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유학과 대순사상의 경제관 시론적 고찰: 유사점을 중심으로

안유경 1 , *
Yoo-kyoung An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1Researcher, Youngnam Culture Institute of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Copyright 2023,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l 25, 2023; Revised: Aug 29, 2023; Accepted: Sep 15, 2023

Published Online: Sep 30, 2023

국문요약

본 논문은 유학과 대순사상의 경제관을 비교·고찰함으로써 그 이론적 동이점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늘날 사회풍토에서 전통사상의 경제관이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를 고찰하고, 또한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경제관을 정립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순사상의 경제관은 주자와 마찬가지로 물질보다는 상대적으로 도덕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대로 경제와 같은 물질세계보다 도덕과 같은 정신세계의 중시로 나타난다. 따라서 의리와 이익, 천리와 인욕, 도심과 인심, 양심과 사심 등의 해석에서 볼 때, ‘부’와 같은 물질세계보다는 도덕과 같은 정신세계를 더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도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물질보다 도덕적 정신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도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사람들의 도덕성이 실현되면 경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와 대순사상의 경제관을 이루는 이론적 구조이며 사상적 특징이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confirm theoretical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y comparing and considering the economic views of Neo-Confucianism and Daesoon Thought. Through this, there can be an examination of what implications traditional thought regarding economic views can have in today’s social climate, which considers economic value to be the greatest value. This can also to help establish a desirable economic view of our society.

In conclusion, it can be observed that economic issues are viewed in Daesoon Thought similarly to how they were perceived by Zhu Xi. Which is to say that both place greater relative importance on morality than material wealth.

These systems of thought appear to place more emphasis on the spiritual world and moral conduct than on the material world and its economy. Therefore, when looking at the interpretation of loyalty and profit, nature and humanity, the heart and humanity, conscience and selfishness, and other such pairings, there is a tendency to focus more on the spiritual world and moral excellence than on the material world and the pursuit of wealth. These systems of thought acknowledge that material needs exist; however, both move to instill values such that human society pursues moral and spiritual ventures over material gain. Therefore, the position arrived upon by both is that people’s morality is the highest good, and when people’s morality is fully realized, all social problems, including economic problems, will be solved automatically. This is the theoretical structure and ideological characteristics that constitutes the economic viewpoints posited in both Zhu Xi’s Neo-Confucianist thought and Daesoon Thought.

Keywords: 유학(주자학); 대순사상; 경제관; 물질; 도덕
Keywords: Neo-Confucianism; Daesoon Thought; economics; material wealth; morality

Ⅰ. 서론

본 논문은 유학과 대순사상의 경제관을 비교·고찰함으로써 그 이론적 동이점을 확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늘날 사회풍토에서 전통사상의 경제관이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를 고찰하고, 또한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경제관을 정립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들의 경제관이 어떠한 시대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고, 어떠한 이론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이들의 철학적·사상적 특징을 재확인한다.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경제’라는 의미는 영어 economy의 번역어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경제란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행위, 또는 생산·분배·소비와 관련된 인간의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먹과 사는 일이니 우리 삶의 문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경제가 전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주관적 심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경제심리는 경제윤리의 문제와 연결되고, 인간관계의 문제로 확대된다. 경제가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면, 유학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전자가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한다면, 후자는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주목한다. 특히 유학의 인간관계는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간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며, 이러한 인간관계를 원만히 하는 방법으로 의리(義)·사랑(親)·분별(別)·차례(序)·신의(信)가 제시된다.

유학에서의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데, ‘경세제민’은 세상을 잘 경영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임금이 국가의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의 운영을 잘하여 백성들의 삶이 보다 넉넉해져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때문에 ‘경세제민’은 경제라는 의미보다는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유학에는 도덕이나 정치학은 있어도 과학이나 경제학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유학의 경제사상은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행위보다 그 행위의 옳고 그름과 같은 윤리의식이 강조되어 인간다움이란 본질적 가치에 더 중점을 둔다. 때문에 유학에 나타난 경제사상을 오늘날 경제학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경제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유학의 경제관에 대한 분석도 무방하다. 이것은 대순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유학의 경제사상에 대한 연구로는 주로 공자·맹자·순자 등 선진유학자들의 경제사상을 윤리적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1) 송대 유학자인 주자의 경제사상도 일부 소개되고 있으나, 주로 정전제 및 생산·분배·소비(절약)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2) 이 밖에도 유학과 기업윤리3), 유교자본주의4) 등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으나, 대부분 공자와 맹자의 내용에 집중된다. 대순사상에는 순환적 관점에서 경제관을 소개하고 있지만5) 아직 체계적인 연구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와 구분하여 유학(주자학)과 대순사상 경제관을 비교·고찰하되, 이들의 경제관을 이루는 시대적·역사적 배경과 철학적·사상적 특징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Ⅱ. 유학의 경제관6)

1. 남송(南宋)의 시대적 상황

주자(朱熹, 1130~1200)가 살았던 남송(南宋)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회하(淮河) 이북의 중원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전하여(1127) 남송의 시대를 연다. 1141년 금나라와의 강화조약을 맺은 후7) 정치적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 금나라의 장기적인 군사대치로 재정 부담이 가중되고, 남송의 국토가 북송의 3/5 정도로 축소됨에 따라 인구의 감소와 동시에 조세 역시 크게 감소한다. 금나라에 바치는 세공을 비롯한 남송의 가중되는 재정 부담은 오로지 백성에게 떠넘길 뿐, 재정 마련을 위한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모색하지 않는다.

이러한 재정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남송 왕실의 사치와 관료의 부패는 북송(北宋)을 능가한다. 북송 때 가장 낭비가 심했던 임금은 휘종(徽宗)인데, 그가 호부(戶部, 재무부)를 통해 지출했던 금액이 매월 95만 관8)이었으나, 남송의 고종(高宗)은 휘종보다 더 많은 매월 110만 관을 지출하였으며, 이후 남송 임금들의 사치는 갈수록 심해졌다. 임금의 사치뿐만 아니라, 관료나 장수들의 부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 요직에 있는 관료나 장수들이 갖은 방법으로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고 세금을 부과·착취하였으니, 이로써 굶주리는 백성들이 증가함에 따라 자연히 수많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만 해도 전국의 대규모 농민봉기가 20여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특히 주자의 활동무대였던 복건(福建)지역은 3~4년마다 한 번씩 농민봉기가 발발하던 봉기의 중심지였다.9)

이처럼 남송은 금나라와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송 때보다 훨씬 더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였는데,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하급관원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백성들에 대한 착취가 거리낌이 없을 정도였다. 주자는 남송의 어지러운 사회상황이 임금을 비롯한 관료들의 사치와 부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무엇보다 이를 바로잡는 일을 급선무로 삼는다.

주자는 당시 남송사회의 부패한 상황을 중병에 걸린 인체에 비유한다.

