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인간 퇴비화(human composting)와 죽음 의례의 전환*: 장묘문화를 중심으로

허남진 1 , **
Nam-jin Heo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원광대학교 기후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1Research Professor, Institute for Climate Humanities, Wonkwang University

© Copyright 2026,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Feb 27, 2026; Revised: Mar 11, 2026; Accepted: Mar 25, 2026

Published Online: Mar 31, 2026

국문요약

본 연구는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조건 속에서 죽음을 단절이 아닌 변환의 과정으로 재이해하고, 근대 장례 체제가 전제해 온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산업화된 화장 중심 장례 시스템은 위생과 효율, 존엄의 언어로 정당화되어 왔으나, 동시에 인간 신체를 생태적 순환으로부터 격리하는 존재론을 제도화해 왔다. 이러한 장례 체계는 죽음을 생태적 관계의 해체로 이해하는 인간 예외주의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재검토가 요구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장과 인간 퇴비화(human composting)를 중심으로 죽음을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 속에 재배치하려는 대안적 시신 처리 방식들을 분석한다. 연구 방법으로는 생태철학 특히 도나 해러웨이, 베른트 하인리히, 발 플럼우드 등의 논의를 참조하여 죽음을 단절이 아닌 변환과 관계적 지속성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전환 가능성을 탐색한다. 또한 인간 퇴비화를 둘러싼 문화적·종교적 비판, 기념의 장소성 문제, 생태적·경제적 쟁점 등을 검토함으로써 생태적 죽음 실천이 지니는 사회적 긴장과 한계를 함께 분석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인간 퇴비화를 특정 장묘 방식의 선택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 예외주의 이후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의례화할 것인가라는 존재론적·의례적 전환의 문제로 재위치시킨다. 나아가 인류세 시대의 죽음 의례는 죽음을 생태적 순환 속에서의 단절이 아닌 변환과 관계적 지속의 과정으로 의미화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reinterpret death not as a rupture but as a process of transformation under the condition of the Anthropocene and to critically re-examine the human exceptionalism presupposed by modern funeral systems. The industrialized cremation-centered funeral system has been justified in the language of hygiene, efficiency, and dignity; however, it has simultaneously institutionalized an ontology that isolates the human body from ecological cycles. Such funeral practices repeatedly reproduce human exceptionalism by understanding death as the dissolution of ecological relations, thereby calling for critical reconsideration.

Based on this problem, this article analyzes alternative body- disposal practices — particularly natural burial and human composting — that seek to reposition death within cycles of energy and matter. Methodologically, the study draws on ecological philosophy, especially the works of Donna Haraway, Bernd Heinrich, and Val Plumwood, to explore the possibility of an ontological shift that understands death not as rupture but as a process of transformation and relational continuity. In addition, the article examines cultural and religious critiques of human composting, concerns about the loss of commemorative place, and ecological and economic issues, thereby analyzing the social tensions and limitations inherent in ecological death practices.

Through this analysis, the study reframes human composting not as a mere choice of burial method but as a question of ontological and ritual transformation: how death should be understood and ritualized beyond human exceptionalism. Furthermore, it proposes that death rituals in the Anthropocene should be reconstructed to signify death not as a rupture, but as a process of transformation and relational continuity within ecological cycles.

Keywords: 인류세; 인간 예외주의; 죽음 의례; 인간 퇴비화; 격리의 논리; 에너지 흐름; 순환적 존재론
Keywords: Anthropocene; Human Exceptionalism; death rituals; human composting; Logic of Sequestration; energy flow; Cyclical Ontology

Ⅰ. 머리말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활동이 지구 시스템의 지질학적 조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시대를 가리킨다. 기후 위기와 생태계 붕괴가 가속화되는 이 시대는 생산과 소비의 방식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사건인 죽음의 처리 방식 또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동시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생태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만큼, 생태적으로 죽는다는 문제 역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나 공동체가 삶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관계를 재조직하는 의례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죽음 의례는 단순한 시신 처리 절차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시신과 영혼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드러내는 상징적·실천적 형식이다. 하지만 시신처리 방식인 장묘(葬墓)의 선택은 곧 인간이 자신을 자연 속에 어떻게 위치시키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선언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 의례의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전환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관계에 대한 사유의 전환을 반영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새롭게 구축된 산업화된 죽음 시스템은 이러한 유기적 연결망을 약화시켜왔다. 병원 장례식장, 전문 장례업, 화장 중심 제도는 죽음을 공동체적 의례의 장에서 분리하여 관리와 처리의 영역으로 이전시켰다. 이렇게 시신은 지구와의 접촉을 전제로 한 존재가 아니라, 격리되고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재배치되었다. 특히 화장은 토지 이용의 효율성과 위생을 확보하는 제도로 자리 잡았으나, 동시에 고온 소각이라는 에너지 집약적 과정을 통해 분해 과정을 단절시키는 방식을 제도화하였다. 이렇게 생태적 관점에서 볼 때 장묘의 변화는 곧 인간이 자연과 맺는 존재론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생태적 단절과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場) 중 하나가 죽음 의례 특히 장묘의 방식이다.

