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언
전북은 한국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사상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지역은 한국의 주요 사상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발전하여 결실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 사상에 근원하여 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이른바 삼교 융합의 풍류사상이 정읍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오랜 역사적·현실적 고통 속에서 대두된 불교 계통의 미륵사상, 이와 연관되어 전개된 고려 말 정읍 백운화상(白雲和尙)의 선교일체사상(禪敎一體思想)이 출현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사회적·정치적 대동사상이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및 정여립(鄭汝立) 등에 의해 전개되었고, 조선 중기에는 고려 말 정읍 백운화상의 선교일체사상을 계승한 정읍의 일재(一齋) 이항(李恒)에 의해 유교적 일체 사상인 이기일물사상(理氣一物思想)이 제시되었다. 이어서 정읍의 청하자(靑霞子) 권극중(權克中)은 실질론적 사상사의 맥락을 선교사상(仙敎思想) 방향으로 전개하여 한국 선도사상(仙道思想)의 여러 경향을 융합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양으로부터 천주교사상, 곧 서학사상이 동래(東來)하자, 이에 대한 사상사적 대응으로 전북 부안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북학/실학을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근현대사상의 출발점인 북학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학사상은 양반-사대부의 계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상사적 전략, 곧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민중 계층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사상, 나아가 서민-민중 중심의 사상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출현한 사상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사상이다. 수운은 이 사상을 전북 남원 선국사(善國寺) 은적암(隱跡庵)에서 완성하여 전북 사상계에 전파함으로써, 전북은 동학사상은 물론 동학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학사상의 한계를 인식한 전북 사상계에서는 동학이 지닌 서학 대립적 시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서학·북학·동학을 통합하고자 하는 남학사상으로, 이는 전북 진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남학 사상가들이 동학혁명의 와중에서 거의 궤멸되고, 동학사상 또한 동학혁명의 현실적 실패로 새로운 사상사적 돌파구가 폐쇄되자, 정읍의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기존의 한국 사상사 전체를 아우르고, 새로이 제시된 한국 근현대사상을 종합하는, 즉 서학·북학·동학·남학을 통합하여 본격적인 한국 근현대사상의 융합적 지평을 개척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증산의 중학사상(中學思想)인 ‘해원(解冤)-상생(相生)-대동(大同)’ 사상이다.
본고는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러한 한국 사상사, 특히 근현대 사상사에 주목함으로써, 한국 사상이 전북 사상사를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융합되어 전승되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된 기존 연구들은 본론을 전개하면서 언급할 것이며, 별도의 연구사 검토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시각의 연구가 처음 시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사를 광범위하게 검토하는 것은 한국 사상사 연구 전체를 논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연구 업적이 있다. 그것은 심천(心泉) 이강오(李康五) 선생의 『한국신흥종교총람』(한국신흥종교연구소, 전주: 대흥기획, 1992)이다. 본고는 이 연구서에 크게 힘입은 바 있음을 밝혀둔다.
Ⅱ. 전사(前史)로서 근현대 이전의 전북 사상사 전개
전북 사상사는 역사적으로 고대 부족국가시대 마한(馬韓) 지역 역사 기록에 전북 지역 사상사의 근원으로서 천지인 합일(天地人 合一) 우주생명 조화사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마한 지역 역사 기록에 보이는 ‘소도(蘇塗)/솟대 사상’이다. 이 사상은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各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1)
이 시기, 곧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부족국가시대에 전북은 마한 지역에 속해 있었다.2) 이 자료는 중국 진수(陳壽, 233~297)가 중국 삼국시대(220~265)의 사실을 기록한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마한’ 조(條)에 나오는 기록이다. 여기에는 전북 사상사의 단초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패러다임이 ‘하늘-땅-사람[天地人]’으로 이루어진다는 세계관 혹은 우주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 지역인 소도의 땅에 큰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이 지역의 제사장인 천군, 곧 사람의 대표자가 신을 섬긴다는 것은,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으며 그 사이에 사람이 산다는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늘-땅-사람’의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가능하다는 자연관 혹은 인간관을 보여준다. 이 사상은 신성한 지역인 ‘소도’에서 사람을 대표하는 신성한 제사장인 ‘천군’이 그 소도의 땅 위에 긴 장대 나무를 하늘을 향해 세우고, 그 장대 나무에 신성물인 ‘방울’과 ‘북’3)을 매달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인간 행위 중 가장 신성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사상은 후대 삼국시대에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풍류도 사상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왜냐하면 풍류도 사상 역시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과 마찬가지로 우주생명의 조화를 통해 생명을 활성화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4)
한편, 이 사상은 전북사상의 근원사상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사상의 근원이기도 하며, 우리 민족의 근원적 종교사상인 무교사상(巫敎思想)으로서 현재까지도 우리 민족사상의 근원이자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사상은 우리 민족의 원형적 신화인 단군신화에도 나타나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하늘의 천신 환웅과 땅의 여인 웅녀가 결합하여 우리 민족의 조상 단군환검을 낳는다는 서사는, 결국 ‘巫’자에 담긴 하늘-땅-사람[天地人]의 합일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한 가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부족국가시대 이후 백제 초기의 지방행정 조직인 오방(五方)의 중심지인 중방(中方)이 현재의 고부[古沙夫里], 곧 정읍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다.5)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볼 때, 부족국가시대 마한 54개 소국가들의 중요한 중심지도 현재의 정읍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정읍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이 사는 정읍을 ‘우주의 배꼽’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으며, 후대 이 정읍에서 우리나라에서 전개된 모든 사상들을 융합하고자 한 증산 강일순의 중학사상이 출현한 것도 우연한 일치만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시대의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은 전북 사상사의 가장 근원적인 사상이자 나아가 우리 민족의 근원사상이다. 이 근원사상은 이후 전북 사상의 근본 원천이 되고 기본 토대가 되어, 이 근원적 원천에서 솟아난 사상사의 샘물이 흘러 전북 사상사의 장대하고도 다양한 강줄기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상적 토대 위에서 역동적 융합과 미래지향적 변혁을 지향하는 과정으로서 전북 사상사의 역사와 세계가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북 지역의 삼국시대 사상으로는 앞선 시기에 중심을 이룬 천지인 합일의 무교사상을 기저로 하여 우리 민족의 중심 융합사상인 풍류사상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이 사상에 관한 기록인 「난랑비문(鸞郎碑文)」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사상의 핵심은 삼교 사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상에 접하면 무릇 뭇 생명들이 생명을 얻는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고 한 것을 보면, 이 사상 역시 앞선 시기의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전북 지역에 미륵사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김제 금산사와 익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무왕(武王) 1년(600)에 창건된 김제 금산사의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이 절의 미륵전은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무왕 35년(634)에 낙성된 익산의 미륵사는 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경영함에 따라 세운 삼국 제일의 큰 규모를 가진 미륵신앙의 중심 대가람이었다. 이에 관한 설화로서 백제 사람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이야기로 유명한 미륵사 건립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지고 있다.6)
이 미륵사상의 핵심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불교적 수행을 통해 불교의 미래 이상세계인 도솔천에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도솔천 극락왕생사상이며, 둘째는 이 세상에 불교적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구현한다는 용화사상이다. 이 사상은 후대 조선시대 말기 정읍 출신 사상가 증산 강일순의 후천개벽사상의 불교적 토대가 되었다.7)
남북국시대의 전라북도는 통일신라 지역에 속해 있었으며, 이 시대 말기에 풍류도에 관한 기록을 남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가 현재의 정읍 칠보·태인 지역에서 태산태수(泰山太守)를 지내면서 풍류도 사상을 이 지역에 깊이 재활성화하였다.
