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

신후담(愼後聃)의 『팔가총평(八家總評)』*: 조선 후기 유학자의 제자백가 비평과 자기 인식

박지현 1 , **
Ji-hyun Park 1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1Visiting Researcher, Institute of Philosophy,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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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Feb 27, 2026; Revised: Mar 12, 2026; Accepted: Mar 25, 2026

Published Online: Mar 31, 2026

국문요약

이 글은 조선 후기 유학자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의 『팔가총평(八家總評)』의 체제와 비평 방식을 분석하여, 제자백가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과 학문적 자기 인식의 형성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제자백가는 정통 유학을 옹호하기 위한 대비적·이단적 범주로 이해되었으나, 신후담은 단순한 배척이나 수용을 넘어 각 사상을 긍정과 부정의 범주 속에서 분별하고 재배치하고자 했다. 그는 주 왕실의 쇠퇴 이후 기존 정치 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지식 권력이 분산되고, 그 속에서 제자백가가 통치의 정당성과 방략을 제시하며 등장했다고 보았다. 왕실의 쇠퇴에 따른 ‘지식 권력의 분산’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제자백가의 출현을 파악하기 때문에 제자백가가 본래 유학의 도와 그 근원을 같이하지만, 전개 양상에 따라 공(公)과 사(私)로 분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유학의 도를 기준으로 각 학설의 가치를 분별하였으며, 이는 유가를 제자백가와 동렬에 두지 않으면서도 그 정당성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인식은 제자백가를 단절적 사상이 아니라 동일한 기원에서 분화된 것으로 이해하게 하며, 유학의 도를 기준으로 이를 분별하고 평가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팔가총평』은 그가 18세에 집필을 시작하여 23세에 완성한 초기 저술로서, 지적 편력을 정리하고 경학 중심의 학문적 방향을 모색하던 전환기의 산물이다. 그는 제자백가의 사상과의 비교 속에서 유학의 철학적·윤리적 정당성을 재정립하고, 이를 통해 유학자로서의 자기 이해를 형성해 나갔다. 따라서 『팔가총평』은 지식 권력의 재편이라는 역사적 인식 위에서 유학을 재정립하고 학문적 자기 인식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평가할 수 있다.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structure and critical methodology of Palgachongpyeong (八家總評, General Review of the Eight Schools) by Sin Hudam (1702–1761), a Confucian scholar of late Joseon, in order to explore his philosophical reflection on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and the formation of his scholarly self- understanding. While Joseon Confucians generally regarded the Hundred Schools as heterodox traditions positioned in contrast to orthodox Confucianism, Sin sought to move beyond simple rejection or acceptance by classifying and reconfiguring each school within a framework of affirmation and negation. He understood the emergence of the Hundred Schools in relation to the historical process following the decline of the Zhou royal house, during which the existing political order disintegrated and intellectual authority became dispersed. In this context, various schools advanced new doctrines to justify and implement political rule. Based on this perspective, Sin argued that the Hundred Schools shared a common origin with the Way of Confucianism, but diverged into the categories of gong (公, normative and non-particularistic) and si (私, particularistic) according to their modes of development. This distinction provided the basis for his evaluation of their doctrines and for his attempt to reaffirm the normative status of Confucianism without placing it on the same level as other schools. As an early work completed between the ages of eighteen and twenty-three, Palgachongpyeong reflects a transitional phase in which Sin organized his intellectual explorations and sought to establish a Confucian, classics-centered scholarly orientation. Through critical engagement with diverse traditions, he rearticulated the philosophical and ethical legitimacy of Confucianism and, in doing so, formed his own scholarly self-understanding. Thus, Palgachongpyeong can be read not merely as a critique of the Hundred Schools, but as a text that demonstrates the reconstruction of Confucianism and the formation of scholarly identity within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reconfiguration of intellectual authority.

Keywords: 신후담; 팔가총평(八家總評); 제자백가; 긍정과 부정의 범주; 조선후기; 자기 인식; 지식 권력
Keywords: Shin Hudam; Palgachongpyeong (八家總評); Hundred Schools of Thought; categories of positive and negative; Late Joseon Dynasty; self-understanding; intellectual authority

Ⅰ.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조선 후기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의 제자백가 비평서 『팔가총평』의 체재와 내용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제자백가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을 고찰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제자백가는 대체로 유학의 정통성을 확인하기 위한 대비적 사상으로 이해되었으며, 정통에 대한 이단이라는 범주 속에서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단순한 배척의 논리를 의미하기보다, 각 사상을 유학의 기준 아래에서 긍정과 부정의 범주로 분별하고 재배치하려는 인식 방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백가의 개별 학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드물었으며, 조선에서 제자백가서는 대체로 유용한 고전으로 소비되고 향유될 뿐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노장을 제외하면 제자서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 작업 역시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신후담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제자서를 직접 독서하고 비평하는 과정을 통해 여러 사상들을 비교·검토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를 단순한 이단 논박에 머물지 않는 사유의 작업으로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유학자가 다시 제자백가를 읽고 비평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러한 비평은 제자백가를 긍정과 부정의 범주 속에서 재인식하는 과정과 나아가 그의 학문적 자기 이해와 어떠한 관련을 갖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팔가총평』은 신후담이 심진(沈津)의 『백가유찬』을 토대로 약 70여 종의 제자서를 읽고 남긴 비평서이다. 『백가유찬』은 선진시기부터 명대에 이르는 제자서를 망라하여 수록한 총집으로, 대부분 각종 주석을 배제하고 원문과 간략한 해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1) 송·명대에 편찬된 제자서 총집류가 조선에 유입되었으나, 실제 독서와 복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용된 사례는 많지 않으며, 『백가유찬』은 그러한 맥락에서 주목되는 텍스트이다. 『팔가총평』은 이 총집을 매개로 개별 제자서에 대한 평가를 시도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조선 지식인의 제자백가를 어떠한 기준 속에서 분별하고 이해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팔가총평』은 신후담의 학문 세계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거나2) 『백가유찬』의 활용 사례로 간략히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3) 신후담의 저작은 모두 필사본으로 흩어져 전해졌는데, 양승민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수습되어, 그 성과는 2006년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된 『하빈선생전집』(총 9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팔가총평』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하빈집(河濱集)』 내편(內篇)으로 『하빈선생전집』 3책과 4책에 수록되어 있다.4) 신후담의 주요 저작들이 번역되면서5) 관련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6)

신후담은 사칠론에서 성호가 제기한 공칠정을 심화시켰으며, 평생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학 방면에서 주자의 『대학장구』 체재를 부정하고 고본 『대학』으로 돌아갔으며, 『주역』 연구에서 독자적인 해석을 제기했다. 그러나 『팔가총평』은 아직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유가와 제자백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성찰한 텍스트로서 의의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다만 강병수의 『하빈 신후담의 학문세계』(2021)는 신후담의 『팔가총평』의 저술 취지와 제자백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조명했는데, 유학의 도를 기준으로 제자백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으로 평가했다.7) 그밖에 도가8), 묵가9), 순자10) 등 『팔가총평』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검토한 연구와 이단 비판론의 관점에서 일부 논의가 이루어졌으나11), 『팔가총평』의 구성과 비평 방식 자체를 중심으로 그것이 신후담의 학문적 전환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제자백가 비평이라는 지적 실천이 그의 사유 형성 과정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보완의 여지가 있다.

주목할 점은 『팔가총평』이 신후담의 생애 초기, 즉 1719년(18세)에 집필을 시작하여 1724년(23세)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는 그가 초기의 지적 편력을 정리하고 경학 중심의 학문적 방향을 모색하던 전환기와 겹친다. 부친의 권고와 스스로 다짐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자백가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은 단순한 독서 범위의 확장이 아니라 학문적 자기 정립 과정과 관련된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팔가총평』에서 신후담은 제자백가를 일괄적으로 배척하거나 역사적 분화의 산물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사상들을 비교·검토하는 과정을 통해 유학의 철학적·윤리적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유학을 자명한 진리체계로 확신하고 숙고없이 수용하거나 그 체계 안에서만 연구하기보다 사유의 과정을 통해 다시 정립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팔가총평』을 단순한 제자백가 해설서가 아니라, 제자백가 비평을 매개로 한 유학자의 학문적 자기 인식 형성 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신후담의 생애와 저술 환경을 검토하여 『팔가총평』의 집필 맥락을 살피고, 3장에서는 텍스트의 구성과 비평 방식을 분석하여 조선 후기 제자백가 인식의 특징을 규명한다. 이를 통해 『팔가총평』이 조선 후기 유학자의 사유 형성과 유학 이해의 재정립 과정에서 갖는 철학적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Ⅱ. 신후담의 생애와 『팔가총평』의 저술

1. 생애와 저술

신후담의 생애는 대체로 순탄했으며 빈곤이나 고초를 겪은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독서와 습작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1723년(23세) 진사시에 입격을 끝으로 출사하지 않고 평생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성장기(17세 이전), 전환기(18~23세), 그리고 24세 이후의 학문기로 나눌 수 있으며12), 이하에서는 전환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후담은 신귀중(愼龜重)과 우계이씨(羽溪李氏)의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자가 이로(耳老), 연로(淵老)이고, 호가 하빈(河濱), 금화자(金華子), 돈와(遯窩), 성암(省庵), 복재(復齋), 규복재(圭復齋) 등 다양하다.13)

