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13~14세기 동아시아의 불교사서 비교 연구*

정천구 1 , *
Chun-koo Jung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부산대학교 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Pusan National University

© Copyright 2025,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Apr 25, 2025; Revised: Jun 04, 2025; Accepted: Jun 25, 2025

Published Online: Jun 30, 2025

국문요약

13~14세기에 중국과 한국, 일본 세 나라에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불교사서, 곧 기전체 불교사서를 차례로 편찬했다. 중국에서는 1237년에 종감이 『석문정통』을 편찬했고, 한국에서는 1289년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일본에서는 1322년에 시렌이 『원형석서』를 각각 편찬했다. 중국의 『석문정통』이 시기에서 앞섰으나, 한국과 일본의 저자들은 구성과 배치, 내용에서 매우 독자적인 불교사서를 각각 내놓았다. 이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형태의 불교사서를 저술할 필요성을 공통적으로 인식했음을, 그러나 의도나 지향은 서로 달랐음을 의미한다.

종감은 『석문정통』을 통해 종파적 정통론을 내세웠으며, 일연은 『삼국유사』로써 상하·남녀·승속 및 유불의 대등론을, 시렌은 『원형석서』론을 폈다. 이 세 가지 다른 주장은 저자들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를 통해 제왕들의 덕으로 일본이 온전한 대승의 땅이 되었다는 존왕것이기도 하지만, 세 나라의 불교사 전개와도 관련이 있었다. 중국의 『석문정통』은 송대에 선종이 거듭 선종사서를 편찬하면서 종파적 정통성과 우월성을 내세운 데 대한 반론으로 나온 것이었다. 『삼국유사』는 이전의 유교사서와 불교사서가 각각 정치와 불교 한쪽에 편향되어 기술한 점을 시정하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한 역사적 사실, 정치사와 종교사가 뒤얽혀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술되었다. 『원형석서』는 불교사서 편찬에서 일본의 후진성과 낙후성을 일거에 극복하고 자국이 대승의 나라임을 알리기 위해 편찬되었다.

Abstract

During the 13th and 14th centuries, a completely new format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namely those in the form of biographic-thematic styles, were compiled in succession in the three countries of China, Korea, and Japan. In China, Zongjian compiled the Shimen Zhengtong (Comprehensive Orthodox Transmission of the Sākya Clan) in 1237. In Korea, Ilyeon compiled the Samguk Yusa in 1289, and in Japan, Shiren compiled the Genko Shakusho in 1322. Although the Shimen Zhengtong was ahead of its time, Korean and Japanese authors each produced Buddhist historical texts that were exceptionally unique in formation, arrangement, and content. This means that there was a common recognition of the need to write a new form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during key historical turning points, but their intentions and goals were differed greatly.

Zongjian advocated sectarian orthodoxy in his Shimen Zhengtong, while Ilyeon advocated equality of the upper and lower classes, men and women, monks and laity, and Confucianism and Buddhism in his Samguk Yusa. Shiren advocated the reverence for the king in his Genko Shakusho, claiming that Japan had become a land of complete Mahāyāna Buddhism thanks to the virtues of the emperors. These three different claims were partly due to differences in the authors’ historical consciousness but were also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Buddhist history in the three countries. Zongjian’s Shimen Zhengtong was a counterargument to the Song Dynasty Chan Buddhism’s repeated compilation of Chan Buddhist historical texts, which emphasized sectarian orthodoxy and superiority. Samguk Yusa was written to correct the manner in which previous Confucian and Buddhist historical texts had been biased toward politics and Buddhism, respectively, and to highlight the historical fact that Confucianism and Buddhism coexisted and that politics and religious history were intertwined. The Genko Shakusho was written to overcome Japan’s backwardness and underdevelopment in the compilation of Buddhist historical texts and to show that their country was a country of Mahāyāna Buddhism.

Keywords: 석문정통; 삼국유사; 원형석서; 기전체; 정통; 대등; 존왕
Keywords: Shimen Zhengtong; Samguk Yusa; Genko Shakusho; biographic-thematic styles; legitimacy; equivalence; revering the king

Ⅰ. 머리말

당말과 오대십국(五代十國, 907~960)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교세를 확장하던 선종(禪宗)은 송대(宋代, 960~1279)에 가장 거대한 종파로 자리잡았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부터 『오등회원(五燈會元)(1252)까지 무려 아홉 종의 선종사서들이 잇달아 편찬되었으니, 선종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1) 선종과 달리 혼란기를 거치면서 약화되었던 천태종도 송대에는 부흥해 다시 융성을 누렸다.2)

1170년에 무신들의 정변으로 문벌 귀족들이 몰락한 고려에서는 귀족과 긴밀하게 연계되었던 교종이 쇠퇴하고, 불교계의 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개혁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선종에서 지눌(知訥, 1158~1210)이 수선사를, 천태종에서 요세(了世, 1163~1245)가 백련사를 각각 결성해 실천운동을 펼치면서 그 운동을 주도했다. 이 시기의 고려도 중국에서처럼 선종과 천태종이 주요한 종파로서 불교계를 이끌었다.3)

일본에서도 1185년에 무사 정권인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5~1333)가 탄생하면서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불교계 또한 재편되었다. 에이사이(榮西, 1141~1215)와 도오겐(道元, 1200~1253)을 통해 전해진 선종이 무사 집단의 선호로 크게 번성했으며, 복잡한 이론이나 엄격한 수행보다 염불처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불교로 전환하면서 민중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임제종·정토종·일련종(日蓮宗)·정토진종(淨土眞宗) 등 새로운 종파들이 등장해 이른바 신불교의 시대가 열렸다.4)

이렇게 중국과 한국, 일본은 12세기부터 정치적 변화와 함께 불교계가 커다란 변혁을 겪고 있었다. 이때 유목민들이 세운 요(遼, 907~1125), 금(金, 1115~1234), 몽골 제국(1206~1368) 등이 차례로 등장해 전쟁을 거듭하며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서 혼란과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에서는 같으면서도 다른 불교사서, 곧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불교사서(佛敎史書)가 차례로 편찬되었다. 종감(宗鑑)의 『석문정통(釋門正統)』(1237),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1289), 코칸 시렌(虎關師鍊, 1278~1846)의 『원형석서(元亨釋書)』(1322)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만 기전체 불교사서가 나타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편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환기의 산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5)

13세기까지 동아시아의 불교사서는 모두 열전체였다. 열전체는 십과(十科) 체재의 고승전(高僧傳)과 계보형 열전인 전등록(傳燈錄) 두 가지인데, 모두 중국에서 고안되고 확정된 형태다. 양(梁)나라 혜교(慧皎, 497~554)가 『고승전』을 저술하면서 마련한 십과 체재를 도선(道宣, 596~667)과 찬녕(贊寧, 919~1001)이 차례로 이으며 각각 『속고승전(續高僧傳)』(649), 송고승전(宋高僧傳)』(988)을 편찬했고, 이로써 고승전은 불교사서의 주요 형태가 되었다. 전등록은 선종에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계보를 중시하며 서술한 선종사서(禪宗史書)인데, 송초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을 필두로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1101),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1204) 등이 잇달아 저술되면서 주요한 불교사서로 자리잡았다.6)

