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전북에서 발원한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의 의미: 동학농민운동 이후의 사상적 전환과 종교적 실천

차선근 1 , *
Seon-keun Cha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대진대학교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Daesoon Studies, Daejin University

© Copyright 2025, The Daesoon Academy of Sciences.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Oct 05, 2025; Revised: Nov 22, 2025; Accepted: Dec 15, 2025

Published Online: Dec 31, 2025

국문요약

이 글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전라북도를 뒤흔든 두 개의 ‘지진’인 동학농민운동과 강증산의 종교운동에 주목하여, 후자가 전자와는 다른 사상적 전환과 사회적 실천을 보여주었음을 살핀 것이다. 전북 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이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한 정치·사회 개혁의 무력 투쟁이었다면,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발흥한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은 상생을 통해 우주 질서와 인간 삶을 재편하려는 초월적·초역사적 개벽의 실천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동학농민운동은 사회적 ‘개혁’을, 증산 종교운동은 종교적 ‘개벽’을 꿈꾸었다는 데에서 서로 대비된다.

증산의 종교운동은 개벽으로 향하는 해원상생(解冤相生)과 보은상생(報恩相生)의 도덕 실천을 통해 한국의 존재 기반을 재건하고 그 정체성을 유지·발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라북도를 거점으로 발흥한 증산의 상생 사상과 종교운동은 식민지 근대와 서구 문명의 급격한 유입이라는 격변기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던 한국 사회가 당대의 현실에 맞서 주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자 했던 하나의 치열한 노력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덧붙여 강조하자면, 유교·불교·도교가 외부에서 유입된 외래 종교사상인 데 비해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은 한국에서 발원한 자주적인 평화 사상이자 종교운동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민간신앙 수준을 넘어 체계적으로 제도화된 형태의 한국 고유종교를 ‘K-종교’라 부른다면, 그 대표는 증산의 종교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민족종교가 대순진리회이며, 대순진리회는 바로 증산의 종교운동이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wo “earthquakes” that shook Jeollabuk-do Province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and Kang Jeungsan’s religious movement — demonstrating that the latter manifested an ideological transformation and social practice fundamentally distinct from the former. Whereas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that unfolded in the Jeonbuk region constituted an armed struggle for political and social reform under the banner of anti-feudalism and anti-foreign imperialism, Jeungsan’s thought and religious movement, which emerged in the same region during the same period, represented a practice of transcendent and transhistorical cosmic renewal that sought to reorganize the cosmic order and human life through SangSaeng (相生, mutual beneficence). Put simply, the two movements stand in contrast: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aspired to social “reform” (改革, Gaehyeok), while Jeungsan’s religious movement envisioned religious cosmic “renewal” (開闢, Gaebyeok: the Great Opening).

The significance of Jeungsan’s religious movement lies in its aim to reconstruct Korea’s existential foundation and to preserve and develop its identity through the moral practice of Haewon- sangsaeng (解冤相生,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for Mutual Beneficence) and Boeun-sangsaeng (報恩相生, the Reciprocation of Favor for Mutual Beneficence) oriented toward Gaebyeok (開闢, the Great Opening). In this context, Jeungsan’s Sangsaeng Thought and religious movement, which originated in the Jeollabuk-do region, warrant re-examination as a fierce, autonomous effort made within Korean society. Amidst the upheaval characterized by colonial modernity and the rapid influx of Western civilization, it represented a struggle to establish a direction for life in direct confrontation with the grim reality of the times.

It must be further emphasized that while Confucianism, Buddhism, and Daoism were foreign religious traditions introduced from outside Korea, Jeungsan’s thought and religious movement constituted a peace-based philosophy and religious movement that originated indigenously in Korea — a fact that should not be overlooked. If one were to designate institutionalized forms of Korean native religion beyond the level of folk belief as “K-religion,” its representative should be found in Jeungsan’s religious movement, for Daesoon Jinrihoe, the largest existing Korean ethnic religion, is precisely the product of Jeungsan’s religious movement.

Keywords: 동학농민운동; 강증산; 한국 자생 종교; K-종교; 대순진리회; 상생
Keywords: Donghak Peasant Movement; Kang Jeungsan; Korean native religions; K-religion; Daesoon Jinrihoe; Sangsaeng

Ⅰ. 여는 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라북도는 근대 여명기 한국을 뒤흔든 거대한 지진의 진원지였다. 그 지진이란 한국 최초의 전면적 반봉건·반외세 투쟁인 동학농민운동(1894년), 그리고 한국 역사상 중요한 종교적 대격변을 일으킨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의 활동이었다. 전자는 탐관오리의 수탈과 학정에 맞서 ‘개혁(改革)’을 추구하다 수많은 희생을 낳았던 무력 항쟁이었고, 후자는 세상에 쌓인 모든 원망과 억울함을 상생(相生)으로써 풀고 ‘개벽(開闢)’의 지상선경(地上仙境)을 열겠다고 선언한 종교적 실천이었다.

‘개혁’을 지향한 동학농민운동은 학문적 관심을 많이 받아왔고 그 축적된 성과도 상당하다. 관련한 유적지도 곳곳에 잘 조성되어 있다. 반면에 ‘개벽’을 지향한 증산의 종교운동은 학문적 관심과 그 축적된 성과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유적지 조성도 거의 되어 있지 않다. 늦었지만 2024년 9월 30일 증산의 탄생지(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436)가 ‘전북 종교문화유산 1호’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1) 이제는 증산을 향한 관심이 보다 진전되어야 할 때다. 증산의 상생 사상과 그로부터 촉발된 종교운동이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번지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력을 사용하여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추구했던 동학농민운동과는 다른 층위에서 펼쳐졌던 증산 사상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그리고 그 특징은 무엇인가? 그로부터 비롯된 종교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오늘날 어떤 사회적 실천을 낳고 있는가? 이 물음들의 답변을 하나씩 써내려 가는 이 글의 작업은,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이 가진 독창성과 시대적 의미를 드러나게 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전라북도 사상과 종교 문화의 창조적 역동성을 밝히는 데 약간의 공헌도 할 것이다. 기존 연구들이 증산의 사상 해석이나 사회운동 등 특정 측면에 개별적으로 천착했다면, 이 글은 증산 사상과 그 실천이 동학농민운동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또한 당대 백성의 삶과 윤리, 사회 문제와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통합적 관점에서 고찰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Ⅱ. 증산의 등장

증산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이 태동한 전라북도2) 지역의 특수성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주목할 사실은 20세기 초의 전북이 정읍·고부·김제와 군산항을 잇는 철도망 덕분에 지리적 개방성이 극대화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이곳은 궁벽한 촌락이 아니라 사통팔달의 요지였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근대 여명기 이 지역에서 발흥한 사상과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전북이라는 지역적 배경을 하나씩 살피도록 한다.

1. 전북의 사회적 배경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 정치가 막을 내린 뒤 조선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외척 세력이 국정을 농단하는 세도정치 체제가 고착되면서 왕권은 추락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했다. 각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이때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곳이 전라도였다. 이 고장은 김제·만경·익산·정읍·고창의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조선의 곡창이었고, 경기도나 충청도에 비해 중앙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지방 탐관오리들의 전횡이 잦았다.

주지하듯, 조선 말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던 것이 삼정(三政: 田政, 軍政, 還穀)의 문란이었다. 전정(田政)의 폐단은 토지가 없음에도 토지세를 걷는 ‘백지징세(白地徵稅)’, 황폐한 땅에도 토지세를 걷는 진결(陳結), 비옥한 전답의 토지세를 포탈하는 ‘은결(隱結)’의 형태로 나타났다. 군정(軍政)의 문란은 실제 병역 대상자가 아닌 갓난아기를 군적에 올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 노인을 군적에 올리는 ‘강년채(降年債)’로써 부당하게 군포(軍布)를 강제 징수하는 것이었다. 환곡(還穀)은 본래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제도였으나, 관리들은 이것을 이자 수취의 수단으로 삼아 고리대로 전락시켰다. 이런 폐단이 전북에 특히 심했고, 1862년 임술민란(壬戌民亂) 때는 익산·함평·부안·금구·고창 등지에서도 항쟁이 일어났다.

