standpoint that human nature is good. With regards to educational outcomes, this can be observed both in terms of human nature and personality.

Modern education today sees education as leading the immature to a mature state from the standpoint that human nature is evil. But if human nature is evil, how could we implement an education that would render it good? If character education becomes a system of etiquette education or one of instilling manners whereby simple wrong cases are righted, it would be nothing but a follow-up to the wrong educational cases that had been carried out previously. In that sense, character education is correction; not education. Education should be done in a way that realizes and understands the perfect self rather than unfolding as a process of constantly correcting and reinforcing immature human beings.

In that sense, this paper posits that enabling students to understand their own emotions would serve as a correct form of character education. This would be a system of focusing on emotions that reveal the goodness of human nature. Personality can be educated, but education at this time should be a way to bring out a student’s already good and even perfected nature. This is more realistic than replacing a ‘faulty’ character with a good character which supposedly did not exist previously. If personality education morphs into ‘emotional self-understanding,’ contemplations on ‘why not to do’ unsavory acts rather than mere negative commands ‘don’t do that,’ and listening to what one’s emotions intuit prior to and after given actions, then that would arise to the true standard of a good education.

Keywords: 인성(人性); 교육(敎育); 성선(性善); 성악(性惡); 감정(感情)
Keywords: Character; Education;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good; Human nature is fundamentally evil; Emotion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무한경쟁시대에 내던져진 현대인의 삶 속에서 최근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강력범죄, 아동학대, 비리 등)을 접할 때마다 인성교육의 부재를 탓하게 된다. 교육은 이미 입시를 위한 무한경쟁체제 속에서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고, 그러한 체제 속에서 사회생활까지 이어지는 현실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타인에 대한 공감보다는 경쟁의 대상자로서 무감정하게 대하는, 영원한 타자로써만 이해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과연 도덕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는 지난 2014년 12월 국회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을 통과시켜 2015년 7월부터 인성교육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오늘날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인성교육의 필요성과 입법취지를 보자면 마땅히 환영할만한 내용이지만, 과연 인성교육의 본질과 의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병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1) 인성을 교육하겠다는 취지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인성교육이라고 하면서 인성은 나쁘다는 것을 전제로 한 뒤에 교육으로서 그것을 바꾸어보겠다는 류의 교육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인성교육열풍에 대해서 인성은 과연 교육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인성교육의 본질과 의의를 고찰하고, 인성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더 중요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특히 ‘인성은 교육가능한 것인가’라는 주제는 이미 플라톤의 『메논』에서 ‘덕은 교육가능한가’라는 주제로서 다루어진 전통적인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데2), 본고에서는 인성의 이해방식에 따른 상이한 교육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인성교육의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인간본성의 발현인 감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인성개념에 관한 비판적 분석

2015년 제정된 인성교육진흥법 제2조 정의에 따르면, ‘인성교육’이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ㆍ공동체ㆍ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말한다”3)고 보고 있다.

인성에 대한 정의는 분분하다. 인성교육진흥법을 입법하는 과정에서조차 인성개념에 대한 모호성을 지적하였는데,4) 이는 인성이 인간의 본래 성품, 즉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태어나서 후천적으로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인성교육법령에서도 인성을 ‘인간다운 성품’ 혹은 ‘인간다운 역량’ 등으로 보고 있는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인성을 ‘사람의 성품’,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을 인성이라고 보는 측면과 함께 심리학적 논의 속에서 인간의 성격이라고 이해하는 측면인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논의가 인성이라는 개념을 두고 상반된 논의인지 아니면 똑같은 의미를 두고 다르게 표현하는 형태인지에 대해서 먼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

인성을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내린다면, 인성교육은 곧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부터 교육의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인성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방식은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선하냐 악하냐에 대한 논의가 있다. 맹자의 경우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보았고,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는 방향으로서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성을 교육한다’라고 놓고 보았을 때 교육의 초점은 선한 인간의 본성이 더욱 드러나도록 도와주고 장려하는 측면에서의 교육이 될 것이다.

