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문제의식의 실타래
인간은 자연의 무한한 벽 속에 삶의 현실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삶과 죽음의 원초적 굴레에 얽매이면서 명운의 의식이 생겨났다. 명운에는 삶의 불가항력성과 예측불가능성이 양립하고 있다. 이 양립가능성 속에 인간은 종교, 과학, 철학과 같은 인문적 영역을 개척하고 확보해갔다. 종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고 과학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철학은 종교의 교리나 과학의 지식 속에 주체적 사고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이러한 종교, 과학, 철학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 삶의 총체적 양식이 형성되고 문화의 현상으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문화의 총체적 영역과 관련하여 본고에서는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 대순사상의 강령에 대한 재해석과 그에 따른 확장적 적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 방법론 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적 담론이다. 대순사상은 신종교 중의 하나로서, 조선의 근대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의식 하에 등장하였다. 당시에 민생의 고초, 민중의 불만, 민권의 불평등 등을 제대로 인식하고 올바로 대처할 사상적 지주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서 신종교가 등장하였다. 신종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갈구하였다. 이러한 기대와 희망에서 대순사상도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시대적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데에 대순사상의 문화적 담론이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 대순사상의 강령에 대한 재해석과 그에 따른 확장적 적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대순사상은 조선사회가 내우외환 속에 근대화되는 과정과 맞물려있다. 조선사회는 근대화의 시대적 전환 속에 민족적 전통을 중건(重建)해야 하는 시대적 과업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민족생존이나 반봉건주의의 기치 하에 민생, 민중, 민권의 근대의식이 고양되면서 계도나 교화를 통해 조선사회의 총체적 삶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대순사상에서는 선천(先天)시대에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인간의 적나라한 삶을 진단하고 후천(後天)시대를 개벽(開闢, 변혁)하기 위해 상생(相生)의 차원에서 해원(解冤)의 처방을 내리고 보은(報恩)의 치유를 수행한다. 문화생태주의적 차원에서 보자면, 대순사상은 선천의 현실적 인식 속에 후천의 개벽을 통해 존재와 사유, 존재와 가치, 사실과 가치 등의 구분을 넘어서는 탈경계성의 가치지향적 차원을 추구한다. 그것은 조선의 근대사회가 직면한 민생, 민중 및 민권의 가장 절실한 현실적 문제의식 하에 등장하였으며 이를 해결할 사상적 지주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민생의 해결, 민중의 불만 및 민권의 불평등의 시대적 요청에서 신종교가 등장하였다. 대순사상도 이러한 시대적 문제를 극복하려는 기대와 희망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이해하는 데에 문화적 담론이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대순사상의 강령도 조선사회의 총체적 삶 전반에 관한 문화적 담론에서 접근될 수 있다. 대순사상은 전통성과 근대성의 대립, 모순 및 충돌을 실감하고 민족의 공동체적 의식과 근대화의 주체적 의식 속에 사회적 정서의 공감을 통해 공생과 화합의 유대감을 결성하였다. 대순사상의 문화적 담론은 을 통해 대순사상이 떠맡아야 했던 인간의 존재와 가치의 근대적 과제나 과업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대순사상의 조감도에서 민족생존이나 반봉건주의를 위한 계도나 교화의 등고선을 찾아가면서 조선의 문화적 공간을 조망하고 그 문화생태주의적 좌표를 알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문화생태주의란 문화의 심층적 바탕에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관계가 깔려있다는 전제 하에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을 인문학적으로 특화한 사조를 가리킨다. 생태주의적 좌표는 순환사관(循環史觀)과 같은 역사주의적 지점과 달리 민생, 민중 및 민권의 동일선상에서 공감, 공생, 화합 등의 열린 공간을 제시한다.
문화생태주의는 세계를 인식하는 패러다임으로서 형식주의, 기계주의, 유기주의 등과는 차별화된다. 문화란 사회 전반에 걸쳐 구성원들이 일정한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 새롭게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문화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전체적 혹은 총체적 흐름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구성적 요소들도 고립되거나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하는 역사성의 맥락을 지닌다. 구성적 요소들 자체가 전체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 총체적 흐름이 바로 문화생태주의의 기조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순사상은 조선의 근대사회에서 민생, 민중 및 민권의 입체적 기반 위에 문화의 총체적인 조감도를 그려내고 있다.
기존의 연구의 흐름을 보자면, 대순사상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종교의 공통적 특징으로서 종교적 구원관(救援觀), 형이상학적 우주관(宇宙觀), 현세적인 인간관(人間觀) 등의 맥락에서 논의되어왔다. 특히 대순사상을 지상낙원설, 구세주설, 종말설 등과 연관시키기도 하고 역사의 맥락에서 결정론적 순환사관(循環史觀)이나 선택론적 시운관(時運觀)으로 조명하기도 하였다.1) 이러한 연구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순사상에서 조선사회의 근대성과 관련한 문화적 차원을 고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본고에서는 대순사상을 거시적 차원에서 조명하려는 취지에서 대순사상의 문화적 담론과 그 통로로서 문화생태주의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문화의식과 문화생태주의의 조감도
일반적으로 문화는 특정의 지역이나 시대를 반영한 삶의 총체적 결집체이다. 그것은 고유한 역사와 특수한 지리에 관한 해석력과 수용력을 통해 집약적으로 축적되고 자리잡아왔다. 인간의 삶은 절박한 현재에서 지나간 과거를 보듬고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가는 역동적 과정이다. 이 역동적 과정이 바로 삶의 총체적 양식, 즉 문화를 창출하고 발전시킨다. 문화는 삶의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를 포용하는 시공간의 입체적 과정 속에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역사적 전통과 시대적 정신이 한데 어우러지는 과정을 통해 주체와 객체, 인식과 의식 등의 통합적 지평에서 창신(創新)의 생명력을 끊임없이 발휘한다.