한국 사회는 지난 30여 년간 매장 중심 문화에서 화장 중심 체제로 급격히 이동하였다. 조선시대 유교식 상례의 제도화, 일제강점기의 「의례준칙」, 해방 이후 「가정의례준칙」을 거치며서 죽음 의례는 점차 간소화·세속화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병원과 상조회사를 중심으로 고도로 산업화되었다.1) 2024년 기준 화장률은 94.0%에 도달하였고, 연간 33만 건 이상의 화장이 이루어지고 있다.2) 시신 1구당 약 160kg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3), 화장은 토지 이용의 효율성을 확보하는 대신 대기 중 탄소를 증가시키는 화석연료에 기반된 에너지 집약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수치를 2024년 우리나라 화장자 수에 적용할 경우, 연간 약 53,910톤의 이산화탄소가 화장 과정에서 배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화장은 탄소 배출을 구조적으로 내포한 시신 처리 방식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장의 지속가능성은 국제 기후 거버넌스의 방향과도 긴밀히 맞물린다. IPCC는 2018년 발표한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를 통해,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0년 대비 최소 45% 이상 감축하고, 2050년에는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명확히 제시한 바 있다.4)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2050년 탄소중립을 공동 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2020년 10월 28일 ‘2050 탄소중립 선언’을 통해 국가 차원의 감축 책임을 공식화하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화장은 지속가능성이 결여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국토잠식과 자연환경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자연장(自然葬)제도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자연장은 화장한 유골의 골분을 나무, 화초, 잔디 등의 밑이나 주변에 묻어 장사 지내는 방식이다.5) 따라서 대체로 화장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시신 처리의 핵심 공정(소각-탄소배출)을 근본적으로 비켜서지 못한다. 따라서 지속가능성과 생태적 전환을 진지하게 모색한다면, 화장을 전제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기존의 죽음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종교학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장례 의례를 상징 체계와 사회 통합의 장치로 분석하는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환경 및 디자인 연구 차원에서 죽음을 지속가능성과 생태미학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선행 연구들에서 죽음을 생태적 순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하는 문제의식이 제기된 바 있으나,6) 이러한 논의는 주로 세계관 차원의 비판이나 디자인 방법론 제안에 머물렀을 뿐 장례 의례 특히 시신처리 자체를 생태적 사건으로 이론화하는 작업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 논문은 근대 화장 중심 죽음 의례 체제가 전제해 온 인간 예외주의적 상상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인간 퇴비화(Human Composting)나 알카리 가수분해(alkaline hydrolysis)7)과 같은 대안적 시신처리 방식을 통해 죽음을 에너지 흐름과 생태적 순환의 한 국면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인간-자연 관계를 재구성할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결국 이 논문이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류세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그 죽음은 어떤 의례적 형식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장법의 선택을 넘어, 인간 예외주의 이후 인간을 자연 속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Ⅱ. 인간 예외주의를 넘어 순환적 존재론으로

1. 인간 예외주의와 격리의 존재론

인류세는 인간이 지질학적 힘으로 작동하는 시대라는 문제의식을 전면화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단지 인간의 힘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인간의 힘을 과시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그 결과로 초래되는 기후 위기와 생태계 붕괴는 인간 자신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지구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를 대멸종의 조건으로 밀어 넣는 존재가 된다.8)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손상된 지구 위에 거주하는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죽음의 방식을 다시 물어야 한다. 즉, 우리는 삶과 죽음을 둘러싼 당연시 되어 온 사고와 관행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 예외주의(human exceptionalism)는 근본적 도전에 직면한다.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는 악어와의 조우라는 극적인 경험을 통해 서구적 인간예외주의가 은폐해 온 전제를 급진적으로 재사유하였다. 그녀는 인간을 먹이 사슬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문화적 상상력이야말로 근대적 인간 예외주의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이 소비하는 존재임은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해 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먹이 순환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문화적으로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럼우드에 따르면, 이러한 순환의 부정을 제도화한 대표적 장치가 바로 근대적 장례 문화이다. ‘튼튼한 관’과 ‘무덤을 덮은 석판’은 시신을 벌레나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대지와 지구의 타자들(earth others)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주기를 거부하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즉, 시신을 토양과 생물학적 분해 과정으로부터 격리하는 행위는 단순한 위생적 조치가 아니라, 인간을 먹이 순환의 외부에 위치시키려는 문화적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플럼우드는 인간예외주의라 명명한다.9) 이렇게 인간은 자연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분해·순환·재구성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시신의 분해를 지연시키거나 차단하려는 관행은 인간을 여전히 자연과 구별된 특수한 존재로 전제한다.