신이 오늘날 천하의 형세를 살펴보니, 마치 인체에 중병이 들어 안으로는 심장과 복부로부터 밖으로는 사지(四肢)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체로 터럭 하나에도 병이 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비록 자고 먹는 데는 지장이 있지 않더라도, 그 증세가 위급하고 긴박하여 ‘의사가 참으로 이미 쳐다보고 <치료할 것을 포기한 채> 달아난 지’가 오래됩니다. 이것은 반드시 편작이나 화타와 같은 무리가 신단(神丹)과 묘제(妙劑)를 투여하여 그를 위해 내장과 위를 세척하여 병의 뿌리를 제거한 후에야 안전을 바랄 수 있습니다.10)

남송의 사회상황이 마치 인체에 중병이 걸린 것과 같다. 중병이 안으로는 심장과 복부로부터 밖으로는 사지에까지 퍼져서 터럭 하나라도 병들지 않는 곳이 없듯이, 남송사회의 부패 역시 안으로는 왕실로부터 밖으로는 지방관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 하나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러한 중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명의가 신비한 약이나 약제를 투여하여 내장과 위를 세척해야 하듯이, 남송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병의 뿌리’, 즉 부패에 오염된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주자는 부패로 물든 남송사회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심장에 해당하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무릇 천하의 큰 근본은 폐하의 마음입니다. … 신이 늘 폐하의 마음을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천하의 일은 천변만화하여 그 단서가 무궁하지만, 하나라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하나라도 바른 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천하의 일이 하나라도 바른 데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11)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은 임금의 마음이다. 왜냐하면 천하의 일이 모두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른 데서 나오므로 잘되고,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른 데서 나올 수가 없으므로 잘못된다. 결국 임금의 마음이 바른지 바르지 않는지의 여부에 따라 천하의 모든 일의 잘잘못이 결정된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일은 그 근본이 한 사람에게 있으며, 한 사람의 몸은 그 주인(주재)이 마음 하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한번 바르면 천하의 일이 바르지 않은 것이 없고, 임금의 마음이 한번 사특하면 천하의 일이 사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치 모양이 바르면 그림자가 곧고, <물의>근원이 탁하면 지류가 더러운 것과 같으니, 그 이치는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12)

천하의 일은 한 사람의 몸에 달려있고, 한 사람의 몸은 또한 그 몸을 주재하는 마음에 달려있다. 결국 천하의 모든 일은 마음 하나에 달려있으니, 임금의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르게 되고, 임금의 마음이 사특하면 천하의 일이 모두 사특하게 되니, 마치 모양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고 근원이 탁하면 지류의 물도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물건의 모양이나 물의 근원에 따라 그림자나 지류의 상태가 달라지듯이, 임금의 마음이 바른지 사특한지의 여부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

때문에 국가의 경제·사회·정치 모든 정책 역시 임금의 마음으로 환원된다.

천하 국가의 큰 임무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은 부세를 줄이는 데 있고, 부세를 줄이는 실질은 군대를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만약 군대를 다스리고 부세를 줄이는 것을 백성을 구제하는 근본으로 여긴다면, 또한 임금이 그 마음(心術)을 바르게 하여 기강을 세우는 데에 있을 따름입니다.13)

국가의 가장 큰 임무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으며,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 방법은 부세를 줄이거나 군대를 다스리는 데 있다. 그렇지만 부세를 줄이거나 군대를 다스리는 일 역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기강을 세우는 데 달려있다. 부세를 줄여서 재물을 다스리는 경제정책이든 군대를 다스리는 국방정책이든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절대 왕권국가에서 모든 정책의 최종 결정은 임금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천하의 일은 근본을 따라서 이해해야지, 일을 따라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14) 근본이란 임금의 마음을 가리키니, 천하의 모든 일은 임금의 마음이 바른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국가의 경제성장과 발전도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로 귀결된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이 바르게 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관리들이 바르게 되고, 관리들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성이 바르게 되고, 백성을 바르게 함으로써 나라가 바르게 된다.”15) 결국 임금의 바른 마음이 국가의 경제·사회·정치 모든 방면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다.

남송은 금나라에 남경(南京)으로 밀려나 국토의 절반을 잃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조정에서는 사치와 부패가 만연하다. 주자는 이러한 부패한 사회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임금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보고, 부세나 분배와 같은 경제정책 역시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도덕성 회복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남송의 부패한 사회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사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2. 주자 경제관의 이론적 구조

주자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무엇보다 먼저 의리(義)와 이익(利)의 분명한 구분을 강조한다. 주자의 의리와 이익을 언급하기에 앞서, 공자와 맹자의 의리와 이익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자.

공자는 삶의 가치를 의(義, 도덕적 삶)와 이(利, 경제적 삶)로서 표현한다.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한다.”16)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17) “부와 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도의에 맞지 않으면 처하지 않는다.”18) “의롭지 않은 부와 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19) 물질적·경제적 이익과 도덕적 의리가 모두 중요하지만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이익만을 추구하면 다툼이 일어나니,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의리의 한도 내에서 추구할 것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공자는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소인으로 평가하고, 의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로 평가한다.

이러한 사고는 공자 이전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의리를 폐하고는 이익이 설 수 없다.”20), “의리로써 이익을 인도해야 한다.”21), “의리는 이익의 근본이다.”22), “이익에 처해서는 의리를 생각한다.”23) “의리는 이익을 낳고, 이익은 백성을 풍요롭게 한다.”24) 공자와 마찬가지로, 이익을 추구하되 반드시 의리에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공자가 의리를 중시한다고 해서 이익을 폄하한 것은 아니다. “부(富)를 구할 수만 있다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내 또한 하겠다”25)라고 하여, 이익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고에서 공자는 백성들의 ‘풍족한 식량(足食)’, 즉 넉넉한 생활을 정치의 근본으로 생각한다.26) 이익에 기초하는 민생경제의 보장이 국가를 이루는 출발점이며,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이익으로 여기는 것에 근거해서 그들을 이롭게 한다”27)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공자의 경제관은 이익을 추구하되 의리에 맞는, 즉 의리와 연계되는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맹자 역시 이익보다 의리를 중시한다. “왕은 하필 이익을 말합니까.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28) 이것은 양혜왕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방책이 있는지의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다. 만약 왕이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대부·사·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어29) 결국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반대로 인한 자는 그 부모를 사랑하고 의로운 자는 그 임금을 우선으로 하니30), ‘인의’가 행해지면 이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맹자는 “진실로 의리를 뒤로 하고 이익을 우선하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는다”31)라고 하여, 이익의 추구를 의리의 한도 내로 제한할 것을 강조한다.

