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6월항쟁 이후 새로운 갈등 양상과 종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이종우 1 , *
Jong-woo Lee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상지대학교 교수
1Professor, FIND College, Sangji University

© Copyright 2025,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l 25, 2025; Revised: Nov 24, 2025; Accepted: Dec 15, 2025

Published Online: Dec 31, 2025

국문요약

본 논문의 목적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 양상과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 중심의 운동에서, 경제적 평화, 경제불평등, 생명 등 다양한 사회 정의 이슈에 적극 참여했고, 정권이 불의하다고 판단하면 기존의 활동과 비슷한 정권에 대한 저항을 전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은 한국천주교 고위층의 진보적 움직임을 유도하고, 천주교에 진보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젠더, 낙태 등 생명에 관련된 이슈에 관해서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보수적인 입장을 표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를 향한 쇄신 요구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입장을 드러내거나 내부 개혁에 나서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천주교 특유의 엄격한 위계질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조직 보호를 위해 내부 쇄신 묵인을 암묵적인 경계선으로 인식하는 것, 성속의 엄격한 구분과 사제들의 자기 정의, 외부의 비판 회피 등 원인이 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activities and significance of the Catholic Priests’ Association for Justice (CPAJ) from the June Democratic Uprising in 1987 to the present. Following Korea’s democratization, the CPAJ expanded its focus from resistance against authoritarian regimes to active involvement in diverse social justice issues, including economic peace, economic inequality, and the right to life. When the CPAJ judged a government to be unjust, it launched resistance movements reminiscent of its earlier activities. These actions contributed to encouraging progressive initiatives among the Catholic hierarchy in Korea and helped to shape a progressive public image of the Catholic Church.

However, the CPAJ has remained largely silent — or in some cases expressed conservative views — on critical issues such as gender and abortion. It has also failed to propose concrete positions or resistance in response to calls for internal reform within the Korean Catholic Church. These tendencies may stem from various factors, including the Church’s strict hierarchical order, a tendency to treat internal reform as a taboo in order to protect the CPAJ itself, the rigid boundary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the priests’ self-definition of their roles, and a general avoidance of external criticism.

Keywords: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6월 민주항쟁; 종교의 사회참여; 종교와 갈등; 위계질서; 천주교 쇄신; 생명윤리
Keywords: the June Democratic Uprising; religious engagement in society; religion and conflict; religious hierarchy; Catholic Church Reform; bioethics

Ⅰ. 서론-갈등의 어원 속 맥락

갈등(葛藤)의 사전적 의미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이해관계 따위로 적대시 또는 불화하는 일. 상반(相反)하는 것이 양보하지 않고 대립함.”이다. 갈등은 기본적으로 칡과 등나무라는 두 가지 수종(樹種) 사이의 관계를 전제하는데, 둘 이상의 존재 사이의 관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숨은 뜻은 영어 단어인 ‘conflict’의 어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conflict는 라틴어 ‘confligere’에서 비롯되었는데, confligere에서 ‘con’은 ‘함께’라는 뜻의 ‘com’에서 비롯되었다.

칡과 등나무가 같은 나무를 감고 올라가면 칡은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올라가면서 서로 얽힌다. 그런데 칡과 등나무는 칡이나 등나무 한 품종이 단독으로 어떤 나무를 감고 올라가기도 하고, 칡 두 줄기 이상, 등나무 두 줄기 이상이 하나의 물체를 함께 감고 올라가기도 한다. 등나무가 다른 등나무를, 칡이 다른 칡을 덮고 올라간다면, 같은 방향으로 어떤 물체를 감고 올라가지만, 칡과 등나무가 같은 물체를 감고 올라갈 때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갈등의 어원을 설명한 이유는 갈등이 단순히 서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적대나 불화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문학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내적갈등’이라고 하고, 같은 집단에서도 생각이나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면 갈등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기독교는 처음 생겼을 때부터 외부와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사회의 기득권 세력일 때도 있었고, 기존의 종교나 세속의 지배 세력을 향한 저항의 주체인 적도 있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와 그 제자,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은 대안적 종교와 공동체, 새로운 신앙을 구현한 “별도의 무리”였던 반면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는 피지배계급과 연대하며 자신들의 종교와 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1)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으로 약칭)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 갈등에 참여하면서 각종 갈등 상황에서 의사를 표현하고, 그 결과 천주교 안팎에서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본 논문의 목적은 보통 ‘6월항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전국적 항쟁을 통해 획득한 1987년 6월 직선제 개헌 이후 사제단의 활동과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사제단의 활동이 한국의 민주화 이후 다양해진 사회 갈등에서 입장을 드러냈지만, 정작 천주교 내부의 각종 담론을 비롯한 몇몇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음을 드러낼 것이다. 하필 1987년을 시점으로 잡은 것은 이전의 박정희, 전두환 신군부 등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의의는 종교가 사회적 갈등에 참여하는 사례와 의미가 그 맥락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종교는 그 자체가 갈등의 원인인 경우도, 중재자인 경우도 있었다. 혹은 갈등 관계에 있는 두 집단 중 한쪽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같은 종교 안에서도 ‘사회참여’라는 아젠다를 두고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각 종교의 사회참여에 관한 입장, 개별 종교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인식, 사회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는 뜻이다. 종교인의 사회참여는 신앙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합하면서 이루어진다.2)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 초 세속 속 종교에 대한 평가는 ‘가난한 피조물의 한숨,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정신을 상실해 버린 현실 정신, 인민의 아편’3)에서부터 ‘자본주의 기원과 유지의 주요 원인’4)이라는 규정까지 매우 다양했다. 혹은 “종교가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오히려 사회적 영향력이 강화될 수 있다.”5)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심지어 “시민사회를 상부구조이자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뜻하는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공간으로 규정하면서, 천주교회 역시 헤게모니를 발휘하는 시민사회에 포함된다.”6)라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담론들은 대부분 서구의 세속화나 정치 변동의 관찰 결과였다. 사제단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독재와 민주화, 빠른 경제성장 등 독특한 역사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라는 종교적 배경을 기반으로 종교가 사회적 갈등에 참여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에서 종교가 갈등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을 설명하는 서구의 이론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특히 분단, 독재, 민주화 등 한국현대사의 독특한 맥락 때문에 ‘세속화’와 관련된 서구 이론들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사안들이 존재한다.