1863년이 되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무너진 왕권을 세우며 삼정을 개혁하는 등 국가 기강을 확립하려 했다. 그의 개혁은 나름의 성과도 거두었으나 민생 안정보다 전제왕권 강화에 초점을 두었다는 한계가 뚜렷했으며, 쇄국으로 일관하여 급변하는 세계정세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조선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명성황후 일가인 여흥 민씨 척족(戚族)은 20여 년 동안(1874~1895) 권력을 장악하고, 지방 수령 자리나 참봉(參奉)·감역(監役)을 포함한 조선의 거의 모든 관직을 팔아 치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상황이 이러하니, 수탈 당해왔던 전북의 형편은 나아질 수 없었다. 특히 희대의 탐관오리 조병갑이 명성황후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 1893년 고부의 군수로 부임한 사건은 전북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고부는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을 거느린 큰 고을이었던 데다가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였기에, 조병갑은 그 지역의 물산을 수탈하고자 했다. 그는 만석보라는 큰 저수지를 강제로 만들어 세금을 갈취했고, 백성의 재산을 탐내 무고한 죄를 뒤집어씌워 빼앗는 갖은 악행에다가, 모친상 부조금 2,000냥3)을 민가에 걷을 때 이에 항의하는 고을 대표 전창혁을 곤장으로 쳐 죽였다. 백성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전창혁의 아들 전봉준은 1894년에 고부 민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구호로 걸고 폐정 개혁과 탐관오리 징계, 신분 차별 철폐,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목적으로 삼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 승리에 이어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화약(全州和約)을 통해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도 내었다. 그러나 강력한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개입과 관군의 진압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고, 그들이 추구했던 개혁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19세기 말의 전라북도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 사회 구조와 모순이 집중적으로 표출되면서, 수많은 목숨이 안타깝게 스러져간 고장이었다.

2. 전북의 종교적 배경

종교적 측면에서 보자면, 전북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 외에도 불교와 도교, 민간 수련 전통과 도참(圖讖) 신앙, 무속 의례가 한 데 뒤얽혀 있었던 땅이었다.

전북 유교의 초기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이는 상춘곡(賞春曲)의 저자인 정극인(鄭克仁, 1401~1481)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그는 처가가 있던 전북 태인에 불우헌(不憂軒)을 짓고 시문 창작과 강학(講學)에 힘쓰고, 지역 사림과의 교유를 통해 향촌 유교 질서의 정립에 공헌하였다. 전통적으로 전북 유교의 중심으로 기능했던 장소는 정읍의 무성서원(武城書院)이었다. 이곳은 1868년 서원 철폐령 때도 존속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으며, 1906년 최익현을 중심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이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은 201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전북은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가 근대 전환기에 조선 유학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전주에서 출생한 간재는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어 제자 3,000명을 문하에 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비록 그가 국망(國亡)의 위기에 현실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부안이나 군산 앞바다의 작은 섬에 들어가 학문 닦기에만 몰두했던 부유(腐儒)라는 비판을 받지만, 그럼에도 조선 유학의 마지막 전통을 이은 정통 유학자였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된다.

불교와 도교도 전북의 중요한 종교 자원이었다. 일찍이 진표(眞表, 717/733~?)가 중창했던 김제 금산사는 한국불교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유명했고, 고창 선운사도 마애불 미륵의 성지이자 지장보살 기도처로 명성이 높았다. 선운사는 긍선(亘璇, 1767~1852), 탄영(坦泳, 1847~1930), 석전(石顚, 1870~1948) 등의 고승을 배출한 수좌(首座) 선종(禪宗) 수행의 도량이기도 했다. 고부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쓴 고려 말의 승려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 1299~1374)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 중기 지선(地仙)으로 유명했던 남궁두(南宮斗, 1528~1620)가 말년을 보낸 지역이자, 조선 단학(丹學)의 대표적 이론가인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의 활동지도 고부였다.4)

전북은 『정감록』 등의 도참(圖讖)사상도 폭넓게 유포된 고장이었다. 비옥한 땅을 가졌으나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수탈에 시달렸던 백성으로서는 새로운 세상과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북에는 이상향의 미래 세계인 남조선(南朝鮮)이나 정감(鄭鑑)과 같은 구원자의 출현을 꿈꾸는 진인대망론(眞人待望論)이 강했다.5)

농악과 공동체 제의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던 지역이 전북이기도 했다.6) 당산제, 산신제, 동제 등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제의는 종교적 행사에 그치지 않고, 백성의 집단적 정서를 정화·치유하며 통합하는 실천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런 문화와 세계관은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는 전북 사람들의 고통을 해소하고, 작은 위로를 전해주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3. 새로운 종교운동의 대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통 유불도와 무속 및 민간 문화가 이어지던 전북 지역에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전북은 농업 생산력이 뛰어났던 탓에 많은 억압과 수탈에 시달렸으나 중앙정부로부터의 정의로운 통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존하는 종교 전통도 이 문제에 적극적인 해답을 주지 못했다. 강상(綱常)을 강조하는 유교는 형식적 명분과 체제 안정만 강조할 뿐 근본적인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불교는 미륵 출현의 희망을 꿈꾸게 해주는 곳이기는 했으나 제도 승단 중심의 권위주의적 체계에 젖어 백성의 실제 삶을 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교 역시 탈속의 영역에서 개인의 수련 또는 술수(術數)의 방편으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무속 의례들은 한바탕 놀이와 신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삶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거나 공동체에 일시적 활력을 불어넣는 데는 효과적이었으나, 윤리적 삶을 인도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실천력까지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전통 종교들이 백성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한계를 보이자, 새로운 종교적 사유와 구원의 전망을 제시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출현한 새로운 종교는 동학이었다. 원래 동학은 최수운(崔水雲, 1824~1864)이 경북 경주에서 창도한 종교였다. 수운은 도탄에 빠진 백성과 국운이 다해가는 조선의 참상을 실감하고, 세상을 구제할 도를 얻고자 수행하다가 1860년 4월 5일 경주 구미산 자락에서 마음이 섬뜩해지고 몸이 떨리는 가운데 허공에서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하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리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7) 한국 종교사에서 이 신비 체험은 한국인이 하느님을 뵙고 문답을 나눈 ‘최초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8) 수운은 하늘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서학(西學)과 서교(西敎)에 대항하는 성격을 지닌다고 여겨 ‘동학(東學)’이라고 이름 붙였다. 동학은 하느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로써 경천(敬天)을 실천하며, 천도(天道)로써 보국안민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실현한다는 구제의 사상이자 신앙이었다. 그러나 동학의 교세가 커짐에 불안을 느낀 조선 조정은 동학을 사도난정(邪道亂正)으로 규정하고, 1864년 3월 교조 수운을 사형에 처했다.

수운은 죽었으나 동학의 교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번창했다. 동학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교조 수운의 신원(伸冤)을 주장하는 한편, 외세 침탈을 비판하고 유교적 위계질서에 맞서며 신분 계급을 철폐하는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은 동학이 출현했던 경북이 아니라, 부패와 수탈이 극심하고 미륵과 진인의 새 시대 갈망이 뜨거웠던 전북이었다. 결국 전북 지역 동학은 지배층의 탐학에 항거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강력한 무력 운동을 전개했으니, 그것이 앞서 언급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사를 통틀어 종교운동이 사회 개혁운동으로 확대된 대표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백성의 희망도 좌절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참화가 벌어진 바로 그 땅, 전북에 곧바로 새로운 희망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그 희망은 희생만 남기고 실패했던 직전의 사회 개혁운동을 대신하는, 초역사적·초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종교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증산이었다.

증산은 1871년 9월 19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지금의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436)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고부에서 보낸 그는 24세 되던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전봉준이 배들평의 농민 수천 명을 모아 처음 봉기했던 이평면의 말목장터는 증산의 외가 인근이면서, 증산의 생가로부터 북쪽으로 불과 4km 떨어진 곳이었다(<그림 1>).9) 당시 수천 명의 농민들이 고부 관아로 몰려가 점령하는 큰 소란이 일었으니, 지척에 살았던 증산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더구나 농민군들이 4월 7일에 1,300명의 관군 토벌대와 싸워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은 증산 탄생지에서 서쪽으로 불과 1km 떨어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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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증산 탄생지 주변. 동학농민운동의 첫 불꽃이 타올랐던 말목장터는 증산 탄생지에서 북쪽으로 4km 지점에 있으며, 증산의 외가도 말목장터 바로 옆에 있다. (지도: Goolg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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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은 전봉준의 인물됨을 두고,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주려는 마음을 가졌으며,’10)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 천하를 움직인 만고의 명장(名將)’이라 높이 평가했다.11)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이 보국안민을 주장한 것은 미래의 이상세계인 후천(後天)에 구현될 일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의 명분만큼은 충분히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증산은 동학군들 가운데에는, 폐정 개혁과 정의 구현을 추구하는 이들 외에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치우친 이들도 상당수 있음을 지적했다.12)

증산은 동학군의 시운(時運)이 불리하여 첫 겨울을 맞으면 실패할 것을 예견하고, 당나라 시인 노륜(盧綸, 739~799)의 「화장복야새하곡(和張僕射塞下曲)13)」 가운데 일부를 주변 사람들에게 읊어주었다고 한다.14)

月黑雁飛高(월흑안비고) 달빛 어둑한데 기러기는 높이 날고

單于夜遁逃(선우야둔도) 선우(單于)는 밤이 되니 도망가네.