공자와 마천가지로 맹자 역시 의리를 중시한다고 해서 이익을 폄하한 것은 아니다. 맹자는 생업에 기초한 민생경제의 보장을 무엇보다 강조하는데,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항산’은 사람이 항상 살아갈 수 있는 생업이고, ‘항심’은 사람이 항상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이다.32) 인정(仁政, 왕도정치)의 기초는 무엇보다 경제안정에 있으니, 위로는 부모를 모실 수 있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를 수 있는 생업이 보장되지 않으면(恒産) 선한 마음을 낼 수 없으며(恒心), 선한 마음을 낼 수 없으면 방탕하고 사치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결국 국가는 혼란에 빠진다.33) 주자가 말한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선한 본성도 생업이 보장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우며, 반대로 세상에 만연하는 온갖 죄악 역시 생업이 보장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양식이 물이나 불과 같이 풍족하면, 백성이 누가 어질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34)라는 의미이다. 생업이 보장되면 ‘인의’가 저절로 실현되니, ‘인의’를 실현하려면 생업에 대한 보장이 우선되어야 한다. 즉 이익과 의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와 맹자의 경제관은 이익을 추구하되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리에 맞는, 즉 의리와 연계되는 이익을 추구한다. 결국 이익과 의리의 관계는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학의 경제관을 이익과 의리의 조화 또는 상호 보완의 관계로 평가하기도 한다.35)

그러나 공자·맹자와 달리, 주자는 의리와 이익의 관계를 공(公)/사(私)의 대립적 구조로 이해한다.

인의(仁義)는 사람 마음의 고유(固有)한 것에 근원하니 천리의 공정함이고, 이심(利心)은 남과 나의 형체에서 생겨난 것이니 인욕의 사사로움이다. 천리를 따르면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롭지 않음이 없고, 인욕을 따르면 이익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해(害)가 이미 따른다. … 그러므로 맹자가 인의를 말하고 이익을 말하지 않은 것은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서 그 폐단을 구제한 것이니, 이것이 성현의 마음이다.36)

주자는 ‘인의는 사람 마음의 고유한 것(성)에 근원하니 천리의 공정함이고, 이익은 사람의 형체에서 생겨나 것이니 인욕의 사사로움’이라 하여, 의리(仁義)와 이익(利心)을 공/사 또는 천리/인욕의 관계로 해석한다. 이것은 주자의 인심·도심의 해석과도 연결되니,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난 것이고 도심은 성명의 올바름에 근원한 것이다. 결국 의리 = 공 = 천리 = 도심, 이익 = 사 = 인욕 = 인심의 도식이 성립한다.

이러한 공/사라는 대립적 구조에서 의리와 이익은 흥망의 차이로 이어진다. “그 마음에 의(義)와 이(利)의 다름이 있어서 그 결과에는 흥망의 차이가 있다.”37) 사람의 마음에는 의리와 이익이 있으니, 의리를 따르면 흥하고 이익을 따르면 망한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인의를 말하고 이익을 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주자의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공자와 맹자가 의리와 이익을 함께 말하여 이들의 조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주자는 이들을 공/사, 천리/인욕, 인의(仁義)/이심(利心) 등과 같은 대립적 관계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이익보다 의리를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의리를 따르면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지만, 이익을 따르면 이익을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때문에 의리와 이익의 분명한 구분을 강조하니 “지금 천리와 인욕, 의리와 이익, 공정함과 사사로움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38) 이것은 의리의 가치와 이익의 가치가 충돌하면 의리의 가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의리와 이익이 ‘천리(또는 리)’라는 형이상의 본체개념과 연결됨에 따라 본말(本末)·주종(主從)·선후(先後) 등의 가치우열의 관계가 성립된다. 의리는 근본이고 이익은 말단이니, 자연히 이익보다는 의리 쪽으로 편향된다. 이때의 이익은 더 이상 생존에 필요한 정당한 욕구가 아니라 사욕(탐욕)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주자는 의리와 이익을 천리와 인욕의 관계로 확대한다. 먼저 주자는 천리와 인욕을 공(公)/사(私), 시(是)/비(非), 정(正)/사(邪), 호(好)/불호(不好), 경(敬)/사(肆), 도심/인심, 도리/정욕 등의 대립적 의미로 이해한다.

무릇 하나의 일에는 두 가지 단서가 있으니, 옳은 것은 천리의 공정함이요 그른 것은 인욕의 사사로움이다.39)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바른 것이고, 사랑이 끝이 없어 반드시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특한 것이다. 이것이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니 마땅히 살펴서 분별해야 한다.40)

좋은 것은 천리이고 좋지 않는 것은 인욕이다.41) 공경하면 천리이고 방자하면 인욕이다.42)

인심은 인욕이고 … 도심은 천리이다.43)

다만 한 사람의 마음인데, 도리에 합하는 것은 천리이고 정욕을 따르는 것은 인욕이다.44)

이때 천리와 인욕은 별개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두 양상을 가리킨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인데, 도리에 합하면 천리가 되고 정욕을 따르면 인욕이 된다. “사람의 한 마음에는 천리가 보존되면 인욕이 없어지고 인욕이 이기면 천리가 없어지니, 천리와 인욕이 서로 뒤섞인 경우는 있지 않다.”45) ‘천리와 인욕이 서로 뒤섞인 경우는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의 마음속에 천리와 인욕이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하나인데 다만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천리와 인욕으로 나누어질 뿐이다. 마치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이 내려가는 저울처럼, 천리가 이기면 인욕은 저절로 없어지고 인욕이 이기면 천리는 저절로 없어진다. “천리를 보존한다는 말도 반드시 그것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를 묻지 말고, 다만 인욕을 제거하면 천리가 저절로 보존된다.”46) 따라서 “천리와 인욕이 비록 동시에 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선후(先後)·공사(公私)·정사(正邪)의 상반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47) 천리와 인욕이 나란히 상대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대립적인 관계이다.

그렇다면 천리와 인욕은 무엇인가.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에 성명의 바른 것은 참으로 천리의 실상이 아님이 없다. 다만 기질의 치우침으로 이목·구비·사지의 좋아하는 것(욕구)이 그것을 가려서 사욕이 생겨난다.48)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리를 성으로 부여받는데, 이것이 바로 천리의 모습이다. “천리는 이미 혼연한데, 이미 그것을 리라고 하면 조리가 있는 이름이다. … 모름지기 천리는 다만 인·의·예·지의 총체적인 이름이고, 인·의·예·지는 바로 천리의 구체적 내용(가짓수)임을 알아야 한다.”49) 혼연한 전체로서 말하면 천리이고, 개별 사물의 조리로서 말하면 리이다. 또한 리가 사물에 내재된 뒤에 성이라고 부르니, 천리 = 리 = 성(인·의·예·지)의 도식이 성립한다. 결국 천리는 인·의·예·지의 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천리의 실현은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오륜(五倫), 즉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형체를 이루는 기질(기)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을 가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데, 이로써 인욕이 생겨난다. 천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을 가리킨다면, 인욕은 육체의 기질이 성을 가림으로써 생겨나는 욕심을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성을 가리는 기질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키는 수양공부가 필요하며, 그 대표적인 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거경함양(居敬涵養)이다. 밖으로 객관대상을 궁리하여 지식을 이루거나(격물치지) 안으로 마음속에 내재된 덕성을 자각하고 기르는 것(거경함양)은 결국 기질에 가려진 성을 드러내기 위한 실천적 방법이다.

