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9세기 동아시아 개신교 선교에서 조상의례(ancestral ritual)는 지속적인 갈등의 핵심이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개종자의 조상의례 참여를 일관되게 금지했으며, 이러한 금지가 선교의 주요 장애임을 인식하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1) 기존 연구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이러한 태도를 주로 신학적 보수성이나 문화적 편견의 산물로2) 또는, 개신교 특유의 반의례적 경향으로 설명해왔다.3) 특히 후자의 경우, 모든 종류의 정형화된 의례에 대한 선교사들의 “뿌리 깊고 본능적인 의심”4)이 중국인들의 조상의례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게 만든 기반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중심의 설명은 왜 선교사들이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임이 아닌 적극적 금지를 요구했는지, 그리고 가톨릭의 ‘전례 논쟁(Rites Controversy)’과 달리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왜 이 문제로 비교적 분열하지 않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에 본 연구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조상의례 논쟁을 기호와 의미에 대한 인식 틀, 즉 기호 이데올로기(semiotic ideology)의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기호 이데올로기란 언어, 행위, 물질과 같은 기호가 그 지시 대상과 맺는 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공유하는 암묵적 전제를 의미한다.5) 개신교 전통에서 이는 ‘진정성’(sincerity)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기독교 인류학자 웹 킨(Webb Keane)에 따르면, 개신교의 진정성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정직함을 넘어 내면의 신념과 외부의 표현이 투명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범을 의미한다.6) 이 관점에서 언어 및 행위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단지 행위자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여겨진다. 킨은 종교 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 전통이 이러한 진정성 이데올로기를 보편화시킨 주요 요인이며, 특히 개신교 선교 활동이 비서구 사회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7) 결과적으로 진정성 이데올로기는 근대적 주체를 규정하는 핵심 원리로 작동하며, 이를 통해 개인은 스스로를 전통이나 사회적 관계에 얽매인 존재가 아닌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정성 이데올로기는 구조적 역설을 내포한다. 개신교는 외적 형식을 불신하고 내적 신앙의 우선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 ‘보이지 않는 진정성’을 공동체 내에서 증명하고 확인해야 하는 필요에 직면한다.8) 결국 외적 표현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형식이 내면을 투면하게 반영하는지를 판별하는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 선교 맥락에서 이 딜레마는 더욱 첨예해진다. 익숙한 사회적 신호가 부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개종자의 내적 신앙을 가시화할 외적 증거를 필요로 했고, 이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형식에 대한 요구로 귀결될 수 있다. 예컨대 킨이 분석한 인도네시아 숨바(Sumba) 사례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진정성 이데올로기가 토착 신자들의 의례 체계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여준다.9) 숨바 사회에서 물질적 교환과 의례는 친족 관계와 분리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였으나, 개신교 개종 이후 그 의미는 수행자의 신념을 얼만큼 투명하게 드러내는지에 따라 재평가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논의를 중국 개신교 선교의 맥락으로 확장한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의례는 보편적인 관습이었으나, 그 의미는 단일하지 않았다.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조상의례는 복의 원천이자 윤리적 의무였으며, 때로는 구제의 수단으로 다양하게 이해되었다.10)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러한 의례적 표상을 마주했을 때, 그 의미는 선교사들이 지닌 기호 이데올로기의 렌즈를 통해 재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는 개신교 선교 과정에서 조상의 신주, 제물, 절 등과 같은 물질적·행위적 요소들이 진정성 이데올로기 내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새로운 의례적 질서가 창출되었는지 추적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세 차례의 중국 개신교 선교대회(1877, 1890, 1907)에서 진행된 조상숭배 논쟁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이 대회들은 중국 개신교 선교 과정에서 주요 교파 간 합의를 도출하는 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의 결정은 한국 개신교 선교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1) 이 자료들은 진정성 이데올로기가 선교사 내부 담론을 통해 어떻게 구체적인 규범으로 구조화되고 합의에 이르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본 연구는 선교사들이 직면한 핵심 문제, 즉 ‘개종자의 내적 신앙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조상의례 금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단순한 신학적 보수주의가 아닌, 진정성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새로운 의례적 질서를 구성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1877년 대회를 통해 선교사들이 조상의례의 물질적·행위적 요소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했는지 살핀다. 3장에서는 1890년 대회에서는 중국 조상의례의 형식의 의미를 둘러싸고 선교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분석하며, 논쟁에도 불구하고 진정성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저변에 반영되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4장에서는 1907년 대회의 합의에 주목하여, 진정성 이데올로기가 공식적으로 규범화되고 새로운 형식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양상을 분석할 것이다.