바넷(Barnett)이 지적하듯, 이러한 태도는 ‘격리의 논리(logic of sequestration)’와 긴밀히 연결된다.10) 격리의 논리란 시신을 자연적 분해 과정으로부터 분리하여 통제하고 봉인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하는 사유 구조를 의미한다. 죽음이 에너지 흐름11)과 변환의 과정12)이 아니라 위생적·행정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사건으로 전환되는 순간, 인간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제도화한다.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 단지 존재방식의 변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다른 생명체에게도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13)

근대 이후 형성된 산업화된 장묘문화는 이러한 격리의 논리를 구조적으로 강화해 왔다. 죽음 의례는 점차 가족과 공동체의 영역을 벗어나 전문 직능 집단과 산업 구조 속으로 편입되었고, 죽음은 의례적 사건이라기보다 산업적·행정적 체계로 재구성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제도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가 전제하는 존재론적 전환이다. 죽음은 더 이상 생태적 순환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통제와 격리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신은 점차 ‘위험화’되었다. 특히 도시화와 감염병 확산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시신은 잠재적 전염원으로 이해되었고, 화장은 주요한 위생적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단순한 공중보건 조치를 넘어, 분해와 부패라는 자연적 과정을 사회적 시야에서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이처럼 현대 장묘문화는 인간을 생태적 관계망으로부터 분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살아 있을 때 자연을 통제의 대상으로 상정했던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생태적 순환으로 되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특수한 객체로 남는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선택이 아니라 ‘격리의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는 사유 구조이다. 격리의 논리는 인간의 몸을 다른 유기체와 본질적으로 구별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분해를 억제하거나 차단해야 할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초월하거나 지배하는 위치에 두는 근대적 인간 예외주의와 깊이 연결된다.

이러한 사유는 산업화된 죽음 시스템(death system) 속에서 제도적으로 재생산된다. 카스텐바움(Kastenbaum)에 따르면, 죽음 시스템이란 죽음과의 관계를 매개하고 표현하는 사회·물리적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이는 인간, 장소, 시간, 사물, 상징이 결합하여 죽음에 대한 지식과 태도, 신념과 실천을 구성하는 구조이다.14) 이러한 죽음 시스템 속에서 시신 처리 방식은 단순한 기술 선택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전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재구성된다.

현대 산업화된 죽음 시스템은 격리 논리를 강화해 왔다. 표준화된 절차와 서비스 체계는 죽음을 서비스로 전환시켰고, 시신은 처리 과정의 한 단계로 환원된다. 이러한 경향은 죽음을 상품화하고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격리’는 위생과 존엄이라는 담론과 결합하여 정당화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을 생태적 순환으로부터 분리하는 존재론이 반복적으로 실천된다.

그러나 격리의 논리는 완전한 분리를 실현하지 못한다. 특히 화장은 화석연료 소비와 탄소배출 등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생태계에 개입한다. 결국 죽음 시스템이 새로운 형태의 생태적 부담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신을 순환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왜곡된 순환을 낳는다. 올슨(Olson)이 지적하듯, 이러한 ‘네크로-폐기물(necro-waste)’의 문제는 죽음을 생태계 바깥에 위치시킬 수 없음을 드러낸다.15)

결국 산업화된 죽음 시스템은 시신을 위험물로 규정하고, 분해를 억제하며, 죽음을 기업화된 관리 체계로 편입시킴으로써 인간을 생태계로부터 예외화하는 복합적 구조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인류세라는 조건은 이러한 전제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인간의 몸은 물, 탄소, 질소, 미생물의 집합체이면서 생태적 순환의 일부이다. 그래서 분해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따라서 격리의 존재론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구별되는 특수한 존재로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배치한다. 이러한 존재론은 인류세적 조건에서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격리의 존재론을 해체하고 인간을 다시 에너지 흐름과 순환의 관계망 속에 위치시키는 순환적 존재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이다.

2. 자연장과 순환적 존재론의 모색

산업화된 죽음 시스템이 분해를 억제하고 시신을 격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한국의 자연장과 달리 서구에서 시작된 녹색장례운동의 등장은 이러한 격리의 논리에 대한 반성적 대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녹색장례 운동은 단순히 기존 매장 방식의 기술적 변형이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상징 체계와 존재론을 재배치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6) 녹색장례는 시신이 토양과 직접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분해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17) 녹색장례는 시신이 토양과 직접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분해 과정을 수용한다. 그래서 시신을 ‘보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 흐름 즉 생태적 순환에 참여하는 존재’로 재정의한다. 이는 죽음을 다시 생태적 관계망 속에 위치시키려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녹색장례는 산업화된 장례의 반대편에 서 있는 기술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상징적 장치이다. 한편으로 녹색장례는 격리의 논리를 완화하고 시신을 에너지 흐름 속으로 환원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참여자들에게 생태적 책임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수행적으로 학습하게 한다. 이 점에서 녹색장례는 생태적 세계관을 체화하는 의례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바넷(Barnett) 역시 생태적 죽음 실천이 인간을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more-than-human) 관계망 속으로 다시 위치시키는 계기임을 강조한다.18) 이처럼 자연장은 시신을 더 이상 ‘봉인된 개인’으로 남겨두지 않고, 미생물, 토양, 식물과 연결된 물질적 집합체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에너지 흐름을 통한 재구성 내지 변환이며, 개인적 종결이 아니라 생태적 연속성의 전환점으로 해석된다. 말하자면, 죽음을 자연의 순환에서 일시적으로 분리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고, 생태적 물질 순환의 한 국면으로 재배치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생태적 전환(ecological turn of death)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자연장은 단순한 장례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존재론, 윤리, 의례의 전환을 요청이기도 하다.

