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중국은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로 대가족제를 통한 농경적 삶을 기본으로 하면서 종법적(宗法的)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해왔다. 이런 정황에서 한 집안은 모든 사회 더 나아가 국가의 축소판으로서 존재하였다. 이런 정황에서 유가는 가정 및 사회, 국가의 안정과 질서 및 화해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효(孝)를 강조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집안과 나라가 일체라는 이른바 가국일체(家國一體) 혹은 가국동구(家國同構)라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효와 충(忠)을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윤리적 덕목 가운데 도(道)라는 글자를 사용하여 그 행동거지 및 마음가짐을 규정한 대표적인 것은 바로 효다. 즉 ‘효도(孝道)’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효가 갖는 의미를 특화하고 있다. 한대(漢代) 이후 유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한 이후 효 관념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덕목으로서 황제에서부터 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하였다. 이런 점에서 불효자로 낙인찍히면 사회적 운신 폭이 매우 좁아졌고, 이런 정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흔히 도교는 ‘절세유물(絶世遺物)’을 강조한다고 여기지만 도교에서도 효는 물론 충까지도 매우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태평경(太平經)』과 『포박자(抱朴子)』(내편) 「대속(對俗)」 등에서는 몇 군데 효에 관한 언급이 출현하는데, 그 함의는 전통 유가 윤리와 일치하는 것이 많다. 『태평경』에서는 “자식은 마땅히 효도하고 부모의 가르침을 받들면서 골육지절(骨肉肢節)을 완전하게 잘 보존하라.”1)고 한다. 갈홍(葛洪)의 『포박자』에서도 충효화순인신(忠孝和順仁信)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장생의 요건으로 제시하면서 충효를 도교 차원에서 용인하는 것을 볼 수 있다.2)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에서는 충효와 우애를 통해 자기를 바로 하고 다른 사람을 교화시킬 것을 말하기도 한다.3) 『태상대도옥청경(太上大道玉淸經)』에서는 천존(天尊)이 종신토록 받들면서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열 가지[十戒]’를 말하는데, 맨 첫 번째 경계해야 할 것으로 부모와 사장(師長)에게 위려(違戾)하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는 부모와 사장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가고 만겁(萬劫)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비록 사람 가운데에서 살더라도 어려서 고아가 되고 타인의 능자(凌刺)를 받아 항상 비천하게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4) 『문창효경(文昌孝經)』에서는 “모든 행동에 오직 효가 근원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5)라는 것을 말한다. 이상 본 바와 같이 효도관은 유가의 효도관과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도교는 유가와 달리 부모 이외에 사장에게까지 효도할 것을 요구하고 아울러 효도를 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는 현실적 삶에 대한 고난과 불이익을 강조하는 점은 차이가 있다.
도교가 지향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불로장생하는 신선 되기 혹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신선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 갈홍(葛洪)이 “신선 되기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충효(忠孝), 화순(和順), 인신(仁信)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덕행이 닦이지 않고서 다만 방술을 구하면 모두 장생(長生)을 얻을 수 없다.”6)라는 것이 그것이다. 충효, 화순, 인신을 강조하는 것은 유가와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신선 되기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유가에서 신선을 부정하는 것과 차별화된 사유에 속한다. 부모에게 효도를 비롯하여 자신의 덕행을 닦는 것을 통해 성선(成仙)이 가능하다는 것은 일석이조(一石二鳥)에 해당하는 매우 매력적인 사유라고 본다.
유교의 충효관에 관한 연구는 『효경』에 나타난 충효관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매우 많다.7) 특히 유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조가 「삼강오륜행실도(三綱五倫行實圖)」와 같은 텍스트를 통해 효와 충을 강조한 점은 오늘날 우리 학계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세속에서의 인간관계망에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행동거지를 잊어버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다양한 사물과의 관계를 끊는 것[絶世遺物]’으로 여겨진 도교의 충효관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충효라는 관념이 삼강오륜으로 상징되는 유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본고에서 본 것처럼 도교의 경전에도 충효관을 강조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8) 이런 점에서 유교의 충효관과 본고에서 거론한 도교 경전의 충효관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규명하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송원(宋元) 이후 유·석·도(儒·釋[佛]·道) 삼가(三家)에는 ‘효도를 권하는 책[勸孝書]’이 등장하는데, 도교 효도관은 도교 종파에 따라 다른 점을 보인다. 효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경우도 있고 효를 충과 함께 중시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도교를 ‘절세유물’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정명충효도(淨明忠孝道)’의 효도관 및 충효관은 유가의 충효관의 영향 관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도교의 효도관과 충효관을 보여준다.9) 본고는 이에 『문창효경(文昌孝經)』과 『정명충효전서(淨明忠孝全書)』에 나타난 충효관을 중심으로 하여 도교가 지향하는 충효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문창효경(文昌孝經)』에 나타난 충효관
송대 후기 도교의 권효서(勸孝書)에 속하는 『문창효경』은 텍스트 이름 자체에서 보여주듯 도교의 효도관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문창효경』에서는 매우 다양한 효도관을 전개하는데, 첫머리에 해당하는 「개경계(開經啟)」에서는 인간이 재난의 화복(禍福)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효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여 유가의 효도관과 다른 점을 말한다.
