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논의의 이론적 기초
예술은 예술이고 종교는 종교다. 서로 독립된 분야다. 그러나 예술은 종교를 소재로 삼을 수 있고, 종교는 예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1) 예술과 종교 사이에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교집합을 주제로 삼는 ‘예술-종교’ 논의는 ① 예술로서의 종교(religion as art), ② 종교로서의 예술(art as religion), ③ 종교적 예술(religious art), ④ 예술적 종교(artistic religion), ⑤ 종교로부터 비롯된 예술(art from religion), ⑥ 예술로부터 비롯된 종교(religion from art) 등으로 유형화될 수 있다.2)
예술-종교 논의는 미학(美學)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성스러움·상징·종교체험 같은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다.3) 대개 그 논의의 결과물들은 인간이 예술에 부여한 가치를 살핀 것들이다. 우리는 이와 약간 결을 달리해서, 예술에 얹히는 대상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종교학은 예술을 물질로 대치한 ‘물질-종교’ 논의로써 그 일을 한다. 이 글도 예술-종교 대신 물질-종교 분야로 이동하여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21세기 이후 본격화한 물질-종교 논의는 시각문화(visual culture)·물질문화(material culture)에 초점을 맞추는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4) 이 분야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은 영국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의 인류학자 다니엘 밀러(Daniel Miller, 1954~)다. 그는 인간과 물질을 이분법으로 구분해 온 것이 종래의 인류학(주로 민족지학) 연구 경향이었음을 비판하고, 인간과 물질이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질문화(material culture)라는 프레임 속에서 ‘인간이 물질을 만드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인간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의 제안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물질문화 연구는 학계에서 하나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6)
이전에도 고고학·인류학·사회학은 그 나름대로 물질을 분석하는 연구 전통을 보여주기는 했다. 그러나 새로운 물질 연구는 물질을 인간과 별개인 객체가 아니라 내재적인 생기를 지닌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관점은 물질을 인간과 분리된 대상으로 보아온 마르크스적 유물론과는 다르므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으로 불린다. 이에 따르면, 물질은 인간에게 특정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agent)로 규정된다.7) 이것을 ‘물질의 물질성(materiality of matter)’이라고 하는데, 물질성(materiality)이란 사물의 속성(property of thing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물질의 행위자적 특질(the agential qualities of matter)을 합한 개념이다.8)
물질 연구는 종교학에도 도입되었다. 종교가 물질이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뒤늦은 자각 때문이다. 이로써 기존 종교연구가 관념적이고 초감각적인 측면에 집중해왔던 사실이 비판될 수 있었다. 종교 생활에서 믿음과 관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지만 그것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결합하여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9) 물질은 형체를 가진 것은 물론이요, 음악·주문·몸짓과 같은 무형의 요소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종교인들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상징적 물건을 보고 만지며, 특정한 장소 혹은 건물을 성스럽게 여기고, 주문·경전·성가(聖歌) 등 신성한 텍스트를 읽고 부르거나 들으며, 정해진 장소에서 특별한 몸짓을 선보이거나 음식을 먹는다.10) 이런 물질적인 표현 덕분에 하나의 종교는 다른 종교와 문화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11)
종교학에서 물질 연구 분야는 대개 물질종교(material religion)12)라는 이름으로 범주화된다.13) 물질종교는 종교 ‘이론’이 아니다. 그 대신 물질 그 자체에 더 집중하면서, 나아가 물질이 인간에게 특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까지 강조하는 학술적 종교연구 ‘접근법’을 의미한다.14)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연구 관점과 방법을 물질종교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특정 종교를 마주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건축물이나 복식(服飾) 등 그 종교에 속한 물질이다. 그리고 그 물질에 대한 설명은 그 종교 이해의 첫걸음이 된다. 물질종교 연구가 필요한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니까 피터 J. 브래운라인(Peter J. Braunlein)에 의하면, 물질종교 접근은 ① 그 물질의 현대적 또는 역사적 사용 사례를 조사할 것, ② 그 연대기(biography)를 추적할 것, ③ 문화 경관(cultural landscapes)을 해석할 것, ④ 물질과 물질적 과정(material processes)을 살필 것, ⑤ 물질의 사회생활(social life) 기록을 연구하거나 현장 조사를 할 것을 요구하므로,15) 그 관점을 담아낸 연구 결과물은 해당 종교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더 나아가, 같은 물질이 다른 종교들에서 동시에 나타난다면, 각 종교가 해당 물질에 어떤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물질의 역사와 문화 경관은 어떤지를 비교의 시선에서 조명함으로써 각 종교의 특징을 추출할 수도 있다.
둘째, 종교 건축이나 물품이 그 종교의 세계관을 어떻게 상징적으로 나타내는지 확인하는 일은 이전부터 해왔던 작업이다. 물질종교 논의는 이를 넘어서 물질성, 즉 물질이 인간과 상호 작용하는 현상까지 더 설명하고자 한다. 브렌트 플레이트(S. Brent Plate)에 의하면 이런 연구는 ① 인간과 자연적·인공적 물리 대상 간의 상호 작용을 조사하되, ② 그 상호 작용은 대부분 감각의 인지에서 나타난다고 보고, ③ 아울러 특별하게 정해진 공간과 시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④ 그 상호 작용의 목적은 종교 공동체와 신앙인에게 지향점을 제공하거나 바꾸어주기 위한 것으로서, ⑤ 상호 작용의 결과로 종교 전통의 형식적 제한과 구조가 형성됨을 설명한다.16)
일본 에도시대의 마리아 관음상(マリア観音像)을 하나의 사례로 간단히 살펴보자. 이 성상(聖像)은 에도 막부의 극심한 탄압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가쿠레기리시탄(隱れキリシタン, 숨은 기독교인]들이 모셨던 것으로서, 자신들의 믿음을 감추기 위해 성모상을 관음보살로 위장하여 만든 것이다. 이 성상을 주제로 한 연구가 상징적 차원, 즉 성상의 어느 부분이 기독교의 교리를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설명하는 차원에서 머무른다면, 기독교 성상과 불교 성상의 불편한 동거는 해명되지 못하고 결국 이 물질은 순수한 기독교 정신의 훼손으로 폄훼되거나 종교혼합 현상으로 단정될 수밖에 없다. 물질종교 연구는 탄압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 감각의 인지를 통해 가쿠레기리시탄과 성상 사이에서 일어난 상호 작용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문화 경관과 인간·물질의 사회생활 속에서 종교 형식의 특정한 구조적 출현이 불가피함을 기술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논의는 기독교 성상과 불교 성상이 하나의 몸체에 동거하는 기묘한 현상을 기술할 수 있다.
