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시작하는 글
45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1) (마태복음 5:43~48)2)
예수가 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유명한 성서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신인식은 전통 기독교와 상당히 다르다.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넘어선다는(45절) 신인식은 선악 이원론을 넘어선다. 나아가 신과 같이 인간도 온전해야 한다는 48절은,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주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런데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예수의 신인식이 얼마나 살아 움직였을까? 그러지 못한 기독교 현실이 참 안타깝다.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 ”3)
『전경』의 이 구절 역시 놀랍다. 증산이 서양인 이마두(마테오 리치)를 포용하고 넘어서려 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증산의 종교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서양의 이마두와 연결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순사상논총』의 여러 논문 중, 기독교와 직접 관련된 논문은 극소수다. 서로에 대한 연구가 이리 적다니? 이 역시 참 안타깝다.
2,000년에 걸친 기독교 논쟁은 따지고 보면 신인식 논쟁이나 다름없다. 기독교는 신인식의 차이에 그만큼 예민하다. 이런 기독교와 대순진리회(이하 대순)의 신인식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 논문이 주목하는 것은 에크하르트다. 그의 신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유대의 신명기 사가나4) 중세의 삼위일체 신인식과는 달리, 21세기 신인식과 통하는 영성적 깊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중세 삼위일체, 대순진리회, 에크하르트의 신인식을 분석·비교하여, 대순의 신인식이 어떤 의미와 문제적(問題的) 관건을 갖는지를 파악하고, 에크하르트의 ‘신성’을 토대로 새로운 신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참 어렵다. 우선 비교하려는 종교의 교리 체계가 다르다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이론적·실체적으로 각 종교를 동시에 깊이 파악하기 어렵고, 용어도 서로 다르다. 두 종교의 비교 등가성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종교마다 생성 배경과 시기, 교리 체계의 확립과 발전 과정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대순의 교리 체계에 대한 글쓴이의 지식은 매우 얕다. 이런 이유로 이 논문에서는 대순의 『전경』과 『대순지침』, 『대순진리회요람』을 토대로 하고, 『대순사상논총』과 대진대학교 구성원들의 저술을 중심으로 대순의 신인식을 분석하였음을 밝힌다.5)
Ⅱ. 중세의 삼위일체 신인식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적 자유를 얻었다. 황제의 배경을 업은 기독교는 크게 확장되었으나 동시에 각종 교리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런 배경에서 확정되었다. 여기서 그 신학적 논쟁을 일일이 살필 필요는 없다. 다만 논쟁의 한복판에 섰던 아리우스(256~336)의 주장을 살펴보는 것은, 삼위일체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간결하다. 그에 의하면 신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지만, 예수(로고스)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6) 그런데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아타나시우스가 주도하는 양성론, 곧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주장을 채택하였다.7) 그 후 성령과 관련하여 필리오케 논쟁도 일었다.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가 확정되었다.
중세의 삼위일체는 하나의 ‘존재론적 신인식’ 체계다. 성서에는 삼위일체가 거론되지 않는다. 예수도 삼위일체적으로 신을 인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세교회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교회 권력과 정치권력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작용론적 신인식’은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기본 틀을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그는 플로티노스(205~270)의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기독교를 종합하여, 중세가톨릭의 거대한 교리 체계를 만들었다.
신인식은 존재론적 관점과 작용론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존재론적 관점이란 신이 어떤 격과 위상으로 인식되느냐 하는 것을 이름이요, 작용론적 관점이란 신이 타자(자연, 인간, 다른 신)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일을 하는가를 이름이다. 이 두 가지 그 관점에서 삼위일체 신인식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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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지고지존의 최고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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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자로서의 하나님은 성육신(成肉身)한 신인양성(神人兩性)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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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신의 숨결(רוּחַ, 루아흐)로 발현되는 권능의 신이다.
중세가톨릭 전통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위격(位格)은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고 본다. 이를 삼위일체라 하는 것이다. 중세가톨릭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적극 도입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대 신명기 사가 전통에 따라 인격신임과 동시에, 최고선(最高善) 이데아인 로고스(Logos, 말씀), 곧 이법신(理法神)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과 완전히 분리된 절대적 타자다. 이러한 분리는 인간의 원죄로부터 생겼으며, 이 분리를 잇기 위해 예수가 강세(降世)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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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 신은 전지전능하며, 완전하며, 무소부재하며, 불변하며, 절대 권능을 행하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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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위일체 신은 의(義)롭고, 선하며 사랑을 베푸는 거룩한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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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위일체 신은 인과응보(因果應報)·상선벌악(賞善罰惡)·심판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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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위일체 신은 자연법칙이나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 그 개입은 전적으로 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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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위일체 신은 피조 세계의 생성·변화를 주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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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위일체 신은 철저한 위계적인 존재 구조의 최고 지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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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피조물은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기도에 대한 응답도 전적으로 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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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물질(자연, 인간의 몸)은 죄성(罪性)을 지니며,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가 된다. 신의 강세는 원죄로부터의 구원에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신인식은 전능성과 악의 공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중세 이후 신정론이 기독교의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선과 사랑의 신, 심판과 징벌의 신이 공존하는 데 대한 신학적 해명도 어렵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배와 피지배의 체계에서 최고위를 가진 가부장적인 신이다. 또한 절대적 타자이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원론을 전혀 극복하지 못한다.
이 신인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크게 훼손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신의 절대적 자유의지와 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세 말이 되어서야 차츰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는 인간 의지를 신에게 종속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능산적(能産的) 생성·생동·변화는 보장받지 못했다.