반면 순자의 경우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보았고,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반하여 인위적인 교육과 예절로서 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성인(聖人)이 밝힌 예법에 따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때의 ‘인성을 교육한다’는 말은 교육의 초점이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고 ‘좋다’라고 합의된 사항에 대한 계발이 중점이 될 것이다. 오늘날 서구교육론의 대부분이 이러한 순자의 인성 이해방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성숙한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교육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2. 인간의 성격이라는 측면

인성을 인간의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성격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특정한 개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독특한 방식”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선천적 특성보다는 후천적 경향성에 의미를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심리학과의 연계를 통한 심리학적 성격패턴 혹은 성격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인성교육에서의 인성이 인간의 성격이라고 정의한다면, 인성 교육은 어떤 특정한 목적지향적인 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육학적 특성이 인간의 무지(無知)에서 지(知)로서 이끄는 방식으로의 교육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이때의 인성교육은 인간의 성격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보다는 성격에는 어떠한 층차가 있고, 좋고 나쁨이 있다고 전제한 뒤에서 그것을 어떠한 목적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방식의 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격은 각자가 지니는 본래의 고유한 성품으로서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특성이다. 각자의 고유성을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기준하여 층차를 두거나 차별을 한다는 것은 올바름으로 이끄는 방식으로서의 교육의 본질과는 취지가 맞지 않는다. 특히 인성교육이라고 하면서 도덕성의 회복 혹은 도덕예절 교육이라는 미명으로 ‘마땅히 바른 성격은 이러이러하다’라고 규정한 뒤에 이것을 교육하는 방식이 된다면 인성교육의 취지가 퇴색될 가능성이 높다. 마치 도덕시험을 암기해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두고 보았을 때, 인성교육에 있어 인성개념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든 인간의 성격이라고 보든 간에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그 무엇이 과연 원래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인성교육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성격을 인성이라고 정의내린다 하더라도 인간의 성격에 좋은 성격이 있고 나쁜 성격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므로 결국 인간본성이 ‘선하다’, ‘악하다’의 논의의 핵심을 비껴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성은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여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에 따른 교육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Ⅲ. 인성 이해방식에 따른 교육의 차이

인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해 본다면, 인성교육은 곧 인성이해방식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다 좋다’, ‘완전하다’고 이해하는 방식과 그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나쁜 것이 있다’, ‘결핍되었다’라고 이해하는 방식 이 두 가지에 따라 교육 역시도 확연히 차이나게 된다.

1. 선하고 완전하다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 ‘다 좋다’, ‘완전하다’고 본 대표적 사상가는 맹자라 할 수 있다. 맹자의 경우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을 측은한 감정의 발현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논증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측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보편성을 성선(性善)의 근거로 밝힌 것이다.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생각, 계산, 판단 등의 마음이 아닌 직관지로 드러나는 우리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느닷없이 어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다 깜짝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들 것이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려 해서가 아니며, 동네 사람들과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 아이를 구하여 주지 않았다는 나쁜 평판이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5)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측은지정(惻隱之情)이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다는 맹자의 주장은 수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유의미한 이유는 측은함을 느끼는 감정의 주체가 바로 ‘나’이고 외부원인이 아닌 직접적인 ‘나’에 관한 질문과 답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3자가 아닌 ‘나’에게 맹자는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맹자는 고자와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인간의 성격이 포악하거나 악한 사람이 있다는 등의 주장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서 잘못 이해된 결과라고 본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풍년에는 자제들이 의뢰함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함이 많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림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림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보리를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불쑥 싹이 나와서 하지 때에 이르러 모두 익으니, 비록 똑같지 않음이 있으나 이것은 땅에 비옥하고 척박함이 있으며 비나 이슬의 길러줌과 사람이 가꾸는 일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동류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사람에 이르러서만 의심을 하겠는가. 성인도 나와 동류인 자이시다.6)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성인과도 같으며, 선악의 문제는 좋고 싫음의 문제로서 본래부터 하늘의 재주를 내림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빠뜨림이 그렇게 여기는 것으로 보았다. 즉 선악이라는 개념이 본래 선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서 그렇게 여기는 것이라는 점이다. 맹자의 인성이해는 교육의 방식에 있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보는 입장에 있어서는 교육의 방식이 그 사람을 본성을 억제하는 방식이 아닌 본래의 선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되게 된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에서의 인성교육은 곧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서의 교육이 되며, 재능을 살리고,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2. 악하고 불완전하다

순자는 공맹과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단언한다.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의 교도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악한 본성을 제어하기 위한 법도와 예의를 만드는 주체, 즉 성인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논제를 비껴나가고 있다. 그래서 순자는 ‘예의(禮義)’라는 것은 “성인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7)라고 말한다. 또 성인의 작위 역시 본성이 아닌 “생각을 쌓고 작위를 오랫동안 익혀 만든 것”8)이라고만 말하지 본래 악하게 태어난 성인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악한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을 쌓고 작위를 오랫동안 익혀만들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함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며 충성과 믿음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귀와 눈의 욕망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와 빛깔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지나친 혼란이 생기고 예의와 아름다운 형식이 없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감정을 좇는다면 반드시 다투고 뺏게 되며, 분수를 어기고 이치를 어지럽히게 되어 난폭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의 교도가 있어야 하며, 그런 뒤에야 서로 사양하게 되고 아름다운 형식을 갖게 되어 다스림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다.9)