欲將輕騎逐(욕장경기축) 날랜 기병을 이끌고 쫓아가려 하니

大雪滿弓刀(대설만궁도) 큰 눈이 활과 칼을 가득 덮는도다.

증산이 인용한 노륜의 시구는 겨울이 되면 큰 눈이 와서 병장기(兵仗器)를 못 쓰게 되니, 날랜 군사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이것으로써 동학군들이 눈이 내리는 시기에 망할 것임을 알리고, 인명의 희생을 안타깝게 여겨 사람들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말렸다.15) 당시의 동학군은 황토현의 첫 승리에 이어 전주성까지 점령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전봉준은 5월 7일 조정이 27개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 통치를 시행하고 있었다. 동학군의 기세가 정점에 달했던 순간, 증산은 오히려 몇 달 뒤 닥쳐올 동학군의 패망을 예견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주화약 이후 조정의 개혁 이행은 지체되었고, 급기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정세가 급변했다. 이에 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재점화되었으나, 일본군의 본격적인 무력 개입 앞에 북상하던 동학군은 11월 초 공주 우금치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패전을 거듭하던 동학군은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12월 2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사로잡히면서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렸다.

동학농민운동의 처절한 희생과 좌절된 개혁의 꿈을 지켜본 증산은 새로운 희망을 심고자 했다. 그는 국가의 운명이나 사회 제도의 혼란 그 자체보다는, 보다 더 본질적인 영역에서 문제를 찾고자 했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적 질서 그 자체였다. 증산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서로 극하고 억누르는 상극(相克)의 원리에 지배되어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찼고, 그 때문에 신명(神明)·인간·만물은 참상(慘狀)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과 신명, 천지와 국가·사회, 그 모두를 포괄하는 근원적 질서 전환이 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구제되지 않는다는 게 증산의 판단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증산은 기존하는 유불도를 비롯하여 무속과 참위(讖緯) 등 다양한 전통 사상과 민간신앙을 종합적으로 통섭하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담아낸 새로운 사상을 구상했다.16) 그리고 상극을 극복하며 원한을 해소하는 해원과 보은의 상생 원리로 천지인(天地人) 삼계를 개벽함으로써, 인간과 신명을 비롯한 만물의 공존과 번영을 누리게 한다는 독창적인 처방을 내어놓았다.17)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직접 천지인 삼계의 대권(大權)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뜯어고친다는 전대미문의 선언을 하면서,18)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의 질서를 바로잡고 인간과 신명을 구원하기 위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하였다. 천지공사의 목적은 상극을 완전히 철폐하고, 만고에 쌓인 만물(신명·인간·금수19) 등)의 모든 원한을 풀어 상생으로써 새 시대를 열고 화평(和平)의 새로운 세상을 개벽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구상은 인간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전환을 넘어 신명을 포함하는 우주적 질서의 재편이라는 점에서, 종래의 인간 중심 개혁운동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에 우주와 인류 역사의 방향 전환을 제시한 증산의 초종교적 사상과 세계관은 기존의 유교적 천명론이나 불교적 해탈론, 도교적 불사론과는 완전히 다른 독자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동학농민운동이 보국안민을 주장하면서 폐정 철폐와 인간 존엄 및 평등의 사회 개혁을 강조하였다면, 증산은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뛰어넘는 우주적이고 신적(神的)인 질서의 정비와 새 시대의 창조를 기획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인간 역사 안에서 사회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던 데 비해서, 증산은 인간 역사를 넘어 천지와 신명의 질서 재확립까지 포함하는 새 시대의 ‘개벽’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인간·신명·천지 만물의 모든 원한을 풀고, 이들의 적극적 화해와 상생을 통한 총체적 질서 전환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벽 사상은 초월적·초역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벽은 수운의 동학에도 있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수운의 개벽이 순환사관(巡還史觀)과 시운관(時運觀)을 토대로 미래에 당연히 올 ‘다시(again)’ 개벽을 예언하는 수준이었다면, 증산은 삼계의 대권을 지닌 자신이 직접 ‘운수에 없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준의 개벽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20) 9년의 천지공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종교적 실천이었고, 증산을 따랐던 사람들은 그 현장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이로써 동학농민운동의 참담한 실패를 곱씹어야 했던 전북에서는, 증산을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에 희망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지배층이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더라도, 약소한 한국이 외세의 침탈로 주권을 빼앗기더라도, 그것은 한순간의 고통에 불과하며 증산이 정한 천지도수(天地度數)에 따라 머잖은 내일에는 모두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개벽의 세상이 열리고야 만다는 믿음이 퍼져나간 것이다.

천지공사를 마친 직후, 증산은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사상만큼은 사람들에게 구제와 개벽의 희망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을 때, 한국이 조만간에 국권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세계에 으뜸가는 상등국(上等國)이 될 것이라는 증산의 약속은21)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다. 이 때문에 그를 숭상하는 종교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교단들이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오늘날 한국 종교의 중요한 축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증산의 사상은 여러 계승 집단에 의해 재구성되었고, 각각의 교단은 증산이 제시한 원리들을 자신들의 교리 체계에 맞게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해원상생·보은상생·후천개벽의 세계관은 현대의 다양한 종교 각축장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며 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근대 여명기 한국에서는 내우외환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중심은 단연코 전북이었다. 이곳에서 발흥한 동학농민운동과 증산의 종교운동은 한국을 뒤흔든 거대한 두 지진이었다. 전라북도에서 발생한 이 두 움직임은 한국 역사 전환기의 중심축이었다. 두 운동은 같은 사회적 배경과 지역을 두고 출발하였지만, 그 이념과 실천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교조 신원과 보국안민을 표방하며 폐정과 외세를 몰아내려는 ‘사회 개혁운동’이었다면,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은 신명과 인간, 천지와 우주를 아우르는 통합적 구조 속에서 상극을 상생으로 대전환하는 새로운 시대의 ‘우주 개벽운동’이었다.

Ⅲ. 증산의 사상과 그 특징

증산은 우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초월적인 천지공사의 방법으로써 백성의 고통과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해소하는 구세사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를 신앙하는 교단의 입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정리되고 해석되는데,22) 그 주요한 공통부분을 뽑아서 간추려본다.

1. 천지공사와 우주 질서의 재편

증산이 전개한 사상의 핵심에는 ‘천지공사’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종교적 작업이 있다. 이것은 천지를 재편하는 시도로서, 그 범위는 천지·신명·인간·만물 전체를 아우른다.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한 이유는, 현실에서 드러나는 온갖 고통과 혼란의 근원이 우주 질서의 구조적 문제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 세계가 상극의 원리에 지배되어 억압·착취·전쟁·질병·원한을 양산한다고 보았다. 병든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기 위해서는 상극의 우주 질서를 상생으로 전환하는 근본적인 재조정이 필요했다. 이에 실행했던 것이 천지공사였다. 이 공사를 위해 증산은 자신이 천지인 삼계의 대권을 가졌음을 밝히고 ‘내가 천지를 뜯어고친다’라고 천명하였다.23) 기존 세계의 시간과 공간, 존재론적 틀을 해체하고 새롭게 짜는 주체로서 그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공사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약 9년에 걸쳐 집행되었으니, 그 내용은 신명들의 위치와 임무 재편성, 우주의 법칙과 도수(度數)의 재조정, 만고에 쌓인 원한의 해소, 신명과 인간의 조화로운 상합(相合) 관계 설정,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 질서의 재정비 등이었다. 이로써 앞으로 도래할 세상인 상생의 후천(後天)은 상호 조화(調和)와 공존 및 번영을 기반으로 삼는 화평의 세계가 된다. 그것을 만드는 거대한 역사(役事)인 천지공사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직접 설계하고 만드는 기획이었다.

