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덕에 대한 담론은 덕이론(virtue theory)과 덕윤리(virtue ethics)로 나누어진다. 덕이론과 덕윤리를 최초로 구분한 줄리아 드라이버(Julia Driver, 1996)에 의하면, 덕이론은 덕의 속성과 관련된 개념들에 대한 광범위한 범위의 질문들을 다루고, 덕윤리는 덕이론의 질문들을 포함하되 덕이 ‘좋은 삶’과 ‘옳고 그른 행위’를 설명하는 핵심 기준이 된다.1) 이 글에서 다루는 덕은 덕이론의 입장에서 덕의 유래와 의미, 특징 등을 다룬다. 서양의 덕이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하며, 동양의 덕이론은 주로 공자와 맹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오늘날 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현대의 행위 중심 윤리관인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인간의 내면적 성품인 덕을 중심으로 한 윤리관을 세우려는 덕윤리 연구가 증가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 행위 중심 윤리관은 인간의 내면적 성품을 도외시하여 윤리적 행동이 형식과 외면에 치우쳐 진정한 인격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덕윤리가 대두되면서 칸트의 의무론이나 공리주의, 흄의 도덕감정 윤리관을 덕으로 설명하는 덕이론 연구가 이루어졌다.2)
덕이론의 입장에서 덕을 다룬 기존 연구를 보면 유교나 도교의 덕,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처럼 특정 사상의 덕 개념에 대한 연구와 서로 다른 사상의 덕 개념을 비교하는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특정 시대 또는 문헌에 나타난 덕 개념 연구도 있다.3) 이외에 유교의 덕윤리, 기독교의 덕윤리 연구처럼 특정 사상을 덕윤리로 바라보기 위한 덕 연구도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타종교 사상의 덕윤리 연구는 아직 서양의 덕윤리처럼 덕과 관련한 옳은 행위나 좋은 삶에 대해 체계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글은 앞으로 강증산의 덕윤리 연구4)를 위해 덕이론의 입장에서 강증산의 덕의 속성과 특징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는 지난번 「대순사상에 나타난 덕과 그 실천수행」(주소연·고남식, 2021)에서 살펴본 덕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비교를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 강증산의 덕을 덕윤리 이론으로 살펴보기 위한 기초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강증산의 덕이론이나 덕윤리 연구는 선행 연구가 거의 없어서 이글은 그 연구방법에서 주로 서양 덕윤리 학자들이 유교를 덕윤리로 바라보는 관점을 참고하였다. 이는 현재 동양사상 가운데 유교가 덕윤리로서 많이 연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상의 덕을 비교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을 비교한 지유안 유(Jiyuan Yu)와 윤영숙(2016)의 논문과 유교를 서양 덕윤리로 설명한 논문집 『Virtue Ethics and Confucianism』(2013) 등을 참조하였다.5) 동양의 사상인 강증산의 덕을 서양 이론인 덕윤리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소 무리일 수도 있고 강증산을 오히려 제한하는 틀이 될지 모른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유교 덕윤리를 언급한 외국의 학자나 황경식과 같은6) 연구자의 주장처럼 그것이 유교의 현대화에 긍정적일 수 있듯이 이런 시도가 강증산을 현대사회에 알리는 하나의 부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글은 대순사상의 연원(淵源)인 강증산(1871~1909), 조정산(1895~ 1958), 박우당(1917~1995)의 사상에서 주로 강증산의 사상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론을 비교해 보았으며, 덕이 갖는 형이상학적 기원과 관련한 덕의 속성을 비교한 후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한 성품이라는 덕의 목적론적 성격을 알아보고 그 대표적인 덕목을 찾아 보았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 사상에 나타난 덕의 속성을 각각 영혼과 이성, 도와 마음과의 관계를 대비시켜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성품’으로서 목적론적 덕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 대표적인 덕목을 소개한다. 이러한 덕의 정의는 로잘린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가 덕을 “인간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성품적 경향”7)이라고 한 목적론적 덕윤리로 덕을 정의하는 방식을 토대하였다. 이어서 Ⅳ장에서는 앞의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대순사상의 시원이 되는 강증산 사상을 중심으로 강증산의 덕이론을 유사점과 차이점으로 찾아보았다.
이를 통해 사상으로서 용어적인 면이나 학문적 성향에 있어서 그 설명의 층위가 다를 수 있으나 서양과 동양에서 언급해온 덕에 대한 논의가 그 근접점을 찾는 면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시련의 20세기 초를 지나 보편적 가치로서 현대사회의 인간성 상실을 치유하고 더 나아가 이상세계를 이루기 위한 면에서 동서양에서 의미가 큰 인간의 덕에 대한 논의가 한국 신종교사상을 한 축으로 활성화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Ⅱ.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 사상에서 덕관(德觀)의 기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영혼에서 나오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 나타난다. 영혼이란 용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인간이 죽은 후 육체를 떠나는 어떤 것으로 묘사되다가8) 이후 논리적(logos) 사유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아르케(arche)9)로서 변화와 운동의 원리로 인식되었다. 또한, 영혼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 능력과 관련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성이 영혼에 속하여 깊고 심오하며 올바른 감각과 인식능력이 가능하다고 보았다.10) 플라톤에서부터 영혼은 인간을 한 인격적 개체로 생기게 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영혼에 대해 “혼은 신적이며 사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과 동류의 것”11)이라고 하여 영혼을 영원한 생명력의 원인이자 인식과 사유의 원리, 육체를 주도하는 행위의 주체로 보았다.12) 플라톤의 영혼관은 이데아론과 함께 인간관과 윤리관을 세우는 근거가 된다. 영혼은 이데아와 감각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데 영혼의 이성의 활동으로 육체의 감각을 통제하여 모든 사물이 갖는 궁극적인 선인 이데아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영혼을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주체이자 생명으로 보았다.13) 그에게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며, 생명의 본질이고, 삶의 의미와 목적과 관련되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통일체인데 이때 영혼은 전체이며 육체 전체 안에 있다.14)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이 연결된 이데아는 초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의 세계에 있다고 보았다. 모든 개체는 형상과 질료로 되어있는데 이데아는 그러한 개별적 세계 안에 있으며 감각적 지각은 영혼에게 한 가지의 형상 또는 이데아에 관한 인식을 제공한다.15)
그는 인간의 영혼을 식물적인 영혼, 감각적인 영혼, 정신적인 영혼으로 구분한다. 식물적인 영혼은 성장과 영양, 생식에 관여하며, 감각적인 영혼은 동물에게 나타나는 낮은 수준의 욕구와 감각을, 정신적인 영혼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다른 부분의 영혼을 지배한다. 정신적인 영혼의 인식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신(logos)이다.16) 이러한 영혼에서 덕은 이성이 관여하는 영역에서 나타나는데, 아래 <그림 1>17)은 영혼의 세 가지 영역에서 덕이 되는 부분을 보여준다.