주자는 수양공부를 통해 천리, 즉 성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누구나 자신의 성을 실현하면 최고의 도덕적 인간(성인)이 될 수 있으며, 이로써 도덕적 이상사회 건설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개인과 국가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의 목표이며 최고의 가치이다. 결국 최고의 삶은 기질로 인하여 생겨난 욕심을 제거하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천리)을 실현하는 것이니, 이것을 주자는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이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경제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가치가 되지 않는다. 다만 주자는 도덕적 삶의 최적의 실현으로서 국가경제를 말하는 것이지, 개인의 이익(富)을 만족시키는 장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주자는 국가경제 전반의 문제들을 모두 천리/인욕, 의(義)/이(利), 공(公)/사(私), 정(正)/사(邪) 등의 관계로 환원시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의리·공정과 같은 도덕성이 중요하고 이익에 기초하는 경제·기술문제 등은 사소한 것이 된다. 이것을 도덕적 경제관50) 또는 윤리적 경제관51)이라고 부른다. 주자는 경제의 목적으로서 무엇보다 천리를 앞세웠는데, 그의 경제문제에 관한 노력은 도덕적 사회건설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52)

국가의 경제정책도 결국 한 생각의 사이에 있을 뿐이니, 그 한 생각이 천리에서 나온 것인지 인욕에서 나온 것인지, 즉 공정한지 사사로운지에 따라 결정된다. 주자가 임금에게 천리와 인욕을 분명히 구분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결국 임금이 의(義)/이(利), 공(公)/사(私), 정(正)/사(邪)를 판별하여 공정무사한 마음가짐으로 국가경제의 모든 정책에 대응하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임금이 국가조직의 최고 수장이며 최종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적 사고는 주자의 인심과 도심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주자는 성인과 같은 도덕적 인격함양을 중시하여 도덕적 자각과 동시에 도덕의식을 제고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상서』속의 인심과 도심의 문제를 크게 부각시킨다. 인심과 도심이라는 말은 『상서』 「대우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다”53)라는 말에 근원한다. 그렇다면 인심과 도심은 무엇인가.

마음의 허령한 지각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이 다른 것은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고 혹은 성명의 올바름에서 근원하여 지각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사람은 이 형체가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비록 상지(上智)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성이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비록 하우(下愚)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 …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항상 한 몸의 주재를 삼아 인심이 매양 명령을 따르도록 하면, 위태로운 것이 안정되고 미약한 것이 드러나서 말이나 행동이 저절로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잘못이 없게 된다.54)

사람의 마음은 일신(一身)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바른 기로 이루어져 허령하다고 말하며, 마음이 허령하기 때문에 대상세계의 모든 사물을 지각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지각은 그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니,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는 인심과 성명의 올바름에 근원하는 도심이 그것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인심의 지각대상은 형기(기)이고, 도심의 지각대상은 성명(리)이다. 따라서 형기와 같은 감각적인 것을 지각하면 인심이 되고, 성명과 같은 도덕적인 것을 지각하면 도심이 된다.

그러나 인욕과 천리처럼, 인심과 도심 역시 별개의 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의 두 양상일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이지만, 이것이 형기와 같은 감각적인 것을 따르느냐 성명과 같은 도덕적인 것을 따르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이때 감각적인 욕구를 따르면 인심이 되고, 도덕적인 이치에 부합하면 도심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인심과 도심이 모두 있으니, 누구는 인심만 있고 누구는 도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나고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형체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인심이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성이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도심이 있다. 이로써 마음이 기(형체)와 리(성)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인심이 형기의 사사로움(私)에서 생겨난 것이고 도심이 성명의 올바름(正)에 근원한 것이라고 규정하면, 인심과 도심에는 사(私)와 정(正 또는 公)이라는 가치우열의 구분이 설정된다. 비록 형기의 사사로움(私)에서 생겨난 인심이 곧장 악(또는 불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도 하더라도, 성명의 올바름(正)에 근원하는 도심과는 분명히 구분되지 않을 수 없다. 『상서』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다”는 말처럼, 인심이 곧장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위태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주자는 도심으로 하여금 한 몸을 주재하게 하여 인심이 항상 도심의 명령을 따르도록 제어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개인의 행위를 지배하여 감각적 욕구로 하여금 도덕적 의식의 지배와 통제를 받게 한다는 말이다. 도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인심을 그대로 방치하면 악으로 흐르게 된다. 결국 인심과 도심의 문제는 도심이 얼마나 인심을 잘 제어하느냐에 달려있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도덕적 의식(도심)과 감각적 욕망(인심) 사이의 충돌이 교차하고 있다. 이때 주자는 지나치게 이익만을 추구하는 감각적·물질적 욕망을 도심이라는 도덕적 의식으로 제한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인심과 도심을 말하는 이유이다. 물론 “음식은 천리이고, 맛있는 것을 구하려는 것은 인욕이다”55)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이고 정당한 욕구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심과 도심을 사(私)/공(公) 또는 기(氣)/리(理)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은 도덕적 의식에 대한 중시와 동시에 물질적 욕구에 대한 폄하로 이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대립적 사고는 리와 기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주자는 이 세계를 리와 기의 구조로 설명한다.

천지 사이에는 리가 있고 기가 있다. 리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道)이며 사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라는 것은 형이하의 재료(器)이며 사물을 생성하는 도구이다. 이 때문에 사람과 사물이 생성될 때는 반드시 리를 부여받은 연후에 성이 있고, 반드시 기를 부여받은 연후에 형체가 있게 된다.56)

리는 형이상의 원리이고 기는 형이하의 재료이다. 사람 역시 리와 기가 합쳐져서 이루어지니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생성하는데,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된다.”57) 더 나아가 주자는 이때의 ‘리’를 존재의 이유와 당위의 법칙으로 해석한다. 이것을 ‘소이연의 이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의 법칙(所當然之則)’이라고 부른다. “천하의 사물에 이르면 반드시 각각 ‘소이연의 이유’와 ‘소당연의 법칙’이 있으니, 이른바 리라는 것이다”58) 주자는 모든 사물이 그렇게 되는 존재이유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당위법칙, 즉 우주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도덕법칙을 하나의 ‘리’로써 설명한다.