Ⅱ. 1877년 대회 : 동기의 발견과 형식의 통제
19세기 후반, 톈진 조약(1858)과 베이징 협약(1860)을 통해 내륙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중국 내 개신교 선교는 급격한 양적 팽창을 경험하게 된다.12) 수십 개의 다양한 교파 소속 선교사들이 중국 전역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교파 간 갈등 요소를 관리하고 통일된 선교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선교 대회가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조상의례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처음 등장했다. 1877년 이전까지 개신교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조상숭배에 대한 합의된 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선교회에서 중앙 권위가 부재했기 때문도 있지만, 초기 수십 년간은 개종자가 소수여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 126명의 선교사가 모인 첫 번째 선교사 대회에서, 조상의례 문제는 열째 날에 진행되었다.
1877년 대회의 발표와 토론은 중국인들의 조상숭배가 효나 애정과 같은 윤리적 가치보다는, 두려움이나 사자숭배와 같은 종교적·미신적 동기에 기반한 것임을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의는 회의 주최자 중 한 명이자 상하이에서 약 30여 년 활동하던 남침례교 선교사 매튜 T. 예이츠(Matthew T. Yates)의 발표로 시작되었다. 그의 발표는 중국인들의 조상숭배를 유교의 효와는 구분되는, 당대에 살아있는 하나의 종교 체계로 설명하려는 목적이 강한 글이었다. 서두에서부터 예이츠는 중국인들의 조상숭배가 유교 경전에 나타난 고대의 ‘효(filial piety)’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선언하며, 지금까지는 조상숭배가 중국의 종교 시스템의 일부로 분류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13)
예이츠는 조상숭배를 조상의 안락을 위해, 또는 조상으로부터 비롯된 재앙을 막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으로 정의한 뒤, 그 핵심 동기를 존경이 아닌 ‘두려움’으로 규정한다.14) 즉 중국인들이 조상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거나,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의 핵심 동기는 죽은 자들의 분노를 피하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화나 수정의 대상이 아닌, 근절해야 할 명백한 ‘우상숭배’가 된다. 이 과정에서 개별적인 여러 의례적, 물질적 요소들은 ‘두려움’과 같은 미신적이고 부도덕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장례식에서 지전(紙錢, Joss paper)을 태우는 행위는 내세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조상에게 평안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에서 동원된다고 설명한다.15) 중국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조상의 평안을 기원하지 않으면 조상이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을 가져다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두려움에 기반해서, 중국인들은 조상의 무덤, 신주(神主, Ancestral tablet), 그리고 지역 성황 앞에서 주기적으로 제사를 드린다.16)
조상의례에서 절하는 행위는 선교사들이 자주 언급하는 숭배의 증거였다.17) 예이츠에 이어 토착 기독교인들의 혼례 및 장례 관습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의심스러운’ 관습들에 대해 발표한 셰필드(D. Z. Sheffield)는 살아 있는 친족에게 행하는 절의 형식과 죽은 자의 신주에 대한 절의 형식이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록 절하는 대상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절하는 행동 자체는 명백히 우상숭배로부터 온 것이며 따라서 제거되어야 할 관습이었다.18) 나아가 본질적으로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은 그들을 공경하기보다는 죽은 조상을 두려워하여 달래거나 복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19)
장례에서 곡하는 절차에 대해서도 선교사들은 애도나 공경보다는 고인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말한다. 예이츠는 개인이 죽은 후 7일마다 가족의 여성 구성원들이 큰 소리로 애곡하며 고인의 이름과 미덕을 나열하는 관습이 있음을 언급하며, 이는 망자가 받게 되는 처벌을 완화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20) 그렇기 때문에 이 행동은 진정한 애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울음을 통해 사후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으로 간주된다. 부유한 집안에서 곡하는 사람을 따로 고용하는 관습은 이러한 해석을 더욱 강화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일관되게 조상의례의 핵심 동기가 공경이나 추모가 아닌,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로부터 복을 얻으려는 이기심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예이츠의 언급은 당대 개신교 선교사들의 인식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유교 철학에 의해 주입된 효는 부모와 나이와 지위가 높은 윗사람에 대한 공경과 헌신으로 구성되었지만, 우리 시대에 실천되는 효는 주로 죽은 자에 대한 헌신으로 구성되며, 조상의 위패, 무덤, 그리고 감금된 죽은 자의 영혼을 담당한다고 여겨지는 성황 앞에 제물을 바치고 엎드리는 식으로 표현된다.21)