그의 8대조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이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중종반정 이후 가문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조부 신휘오(愼徽五)는 부친 신귀중을 양자로 들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후담의 성장기는 가문을 부흥시키고자 한 조부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6세에 조부가 숙사 박세흥을 모셨으며, 10세(1711)에 부친이 생원시에 합격했을 때 조부가 성대한 축하연을 열었다. 14세(1715)에 관례를 치렀으며, 16세(1717)에 충주 오상억(吳尙億) 딸과 혼인했다. 17세(1718) 부친의 권고에 따라 『대학』을 다시 학습하고, 『성리대전』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부친이 그에게 유가경전과 성리서를 다시 읽도록 한 것은 과거시험을 준비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성리대전』을 읽으면서 관심을 둔 것은 「황극경세서」와 「율려신서」 등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표 1. 성장기 저술 목록(삭제된 것은 제목 우측 상단에 *로 표시함)
연도 나이 제목
1707 6 趍庭記聞*
1713 12 兵學指南(抄錄), 赤壁歌 夢仙歌 怪木賦
1714 13 金華外篇 續列仙傳* 繼搜神記* 太平遺記* 龍王記* 海蜃記* 遼東遇神女記* 紅粧傳* 奇門圖說* 文字抄* 雜書抄* 隨筆錄* 經說雜錄* 題手抄兵學指南後 題太平遺記後 題手韻艱字抄後
1715 14 讀書錄 物外勝地記 察邇錄 物産記 動植雜記 海東方言 俗說雜記 衆籟通記 百果志 四韻艱字抄* 續道家* 玉華經*
1716 15 三角山詩 北漢記
1717 16 穀譜 歲時記 蘂城八詠
1718 17 雅言, 雙溪夜話 夢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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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담의 성장기 저술은 선행연구에서도 주목했는데, 특히 『하빈잡저(河濱雜著)』14)는 십대의 지적욕구와 글쓰기를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로 가치가 인정되었다. 「연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장기 작품은 제목만으로도 그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했던 박물학적 취향이 잘 드러난다. 그 중에 유교와 제자백가 사이를 오갔던 흔적이 보이는 작품 몇 가지를 살펴보면, 『금화외편』은 불과 13세에 치란의 문제를 다룬 내용이 있지만, 경세론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15) 『잡술오편』은 「몽장편(夢莊篇)」, 「황허편(怳虛篇)」 등 일부 편제에서 장자의 색채가 확연하지만, 마지막 편에서 스스로 노장에서 유교로 돌아서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16) 『아언(雅言)』은 『성리대전』을 읽고 쓴 것으로, 리기심성설을 비롯하여 천당지옥설, 육구연의 심학에 대한 주희의 비판, 『논어』, 『관자』 등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위의 표에서 볼 수 있 듯이 성장기 저술 중에는 목록만 남아 있는 것도 적지 않은데, 그가 두 차례에 거쳐 스스로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학문적 전환기와 연동되는데, 18세(1719)가 되던 새해 첫날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성장기의 자유로운 독서와 저술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올해 18세가 되었다. 그러나 배움은 거칠고 성취는 조박하여 마음에 얻은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것에 안주하여 분발할 줄 모르면 장차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두렵지 않겠는가? 내가 스스로 생각하니, 부모님의 보살핌에 몸을 의지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걱정을 모르고 종일 편안히 지냈으나, 성취한 것이 없이 유유자적하며 태연히 스스로 지냈다.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면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매우 근심스럽다. 옛날 정이는 18세에 글을 올려 천하의 일을 논하고 「호학론」을 지었다.17) 옛 성현은 일찍 이룬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후학이 바라고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안연은 어떤 분이던가? 그와 같이 되기 바라면 그렇게 된다.”라고 했으니, 어찌 성현의 탁월함을 미치기 어렵다고 여겨 먼저 자신을 한계 짓겠는가? 주자는 어찌 아성의 영역에 들어가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주자는 늘 의리는 무궁하고 세월은 유한한 것을 근심했다. 후인의 자질은 그에 비견할 수 없지만, 부지런함도 백분에 일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주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입으로만 운운하더라도 실제로 공부에 착수할 수 없으면, 참으로 고인이 말한대로 말만 잘하는 앵무새일 뿐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18)

그는 지금까지 부모님 덕에 편안히 지냈으나, 학업에 성취가 없었다고 반성한다. 부친의 거듭된 권고는 장손으로 가문을 일으키고 이끌어 나아야 하는 책임감을 일깨웠으므로, 새해 아침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이나 주희를 본받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정진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비록 정이나 주희와 같은 대학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먼저 스스로를 한계 지을 수는 없다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이때 성장기 저술도 삭제가 시작된 것인데, 1차 삭제에서는 주로 도가와 불교에 관한 것이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해 여름 그는 『팔가총평』 집필에 착수했다. 스스로 부박하고 황탄하다고 여겼던 제자백가의 학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18세의 신후담은 아직 유학으로 완전히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19) 『팔가총평』은 24세(1724)에 완성되는데, 이 책의 집필 기간동안 질병으로 독서를 중단하기도 했지만, 「참동계찬요(參同契纂要)」를 짓고 『음부경』을 주해했다. 특히 도가류 문헌 『음부경』을 주해한 것은 여전히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작업에 대한 반성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음해 21세(1722)에 「자경삼장(自警三章)」을 지어 자신의 학업을 다시 일신하고자 했다.20) 22세(1723)에 진사시에 입격했지만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과거를 단념했다. 이때 2차 삭제하는데, 「연보」에 따르면 과거공부를 폐하고 성리학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팔가총평』은 집필 중이었다.

23세(1724) 봄 성호를 처음 방문하는데, 첫 만남에서 『사칠신편』에 대해 질의하고 서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학서를 읽고 「서학변」을 지었다. 이해에 『소학차의』의 집필에 착수하며, 이듬해 봄에 완성하는데, 『소학차의』는 그의 첫 경전 연구의 성과이다. 바로 이해에 『팔가총평』이 마침내 완성된다. 그가 과거 학문적으로 방황했던 흔적을 지우면서도, 『팔가총평』은 5년 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신후담의 생애 전환기는 아래 표와 같이 『팔가총평』의 집필기간과 겹친다.

표 2. 전환기 저술 목록
연도 나이 제목 특기사항
1719 18 1월 1일 自警說
여름 八家總評 착수
도학으로 전환 선언
구고 삭제 : 續道家 玉華經 등
1720 19 科詩 : 佹詩遺春申君詩 四書疑
琢玉記* 壽養叢書題辭 存想銘* 調氣銘*
가을 增廣監試 兩場 入格
1721 20 課讀* 參同契纂要* 唐詩廣評
1722 21 自警三章*(春帖) 陰符經註解*
秋興詩(式年監試)
式年監試 入格
1723 22 科詩 : 寓感溫公碑 進士試 入格 : 이후 과거 단념 구고 재삭제
1724 23 八家總評 완성(1719~1724)
小學箚疑 착수
봄 성호의 鵝峴寓舍 방문 : 甲辰紀聞編 西學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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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진사를 끝으로 출사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문인도 아닌 학자, 그것도 경학자로써의 삶은 『팔가총평』의 완성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경학자 신후담의 면모는 이후 저술에서 잘 드러난다. 성호는 신후담의 묘지명에 방대한 저술을 기록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성호가 나열한 저술은 대부분 경학연구 성과이다.21)

23세 이후부터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독서와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부친과 함께 가문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간혹 족보편찬 등 집안일로 여행을 했지만 대부분 칩거하듯 머물면서 학문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29세(1730년) 여름에 동해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도가적 정취가 완연한 『정양록(正陽錄)』을 남겼다. 38세(1739)에 단경왕후 복위가 결정되고, 신수근에게 관직이 추증되는 경사가 있었으며, 조모의 회갑연에 「육남매전(六男妹傳)」을 찬술했다. 40세(1741)에 지은 『사칠동이변(四七同異辯)』은 스승인 성호가 『사칠신편』 발문을 다시 쓰게 했으며[重跋], 성호학파 내부에서 논란을 야기시켰다. 43세(1744)에 부친의 상을 당했고, 1745년 무신란의 잔당과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고로 방면되었다. 이 일로 아우 신후함(愼後咸)은 경상도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22) 그는 곧바로 풀려났으나 아우가 유배된 일이 전 생애에가장 큰 변고일 것이다. 59세(1760) 4월 모친 이씨의 상을 당했는데, 상중에 앓고 있던 족질(足疾)이 악화되었다. 60세(1761) 평생 독서 획수를 기록한 글을 지어 후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고,23) 11월 24일 금성촌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24)

2. 『팔가총평』의 저술배경

신후담이 생애 전환기와 같이 중요한 시기에 반성과 다짐을 반복하면서도 『팔가총평』을 집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팔가총평』의 서문25)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1단>

내가 어렸을 때 오로지 박학에만 힘쓰고 요체는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왕세정이 삼엄이라는 서재를 만들어 백가의 책을 모아두고 서재 안에서 저술했다는 것을 들었다. 흔연히 그를 배우고자 하였으니 마침내 한 책을 지어서 「후독서지(後讀書志)」라 했다. 무릇 평일에 읽은 책을 논의에 따라 배열하여 장차 이것으로 미루어 천하의 책으로 이름난 것을 다 읽고 그 지취를 다 궁구하고자 했다. 그런 뒤에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식견이 고루하고 견해가 치우쳐 형식적인 문채(文彩)에만 빠졌으니, 사람이 부박하고 허황된 습관에 매우 놀랄만하여 마땅히 몹시 뼈아픈 것이라 급히 고쳤다.26)

자신의 과거 학습태도가 박학에 치중했다고 반성한다. 박학은 왕세정(1526~1590)27)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후독서지』를 썼다고 하는데, 천하의 명저를 빠짐없이 독파하려 했다고 하므로 일종의 독서 목록으로 보인다. 왕세정의 『독서후』28)에 착안한 것으로 보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29) 결국 자신의 박학은 그저 형식적으로 문채만 탐닉했던 것으로 근본을 놓쳤음을 깨달아 고쳤다는 것이다.