그는 남북국시대 말기 정읍 태산태수로 부임하여 현 칠보면 무성리·시산리[古縣內] 물가에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조성하고 그 물가에 정자를 지어 풍류 생활을 즐겼다. 이에 관한 유래와 기록들이 정읍 칠보 무성서원(武城書院)을 중심으로 유상곡수 유적 및 감운정(感雲亭) 유적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유상곡수 유적지는 고운 최치원이 이곳 태산태수로 부임했을 당시 그의 풍류사상을 몸소 실현하기 위해 조성한 일종의 음주문화 유적이며, 이와 관련된 유적지 그림이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이 그린 『칠광도(七狂圖)』에 남아 있다. 감운정 정자는 최치원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이 정자 마당에는 최치원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또한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 마을에 소재한 무성서원 태산사(泰山祠)에는 최치원을 제1위에 모시고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부족국가시대의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을 계승·발전시킨 풍류사상은 매우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사상으로서,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러 정읍 고부 출신의 경한(景閑) 백운화상(白雲和尙)의 불교 융합사상인 ‘선교일치사상’으로 새롭게 전개되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출현한 미륵사상은 이 시대에 이르러 김제 만경 출신 사상가 진표율사 등에 의해 한층 더 심화·강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독특한 참회 의식의 수행법인 ‘점찰법(占察法)’에 있다. 이 불교적 인식 방법론은 석가모니의 입적 후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불자들이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 부딪쳐 수행에 곤경을 겪게 되고, 산란한 마음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질 때, 전생의 선악업보와 현생의 고락길흉(苦樂吉凶)을 점찰하여 참회하고 반성함으로써 자심(自心)의 안락을 얻도록 하기 위한 인식론적 참회 수련 방법이다. 이는 일종의 불교적 인식론으로서 불교의 선종사상과 교종사상의 융합적 통찰을 지향하는 사상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진표율사의 새로운 융합적·직관적·미래지향적 통찰법은 후대 이 금산사를 근원지로 하여 조선 후기에 수많은 민중종교 및 신종교 사상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증산 강일순이 창도한 해원-상생-대동 사상을 중핵으로 하는 중학사상, 곧 증산사상이다.
이 시대는 고운 최치원이 우리나라의 현묘한 도로서 풍류도가 있음을 기록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기와 곧바로 이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풍류도가 이 시대에도 전승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서 그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것은, 이 시대의 풍류사상이 강력한 불교사상의 지배력으로 인하여 표면적으로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고 잠재적으로 복류(伏流)하며 이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시대의 ‘풍류(風流)’라는 말은 ‘천령(天靈)·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인 팔관회(八關會)와 관련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이 시대의 팔관회는 『고려사(高麗史)』에 신라의 선풍(仙風), 곧 화랑도(花郞道)/풍류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인종 때의 인물 곽동순(郭東珣)의 「팔관회선랑하표(八關會仙郞賀表)」라는 글에는 “풍류가 역대에 전해 왔고, 그 제작(制作)이 본조(本朝)에 와서 경신(更新)되었으니”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풍류의 전통이 이 시대에 와서는 산악숭배와 연관된 팔관회와 같은 축제 행사로 변화되어 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
이 시대 직전인 후삼국시대부터 이 시대 초기까지는 미륵신앙이 매우 성행했으나, 고려가 안정적인 정권으로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특별히 미륵신앙에 관심을 가진 승려가 많지 않았다. 또한 미륵신앙을 중시하는 법상종이 선종이나 화엄종의 세력에 의해 중심에서 밀려남으로써, 이 시대 미륵사상은 앞선 시기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함께 갖춘 형태로는 다시 융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전북 지역에서는 미륵사상이 지닌 미래지향적 극락왕생사상과 불교적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구현한다는 용화사상을 유지하고 활성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중심에는 특히 김제 금산사와 고창 선운사가 있었다. 금산사에서는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금산사 미륵전이, 고창 선운사에서는 벽련암 인근 마애 미륵불 석상 등이 그 중심이 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라는 기록을 보면, 전북 옥구에서 장사(長沙)/고창으로 가는 길가에 도솔사가 있었고 그곳에 미륵석상이 있었다는 기록도 확인된다.9)
그러나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고려 후기에 이르면, 민간에서는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하였다.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교화한다는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 두는 매향풍속(埋香風俗)이 많이 행해졌다. 이 시기에 고창 선운사 앞 장수강(長水江)에는 많은 양의 침향(沈香)이 매장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매향비(埋香碑)가 여러 곳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경한 백운화상(1299~1374)은 전라도 고부(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출생하여 구법(求法)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10여 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지공(指空)에게 법을 묻고 석옥(石屋) 청공(淸珙)에게서 임제종(臨濟宗)의 선법(禪法)을 전수받은 뒤 귀국하였다.
그의 사상은 선(禪)과 교(敎)가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 몸이라는 선교일체에 있으며, 무심선(無心禪)과 간화선(看話禪)이 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고려 말 불교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불교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나옹화상·보우화상과 함께 임제선(臨濟禪)의 법맥을 이었으나, 그 선풍(禪風)은 그들과 상당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의 저술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1378) 상권의 「선교통론(禪敎通論)」에서는 교10)를 부처의 말씀, 선11)을 부처의 뜻이라고 정의하고, 부처의 말씀과 마음은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과 교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부처도 중생도 없고 이름도 형상도 없는 것이므로, 자연히 선과 교가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 선과 교, 권교(權敎)12)와 실교(實敎)13), 돈교(頓敎)14)와 점교(漸敎)15) 등을 나타낸 것일 뿐, 이들에 집착하면 모두 병이 되며 참뜻에 통해야만 바른 법이 됨을 천명하였다.16)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이후 조선시대 전기에 정읍에서 전개된 일재 이항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일재는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곧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으로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들 간 갈등을 빚었던 이기론을 통합하여 이기일물론(理氣一物論)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초인본은 정읍 출신인 그가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었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인 주자(鑄字)로 인쇄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하권 1책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17) 오늘날 그가 청주 출신으로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풍류’란 말은 우리 고유의 근원적·융합적 전통 사상이 아니라 자연과 가까이하고 멋과 운치를 즐기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점차 변화되어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풍류는 사람을 사귀고 심신을 단련하는 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으며, 선비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른바 ‘유교적 풍류’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유교적 풍류사상을 대변한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가 정읍 태인에서 살았던 불우헌 정극인(1401/태종 1~1481/성종 12)이다. 그가 살았던 지역은 남북국시대 말기 고운 최치원이 태산태수를 지낸 바로 그 지역이었다. 그는 실제로 「고운 최치원을 생각하며(憶孤雲)」라는 시 등을 지어 최치원을 흠모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그가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문학 작품 「상춘곡(賞春曲)」과 그의 대표적인 한시 작품인 「벼슬을 버리며 읊다(致仕吟)」, 「불우헌의 노래(不憂軒吟)」, 「심회를 노래함(詠懷)」 등의 일련의 시가 작품들을 통해서도 풍류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그가 기존의 우리 고유 전통 풍류사상을 유교적 지평에서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다만 불교적 입장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이 점은 최치원의 사상적 지향과는 다른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18)
그의 유교적 풍류사상의 요체는 ‘물아일체’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을 그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 엇더고, 녯 사 風流 미가 미가. 天地間 男子 몸이 날만 이 하건마, 山林에 뭇쳐 이셔 至樂을 것가. 數間茅屋을 碧溪水 앏픠 두고, 松竹 鬱鬱裏예 風月主人 되어셔라.