예이츠의 입장이 당대 개신교 선교사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발표 이후 진행된 토론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예이츠의 입장에 동조하며, 개종자들이 조상숭배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를 표했다. 다만 몇몇 선교사들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언급했다. 선교사들은 효가 중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미덕이며, 자칫 이러한 논의가 기독교인이 효를 무시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22) 따라서 이러한 가치들은 인정하되, 올바른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선교사들의 논의는 잘못된 형식으로는 내면의 참된 믿음을 드러낼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예컨대, 셰필드와 함께 토착 신자들의 관습에 대해 발표한 하트웰은 일부 토착 신자들이 개신교식 혼례를 마친 후, 향을 피우지 않은 상을 차리고 하늘을 향해 절한 사례를 언급한다.23) 이들의 동기가 “열린 하늘을 향해 여호와께 절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트웰은 이 절차를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가 흥미로운데, 그 형식이 이교도의 천지 숭배와 너무 유사하여 이교도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24)
토론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조상의례 문제를 신자의 양심에 맡길 수 없다고 단언한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일부는 토착 신자들 스스로의 내적인 확신과 양심 형성을 강조했지만25), 대다수는 레클러(R. Lechler) 선교사의 우려에 동조했다. 레클러는 이 문제를 신자 개인의 판단에만 맡길 경우, “오래된 누룩”이 교회 안에 남아있을 실질적인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선교사의 단호한 개입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26)
결국 다수의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자의 보이지 않는 동기만큼이나 그 동기를 담아내는 형식이었다. 메이터(C. W. Mateer) 선교사가 “이교와 최소한의 타협이나 혼합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고, 존(G. John) 선교사가 기준을 높게 세우지 않으면 “세례받은 이교도들의 공동체를 모으는 데 그칠 것”27)이라고 경고했듯이, 그들은 형식의 순수성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의 경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따라서 설령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외부로 드러나는 형식이 이교적인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면 그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다. 조상의례는 내면의 동기 문제인 동시에 그 동기를 담아내는 형식 자체에 대한 통제의 문제였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아니지만, 몇몇 선교사들은 토론에서 개신교적인 대체 관습을 의논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크로퍼드(T. P. Crawford)와 구드리치(C. Goodrich)는 조상 신주를 대체할 수단으로 가족 성경(Family Bible)의 도입을 제안했다. 가족 성경은 앞부분이나 뒷부분에 별도의 지면을 두어 가족 구성원의 출생, 결혼, 사망 날짜 등 계보를 기록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것이 신주가 수행하던 기억과 기록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28) 이러한 제안들이 1877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합의되진 않았지만, 이러한 제안들의 기저에는 내면의 양심을 넘어 올바른 형식을 적극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다고 볼 수 있다.
Ⅲ. 1890년 대회 : 형식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1890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2차 선교사 대회29)는, 진정성 이데올로기가 선교 담론에서 부딪히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 회의에서도 조상의례 문제는 가장 뜨거운 주제였으며, 아마 그 이유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거의 마지막 순서로 배치된 듯하다. 실제로 이 날 토론은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이로 인해 회의는 그 다음 날까지 진행되었다. 이 논쟁의 표면적 구도는 관용을 주장한 마틴(W. A. P. Martin)과 비타협을 고수한 블로젯(H. Blodget)의 대립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조상의례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쟁점으로 깔려있었다.
