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본 연구는 1920년대 초 학무국 종교과 직원 혹은 촉탁으로 근무했던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 1861~?)1)의 저술들에 대한 분석을 목표로 한다. 일제 관료의 종교 관련 저술들은 조선총독부의 종교 정책 구상과 시행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사찰령」(1911), 「사립학교규칙」(1911), 「경찰범처벌규칙」(1912), 「포교규칙」(1915) 등은 일제의 종교 정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법령들이지만, 종교를 바라보는 관료들의 시각, 조선의 종교 현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책의 시행 과정을 되돌아보는 실무자의 고민 등은 관료들의 저술들을 검토해야만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3·1운동 이후 학무국 산하에 종교과가 설치되고 다수의 관료들이 종교 관련 사무에 종사하면서 그들을 통해 종교 연구도 진행되었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변화된 1920년대 종교 정책의 맥락과 개편 과정을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초 종교과 관료들의 행적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직 종교과 관료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2) 근래에 미비했던 학무국에 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진전되었지만,3) 그 기관에 소속되어 근무했던 관료들에 대한 연구는 더 진척이 필요한 상황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와타나베 아키라의 저술들을 중심으로 그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고, 일제의 종교 정책을 파악하는 데에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일제 관료의 시선을 드러내고자 한다.
저자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된 바는 없지만,4)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직원록자료에 따르면,5) 1910년대에는 내무부 지방국 지방과(1910~1911), 내무부 지방국 제1과(1912~1914), 내무부 제1과(1915~1919)에서 속(屬)으로 일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학무국 종교과에서 1등 관등 속으로 근무했다.6) 1923년부터는 2년간 종교과 및 고적조사과 촉탁(囑託)을 겸임하면서 담당 업무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업무 이력을 보았을 때, 3·1운동의 여파로 학무국 종교과가 개설된 이후, 와타나베 아키라는 일제의 종교 정책 업무를 담당했던 주요 관료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7) 한편, 그는 신직(神職)8) 선발을 관리하는 사사사장시험위원(社司社掌試驗委員)이 설치된 1916년부터 서기로 활동하였고 학무국 종교과에 소속되었을 때에도 서기 활동을 지속했던 것을 볼 때,9) 장기간 동안 신사 관련 업무와 신직 시험 관리에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업무들과 함께 1920~1924년에 학무국 종교과 업무도 병행되었던 것이다.10)
조선총독부가 수립된 1910년 직후부터도 와타나베 아키라11)는 종교 관련 정책에 개입하고 종교 연구를 지속해 왔다. 그는 1911년에 공포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을 입안한 인물이었고,12) 『효경(孝經)』과 호응하는 문헌인 후한 시대 인물 마융(馬融, 79~166)의 『충경(忠經)』을 1911년에 번역하기도 했으며,13) 1917년에는 발대(拔隊)선사의 법어집,14) 1918년에는 동경대전을 일어로 번역했을 정도로15) 종교 전통들의 경전에 관심을 두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천도교와 시천교에 대한 자신의 강연 대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1919년 8월 사이토 총독이 부임한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이 개편되면서 학무국 종교과가 신설됐을 때, 관련 업무 적임자 중 한 명으로 와타나베 아키라가 임명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보인다. 종교과 관료가 된 1920년부터는 다수의 글들을 『조선휘보(朝鮮彙報)』, 『조선(朝鮮)』,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 『경무휘보(警務彙報)』 등 총독부 기관지를 통해 발표했다. 특히, 『경무휘보』에는 1920년부터 1927년까지 29편의 글이 게재된 것으로 확인되는데,16) 그만큼 와타나베는 연구자이자 저술가로서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다. 지금까지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그의 저술들17)을 통해 종교의 범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종교 정책을 구상하고 시행했는지에 대한 종교과 관료의 시선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 연구에서는 1920년 전후 와타나베 아키라의 저술 활동을 크게 3가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2장에서는 1919년 11월에 발행한 그의 강연 대본집 『천도교와 시천교(天道敎と侍天敎)』를 중심으로, 일제의 관료 입장에서 3·1운동의 참여 여부를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삼고 진행한 종교 연구를 살핀다. 3장에서는 조선총독부에서 1921년 12월에 발행한 『조선에 있어서 종교의 상황(朝鮮に於ける宗敎の狀況)』를 중심으로 조선의 종교 현황에 대한 분석과 조선의 종교 지형에 대한 그의 관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경무휘보』에 게재된 종교 전통별 분석 논고들을 중심으로, 그의 종교 연구를 살핀다. 즉, 3장의 내용이 그의 총론이라면, 4장의 내용은 그의 각론이 될 것이다.