사제단이 한국 사회의 시대적인 과제에 대하여 성찰하고 참여하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세속 사회에 온전히 존재하는 동시에 그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자각 때문7)이라는 평가가 있다. 실제로 사제단 사제들의 활동을 ‘세상사목’이라고 표현8)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사제단의 활동을 ‘천주교나 성공회에서, 사제가 신도를 통솔·지도하여 구원의 길로 이끄는 일’인 사목으로 규정함을 의미한다. 즉 사제단의 활동이 세속에서의 투쟁이 아닌 성직자의 성스러운 일이라고 규정하거나, 그것을 명분으로 삼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모습은 세속 사회 안에서 세속법의 보호를 받는 종교가 갈등 상황에 목소리를 내고,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천주교의 지향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제단에 관한 연구는 과거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행연구는 주로 1970년대에서 1980년대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나마 1987년 이후의 활동에 관한 연구가 일부 존재하지만, 이것들 역시 해당 연구에서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9) 2000년대가 시작되고 20년이 넘게 흘렀고, 1987년 민주화가 이제 ‘87체제’라고 일컬어지면서 과거로 평가받는 현재 시점에서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을 분석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종교가 사회 갈등 상황에 참여하는 양상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Ⅱ. 배경

1. 역사적 배경

제2차바티칸공의회 이전 천주교는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기득권에 협조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천주교에서도 확인된다.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였던 귀스타브 샤를마리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재위기간 1911~1933)의 안중근 의사 고해성사 거부, 독립운동가 밀고에 따른 105인 사건 발생, 3.1운동 당시 식민지 조선의 각 교구에서 있었던 천주교 신학생의 만세운동 참가 금지와 참가자 퇴학 조치 등 천주교의 친일반민족행위 논란이 대표적인 근거다.10) 그리고 그 결과로 식민지 조선 당시 천주교회는 교단을 지키고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부가 수립되고 유신독재가 시작된 이후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출범 초기 사제단은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겼고,11) 이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유신체제에 저항했다. 이후 사제단은 평신도 중심의 시민단체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서 민주화운동 기간 중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활동했다. 또한 임의 단체인 사제단이 공식단체인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중첩되는 활동을 하면서 서로 협력하는 모습도 보였다.12)

10.26 사건과 신군부정권 출범 이후 종교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이전의 박정희 정권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신군부정권은 이승만 정권 당시와 비슷한 형태의 종교에 대한 분할통치(divide and rule policy)의 전략을 사용했다. 통제와 탄압 일변도였던 박정희 정권과 달리 신군부정권은 종교에 대한 일정한 수혜를 제공하여 정권 친화적 세력을 지원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과 내부적 갈등을 조장했다. 종교에 대한 세금 혜택과 정부보조금 지원, 종교 시설의 존재로 발생하는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과 관련된 민원을 핑계로 종교 통제를 시도13)했다.

민주화 이후 진보적 시민단체가 인식하는 천주교의 위상도 변했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운동은 노동운동, 도시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 등 소위 ‘민중운동’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는데, 특히 농민운동에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동자, 농민 등 민중운동 세력이 종교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영향력이 뚜렷하게 약해졌다. 이 과정에서 종교를 배경으로 한 활동가들과 그렇지 않은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도 발생했다.14) 이후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천주교, 개신교 단체와 종교와 관련 없는 사회운동 단체는 일부 사안에 대해서만, 일부 단체가 연대하는 형태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는 민주화로 인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성향의 활동가들이 더 이상 천주교를 보호막으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었다.15) 이것은 군부독재 시절 외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받는 상황에서 그나마 종교가 시민단체에 비해 독재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이를 바탕으로 종교가 진보적 시민단체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사제에서 교황에 이르는 연결과 이에 따른 교황이 다른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도 여기에 영향을 끼쳤다.16) 그러나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 단체의 활동 범위와 자율성이 확장되면서 활동가들은 더 이상 종교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졌다.

1987년 이후 종교 내부에서 정치적인 재편이나 재정렬이 이어졌다. 특히 상이한 정치성향을 지닌 종교지도자 집단 사이에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변화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서 민주화운동 당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진보적인 개신교 단체들로 인해 침묵을 유지했던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이 거침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고 단체를 구성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단체를 결성하고 집회를 개최하며 정치적 입장을 표현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시민들이 천주교를 진보적으로 인식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이들은 때때로 사회참여에 부정적인 다수 세력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사회참여에 부정적인 다수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 표명에 소극적이거나,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소수 사제에게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한국 천주교회의 진보적 이미지나 한국 천주교회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의 인식은 천주교 교세 확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자수의 증가세가 정체했던 1969년에서 1972년까지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1973년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 수 추이는 빠른 상승세로 전환했다.18) 교회가 정치권과 갈등 상황에 있는 행위자들에게 종교적 정체성과 도덕성을 부여할 경우, 평신도들의 수적 증가와 높은 헌신이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사제단이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 운동에 관여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종교적 이익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19)

2. 천주교 내부적 배경

천주교 내부적으로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에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은 해방신학의 체화와 실천이었다.20) 잘 알려진 대로 사제단은 제2차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영향으로 결성되었고,21)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한국 천주교회나 성직자를 향해 탄압 일변도의 정책을 펴면서, 보수적인 주교들까지 해방신학을 옹호하는 논조의 공동 교서를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22) 해방신학이 한국에 유입된 것은 1970년대였고, 시기적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 시기와 비슷한데, 이것은 사제단의 결성에 해방신학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뜻한다. 그러나 해방신학을 학습하고 실천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을 고려하면, 해방신학의 정신을 본격적으로 실천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해방신학에 관한 저서가 본격적으로 번역되고 출판된 것도 1980년대 이후였다.23) 해방신학은 남아메리카의 빈부격차와 이것으로 인한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관심을 시작으로, 그 근본적 원인이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침략이라고 규정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서 해방신학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와의 연대, 통일운동 등이다. 그런데 이것은 역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계의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에 관한 관심이 주로 “가난”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는 것도 보여준다. 일부 식민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신학을 연결한 저서를 제외하고, 상당수의 저서의 키워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희망”이었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라는 개념에서 주된 기준이 “경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사회적 약자”라는 개념의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지만, 실제로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노동과 통일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1987년 이후 사제단이 전개한 활동의 의미를 더욱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뒷부분에서 소개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과의 대립과 협력이 교차했던 1980년대는 비판적 사회참여와 정권과의 협력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던 시기였다.

신군부의 종교 정책은 정부의 종교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종교 사이의 갈등과 종교와 세속 사이의 갈등을 강화시켰다. 사제단 역시 천주교 교구의 고위층, 특히 친정부적인 성향의 사제가 교구의 고위층이 되었을 때 일정한 불이익을 받았다. 1980년대 신군부독재정권이 한국 천주교회에 호의와 억압을 동시에 수행하는 분할통치 형태의 정책을 펼쳤을 때 교구별 자치와 분권 원칙이 강했던 한국 천주교회의 특성을 바탕으로 보수적인 교구장들이 진보적인 신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모습도 나타났다.24) 사제단이 활동하는 와중에 내부적 갈등도 존재했다. 일부 교구 주교들이 자신의 관할 교구에서 활동하는 사제단 소속 신부를 징계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1975년 2, 3월에 주교단이 사제단의 활동을 공식 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로 흡수시키고, 시국 문제에 대해 주교단 차원에서 대처하겠다고 나서는 등 사제단의 활동에 제동도 걸었다. 천주교 교단 내부에서 오랫동안 아예 사제단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었다.25) 『가톨릭대사전』에서 “사제단” 항목이 빠지는 등 적어도 1988년까지 한국 천주교회 내부에서 사제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도 주저하거나 삼가는 분위기였다. 함세웅은 이러한 모습이 사제단이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배척받고 있으며, 사제단이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이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26)