엊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 오니 桃花杏花 夕陽裏예 퓌여 잇고 綠楊芳草 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造化神功이 物物마다 헌다 수풀에 우 새 春氣 내계워 소마다 嬌態로다 物我一體어니 興 이 다소냐.19)
그의 이러한 풍류사상은 바로 앞선 시기 정읍 출신 백운화상이 주장한 “선과 교는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몸”이라는 선교일체 사상, 무심선(無心禪)과 간화선(看話禪)의 융합 사상과 연결되며, 더 거슬러 올라가 부족국가시대 마한 지역 및 단군신화의 천지인 합일사상, 삼국시대 이후의 생명적 일체 사상인 풍류사상과도 긴밀히 연결되는 사상이다.
이후 조선 중기에 와서는 정읍에서 학자적 삶을 영위한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일재 이항에 의해 창조적으로 계승되어, 그의 획기적인 철학사상인 ‘이기일물설’로 심화·확장되었다. 정극인의 이 유교적 풍류사상의 요체인 ‘물아일체’ 사상과 조선 중기 일재 이항의 ‘이기일물설’ 사이의 사상적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불우헌 정극인의 이러한 성리학적 풍류사상은 같은 칠보 출신 조선시대 중기의 유명 문인 눌암(訥庵) 송세림(宋世琳, 1479/성종 10~1591/중종 14)에게 이어져, 그의 유명한 풍류문학 저서 『어면순(禦眠楯)』을 낳게 하였다.
한편, 불우헌 정극인은 조선 전기에 이미 대동(大同)-공동체사상을 강하게 추구하고 이를 현실화하여 주목된다. 그는 75세 때인 1475년(성종 6)에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 마을 인근의 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관권의 개입 없이 마을 자치의 자발적 향약인 ‘고현향약(古縣鄕約)’을 실시하였다. 이는 위로부터 관 주도로 실시된 향약의 시초로 알려진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향약보다 무려 90여 년 앞선 것이다.20) 불우헌이 이 향약을 만들어 실시한 목적은 마을 주민들의 예의·화목·상호부조 등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다.21) 불우헌이 이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자발적 자치 향약을 창안·실시하였다는 것은, 후술할 그의 ‘신분 해방 사상’과 함께 그의 자주적이고 공동체적인 사상의 선각적 위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불우헌은 또한 놀랍게도 조선 초기에 민주적 신분 해방 사상을 드러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시정의 폐단을 진달하는 상소(致仕後陳獘疏)」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종공신23)은 비록 여덟 공신의 특별한 은총에는 미치지 못하나, 충훈부24)와 충익부(忠翊府)25)의 둘로 병립하여 있고, 대려26)의 바램과 숭화27)의 축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점에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신이 원하옵건댄, 공적인 첩이든 사적인 첩이든 간에 첩의 자식들은 아버지 혈통을 따라 그 신분을 양인28)으로 취급하여 백성이 바라는 아름다운 정사를 가다듬는 것이 어떠할까 하옵니다.29)
이상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공적인 첩이든 사적인 첩이든 간에 첩의 자식들은 아버지 혈통에 따라 그 신분을 양인으로 취급하여 백성이 바라는 아름다운 정사를 가다듬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갑오경장에서와 같은 완전한 신분 해방의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혈통에 따라 자식들의 신분을 결정하자는 말은 당시 백성들의 신분 차별 문제를 최대한 폭넓게 해결하고자 하는 불우헌의 의도가 강하게 담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눌암 송세림(1479/성종 10~1591/중종 14)은 전북 태인 고현내(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일대) 출신으로, 조선 초기 불우헌 정극인의 유교적 풍류사상을 계승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대표적인 업적이 그의 『어면순(禦眠楯)』이란 책이다.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서문에서 눌암의 풍류사상적 면모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가 있다.
선생은 … 취은(醉隱)이라 자호하고 강호로 물러나 양생하였는데, 한가로운 시간을 때우면서도 해롭고 난잡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여, 촌사람과의 대화에서 잠을 달아나게 할 만한 것을 주워 모아 맹랑한 말이라고 칭탁하면서 약간의 이야기를 저술하니 이름하여 ‘어면순(禦眠楯)’이라고 하였다.
그 안에 있는 사신(史臣)의 논평은 공자의 춘추(春秋)가 쇠퇴해진 세상의 인심을 경계하는 것과 같으니, 선생이 이 책에 둔 뜻은 익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유교의 일단을 부추기고자 한 데 있으니, 그 뜻이 은미하도다. 옛날 현달한 자들 사이에도 술에 칭탁하여 혼돈한 곳으로 도피한 자도 있었으며, 지나치게 과장하고 수식하여 분분히 희롱하는 글을 지은 자도 있었으나, 이는 청허(淸虛)한 마음에 누가 되는 것이요, 헛되고 한탄함으로 돌아가는 데 불과하니, 어찌 취할 수가 있겠는가. …
호산군 송세형 삼가 쓰다.30)
이 글은 눌암의 동생 송세형(宋世珩)이 쓴 서문인데, 여기에는 눌암 풍류사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것은 “강호로 물러나 양생(養生)하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때우되 해롭고 난잡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여, 촌사람과의 대화에서 잠을 쫓을 만한 것들을 주워 모아 맹랑한 말이라고 칭탁하면서 이야기를 짓는 것으로서, 그 의도는 익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은미하게 표현하여 유교의 일단을 부추기고자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 풍류사상을 유교적 심심파적(尋尋坡適)의 방향으로 전개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전북사상은 초기의 불우헌 정극인에서 싹튼 대동-공동체-민주사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바로 정여립(鄭汝立, 1546/명종 1~1589/선조 22)의 대동사상이다. 그의 이 사상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려우나, 관련 기록들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곧 천하는 모두 공물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강력한 왕권시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민주적 사상의 비전이다.
둘째, 그가 주장한 “어느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이른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당시 왕조정치의 불문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왕권 교체의 정당성을 주장한 혁명적 사상이다.31)
일재 이항(1499/연산군 5~1576/선조 9)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40세 때인 1538년(중종 33)에 전라도 태인(현 전북 정읍시 북면 분동리)로 모친을 모시고 내려와 이곳 칠보산 아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이곳에서 서거하여 묻혔다.
그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성리학의 본질론인 이기설에 있다. 그는 율곡 이이의 주기설과 퇴계 이황의 주리설을 공허한 명목론이라 비판하고, 본질적 속성인 이(理)와 기(氣)는 그 자체로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불가시적 이념일 뿐이며, 이러한 이념은 오직 구체적인 사물(事物)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이기일물설’을 주장하였다.