순자의 ‘화성기위(化性起僞)’는 인간 본성이 본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악한 본성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키고 교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순자의 인성론이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 사람을 무슨 수로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설령 인위적인 작위나 생각 등으로 그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킨다고 해도 근본적인 본성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태어날 때 악하게 태어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에는 하등에 문제될 이유가 없다. 본성을 타고 본성에 따라 행동한 것이지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자 자신은 악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보통 사람을 악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학문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은 악하지 않지만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제3자의 경우나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예를 들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라도 자기 자신을 ‘악하다’고 단정짓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거짓으로라도 나 자신은 ‘악하다’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느끼게 되는 자신의 선함을 통해 자신의 선함을 깨닫게 된다.

순자는 사람의 정(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의 대화형식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요임금이 순에게 물었다.

“사람의 정이란 어떤 것이오?”

순이 대답하였다.

“사람의 정이란 매우 아름답지 못한 것인데, 어찌하여 물으십니까? 자기 처자식이 생기면 어버이에 대한 효도가 시들고, 바라던 욕망이 채워지면 친구에 대한 믿음이 시들고, 작위와 봉록이 차면 임금에 대한 충성이 시드는 법입니다. 사람의 정이여, 사람의 정이여, 매우 아름답지 못한 것인데 어찌하여 묻습니까? 오직 현명한 사람만이 그렇지 않습니다.”10)

요임금과 순임금의 실제 대화가 이렇게 이루어졌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순임금이 대효(大孝)라는 사실은 경전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순임금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부모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순임금이 처자식이 생겨 어버이에 대한 효도가 시든다는 언급을 했다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나 순자가 순임금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점이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그 본성에서 나오는 감정 역시 악하다고 보는 것이다. 순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자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악한 본성에서 악한 감정이 나온다는 것은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 역시 악하지 않으므로 순자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본성이 선하다고 하면서 정이 악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이다. 순자는 본성이 악하다고 했기 때문에 정이 악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지만, 본성이 선하다고 하면서 정이 악하다는 주장을 한다면 과연 이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이것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선하게 교화시켜야 한다고 보았지만 본성이 선하다고 여기는 경우에는 그 본성을 장려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선한 본성에서 나오는 감정 역시 선한 것이므로 감정을 억압하고 통제해야 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순자는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위적 노력’은 무엇인가?

본성으로부터 나타나는 좋아함과 싫어함,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이 그러하여 마음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생각이라 한다. 마음이 생각해 그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작위라 한다. 생각이 쌓이고 능력이 익숙해진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을 인위라 한다.11)

순자의 주장대로라면 ‘인위’는 곧 마음의 생각함이다. 즉 사고를 통해 행동으로 나아감을 말한 것이다. 맹자는 마음의 기능을 생각이라고 보았고12), 순자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또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을 마음이 선택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보았는데 여기서 ‘선택한다’는 것은 필연의 구조가 아니라 유선악(有善惡)의 구조, 즉 선과 악이 따로 있다고 보는 구조이다. 주자의 ‘심통성정(心統性情)’에서의 마음은 성정(性情)을 필연적으로 통솔하는 것이지 성정을 따로 선악의 개념구분을 통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순자의 경우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본성으로부터 연원하는 감정 역시 악할 뿐이기에 순자에게 있어 선택은 좋은 정과 나쁜 정을 구별하여 취사선택하는 마음이다.13) 좋은 정과 나쁜 정이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은 작게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이 되겠지만, 크게 확대한다면 사람과 사람 간의 살인이 될 수 있고,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태를 역사를 통해 똑똑히 지켜봐왔다.