이 날 회의는 당시 선교사 사회의 일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두 편의 글로 시작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올링거(F. Ohlinger)30)와 광둥(廣東)에서 활동하던 노이에스(H. V. Noyes)의 글은 그 접근 방식에서는 미묘한 온도 차이를 보였지만, 두 사람 다 조상의례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31) 현지 관습에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올링거는 중국인들이 조상의례를 행하는 이유가 효심이 아니라 죽은 자의 노여움을 사서 재앙을 입을까 두려워하는 “노예적인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했다.32) 더욱 엄격한 입장을 고수한 노이에스는 미국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행위를 예로 들며 이 차이를 설명했다. 그는 이 순수한 추모 행위에 죽은 영혼이 산 자에게 복이나 화를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더해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중국적인 조상숭배가 된다고 보았다.33)
이러한 다수 의견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은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장로교 선교사 마틴(W. A. P. Martin)34)이었다. 그는 「조상숭배 : 관용을 위한 변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상의례의 핵심 요소인 절(拜, posture), 기도(敬, invocation), 제사(祭, offerings)은 서구의 ‘숭배’(worship)와는 다른 맥락을 가지며, 문제는 “그 본질이 아닌 과도함”에 있다고 주장했다.35) 마틴이 제시한 논증의 핵심은 조상의례의 진정한 동기를 의례적 형식과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신자의 마음 속 효라는 동기는 인정하고, 문제가 되는 ‘잉여물’만 제거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조상의례의 본질과 후대에 덧붙여진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 요소를 구분한다. 그는 중국인들의 절하는 자세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행하는 존경의 표시이며, 기도 또한 우상숭배적인 호칭만 제거한다면 자연스러운 애정의 표현이 될 수 있고, 제물 역시 그 자체보다는 숭배의 대상이 문제라고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는 본질적으로 숭배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표현의 수정을 통해서 충분히 용납 가능하다는 것이다.
길버트 리드(Gilbert Reid), 티모시 리차드(Timothy Richard), 존 로스(John Ross) 등 소수의 선교사들이 토론에서 마틴의 견해에 힘을 보탰다. 리드는 마틴이 옹호한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는 체계 그 자체라고 변호하며, 중국인 스스로 관습을 수정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6) 리차드는 절하는 행위 자체는 성경에서도 발견되는 문화적 관습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의 핵심이 “우상숭배적이지 않은 조상의례의 용인”37)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특히 로스는 자신이 만난 한 중국인 관료의 사례를 들며, “현대의 우상숭배적 관행을 제거한다면”38) 양심적으로 조상의례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문인 계층의 현실적인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회의의 다수는 내적인 동기가 형식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마틴 다음으로 발표한 선교사 헨리 블로젯 (Henry Blodget)은 「조상숭배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라는 글을 통해 마틴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39) 블로젯은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등 방대한 중국 고대 경전을 인용하며, 조상숭배가 중국 역사 초기부터 단순한 사회 관습이 아닌, 국가가 공인하고 황제가 주관한 종교 체계였음을 논증했다.