… 그대는 … 상일권의 이(理)와 하일권의 도(道)를 분변하지 않고 통틀어 태극(太極)은 음양에 섞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또 역(易)에도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는다.”라고 했으니, 대개 양의가 아직 생기기도 전에 양의가 어디에 있으며, 양의가 이미 생긴 후에는 태극의 이(理)가 또한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면에서 깊이 생각하고 밝게 분변한다면 거의 이기(理氣)가 혼연한 일물[理氣一物]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태극이 아직 양의를 낳지 않았을 즈음에 양의는 지실로 태극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만, 태극이 이미 양의를 낳은 후에는 태극의 이理가 또한 양의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며 양의가 생기지 않는 것과 이미 생긴 것은 원래 태극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서로 떨어져 있다면 물(物)이 없습니다. 아! 도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른바 “서로 떨어지면 물이 없다[相離則無物]라는 다섯 글자를 평범하게 보시지 알기를 바랍니다.
또한 천(天)과 인(人)이 일리(一理)이니, 사람의 지각·운동과 강·약·청·탁의 기(氣)가 한 몸에 충만한 것과 같은 음양의 기(氣)이고, 인·의·예·신 따위가 기(氣)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은 태극(太極)의 이(理)입니다. 그렇다면, 이(理)와 기(氣)가 한 몸 안에 있으니, 이물(二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일체(一體)가 됩니까? 아니면 이체(二體)가 됩니까? 이를 다시 정밀하게 체인(體認)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대가 또한 일찍이 나에게, “형이상자(形而上者)는 도(道)가 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는 기(氣)가 되니, 그렇다면 태극과 음양은 일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셨으나, 대개 도(道)와 기(氣)는 비록 상하의 나뉨은 있으나, 태극과 양의는 정밀함과 거침이 원활하게 융통하고 끝이 없어 일체(一體)가 되는 것입니다.32)
이상에서 인용한 부분을 통해 일재 이항 성리학의 주요 핵심을 다음과 같이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이(理)와 기(氣)는 불가시적인 사물의 본질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이러한 본질 개념은 우리가 직접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하나의 사물로 존재한다[理氣一物, 相離則無物說].
둘째,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는 하나이다[天人合一, 人心道心說].
셋째, 이와 기 중에서 기가 이보다 먼저 움직인다[氣先動說].
이러한 일재의 성리학 이기론 학설은 본질론에 속하는 율곡 이이의 주기설 이론과 퇴계 이황의 주리설 이론을 실질론의 지평에서 재사유하여 ‘이기일물설’로 재정립한 것이다. 이는 서양 철학으로 비유하자면,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의 본질론/명목론/이념론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질론/실재론/실물론 철학으로 전환시킨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일재 이항의 이기일물설 성리학 이론은 조선 성리학 사상의 일대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전북 사상사 전개를 명목론에서 실질론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상은 일재 이항의 독자적 창안이 아니라,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부족국가시대의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 삼국시대 이후의 풍류사상 및 미륵사상, 그리고 고려시대 이 지역 사상가 경한 백운화상의 선교일체사상 등의 유구한 사상사적 전통의 기반 위에서 수립된 독특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선교사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토착사상33)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상은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와 도선사상(道仙思想)의 ‘한국적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한국 사상사적 정체성 탐구가 시작되었다.34)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읍 고부 출신 청하 권극중(1585/선조 18~1659/효종 10)에 의해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탐구됨으로써 유불선적 통합적 시각이 마련되었으며, 이러한 시각을 그는 우주론·인성론·실천론 등에 걸쳐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그의 신선사상/내단사상은 다음 네 가지 방향, 곧 내단주체론(內丹主體論)·단역참동론(丹易參同論)·선불동원론(仙佛同源論)·선단호수론(仙丹互修論)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내단주체론이란 선도 수련 중 외단(外丹)이 아닌 내단의 방법을 선인에 이르는 중심 방법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둘째, 단역참동론이란 내단 수련의 원리와 주역사상을 일치시키는 논리이다. 셋째, 선불동원론이란 내단에서 추구하는 선인의 경지와 불교에서 추구하는 부처의 경지가 서로 상통한다는 것을 말한다. 넷째, 선단호수론이란 불교의 선정(禪定) 수련과 선도의 내단 수련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35)
이렇게 청하 권극중은 우리나라 도선사상에서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지평의 유불선 융합사상을 개척하였다. 이러한 사상사적 모색은 우리나라 도선사상에서의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으며, 훗날 조선 말기 남학·동학, 특히 중학사상/증산사상을 전개한 증산 강일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Ⅲ. 한국 근현대 종교사상사의 중심으로서 전북 사상사 전개
서학36)이란 말은 『삼국유사』에도 나오지만, 이때의 서학은 서역 지역의 불교사상을 의미하였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서학은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해 조선에 유입된 서양의 사상·학문·과학기술·천주교 신앙, 특히 천주교 사상을 지칭한다. 이 일련의 사상적 경향은 대체로 17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서학이 우리 사상사에 영향을 준 주요 논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으며, 이러한 점들은 전북 사상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첫째, 세계관을 동양 중심의 천동설에서 전 세계 중심의 지동설로 전환한 점, 둘째, 이로 인한 근대적 과학적 세계관 및 과학기술의 도입을 주장한 점, 셋째, 관념주의적 사상·철학 중심에서 실질론적 사상·철학으로 전환시킨 점, 넷째, 서양 기독교 사상에 의한 봉건적 도덕·윤리관의 해체가 시작된 점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서학 사상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실질론적 사상사 전통이 매우 강력하게 축적·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우선 이 시대 바로 앞선 시기의 청하 권극중의 실질론적 선도사상, 그 이전 일재 이항의 이기일물설 사상, 그 이전 불우헌 정극인의 물아일체사상, 그 바로 이전 고려 말 경한 백운화상의 선교일체사상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풍류사상과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 등의 자주적 실질론 사상사의 맥이 강하게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이러한 새로운 서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서학에 대응하는 북학 사상이 대두되었다. 이 북학/실학의 길을 처음으로 연 학자가 바로 전북 부안에서 학문을 전개한 반계 유형원(1622/광해군 14~1673/현종 14)이었다. 우리나라 북학/실학의 단초가 전북 지역에서 마련되었다는 것은 전북 사상사가 다른 지역의 사상사보다 실질론적·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성이 강했다는 점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나라 실학/북학은 이후에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등 이른바 ‘기호남인(畿湖南人)들’, 곧 전라도 지역에서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중 다산은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다.
정약용의 고종사촌이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7세손인 진산/금산의 윤지충(尹持忠, 1759/영조 35~1791/정조 15)37)은 정약용 형제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자신의 이종사촌인 전북의 유항검(柳恒儉, 1756/영조 32~1801/순조 1)에게 천주교를 전하여 전라북도에 천주교의 불씨를 전달하였다.38)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북학사상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전반적으로 서양 근대 패러다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둘째, 종래의 중화주의를 또 다른 중화주의, 곧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서양 중심의 세계관으로 대치하는 반자주적 경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 셋째, 동서양 사상을 아우르는 범세계적 사상적 사고의 지평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 등이다.