넓고 광활하면서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신천[紫宸天]’이여, 향기가 가득한 보배로운 華筵이여. 문명의 빛이 찬란한 기묘한 도여, 대도[大洞]를 體悟한 인물들이 신선 반열에 자리하였다. 인간 자손들의 은택을 진흥하는 것이 매우 중하니, 인간의 재난과 화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효도로부터 개시해야 한다.10)
‘자신천(紫宸天)’은 도교의 천계 이름으로 천신상제(天神上帝)가 거처하는 곳이고, ‘신(宸)’은 북극성이 있는 곳인데 후대에 제왕이 있는 곳으로 비유된다. 인간 자손들의 은택을 진흥하는 것이 매우 중하다고 하면서 인간이 재난 화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효도를 실천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은 윤리도덕적 차원 및 정치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유가의 효도관과 그 결을 달리한다.
『문창효경』에서 말하는 효의 구체적인 것은 「변효장(辨孝章)」에서 말한 효도관이다. ‘변효(辨孝)’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효가 무엇인지를 분변하되 구체적으로 ‘지극한 효[至孝]가 무엇인지’, ‘제대로 된 효가 아닌 것은 무엇인지’, ‘효를 하면 어떤 공효성이 있는지’ 하는 점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규명하고 있다.
진군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가르침을 널리 펴서 대중에게 보이노라. 부모가 계시는데 봉양하지 않고,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부모의 복이 연장되지 않으리라 … 부모가 타향에서 돌아가셨는데 해골을 거두지 않으면 ‘크게 불효하는 것[大不孝]’이 된다.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衣食만을 봉양하면 효가 되지 못하고, 부모님 심지를 봉양해야 바야흐로 ‘지극한 효[至孝]’가 된다. 살아있을 때 봉양하지 않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효를 다하는 것은 ‘아직 효가 되기 족하지 않다[未足爲孝]’. 살아계실 때 이미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때도 효를 다하는 것이라야 바야흐로 ‘지극한 효[至孝]’가 된다.11)
효에 관해 ‘크게 불효하는 것[大不孝]’, ‘지극한 효[至孝]’, ‘아직 효가 되기 족하지 않다[未足爲孝]’라는 세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는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지극한 효’라고 규정하는 내용이다. ‘지극한 효’라는 용어에는 상대적으로 지극하지 못한 효, 지극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효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담겨 있다. 이런 점을 크게 ‘아직 효가 되기 족하지 않은 것[未足爲孝]’ 및 ‘크게 불효하는 것[大不孝]’이란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지극한 효[至孝]’의 내용으로 말해지는 ‘살아계실 때 이미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때도 효를 다하는 것’과 ‘의식(衣食)만을 봉양하면 효가 되지 못하고, 부모님 심지를 봉양하는 것’이라 효도관은 유가에서 제시한 효도관과 일치한다. 다만 『문창효경』에서는 이 같은 효도관을 단순 부모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정황 및 인물과 사물에 적용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에게 나는 진실로 마땅히 효도해야 하고, 후모나 서모도 내 또한 마땅히 효도해야 한다. 어머니가 혹 과오를 범해 아버지에게 黜陟당하거나 再嫁하더라도 나를 낳아주신 노고를 생각하여 또한 등지지 말아야 한다.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 고아가 되어 고생할 때 나는 길러준 양부모님을 또한 잊으면 안 되는데, 하물며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야 말할 것도 없다. 나를 낳아준 同母 형제를 나는 마땅히 사랑해야 하고 前母가 낳은 형제도 나 또한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 親生 누이도 내가 진실로 和敬하고 同壻에게도 나는 마땅히 和敬해야 한다. 내가 낳은 자식도 나는 마땅히 보살피고 전처 소생이 남긴 자식도 내가 마땅히 보살펴야 한다. 모든 선행이란 집안사람들을 잘 닦는 것에 있으니 효도하는 마음으로 미루어 나가지 않은 것이 없다. 이같이 효를 다해야 비로소 능히 효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로소 모든 행동에서 효가 그 근원이 됨을 알겠다.12)