천지공사는 그 집행 방식에서 독특한 상징적 구조를 지닌다. 겉으로 보기에는 글을 쓴 종이의 소각[燒紙]이나 수행적 발화(發話), 물건 이동 등의 행위이지만, 그것은 모두 천지신명 소집, 우주 법칙과 구조의 재조정 및 재배치 또는 원한 해소라는 신성한 사건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증산은 천지공사에 참여해야 하는 신명을 부르기 위해 종이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불태운다고 하였다.24) ‘수운을 선도(仙道)의 종장으로, 진묵대사를 불교의 종장으로, 주자를 유교의 종장으로, 이마두[마테오 리치]를 서도(西道)의 종장으로 각각 세운다’라는 발언은 유불선 및 서교의 책임자를 교체하는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로 이해된다.25) 또 여러 우물의 물을 옮겨 퍼담도록 한 행위는 향후 세계 사람들이 물화(物貨)를 서로 교류하는 생활을 하게 되도록 만드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26) 이러한 방식의 천지공사는 상징적 행위임과 동시에 우주적 선언이며, 향후 실제 역사 현실에 구현될 계획이었다.

천지를 구조적으로 재편하는 이 공사에는 시간과 공간의 전환도 포함되었다. 선천 시대의 종결과 후천 시대의 개막을 선포한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시간 질서 자체는 변화하는 우주적 분기점이었다.27) 언어가 곧 행위가 되고 상징이 곧 실재로 전화하는 세계관을 토대로 작동하는 천지공사는 시공간의 새로운 질서를 선언하는 장(場)이었다는 뜻이다.

천지공사의 함의는 종교 내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근대 유럽 문명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자,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의 제안이기도 했다. 증산은 서구의 과학기술 중심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견지했으며, 천지공사는 이러한 병든 근대를 해체하고 동아시아적 조화와 통합의 이념에 기반한 문명 전환을 제시하는 청사진이었다.28) 유불도, 무속 등 다양한 선천 종교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위에 후천의 새로운 법을 수립한다는 증산의 구상은 다종교 간 융합과 보편 종교의 가능성까지 내포했다. 결론적으로 천지공사는 증산 사상의 중심축으로서 우주관, 역사관, 자연관, 종교관, 상징체계, 윤리관을 총체적으로 담아낸 종합적 모형이었다. 고단한 현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창조적 선언이자 신명과 인간, 시간과 공간, 상징과 실재를 통합하는 전환 장치였던 증산의 천지공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헌법’이며, 인류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종교적 실험으로 평가된다.

2. 개벽과 문명의 대전환

증산의 사상은 우주와 인간, 문명의 질서를 총체적으로 전환하려는 거대한 기획으로 이해된다. 그 핵심에는 ‘개벽’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개벽은 새로운 문명의 출현이라는 구조적 전환의 사건을 가리키는 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개념이다.

증산은 인류 역사를 선천과 후천이라는 두 시기로 구분하였다. 선천은 상극의 원리에 따라 경쟁·대립·억압·착취가 지배하는 시대인 반면, 후천은 상생의 원리에 따라 조화·협력·연대·공존·번영이 실현되는 이상세계로 제시된다. 개벽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이행하는 문명의 전환점이자 신명·인간·자연·만물의 존재 구조가 함께 재편되는 총체적 사건이다.

원래 개벽은 동아시아 전통에서 우주창생(宇宙蒼生)의 의미로만 사용되었던 개념이다. 오직 한국에서만 수운 이후에, 개벽을 ‘현재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도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29)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수운은 ‘다시 개벽’이라 하여 과거에 있었던 수준의 개벽이 순환적으로 자연스레 올 것이라고 예견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증산은 개벽이 과거에 없던 미증유의 수준으로서 하늘과 땅, 신명과 인간 만물 모두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우주적 대전환이라고 하였다. 도교 『태평경』의 메시아니즘,30) 불교의 미륵과 말법사상, 참위설의 정감과 진인도 일정 부분 개벽과 유사한 사유를 공유하지만, 증산의 개벽론은 더욱 급격한 전환적·현실 개조적·실천적 성격을 지닌다. 그의 개벽은 반복이나 순환 속에 놓인 게 아니라, 이전 질서의 완전한 단절과 새로운 창조이므로 우주적 운수의 퀀텀 리프(Quantum Leap)에 해당하는 변화임이 강조된다.31)

증산에 의하면 개벽 이전 선천 세계는 상극에 지배되었기에 인간은 서로 충돌하고, 신명계의 권위와 질서는 무너졌으며, 자연은 착취를 당해 죽어가고 있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방법은 점진적 개혁이 아니라 전면적이고 일시적인 대전환, 즉 개벽뿐이다. 개벽을 맞아 인간 내면도 탐욕과 위선에서 벗어나 상생을 바탕으로 진실·성실·정직·겸허를 회복하는 전인적 전환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외적 도덕률의 부과가 아니라, 내면적 각성과 공동체적 실천이 결합한 새로운 윤리 질서의 구축이다. 그 결과 인간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도통군자(道通君子)로 화한다. 그러므로 개벽은 문명의 종말이자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불가피한 해체이자 창조의 혁신이다.

이러한 개벽의 총체적 성격은 문명의 질적 성질과 역사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데 있다. 그 결과로 출현하는 후천의 세계는 상생과 항구적 평화의 문명이다. 이 문명의 기초는 상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명, 인간 상호 간의 관계는 대립과 지배의 방식이 아닌 조화와 상호 도움, 생명 존중으로 재편된다. 증산은 이러한 문명 세계를 선경(仙境)·후천선경(後天仙境)·지상선경(地上仙境)이라고 불렀다.32)

그러나 개벽은 동시에 무서운 대심판(大審判)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심판은 특정한 종교의 신앙 여부를 묻는 게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것이다. 증산은 개벽 대심판 때의 구제는 인간 각자가 상생을 실천하며 ‘남 잘되게 하는 공부’에 매진할 때 주어지는 것이며, 특히 부모와 조상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33) 인간은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 객체가 아니라 도덕을 실천해야 하는 주체로 강조된다. 이로써 증산의 개벽론은 현실적 윤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실천적·참여적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개벽 사상은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자연 파괴, 인간 허욕, 환경과 생태 위기 등은 모두 선천 문명의 참상이며, 인류가 이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증산의 경고다.34) 따라서 개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사건이며, 그 전환을 준비하고 실현하는 주체로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핵심 과제가 된다.

증산이 설계한 후천개벽은 유토피아적 예언이나 전망에서 그치지 않고, 현존하는 문명의 반성과 해체, 새로운 세계의 설계와 실현이라는 두 과정을 포함한다. 그는 후천을 이상적인 꿈을 좇는 세계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현실의 구조를 상극으로 해석하고 상생으로 재편성함으로써 실현이 가능하게 된 새로운 역사로 만들고자 했다. 이 새로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신의 계시를 수동적으로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대신에 신의 뜻을 받들어 함께 이루어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결국 개벽은 파괴와 창조, 심판과 구원, 단절과 창출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문명사적 대사건이다. 증산의 개벽론은 종교적 폐쇄성을 넘어선 포괄적 구원을 지향하며, 도덕적 자각과 역사적 실천을 요구하는 실천철학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한국이라는 좁은 지역에 국한되지 않으며, 세계적 문명 위기 시대에 새로운 윤리와 질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독자적이고 ‘거의 유일한’ 해법(solution)이기도 하다.35)

3. 해원상생과 보은상생

증산 사상의 핵심은 세계의 질서가 상극에서 상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상생을 방법과 목표로 삼는 해원(解冤)과 보은(報恩)의 종교적 실천이 전제된다.

증산은 현재의 혼란한 세계가 억울함과 원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원한이 해소되지 않는 한 어떤 평화도 진정으로 구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 기운이 막힌다.”36)라는 그의 선언은 인간 존재 전반의 원한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만 새로운 세계, 즉 후천의 질서가 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증산의 해원은 무속 수준의 정서적 위로/위안 수준에 그치지 않고, 존재적 고통과 구조적 불의를 윤리적으로 해소하고 상생의 우주 질서 재정립으로 나아가고자 한 특별한 종교적 기획이었다.37)

증산의 해원에서 눈에 띄는 점은 가해자 또한 해원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일반적 윤리 관점으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이 발상은, 모든 존재가 상극이라는 우주적 지배 구조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억울함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억압과 복수는 서로를 반복 재생산하는 악순환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진정한 해원은 가해자의 고통까지도 이해하고, 그마저도 포괄하는 전면적 구원과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해원은 곧 상생의 실현을 지향한다. 상생은 증산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자, 새로운 세계의 성립과 유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원리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명, 인간과 역사를 포함하는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되는 상생은 모든 존재가 ① 서로를 살리고 ② 서로가 공존하며 번영하는 두 가지의 관계 설정을 동시에 의미한다. 요컨대 상생은 ‘같이 산다’라는 소극적 ‘공존(共存)’에 그치지 않고, ‘같이 살면서 같이 잘되게 하여 같이 번영한다’라는 적극적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의미하는 것이다.38) 이것은 인간들, 인간과 신명, 인간과 자연, 신명과 자연 간의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조화(調和)를 담보한다. 이것이 바로 해원상생(解冤相生)이다. 해원상생은 사회 질서와 역사 현실의 재조정을 요구하는 총체적 실천으로 전개되니, 오늘날 증산계 교단들에서 억울한 자들의 구제, 약자 보호, 공동체적 돌봄, 포용적 질서 구축 등으로 실천되고 있다.