인간은 삶의 굴곡진 여정(旅程)에서 자연의 자생적 생명력을 직관적으로 터득하고 그 유기적 연결망을 체득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자연계의 창발적(emergent) 질서 속에 주체가 그 주위의 객체와의 관계 속에 만들어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연계에 생태적으로 살아가는 생물학적인 존재이지만 개인의 자각의식이나 공동체의 집단의식을 통해 삶의 목적, 신념, 가치 등을 지향하는 문화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은 자연계의 유기적 질서에 맞추어가면서 공동체의 집단의식이 형성되며 문화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문화는 삶의 여정에서 현재성의 생명력을 지닌다. 과거의 문화는 현재의 삶에 누적되고 미래의 문화는 현재의 삶이 연속된 결과이다. 이처럼 생명력을 지녀야 성숙한 문화가 이루어지며 모두 현대 혹은 당대의 문화인 셈이다. 문화는 시대마다 복잡다단한 상황이나 여건의 가능성으로 열려있고 그 다양성과 다원성의 흐름 속에 인간은 삶의 방향을 조정하며 그 내용을 채워간다. 따라서 문화는 삶의 방식에 특화된 정체성(正體性)을 지닌다. 그 속에서 문화의 원형(archetype)이 형성되고 고유한 정신적 기질(ethos)이 발휘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의 차원에서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지구촌의세계와 맞물려있는 관점이 생태주의(ecologism)2)이다. 생태주의의 사조는 자연의 생태계와 그 유기적 흐름에 관한 관점에 기초하여 그 속에서 지속가능성의 원리를 모색한 것이다. 이는 생명의 연결망 속에 삼라만상의 스펙트럼을 생명력의 통일적 질서로 의식화한 결과이다. 생태주의의 사조는 자연계의 순환적 과정에서 인간의 삶과 성향, 사회의 구조나 조직, 문화의 현상이나 활동 등을 조망하고 체득한 관점이다. 이러한 생태주의를 문화현상 전반에 적용한 사조로서, 특히 문화의 차원에서 다양한 문화현상들의 유기적 관계와 그 콘텐츠의 흐름을 중시하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을 문화생태주의(cultural ecologism)라고 부를 수 있다. 문화생태주의는 생태학의 특징을 문화의 통합적 차원에서 특화한 산물이다. 문화의 심층적 바탕에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관계가 깔려있다는 전제 하에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을 인문학적으로 특화한 사조이다.3)
문화생태주의는 문화에 접근하는 데에 문화의 성격이나 특징을 생태주의의 사회공학적 차원에서 투사해낸 다각도의 관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계의 자생적 생명력과 그 유기적 연관방식에 특정의 가치를 부여한 일종의 질서의식의 산물이다. 질서의식이란 인간이 주체적 의식을 갖고서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 흐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문화생태주의는 사물의 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특수한 관점도 아니며 사물의 배후를 조명하는 추상적인 관점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관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물의 양상을 바라다보는 일반적인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특정의 관점이 없는 열린 관점, 즉 보편적 관점이다.4)
문화생태주의는 인간 삶에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시의적절하게 만들어가는 최적의 탈경계적 관점을 특징으로 한다. 그 속에는 정서적 공감(empathy)의 유대감 속에 삶의 모순과 충돌을 극복하는 조정과 통합의 방식이 작동한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질 혹은 성향 혹은 감정이 각각 다를지라도 특정의 상황과 관련하여 서로 함께 교감을 통해 이해하고 배려하고 관용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식은 사회를 효율적이고도 통합적으로 이끌어가는 공감의 방법을 제공하며, 심지어 사회가 모순과 갈등 속에 상대적인 혐오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에도 소통과 화합의 구심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여정을 통해 현실적 한계와 이상적 경계 사이에서 생겨나는 일정한 거리감을 좁히고 일련의 해소와 화해의 단계를 거쳐 자아실현의 목표로 나아간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생태주의는 특정의 가치를 평가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창조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문화생태주의의 관점은 문화의 현상에서 조정과 통합의 과정을 거쳐 문화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확보하는 관점이다. 이는 본질과 현상, 주체와 객체 등과 같은 이분법적 경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통합적 경계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방법론적 성격을 지닌다. 문화의 복잡다단한 현상들에서 전체와 부분, 통합과 분화, 안정과 변화 등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의 전통과 계승에서 범하기 쉬운 ‘본질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극복할 수 있다. 문화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기존의 시각에서는 문화 전반에 대한 특정의 고정적 틀이나 혹은 필연적 형식을 설정하고 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 주변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관점이다. 이와 달리 문화생태주의에서는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등의 간격이나 차이를 벗어나는 탈경계의 통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문화생태주의는 문화를 끊임없이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삶의 실질적 내용을 충족하는 자아실현의 창조적 과정과 관련된다. 그것은 인간이 존재의 변화가능성 속에 살아가면서 인식의 실천가능성을 구현하고 가치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삶의 총체적인 지평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의 근대사회의 경우에 민생, 민중 및 민권의 입체적 차원을 문화 전반의 근대화에서 이해한다면 대순사상을 문화생태주의의 보편적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다. 조선사회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전통적 문화와 서구적 문화의 대립 속에 세속과 탈속, 정신과 물질 등의 충돌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대순사상의 등장은 이러한 근대화의 시대적 병폐를 치유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조선사회의 근대화 속에 대순사상의 문화생태주의적 조감도는 폐쇄되고 고립된 닫힌 체계도 아니며 또한 완전히 개방적인 열린 체계도 아니다. 이는 일정한 위계적 질서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서로 소통하고 통합하는 일종의 자생적 유기적 체계를 지닌다. 이 유기적 체계는 대립과 모순의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통일과 조화의 안정된 상태로 나아가고 대립과 통일, 모순과 조화 사이의 불확정적 상태로부터 통합의 확정적 상태로 나아가는 가치지향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 속에서 개별적 개인들은 계층들의 구조 속에 화해와 공생은 물론이고 대립과 충돌의 관계조차도 조화나 통합의 추세로 나아갈 수 있다.