천주교 내부적 배경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모습은 1980년대 이후 교구장이나 주교회의로부터 인준(認准)이나 공인(公認)을 받지 않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평신도 조직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 내에 사회운동에 관한 더 전문적인 조직들이 생겼다는 점이다. 양적으로 이들 단체의 수는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조직의 수와 함께 증가했다. 또한 질적으로 이들 단체는 영성이나 신앙공동체 활동의 강조와 사회참여를 동시에 지향했고, 환경, 여성, 통일, 평화 등 새로운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도 목소리를 냈다. 무엇보다도 이들 단체는 한국 천주교회에 기반을 둔 단체인 동시에 타종교인이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고, 이것은 ‘탈가톨릭화’와 ‘가톨릭의 확장’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현상이다. 이들 단체는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 천주교의 ‘비공인단체’지만, 오히려 한국 천주교회의 감독이나 통제에 구속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에서는 교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흔들지 않으면, 혹은 한국 천주교회를 멸절의 위기에만 빠뜨리지 않으면 단체의 설립과 운영을 용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각 교구에서 주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해당 단체에서 활동하는 신부들에게 개별적인 불이익을 주는 경우도 엄존한다. 이러한 다양한 조직들의 활동은 사제단과 입장을 같이 하는 평신도 조직들이 등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실제로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공인·비공인 단체들은 2000년대 초까지 활발한 연합이나 연대의 모습을 보였다.27) 이것은 역으로 사제단과 지향이 다른 평신도 조직들의 등장이라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사제단은 공식적이거나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사제 각각 또는 교구 사제단의 연합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28) 실제로 김인국은 사제단을 “교구의 벽에 갇히지 않고, 교계제도의 사사로운 통제에도 매이지 않으며 복음과 양심의 명령을 따라 자유롭고 활달하게 뜻을 펼치고 행동하는 사제들의 자유 결사체”29)라고 규정했다. 사제단 조직이 세속 국가가 아닌 교구별로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의 특징을 뛰어넘음을 드러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사제단과 지향이 다른 평신도 조직은 전통적인 천주교 위계에 순응하는 조직일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직자와 발을 맞추는 조직일 가능성도 높음을 의미한다.

결국 한국 천주교 사제들이나 평신도 조직은 그 정치적 지향점이 다양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다음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 한국천주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나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와 경갑룡, 정진석, 김남수 주교 등이 교회의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정권친화적 태도를 유지해 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등 극우 천주교단체까지 나서서 정의구현사제단 등 참여적 사제들을 ‘종북사제’로 규정하며 겁박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사제단이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조차도 ‘정치적 사랑’을 강조하고 가톨릭사회교리가 ‘행할 교리’로 제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교회분열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정치권력을 옹호하는 세력이 일으킨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30)

1970년대부터 사제들이 정권을 대하는 모습은 매우 다양했다. 또한 평신도 조직의 결성이 활성화된 이후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 모임과 같이 극우 단체로 평가받는 조직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이 제시하는 사제단 반대 논리가 “교회의 분열”이라는 점과 이에 대한 한상봉의 반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세속의 상황에 대하여 단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다.

한국 천주교회의 분열을 우려하면서 천주교 내부의 불일치, 교회 내부의 쇄신에 대한 활동 부족, 한국적 신학의 논의에 대한 부족 등을 부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는 연구31)도 존재한다. 그러나 오히려 천주교의 사회 갈등에 대한 일치된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사안과 사제 개인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사회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한국 천주교가 가진 다양성으로 봐야 한다. “천주교가 단일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나 천주교 내부의 일치를 위한 노력은 천주교 자체에서 논의하고 해결할 문제다. 오히려 사제단이 천주교 외부 단체와 연대하고, 천주교의 특징 중 하나인 평신도에서 사제에 이르는 위계질서나 교구 중심의 질서를 넘나드는 모습32)은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독특하고 긍정적일 수 있지만, 천주교 내부의 시각에서는 천주교회의 전통을 위협할 수 있는 모습일 수 있다.

Ⅲ. ‘민주화의 성지’로부터의 탈피 : 의례 공간의 확장과 그 의미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그들의 의견을 표명하기 위한 의례의 공간이 성당 밖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의례는 사제단의 활동이 천주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며, 공간의 확장은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 모두의 참여를 요청하는 홍보의 기능으로 성당 밖에서의 미사를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도 특정 종교의 공간은 세속의 권력이 함부로 침탈할 수 없는 곳이다. 이를 기반으로 1987년 이전까지 명동성당이나 기독교회관 등은 사회적 약자의 보호, 기득권의 비판, 그리고 이들 사이의 중재를 수행하는 효과와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거대 종교와 기득권 세력 사이의 대립이 증가하는 ‘성역정치’로 이어졌다. 국가 권력이 종단 측의 허락이나 합의 없이 종단의 공간에 침범하고, 이것이 종단과의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국가 권력과 종교 사이에 법집행의 한계나 공권력 적용의 범위를 놓고 갈등과 대립이 이어졌다.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높아진 종교의 사회적 공신력으로 이익집단 사이의 갈등이나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의 갈등이 부각될 때 시민 사회가 종교에 협조를 구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명동성당, 기독교회관, 조계사 등은 농성에 돌입하면서 시민단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부분 종교의 고위층 종교인들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면서 이들과 국가 권력의 중재를 담당했고, 이것으로 인해 몇몇 공간이 세속 사람들에게 ‘성역’으로 인정받으며, 특정 종교가 자신들의 종교적 공간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는데, 이것이 ‘성역정치’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성역의 공고화로 이어지면서 국가 권력이 성역을 침해하는 빈도를 감소시켰지만, 종교와 국가 사이 갈등이 줄어들면 아이러니하게도 성역에 국가 권력이 침범하면서 생기는 갈등도 줄어들면서 퇴조하는 경향도 발생했다. 또한 1987년 이후 종교정당의 정치 참여는 시민들이 종교에 대하여 ‘공동선의 추구’라는 이미지를 가진 것과 달리 자기 종교의 이익을 위해 정치 영역에 접근하는 모습으로 여겨졌고, 시민들에게 종교가 ‘또 하나의 이익단체’로 보이기 쉬웠다. 이러한 양상 역시 성역정치의 퇴조로 이어졌다.33)

한국 천주교사에서 성당 밖 미사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이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이 시성식은 일반적인 시성식과 달리 성 베드로 성당이 아닌 곳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에서 가톨릭 내부의 행사인 시성식을 야외에서 거행한 것이기 때문에 천주교의 사회참여와 관련된 미사가 성당 밖에서 열리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순 없다. 다만 시성이라는 중요한 의례가 성스러운 공간인 성당 밖에서 거행된 사례라는 점은 눈여겨 볼 사항이다.