녹색장례가 분해를 허용함으로써 격리의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이라면, 인간 퇴비화(human composting)는 그보다 더 급진적인 전환을 시도한다. 인간 퇴비화는 통제된 환경 속에서 시신을 미생물 활동을 통해 토양으로 전환하는 가속 분해 기술이다. 즉 인간 퇴비화란 인간 유해를 생물학적 분해 과정을 거쳐 생태적으로 풍요로운 흙으로 전환하는 가속 분해 기술을 의미한다. 인간 퇴비화의 대표적 실천 모델로 알려진 ‘리컴포즈(Recompose)’는 건축가 카트리나 스페이드(Katrina Spade)가 구상한 ‘어반 데스 프로젝트(Urban Death Project, UDP)’에서 출발하였다. 2017년 설립된 리컴포즈는 2020년부터 인간 퇴비화 서비스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고, 장례 문화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스페이드의 구상은 단지 기술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을 생태적 회귀의 과정으로 재의미화하려는 철학적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그녀는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과의 관계를 여는 ‘변환의 지점’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시각은 ‘Recompose’라는 명칭 자체에 함축되어 있다. ‘Re-’는 반복 또는 다시의 의미를 갖는 접두사로, 분해의 과정을 단순한 해체가 아닌, 새로운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과정으로 재규정한다. 실제로 리컴포즈는 “인간 유해를 흙으로 전환함으로써, 우리 삶을 지탱해온 지구를 재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인간 퇴비화가 탄소 배출을 억제하고, 생태계의 재생에 기여하는 구체적 수단임을 강조한다.19) 그래서 인간 퇴비화는 단지 ‘시신을 흙으로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죽음을 재생과 변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생태윤리적 전환인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닌, 인간 존재를 둘러싼 근본적 인식의 전환과 맞닿아 있다. 크리스틴 C. 블린(Kristen C. Blinne)은 인간 퇴비화를 “인간과 자연을 구분짓는 정체성 서사를 해체하는 작업”으로 해석한다. 이를 통해 ‘경계 짓기된 자아’에서 생태적 상호연결망의 일부로서의 자아로 전이하는 과정을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0) 이러한 관점은 죽음을 고립된 종말로 이해하기보다는, 생태적 기여와 돌봄의 계기로 보는 패러다임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이 전환의 중심에는 ‘분해(decomposition)’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분해는 일반적으로 소멸이나 파괴로 이해되지만, 어원적으로 보자면 ‘de-compose’는 기존의 구성을 풀어 또 다른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다. 후지하라 다쓰시에 따르면, 분해는 단순한 소멸의 순간이 아니라 다른 생명 형태가 출현하는 조건이다. 다시 말해 분해는 종결이 아니라 변환이며, 해체가 아니라 재조립의 출발점이다. 후지하라는 분해의 과정을 “먹는 행위로서의 분해”로 설명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자연 속 분해자들 — 지렁이, 미생물, 곤충 등 — 은 사체를 섭취하고, 그 배설물은 다시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는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그는 이를 “네트워크적 영위”라 표현하는데, 분해하는 존재와 분해되는 존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협력적 생태계로 이해한다21) 더불어 후지하라 다쓰시는 식(食)이라는 현상을 생태계의 일환으로 관찰하면 단순히 에너지와 물질의 교환을 통해 관계가 지속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22)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시작점이며, 새로운 생태적 조립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분해는 생명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예컨대, 숲속에서 쓰러진 나무는 다양한 곤충, 진균, 미생물들의 서식지가 된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유기물은 다른 생명체의 영양분이 되어 생태계의 순환을 지속시킨다. 이렇게 한 생명의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토대’가 된다.

연어의 생태적 순환도 이러한 분해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산란을 위해 고향 하천으로 돌아온 연어는 쇠약해진 상태로 곰의 먹이가 된다. 이후 남겨진 유해는 새로 태어난 연어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미생물의 음식이 되어 숲과 하천 생태계의 풍요를 가능케 한다. 후지하라는 이를 두고 “스스로 부과한 죽음이 자식의 생존을 돕는다”고 말한다.23) 이렇게 죽음은 생태적 회귀이며, 이로부터 다른 존재의 삶이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 퇴비화는 죽음을 생태적 순환에서 예외화해 온 인간 중심적 상상력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그것은 인간의 시신을 보호해야 할 잔여물이나 폐기물로 간주하는 대신, 물질 순환의 능동적 요소로 재위치시킨다. 죽음은 제거되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생태적 상호작용의 연쇄에 참여하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인간 퇴비화는 단순한 장례 방식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실천이며, 죽음을 고립된 종말이 아니라 관계적 전환으로 이해하도록 요청하는 철학적 제안이다. 정리하면, 인간 퇴비화는 인간 중심주의가 단절해 온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재연결함으로써, 보다 감응적이고 순환적인 생태윤리를 사유하고 실천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퇴비화가 존재론에 대한 성찰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사회적 수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실천은 “존엄은 무엇인가”, “죽은 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따라서 인간 퇴비화를 단순히 ‘대안 장례’로 서술하기 보다는, 이를 가능케 하는 철학적 배경과 그 내부의 긴장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인간 퇴비화가 전제하는 존재론과 사유의 지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 ‘인간 퇴비화’의 생태철학적 맥락

1. 도나 해러웨이의 ‘부식토-되기’(Becoming-Humus)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현대 생태철학과 페미니즘 이론의 주요 사상가로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의 얽힘과 공생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사유해 왔다. 그녀는 인간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전제해 온 근대적 인간관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다종적 생명 네트워크 속에서 ‘함께-되기(becoming-with)’를 통해 형성되는 존재로 재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 퇴비화라를 단순한 생태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치를 재배치하는 존재론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기반을 제공한다.