순자의 화성기위는 곧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주장이다. 혹자는 순자의 성악설에 대해서 성악이라는 이름 때문에 순자의 학문 전체가 매도된다고 항변한다.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좋은 세상을 위한 예의 확립 등에 대한 측면을 높게 사야한다는 등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것으로 『순자』의 「해폐」편을 든다. 「해폐」편은 ‘사람의 마음이 보통 한 모퉁이가 가려져 있어 큰 이치에 어두운 경우가 있다’고 보고 가려져있는 마음의 여러 가지 병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수양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마음 수양을 통해 그 병폐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도를 아는가? 그것은 마음으로 알 수 있다. 마음은 어떻게 도를 아는가? 그것은 마음이 텅 비고 한결같아지고 고요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쌓여 있으나 이른바 텅 빈 상태가 있다. 마음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만 이른바 한결같은 상태가 있다. 마음은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이른바 고요한 상태가 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사물을 기억하게 되며, 기억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가 쌓이게 된다. 그러나 이른바 텅 빈 상태가 있는 것이다. 마음에 이미 쌓여 있는 것들 때문에 새로 받아들이려는 것들이 방해를 받지 않는 것, 그것을 텅 빈 상태라 한다. 마음은 생겨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여러 가지를 분별하게 된다. 분별하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아울러 알게 하며, 동시에 여러 가지를 아울러 알게 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른바 한결같은 상태가 있는 것이다. 저쪽의 하나 때문에 이쪽의 하나가 방해받지 않는 것, 그것을 한결같은 상태라 한다.14)

순자는 사람이 도를 아는 방법은 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보고 마음이 텅 비고 한결같아지고 고요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앞서 순자는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감정이 악한 것으로 보고 감정이 그러하여 마음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생각이라 하고 마음이 생각해 그것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작위라 하고 생각이 쌓이고 능력이 익숙해진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을 ‘인위(人爲)’라고 하였다. 즉 순자에게 있어 마음은 악한 감정을 선택하여 생각할 뿐이다. 또 순자는 마음의 이해를 돕기 위해 쟁반의 물 비유를 든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쟁반의 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바르게 놓고 움직이지 않게 한다면, 지저분하고 탁한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맑고 밝은 것은 위에 있게 된다. 그러한 물에서는 수염과 눈썹까지도 비추어 보고 잔주름까지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풍이라도 불어오면 지저분하고 탁한 것이 아래편에서 움직이고, 맑고 밝은 것이 위편에서 어지러워져, 큰 형체조차도 올바르게 비추어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15)

사람의 마음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이를 마음의 활동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늘 언제나 생생하게 우리의 몸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여 맑은 것과 탁한 것을 구분짓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전락시킨다면 마음의 기능이라는 것은 단지 맑은 것과 탁한 것, 깨끗한 것과 지저분한 것 등을 구별하는 것뿐일 것이다. 또한 마음이 쟁반의 물이라고 할 때 설령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내 마음이며, 내 마음 속에 지저분하고 탁함이 끼게 되면 그것을 잘 살피고 또 배워서 깨끗하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이 움직이면 지저분하고 탁하게 될까봐를 걱정한다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산 속에서 정좌를 틀고 텅 빈 마음과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순자』 「해폐」에 나타난 순자의 마음이해는 마치 육조단경에서의 신수 계송에서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려는’ 신수의 마음 이해와 비슷하다.16) 실재로 있지 않는 허상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다.

『순자』의 「해폐」편은 마음수양이라는 좋은 주제를 가지고서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짓고 나쁜 것은 없애는 방법으로서의 마음 수양이 되어버려 그 본질을 흐려버렸다. 이러한 순자의 인성이해의 토대위에서 교육이란 좋은 마음은 장려하고, 나쁜 마음은 없애는 방식으로 진행되게 된다. 인간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그 본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순자는 이때의 교육은 ‘성인을 본받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본래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성인이 어떻게 출현했는가에 대한 논의는 함구한 채 성인은 예의와 법도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성인의 도를 따라 교육시켜야 한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성인과 보통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과 함께 나에게는 무언가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완전한 모습의 사람 즉, 어떠한 특정한 목적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교육론과 비교하여 볼 때도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

교육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성숙한 사람들이 미성숙자들을 이끌고 인도하여 보다 가치 있는 상태로 만들고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성숙한 사람들이 미성숙자들의 내면에 있는 잠재 가능성을 계발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이다.17)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교육학개론서에서도 교육의 정의를 미성숙자를 성숙자로 이끄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를 결핍하고 태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반드시 채워넣어야 할 무엇인 셈이다. 그런데 단 한번도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교육을 한다고 완전해질 수 있을까? 불완전에서 완전으로의 전회가 교육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각종 강력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도덕윤리교육의 부재, 인성의 부재를 외치며 인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때의 판단은 아마도 인간은 악한데, 이 악함을 교정하는 인성교육이 있었어야 했는데 못했다는 의미와 인간은 원래 선한데 그걸 까먹고 악하다는 착각으로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것을 바로잡은 인성교육이 있어야 했는데 못했다는 의미 등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성교육의 패러다임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를 말이다. 가령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선천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어 수정할 여지가 없지만,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교육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Ⅳ. 인성교육의 새로운 방법론 : 감정의 올바른 이해