Ⅱ. 3·1운동 직후 천도교·시천교 탐구
와타나베 아키라가 종교과 관료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19년 3월부터 전개된 3·1운동의 여파 때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천도교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주도한 독립선언문 낭독은 이후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로 조선총독부의 기관 개편이 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계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만큼, 종교 정책에 대한 변화 또한 일어났다. 일제 당국은 우선 만세시위가 완전히 소강되지 않았을 때에 각도(各道)의 3·1운동에 대한 종교계의 움직임이 어떠했는지 예의 주시했다.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은 1919년 6월 일본 헌병대장·경무부장 연석회의에 보고 형식으로 제출된 내용으로, 기독교, 불교뿐만 아니라 천도교, 시천교 등 ‘종교유사단체’의 동태 또한 도별로 조사되었다.18) 주목되는 것은 시천교는 천도교와 달리 3·1운동에 참여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경기도에서 “시천교(侍天敎)는 거의 초연한 태도를 가지고 방관하였”고,19) 충청북도에서 “시천교도는 행동을 삼가하여 단 한 사람의 망동 범인이 있었을 뿐이며, 교세의 소장(消長)도 없다”고 보고했다.20) 전라남도, 경상남도, 평안남도, 강원도, 함경남도 등 또한 마찬가지로 시천교는 만세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19년 6월 30일까지의 만세시위 수감자 종교인 통계에서 전체 수감자 9,458명 중 천도교인이 1,461명, 시천교인이 5명이었던 것을 보면,21) 시천교인의 참여는 거의 전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와타나베 아키라 또한 만세시위를 대하는 천도교와 시천교의 차이를 빠르게 인지했다. 3·1운동이 전개되면서 천도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는 1919년 4월 말에 천도교와 시천교를 비교하며 두 교단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강연을 실시했다. 주변 식자(識者)들이 그에게 강연 대본을 별도로 요청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고,22) 그가 학무국 종교과 관료로 부임한 이후 1919년 11월에 해당 대본을 『천도교와 시천교(天道敎と侍天敎)』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 이에 앞서 1918년에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일어로 번역했던 경험이 관련 연구를 진척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교단에서 발행한 서적들이 연구에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23) 해당 강연의 주제가 3·1운동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만큼, 천도교·시천교를 탐구하는 문제의식도 3·1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천도교와 시천교 모두가 같은 교조와 경전을 받들지만, 만세시위 참여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가 가장 주된 물음이었다.24)
저자는 ‘제1장 입교의 유래’부터 ‘제8장 서술의 총결’까지 총 8장으로 나누어 천도교와 시천교의 역사적 흐름을 설명하였다. 먼저, 수운 최제우가 서세동점과 천주교의 확산 및 조선 국정의 문란을 배경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펼친 과정을 설명하고,25) 이후 2대 교조 최시형을 통해 『동경대전(東經大全)』 간행으로 동학도들의 수련 전거(典據)가 마련되었음을 설명한다.26) 즉, 천도교와 시천교가 같은 교조, 같은 경전을 받들기 때문에, 3·1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가 생긴 것은 다른 연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천도교와 시천교가 서로 분립하게 되는 동학사의 흐름을 추적하여 일진회 활동을 둘러싼 손병희와 이용구의 정교분리의 입장이 결정적 계기였음을 주목했다.27) 그는 강연 전반에서 ‘정치와 종교의 혼동(政治と宗敎の混同)’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천도교와 시천교의 분립 계기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대한 태도의 차이도 이로 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두 교단이 분립되던 시기와는 다르게 만세시위에서는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는데, 시천교가 품었던 정치적 열망은 1910년 한일병합으로 충족되었던 반면, 천도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면서 정치적 열망을 숨겨두었다가 결국 만세시위를 통해 분출시켰다고 해석했다.28)
『천도교와 시천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와타나베 아키라가 두 교단에 대한 역사적 분석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세 상황 또한 교인수 통계를 통해 제시한 점이다. 두 교단에서 자체 조사한 교인수(自稱計數)와 조선총독부 기관에서 조사한 교인수(其筋調査計數)를 나란히 제시하여 적절한 교인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29)