주지하듯 인간 퇴비화는 인간 유해를 부식토(humus), 곧 생명을 다시 일으키는 토양으로 전환하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해러웨이의 논의는 ‘퇴비화(composting)’를 단순한 물질적 분해로 환원하지 않고, 존재론적 재구성의 계기로 읽게 한다. 그녀는 “우리는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퇴비이다(We are compost, not posthuman)”라고 선언하고, 인문학(humanities)을 어원에 근거한 ‘퇴비학(humustities)’을 사유의 토대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핵심은 ‘호모(homo)’라는 특권적 범주의 해체이다. 인간은 자연 밖에 선 존재가 아니라 흙(humus)의 존재로서, 다종과 얽히고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는 지구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제기된다.24) 이 맥락에서 퇴비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강력한 은유로 기능한다. 퇴비는 박테리아와 곰팡이 등 미시적 존재들이 죽은 유기체를 ‘먹고’ 만들어낸 배설물이라는 점에서, 서로를 만들고 서로를 지속시키는 다종적 생산 즉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현장을 가리킨다. 따라서 해러웨이에게 퇴비(compost)는 삶과 죽음, 먹고 먹히기, 상호의존적 뒤얽힘, 공생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은유라 할 수 있다.25)

더불어 이러한 관점에서 유한성과 죽음은 단지 우울하거나 비극적인 사건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육체가 지구로 되돌아가 인간/비인간의 얽힘을 다시 생성하는 과정으로 재규정된다. 죽은 유기물이 미생물과 곰팡이에 의해 분해되어 배설물로 전환되고, 그 배설물이 다시 식물을 양육시키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는 생태적 사실은, 죽음이 생태적 생성의 한 국면임을 보여준다.26) 이렇게 퇴비는 생명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면서, 그 경계 위에서 일어나는 상호의존적 얽힘을 가시화한다.

따라서 해러웨이의 ‘부식토-되기(becoming-humus)’는 인간은 더 이상 독립적이고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흙과 미생물, 곰팡이, 그리고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얽히고 설키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죽음을 비극이나 소멸로만 이해하지 않고, 다른 존재의 생명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흙으로 돌아가고, 흙은 다른 생명의 조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순환의 복원이 아니라, 다종적 존재들이 얽힌 지구 공동체 속에서 다른 방식의 삶(재삶, re-life)을 열어 보이는 윤리적 기제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인간 퇴비화는 해러웨이가 말하는 “트러블과 함께 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의 실천적 사례이며,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지구적 공생을 위한 철학적 전환점이 된다. 말하자면 인간 퇴비화는 죽음을 통해 지구와 다시 얽히는 방식으로, 인간 존재를 자연 속 관계망의 일부로 되돌리며, 포스트휴먼적 사유가 아닌 ‘퇴비주의적 사유’를 실현하는 윤리적 행위로 자리잡는다.

2. 베른트 하인리히의 ‘죽음의 생태학’

베른트 하인리히(Bernd Heinrich)의 생명 철학은 생태계 내 순환과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집요한 관찰에 근거한다. 그는 『생명이 생명으로』(Life Everlasting: The Animal Way of Death)에서 자연 속 동물의 죽음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죽음이 생명의 종결점이 아니라 생태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능케 하는 전환 혹은 변환 과정임을 강조한다. 이때 죽음과 삶을 매개하는 핵심 존재가 ‘분해자(decomposer)’이며, 균류(fungi)와 곤충, 박테리아 등은 죽음을 생태계의 에너지와 영양의 흐름으로 다시 조직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하인리히는 분해자들을 ‘장의사(undertakers)’에 비유하고, 죽은 생물을 둘러싼 분해 과정을 ‘야생의 향연(a feast in the wild)’으로 묘사한다. 이 은유는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죽음이야말로 생태계가 자신을 재조직하는 역동적 과정임을 드러내는 감각적 언어와 묘사이다. 이 관점에서 죽음와 먹기는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 과정 속에서 서로 얽힌 연쇄과정이다. 먹는 행위가 생명의 유지 방식이라면, 죽음은 그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변환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죽음은 무엇보다 재생에 대한 야생의 찬양이지. 우리 몸으로 파티를 여는 거야. 야생에서 동물은 죽은 장소에 그대로 누운 채 청소동물의 재순환 작업에 몸을 맡기지. … 인간 육체의 영양분을 자연계로부터 박탈하는 것은, 인구가 65억 명이나 된다는 사살을 감안할 때 지구를 굶기는 일이잖아. 관에 넣어서 매장하면, 즉 시체를 감금해버리면 그런 결과가 생긴다고, 화장도 답이 아니야, 온실 기체가 누적될 테니까.27)

하인리히가 인용하는 동료의 편지는 이러한 관점을 극적으로 응축한다. 편지의 화자는 죽음을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바뀌는 과정”이라 이해하고, 죽음을 “재생에 대한 야생의 찬양”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체가 청소동물과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을 “우리 몸으로 파티를 여는 것”이라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육체의 영양분을 자연계로부터 박탈하는 관행이야말로 “지구를 굶기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하인리히는 이 편지를 통해 자신이 오랫동안 탐구해 온 ‘생명과 죽음의 그물망’ — 그리고 그 그물망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 — 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고백한다.28)

