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얼마 전까지,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반성과 인문학의 발전 방향에 대한 다소 무뎌진 논의들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지금은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1) 그동안 해결된 것도, 새로운 것도 없기에 지금은 더욱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논하게 된다. 과학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 비하면 위축될 대로 위축된 인문학의 위상을 달리 개선할 묘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인류가 인문학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어떻게 어디서부터 논의를 시작할까 고민하다, “인문학”을 기초로 하면서, 인문학에게 빛과 어둠을 안긴 “변화”에 집중하며,2) 그 변화를 탐구할 “연구 방법”에 논의의 초점을 맞춰 본다. 그 이유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AI가 등장하여, 인간의 일을 대체하며,3) 사회 곳곳에 거센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4) 하지만, 그 반대편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해서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간의 특징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의문을 넘어, 이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위협마저 들게 한다.
모두가 과학과 기술에 매몰되어 갈 때, 인간과 인간이 만든 공동체를 고민하고, 보다 본질적이고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나 하나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생각할 지혜를 갈구하며, 이러한 연구와 담론과 실천을 찾게 되지만, 그 역할을 담당할 인문학은 지금 좌초되기 일보 직전에 있다.
현재의 인문학이 위기에 빠진 것도, 대학의 인문학 전공과 개설 과목이 대거 사라진 것도,5) 결국은 변화에 있다. 변화에 대한 파악, 대처, 성찰적 피드백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인문학 연구는 다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고대로부터 철학 특히 동양의 학문에서는 변화가 주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부처는 “모든 것은 변한다.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말을 열반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겼고, 중국 사상의 핵심인 『주역(周易)』은 “易”을 통해 변화 그 자체를 말하고(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 것을 역이라 했다), 경전은 변화 자체를 탐구했다. 그리고 선진시기의 공자와 노자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그 천변만화의 변화 속에서 변화의 끝이 아닌 본질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순자(荀子, BC 298~BC 238)는 “천 개를 들어 만 개를 변화시켜도 그 도는 하나(千擧萬變 其道一也)”라고 말했다.
변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현재가 언제나 가장 빨랐다. 이처럼 빠른 변화 속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점점 중요해진다. 그 미래도 먼 미래가 아니다. 오랜 기간 인류가 시도한 변화 속 미래의 예측은 오늘을 제대로 파악하고,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끄는 동인이었다.
변화에 대한 예측은 공학과 자연과학에서는 매우 정밀하고, 즉각적이고 즉시적이며, 그 파장 역시 크다. 하지만 이러한 분야에서는 거시적으로나 통합적으로 변화를 연구하기 어렵다. 미시적으로 가까운 미래의 것을 보는 것도 벅차다. 거시적이거나 통합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을 다루는 이들의 학문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부분은 주로 인문학이 담당했다.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보면서 조금 먼 미래를 생각하는 일, 과학이 정밀함에 집중한다면 인문학은 본질에 대한 물음에 집중했다. 오랜 역사 속에 변화의 끝은 다양했지만, 변화의 본질은 큰 차이가 없었다. 과학이 변화의 끝에 집중한다면, 인문학은 변화의 본질에 집중한다.
인문학이 제시한 아웃풋은 과학보다 실용적, 실천적, 현실적 측면에서 부족함이 있어 보였지만, 변화의 발전 방향을 잡아주는 가늠자 역할을 했다. 결국,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블랙 스완(black swan)”을 막는 것이 아닌, 인문학의 장점을 살려 변화 속에서 “회색 코뿔소(grey rhino)”의 위험을 경고하며 사고를 예방하는 데 있었다.6)
그럼, 변화를 연구하는 인문학의 연구 방법은 어떠한가? 기존의 연구에서는 인문학의 여러 측면을 다루었지만, 인문학의 연구 방법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다. 과거 장대년(張岱年)은 “중국 철학사”를 연구하는 방법에 있어 정확한 방법의 사용을 주장하며, “정확한 방법이란 정확한 세계관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정확한 방법은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 정확한 세계관은 실제와 부합하는 세계관을 말한다.7) 마찬가지로 두루뭉술하거나 추상적이거나 혹은 자신들만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실제와 부합하는 세계관과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인문학적 변화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학의 역할을 과학과 구별하여,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데 발생하는 “검은 백조”에 두기보다,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 방심하여 사고로 이어지는 “회색 코뿔소”를 예방하는데 두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제어하기 어려운 발전을 조정하는 데 인문학의 역할을 두면서, 인문학이 지향할 변화 연구 방법은 어떤 것일지, 과학의 발전과 변화한 환경에 맞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인문학적 측면에서의 변화 연구 방법에 집중하여 고찰하려 한다. 비록 본고의 논의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겠지만, 인문학이 처한 작금의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을 시작했다는 것에 본 연구의 의미를 둔다.