앞서 논의한 바에 따르면 인성교육이라고 할 때에 인성은 본래 선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측면에 한해서는 교육은 선한 본성을 드러내는 방향이 될 것이고, 이와 반대로 인성이 본래 악한 것이라고 여기는 한해서는 교육은 그 본성을 억압하고 좋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계발하는 측면이 될 수밖에 없음을 논하였다. 그런데 만일 태어날 때부터 좋은 인성이 있고, 나쁜 인성이 따로 있다고 하게 되면 나쁜 인성이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좋은 인성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좋다’, ‘나쁘다’라는 용어를 ‘좋다’, ‘싫다’라고 바꾸어본다면 교육이라는 측면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1. 감정은 인성의 발현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좋은 것을 ‘좋다’라고 하고 싫은 것을 ‘싫다’라고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감정이다.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좋다’, ‘싫다’를 늘 알려주고 있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에 비해 불완전하고 못 믿을 것으로 치부되어 왔지만, 사실 감정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은 단 한 번도 싫은 것을 좋다라고 한 적이 없으며, 설령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표정이나 몸짓은 결코 그것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인성의 알맹이18)며,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한국철학사에 있어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변의 핵심 역시 감정에 관한 논의였으며, 감정은 어떻게 발하고 또 어떻게 여겨지는가에 대한 심도있는 토론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그 감정 역시도 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맹자는 “그 정에 따르면 선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른바 소위 말하는 선이다”19)라고 하여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는 감정 역시 선하다고 보았고, 인간본성의 선함을 논증하는데 있어서도 인간의 측은한 감정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었다. 또 『中庸』에서는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발하여 중절한 것을 정(情)이라고 한다”20)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이 발하게 되면 정으로 드러나게 됨을 말한 것으로 인성의 알맹이가 곧 감정임을 밝힌 것이다. 주자는 마음과 성과 정의 관계를 놓고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을 때를 미발(未發)이라고 하여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지만, 마음이 발한 것은 이발(已發)이라고 하여 인간의 감정이 그러하다고 보았다. 즉 미발지성(未發之性)과 이발지정(已發之情)을 인간의 마음이 통솔한다고 본 것이다.21) 퇴계는 주자의 논의를 한층 더 발전시켜 인간의 본성과 감정이 마음이 통솔한다고 보고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였는데, 이때 마음이 통(統)하게 되면 심통성정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불통(不統)하게 되면 심불통성정(心不統性情)이 된다고 보았다.

감정은 내가 느끼는 것이다. 감정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것이고, 내가 가장 먼저 아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은 내 마음 속에서 싹트는 알맹이로 거짓됨이 없다. 그런데 가령 어떤 잘못을 하고 숨기려고 할 경우에, 내 마음은 잘못한 행위를 들키지 않게 숨겨보자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할 수는 있지만 이때에도 우리의 감정은 불안함, 초조함, 두려움 등의 감정을 통해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틀림없이 알려주고 있다. 즉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 따로 있겠거니 생각하는 마음의 문제가 핵심인 셈이다. 그래서 맹자는 “마음이 주관하는 것은 생각이니 올바로 생각하면 얻고, 잘못 생각하면 잃는다”고 하였고, 주자와 퇴계는 심통성정 개념을 통해 심의 통, 불통을 말한 것이었다.

인성교육은 어떤 특정한 마음상태 혹은 결과를 성취하고자 하는데 초점을 두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특정한 마음상태, 가령 도덕적이고 선한 마음이 따로 있어서 그런 마음을 쟁취하기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인성교육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면, 교육은 곧 좋은 것, 나쁜 것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아는 것 혹은 그러한 결과를 얻는 것이 인성교육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는 것이다.22)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 그대로 발현하는 감정은 그 자체로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게 되는 다양한 요인들, 특히 잘못된 생각 등은 나쁜 감정이 따로 있다는 착각에 감정을 억누르고 인성교육을 마치 주입식으로 교육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쁘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고’가 있는 것이다. 가령 화나거나 슬프거나 하는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드러나는 감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배우라는 마음의 지시라는 것을 이해시켜주는 방식, 그것이 새로운 인성교육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23)