보은(報恩) 역시 상생의 윤리 구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은은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도덕률을 넘어 상생과 결합함으로써 존재 간의 관계적 윤리를 재정립하는 실천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보은으로 상생하기, 상생으로 보은하기는 단순한 감사의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대신 사회적 관계의 회복과 항구적 유지를 위한 실천적 원리로 제시된다. 그 근거는 인간이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받은 은혜를 자각하고 그에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라는 데 있다.

보은은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다. 일방적인 희생이나 강요가 아닌, 상호 도움과 감사가 오가는 관계 속에서 신뢰는 형성된다. 그러하기에 보은은 공동체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도덕적 당위이며, 선순환적 사회 질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공동체 윤리의 근간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보은 행위는 또 다른 이에게 은혜로 작용하고, 그 사람이 다시 보은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밝고 따뜻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확장된다.

보은은 개인의 외부 사회생활에서만 강조되지 않는다. 크게 보면 천지에 대한 보은도 필요하다. 이런 행위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도리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태 윤리적 태도를 함축한다.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가 일상화된 오늘날의 인간중심주의적 문명에 경종을 울리는 성찰이 바로 천지에 대한 보은이다. 또한 국가 사회에 대한 보은은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다하는 시민윤리를 요청한다. 이것은 무분별한 개인 권리 주장이나 이기적 경쟁을 넘어, 공동체의 유익에 공헌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요구한다. 부모와 조상에 대한 보은은 단절된 가족문화와 고령화 사회 속에서 점차 약화하는 효와 조상 숭배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종교적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단순한 전통 회귀가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 기반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윤리 행위가 부모와 조상을 향한 보은이다. 스승에 대한 보은은 교육을 통해 인격을 수양하고 지혜를 계승하는 문화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며, 직업에 대한 보은은 물질적 보상 너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 기여라는 윤리 그 자체이다.

결국 보은상생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종교적 실천이자, 현대 사회에서 점차 약화하는 연대성과 상호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관계 윤리의 해답이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 교육을 넘어, 종교가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는 윤리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은상생은 단절된 현대 사회의 관계들을 다시 잇고, 갈등과 고립을 넘어서는 실천적 종교 윤리라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정리하자면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은 증산 사상의 도덕적 구조를 구성하는 두 축이며, 우주와 인간, 신명과 자연, 역사와 미래를 연결하는 윤리적 다리 역할을 한다. 해원상생이 구조적 억압과 존재하는 모든 원한을 해소하는 과정이라면, 보은상생은 그 관계를 유지하며 더욱 조화롭게 만드는 정서적·도덕적 실천이다. 이 모든 것은 종교적 계시나 초월적 힘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인간의 자각에 따른 실천에 달렸다. 인간이 변화하고, 인간이 실천하며, 인간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천지대도(天地大道)는 실현되는 것이며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도덕의 회복이며 질서의 갱신이고, 증산이 제시한 종교적 윤리라 할 수 있다.

4. 신인상합(神人相合)과 인존(人尊)의 철학

증산의 사상은 근대 한국 종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급진적인 세계관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그는 종교적 계시나 영적 깨달음을 얻는 수도(修道)의 경험이 없이, 곧바로 인간과 신명, 역사와 우주, 윤리와 문명의 질서를 총체적으로 재편하는 철학적 기획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중심에는 인간-신명 존재론적 핵심인 신인상합(神人相合)과 인존(人尊)이라는 개념이 있다. 신인상합은 신명과 인간의 단절을 넘어선 상호 교섭과 실천적 연합이며, 인존은 인간이 신명과 함께 도(道)를 구현하고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주체로서 그 존재의 위상을 드높이는 철학적 선언이다.

신인상합과 인존을 이해하려면 증산의 신관(神觀)을 짧게라도 살펴야 한다. 증산은 하느님의 한자 표기인 ‘상제(上帝)’라는 표현을 통해, 최고신을 우주의 주재자, 윤리적 질서의 수립자, 그리고 신명계를 포함한 전체 존재 질서의 통합자이자 조화주(造化主)로 설정했다. 그러나 상제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곧 증산 그 자신으로서 ‘역사 속에 인간의 몸으로 현현한 신’이었다. 상제는 천상에서 존재하는 절대자였으나 세상이 진멸에 빠졌으니 구제해달라는 신명들의 청원(請願)을 듣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강세하였으며, 인간과 교섭하면서 천지공사라는 대역사로써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재조정하여 만물에 새로운 삶의 법칙을 만들어준 존재로 그려진다. 증산의 상제관은 역사에 드러나지 않았던 과거의 ‘감추어진 신’이 신명 청원 이후 역사에 적극 개입하는 ‘드러나는 신’으로 변모했다는 것이어서, 기독교의 성육신(成肉身), 힌두교·불교의 권화(權化, avatāra) 사상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신관으로 이해된다.39)

증산은 다양한 신명들의 존재도 인정했다. 풀잎 하나에도, 흙으로 바른 벽에도 신명이 있다는 것이 증산의 인식이었다.40) 신명은 다양한 층위에서 존재하니 풀잎에 맺힌 신은 물론이요, 천지를 다스리는 천지신명에서부터 조상 선령신, 문명신, 도통신 등이 있다. 증산은 이 신명들을 총괄하는 존재인 상제로서, 그들을 호출하여 해원과 상생, 개벽과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였다.

신명들은 인간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신명과 인간의 상호 교섭은 천지공사와 수도 실천을 통해 구체화한다. 증산은 천지공사의 설계자로서, 인간과 신명이 서로 감응하고 상합(相合)하여, 서로가 창조적 동반자로서의 위치에 있게 됨을 강조하였다. 상제에게 명령을 받은 신명은 인간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과 함께 도를 펴고 세계를 구성하는 협력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수동적 피조물이 아니라 신명과 함께하는 능동적 조율자이다. 이것이 신인상합(神人相合)의 핵심 내용이다.

상제가 만든 이러한 신명계의 질서와 원칙이 바로 신도(神道)다. 인간은 신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삶의 원칙이다. 신도는 신앙적 절차를 넘어서, 삶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세계관이며 신명과 인간이 함께 참여하는 존재론적 규범이 된다. 이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만이 개벽의 여정에 참여할 수 있으며, 후천 문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신도와 신인상합은 인존 사상으로 귀결된다. 증산은 ‘이제는 인존시대’라고 천명하며,41) 앞으로의 세계가 인간 중심의 질서로 전환할 것을 강조했다. 인존(人尊)은 문자로 보면 인간이 존귀하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인간만이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천지의 도를 실천하고 신명계와 교섭하며, 그 결과 닦은 바에 따라 자기의 기국에 맞는 신명과 합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게 되면, 신명이 지니는 권위를 인간 자신도 그대로 지니게 된다는 것이 인존이다. 결국 인존은 인간이 신명을 초월하는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신명의 상합으로써 인간-신명이 동시에 존귀해짐을 의미한다. 다만 인간이 신명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신명이 인간에게 응하는 것이므로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만남의 주체가 인간이므로, 신존(神尊)이 아니라 인존(人尊)이다. 따라서 인존은 인간이 신명의 지위와 동등해진다는 것으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가 이전보다 상향함을 선언하는 종교적 선언이다.42)

인존 사상은 종교적 변화를 넘어서, 사회적·정치적·문명적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며, 인간의 실천과 책임, 윤리와 수행을 통해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 구상의 핵심이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을 도덕적 주체이자 우주적 실천자인 동시에 공동체 질서의 창조자로서 설정하므로, 인간과 신의 위계를 절대화하는 유교의 천관 또는 불교의 무아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리하자면, 신인상합과 인존은 증산 사상이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관이자 신관이며, 우주 질서의 윤리적 재구성이다. 증산이 기획한 종교적 세계 안에서, 상제의 천지공사로써 신명은 초월적 존재로만 남지 않고 인간과 함께 세계를 조직하는 존재로, 인간은 신명과 더불어 상제의 의지와 세계 질서를 실현하는 주체로 각각 거듭났다. 신명과 인간의 상합이 만들어내는 이 인간상은 인존으로 귀결된다. 이로써 인간은 공동체의 회복과 문명의 전환을 이끄는 새로운 주체로 올라설 수 있게 된다.