사제단이 성당 밖에서 미사를 봉헌한 것은 기존에 “민주화의 성지”로 일컬어졌던 명동성당 등을 기반으로 펼쳐졌던 성역정치의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 천주교 내부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이로 인한 천주교 내부의 갈등도 보여준다. 1987년 직후까지도 사제단이 거리에서 하는 것은 시위와 기도회 정도였고, 의례인 미사는 성당 안에서 봉헌했다. 그런데 2002년에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과 그 사건의 사후 처리를 계기로 사제단은 더 큰 규모의 야외 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기존에 명동성당 안에서 미사를 열고 명동성당 근처를 행진하는 정도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34) 사제단 주도로 성당 밖에서 ‘미사를 연’ 첫 사례는 경우 미군기지 건설로 인해 주민들이 주거 지역에서 강제로 퇴거당한 대추리 사건 직전이었던 2005년 대추초등학교에서의 반전평화미사였다.35) 이후 오히려 성당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이명박 정권 당시 시행되었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첫 번째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명동성당 입구에서 진행되었는데, 정진석 당시 서울교구장은 4대강 사업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고, 서울대교구청으로부터는 미사 반대 입장을 통보 받았다.36) 사제단이 거리로 나서고 성당 밖에서 미사를 봉헌한 것은 단순히 명동성당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성역을 벗어났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천주교 교구 수뇌부와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도 드러낸다.

물론 사제단이 주도하는 미사가 항상 성당 외부에서만 봉헌된 것은 아니었다. 2013년 전주교구 사제들이 국가정보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을 규탄하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군산 수송동성당에서 봉헌했다.37) 이것은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위한 사제단 주도의 미사가 성당에서 오랜만에 봉헌된 사례이다. 아울러 실제 사제단이 교구를 초월한 공동체이지만, 교구별로 독자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는 천주교의 특징에서 오는 장점 역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교구장의 정치 성향에 따라 교구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안에 관한 입장은 달라진다. 이것은 사제단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구에서는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사제단은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광장과 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의례의 장소가 성당 내부에서 성당 밖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음도 의미한다. 성당 외부에서 미사를 비롯한 각종 천주교 의례가 봉헌되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미사”라는 종교 의례를 사회문제에 관한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 혹은 사제단의 활동을 미사라는 종교적 행위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미사가 성당 밖에서 봉헌되기 시작한 것이다.

Ⅳ. 다양한 갈등과 다양한 입장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제단의 활동은 천주교 내부의 다양한 갈등과 다양한 입장을 드러냈다. 종교 전문가인 사제가 반정부투쟁에 나선 것은 중남미와 유사한 형태의 군부정권 탄압, 진보정당이 탄압받거나 존재하지 않는 상황, 다른 정치·시민 단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행동반경이 넓고 자유로운 종교의 상황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더하여 특유의 결속력, 독신 상황, 남다른 투지력은 1970년대 사제단이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38) 그런데 상대적으로 시민단체의 자유가 커지고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 이후 다양한 시민단체가 새로 생기고 기존의 단체가 소멸했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를 목적의 달성으로 보고 그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하거나 새로운 아젠다를 제시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단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제단은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많은 시민단체가 민주화 이후 해산·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단이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그 원인이 사제단 구성원의 꾸준한 활동과 이에 대한 시민의 신뢰와 기대였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하는 사례39)도 존재한다. 아울러 사제단이 독재정권의 타도만을 목적으로 두지 않았음도 의미한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대립적인 가치관들의 분출,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해 당사자들의 경쟁과 대립, 그리고 조정과 타협을 통해 민주주의 절차가 확립되는 것과, 그 절차를 통해 도출되는 결과의 옳음의 문제는 별개였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의 현실에서 확인된다. 유신정권에 저항한 민주화운동 진영의 담론에서 “민주회복, 인간회복, 인권회복”이 핵심 내용이 된 것은 저항 주체 중 하나가 종교계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서 당시 사제단은 창립 당시 인간다운 삶, 민주주의, 생존권을 비롯한 기본권을 각종 선언문에서 언급했다. 제5공화국 하에서 저항하던 주체들 사이에서 민주화의 성격, 주체, 독재 타도 이후 전망에 대하여 상당히 큰 입장 차이가 드러났다. 그러나 이들은 군부독재정권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40) 이것은 87항쟁 이전까지 군부독재정권의 타도가 공동의 목적이자 정의였고,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이후에는 각자의 입장 차이가 더 두드러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민주화 이후 종교계 역시 자신들의 교리를 기준으로 다양한 사회 담론에 대하여 발언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갈등을 일으켰다. 유교의 호주제, 신앙에 따른 병역 거부, 안찰 기도나 축귀의식 등 전통적인 쟁점들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또한 낙태나 인공피임을 둘러싼 천주교와 국가 사이의 대립,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벌였던 혼전순결 서약운동 등은 사회운동의 형태로 두드러졌다.41)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 역시 천주교 신앙을 기반으로 천주교 신자가 주체가 되어서 사회 문제에 대하여 천주교 신앙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집단적인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실천은 노동, 농민, 학생, 여성, 문화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다.42)

90년대 들어서 ① 일반 사회운동의 성장과 다원화, ② 고위 성직자와 신자 구성 변화에 따른 보수화, ③ 외형적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국가 권력과 결탁하는 사목전략의 득세와 그로 인한 ‘종교권력구조’ 재편의 상승효과에서 오는 도전, ④ 천주교 사회운동의 주체, 특히 89년 출범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의 일부 지도자들의 ‘생태적 근본주의’적 입장에서의 도전, ⑤ 연구와 교육 작업을 전문화할 역량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대응적 시도들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나 실제적인 협력의 노력은 미흡하다는 것 등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직면한 또다른 도전과 어려움이었다.43) 특히 ⑤에서 연규영은 가톨릭의 진보진영 운동의 역할 재조정, 천주교 사회운동의 종교운동으로서의 정체성 강화, 운동이념의 재정립 등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또 공동체운동 지도자들의 양성을 위한 연구와 교육 작업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 사회운동이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천주교의 사회 참여가 종교운동의 연장선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제단의 활동 역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사제단은 1970년대 유신체제 자체를 향한 부정의 과정에서 발족되었다. 이것을 전제로 사제단은 결성 직전만 해도 유신독재를 불의로 규정하는 인식 정도만 공유되었을 뿐 명확한 지향점이 없었다. 그런데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라는 ‘우발적 사건’44)을 계기로 젊은 사제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결성 직후 사제단은 인본주의에 기반한 기본적 생존권의 요구와 정권의 타도 정도만을 지향했다. 이후 사제들은 유신독재에 대항하면서 체험과 학습을 통해 사회과학적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45) 즉 사제단 결성 초기에는 저항, 노동자, 농민, 여성의 인권 등 기본적인 인권의 수호, 경제적 불평등, 도시화로 인한 도시 문제와 반대 급부로 고통받는 농민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안에 대하여 입장을 표명하고, 문제의 원인을 유신정권으로 보고 그 퇴진을 요구했다. 반면 1980년대 신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은 엄혹한 사회적 분위기와 사회운동 진영 전반의 패배감 등으로 주로 단일 사건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수준이었다. 이후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신군부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7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성공한 이후 사제단의 발언은 다시 세부적인 사안으로 바뀌었다.