이 글에서 ‘효가 모든 행동[百行]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효경(孝經)』에서 말하는 효도관과 동일하다. 이런 점을 보면 『문창효경』은 『효경』에서 말하는 효도관의 실질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면서 도교 차원에서의 효도에 관한 사유를 보완한 것에 속한다. 『문창효경』에서 말하고 있는 효도 해야 하는 대상을 보자. 일단 친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 후모, 서모, 양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말한다. 아울러 이 같은 효도하는 마음을 가족 구성원들과 화경(和敬)하는 차원으로까지 연장한다. 예를 들면 동모 형제, 전모 형제, 친생 누이, 동서, 내가 낳은 자식, 전처가 낳은 자식 등에게 화경하는 마음을 갖고 보살피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구성체들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미루어 적용하라는 것은 유가가 혈연의 친소(親疏) 관계를 따지면서 방법론적으로 차별화하는 사유와 다르다. 특히 『문창효경』에서 어머니가 혹 과오를 범해 아버지에게 출척당하거나 재가하더라도 나를 낳아주신 노고를 생각하여 등지지 말아야 한다는 사유는 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을 말하는 유가와 다른 효도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부모 이외에 여타 가족 구성원들에게 효도하라는 사유는 보다 구체적으로 ‘지극한 선[至善]’에 해당하는 ‘진정한 효도’가 무엇이고 ‘진정한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는 효도[於孝有虧]’가 무엇인지 하는 구분으로 전개된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叔伯을 공경하지 않고 祖曾을 공경하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虧]’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姻婭에게 불화하고 鄉黨에서 화목하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君上에 충성하지 않고, 師友을 믿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人民을 사랑하지 않고 만물의 생명을 가엽게 여기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天地를 공경하지 않고 ‘해·달·별[三光]’을 공경하지 않고 天地神明을 공경하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聖賢을 공경하지 않고 邪佞한 이를 멀리하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財色을 망령되이 탐하고 性命을 돌보지 않고 잘못을 알고서도 고치지 않고, 선한 것을 보고 행하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집안의) 奸淫하고 毒害한 부녀가 사람의 명성과 절조를 파괴하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힘써 명예와 절조를 이루게 해야 효도에서 큰 것이 된다. 비록 여러 가지 선행을 봉행하더라도 우리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끝내 ‘작은 선[小善]’이 될 뿐이다. 각종 선행을 하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지극한 선[至善]’이 되는 것이다.13)
올바른 효, 제대로 된 효를 실천해야 하는 대상을 보면 숙백(叔伯), 조증(祖曾), 인아(姻婭), 향당(鄉黨), 군상(君上), 사우(師友), 인민, 만물의 생명, 천지신명, 성현 등이다. 이런 효도관은 앞서 말한 가족 구성체에서 넘어 사회구성체 더 나아가서는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에까지 효도를 강조하는 것에 해당한다. 다양한 대상에 대한 효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결론은 여러 가지 선행을 봉행하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끝내 ‘작은 선[小善]’이라 규정하는 것은 그만큼 부모에 대한 효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人民을 사랑하지 않고 만물의 생명을 가엽게 여기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天地를 공경하지 않고 ‘해·달·별[三光]’을 공경하지 않고 천지신명을 공경하지 않으면 효도에 모자란 점이 있다.”는 유가의 인간중심주의 효도관과 차별화된 도교의 공존의 논리와 생태학적 효도관을 잘 보여준다. 효도의 마음을 인민 사랑과 만물의 생명을 가엽게 여긴다는 것은 맹자가 “군자는 동식물을 대하는 데에 애호하지만 인자하게 대하지 않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인자하게 대하지만 친근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친족을 친근하게 대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백성들을 인자하게 대하고, 백성들을 인자하게 대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있고 동식물을 사랑한다.”14)라고 말한 방법적 차별에 근간한 인(仁)의 실천론과 차별화된 발언에 속한다. 즉 『문창효경』에서는 백성과 동식물 사랑에서 유가가 강조하는 인(仁)보다는 효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는 특징을 보인다. 유학에서 최상의 인간을 말할 때 성인(聖人)을 거론하지만 장자의 경우는 ‘지인(至人)’을 거론한다.15) 『문창효경』에서 ‘지효(至孝)’ 및 ‘지선(至善)’ 등과 같이 ‘지(至)’자를 붙인 것에는 그만큼 ‘올바른 효도’, ‘제대로 된 효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조점과 지극한 것 혹은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감겨 있다.