삼위일체는 유대교와 존재론적 체계가 크게 다르다. 그러나 작용론적 신인식에서 보면 신명기 사가의 전통을 대부분 이어받고 있다. 전쟁·군대·질투·보복·진노의 신이라는 인식은 사랑·자비·용서의 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과응보, 심판과 징벌, 절대적 권능의 신인식은 그대로다. 기독교 교권적 차원에서 보면, 전쟁·군대·질투·보복·진노의 신이라는 인식도 사실상 용인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세 이후 다른 종교나 다른 민족을 철저히 파괴한 기독교 역사는, 삼위일체 신인식이 신명기 사가의 신인식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상의 삼위일체 신인식은 21세기 현대 기독교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근본주의 교회에서는 아직도 이런 신을 철석같이 믿는다.8)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전통적 신인식은, 신의 역동성, 과정성, 규정 불가성 등의 현대신학의 신인식과 거리가 멀다. 동시에 고통에 둔감한 신,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신, 지배자로서의 신, 이원론적인 신이라는 틀도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중세 삼위일체는 과정 신학과 여성 신학은 물론 종교다원주의와 문화 신학 그리고 약자의 고통에 호소하는 민중신학 계열의 여러 현대신학으로부터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9)
Ⅲ. 대순진리회의 신인식
『대순진리회요람』은 구천상제를 대순의 신앙 대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서 그 신격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규정하고 각각의 어의를 풀고 있다.10) 여기서는 이를 토대로 구천상제의 신격을 정리할 것이다.
대순의 구천상제도 최고신이다. 『전경』에 의하면, “상제께서는 …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 ”라는 구절이 나온다.11) 구천(九天)은 천계 중 최고의 하늘이다. 이에 대해 『대순진리회요람』은, “구천(九天)은 상제께서 삼계를 통찰하사 건곤(乾坤)을 조리(調理)하고 운화(運化)를 조련하시고 계시는 가장 높은 위(位)”라고12) 하고 있다. 그러니 구천상제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최고신이 된다. 이경원 교수도 상제는 유일무이한 지고의 신이라고13) 하면서 이런 동양의 상제관이 대순의 상제관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편 구천상제는 인간 사회의 모든 종교조차 관령(管領)하는 최고신으로 자리한다.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국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14)
『전경』의 이 구절은 선도, 불도, 유도는 물론 서도(기독교)의 종장을 구천상제가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타 종교의 관점에서는 어불성설이라 하겠지만, 이런 언표는 자기중심적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구천상제가 어떤 신격인가를 말하기 위함이라 할 것이다.
구천상제는 자연과 인간은 물론 여러 종교와 그에 따른 신격조차 관장하는 최고의 신이다. 그래서 상제는, “군생만물(群生萬物)을 뇌성(雷聲)으로 보화만방(普化萬方)하시는 지대지성(至大至聖)한 삼계(三界)의 지존(至尊)”을15) 뜻하는 천존(天尊)이라고 한 것이다. 한 마디로 구천상제는 삼계의 모든 존재자보다 그 위(位)가 가장 높은 지고지존의 최고신이다.
이러한 지고지존의 최고신 개념은 기독교에도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지고지존의 최고신이다. 하지만 두 종교의 최고신 인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 문제는 강세와 관련되기 때문에, 강세 문제를 다룰 때 논할 것이다.
구천상제는 응원(應元)의 신이기도 하다. “응원(應元)은 모든 천체(天體)뿐만 아니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천명(天命)에 응(應)하지 않고 생성(生成)됨이 없음을”16) 뜻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元)이다. 원은 이법적 용어다. 구천상제가 인격신이며 동시에 이법신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대순진리회요람』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한편 원은 강세 전의 신으로 봉안하는 구천대원조화주(九天大元調和主)의17) 대원(大元)에도 나타난다.
대순의 원은 매우 이법적이다. 대원(大元)은 도(道)이며, 도는 하늘의 무극(無極)한 대도이며 무극한 리(理)다.18) 그러니 원은 무극과 닿아있으며, 이는 조정산 도주가 무극도를 창도한 것으로도19) 알 수 있다. 원(元), 무극, 태극, 대순, 원(圓), 도, 리 등은 같은 것으로20) 이해된다. 따라서 응원과 대원의 원은 모든 이법의 지고한 차원, 곧 만물의 근원자로서의 제1 원인자라21) 할 것이다.
한편 원은 원기(元氣)로도 해석된다.22) 박인규는 “원기는 최고의 범주로 여기는 흐름과 최고의 범주는 도나 현으로 삼고, 원기는 그보다 아래 개념으로 여기는 흐름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전자는 물론 후자의 측면에서도 원기는 만물의 근원이고 원천”이라고23) 하고 있다. 원을 대원이라 함은 지리(至理)의 표현이며, 응원이라 함은 지기(至氣)의 표현일 수 있다. 지기는 지리와 같은 위(位)일 수도 있으나, 그 바로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능산의 일을 하는 이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보면 구천상제는 지리지기(至理至氣)의 신격이 된다. 매우 이법적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구천상제는 매우 인격적이다. 그래서 그 인격적인 구천상제가 무극·태극을 주재한다고 본다.24) 그런데 학자에 따라 상제는 최고의 인격신이지 우주적 규범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25) 그러나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대순의 상제는 인격과 이법의 일체로서의 신이라 할 수 있다. 무극신 태극지천존은 무극·태극을 본질로 하는 최고신이라고 한 것만 봐도26) 이법적인 신격도 최고신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이법과 인격의 위(位)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인격으로서의 구천상제가 모든 이법을 주재한다고 보면, 인격이 이법보다 상위가27) 된다. 하지만 이법과 인격의 위계는 대순의 언표 안에서도 서로 다르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은 태극을 관령 주재하는 천존이지만, 한편 영성(靈聖)한 분으로 우주지간에 왕래하고 태극지기에 굴신한다’고28) 한 것을 보면 인격이 이법보다 하위인 것처럼 보인다. 구천상제의 인격과 이법의 위계가 서로 부딪히고 있다. 이 모순을 변증법적 지양(止揚, Aufheben)의 관점에서 풀어볼 수도 있지만,29)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깊이 풀어야 할 과제라 여겨진다.