하인리히에게 죽음은 에너지와 영양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다. 대형 동물의 사체는 곤충과 미생물에게 중요한 먹이가 되고, 분해 산물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여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기 때문다. 예컨대 사슴의 사체는 곤충들의 활동을 통해 분해되며, 그 부산물은 숲의 순환 체계에 기여한다.29) 더 나아가 죽은 나무가 서식처가 되고, 곰팡이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며 숲 전체의 풍요를 재구성하는 사례들은, 자연이 죽음을 통해 삶을 정교하게 재구성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30)

이 순환의 논리는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인리히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에도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예외적 존재로 상정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특히 매장과 화장을 통해 인간 육체를 자연의 분해 과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태도는, 인간이 생태적 만찬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문화적 실천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비판은 발 플럼우드(Val Plumwood)가 말한 앞에서 논의했듯 인간 예외주의 문제의식과도 맞닿는다.31) 하인리히에게 인간 역시 만찬의 일부이며, 생명의 순환 고리 밖으로 이탈할 수 없는 존재이다.32)

요컨대 하인리히의 죽음 이해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상정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죽음을 생태적 기여의 순간으로 재위치시키는 전환을 촉발한다. 죽음은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생태계에 대한 에너지적 기여이며, 상호 의존적 생명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 관점은 인간 퇴비화와 같은 생태적 장례 방식이 단순한 대체 기술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돌봄이라는 윤리적 실천의 형태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뒷받침한다.

정리하면, 하인리히는 죽음을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생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필수적 ‘전환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의 생태철학은 죽음을 통해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방식, 즉 ‘죽음을 통한 돌봄’이라는 윤리적 실천을 제안한다. 이는 인간 퇴비화와 같은 생태적 장례 방식의 철학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사유 기반이 된다. 아울러 죽음을 삶의 한 부분이자 새로운 생명으로의 ‘되기(becoming)’로 받아들이는 존재론적 전환을 촉진한다.

3. 발 플럼우드의 인간 예외주의 비판과 ‘먹히는 존재’

생태여성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는 생명을 순환적이고 상호의존적 존재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한다. 그녀에게 죽음은 생명과의 단절이 아니라, 생태계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에너지의 변환 과정이며, 선조 공동체가 생태 공동체에 건네는 ‘선물’로 다시 사유된다. 이러한 관점은 죽음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태적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존재론적 전환을 요청한다.

플럼우드의 핵심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가 자연의 먹이그물을 부정하고, 인간을 그 먹이그물의 바깥 — 곧 예외적 위치 — 에 두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을 “다른 존재를 잡아먹는 자이되, 결코 다른 존재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자”로 위치시키는 사고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예외주의의 전형이다.33) 그녀는 죽음은 개체 수준에서는 생명의 찰나성을 확정하지만, 생태적 수준에서는 지속적이고 탄력적인 순환의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 역시 분해와 환원을 통해 생태계의 삶을 구성하는 조건임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통찰은 플럼우드의 실존적 경험 — 악어의 습격 — 을 통해 급진화된다. 생사의 경계에서 그녀는 자신이 생태계의 다른 ‘먹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했고, 그 경험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믿음이 허구임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34) 이후 플럼우드는 인간을 ‘먹히는 존재(eaten-being)’로 사유함으로써, 인간이 자연과 맺는 존재론적 관계를 새롭게 바라본다.

여기서 ‘먹히는 존재’는 단순한 포식자-피식자의 생태적 위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자연의 일부로 되돌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죽음을 통해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재위치시키는 윤리적·존재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주체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되기(becoming)’를 수행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플럼우드는 우리가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 제도적 장치를 장례에서 발견한다. 우리의 시신 처리 방식은 몸이 다른 종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구조화되어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인간 예외주의가 반복적으로 수행된다는 것이다.35)

플럼우드는 죽음을 “생태공동체이자 조상공동체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36) 또한 먹이/죽음에 대한 상상력의 회복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을 더 큰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 근본적 평등과 상호 양육의 구성원으로 — 다시 상상하게 하는 열쇠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 퇴비화는 플럼우드의 철학을 하나의 실천으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시신이 부식토로 전환되어 다른 생명의 조건이 되는 과정은, 인간이 ‘먹히는 존재’로서 다시 생태적 먹이그물에 편입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결국 ‘먹히는 존재’는 플럼우드가 제안하는 탈인간예외주의적 생태철학의 핵심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해체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재정립과 생태 윤리의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단절이 아닌 지속으로, 소멸이 아닌 변환으로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조화롭게 관계 맺는 존재로 전환할 수 있다.