셋째, 관념이 물질을 앞선다는 인식은 일반적이다. 종교는 이론적 사상과 교리를 체계화하고, 그 연후에 그것을 담아내기 위해 2차적으로 물질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질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물질종교 접근법은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물질이 종교적 감성을 담은 표현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 관념의 종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까지 본다는 관점은 종교 이해에서 중요하다. 물질이 가진 힘은 종교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며, 나아가 교리나 제도의 형성에 핵심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물질종교는 사유가 형성되는 곳이 물질 영역이라는 점, 신념은 실천·공간·대상·신체에 근거를 둔다는 점, 종교적 신념과 교리가 대개 물질적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 다시 말해서 물질은 관념을 담기 위해 부수적으로 창조된 그릇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인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동안 종교학에서 간과되어왔던 물질의 위상을 일깨운다.17)
넷째, 물질종교는 특정 종교의 세계관이 물질과 인간의 상호 작용 속에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간단한 사례로 불교와 육식의 관계를 살펴보자. 붓다는 건강을 위해서라면 육식이 인정된다고 했고, 초기 불교 공동체도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고기[三種淨肉, 五淨肉]라면 먹을 수 있다고 했다.18) 그러나 후대의 대승불교는 육식을 철저히 금했다. 그 이유가 생명 존중 때문임은 당연하지만, 다른 이유로 제시된 사실은 육식을 당하는 동물이 인간에게 원한을 품으면 허물이 생겨 수행에 지장을 주고, 고기 섭취는 포악함·성적 욕구를 불러일으켜 명상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19) 물질종교 연구는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는 이유를 나열하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불교 수행자와 육식 고기 사이에서 진동하는 생명 존중·평등·원한·허물·포악함·욕망 관념이 초기불교 시대와 대승불교 시대에 각각 어떻게 다르게 작동했는지까지 살필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물질종교 논의는 초기불교에서 덜 고려되었던 물질과 인간의 상호 작용이 대승불교에서는 더 중요시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정리하자면, 종교학에는 예술-종교 논의만이 아니라 물질-종교 논의도 활발하다. 그 두 논의의 구분이 아주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예술-종교 논의가 미학을 바탕으로 성스러움·상징·종교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면, 물질-종교 논의는 물질 그 자체 또는 물질의 물질성을 강조한다는 데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적될 수 있다. 예술-종교 논의가 집중하는 미학·성스러움·상징은 인간이 예술에 부여한 가치이고, 그로써 예술은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이와 달리 물질-종교 논의는 물질을 보다 독립적인 대상으로 인정하며, 나아가 물질이 인간에게 특정한 가치까지 전달해준다고 본다. 그러니까 예술-종교 논의가 인간의 관념이 예술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진다면, 물질-종교 논의는 그 반대로 물질(유형이지만 무형도 포함한다)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물질의 그 가치가 인간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진다는 데에서 일정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물질종교의 사례 연구로 ‘영대(靈臺)’를 지목하고자 한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영대는 대(臺)·무덤·지방·별자리[靈臺三星]20)·대순진리회 신전(神殿)의 이름 또는 인간의 마음을 뜻하거나,21) 심지어 잡지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22) 이 다양한 사례들은 물질인 영대와 물질이 아닌 영대로 구분된다. 이 글은 그 사례들 가운데 대(臺)와 마음, 그리고 대순진리회의 영대에 주목할 것이다. 물질 영대와 비물질 영대는 서로 통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지만, 대순진리회는 신봉(神封)이라고 하는 교설로써 물질 영대[臺]와 비물질 영대 마음을 동시에 활용한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 종교사에서 하나의 대상이 같은 구조와 맥락 속에서 물질 영역과 비물질 영역에 동시에 나타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서두가 길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논의를 위한 기초를 쌓는 과정에서 언급했던 물질종교의 여러 접근법 가운데 물질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연구 관점, 그리고 피터 J. 브래운라인이 제시했던 다섯 가지 요구 가운데 ①·②·③을 활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Ⅱ. 물질 영대
인류 역사에 처음 모습을 보인 영대란 것은 물질 형태였다. 그 최초 기록은 『시경(詩經)』의 「대아(大雅)·문왕지습(文王之什)」에 전한다.
經始靈臺 영대를 짓기 시작하여
經之營之 그것을 재고 다지니
庶民攻之 서민들이 거들어주어
不日成之 며칠 안 되어 다 이루어졌네.
經始勿亟 지을 때 서두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庶民子來 서민들은 어버이 돕는 자식처럼 모여들었다네.
王在靈囿 주문왕이 영유(靈囿: 영대 아래에 동물을 기르는 동산)에 오르니
麀鹿攸伏 암수 사슴이 이에 엎드리네.
麀鹿濯濯 암수 사슴은 포동포동 윤기 흐르고
白鳥翯翯 백조는 깨끗하고 하얗도다
王在靈沼 주문왕이 영소(靈沼: 영대 앞의 연못)23)에 머무르니
於牣魚躍 아아, 물고기가 한가득 뛰어노네.
虡業維樅 종과 경을 매다는 틀에
賁鼓維鏞 큰 북과 큰 종이 걸려 있네.
於論鼓鍾 아아, 질서 있게 종을 쳐서
於樂辟廱 아아, 벽옹(辟廱: 임금이 공부하는 학궁)을 즐겁게 하네.
於論鼓鍾 아아, 질서 있게 종을 쳐서
於樂辟廱 아아, 벽옹을 즐겁게 하네.