『대순진리회 요람』은 상제를 뇌성·보화의 신격으로도 규정한다. 이 두 가지 신격 규정은 신이 삼계를 관령할 때 어떻게 현현하는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과 유사한 신격이라 할 수 있다.
“뇌성은 천령(天令)이며 인성(仁聲)이다. 그래서 뇌(雷)는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결합으로써 성뢰(成雷)되며, 뇌(雷)는 성(聲)의 체(體)요, 성(聲)은 뇌(雷)의 용(用)으로서 천지(天地)를 나누고 동정진퇴(動靜進退)의 변화(變化)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승강(乘降)케 하며, 만물(萬物)을 생장(生長)하게 하고 생성변화(生成變化) 지배자양(支配滋養)함을 뜻한다”고30) 하고 있다. 뇌성은 만물을 주재 자양하는 전능자의 능력이라는31) 것이다.
“보화(普化)는 우주의 만유가 유형무형으로 화성(化成)됨이 천존(天尊)의 덕화(德化)임을 뜻한다.”32) 결국 보화도 온 우주를 관장하는 최고신의 능력인 셈이다.
앞서 살펴본 응원도 관령현현과 연결된다. 응원은 원(元)에 응(應)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元)이 삼계에 응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응원을, “천체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이 다 천명에 응하지 않고 생성됨이 없음을 뜻한다”고33) 한 것은, 지리로서의 원이 삼계에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남, 곧 현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구천상제는, 도맡아 다스리는 관령현현으로서의 최고 힘을 가진 신이라 할 수 있다. 그 힘이 인격적으로 아니면 이법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따라서 대순의 구천상제는 삼계를 생성·생동·변화하게 하는 힘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전경』은 “상제께서 … 내가 …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다”고34) 한다. 대순의 강세는 기독교의 육화(肉化, incarnation)와 상통한다. 강세로 보면, 삼위일체의 예수와 대순의 증산은 같은 신격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육화(성육신) 교리는 통일되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성서가 이미 서로 다른 육화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를 선재적(先在的)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따르면, 성부와 본질은 동일하나 위격이 다른 성자가 육화(강세)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삼위일체에서 천계는 한 번도 비워진 적이 없다. 그런데 대순의 강세는 다르다. 하늘의 최고신 자체가 천계를 비우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인계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순에는 ‘신의 아들’과 같은 위격 교리가 없다. 그렇다고 강세한 증산이 구천상제로서의 최고신의 지위를 잃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강세 증산도 천계를 관령할 수 있다.
『대순지침』은 “강세하신 강증산(姜甑山)께서 구천상제이심을 분명히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35) 강조하고 있다. 강세 증산과 구천상제는 신위(神位)도 동일하고, 신능(神能)도 동일하다. 최고신과 강세한 증산이 분리되지도 않고, 증산을 아래로부터 상향된 신격으로 보지도 않는다. 인간 증산으로서의 불완전성이 있다고 해서 구천상제의 최고신 지위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증산의 탄강은 구천대원조화주신의 강세이며, 증산의 생애는 상제의 삼계 대순 과정이고, 증산의 죽음은 삼계의 보화천존 제위(帝位)에 임어(臨御)하기 위한 화천(化天)에 해당”하는36) 것이 된다. 도주 조정산은 구천상제를, 최고신이며 인세(人世)에 강림한 역사적 존재라고 했다.37) 본질로서도 동일이며, 위격으로서도 동일하다는 것이다.38)
삼위일체에서는 하늘의 최고신 성부와 육화한 예수의 위격이 다르다. 그래서 예수는 ‘신(최고신)의 아들’이라는 위격으로 육화했다고 본다. 그런데 위격 문제는 강세 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서는 ‘신의 아들’이 태초부터 있었다고 증언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39)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
말씀은 로고스의 한국어 번역이다. 하나님은 최고신 성부 하나님을 뜻한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땅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계의 최고신도 동일 본질과 다른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승천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삼위일체 신앙고백의 핵심인 사도신경은 예수가 승천 후 하나님(성부)의 우편으로 갔다고40) 한다. 삼위일체에서는 승천한 신(예수)도 성부와 위격이 다르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순의 상제는 강세 전이든 강세 기간이든 화천한 후든 모두 동일 본질과 동일 위격으로 존재한다. 구천상제의 삼계 관령이 천계에서 이루어지는가, 인계·지계에서 이루어지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구천상제나 강세 증산은 본질이나 위격이 동일하다. 두 종교 간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여기에 있다.41)
현대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의 육화 예수나 대순의 증산 강세는 신화적 내러티브다. 따라서 이를 신앙하느냐 않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만 강세 증산이 동일본질 동일위격의 구천상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신인식에서는, 신인의도(神人依導)나 신인조화를 넘어, 에크하르트의 신인합일과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생긴다.