그렇다면 주자는 왜 우주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도덕법칙을 동일한 ‘리’로써 설명하는가. 이것은 인간의 도덕법칙을 우주의 자연법칙에 근거지어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의 질서·법칙인 리가 인간에 내재되어 그 본질을 이루는 도덕성의 근거가 되니, 이로써 우주자연의 구조와 인간심성의 구조가 하나 되어 인간사회의 도덕이 곧 우주자연의 법칙이 된다. 결국 인간의 도덕법칙이 우주의 자연법칙에 근거함으로써 절대성·당위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주자는 존재이유로서 리의 의미보다 도덕법칙으로서 리의 의미에 더 주목한다. 사물의 존재이유를 다루는 이기론보다 인간의 도덕법칙을 다루는 심성론의 중시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우주 속의 만물을 인간 중심에서 해석한 것이기도 하지만,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도덕법칙인 소당연(所當然)의 뜻이 강조될 때, 리는 선의 원리 혹은 선 자체의 뜻으로 통용된다. 이로써 리는 존재의 원리뿐만 아니라 절대선이라는 가치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주자는 사물의 존재를 말할 때는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不相離)’는 일원적 관점을 견지하지만, 그 가치를 말할 때는 리와 기가 ‘서로 뒤섞일 수 없다(不相雜)’는 이원적 관점을 견지한다. 따라서 리가 가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때, 리와 기는 서로 대립적 존재로 인식된다. 리가 선이라고 하면 기는 상대적으로 악이 된다. 물론 기 자체가 악이 아닐지라도 악의 원인 또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리와 기로 자연세계를 설명할 때는 문제되지 않던 것이 인간존재를 해명함에 있어서, 특히 도덕의 선악문제에 연관해서는 리선기악(理善氣惡)·리귀기천(理貴氣賤) 등의 차등관계를 갖는다. 이것은 그대로 기보다 상대적으로 리를 더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자연히 경제와 같은 물질세계(기)보다 도덕과 같은 정신세계(리)의 중시로 나타나고, 이로써 물질세계를 경시하거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의리와 이익, 천리와 인욕, 도심과 인심, 리와 기에 대한 주자의 해석에서 볼 때, 경제와 같은 물질세계보다는 도덕과 같은 정신세계를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고 경제문제를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주자에게도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만, 의식주와 같은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인간사회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물질보다 정신적 도덕성인 것이다. 주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덕성, 특히 군주의 도덕성이며, 경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자는 의리쌍행(義利雙行), 즉 의리와 이익의 효용(事功)을 함께 중시하는 진량(陳亮, 1143~1195)을 비판하니 “다만 짐승을 많이 잡는 것만 취하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취하여 <짐승을 잡는 방법이> 바른 데서 나오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59) 짐승을 많이 잡는 것보다 짐승을 잡는 사냥방법이 올바른지가 더 중요하다. 진량처럼 이익만을 중시하면, 자칫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과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도덕성(의리)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사람들의 도덕성이 실현되면 경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자는 경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문제를 사람들의 도덕성으로 환원시켜서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도덕성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도덕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추구한다.

Ⅲ. 대순사상의 경제관

1. 한말(韓末)의 시대적 상황

증산(姜一淳, 1871∼1909)이 태어난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유교적 질서의 붕괴, 정치사회의 혼란, 삼정의 문란, 그리고 계속된 자연재해와 전염병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날로 거세지는 외세의 압력은 국가적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사회현실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은 깊어졌으며, 이들의 고통을 종교적 가르침에 의해 덜어주고자 하는 일단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최제우(1824~1864)에 의해 창도된 동학(東學)이다. 최제우가 1860년에 동학을 창도한지 불과 3년 만에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조정에서는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민심을 미혹시키는 사교(邪敎)로 간주하여 이를 탄압하였는데, 이로써 최제우는 처형된다.

원래 상제는 천상의 가장 높은 곳인 구천(九天)에 계셨는데, 천지의 신명인 신성·불·보살 등이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니, 이에 사멸에 빠진 세계의 창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서 삼계(三界)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전북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이르러 30년을 지낸다. 이 시기에 상제는 세상을 구제하는 대도(大道)를 최제우에게 알려줌으로써 동학을 창도하게 하였으나, 최제우가 그 ‘대도’의 참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실패한다. 이에 상제는 최제우에게 주었던 ‘대도’를 거두고, 그가 직접 ‘대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오니 “상제께서는 신미년 1871년 11월 1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씨 집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하시니 존호는 증산이시다.”60)

상제께서 구천에 계시자 신성·불·보살 등이 상제가 아니면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셔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시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大道를 세우게 하셨다가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리기로 정하셨도다.61)

증산의 대도(大道)는 1901년에서 1909년까지 총 9년에 걸쳐서 시행된 천지공사로 드러난다. “선천에서는 상극이 인간사를 지배하여 원한이 세상에 쌓이고 맺혀 삼계(三界)를 채웠으니, 천·지·인 삼계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여 이 세상에 참혹한 재화(災禍)가 생겨났다.”62) 이에 상제는 천지공사를 통해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경의 운로를 열어서 선천에서의 상극에 따른 모든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道)로써 세계의 창생을 구제한다.”63) 상생의 ‘대도’를 세워서 상극이 지배하는 선천의 도수를 정리하고 세상에 쌓인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새로운 후천의 선경세계를 여니, 이로써 삼계가 조화를 이루는 지상선경이 건설된다.

여기에서 증산은 세상이 혼란하게 된 원인으로 물질문명을 지목한다.

그(서양의)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 64)

이 세상이 혼란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 물질문명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서양의 문명이 물질에 치우쳐서 인간이 교만해지고, 자연 역시 함께 살아가야할 소중한 동반자가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니, 그 결과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파괴를 일삼으며, 더 나아가 물질에 집착한 인간은 자신들이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신(神)도 무시한 채 전쟁과 살육에 광분한다. 이로써 신도(神道)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천도와 인사의 상도(常道)가 무너져서 삼계가 혼란에 빠진다. 결국 지나친 물질에 대한 추구가 인간 세상의 혼란을 초래하니, 물질은 경계해야할 대상이 된다. “이제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財利)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65) 이때의 ‘재리’는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재화라기보다는 물질적·경제적 욕망에 해당한다. 때문에 이러한 물질적 욕망이 자칫 생명에까지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하니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66)

여기에서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물질, 즉 ‘부’에 대한 대순사상의 인식을 살펴보자.

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니 묵은 기운이 채워 있는 곳에 큰 운수를 감당키 어려운 까닭이니라. 부자의 집 마루와 방과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 차 있나니라.67)

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한 권력을 가진 자는 주로 물질적·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자, 즉 부자에 해당한다. 증산은 부자가 주로 척에 걸린다고 설명한다. 척(慼)은 나에 대한 남의 원한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원한을 갖게 하는 것이 척을 짓는 행위가 되니, 남에게 억울하게 하거나 남을 미워하는 것, 남의 호의를 거스르는 것, 남을 서운하게 하는 것 등이 다 척을 짓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남을 대할 때는 겸손·온순·사양의 덕으로서 항상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서 척을 짓지 말아야 한다.68)

그러나 부자는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남을 해치거나 억울하게 하는 등 많은 척을 지어 원한을 쌓았으므로 부자의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하다. 부자의 곳간에 살기와 재앙이 가득한 것은 전적으로 남에게 지은 척이 원한으로 쌓인 것이니, 이 때문에 부자는 주로 척에 걸려 그 재물이 콩나물 뽑히듯 없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증산은 사람을 기용하여 쓸 때조차도 부자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자는 자신이 가진 재산만큼 그자에게 살기가 붙어있느니라. 만일 그런 자를 문하에 둔다면 먼저 그 살기를 제거하여 그 앞길을 맑게 해 주어야 할 터이니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공사에 막대한 지장이 오느니라 .69)

종도들이 때때로 부자를 종도로 천거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제는 이것을 매우 꺼려한다. 예컨대 종도들이 천거한 부자가 상제를 찾아온다고 하면, 먼저 부자가 오는 길가의 주막에 가서 술에 취한 모습으로 횡설수설함으로써 부자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산은 왜 부자를 기피하는가. 왜냐하면 부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재산만큼 살기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부자의 재산에 살기가 붙어있다’는 것은 부자가 남에게 척을 지어 그 원한이 쌓여 살기가 된 것이다.