Ⅳ. 증산의 종교운동과 사회적 실천

1. 증산 종교운동의 전개와 현재
1) 증산 종교운동의 형성과 진전

천지공사는 증산이 39세가 되던 1909년에 끝났다. 자신이 정한 일을 마무리한 증산은 그를 따르던 종도(從徒)들에게 자기가 곧 세상을 떠날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종도들은 증산이 번개와 비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사실을 목격했기에, 그런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증산은 소집령을 내려 모든 종도를 모아놓고는, 6월 24일 방 안에서 홀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종도들은 크게 실망하여 대부분 떠나버렸다. 김형렬과 차경석, 박공우 등 단지 여섯 명만이 끝까지 남아 장례를 치렀다. 그해 10월, 김형렬과 김광찬, 차경석 등은 김제 금산사의 미륵불에 참배하면 증산의 영(靈)이 감응하여 무언가 가르침을 주리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자 김형렬이 신의 세계를 보는 신비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미륵전 앞 대장전에 봉안된 석가불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었는데, 갑자기 미륵불이 와서 석가불의 입을 막아 대답하지 못하게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크게 낙담한 김형렬은 다른 종도들에게 자신이 본 바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43)

얼마 후 종도들은 증산으로부터 수부(首婦)44)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받았던 고판례와 그의 이종사촌 차경석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원시적 형태의 교단이 형성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이 교단을 태을교(太乙敎)라 불렀는데, 후에 선도교(仙道敎)라는 명칭을 갖게 된다.45) 하지만 이 교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열되었다. 그 이유는 교단을 장악한 차경석의 전횡에 대해 다른 종도들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46) 종도들이 모두 떠난 후 홀로 남은 차경석이 교단을 이끌었는데, 그 교단은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주지하듯이 보천교는 60방주(方主) 조직에 55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둘 정도의 교세를 자랑했다. 이 외에도 안내성의 선도, 박공우의 태을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이상호의 증산교본부 등 여러 증산계 교단들이 활동했다. 증산으로부터 별도의 계시를 받아 만들어진 교단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이 1925년에 창도한 무극도(無極道)였다. 태인에 본부를 두었던 이 교단은 현재 대순진리회로 교명을 변경한 상태다.

이렇게 증산의 종교운동은 하나의 단일 조직으로 계승되지 않고, 여러 교단을 통해 독자적인 신앙 실천으로 전개되었다. 각 교단이 주장하는 정통성의 근거는 증산을 추종했던 개인적 인연, 또는 계시와 같은 영적 체험이나 신비적 사건에 대한 기억 등이었다. 어떤 교단은 강력한 소속감보다는 조직 내부의 인간관계와 종교적 경험을 중시하는 느슨한 형태였지만, 어떤 교단은 조직적 형태를 갖추고 제도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체계 정비와 교리 정립, 수행 규범 제정 등을 통해 증산의 사상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1920~30년대 일제의 탄압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여러 증산계 교단은 증산의 가르침을 신성화하면서 독자적인 교리 체계를 확립하고 외연을 넓혀갔다. 증산계 교단의 숫자는 한때 100개를 넘었다는 보고도 있다.47) 하나의 종교가 수십 년 만에 이렇게 많은 분파를 낳은 사례는 세계 종교사에서도 찾기 어렵다.48) 증산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상황이 이런 혼란을 일으킨 주된 원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부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상호 충돌도 발생했다.

증산계 교단들의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증산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10년, 한국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제강점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이었으나, 증산계 교단 신도들은 한국이 곧 국권을 회복하고 후천개벽의 밝은 미래를 맞이하리라는 증산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일제의 동화정책을 거부했던 증산계 교단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한국의 독립을 획책한다는 이유로 ‘유사종교(類似宗敎)’로 취급되어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겪었다. 1930년대부터는 탄압이 드세어져서 1936년부터 강제로 해산을 강요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특히 1941년 치안유지법의 3차 개정으로,49) 비밀 결사 형태로 유지되던 무극도(지금의 대순진리회)도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50)

해방이 되자 증산계 교단들의 활동은 재개되었다. 이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경전 편찬과 교리 체계 수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쇠락과 서양문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대다수 교단은 교세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현대의 변화에 맞추어 체계화에 성공한 교단들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로 자리매김했다. 대표적으로 대순진리회가 사회적 지명도를 높이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교단은 전국적 확장에 성공하여 한때 한국 4대 종교에 들어간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51)

2) 신앙 실천과 포덕 활동

증산은 생전에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거나 경전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각 교단이 증산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편차가 발생했다. 그러나 주문 봉송과 치성 봉행이라는 신앙 실천은 거의 모든 교단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각 교단이 사용하는 주문은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증산이 직접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태을주(太乙呪)’52)만큼은 대다수 교단이 수용했다. 태을주는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㖿都來 吽哩喊哩 娑婆訶)’인데, 읽는 방식이나 표기는 교단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외에도 24절기 주문, 28수 주문, 운장주(雲長呪), 칠성주(七星呪), 진법주(眞法呪) 등이 많이 알려진 증산계 주문들이다.53)

치성(致誠) 봉행 역시 증산계 교단 신앙 실천의 핵심 요소다. 본래 치성은 민간 신앙에서 천지신명이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기원을 올리는 의례를 지칭했다. 증산계 교단들은 이를 재해석하여, 정기적으로 정성을 다해 상제·신명들과 소통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합적 수행으로 정의했다.54)

신앙 실천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포덕(布德)이다. 포덕은 전도(傳道)나 포교(布敎)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단순한 교리 전달이나 신앙 권유를 넘어선다. ‘덕을 펼친다’라는 문자적 의미가 시사하듯, 포덕은 자기 수행과 실천적 모범의 결합을 통해 신앙을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증산계 교단의 신도들은 빈민 구제나 덕행과 같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자연스럽게 신앙을 알렸다.

이 실천에는 ‘언덕(言德)’이라고 하는 독특한 방식도 있었다. “언덕(言德)을 잘 가져 남에게 말을 선하게 하면 그가 잘 되고 그 여음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악하게 하면 그에게 해를 입히고 그 여음이 밀려와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 삼갈지니라.”55)고 한 증산의 가르침 대로, 말로써 덕을 쌓도록 노력하는 것은 신도들의 중요한 포덕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증산의 종교 언어는 직관적 호소력을 지녀 포덕 활동에 효과적이었다. ‘상극하지 말고 상생하라’, ‘서로 잘되게 하라’, ‘원한을 풀고 척을 짓지 말라’, ‘보은하라’, ‘신명이 옆에서 지켜본다’ 등의 표현은 복잡한 교리 이해 없이도 강한 울림을 던지는 메시지였다. 따라서 언덕을 포함하는 포덕은 신도 확보라는 차원을 넘어, 공동체 갈등을 해소하고 윤리를 회복시키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제공하고 삶의 방향성과 윤리적 지향까지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처럼 증산 신앙의 실천은 사회 공동체와 분리되지 않은 상호보완적 구조로 작동했다. 정성과 덕행, 수행과 감화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개인의 내적 수양이 곧 사회적 윤리의 실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현대 종교가 지향해야 할 실천 중심, 삶 중심, 공동체 중심 신앙의 한 모델로서 의미를 지닌다. 증산 종교운동은 신도 개개인의 삶을 통해 종교를 구현한 실천적 윤리 운동이었으며, 그 핵심은 ‘실천이 곧 신앙’이라는 원리에 있었다.

3) 종교운동의 지속 가능성

지난 백여 년 동안 증산의 종교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서구 문명의 유입이라는 격변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고단한 현실을 극복할 희망을 제시하는 개벽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증산 종교운동은 지속 가능하리라 전망된다. 그 이유는 첫째, 종교운동의 지속을 담보하는 제반 요소들(교단의 조직화, 인적·지역적 네트워크, 참여적 윤리 실천의 강조, 교리의 체계화)이 이미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적극적 참여는 주목할 만하다. 증산계 교단들은 초기부터 여성 신도를 중요한 주체로 인정하고 남성과 동등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기존 전통 종교와는 차별화된 양상을 보였다. 이는 현재 종교계의 성평등 논의에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지점이다.