<제2단>

내가 열너댓살 때 심씨의 『백가유찬』을 읽고 마음으로 좋아하여 숙독하고 침잠완미하여 제자백가의 황탄한 설에 동화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후에 유가의 글에 돌이켜 구해보면서 조금씩 전일의 잘못됨을 깨달았으니, 도리어 잘못된 습관을 과감히 고쳐 제때에 진덕수업의 계책으로 삼지 못했다. 다시 제자의 설을 취해 그 원류를 궁구하고 시비를 증험하여, 저술에 스스로 의탁하고자 했으니 마음을 쓴 것이 또한 이미 그릇되었고 도에서 떠난 것 또한 더욱 멀어졌다. 그러므로 그 글에서 보이는 것은 대부분 부범(浮汎)하고 외도(外道)의 의미에 힘써 반본을 수렴하고 요약하는 실질은 전혀 없다. 아! 병폐를 받아들인 근원이 어찌 언어에만 달려있을 뿐이겠는가?30)

『백가유찬』은 14~5세 무렵부터 읽고 깊이 심취했던 경험을 고백한다. 당시에는 읽은 것에 무비판적으로 빠져 들었지만, 이후 유가의 글을 다시 읽으며 점차 자신의 오류를 자각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백가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제자백가 비평서를 저술한 일 역시 잘못이라고 인정한다. 저술 내용도 실질이 없다며 스스로 비판적 태도를 보이지만, 마지막에 잘못된 길로 빠져든 병폐가 단지 언어문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도, 『팔가총평』을 집필할 수 밖에 없었던 내적 동기를 드러내는 것인데, 앞에서 말한 ‘제자백가의 원류를 탐구하고 시비를 증험’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이를 통해 유학과 제자백가를 분변하고 오류를 밝혀내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제3단>

삼대 이후로 학교의 가르침이 밝게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이 성현이 만든 법을 상고하고 사리의 당연함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글을 배우는 것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그러나 글을 배우는 방법에는 순서가 있다. 의리의 정미한 경지와 학문의 진덕수업(進德修業)하는 길은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국가 치란의 변화와 인물 사정의 분별은 역사서에 자세하니, 이것이 마땅히 먼저 공부할 것이다. … 그렇지 않고 그 삿됨을 변척하여 혹세무민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도를 이루고 덕을 세운 뒤에 천천히 논의하는 것이 옳고, 경사를 뛰어 넘어 먼저 공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이 또한 매우 분명하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 비록 그렇더라도 이미 저지른 일은 말 할 것이 없고 이제부터 앞으로 더욱 몸에 절실한 공부의 문자에 마음에 두려고 계획하여 깊이 잠심하여 보익이 될 것을 구하여, 전일의 한만한 짓과 스스로 말타고 멀리 나가서 돌아올 곳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31)

이미 삼대 이후로 학교의 교육이 무너졌으므로, 배우는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언어문자 밖에 없다. 성인이 언어문자로 남긴 가르침을 배워야 하지만, 그 배움에는 올바른 순서가 있다. 그러나 자신은 그 순서가 전도되어 도를 이루고 덕을 세운 뒤에 논의해야 할 제자백가를 우선시 했으므로, 앞으로는 이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서문이 마무리 된다. 신후담의 이런 반성과 다짐이 처음은 아니다. 『팔가총평』의 완성으로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과거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이후 그는 유학의 진리성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견지하며, 경학연구에 집중한다.

신후담이 비록 서문에서 저술 동기를 밝히고 있지만, 서문만으로는 신후담의 취지가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후담이 이 책을 저술한 시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선행연구에서 신후담의 성장기 독서와 글쓰기 결과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하빈잡저』에 주목했다. 18세가 되던 해 신후담은 비록 부친의 권고를 따른 것이지만 도학에 정진할 것을 선언하며 이전의 지적 편력을 한만한 것으로 강등시켰다. 18세부터 신후담은 학문의 방향을 유학으로 정위시키는데, 같은 해 여름 『팔가총평』의 저술에 착수한 것이다. 이 책의 저술은 23세(1723년)에 완료되는데, 그 사이 신후담은 과거에 응시하여 입격하였으나 22세에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기를 결정했다. 19세부터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성리서의 학습과 저술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저술이 완료된 이듬해 1724년 봄 성호 이익을 방문하였다.

『팔가총평』의 저술시기는 신후담의 평생에 걸친 일대 전환기와 겹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신후담은 왜 다시 제자백가에 눈을 돌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도학(유학)에 정진하겠다고 선언한 직후부터 시작된 『팔가총평』의 저술은 신후담의 학문적 전환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후담은 이 시기에 『역학계몽보주(易學啓蒙補註)』를 저술하고 『음부경』을 주해했으며, 섭생술에 관한 책을 읽으며 관련된 글을 지었다. 또한 「당시광평(唐詩廣評)」을 짓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으며, 「자경설」(18세)을 비롯하여 「자경삼장」(20세) 등 학문의 자세를 다잡는 글을 지었다. 학문에 정진하기를 다짐하는 글을 반복적으로 지어 유학자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스스로 확인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팔가총평』은 단순히 제자백가에 대한 일시적 관심의 산물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을 검토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방향을 재정립해 가는 전환기의 산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팔가총평』은 신후담이 유학을 자명한 전제로 수용하기 이전, 사유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해 가는 자기 인식의 한 국면을 보여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Ⅲ. 『팔가총평』의 구성과 내용

1. 『팔가총평』의 구성

『팔가총평』의 저본인 『백가유찬』은 명대 심진(沈津; 생물년미상)32)이 선진시기부터 명대까지 제자백가를 유가·도가·법가·명가·묵가·종횡가·잡가·병가의 8가로 분류하고, 총 74종의 문헌을 수록한 총집이다. 이 책은 1567년 함산현(含山縣: 현재 安徽省 馬鞍山市)에서 40권 38책으로 간행되었다. 심진은 당시 함산현 학관의 교유(教諭)였는데, 흩어진 제자서를 수습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초본을 만들었다. 이를 열람한 남경 병부상서(南京兵部尚書)를 역임한 장시철(張時徹, 1500~1577)과 함산현 지사(知事) 장사충(張思忠, 1536~?)은 그의 안목을 높이 평가했으며, 함산현 학궁에서 판각이 추진되었다. 이 책의 간행은 당시 제자서에 대한 수요를 반영한 것이다.

심진은 범례에서 서명, 분류의 배열기준, 찬집 취지와 경위 등을 밝혔다. 8가로 분류한 것은 『한서』「예문지」를 따르되 반고가 볼만하다고 한 9가에서 소설가를 제외한 것이다. 각 가의 첫머리에 원본에 대해 서술한 ‘총제(總題)’를 붙이고, 각 문헌의 첫머리에는 서지사항 등을 밝힌 ‘제사(題辭)’를 수록했다. 자부에 속하기는 하지만, 당송 문장가나 송대 유학자들은 제외시켰다. 이와 같이 분류 체계를 명확하게 하는데 주력했고, 이 책에서 제외시킨 제자서는 별도의 『백가별찬(百家別纂)』, 『설림수찬(說林粹纂)』으로 판각했다고 하는데, 현전여부는 알 수 없다.

신후담이 열람한 『백가유찬』은 1692년 영남감영에서 관찰사 민창도(閔昌道, 1654~1725)에 의해 복간된 여러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33) 함산본[하버드본]과 조선본[장서각본]의 구성과 내용은 동일하며, 간행에 대한 기록만 차이가 있다. 심진은 제자백가가 공자 이후 끊어진 육경의 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제자서 독서가 육경을 학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34) 이 때문에 주석에 의존하지 않고 제자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대부분 주석을 배제하고 각 제자서 원문만 수록했다. 간혹 주석을 일부 남기거나 자의나 음을 풀이한 경우도 있다. 심진이 육경의 도에서 제자백가가 갈라져 나왔다고 한 것은 신후담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후술하겠지만 신후담은 제자백가가 모두 유학의 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후담은 『백가유찬』 분류와 범위, 편차의 구성 순서 등을 그대로 따랐다. 심진이 제공한 서지 정보 역시 대부분 수용하며, 판본 비정이나, 문헌고증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팔가총평』은 첫머리에 「서설삼단」에 이어 유가를 비롯한 8가의 문헌에 대한 논평과 각가의 「총론」과 마지막 부분에 결론에 해당하는 「팔가총론」이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서설-각 가의 논평-총론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갖는다.