한편 강세 신앙은 인간이 처한 사회 현실이 투영된 결과로 나타난다. 증산 강세는 19세기 말 “조선 민중들이 저항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종교적 완충제로, 현실의 폭력과 박해가 심하고 이에 대항할 최소한 물리적 수단조차 없을 때 민중들은 해방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고난을 종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42)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도 두 종교는 차이를 보인다. 삼위일체는 선재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육화 신앙은 인간 의지와는 무관하다. 신의 전적인 자유의지에 의해 ‘신의 아들 예수’를 육화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1세기 유대의 메시아(그리스도) 대망론은 분명, 로마제국의 침탈, 그리고 헤롯 왕당파나 사두개파, 바리새파, 서기관이라는 종교적 권력을 가진 이들의 착취로 엄청난 고통을 받던 유대 민중의 희망이 종교적으로 투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삼위일체는 이러한 땅의 현실을 반영한 상향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선재적 그리스도론을 수용함으로써, 사회 현실과 무관한 육화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작용론적 신인식은 대순의 문서 및 관련 연구를 종합하여, 일곱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작용론적 관점에서 보면, 최고신은 전지전능성, 절대성, 완전성 등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힘은 신과 타자 사이에 정보적 비대칭을 일으킨다. 지배와 피지배적 관계가 자연스레 생길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의 신이라 한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그 신을 전지전능의 절대적 힘을 가진 신으로 인식한다. 기독교는 지금도 이러한 비대칭의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제를 전선의 신으로 본 것은 플라톤의 최고선 이데아와 같다. 삼위일체의 성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대순의 문서들은 구천상제를 위압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지전능과 전선, 온전함, 불변을 강조하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의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다.
대순도 삼위일체처럼 상선벌악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기를 바라는 선한 인간들의 희망이 투영된 신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인식을 고수하는 한, 두 종교는 신정론이라는 난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느 종교나 최고신은 삼계를 관령·주재한다고 한다. 대순의 상제도 인간을 비롯한 삼계를 주재한다. 그러니 이런 신격은 인간과 자연에 대해 신통자재(神通自在)로51)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며, 삼계의 생성·변화·발전의 힘이52) 된다. 이 점 또한 대순과 삼위일체가 유사하다. 자연법칙이나 인간 역사에 자유롭게 간섭하는 힘으로 인식되는 신은, 인간과 자연을 종속시키며 위계적으로 만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크게 훼손시킨다. 비과학적인 것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현대신학에서는 신을 자연이나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도리어 타자(인간과 자연)의 자유의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자기를 비우는 신으로 그 인식을 바꾸고 있다. ‘하나님 없이’라는 개념이나53)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는54) 개념은 이러한 신인식의 대전환을 잘 보여주는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대순은 삼위일체 기독교보다 유연하다. 신인의도의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는 구천상제를 정점으로 한 가치체계다.55) 기독교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대순의 신격 이해도 매우 위계적이다. 삼계의 모든 존재의 위계는 세분되어 있다. 이것은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자를 위계적 질서에 따라 세밀하게 나누는 중세가톨릭과 닮았다.
심판하는 최고신이라는 인식도 현대신학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대순에서는 심판의 주체가 최고신이 아니라 신명들이다. 그러나 최고신이 신명들을 관령·주재하기 때문에56) 결국 심판이나 상선징벌은 최고신 상제의 작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점도 전통 기독교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현대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넘어서야 할 신인식의 하나다.
신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면 대순은 다신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며,57) 범신론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58) 심지어 『전경』에 나타나는 신명의 이름을 분석해 보면, 50여 개가 넘는 이름이 나온다.59) 대순은 이런 신명을 상제의 작용론적 실행의 실체로 여긴다. 이 점은 기독교와 상당히 다르다. 삼위일체는 유일신론을 강조한다. 다른 신들은 교리적 차원에서 강하게 억압된다. 삼위일체는 다신론에 인색하다. 오죽했으면 『전경』이 “서교는 신명의 박대가 심하니 감히 성공하지 못하리라”고60) 했겠는가?
그런데 최고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면 대순은 기독교와 상당히 다르다. 신과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이끈다는 신인의도는61) 대순의 매우 중요한 신인식이다. “신은 사람이 없으면 의탁하여 맡길 곳이 없으며, 사람은 신이 없으면 앞에서 계도해 줄 대상이 없다”고62) 한 것은, 삼위일체에는 없는 신인식이다. 이러한 대순의 신인식은 현대 신학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경원 교수는, “신이 단지 숭배 대상으로만 남으면,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 수동적인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고, 신의 지배와 명령만이 의미를 지니며 인간의 무한한 욕구와 창의력은 구속된다”고63) 했다. 그래서 그는 대순의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과 인간은 각각 별개의 존재로 독립해서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상호간의 교류 속에 놓여 있다. 달리 말하면 신의 작용이 인간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인간의 행위가 신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므로 그 이상적 관계는 신과 인간의 상보성(相補性)을 통해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64)
삼위일체나 신명기 사가는 신을 찬양하고 신에 봉사하는 데 목적을 둔다. 물론 대순도 증산 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신격은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대순에서는 최고신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타자를, 능산적·소산적 지위를 바꿀 수 있는 관계로 인식하는 셈이다. 이 점은 “신과 인간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신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대순사상의 신관의 주안점”이라는65) 기술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삼위일체를 넘어서는 신인식이다. 이런 신인식은 에크하르트의 생각과 유사하다. 에크하르트는 신인조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의 탄생을66) 말한다. 대순의 신인의도와 신인조화,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신인합일과 신의 탄생은, 모두 최고신의 지배적 위계성의 문제점을 새로운 차원에서 해결해 줄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Ⅳ. 신인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돌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는 독일 출신이다. 중세 후기 스콜라 철학을 주도했던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보다 조금 뒤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스콜라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는 영성적 차원에서, 독자적인 사상을 펼쳤다.