Ⅲ. 조선의 근대사회와 대순사상의 나침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사회는 근대화의 시기를 겪었다. 쇄국과 개항, 신분체제와 사회질서의 붕괴, 청나라의 쇠퇴, 일본과 러시아의 부상, 서양열강의 침입, 서구문명의 유입 등처럼 동아시아의 정세와 흐름이 급변하는 근대화의 격동기였다.5) 신종교도 이러한 격동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에서 대순사상은 천지공사를 통해 지상선경의 경계를추구하였다. 그 경계에서 사회적 공감대와 문화적 유대감을 토대로 하는 또 하나의 현실적 공간이 창출된다. 즉 천지공사의 작업을 통해 후천의 개벽을 창출하여 지상선경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 세계는 속세에서 구현되는 현실적 공간이다. 대순사상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세상인 선천의 기존의 세계를 끝내고 천지인 삼계의 대권을 주관하여 선천의 굴레를 벗어나 신명(神明)과 화합한다.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써 후천의 세상을 열어 지상선경의 세계를 만들어 민생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공간에 접근하는 방법론적 발상 중의 하나로서 문화생태주의의 관점이 논의될 수 있다.
우선, 대순사상에서 세계를 보는 눈은 개벽의 용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개벽은 문명을 개척하는 데에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나아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문명의 발전사관에서 개벽의 관념은 선천과 후천의 연결고리 속에 선천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후천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취지를 지닌다.
강증산은 후천의 개벽이라는 또 다른 개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 민중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민생의 현실세계를 적극적으로 개조하여 궁극적으로 평등한 민권의 지상낙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천지공사로 대변되는 인간의식의 개조를 통해 현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열망을 피력한다.
천지의 개벽이란 시공간적 계기에 따라 세계의 실재를 경험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자연계에서 모든 존재는 감응의 방식을 통해 그 특유의 생명력을 유기적으로 발휘하며 일정한 통일적 질서를 형성한다. 생명은 모든 존재의 본질로서, 그 자생적 생명력을 통해 생명체의 활동을 진행한다.6) 여기에는 자연계의 유기적 연관체계를 특징으로 하는 생명력의 존재론적 차원이 있다.
또한 역으로 자연의 생태계에서 생명의 율동은 천지의 개벽을 통해 시공간적 계기로 인지된다. 그 계기는 인간이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 속에 자신의 유한한 생명력을 직관적으로 체험한 산물이다. 이러한 직관적 체험 속에 인간은 물리적 존재를 넘어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지개벽은 역사의 개막이나 문명의 개화처럼 특정의 시대를 전환하는 일종의 관문으로 상징화된다. 조선의 근대사회에서 그것은 후천의 개벽으로 표현되며 근대화의 시대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순사상의 개벽은 『주역』에서 말하는 개벽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주역』에서 천지의 개벽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와 대비하여 대순사상에서 후천의 개벽은 조선의 역사시대에서 근대적 변혁을 의미한다. 천지의 개벽이 혼돈으로부터 문명으로 개화하는 계기를 상징한다면 후천의 개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문명의 진보를 상징한다. 전자가 인간의 존재와 가치의 문제에 중점을 두는 반면에 후자는 역사의 사실과 가치의 문제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 양자는 모두 문명사회가 나아가야할 가치지향성을 지닌다. 그러나 전자의 초점이 존재론적 측면에서 문명화의 서막에 맞추어져있다면 후자의 초점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근대화의 개혁에 맞추어져 있다.