1987년 이후 사제단이 집중했던 사안은 남북화해였다. 1990년대 전후부터 사제단은 분단을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불의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46) 특히 광주민주화운동과 이것으로 인해 발생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사제들이 연루되는 경험을 겪으면서 분단 상황을 근본적 문제로 의식했다.47)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은 일회성에 그치거나 자선의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닌 분단을 당대 문제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한 상태에서 수행한 인도주의적 접근이었다.48) 그러나 80년대 말 문규현 신부의 방북에 대하여 최고위 성직자 층과 평신도는 부정적 시선을 보였다. 사제단의 활동은 오히려 친북적 성향을 가진 단체라는 이미지도 함께 심어주었고, 진보진영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받았다.

민주화 이후 주로 분단 상황에 관하여 천착하던 사제단은 SOFA의 불평등한 개정, 매향리 폭격, 새만금간척사업 반대,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 반대,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라크 파병 반대 등에서 목소리를 냈다. 2007년 10월 사제단의 삼성그룹 비자금 폭로와 같이 재벌을 향한 저항도 있었다. 그런데 이 활동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가 말한 ‘재봉건화’49)의 형태를 띤 민주화 이후의 정치, 사법, 언론, 재벌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이들의 엄청난 권력을 실감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비판50)도 받았다. 아울러 이명박 정부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최서원의 국정 개입, 그리고 2024년 비상계엄 선포 등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과거 군부독재 시기와 비슷하게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생명 문제에 관한 갈등 현장에서도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생명에 관한 사회적 논란은 ‘그나마’ 갈등의 사전적 의미에 가장 가깝다는 점이다. 즉 독재를 향한 저항, 약자의 대변 등은 사제단이 강력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과 관련된 일부 문제는 나름의 입장이 모두 합리성을 가지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사안들이고, 낙태, 피임, 세포 복제 같은 사안의 경우 사제단이 함께 활동했던 세속의 진보적 단체의 입장과 다른, 신앙에 기반한 주장을 펼치며 그들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사제단이 생명 문제에 관한 갈등 현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새만금간척사업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 개발 대 보존 사이의 갈등과 관련된 사안들이었다. 사제단의 생명 문제와 관련된 활동에서 나타나는 인식은 한국 천주교회 상위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적으로는 사회의 민주화, 내적으로 주교단의 보수화, 평신도의 중산층화는 체제나 정권과 무관한 맥락에서 생명권 담론이 나타난 조건이었다. 다른 한편, 사회적 메시지를 생산해야 하는 한국 천주교회 최상위층의 입장에서 ‘생명’만큼 익숙하고 합의하기 쉬운 주제도 없었다.51) 특히 앞에서 언급한 새만금 간척사업,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같은 사안에서는 사제단과 한국 천주교회 각 교구의 상위층이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하여 서울대교구52), 광주교구와 전주교구53)에서 사업 반대의 입장을 발표했고,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주 강정마을에서 있었던 국방부 행정대집행의 중단을 요구54)하는 사례도 있었다. 정치적 사안에 관해서는 천주교 내부 갈등의 한 주체인 사제단이 생명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 천주교 고위층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입장이 한국 천주교 고위층과 비슷한 모습은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다른 생명 관련 이슈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사제단은 같은 생명 관련 담론이더라도 피임이나 낙태, 동성애 등 섹스와 젠더 이슈와 연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이나 입장 표명이 거의 없다. 기존의 일부 선행연구에서 생명 문제를 한국 가톨릭 보수 측의 아젠다로 규정했지만, 실제로 사제단의 입장도 참여, 모호한 입장, 불개입 등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며, 한국 천주교 고위층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제단의 다양한 활동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분야는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사제단은 경제적 불평등에 집중함으로써 사제 전체를 향해 청빈의 의무 준수 여부를 따지거나, 생명 담론에서 일부 문제에 침묵하거나 한국 천주교 고위층과 입장을 같이하는 모습에 대한 비판을 피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해방신학에서 보이는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영향을 받아서 사제단 역시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지향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노동자, 농민과 관련된 갈등에 개입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빈곤이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오히려 사제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의구심과 반문55)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를 외치는 교황의 메시지가 한국 가톨릭교계에 부담스러웠던 것도 그러할 것이다. 교황 방한의 메시지를 교회 쇄신의 움직임을 촉진하는 씨앗과 불씨로 삼기는커녕 오히려 교회 내부에서부터 교황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들만 노골화되는 현실은 결국 방한 전에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가 염려한 대로 교황 방한을 ‘4박 5일짜리 이벤트’ 이상으로는 삼고 싶은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 아닌가.56)