Ⅱ. 인문적 자산과 과학적 방법의 협업
인문학적 변화 연구는 타 학문의 변화 연구와 달리, 인류의 축적된 인문적 데이터를 자산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와 인문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경험적 지식(heuristic)으로, 과학과 다르다. 또한, 과학 분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연구는 그 대상이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아주 오랜 과거와 미래까지, 연구 대상의 시간과 공간은 넓다.
이제 인문학은 과학의 연구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과학은 과거 인류의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8) 그리하여 “과거 인류의 인문적 데이터”에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잡아줄 요소를 추출하고, 여기서 산출한 결과물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 방법에 활용해야 할 것이다. 축적된 인문적 자산의 활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가 쌓아온 축적된 인문 자산을 적극적이고 다각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그동안 걸어온 자취는 글, 그림, 소리, 조각, 건축물, 도구 등 다양한 물질문화에 녹아 있다. 오랜 인류의 자취만큼 인문적 자산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 속에는 인간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 이를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문적 자산을 활용하고, 연구하며, 해석하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접근과 이해의 큰 틀은 기본적으로 그대로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의 발전은 시대의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부응하여 변했지만, 인문적 자산을 활용한 연구에 있어서, 기본적 접근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이중증거법(二重證據法)”이나 “삼중증거법(三重證據法)”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중증거법은 왕국유(王國維, 1877~1929)가 제안했다. 이중증거법은 고대의 인문적 자산 중에서도 문자(文字) 자료에 집중하였다.9)
물론 인문적 자산에는 문자 자료 외에도 기구, 복식, 건축 등의 물질 자료도 많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문자 자료에 상응하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물질 자료에는 정신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물질 자산을 통해서도 비물질적 자산에 대한 추측이 가능하다.
비가시적인 것들을 근거로 고대의 정신문화로서 우주관이나 영혼관 같은 것을 추정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중증거법이다. 삼중증거법은 요종이(饒宗頤, 1917~2018)가 제안했다. 그는 문헌 외의 다른 문물을 연구하여, 고대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 이제 이러한 방법을 조금 더 발전시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고, 이는 과학기술과의 접목을 통해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둘째, 전통적인 방식과 발전된 기술의 접목이 요청된다. 그동안 개인의 능력에 기대어 축적된 데이터를 사용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제는 변화한 현실에 맞춰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인류가 쌓아온 인문적 자산의 활용을 개척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과거의 것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다가올 변화를 예측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문화재 방사성탄소연대측정용 가속질량분석기(AMS)같은 발전된 과학기술의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넓게 확장되고, 다양하게 활용된다.