여기서 덕은 이성이 관계하는 부분으로 지적인 덕과 성품적 덕이 있다. 일차적 의미의 이성은 지적인 덕이, 욕구적인 부분은 성품적 덕이 관계한다. 영양과 성장에 관계된 식물적인 부분은 인간의 덕과는 관계가 없다.18) 이성의 부분 중 일차적 의미의 이성은 지혜, 지식과 같이 순수한 지성과 직관으로 이론적인 이성을 말한다. 이성이 욕구적인 것과 함께 있는 부분은 이성이 욕구에 명령하는 부분으로 실천적 이성이 관여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관계하는 성품적 덕이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설명하는 윤리적인 덕이다.
위 영혼의 구조에서 나타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이성의 기능과 관계가 있으며, 이성의 기능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속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인간의 존재 목적(telos)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덕(아레테, arete)은 바로 그러한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는 인간 기능(ergon)의 탁월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19)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은 어떤 개체의 고유한 기능을 잘 하여 그 무엇을 좋은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을 말하므로20) 인간의 덕은 인간 고유의 기능인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을 탁월하게 하는 성품을 가리킨다.21)
이성적 덕으로서 덕 개념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성찰’을 위한 앎(episteme)에 중심을 둔 주지주의적 덕을 강조했다. 플라톤은 도덕의 근거를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영혼의 일부분인 이성으로 보았다. “이성(nous)은 인간다운 삶의 주체인 동시에 가장 고차원적인 인식 주관이다.”22)라고 하여 인간은 영혼의 역할, 특히 이성(nous)의 작용을 통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영혼삼분설에 따라 이성의 덕인 지혜, 기개의 덕인 용기, 정욕을 지배하는 절제의 덕을 세우고, 이 세 가지 덕을 통일하는 정의의 덕과 함께 사주덕(四主德)을 주장하였다. 사주덕은 국가 구성원의 계층에 따른 덕으로 확대되어 국가적 선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23)
플라톤이 영혼의 이성에 의한 각 부분의 조화를 통해 국가적 조화를 이루는 것을 강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적 선의 실현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24) 개인이 추구하는 최고선이 에우다이모니아(행복)인데 그것은 탁월한 품성상태 즉 이성 활동의 탁월함을 갖춤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품적 덕에 관여하는 이성의 역할은 육체의 감정과 행위를 지배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 감정(pathos)과 능력(dynamis), 품성상태(hexis)라고 하였는데 덕은 품성상태에 대한 것이다. 감정은 즐거움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들이고 능력은 눈으로 보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행위를 말한다. 품성상태는 감정들에 대해 좋거나 나쁜 태도를 취하게 되며, 그 탁월성의 유무(有無))에 따라 덕과 악덕이 된다.25)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영혼 중에서 이성이 관계된 영역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품성상태의 탁월성의 유(有)로서 이성의 탁월한 활동에 의한 성품을 가리킨다. 또한, 덕은 “고통과 즐거움에 따라 나타나는 감정과 행위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올바른 이성이 명령할 방식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26) 그리고, “명령을 내리는 이성에 순응하여 이성을 따를 수 있는 영혼의 질”27)이 덕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덕은 이성에 의해 감정과 행위를 적절히 하는 것이다.28) 예를 들어, 중용의 덕으로서 용기는 두려움의 감정에 대한 적절한 대응인데 그것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간이다. 한편, 육체의 감정과 욕구, 행위를 지배하는 이성의 활동을 덕으로 본 것은 인간 행위의 동기에서 감정과 욕구를 중요시한 것으로, 이는 소크라테스의 인식 중심의 덕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때 이성이 육체적 감정을 지배한다는 것은 절제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성에 의한 덕이 습관을 통해 완전히 몸에 체득되어 감정과 욕구가 일체가 되어 자연스런 감정과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완전한 덕이다.29) 또한, 이성적 탁월함으로서 덕은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완전히 본성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덕을 함양하여 완성할 가능성으로서 본성을 가진 것이므로 그것이 이성적 활동에 의한 실천과 습관에 의해 함양되지 않으면 덕이 아니다.30) 따라서 그는 어린이나 이성 능력이 결여된 자는 덕이 없다고 하였다.
강증산의 덕은 기본적으로 동양의 덕 개념과 같이 도를 기원으로 하여 마음을 통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사상에서 도와 덕, 마음에 대한 개념과 그 관계에 대한 해석은 사상마다 다르지만 ‘도에서 덕이 나온다’는 개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에서 나오는 덕은 자연만물의 생성변화로 나타나는 측면과 인간의 윤리적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때 인간과 관련한 덕은 도와 연결되는 마음의 본체론적 차원과 도를 인사(人事)에서 실천하는 수양론적 차원으로 다루어지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성품적 덕과 대응하는 덕은 수양론적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증산의 도 및 마음과 관련한 덕을 살펴보기 전에 전통적 도와 덕과 마음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덕(德)의 어원적 의미는 척(彳)과 직(直), 심(心)이 합쳐진 글자로 바른 마음으로 가는 것이라는 뜻이 있고, 왕의 시찰이나 주술적인 능력, 높은데 오른다는 등의 뜻이 있다.31) 은대(殷代)부터 덕은 정치적 관념으로 등장하여 주대에 덕은 왕이 천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으로서 덕이 강조되었다. 왕의 덕은 위로는 하늘과 조상신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아래로는 백성에 대한 덕치를 의미하였다.32) 춘추시대에 철학적 의미에서 우주적 원리를 가리키는 도(道) 개념이 나오면서33) 덕은 도가 실현되는 자연의 양상과 도를 실현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적 성품을 가리키게 된다.
도와 덕의 관계는 특히 도교와 유교에서 찾을 수 있다. 도가에서 도와 덕(德)은 도와 덕은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계 또는 음양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덕’이라는 것을 우주의 운행 법칙인 ‘도’가 우주와 세상에 작용함으로써 발현되는 현상의 결과물로 보았다.34)
‘도’가 만물을 낳고 ‘덕’이 그것을 뿌리내리게 해주면, 만물은 형체를 갖추게 되고 도구는 그것으로 만들어진다.35)
유교에서 도와 덕의 관계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천은 인간이 합일하기를 추구하는 지향점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제공하는 근원적 존재이다. 천은 천명(天命)을 통해 만물을 주재하는데, 도는 그런 천명이 행해지는 자연의 원리이자 인간 삶의 근원이 되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천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 덕이다.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리요.”36)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덕은 자신에게 부여된 하늘의 뜻으로 누구도 범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가치이자 본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덕은 천명으로서 도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덕은 하늘에서 부여한 본성이란 의미에서 성(性)과 유사한 의미가 있으며 성은 마음에 내재한다. 『중용』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라고 하였다. 맹주만, 김나윤은 천명(天命)으로서의 성에 대해 맹자의 인의예지의 덕과 연결된다고 보고 덕은 성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한다.37) 또한, 주자는 “성은 실리로서 인의예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38)라고 하고, 천명의 성을 인의예지의 덕으로 설명하며 덕을 “도를 행하여 마음에 득한 것”39)이라고 하여 마음을 통해 덕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때 마음은 인욕(人慾)에 가릴 수 있으므로 마음의 본성인 명덕(明德)을 밝히는 수행이 필요하다. 이처럼 동양사상의 덕은 우주적인 측면과 인간적 측면에서 인성론과 수양론의 핵심 개념이 된다. 이때 덕은 마음과 관련하며, 마음에서 천명인 성으로서 덕을 행할 때 도에 이르게 된다.