결론적으로 효가 갖는 무한 공효성을 일신(一身)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지에까지 적용하되 궁극적으로는 이 같은 효도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효의 도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근본한 것이기에 억지로 노력하여 기다리는 것은 없다. 배우지 않고서도 능하고,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위하면 자연스럽게 효도에 합치하게 된다. 책을 읽어 도리를 밝히고, 양심을 사용하여 사랑을 통솔하고, 양심을 사용하여 경을 통솔하면 효도는 저절로 온전하게 된다. 어리석은 백성과 어리석은 속인이라도 조탁하지 않고 乖戾하는 것이 없으면 효도의 이치는 자연스럽게 있게 된다. 만일 (그들로 하여금) 영명한 근성을 갖추게 하고, 사랑을 알아 사랑을 통솔하게 하고, 공경을 알아 공경을 통솔하게 하면 효행을 미루어 갈 수 있다 … 효로 일신을 다스리면 일신이 이에 선다. 효로 일가를 다스리면 일가는 이에 순응한다. 효로 일국을 다스리면 일국은 이에 인자하게 된다. 효로 천하를 다스리면 이에 천하는 태평하게 된다. 효로 천지를 섬기면 천지는 이에 완성된다. (이처럼 효도는) 상하에 통하며 귀하고 천한 것을 나누지 않는다.16)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효의 도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 본성에 근본한 것이기에 억지로 노력하여 기다리는 것은 없다. 배우지 않고서도 능하고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위하면 자연스럽게 효도에 합치하게 된다.”라는 이른바 효도에 관한 자연본성론적 사유다. 효를 행한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갖고 태어나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후천적 규율이 아니라는 것은 유가에서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효도의 이치’를 깨닫고, 이에 당위적 차원에서 효도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차별화된 사유다.
효가 제대로 실행되었을 때 일신의 경우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고, 일가의 경우 가족 구성체들이 순응하는 삶이 가능해지고, 일국을 다스리면 일국의 전체 백성이 인자하게 되고, 천하를 다스리면 천하가 태평하게 되고, 더 나아가 천지에 적용하면 천지가 완성된다고 하는 것은 효가 갖는 공효성의 무한 확장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같은 효가 갖는 무한한 공효성은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이 완성된 이후에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한다는 사유 및 『중용(中庸)』에서 중화(中和) 상태를 인간 이외 천지 만물에까지 미루어 나가면 천지가 제자리에서 각각 제대로 된 작용을 하고 아울러 그 결과로서 만물이 길러진다17)라는 사유와 비교되는 사유에 속한다. 이처럼 천지에까지 효의 무한 공효성이 적용된다는 사유는 도교 효도관의 특징에 해당한다. 아울러 ‘귀하고 천한 것을 나누지 않는다.’는 사유는 『중용』 20장에서 귀천과 친소를 구분하는 차원에서 예를 규정하고 그 차별상에 입각해 효도를 실천하는 것18)과 차별화된다.
이밖에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유를 통해 효도하는 사람과 불효하는 사람이 각각 어떤 차별화된 삶을 살게 되는가 하는 점을 규정하고 있다.
진군이 말하기를, 나는 오늘 대도에 근거하여 교화를 시행하고 사람된 도리를 대중에서 고하고자 한다. 불효하는 자녀는 온갖 선행을 한다고 해도 이전의 죄과를 면제받기 어렵다. 그러나 지극한 효를 행하는 사람들은 가령 만 가지 怯難을 만나더라도 掃除할 수 있다. 불효하는 자녀는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雷霆이 노하게 치고 鬼魔가 侵襲하고 災禍가침범한다. 효자 집안은 귀신이 보호하고 복록이 내린다. 오직 효라야 上天에 감통할 수 있다. 오직 효라야 대지에 배향할 수 있다. 오직 효라야 인간을 감화시킬 수 있다. 이에 天地人 三才가 化成하게 된다.19)
효를 행했을 때와 행하지 않았을 때의 상반되는 정황을 말하고 있는 이 글의 핵심은 결국 효의 실천을 통해 귀신에게 보호받고 복록을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상천(上天)에 감통하고 대지에 배향하고 인간을 감화시킬 수 있게 되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화성(化成)하게 된다는 것이다. 천지인 삼재가 화성한다는 이 같은 천인감응 사상은 유가의 효도관과 차별화된다. 이 같은 천지감응에 의한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신은 효를 공경하고 오직 천은 효를 사랑하고, 오직 땅은 효를 이룬다. 이에 효를 다하면 물난리와 불난리의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兵刃의 刑戮, 질병의 凶災, 독약과 독충, 寃家가 謀害하는 등 일체의 액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곳곳마다 신령이 도움을 준다. 효가 이르는 곳에는 지옥의 고난처에서 거듭 구원을 받고 元祖와 宗親이 모두 해탈을 얻는다. 死生六道의 餓鬼와 窮鬼도 모두 超升을 얻게 되고, 부모님의 심각한 병도 즉시 낳게 된다. 36天이 세상을 제도하는 것을 쾌락으로 여기고 72福地 속에서 혼령이 소요자재한다. 그러므로 斗星 가운데 孝弟王이 있고 하계에서는 효자가 있다 … 효를 도로 삼으면 그 공덕이 깊고 넓고 일체에 두루 미친다.20)
효를 통해 천지신명과 감응한다는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한 이런 사유에는 기본적으로 천인감응의 사상이 농후하다. 이처럼 천인감응 사상에 입각하여 효의 실천을 통해 천지와 귀신과 감응하고 더 나아가 신령이 도움을 받아 자연재해에 피해당하지 않고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 같은 논지는 유가와 다른 도교 효도관이다. “효가 이르는 곳에는 지옥의 고난처에서 거듭 구원을 받고 元祖와 宗親이 모두 해탈을 얻는다. 死生六道의 餓鬼와 窮鬼도 모두 超升을 얻게 되고, 부모님의 심각한 병도 즉시 낳게 된다.”는 사유는 효도를 통해 조상이나 부모님들이 긍정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 효도하라는 것보다 훨씬 장점을 지닌다.