『팔가총평』은 두 가지 필체의 전사본(傳寫本)이다. 그런데 서명표기에 차이가 있다. 대부분 ‘八家總評’이 서명으로 쓰이지만, ‘八家總論’으로 표기하거나,35) ‘八家總論’과 ‘八家總評’으로 나누어 성격은 같지만 다른 시기에 저술된 두 책으로 보기도 한다.36) ‘총론’과 ‘총평’은 통용될 수 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필사자에 따라 總자를 摠자로 쓰기도 하는데, 서명이라는 점에서 정리가 필요하다.

먼저 두 필체에 따른 서명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그림 1>과 <그림 2>은 필체가 다르지만 서명이 ‘八家摠評’이라고 되어 있고, <그림 1>과 필체가 같은 <그림 1-1>에서는 ‘八家摠論’으로 되어 있다. 서명은 이와 같이 모두 세 번 보인다. 다음은 각 가의 끝에 있는 ‘總論’과 책의 말미에 붙여놓은 ‘八家摠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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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서명표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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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서명표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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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서명표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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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는 ‘도가류총론’으로 ‘總論’으로 표기되어 있다.37) 각 가의 총론은 7가가 동일하고 묵가류만 예외적으로 「묵자론(墨子論)」, 「묵씨원류(墨氏源流)」, 「묵불설(墨佛說)」 세 편으로 총론을 대신한다. ‘총론’은 제가에 대한 소결의 성격이라면, ‘팔가총론’은 이 책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므로 모두 『팔가총평』이라는 책의 하위 범주이다. 따라서 이 책의 서명을 ‘팔가총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위범주인 ‘팔가총론’과 혼동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전체 구조상 적절하지 않다.38) 이러한 서명의 불일치는 의도된 것이라기 보다는 필사과정에서 생긴 단순한 혼동이나 오류이겠지만, 서명으로는 ‘八家總評’이 타당할 뿐 아니라 이 책의 성격이 비평서임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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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항목표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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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항목표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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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유찬』이 조선에서 널리 읽혔지만, 신후담의 『팔가총평』은 분량면이나, 내용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택이 『백가유찬』을 읽고 만든 선집은 전하지 않고 서문만 남아있으며,40) 그 외에는 백가유찬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이나 인용 등에 불과하다. 심진은 제자서 원문을 충실히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고, 편저자나 각 문헌의 시말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므로 신후담은 각 문헌의 서지정보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밝힌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본문 속에 포함시키거나 생략했다.

『팔가총평』의 수록 문헌 구성은 다음 <표 3>과 같다.41)

표 3. 『팔가총평』 수록 목록
Ⅰ. 儒家類 Ⅱ. 道家類 Ⅲ. 法家類 Ⅶ. 雜家類
家語(孔子門人) 道德經(周 李耳) 管子(齊 管夷吾) 鬻子(楚 鬻熊)
國語(左丘明) 列子(鄭 列禦冠) 韓子(韓 韓非) 呂氏春秋(秦 不韋)
晏子春秋(齊 晏嬰) 莊子(宋 莊周) 政論(漢 崔寔) 淮南子(漢 劉安)
孔叢子(漢 孔鮒·孔臧) 文子(周 辛鉼) 大復論(明 何景明) 論衡(漢 王充)
荀子(趙 荀況) 關尹子(周 關令尹喜) 法家類總論 (4종) 白虎通(漢 班固)
新語(漢 陸賈) 亢倉子(周 庚桑楚) 風俗通(漢 應劭)
賈誼新書(漢 賈誼) 陰符經(黃帝) 子華子(晋 程本)
春秋繁露(漢 董仲舒) 參同契(漢 魏伯陽) Ⅳ. 名家類 劉子新論(北齊 劉晝)
韓詩外傳(漢 韓嬰) 鶡冠子(楚 隱人) 尹文子(周 尹文) 雜家類總論 (8종)
新序(漢 劉向) 抱朴子(晋 葛洪) 鄧析子(鄭 鄧析)
說苑(漢 劉向) 天隱子(唐 司馬承禎) 公孫子(趙 公孫龍)
鹽鐵論(漢 桓寬) 玄眞子(唐 張志和) 名家類總論 (3종) Ⅷ. 兵家類
法言(漢 揚雄) 齊丘子(終南隱者 譚峭) 六韜(周 呂望)
潛夫論(漢 王符) 素書(黃石公) 司馬子(齊 司馬穰苴)
忠經(漢 馬融) 無能子(唐 隱民) Ⅴ. 墨家類 孫子(魏 孫武)
昌言(漢 仲長統) 玉華子(明 盛若林) 墨子(宋 墨翟) 吳子(魏 吳起)
申鑒(漢 荀悅) 道家類總論(16종) 墨子論 墨子源流 墨佛論 (1종) 三略(黃石公
中論(漢 徐幹) 尉繚子(魏人)
中說(隋 王通) 孔明心書(漢 諸葛亮)
鹿門子(唐 皮日休) 李衛公(唐 李靖)
巵辭(明 王褘) Ⅵ. 縱橫家類 韜鈐內篇(明 趙本學)
說林(明 張時徹) 鬼谷子(戰國 隱士) 韜鈴續篇(明 兪大猷)
郁離子(明 劉基) 戰國策(漢 劉向) 兵家類總論 (10종)
龍門子(明 宋濂) 縱橫家類總論 (2종) 八家摠論
儒家類總論 (24종) (총 68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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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류는 『백가유찬』에 수록된 문헌 총 24종에 대해 논평했다. 『순자』·『법언』·『중설』 등은 편명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백가유찬』은 대부분의 문헌에 대한 일련의 고증을 거쳐, 중복되거나 재인용된 구절을 삭제한 경우가 있는데.42) 『순자』 현행본 32편 중 28편만 수록했다.43) 신후담은 이에 대해 15편 중 33구절을 축약해서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 중에는 순자 학설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모두 나타난다.44) 유향의 『신서』와 『설원』에 대해서는 각각 「신서고(新序考)」와 「설원상하고(說苑上下考)」 등의 소제목을 붙였다

도가류 문헌은 『백가유찬』의 22종 중 16종에 대해서만 논평했다. 신후담이 삭제한 문헌들은 도가 수련서이며, 심진은 이를 『음부경』·『참동계』와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보고 『음부경』 뒤에 붙였다.45) 신후담은 도교 수련서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백가유찬』에 수록된 『음부경』 주석46) 대신, 자신의 주석을 붙였다.47) 이것이 『팔가총평』에 수록된 「음부전주(陰符前註)」와 「음부후주(陰符後註)」이며, 「음부육찬(陰符六贊)」·「음부후설(陰符後說)」·「육경총론(六經總論)」이 포함된다. 「연보」에서 신후담이 「참동계찬요」와 『음부경』을 주해를 했다고 기록했지만 실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팔가총평』에 수록된 「참동계」는 역대의 판본과 주석들을 설명하고 『백가유찬』의 판본을 평가한 내용이다. 이러한 것을 보아 실전된 『음부경주』와 「참동계찬요」는 『팔가총평』 도가류에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8)

나머지 법가류 4종, 명가류 3종, 묵가류 1종, 종횡가류 2종, 잡가류 8종, 병가류 10종으로 『백가유찬』과 동일하다. 『백가유찬』이 총 74종의 문헌을 수록했지만, 『팔가총평』은 도가류 6종을 제외한 68종의 문헌에 대해 논평한 것으로 『하빈선생전집』을 기준으로 400쪽이 넘는다. 신후담이 논평한 문헌의 수도 많지만, 각 논평 내용도 풍부하다. 비록 『팔가총평』의 성격과는 다르지만, 허균의 제자서 독서기, 서학비판을 목적으로 집필된 유건휴의 『이학집변』 홍석주의 문헌해제서 『홍씨독서록』 등과 외형적으로만 비교해도 제자백가에 대한 논의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팔가총평』의 구성과 서명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구성 속에서 신후담이 각 제자백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팔가에 대한 비평

신후담은 8가의 학설이 모두 유가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는 심진이 육경의 도에서 제자백가가 분화된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제자백가의 연원이 유가라는 주장은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유학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논거가 필요하다. 그는 먼저 제자백가가 동일한 도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옛날에는 오직 유학의 도(道)만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위로는 요순과 우탕이 전한 것이 바로 이 도이며, 아래로는 공자, 증자, 자사, 맹자가 조술한 것이 바로 이 도이다. 『시경』와 『서경』에 기록되고 『역』과 『춘추』에 실린 것이 이 도가 아님이 없었다.49)