2. 감정의 자기이해를 위한 교육

교육은 무언가 미완성된 것을 완성된 것으로 채워주려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인성교육이라고 하면서 좋은 것(도덕, 윤리적으로 선한 것)과 나쁜 것(각종 범죄 등의 나쁜 행위)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런 인성교육이라면, 이미 우리가 충분히 해왔던 방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며, 이미 그것이 실패했음을 오늘날의 무한경쟁체제 속의 교육현실에서도 충분히 드러나는 바이다. 초중고의 교과과정은 대학입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대학교육은 취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사회에서의 교육은 더 많은 돈을, 명예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한 진단이 이러한 교육의 부조리를 정확히 짚어내지 않은 채 인성교육이라는 것으로 해결해보려 한다면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인성교육은 결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감정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얼른 가서 구하고자 하는 측은한 감정이 드는 것[측은지심], 그러한 즉발(卽發)하는 감정과 나를 마주 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인성교육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성교육은 감정의 올바른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하거나 못 믿을 것으로 치부되어왔고, 보다 이성적인 삶을 강요받아왔다. 그런데 이성은 감정과 다른 별개의 말이 아니다. 감정이 본래 이성의 알맹이였던 것이다.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폭력행위에 분개하고, 갑질하는 회사의 높은 사람의 행위에 분노하였던 것이 과연 감정에 치우친 행동이었을까. 감정이 먼저 저런 행위는 비이성적이라고 먼저 알려주었고, 그것이 분노라는 감정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나서 반성하고 뉘우치는 보육교사나 갑질하는 회사의 높은 사람의 행동을 보고 ‘좀 안됐다’, ‘이제 그만하면 됐네’라고 한편으로 측은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역시도 감정이 이성이라는 것을 바로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할 뿐이다. 선한 본성을 두고 교육을 한다면 바로 선한 본성에서 발한 감정이 알려주는 진실함을 올바로 이해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감정을 억압하는 방식의 교육에서 벗어나 감정의 진실함을 깨닫게 해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 인성교육을 하는 주체로서의 교사가 있고 교육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학생이 있는 구도가 아닌, 학생들 스스로가 느끼는 것을 생각해보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A라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하면 안 된다는 방식이 아니라, A라는 행위를 두고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게끔 하고, ‘나’는 그러한 행위를 두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솔직하게 얘기해보는 것으로부터 교육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는 훈련을 통해서 선한 본성의 나 자신을 마주 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우리 선조들은 『소학』에서 가장 먼저 마당에 물 뿌리고 쓸고 하는 등[灑掃應對]의 교육방식을 강조한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서 느끼는 바로부터 자기 자신을 마주 대하는 훈련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인성교육에서의 교육은 인간의 본성이 나쁘니 그것을 바로잡는 교정의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닌 나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는 방식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소학』의 체험학습처럼 인성교육이 단순히 윤리도덕 이론교육하는 기존의 잘못된 인성교육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회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올바로 생각하고 배우라고 알려주는 감정과 진실하게 마주 대하는 교육, 감정의 자기이해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인성교육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Ⅴ. 나가는 말

오늘날 강조되고 있는 인성교육은 단순히 충효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방식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과 함께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 속에서의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인성교육이 단순히 잘못된 사례를 중심으로 고쳐나가는 방식의 에티켓 교육이나 주입식 예의범절 교육이 된다면 그 이전에 잘못된 교육사례의 답습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의 인성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교정이다. 교육은 인간의 미성숙하기에 끊임없이 교정ㆍ교화해나가는 절차가 아니라 완전한 나를 깨닫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야만 한다. 역사 이래로 성현들의 말씀을 살펴보면, 완전한 인간과 그에 대한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해 왔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과를 바로잡으려는 행동주의 철학은 성과나 지표로서 말하려고 한다. 얼마만큼 투입된 양이 얼마만큼의 결과치가 나왔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보아도 결과를 잡고 행동을 고치려는 방식의 모든 일련의 시도들은 늘 실패하고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평화를 외치던 사람들이 전쟁광이었던 사실은 어쩌면 결과물이 잘 나오지 않으면 싸우려고 해서이지 않을까. 말이 본래 생긴 까닭은 서로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어 다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인성교육의 교육은 특정한 형태의 인간을 기계 찍듯 만들어내는 교육이 아니라 본래 선하고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 사유의 전회로만이 가능할 것이다. 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올바른 생각, 배움이 곧 인성교육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배우면 즐겁다’24)고 하여 교육에서 감정의 즐거움을 말하였고, 뒤이어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25)라고 하여 배움[學]과 생각[思]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또 맹자는 ‘생각하면 얻고 그렇지 않으면 잃는다’26)고 하여 그러한 배움은 곧 올바른 생각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혔다.