『효경』과 비교할 때 『문창효경』의 최대 특징은 신명(神明)이 감독하는 입장에서 효행의 근거를 밝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효경』에도 귀신을 공경하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면 『효경』 「성치장(聖治章)」에서 “주공이 后稷을 郊祀함으로써 配天하고 문왕을 명당에 종사한다.”21)라는 것과 『효경』 「감응장(感應章)」에서 “종묘에서 공경을 다하니 귀신이 나타났다.”22)라는 것을 통해 효와 연계하여 천지귀신(天地鬼神)을 언급한 것이 그것이다. 다만 『효경』에서는 귀신을 제사하는 것을 효로 삼는 점에 비해 『문창효경』에서는 인간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이 모두 천지신명의 감찰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 차이가 있다. 특히 개인이 불효를 하면 천지신명의 징벌을 받고 반대로 효도를 힘써 행하면 천지신명의 보호를 받는다는 논지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도관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급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총괄하면 『문창효경』에서 제기한 효에 대한 인식이나 주된 내용은 유가 효도관과 같은 점이 많다. 하지만 천인감응 사상을 통해 효도의 실천 여부에 따라 신우귀징(神佑鬼懲)한다는 사유를 제시한 것은 도교 효도관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문창효경』은 송원(宋元) 이후 유·석·도(儒·釋[佛]·道) 삼가(三家)의 ‘효도를 권하는 책[勸孝書]’ 중에서 비교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민중의 효도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Ⅲ. 『정명충효전서(淨明忠孝全書)』에 나타난 충효관
『문창효경』이 주로 효에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면 『정명충효전서』에서는 효 이외에 충을 동시에 강조한다는 점에 차별상이 있다. 『정명충효전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선도(仙道)를 배우는 것 및 승선(昇仙)의 요건으로 ‘세속에서의 인간관계망에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행동거지를 잊어버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다양한 사물과의 관계를 끊는 것[絶世遺物]’이라 이해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충효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정명충효전서』에서 효와 더불어 충을 강조할 경우 유가의 사유를 빌려 논지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 충효는 신자(臣子)의 양지양능(良志良能)으로서 사람마다 이 천리를 구비하고 있지 외사(外事)로 나뉜 것은 아니라고 한다.23) 최종적으로는 충효는 백행의 우선에 해당한다24)고 하여 충까지도 백행의 근본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럼 먼조 ‘정명과 충효’라는 용어에 대해 『정명충효전서』에서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한다.