여기서 제자백가의 동일한 근원이 되는 ‘도’가 바로 유학의 도이다. 그러므로 신후담은 제자백가의 사상적 근원까지 성리학 도통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도’는 유가 뿐 아니라 모든 학파에서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노장을 ‘도가’로 칭한다. 홍석주도 노자가 ‘도’를 전유하는 것에 부정적인데, 노자를 도가로 일컬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아예 ‘노가(老家)’라고 칭했다.50) 도통계보는 학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유학이 정통이며 그 연원을 삼대로 미루어나가면 유학 이외에 학설을 철저히 배제된다. 그러므로 ‘도’라고 하는 것은 유학의 전유라는 것이 신후담의 주장이다. 이러한 도에 대한 신후담의 주장은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도’ 자체를 유학적 도의 계보 속에서 재배치함으로써 제자백가의 도가 공자의 도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배치는 곧 말류의 유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또한 제자백가는 유학과 대립적이거나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유학의 도의 일단을 얻은 동일한 근원을 갖는 유학의 지류로 재정위된다. 신후담이 도를 유가의 전유로 삼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도통의 관점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옛날에는 유도만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다.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천하가 크게 혼란해지면서 사람마다 논의가 다르고 사(士)마다 학설을 사적으로 주장하여 비로소 유가와 도가 법가 등이 나뉘게 되었다. 그 후대의 유가라는 자들은 이미 유학의 도가 포괄하는 것이 광대하나 칠가를 두루 포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 칠가는 각기 유학의 도의 일단을 얻었으나 그 근원이 같은 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51)

여기서 신후담은 삼대로부터 전승된 유학과 제자백가의 하나에 포함되는 유가를 구분한다. 그러므로 삼대 이후 공맹으로 이어지는 천리와 인륜을 포괄하는 넓고 큰 도에 바탕은 둔 것이 ‘유학’이고, 후대의 유가는 그 말류로 제자백가 중 하나에 포함된다. 그러나 유학과 후대 유가를 완전히 단절시켜 분리한 것은 아니다. 신후담에 따르면 유학의 도가 온전히 유지되는 것은 맹자까지이고, 맹자 이후 순자를 비롯한 유가는 유학의 도에서 괴리되고 벗어난 것이다. 명대에 이미 『맹자』가 경전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제자에 『맹자』는 포함되지 않으므로, 『팔가총평』이나 『백가유찬』에 『맹자』는 없다. 그러나 신후담은 도통의 관점에 따르면서도 유학과 유가를 분리하고, 제자백가의 원류를 유학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신후담도 주왕실의 쇠퇴로부터 제자백가의 출현을 설명하는데, 기존의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변화하는 전환기에 등장한 제자백가는 당시 제후들에게 지배와 통치를 정당화하고 실현할 수 있는 계책을 새롭게 제기했다. 이는 서주 이전에 주왕실에 집중되어 있던 천하를 경영하기 위한 통치 권력으로서의 지식[지식권력]의 분산을 의미한다. 주왕실이 약화되고,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개인과 국가의 이해가 서로 얽히고 작동하는 가운데 각종 사상과 학설이 새롭게 등장하고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중앙에 집중되었던 지식권력의 분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공자도 서주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등장하는데, 춘추시대 가장 앞선 인물은 관중이다.

지식 권력의 핵심은 전쟁과 제사[禮]라고 할 수 있다. 관중은 제나라에서 예와 전쟁을 중심으로 지식권력을 재편했다. 관중보다 100년 뒤에 공자는 서주의 예악을 재편하고자 했으나 현실정치에서는 관철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경전 정리로 그 작업을 완성했다. 오나라의 손무는 전쟁을 중심으로 재편했으므로, 『손자병법』은 단순히 전쟁에 필요한 전략·전술 기술서가 아니다. 노자는 지식권력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노자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는 그 분산된 지식권력이 특화되면서 개성이 드러나며, 분산된 지식권력의 허브가 형성된다. 귀곡자(鬼谷子)는 일종의 재야 지식권력의 새로운 중심이었으며, 직하학궁(稷下學宮)은 지식인들의 토론 광장 역할을 했다. 이렇게 생산된 논제들은 『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 종합·정리되었다. 또한 『맹자』·『순자』·『장자』 등을 통해서 특화된 지식체계에 대해 서로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2) 따라서 제자백가의 등장은 특정 사상의 단절이나 해체는 아니며, 주왕실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식권력의 재편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정치 주체들이 새로운 통치 논리를 필요로 했던 현실적 맥락과, 지식의 사회적 기능 변화라는 구조적 조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신후담이 제자백가는 그 근원이 유학의 도라는 점에서 근원이 같기 때문에 유학의 도를 계승한 유가에서 7가가 나왔다는 주장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의 도통 관점에서는 여전히 타당한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후대 유가는 스스로 제자백가와 동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유학의 도를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존의 학설에 근거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그는 도를 그 전개 양상에 따라 다시 공(公)과 사(私)로 구분한다.

천하의 도는 두 가지이니, 공과 사일 뿐이다. 사람은 이 둘 사이에서 생겨나니 음양오행의 기(氣)를 품부받아 그 형체를 이루고 음양오행의 리(理)를 품부받아 그 성(性)을 이룬다. 성은 천하 공공(共公)의 도이니 본래 물아의 간격이 없다. 그러므로 이미 자신의 성을 온전히 다하면[盡己] 반드시 그것을 미루어 타인의 성을 다하게 하며[盡人], 이미 타인의 성을 다하게 하면 반드시 그것을 미루어 만물의 성을 다하게 하여[盡物] 점차 천지 만물의 화육을 돕고 천지에 참여하는 영역에 이르게 되니53), 이것이 공(公)이 되는 까닭이다. 형체를 따르는 자[徇形者]는 피(彼)와 차(此)의 구분을 두는 것에 막히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나를 위하는 것만 알고 미루어 타인에게 미칠 수 없고, 이미 타인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것을 미루어 물에까지 미칠 수 없어 끝내 인륜[常倫]을 도외시하고 자기만 아는 폐단에 전몰(專沒)되니 이것이 사(私)가 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성을 따르는 자[徇性者]는 비록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낌이 만물에까지 널리 미치니, 이것은 성의 올바름[正]이 주(主)가 되어서 사(私) 또한 공(公)이 되는 것이다. 형체를 따르는 자[徇形者]는 비록 스스로 자기 성을 수양한다고 말해도 그 수양이 전적으로 한 몸의 이로움만 추구하니, 이것은 형체의 편벽됨이 주(主)가 되어서 공도 또한 사가 되는 것이다. 군자는 이 두 가지의 구분에 대해 살필 수 있으니 천하 도술의 그릇됨과 바름에 대해서 또한 명쾌하고 분석하고 밝게 분변하여 의혹되는 바가 없다.54)

공사의 구분은 철저히 성리학에 기반한다. 도의 공적인 전개는 천하 공공의 도인 성을 따르는 것이며, 사적인 전개는 형체[몸]을 따르는 것이다. 성은 애초에 물아의 간극이 없이므로 순성자는 진기에서 진인과 진물로 나아갈 수 있어 천지만물의 화육을 돕고 천지에 참여하는 영역에 이를 수 있다. 반면 순형자는 피차의 구분에 막혀서 오직 위아에 그치고 타인은 물론이고 만물에 미칠 수 없으므로 사로 규정된다. 그러나 순성자 역시 자기 몸을 아끼지만[私] 그 사는 성의 올바름으로 공이 될 수 있고, 순형자는 성이 있지만 오로지 자사자리(自私自利)만을 추구하므로 공이 사가 된다. 이와 같이 공사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순형자라도 자사자리를 추구하지 않고 성을 따를 수 있다면 사적인 도의 전개를 공으로 되돌릴 가능성도 있다. 마찬가지로 순성자라도 성의 올바름을 주로 하지 않으면 공 역시 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공사 개념에 대한 신후담의 최초 논의가 바로 팔가총평에서 제시된 것이다. 이는 이후 사단칠정에서 공칠정에 대한 논의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자백가는 유학의 도에서 나온 다양한 갈래라면 무엇이 어떻게 같고 다른가? 신후담은 각각의 핵심 주장과 그 폐단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유가 : 경전연구와 인의의 실천 → 경학에 천착하여 괴리되고 갈라져 도를 떠남

도가 : 청정자수(清淨自守)와 허적무위(虛寂無爲) → 이치를 미혹시킴

법가 : 신상필벌(信賞必罰) → 잔인하여 은혜를 손상시킴

명가 : 순명책실(循名責實) →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지니치게 따짐

묵가 : 귀검(貴儉)과 겸애(兼愛) → 예악을 폐기함

종횡가 : 명변(明辯)과 선사(善辭) → 속임수의 술책에 불과함

잡가 : 박기(博記)와 겸통(兼通) → 체계가 없이 산만함

병가 : 기략(機略)과 절제(節制) → 속임수와 기만술에 지나지 않음55)

이러한 것은 사마담, 반고 등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는 제자백가에 대한 일반화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후담은 칠가가 주장하는 설이 모두 유가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았다.