앞에서 논의한 서학 및 북학의 한계가 분명해지자 전북의 사상가들은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전북 사상계에 큰 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경상도 경주 출신 수운 최제우(1824/순조 24~1864/고종 1)가 동학을 창도한 것이었다.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경상도 구미에서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였지만, 그가 현재 전하고 있는 『동경대전(東經大典)』의 절반 이상은 그 후 1862년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전라북도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서 피신 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동학사상을 전북 남원에서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즉, 그의 중요한 종교사상이 구체화된 「논학문(論學文)」·「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은 모두 이곳 남원 은적암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적으로 그의 사상은 먼저 남원·임실·정읍 등지로 전파되었고, 1894년 정읍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대략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이고, 둘째는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1898/고종 35)이 제시한 ‘향아설위(向我說位)’39) 사상, 셋째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다. 시천주 사상은 초월적 천주를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만물 속에 ‘모심’으로 체현하여 천인합일을 지향하는 내재적 신관·실천 윤리이고, 향아설위 사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종의 종교적 착취구조로 작동해 온 신을 최고의 존재로 대상화하고 이러한 대상화 제도를 통해 인간들을 착취해 온 종교적 억압·착취구조에 대한 강렬한 저항 사상이며,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하늘처럼 존귀하다는 보편적 인간 존중 사상이다.
동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상사적 특성을 지닌다. 첫째, 이 사상은 우리 민족의 토착 전통 사상인 무교사상, 곧 천지인 합일 우주생명 조화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둘째, 이 사상은 우리나라 양반·사대부 중심으로 서학에 대응하기 위해 전개된 북학/실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추구되었다. 셋째, 조선 중기 정읍 태인의 일재 이항이 전개한 천인합일론, 곧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는 하나이다’라는 주장이 이 사상에 반영되어 있다. 넷째, 이 사상에 이르러 비로소 수천 년 우리 역사에서 지배자 위주의 사회적 계급 체계를 타파하는 민중적 자주 사상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전북 지역에서 혁명적 실천가들을 중심으로 민중혁명적 방향으로 전개되어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발발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읍의 전봉준·김개남·송화중, 김제의 김덕명 등이었다. 동학의 혁명적 실천 사상은 첫째 반봉건-민권의식, 둘째 반외세-자주의식을 기본으로 하였다.40)
그러나 동학사상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사상은 서학에 대응하되 양반·사대부 중심이 아닌 서민·민중 중심의 대응 자세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기존 사상과 차별화되었다. 그러나 서양사상까지 아우르고 융합하고자 하는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자세와 방향성은 극히 미약하였다.
동학이 이러한 한계에 빠지게 되자 이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일련의 사상적 모색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전북 진안을 중심 근거지로 전개된 중학 지향의 새로운 사상 곧 남학(南學)이었다. 남학에서부터는 증산 강일순의 사상에 매우 지대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이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강오의 『한국신흥종교총람』에 의하면, 남학은 그 계통이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순조26~1898/고종25)의 ‘일부계 남학’과 광화(光華) 김치인(金致寅, 1855/철종6~1895/고종32)의 ‘광화계 남학’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계통의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부계 남학사상은 일부 김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상으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남학 계통은 주로 중국 선대의 유학사상, 특히 주역사상(周易을 중시하여 새로운 사상사적 변화를 역(易)의 변화로 설명하고자 한다. 일부는 중국 복희의 팔괘를 ‘제1역(第一易)’이라 부르고, 그 다음 문왕(文王)의 팔괘를 ‘제2역(第二易)’이라 부르며, 자신이 만든 역을 ‘제3역(第三易)’, 곧 세 번째 역이라 부른다. 그리고 앞의 두 역을 모두 ‘선천시대’의 역이라 하고 자신의 역을 ‘후천시대’의 역이라 한다. 그는 자신의 이 역이 기존 선천시대의 문제들을 새롭게 개혁하는 새로운 시대, 곧 ‘후천개벽’의 변화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
둘째, 구체적인 사상적 수련 방법으로서 ‘음·아·이·어·우’ 5자를 외우는 ‘오음주(五音呪)’라는 수련 방법과 이 오음주에 맞추어 무도(舞蹈)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일부계의 심신 수련 방법으로 인해 일부계 남학을 사람들은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라고도 부른다.
셋째, 남학은 전반적으로 시간적·역사적 변혁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것이 일부 김항이 저술한 『정역(正易)』이 담고 있는 역사적 변화의 원리이다. 이 변화 원리와 관련하여 ‘일부계 남학’의 『정역』 사상은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중요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정역』은 ‘간괘(艮卦)’를 머리 괘로 하여 구축되는 사상인데, 이 간괘는 시간적으로는 겨울과 봄의 교차점을, 공간적으로는 낡은 것들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는 곳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리상 동북방에 위치해 있고, 이 동북방은 바로 간방(艮方)이므로, 한국은 앞으로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곳이 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상은 중학사상인 증산 강일순의 증산사상의 선각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광화계 남학은 앞서 살펴본 일부계 남학과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서로 같은 방향의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인다.
첫째, 이 사상은 불교 쪽과 가까이 있다. 그래서 남학을 일명 ‘오방불교(五方佛敎)’라고도 부른다. 이런 오방사상의 측면에서 광화계 남학은 다음과 같은 ‘오학질망설(五學迭亡說)’을 내세우고 있다.
서학은 동학에 망하고, 동학은 북학에 망하고, 북학은 남학에 망하고, 남학은 중학에 망한다(西學亡於東學 東學亡於北學 北學亡於中學).42)
둘째, 일부계 남학이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새로운 차원에서 융합하려는 방향을 취한 반면, 광화계 남학은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 사상을 새로운 차원에서 융합하려는 방향을 지향한다.
셋째, 일부계 남학이 유교의 역학적·주역적 이론에서 후천개벽의 원천을 찾고자 한 반면, 광화계 남학은 민중불교의 미래지향적 사상인 ‘미륵신앙’에서 그 사상의 원천을 찾고자 하였다. 앞서 언급한 오음주를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는 점도 다른데, 오음주는 동서남북 및 중앙에 각기 위치한 오방불(五方佛)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고, 오방불의 중앙에 위치한 불이 바로 중심불인 용화불(龍華佛)이라 본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남학이 동학과는 달리 중학 지향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일부계 남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일부계 남학에서는 오음주 이외에 다른 주문을 외우면서 영가무도를 하는 경우가 드문 데 비해, 광화계 남학에서는 오음주 외에도 각종 염불·진언(眞言)·칠성주(七星呪) 등의 각종 주문과 기도문·경문(經文) 등이 많이 있다는 점도 다르다. 이는 광화계 남학이 수련보다는 기축(祈祝), 즉 기도와 축원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43)
다섯째, 일부계 남학이 시간적·역사적 변혁을 강조한다면, 광화계 남학은 공간적 변혁의 방향을 지향하여 서학 → 북학 → 동학 → 남학 → 중학의 방향성을 추구한다.