때문에 상제가 부자를 종도로 쓰려면 먼저 그의 살기를 제거하여 겁액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의 살기를 제거하여 겁액을 풀어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이로써 공사에 차질이 생기므로 부자를 기용하는 것을 꺼려한다.

반대로 가난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쓴다.”70)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가 곧 나의 사람이니라.”71) “때 묻고 해진 옷이 금갑옷보다 낫고, 담 없이 허물어진 집이 철옹성과 같다.”72) 해진 옷이 금으로 만든 갑옷이나 허물어진 집이 쇠로 만든 튼튼한 성보다 낫다는 것은 공자의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에 있다”73)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기는 모습, 이것이 바로 대순사상이 추구하는 수도자의 자세가 아닌가한다.

이러한 ‘부’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 볼 때, 대순사상의 경제관은 유학에서처럼 의(義)와 이(利)에 대한 분명한 내용은 없지만, 경제(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대순사상 경제관의 이론적 구조

대순사상은 경제(부)를 순환구조 속에서 이해한다.

돈이란 것은 순환지리로 생겨 쓰는 물건이니라. 억지로 구하여 쓸 것은 못되나니 백년 탐물(百年貪物)이 일조진(一朝塵)이라.74)

돈이란 억지로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백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도 하루아침에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다. 이 구절은 불교 경전의 하나인 『잡아함경(雜阿含經)』과 원효대사의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또는 자경문(自警文)』75) 등에 나오는 말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회자되는데 증산이 재인용한 것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된다.”76) 세상에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듯이,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간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재물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거늘, 다른 사람의 재물에 어찌 집착하겠는가. 즉 마음을 닦아 탐욕을 버리고 돈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대순사상은 경제의 순환론을 제기한다. ‘돈이란 순환지리로 생겨 쓰는 물건이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는 말처럼, 돈은 순환의 이치에 따라 내가 준 재물이 어떤 형식으로든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식이다. 내가 남에게 주면 그것이 돌고 돌아 남이 나에게 주니, 남에게 주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잘 되려면 먼저 베풀라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77) 남을 좋게 말하면 그 복이 자신에게 미치고 남을 나쁘게 말하면 그 해가 자신에게 미치듯이, 재화 역시 남을 잘되게 하기 위해 베푼 것은 그 남은 덕이 밀려서 더 크게 돌아온다. 이것이 『대학』에서 말한 “재물이 모이면 백성들은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들이 모인다”78)라는 뜻이기도 하다. 재물은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 것이므로 재물을 독차지 하면 서로 다투고 싸우니, 이로써 백성들이 흩어진다. 그렇지 않고 재물을 골고루 나누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니, 이로써 백성들이 모여든다.

이어서 대순사상은 선하게 살면 오히려 돈을 벌게 된다고 강조한다.

지난 선천 영웅시대는 죄로써 먹고 살았으나 후천 성인시대는 선으로써 먹고 살리니 죄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선으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이제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았도다.79)

선천에는 눈이 어두워서 돈이 불의한 사람을 따랐으나 이 뒤로는 그 눈을 밝게 하여 선한 사람을 따르게 하리라.80)

선천시대는 상극의 원리가 지배하여 인간사회에도 신분·계층 등 상호 이해가 충돌하여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니 죄로써 먹고 사는 시대였다. 그러나 후천시대는 상생의 원리가 지배하여 어떠한 대립과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세상이니 선으로써 먹고 사는 시대이다. 선으로써 먹고 사는 시대에는 악을 선으로 갚으며, 너와 내가 서로 화해하며, 남을 비방하지 않고, 대립과 갈등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이룩된 후천선경의 세상이 펼쳐진다.

때문에 선천시대에는 돈이 불의(不義)한 사람을 따랐으나, 후천시대에는 돈이 선한 사람을 따른다. ‘돈이 불의한 사람을 따랐다’는 것은 불의한 사람이 돈을 벌었다는 뜻이니, 이로써 온갖 부정과 다툼이 만연하다. 반면 ‘돈이 선한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선한 사람이 돈을 번다는 뜻이니, 이로써 부정과 다툼이 아니라 상생과 조화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선한 삶을 살면 돈을 벌게 되니, 결국 선하게 살수록 더 부유하게 된다. 선과 돈, 즉 도덕과 경제를 접목시킴으로써 도덕적 삶과 경제적 풍요로움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것은 주자(공맹)의 의리를 따르면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지만, 이익을 따르면 이익을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대순사상은 마음을 양심과 사심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대립적 관계 속에서 해석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양심·사심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요,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다. 원래 인성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81)

대순사상은 사람의 마음을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으로 분명히 구분한다. 양심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天性)이니 본래의 선한 마음을 가리키고,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생겨난 욕심을 가리킨다. 또한 이것은 도심과 인심으로도 해석되니, 양심은 성(리)에 근원하니 도심에 해당하고, 사심은 물욕에서 생겨난 것이니 인심에 해당한다. 결국 사람의 마음에는 성에 근원하는 양심/도심과 물욕에 근원하는 사심/인심이 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는 양심과 사심이 모두 있으나, 사람의 본질은 양심이다. ‘사람의 본질이 양심이다’는 것은 마음의 본래모습이 양심이며, 사심은 다만 이때의 양심이 물욕에 가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물욕에 가려진 사심을 제거하면 마음의 본래모습인 양심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하지만 기질에 가려서 악이 되며, 이때 가려진 기질을 제거하면 다시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처럼, 사심을 제거하면 양심을 되찾을 수 있다. 때문에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되찾는 데 전념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양심과 사심의 대립적 해석은 주자의 의리와 이익, 천리와 인욕, 도심과 인심에 대한 해석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양심과 사심이 충돌하는데, 이때 도덕적 의식인 양심이 물질적 욕심인 사심을 제어해나가야 하니, 이 과정에서 수도(修道)의 자세가 요구된다. 결국 대순사상의 경제관 역시 주자와 마찬가지로 물질을 경시하고 도덕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대순사상은 사심과 양심을 죄와 복의 구도로도 설명한다.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 이제 먼저 난법을 세우고 그 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 하라. 사곡한 것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 되니라.82)

사곡(邪曲)은 올바르지 않는 것이니 사특하다는 뜻이다. 사특한 마음은 물욕과 같은 사심에 의해 생겨난다.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을 터뜨리고, 자신과 주변 사람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다가 큰 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으니, 사특한 마음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된다.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것이니 참되고 바르다는 뜻이다. 인간 본연의 참된 마음이 양심이니, 양심으로 가득 찬 상태가 진실이다. “진실한 마음을 굳게 지키면 복이 먼저 찾아온다.”83) “나를 믿고 마음을 정직히 하는 자는 하늘도 두려워하느니라.”84) 사람의 본질은 양심이고, 양심의 본질은 정직과 진실이니, 이로써 진실한 마음이 바로 만복의 근원이 된다. 결국 사심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고 양심은 만복의 근원이 되니, 물질적 욕구인 사심은 죄악이고 인간의 본질인 양심은 만복이라는 대립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도덕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언제나 도덕적 가치가 우선해야 한다는 의미이니, 이러한 사고에서는 경제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가치가 되지 못한다.