강증산의 덕은 도에 기원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는 우주적 측면에서 천지의 덕이 있고, 인간과 관련하여 천성(天性)으로서의 덕과 도를 마음을 통해 실천하는 덕이 있다. 먼저 우주적 측면에서 도와 덕의 관계는 음양의 관계처럼 도가 만상의 존재법칙이고 덕은 그것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도에서 덕이 나오고 덕이 세상에 펼쳐지는 과정은 「현무경(玄武經)」의 다음 구절에서 나타난다.
도(道)가 있으면 덕(德)이 있고, 덕이 있으면 화육(化育)이 있고 화육이 있으면 창생(蒼生)이 있고 창생이 있으면 억조(億兆)가 있다. 억조는 당요(唐堯)를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기초동량이 마무리되었다.40)
여기서 덕은 창생을 화육(化育) 즉, 감화하여 기르는 역할을 한다. 억조는 창생이 번성하여 이룬 인류집단이라고 볼 때 상고 당나라 제요(帝堯)가 인류문명의 기초를 마련하여 인세에 덕이 펼쳐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도교나 유교의 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만물을 생육하는 덕이 궁극적 실재이자 인격적 신인 강증산 구천상제의 덕화(德化)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41)
또한, 도와 덕의 관계는 신격위가 구천상제인 강증산이 한국 땅에 강세하여 시행한 천지공사에 의해 새로운 특징을 드러낸다. 도는 상극에 지배된 세계질서를 상생으로 뜯어고치는 천지공사로 새롭게 열린 ‘천지대도(天地大道)’를 가리킨다. 천지공사는 인류와 신명계의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극이 없는 상생의 도로 우주의 구조를 재정립하는 대역사이다. 상생의 원리로 운용되는 천지대도에서 나오는 천지대덕은 천지인의 덕을 통합하며42) 천덕(天德)과 지덕(地德), 인덕(人德)이 통합하여 작용하는 삼덕(三德)으로 만물이 생장하고 인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천지인 삼계에서 인간의 고유한 역할과 관련한 덕은 요임금의 일에서 알 수 있다. 『전경』에 일월과 같은 자연현상은 그것을 알아주는 인간이 아니면 텅 빈 그림자인데 당요(唐堯)가 자연의 이치를 밝혀 창생의 생활에 인시(人時)를 전해주었고 이것이 곧 인류문명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43) 창생을 화육하는 것이 우주적 측면에서 구천상제인 강증산 성사의 덕화가 천지의 덕으로 펼쳐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역할로서 덕은 강증산 성사의 덕화로 펼쳐지는 자연의 이치인 천지대도를 알고 이를 인세에 펼치는 일이다. 그러한 인간 행위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덕은 천지대도를 펼치는 마음의 성품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덕은 먼저 천지대도를 인식하는 마음의 본체적 속성44)에서 비롯한다. 마음의 본체적 특성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인 양심45), 천지의 중앙으로서 마음46), 심령 또는 신과의 소통기관으로서의 마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본체론적 마음을 통해 인간은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우주적 주체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또 ‘리정심법(理定心法)’이라 하여 마음의 법을 리(理)영향하에서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내어 마음에 대해 그것의 존재가 어떠한 리(理)에 의해 구체적으로 강한 구속력을 갖는 것임을 대순사상은 표명하고 있다.47)
천지대도를 인식하여 그 이치를 인세에 펼치는 인간의 역할을 교법 3장 47절에서 ‘천지의 일에 참여하는 존재’로 언급하고 있다.48) 그 천지의 일은 인간의 마음 활동을 통해 가능한데, 다음 구절에서 ‘천지인의 작용을 마음을 통해 주재하는 존재’로 언급하여 마음과 관련한 인간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하늘이 비와 이슬을 적게 내리면 반드시 세상에 원망함이 있고, 땅이 흙과 물을 적게 쓰면 반드시 만물의 원망이 있으며, 사람이 덕화를 베풀기에 인색하면 모든 일에 원망을 맺을 것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덕을 쓰는 것은 모두 마음에 달려있다. (天用雨露之薄則必有萬方之怨, 地用水土之薄則必有萬物之怨, 人用德化之薄則必有萬事之怨, 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49)
여기서 용(用)은 작용, 쓰임, 베풂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천지의 용’은 천의 우로(雨露)와 지의 수토(水土)처럼 상제의 덕화가 구체적인 물질계로 구현되는 현상과 관계한다. 모든 생명의 자원이 되는 우로와 수토의 베풂은 천지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할은 인사에서 덕화를 베푸는 것인데 그것은 천지인의 작용을 주재하는 마음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본체론적 마음을 통해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우주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본성으로서 마음이 가려져 인간으로서 덕화를 베푸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50) 『대순진리회요람』에 보면 마음은 양심과 사심으로 되어있고, 천성 그대로의 본심인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생하는 욕심이며 사심에 사로잡히면 도리에 어긋나는 언행과 행동을 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라고 하였다.51) 이 구절을 볼 때, 양심이 정직과 진실함으로 나타난다면 사심은 마음을 속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양심을 밝히는 수행은 사심을 제거하고 마음을 속이지 않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마음은 선한 신뿐만 아니라 악한 신이 다 드나드는 통로이므로52) 악한 것은 고치고 선한 것은 배우는 수행이 필요하다.