여섯째, 광화계 남학은 천인합일 음양조화의 우주·자연관, 사해동포주의 인생관, 궁궁을을(弓弓乙乙)[호호세계(呵呵世界)] 무상지도(無上之道)의 이상관, ‘나눔-상생-대동’의 경제관 및 공공소유론 등을 주장하였다.44) ‘나눔-상생-대동’의 경제관 및 공공소유론은 광화계 남학 사상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경제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즉, “천지신명은 경제의 기틀을 공평하게 마련하여 곡식을 공평히 나누어 먹도록 해 놓았는데, 육축(六畜)으로 환생한 짐승들, 곧 자기의 욕심만을 무한히 추구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그러한 나눔의 경제 기틀이 파괴되었다. 모든 사람은 동기간(同氣間)이기 때문에 함께 더불어 나누어 먹어야 한다. 만석군(萬石君)도 밥 한 그릇 술 한 잔밖에 못 먹는다.”45)
뿐만 아니라 국토는 개인 소유의 땅이 아니며, 부모, 곧 나라의 땅이기 때문에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고 개인은 소유할 수 없다고 한다. 특히 악랄한 부자는 ‘단단한 땅’이라서 거기에 물은 고이지만 샘물은 솟아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 상호 조화로운 순환과 재생을 ‘샘물’에 비유하여 생명사상적 경제학의 지평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이다.46) 이러한 광화 김치인의 ‘나눔-상생-대동의 경제관 및 공공소유론’ 사상은 앞서 살펴본 조선 중기 정여립의 사상사적 맥락과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광화계 남학의 방향은 서학에 대응하여 일어난 북학의 상류층적 계층적 한계와 민중적 입장에서 서학에 대응하고자 한 동학의 서학 대립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동학과는 달리 중학 지향성, 곧 서학·북학·동학·남학을 새로운 사상사적 지평에서 융합하고자 하는 방향을 추구하였다. 이는 동학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융합적 방향을 모색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남학은 다음과 같은 사상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남학은 모든 사상을 아우르고 융합하고자 하는 중학 지향성을 가졌으나, 실제로 그렇게 추구된 융합사상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 사상은 그러한 변혁의 방향을 유교 주역의 전통인 변혁사상과 불교의 미륵하생 사상의 한계 내에서 추구하고 모색되었다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둘째, 이 사상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토착 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어떤 사상이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그 근원으로의 회귀, 곧 ‘원시반본(原始反本)’적 회귀의 모색이 필요한데, 남학 사상가들은 우리 민족의 원천적 토착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중국의 유교적 전통과 인도의 불교적 전통에서 자신들의 사상사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그들의 스승이었던 연담(蓮潭) 이윤규(李雲圭)가 제자인 김항과 김광화에게 각각 유교와 불교를 새로운 사상사 탐구의 전범으로 제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남학은 광화 김치인의 사망(1895)과 일부 김항의 사망(1898)으로 침체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무렵은 1894년 4월 동학이 정읍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전개되었다가 관군과 일본군의 진압으로 12월에 좌절되고, 그 영향으로 같은 해에 이천 년 역사 이래 계급사회가 붕괴되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실시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광화계 남학의 창시자 김치인은 혁명 가담을 이유로 1895년 전주에서 처형되었고, 일부계 남학의 창시자 김항도 김치인이 사망한 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급격한 시대·사회적 변화와 두 남학 창시자의 사망은 남학사상의 발전을 중단시켰다. 왜냐하면 이들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현실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대·사회적 여건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앞서 지적한 남학 자체의 사상적 한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기에 정읍군 이평면 객망리 손바래기 마을에서 새로운 사상가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증산 강일순(1871~1909)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던 해인 1894년에 그는 24세였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미리 예견하고 동학군을 따라 공주 우금치 인근까지 가면서 동학군을 만류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동학농민군을 중심으로 한 당대 우리나라 백성들의 크나큰 고통과 참담한 현실을 몸소 체험한 상황에서 그는 깊은 사상사적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강증산의 이러한 사상사적 고민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고, 이때까지 전개되어 온 우리 근현대 사상사 전반을 새로운 차원과 지평에서 종합적으로 비판·재검토하는 매우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이러한 고통과 고민을 안고 그는 멀리 북만주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떠돌며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현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동사면에 위치한 대원사(大願寺)란 절로 들어갔다. 그는 오랜 기간 고심한 끝에 마침내 지금까지의 우리 사상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융합적 사상사의 지평에 도달하여 새로운 사상을 내어놓게 되었다.
이로부터 전북 사상은 그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융합적 전기와 지평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방향은 ‘중학’, 곧 동서남북 전 세계의 모든 사상들을 우리의 새로운 근현대적 사상사의 총체적 지평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중학 지향적 융합이었다.
증산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학’이었고, 그중에서도 ‘일부계 남학’, 곧 『정역(正易)』 사상이었다.
이 사상의 핵심은 시간적·역사적 변혁의 지평을 우리 사상사에 부여한 것이며, 그 사상사적 변동의 체계는 중국 복희팔괘를 ‘제1역’, 그다음 문왕팔괘를 ‘제2역’, 그리고 자신이 만든 역을 ‘제3역’, 곧 ‘정역’이라 명명하였다. 이 중 제1역은 천지자연의 소박한 자연역으로서 무문자 시대의 역이며, 제2역은 복잡한 인간역으로 문자 시대의 역이라 하였다. 이에 비해 자신의 제3역, 곧 정역은 제1역인 복희의 자연역과 제2역인 문왕의 인간역을 융합·조화시킨 조화역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1역은 선천시대의 역, 곧 과거의 역이며, 제2역은 현재 시대의 역, 곧 현재의 역이고, 자신의 제3역은 후천시대의 역, 곧 미래의 역이라 하였다.
이러한 일부 김항의 변혁 논리는 증산 강일순에게도 나타났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정역』 사상의 변혁 논리는 융합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변혁 논리는 과거 논리와 현재 논리의 융합, 자연 논리와 인간 논리의 융합, 무극 논리와 태극 논리의 융합을 지향한다. 이러한 융합적 논리는 증산으로 하여금 기존 동양 사상과 논리를 융합적으로 사고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사적 과제도 그러한 융합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정역사상은 그 근저에서부터 주체적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정역사상은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정역』은 간괘(艮卦)를 머리 괘로 하여 구축한 사상인데, 우리나라가 지리상 동북방에 위치해 있고 이 동북방은 바로 간방(艮方)이므로, 한국은 앞으로 새로운 문명과 문화가 시작되는 곳이 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47)
증산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 사상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사상보다도 전 세계적 범위에 걸쳐 총체적이고 융합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서학·북학·동학·남학 사상을 하나로 융합하고자 하는 사상적 특성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증산의 말 중에 ‘오선위기설(五仙圍碁說)’이라는 비유적·상징적 언술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하 대세가 오선위기(五仙圍碁)와 같으니 두 신선이 판을 대하고 있느니라.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는데 한 신선은 주인이라 어느 편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하고 다만 대접할 일만 맡았나니 연사에만 큰 흠이 없이 대접만 빠지지 아니하면 주인의 책임은 다한 것이로다. 바둑이 끝나면 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려지리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48)
오선위기형 명당은 전북의 명산인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있다. 증산을 이에 대해 네 명의 신선이 편을 나누어 각각 바둑을 두다가, 판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바둑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아간다고 풀이했다. 흔히 이 비유는 약소한 한국이 국운을 회복하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상등국(上等國)으로 오른다는 식으로 해설된다.