셋째, 과학과 기술에만 의존하기 어려운 문제에서 인문학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과학에 의존하지만, 상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이를 조율하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줄 것에,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 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쪽의 주장은 지구가 이산화탄소 배출로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에 힘이 실린다. 『2050 거주 불능 지구』를 쓴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는 인류가 1990년부터 30년 동안 지구에 가한 오염은 지난 2000년의 누적된 양보다 많다고 경고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의 경우는 화석연료 문명 종말의 해로 2028년을 콕 찍어 말했다. 그만큼 인류가 절박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2100년이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지금보다 4도 이상 높아질 것이라거나, 과거보다 현재 인류가 100배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등 구체적인 경고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인류는 이상기온, 영구동토층의 파괴 등으로 기후 변화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 지구에는 지금까지 5번 정도의 대멸종이 있었는데, 그 원인이 기후 변화와 관계된다고 『대멸종 연대기』에서 경고하고 있다.11)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기후 변화가 이산화탄소 배출과 연관되어 인류를 위협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른 한쪽의 주장은 첫 번째 주장과 상반된다. 하지만 그 근거 역시 충분히 과학적이다. 어떤 면에서 첫 번째 주장에 상반된 주장을 하는 이들은 반대편의 주장 보다, 나름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근거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탄소 문제나 온난화에 대한 지나친 문제 제기를 경고한다. 지금은 빙하에서 아주 오래전의 기후를 확인할 수 있고, 이에 근거하면 지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지금보다 지구가 더 따듯해서, 노르웨이에서 포도주를 만들었다거나, 그린란드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 등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빙하가 녹아도 북극곰은 온혈동물이기에 멸종하지 않는다거나, 12만여 년 전에는 지금보다 온도가 8도 높았고, 이산화탄소 수치는 낮았으며, 북극에는 얼음이 없었다고 주장한다.12)
물론 본고의 목적은 환경문제 해결이 아니기에, 상반된 두 의견을 소개하는 선에서 멈추지만, 이처럼 과학과 과학의 대결로 맞서는 일은 현대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이 역시도 데이터 연구기술이나 발전된 과학기술로 면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사실 충실성의 측면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토가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의견이 대립한다면, 인문학은 이를 조율하며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즉, 인문학은 인문학의 전통적 연구 방식에 발전된 과학기술을 더하면서도, 과학적 의견의 충돌을 조율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넷째, 변화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 방법에 있어서도,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인문학적 연구라 하여도, 지속적인 자기반성과 성찰이 요청된다. 예를 들면, 초점주의(focalism)의 경고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과거의 문제를 관찰하는데, 미래를 종속되게 만드는 초점주의에 자주 빠지게 된다. 또한, 몇몇 문제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초점주의가 지적하는 문제에도 자주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인문학 연구 자체에 적용하며,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을 필요가 있다. 인문학적 변화 연구가 기존의 틀에 얽매이고, 학문이 다루어야 할 본질을 놓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성찰이 요청된다.
끝으로, 축적된 인문적 자산은 과거의 교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무수히 많은 다양한 사례의 축적된 데이터에서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시간의 변화 속에, 인간이 처한 환경과 기술의 발전은 있었지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변화는 크게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축시대(Axial Period)의 담론이 2500여 년이 지난 현대에도, 인간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에도 이는 적용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는 일을 중심으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변화에 대한 대책에서도 축적된 인문적 자산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인문학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과학과 공학은 사람들의 일상에 머물면서 가깝고 빠르게 인류의 삶을 변화시켰다. 예를 들면, 과학의 발전에 기초한 기상 변화의 예측에서 그 정확도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량의 예지력이 이제는 검색 하나로 해결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젠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의 능력이 인터넷 검색능력으로 평범해졌다.13)
어디 이뿐일까? 자동차가 목적지까지 가는데, 수시로 바뀌는 교통상황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예측하고 안내까지 해주는 자율주행기술의 발전도 눈부시다. AI의 발전도 이제는 인류 자체를 위협할 지경까지 이르러, 대비책을 서둘러 준비하는 상황까지 펼쳐졌다.14)
눈부신 과학의 발전, 이러한 발전을 일상에서 직접 체험하며 느끼는 사람들의 변화된 인식은 과학에 대한 응대와 인문학에 대한 기대를 변화시켰다. 피부로 느끼는 과학의 발전에 사람들은 과학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인문학적 외침보다 과학을 더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과학의 빠른 발전 때문일까? 그 속에서 인류는 “인간”을 놓치거나 잊게 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자연스레 인간을 “도구”나 “부품”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이 역시 크게 보면 인류사에 근거한 변화의 한 과정이겠지만, 인문학은 과학의 발전에서 인간을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지금의 상황에 맞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15)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에서는 인문학이 해야 할 여러 역할 중에서, 연구 방법에 집중하여 논의를 이끌고자 한다.