그는 매우 뛰어난 설교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독창적인 사상은 점차 다중(多衆)에게 퍼져 나갔다. 중세 전통을 흔들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죽기 직전에 이단 고발이 이뤄졌고, 죽은 얼마 후 이단 판정을 받았다. 판정 내용이 황당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단자가 아니나, 그의 가르침은 너무 앞서 있어서 예민하다는 것이다.67)
그래서일까? 그의 사상은, 폴 틸리히의 상관적 신학, 민중 그리스도론을 강조하는 한국의 민중신학, 찰스 하츠온이나 존 캅 등의 과정신학, 존 힉이나 폴 니터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파니카의 보편 그리스도론, 하비 콕스의 세속신학 등, 20세기 중후반 이후의 현대 신학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파격적이다. 특히 그의 신성(神性), 청빈(淸貧), 초탈(超脫, Abgeschiedenheit), 돌파(突破, Durchbruch), 신인합일(神人合一), 언표불가(言表不可), 반대의 일치, 만유의 포괄, 신의 탄생 등의 개념은 21세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뛰어난 통찰이다.
그의 영성 사상을 반성적 비판을 통해 활용한다면, 기독교는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신인식을 더욱 깊이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이유로 에크하르트의 영성적 신인식은 대순의 신인식을 새롭게 돌아보게 해 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신 이해는 교리적이라기보다 영성적이다. 교권에 순응적이라기보다 돌파적이다. 그래서 그의 신인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청빈, 초탈(Abgeschiedenheit), 돌파(Durchbruch)라는 방법론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는 청빈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청빈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이다.68) 청빈은 의지의 가난, 지성의 가난, 존재의 가난이라는 차원을 아우르는 개념이다.69) 신의 참모습을 이해하려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나 지적 욕구마저 비우는, 청정한 가난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신적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설교에서, 마음의 가난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알지 않으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다.70)
그런데 청빈은 준비 단계다. 영혼을 비우는 연습에 해당한다. 청빈의 바탕 위에 초탈이 일어나야 한다. 초탈은 청빈이 이루어져, 모든 인식 체계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덧없는 애착이나 슬픔이나 명예나 비방이나 악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초탈”이다.71) 초탈은 모든 인식과 언행과 활동으로부터 초연해지는 경지며, 자기 사랑, 자기 의지, 자기 계박(繫縛), 소유욕이라는 모든 아집(我執)에서 벗어나는 것이다.72) 마치 원효의 무애(無碍)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사실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초연하고 자유로운, 거칠 것 없는 존재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을 믿는다는 아집조차 청빈을 통해 버릴 때 초탈이 가능해진다.
신성은 모든 상을 비우는 철저한 초탈 혹은 영적 가난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73)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는 참 어려운 경지다. 그럼에도 그가 초탈을 강조한 의도는, 인간이 끊임없이 초탈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비울수록,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돌파는 초탈의 최고점을 뜻한다. 돌파는 모든 인식과 언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초탈 상태다. 신과 합일한다는 생각도 의지도 모두 비워진, 그래서 신조차 사라진 상태가 바로 초탈의 최고점인 돌파다. 바로 그 순간(이런 시간 의식조차 없는)에 신인합일이 이루어진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인합일은 의식되지 않는다. 돌파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집착은 물론, 합일하고자 하는 대상적 존재인 신, 곧 속성을 지닌 삼위일체의 신마저 떠나, 신과 인간의 구별이 사라지는 초탈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것을74) 뜻한다.
돌파의 결과는 신인합일이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이를 인간 ‘영혼의 근저에서 신이 탄생하는 것’이라 했다.75) 참 위험한 발상이다. 기존 삼위일체 교리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신이 인간이 된 이유는 모든 인간이 예수와 똑같이 신으로 태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76) 이처럼 그는 인간이 신으로 탄생하는 것을 영성적 신인식의 최종 목표로 보았다. 청빈 → 초탈 → 돌파 → 신인합일 → 인간 영혼의 근저에서 신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상 전개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인간과 분리된 신은, 신명기 사가나 삼위일체의 신인식이다. 에크하르트는 신과 인간의 분리를 잘못이라 한다. 그가 이해하는 신은 인간과 분리된 절대타자로서의 초월신이 아니다. 그는 신은 존재의 뿌리이고 지반이고 힘이며, 존재 자체라고 본다.77) 그러면 청빈과 초탈과 돌파라는 실행을 통해 닿게 되는 신인합일의 경지에 있는 신은 어떤 신일까? 이런 신을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크하르트는 신(神, Got)과 신성(神性, Gottheit)을 확연히 구분했다. 속성을 지닌 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생성·해체되는 상대적 실재인 데 반해, 모든 속성을 여읜 신성은 그러한 관계성과 상대성을 완전히 초월한 감추어진 신비 세계다.78)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처럼 속성을 지닌 신은 ‘신의 근저(신성)’에서 흘러나온 신성의 한 모습일 뿐이다.
본래 인간인 예수가 신이 된 것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입한 데 큰 원인이 있었다.79) 그래서 예수의 양성론은 지금도 논란 중이다.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신과 신성을 구별한 이유도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신성과 신의 탄생이라는 영성적 인식을 통해, 성자 예수가 선재적(先在的) 그리스도라는 전통적 신인식을 사실상 바꾼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하나(unum)’를 강조한다.80) 이때의 ‘하나’는 만유의 무제약적 포괄자, 영존하시는 충만자로서 유일하다는81) 의미다. 그는 신성을 이 ‘하나’로 설명한다. 모든 존재자는 차별적 존재다. 그런데 ‘하나로서의 신성’에는 이런 차별성이 없다. ‘하나’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하나로서의 신성은, 잡다한 이름과 형상과 양태를 초월한 그야말로 이언절려(離言絶慮)의 실재다.82) 현대신학에서도 이 언표불가의 하나를 “천지인이 합일되는 우주와 생명과 정신의 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실재”로 규정한다.83) 중세 때 에크하르트가 이런 혜안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다.