선생이 말하기를, 무엇을 일러 淨이라고 하는가? 바로 사물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明이라고 하는가? 바로 사물에 접촉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에 오염되고 사물에 접촉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충효는 저절로 얻어진다.25)
이런 발언에서 주목할 것은 오물(汚物)과 촉물(觸物) 상태가 아니게 되면 충효는 저절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충효를 실천하는 핵심은 바로 정명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명과 충효에 대해 정명은 정심(正心)과 성의(誠意)이고 충효는 강상을 부식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26) 정심과 성의를 정명으로 규정하는 것을 유가 사유를 빌면 수기(修己) 차원에서 말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충효가 강상을 부식한다고 여기는 것은 충효란 이 같은 정심을 기준으로 한 대사회적 실천행위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대충(大忠)은 어느 한 사물도 속이지 않는 것이고, 대효(大孝)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27) 대효에 대해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앞서 『문창효경』에서 본 효의 확장성과 통하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도교에서의 효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충은 군주에 충성하는 것으로, 심군(心君)이 만신(萬身)의 주재가 되기 때문에 일념(一念)이라도 마음을 속이는 것이라면 ‘불충한 것’이라고 규정하여28) 마음 씀씀이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정명과 충효의 관계를 규정한 다음 「정명대도설(淨明大道說): 호화속술(胡化俗述)」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선 정명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형이상학 차원에서 규정하고, 이 같은 정명의 원리에 입각하여 사람이라면 마땅히 충효를 통해 군친(君親)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淨明은 無形의 대도로 先天의 宗本이다. 위에 있어서는 無上淸虛한 것이 되고, 하늘에서는 中黃八極이 되고, 인간에게는 丹元絳宮이 된다. 이 세 가지는 함께 나왔지만 이름이 다른 것으로, 같은 것을 일러 玄이라고 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衆妙의 문이다. 이 이치를 밝히는 것이 정명이다. 맑으면 깨끗하고, 비면 밝다. 無上淸虛한 경지를 정명이라고 한다. 중황팔극은 天心이다. 단원강궁은 人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중황팔극을 세워 무상의 근본에게 보상한다. 사람은 마땅히 충효하여 군친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29)
이 글 논지의 기본 형식은 『노자』 1장에서 말하는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을 차용한 글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명이 무형의 대도와 선천의 종본이란 이해도 노자가 도를 말할 때 『노자』 41장에서 ‘大常無形’이라 한 것과 『노자』 25장에서 ‘先天地生’을 말한 것과 유사성을 띤다. 다만 이 같은 정명을 ‘무상청허’, ‘중황팔극’, ‘단원강궁’이란 도교 색채를 띤 내용으로 풀이하는 것은 다른 점이 있다.
군친(君親)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근거를 무상청허의 경지를 정명, 중황팔극을 천심, 단원강궁을 인심이라고 층차(層次)를 논하면서 군친에 대한 충효를 강조하는 것은 『정명충효전서』의 충효관의 핵심에 속한다. 그럼 『정명충효전서』에서 말하는 충효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자.
충효는 대도의 근본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 孝弟라는 것은 그 인을 행하는 근본이 아니겠는가? 근본에 힘쓰지 않고 수련하는 자는 太匠이 재료가 없는 것과 같으니 비록 기교가 있다 해도 무엇을 이루겠는가? 오직 大舜과 比干은 수련을 하지 않고 힘써 충효를 했고, 도를 구하지 않았지만 도는 스스로 갖추어졌다. 인간 아래로 보면 豺狼도 父子가 있고 螻蟻도 君臣이 있다. 사물들이 또한 충효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法子[불도를 좇아 법에 의하여 양성된 사람]도 더 말할 것도 없다.30)
‘충효가 대도의 근본’이란 말은 정명충효도에서 충효가 갖는 의미를 선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랑(豺狼)과 누의(螻蟻)의 효와 충을 거론하는 것에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충효를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담겨 있다. 이글에서 충효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논어』 「학이(學而)」에서 말하는 ‘君子務本’의 사유와 효제가 인을 행하는 근본31)이라는 점을 차용하고 있다. 수련을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무본’에 해당하는 효제를 충실하게 행하라는 것은 유가의 효제관을 도교의 수련의 전제 조건으로 운용한 것에 해당한다.
이처럼 『정명충효전서』에서는 정명이 무엇이고 아울러 충효를 실천하는 방법론에 대해 『노자』 문구를 운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가 경전[『논어』]의 문구를 운용하여 유가와 도가의 묘합적 사유를 보여준다. 정명의 대도를 설명하면서 충효의 실천을 강조하는 다음 문장에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노자 사유를 응용한 것을 보자.
정명의 대도는 같은 이치이고 같은 근원이지만 형이 같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 문을 말미암아 나오지 않고 어떤 것이 이 도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근원은 같지만 형이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노자』 42장]’이다. 만물 가운데에 오직 인간이 가장 귀한데, 충하지 않고 효하지 않으면 豺狼이나 螻蟻만도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명을 할 수 없는 자는 蜣蜋이 飲露하는 것만도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물들도 충효의 大道體를 얻는데 법자가 어찌 모르겠는가?32)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각각 형태적 측면에서는 다르다. 하지만 모두 도에 의해 각개 사물의 존재한다는 그 근거가 도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도를 동일한 근원으로 갖고 있지만 인간이 오직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인간이 충과 효를 실천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유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을 충효를 통해 규정한 것으로, 그만큼 충효를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적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음 노자와 유가의 사유를 동시에 응용하여 충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보자.