인문학적 변화 연구는 과학의 연구와 다르다. 하지만 엄격한 요구에 완벽하게 응답할 수는 없겠지만, 그에 준하는 노력과 준비는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도 20세기 초반에 과학에서 중요시하는 정확성(正確性)을 언급했다. 철학이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원인에 정확성의 결여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철학의 여러 체계(體系)가 현실과 다르게 재단되었다고 주장했다.16)
인문학과 과학의 차이에서, 정확성의 결여는 여러 가지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조금 더 좁혀 생각하면, 학문이라는 틀에서 인문학과 과학을 보았을 때, 중시해야 할 것은 “객관적 요소의 설정과 확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객관적 요소의 설정과 확보는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뉴턴 역학에서는 시간, 공간, 질량을 측정 가능한 기본개념으로 설정하고, 다른 모든 개념을 이러한 기본개념에서 유도했다. 숫자로 표현되는 개념은 주관성을 떠나 객관적이며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해된다는 뜻에서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과 맥이 통한다.
이러한 시도는 과학을 과학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역학 분야에만 해당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기장을 “역선(力線, lines of force)”이나 위치에너지의 숫자로 표현하며 객관화시켰던 전자기학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과정을 “관측 장비로 힘의 크기를 측정하여 공간의 각 지점마다 특정한 숫자(전기력이나 자기력의 크기와 방향)를 할당했는데, 이 숫자의 집합을 하나의 객체로 간주한 것”으로 미치오 카쿠(Michio Kaku)는 설명했다.17)
심지어, 기후 탐구에서의 혼돈 현상을 발견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기상학자 로렌츠(Edward Norton Lorenz, 1917~2008), 또는 소용돌이치는 유체의 흐름에서 혼돈 현상을 찾은 뤼엘(David Ruelle, 1935~), 희귀 먹이를 다투는 개체군 리모델링 과정에서 혼돈 현상을 찾아 추적한 메이(Robert May, 1936~2020), 별들의 궤도 방정식에서 찾은 농(Michel Henon, 1931~2013) 등, 이들은 그동안 간과하거나 미지의 영역으로 두었던 혼돈을 객관화하여 과학의 영역에 포함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 물리적 세계를 기호로 가시화시킨 수학이나 기타 과학의 전 분야에도 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다.
“객관적 요소의 설정과 확보”는 과학을 넘어 경제학에도 적용되었다. 마르크스는 “가치”라는 다소 모호한 것을 객관적 요소로 바꾸고자 시도했다. 그래서 노동, 생산비 등을 객관적으로 투입된 비용으로 설정하면서 가치를 설명했다. 또한, 기능주의가 가시적 기능에서 세상을 분석했다면, 구조주의는 비가시적인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조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구조주의는 프랑스 경제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구조 개념이 경제학 영역에서 실용적 차원으로 사용되었다.18) 물론, 이는 다른 학문에도 적용되어, 보이지 않는 소리를 음표로 객관화시킨 음악의 경우에까지 확장하여 생각할 수 있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대상을 객관화시켰던 이러한 방식은 디지털의 변화와 맞물려, 아날로그의 지식과 정보를 디지털의 세계로 환원하여, 디지털 혁명의 발전을 재촉하고 있다.19) 그리고 이러한 변혁 속에, 과학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자산도 중시하고, 인문학적 자산의 과학화, 객관화, 디지털화를 통해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일이 인문학적 생각만으로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세상에 대하여, 보다 현실적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면에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것을 객관적 요소로 바꾸고”, “나머지를 다른 변수로 분리”하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겠다. 이후 과학과 학문의 발달에 기대어 “변수를 조금씩 객관적 요소로 변환”시켜 나간다면, 과거에 모호하거나 추상적으로 처리되었던 것이, 앞서 언급한 역학이나 경제학에서 진행된 것처럼, 더디지만 언젠가는 과학화, 객관화, 디지털화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일상의 문제에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사회에서 범죄가 발생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풀이할 수 있을까? 이것을 “잡힐 확률(pa)과 잡힐 때의 대가(ma)”와 “잡히지 않을 확률(pu)과 이때의 보상(mu)”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서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를 도식으로 정리하면, “pa*ma < pu*mu”로서 즉, “잡히지 않을 확률(pu)과 이때의 보상(mu)”이 “잡힐 확률(pa)과 잡힐 때의 대가(ma)”보다 클 때, 범죄가 일어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20)
이것은 『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에서 제시한 예이다. 책에서는 “정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사회에서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를 냉혹하지만, 현실적으로 재단하며 “객관적 요소의 설정과 확보”에 부합하도록 시도했다. 물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경우의 수는 너무 많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고 포기하기에 앞서, 발생할 경우의 수를 하나씩 정리하며 반영한다면, 경우의 수가 무한하지 않기에 언젠가 가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 언급할 “변화를 세 가지로 정리”하여 접근하는 것이나, “삼차원적 귀납” 방식의 제안 등이 이러한 예이다.