이때 양심에 따르거나 사심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53) 따라서 마음을 닦는 수행은 자기 마음을 반성하는 수기(修己)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남을 향한 이타적 태도를 갖는 대인적 차원으로 덕 실천이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54) 이러한 대인적 차원의 덕 실천은 인간관계의 도리를 다하는 윤리도덕의 실천이 된다. 이는 『대순지침』에 “수도는 인륜을 바로 행하고 도덕을 밝혀 나가는 일”이라고 하고, “덕은 도를 닦는 근본”이며 “덕은 곧 인성(人性)의 신맥(新脈)이며, 신맥은 정신의 원동력이므로 이 원동력은 윤리도덕만이 새로운 맥이 될 것이다.”55)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윤리도덕의 덕이 인간 정신의 새로운 맥이라는 것은 지금 인류가 가져야 할 덕이 윤리도덕을 위한 덕이며 따라서 수도의 핵심은 윤리도덕에 있고 그것은 덕의 함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윤리도덕을 위한 덕은 『전경』에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56)라고 하였듯이 ‘남을 잘 되게 하는 성품’으로서의 덕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음 수행에서 나오는 성품으로서 덕은 자신을 고쳐나가는 개인적 차원의 덕과 남을 잘 되게 하는 대인적 차원의 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개인적 차원의 덕은 자기 수양의 덕으로서 마음 속 사심을 제거하고 나쁜 신을 고치는 마음의 의지로서 덕이고 대인적 차원의 덕은 남을 잘 되게 하는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악덕은 의지가 없이 사심과 악한 것에 따른 성품으로 남을 미워하고 척을 맺는 것이 된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와 덕과 악덕이 나오는 도식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의 구조 | 마음의 의지를 통한 수행 | 개인적 덕/악덕 | 대인적 덕/악덕 | |
---|---|---|---|---|
마음 | 양심 (천성 그대로의 본심) | 선한 것은 배우고 악한 것은 고치기 | 덕 | 남을 잘 되게 하는 덕 |
사심을 제거하고 양심에 따르기 | 덕 | |||
사심 (물욕에 의한 욕심) (선하거나 악한 신의 드나듦) | 악한 신을 따르거나 사심을 따르는 경우 | 악덕 | 남을 미워하거나 척을 맺는 악덕 |
이처럼 강증산에게서 인간의 덕은 사심과 악한 신이 드나드는 상태의 마음이 아니라 양심에 따르고 선한 것을 본받아 본성을 회복하려는 마음 수행에서 나오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에 대해 본성의 훌륭한 상태라고 한 것처럼 인간 본래의 청정한 본질로서의 마음을 회복한 훌륭하고 좋은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마음의 의지는 남을 잘 되게 하는 덕을 행하게 되는 전제가 되므로 개인적 및 대인적 차원의 덕은 서로 분리되는 덕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은 형이상학적 기원이 있고 그것을 인식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이성과 마음의 고유한 역할로서 인간의 덕이 있다는 것 점에서 유사한 속성이 있다. 다만 형이상학적 기원으로서 영혼과 도와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이성과 마음은 서로 다른 측면이 있고 그 의미 또한 다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본성이라기보다 후천적인 교육과 습관 형성으로 갖게 되는 성품인 반면 강증산의 덕은 우주적으로 연결된 마음과 함께 인성의 맥으로 가진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욕구와 감정을 조절하는 이성 활동의 탁월함이며 강증산의 덕은 청정한 본질로 회복하려는 마음 수행에서 나오는 성품이다. 그런데 덕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 또는 역할과 관련하여 추구하는 인간이 삶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덕의 개념은 인간이 덕을 갖춤으로써 실현하고자 하는 선에 대한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데 이것을 다음에서 살펴보겠다.
Ⅲ. 목적론적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에서 나오는 인간의 최고선이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에 의하면 그리스 윤리학은 에우다이모니아의 윤리학이며, 최고의 선은 에우다이모니아이고 인간은 그것을 추구한다.57) 에우다이모니아는 영어로 행복(happiness), 번영(fluorishing), 잘 사는 것(living well) 등으로 번역되는데,58) 그것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기술과 탐구, 모든 행위는 어떤 선을 목표로 한다고 하였다. 선 또는 좋음(善, good)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른데 그것은 각자 추구하는 삶의 유형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다. 삶의 유형은 향락적인 삶, 정치적 삶, 관조적 삶이 있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향락적인 삶은 짐승과 같은 삶이며, 정치적 삶은 교양이 있거나 실천적인 사람이 추구하며 이들에게 명예가 좋음이지만 명예는 피상적인 것이다. 관조적 삶은 지혜를 추구하는 삶인데.59) 이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의 활동에 의한 관조적 삶이 추구하는 좋음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인간의 최고선인 에우다이모니아와 연결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의 좋음 중에서 가장 큰 선이며60), 인간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최고선으로서 목표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 모두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행한다”61)라고 하였듯이 인간이 명예나 즐거움,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삶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최고선의 하위에 있는 다른 선들도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즉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덕에 부합하는 이성의 활동 외에도 외적인 선으로서 부유함, (노예가 아닌) 좋은 태생, 건강,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 같은 것도 필요하다.62)
더 나아가 에우다이모니아는 개인적인 선이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선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사상은 당시 아테네에 팽배했던 상대주의와 윤리적 타락을 바로잡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은 아테네 공동체의 윤리적 회복과 공동선으로서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한다. 인간은 덕성을 통해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지만 인간적인 좋음은 궁극적으로 아테네 공동체인 폴리스의 좋음을 위한 것이다.63) 이런 의미에서 에우다이모니아는 이데아와 같은 절대적 진리라기보다 현세의 인간과 사회가 추구하는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하기 위해 내적인 선으로서 도덕적 덕뿐만 아니라 외적인 선으로서 재산이나 좋은 신분을 포함하였듯이 오늘날 덕윤리에서 에우다이모니아는 세속적인 행복을 포함한 좋은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하기 위해 덕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덕은 ‘이성의 활동을 탁월하게 하는 것’인데 그 탁월함의 기준이 중용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은 중용의 덕이다. 덕은 완전히 본성적으로 올바른 인간의 행위를 가리키는데64) 올바르다는 것은 결국 ‘중용’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중용은 다음 구절과 같이 모든 측면에서의 적중함을 가리킨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덕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위에 관련해서도 지나침과 모자람, 그리고 중간이 있다. 그런데 덕은 감정과 행위에 관련하고, 이것들 안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이 잘못을 범하는 반면, 중간적인 것은 칭찬을 받고 또한 올곧게 성공한다. 이 양자가 덕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덕은 중간적인 것을 겨냥하는 한 일종의 중용이다.65)
이러한 중용의 덕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구체적인 예는 『에우데모스 윤리학』에 나오는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온화, 용기, 정의, 절제 등의 덕은 모두 중의 상태에 있는 성품을 가리킨다. 즉 덕은 양극단을 지양하고 그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지나침과 모자람은 악덕이 되고, 그 중간이 덕이 된다.