신성은 언표불가다. 규정 불가다. 에크하르트는 이를 일러, “표현할 수 없는 분, 이해할 수 없는 분, 본질을 초월한 지성”이라84) 했다. 신성의 깊이에는 모든 인식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생각으로도 언어로도 신앙으로도 감성으로도 신성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말할 수 없는 도(道)와85)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에크하르트가 생각하는 신성이다. 그러니 신성은 통상적인 신과 확연히 구별된다. 따라서 신성은 ‘신 너머의 신’이자, 신이 아니며 신이 없으며 신을 벗은 신이며 무(無)조차 넘어선다. 신의 근저와 인간 영혼의 근저로서의 신성은, 만유의 무제약적인 포괄자로서 ‘하나’ 그 자체이며, ‘존재’ 그 자체이며, ‘있음과 없음’조차 넘어서는 규정 불가의 깊이다. 이런 규정조차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신성을 규정하는 것은 언표불가의 반복적인 레토릭에 빠지게 된다. 에크하르트는 신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신은 창조하고 일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일하고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 밖에 있는 것 … 그것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되는 것의 범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마치 피조물을 자기 밖으로 던지거나 또는 자기 밖의 어떤 무한한 공간이나 진공 속에서 창조한 것처럼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은 … 자기 안에서 존재를 발견하고 받고 소유하도록 만물을 무로부터, 곧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존재이기 때문이다.86)
그의 주장을 풀어보면 이렇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이라 부르는 존재는 세계와 동떨어진 존재다.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주 엘(El)이나 여호와(YHWH)도 마찬가지다. 그 신은 자기 밖에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 신은 이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도 있었고, 존재할 때도 있고, 또한 이 세계가 없어지더라도 존재한다. 그러기에 그 신은 세계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들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신과 이 세계는 분리되어 있고, 그 신 이외의 모든 것은 그 신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이런 신 이해를 틀렸다고 본다.
‘하나’로서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신은 그 자체가 존재다. 그러면 그 ‘존재 그 자체’에는 애초부터 안과 밖이 있을 수 없다. 그 자체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 바깥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만일 무엇인가 그 ‘존재 그 자체’의 밖에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에크하르트는 이때의 ‘존재 그 자체’를 전통적으로 알려진 신과 구분하여 신성(神性)이라 했다. 그러니 신성은 모든 개별존재자의 존재 근거가 된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신도 인간도 세계도 모두 신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서 나온다. 그래서 신성을 ‘신 너머의 신’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성과 구별되는 신은 어떤 존재인가? 그 신은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신을 뜻한다. 삼위일체의 신도, 성서의 엘이나 여호와도, 불교의 비로자나불이나 석가모니불도, 이슬람의 알라도, 동양의 상제나 천(天)도 모두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이다. 최고신인지 하급신인지, 유일신인지 범신(凡神)인지, 초월신인지 내재신인지, 민족신인지 보편신인지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도 신성에 포섭되는 제한적인 존재일 뿐이다.
청빈 → 초탈 → 돌파 → 신인합일 → 신의 탄생으로 설명되는, 에크하르트의 영성적 신인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는 신의 근저로서의 신성은 인간 영혼의 근저와 같다고 본다. 그래서 청빈·초탈·돌파 과정을 통해 신의 근저와 인간 영혼의 근저는 하나로 만나게 된다. 사실 만난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인간 영혼의 근저에는 이미 신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깨닫고 실천하는 자가 신과 하나가 되는 신비한 일치를 하게 되는87)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찰렘, צֶלֶם)과 모양(데무트, תְּמוּנָה)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구절을 활용하여,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앗을 잘 보살피고 싹을 틔워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 신과 하나가 되는 것, 곧 신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88)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신의 탄생이다.
이렇게 되면 신성과 구별되는 신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인식되는 속성을 가진 신이나, 태어날 때부터 신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그 존재 위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가 인간의 위상을 얼마나 높고 깊게, 그리고 영성적으로 인식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항상 반대의 일치로 나타난다. 실존적 차원에서 보면 신과 인간은 길항적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치다. 이런 반대의 일치가 가능한 것은 신의 근저와 인간 영혼의 근저가 같고, 그 근저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며, 그 ‘하나’는 ‘존재 그 자체’일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 그 자체’로서의 신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나 통상적 신은 같은 위상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이 곧 신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러니 에크하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신은 전능자도 완전자도 권능자도 아니다. 신의 근저(신성)에 닿아있지 않은 신이라면 말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전능자이며 완전자이며 권능자다. 영혼의 근저(신성)에 닿아있는 인간이라면 말이다. 통상적 신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신인식을 에크하르트는 중세 말에 과감히 하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원죄를 짊어진 존재가 될 수 없다. 도리어 영혼의 근저에 신성이 있는 매우 거룩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인간을 원복의 존재로 본다. 인간의 불행은 영혼의 근저 깊은 곳에서 신의 근저와 일치되는 깨우침을 얻지 못한 데 기인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불꽃’의89) 중요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신성과 분리될 수 없다. 다른 존재자들도 마찬가지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신성에 포유(包有)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상적으로 떨어져 있는 존재들을 신의 근저(신성)에서 결합하는 일이 에크하르트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청빈과 초탈과 돌파를 통해 불꽃이 튀기를 바란 것이다. 바로 그때 신인합일과 동시에 인간 안에서 신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영혼의 근저에서 불꽃이 일었다면, 신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됨은 물론, 신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와 합일한 것이고, 이는 다시 그 신성으로부터 이 세상 현실로 나서도록 인간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90) 따라서 신성은 인간의 완전한 자유와 존엄, 나아가 일상의 행복도 보장하게 된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불가분리로 통합된 하나의 통일적 존재다.91) 따라서 그가 말한 인간의 일상적 행복은 영혼은 물론 육체적 행복을 포함한다. 따라서 신인합일과 동시에 인간 영혼의 근저에서 ‘신이 탄생’한다면, 신 없는 일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결과 인간은 신성의 존재로 최고의 존엄을 가짐과 동시에, 현실에서의 일상적인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세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는 원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에크하르트의 신성을 토대로 하면, 인간은 ‘너무나 존재적 축복 그 자체’가 된다. 신성과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는 신성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 아니 행복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을 경계하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놓아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도 떠나야 한다”고92) 했다. 20세기 신학자 본회퍼가 ‘종교 없는 신앙, 신 없는 신앙’을 보여줬지만,93) 14세기 당시를 생각하면 참 위험한 발상이다. 교권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이단 중의 이단이 된다. 그러나 신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예수’라며,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자들이야말로 신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는 삼위일체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예수의 양성(兩性) 문제도, 신성의 깊이에서 신과 인간이 완전히 합일된 것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성서가 증언하는 갈릴리 예수는 영혼의 근저에서 완전히 신인합일을 이룬 존재가 아니다. 에크하르트가 말한 신인합일로서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그 역사적 예수도 신인합일의 가능성이 함유된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예수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신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을 품고, 신성과 합일할 수 있는 거룩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길, 곧 신과의 합일을 향해 가는 길이야말로, 실존적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길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Ⅴ. 삼위일체·대순진리회·에크하르트의 신인식 비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먼저 삼위일체와 대순의 신인식을 비교하고, 이어서 대순과 에크하르트의 신인식을 비교하여 각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할 것이다.94)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두 종교는, 신을 지고지존이며, 이법과 인격의 동시성을 가지며, 관령현현의 권능이며, 또한 이천강세로서의 신이라 인식한다. 이처럼 삼위일체와 대순의 존재론적 신인식은 거의 유사하다.