비록 그렇지만 내가 보건대, 이 8가는 비록 주장하는 설이 각자 추구하는 방향이 이와 같지만 그 연원을 깊이 찾아보면 도가 법가를 비롯한 7가는 실로 모두 유가에서 나온 것이니, 유가는 7가에 대해 애초에 이와 같이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불가하다. 대개 유학이 도로 삼는 것은 바로 천리의 저절로 그러함[所自然]이요, 인륜의 당연함[所當然]이니 대중지정(大中至正)하여 만세에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저 한 가지 일로 지목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지칭하여 경전에 마음을 두고 인의에 유의하는 것에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56)

유가는 애초에 칠가와 동렬에 둘 수 없다고 하므로, 경전연구에 몰두하고 인의의 실천에만 급급한 말류의 유가를 비판하며 유가는 본래 천리와 인륜의 도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가는 칠가의 핵심 주장을 이미 모두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칠가가 유가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청정(淸靜)과 허적(虛寂)은 비록 도가의 설이지만 유가 또한 ‘마음을 깨끗이 함[淸心]’, ‘욕심을 적게 함(寡慾)’, ‘마음을 비워 나를 고집함이 없음[虛中無我]’ 등을 말한 것이 있으니, 이는 도가가 전유하는 것이 아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은 비록 법가의 설이지만 유가 또한 ‘상은 공적에 합당하게 하고 벌은 죄에 합당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법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명가는 비록 순명책실(循名責實)에 주안점을 두지만 예경에 사물의 명칭을 변별하는 설을 볼 수 있으니, 유가 또한 명실(名實)을 살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묵가는 비록 귀검(貴儉)과 겸애(兼愛)를 위주로 하지만, 공자의 ‘예를 행할 때에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함[寧儉]’과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汎愛]’의 가르침으로 보건대 유가 또한 검소함[儉]와 사랑함[愛]을 높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횡가의 경우, 명변(明辯)과 선사(善辭)는 본래 행인(行人)57)의 전대(專對)하는 직책에서 나온 것이고, 잡가의 널리 기록하고 두루 통하는 것은 본래 사사(司史)가 채술(採述)하던 유습이고, 병가의 기략(機略)과 절제(節制)는 또한 사마의 유법에서 시작된 것이니, 어느 것인들 유가가 강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7가의 실질이 모두 유가에서 나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58)

앞에서 정리한 7가의 핵심 주장을 모두 유가와 연관시켜, 이미 유가가 가지고 있던 한 부분을 특화시켰으므로 7가의 실질이 모두 유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유가는 7가와 동렬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통의 계보에서는 제자백가는 배제시킨다. 그러나 신후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백가 역시 유학의 도를 일부를 공유한다는 것이 신후담의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8가를 차례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때문에 이른바 유가는 천리의 근본에 어둡고 인륜의 상도에도 어두우니 괴리되어 중(中)을 잃고, 잘못 분석하여 그 정(正)을 해치고 시속에 따라 오르고 내리며 시끄러운 세상에서 총애를 취한다. 이는 유학의 도가 되는 근거를 상실하고 한 쪽으로 흘러 잘못된 것이다. 이른바 도가는 상도를 벗어나고 속세와 단절하는 것을 청(清)으로 여기며, 인사를 물리치고 외물을 멀리하는 것을 허(虛)로 여기며, 황당무계한 말로 인륜을 어지럽히며, 허탄하고 망령된 말로 도를 해치니 이는 청허의 일단을 얻었지만 그 근원을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 이른바 법가는 맹서를 숭상하여 명령을 미덥게 하지만 살육을 과감하게 하여 그 법을 엄격히 하니, 빌려서라도 수를 채우고 각박하기만 하고 은혜가 적으니 이는 상벌의 일단을 얻었지만 그 근원을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 이른바 명가는 애초에 기물을 헤아려 이름을 바로잡으려는 것으로 그 설을 삼았으니, 지나치게 살피고 얽어매어 도리어 그 명칭을 어지럽히게 되었으며, 애초에 사물을 가져다 실질을 따지는 것으로 그 언사를 삼았으니 번거롭고 산만한데 빠지고 막혀 도리어 실질과 유리되었다. 이는 그 명실의 일단은 얻었지만 그 근원을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 이른바 묵가는 전적으로 검소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힘쓰지만 검소함이 너무 지나쳐 예를 번거롭게 여겨 없애고자 하고, 음악을 사치로 여겨 없애고자 하는데 이르렀으니 이는 겸애의 일단은 얻었으나 그 근원을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 종횡가는 사설(辭說)을 꾸미고 구변을 높였으나 나라를 기울어지고 엎어지게 하는 교활한 속임수로 귀결됨을 면하지 못했다. 잡가는 견문과 식견을 탐하고 지난 것을 기록하는데 힘썼으나 끝내 어지럽게 뒤섞이고 난잡한 폐습으로 흘렀다. 병가는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에 힘쓰고 분할과 쟁탈의 기술을 익혀 천하에 해독을 끼쳤다. 이는 모두 각기 명변(明辯), 박기(博記), 기략(機略), 절제(節制)의 일단을 얻었으나 그 근원을 살피지 못한 잘못이다.59)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신후담은 각 학파의 오류를 단순히 지적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제자백가가 도의 한 측면을 포착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전체로 오인될 때 발생하는 폐단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단(一端)’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인식 구조를 잘 보여준다. 즉 제자백가는 유학과 대립하는 이단이라기보다, 도의 부분적 구현으로 이해되며, 유학은 그러한 부분들을 통합하는 근원적 학문으로 재규정된다.

Ⅳ. 맺음말

이 글에서는 『팔가총평』을 조선 후기 유학자의 제자백가 비평이라는 맥락에서 분석하고, 이를 통해 신후담의 학문적 자기 인식 형성과정을 고찰하였다. 『팔가총평』은 단순한 이단 논박이나 학설의 나열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을 비교·검토하는 과정 속에서 유학의 철학적 정당성을 사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지적 실천이었다. 성장기 자유로운 독서 경험을 통해 제자백가에 깊이 매료되었던 신후담은 전환기에 이르러 자기 반성과 학문적 다짐을 바탕으로 유학 중심의 학문적 방향을 정립하였으며, 『팔가총평』은 이러한 전환의 과정과 조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제자백가를 단순한 배척이나 수용의 대상이 아니라 유학의 도를 기준으로 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사유의 장으로 전환하였으며, 이를 통해 유학의 철학적·윤리적 정당성을 재구성하고 학문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팔가총평』은 조선 후기 지성사에서 제자백가 이해의 한 양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유학이 타 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재정립해 나가는 사유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글은 『팔가총평』의 체제와 비평 방식, 그리고 저술 배경을 중심으로 신후담의 문제의식과 사유 구조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접근은 개별 학설의 내용 분석보다는 그에 대한 평가 기준과 인식 틀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팔가 각각의 사상에 대한 심층적 검토는 본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제로 남겨두었다. 후속 연구를 통해 신후담이 개별 학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비판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학적 정체성을 어떻게 구체화했는지를 보다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팔가총평』에 대한 일부 개별적 연구가 축적되고 있는 만큼, 이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 역시 향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팔가총평』은 제자백가 비평을 매개로 유학의 사유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텍스트로서 그 위상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Notes

* 이 논문은 2023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23S1A5B5A16080931).

1) 이 글에서 검토한 『百家類纂』(1567年 含山縣刊)의 저본은하버드-옌칭 도서관 소장본이다. Harvard-Yenching Library Chinese Rare Books Digitization Project-Philosophy (https://curiosity.lib.harvard.edu/chinese-rare-books, 2025. 6. 11. 검색), 최근 识典古籍에서 동일한 판본을 제공한다. (https://www.shidianguji.com, 2025. 7. 1. 검색).

2) 김동준, 「성장기 신후담의 지적 욕망과 『하빈잡저(河濱雜著)』」, 『민족문화연구』 62 (2014); 양승민, 「18세기 궁경실학자 하빈 신후담과 남흥기사 : 신후담의 학문세계와 소설문학에 대한 종합적 고찰」, 『고전문학연구』 21 (2002).

3) 김철범, 「조선 지식인들의 제자서 독서와 수용양상」, 『한문학보』 17 (2007), p.122; 심경호, 「조선후기 지성사와 제자백가」, 『한국실학연구』 13 (2007), pp.373-374; 김방울, 「『백가유찬(百家類纂)』의 편찬과 간행」, 『한국전통문화연구』 10 (2012).

4) 이 글에서도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하빈선생전집』의 『팔가총평』을 대상으로 고찰하였다.

5) 신후담, 『하빈 신후담의 돈와서학변』, 김선희 옮김 (서울: 사람의 무늬, 2014); 신후담, 『하빈 신후담의 대학후설과 사칠동이변』, 최석기·정소이 옮김 (서울: 사람의 무늬, 2014); 김병애, 「河濱 愼後聃 『周易象辭新編-上經』 譯註」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

6) 최근 신후담 연구를 주제로 학술발표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발표회에서도 다양한 주제로 신후담의 학문과 사상이 조명되었다.(2024년 11월 15일, “조선후기 실학사의 재조명 : 하빈 신후담 연구” 재단법인 실시학사·한국실학회 공동주관)

7) 강병수, 『하빈 신후담의 학문세계』 (서울: 다할미디어, 2021), pp.86-127.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 「하빈 신후담의 학문과 사상연구」 (동국대학교, 2001)과 함께 신후담 연구에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8) 王超, 「河濱愼後聃對老莊之評價 : 以『八家總評·道家類』爲中心」, 『국제중국학연구』 87 (2019).

9) 박지현, 「하빈 신후담의 묵가 비판론」, 『대순사상논총』 52 (2025).

10) 박지현, 「조선시대 순자의 인식과 그 변화」, 『동방학』 52 (2025).

11) 진현우, 「하빈 신후담의 이학 비판론 : 『팔가총평』과 『돈와서학변』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3).