Ⅳ. 맺음말 : 남아 있는 과제들

이 논문은 인류세라는 조건 속에서 죽음을 생태적 사건으로 재이해하고, 근대 장례 체제가 전제해 온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화장 중심의 산업화된 죽음 시스템은 위생과 효율, 존엄의 언어로 정당화되어 왔지만, 동시에 인간의 신체를 생태적 순환으로부터 격리하는 존재론을 반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에 본 연구는 자연장과 인간 퇴비화와 같은 대안적 시신 처리 방식이 죽음을 다시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 속에 위치시키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전환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 퇴비화는 이론적 정당화와 달리 사회문화적 수용 과정에서 강한 문화적·종교적 저항에 직면하였다. 특히 고인에 대한 존엄을 훼손한다는 비판과 함께 애도와 기념의 장소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예컨대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육체를 정체성과 기억, 그리고 부활의 희망을 담지한 존재로 이해해 왔다. 특히 2016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Ad resurgendum cum Christo)에서, 시신은 가급적 매장되어야 하며, 조각나거나 흩어져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또한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는 2023년 성명에서 인간 퇴비화가 “인간의 육체를 식별 불가능한 물질로 환원함으로써 기도와 기억의 장소를 지워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37) 특히 인간 퇴비화는 “어디에서,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는 이 문제는 더욱 복합적이다. 유교적 죽음관과 조상 개념, 가족 중심의 애도 구조는 신체의 물리적 연속성과 장소성을 중요하게 여겨 왔다. 이러한 전통과 급진적 생태 장례 방식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시신처리 방식 선택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인간 퇴비화를 단순히 ‘존엄의 훼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근대적 인간 예외주의를 전제한다. 인간 퇴비화는 인간 시신을 제거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순환 속에서 다시 관계 맺게 함으로써 인간의 생명 생성적 능력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살아감’을 영혼 불멸 혹은 윤회적 주장 대신 관계적 지속성의 차원에서 재정의한다면, 계속 살아감이란 다른 생명과의 생태적 얽힘 속에서 존재가 변환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징과 의례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인간 퇴비화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기억과 기념의 장소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과제는 기억의 장소성을 보존할 수 있는 의례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다. 예컨대 토양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공동체가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을 구성하거나, 생태적 환원을 의미화하는 방식 등 충분히 모색될 수 있다. 이는 기술을 넘어 의례의 문제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학적 사유가 기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 자연장 실천에서는 이미 기존의 장소 중심 추모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례적 상상력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 자연장에서는 “고인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날은 슬픈 날이 아니라 축복할 날”로 이해하는 등 죽음을 애도의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비록 화장을 전제하고 있지만, 산골(散骨)이후의 추도 방식에서 강조되는 것은 특정 장소를 반복적으로 방문하지 않는 것이다. 즉 자연 전체를 기억의 매개로 삼는 추모 방식을 제시한다. 예컨대 바다나 산을 볼 때마다, 혹은 꽃이 필 때마다 고인을 떠올리는 것도 하나의 추모 방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바다와 같은 자연 공간은 어디에서든 고인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 매개가 된다. 이러한 추모 방식의 근저에는 “크나큰 자연의 생명의 순환 안으로 돌아가는 기쁨”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38)

마지막으로 인간 퇴비화는 화장에 비해 약 87%의 탄소배출을 감소시킬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지만, 여전히 고온 유지를 위한 에너지 사용 등에서 발생하는 생태적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또한 기술 기반 장례 방식은 비용 상승을 초래하여 생태적 장례의 접근성을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죽음을 생태적 전환의 중심적 사건으로 강조하는 담론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자연 속에서 특권적 존재로 재위치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예외주의를 재생산할 위험도 내포한다. 따라서 인간 퇴비화는 생태적 가능성뿐 아니라 생태적 부담, 경제적 접근성, 그리고 인간예외주의의 재구성 가능성이라는 긴장을 동시에 고려하는 비판적 논의가 필요하다.

Notes

* 이 논문은 202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5S1A5B5A16008374).

1) 송현동, 「근대이후 상장례정책 변화과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민속학』 14 (2002), pp.206-213.

2) 보건복지부·한국장례문화진흥원, 『2024년 화장통계』, 2025년 10월, pp.2-3.

3) 김충현, 「탄소 중립 달성하려면 다른 장법 필요하다」, 《상조장례뉴스》 2024. 1. 12.

4) 기상청, 『「지구온난화 1.5℃」특별보고서 :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본』, 2018. 10. 8.

5) 《한국장례문화진흥원》, 「자연장제도」 (https://www.kfcpi.or.kr/portal/home/contents/contents_view.do?menuId=M0001000400010001, 2026. 3. 24. 검색).

6) 최은주, 「인간 예외주의로서의 장례와 환경적 사유」, 『OUGHTOPIA(오토피아)』 36 (2021), pp.65-91; 전유미, 「죽음에 대한 생태미학적 관점이 적용된 지속가능한 베리얼 디자인 탐구」,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26-4 (2020), pp.417-432.

7) 알칼리 가수분해(alkaline hydrolysis)는 전통적인 매장이나 화장 방식의 대안으로서 인간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미국, 캐나다, 영국, 멕시코,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여러 국가에서 점차 호응을 얻고 있다. 간단히 말해, 알칼리 가수분해는 95%의 물과 5%의 알칼리 용액 속에서 시신을 가압된 스테인리스강 탱크에 넣고 약 150℃ 전후로 가열하여 용해시키는 과정으로, 그 결과 하수 시스템으로 흘려보내거나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액체 폐기물과, 백색 재(white ash)로 분쇄될 수 있는 뼈의 무기질 잔여물이 생성된다. 알칼리 가수분해는 원래 1888년 미국에서 동물 사체로부터 비료를 생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특허를 받았으나, 알칼리 가수분해가 매장처럼 토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화장보다 에너지 효율이 훨씬 높고 탄소 발자국도 더 작기 때문에, 최근 인간 시신 처리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G. Scarre, “Alkaline hydrolysis and respect for the dead: an ethical critique,” Mortality, 30:1 (2025), pp.273-286.