나는 太上을 받드니, 가령 충효 대도의 문은 ‘심히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우니’ 근면하게 행하여 넓혀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參禪하고 問道하는 것이 入山하여 煉形하는 것에 있지 않으니, 귀한 것은 충효라는 근본을 세우는 것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정명하면 四美가 모두 갖추어져 정신이 점차로 신령함에 통하게 되어 수련을 쓰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도를 이룰 것이다. 믿을 만하구나 이 말이여, 곧바로 정명이 이르리라.33)
충효 대도의 문은 ‘심히 알기 쉽고 행하기 쉽다.’라는 것은 『노자』 70장34)을 차용한 것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논어』 「위령공」에 나오는 말35)을 차용한 것이다. 노자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결국 충효는 현실적 인간의 삶에서 인간의 자각적 노력 및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참선하고 문도하는 것이 입산하여 연형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사는 현실적 삶 속에서 요구되는 충효를 도외시한 상태에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신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충효라는 근본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마음의 정명을 통해 충효를 실천하면 정신은 점차로 신령함에 통하게 되고 이에 특별한 수련을 쓰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도를 이루게 된다는 것은 도를 이루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법자(法子)들에게 인간의 현실적 삶에서 충효를 실천하는 것이 먼저 우선시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유가와 도가의 사유를 통해 충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효도를 통해 하늘을 감동시키고 천심이 그것을 인가해야 진정한 효도가 완성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으로서 그 친한 이를 섬기는 데 스스로 그 힘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름지기 일념으로 효도하여 부모 심중에 인가를 받을 수 있으면 천심도 인가할 것이다. 이와 같아야 효도가 하늘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36)
자식이 아무리 자신이 전심전력으로 효도를 했다 해도 그것은 완벽하게 효도가 행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장치로서 부모의 인가를 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즉 효는 나 혼자서 행하는 것이 아닌 부모와 상호 간의 참된 교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식이 효도 행위에 대해 부모의 인가를 받을 것을 강조하는 것은 부모의 인가를 받아야 천인이 감응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식, 부모, 천심이 일체화되는 것을 강조하는 효도관은 유가의 효도관과 차별화된다. 이글에서 도교적 색채를 띠는 가장 중요한 것은 충효를 실천하려면 입산을 통해 현실을 떠나거나 현실에서 추구하는 일상적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한다.
또 말하기를, 上士는 반드시 入山하고, 인사를 끊고, 처를 버리고, 閒曠에 들어가고, 榮華를 버리는 것을 服煉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그 심성을 복련하여 마음을 밝게 하고 성에 통달하여 효제가 덜어지지 않아야 하니, 山澤의 파리한 癯童者와 다르다. 충효의 도는 반드시 長生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생의 성은 온전히 보존된다. 죽어서 어둡지 않고 신선 반열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일러 장생이라고 한다 … 불충과 불효하게 됨으로써 그 국가가 어지러워지고 국가가 망하게 되면 몸을 용납할 수 없다. 이에 假名으로 산에 들어가 도를 배우는 것은 廈屋을 버리고 炎火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들은 보지 않았는가? 백성이 불충하면 하늘이 苛斂誅求하는 신하를 낳고, 자식이 불효하면 부인이 집안을 망하게 하는 자손을 낳는다는 것을.37)
‘상사(上士)’라는 조건을 달면서 바람직한 충효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이 문장에서 핵심은 입산하여 세상사의 모든 것과 단절하면서 성선(成仙) 혹은 승선(昇仙)을 추구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입산하여 신선이 되는 도를 배운다는 것이 바람직한 장생의 도를 깨닫고 및 승선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도교가 현실의 인간관계를 떠난 종교가 아님을 보여준다. 농경사회의 종법제(宗法制)를 중심으로 한 가국동구(家國同構), 가국일체(家國一體)라는 사유 틀에서 볼 때 도교도 예외 없이 가정 구성체 간의 화목과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 신민의 군주에 대한 충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충효를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망하게 된다는 것과 집안이 망하는 결과가 야기된다는 것은 그만큼 충과 효가 가정과 국가를 유지하는 골간이 됨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도교가 추구하는 가장 핵심인 장생에 관해서도 충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충효한다고 장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효하는 그 자체에 장생의 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은 도교에서 추구하는 장생과 관련된 충효의 공효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명충효전서』에서는 상사, 중사, 하사를 구분하여 효를 실천하는 방법을 기술하기도 하는데,38) 이런 점은 노자가 도를 체득한 경지와 관련하여 상사, 중사, 하사를 구분하여 말하는 방식39)과 유사하다. 다만 정황에 따라 제대로 된 충효를 실천하는 것이 역사적 사례를 들어 쉽지 않음을 말하면서 권변(權變)에 능통해야 함을 강조한다.40) 효에 대해서는 신생(申生)을 거론하는데, 신생이 팽형(烹刑)을 기다리면서 어머니에게 공경함을 이룬 것은 효이지만 유독 대순(大舜)을 효자로 일컬는 것은 순이 부모[瞽叟]에게 고하지 않고 결혼하여 부모를 자애롭지 못한 것에 빠지지 않게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올바른 효도를 이룬 것을 말한다. 아울러 충에 대해서는 미자(微子)가 은을 떠나 종사(宗祀)를 보존한 것은 충이지만 참된 충을 거론할 때 비간을 일컬는 것은 비간은 신하의 대절(大節)을 온전히 했었다는 점에서 올바른 충이라는 것이다.41)
이처럼 『정명충효전서』에서 ‘절세유물(絶世遺物)’하는 것과 입산학도(入山學道)하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승선(昇仙)의 조건과 장생을 추구하는 것에 충효 실천을 관계하여 이해하는 사유는 도교 충효관의 핵심에 해당한다.