둘째, 증산 종교운동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인이 경험한 식민지적 고통과 윤리적 위기에 대응하는 종교 언어와 실천을 제공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해원상생’, ‘보은상생’, ‘인존’, ‘개벽’ 등의 개념은 현대인의 고통 치유와 갈등 극복, 공존과 번영의 사회 구현을 위한 실천적 도구로 여전히 기능할 수 있다. 양극화, 공동체 해체, 생태 위기, 인간소외와 사회 갈등 같은 현대적 문제들에 대한 유효한 해법 역시 ‘상생’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 증산 사상은 생태주의적 지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신명·만물이 자연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척을 짓지 않고 상생해야 한다는 ‘상생생태론’의 생명 중심적 사고는, 만물이 서로를 살리는 네트워크 안에서 존재하는 새로운 윤리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56) 이 네트워크는 유기적 관계로 구성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서로를 살림으로써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공존과 공영의 상생 원리를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증산 사상은 현대 생태 위기에 대한 종교적 성찰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정리하자면, 오늘날 제도 종교의 쇠퇴, 신뢰의 붕괴, 공동체 해체, 양극화와 갈등 증폭, 생태 위기라는 현대적 도전 속에서, 증산 종교운동은 실천과 일상의 회복, 관계 윤리의 구현, 공동체적 연대, 생태와 문명 위기에 대한 해법 제시를 통해 새로운 종교적 대안을 마련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증산 종교운동은 구시대적 유물이 아닌, 현대적이면서 미래지향적 발전 가능성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다고 전망할 수 있다.

2. 사회적 실천
1) 일제강점기 현실 참여 실천

증산 종교운동은 사회적 변혁과 공동체 복원, 경제적 자립 등 실질적인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실천을 강조해 왔다. 특히 증산계 교단들은 신앙이 일상생활과 분리된 제의적 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도덕과 질서를 회복하고 상생과 화합을 이루기 위한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초기의 증산계 교단 신도들은 고통받는 백성과 함께하며 종교가 현실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견지했다. 이를 위해 수행과 치성뿐 아니라 토지 개간, 농지 정비, 황무지 간척, 구제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실천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으로 조정산의 무극도는 안면도와 원산도 지역에서 농지 개발 및 염전 개간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신앙의 구체적 현실화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실천들은 억눌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백성의 삶을 구제하는 해원의 실현이기도 했다.

크게 보면 증산 종교운동의 사회적 실천은 개벽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내적 윤리의 강화와 도덕 실천을 통한 변혁을 지향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적극적 무력 투쟁보다는 한국인의 내면을 각성시키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영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당시 억압적 통치 체제 속에서 종교가 갖는 비폭력적 저항의 한 형태로 유지되었던 이유는, 증산이 약속한 후천개벽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57) 짧은 시간 뒤에 국권은 회복될 것이고 한국은 상등국으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증산계 교단들의 믿음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재편하려는 일제의 술책에 빠지지 않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2) 대순진리회의 사회활동

해방 후에 한국은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 등 여러 굴곡을 거치면서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증산이 천지공사로써 전했던 꿈이 조금씩 실현되는 속에서, 오늘날 증산계 교단들은 한국의 현실 문제에 다양한 참여를 시도하고 있다. 그 교단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곳이 대순진리회다.

대순진리회는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창립자 조정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박우당(朴牛堂, 1917~1996)을 거치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 과정에서 대순진리회는 사회적 실천을 핵심 과제로 삼고 결과를 보여왔다. “구호자선사업·사회복지사업·제반 교육사업을 종단의 3대 중요사업으로 하고 연차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중점적으로 사업을 촉진하도록 하라.”,58) “3대 중요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종단의 연간예산을 최대 규모(70%)로 편성하고 규모 있게 쓰도록 하라.”59)는 박우당의 훈시에 따라, 대순진리회는 구호·복지·교육 분야에 걸친 종합적인 사회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구호자선사업은 재난 이재민, 장애인, 불우 가정 등 소외된 이웃을 돕는 성금 기탁 활동으로부터 시작하여, 1981년부터는 대순청년회와 부녀회의 저소득층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이어졌다. 2008년부터는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로 자원봉사 활동을 확대하였고, 2013년에 대진국제자원봉사단(DIVA: Daejin International Volunteers Association)을 설립하여 체계적인 해외 구호 활동에 나섰다.

사회복지사업은 복지사업과 의료사업으로 나뉘어 추진된다. 대순진리회복지재단, 상생복지회, 대진복지재단, 사회복지법인 효담 등의 기관들은 양로원, 전문요양시설, 복지관,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하며,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의 건강과 존엄한 삶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여주의 대진노인복지센터는 ‘유니트 케어’ 시스템을 도입하여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하면서도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선진 복지 모델을 국내에 처음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의료 분야에서도 대순진리회는 대진의료재단과 제생병원을 통해 전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저소득층과 의료 취약지역 주민을 위한 지원 사업, 몽골·베트남 등지에서 해외 무료 진료 사업도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교육사업 역시 대순진리회의 사회활동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대순진리회는 대진장학회를 중심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4년제 종합대학 대진대학교 및 6개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전인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써왔다. 1992년에 개교한 대진대학교는 중국 하얼빈, 쑤저우, 무한에도 해외 캠퍼스를 설립하여 운영 중이다. 특히 대순진리회의 인성교육 교재 『DOUBLE 행복』의 자체 개발 및 보급은 종교의 도덕적 가치가 교육 현장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순진리회의 현실 참여 실천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이라는 종교적 이념을 실제 사회 속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서, 오늘날 종교가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질적 모범으로 평가된다.

3) 종교의 공공성과 실천의 의의

대개 종교의 사회 참여는 포교를 목적으로 둔다. 이에 비해 대순진리회로 대표되는 증산계 교단들의 사회 참여는 포교보다는 포덕이 우선이다. 포덕, 즉 덕을 편다는 것은 종교가 공공선을 지향하고 공동체 복지를 증진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과 만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실천하는 일이다. 증산 사상은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에, 증산계 교단이 적극적 현실 참여로 고통의 치유와 사회 질서의 회복에 도움을 주는 것은 증산이 추구했던 목적에 부합한다. 이러한 실천은 일회성 이벤트나 상징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 기반과 전문 인력을 통해 지속 가능하게 유지되고 있다.

결국 증산 종교운동은 영적 구원이나 도덕적 교훈 제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공공성을 구현하고, 적극적 사회 참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게 하며 사회를 치유하는 종교의 본령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결실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해원상생·보은상생의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복지국가의 윤리와도 깊은 접점을 이루고 있다. 대순진리회와 같은 증산계 교단들의 실천은 한국 종교의 사회적 공공성 증진에 기여하고 있으며,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지속 가능하기 위해 요구되는 실천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Ⅴ. 닫는 글

지금까지 전북 지역에 출현한 증산의 사상과 그에 기반한 종교운동이 지닌 의미를 고찰하였다. 증산 사상의 핵심은 ‘상생’, 즉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에 있다. 상생은 서로가 살림으로써 다 같이 잘되게 하여 모두의 공존과 공영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대립적 요소들의 조화와 ‘살림[잘되게 함]’을 통해 영구적 평화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는 생명윤리가 상생이다. 해원은 원한을 해소한다는 것이지만, 분풀이 혹은 복수나 방만한 허욕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누적된 불의(不義)를 인식하고 그것을 상생으로써 치유하고 갱신하려는 실천을 의미한다. 현세에서의 도덕 실천과 공동체적 정화를 통해 평화와 치유에 기반한 해원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증산의 사상은 무속의 해원 혹은 유교 천명론, 불교 연기론, 기독교 구원론과는 다른 독창적 의미를 지닌다. 보은은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좋은 관계를 지속되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기능한다. 현대 사회에서 약화하는 연대성과 상호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관계 윤리의 핵심이 바로 보은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사회적 약자, 주변화된 존재들, 그리고 생태계 전반에 이르기까지 존엄과 권리를 회복하는 해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전북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이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사회 개혁 무력 투쟁이었다면, 역시 전북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흥한 증산의 사상과 그 종교운동은 상생으로써 우주 질서와 인간 삶을 재편하는 초월적·초역사적 개벽의 실천이었다. 증산의 종교운동은 직접적인 무장투쟁이나 계급혁명을 지향하지 않는 대신, 개벽으로 향하는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의 도덕 실천으로써 한국의 존재 기반을 재건하고 그 정체성을 유지·발전시키려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도 황국신민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주체성을 보전했던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옳다. 아울러 현대에서도 종교의 공공성, 갈등 치유의 윤리적 회복, 생태 환경 위기 극복의 과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도 지적되어야 한다. 노약자·빈민·소외계층을 위한 적극적 사회 참여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은, 증산 신앙이 기존 질서에 의해 배제된 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음을 입증한다.