과도함 | 부족 | 중용의 덕 |
---|---|---|
성마름 | 무신경 | 온화 |
무모 | 비겁 | 용기 |
몰염치 | 쩔쩔맴 | 염치 |
방종 | 무감각 | 절제 |
시기 | (용어 없음) | 의분 |
이득 | 손해 | 정의 |
낭비 | 인색 | 후함 |
허풍 | 자기 비하 | 진실성 |
아첨 | 무뚝뚝함 | 친애 |
이때 성품적 덕을 실천하는 과정에는 중간이 무엇이냐를 판단하는 지혜 즉 지적인 덕이 관여한다. 행위자가 처한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목적, 그 상황과 대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등에 대한 실천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이처럼 성품적 덕의 실천은 지성적 덕에 의한 합리적 선택과 이를 실천하는 실천적 지혜, 감정적인 자발성 모두를 포괄하는 이성적 활동의 복합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세 가지 실천적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 중간에서 더 대립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둘째, 비틀어진 나무를 곧게 펴는 것과 같이 쉽게 기울어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 셋째, 즐거움을 경계하기이다(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고초를 겪는 일을 경계하는 것과 같이).67) 이것을 개별적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실천하여 중용의 덕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에 의한 중용의 실천을 지속적으로 하여 습관화하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며, 성품적 덕을 함양하여 좋은 삶 또는 행복을 이루는 것을 인간 삶의 목표로 삼는다. 덕이 있는 자는 선하며, 좋은 삶을 사는 것이며 행복한 것이다.
해원상생(解冤相生)은 강증산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실천이념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추구하는 좋은 삶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에 비교할 수 있다. 강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대순사상에서 수도의 목적은 정신개벽과 인간개조를 통한 지상신선실현과 지상천국 건설에 있는데, 해원상생은 이러한 목적이 사회적으로 구현된 화평의 경지로 모두가 덕을 갖추어 실현하고자 하는 좋은 삶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해원상생은 전 세계의 평화이며 전인류의 화평이다. 전세계 인류의 화평이 세계개벽이요 지상낙원이요 인간개조이며 지상신선이다. 인류가 무편무사하고 정직과 진실로서 상호 이해하고 사랑하며 상부상조의 도덕심이 생활화된다면 이것이 화평이며 해원상생이다.68)
이처럼 해원상생은 인류와 세계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 해원상생은 ‘원을 풀고 서로를 살린다’는 뜻인데, 나아가 그 관계는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인 삼계의 신명과 자연 만물을 아우른다.
강증산 사상의 핵심은 전(全)우주적 해원과 상생이다. 상고시대 요(堯)로부터 제위(帝位)를 전수받지 못하여 포원(抱冤)한 아들 단주(丹朱)의 맺힌 원(冤)로부터 시작되어 우주에 퍼진 인류역사 속 ‘원(冤), 원한(怨恨)’의 해결인 해원(解冤)과 이후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상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상생(相生)의 천지대도(天地大道)이다.69) 해원상생은 에우다이모니아처럼 개인적인 선과 공동체적 선을 포함하는 좋은 삶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70) 먼저 개인적 선으로서 해원상생은 자기 마음에서 먼저 원을 푸는 것에서 시작하여 더 이상 원과 척을 맺지 않음으로써 이룰 수 있다. 개인의 좋은 삶을 위해서 해원상생이 필요한 것은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의 원한이나 원망이 척이 되어 앞길을 막기 때문이다.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남에게 억울한 원한을 짓지 말라. 이것이 척이 되어 보복하나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71)
여기서 척은 남을 억울하게 만들거나 미워한 것이 나에게 보복으로 되돌아오며 여기에는 신명의 작용이 수반됨을 알 수 있다. 신명은 마음 속을 드나드는 존재로서 인간 마음에 품은 의도를 다 읽으므로 척을 맺지 않기 위해서는 누가 말하거나 보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마음을 반성하여 마음에서부터 해원상생을 이루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미 생긴 원에 대한 해원은 원수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악을 선으로 갚는 용서를 통해 시작하며72) 원을 막기 위해서는 남을 미워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을 반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마음의 의지로서 노력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심을 제거하고 마음 속에 드나드는 신 가운데 선한 것을 배우고 악한 것을 고치는 것인데 이것이 곧 무자기(無自欺)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반성하여 속임이 없는 무자기에 대해 수칙에 “무자기는 도인의 옥조(玉條)”73)라고 한 것과 같이 수도의 가장 근본이 됨을 알 수 있으며, 또 대순진리회 목적의 첫 번째 항목에 ‘무자기-정신개벽’74)이라고 하여 정신개벽이 무자기에 의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과오를 경계하기 위하여 예부터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自欺自棄)이요, 마음을 속이는 것은 신을 속임이다(心欺神棄).”라고 하였으니, 신을 속이는 것은 곧 하늘을 속임이 되는 것이니 어느 곳에 용납되겠는가 깊이 생각하라. <83.6.24>
이처럼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은 신과 하늘을 속이는 일로서 결국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큰 과오를 만들게 된다. 무자기는 양심을 속이지 않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무자기는 의무론적 근거로 볼 수도 있고75) 수도의 목적이자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자기는 수도에서 자발적으로 마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성품이 되어 이를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거짓을 말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정직이나 진실의 덕으로 볼 수도 있다.76) 도전(都典) 박우당(朴牛堂)은 “무자기(無自欺)를 바탕으로 수도에 만전을 기하라”77), “성경신을 무자기로 반영”78)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무자기가 수도와 덕을 행함에 있어 내면의 불일치가 조금도 없는 성품으로 굳게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에 무자기를 중요한 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자기는 척을 짓지 않고 남을 잘 되게 하는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출발점라 할 수 있다.79) 자신을 고치는 덕이 남을 잘 되게 하는 기초가 되는 것은 무자기의 ‘자기(自欺)’의 의미가 단지 거짓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속될 때 더 나아가 남을 해하거나 억압하는 것 등을 가리키는 데서 알 수 있다. 도전은 “거짓이란 위세를 부려 지위를 노리는 것, 자존(自尊)으로 남을 멸시하는 것, 공리(功利)를 과장하기 위하여 자기 사람을 만들기에 힘쓰는 것, 허물을 은폐하기 위하여 아첨하는 것 등이니, 이러한 일을 시행하는 자는 허구심(虛構心)에 여념이 없는 법이다.”80)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기를 속이는 거짓은 곧 남을 함부로 대하는 행위로 이어지므로 무자기가 해원상생을 위한 수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원상생은 공동체적 선이라 할 수 있는데 해원상생은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조화(調和)와 화합을 이루는 화평의 삶을 가리킨다. 개인의 좋은 삶은 남과 공존하는 삶에서 이루어지므로 타인과의 조화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일인데 이때 상호이해와 상부상조가 무자기라는 진실한 성품에서 이루어지므로 어떤 외적인 계약이나 목적을 위해 상호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해원상생에 의한 좋은 삶은 서로가 있어서 감사하기에 타인에 대해 보은하는 자세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룰 수 있다. 또한 강증산의 마음은 원한이 생기는 곳이기도 하므로 서로의 원을 이해하고 이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 강증산에 의하면 원한은 이 세계가 진멸할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이므로 하나의 원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해원상생의 근본 원리이다. 그러한 해원을 위해서는 상생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상생은 서로가 있어서 살 수 있는 호혜적 관계인데 그것은 ‘남을 잘 되게 해야 내가 잘 되는’81) 적극적인 의미의 호혜성을 갖는다.