후천시대는 폐쇄되고 고립된 닫힌 체계도 아니고 완전히 개방적인 열린 체계도 아니다. 그것은 신분의 위계적 질서를 넘어 서로 소통하고 해소하고 화합하는 문화생태주의적 성격의 통합적 차원을 지닌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민생의 현실적 세계에서 민중의 시계를 통해 문화현상의 한계 속에 문화정신의 지평을 바라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끊임없이 지향하지만 결코 완결되거나 완성되지 않는 지상선경과 같은 지속가능한(sustainable) 문화생태주의적 경계가 있다. 이러한 경계는 민생의 채움, 가꿈 및 누림의 현세적 경향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계가 고전적 유토피아와 같은 관념론적인 이상적 경지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순사상은 근대화의 변화가능성 속에 민권의 실천가능성을 모색하고 민생의 계몽이나 민중의 계도의 실현가능성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대순사상은 조선의 근대사회를 위한 시대적 압박감과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서 개혁의 실천에서 현세적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다.7) 강증산은 서구의 진화론적 문명관에 대한 회의와 그 부정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에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神道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를 어기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 .8)
조선사회는 근대화의 미명하에 전통적인 정신적 관념과 서구적인 물질적 문물 사이에 대립과 충돌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있다. 그는 조선의 근대사회의 문제의식을 동도서기(東道西器)처럼 이분법적 모순과 충돌 속에 바라다보고 조선의 근대적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할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9)
천계탑은 상징적으로 西天의 고답적 영역을 가리킨다. 동아시아의 세계에서 서천은 동방과 대비되어 신성의 상징성이 강한 곳이다. 서천의 성격은 『주역』의 소축괘(小畜卦, )10)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그 괘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통하다. 먹구름이 있지만 비가 오지 않으니 나의 서쪽 근교에서 나온다.11)
여기에서는 구름과 비의 인과적 자연현상을 통해 인간의 의식의 차원을 표현한다. 서쪽의 근교란 중국의 서쪽 고원지방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의 신령스러운 곳을 가리킨다. 그 곳은 지상의 세계에서 上天과 가장 가까운 신성한 장소로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령과 소통하는 명당(明堂)의 성역으로 알려져 있다. 서천은 상제와 관련한 신성의 지역으로서, 만물의 생명력의 원천이나 문명의 원류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른바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함축된 내용은 유럽의 서구사회라기보다는 서천의 동경적 대상을 상징한다. 따라서 천계탑은 서천의 상징성을 통해 문명의 본원이나 원천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유추될 수 있다.
Ⅳ. 천지공사와 후천개벽의 좌표
대순사상에서 천지공사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진화하는 일련의 개벽의 과정이다. 지상선경의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천지공사의 설계에 따라 선천의 세상은 순차적으로 일정한 변화를 겪으면서 후천의 세상으로 열려진다. 여기에서 후천의 세상이 도래하는 일련의 과정은 현대적 의미에서 문화생태주의의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다.
대순사상의 세계관에서 상극에서 상생으로의 이행 과정12)은 선천의 후천의 관계를 설정하는 단서가 된다. 선천의 세계는 결원(結冤)의 억압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후천의 세계는 해원(解冤)의 해방으로 특징짓는다. 전자에서 후자로 전환하는 과정은 천지공사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지상선경의 경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여기에서 선천의 결원은 모든 재앙의 원천이므로 해원의 과정을 거쳐 포용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화합과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서는 선천과 후천, 상극과 상생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실의 양립가능성을 넘어서 선천에서 후천으로, 상극에서 상생으로 나아가는 지상선경의 지속가능한 경계를 바라다볼 수 있다. 이는 조선사회가 당면한 내우외환의 급박한 상황에 대한 현세주의적 강렬한 염원을 반영한다.
대순사상의 기조는 결정론적 순환사관이나 선택론적 시운관을 넘어서 문화생태주의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천지공사의 작업을 통해 후천의 개벽을 창출하여 지상선경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 세계는 속세에서 구현되는 현실적 공간이다. 여기에는 언어가 일치하는 한 집안과 같은 천하의 세계이며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지상선경은 이상적인 천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원(冤)이 해소되어 화해의 상태에 도달한, 천상이 지상에 구현된 세계, 즉 천상의 변형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찢겨진 조선후기 사회의 시대상이 투영되어 있다.
강증산이 직면했던 조선의 사회상에서 민생의 어려움이나 민중의 원한은 근대에 들어와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 속에 장기간 누적된 결과이다. 현재는 인간 삶이 진행되는 현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와 미래의 시간적 연속선상에 존재한다. 인간은 과거의 누적을 거쳐 현재의 진화를 진행하며 미래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이란 것은 마땅히 왕성히 천지에 있다. 반드시 인간에게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다. 그러므로 천지는 인간을 낳아 쓴다. 인간으로 태어나 천지가 인간을 쓰는 때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13)
천지공사가 인간의 삶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우주의 원리에 따른 천·지·인 삼계의 공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조선의 근대사회는 사회진화론의 흐름 속에 공존, 조화 및 화합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생태주의 차원을 지닌다. 여기에서 현실적 한계와 이상적 경계 사이에 간격이 좁혀지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아와 타자의 연속선상에 있는 노선, 즉 타자의 자아화와 자아의 타자화의 통합적 지평과 맞닿아 있다.
선천의 시대에는 상극과 같은 원한이 계속 쌓여 멸망 혹은 멸절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지만 후천의 시대가 다가오면 상생의 협력을 통해 공생, 번영 및 화평의 세상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다 해원(解冤)과 보은(報恩)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강증산은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리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 기록의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14)
그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원한이 맺힌 근본적인 원천을 찾아내어 해소할 수 있으며 이것이 혼돈의 상태를 넘어 문명사회로 발전하는 전환점으로 본다. 그 해소는 세상에 이미 기미 혹은 조짐의 낌새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의 순환적 흐름을 가로막으면 세상의 종말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선양하는 데에 그의 아들인 단주의 원한을 낳았던 역사적 사건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내용은 해원의 해소를 통해 공공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지상선경에 도달하는 대순사상의 가치론적 차원을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개벽의 본질적 내용을 설명한다.