鼉鼓逢逢 악어가죽 북을 둥둥 울리며
矇瞍奏公 앞 못 보는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한다네.24)
‘영대(靈臺)’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노랫말은 주나라의 문왕이 대(臺)를 세우기 위해 설계하고 터를 닦을 때 서민들이 자발적으로 몰려와 도왔던 덕분에 며칠 만에 건설할 수 있었음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니까 영대는 주문왕이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세운 건축물[臺]로서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주문왕 이전에도 영대가 있었다는 논란이 있다. 그 하나가 18세기 말 조선의 기록에 보인다. 『시경강의(詩經講義)』에 의하면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 1752~1800)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전한서(前漢書)』의 ‘제음군(濟陰郡) 성양현(成陽縣)에 요임금의 영대가 있었다’는 기록, 그리고 『유씨외기(劉氏外記)』의 ‘황제헌원이 영대를 설치하고 오관(五官)25)을 세워 오사(五事)26)를 질서 있게 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영대는 주문왕이 아니라 황제헌원이 처음 세운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전한서』와 『유씨외기』의 기록이 오경에 없어 근거가 없고, 그 기록의 권위도 오경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황제헌원이나 요임금 시대에도 대는 있었으나 ‘영대라는 이름’만큼은 주문왕 때 처음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27) 그의 말과 같이, 유교 경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리고 『전한서』와 『유씨외기』보다 더 오래된 『시경』을 근거로 한다면 영대는 주문왕이 최초로 만든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문왕 영대가 있었다고 알려진 장소는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중앙에서 약 150㎞ 직선거리의 간쑤성(甘肅省) 핑량시(平凉市) 링타이현(靈臺縣) 고영대유지(古靈臺遺址), 그리고 시안시 중앙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22㎞ 직선거리의 서주문왕영대유지(西周文王靈臺遺址) 두 곳이다(<그림 2>). 이 두 영대 가운데 어느 것이 주문왕 최초 영대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영대제천’ 설화를 가진 링타이현 고영대가 가장 먼저 지어졌고, 그다음에 시안의 서주문왕영대가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간쑤성의 고영대는 링타이현 중심가에 위치한다.28) 이 영대는 고대 밀수국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서, 주문왕이 천제를 지내고 (자신이 정복한 밀수국)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祭天慰民] 북향으로 흙을 다져 쌓았던 것이라고 한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쇠락하자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나 20세기 초에는 높이 2장 남짓(약 6.7m)에 바닥 너비 1장 5척(약 5m)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1928년 군대 막사를 지으면서 영대를 허물었다가, 1934년 원래의 터에 높이 28척(약 9.3m), 둘레 120척(약 40m)의 팔괘정(八卦亭)에 주문왕의 상(像)을 모심으로써 영대를 복원하였다. 1966년 문혁(文革)을 맞아서는 철저하게 파괴했다가, 1984년부터 재건을 시작하여 1985년에 북향의 영대 건축물[古靈臺]을 완공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림 3>).29)
시안의 서주문왕영대는 서주영대(西周靈臺)로도 불리며, 산시성(陕西省) 시안시 장안취(长安区) 링쟈씨앙(灵沼乡) 아디춘(阿底村) 남쪽에 위치한다.30) 문왕은 기산(岐山: 지금의 陕西省 宝鸡市 岐山县)에서 풍경(豊京: 지금의 시안시)31)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서주문왕영대는 바로 이 지역에 위치한다. 이 영대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 천문 관측, 오락 등 다양한 목적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32)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이 서주영대도 몇 번의 개축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되며,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편찬한 『장안지(長安志)』(1076)에 의하면 당나라 숙종(肅宗) 때인 758년에 사천대(司天臺)로 이름이 바뀌고 명장(名將)이었던 장수규(張守珪, 684~740)의 고택(故宅)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송민규는 그 위치를 ‘함양고적도(咸陽古迹圖)’에 그려두었다(<그림 4>). 그곳은 오늘날 시안시의 노가촌(鲁家村) 일대이고,33) 현재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장안현지(长安县志)』에 따르면 서주문왕영대가 장수규 고택으로 옮겨진 후에 원래의 자리에는 터만 남았는데, 당나라 때 그곳에 평등사(平等寺)라는 불교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한다.34) 평등사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현재는 사찰 내에 주문왕 영대 유적지를 조성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그림 5>). 평등사는 매년 정월 20일이 되면 주문왕을 기리는 예불 행사를 벌인다.
주문왕이 영대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천자들이 대를 세우는 이유는 첫째, 천문(天文) 즉 하늘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요사스러운 기[祲氣]가 국가에 재앙을 일으키거나, 상서로운 기가 길사(吉事)를 만드는 조짐을 읽기 위함이다.35) 고대 동아시아에서 천자(天子)는 천(天)을 대신하여 천하(天下)를 통치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었으므로, 천자에게는 천의(天意)를 파악하는 수단이 당연히 있어야 했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아낼 방법조차 없다면, 그것은 곧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는 통치자 자격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문 관측을 위한 대의 설립은 천자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천자가 대를 세우는 둘째 이유는 천체가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을 살펴 시변(時變)을 확인하고 율력(律曆: 樂律과 曆法)을 제정하기 위함이다.36) 전통사회에서 농사를 비롯한 각종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달력이 필수적이다. 전통 시대 달력을 만드는 작업은 고도의 축적된 기술력이 요구되었으므로 어느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은 국가가 유일했다. 천자가 통치하는 국가는 대를 세워 천체의 변화를 읽고 예측하였으며, 그 결과를 달력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배포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주문왕이 세웠던 영대도 전통적인 대와 같은 맥락에서 천자가 천의를 읽거나 역법을 제정하기 위해 천문을 관측하는 천문대인 것으로 이해되었다.37) 주문왕 사후 약 900년이 지나 등장한 한나라 영대가 천문 관측을 목적으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라 때는 영대가 두 차례 만들어졌는데, 첫째는 전한(前漢) 때 천문 관측을 위해 장안성(長安城) 남쪽 안문(安門) 동쪽에 세워진 천문대로서, 그 이름이 원래는 청대(淸臺)였으나 후에는 영대(靈臺)로 개칭되었다.38) 그 영대는 소실되었고 현재 유적도 남아 있지 않다. 둘째는 광무제(光武帝, 기원전 6~57)가 후한(後漢)을 일으키고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한 후 56년에 낙양에 천문대를 다시 세우면서, 그 이름을 영대라고 한 것이다. 광무제의 낙양 영대는 동한영대(東漢靈臺)로 불리며, 천자가 태일신과 오제에게 천제(天祭)를 올리고 정치를 행하는 건물인 명당(明堂), 천자의 학궁인 벽옹(辟雍)과 함께 삼옹(三雍) 혹은 삼궁(三宮)으로 인정되었다. 동한영대는 건축 후 250년 동안 태사령(太史令)의 감독하에 관측기구 지동의(地動儀)를 운용하는 천문대로 사용되었으나 서진(西晉) 말기에 전란을 겪어 소실되었다.39) 현재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 동쪽에는 그 유적지가 조성되어있다(<그림 6>).