전체 신도수에서는 두 가지의 계수 방법이 서로 차이가 크지만, 각 도별로의 비율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평안도, 함경도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교세가 강한 반면, 상대적으로 황해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시천교의 교세가 강했음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교세 현황을 확인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그가 종교 교세의 귀추에 대한 관심이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강연의 결론에서 “질병의 근원(疾病の根元)”을 규명하듯이 임시방편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닌, 근원적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 함을 역설했다. 저자는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종교 정책에 따라 “비행(非行)을 제지(制止)”하는 행위는 마지막이 아닌 시작점이여야 하고, 비행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을 종착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30) 이와 같이, 보다 근저에 집중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의 관심은 이후 그가 보여준 종교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Ⅲ. 조선의 종교 현황 탐구
와타나베 아키라는 1919년 8월 학무국 종교과가 신설된 이후부터 적어도 1924년까지는 종교과 소속으로 종교 관련 사무를 담당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무휘보』에 1920년 초부터 자신이 일제 관료로서 수행한 연구 성과들을 상당수 기고했다. 종교와 관련된 글들의 주제로는 불교, 도교, 무격(巫覡), 기독교, 종교 관련 경찰 사무, 신앙에서 비롯된 비행 등 방대하게 다뤘으며, 한편으로 통계 자료를 활용하여 조선의 종교 현황 전체를 조망하고 분석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포교규칙」에 따라 공인된 신도(神道),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 3대 종교뿐만 아니라, 각종 ‘신앙단체(信仰團體)’로 표현되는 비공인종교 또한 연구하고자 했다. 공인종교 외의 ‘종교유사단체’는 종교과가 아닌 경무국 관할이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됐지만,31) 와타나베는 표면적인 종교 조직 자체보다 근본적으로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신앙인과 관련된 종교 전반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의 저술 속에서는 비공인종교의 신앙 양태를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설명하고자 하는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약 2년 동안 종교과 관료로서 연구 역량을 키워내고, 조선의 종교 현황에 대한 통계 자료를 자신의 관점으로 분석해 낸 것이 작은 소책자로 간행되었는데, 바로 『조선에 있어서 종교의 상황』이다.32)
와타나베는 글의 서두에서 “조선에서의 종교는 제도를 기준으로 구분하면 공인종교와 비공인종교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포교 규칙상 공인된 신도(神道), 불교(佛敎), 그리고 기독교(基督敎)의 세 종교에 대해 그 상황을 기술하고, 이어서 포교 규칙상 공인되지 않은 각종 신앙단체에 관해 언급하겠다”고 말하며, 신앙인 전반에 대해 관심이 있음을 보여준다.33) 공인종교는 1920년 말 기준으로 각 종교별 포교소, 포교자, 신자의 총수에 관한 통계 자료를 통해 분석되었고, 비공인종교는 각종 신앙단체별 신자의 총수만을 파악하여 분석되었다. 그의 탐구에서 특징적인 것은 통계 자료를 통한 종교별 비교, 신앙단체별 비교, 공인종교와 비공인종교의 비교 등에서 더 나아가 신자와 미신자(未信者)의 구도를 통해 ‘장래에 미신자들을 어떻게 귀의시킬 것인가’. ‘신앙인의 수는 어느 정도 증가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는 점이다. 물론 와타나베의 목적은 종교단체들을 위해서 교세 확장 방안을 제언한다기보다는, 어떤 요인이 교세에 영향을 줄 것인지를 연구자로서 분석하고 판단해 보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 거주 총인구 수를 전체 모수로 염두에 두면서 신자와 미신자의 구도로 비교하는 수준까지 그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그는 귀의자(歸依者)가 될 수 있는 미신자 인구수를 구하기 위해서, 통계 자료를 통해 미신자 중 ‘종교 선택을 자유롭게 판단할 수 없는’ 인구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구한다. 