그러나 해설은 한 가지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선위기에 대한 증산의 설명에서, 바둑을 두는 네 명의 신선을 각각 서학·북학·동학·남학이라는 네 개의 ‘사상’일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가능하다면, 네 신선 즉 서학·북학·동학·남학이 밤을 지새며 겨루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주인이 곧바로 등장한다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주인을 서학·북학·동학·남학이 지고 난 후에 등장하는 ‘중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해설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오선위기설은 증산 자신이 펴는 사상이 서학·북학·동학·남학, 나아가 세계 동서남북(이것도 네 명의 신선에 대응할 수 있다) 모든 사상을 두루 종합하는 지평에서의 융합을 지향한다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한, 매우 탁월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증산은 동서양 사상의 융합적 지평을 추구하면서, 그 사상의 원천은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근원적 토착 사상인 무교사상에 두고 있다. 다음과 같은 증산의 발언은 이러한 그의 사상적 근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비유적 발언이다.
상제께서 하루는 무당 도수라 하시며 고부인(高夫人)에게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치시며 “이것이 천지(天地) 굿이니라.” 하시고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요 나는 천하 일등 재인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서 빌어야 살리라.”고 하셨도다.49)
강증산의 이 발언은 종교·정치·사상사적으로 큰 전환기적 위기의 시대인 우리나라 근현대 사상사의 전환기에, 민족 사상사적 ‘원시반본’의 일차적 처방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종교·사상사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 원천사상인 무교사상으로 원시반본하는 사상사적 특징을 보여 왔으며, 증산 역시 그의 종교사상적 변환(transformation) 논리의 구축을 위해 전통 토착 사상인 무교사상에 주목하고 있다.50)
그의 어법은 늘 비유적·상징적·중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 발언 중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 가야 살리라.”고 한 말에서의 ‘무당’은 ‘무당(無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발언에서 지향하는 방향은 기존의 어떤 당(黨)이 아니라 기존의 그 어떤 당도 아닌 새로운 당 또는 비전을 찾기 위한 원시반본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상징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통과의례를 연구한 판 헤네프의 이론을 참고하여, 인간은 삶의 중요한 변환을 기하고자 할 때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일정 기간의 탈 일상 상태, 곧 ‘리미널 영역(liminal domain)’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 대표적 사례로 성인식·결혼식·장례식 같은 것을 들었는데, 이러한 리미널 영역은 인간 삶의 새로운 전체적 변환을 위해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잠재적 영역임을 그의 저서 『제의에서 연극으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51)
이러한 리미널 영역은 증산과 같은 종교 사상가가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새로운 사상, 곧 실패한 동학과는 다른 새로운 성공 가능한 사상을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환을 위한 그 나름의 리미널 영역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때문에 우리의 토착 전통 사상인 무교사상을 주목한 것이다.
전통 무교사상에서 그가 발견한 가장 소중하고 혁명적인 사상의 비전이 바로 ‘해원(解冤)’ 사상이다. 해원 사상은 우리 전통 무교사상의 중요한 핵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무당굿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죽은 자의 원혼에 맺힌 한을 풀어[解冤] 그의 영혼을 저승으로 천도(薦度)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지방의 진오귀굿, 호남 지방의 씻김굿 등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굿이다.
강증산은 그의 새로운 사상사적 변환을 도모하기 위해 전통 샤머니즘의 해원사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보다 확대 발전시킴으로써 새로운 시대·사회적 사상사 전환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사적 모색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당대 시대·사회의 맥락을 전제로 일종의 무의식적 종교 혹은 민속 종교인 무교의 사상을 의식적 혹은 전문 종교적 차원의 사상으로 혁신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변환을 토대로 자신의 사상적 사고의 폭과 깊이를 전 세계의 사상사적 지평 전반으로 확장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52)
증산사상의 핵심은 기존 사상사의 폐쇄적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상, 곧 세계 동서남북의 다양한 사상들을 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방향의 사상적 패러다임 체계화의 핵심을 그는 ‘천지공사’라고 명명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요체는 바로 이 천지공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새로운 사상사적 패러다임으로서 이 천지공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운도공사(運度公事), 둘째 신명공사(神明公事), 셋째 인도공사(人道公事)가 그것이다.
‘운도공사(運度公事)’란 시대적 변화의 방향에 관한 사상 패러다임의 혁신적 변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시대적 패러다임 변환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그가 만난 일부 김항(1826~1898)의 후천개벽 사상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증산도 이 김항의 새로운 역(易), 곧 새로운 변환 논리를 정역의 논리에 따라 그의 운도공사를 체계화하고 있는데, 이 운도공사는 구체적으로 액운공사(厄運公事), 세운공사(世運公事), 교운공사(敎運公事), 지운공사(地運公事)로 나누어진다.
① 액운공사(厄運公事) : 액운공사란 선천시대와 후천시대가 바뀌는 시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액운들을 모면하는 공사를 말한다. 이는 다시 ‘신명 해원 공사’와 ‘의통(醫通) 전수 공사’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우리나라 전통 무교사상의 해원굿 전통을 혁신적으로 재창조하는 방향이고, 후자는 전통적 한의학·한약·비방(祕方)·주술·부적 등의 의술을 현대적으로 재활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방법의 구체적 실행을 위해 그는 조선 중기 정여립이 살던 제비산 옆 골짜기인 현 김제시 원평면 동곡마을/구릿골에 ‘만국의원(萬國醫院)’이란 이름의 동곡약방을 설치하고 이른바 ‘의통제세(醫統濟世)’의 수행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현상의 각종 비방·주문·부적 등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이를 활용하도록 하였다. 이 중 특히 시천주(侍天主)·태을주(太乙呪)·오주(五呪)·칠성주(七星呪)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중에서 시천주는 동학의 주문이므로 증산이 동학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② 세운공사(世運公事) : 세운공사란 세상의 운도를 조정하여 상극투쟁의 혼란에 빠진 세상을 서로 상생-대동하는 평화로운 세계로 변화시키는 공사를 말한다. 이러한 공사의 구체적 방법은 상극(相剋)으로 누적된 원한으로 상도(常道)가 붕괴하였으니, 그 묵은 원한을 풀고 새 도수(度數)를 정립하여 상생(相生)의 운을 개창하는 것이다.
③ 교운공사(敎運公事) : 교운공사에서 ‘교(敎)’란 전 세계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종교들, 즉 무교·음양·풍수·도참(圖讖)·도교·유교·불교·기독교 등의 정수를 뽑아 융합시킨 새롭게 창도된 종교를 의미한다. 이 융합의 길을 제시하는 이는 증산 그 자신이다. 그 종교 사상의 융합적 작업을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선위기설의 비유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교운이란, 바로 이 새로운 융합 종교의 운로를 말한다.
④ 지운공사(地運公事) : 지운공사란 각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신과 그 지역의 운수, 곧 지운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를 바로잡는 공사를 말한다. 증산은 지금까지 지기(地氣)가 통일되지 못하여 분쟁과 다툼이 생겼다고 보고, 그래서 땅의 기운을 뽑아 두루 합치며 조화를 이루는 공사를 보아 평화를 이룩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신명공사(神明公事)’란 증산의 세계 변환 공사 중에서 신명, 곧 종교·사상·정신·영혼 등을 총체적으로 지칭한 용어인 신명의 시대적 변환을 정리·체계화하는 공사를 말한다. 이 공사는 다시 신명의 해원, 신명의 배치, 신명의 통일 등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한다.