중국에서 시작된 불교사서 편찬은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8세기 초에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고승전』을 저술했다고 하며,7) 1215년에는 각훈(覺訓)이 십과 체재에 따라 『해동고승전』을 편찬했다.8) 일본에서는 당나라에서 건너간 승려 사탁(思託)이 788년에 일본 최초의 고승전인 『연력승록(延曆僧錄)』을 저술했으며, 1251년에 소쇼(宗性)가 단순히 전기를 나열한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를 편찬했다.9) 한국은 13세기가 되어서야 간신히 중국 고승전에 견줄 만한 『해동고승전』을 내놓았고, 일본에서는 13세기가 지날 때까지도 체계적인 불교사서를 거의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13세기까지 고승전을 비롯한 불교사서의 편찬에서 중국에 크게 뒤처져 있었던 한국과 일본이 기전체 불교사서를 편찬하는 데서는 그다지 뒤처지지 않았다. 저술 시기나 국내외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일연이 『석문정통』을 접했을 공산은 거의 없다. 그리고 코칸 시렌은 중국의 『석문정통』을 읽었음이 분명한데도 『원형석서』를 편찬할 때 전혀 참조하지 않은 듯하다.10) 이렇게 직접적인 영향이 거의 없음에도 ‘기전체’를 공통적으로 채택했고, 그럼에도 체재와 구성에서는 이질성이 두드러진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석문정통』과 『삼국유사』, 『원형석서』는 대체로 자료집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개별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각각을 불교사서로서 고찰하거나 둘이나 셋을 비교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11) 『삼국유사』의 독특한 체재를 『석문정통』과 대비해서 간단하게 언급한 김두진의 연구,12) 『삼국유사』와 『원형석서』를 불교문학으로 보고 그 특성을 비교한 정천구의 연구13) 등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세 불교사서를 한꺼번에 다루면서 비교 고찰하는 작업은 여기에서 처음 시도한다.

『석문정통』과 『삼국유사』, 『원형석서』는 모두 기전체 불교사서이지만,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전기들과 설화들 또한 풍부하다. 이는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주제로 비교해서 고찰할 수 있어 세 나라의 불교사적·문화적·사상적 특성을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논문에서는 시론격으로 각 불교사서의 전반적인 특성을 먼저 고찰하고자 기전체라는 외피 속의 내피, 곧 세부 항목의 설정과 배치, 서술 내용 등의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편다. 이를 통해 각 저자의 의도나 저술의 특성을 드러낼 것이다.

Ⅱ. 중국의 『석문정통(釋門正統)』 : 정통론

『석문정통(釋門正統)』(8권)은 천태종 승려 종감(宗鑑)이 1237년에 편찬했다. 책명에 “올바른 계통”을 뜻하는 ‘정통’을 썼는데, 이 ‘정통’은 유교사서인 『춘추(春秋)』에서 나온 개념이다. 종감의 의도가 담겨 있는 용어로 보이므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석문정통』의 서문에서 종감은, “편년이란 옛 성인이 만든 오래된 법칙이다”라고 하면서 “성인이 붓을 들어 간략하게나마 갖추어 두었기에, 숨기면서 드러내고 쓰면서도 감추며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하는 문체가 여전히 남아 있다”14)고 썼다. 『춘추』와 그 필법을 두고 한 말이다.15) 그런데 『춘추』는 제왕의 재위 연월에 따라 정치사를 기록한 유교사서다. 이런 『춘추』의 편년과 문체를 불교사 기술에 원용할 수 있을까?

석씨들은 산속이나 굴속에 숨어 살았으며, 몸을 낮추는 이의 이름이 더욱 높아지고 지위가 낮은 이의 도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사해만리를 떠도는 외로운 구름 같은 몸이니, 어찌 편년체만으로 논하겠는가? … 사마천과 반고의 법을 쓰는 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사마천과 반고의 법을 쓰기는 해도 숨기면서 드러내고 쓰면서도 감추며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하는 필법은 모두 오래된 법칙에서 넌지시 가져다 쓴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제목에) 정통을 썼다.16)

석씨들, 곧 승려들은 세속과 인연을 끊고 수행하며 득도하려는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은둔하거나 떠돌며 수행하므로 그 행적을 정확하게 포착하기 어렵다. 종감은 그런 승려들을 중심으로 불교사가 펼쳐진다고 보았으므로 역사 서술의 기본이라 할 편년체가 불교사 서술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편년체 대신에 사마천이 고안하고 반고가 썼던 기전체(紀傳體)를 선택했다. 편년은 제쳐두면서 춘추필법을 쓰기로 한 것도 그런 불교사의 특성 때문이었다.17) 이렇게 기전체에 춘추필법을 더했기에 ‘정통’을 썼다고 종감은 말했다.

그러면, ‘정통’의 의미가 체재에서도 구현되고 있는가? 『석문정통』은 「본기(本紀)」(권1), 「세가(世家)」(권1~권2), 「제지(諸志)」(권3~권4), 「열전(列傳)」(권5~권8), 「재기(載記)」(권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18) 종감은 연표에 해당하는 ‘표(表)’를 뺀 대신에 ‘재기’를 두었다. 그는 서문에서, “본기로써 종파를 열고 세운 이들을 높이고, 세가로써 종파를 지키고 이룬 이들을 드러내며, 지에서는 실행된 제도들을 자세하게 서술해 잘 실행한 승려들을 높이고, 열전에서는 [승려들이] 시내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흘러온 양상을 보여주며, 재기에서는 산처럼 우뚝한 이들의 전기를 서술하려 했다”19)면서 각 항목의 의의를 밝혔는데, 종파를 중시한 구성임이 드러나 있다.

「본기」는 <석가모니세존본기>와 <용수보살본기> 둘로 되어 있다. 두 본기는 각각 석가모니 세존과 용수의 전기만 자세하게 서술하고, 대가섭(大迦葉)부터 사자(師子)까지 용수 외의 조사들 23명에 대해서는 차례로 법을 전한 사실만 밝히며 간단하게 처리했다. 이는 「본기」가 전기보다는 계보에 중점을 둔 항목임을 말해주는데, 그 계보는 다음과 같다.

대가섭 → 아난(阿難) → 상나화수(商那和修) → 마전지(摩田地) → 국다(鞠多) → 제다가(提多迦) → 미차가(彌遮迦) → 불타난제(佛陀難提) → 불타밀다(佛陀密多) → 협비구(脅比丘) → 부나사(富那奢) → 마명(馬鳴) → 비라 → 용수 → 제바(提婆) → 나후라(羅睺羅) → 승거난제(僧佉難提) → 승거야사(僧佉耶舍) → 구마라타(鳩摩羅馱) → 사야나(闍夜那) → 반타(盤馱) → 마나라(摩奴羅) → 학륵야나(鶴勒夜那) → 사자

위의 계보는 송대 초기에 확립된 선종의 서천27조설과는 차이가 있다.20) 종감은 지의(智顗, 538~597)의 『마하지관(摩訶止觀)』을 바탕으로 계보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마하지관』에서도 위와 같이 법이 전해진 과정을 간단하게 서술한 뒤에, “법의 곳간을 넘겨 받은 사람은 대가섭부터 사자까지 23명이다. 말전지(마전지)와 상나화수는 [아난으로부터] 동시에 법을 전해 받았으므로 [말전지를 포함하면] 24명이다”21)라고 적고 있다. 종감이 이 계보를 「본기」에 넣은 것은 천태종도 선종과 마찬가지로 종파적 기원이 인도에 있음을, 특히 세존의 법통은 선종이 아닌 천태종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생각된다.22)

「본기」에 이어 「세가」에서는 천태종의 중국 쪽 계보가 나온다. <북제남악세가(北齊南嶽世家)>, <지자세가(智者世家)>, <장안세가(章安世家)>, <삼존자세가(三尊者世家)>, <형계세가(荊溪世家)>, <칠조사세가(七祖師世家)>, <법지세가(法智世家)> 등 일곱 세가가 차례로 서술되고 있다. 북제는 중국 천태종의 초조인 혜문(慧文)이고 남악은 2조 혜사(慧思)이며, 지자는 3조인 천태지의(天台智顗), 장안은 4조인 관정(灌頂)이다. 삼존자는 5조 지위(智威), 6조 혜위(慧威), 7조 현랑(玄朗)을 가리키며, 형계는 8조인 담연(湛然)이다. 칠조사는 10조인 도수(道邃)를 비롯해 16조인 의통(義通)까지 일곱 조사를 가리키며, 법지는 17조인 지례(知禮)다. 이 「세가」에서는 17명의 조사들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전기들도 자세하게 서술해 중국에서 성립된 천태종의 초기 역사를 잘 보여준다.