전통적으로 대는 천자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천문 관측이 주목적이었다는 점, 전한 영대와 후한 영대의 용도도 천문 관측이었다는 점 때문에, 주문왕의 영대 역시 그런 맥락에서 천문대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중국 민간의 ‘영대제천(靈臺祭天)’ 전설에 의하면, 주문왕이 영대를 세웠던 ‘원래의’ 목적은 천문 관측이 아니라 천제를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앞서, 주문왕의 유적지가 두 곳 전해진다고 언급했는데, 영대제천의 설화가 전해지는 장소는 간쑤성 링타이현의 고영대유지다. 이 전승을 간략히 적어본다 : ‘주문왕이 영대를 건설할 당시 그는 천자가 아니었다. 당시의 천자는 상나라의 주왕(紂王)이었다. 상나라는 주왕의 폭정으로 제후들로부터 신임을 잃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주나라는 상나라 아래의 제후국 처지였다.40) 상나라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제후들의 반란을 부추겼다. 그 핵심은 서방 제후들의 리더였던 주문왕이었다. 그는 견융(犬戎)과 밀수(密须)를 차례로 토벌하였는데, 특히 밀수는 상나라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문왕이 그런 밀수를 꺾었다는 것은 그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한 일이었다. 주문왕은 밀수 정벌 후 귀국하면서, 밀수 지역인 형산(荆山) 기슭[지금의 靈臺縣]에 이르러 이곳에서 천자만이 지낼 수 있다는 천제를 자신이 직접 거행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주문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영대를 세우고 제단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이어서 귀복(龜卜)으로써 천제를 올릴 날짜를 잡고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천제에 참여하라고 통지했다. 주문왕이 제천 의례에 제후들을 참여시키겠다는 것은, 제후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해진 날짜에 제후들이 모여들자 주문왕은 영대에 설치된 제단에 희생(犧牲)과 각 제후에게 거두어들인 옥규(玉珪)41)들을 바치고 천제를 거행하면서, 포악하고 실덕(失德)한 주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천자가 되어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천제가 끝나자 주문왕은 영대에서 내려와 제후들에게 자신이 천자가 되라는 천명을 받았음을 선포하면서, 상나라를 멸하고 새로운 주인이 되라는 하늘의 뜻에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밀수처럼 패망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후들은 다시 영대에 올라 향을 꽂으며 하늘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맹세하고 상주혁명(商周革命)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다짐했다. 이로써 주문왕은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과 그렇지 않은 제후들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혁명의 의지를 대외에 널리 알리고 대업을 향한 본격적인 길에 나서게 된다.’42)
이러한 주문왕의 영대제천은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는 구전 전승의 설화다. 그러나 오히려 그 덕분에 기록 당사자의 가치 판단과 평가에서 벗어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민들의 삶 속에 생생히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영대제천이 전하는 주문왕 영대의 기능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제천으로써 천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주문왕의 대에 신령하다는 의미의 ‘영(靈)’이 붙은 이유를 제시하므로, 중요하게 주목되어야 한다. 일찍이 유향(劉向, B.C.E.79~B.C.E.8)은 주문왕이 사람들에게 인(仁)을 행하였고 인은 신령함을 의미하므로 그가 쌓은 대를 영대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었고,43) 정약용은 주문왕이 세운 대는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빠르게 다 지어졌기[速成] 때문에 신기하고 영묘하다는 뜻으로 대의 이름을 영대라고 붙이게 된 것이라고 해설했던 적이 있었다.44) 그러나 이들의 의견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게 들리지 않는다. 원래 ‘靈’은 춤을 추며 신이 내려오는 무(巫)를 일컫는 것으로서, ‘신(神)’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글자다. 춘추시대 ‘靈’은 <그림 7>의 1번 글자처럼 우(雨), 구(口), 기(示)가 결합한 형태인데, 口와 示는 제단에 놓인 술잔 또는 그릇을 나타낸다. 즉 靈은 원래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냄을 형상화한 문자다.46) 유향과 정약용의 설명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영대제천 설화는 주문왕의 건축물이 천제로써 천신과 소통하며 천명을 받드는 성스러운 의례 공간임을 말하기 때문에 ‘靈’의 대(臺)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링타이현의 고영대는 영대제천 전승을 직접적으로 전하고 있지만, 시안의 서주문왕영대에는 이런 전승이 없다. 그 대신, 서주문왕영대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제천(祭天)·천문 관측·오락 등 다양한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어왔다. 또한 링타이현 고영대는 주문왕이 밀수 정벌 직후 그 정복 지역에 세워진 건축물이고, 서주문왕영대는 서주의 임금이 직접 다스리던 도읍 지역 안에 들어선 건축물이다. 이 두 가지 사실로 판단하면, 주문왕은 밀수 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영대(링타이현의 고영대)를 처음 세워 천명을 받고자 하는 천제를 올리고, 그 후 귀국하여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영대(시안의 서주문왕영대)를 다시 세웠으며, 서주문왕영대에는 천제와 더불어 천문 관측 등 다양한 용도가 더 추가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Ⅲ. 비물질 영대
영대는 주문왕이 지은 건축 구조물[물질]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물질보다 비물질인 마음의 의미로 더 잘 알려졌다. 영대가 언제부터 마음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문헌으로만 보면, 기원전 3세기 무렵 전국시대 말에 편찬된 『장자(莊子)』가 그 최초의 기록이다.
(A) 공수(工倕: 요임금 시대의 기술자)는 손을 돌리면 그림쇠와 곱자를 씌운 듯 딱 들어맞았다. 손가락은 물건과 일체화되어 마음으로써 따짐이 없어서, 그러므로 그 영대(靈臺: 마음)가 하나여서 막힘이 없었다. 발을 잊어버림은 신발이 꼭 맞아서이고, 허리를 잊어버리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아서이다. 옳고 그름을 잊어버림은 마음이 맞아서이다. 안으로 변함이 없고 밖으로 좇음이 없음은 일의 부합함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알맞은 데에서 시작하여 늘 맞지 않음이 없음은 알맞음을 잊어버리는 경지의 알맞음이다.47)
(B) 배우는 자는 그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려 하고, 길을 가는 자는 그 갈 수 없는 곳을 가려 하며, 말하는 자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한다. 앎이 그 알 수 없는 곳에까지 다다른다면 앎에 도달할 수 있다. 만일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천균(千鈞: 만물 일체 경지)은 깨어지게 된다. 물건을 갖추어서 형체를 기르고, 사색하지 않는 지혜로 마음을 살리며, 공경으로써 상대에게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러했음에도 온갖 재난이 닥친다면, 그 일은 하늘에 달린 것이지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로써 어지러워질 수 있는 게 아니며, 영대(靈臺: 마음)의 안에 놓이는 것도 불가하다. 영대라는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나, 그 지키는 바를 알지 못하면 지킬 수 없는 것이다.48)