Ⅳ. 결론

모든 사상이 그러하듯이, 주자와 증산의 사상도 그들이 몸담았던 시대적 환경이나 그들이 직면했던 역사적 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경제관이 형성되고, 이들의 경제관은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기 보다는 도덕성의 확충에 의해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 있으니, 이로써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이상사회의 건설이 가능하다.

주자의 경제관은 당시 남송의 부패한 상황을 바로잡는 일에서 출발한다. 대순사상 역시 한말(韓末)의 혼란한 상황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종교적 가르침으로 덜어주는 데서 출발한다. 부패한 남송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았으며, 이로써 국가의 경제성장과 발전도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로 귀결된다.

대순사상은 사회가 혼란한 원인으로 물질문명을 지목하고, 인간의 문명이 물질에 치우쳤기 때문에 신도(神道)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천도와 인사의 상도(常道)가 무너져서 삼계가 혼란에 빠졌다. 결국 지나친 물질 추구가 인간세상의 혼란을 초래하니 물질은 경계해야할 대상이 된다. 부자의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하다는 말처럼,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물질, 즉 ‘부’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다.

주자는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의리(義)와 이익(利)의 분명한 구분을 강조한다. ‘의리(仁義)는 천리의 공정함이고 이익은 인욕의 사사로움’이라 하여, 의리와 이익을 천리/인욕, 공/사의 대립적 관계로 해석한다. 공자와 맹자가 의리와 이익을 함께 말하여 이들의 조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주자는 이들을 공/사, 천리/인욕, 도심/인심 등과 같은 대립적 관계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이익보다 의리를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의리와 이익이 ‘천리’라는 형이상의 본체개념과 연결됨에 따라 본말(本末)·주종(主從)·선후(先後) 등의 가치우열관계가 성립한다. 의리는 근본이고 이익은 말단이니, 자연히 이익보다는 의리 쪽으로 편향된다. 이로써 이익은 더 이상 생존에 필요한 정당한 욕구가 아니라, 사욕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주자는 천리, 즉 성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한다. 누구나 성을 실현하면 최고의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이로써 도덕적 이상사회의 건설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국가와 개인이 추구해야 하는 공동의 목표이며 최고의 가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문제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가 되지 않는다. 다만 주자는 도덕적 삶의 최적의 실현으로서 국가경제를 말하는 것이지,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키는 장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주자는 국가경제 전반의 문제를 모두 의리/이익, 천리/인욕, 공/사, 도심/인심, 리/기 등의 관계로 환원시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의리’와 같은 도덕성이 중요하고 ‘이익’에 기초하는 경제문제는 사소한 것이 된다.

대순사상 역시 마음을 성에 근원하는 양심(良心)과 물욕에 근원하는 사심(私心)으로 구분하고, 양심으로 사심을 제어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양심과 사심의 대립적 해석은 주자의 의리/이익, 천리/인욕, 도심/인심 등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결국 대순사상의 경제관은 주자와 마찬가지로 물질보다는 상대적으로 도덕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대로 경제와 같은 물질세계보다 도덕과 같은 정신세계의 중시로 나타난다. 따라서 의리와 이익, 천리와 인욕, 도심과 인심, 양심과 사심 등의 해석에서 볼 때, ‘부’와 같은 물질세계보다는 도덕과 같은 정신세계를 더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도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물질보다 도덕적 정신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도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사람들의 도덕성이 실현되면 경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와 대순사상의 경제관을 이루는 이론적 구조이며 사상적 특징이다.

Notes

1) 최희남, 「현대 사회문제와 유학의 경제윤리」, 『동양철학연구』 37 (2004); 이철승, 「선진 유가사상에 나타난 경제와 윤리의 관계 문제」, 『사회사상과 문화』 9 (2004).

2) 김승혜, 「주자의 경제관 : 민을 위한 의와 이의 긴장」, 『동아연구』 34 (1997); 백도근, 「주자의 경제사상」, 『철학연구』 71 (1999); 김조영, 「사서에 나타난 유학사상의 경제관연구」, 『한문고전연구』 32 (2016).

3) 정인재, 「유학과 기업윤리」, 『유교사상문화연구』 7 (1994).

4) 이상익, 「유가의 경제사상과 유교자본주의론의 타당성 문제」, 『철학』 66 (2001).

5) 최원혁, 「대순사상의 순환적 경제관 연구」 (대진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2).

6) 유학의 경제관은 주자(朱熹, 1130~1200)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7) 1141년에 맺은 紹興和議를 계기로, 남송은 金에게 세공으로 매년 은 3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바치기로 약속한다. 이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8), p.324.

8) 1貫은 1,000錢이다.

9) 이승환, 앞의 책, pp.325-328 참조.

10) 『朱熹集』 卷11, 「戊申封事」, “蓋臣竊觀今日天下之勢, 如人之有重病, 內自心腹, 外達四肢, 蓋無一毛一髮不受病者. 雖於起居飮食未至有妨, 然其危迫之證, 深於醫者固已望之而走矣. 是必得如廬扁華佗之輩, 投以神丹妙劑, 爲之湔腸滌胃, 以去病根, 然後可以幸於安全.”

11) 『朱熹集』 卷11, 「戊申封事」, “蓋天下之大本者, 陛下之心也. … 臣之輒以陛下之心爲天下之大本者, 何也. 天下之事千變萬化, 其端無窮, 而無一不本於人主之心者, 此自然之理也. 故人主之心正, 則天下之事無一不出於正; 人主之心不正, 則天下之事無一得由於正.”

12) 『朱熹集』 卷12, 「己酉擬上封事」, “臣聞天下之事, 其本在於一人, 而一人之身, 其主在於一心. 故人主之心一正, 則天下之事無有不正; 人主之心一邪, 則天下之事無有不邪. 如表端而影直, 源濁而流汙, 其理有必然者.”

13) 『朱熹集』 卷11, 「庚子應詔封事」, “天下國家之大務, 莫大於恤民. 而恤民之實, 在省賦, 省賦之實, 在治軍, 若夫治軍省賦以爲恤民之本, 則又在夫人君正其心術以立紀綱而已矣.”

14) 『朱子語類』 卷108, “天下事當從本理會, 不可從事上理會.”