인성은 교육 가능하지만 이때의 교육은 결코 없던 인성을 채워 넣는 방식이 아닌 이미 완전하고 선한 나의 본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어떤 행동을 ‘하지마’라는 부정적 명령보다 ‘왜 하면 안 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이전에 내 감정이 그렇게 느끼고 말해주는 것에 귀 기울여 듣는 ‘감정의 자기이해’가 녹아들어 가는 인성교육이 된다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교육방식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 후속연구를 통해 더욱더 고찰되기를 기대해 본다.

Notes

1) 송민규 외, 「인성교육진흥법의 한계에 대한 철학적 분석」, 『교육사상연구』, 34-3 (2020), pp.66-67. 인성교육지진흥인성교육진흥법은 인성개념 이해에 따라 자체적 모순이 있으며, 법적 실효성측면에서도 과현 효력이 있는 법일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2) 플라톤, 『메논』, 이상인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p.45, Menon 70a, “제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가르쳐질 수는 없고, 수련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련에 의해서나 배움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사람들에게 생기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 것입니까?”

3)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인성교육진흥법」, 제2조(정의) (https://www.law.go.kr/법령/인성교육진흥법, 2022. 4. 1. 검색).

4)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수석 전문위원 임진대의 인성교육진흥법안 검토보고서(2014.11, 의안번호 10733))에 따르면, 제정안은 ‘인성교육’에 관한 정의규정을 통해 ‘인성’을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ㆍ공동체ㆍ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으로 보고 있을 뿐, 별도로 ‘인성’에 관한 정의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고 보았다. 인성과 교육이 결합(인성교육)되지 않은 용어로서 ‘인성’에 관한 사항이 언급되어 있고, 그동안 인성교육을 어렵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는 학문적, 사회적으로 합의된 인성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었다는 의견이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성에 관한 정의규정 마련이 필요한 측면이 있을 것이나, 인성의 개념이 학자마다 ‘인품’, ‘인격’, ‘인간성’, ‘사람됨’ 등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의를 내리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인성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4)

출처(연구)인성의 개념 정의
황응연(1992)환경에 대응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행동 및 태도, 동기, 경향성, 인생 과정들의 총합, 사람들에게 있어 시간과 상황에 걸쳐 지속되 는 독특한 구조이며, 인성은 어떠한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크게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
이근철(1996)좁게는 도덕성, 사회성 및 정서(감정)등을 의미, 넓게는 지ㆍ덕ㆍ체 또는 지ㆍ정ㆍ의를 모두 골고루 갖춘 전인성
이윤옥(1998)다른 사람애게 주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인상으로 성품, 기질, 개 성, 인격 등 가치개념의 의미를 내포
한국교육학회 (1998)사람의 마음의 바탕이 어떠하며, 사람된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는 개념으로 사람의 마음과 사람됨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
남궁달화 (1999)사람의 성품이며, 성품은 성질과 품격, 성질은 마음의 바탕이고 사람됨의 바탕을 가리키는 말
조난심(2004)인성은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는 성격이나 특질의 개념이 아니라, 의도적 교육이나 학습에 의해 습득하거나 변화가 가능한 인간의 성품을 지칭하는 것
조연순(2008)자신의 내면적 요구와 사회 환경적 필요를 지혜롭게 잘 조화시킴 으로써 세상에 유익함을 미치는 인간의 특성
현주 외(2009)보다 긍정적이고 건전한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위한 심리적, 행동적 특성
미 교육부 (2007, 2008)존중, 공정성, 보살핌 등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와 책임감, 신뢰, 시민성 등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개인 또는 집단의 정서적, 지적, 도덕적 자질은 물론 이러한 자질들이 친사회적 행동으로 발현되 는 것을 포함하는 것
Lickona & Davidson (2005)인성을 도덕적 인성과 행동적 인성으로 구분함. 도덕적 인성은 핵 심 윤리적 가치가 될 수 있는 정직, 정의와 같은 덕목을 의미하 며, 행동적 인성은 인내심, 용기와 같이 옳은 것을 행하지 않도록 유혹하는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내적인 강인함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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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성현, 「인성교육 개념의 재구조화」, 『제6회 청람교육포럼 및 제53차 KEDI 교육정책 포럼 발표문집』 (서울: 한국교육개발원, 2012) 인용.