12) 신후담의 생애는 아들 愼信이 1811년 경 기록한 『하빈선생전집』 권9, 「하빈선생연보」에 근거했으며 (이하 「하빈선생연보」는 「연보」로 약칭함.) 구체적인 내용은 강병수, 「하빈 신후담의 학문과 사상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양승민, 「18세기 궁경실학자 하빈 신후담과 남흥기사 : 신후담의 학문세계와 소설문학에 대한 종합적 고찰」, 『고전문학연구』 21 (2002), 김동준, 「성장기 신후담의 지적 욕망과 『하빈잡저(河濱雜著)』」 『민족문화연구』 62 (2014) 논문을 참조했다.

13)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5책, 『周易象辭新編』 卷1, 「遯窩先生全書」, p.3, “先生嘗居交河之金尺里, 故自號河濱及金華. 又嘗夢筮同人之遯, 而號遯窩. 又寓自警之意, 而號省庵. 又玩大易陽復之象, 而號復齋. 又以圭復齋.”(1762, 舍弟 愼後恩)

14) 규장각 소장본(一簑古041-Si61h)으로 불분권 1책 필사본으로 『하빈선생전집』 8책에 수록되었다.

15)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8책, 『河濱雜著』 「金華外篇」 <後識>, pp.387-388, “余幼時惑於莊老之術, 喜爲詭誕之論, 而又益之以諸家博雜之說氾濫而不知歸宿. 若此三篇者, 亦可以監其弊矣. 今秋偶閱舊稿爲之三歎, 而書其後以識悔焉. 癸卯季秋之初吉日也.”

16)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8책, 『河濱雜著』 「雜術五篇」 <後書>, pp.394-395, “右雜術五篇, 皆余幼時所撰也. 余幼時喜氾濫諸家, 而尤耽莊老之術. 嘗著玉華經 三十篇, 續道家二十餘篇, 及此五篇者, 以述其意. 雖然玉華經續道家, 所言乖戾特甚, 前已毁削, 此五篇者, 則比二書差爲平順, 故得以留存. 然今觀夢莊篇主意, 幾欲以吾道異端混而一之. 怳虛篇所記臨伯子渾之問答者, 全襲莊子荒誕之說, 其爲乖戾, 盖幷無異於二書也. 斥僞至理二篇, 雖若契於吾儒之說而終亦雜之以諸家不純之論, 無所取哉. 獨喩狂一篇, 頗有戒衆省己之意, 盖去邪返正之漸而亦安足以贖諸篇不善之多乎. 今輒幷錄而不削者, 非謂其言之有取也, 特欲知前日衡馳之端, 而愈馳戒焉, 又因喩狂篇 自反之意, 而實加工焉. 使雜家乖離之說, 不至尙亂乎. 知思使日用進修之心, 不至遽歸於墜墮, 而他日覽之, 亦有以驗其學之進不也. 癸卯八月二十七日書於金城草堂.”

17) 程頤는 太學生 때 胡瑗이 출제한 ‘顔子所好何學’에 대해 쓴 답안으로 「顔子所好何學論」을 썼으며, 이를 「호학론」이라고도 한다. 이 글에서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樂愛惡欲.”이라고 한 구절은 퇴계의 사칠론에 응용된다. (『二程全書』 卷62, 「伊川先生文」 4)

18) 『河濱先生年譜』(고려대학교 六堂文庫 소장본), “余今年十八矣, 學荒業粗, 無所心得. 安於如此, 不知振作, 則將不免爲小人之歸也, 可不懼哉. 余自念一身資眷於父母, 不知飢寒之憂而逸居終日, 無所爲業, 悠悠汎汎, 恬然自安. 不知如此, 將何用哉, 甚可憂也. 昔程伊川十八, 上書言天下事, 著好學論. 古之聖賢, 夙成如此, 雖非後學之可企而及. 然古人曰, 顏何人哉, 希之則是. 豈可以聖賢爲卓然難及而先爲自劃乎. 朱子豈非優入亞聖之域與, 然朱子每以義理無窮日月有限爲憂. 後之人資質不可擬之, 而其勤又不及百倍之一, 欲爲朱子不亦難乎. 口雖云云, 而不能實下工夫, 則眞古人所謂能言之鸚鵡也, 可不戒哉.”

19) 김동준, 앞의 글, p.161.

20) 『河濱先生年譜』, “自警三章;一曰, 歲不我與兮, 學日退, 每逢新陽兮, 心自愧. 二曰, 感天道陰陽之升降兮, 察吾心理慾之消長. 三曰, 所不能自今, 而日新兮.”

21) 『星湖全集』 卷64, 「成均進士愼公墓誌銘」.

22) 『英祖實錄』 卷62, 英祖 21년 11월 3일.

23) 『河濱先生年譜』, “公自度不久於世, 乃有示後孫一篇曰, “河濱老人, 自五六讀書以至六十, 今病且死, 記平生讀書之數以示後孫. 余讀中庸最多, 萬後不復計, 未知果爲幾讀, 而想不下累千. 大學半萬後不計數, 想去萬不遠. 書易各數千讀, 詩論語孟子, 各千餘讀. 小學百讀, 禮記春秋左氏傳, 五十餘讀. 三傳半之. 周禮儀禮孝經, 各數十讀. 二程全書朱子大全心經近思錄性理大全, 終身所閱, 而其中抄讀至百遍, 或累千遍者有之. 沈氏所輯百家類纂數十讀, 而其中道經陰符南華參同, 則讀至累百. 漢魏叢書中, 如大戴禮王氏易例焦氏京氏易文申公詩說之類, 皆數十讀. 太史公史記韓文公昌藜集, 亦抄讀, 或百遍, 或數十遍. 其外, 讀不及數十者, 不記多讀, 而短編小文, 不記. 辛巳八月八日, 書于金城草堂, 是卽平生讀書處也.”

24) 신후담의 문학, 경학 등에 관련된 중요한 기록들이 있지만 생략했다.

25) 『八家總評』의 서문은 세 단락으로 구성된 「序說三段」이므로,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보았다.

26)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3책, 『八家總評』 「序說三段」, p.608, “余幼時, 專以博學爲務, 而不求其要. 嘗聞王世貞爲三弇, 以畜百家之書, 而著書於其中, 則欣然欲學,遂爲一冊, 號以後讀書志. 凡平日所讀之書, 隨輒論列, 將欲以此推類, 盡讀天下之以書爲名者, 而盡窮其志趣. 然後乃己自今思之, 則其識之陋見之偏, 而溺於文, 人浮夸之習者, 殊極可駭, 所當痛念, 而亟改也.”

27) 왕세정은 명나라 복고파 중 이반룡과 함께 후칠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반룡 사후 오랜 기간 문단을 이끌었다. 그의 시문은 조선 문인들도 애독했는데, 선진 제자백가를 배워 새로운 격조를 만들어 낸 것으로 평가 되기도 한다. 심경호, 「허균과 왕세정」, 『연민학지』 40 (2023) 참조.

28) 『독서후』는 왕세정의 만년 저작으로, 선행연구에 따르면 李衷純의 『王郭兩先生崇論』에 수록되어 있다. 같은 글, p.82.

29) 『연보』에 따르면, 29세(1730)에 왕세정의 문집을 열람한 후기를 작성했다고 하므로, 그 후기가 「후독서지」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후독서지」는 『연보』나 다른 저술목록에 보이지 않는다.

30)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3책, 『八家總評』 「序說三段」, pp.608-609, “余十四五時, 讀沈氏百家類纂而心悅之, 熟閱潛玩, 不覺見化於諸子荒誕之說. 後因反求於吾儒之書, 稍悟前日之非, 則却不能勇革謬習, 以爲及時進修之計, 而乃復取諸子之說, 究其源流, 証其是非, 而欲以自托於著述, 其用心亦已左, 而去道亦愈遠矣. 故其見於文者, 率多浮汎, 務外之味, 而全欠損約反本之實.噫. 是其受病之原, 豈但在言語之間而已哉.”

31)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3책, 『八家總評』 「序說三段」, pp.609-610, “三代以後, 學校之敎不明, 學者將欲考聖賢之成法, 而究事理之當然. 舍學文何以哉. 然學文之道, 即有其序矣. 義理精微之奧 學問進修之路, 備於經傳. 國家理亂之變, 人物邪正之分, 詳於史記, 此其所當先也. … 無已而欲卞其邪, 俾不至惑世而誣民, 則此亦徐議於道成德立之後, 可也, 其不可越經史而先之也, 亦甚明矣. 若余則不然 … 遂以是著爲成書, 其於學者, 學文之序, 不亦舛甚矣乎. 雖然已事無可言者, 自今以往, 尙圖置心於切已文字, 以求其浸灌輔益之助, 而不復爲前日之汗漫, 自同於游騎之無所歸也.”

32) 심진은 浙江 慈溪 출신으로 가정(嘉靖, 명 世宗 1521~1567) 연간에 함산현에서 教諭를 지냈다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정덕 연간(武宗, 1509~1521)에 활동한 蘇州 출신 심진과는 다른 사람이다. (『四庫全書總目』 子部四十一 雜家類存目, “百家類纂 40卷 [內府藏本] : 明沈津編. 案明有兩沈津, 其正德中作鄧尉山志及欣賞編者乃蘇州人, 此沈津慈溪人, 嘉靖中官含山縣教諭. 是書所錄, 自周秦諸子下逮於明, 殊爲冗濫. 同時尚書張時徹所作說林亦與焉, 殆未聞昭明文選不錄何遜之義也.)