(A)는 기술자가 물건을 잘 만드는 이유를 몸[손]과 물건의 일체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일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영대[마음]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으로 본다. (B)는 구별과 대립을 극복하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그 극한의 경지까지 긍정하는 망아(忘我)의 경지를 말하는데, 이 경지에 다다른 안정된 마음은 영대로 설명된다. 이처럼 『장자』는 영대를 잡념이 허용되지 않는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때의 영대는 『장자』가 말하는 3개의 수행법, 즉 심재(心齋)·전일(專一)·좌망(坐忘)의 도달 목표로 이해할 수 있다. 심재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부정을 물리치는 것으로서, 재물이나 명예를 포함하는 외부 사물에 흔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상태에서 단정히 앉아 생각을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게 전일이며, 그로써 ‘주관 vs. 객관’, ‘주체 vs. 객체’, ‘옳음 vs. 그름’의 구분 따위를 잊어버리는 공부가 좌망이다. 이렇게 『장자』는 심재·전일·좌망으로써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정신을 모으면 천지와 일체를 이루고 도를 체험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49) 쓸데없는 생각과 같은 어지러움을 막아 지켜야 하는 순수한 마음 그 자체는 『장자』 수행의 핵심이자 도달해야 할 목표다. 이 마음을 『장자』는 영대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문헌상으로는, 마음을 의미하는 비물질 영대가 도교, 특히 『장자』 수행의 맥락에서 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자』의 수행은 후에 중국불교 선종(禪宗)과 유학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장자』 맥락의 비물질 영대 개념도 불교와 유학의 수행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그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유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는 43세 때 직접 쓴 경계문[敬齋箴]을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 상태를 단정히 할 것을 반성했는데, 그 마지막 글귀는 ‘먹[墨卿]으로 경계하는 글을 맡아 쓰게 하여, 감히 영대(靈臺)에 고하노라’였다.50) 이때 영대는 스스로 다잡아야 할 순수한 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사례는 도불(道佛) 관념이 혼융되어 나타나는 『서유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화과산 돌 원숭이에게 손오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근두운과 72종의 변화를 일으키는 지살수(地煞數) 술법까지 가르친 신선은 수보리조사(須菩提祖師)였는데, 그가 사는 장소는 영대방촌산(靈臺方寸山)의 사월삼성동(斜月三星洞)이었다. 영대방촌산의 ‘영대’는 건축물이 아니라 ‘마음’을 의미하는 글자다. ‘방촌(方寸)’도 마음을 의미하고, 사월삼성동의 ‘사월삼성(斜月三星)’도 마음을 의미한다. ‘사월(斜月)’은 갈고리 모양이어서 ‘心’의 구부러진 부분을 나타내고, ‘삼성(三星)’은 점 3개를 나타내니, ‘사월’과 ‘삼성’이 합쳐지면 ‘心’이 된다는 이유다. 그러니까 수보리조사가 살던 곳이면서, 손오공이 술법을 닦은 장소에 등장하는 영대·방촌·사월삼성은 모두 닦음의 대상인 마음을 뜻한다.51)
‘심(心)’은 심장 모양을 형상화한 문자이니, 마음은 심장과 떨어질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의미하는 영대도 심장과 연결될 것임은 당연하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영대혈(靈臺穴)이다. 허준(許浚, 1539~1615)의 『동의보감』에 의하면 영대혈은 제6등뼈[胸椎] 아래에 있다.53) 이 혈의 이름이 영대혈인 이유는 등에 있는 이 혈에 뜸을 떠 몸 앞쪽에 있는 심장 질환을 치료하기 때문이다.54) 그러니까 한의학에서 영대는 인체의 중요한 장기인 심장과 연동되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영대는 물질 심장과 관련되지만, 그 심장은 도교 내단 수행 특히 존사(存思)에서는 비물질적 성격도 지닌다. 이를 처음으로 설명한 도교 문헌이 『황정경(黃庭經)』이다. 『외경경(外景經)』과 『내경경(內景經)』55)을 묶은 『황정경』은 4세기 중엽에 그 모습이 처음 보이지만, 그 성립은 위(魏) 또는 후한 시대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6) 이 경전은 수행자가 시각적 명상[存思]으로써 자기의 신체 각 장기에 거주하는 체내신(體內神: 인체 내 선천의 원기를 신격화한 것)을 발견하고 이들이 빠져나가지 않게 잘 섬기며, 이로써 정기신(精氣神)을 모아 황정(黃庭)57)에 응집시키는 수련법을 설명한다. 이러한 『황정경』에서 영대는 다음과 같이 존사의 대상인 심장으로 설명된다.58)
(C) 영대(靈臺: 심장)는 하늘에 통하고 중야(中野: 인체의 복부)에 임해 있다. 사방 한 치 되는 중간에서 관(關: 關元, 단전)의 아래에 이르면, 옥방(玉房: 단전)의 가운데 있는 신의 문호다.59)
(D) (존사로 보았더니) 황정 안에 있는 인물[神]은 비단옷을 입고 있다. (그 옷에는) 자줏빛 화려한 치마에 구름 기운이 펼쳐있고 단청 푸른 나무와 비취색 신령한 가지가 있다. (얼굴의) 일곱 구멍(눈, 코, 귀, 입)을 옥으로 된 열쇠로 잠그고 두 문을 닫아, 무겁고 엄하게 빗장을 걸어 추기(樞機: 기가 쌓이는 곳)를 지킨다. 현묘한 샘인 유궐(幽闕: 腎臟)이 우뚝 높으며, 세 단전 가운데에는 정기가 미세하고, 교녀(嬌女: 耳의 神)가 잠잠하게 하늘의 빛을 가리고 있으나, 중당(重堂: 목구멍)이 환하여 팔위(八威: 인체 곳곳)를 밝힌다. 천정(天庭: 양미간)에서 지관(地關: 足)까지 도끼를 벌여 놓으니(기가 채워지므로 사악한 기가 침범하지 못하니), 영대(靈臺: 심장)는 반석처럼 단단하여 영원히 쇠하지 않는다.60)
(E) 영대(靈臺: 심장)의 기운이 가득하고, 황야(黃野: 脾臟)를 바라보면 세 치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방(심장과 비장)이 위와 아래에 있으며, 울퉁불퉁한 험로를 거친[間關] 영위(營衛: 몸속 영양분)는 높이 솟은 신장(腎臟)으로 간다. 동방(洞房: 머리)과 자극(紫極: 양미간 안쪽)은 신령스러운 문호이니, 이 사실은 옛날 태상대도군(太上大道君)이 나에게 알려준 것이라. 좌신(左神) 공자(公子: 간의 신)는 신묘한 말을 내뱉고, 그 오른쪽에 백원(白元: 폐의 신)이 나란하게 서 있으며, 명당(明堂: 뇌 속에 있는 아홉 개의 궁 가운데 하나) 금궤의 옥으로 된 방 사이에 상청진인(上淸眞人)이 지금 내 앞에 있다. 황색 치마의 자단(子丹: 비장) 기운이 왕성하니, 가령 (그 기운이) 어찌하여 양 눈썹 끝자락에 있는가 하고 물어볼지라. 안으로 일월(日月: 두 개의 눈)을 끼고 별들이 줄지어 있으니, 칠요(七曜: 얼굴의 일곱 구멍)와 구원(九元: 인체의 아홉 구멍)은 뛰어난 생문(生門)이다.61)
은유적 표현으로 가득하지만, 위 인용문들은 인체 내부를 향한 시각적 명상[存思]으로써 영대(심장) 등 여러 장기에 깃든 체내신의 존재를 하나씩 일일이 확인하며 정기신을 응집시키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C)는 하늘의 기운이 심장과 통하여 단전에 쌓이는 모습을 표현했다. (D)는 황정에 기가 가득하면 온몸이 밝아지고 신장과 심장이 영원해지며 사악한 기가 침범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 것이고, (E)는 심장·신장·간장·폐장·비장·양미(兩眉)에 기가 모이는 상황, 그리고 뇌와 머리의 일곱 구멍 및 인체의 아홉 구멍이 생기(生氣)를 품은 곳이자 외부와 교류하는 통로임을 설명한 것이다.