「세가」 다음에는 「제지」가 배치되어 있다. 「제지」는 <신토지(身土志)>, <제자지(弟子志)>, <탑묘지(塔廟志)>, <호법지(護法志>, <이생지(利生志)>, <순속지(順俗志)>, <흥쇠지(興衰志)>, <척위지(斥僞志)> 등 여덟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항목의 명칭을 통해 그 내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신토지>에는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의 삼신(三身)에 관한 이론이, <제자지>에는 중국에서 불법의 유통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불제자들이, <탑묘지>에는 사리와 탑의 역사가, <호법지>에는 호법을 위한 갖가지 주장과 논리 등이 서술되어 있다. 또 <이생지>에서는 방생(放生)과 윤회의 논리가, <순속지>에는 속세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갖가지 방편이, <흥쇠지>에는 중국의 불교사가 편년의 형식으로, <척위지>에는 불법을 왜곡한 사이비들과 이교들이 나온다. 다양한 불교적 사실을 주제별로 간명하게 서술한 「제지」는 계보와 전기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다른 항목들을 보완한다.

「제지」 다음은 천태종 승려들의 전기를 실은 「열전」이다. 「열전」은 「부하부지전(荷負扶持傳)」, 「본지휘영전(本支輝映傳)」, 「구격종도전(扣擊宗途傳)」 등을 앞세우고 그 뒤에 「중흥일세전(中興一世傳)」부터 「중흥칠세전(中興七世傳)」까지 일곱 항목을 더 나열한 것으로, 모두 열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하부지전」은 불교가 탄압 받거나 쇠퇴할 때 천태종을 떠받쳤던 승려들을, 「본지휘영전」은 저술로써 천태교학을 잘 다진 승려들을, 「구격종도전」에서는 천태교학을 널리 알린 승려들을, 「중흥일세전」부터는 송대에 천태종을 중흥시킨 승려들을 각각 싣고 있다. 회창법난(會昌法難, 840~846) 이후에 천태종이 쇠퇴했다가 중흥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고승들의 전기를 연대순으로 서술한 것이 「열전」이다.

마지막의 「재기」에는 선종·현수종(賢首宗, 화엄종)·자은종(慈恩宗, 유식종)·율종·밀교 등의 승려들이 입전되어 있다. 「재기」는 본래 기전체에 없는 항목이지만, 선례는 있다.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晉書)』(648년)에 「재기」가 있었다.23) 『진서』는 진(晉, 266~420) 왕조의 역사서다. 진 왕조는 전조(前趙, 304~329)·후조(後趙, 319~351)·전진(前秦, 351~394)·후연(後燕, 384~407) 등 비한족(非漢族) 나라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존속했는데, 이 나라들의 통치자를 입전한 항목이 「재기」다. 요컨대, 『진서』의 「재기」는 비정통의 왕조들을 인물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진 왕조가 정통임을 드러내는 항목이다. 『석문정통』에서도 천태종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다른 종파들은 비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재기」를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석문정통』은 「본기」와 「세가」에서 세존을 필두로 인도와 중국의 조사들을 계보에 따라 서술했고, 「제지」에서는 불교적 사실들을 두루 보여주었다. 「열전」에서는 천태종의 중흥에 기여한 고승들을, 「재기」에서는 다른 종파의 주요 고승들을 실었다. 본래 기전체가 제왕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출세간의 종교인 불교의 역사를 서술하는 체재로는 적절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24) 그러나 어떻게 변용하고 적절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효과적일 수 있다. 아래는 그 구성적 특성을 정리한 표다.

표 1. 석문정통의 항목들과 그 내용
항목 본기 세가 제지 열전 재기
내용 인도의 조사들 계보(24조) 중국의 조사들 계보(17조) 갖가지 불교적 사실들 천태종의 고승들 다른 종파의 고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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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감은 「제지」를 가운데 둔 배치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천태종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었다. 천태종은 당대(唐代)까지 번성했다가 송대 이후에 다시 융성했는데, 종감은 「세가」에서 당대까지를, 「열전」에서 송대 이후를 각각 나누어 서술하고 「재기」를 그 사이에 둠으로써 그러한 천태종의 역사를 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기전체를 채택한 종감이 「제지」를 이렇게 배치하고 「재기」까지 둔 진정한 의도는 천태종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다.

불교사서를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성공한 종파는 선종이었다. 종감이 그런 선종을 상당히 의식했다는 사실은 『석문정통』 곳곳에서 확인된다. “당나라 덕종 말기에 금릉의 사문 혜거가 편찬한 『보림전』은 그 종파(선종)를 지나치게 부풀렸다”25)고 하거나 “혜거가 편찬한 『보림전』부터 [서토에] 28조가 있고 동토에 6조가 있음을 일컬었고, 그 뒤로 『경덕전등록』에서 다시 그 잘못을 이어받더니, 계숭이 마침내 소승의 선경과 『보림전』 등을 받아들여 그 설을 확정하며 『부법장인연전』을 태워야 한다고 말했다”26)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종감은 선종의 계보가 허위이며 과장되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정통성 문제로 선종을 의식했음을 말해준다.27)

선종이 종파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송대 초기에 편찬된 『경덕전등록』(30권, 1004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권1~2에서 석가모니를 포함한 과거칠불(過去七佛)과 서천(西天, 인도)의 27조사들을, 권3에서는 보리달마부터 홍인까지 동토(東土, 중국)의 6조사들을 계보에 따라 서술했다. 그리고 권4부터는 선종 승려들의 전기를 각 문파에 따라 차례로 서술했다. 『석문정통』의 「본기」, 「세가」, 「열전」에 각각 해당되는데, 『경덕전등록』과 그 후의 모든 전등록은 이런 구성으로 종파적 정통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뒤늦게 천태종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선종보다 우위에 있음을 입증하려 한 종감은 전등록을 뛰어넘는 구성과 배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 기전체를 채택하며 「제지」와 「재기」를 위에서처럼 배치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특히, 「재기」는 천태종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며 선종보다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설정되었다. 다른 종파들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천태종의 포용성뿐 아니라 그 정통성을 다른 종파들도 인정한다는 뜻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종감은 서문에서 어쩔 수 없이 기전체를 선택한다고 말했으나, 구성과 배치는 그게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전등록을 거듭 편찬하면서 정통성을 확보하고 강화해 온 선종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석문(釋門)의 정통성은 천태종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전체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석문정통』의 ‘정통’은 기전체와 춘추필법을 아우른 서술 방식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천태종이 세존의 법통을 올바로 이은 종파라는 뜻을 아울러 담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결국, 종감은 『석문정통』을 통해 천태종의 정통론을 펼쳤다고 말할 수 있다.

Ⅲ. 한국의 『삼국유사(三國遺事)』 : 대등론

종감이 『석문정통』을 편찬할 때, 일연(一然)은 갖가지 문헌 자료들과 구전 설화들을 바탕으로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나 고려의 국내 사정을 감안하면, 일연이 『석문정통』의 존재를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다.28) 그럼에도 매우 유사한 형식의 불교사서를 구상하고 저술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비교해서 논의할 만하다.