이는 확장된다.21) 앞서 언급한 문화재 방사성탄소연대측정용 가속질량분석기(AMS)를 사용하여, 과거에 대한 관념적이고 추상적 논의에서 벗어나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인문적 논의가 가능해지고, 이러할 때 인문학은 정확성과 객관성을 담보한 기초 위에 현실의 문제에 적합한 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더 확장된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사고 능력”이나 판단에 대한 확신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찰스 휘트먼(Charles Whitman)이 1966년 7월 31일 저질렀던 비정상적인 끔찍한 사건도, 공포와 폭력성과 관련이 깊은 편도체를 누르고 있던 뇌종양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뇌의 이상이 변태성욕이나 폭력성을 유발할 수도 있다.22) 결국,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을 온전히 그의 알 수 없는 정신세계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그를 좌우하는 뇌의 상태 속에서 조망할 필요도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이 지닌 추상화되고 관념적인 것들의 일정 부분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뇌의 기능과 연관하여 객관화·과학화하는 범주 안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말이다.23)
회색 코뿔소는 위험하지만, 다행스럽게 눈에 잘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회색 코뿔소의 위험을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설마 나에게 달려오겠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위험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다. 회색 코뿔소의 위험이 발생할 증후는 농후하다. 이미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는 “신호와 소음”으로 우리에게 다양한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다.24)
그러므로 회색 코뿔소를 대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한 인문학적 변화 연구는 뻔한 위험을, 증후와 나름의 패턴을 지닌 위험을 경고하며 예방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인문학적 정체성을 살려, 세상의 많은 일을 단순히 과학적 일로만 단정하지 말고, 이를 유추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도 인문학적 요인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Ⅲ. 변화한 환경, 인문학적 변화 연구 방법의 제안
연구 방법도 변한다. 그렇다면 연구의 목적에 맞춰, 창의적이면서 구체적인 연구 방법을 계속 실험하며 개발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문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연구 방법에는 문헌 연구가 있다. 문헌 연구는 연구자가 기존의 논문과 도서 등의 관련 문헌을 읽으며 연구하는 것으로 인문학 연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과거에는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know how”가 아닌 “know where”가 경쟁력이 되기도 했다. 특히 서지학 분야에서는 “know where”는 중요하게 작동하기도 했다. 이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많은 자료는 디지털로 전환되어, 온라인으로 손쉽게 찾을 수 있고, 나아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와 이론이 온라인을 통해 넓게 전파되어 확인이 수월해졌다. 물론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인문학 연구는 자료에 대한 비중(know where)보다 자료를 이용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know how) 하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이밖에 현장 탐사, 비교 연구, 전문가 초청 자문을 비롯하여 인문학의 외연을 넓히기 위한 학제간 융복합 연구 등이 있다. 또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빅데이터를 활용하거나 통계 자료 등을 이용한 기초위에 인문학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상의 방법은 인문학 연구를 진행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방식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이 있고, 변화 연구에서는 귀납적 방법이 주요하게 작동된다. 그럼, 이제 다시 인문학적 변화 연구에 집중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변화는 어떻게 연구해야 할까? 인문학적 변화 연구는 축적된 과거의 데이터에 의존하기 쉽다. 개별적 현상의 축적 속에 믿을만한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귀납(歸納, induction)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귀납의 한계는 명확하다.
첫째, 귀납은 과거의 데이터에 의존하기에 (과거의 연결성에서 떨어진) 먼 미래의 것을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먼 미래에 대한 예측은 다른 연구 방법에서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둘째, 귀납은 과거의 축적된 자료의 연장선에서 제시되는 것이기에 과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셋째, 귀납은 논리적으로 전제가 결론의 필연성을 확립하지 못한다. 반면에 연역법은 대전제가 참이라고 가정하면 결론은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물론 대전제를 참으로 가정하는 연역법, 그 전제가 쉽지 않다.