조선에 거주하는 총인구 17,288,989명에 공인종교 및 비공인종교 신자수 841,864명과 5세 이하 추정 유아수 2,230,279명, 종교 교육을 할 수 없는 학생 251,078명과 종교 소속이 정해진 종교계 사립학교 학생 29,747명을 빼면, 종교 선택에 자유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미신자 인구수 13,925,051명이 도출된다.34) 종교 교단에 소속된 신자 84만여 명과 미신자 1392만여 명의 대비는 종교 교세의 확장력이 무궁하다는 전망과 동시에, 종교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조선 사회에서 미미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더욱이 비공인종교의 신자수는 16만여 명이라는 점에서 더 미약하다고 평가될 수 있다.35) 그럼에도 저자는 공인종교와 비공인종교 모두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보고 단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가 분석한 종교 교세 확장의 요인은 두 가지다. 1) 청년교육에 힘쓰는 것, 2)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집되도록 종교적 이익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36) 계속해서 해당 종교의 교의를 체득한 인재가 배출되는 방법으로는 청년교육이 최선일 것이고, 종교적 효능감이 있어야 신앙을 지속하고 자신감 있게 선교에 임한다는 점에서 두 가지 모두 적합한 통찰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천도교의 경우, “소속 귀의자들의 자제를 교육하여 교파의 계승자가 끊이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천도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37) 이는 와타나베 아키라가 천도교를 단순히 부정적인 신앙단체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공인종교에 대한 다소 유화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비공인종교를 설명하면서 신앙단체를 4가지 분류38)로 나누었는데, 부정적인 표현들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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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성립된 종교의 교리 교법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 60년 전에 새롭게 하나의 교의를 창설하였으며, 또한 이를 당시 유행하던 기세가 강했던 기독교에 대항하는 정책으로 삼아, 그 선언과 보편적인 설법을 동학(東學)이라 이름 짓고, 그 소행의 이치를 천도(天道)라고 칭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 후계자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는 점이 있어서, 한 교파가 나뉘어 마침내 두 파가 되었다. 천도교(天道敎), 시천교(侍天敎)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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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득한 옛 태초의 신인을 숭경하고, 그 전교(傳敎)라고 칭하며 일정한 경전을 의지할 바 삼고, 한 파의 독특한 언설을 유포하여 기성 종교에 귀속되지 않는 것이 있다. 다만 유전(流傳) 주간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결하는 바가 있어서, 그 명칭을 달리하지만 그 교의에 있어서는 감히 다를 바가 없다. 단군교(檀君敎), 태종교(太倧敎)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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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늘의 별자리에 위대한 영험함이 있어서,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미묘하게 결정한다고 믿으며, 불교 설법 및 노장(老莊) 등의 학설을 가미하여 하나의 단체를 이룬 것이 있다. 태을교(太乙敎), 청림교(靑林敎) 등 모두 이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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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 주나라 말기의 성인 공자의 언론을 존봉하여 덕교(德敎) 유출의 본래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믿으며, 그 언설을 선전하고 그 의용을 각 개인에게 권하여, 견고히 기성 종교에 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 공자교(孔子敎), 태극교(太極敎)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위 외에도 여러 가지 명목을 세워 하나의 교의 단체라고 스스로 칭하는 것이 있지만, 지금 일일이 이것들을 열거할 겨를이 없으므로 여기서 이를 생략하기로 했다.39)
이와 같은 분류 방식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시정연보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시정연보에서 (3)의 청림교가 ‘미신적 종교’로 분류되었던 점을 생각하면, 와타나베 아키라의 설명과 차이가 있다.40) 이러한 차이는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종교적 기능을 긍정하는 저자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경무휘보』 1920년 9월호에 게재된 「위생경찰과 종교경찰과의 관계(衛生警察と宗敎警察との關係)」라는 저자의 글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글의 첫 문장에서 “위생 경찰의 목적은 우리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있고, 종교 경찰의 목적은 우리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언급한다.41) 위생과 종교에 관한 경찰 업무 두 가지가 수레바퀴처럼 함께 굴러가는 협력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관 중 ‘종교학적 소양(宗敎學の智能)’이 부족해 종교적 가르침을 무조건 미신적 행위로 치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반대로, 종교인 또한 의료 행위 외의 정신요법을 맹신하고 실행하는 것 또한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위생 경찰과 종교 경찰의 목적이 모두 달성될 수 있도록 긴밀한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42) 저자는 이처럼 종교가 정신적인 측면에 끼치는 영향력을 주목하고 있는데, 다음 장에서 살필 종교 전통별 분석에서도 해당 측면이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Ⅳ. 