『삼국유사』(5권)는 「왕력(王曆)」,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 아홉 개의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목의 구성이 매우 복합적이고 독특하다. 「의해」와 「감통」은 중국의 고승전에서 마련한 십과에서도 볼 수 있고, 「흥법」이나 「신주」 등도 십과의 과목들과 유사한 편목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왕력」과 「기이」는 고승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편목들을 설정한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배치했는가? 각 편목들의 성격부터 살펴보자.29)

「왕력」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네 나라 왕들의 즉위 사실과 치세 기간 등을 간단하게 서술한 연표다.30) 기전체 역사서인 『삼국사기』 권29~31에도 이런 연표가 나오는데, 그것은 ‘표(表)’가 기전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기전체를 지향했으리라 추론할 수 있는데, 「왕력」에 이어지는 「기이」편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기이」는 편목의 명칭부터 특이하며, “신이한 일을 기록하다”라는 뜻으로도, “본기와 다르다”는 뜻으로도 풀 수 있다. 앞의 풀이는 「기이」편의 ‘서(敍)’에 나오는 “삼국의 시조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이것이 「기이」가 여러 편들의 처음이 된 까닭이니, 그 뜻이 여기에 있다”31)는 내용과 연결된다. 그렇지만, 신이는 삼국의 시조를 두고 한 말이고 또 「기이」편에만 신이한 일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신이한 일을 기록하다”로 풀이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32)

「기이」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편목이므로 구성의 차원에서 들여다보면 뜻이 달라진다. 앞에 기전체의 표에 해당하는 「왕력」이 있고 또 뒤에는 열전에 해당하는 편목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기(紀)’는 기전체의 ‘본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왜 “본기와 다르다”는 뜻의 ‘기이’라고 했느냐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제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기이」는 제왕의 역사만 기록한 편목이 아니다. 「기이」는 <고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 <마한>, <북부여>, <동부여>, <가락국기> 등 삼국 이외의 나라들을 조목의 명칭으로 삼으면서 그 나라들에 대한 주요 정보를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시조혁거세왕>, <진흥왕> 등 제왕을 내세운 조목들 외에도 <연오랑세오녀>, <도화녀비형랑>, <김유신>, <장춘랑파랑>, <수로부인> 등 제왕이 아닌 인물들도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장군과 화랑, 귀족과 서민, 남성과 여성 들이 모두 제왕과 대등하게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기이」가 본기이면서 본기와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33)

「기이」편 뒤에는 「흥법」이 배치되어 있다. ‘흥법’은 “불법을 일으키다”는 뜻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불법을 일으키는 데 누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불법의 성쇠가 국가의 흥망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따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흥법」편은 고승과 제왕의 역할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각 나라에 불법을 전하는 역할은 순도, 마라난타, 아도 등 고승들이 했으나, 불법의 공인이라는 흥법은 소수림왕, 침류왕, 법흥왕 등 제왕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고승을 흥법의 필요조건으로, 제왕을 흥법의 충분조건으로 보고 흥법에서 고승과 제왕이 대등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흥법」의 요지다. 그렇다면, 「흥법」은 제왕의 본기인가, 고승의 열전인가?

「흥법」편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앞서 살펴본 『석문정통』의 <흥쇠지>가 도움이 된다. <흥쇠지>는 항목의 명칭에 ‘흥쇠(興衰)’를 내건 그대로 중국 불교사의 흥성과 쇠퇴를 간결하게 서술하면서 불교의 흥쇠에 제왕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드러낸 항목으로, 명칭이나 내용에서 이것과 유사한 편목이 「흥법」이다. <흥쇠지>와 견주어 보면, 「흥법」은 기전체의 ‘지’에 해당되는 편목임이 드러난다. 「흥법」 뒤에 「탑상」이 놓인 것도 그 때문이다.

「탑상」은 삼국 곳곳에 있는 불탑과 불상, 사리와 사찰 등 물질적인 것의 내력에 관한 문헌 기록과 구전 설화를 기록한 편목이다. 이 「탑상」에도 자장, 원효, 의상 등 많은 고승들이 등장하지만, 각 조목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불탑이나 불상 등이다. 따라서 「탑상」이 본기도 열전도 아니라는 점은 「흥법」보다 더 명확하다. 그리고 「탑상」이 「흥법」처럼 기전체의 지에 해당된다는 사실도 『석문정통』의 <탑묘지>가 뒷받침해준다. <탑묘지>도 중국에 부처의 사리가 전해지고 곳곳에 불탑과 사찰 등이 세워진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전체의 지에 해당하는 「흥법」과 「탑상」 뒤에는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 다섯 편목이 차례로 이어진다. 「의해」는 불교 교리를 잘 해석하거나 깨친 고승들의 전기를 실은 편목이며, 「신주」는 신라의 밀교 승려들이 주문으로 신통력을 보여준 이야기들을 실은 편목이다. 「감통」에는 지극한 수행이나 신앙으로 신통한 일을 일으킨 승려와 속인 들의 이야기가, 「피은」에는 세속의 명성을 피해 산속으로 숨은 승려나 속인 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마지막 「효선」에는 불교적 효를 실천한 승려와 재가 불자, 유교적 효를 실천한 속인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의해」부터 「효선」까지는 모두 기전체의 열전에 해당한다. 다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고승전의 십과에도 있는 「의해」와 「감통」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삼국유사』에만 있는 편목이라는 점이다. 「신주」, 「피은」, 「효선」 등은 중국의 고승전에서는 볼 수 없었다.34) 신라 불교의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감통」과 「피은」, 「효선」에는 욱면(郁面)이나 김현(金現), 신충(信忠), 손순(孫順), 빈녀(貧女) 등 속인들, 특히 미천한 신분의 여인들이 승려들과 나란히 입전되어 있다는 점이다. 『석문정통』에도 거사들의 전기가 실려 있으나, 미천한 신분의 여인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 편목들에는 속인이 승려보다 낫다거나 여성이 남성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이야기도 『석문정통』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셋째, 마지막 편목인 「효선」이 불교와 유교를 대등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효선」편에서는 먼저 출가자인 진정(眞定)과 재가자인 대성(大城)을 통해 불교적 효를 보여주고, 이어 속인인 향득(向得)과 손순, 빈녀 등의 이야기들을 통해 유교적 효를 따로 보여주고 있다. 득도를 위한 선만 중시되리라 여겨지는 불교에도 나름의 효가 있으며, 유교적 효 또한 온전하게 실행될 때 불교적 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불교적 효나 선은 유교적 효나 선과 충돌하거나 대립하지 않으며, 각각의 효와 선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실행되고 또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효선」은 그 자체로도 불교와 유교의 대등함을 보여주지만, 『삼국유사』 전체를 유교와 불교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구성과 그 특성을 정리해 보자. 「왕력」은 표, 「기이」는 본기, 「흥법」과 「탑상」은 지, 「의해」에서 「효선」까지는 열전이다. 형식은 단순한 기전체인데, 서술 내용에서는 매우 복합적이다. 「왕력」과 「기이」는 세속의 정치사를 기술한 것이고, 「흥법」은 제왕과 고승, 유교와 불교가 대등하게 화합한 역사를 서술한 것이며, 「탑상」부터 「피은」까지는 불교사를 물질과 인물을 통해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효선」은 「흥법」처럼 효와 선이라는 윤리적 덕목을 통해 유교와 불교가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전체 구성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를 표로써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2. 삼국유사의 편목들과 그 내용
편목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형식 본기 열전
내용 유교-정치사 유교 = 불교 불교-종교사 불교 =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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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5권)에서 권1~2의 「왕력」과 「기이」는 편목의 수에서는 둘에 불과하지만, 분량에서는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따라서 내용에서 서로 대등하게 기술된 유교와 불교, 정치사와 종교사는 분량 면에서도 대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단일한 기전체 형식 속에 유교와 불교, 세간의 정치사와 출세간의 종교사를 대등하게 기술했다는 점이 『삼국유사』의 주요한 특성이다. 이는 일연이 불교사를 불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유교 또는 정치와 뒤얽혀서 전개된 역사라고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일연은 또 신분, 성별, 승속(僧俗) 따위로 귀천과 우열, 현우(賢愚)를 가르며 차별하고 차등을 두는 관행이 그릇되었음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대등을 보여주었다. 「기이」는 제왕과 신하, 귀족과 서민, 남성과 여성 등이 역사에서 대등한 주역임을 보여주고, 「흥법」은 불교의 흥성에서 제왕과 고승이 대등한 역할을 했음을, 「의해」 이하의 편목들에서는 수행과 득도에서 상층과 하층, 승려와 속인, 남성과 여성 등이 대등함을 각각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교와 불교를 아우르고 승려들 외에도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을 두루 포괄하면서 대등론을 펼치는 것이 『삼국유사』의 특성이다.