5) 『孟子』, 「公孫丑上」 6,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6) 『孟子』, 「告子上」 7, “孟子曰 富歲子弟多賴, 凶歲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今夫麰麥 播種而耰之, 其地同, 樹之時又同, 浡然而生, 至於日至之時, 皆熟矣. 雖有不同, 則地有肥磽, 雨露之養, 人事之不齊也. 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與我同類者.”

7) 『荀子』, 「性惡」 5, “凡禮義者,是生於聖人之僞, 非故生於人之性也.”

8) 『荀子』, 「性惡」 5, “聖人積思慮, 習僞故, 以生禮義而起法度.”

9) 『荀子』, 「性惡」 1, “人之性惡,其善者僞也. 今人之性,生而有好利焉, 順是, 故爭奪生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順是, 故殘賊生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 有好聲色焉, 順是, 故淫亂生而禮義文理亡焉. 然則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而歸於暴. 故必將有師法之化禮義之道, 然後出於辭讓, 合於文理而歸於治. 用此觀之, 然則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10) 『荀子』, 「性惡」 13, “堯問於舜曰, 人情何如. 舜對曰, 人情甚不美, 又何問焉. 妻子具而孝衰於親, 嗜欲得而信衰於友, 爵祿盈而忠衰於君, 人之情乎. 人之情乎!甚不美, 又何問焉. 唯賢者爲不然.”

11) 『荀子』, 「正名」 1, “性之好惡喜怒哀樂謂之情. 情然而心爲之擇謂之慮. 心慮而能爲之動謂之僞.慮積焉. 能習焉而後成謂之僞.”

12) 『孟子』, 「告子上」 15,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13) 마음이 선을 취하고 악을 없애는 방식의 설명은 후에 왕양명의 심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왕양명의 핵심사상을 담고있는 사구결(四句訣)은 인간의 마음의 주된 기능이 선악을 구별하고 없애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음의 본체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의 작용 때문이다.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이다.(無善無惡是心之體 有善有惡是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14) 『荀子』, 「解蔽」 6, “人何以知道. 曰, 心. 心何以知. 曰, 虛壹而靜, 心未嘗不臧也. 然而有所謂虛, 心未嘗不滿也. 然而有所謂一, 心未嘗不動也,然而有所謂靜. 人生而有知, 知而有志,志也者,臧也, 然而有所謂虛, 不以所已臧害所將受謂之虛. 心生而有知, 知而有異,異也者, 同時兼知之, 同時兼知之,兩也. 然而有所謂一, 不以夫一害此一謂之壹.”

15) 『荀子』, 「解蔽」 8, “故人心譬如槃水, 正錯而勿動,則湛濁在下, 而淸明在上, 則足以見鬢眉而察理矣. 微風過之, 湛濁動乎下, 淸明亂於上, 則不可以得大形之正也.”

16) 『六祖檀經』,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17) 박철홍 외, 『현대교육학 개론』 (서울: 학지사, 2013), p.15.

18) 알맹이라는 말은 핵심을 의미하는데, 인간 본성이 발현되는 것을 감정이라고 보는 맹자 이하 한국철학적 사고 속에서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감정을 통해 인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알맹이로 표현하였다. 맹자가 측은한 감정이 드는 우리의 마음의 실마리를 따라 인간 본성의 선함을 알게 되는 성선 논증방식처럼 감정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알맹이인 것이다.

19) 『孟子』, 「告子上」 6, “孟子曰 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20) 『中庸』, 1章,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21) 『朱子語類』 卷98 “性是體, 情之用, 性情皆出于心, 故心能統之, 統如統兵之統, 言有以主之也(성은 체요 정은 용이며 성정은 모두 심에서 나오니, 심은 그것을 거느릴 수 있다. 통은 군사를 거느린다고 할 때의 그 통인데, 말하자면 주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22) 좋은 것, 나쁜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좋은 것은 챙기고 나쁜 것은 없애자는 주장이 교육이 된다면, 가장 적합한 형태의 교육은 아마 전쟁교육이 될 것이다. 좋은 편과 나쁜 편을 상정하고 무감정하게 싸우는 최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한경쟁체제의 교육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

23) 분노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은 나쁜 감정이 아니라 본래 선한 사람이 왜 이럴까라고 느낀 나의 감정 분노하고 노여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에 감정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가 아닌 ‘저럴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럴까, 한번 알아보자’라는 방식으로 분노표출이 아닌 이해를 위한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24) 『論語』, 「學而」 1,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25) 『論語』, 「爲政」 15,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26) 『孟子』, 「告子上」 15,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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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https://www.law.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