위의 기사에서 심지어 한국 천주교 내부에서 교황청의 사목 방향에 부담을 느끼는 모습이나, 교황의 방한을 일회용 이벤트 이상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가난과 빈곤 문제에 대한 집중은 사제가 사회적 약자의 기준을 경제적 빈곤에 주안점을 두고 이 문제에 주로 집중하면서, 천주교회 기득권에 도전하거나 천주교 교리와 갈등할 수 있는 다른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Ⅴ. 천주교회 내부 쇄신 담론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에서 보이는 다양해진 담론들, 특히 통일이나 경제, 생명에 관한 담론들은 천주교 내부 쇄신 논의와도 연결된다. 민주주의 이행이 완결된 사회에서 교회는 사사화(私事化)의 압력을 받게 된다. 그에 따라 제도 교회의 공적 개입은 불편부당하고,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이다.57) 종교의 사사화는 종교의 내부 개혁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모습은 실제로 사제단의 1987년 이후 한국천주교 내부 쇄신에 대한 논의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사제단의 사상적 배경이 된 제2차바티칸공의회 역시 천주교회의 쇄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회 쇄신은 기존에 보였던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던 모습의 변화였지 내부 문제나 모순을 공론화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하진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 천주교회 전반, 심지어 사제단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한국 천주교회 내부 쇄신에 대하여 사제단이 진보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내부 쇄신은 그 종교가 알아서 할 문제다. 다만 필자의 의도는 천주교의 진보적 이미지를 견인하는 사제단이 내부 쇄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쇄신 요구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87년 대선에서 사제단이 김영삼과 김대중 중 김대중이라는 특정 후보에 대하여 비판적 지지를 보냈고, 90년대 문민정부 수립 이후 외관상으로는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런 과정은 사제단 중심의 한국천주교의 사회 참여는 천주교 내부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통일, 환경, 여성차별, 교육, 인권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하여 목소리를 냈지만, 사제단에게 교회개혁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5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제단의 사제들은 한국 천주교 고위층과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제단의 활동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 안의 교구와 사제를 넘나드는 연대와 협력, 한국 천주교회 내의 사회운동 단체들, 그리고 평신도에서 주교단에 이르는 유기성 확보, 한국 천주교회 외부의 개신교, 시민단체와의 협력을 이루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사제단과 주교단 사이의 의견 대립 역시도 두드러졌다.59)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같은 해 가을,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임원을 개편했다. 이 무렵부터 천주교회는 보수화, 탈정치화, 진보·개혁적 신자그룹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천주교 신자의 중산층화가 뚜렷해졌고, 본당의 비대화와 관료화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초의 소공동체운동과 본당 분할 등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창립되었고, 기존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천주교 내부의 개혁세력 사이에 ‘교회쇄신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이 커졌다.60) 이러한 한국 천주교 내부의 변화 역시 교회쇄신 요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진보적 성향의 세력과 보수적 세력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개진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아울러 199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에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세력들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쇄신’이라는 대의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교회쇄신이라는 논제가 전면에 드러났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수적 성격의 사회참여 세력은 소위 ‘생명운동’으로 대표되는 모습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했다.61) 결국 보수적인 사제나 평신도가 생명운동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 고위층을 향한 사회 참여와 교회 쇄신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근본적이고 민감한 요구를 피할 수 있는 논제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사제단은 한국 천주교회 내부 쇄신을 위해 얼마나 활동했을까? 사제단의 한국 천주교회 쇄신 요구는 활발하지 않거나,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7년 이후 한국 천주교 안팎의 한국 천주교회 쇄신 요구나, 사제단의 활동에 비해서, 사제단의 한국 천주교회 쇄신 요구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예를 들어서 함세웅은 사제단 결성 30주년 관련 글에서 사제단의 30년의 행적을 결실을 위해 씨를 뿌리는 기간이자, 완성을 향한 희망의 해라고 평가하면서, 과거의 성찰을 통해 미래의 도약을 다짐하는 기간이라고 평가했다.62) 사제단의 원로인 함세웅 역시 추상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 제시할 뿐 교회 내부에 대한 성찰이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제단 내부에서 한국 천주교회 쇄신을 요청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내용은 주로 추상적이거나 천주교 외부 단체와의 연대에 관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함세웅 역시 1970~1980년대 사제단의 활동에 대하여 반성할 측면으로 한국 천주교회 내부의 쇄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함세웅이 언급한 교회 쇄신은 한국 천주교회와 개별 사제의 과도한 권위였다.63) 또한 1988년 당시 함세웅은 사제단과 한국 천주교회 밖의 시민단체,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의 위치, 타종교와의 연대·협력을 과제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의 내적 쇄신, 사제단의 자기 쇄신 노력과도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며, 당대 젊은 사제의 주도적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64) 다른 종교나 시민단체와의 연대, 사제의 권위주의 정도만 쇄신의 항목으로 꼽은 것이다. 실제로 2014년 9월 22일, ‘사제단의 활동 평가와 전망’이란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사제단의 활동과 전망 모두 사회참여에 관한 것만 집중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내부에 관한 것은 없었다.65) 그나마 해당 학회에서 천주교회의 쇄신을 요구한 사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술대회에서 박기호 신부도 사제단의 활동이 한국가톨릭교회를 쇄신했는가 묻고 “고단한 광야의 예언자로서 가볍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단의 역량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이 분명히 있었다.”라고 성찰하면서 “정의구현을 위한 사제의 행동은 분노나 공명심이 아니라 영성의 행동화라는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66)

위의 인용문에서 사제단의 행동을 ‘영성’과 연결하며 영성의 실천임을 강조했고, 이 영성의 실천에 천주교 내부의 쇄신을 위한 행동도 포함된다는 시각을 드러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제의 발언에서 천주교회 쇄신의 구체적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다. 최근에 김인국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했다.

나의 교회는 앉은 자리는 안전해 보였지만 너무 왜소해 보였다. 따뜻하거나 따끔한 말씀 한마디가 필요한 순간마다 입을 앙다물고 눈을 감는 걸 자주 목격했다. 교회를 두고 ‘어머니요 스승’이라고 불렀던 전통도 이제는 어색하다.67)

이것은 표면적으로 한국 천주교가 불의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질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의에 순응하며 교회의 안위를 지키려는 모습에 대한 한탄이 주가 되었고, 쇄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하거나 구체적인 내부 개혁의 내용이나 방법을 요구하진 않았다. 또한 사제단이 발행하는 주보 형식의 소식지인 <빛두레>에 ‘사제가 사제에게’라는 메뉴가 있지만, 그 내용은 사제나 수녀가 저지르는 잘못의 개선을 요구하거나, 성직자의 쇄신을 요구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성직자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68)하는 논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 내부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한 것은 사제단이 결성되고 활동한 지 한참이 지난 이후였다.

교종마저도 ‘교황청 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마당에 한국교회는 교회개혁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가 없고, 결국 교황 방한 효과가 벌써 시들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관료화, 사제 줄 세우기와 성직이 직업이 되는 현상, 상업주의와 출세주의, 남녀차별주의, 장애인 배제 사목 등 사회문제 만큼 심각한 것이 교회문제다. 다만 개신교처럼 이러한 문제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교회개혁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이며 권력지향적인 평신도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교회가 투명하고 민주적이라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교가 될 것이다.69)

위의 인용문은 사제단 40주년을 기념하여 작성된 글이다. 이것은 결성 40년이 지난 이후에야 구체적인 쇄신 사안 지적이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제단에서 활동하는 사제가 아닌, 가톨릭 관련 언론사 주필인 평신도가 제기한 문제다. 이와 함께 한상봉은 어쩔 수 없는 천주교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사제단이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사제갱신운동’을 제시했다. 사제갱신운동은 사제의 기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동시에 사회 참여에 관심을 가지고, 청렴하고 온유한 목회자로서 성실한 본당을 제안하는 것이다.70)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 것 역시 가톨릭 언론에 종사하는 평신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본당쇄신, 교회 내 권력형 부패와 비리, 명동성당 재개발, 가톨릭 병원들의 노동자 탄압, 사제들의 성추문, 냉담자, ‘평화드림’을 비롯한 교회의 사기업화, 꽃동네 문제 등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내부의 문제에 목소리를 낼 것을 요구했다.71)

교회 내부 쇄신이 힘든 가장 주된 이유는 천주교 특유의 상명하달식 권위주의적 특성 때문이다.72) 천주교 사제의 강력한 위계 체제 때문에 사제단 소속 신부가 천주교회 내부를 쇄신해야 사회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위계질서 때문에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사제단이 교회 내부 교리에 대해서는 한국 천주교회 고위층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겉으로 진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한국천주교 안에서도, 진보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사회참여에 가장 적극적인 사제단에서 활동하는 신부도 천주교회와 교리에 관한 한 기존 한국 천주교회 고위층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제들도 존재함을 의미한다.