Ⅳ. 일본의 『원형석서(元亨釋書)』 : 존왕론

일본에서 무가정권이 카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36~1573)로 넘어가기 직전인 1322년에 선승인 코칸 시렌(虎關師鍊, 1278~1346)은 기전체 형식의 『원형석서(元亨釋書)』를 편찬해 내놓았다. 시렌이 『삼국유사』를 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의 『석문정통』과 『불조통기』는 읽었다. 문제는 『원형석서』를 저술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시렌의 시문집(詩文集)인 『제북집(濟北集)』에는 곳곳에서 『석문정통』이나 『불조통기』가 언급되고 있다. 한 대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송나라 말에 개암 오극기가 편찬한 『석문정통』은 태사공(사마천)을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천태의 교리를 떠받들었기에 취사선택이 졸렬하다. 모든 승려들을 벌여 놓고 오롯이 하나의 근원을 이으려한들, 어찌 통사가 될 수 있겠는가? 그 뒤에 지반이 『불조통기』를 편찬했으나, 그 역시 개암의 전철을 밟았다.”35) 그런데 『원형석서』를 보면, 『춘추』, 『사기』, 『신당서』 등을 비롯해 고승전이나 전등록은 거론되고 있어도 『석문정통』과 『불조통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원형석서』의 편찬이 완료된 뒤에 『석문정통』과 『불조통기』를 읽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석문정통』이나 『불조통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점을 감안하면, 시렌이 『원형석서』를 저술하는 동안에 두 불교사서를 읽었다 해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36) 실제로 『원형석서』의 구성과 배치는 『석문정통』과 사뭇 다르다.

『원형석서』는 「십전(十傳)」, 「자치표(資治表)」, 「십지(十志)」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전」(권1~19)은 「전지(傳智)」, 「혜해(慧解)」, 「정선(淨禪)」, 「감진(感進)」, 「인행(忍行)」, 「명계(明戒)」, 「단흥(檀興)」 「방응(方應)」, 「역유(力遊)」, 「원잡(願雜)」 등 열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중국 고승전의 십과(十科)를 변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렌은 중국의 고승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원형석서』 권30의 <서설(序說)>에서, “대장경을 보다가 승사(僧史)의 세 전이 있음을 알았는데, 이른바 양·당·송의 고승전이었다. 그러나 이 세 전은 사서(史書)의 글로는 정밀하지 못하였다”37)고 썼다. 십과가 불교사서의 체재로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혜교는 고승들의 공덕과 업적에 따라 십과를 설정했다고 했는데,38) 이는 객관적 기준이 없이 주관적으로 분류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도선이 『속고승전』을 저술하면서 십과를 재조정한 것도 그런 점을 보여준다.39) 그렇다면, 시렌은 왜 십과를 버리지 않았는가? 그 자신이 “『고승전』과 『속고승전』 가운데서 한둘을 더하거나 뺐는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40)라고 밝혔듯이, 십과를 수정하고 변형한 것이 「십전」이다. 시렌이 십과를 버리지 못한 것은 숫자 ‘십(十)’ 때문이며, 스스로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렌은 “옛날에 성인(부처)이 법도를 세웠는데, 성자들과 범부들을 두루 이끌면서 가르침을 내었고, 여섯으로 나누고 넷으로 쪼개어서 숫자에 기대었다. 이는 지혜를 통해 변화를 살펴보고 수행하게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법도를 이치의 길로 삼아서 넓고 크게 두루 다 갖추었다. 부처의 길(佛道)이 있고, 법의 길(法道)이 있고, 승려의 길(僧道)이 있으니, 이 삼보를 아우르면서 열 가지로 나누었다. 열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삼보의 길이다”41)라고 했다. 여기서 여섯은 육도(六度, 육바라밀)를 가리키며, 넷은 사지(四智, 부처의 네 가지 지혜)를 가리킨다.42) 「십전」은 육도와 사지를 아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렌은 「십전」을 삼보의 길이라 했다. “부처의 길을 세워서 전지·원잡·방응이라 하였고, 법의 길을 세워서 역유·혜해라 하였으며, 승려의 길을 세워서 정선·감진·인행·명계·단흥이라 하였다.”43) 시렌이 「십전」의 성격과 의의를 이렇게 강조한 것은 중국 고승전의 십과보다 더 나으며 불교사서의 편찬에서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시렌의 「십전」에는 주목할 만한 항목이 하나 있다. 열 번째의 「원잡」이다. 시렌은 “왕족이나 귀족이면서 불도를 행하고 저승에서나 이승에서나 교화를 행하여 온갖 것들이 각기 제자리를 찾도록 해준 이들이 있어서 「원잡」에 모아 실었다”44)고 했고, 「고덕(古德)」·「왕신(王臣)」·「사서(士庶)」·「니녀(尼女)」·「신선(神仙)」·「영괴(靈怪)」 등 여섯 개의 하위 항목을 두었다. 「고덕」을 제외한 다섯 항목은 중국의 고승전들이나 『석문정통』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로, 왕족과 귀족, 서민, 여인 등 다양한 신분의 속인들 및 토착신들의 전기가 실려 있다. 이런 포괄성은 『삼국유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시렌이 속인들과 토착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실은 까닭은 『삼국유사』와 매우 다르다.45) 시렌은 「왕신」의 서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거룩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들이 이따금 이어서 나왔는데, 모두 우리 불법을 제대로 흠모하였다. 나는 인도와 중국의 여러 전적들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이 나라처럼 순박하고 맑은 곳은 없었다”46)고 썼고, 또 「신선」의 서두에서는 “이 나라는 순수하고 맑은 대승의 땅이어서 비록 이도(異道)라고 하여도 모두 불법을 받든다”47)고 썼다. 일본이 인도와 중국보다 더 순수하고 맑은 대승의 나라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이런 나라가 된 것은 임금이 잘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게 시렌의 주장이다. 「왕신」의 ‘논’에서 시렌은 일본은 대대로 왕들이 선양하여 왕통이 바뀐 적이 없어 인도와 중국보다 순일하고 온전한 나라라고 하면서 갖가지 역사적 사실을 끌어와 논의를 편 뒤에, “내가 천축과 중국의 일들을 보니, 우리나라처럼 원만하고 온정이 두터웠던 적이 없었다. 이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빼어난 까닭이고, 대대로 임금들이 지덕과 무용을 겸비한 까닭이며, 또한 우리 불법이 돕고 받쳐준 까닭이다. 그리하여 내가 ‘지극하게 다스려지는 곳’이라 말한 것이니, 과연 그러하지 않은가?”48)라는 글로 마무리했다. 일본은 훌륭한 임금들이 다스리는 곳이어서 순수한 대승의 나라라는 것이다.