Ⅴ. 나오는 말
이상 도교의 효도관 및 충효관을 『문창효경』과 『정명충효전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주대(周代) 이후 종법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틀로서 유가의 효와 충이 강조되고, 아울러 유가사상이 중국 송대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황에서 현실적 삶에서 유가와 공존하려면 불교와 도교도 유가의 효도관과 충효관을 받아들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이상 본 바와 같이 도교의 효도관은 큰 틀에서는 유가의 효도관과 충효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특징을 드러내는 효도관 및 충효관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효의 중요성은 출가(出家)를 강조하면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단절을 강조하는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같은 텍스트를 통해 효도할 것을 강조한 것은 이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장(老莊)도 효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六親[부모, 형제, 부부]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면 효도하라는 것과 자애롭게 대하라는 말이 있게 된다. 국가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있게 된다.”42)라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유는 효와 자애로움 및 충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 가족 구성체 간의 효와 자애 및 국가 차원에서 충을 강조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근본 원인을 육친 간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한 것과 국가 혼란에서 찾은 것이다. 만약 육친 간의 관계가 조화롭고 화목하다면 효도와 자애로움이라는 용어를 통해 상호 관계의 원만함을 모색할 필요가 없고 아울러 국가가 안정을 이루고 있는 경우라면 충신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노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효자(孝慈) 및 충신(忠臣)이란 용어가 만들어진 다음에 당위적으로 행위 할 것을 요구하는 강제성이 갖는 문제점도 지적하는 것이다. 장자는 탕(蕩)이 질문한 인(仁)에 대한 답변에서 “최고의 仁은 친함이 없습니다[至仁無親].”라는 것을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무릇 孝悌와 仁義 및 忠信과 貞廉 따위의 가르침은 모두 스스로 억지로 힘쓰게 해서 본래의 참다운 덕을 부리는 것인지라 족히 존중할 만한 것이 아니다.”43)라고 하여 이런 점을 입증하고 있다.
불교에 비해 현실의 가족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도교의 경우 효도관에서는 불교보다 효와 충을 수용하는 측면에서 탄력성이 있다. 이런 점은 특히 도교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도교가 추구하는 승선(昇仙)이나 장생(長生)이 ‘세속에서의 인간관계망에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행동거지를 잊어버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다양한 사물과의 관계를 끊는 것[絶世遺物]’에서 출발한다고 규정하면 효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 충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본고에서 본 바와 같이 도교가 절세유물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충효를 행할 것을 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유가의 효도관과 대비하여 본 도교 효도관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도교가 추구하는 장수(長壽)하면서 성선(成仙)하는 것을 효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짓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장수성선(長壽成仙) 신앙을 가미해 유가의 효도관을 개조하고 제고시킨 점이 있다. 다른 하나는 도교의 효도관에는 천인감응의 사상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효행을 하면 천지신명과 감응한다는 도리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불효하고 불충한 경우 하늘로부터 재앙을 받는다는 사유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친소의 구별을 하지 않고 부모부터 천지 만물에 이르기까지 효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효도관 및 충효관을 이해할 때 논쟁 거리는 도교가 어떤 종교냐 하는 것이다. 이에 적극적으로 유가의 충효 윤리 관념을 도교의 수선(修仙)하는 사유에 융합시킨 특징을 보이는 정명충효도에서는 ‘절세유물(絶世遺物)’로 이해되는 도교관을 거부함과 동시에 충효를 통한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은 물론 모든 만물에까지 충효의 이념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즉 도교의 효도관과 충효관에는 도교가 승선(昇仙)을 추구하고 장생하기 위해 인간의 현실적 삶 및 인간세계를 떠나 입산하여 학도(學道)하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냐 아니냐의 여부에 대한 답이 동시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본고와 같은 논의를 통해 중국역사에서 유교의 충효관이 실제 삶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불교의 경우도 예외였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