오히려 한국 천주교회 고위층은 한국천주교의 역사적 과오를 고백하면서 교회 쇄신의 이미지를 선점했다. 2000년 12월 3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쇄신과 화해’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조선 말부터 현대까지 구한말, 일제강점기, 이승만과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반성했다.73) 또한 원래는 병인양요, 일제강점시대 독립운동 외면 또는 제재, 신사참배 허용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최종 확정 단계에서 구체 사안들은 빠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신학적 평가의 어려움으로 인한 것으로 예상했다.74)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이러한 모습은 쇄신과 화해라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 자신들의 행적을 돌아보고,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에서 천주교가 갈등의 현장에서 보여주었던 행위 중 잘못했다고 판단하는 점을 반성하고, 이것을 통해 현재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화해로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그러나 이후 선교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교나 병원에서 있었던 노동분쟁이나 각종 사회 단체와의 충돌, 성추문과 재정에 관한 각종 의혹에 대해서는 여전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제단의 천주교 쇄신 요구나 활동은 어디까지나 소속 사제들의 판단에 달려있다. 아울러 이것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제단의 지금까지 활동, 천주교의 사회적 이미지 등을 감안하면 사제단의 천주교 내부 쇄신 요구는 기존에 사제단이 보여주던 사회참여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이것은 사제단 소속 신부의 입장에서 사회와 달리 천주교 내부는 완전무결한 상황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성스러운 천주교 내부는 흠결이 없고, 그 흠결 없음을 바탕으로 세속의 불의를 타파하며, 흠결 많은 세속은 성스러운 천주교 내부를 지적할 수 없다는 전통적이고 옛스러운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적용한다는 의미다. 그 외에 사회적 갈등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일 수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천주교의 위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부 쇄신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사제단이 자기 조직 유지를 위해 천주교 고위층과 합의한 암묵적인 경계선일 수도 있다. 종합적으로 이러한 모습은 사제단과 같은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종교 전문가도 자신이 속한 종교 내부와 외부에 대한 기준은 다르게 적용함을 의미한다.

Ⅵ. 결론을 대신하여

글을 맺으면서, 한가지 전제할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라는 말이 오용된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의 차별을 ‘지역 갈등’으로, 약자로서 거의 일방적으로 위협받고 차별받는 상황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젠더 갈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나 이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집단이 ‘갈등’이라는 단어를 주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1987년 이후 사제단의 활동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종교적 영향과 지학순 주교의 구속으로 결성된 사제단은 이전에 유입된 해방신학을 체화하고 실천하면서 1980년대 신군부정권에 저항했다. 1970년대 군부독재와 유신 정권 퇴진을 요구하던 모습에서, 1980년대 개별 사안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던 사제단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공개를 계기로 다시 신군부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저항에 나섰다. 직선제 개헌을 달성한 이후에도 사제단은 지속적으로 활동했지만, 다양해진 사회적 담론에 나름의 기준에 따라 사안별로 발언했다. 1987년 이후 초기에는 사회적 문제의 근본 원인을 분단 상황으로 진단하고 남북화해에 집중했다. 이후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활동과 생명이나 환경 문제에 주로 집중했다. 이것은 남북화해에 대한 활동으로 사제단이 역풍을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천주교 교리 문제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활동 영역을 스스로 제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담론이 다양해진 상황에서 사제단이 담론에서 사안을 선택하여 개입했음을 의미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진보적인 사회단체의 입장과 다르거나 민감한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한국천주교의 쇄신 요구가 강해지는 상황에서 사제단은 이 문제에 대해 추상적인 내용만 제시하고 자세한 사항에 대한 쇄신 요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천주교를 진보적이고 정의롭게 평가하는 시민들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천주교 특유의 엄격한 위계질서, 사제단 조직 보호를 위해 내부 쇄신 묵인을 암묵적인 경계선으로 인식하는 것, 성속의 엄격한 구분과 사제들의 자기 정의, 외부의 비판 회피 등 원인이 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재까지 천주교 일부 사제들은 사회적 갈등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몇몇 사례는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용이라는 표현도 가당치 않은 용산의 이무기,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그 자가 지난 12월 3일 밤에, (뭐라고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전도 찾아보고) 지랄발광을 하였습니다. 2024년 대명천지에 비상계엄이라니(처음엔 가짜뉴스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무슨 TV에서 영화 해주나? 이런?) 사실 그것은 비상계엄을 가장한 친위 쿠데타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반란이었습니다.75)

계엄 선포라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하고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헌법재판소에 호소합니다.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정의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정의의 판결을 해 주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명백히 밝혀 주시길 촉구합니다.(유흥식 추기경/교황청 성직자부 장관)76)

첫 번째 인용문은 2024년 12월 9일, 천주교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대전교구 주교좌 성당인 대흥동 성당에서 봉헌했던 시국미사에서 교구 소속 김용태 신부가 강론 중 했던 발언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2025년 3월 22일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이 헌법재판소의 빠른 탄핵 심판 결정을 요구하면서 했던 발언이다. 사제단 소속이 아니라도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한국천주교의 신부 중 일부는 나름의 입장을 표명해 왔고, 이것이 사제단의 활동보다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사제단은 한국 천주교회가 사제단의 주장과 같은 입장에 서도록 견인하고, 대외 활동으로 한국천주교의 진보적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물론 특정 사안에 대하여 한국천주교 고위층과 사제단의 주장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천주교는 여러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자신들의 공식 입장을 표했고, 천주교의 비공인 결사체인 사제단의 활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천주교의 공식 입장에 영향을 끼쳤다.

김용태 신부와 유흥식 추기경의 발언은 사회적 갈등에서 한쪽 편을 들었다기보다는 천주교의 교리와 사회관에 따라 윤석열 정권의 계엄과 탄핵을 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1987년 이전까지 사제단의 활동에 관한 평가도 비슷하다. 사제단 역시 그 형성 시기부터 현실과 신앙, 신학적 의미를 연결했다.77)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과 이후 등장한 신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사제단의 활동은 갈등 상황에서 한 정파의 편을 든 것이라기보다는 제2차바티칸공의회 정신과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군사정권들을 절대적 불의로 간주하고 원칙과 정의를 지향한 행위였음을 뜻한다. 이것은 민주화로 군부독재가 종결된 이후 사제단의 활동 내용과 그 의미가 더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가 자신들이 가진 세계관과 교리를 바탕으로 입장을 표하는 방식과 양상, 이에 대한 평가도 다양했다. 사제단의 활동은 갈등, 사회참여, 한국 현대사회의 역사, 정치, 경제적 맥락, 그리고 천주교라는 종교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연구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스스로 절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실제로는 세속 사회 안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세속법의 보호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 갈등에 종교가 참여하는 모습, 성직자나 신자가 종교 내부를 대하는 태도, 종교 외부의 사람들이 종교를 ‘소비’하는 방식, 종교가 세속 사회에서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 종교와 사회의 관계, 종교 내부의 갈등 등 다양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본 연구가 향후 천주교 내부의 극우단체, 대순진리회, 불교, 개신교 등 다른 종교나 그 종교의 결사 조직이 사회 갈등에 참여하는 모습 등에 관한 다른 연구자의 훌륭한 후속 연구가 등장하는데 본 연구가 작으나마 기여하길 희망한다.