종교 전통별 역사와 영향력 분석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와타나베 아키라는 조선의 종교 현황에 관한 총체적인 분석뿐만 아니라 종교 전통별 분석 또한 다수를 진행했다. 『경무휘보』에 게재된 글들만 보더라도 불교, 도교, 무격, 기독교 등 다양하다. 저자가 수행한 각론적 연구들에서 두드러지는 서술의 특징이 있는데, 정리하자면 세 가지다.
첫째, 현세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적 맥락과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와타나베는 조선 땅에 해당 종교 전통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를 관심 있게 주목한다.
조선에서의 도교는 어떠한 기회에 어떻게 전래되었고, 또한 어떠한 시대에 어떻게 유포되었으며, 그 흥망성쇠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연구의 순서로서 밟지 않을 수 없는 바라고 생각한다.43)
조선에서의 무격 단속 제도와 율례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명국의 제도와 율례를 상세히 아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가장 먼저 명국의 제도 검토에 착수하는 까닭이다.44)
조선에서의 기독교 유전(流傳) 유래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중국(支那)의 사적(史實)을 탐방하여 서술의 발단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중국에 비로소 천주교(天主敎)가 전해진 것은 명나라 만력(萬曆) 21년 계사(癸巳)년(1593년)인데, 이를 조선의 연대에 비교하면 선조왕 26년에 해당하고, 내지(内地)의 연대에 비교하면 분로쿠(文祿) 2년에 해당한다. … 이상 중국에서의 천주교 유전(流傳) 개요를 서술한 함의는 같은 교도들이 손을 조선으로 뻗쳐 교선(敎線)을 펼치고 그로 인해 유포의 소인(素因)을 만들었음을 추측하는 자료를 풍부하게 하고자 함이다.45)
위의 인용문들은 와타나베가 각각 도교, 무격, 기독교에 관해 쓴 글의 일부이다. 저자는 특정 종교 전통이 조선 땅에 전래된 역사적 맥락이 현재의 종교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도교의 경우, 조선 땅에서 의례를 집전하는 도관(道觀)이나 의례 전문가인 도사(道士) 등이 눈에 띄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유교 및 불교의 학설에 끼친 도교의 영향이나 천도교 및 시천교와 같은 신앙단체에 도교의 이치가 스며들어 있다고 판단하면서 그 영향력을 강조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한 우선되는 작업이 바로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무격의 경우도 조선시대의 법제사를 검토하여 무격 행위가 어떻게 단속되고, 금지되었는지를 일제시기 경찰범처벌규칙까지 이어지는 법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통해 추적한다. 기독교의 경우는 중국, 조선, 일본의 연대를 비교하면서 중국에서 조선 땅으로의 천주교 전래 과정과 개항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한 개신교 전래 과정을 살핀다. 그 이후에 당시 포교소, 포교자, 신도 등의 교파별 통계를 제시하여 전래된 다양한 교파들이 어떻게 교세를 형성했는지를 제시한다. 그가 기고한 글들에서 보여준 역사적 탐구는 결국 현재의 종교 현황을 이해하기 위한 밑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교단 조직의 영향력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종교적 힘에 주목한다. 교단 중심으로 파악하기 힘든 도교, 무격 등의 영향력이 여러 신앙단체 혹은 민심에 스며들어 있다고 보고, 그 잠재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심(民心)의 미묘한 부분을 깊이 들여다보면 유교, 불교는 물론 천도교(天道敎) 및 시천교(侍天敎)와 같은 신앙 단체들이 (도교를) 도학의 이치와 의미에 따라 포교(弘敎) 및 선전(宣傳)의 조력(助勢力)으로 삼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에서의 도교 잠세력(潛勢力)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46)
조선에서는 무격의 행위를 사회 풍교(風敎)에 유해하다고 보아, 예로부터 이를 금지하고 저지하는 정책을 세워 강력히 시행하고자 노력했던 역사적 증거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로는 깊이 민심에 스며들어 뿌리 뽑을 수 없는 잠세력(潛勢力)을 지닌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47)