상제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제재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지어다”라고 말씀하셨도다.15)
천지공사는 조선의 근대사회를 민생, 민중 및 민권의 올바른 궤도로 올려놓는 상징적 표현이다. 천지공사가 완수되어야 비로소 상생(相生)의 세상이 바로 지상선경을 성취할 수 있다. 인간은 사계절과 같은 천도(天道)의 천체적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의(仁義)와 같은 인도(人道)의 주체적 도덕성을 지녀야 비로소 민생의 교화나 민중의 계도를 실천할 수 있다.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 … .16)
선천의 시대에는 상극의 관계 속에 원한이 누적되어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후천의 시대가 다가와 상생의 관계 속에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원(解冤)의 과정을 통해 보은(報恩)을 성취하는 구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천도(天道)의 질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주체적 신념을 갖고서 인도의 규범에 맞추어 살아가야 비로소 민생의 교화, 민중의 계도 및 민권의 취지를 합리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인도의 실천은 신도(神道)의 강령을 구현하는 취지와 일치한다. 특히 성인은 천도를 본받고 인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헤아릴 수 있다. 여기에서 촛점은 생명의 실재성에 맞추어져 있으면서도 모든 실재의 생명성에도 맞추어져 있다.
세계는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생성과 변화를 진행하는 생물학적인 진화의 현상계이다. 세계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창출된 결과가 아니라 천지의 틀 속에 진행되는 신진대사와 세대교체와 같은 일련의 유기적 과정의 산물이다.17) 이러한 세계는 천지창조(天地創造)의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니라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다. 천지의 개벽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환의 계기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신화시대에서 계몽시대로, 혼돈시대에서 문명시대로, 선천의 개벽에서 후천의 개벽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전통과 시대적 개혁이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일련의 계기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공동체적 의식의 차원에서 보자면, 현상계는 혼돈에서 질서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을 특징으로 한다. 문화의 총체적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사회의 발전은 개벽의 시대적 계기를 통해 선사(先史)의 혼돈시대에서 역사의 질서시대로 전환하는 지속가능한 과정으로 상징화된다. 대순사상에서 이러한 과정은 세계의 개조를 통해 조선사회가 건전한 근대화를 진행할 것을 기대한다. 이는 선천시대에서 후천시대로 개벽하는 근대의 시대적 전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 이후에 일용 백물이 모두 핍절하여 살아 나갈 수 없게 되리니 이제 뜯어고치지 못하면 안 되느니라” 하시고 사흘 동안 공사를 보셨도다 … .18)
상제께서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19)
그 삼계공사는 곧 천·지·인의 삼계를 개벽함이요, 이 개벽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예전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으며 남에게서 이어받은 것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다만 상제에 의해 지어져야 되는 일이로다.20)
조선의 근대사회는 반제국주의의 기치 하에 민족을 계몽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감의 부담을 안고 있으면서도 반봉건주의의 구호 하에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교화하는 시대적 절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는 사회진화론과 같은 발전사관 속에 고유의 전통을 새로이 중건하면서도 근대사회로 신속히 전환해야 하는 일종의 양립가능성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모순과 충돌의 근대적 상황 속에 대순사상은 계급적 신분질서의 모순과 충돌을 넘어 민중 혹은 민생의 삶으로 확대되는 문화 전반에 대한 현세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후천의 개벽과 같은 시대적 전환의 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천지공사는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특징짓는 문화생태주의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는 부도덕한 말세를 끝내고 민생의 계도나 민중의 교화나 민권의 취지를 통해 다음 세대에서는 민생이나 민중을 위한 지상선경을 맞이하려는 취지를 지닌다. 이러한 선경의 경지에 관해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21)
무위이화는 자연의 순환적 이법, 즉 천리(天理)에 따른 후천의 개벽과 관련된 용어이다. 이 말에는 지상선경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함축되어 있다. 천지공사는 생명의 이법, 즉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조화적(造化的) 섭리를 통해 이루어진다.22) 그렇다면 상제(上帝)의 덕화(德化)23)를 베풀어 신도(神道)의 취지에 맞게 무위이화의 실천적 과정을 통해 천지공사를 시행하고 민생을 원만하게 개벽해야 상생을 실현하는 궁극적 목표인 지상선경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증산은 천지공사에 관한 취지와 포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 .24)
그는 천지공사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선천의 세계와 그 이후에 존재하게 될 후천의 세계를 구분한다. 특히 후천의 개벽으로서 지상선경의 경지는 천지공사가 성취되자마자 곧바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지상선경은 원래 언제든지 실현될 수 있을지라도 시의적절한 시대가 와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공사는 순차적으로 시의적절하게 개벽의 통로를 따라 진척되어야 세상에 재난이나 재해가 없게 된다. 만약 천지공사가 완공된다면 천지에 급격한 대변혁이 일어난다. 이 대변혁이 바로 개벽에 해당되고 특히 후천의 개벽이라고 명명한다. 이는 천지공사가 인간의 절실한 삶을 위한 현세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시사한다.
천지공사는 민중이 주체성을 갖고서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개벽의 열린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속에서는 결원(結冤)과 같은 대립, 긴장, 충돌의 관계를 넘어 해원(解冤)의 조화나 화합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해원의 협동, 화해 및 공생의 관계는 문화생태주의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문화의 조정과 통합의 작동방식에서 끊임없이 창조되면서 진화하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 생명력의 지속가능한 흐름과 같은 것이다.