8) Joshua Trey Barnett, “On Dying Ecologically in the Anthropocene,” The Ecological Citizen 2 (2018), p.23.

9) 허남진·조성환, 「지구학적 관점에서 본 먹음·먹힘의 철학 : 발 플럼우드와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신종교연구』 47 (2022), pp.146-148.

10) Joshua Trey Barnett, “On Dying Ecologically in the Anthropocene,” pp.25-27.

11) 대지 윤리를 주창한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는 대지를 “에너지의 샘”으로 보았다. 그가 말한 대지 피라미드는 토양-식물-동물이라는 회로를 통해 에너지가 흐르는 생태적 네트워크를 가리키며, 죽음과 부패는 에너지를 다시 토양으로 되돌리는 핵심 과정이다. (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달 그리고 이곳 저곳의 스케치』, 송명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따님, 2020), p.258.)

12) 클레이튼 크로켓(Clayton Crockett)은 존재를 “에너지 변환”(energy transformation)으로 규정한다. 에너지의 흐름이 생명의 존재를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의 과정이 된다.(Clayton Crockett, Energy and Change: A New Materialist Cosmotheolog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2), p.2.

13) 에마누엘레 코치아, 『메타모르포시스 : 생명의 순환』, 이아름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25), pp.110-118.

14) R Kastenbaum, “On the future of death: Some images and options,” OMEGA Journal of Death and Dying, 3:4 (1973), p.310.

15) Philip R. Olson, “Knowing ‘Necro-Waste’,” Social Epistemology, 30:3 (2016), pp.326-331.

16) Andy Clayden, eds., Natural burial: Landscape, practrice, experience (London:Routledge, 2015), pp.10-11.

17) A.A. Bouverette, “Green Burials: The Deinstitutionalization of Death,” The Hilltop Review 10:1 (2017), pp.50-55.

18) Joshua Trey Barnett, “On Dying Ecologically in the Anthropocene,” pp.26-27.

19) 《RECOMPOSE》 (https://recompose.life/our-model, 2025. 1. 14. 검색).

20) Kristen C. Blinne, “Compost me: a more-than-humanifesto,” Mortality (2024), p.2.

21) 후지하라 다쓰시, 『분해의 철학 :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박성관 옮김 (서울: 사월의 책, 2022), pp.251-252.

22) 같은 책, p.262.

23) 같은 책, pp.284-286.

24)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파주: 마농지, 2021), p.166.

25) 주기화, 「신유물론, 해러웨이, 퇴비주의」, 『비교문화연구』 65 (2022), p.127.

26) 최유미, 「인류세 시대의 페미니스트 스토리텔링」, 『한국종교』 56 (2023), p.71.

27) 베른트 하인리히, 『생명이 생명으로』, 김명남 옮김 (서울: 궁리출판사, 2015), pp.5-6.

28) 같은 책, p.6.

29) 같은 책, pp.41-60.

30) 같은 책, pp.167-182.

31) 발 플럼우드, 『악어의 눈 :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략』, 김지은 옮김 (서울: yeondoo, 2023), p.238.

32) 베른트 하인리히, 앞의 책, p.260.

33) 발 플럼우드, 앞의 책, p.54, pp.238-239.

34) 같은 책, p.54.

35) 같은 책, p.240.

36) 같은 책, pp.239-240.

37) 「Human composting: not “green” and harms human dignity」 (https://www.mdcatholic.org/human-composting-harms, 2025. 5. 21. 검색).

38) 김샛별, 「정치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서의 자연장(自然葬)」, 『일본비평』 18 (2018), pp.179-182.

【참고문헌】

1.

기상청, 『「지구온난화 1.5℃」특별보고서 :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본』, 2018. 10. 8.

2.

김샛별, 「정치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서의 자연장(自然葬)」, 『일본비평』 18, 2018.

3.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파주: 마농지, 2021.

4.

발 플럼우드, 『악어의 눈 :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략』, 김지은 옮김, 서울: yeondoo, 2023.

5.

베른트 하인리히, 『생명이 생명으로』, 김명남 옮김, 서울: 궁리출판사, 2015.

6.

보건복지부·한국장례문화진흥원, 『2024년 화장통계』, 2025.

7.

송현동, 「근대이후 상장례정책 변화과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민속학』 14, 2002.

8.

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달 그리고 이곳 저곳의 스케치』, 송명규 옮김, 서울: 도서출판 따님, 2020.

9.

에마누엘레 코치아, 『메타모르포시스 : 생명의 순환』, 이아름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25.

10.

전유미, 「죽음에 대한 생태미학적 관점이 적용된 지속가능한 베리얼 디자인 탐구」,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26-4, 2020.

11.

주기화, 「신유물론, 해러웨이, 퇴비주의」, 『비교문화연구』 65, 202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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