넷째, 귀납의 결론은 언젠가 틀린다. 그 결론 자체가 과거의 데이터에 근거한 개연성을 가진 가설이지 필연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납의 한계가 이처럼 자명함에도, 인문학은 앞서 언급한 인류가 축적한 다량의 인문적 자산을 기초로, 과학기술의 결과물을 이용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귀납적 방법의 사용을 포기할 수 없다. 앞에서 설명한 “이중 증거법”이나 “삼중 증거법”도 귀납적 접근과 과학적 기술을 기초로, 보다 정교하고 정확한 그다음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귀납의 한계는 학문적으로 연구되며 발전하고 있다. 헴펠(Carl G. Hempel, 1905~1997)은 “까마귀 역설(the raven paradox)”을 제시하며 입증(Confirmation)을 강조했다. 여기서 입증이란 증거와 가설 사이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입증은 정성(qualitative), 비교(comparative), 정량(quanti)의 세 가지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데, 정량 입증에서 중요한 이론으로 카르납의 귀납논리와 베이즈주의 입증 이론을 말할 수 있겠다.
카르납의 귀납논리에서는 확률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가능해진다. 여기에서는 확률을 객관적으로, 즉 증거와 가설 간의 논리적 관계로서 생각한다.25) 베이즈주의 입증 이론은 확률에 대한 주관적 분석을 내놓는다. 이 둘의 특징과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므로 이 둘의 이론을 융합하여 카르납의 귀납논리가 직관을 포착하고, 베이즈주의가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26)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수도 있겠다.27)
이러한 방식은 다른 측면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래서 카를 포퍼(Karl Popper, 1902~1994)가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제시한 방법과 논리실증주의자가 경험론에 기초하여 “관찰을 통한 검증”으로 이론을 정당화한 방법처럼 반증적(Negative) 방법과 실증적(Positive) 방법을 융합하여 장점을 극대화한 방법도 모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쿤(Thomas Kuhn, 1922~1996)이 과학사회학의 구조에 근거를 두고 과학의 사회학적 조건과 역동성을 중시한 방법과 포퍼가 논리학적 체계에 근거를 두고 과학적 명제의 구성 논리나 엄밀성을 중시한 방법을 함께 생각하여 발전적 방향을 새롭게 제시할 수도 있겠다.28)
이제 다시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자. 큰 틀에서, 변화 연구를 하는 인문학적 접근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까? 많은 연구가 “양질의 빅 데이터”를 가지고, 이를 풀이할 “잘 짜인 알고리즘(algorithm)”을 “연산 능력이 뛰어난 장치”를 이용하여 작동시킨다면, 만족할만한 “결과”를 도출할 것이다.
지금의 AI도 결국 이러한 틀에서 아웃풋을 만든다. 그래서 AI 개발 업체에서는 “잘 짜인 알고리즘”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연산 능력이 뛰어난 장치”를 확보하기 위해 더 좋은 컴퓨터 장치를 찾는다. 나아가 최근에는 AI에게 “양질의 빅 데이터”, 즉 검증된 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이용하기도 한다.29)
인문학적 변화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검증된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이중 증거법이나 삼중 증거법처럼) 무언가를 규명하거나 혹은 인간의 무언가를 찾아 적용하려는 “잘 짜인 알고리즘”을 만든다면, 양질의 결과물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 과정은 귀납적 방법에 기초하여 전개된다. 사실 귀납의 방법은 수학에서 사용하는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과 내삽법(內揷法, interpolation)하고 통하는데, 이 역시 일정한 구간에서 몇 개의 값을 주고, 그 값의 패턴을 파악하면서 다른 값을 추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계가 있는 연구 방법이지만, 귀납적 방법에 구체적이고 세세하면서 다양한 경우를 고찰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만들어 적용한다면 그 정확성이 높아질 가능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교차 확인의 방법으로, 조사와 관찰을 겸하고,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방법을 병행하면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처럼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윤리적 직관을 실험하는 방식 등을 계속해서 보강하며 개발한다면, 발전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더구나 이를 뒷받침할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양자 컴퓨터와 같은 “연산 능력이 뛰어난 장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할 수 있겠다. 즉, “축적된 인문학적 자산을 연구하며,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서 얻은 결과를 대전제로 상정”한다. 풍부한 데이터를 근거로 얻은 결과는 귀납적 방법에서 얻은 결과물이지만, 그 근거자료가 풍부하고, 결과가 신뢰할만한 것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를 연역법의 대전제로 상정하여, 다른 문제를 해결하거나 연구하는 데 응용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첫째, 축적된 인문학적 자료.30) 둘째, 잘 짜인 알고리즘과 수준 높은 연산 기계.31) 셋째, 연역법의 대전제로 삼을만한 (첫째와 둘째의 방법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갖추면, 앞서 언급한 “과학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을 이용한 기본적 틀은 만들어졌다.