① 신명의 해원 : ‘신명의 해원’이란 신명공사의 첫 단계 공사로서, 이 세상에는 인간의 역사 이래 원통하게 사는 신명·영혼들이 수없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변환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의 전통 무당굿 중 해원굿 전통을 활용한 적도 있었다. 그는 신명의 해원을 위해 전통 무교의 해원굿 방식을 활용하여, 해원 대상 앞에 제사 음식, 돈·곡식·베·옷가지 등을 차려놓고 무구(巫具)들을 갖춘 다음 소지(燒紙)를 올리고 춤을 추고 유희를 하는 식으로 이 해원굿을 실행하기도 하였다.
② 신명의 배치 : ‘신명의 배치’란 신명들이 각기 그 맡은 바 지역에 거주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이 공사에 대해 증산은 매우 거시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의 여러 신명들이 각기 자기 처소에서 활발히 작동하게 하여 지금의 새로운 세계 운수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과거 서양의 신명들이 동양을 지나치게 침략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는 조선 신명을 서양으로 보내어 서양의 상승을 막게 하고, 서양 신명을 우리나라로 불러들여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드는 공사를 하도록 하였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③ 신명의 통일 : ‘신명의 통일’이란 세상 여러 신명들을 한데 융합·통일시키는 단계의 공사를 말한다. 이 공사는 다시 선령신 통일, 지방신(地方神) 통일, 문명신(文明神) 통일 등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첫째, 선령신 통일이란 각 성씨별로 조상신을 화합케 하여 그 자손들을 화목하게 하고, 각 민족들의 시조신들을 하나의 제단에 결합시킴으로써 온 세상 인류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이다.53)
둘째, 지방신 통일이란 단군·관우 등과 같은 지방 민족의 주신(主神)들을 하나의 제단에 통합하여 모심으로써 모든 민족들의 상호투쟁과 갈등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현재 모든 민족과 국가의 투쟁은 이 민족신 또는 지방신들 사이의 지역적 편견과 민족적 감정의 고집·갈등에서 야기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정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문명신 통일이란 세계 여러 지역별로 그 지역 문명의 선구적 역할을 한 성인들의 신명, 곧 공자·석가·무함마드·예수·소크라테스 같은 성인 신들의 신명을 하나의 제단으로 통일하여 모시는 공사를 말한다. 오늘날 전 세계가 서로 갈등·대립하는 것은 이러한 신명계의 여러 문명신들이 각기 자기의 사상만을 주장하여 통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세상이 이러하므로 그는 여러 문명신들이 주장하는 사상적 진수를 발췌·통일하여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열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떤 문명신도 불평 없이 서로 화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도공사’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윤리·도덕에 대한 잘못을 시정하고 마음과 몸을 수련하여 지상선인(地上仙人)이 되게 하는 길을 열어주는 공사를 말한다. 이 인도공사는 구체적으로 신화(神化)·신통, 해원·보은, 인의·상생, 정륜·명덕, 일심 및 성·경·신, 수명·복록, 남녀평등 등의 실현을 의미한다.54)
① 신화(神化)·신통(神通) : 이것은 사람이 심기(心氣)를 수련하면 신명과 교통하고 도통(道通)이 되므로 모든 일에 달통하여 우주 자연과 인생의 도리를 알게 되며, 도술 조화를 마음대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 해원(解冤)·보은(報恩) : 이는 인간 사회에서 서로의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저절로 그에 대한 은혜를 갚을 줄 알게 되어 화목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③ 인의(仁義)·상생(相生) : 이는 인간의 도덕법칙으로서 인의로써 상극·투쟁을 없애고 상호 협동하여 공생·공영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④ 정륜(正倫)·명덕(明德) : 이는 유교적 덕목에서 이끌어온 것으로서 윤리를 바르게 하고 덕을 밝게 함을 말한다.
⑤ 일심(一心) 및 성(誠)·경(敬)·신(信) : 이는 인격 수양의 원리로 제시된 것으로서, 인격 수양을 위해서는 일심으로 성·경·신의 덕목들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⑥ 수명(壽命)·복록(福祿) : 이는 앞의 과정을 제대로 수행해 나아가면 수명이 연장되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복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⑦ 남녀평등(男女平等) : 이는 기존 전통사회의 윤리·도덕인 남존여비 사상을 극복하는 평등사상이다.55)
Ⅳ. 결어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전북 사상사는 우리 본래의 전통 토착 사상 계통의 사상과 외부로부터 유입된 사상들이 서로 부단한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그 속에서 늘 새로운 사상사적 지평을 향해 융합적 지향성을 활성화해 왔다. 어떻게 보면 전북 사상사는 우리나라 사상사, 특히 서민·민중적 지향성 사상사의 토대이자 모태로서, 그 안에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주요 사상들이 탄생하고 전개되고 서로 충돌하고 변이되면서 부단히 한국 사상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온 우리나라 사상사의 중심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전북 사상사는 가장 먼저 부족국가시대의 천지인 합일 조화 사상에서부터 시작되어,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전통 토착사상을 새로운 차원의 생명사상으로 전개하는 풍류사상으로 펼쳐졌고, 여기에 외부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미륵사상을 미래지향적 비전으로 부단히 활성화하였다.
남북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풍류사상을 더욱 심화·확장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존의 외래적 미륵사상도 심화·확장하고, 이 양자의 비전이 더욱 강력한 미래지향적 방향으로 융합되도록 모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기존의 천지인 합일 조화사상과 풍류사상을 불교적 방향으로 변이·심화·확장하면서,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불교의 교선합일사상의 융합적 노력을 통해 그 사상사적 깊이를 더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복류(伏流)하여 온 전통 풍류사상을 불우헌 정극인 등이 유교식으로 재해석하여 ‘유교적 풍류사상’으로 변이·계승하였고, 소박한 초기의 대동-공동체 사상과 민주적 대동사상의 맹아도 출현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풍류사상을 선비들의 심심파적식 풍류로까지 확장하면서 정여립은 초기의 대동-공동체 사상을 계승하여 대동-민주사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일재 이항은 정읍에서 기존 명목론적 성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질론 방향으로 전개한 이기일물설을 주장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실질론적 통합적 지평을 열었다. 그 결과 이러한 성리학의 실질론적 변환은 조선 중기에 전개된 청하 권극중의 실질론적 도선사상, 곧 통합적 내단사상의 단초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북학·동학·남학·중학 사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전에 전개된 실질론적 방향을 현안적 정치학으로 전개하면서, 서학을 수용하며 이에 대응하는 북학, 북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동학, 동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남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학·북학·동학·남학을 새로운 현대 사상사의 지평에서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중학사상, 곧 증산사상으로 전개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현대 사상을 전 세계적 지평의 융합적 세계사상으로 상승시켰다.
앞으로 우리는 이 논의에서 확인하고 정리한 전북 사상가들의 철학적 사고를 근거로 삼아, 전북 사상사의 새로운 미래, 우리 민족사상사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 세계 사상사의 새로운 21세기적 지평을 향해 정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미래지향적 노력을 통해 전북 사상사는 물론 우리 사상사의 폭과 깊이와 높이는 마침내 세계 사상사의 주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