와타나베는 도교와 무격에 관한 글 모두에서 ‘잠세력(潛勢力)’이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심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정한 교단으로서 포착되지는 않더라도 종교적 교리 혹은 종교적 실천으로서 그 의미가 살아있다고 본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학(道學)’에 대한 규제 및 감독이 조선시대에도 있어왔고 국가에서 장려하는 학문 범위 밖에 있었지만, 개인의 기호에 따라 탐색하는 것은 탄압하지 않았다. 와타나베가 판단하기에 도교적 이치가 민심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유교, 불교뿐만 아니라 비공인종교에서도 이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무격 행위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규제 및 단속이 있어왔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민심에 깊이 스며들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라 무속 행위를 단속할 뿐만 아니라 “인지(人智)의 개발을 촉진하여 참위, 요언 등에 미혹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함을 강조했다.48)
셋째,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른 공공질서의 유지와 보호의 측면에서 종교에 접근한다. 불교의 계율과 경찰 업무의 관계를 고찰하는 글에서 둘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고, 신앙에서 비롯되는 비행(非行)을 다루는 글에서 신앙단체가 주는 정신적 위안을 인정하면서도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위는 경계했다.
불교의 계율은 각자의 행위를 바르게 하여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그릇됨을 막고 악행을 그치게 하는 조목을 세운 것이므로, 해악이 발생하기 전에 막아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주안(主眼)으로 하는 행정 경찰과는 그림자가 형태를 따르듯 서로 즉각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가진 것이다.49)
우리는 한편으로 재난 배제에 부지런하다. 그러한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수법자(修法者)가 나타나, 때로는 금염(禁厭)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부주(符呪)를 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정신 요법을 베풀거나 신부(神符)나 신수(神水)를 주는 등 임기응변의 행위를 하여 병자에게 위안을 주지만, 이로 인해 의료 시기를 놓쳐 결국 병자에게 불의의 불행을 입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런데 이를 공안 유지의 균형을 잡는 경찰의 시각으로 볼 때, 병자에 대하여 의료를 방해하는 비행(非行)으로 감지되는 것이다.50)
와타나베는 불교의 계율이 각자의 행위를 바르게 만들어서 사회 평화를 돕고, 악행을 막게 도와준다는 점에서 공공질서의 유지와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행정 경찰의 업무와 매우 밀접하다고 판단했다. 저자는 불교의 계율과 경찰 업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비행이 벌어진 이후의 처벌보다 사전에 비행을 예방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더 중요한 일임을 피력했다. 저자는 불교의 계율이 1) 미혹됨을 벗어나 높은 경지를 추구하게 한다는 점, 2) 생자필멸의 논리를 통해 이치에 벗어나는 의료 행위를 금한다는 점, 3) 『충군경(忠君經)』, 『효자경(孝子經)』 등 사회 질서를 지키도록 하는 가르침이 있다는 점, 4) 사찰과 같은 종교 시설을 존숭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경찰 업무와의 친연성을 강조했다.51) 이렇게 와타나베는 불교의 계율과 같이 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주목하기도 했지만, 비행을 조장하는 신앙 또한 경계했다. 경찰범처벌규칙의 제1조 제22호52)와 제23호53)를 통해 처벌된 공인종교 및 비공인종교 비행자 수의 통계 자료를 통해 해당 논의를 전개했다. 제23호와 관련된 위의 인용문처럼, 종교 행위가 병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되어 불행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한편, 저자는 공인종교와 비공인종교 둘 모두에 비행자가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는데, 종교의 공인 여부와 상관 없이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른 기준으로 신앙 행위를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와타나베 아키라의 종교 전통별 분석은 1920년초부터 약 2년간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종교과 관료답게 그의 글들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의 신앙 태도를 정책적으로 잘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두들어졌다. 다만, 공인종교 및 비공인종교를 구분하고, 비공인종교에 소속된 신앙단체들을 없애고자 하는 방향성보다는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교심을 관리하여 공공질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 더 가까웠다고 판단된다. 저자는 자신의 종교 전통별 분석을 통해 종교정책 분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책 실무자이자 종교 연구자로서의 입장과 시각을 동시에 보여줬다고 생각된다.