반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점은 모두 강세 신에서 발견된다. 첫째, 삼위일체에서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이나 위격이 다르다. 따라서 강세 전에도 강세한 때에도 승천한 후에도 삼위의 위격은 둘로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천계는 한 번도 비워진 적이 없다. 성부는 비록 삼계를 관장하는 신이지만 그 위(位)의 자리는 항상 천계에 있다. 반면 대순에서는 구천의 상제도, 강세의 증산도, 화천한 상제도 모두 본질과 위격이 동일하다. 단지 상제가 관령·주재하는 곳이 어디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둘째, 삼위일체의 강세 목적은 ‘죄로부터의 인간 구원’이다. 원죄론의 틀에서 만들어진 중세가톨릭의 강세 교리다. 반면 대순의 강세 목적은 인간의 죄성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 『대순진리회요람』은 “음양합덕(陰陽合德)·신인조화(神人調化)·해원상생(解冤相生)·도통진경(道通眞境)의 대순진리(大巡眞理)에 의한 종교적 법리로 인간을 개조하여 정치적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사회적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실현하는 데”95) 강세의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해소하고 그로 인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 강세의 목적이다. 삼위일체의 강세 목적은 사실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무관하다. 역사적 예수는 원죄로부터의 인간 구원이 아니라, 도탄에 빠진 당시 유대 민중들을 구하고 유대를 평화롭고 정의로운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하나님 나라’라고 한 것은, 당시 억압 기제였던 ‘로마 황제의 나라’에 대비시키기 위한 종교적 레토릭이다. 그러니 대순의 강세 목적은, 삼위일체의 강세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작용론적인 관점에서도 삼위일체와 대순의 신인식은 유사하다. 전지전능·전선·완전·불변의 절대적인 신, 정의·공평·사랑의 신, 인과응보·상선벌악·권선징악·심판의 신, 삼계 관장의 신, 엄격한 이원론적인 위계의 신이라는 신인식은 삼위일체나 대순 모두 사실상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와 대순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삼위일체의 신은 전적인 자유의지에 따라 삼계에 개입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철저히 신에 예속된다. 반면 대순의 신은 인간과 신인의도의 관계에 놓인다. 물론 대순도 신의 위계성이 엄격하다. 하지만 강압적이지 않다.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상제의 의지를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신인식이다.
둘째, 삼위일체는 인간을 원죄적 존재로 본다. 그러나 대순은 인간을 원죄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셋째, 삼위일체는 공적으로 다신론적 범주를 인정하지 않지만, 대순은 이를 인정하며, 도리어 신명을 상제의 작용적인 현현으로 본다.