마틴이 절하는 행위의 의미를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비교하며 해석의 유연성을 주장했다면, 블로젯은 그 행위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재해석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황제들이 최고신인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낼 때 자신의 조상을 그와 동등한 지위에 놓고 함께 숭배했던 배위(配位)의 사례를 들어, 조상숭배의 형식이 처음부터 신격화된 존재를 향한 명백한 ‘종교적 숭배(religious cult)’였음을 강조했다.40)
따라서 블로젯에게 조상 신주는 단순한 기념패가 아니며, 고인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신자의 개인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죄악이 된다. 그는 100년 넘게 이어진 천주교의 의례 논쟁이 결국 교황의 전면 금지로 끝났던 역사를 상기시키며, “앞 수레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뒷 수레는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강조했다.41) 즉 블로젯에게 조상의례의 형식들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너무나 명백하게 오염되어 있었기에, 개인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타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토론에서도 다양한 논거를 통해 뒷받침되었다. 가장 먼저 파베르(E. Faber)는 조상의례가 단순히 공경이 아닌 우상숭배인 이유를 13가지로 들면서, 이러한 행위는 “어둠의 권능과 영적 세계와의 교류를 가장하는 행위”42)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라이온(D. N. Lyon) 선교사도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중국인의 효도를 지나치게 찬양해왔다고 말하며, 조상숭배 체계 전체의 핵심은 “귀신들에 대한 노예 같은 두려움”43)에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창립자이자 존경받는 원로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는 한발 더 나아가 조상의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우상숭배”44)라고 단언하며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토론은 마틴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강한 항의에 부딪혀 중단되기도 했다.45)
특히 회의의 유일한 중국인 목사였던 옌용징(Y. K. Yen)의 발언은 인상적이다. 그는 내부자의 관점에서, 중국인들에게 조상의례의 형식(절, 제물)과 의미(조상 영혼에 대한 숭배)는 분리할 수 없는 요소라고 주장했다.46) 그는 마틴처럼 둘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형태의 기념비나 사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을 통해 조상을 공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1890년 대회의 관용파와 반대파는 표면적으로는 양립 불가능한 대립각을 세운 것처럼 보였지만, 공통적으로 진정성이라는 동일한 인식 틀을 공유하고 있었다. 양측 모두 종교적 숭배의 본질은 내면의 의도, 동기, 신앙에 있으며, 외부의 형식은 이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도구여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마틴은 우상숭배적 요소라는 ‘잉여’를 제거함으로써 형식이 내면의 진정성과 다시 일치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블로젯과 테일러는 중국의 전통적 형식이 이미 숭배라는 동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결코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논쟁에 깔린 진정성 이데올로기는 17세기 전례 논쟁에서 가톨릭 선교사들의 태도와 비교해볼 수 있다. 당시 관용파였던 예수회와 강경파였던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 등이 공유하던 공통의 인식 틀이 존재했다. 이는 특정 의례가 사회적 규범인 예절(civilis)47) 또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politicus) 의례로 간주된다면 이를 미신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48) 이에 따라 가톨릭의 전례 논쟁은 중국의 장례 및 조상의례가 예절 또는 정치적인 의례로 용납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49) 가톨릭 전례 논쟁이 사회적 영역의 분리를 통해 미신 여부를 판별하려 했다면, 19세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행위자의 내적 진정성과 이를 표현하는 형식의 투명성을 중심으로 논쟁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50)
Ⅳ. 1907년 대회 : 조상의례의 개신교적 재구성
1890년 대회가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종료되면서, 1907년 선교 100주년 기념 대회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한 합의안 도출을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13인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대회에 앞서 수년간 체계적으로 자료를 준비했으며, 위원장 제임스 잭슨(James Jackson)은 이에 기반해 조상숭배의 의미와 본질, 그리고 구체적 대처 방안을 담은 상세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잭슨은 보고서 서두에서 이 문제가 1877년과 1890년 두 차례 대회에서 이미 격렬하게 논의되었으며, 특히 1890년 대회에서는 “가장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대회가 평정심을 잃을 뻔”했던 주제였음을 상기시켰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다시 다루는 이유는, 조상의례가 여전히 개신교 선교의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공통의 인식 때문이었다.