Ⅴ. 나가며
와타나베 아키라는 학무국 산하에 종교과가 신설될 때부터 속(屬)으로 함께 근무했던 주요 관료였다. 3·1운동이 전개된 직후에 천도교와 시천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주목한 것은 조선총독부 관료이자 종교 연구자로서 탁월한 문제의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 천도교와 시천교로 분립되는 과정을 통해 ‘정교분리에 대한 인식’이 중요했음을 포착했고, 만세시위 참여에 대한 입장 차이 또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였다. 이후 1920년부터 『경무휘보』를 통해 종교 관련 연구 성과들을 게재하면서 조선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갔다. 그는 무엇보다 일제의 종교 정책 대상이 되는 조선 거주자들의 종교적 심성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조선의 종교 현황을 분석할 때에도 조사된 교세 규모로 종교의 영향력을 살펴보면서도 아직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미신자들이 어떤 종교에 소속될 가능성이 더 큰지에 대한 물음도 고려하고자 했다. 종교 전통별로 탐구할 때에도 현재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추적하여 해당 종교적 전통이 갖고 있는 ‘민중을 움직이는 힘’을 포착하고자 했다.
와타나베 아키라가 정책 실무자, 종교 연구자로서 보여준 감각은 당시 일제 관료의 종교 이해가 종교 정책 구문 자체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다면 2가지다. 첫째, 장래 조선의 종교 현황에 대한 통찰이다. 공인종교와 비공인종교의 구분이 정책적으로 존재하지만, 탐구자의 시선으로 신앙단체로서 배제 없이 모두 고려한다. 신자수와 미신자수를 대비하여 장래의 조선의 종교 현황을 짐작해 보는 것은 조선의 종교 지형을 그리는 그의 폭넓은 시야를 보여준다. 둘째, 민심에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에 대한 고려이다. 천도교와 시천교, 조선의 종교 현황, 개별 종교 전통을 탐구하는 모든 작업에서 그는 처벌 및 통제보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추구했다. 경찰범처벌규칙에 공공질서의 유지와 보호를 위한 처벌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방편일 뿐 사람들의 심적인 변화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공질서의 차원에서 종교의 긍정적 측면이 있으며, 행정 경찰 또한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는 점은 종교 정책 자체로는 알 수 없는 일제 관료의 면모이다.
본 연구는 와타나베 아키라의 종교 관련 저술을 중심으로 다뤘다. 그가 조선에서 활동하며 남긴 방대한 저술들은 그가 경전 번역가이자 종교 연구자 및 실무자였음을 보여준다. 본 연구에서 다룬 종교 관련 저술들 외에도 생활 문화, 인구 분포 분석, 고적지 조사 및 역사적 유래 탐구 등을 다뤘는데, 그의 관심 분야가 매우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향후 종교과 관료들이 남긴 저술들에 대한 심화된 연구들이 축적된다면, 조선총독부의 종교 정책 내용 자체로 포섭되지 않는 다채로웠던 일제 관료의 시선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