넷째, 삼위일체의 신은 절대적 타자로써, 인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예수를 통해 구원하더라도 분리된 관계는 그대로다. 반면 대순은 신과 인간의 조화를 매우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기존의 신인식에서 필요한 부분을 바람직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현대의 신학, 종교학, 과학, 철학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복잡한 논의로 들어가기 전에, 중세가톨릭의 신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이를 해결하려고 애썼던 에크하르트의 영성적 신인식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대순진리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신성과 대순의 신인식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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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순은 삼위일체와 유사한 존재론적 체계를 갖지만,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그렇지 않다. 철저하게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로만 인식된다. 이경원 교수는, “도통진경의 교의(敎義)에서는 모든 신앙의 근원이 하나로 귀일한다는 데 근거하여 그 하나의 존재가 현현하는 데 따라 근원적 일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됨을 강조한다.”고96) 했다. 도통진경은 에크하르트의 ‘하나’로서의 신성과 만날 수 있는 지점으로 보인다. 이를 발전시킨다면 위계성을 벗어난 신성으로서의 상제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증산의 상제관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서 나타난 신관이다. 따라서 도통진경을 신성의 차원에서 밝힌다면 대순의 존재론적 신인식의 난점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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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순은 삼위일체처럼 최고신의 속성을 다양하게 규정하지만,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규정 불가이며 언표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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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순의 상제는 신명(하위신)을 거느리지만,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통상적인 신(들)을 신성의 활동 현현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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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순은 상제와 세계가 분리된 것으로 보지만, 에크하르트의 신성에는 이런 분리가 의미 없다. 따라서 상제는 삼계를 관장하는 무제약적 주재자이지만, 신성은 주재하지 않으며 단지 만유의 무제약적 포괄자로서의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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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순은 엄격한 위계성을 유지하지만,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모든 위계성과 모든 이원론을 넘어서서 ‘하나’로 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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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순은 최고신의 강력한 개입을 통한 지상천국의 행복을 말한다. 반면 에크하르트는 인간의 신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행복을 얻는다고 본다. 대순의 신의 개입은 에크하르트의 ‘신으로부터의 해방’과 그 접근방식이 사뭇 다르다. 따라서 대순은 사회·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개인적인 성격이 강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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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와 달리 대순은 신인의도를 중시하고 신인조화를 종지로 삼는다.97) “신과 인간은 음과 양의 관계에서 서로 합덕됨으로써 이상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98) 본다. 이는 에크하르트의 신인합일과 유사하다. 다만 에크하르트는 적극적으로 신인합일의 성취로서 신의 탄생을 말하지만, 대순에서는 인간이 신이 되는 데 대한 언표가 다소 약하다. 하지만 대순은 도즉아 아즉도(道卽我 我卽道)를99) 말하기도 한다. 이를 신성과 연결한다면 신인조화에서 나아가 신인합일로 신인식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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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순은 안심(安心)·안신(安身)·경천(敬天)·수도(修道)를 중시한다.100) 이는 청빈·초탈·돌파라는, 마음과 몸 수련을 중시하는 에크하르트의 신인식 과정과 유사하다. “사람의 마음은 신의 중요한 용사기관이요 신이 출입하는 문이며 왕래하는 길이라(心也者 鬼神之樞機也 門戶也道路也) 하셨으니 마음의 발로(發露)에 사심(邪心)을 버리고 예법에 합당케 행하는 것”이101) 안심이라는, 『대순지침』의 안심 이해는 에크하르트 신성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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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순은 사후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와 같은 종말론적 심판 사상은 강조되지 않는다. 에크하르트의 신성도 ‘지금 여기’에 집중된다. 하늘의 문제보다 땅의 문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Ⅵ. 나오는 글 : 신성(神性)으로 본 대순진리회의 신인식
삼위일체와 대순은 공유하는 신인식도 많지만, 차이점도 있다. 또한 대순은 에크하르트의 신인식과 다르면서도 매우 유의미하게 닮은 점도 있고, 에크하르트의 신성과 관련하여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지점들도 있다.
삼위일체와 공유하는, 지고지존의 최고신, 위계적인 신, 전지전능·완전·불변·절대의 신, 이원론적인 신, 인과응보·상선벌악·심판의 신, 규정 가능한 신, 신정론, 유일한 강세 신이라는 신인식은, 현대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넘어서야 할 지점들이다.
상제의 절대 완전성과 대순 문서에 나타나는 증산의 불완전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과거 기독교가 범했던 예수 우상화와 성서 우상화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그러하다. 특정 인간이나 특정 문서를 절대화하는 신화적 교리 체계에 고착되면, 자칫 증산 우상화와 대순 문서 우상화라는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순의 문제들은 에크하르트의 신성이라는 영성적 신인식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신성은 그 어떤 위계도 분리도 배타도 없고, 안과 밖이 없으며 시간과 영원도 없으며, 선과 악도 없으며 신과 다른 타자조차 없는,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존재 양태도 그 어떤 작용 양태도 신성 안으로 수용될 수 있다. 이원론과 위계성을 포함한 모든 교권적인 신인식과 신화적 신인식을 넘어설 수 있는, 종교적·신학적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다.
한편, 신인의도와 신인조화, 인간 자유의지의 능산적 작용, 안심·안신·경천·수도의 돌파 등은 현대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대순의 매우 소중한 신인식과 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에크하르트의 영성적 신인식은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순진리회도 신인식을 끊임없이 변화·상승시켜 왔으리라 본다. 더군다나 대순은 이미 기존의 종교들(선도, 불도, 유도 서도)을 넘어서는 경험을 했다. 종교적 차이를 넘어서려 했고, 동서를 아우르려고 했다. 이마두의 시공간적 제약이 있었지만, 증산은 당시 기독교까지 포유하며 넘어서려 했다. 이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만일 그 ‘넘어섰던 시점’에 고착된다면, ‘넘어섰던 경험’의 소중함과 생동하는 생명력은 쇠락해 갈 것이다. 과거 중세가톨릭과 개신교가 이런 우를 범했다. 기독교는 이런 깨달음을 하는 데 거의 2,000년이나 걸렸다.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과정으로서의 신, 해체로서의 신, 없음으로서의 신, 규정 불가로서의 신, 이름 없는 신, 이원론과 위계가 없는 ‘하나’로서의 신, 신정론을 넘어서는 신 등으로, 신인식을 전환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인식이 반면교사가 되길 바란다.
이 연구를 통해 글쓴이가 만난 증산은 자기 시대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고착된 신격이 아니다. 인간으로서도 그런 분이 아니다. 그러니 대순 문서들에 충실하면서도 그 문서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있을 때 대순진리회의 신인식은 보다 높이 생동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시공의 모든 벽을 무너뜨리는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라는 에크하르트의 신성은, 대부분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분리적, 규정적, 이원론적, 위계적인 교리들을 넘어서는 중요한 하나의 관건이 될 수 있다. 물론 에크하르트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교권적 신인식 체계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영성의 깊이 속으로 들어갔던 인물이다. 그의 깨우침이 대순진리회 신인식의 생동·변화·승화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글이 대순진리회가 현대의 과정신학(유기체론)이나 해체 신학, 문화 신학(종교다원주의), 여성 신학, 해방신학 등과102) 교유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