『황정경』은 존사의 대상이 되는 인체의 장기를 설명할 때 심장을 영대라고도 표현했다. 심장인 영대는 물질이다. 그러나 내단 수행에서 영대는 신체 곳곳에 혈액을 공급하는 장기(臟器)에서 그치지 않고, 체내신이 거주하며 기가 쌓이는 관념적인 장소로 이해되었다. 존사 대상인 심장은 물질을 전제하지만, 수행자가 그리는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황정경』은 심장 영대를 물질과 비물질 영역에서 교차하면서 실체적인 면보다는 관념적인 면을 더 부각하여 표현했다.
관념적 심장인 비물질 영대는 신선으로 화하기 위한 내단 수련의 길목에서 마주쳐야만 했었던 대상이었다. 내단 수련 전통에서 『황정경』은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내단 수련자들이 『황정경』을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전통이었고, 조선 중기의 정북창(鄭北窓, 1506~1549)도 내단 수련 서적인 『용호비결(龍虎秘決)』을 저술할 때 폐기(閉炁)와 주천화후(周天火候)의 요령을 논하면서 『황정경』을 인용했을 정도다.62) 따라서 『황정경』에 등장하는 영대, 즉 영대는 신선이 되기 위해 금단을 이루는 수련의 맥락에서 체내신이 거주하고 정기신이 쌓이는 관념적 심장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Ⅳ. 대순진리회의 영대
대순진리회에서 영대는 물질이다. 물질 영대는 신전(神殿)으로서 주문왕의 건축물 영대와 관련이 있다. 한편 대순진리회에서 영대는 신이 모셔진 신전이면서도, 비물질인 마음과도 연결된다. ‘신을 봉한다, 또는 신을 모신다[封神]’는 개념이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하나씩 살펴본다.
대순진리회는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을 최고신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 이하 줄여서 구천상제로 표기)로 신앙한다. 증산이 상생(相生)의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고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하는 종교적 행위로써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 해원(解冤)과 보은(報恩)의 양대 원리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도화낙원(道化樂園)이 열리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천상제를 비롯한 여러 신들은 하나의 신전에 같이 봉안되어 모셔지는데, 그 신전은 영대(靈臺)로 불린다.
증산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영대 건축물이 없었다. 영대를 만든 장본인은 증산으로부터 종통 계승의 계시를 받은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이었다. 그는 1924년 3월부터 1926년 4월 사이에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도장을 건립했는데,63) 그 기간인 1925년에 영대를 처음 만들었다.64) 당시의 영대는 돌계단 위에 지어졌으며, 외부에서는 1층 정면 5칸·측면 3칸, 2층 정면 3칸·측면 1칸이었고, 실내로 들어가면 3층으로 보였다고 한다.65)
영대가 처음 섰을 때 한국은 일제의 통치를 겪던 시기였고, 대순진리회(당시 이름은 무극도였음)는 감시와 억압에 시달렸다. 1936년 유사종교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그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1941년 무렵 무극도는 강제 해산당하고, 도장 건물은 압수되어 1943년의 경매 처분으로 뜯기게 된다.67) 이로써 대순진리회 최초의 영대 건물은 건립된 지 18년 만에 파괴되어버렸다.
해방을 맞은 후 정산은 1948년 음력 9월에 종교활동을 재개하면서 도의 본부를 다시 설치했다. 그 장소는 영대가 처음으로 섰던 전북 정읍이 아니라 부산의 보수동(寶水洞)이었다. 정산은 이곳에 두 번째로 영대를 모셨고, 1950년에는 종단의 이름을 태극도로 개칭했다. 보수동 도장[寶水道庭]과 인근 지역은 협소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수도인들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1956년에 보수도정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2km 떨어진 감천(甘川)으로 이전하여 도인들 거주 마을과 도장을 새로 건립하였고 1957년에는 세 번째로 영대를 세웠다.68)
1958년 정산은 세상을 떠나면서 우당(牛堂) 박한경(朴漢慶, 1917~ 1996)에게 종통을 계승하게 하고 도의 전반을 이끌도록 유명(遺命)을 내렸다. 우당은 10년 동안 감천의 도장에서 도인들을 이끌다 1968년 그곳을 떠나 1969년 서울 중곡동에 도장 본부를 다시 짓고 도의 조직을 전면 개편하였다. 그리고 이때 영대를 다시 세우면서69) 종단의 이름을 대순진리회로 바꾸었다. 교세가 점차 커지자 우당은 경기도 여주(1986년), 제주도 노형동(1989년), 경기도 포천(1992년), 강원도 고성(1995년)에 도장과 영대를 잇달아 더 건립하였다. 현재 대순진리회는 이 전국 5곳에 도장과 영대를 운용하고 있다.
대순진리회 영대 안에는 구천상제를 비롯하여 총 15개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1925년 영대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15신위가 모셔졌던 것은 아니다. 정산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위를 추가해나갔는데, 1957년 무렵에는 15신위의 설치가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영대 안의 신위 구성은 <그림 10>과 같다. 앞서 『시경』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주문왕이 지은 영대 앞에는 연못[靈沼]과 동물이 노니는 곳[靈囿]이 있었는데, 대순진리회의 여주본부도장 영대 앞에도 이런 시설물들이 있어 흥미롭다.70)
증산은 생전에 그의 화천 이후 지어질 신전의 이름을 미리 지어두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증산이 남긴 ‘운은 영대가 사해에 정박하여 체를 얻고 화함을 얻고 밝음을 얻는 것이라(運, 靈臺四海泊, 得體, 得化, 得明)’는 글귀 때문이다.72) 사해(四海)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세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고,73) 정박[泊]은 배가 닻을 내려 자리를 고정한다는 말인데, ‘체를 얻음[得體]’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영대는 물질도 비물질도 될 수 있다.