이는 용어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셋째 단계에서 연역법의 대전제로 삼을 결과물을, 전제에 적용하는 “귀납적 비약”의 “귀납적 추리”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인문학적 데이터를 고찰하고 귀납적 방법을 통해 얻은 정제된 결과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첫째와 둘째의 조건은 과학기술의 발전 등에 힘입어 계속 보완되며 발전할 것이기에, 이러한 방법의 활용은 앞으로도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변화를 연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카오스(Chaos) 이론처럼 복잡하다.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일어날까?(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라는 주제로 로렌츠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강연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변화의 끝은 변화의 도입부보다 복잡하다. 그 중간에 작용하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할 일은 아니다. 단계별로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극복하면 될 것이다.
앞에서는 축적된 인문적 자산의 활용, 과학적 방법의 지속적 도입, 귀납적 연구 방법의 검토와 제안을 통해 변화의 시대 인문학적 변화 연구와 방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제 이러한 것을 기초로 인문학적 변화 연구와 방법에 대한 포괄적 논의를 제안해 보겠다.
첫째, 변화를 구분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변화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접근하면 인문학적 변화 연구가 보다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이 알 수 있는 변화”, “잘 모르지만 예측이 가능한 변화”, “예측하기 힘든 변화”이다.32) 셋 중에서 인문학적 변화 연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 수 있는 변화”, “잘 모르지만 예측이 가능한 변화”이다. “예측하기 힘든 변화”는 다른 영역에 넘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알 수 있는 변화”, “잘 모르지만 예측이 가능한 변화”에 대해서는 축적된 인문학적 데이터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변화의 패턴과 예상된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알 수 있는 변화”는 누구나 알고 있기에 오히려 무방비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 인문학의 역할로 보아 “회색 코뿔소”에 비유하여 언급했다. 인문학이 위치해야 할 지점이다.
둘째, 다음과 같은 삼차원적 귀납 방식을 제안한다. 먼저, 시간을 토대로 한 역사적 귀납이다. 인문학 연구에서 주로 다루는 시간을 토대로 한 역사적 비교는 과거를 고찰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이바지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료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것이 오늘 여기에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할 때, 그 가치가 살아난다. 다음으로, 공간을 토대로 한 인류학적 귀납이다. 역사적 귀납이 시간의 문제에 집중한다면, 인류학적 귀납은 우리의 시각을 공간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 특히 인문학에서 시간을 토대로 한 역사적 귀납보다 다소 간과되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인류학적 탐구를 통해, 여기 지금 우리의 특수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끝으로, 주체의 지식을 토대로 한 비판적 귀납이다. 이는 인문학의 정체성과 관련한 인식론적, 철학적 문제 제기와 통한다. 편견을 깨고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대안적 미래를 제시하는 비판적 귀납을 발휘하여 회색 코뿔소를 대비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상의 삼차원적 귀납은 시간, 공간,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인문학에서 활용할 중요한 접근 방법이다. 연구자가 나중에 발견하게 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사회학자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의 사회학적 상상과 닮았다. 여기서 귀납이라 표현했지만, 이는 상상으로도 바꿔 생각할 수도 있다.33) 앞서 귀납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인문학적 연구에서 귀납법은 중요하고, 귀납법은 다양하게 접목 변형되어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 더 미래의 것, 조금 더 가능성이 큰 것을 추론하며, 마침내 그것이 실현 가능한 상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셋째, 알고리즘 연구가 필요하다. 인문학적 변화 연구가 쉽지는 않겠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다. 변화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인 “양질의 빅 데이터”, “잘 짜인 알고리즘”, “연산 능력이 뛰어난 장치”가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34) 특히 인문학적 변화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문학적 알고리즘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알고리즘은 컴퓨터공학에서는 컴퓨터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 가능한 정확한 방법을 말한다. 명확성, 효율성, 입력, 출력, 종결성 등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아야 한다. 