15) 『朱熹集』 卷11, 「庚子應詔封事」, “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16) 『論語』 「憲問」, “見利思義.”

17) 『論語』 「里仁」,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18) 『論語』 「里仁」,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19) 『論語』 「述而」,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20) 『國語』 「晉語(2)」, “廢義則利不立.”

21) 『國語』 「晉語(4)」, “義以道利.”

22) 『左傳』 「僖公 27年」, “義, 利之本也.”

23) 『左傳』 「昭公 28年」, “居利思義.”

24) 『國語』 「晉語(1)」, “義以生利, 利以豊民.”

25) 『論語』 「述而」,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26) 『論語』 「顏淵」, “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 民信之矣.”(“자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양식이 충분하고 군비가 충분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

27) 『論語』 「堯曰」, “因民之所利而利之.”

28) 『孟子』 「梁惠王(上)」,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29) “왕이 무엇으로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면, 대부들은 무엇으로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고, 사·서인들은 무엇으로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다투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孟子』 「梁惠王(上)」, “王曰何以利吾國, 大夫曰何以利吾家, 士庶人曰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 而國危矣.”).

30) 『孟子』 「梁惠王(上)」,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31) 『孟子』 「梁惠王(上)」,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饜.”

32) 『孟子集註』 「梁惠王(上)」, “恒産, 可常生之業也, 恒心, 人所常有之善心也.”

33) “恒産이 없으면서 恒心이 있는 것은 오직 선비라야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의 경우는 恒産이 없으면 따라서 恒心도 없어집니다. 진실로 恒心이 없어지면, 방탕하고 사치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백성의 생업을 제정하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넉넉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르기에 넉넉하여 풍년에는 1년 내내 배부르고 흉년에는 굶어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런 뒤에 백성들을 몰아서 착한 데로 나아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쉬운 것입니다.”(『孟子』 「梁惠王(上)」,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 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 然後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

34) 『孟子』 「盡心(上)」, “菽粟如水火, 而民焉有不仁者乎?”

35) 최희남, 앞의 글, p.242 또는 p.263.

36) 『孟子集註』 「梁惠王(上)」, “仁義根於人心之固有, 天理之公也. 利心生於物我之相形, 人欲之私也. 循天理, 則不求利而自無不利; 殉人欲, 則求利未得而害已隨之. … 故孟子言仁義而不言利, 所以拔本塞源而救其弊, 此聖賢之心也.”

37) 『孟子集註』 「告子(下)」, “然其心有義利之殊, 而其效有興亡之異.”

38) 『朱子語類』 卷13, “今須要天理人欲, 義利公私, 分別得明白.”

39) 『朱子語類』 卷13, “凡一事便有兩端, 是底卽天理之公, 非底乃人欲之私.”

40) 『朱子語類』 卷13, “父母愛其子, 正也, 愛之無窮, 而必欲其如何, 則邪矣. 此天理人欲之間, 正當審決.”

41) 『朱子語類』 卷117, “好底是天理, 不好底是人欲.”

42) 『朱子語類』 卷15,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43) 『朱子語類』 卷78, “人心者, 人欲也. … 道心者, 天理也.”

44) 『朱子語類』 卷78, “只是一人之心, 合道理底是天理, 徇情欲底是人欲.”

45) 『朱子語類』 卷13, “人之一心, 天理存, 則人欲亡; 人欲勝, 則天理滅, 未有天理人欲夾雜者.”

46) 『朱子語類』 卷68, “如言存箇天理, 不須問如何存他, 只是去了人欲, 天理自然存.”

47) 『朱熹集』 卷42, 「答胡廣仲」, “天理人欲, 雖非同時竝有之物, 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 亦不得不爲對也.”

48) 『中庸或問』, “若夫人物之生, 性命之正, 固亦莫非天理之實. 但以氣質之偏, 口鼻耳目四肢之好, 得以蔽之, 而私欲生焉.”

49) 『朱熹集』 卷40, 「答何叔京」, “天理既渾然, 然既謂之理, 則便是箇有条理底名字. … 須知天理只是仁義禮智之総名, 仁義禮智便是天理之件数.”

50) 백도근, 앞의 글, p.94.

51) 김조영, 앞의 글, p.335.

52)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주자는 민생의 근본이 식량에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민생의 근본은 식량에 달려있고 식량을 넉넉히 하는 근본은 농사에 달려있으니, 이것은 자연스런 이치이다.”(『朱熹集』 卷99, 「勸農文」, “竊惟民生之本在食, 足食之本在農, 此自然之理也.”).

53) 『尙書』 「大禹謨」, “人心惟危, 道心惟微.”

54) 『中庸章句』 序,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心. …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自無過不及之差矣.”

55) 『朱子語類』 卷13, “飮食者, 天理也; 要求美味, 人欲也.”

56) 『朱熹集』 卷58, 「答黃道夫」, “天地之間, 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是以人物之生, 必稟此理然後有性, 必稟此氣然後有形.”

57) 『中庸章句』 第1章,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58) 『大學或問』, “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59) 『朱熹集』 卷36, 「答陳同甫」, “但取其獲禽之多, 而不羞其詭遇之不出於正也.” 詭遇는 정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것을 말한다. 사냥할 때 예법을 지키지 않고 짐승을 쏘아 맞힌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孟子』 「滕文公(下)」에서 유래한 말이다.

60) 『대순진리회요람』, 「강세」, p.10.

61) 『전경』, 예시 1절.

62) 같은 책, 예시 8절, 공사 1장 3절 참조.

63) 같은 책, 예시 6절.

64) 같은 책, 교운 1장 9절.

65) 같은 책, 교법 1장 1절.

66) 같은 책, 교법 3장 24절.

67) 같은 책, 교법 3장 4절.

68) 『대순진리회요람』, 「훈회」, pp.19-20 참조.

69) 『전경』, 행록 4장 48절.

70) 같은 책, 교법 3장 1절.

71) 같은 책, 교법 1장 24절.

72) 같은 책, 행록 3장 48절, “弊衣多垢勝金甲, 頹屋無垣似鐵城.”

73) 『論語』, 「述而」,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74) 『전경』, 교법 1장 64절.

75) 『自警文』은 신라의 원효가 쓴 『發心修行章』과 고려의 지눌이 쓴 『誡初心學人文』을 합본한 것으로, 『初發心自警文』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오늘날에도 불교에 출가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읽혀지는 대표적인 책이다.

76) 『雜阿含經』,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77) 『전경』, 교법 1장 11절.

78) 『大學』, 傳10章,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79) 『전경』, 교법 2장 55절.

80) 같은 책, 교법 1장 63절.

81) 『대순진리회요람』, 「훈회」, pp.18-19.

82) 『전경』, 교법 3장 24절.

83) 같은 책, 교법 2장 3절, “眞心堅守福先來.”

84) 같은 책, 교법 2장 7절.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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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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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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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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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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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集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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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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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或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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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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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或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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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章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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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阿含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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