정리하자면, 증산의 사상은 시대의 혼란 속에서 출현한 하나의 종교 담론을 넘어서, 사회와 역사, 개인과 공동체, 윤리와 신앙을 하나로 연결 짓는 실천적 종교 철학이었다. 그 종교운동은 상생 윤리 중심의 현실 참여적인 독특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증산의 사상과 그 종교운동은 한국 종교사 연구와 윤리 철학적 성찰에 있어 중요한 참고 지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라북도를 거점으로 발흥한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은 식민지 근대와 서구 문명의 급격한 유입이라는 격변기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던 한국 사회가 당대의 현실에 맞서 주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자 했던 하나의 치열한 노력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한편, 유불도가 외부에서 유입된 ‘외래’ 종교사상인 데 비해서, 증산의 사상과 종교운동은 한국에서 발원한 자주적인 평화 사상이자 종교운동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K-드라마’, ‘K-컬처’, ‘K-팝’, ‘K-푸드’ 등의 표현이 글로벌 문화 담론에서 폭넓게 사용되는데, ‘K-사상(K-Thought)’, ‘K-철학(K-Philosophy), ’K-종교(K-Religion)’라는 표현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 만약 가장 한국적 독창성을 갖춘 사상, 철학, 종교를 ‘K-사상’, ‘K-철학, ’K-종교’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은 전라북도에서 발원한 증산의 사상, 증산의 철학, 증산의 종교가 될 것이다. 특히, 민간신앙 수준을 넘어 체계적으로 제도화된 형태의 한국 고유 종교를 ‘K-종교’라 한다면, 그것은 증산의 종교운동에서 찾아야 한다.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민족종교가 대순진리회이고, 대순진리회는 증산의 종교운동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Notes

1) 《정읍시청 홈페이지》, ‘종교문화유산’ (https://www.jeongeup.go.kr/culture, 2025. 6. 10. 검색).

2) 고종 33년인 1896년 8월 4일의 칙령 제36호 「지방제도관제개정건(地方制度官制改正件)」 공포로 한국의 행정구역은 13도(道)로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전라북도(26군)와 전라남도(1목 32군)로 나뉘었다. 임승빈,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연속과 단절: 갑오·광무개혁에서 일제강점기, 1949년 지방자치법제정」,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26-3 (2015), pp.312-313.

3) 2025년 체감 물가 수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2~3억 원에 해당한다.

4) 김성환, 「한국 선도의 맥락에서 보는 증산사상 : 전북 서부 지역의 선맥(仙脈)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20 (2009), pp.324-326.

5) 정재서, 「호남 도교의 진인대망론(眞人待望論)과 강증산의 탄강(誕降)」, 『대순사상논총』 41 (2022), pp.15-20.

6) 허정주, 「증산사상 형성에 미친 지역적 영향원으로서의 농악·당산제에 관한 사례적 고찰」, 『대순사상논총』 49 (2024), pp.136-140.

7) 『동경대전』, 「포덕문」, “曰勿懼勿恐, 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8) 수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2000년이 넘는 한국 종교사에 하느님과 직접 문답을 했다는 인물이 없었기에, 김종서는 수운의 종교체험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김종서, 「동서 종교간 충돌과 현대 한국의 역동적 신앙」, 『종교와 문화』 16 (2009), pp.28-29; 차선근, 『현대종교학과 대순사상』 (서울: 박문사, 2023), pp.118-123.

9) 차선근, 같은 책, p.294.

10)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12판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10), 교법 1장 2절.

11) 같은 책, 공사 1장 34절.

12) 같은 책, 공사 2장 19절.

13) 장복야(張僕射)의 ‘새하곡(塞下曲: 변방의 노래)’에 화답한다는 뜻이다.

14) 『전경』, 행록 1장 23절.

15) 같은 책, 행록 1장 23절.

16) 같은 책, 행록 2장 1절, 예시 13절.

17) 같은 책, 공사 1장 3절.

18) 같은 책, 공사 1장 2절.

19) 같은 책, 행록 2장 15절.

20) 차선근, 앞의 책, pp.168-172.

21) 『전경』, 공사 2장 25절, 예시 29절.

22) 차선근, 앞의 책, pp.352-392 참조.

23) 『전경』, 공사 1장 2절.

24) 같은 책, 공사 1장 10절.

25) 같은 책, 교운 1장 65절.

26) 같은 책, 공사 2장 23절.

27) 차선근, 「대순진리회의 시간관 연구 (Ⅱ) : 재조정되고 통치되는 시간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49 (2024), pp.21-30 참고.

28) 『전경』, 교운 1장 9절.

29) 한승훈, 「개벽(開闢)과 개벽(改闢) : 조선후기 묵시종말적 개벽 개념의 18세기적 기원」, 『종교와 문화』 34 (2018), pp.205-206.

30) 이봉호, 「『전경』에 나타난 ‘미륵’의 성격」, 『대순사상논총』 26 (2016), pp.60-66.

31) 차선근, 앞의 책, pp.172-173.

32) 『전경』, 공사 3장 5절, 권지 1장 11절, 예시 17·81절.

33) 같은 책, 교법 1장 2절, 공사 3장 9절.

34) 같은 책, 교운 1장 9절.

35) Cha Seonkeun, ““God Always Find a Way” : The Crisis of Civilization and Its Overcoming through the Worldview of Daesoon Jinrihoe.” Journal of Daesoon Thought and the Religions of East Asia. Vol. 3. Issue 2 (2024), pp.13-34.

36) 『전경』, 공사 3장 29절.

37) 차선근, 앞의 책, pp.315-351.

38) 대순진리회 교무부, 『포덕교화기본원리(其二)』 (여주: 대순진리회 교무부, 2003), p.6. “상생법리(相生法理)는 남 잘되게 하는 것이 곧 나도 잘 되는 길임을 자각케 하신 협동의 원리이기 때문에 공존공영의 평화의 윤리(倫理)라 할 수 있다.”

39) 차선근, 「대순진리회 상제관 연구 서설 (Ⅰ)」, 『대순사상논총』 21 (2013), pp.132-134, p.138; 차선근, 앞의 책, pp.113-114, pp.137-138.

40) 『전경』, 교법 3장 2절.

41) 같은 책, 교법 2장 56절.

42) 차선근, 앞의 책, pp.257-260.

43) 이정립, 『증산교사』 (김제: 증산교본부, 1977), pp.41-42.

44) 문자 그대로 우두머리 여인이라는 뜻이다. 증산은 수부를 2명으로 정했는데, 한 명은 차경석의 이종매인 고판례(高判禮, 1880~1935), 또 한 명은 김형렬의 딸 김말순(金末順, 1890~1911)이었다.

45) 홍범초, 『범증산교사』 (예산: 범증산교연구원, 1988), p.35.

46) 이정립, 앞의 책, pp.52-54.

47) 한국종교연구회, 『한국 신종교 조사 연구보고서』 (한국종교연구회, 1996), p.36.

48)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3』 (서울: 집문당, 1991), p.115.

49) 일제는 천황제를 강화하고 종교와 사상을 억압하여 조선 식민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1925년 4월 27일 7개 조항의 ‘치안유지법’을 처음 만들었다. 1928년 7월 4일에 일부 개정을 하고, 1941년 5월 1일에 65개 조항으로 대폭 늘여 3차 개정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사료로 본 한국사’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25_0050, 2025. 6. 10. 검색).

50) 박상규, 「무극도 창도와 해산 시기 : 대순진리회의 관점을 중심으로」, 『대순종학』 3 (2022), pp.18-20.

51) 강돈구, 「대순진리회의 종교교육」, 『종교연구』 62 (2011), p.238.

52) 『전경』, 교운 1장 21절.

53) 차선근, 앞의 책, pp.369-370.

54) 차선근, 「대순진리회 도장 치성의 의미 재검토」, 『대순사상논총』 42 (2022), pp.6-8.

55) 『전경』, 교법 2장 50절.

56) 차선근, 「대순진리회 생태론 연구서설 : 상생생태론」, 『대순사상논총』 35 (2020), pp.295-330.

57) 강돈구, 「근대 신종교와 민족주의 Ⅰ : 동학·증산교를 중심으로」, 『근대성의 형성과 종교지형의 변동 Ⅰ』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pp.198-200.

58)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지침』 (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2), pp.97-98.

59) 같은 책,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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