수학에서는 잘 정의된 명백한 규칙들의 집합을 말하거나, 유한 번의 단계 내에서 문제를 풀기 위한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알고리즘은 인문학적 데이터에서 귀납법에 의거하여 보편타당한 결과물과 알고 싶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이는 인문학에서 다소 생경할 수 있지만, 인문학이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넷째, 귀납적 방법에 더하여 상상력의 발휘가 요청된다. 모든 변화는 인과관계를 이루며 존재한다. 그러나 긴 시간으로 보면, 시작과 끝이 다르고,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인터넷을 개발한 사람들도 2024년과 같은 인터넷 기술과 문화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이처럼 귀납적 변화라 하여도 조금씩 축적되면서, 출발점에서 멀어지며 다른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연유로 변화를 종합적이고 융합적으로 연구하기 어려웠고, 기존의 연구는 미시적이고 분절되어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인류는 같은 잘못을 자주 반복했고,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의 방법을 잘 이용하며 발전시켜 나간다면 보다 나은 변화, 회색 코뿔소를 대처할 방법을 인문학에 기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방법에 더하여 조금씩 발전시켜야 한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과학적으로 발달한 많은 도구가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를 활용한 상상력으로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접근에 도전해야 한다. 귀납적 방법과 지금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잘 배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의 장을 뛰어넘는 지독한 상상력”이 필요한 오늘이라 말할 수 있겠다.
Ⅳ. 나오는 말
지금까지 인문학적 변화 연구에 대한 방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먼저, 2장에서는 인문적 자산과 과학적 방법의 협업을 통하여, 축적된 인문적 자산의 활용과 과학적 방법의 지속적 도입을 논하였다. 과거 인류가 축적한 인문적 데이터는 무궁하고, 활용 범위는 다양하다. 현재는 과학 발전의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뿐더러, 학문의 경계를 넘어, 체계적으로 인문학적 접근과 활용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때이다.
이어서 3장에서는 변화한 환경, 인문학적 변화 연구 방법을 제안하며, 귀납적 변화 연구 방법의 검토와 제안 및 인문학적 변화 연구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변화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변화의 주요 동인으로는 관계, 언어, 가치, 물질, 기술 등이 있는데, 본고에서 주목한 것은 기술의 변화였다.
현대사회에 들어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면적이고 혁명적이다. 과학의 영향력은 확장되고, 잇따르는 많은 연구가 미시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문제를 해결할 대안의 제시에는 인문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대상 자체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데 있어, 과거와 다른 객관화하고 과학화한 방법의 접목이 요청된다.
인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정의로운가?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는 본질을 못 보고 주변을 보는 우(愚)를 자주 범했다. 당시 화제가 된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그러므로 변화의 본질 탐구를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은 중요하다.
마르쿠제(Marcuse)는 선진산업사회에서는 생산성과 효율성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비판적 의식이 사라지고 체제 순응적인 태도가 확산할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회를 “1차원적 사회(One Dimensional Society)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비판의식이 없어지고, 수단에만 관심을 갖는 기술적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한다.35)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본문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제는 마르쿠제의 염려가 일상이 되고, 그보다 더 발전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산업사회를 넘어, 다시 자본주의의 지배를 넘어, 다시 로봇과 AI가 그리고 AI와 결합한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류의 삶에 개입하기 일보 직전이다.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끄집어낼 것은 본질에 대한 성찰이다.36)
본질을 보는 것은 인문학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역시, 인간의 본원, 본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서구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로고스 뿐만 아니라, “영성”도 마찬가지이다. 영성은 각자 존재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내적인 길, 의거하여 살아야 할 준칙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들을 말한다.37)
지금의 변수와 변화의 끝의 한계를 넘어, 그 본질적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인문학의 노력을 다시 살려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과 인문적 자산의 교집합 지점, 여기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대립과 충돌이 아닌 연결과 상생의 방향 속에,38) 변화의 흐름에서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