시렌의 이런 인식은 「십전」 뒤에 배치된 「자치표」(권20~26)가 더욱 명확하게 뒷받침해준다. 「자치표」는 킨메이황제(欽明皇帝) 원년(540)부터 켄랴쿠황제(建曆皇帝) 11년(1221)까지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제왕의 재위년에 따라 서술한 항목이다. 시렌은 「자치표」 서두에서, “처음에 나는 이 책을 편찬할 때 『춘추』를 본받으려고 하였으나, 중치나 하치들이 혹시라도 힘들어할까 걱정하여 어쩔 수 없이 전기를 두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 편년에 대한 굳은 뜻이 있었다. 슬며시 임금들의 덕화를 보았더니, 역시 불교의 도움이 있었다”49)고 썼다. 이는 「자치표」가 『춘추』를 본받아 불교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자치표」의 서술 방식은 기전체의 본기와 다르지 않다. <킨메이황제(欽明皇帝)>조의 일부를 보자.

13년(552) 봄. 여름. 가을. 겨울 10월, 백제국 임금이 대부인 서부 희씨를 보내어 석가모니 부처의 동상과 경전, 논서, 깃발과 덮개 따위를 바쳤다. 대전에 불이 났다.

14년(553) 봄. 여름 5월, 기이한 재목을 얻어서 불상을 새겼다. 가을. 겨울.50)

주요 사건만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방식은 확실히 『춘추』의 필법이다. 그러나 제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 본기라고 한다면, 제왕과 관련된 불교적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는 「자치표」는 분명히 ‘본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자치표」는 기전체의 ‘표’와 ‘본기’를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렌은 이런 「자치표」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했던 것일까?

시렌은 본디 「십전」보다 「자치표」에 마음을 두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임금들의 덕화가 불교사에서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치표」의 서두에서도 이 점이 밝혀져 있으며, 실제로 「자치표」에서는 임금의 은택으로 정치와 불교가 조화를 이루면서 일본이 오래도록 태평을 누렸다는 사실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51) 「자치표」의 명칭에도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자치(資治)’는 “정치를 돕는다”는 뜻이고, 여기서 정치를 돕는 것은 불교다. 정치는 제왕의 소관이니, 「자치표」는 결국 정치에 도움이 된 불교적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제왕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구실을 하는 셈이다. 이런 존왕론(尊王論)이 『원형석서』의 특성이다.

「자치표」 다음에는 「학수(學修)」, 「도수(度受)」, 「제종(諸宗)」, 「회의(會儀)」, 「봉직(封職)」, 「사상(寺像)」, 「음예(音藝)」, 「습이(拾異)」, 「출쟁(黜爭)」, 「서설(序說)」 등으로 이루어진 「십지」(권27~30)가 이어진다. 「학수」에서는 불교에서 배움과 수행의 의미를 밝혔고, 「도수」에서는 출가해서 계율을 받고 승려가 되는 득도(得度)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했으며, 「제종」에서는 일본에서 성행한 열 개의 종파에 대해 소개했다. 이렇게 불교의 수행과 득도, 종파들에 대해서뿐 아니라 법회, 승직, 사찰과 불상 등 불교의 갖가지 제도와 문화에 대해 정리한 부분이 「십지」인데, 여기에서도 일본이 순수한 대승의 나라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표 3. 원형석서의 항목들과 그 내용
항목 십전(十傳) 자치표(資治表) 십지(十志)
내용 고승들의 전기
(재가자 및 토착신 포함)
제왕의 정치를 돕는 불교사 갖가지 불교적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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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석서』를 「십전」, 「자치표」, 「십지」로 구성한 데 대해 시렌은 이렇게 썼다. “십전은 그 사람을 실은 것이다. 십지는 그 일을 적은 것이다. [십전과 십지의] 쌍십은 가득한 수다. 그래서 뒤섞인 데서 큰 것을 세운다. 하나의 표를 가운데 두었다. 이는 전과 지를 두루 꿰기 위한 것이다. 빈말은 싣지 않고 그것을 행해진 일에서 보여주었다. 국사(國史)와는 구분될지라도 이는 실로 석씨(釋氏)의 통표(通表)다.”52) 『원형석서』의 중심이 「십전」과 「십지」를 하나로 꿰는 「자치표」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자치표」가 불교사를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렌이 “‘호법(護法)’은 여기서 없애버렸다. 이 땅에는 폭군이나 패역한 관리가 없는데, 어찌 보호할 일이 필요하겠는가?”53)라고 한 말에도 암시되어 있듯이, 훌륭한 제왕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서 다스리므로 불법이 어그러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시렌의 이런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꽤 어긋난다.

『원형석서』가 편찬되던 14세기 이전의 일본사에서 천황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시기는 매우 짧다. 이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부터 천황의 외척이 정무를 대행하는 섭관정치(攝關政治)가 지속되었고, 그 뒤에는 무가정권이 들어섰다. 천황가는 오래 전부터 실권을 잃은 채 명맥만 잇고 있었으므로 정치사와 불교사에서 제왕들이 큰 역할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시렌은 『원형석서』에서 「자치표」를 중심에 둔 구성과 배치, 서술 등을 통해 불교의 수용과 융성, 불교사의 전개에서 제왕이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원형석서』에서는 기전체가 ‘존왕론’을 위한 장치로 구실하고 있다.

Ⅴ. 맺음말

『석문정통』은 「본기」, 「세가」, 「제지」, 「열전」, 「재기」 등 다섯 항목으로 구성되었고, 『삼국유사』는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 아홉 편목으로 구성되었으며, 『원형석서』는 「십전」, 「자치표」, 「십지」 등 셋으로 구성되었다. 기본적인 체재는 기전체로서 같지만, 세부 항목의 설정과 구성은 사뭇 달랐다. 서술 내용에서도 포괄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포괄 대상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석문정통』이 다양한 종파를 아울렀다면, 『삼국유사』는 유교와 불교를 아우르면서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을 포괄했고, 『원형석서』는 다양한 인물들과 토착신들을 포괄했다.

이러한 차이는 저자들의 인식과 저술 의도가 달랐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종감은 『석문정통』에서 천태종이 세존의 법통을 이은 종파임을 강조하면서 종파적 정통론을 폈고, 일연은 『삼국유사』로써 중세의 여러 차등들, 곧 상층과 하층·남성과 여성·승려와 속인 등이 대등하다는 것, 나아가 유교와 불교가 대등하다는 대등론을 폈으며, 시렌은 『원형석서』를 통해 일본이 순수하고 온전한 대승의 나라가 된 것은 순전히 제왕의 덕화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존왕론을 폈다.