잭슨의 논의는 조상숭배의 본질을 재평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특히 그는 “원초적(primitive) 조상숭배”와 “대중적(popular) 관습”을 구분하며, 전자는 조상의 신격화를 함축하지 않았으나 후자는 신앙이 타락하고 관습이 오염된 형태라고 진단했다.52) 그는 『예기(禮記)』 등과 같은 중국 고전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이러한 관습의 기원이 사랑하는 망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정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53) 그러나 잭슨은 이러한 참된 동기가 현재에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사람들이 조상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는 이기적 동기를 충족하기 위해 조상의례의 외적 형식(outward form)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54)
잭슨의 진단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참된 정신과 외적 형식의 불일치였으므로, 해결책은 참된 정신을 드러내도록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형식의 완전한 제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잭슨의 보고서에서 가장 구체적인 제안은 추모예배(memorial service)의 제도화였다. 그는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고인에 대한 추모일(memorial days)을 지키고, 이 날에는 교회나 무덤에서 성찬식 또는 다른 적절한 예배를 드릴 것을 권고했다.55) 나아가 그는 추모예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찬송, 성경 구절, 기도문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기념과 추모라는 목적에 맞춰 선정되었다.56) 그는 이러한 규정들이 선교사들이 죽은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중국인들의 잘못된 관념”57)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기도문의 수사적 구조는 자세히 들여다볼 만하다. 첫째, 추모예배를 위해 제안된 기도문들은 의례적 상호작용의 대상을 조상이 아닌 ‘하나님’으로 고정한다. 예를 들면 “믿음 안에서 삶을 마치고 쉬고 있는 주님의 모든 종들의 선한 본보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는 표현이나, “선조들의 마음에 많은 거룩한 소망을 심어주시고 … 삶 속에 많은 선한 행실을 나타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와 같은 표현에서 조상은 의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58) 오히려 여기서 조상은 감사를 위한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둘째, 이러한 기도들은 형식적으로는 정형화된 텍스트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발화자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부모를 위한 기도는 “우리가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거짓 없는 마음의 애정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존경”59)하기를 기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찬가지로 조상의례의 물질적 요소인 지전과 제물은 자선 행동으로 대체하도록 제안했다. 그는 부유한 가정이 장례식에 막대한 돈을 쓰는 관습을 비판하며, 그 비용을 학교나 병원, 자선단체를 설립하는 데 사용하도록 장려했다.60) 이는 죽은 조상에게 바치던 물질을 살아있는 공동체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추모의 의미를 기독교적 가치로 재구성하려는 의도였다. 조상의 신주 또한 기념의 의미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대체된다. 그는 신주에 대한 무조건적 파괴를 요구하는 대신 미신적 요소를 제거한 ‘순수한 추모패’(purely memorial tablets) 를 만들어 교회에 걸어두자고 제안하기도 했다.61)
최종적으로 이 회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해 5가지 안건을 제시했다. 토론과 투표를 거쳐 합의된 안건들은 그중 4가지 안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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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숭배는 기독교 신앙의 깨달음과 영적인 개념과 양립할 수 없으므로, 기독교 교회 내에서 하나의 관습으로 용인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이 관습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장려해야 하며, 중국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효(filial piety)를 매우 중시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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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효의 최고 수준의 발전과 표현을 위한 완전한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을 인식하며, 본 회의는 효에 대한 실제적인 의무를 설교, 교육 및 종교 의식에서 더욱 강조할 것을 권고한다. 이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교회가 효를 가장 높은 기독교적 의무 중 하나로 간주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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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중국의 조상 숭배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섬세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점을 인식하며, 우리는 기독교 교회 구성원들의 양심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그러한 문제들은 구성원들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와 깨달음을 통해 교회가 올바른 행동 방침으로 인도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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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회의는 중국 형제들이 기독교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묘를 아름답게 가꾸고, 부모와 조상들을 위한 유용한 기념물(교회, 학교, 병원, 보육원 등 자선 시설 건축 또는 기부)을 세움으로써 고인에 대한 애정 어린 추억을 권장할 것을 권고한다. 이를 통해 고인에 대한 기념이 후대를 돕는 수단이 되게 할 것이다. [진한 표시는 인용자 강조]62)
흥미로운 지점은 본회의에서 부결된 원래의 네 번째 결의안이다. 원래 이 안건은 중국 정부에게 “공자나 황제의 위패에 경의를 표하는 행위를 종교적 숭배(religious worship)가 아닌 단순한 국가 의례(State ceremony)로 규정해 줄 것”을 청원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기독교인의 양심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없다”는 의견과 함께 다수의 선교사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는 진정성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핵심적인 기제를 보여준다. 선교사들의 관점에서 의례의 의미는 국가나 외부 권위가 부여하는 의미(‘이것은 시민 의례다’라는 규정)가 아니라, 행위자의 내면과 그 행위가 가진 본질적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국가가 그것을 ‘시민 의례’라고 부른다고 해도, 신자의 양심이 그것을 우상숭배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우상숭배인 것이다.