해원상생을 오늘날의 행복한 삶의 의미로 볼 때 모두가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며 그 개인의 행복은 상생을 지향하는 가운데 이룰 수 있다. 좋은 삶으로서 해원상생은 자신의 행복과 나와 함께 공존하는 모든 존재의 행복을 서로 추구하는 진정한 화합과 평화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해원상생을 실현하려 하는 덕을 갖는 것이 자신과 세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원상생은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함양해야 할 덕은 자신에 대한 덕과 대인적인 것이 있다. 무자기가 개인적 차원에서 해원상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대표적인 덕이라면 사회적 차원에서 남에게 척을 짓지 않고 남을 잘 되게 하여 해원상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덕은 대표적으로 대인대의(大仁大義)라고 할 수 있다. 척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사랑과 존중의 마음에서 대하는 덕은 언덕(言德), 음덕(陰德)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든 덕을 포괄하는 덕이 대인대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교의 인의가 다른 확장적 덕을 포괄하는 것을 참고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해원상생은 인간뿐만 아니라 신명, 자연, 동물 등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의의 범위를 천지인 삼계의 세상으로 확대한 덕으로서 대인대의가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강증산의 인(仁)은 “편벽된 사랑도 편벽된 미움도 용납하지 않음을 인이라 한다(不受偏愛偏惡曰仁)”라고 하여 인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의(義)는 올바름의 척도, 은혜에 보답하는 은의의 의미 외에도 “어떤 것도 전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不受全是全非曰義)”라고 하여 상호이해와 화합의 의미를 강조한다.82)
이때 대인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살리고자 하는 호생(好生)의 덕과 관련이 있다. 강증산은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 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교운 1장 16절)라고 하였다. 대의는 ‘대의명분’과 같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도리나 본분으로서 은혜에 보답하는 은의(恩義)의 의미가 강조된다. 도전(都典)은 “보은상생은 사람의 도리로서 대의(大義)가 되며 대도(大道)가 된다”83)고 하였다. 대의는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생과 수명과 복록은 천지의 은혜이니 성·경·신으로서 천지 보은의 대의(大義)를 세워 인도(人道)를 다하고”84)라고 하였둣이 그 대상이 인간의 존재 근원인 상제로 확대된다.
또한 강증산이 대인대의에 대해 “대인대의무병(大仁大義無病)”85)이라고 하여 모든 병을 치유하는 중요한 가치로 언급하고 있다. 병의 원인은 무도(無道)함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불통(不通)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해원상생은 그러한 불통을 모두 해소하고 가장 이상적인 화합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대인대의는 해원상생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관계의 모든 불통을 상생으로 통하게 하는 덕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스스로 속임이 없다는 무자기와 신명계와 통할 수 있는 경지의 큰 인의(仁義)를 지닌다는 대인대의는 해원상생과 관계가 있는 인간의 덕이므로 해원상생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에 해원상생에 따라 다양한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덕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에 비교할 수 있지만 강증산의 지혜는 마음의 원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다. 원과 척이 신명에 의해 먼저 일어나기도 하므로 신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도 필요하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강증산의 덕을 정리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영혼의 이성 활동의 탁월함이며 에우다이모니아라는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덕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다. 이때 대표적인 덕이 중용의 덕인데 그것은 이성에 의해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감정과 태도를 갖고 상황에 마땅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성품이다. 강증산의 덕은 청정한 본질인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수행에서 나오는 성품이며 해원상생을 실현하기 위해 갖춰야 할 덕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목적론적 성격이 있다. 이때 해원상생 실현을 위한 덕은 자신의 사심을 고쳐나가고 양심을 지키는 무자기의 덕과 인간과 신명,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인의를 베푸는 대인대의의 덕이 있다. 중용의 덕의 특징이 이성에 의한 욕망과 감정의 통제에 있다면 무자기와 대인대의는 욕심에 의한 사심을 제거하는 마음의 의지와 함께 남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남을 잘 되게 하는 정서적 측면과 천지와 부모 등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대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측면이 강조된다.
Ⅳ.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론 비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은 좋은 삶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덕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목적론적 덕의 특징은 세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나 역할이 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ergon)은 이성의 활동이며 그것을 탁월하게 하는 성품이 덕이다. 강증산 사상에서 인간의 고유한 역할은 천지의 일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러한 덕은 마음 수행을 통해 해원상생의 도를 실천하는 성품이다. 두 사상이 인간의 역할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다르지만 존재의 목적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본다는 관점은 같다.
둘째, 인간의 고유한 기능 또는 역할로서 덕이 있는 것은 인간이 덕을 실천하여 존재 목적을 다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것은 도달해야 할 지향점이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로서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에우다이모니아이며 강증산에서는 해원상생이 된다. 에우다이모니아와 해원상생은 ‘이데아’와 ‘도’처럼 절대적 진리의 차원보다는 인간 삶의 현실적인 지향점을 가리킨다.
셋째, 선(善)을 지향해 고유한 기능을 완성하는 덕 함양의 과정이 자아실현의 발전적 과정이라는 면이다.86)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사물들의 실체 또는 본성은 항상 어떤 것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87) 이런 의미에서 존재에 대한 설명은 기능과 목적이 중심이 되는데 기능은 하나의 가능태가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telos)을 의미한다.88) 마찬가지로 강증산 사상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목적론적 입장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서술로 많이 표현된다.89) 강증산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쓴다”90)라고 하였는데, 이는 도가 구현되는 원리로서 태어나 성장하고 결실을 맺는다는 발전과정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91)이라고 하여 인간이 각자 고유한 씨앗을 키워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과정을 거치는데 같은 씨앗이라도 어떤 꽃을 피우느냐에 따라 결실이 좋거나 나쁠 수 있으므로 인간의 덕 함양의 노력이 더욱 강조된다.