이렇게 세 불교사서에 내재해 있는 논리가 서로 다른 것은 각 나라의 불교사 전개나 불교사서 편찬의 추이가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감이 천태종의 정통론을 편 것은 송대의 불교계를 주도한 선종 때문이었다. 천태종보다 늦게 성립된 선종은 송대에 가장 강력한 종파로 자리잡았는데, 전등록을 거듭 편찬하면서 종파적 정통성까지 확보했다. 종감은 이러한 선종의 정통성에 대한 반론으로 『석문정통』을 편찬한 것이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데에는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1145)와 『해동고승전』(1215)이 역사서로서 편향되어 있었던 점이 주요인이었다. 『삼국사기』는 전형적인 기전체 유교사서인데, 불교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않고 거의 배제했다. 열전체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도 고승의 뛰어남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불교가 유교 또는 정치와 뒤얽힌 사실들을 간과했다. 일연은 두 역사서의 편향을 시정하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고 정치사와 종교사가 뒤얽혀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이 역사 속에서 대등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일본은 불교사서 편찬에서 중국과 한국보다 매우 뒤떨어져 있었다. 13세기가 되어서야 『일본고승전요문초』(1251)와 『남도고승전(南都高僧傳)』(1권)이 편찬되었으나, 체재와 내용이 부실해 온전한 불교사서로 보기 어렵다. 그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시렌이 중국의 고승전들과 『사기』, 『신당서』 등 유교사서를 단번에 넘어설 역사서 편찬을 기획해 저술한 것이 바로 『원형석서』였다.54) 이 『원형석서』는 불교사서 편찬에서 일본의 후진성과 낙후성을 일거에 극복하고 자국이 대승의 나라임을 알리기 위해 편찬된 불교사서다.

본고에서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환기라 할 13~14세기에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편찬된 『석문정통』과 『삼국유사』, 『원형석서』 등 기전체 불교사서들의 특성을 고찰해 각각 정통론, 대등론, 존왕론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이는 시론에 불과하다. 그러한 차이가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또 세 나라의 불교사나 불교문화, 사상 등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 등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후속 작업으로 남겨둔다.

Notes

* 이 논문은 2023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3S1A5B5A16076036).

1) 정천구, 「중국의 불교사서 편찬과 그 역사적 양상」, 『동북아역사논총』 84 (2024), pp.190-197 참조.

2) 송대의 선종과 천태종에 대해서는 郭明, 『中國佛敎思想史』 下卷(福建人民出版社, 1995), pp.23-117 참조.

3) 무신정권 이후에 전개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대해서는 정병삼, 『한국불교사』(푸른역사, 2020), pp.346-435 참조.

4) 신불교의 등장과 추이에 대해서는 末木文美士, 『日本仏敎史』 (新潮社, 1996), pp.191-231에서 잘 정리했다.

5)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대략 48종의 불교사서가 편찬되었는데, 기전체는 『석문정통』과 『불조통기(佛祖統紀)』(1269) 두 종이 13세기에 편찬된 것이 전부다.(정천구, 앞의 글 참조.) 한국에서도 『삼국유사』뿐이다. 일본에서만 예외적으로 1701년에 율종의 승려인 기쵸(義澄)가 『초제천세전기(招提千歲傳記)』를 기전체로 편찬한 바 있다.(『大日本佛敎全書』 권105에 수록되어 있다.)

6) 중국에서 고승전과 전등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불교사서의 주요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정천구, 「7~8세기 중국 고승전의 정형화와 다양화」, 『대순사상논총』 48집(2024), pp.305-335; 정천구, 앞의 글(2024), pp.184-196 참조.

7) 『三國史記』 권46, <金大問>, “作傳記若干卷, 其髙僧傳·花郎世記·樂本·漢山記猶存.” 그러나 이 『고승전』은 전하지 않는다.

8) 『해동고승전』에 대해서는 장휘옥, 『해동고승전』(민족사, 1991), pp.13-50 참조.

9) 이에 대해서는 平岡定海, 「延暦僧録と『日本高僧伝要文抄』の関係について」, 『佛敎學硏究』 43 (1987), pp.341-370 참조.

10) 이에 대해서는 『원형석서』를 다루는 본문에서 다룬다.

11) 불교사서로서 『석문정통』과 『원형석서』를 고찰한 연구는 매우 적다. 『석문정통』에 대해서는 曹仕邦, 「論釋門正統對紀傳體裁的運用」, 『中國佛敎史學史論集』(主編 張曼濤, 臺北: 大乘文化, 1978), pp. 299-380이 대표적이며, 『원형석서』에 대해서는 胡照汀, 『元亨释书研究』 (郑州大学出版社, 2022); 「论 《元亨释书》的史学史地位与史料价值」, 『佛学硏究』 2024年 第1期, pp.59-67이 자세하다. 『삼국유사』에 대해서는 설화집, 고승전, 역사서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저술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오롯이 불교사서로서 다루는 연구는 이 논문에서 거의 처음으로 한다.

12) 김두진, 「삼국유사의 체제와 내용」, 『한국학논총』 23 (2000), pp.1-26.

13) 정천구, 「『삼국유사』와 중·일 불교전기문학의 비교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11-132.

14) 『釋門正統』 권1, <釋門正統序>, “編年者, 先聖舊章也. … 聖筆約以備之, 微顯志晦懲惡勸善之體猶在.”

15) 『춘추좌전(春秋左傳)』 <노성공(魯成公)> 14년조에 나오는, “『춘추』의 글은 숨기면서 드러내고 쓰면서도 감추며, 에두르면서도 조리가 있고 남김이 없으면서도 비루하지 않으며, 악함을 징계하고 착함을 부추기니, 성인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엮을 수 있겠는가?”(春秋之稱, 微而顯, 志而晦, 婉而成章, 盡而不汚, 懲惡而勸善. 非聖人誰能修之?)라는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16) 『釋門正統』 권1, <釋門正統序>, “釋氏岩居穴處, 身屈者名愈高, 位下者道愈肅, 四海萬里孤雲身, 特烏論所謂編年者? 若門戶頹圮, 稱戎侮我, 烝然來思, 不有不似, 罪使誰當? 其用遷·固法, 誠有不獲已者. 法雖遷·固而微顯志晦懲惡勸善, 未嘗不竊取舊章. 此正統之作也.”

17) 曹仕邦은 “송대에 춘추학이 발달했으므로 종감이 ‘존왕양이’의 사상적 영향을 깊이 받았다”(앞의 글, p302.)고 했는데, 사상보다는 필법의 영향이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18) 曹仕邦, 앞의 글에서는 각 항목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했으나, 저술의 성격이나 저자의 의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 점을 특히 논의한다.

19) 『釋門正統』 권1, <釋門正統序>, “本紀以嚴創製, 世家以顯守成, 志詳所行之法, 以崇能行之侶, 諸傳派別而川流, 載記岳立而山峙.”

20) 송대에 선종에서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을 시작으로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1204)까지 다섯 전등록을 거듭 편찬했는데, 이 과정에서 27조설은 사실로 확정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천구, 「중국의 불교사서 편찬과 그 역사적 양상」, pp.190-196 참조.

21) 『摩訶止觀』 권1, “付法藏人, 始迦葉終師子, 二十三人. 末田地與商那同時取之, 則二十四人.” 종감은 계보에 마전지를 포함시켜 24조로 했다.

22) 선종의 전등계보가 확립되는 과정에 『마하지관』의 23조설 또는 24조설, 특히 당나라 때 이화(李華)가 쓴 <고좌계대사비(故左溪大師碑)>에 나오는 29조설의 영향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성본, 「선종전등설의 성립과 발전 Ⅳ」, 『불교학보』 34 (1997), pp.277-309 참조.

23) 『진서』는 모두 130권이며, 「제기(帝紀)」(권1~권10), 「지(志)」(권11~권30), 「열전」(권31~권100), 「재기(載記』(권101~권130)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4) 조사방은 종감이 종교사를 기술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기전체를 채택했을 뿐 아니라 적절하게 운용하지 못했다며 『석문정통』을 실패한 저술로 보았다.(曹仕邦, 앞의 글, p.300) 그러나 본고에서는 다르게 본다.

25) 『釋門正統』 권4, <興衰志>, “德宗之末, 乃有金陵沙門慧炬撰寶林傳, 誇大其宗.”