대순사상에서 선천은 주관적 아집이나 집착의 사사로운 의식과 관련된다. 반면에 후천은 사회적 집단의 주체적인 실천적 사고와 관련된다. 특히 후천의 영역에는 사회적 실천에 따른 사회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대순사상에서는 후천의 개벽을 조선의 근대사회가 나아가야할 문명의 관문으로 본다. 여기에서는 후천의 개벽은 천지공사의 토대 위에 지상선경의 현세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지상선경의 목표는 민중사회의 실현, 즉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교화하는 내용으로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시사된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과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 .”25)
선천시대에는 삼라만상이 상극(相克)의 양상으로 뒤범벅이 되어 원망과 한탄이 天, 地, 人의 삼계에 누적되고 응어리진다. 그 결과로서, 천지의 틀로 대변되는 상도의 자연이법이 무너지고 온갖 재난이 발생하고 말세와 같은 참혹한 지경이 이르게 되었다. 이는 천지의 구조가 뒤집어진 것처럼 사회의 모순과 투쟁이 극심하게 발생하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과 같은 상극적 악순환이 진행된다. 그러나 후천시대가 되면 천지의 개벽을 통해 삼라만상이 상생의 화합적 통로를 찾고 천지의 정상적인 틀 속에 신명(神明)의 조화(造化)26)를 도모하여 원한의 맺힘을 해소하고 상생적 선순환을 진행하여 화합과 통합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후천의 개벽에서야 비로소 지상선경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혹은 관념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라 민생, 민중 및 민권을 위한 현실적 삶과 관련된다. 삼계(三界)의 개벽과 그에 따른 천지공사는 초월적 세계를 바라다보거나 이상적 사회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세의 사회적 현상 속에 개벽의 선험적(pre-experiential) 길을 따라 반봉건주의적 평등사상이나 반제국주의적 민족의식을 고양하려는 것이다. 특히 후천의 개벽은 대순사상의 진리를 통해 근대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여 조선사회가 민생과 민중을 위한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의 논법에서 보자면, 민생은 민중을 이끌고 민중은 충돌과 화해의 역동적 과정을 거쳐 개별적 상극이 민생의 조화로운 삶으로 승화되어 민권을 확충하며 민권은 민중의 평등의식을 고양하여 조선의 근대사회를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27)
Ⅴ. 지상선경과 문화생태주의적 지평선
인간은 자연계의 자생적 생명력 속에 생명의 이치를 터득하고 생명의 가치를 체득하여 주체적 자각의식을 갖는다. 주체적 자각의식은 인간의 존재와 가치를 끊임없이 고양하는 지속가능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생명력의 지속가능성은 우주의 시공간성에 따른 생명공동체의 의식 속에 인간이 자신의 조화로운 삶을 올바르게 영위하는 체험의 경지와 관련된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 공감, 공유, 공생 등과 같은 조화와 화합의 방식에 따른 삶의 필연성과 당위성의 관념이다. 이는 생명의 존재론적 토대 위에 생명력의 본질에 대한 가치지향성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인생의 굴곡에서 명(命)과 운(運)의 양립가능성이라는 것도 이러한 신념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문화생태주의 차원에서 후천의 개벽에는 천지공사의 현실적 작업과 이를 토대로 하는 지상선경의 현세적 성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대순사상에서 결원(結冤)과 같은 원한의 맺힘과 해원(解冤)과 같은 해소의 과정이 있다. 개벽은 천지의 창조처럼 세상을 새로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계도하고 계몽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존재하지만 선천을 없애고 후천을 창조한다거나 선천과 후천이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는 일련의 순환적 과정은 없다. 그러므로 지상선경은 천상의 이상세계가 아니라 천지공사(天地公事)28)의 토대위에 세워지는 가장 건설적 조선의 신천지(新天地), 즉 근대적 조선사회 현실 그 자체이다. 강증산은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29)
지상선경은 현세의 열린 세계로서 민생의 원한이나 숙원을 해소할 수 있는 단계를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상선경은 무릉도원처럼 신선의 경지, 현실과 동떨어진 꿈속에서나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 세계 자체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세상의 경계이다.
경계는 주체(자아)와 객체(타자)의 일정한 관계에서 설정된다. 그것은 인간이 삼라만상의 스펙트럼 속에 이들의 동일성과 차이성에 기반한다. 경계에는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경계와 가치의 대상으로의 경계가 있다. 전자는 시선을 차이성의 구분에 투사한 결과인 반면에 후자는 시선을 동일성의 통합에 투사한 결과이다. 특히 후자를 경지 혹은 지평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서 경계는 구획이나 구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구획이나 구분을 넘어서 시선의 집중적 투사에 따른 행위의 성취도와 관련된다.
여기에서는 주체(자아)와 객체(타자)의 이원론적인 구도를 허물고 자연의 생태계 속에 생명의 본질과 의미를 찾아내고 가치론적 경계를 추구한다. 이러한 경계에서는 끊임없는 시공간적 계기 속에 진행되는 주체와 객체의 통합적 과정이 진행된다.
이러한 경계의 차원에는 삶의 확고한 원리와 원칙에 대한 인간의 강한 회의감도 반영되어 있다. 즉 인간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여지의 시공간도 있으며 또한 이를 제약하는 조건의 시공간도 있다. 이러한 양면의 경계는 존재와 가치의 연속선에서 대체, 해체, 재건축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통일적 가치의 지향성을 모색해간다. 이는 삶의 여정(旅程)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지향하지만 결코 완결되거나 완성될 수 없는 자아실현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혼돈과 질서가 경계지워지는 개벽의 시대가 열린다. 특히 불확실한 시대에 삶의 방식은 변화와 안정의 개별적 경계를 가로지르며 이른바 지상선경의 통합적 경계를 지향한다.