채택된 결의안들 역시 진정성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보여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결의안은 조상의례의 기존 형식을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배격하면서도, 그 내용인 ‘효(孝)’를 기독교적 가치로 전유한다.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조상숭배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효의 감정은 존중하되, 그 표현 방식이 참된 동기를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하며, 기독교적 형식만이 그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63) 이러한 논리에서 형식의 순수성 또한 강조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 귀주(貴州)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클라크(Samuel R. Clarke)는 “이교도와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그들은 행위만 보고 의미는 이해하지 못한다”64)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 번째 결의안은 조상숭배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을 교회의 법규가 아닌 신자 개인의 양심에 맡긴다는 점을 명시한다. 선교사들은 외적 강제가 아닌, 지속적인 양심의 교육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판단하기를 기대했다. 이 구조 속에서 ‘양심의 자유’는 외적 통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신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검열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증명해야 하는 더 무거운 내적 의무로 전환된다. 신자는 조상의례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이 ‘순수함’을 입증해야 했고, 선교사들은 그러한 자기 검열의 과정을 참된 개종의 증거로 간주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결의안은 추모의 동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 가치를 실용적 또는 경제적인 것으로 제한한다. 추모의 진정성은 소모적이고 형식적인 제사 대신, 학교나 병원 건립과 같은 생산적인 행위로 입증해야 한다. 선교사들이 토론 과정에서 기념물이라는 단어 앞에 “유용한”(useful)이라는 문구를 집어넣기로 합의한 것은 이러한 선교사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Ⅴ. 결론
본 연구는 1877년부터 1907년까지 선교대회 기록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의례에 대해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과 그 기저의 논리를 분석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조상의례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해는 ‘철저한 규탄’에서 ‘건설적 수용’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외적 형식이 내적 신념을 투명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깔려있었다. 1877년의 논의는 형식의 의미를 고정하려는 시도였다면, 1890년의 격렬한 논쟁은 바로 그 형식의 해석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최종적으로 1907년의 합의는 진정성 이데올로기를 제도적 규범으로 안착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기호 질서의 재편은 초기 중국 개신교 공동체가 주변 환경과 관계맺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들은 개신교가 부모나 조상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다는 현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효라는 문화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진정성 이데올로기는 개종자들에게 우상숭배를 피하는 소극적 태도를 넘어, 자신의 내적 신념을 증명해야 하는 적극적인 수행의 의무를 부과했다. 이는 조상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던 중국의 전통적 사회 구조로부터 개종자들을 이탈시키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했다.
새롭게 구축된 기호 질서는 개종자들의 실천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진정성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개신교인은 괸습적이고 형식적인 물질(돈, 음식, 위패 등)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러한 물질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인간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믿는 것은 자율성을 훼손하는 물신숭배(fetishism)가 된다. 이러한 요구는 선교 현장에서 적극적인 우상파괴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처럼 진정성 이데올로기는 모든 종류의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매개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개인, 내적 신념을 투명하게 표현하는 진실한 주체라는 근대적 주체성의 형성을 추동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진정성 이데올로기라는 인식 틀이 어떻게 의례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기호 질서를 구성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를 단순한 혼합이나 토착화의 과정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진정성의 원리가 어떻게 토착 기호 질서를 거부하고 이를 재구성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례 형식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졌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비록 1907년의 합의는 구체적 의례 규정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토착 개신교 공동체가 어떠한 규범에 기초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분석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한 해석적 도구를 제공한다.
다만 본 연구는 선교대회 기록과 같은 선교사 측 자료에 의존했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이 자료들은 선교사들이 지녔던 인식과 그 기저의 논리를 드러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토착 신자들이 이러한 요구를 어떻게 수용하고 저항했는지, 혹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는지에 대한 다층적 이해를 제공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토착 신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그들의 능동적 행위성을 조명하는 것은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는다.