26) 『釋門正統』 권4, <興衰志>, “二年, 錢塘長老契嵩進定祖圖正宗記. 自慧炬撰寶林傳, 稱有二十八祖及此土六祖, 厥後傳燈錄復踵其訛. 嵩遂欲小乘禪經及寶林傳等定之, 以謂付法藏傳可焚. 吳門子昉法師着論辦之, 去其僞謬四名, 復准付法藏傳, 止二十四代.”

2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陳垣, 『中國佛敎史籍槪論』 (上海書店出版社, 1999), pp.98-100 참조.

28) 김두진은 “일연은 『석문정통』 등 중국 정사체를 모방한 승전류의 편목을 상당히 참고하였다”(앞의 글, p.12)고 하면서 그 근거로 『석문정통』의 <탑묘지>와 <순속지>가 『삼국유사』의 「탑상」, 「효선」과 유사한 점을 들었다. 그러나 명칭뿐 아니라 서술 방식이나 서술 내용도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일연이 생존해 있을 때 『석문정통』이 고려에 전해졌다고 할 만한 근거가 없다.

29) 『삼국유사』의 체재나 각 편목에 대한 기존 논의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구성적 특성을 비교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연구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한다.

30) 『삼국유사』의 「왕력」에 대해서는 김상현, 「삼국유사 왕력편 검토」, 『동양학』 15 (1985), pp.221-237 참조.

31) 『三國遺事』 권1, <敍>,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32) 『삼국유사』에서 ‘신이’는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하정현, 「신화와 신이(神異), 그리고 역사 : 《삼국유사》의 신이 개념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4 (2003), pp.135-139에서는 정치적 신이, 종교적 신이, 도덕적 신이 등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33) 『삼국유사』의 체재와 성격을 고찰한 김문태 또한 「기이」를 ‘기(紀)로서의 이(異)’라고 보았는데, “기이편은 사서의 본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는 있으나, 신이한 일로써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할 것이다”[『삼국유사의 시가와 서사문맥 연구』 (서울: 태학사, 1995), p.26]라고 해 그 근거를 신이한 일로써 역사를 서술한 데서 찾았다. 이는 다른 편목들에도 신이한 일들이 거듭 나온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34) 굳이 전례를 찾자면, 『법원주림』에서 찾을 수 있다. 『법원주림』 권60~61의 「주술(呪術)」편은 「신주」와, 권31의 「둔세(遁世)」편은 「피은」과, 권49의 「충효(忠孝)」편은 「효선」과 각각 유사하다. 그러나 『법원주림』은 불교사서가 아니라 백과사전이며, 서술 방식과 내용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35) 『濟北集』 권9, <答藤待郞>, “趙宋未, 有鎧菴吳克己撰釋門正統, 學于太史公也. 而崇台敎, 拙取捨. 夫欲列萬僧傳系一宗, 寧得爲通史乎? 其後志磐纂佛祖統紀, 亦陷鎧菴覆轍焉.”(『五山文學全集』 제1권, 思文閣, 1992, p.150)

36) 胡照汀, 「论 《元亨释书》 的史学史地位与史料价值」, p.61에서는 『사기』와 『춘추』뿐 아니라 『불조통기』도 모방했다고 했는데, 본고의 논의에서 드러나겠지만 형식과 내용, 배치 등을 보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37) 『元亨釋書』 권30, <序說>, “因見大藏有僧史之三傳, 所謂梁唐宋也. 而此三傳不精史文.” 번역은 코칸 시렌 저, 정천구 역주, 『원형석서』(하), 씨아이알, 2010, p.593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아래에서는 역자 이름과 쪽수만 밝힌다.)

38) 『高僧傳』 권14, 「序錄」. “開其德業, 大爲十例.”

39) 도선이 십과를 재조정한 데 대해서는 정천구, 「중국 고승전의 체재 변화와 그 의미」, 『대순사상논총』 43 (2022), pp.190-194 참조.

40) 『元亨釋書』 권30, <序說>, “梁唐削添一二科, 不爲無據耳.”

41) 『元亨釋書』 권19, <度摠論>, “昔者聖人之立度也, 彌綸聖凡而生教, 六分四析而倚數. 觀變於智立修. 是故度之爲道也廣大悉備. 有佛道焉, 有法道焉, 有僧道焉, 兼三寶而十之. 十者非佗也, 三寶之道也.”(정천구 역주, pp.201-202.)

42) 육도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 지혜)바라밀이며, 사지는 대원경지(大圓鏡智)·평등성지(平等性智)·묘관찰지(妙觀察智)·성소작지(成所作智) 등이다.

43) 『元亨釋書』 권19, <度摠論>, “是以立佛之道曰智願方, 立法之道曰力慧, 立僧之道曰禪進忍戒檀.”(정천구 역주, p.202.)

44) 『元亨釋書』 권19, <度摠論>, “王公而行, 幽明而化, 被于萬物, 各得其所, 蓋取諸願雜.”(정천구 역주, p.204)

45) 「원잡」은 저자인 시렌의 인식뿐 아니라 일본 불교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과목이지만, 이에 주목한 연구는 石塚薰, 「『元亨釋書』に関する一考察」, 『佛教大學大學院紀要』 33(2005), pp.1-15가 있을 뿐이다. 이 연구에서는 이전과 다른 신앙 형태, 곧 내세를 지향하는 것보다 현세를 지향하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을 밝혔다. 본고에서는 더욱더 자세한 논의를 편다.

46) 『원형석서』 권17, 「王臣」. “我國家聖君賢臣相次間出, 皆能欽歆我法. 予博見印度支那之諸籍, 未有此方之醇淑也.”(정천구 역주, p.59)

47) 『元亨釋書』 권18, 「神仙」. “此方純淑大乘之域, 雖異道皆奉佛.”(정천구 역주, pp.142-143)

48) 『元亨釋書』 권17, 「王臣」. “我見竺支之事, 如我國之渾厚者未有之矣. 是區域之靈勝, 祖宗之聖武, 而亦吾佛乘之資輔也. 我言至治之域者其不然乎?”(정천구 역주, p.99)

49) 『元亨釋書』 권20, 「資治表」. “初予修此書欲則春秋, 只恐中下之或病諸, 其不得已耳矣. 然其胸懷猶介然于此也. 竊見皇朝之德化, 且託佛乘之翼佐也. 故予摭其繫吾之實事, 以寓素蘊而作資治表.”(정천구 역주, pp.209-210)

50) 『元亨釋書』 권20, <欽明皇帝>, “十有三年春. 夏. 秋. 冬十月, 百濟國主使大夫西部姬氏貢釋迦佛銅像及經論幡蓋. 大殿灾. 十有四年春. 夏五月, 得異材, 刻佛像. 秋, 冬.”(정천구 역주, pp.210-214)

51) 칸무황제(桓武皇帝) 재위 11년조에 사문 사교오(施曉)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삼보(三寶)를 크고 풍성하게 넓힌 일에서 임금의 공이 아닌 게 없습니다”(정천구 역주, p.327)라는 표현이 나온다.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으나, 「자치표」의 성격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52) 『元亨釋書』 권30, <序說>, “十傳者所以載其人也. 十志者所以記其事也. 雙十者滿數也. 寓渾而設大 矣. 一表居中焉. 所以通串傳志也. 不載空言見之行事. 雖采國史實釋氏之通表也.”(정천구 역주, pp.589-590.)

53) 『元亨釋書』 권30, <序說>, “護法者今鋤之. 此土無恭君悖吏, 何護之有?”(정천구 역주, p.596.)

54) 이러한 사실은 시렌이 천황에게 『원형석서』를 바치면서 쓴 표문(表文)에 잘 드러나 있다. 코칸 시렌 저, 정천구 역주, 『원형석서』(상), 씨아이알, 2010, pp.23-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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