Notes

1) 최병욱, 「사회적 실천과 치유-뱅상 레브(Vincent Lebbe) 신부의 例」, 『인문과학연구』 30 (2011), p.423.

2) 같은 글, pp.407-423.

3)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서울: 이론과실천, 2011) 참조. 참고로 이후 엥겔스나 레닌은 오히려 종교부터 무신론까지 신념의 자유를 주장했고, 종교를 아편에 빗댄 표현을 당대 아편의 생산과 소비 형태와 연결하여 연구한 사례도 존재한다.

4)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문제 옮김 (서울: 현대지성, 2018) 참조.

5) 로버트 벨라, 『사회변동의 상징구조』, 박영신 옮김, (서울: 박영사, 1988) p.159.

6)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1 : 정치편』, 이상훈 옮김, (서울: 거름, 2006) p.33.

7) 같은 책, p.427.

8) 김인국, 「길에서, 길 위에서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년의 길목에서 지난 25년을 돌아보며」, 『가톨릭평론』 46 (2024) p.119.

9)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연규영, 「한국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정의구현 활동에 대한 고찰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광주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최민석, 「가톨릭 사회운동의 현실 인식과 참여 담론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사회와역사』 139 (2023), pp.55-87.

10) 물론 안중근 의사의 고해성사를 받아주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1938) 신부와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11) 최민석, 앞의 글, p.80.

12) 서중석,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출범 배경과 활동」, 『사림』 27 (2007), p.224.

13)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pp.34-35.

14)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294-295.

15) 같은 책, pp.351-352.

16) 참고로 한국에서 추기경은 이중국적도 허용된다.

17)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pp.11-12.

18)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309-311.

19) 최민석, 앞의 글, p.80.

20)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종교신학연구』 1-1 (1988), pp.268-270.

21) 사제단의 결성이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제들이 제2차바티칸공의회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고 학습하고 체화하는데 일정한 시간이 걸렸고, 이것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야 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이종우, 「한국 민중사 속에서 지학순 주교 활동의 의미」, 『인문과학연구』 71 (2021), pp.171-174;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226-269.

22) 아울러 이것은 천주교회나 성직자를 향한 탄압으로 천주교회가 영향을 받을 경우 이것을 막기 위해 조금 지향점이 다른 사조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천주교회의 보전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의미한다.

23)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270-273.

24) 같은 책, pp.312-315.

25) 서중석, 앞의 글, pp.245-247.

26)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pp.261-262. 현재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굿뉴스’의 ‘가톨릭길라잡이’ 메뉴에 있는 가톨릭사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사제단을 소개하고 있다.

27)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277-291.

28)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p.275.

29) 김인국, 앞의 글, p.112.

30) 한상봉, 「정의구현사제단, 해방의 요람」,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47, 2025. 7. 10. 검색).

31) 연규영, 앞의 글, pp.63-67.

32) 같은 글, p.63.

33)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상충하는 경향들』, pp.10-45.

34) 김인국, 앞의 글, p.113.

35) 「주여! 이곳에 평화를 …」, 《평택시민신문》, 2005. 3. 2. (https://www.pt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29, 2025. 7. 10. 검색).; 같은 글, p.114.

36) 같은 글, p.115.

37) 같은 글, pp.116-117.

38) 서중석, 앞의 글, pp.203-233.

39) 연규영, 앞의 글, p.62.

40) 문지영, 「한국의 민주화와 ‘정의’담론」, 『정치사상연구』 13-2 (2007), pp.31-46.

41)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p.41.

42) 함세웅, 앞의 글, p.275.

43) 연규영, 앞의 글, pp.38-39.

44) 최민석, 앞의 글, pp.57.

45) 같은 글, p.57.

46) 같은 글, p.56.

47) 같은 글, p.80.

48) 연규영, 앞의 글, p.54, p.73.

49) 절대주의 권력이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공론의 장을 활용하는 형태의 정치운동을 벌이는 것을 뜻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한승완 옮김, (서울: 나남, 2001) pp.277-291.

50)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p.28.

51) 최민석, 앞의 글, p.74.

52) 황윤정, 「천주교 “물질.이윤 중심 새만금 개발 반대”」, 《연합뉴스》 2011. 8. 16.

53) 마삼성, 「광주 정평위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가톨릭신문》 2001. 7. 8.; 주정아, 「새만금 지역 관할 전주교구도 “간척사업 반대” 공식 표명」, 《가톨릭신문》2001. 5. 13.

54) 사무국, 「[강정] 국방부는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강정마을에 자행하려는 국가폭력을 멈춰야합니다!」, 『현장의 소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홈페이지》, 2015 (https://catholicjp.or.kr/bbs_action/10339, 2025. 7. 10. 검색)

55) 조아영, 「교황의 걱정에도 ‘골프’ 논란 끊이지 않는 대구교구」, 《셜록》, 2024. 12. 4. (https://www.neosherlock.com/archives/30634, 2025. 7. 10. 검색)

56) 정중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회 개혁과 함께 교회 쇄신에도 나서야」,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1061 (2014), p.85.

57) Casanova, Jose, Public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pp.222-223.

58) 연규영, 앞의 글, p.38.

59) 함세웅, 앞의 글, pp.283-284.

60)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12-13.

61) 같은 책, pp.362-364.

62) 함세웅, 「시노트 신부의 한국에 대한 ‘사랑고백’」, 『말』 221, p.193.

63)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p.286.

64) 같은 글, p.288.

65) 정중규, 앞의 글, p.81.

66) 같은 글, p.84.

67) 김인국, 앞의 글, p.121.

68) 박창균(시메온), 「농부는 파종을 합니다」, 『빛두레』 673 (2004) http://www.sajedan.org/sjd/bbs/board.php?bo_table=sjd05_03&wr_id=82&page=106, 2025. 7. 10. 검색).

69) 한상봉, 「정의구현사제단, 해방의 요람」,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2014. 9. 22.

70) 같은 기사.

71) 정중규, 앞의 글, pp.82-83.

72) 같은 글, p.82.

73)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pp.5-11.

74) 박영호, 「‘쇄신과 화해’ : 한국천주교회, 역사와 민족앞에 200년 잘못 반성했다」, 《가톨릭신문》 2000. 12. 3.

75) 『미사 중에 “지X발광” 외친 신부님.. 알고 보니 OOO 후손이었다!!』 《엠빅뉴스》 (https://youtu.be/aEUgtU_HBRg?si=XU-xjw0asZmue8S1, 2025. 7. 10. 검색).

76) 「유흥식 추기경 “계엄에 참담‥헌재 더 지체할 이유 없다”」《MBC 뉴스데스크》, 2025. 3. 22.

77) 함세웅, 앞의 글, p.26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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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2.

강인철,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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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국, 「길에서, 길 위에서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년의 길목에서 지난 25년을 돌아보며」, 『가톨릭평론』 4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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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벨라, 『사회변동의 상징구조』, 박영신 옮김, 서울: 박영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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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저, 박문제 역,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울: 현대지성,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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