33) 조선본 『百家類纂』은 현재 장서각,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국립중앙도서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판본과 유통 상황은 김방울, 앞의 글 참조. 이글에서 검토한 조선본 『百家類纂』은 장서각 소장본이다.

34) 이상의 내용은 「百家類纂凡例總敍」 참조.

35) 김철범, 앞의 글, p.123.

36) 강병수, 앞의 글, p.90.

37) 摠자와 總자가 혼용되고 있지만, 의미상 차이가 없으므로 總으로 통일해도 무방할 것이다.

38) 조선에서 서명에 ‘評’을 붙인 경우는 많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柳夢寅(1559~1623), 『於于杜評』(失傳); 洪萬宗(1643~1725), 『小華詩評』; 金昌協(1651~1708), 『論語評說』4卷(未刊); 正祖(1752~1800), 『全史銓評』; 柳健休(1768~1834), 『東儒四書解集評』 6卷 등.

39) 이 글에서는 『팔가총평(八家總評)』을 서명으로 사용하며, 추후 연구에서도 이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40) 김철범, 앞의 글, pp.122-123; 심경호, 「조선후기 지성사와 제자백가」, p.370.

41) 왕조와 편저자는 『八家總評』에는 없다. 다만 『百家類纂』에서 제공한 정보를 붙여 이해를 돕고자 했다.

42) 「百家類纂凡例總敍」, “其或有原辭, 而考覈欠精, 品隲未當者, 則節取原辭, 而證以衆論.”

43) 「成相」·「賦」·「哀公」·「堯問」을 생략하고, 28편만 수록했다.

44) 유가류 『순자』에 대한 신후담의 평가는 박지현, 「조선시대 순자의 인식과 그 변화」, pp.100-104. 참조.

45) 『百家類纂』 卷17, 道家類, 「陰符經題辭」, “此又有清靜經洞古經犬通經定觀經胎息經心印經等書, 則皆道家修煉之語, 見諸玄宗. 此纖大吒與陰符參同相表裏也.”

46) 『음부경』은 명칭도 다양하며 서로 다른 판본이 존재할 뿐 아니라, 50여 가지 상이한 주석서도 존재한다. 김백희, 「도교 『음부경』의 사상」, 『정신문화연구』 107 (2007) 참조.

47)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陰符經」, p.149, “沈氏取以錄之, 稱其快意者, 余不知其何說也. 爲前後註二篇, 屛諸家說, 獨就本經, 經文依文口解, 頗得其旨, 今附於此. 以俟後之知者.”

48) 『八家總評』의 「음부경」은 분량이 매우 많다. 필자가 아직 「음부경」과 「참동계」의 내용을 『百家類纂』과 대조해서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단지 『八家總評』에 수록된 것이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음부경주해」와 「참동계찬요」가 아닌가 하는 의문만 제기하고, 추후 심화된 연구를 통해서 사실 여부를 확증하고자 한다.

49)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八家總論」, p.368, “古者, 獨有儒道之名於天下, 上焉而堯舜禹湯之所傳者, 是道也, 下焉而孔曾思孟之所述者, 是道也. 記於詩書, 載於易春秋者, 莫非是道也.”

50) 홍석주, 『洪氏讀書錄』 卷3, 子部, 「老家」, “世恒以老氏爲道家, 非也. 道者, 人之所常行, 豈老氏之所宜私哉.”

51)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八家總論」, p.368, “逮至周室之衰, 天下大亂, 人異其論, 士私其學, 始有儒與道法等家之分焉, 而其爲儒家者, 旣不知儒道所包之廣大, 而無以該攝乎七家. 其七家者, 則又各得乎儒道之一端, 不知其源之同出.”

52) 맹자는 양주와 묵적을 견제했으며(『孟子』 「滕文公」 「盡心」), 순자는 它囂·魏牟·陳仲·史鰌,·墨翟·宋銒·愼到·田騈·惠施·鄧析·子思·孟子 등을 비판했다.(『荀子』 「非十二子」) 장자는 墨翟·禽滑釐·宋鈃·尹文·彭蒙·田騈·愼到·關尹·老聃·惠施 등 학설의 장단점을 평가했다.(『莊子』 「天下」)

53) 『中庸章句』 第22章,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54)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道家類總論」, pp.219-220, “天下之道二, 公與私而已矣. 盖人之生於兩間也, 稟陰陽五行之氣而爲其形, 禀陰陽五行之理而爲其性. 性者, 天下共公之道, 而固無物我之間者也, 故旣以盡己, 而必須推之而盡人, 旣以盡人, 而必須推之而盡物, 馴致於贊化育參天地之域, 此其所以爲公也. 徇形者, 滯於彼此之有分也, 故惟知爲我, 而不能推之而及人, 旣不及人, 而無以推之而及物, 終至於外常倫, 專獨己之弊, 此其所以為私也. 是以徇性者, 雖未嘗不愛其形, 而其愛也, 溥施乎萬物, 此則性之正者爲之主, 而私亦爲公也. 徇形者, 雖自謂能治其性, 而其治也, 全利乎一身, 此則形之偏者為之主, 而公亦爲私也. 君子有見於斯二者之分, 則其於天下道術之邪正, 亦可以快析明辯, 而無所惑矣.”

55)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八家總論」, pp.365-366, “世之稱八家者, 大略曰, 游心於經典, 留意於仁義者, 儒家也而其流也. 乖析而離道, 清淨以自守, 虛寂以無爲者, 道家也而其流也. 迤延而迷理, 信賞必罰, 以補禮制者, 法家之所長, 而刻者爲之殘忍而傷恩. 循名責實以正而物者, 名家之所長, 而譥者爲之, 鉤釽以析亂. 墨家之說, 主於貴儉兼愛, 而弊至於蔑禮樂, 而混親疎. 縱橫之說, 主於明辯善辭, 而弊至於上詐諼, 而亂是非. 博記前言, 兼通衆家, 而盪而歸於漫羡之留者, 雜家也. 明於機略, 詳於節制, 而流而入於狙詐之術者, 兵家也.”

56)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八家總論」, p.366, “雖然以余觀之, 則此八家者, 雖其所執之說, 各自爲方者如此, 而深探乎其原, 則道法等七家, 實皆出於儒家, 而儒家之於七家, 初不可以若是其班也. 盖儒之爲道也, 即天理之所自然, 人倫之所當然, 大中至正, 而萬世不易者也. 夫豈一事之所可目, 一名之所可稱, 而止於游心經典, 留意仁義而已哉.”

57) 朝覲과 聘問을 담당하는 직책을 말한다.

58)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八家總論」, pp.366-367, “淸靜虛寂, 雖曰道家之說, 而儒家亦有謂淸心寡慾虛中無我云者, 此非道家之所專也. 信賞必罰, 雖曰法家之說, 而儒家亦有謂賞當其功 罰當其罪云者, 則此非法家之所獨也. 名家雖主於循名責實, 而以禮經辨其名物之說觀之, 則儒家之亦審名實者, 可知矣. 墨家雖主於貴儉兼愛 而以孔聖寧儉汎愛之訓觀之, 則儒家之亦尙儉愛者, 可知矣. 至如縱橫之明辯善辭, 本出於行人專對之職, 雜家之博記兼通, 本出於司史採述之留, 而兵家之機略節制, 亦祖乎司馬之遺法, 則是孰非儒家之所講者乎. 七家之所以實, 皆出於儒家者此也.”

59) 신후담, 『河濱先生全集』 제4책, 『八家總評』 「八家總論」, pp.368-370, “是以其所謂儒者, 則蒙於天理之本, 昧乎人倫之常, 乖離而失其中, 訛析而害其正, 隨時抑揚, 譁世取寵, 此則失其所以爲儒之道, 而流於一偏之過也. 其所謂道者, 則離常絶俗以爲淸, 屏事遠物以爲虛, 怪詭而亂倫, 誕妄而害道, 此則得其淸虛之一端, 而不察其原之過也. 其所謂法者, 則崇約誓以信其令, 果殺戮以嚴其律,假借而任數, 刻核而少恩, 此則得其賞罰之一端, 而不察其原之過也. 其所謂名者, 則始將以稱器正名而其爲說也, 苛察繳繞, 反有以亂其名, 始將以控物責實, 而其爲辭也, 遌滯煩散, 反有以離其實, 此則得其名實之一端, 而不察其原之過也. 其所謂墨者,則全以貴儉爲務, 而其儉之太過, 至於以禮爲煩而欲除之, 以樂爲侈而欲去之, 全以兼愛爲崇, 而其愛之無本, 至於視己之親, 猶隣人之親, 視兄之子, 猶隣人之子, 此則得其儉愛之一端, 而不察其原之過也. 縱橫則飾辭說尙辯給, 未免爲傾危變詐之歸. 雜家則貪聞識務記歷, 終流於紛錯雜亂之習. 兵家則矜攻守之勢, 習分爭之術, 以流毒於天下. 此皆各得乎明辯·博記·機略·節制之一端, 而不察其原之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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