이러한 경계는 개벽의 계도나 계몽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현세의 구현이다. 여기에는 종교의 이상적 보편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민생이나 민중의 강렬한 현실적 욕구에 더 치중한다. 특히 해원(解冤)이라는 말은 인간 삶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삶의 실현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취지를 지닌다. 해원의 원(冤)은 인간의 욕구를 갈구하는 현실적인 삶 자체를 함축적으로 상징한다. 여기에는 근대사회의 시대적 상황, 교조의 강령, 종교적 체험 등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순사상은 해원의 현실적 해소를 통해 신종교가 모색하는 현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화생태주의는 문화의 총체적인 양식 속에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의 역동적 관계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열린 체계는 삶의 합당한 원칙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서로 공생하는 통합적 차원을 지닌다. 반면에 닫힌 체계는 폐단과 불협화음이 만연하게 되는 방식을 지닌다. 강증산은 조선사회의 내우외환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결국에 닫힌 사회에서 열린사회로 나아갈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 천지공사는 이러한 신념을 존재론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며 지상선경은 이러한 신념을 가치론적으로 실현하는 가장 궁극적인 세계이다.
강증산의 역정(歷程)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세상의 격변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다. 그는 천지인(天地人)의 삼계(三界)를 주재하는 대권을 통해 천지공사를 시행하였다.
우리는 개벽하여야 하나니 대개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지금도 없으며 남의 것을 계승함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오직 내가 지어 만드는 것이니라. 나는 삼계의 대권을 주재하여 선천의 도수(度數)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仙運)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30)
그는 천지공사 이전에 존재했던 선천의 세계와 그 이후에 열리는 후천의 세계를 나눈다. 특히 천지공사가 시행된 후에 시의적절한 상황 하에서 후천의 개벽으로서 선경의 경지를 도달할 수 있다. 천지공사는 삼라만상이 개벽의 길을 따라 순차적으로 진척되어야 재난이나 재해와 같은 피해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공사가 완공될 경우에 천지를 요동치는 대변혁이 발생할 것임을 강력하게 강조한다. 이 대변혁이 바로 후천의 개벽에 해당한다.31)
천지공사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진화하는 일련의 개벽의 과정이다. 지상선경의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천지공사의 설계에 따라 선천의 세상은 순차적으로 일정한 변화를 겪으면서 후천의 세상으로 열려진다. 상극(相克)과 원억(冤抑)을 넘어서야 체험하는 천지의 급격한 대변혁, 즉 개벽을 거쳐 상생(相生)하는 후천의 세상, 즉 지상선경의 세계가 구현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해원의 과정애서는 모든 존재가 원한의 굴레, 원억(冤抑)을 벗어나지만 혼란의 과도적 상황을 피하기는 어렵다. 왜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인적인 욕심이나 욕망을 덜어내어 공생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에 재난이 홍수처럼 급작스럽게 밀어닥쳐서 질병의 위협을 받는 병겁과 같은 경우가 발생한다. 이처럼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세상이 대변혁하는 개벽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여기에서 후천의 세상이 도래하는 과정은 현대적 의미에서 문화생태주의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은 지금까지의 세상인 선천의 기존의 세계를 끝내고 천지인 삼계의 대권을 주관하여 선천의 굴레를 벗어나 신명과 화합하려는 취지를 지닌다.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道)로써 후천의 세상을 열어 지상선경의 세계를 만들어 민생을 구원하는 것이다. 선천의 결원은 모든 재앙의 원천이므로 해원의 과정을 거쳐 포용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화합과 통합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천과 후천, 상극과 상생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실의 양립가능성을 넘어서 선천에서 후천으로, 상극에서 상생으로 지상의 선경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개벽은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예전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으며 남에게서 이어 받은 것도 아니요, 운수에 있는 일도 아니요, 다만 상제에 의해 지어져야 되는 일이로다.”32)
여기에는 문명사회로 진화하는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선천의 선사로 특징짓는 미문명사회에서 후천의 역사로 특징짓는 문명사회로 개화되는 관점이다. 선천을 상극의 과정을 위주로 하는 세계로, 후천은 상생의 과정을 위주로 하는 세계이다. 이른바 지상선경은 후천의 개벽을 통해 상극과 원억(冤抑)이 없는 상생의 과정 속에 이루어진다. 선천의 개벽에서는 상극의 풍조가 조성되는 반면에 천지공사를 시행한 후에 상생의 풍조가 조성된다. 그러므로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개벽은 문화생태주의적 차원에서 탈경계적 성격을 지닌다. 탈경계성은 해소와 화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문화생태주의적 차원에서 보자면, 천지공사를 통해 문명 혹은 문화의 원형을 찾고 정신적 기질의 개벽을 발휘하여 후천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에 사회진화론에 따라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각기 자기들의 생활을 경험하고 계승하면서 각각 고유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으나 각각의 특색 때문에 오히려 국가 혹은 민족 간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조선사회는 각국의 문화들의 고유한 핵심적 내용을 통합하여 새로운 후천의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33)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웅(聖雄)을 겸비해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 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34)
여기에서는 역사의 중고(中古)시대 이후에 정치(俗)와 종교(聖)가 분리되어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분열되면서 진정한 삶의 모습과 그 정신적 경지를 체험할 수 없었다.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원융관통적 삶을 구현할 수 있기 위해 원시반본의 의식적 체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군사위(君師位)아 일체가 되는 통합과 화합의 경지는 충족할 수 있다, 이러한 삶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선천 영웅시대는 죄로써 먹고 살았으나 후천 성인시대는 선으로써 먹고 살리니 죄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선으로써 먹고 사는 것이 장구하랴. 이제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았도다.35)