두 번째 유사점은 덕의 실천에 있어서 실천적 지혜가 필수적이라는 면이다. 실천적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올바른 성품 상태인 중용의 덕을 완성하는 이성적인 지혜로서 일반적인 도덕적 지식 외에도 반복적 덕 실천을 통해 얻은 경험적 지식과 감정과 욕구에 대응하는 성숙한 태도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무자기와 대인대의의 덕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92) 실천적 지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지(智)와 대응하는데, 인의예지 사덕에서 지가 덕을 완성하는 역할로 보는 점을 볼 때 덕의 실천은 지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93) 덕이 ‘해원상생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성품’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남에 대한 사랑의 마음만으로 이룰 수 없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은 덕의 기초가 되지만 그것이 해원상생이 되게 하려면 나와 상대방의 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상생이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원과 척에 대해서는 신의 작용과 천지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보다 확장된 앎을 요구한다.94)
세 번째 유사점으로 지속적인 덕의 함양과 실천의 과정이 요구되는 면이다. 위의 실천적 지혜는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므로 덕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수행 과정에서 성숙해지고 따라서 올바른 덕 실천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과 습관화에 의한 덕의 함양을 말하였고, 강증산 사상에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심을 제거하고 마음에 서 악한 것을 고치고 남을 잘 되게 하는 덕의 함양은 도덕적 지식과 실천적 지혜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덕 수행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도덕적 지식은 이론적인 것으로 강증산의 교리 및 규범 등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되며 실천을 위한 지혜는 도덕적 지식을 바탕으로 포덕(布德)95)을 비롯한 신앙생활을 통한 지속적인 덕 실천의 과정에서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네 번째 유사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 중(中)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은 모든 상황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감정과 태도, 대상, 행위방식으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잘 대응하는 태도와 명확한 판단 등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성품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강증산의 덕은 지혜를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중하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대인대의의 덕이 포괄하는 덕 가운데 인의예지신은 유교와 의미가 조금 다른데 그 특징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에 나타나는 중의 의미와 통하고 있다. 인(仁)은 좋아함과 미워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 의(義)는 전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도 없는 것, 예(禮)는 완전히 강하거나 편하지 않는 것으로 『대순지침』(p.9)에 “평범하면서도 적중함”이라고 하고, 지(智)는 자만하지도 방종하지도 않는 것을, 신(信)은 물욕과 욕심에 지나치지 않음을 뜻한다.96)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론은 전체적으로 목적론적 덕의 성격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실천적 지혜와 덕 함양을 통한 인격적 자아완성의 발전과정이 있다는 면 또한 목적론적 속성에서 비롯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유사점은 덕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측면에서 적중하기를 지향하는 중(中)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때 강증산의 덕에 나타난 중의 의미는 특히 서로 간의 조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강증산의 덕은 형이상학적 기원이 있고, 그것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기능이 각각 이성과 마음을 통해 나타나고, 거기서 훌륭한 성품으로서 덕이 나온다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대응하는 개념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차이점을 세 가지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덕과 관련된 영혼과 도 개념은 서로 다른 측면이 있다. 덕의 형이상학적 기원으로서 도는 일반적으로 만물의 근원 또는 그 원리를 가리키는데 영혼은 아르케인 원리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나 생명의 근원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98)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은 형상을 가진 질료로서 실체99)를 가리키므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분리될 수 없는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도는 추상적인 근원적 가치로서의 개념이 두드러진다. 이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을 비교한 지유안 유(Jiyuan Yu, 2007)가 도를 인간의 좋음(human good)을 가리키는 선 가치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에 대응한다고 한 면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강증산의 도에서 나오는 덕은 인간 차원의 덕 이전에 천지인 삼계의 덕으로 펼쳐지는 우주적 차원의 측면이 있어서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계로 나타난다. 이에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은 그 자체가 인간적 실체를 가리킨다고 보아 영혼에서 나오는 덕은 인간적 차원의 덕으로 한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덕과 연결되는 이성과 마음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이성과 마음은 어떤 성품을 덕이 되게 하는 작용을 하는 인간의 지적 활동이 일어나는 곳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 이성 활동의 탁월함이라 할 때 이성은 진리를 인식하고 육체의 감정과 욕구를 통제하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영혼의 측면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강증산의 마음관은 동양사상의 마음 개념이 일반적으로 heart-mind로 영어 번역이 되는 것과 같이 진리를 인식하고 사고하며 몸을 주관하는 정신적 측면(mind)과 함께 감정이라는 정서적 측면을 포함한다.100) 또한 강증산의 마음관은 천지인 삼덕 가운데 하나로서 덕을 베푸는 작용을 하고 신이 드나들며 인간의 마음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강증산과 달리 천부(天賦)적인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대해 인간 본성과 관련한 우주론적 측면이 결여된 것으로 보는 의견과 관련이 있다.101)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적 덕은 본성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본성에 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본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습관을 통해 완성시킨다”102)라고 하였다. 덕은 반복적인 행위에 의한 습관을 통해 형성되는데 이때 습관은 본성에 반하여 형성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덕을 갖출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지만 인간이라고 누구나 덕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이성적 활동에 의한 실천과 습관에 의해 함양되지 않으면 덕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어린이나 이성 능력이 결여된 자는 덕이 없다고 하며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고 교육에 의한 덕의 습관화를 강조한다.
이와 달리 강증산의 덕은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부여된 본성으로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마음은 천지의 중앙이며 신이 거하는 자리로서 우주적으로 연결되는 본성이며, 그 본성은 마음 수도를 통해 인간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돌아갈 때 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가 된다. 이때 덕이 인성(人性)의 신맥으로 정신의 원동력이 되고 덕이 도를 닦는 근본이므로 덕은 마음을 통해 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본성의 측면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좋은 삶으로서 에우다이모니아와 해원상생을 살펴보면 첫째, 그 좋은 삶이 포함하는 대상의 범주가 다르다. 에우다이모니아가 인간과 인간사회에 국한된 것이라면 해원상생은 인간과 신명, 동식물과 자연을 포함한 천지인 삼계에 대한 개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하기 위한 덕이 인간중심에 있다면, 강증산의 해원상생을 실현하기 위한 덕은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오늘날 자연만물을 대상으로 한 생태론적 덕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측면은 무자기의 덕이 자기를 속이지 않는 성품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자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신과 하늘에 대해 진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에서 볼 수 있고, 대인대의의 경우 천지의 은혜와 부모, 사회 등 자기를 존재하게 해준 모든 존재에 대해 큰 어짊과 의로움을 펴는 덕으로 신인(神人)관계의 덕이자 모든 인간 관계에서 막힘이 없게 하는 덕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하기 위한 덕으로서 중용의 덕은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이성의 역할이 강조된다면 해원상생을 실현하기 위한 무자기와 대인대의의 덕은 자기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측면 외에도 남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서적 측면이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 이성과 관련되고 강증산의 덕이 마음과 관련되는 차이와도 관계된다. 