득체의 체를 물질로 보면, 증산의 이 글은 ‘운은 영대 건축물이 세상에 출현하여 우뚝 설 것이며, 그 영대는 형체[體]뿐만 아니라 조화(造化)와 밝음[明]도 가진 것이다’로 파악된다. 득체의 체를 비물질로 보면,74) 이 글은 ‘운은 마음 영대가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서 자리를 잡으니, 그 마음은 현실의 깨침[體得]과 조화(造化)와 밝음[明]을 가진 것이다’로 이해가 가능하다. 이렇게 증산이 말한 영대는 물질로도 비물질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물질적 측면에서 영대는 신전이 된다고 하는 것이 대순진리회의 주장이다. 우당은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75)는 증산의 발언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신전의 이름이 영대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F) 복희씨는 신명을 천상의 옥경대, 하늘에 봉했고, 문왕은 영대를 둬서 천지신명을 모셨다가 땅에다 봉했고, 이번에는 천지신명을 모신 데가 우리 도장이고 사람에게 봉한다.76)
(G) 지금까지는 만상의 모든 이치, 기운인 신이 하늘·땅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사람에게 있다. 복희 때는 신봉어천(神封於天), 문왕 때는 신봉어지(神封於地), 지금은 신봉어인(神封於人)이 된다. 시·분·초까지 모든 자리를 사람이 맡고 사람에게 신이 봉해지는 것이다.77)
(H) 옛날에는 신봉어천(神封於天)으로 모든 권한을 하늘이 맡아서 행사하여 천존시대였고, 현재는 신봉어지(神封於地)로 땅이 맡아서 행사하니 지존시대다. 지금은 지존시대가 다 끝났다고는 하나 이사 갈 때 방위 보고 묘자리를 보는 등, 아직도 땅에 의존하는 것은 아직도 땅에서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신봉어인(神封於人)으로 이 권한을 사람이 맡아서 하게 된다.78)
이에 의하면, 천존(天尊)이란 신이 하늘 영역에 봉해지는 신봉어천(神封於天)으로써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신의 권위와 모든 이치·기운이 하늘에 있게 되어 하늘이 존귀해진다는 뜻이며, 이것을 밝힌 장본인은 약 4,800년 전의 복희씨(伏羲氏)였다. 지존(地尊)이란 신이 땅 영역에 봉해지는 신봉어지(神封於地)로써 그 권위·이치·기운이 땅에 있게 되어 땅이 존귀해진다는 뜻이며, 주문왕의 영대는 천지신명을 모신 곳으로서 신봉어지로 이어진 장소였다. 인존(人尊)이란 신이 인간에게 봉해지는 신봉어인(神封於人)으로써 그 권위·이치·기운을 인간이 가져 인간이 존귀해지게 된다는 뜻이다. 아직은 인존시대가 아니라 지존시대이므로 인간에게 봉해질 신들은 여전히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증산은 천지공사로써 그 신들을 지상의 한 장소에 모이도록 설계했다. 그 설계에 따라 실제로 신들을 모아가며 신전을 세우고 그 이름을 영대로 정한 인물은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정산이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증산이 ‘영대 건축물이 세상에 출현하여 우뚝 서는 운이 올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의 화천 이후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해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지상의 영대 건축물에 모인 천지신명들은 후에 인간에게 옮겨가게 된다는 것이 우당의 설명이다.
(F)에서 우당은 주문왕이 영대를 세워 신봉어지를 했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강태공(姜太公, ?~B.C.E.1015)의 봉신대(封神臺)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세간에 봉신(封神)이 이루어진 장소로 알려진 곳은 주문왕 영대가 아니라 강태공의 봉신대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은 『봉신연의(封神演義)』다. 『봉신연의』는 명대(明代)의 신마소설(神魔小說)로서 창작된 이야기지만, ‘무왕벌주평화(武王伐紂平話)’라는 민간 설화를 각색한 것인데다가, 역사를 풀어서 쓴 ‘연의(演義)’ 형식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허구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에 따르면 상(商)의 주왕(紂王)이 여신 여와(女媧)를 희롱하자, 분노한 여와는 여우 요괴를 달기(妲己)의 몸에 깃들게 하고 주왕을 부추겨 온갖 악정을 자행하게 만든다. 이것은 상나라의 600년 운수가 다했으므로 극심한 혼란이 일고, 주나라가 그것을 평정함으로써 새로운 천자국으로 등극하는 천운(天運)에 따른 일이기도 했다. 달기의 꾀임에 따라 강직한 신하들을 죽이고 정사를 돌보지 않던 주왕은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희창(姬昌: 주문왕)이 덕이 높아 인망을 얻는다는 이유로 그를 누명 씌워 유리(羑里)에 7년 동안 가두었다. 갖은 고초 끝에 유리에서 풀려난 주문왕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고국 주나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직후 기후와 길흉의 징조를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영대를 짓도록 명령했다.79) 영대가 조성되고 주문왕은 강태공을 등용하게 되었고, 강태공은 민심을 잃은 상나라의 주왕을 타도하는 데 나선다. 연로한 주문왕이 숭후호를 토벌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발(發) 무왕(武王, ?~B.C.E.1043)이 주문왕의 뒤를 잇고 강태공과 함께 상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강태공은 스승 원시천존의 명을 받아 봉신대를 건설하였다. 고된 전투 끝에 강태공은 드디어 대업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략 400명 정도이고 전투에서 희생된 숫자는 365명이었다. 이 365명의 혼백은 죽음을 맞이하는 족족 봉신대로 모여들었고, 강태공은 원시천존의 명에 따라 이들에게 적당한 지위를 내리고 각 지역의 신들로 봉한다는 것이 대략의 줄거리이다.80)
『봉신연의』에서 강태공이 봉신대를 지은 시기는 주문왕이 사망한 후였고, 주문왕은 강태공의 봉신에서 어떤 역할이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처럼 『봉신연의』는 신들을 봉한 장본인과 장소가 주문왕·영대가 아니라 강태공·봉신대라고 말한다. 『봉신연의』에서 신봉어지의 장소는 강태공의 봉신대라는 뜻이다.
대순진리회가 말하는 삼천여 년 전의 신봉어지 장소는 강태공 봉신대가 아니라 주문왕 영대다. 앞선 우당의 설명 (F)에서 ‘신봉어지가 문왕 때 있었다’고 한 것이나, ‘문왕은 영대를 둬서 천지신명을 모셨다가 땅에다 봉했다’는 것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당의 이 설명은 주문왕이 천지신명을 영대에 모셔 제천했다는[靈臺祭天] 중국 민간의 전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소설 『봉신연의』가 봉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는 있으나, 그보다는 주문왕이 영대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천하고 그 천지신명을 땅에 모셨다는 전설이 대순진리회의 신봉어지 관념과 통한다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관점에서 보면, 주문왕 사후 강태공이 봉신대를 지어 전투에서 죽은 자들을 신으로 봉했다는 『봉신연의』의 이야기는, 주문왕이 봉신했었던 사실을 차용하여 전쟁터에서의 참혹한 죽음을 위로하려는 민중(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로 생각될 수 있다.