조선 후기에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천지공사를 통해 지상선경의 경계를 지향한다. 그 경계에서 사회적 공감대와 문화적 유대감을 토대로 하는 또 하나의 현실적 공간이 창출된다. 이러한 현실적 공간에 접근하는 방법론적 발상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생태주의이다. 문화생태주의에는 문화의 통합과 조정의 작동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즉 인간사회는 그 전체적 구조와 그 복잡다단한 개별적 계층들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전체가 계층들이 종횡으로 결합하는 필수적인 조건인 반면에 계층들이 종횡으로 결합해야 더욱 높은 진화 혹은 발전의 경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지상선경의 차원에서 강증산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활동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조선의 근대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역사의 인과적 결정론을 넘어 주체적 선택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란 과거, 현재 및 미래가 연속선상에서 진행되는 시간적 계기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상극의 오래된 원한이 쌓이면 천지의 원활한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에 인간사회의 멸망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이러한 원한의 누적을 해소하는 것이 미래로 나아가는 통로가 된다. 이른바 해원공사는 민중이 체험하는 민생을 살리면서 민권을 확보하는 근대의식의 취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과거의 문화는 현재의 문화에 누적되고 미래의 문화는 현재의 문화가 연속된 결과이다. 이러한 현재의 시간성 때문에 인간사회는 창신(創新)의 생명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생명성을 지녀야 문화의 참모습이 창조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지상선경의 경계는 인간의 평등주의에 따른 열린 세계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이는 남녀의 양성(兩性)의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양성의 대립과 통일, 모순과 조화, 상충과 해소, 갈등과 화해 등의 사회공학적인 문제와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상선경의 문화생태주의적 경계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따른 공동체적 공감대 혹은 유대감을 형성하며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창조되면서 진화하는 자아실현의 지평과 맞닿아 있다.
문화생태주의의 조감도에서는 후천개벽의 좌표 속에 사회적 교감, 조정, 공생 및 통합의 흐름을 통해 자체에 모순, 갈등, 충돌 등을 해소하고 공감력을 확충하며 유대감을 확장해간다.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갈등이 합당하게 해소되고 이러한 해소조차도 또 다른 대립과 갈등의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에 속하는 것뿐이지 그러한 상태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최종적인 결과는 아닌 것이다. 이는 문화의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지향하지만 결코 완결되거나 완성될 수 없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통합적 경계를 지향한다. 대순사상에서는 고전적 유토피아처럼 인간이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관념적인 이상적 경지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조선의 민족이 불가역적(不可逆的) 시간의 현실적 세계를 체험하지만 가역적(可逆的) 시간의 가상적 세계를 기대하며 민생, 민중 및 민권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정표의 미래지향적 청사진을 고대하고 있다.
Ⅵ. 문제해결의 실마리
대순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기초한다. 그 강령에는 조선사회의 근대화에서 삶 전반의 총체적 모습 속에 세계의 실재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합목적성과 가치지향성이 자리잡고 있다. 존재의 합목적성이 천지공사의 세계와 관련된다면 가치의 지향성은 지상선경의 경계와 관련된다. 이러한 강령의 문화생태주의적 조감도에는 현실적 실천과 이상적 바람의 격차를 원만하게 해소하고 전통적 사회와 근대적 사회를 조화롭게 화해하는 탈경계적 지평이 열려있다. 왜냐하면 그 지평에서는 민생, 민중 및 민권의 입체적 관계에 기반한, 현세적인 통합적 삶이 온전하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순사상에서 근대사회의 변화가능성에 맞추어 천지공사의 실천가능성을 도모하고 지상선경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천의 개벽은 조선의 근대사회가 직면한 모순과 충돌의 단계에서 조화와 화합의 차원으로 고양하는 시대적 전환의 성격을 지닌다. 여기에서는 천지의 제한된 시공간성을 체험하는 과정, 즉 삶과 죽음의 원초적 굴레 속에 인간이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삶 전반의 총체적 모습이 있다. 후천의 개벽은 인간 삶 전반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면서 인간의 존재와 가치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시공간성의 계기이다. 진정한 모습이란 세계의 개조이다. 그것은 천지공사를 통해 봉건주의를 탈피하고 제국주의를 배척하는 조선사회의 근대화이다. 이러한 삶의 총체적 모습은 문화생태주의적 시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실의 총체적 삶 전반에 걸쳐 인간은 계도나 계몽과 같은 후천의 개벽을 통해 해소와 화해의 천지공사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창달하고, 그 실현의 산물로서 조화와 화합의 지상선경의 현세적 경계를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에서 민생을 계도하고 민중을 교화하면 민권을 고양하는 열린 체계의 사회를 적극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
문화생태주의의 지평선에서 보자면, 지나온 과거는 머물고 있는 현재에 누적되고 다가올 미래는 현재로부터 연속된다. 문화생태주의의 지평선에는 우주의 무궁무진한 시공간성을 천지의 일정한 시공간성 속에 후천의 개벽으로 체험하는 근대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을 바라보며 자신의 유한한 생명력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간다. 특히 지상선경은 선천시대에서 후천시대로 나아가는 문화정신의 총체적 흐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를 탈출하려는 도피처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적 공간 속에 또 하나의 현실의 공간을 자각적으로 창출한 근대의식의 산물이다. 이는 현세주의적 염원을 투영한 결과로서, 현대적 의미에서 현실과 이상을 함께 아우르는 탈경계적인 문화생태주의적 조감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