먼저 감정의 측면에서 이성과 마음은 서로 다른 특징이 있다. 감정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 사상에서 인간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면은 같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을 통제 대상으로 보고 강증산 사상에서 감정은 덕을 행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이것은 덕이 본성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강증산의 덕은 맹자의 사단(四端)과 같이 남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공감, 이해의 감정이 덕행의 동기가 된다. 이것은 강증산이 종도들에게 읽어준 팔불가근(八不可近)에 대한 글103)에서 ‘인정(人情)’을 여러 가지 덕이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밑바탕으로 본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 덕윤리 유형 가운데 로잘리 허스트하우스 등의 신(新) 아리스토텔레스(neo-Aristotelian) 덕윤리와 마이클 슬로트 등의 행위자 기반(agent-based) 덕윤리의 감정에 대한 입장 차이와 비슷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한 덕은 올바른 감정과 태도가 필요한데 그것은 이성에 의한 실천적 지혜로 나온다. 행위자 기반 덕윤리는 내면의 감정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감정주의 덕윤리(sentimentalist virtue ethics)라고 하며 이성에 의한 실천적 지혜보다 행위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상대방에 대한 따뜻한 감정으로서 자비나 보살핌의 성품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도덕 이론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성품은 이성과 감정이 잘 조화된 것인데, 오늘날 덕윤리는 이성에 의한 실천적 지혜를 강조하는 입장과 감정 중심의 덕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뉜다.104)
강증산의 마음의 덕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무자기와 남을 사랑하고 보은하는 대인대의의 덕이 있다는 점에서 그 두 입장을 통합적으로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되는 감정주의 입장으로 볼 때 강증산의 마음의 덕은 정서적 공감이 더욱 깊은데 그것은 마음이 원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105) 원(冤)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과 욕구의 영역 즉, 서운한 감정, 미워하는 감정, 인정받지 못하여 생긴 억울함 등의 감정과 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 불만족에서 나온다. 이러한 원은 삼계를 가득 채워 세상을 진멸지경에 빠트려서 강증산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해원’에 두었다. 이는 강증산이 윤리의 문제를 감정과 욕구의 ‘통제’ 외에 그것의 ‘인정’과 ‘올바른 행위의 방법’의 차원으로 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감정과 욕구의 차원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에 의한 통제’ 중심의 덕에서 더욱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마음의 덕은 관계적 덕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가지는 탁월성일 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성이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강증산 사상의 무자기와 대인대의의 덕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남에게 척을 짓지 않게 하는 대인관계적 태도이다. 원을 일으키는 감정과 욕구, 즉 서운하거나 억울한 감정,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주로 대인관계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마음의 덕은 자기 자신의 통제뿐만 아니라 남과의 관계를 잘 하는 성품이다.106) 강증산 사상의 덕의 관계적 특징은 동양의 덕이 전통적으로 인간관계에 기초한다는 것과 상관이 있다. 하지만 강증산 사상의 덕은 마음으로 서로의 원을 이해하는 덕이므로, 유교의 신분관계에 따른 덕이 강조되는 것과 다른 점이 있다. 이때 언덕(言德)이 관계적 덕으로서 중요한데 그것은 말은 마음의 소리로서 남을 잘 되게 해주는 덕이 말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107)
Ⅴ. 맺음말
오늘날 규범윤리 중 하나인 서양의 덕윤리는 행위보다 행위자의 성품에 중심을 둔 윤리이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론에 기초하여 발전하였다. 본고는 강증산의 덕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론과 비교하여 살펴봄으로써 그 특징을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Ⅱ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의 속성을 살펴보기 위해 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로서 영혼과 도를 살펴보고,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이성과 마음을 통한 덕이 인간의 고유한 역할로서 덕임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영혼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간의 고유한 역할로서 덕은 이성 활동의 탁월성이다. 강증산에서 인간은 천지인 삼덕을 구성하는 존재이며 그 고유한 역할로서 덕은 도를 마음을 통해 인식하여 그것을 삶에 구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천지의 일에 참여하는 존재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사심으로 본성인 양심이 가려지고 악한 신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마음 수행이 필요하다. 양심을 밝힌다는 것은 결국 이기적인 사심을 제거하여 남을 잘 되게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덕은 마음 수행에서 나오는 것으로 개인 차원에서 마음의 의지로써 사심을 제거하고 악한 것을 고쳐 양심을 밝히는 성품과 대인적 차원에서 남을 잘 되게 하는 성품으로서 덕을 설정하여 보았다.
다음으로 Ⅲ장에서는 두 가지 덕이론이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론적 덕의 성격이 있으므로 각 각의 좋은 삶 개념을 알아보고 그와 관련된 덕목을 알아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이 모든 행위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며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의 활동을 탁월하게 함으로써 얻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은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성품으로서 대표적인 덕이다. 강증산의 좋은 삶은 개인과 사회, 천지인 삼계의 관계가 완전한 화합과 화평을 이루는 이상적 삶의 지향점으로서 해원상생으로 보았다. 해원상생은 남에게 척을 짓지 않고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인데 그러한 성품으로서 덕은 무자기와 대인대의가 있다. 무자기는 양심과 진실함을 지키는 덕으로 사심을 버림으로써 남을 잘 되게 하는 대인대인의 덕을 실천할 수 있다. 대인대의는 인간과 신명, 자연 만물을 대상으로 하는 덕이며 해원상생을 위해 모든 관계의 불통을 치유하는 덕으로 간주된다.
Ⅳ장에서는 앞의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론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 살펴보았다. 유사점은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 목적론적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목적론적 특징은 인간의 고유한 역할로서 덕이 있고, 덕을 갖춤으로써 지향하는 좋은 삶이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덕 함양과 실천의 과정이 발전적인 자아실현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또다른 유사점은 덕을 실천하기 위해 올바른 판단과 성품태도를 갖추기 위한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 그러한 실천적 지혜에 의한 덕 실천은 지속적인 교화와 덕 함양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인간완성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유사점은 두 사상의 덕이 공통적으로 중의 의미가 있다는 점인데 강증산의 덕에서 중의 의미는 조화와 화합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차이점은 덕의 속성에 나타나는 차이와 좋은 삶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덕의 특징에서 나타나는 차이로 살펴보았다. 덕의 속성에 대한 차이는 첫째, 덕의 기원으로서 영혼과 도는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영혼은 주로 형상을 가진 질료로서 인간적 실체를 가리키므로 영혼의 덕은 인간적인 차원에 한정되지만, 도는 덕과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계를 이루며 천지의 덕으로 펼쳐진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강증산의 덕과 달리 천부적인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교육과 습관화를 통해 획득하는 성품이라면 강증산의 덕은 마음의 본체론적 측면으로 내재하는 본성인데 다만 그것이 가려질 수 있으므로 마음 수행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목적론적 덕의 특징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과 인간 사회에 국한되는 좋은 삶이며 강증산의 해원상생 사상은 인간과 신명, 자연만물을 아우르는 천지인 삼계를 위한 좋은 삶이다. 또한, 각각의 대표적인 덕목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과 강증산의 무자기와 대인대의의 덕은 이성 및 마음과 관련된 서로 다른 특징에서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중용의 덕은 이성이 감정과 욕망을 통제하는 역할이 중심이라면, 무자기와 대인대의의 덕은 중용의 덕과 같은 자신의 통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남을 잘 되게 하기 위해 상대방의 원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서적 측면과 관계적 덕이 강조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강증산의 덕이론 비교는 서양과 동양 사상의 비교라는 점에서 난점이 있지만, 덕의 속성이나 특징상 유사한 점이 발견되고 그러한 비교를 통해 강증산 사상의 덕의 장점을 부각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오늘날 서양 덕윤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강증산 사상의 덕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대비시켜 보는 것은 향후 추가적으로 강증산의 덕을 고찰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