대순진리회에서 영대는 물질인 신전을 말한다. 신전의 이름은 주문왕이 천제를 올렸던 영대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영대제천의 설화를 간직한 주문왕 영대는 제단을 갖추었으니 신(혹은 신들)을 모신 곳이 분명하고, 대순진리회 영대도 신전이니 신을 모셨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러나 이 두 곳에서 모셔진 신(신들)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대순진리회 영대에 모셔진 15신위의 체계는 대순진리회에서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주문왕 시대에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81)
앞 절에서 언급했듯이 ‘영대가 사해에 정박함[四海泊]’이라는 증산의 글귀는 마음 영대가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라는 해석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증산에게 있어서 영대는 비물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순진리회 관련 문헌들에는 영대를 물질-신전이 아닌 비물질-마음으로 수록한 사례는 없다. 이 글은 직접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대순진리회가 마음을 신과 연관하여 본다는 교설은 영대를 비물질-마음으로 보게 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본다.
봉신[신을 봉함, 신을 모심] 장소는 물질 신전인 영대였으나, (F)·(G)·(H)에서 보듯이 이후에는 봉신 장소가 인간이 되는데, 증산은 바로 그런 일이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마음이란 것은 귀신의 추기(樞機: 지도리)요, 문호요, 도로이다.
추기를 개폐하여 문호를 출입하며 도로를 왕래하는 신은
선한 경우도 있고 악한 경우도 있으니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고쳐야 한다.
내 마음의 추기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보다도 더 크다.82)
증산의 말에 의하면, 귀신은 인간의 마음을 통해 드나든다. 귀신은 전통 의학에서 말하는 내재적인 신이 아니라 외재적 신명이다.83) 인간의 마음과 신명은 수행의 차원에서 연결된다는 것이 증산의 주장이다. 신명은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와 인간과 하나가 된다. 대순진리회는 이것을 신인조화(神人調化)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84)고 했던 증산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도인은 각기 마음을 닦고 수행한 정도에 따라 그에 맞는 신이 마음을 통해 응하여 그 수도인을 지키고 임무를 돕는다고 본다. 이것이 인간에게 신이 봉해지는 신봉어인으로서 인존의 실현이며,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종교적 목표인 도통(道通)이라고 한다.85)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는 신봉어천 시대는 지나갔고, 지금은 신봉어지 시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곧 신봉어인의 시대가 열린다고 본다. 신봉어지의 장소는 물질인 신전 영대다. 신봉어인의 장소는 인간 그 자체이고,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오는 통로인 인간의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봉신 장소가 신전(물질 영대)에서 마음으로 옮겨진다는 사실, 그리고 대순진리회 문헌에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동아시아 전통에서 영대는 마음을 줄곧 의미해왔다는 사실을 겹쳐보면, 대순진리회 세계관에서 영대는 봉신을 기준으로 물질[신전]과 비물질[마음]로 나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증산은 그의 유일한 기록물 『현무경(玄武經)』에서 영대가 비물질인 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현무경』 18면에서 증산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도형을 그리고, 그 위에 반서체(反書體)로 ‘심령신대(心靈神臺)’라는 문구를 썼다.86)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심령(心靈)이 인간의 마음[心]-정신[靈]을,87) 신대(神臺)가 신전(神殿)을 각각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다. 이때는 인간의 마음-정신-신전(물질 영대)을 나란하게 배열하였으므로, 마음-정신-물질 영대는 같은 맥락 위에 구성될 수 있다.
둘째는 증산이 이 문구를 좌우 대칭의 반서체로 썼다는 점에서 특별한 방식의 읽기를 의도했다고 보고, 심령신대를 심신(心神)과 영대로 분리해서 해석하는 관점이다. 이때도 인간의 마음-신명-영대는 나란하게 배열된 덕분에 같은 맥락 위에서 작동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심령신대’라는 문구는 인간의 심령(마음과 정신: 비물질 영대)-신명-신명이 거주하는 신전(물질 영대)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대순진리회는 신전의 물질 영대는 신봉어지로써, 수행의 대상인 마음의 비물질 영대는 신봉어인으로써 해명하고 있다. 대순진리회 세계에서 봉신(封神)은 영대가 물질이 되거나 비물질이 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주문왕의 물질 영대와 수행의 대상인 비물질 영대는 대순진리회에서 신봉이라는 개념으로써 엮이고 있다. 그리고 신전인 물질 영대와 마음인 비물질 영대는 ‘수행’이라고 하는 맥락에서 연결된다. 수행으로 만들어지는 마음의 크기나 성질에 따라 신전 영대에 모셔진 신들이 자기에게 어울리는 마음 영대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Ⅴ. 닫는 글
원래 동아시아에서 영대는 주문왕이 건립한 건축물이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영대는 수행의 목표이자 대상인 마음 영대, 존사에서 나타나는 관념적 심장으로 그 의미가 변모되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영대는 물질이기도 했고, 비물질이기도 했다. 그 두 의미는 각각의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뿐, 서로 연결되었던 적은 없었다. 한국 근대에 출현한 대순진리회는 봉신(封神)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 둘을 하나로 묶었다. 그러니까 천지신명을 모시고 제천을 했던 주문왕의 영대를 신봉어지의 장소로 설명하고 자신의 신전 이름으로 활용했으며, 수행의 정도에 따라 그에 맞는 신명이 수행자의 마음을 통해 응한다는 논리를 세워 인간의 마음 영대를 신봉어인의 장소로 규정했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요소들, 즉 주문왕의 건축물 영대와 『장자』·『황정경』 등에서 보이는 마음 영대를 봉신이라는 일관된 논리로 묶어내면서 교리 체계 안에 구축하는 이 모습은, 과거의 전통 개념들을 재창조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의 표현을 빌려서, 대순진리회의 영대는 물질 영대와 비물질 영대를 가로지르는 ‘발명된 영대(invented Yeongdae)’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종교사에서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의 논리 구조 속에서 연동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에서 발견되는 이 사례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종교의 물질 혹은 물질과 연동되는 스토리들을 발굴하고 그 역사와 연대기, 문화 경관을 추적하며, 나아가 여기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한국종교 물질의 물질성까지 더 드러내는 작업은, 이 글 앞에 놓인 과제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